MN 43. 교리 문답의 큰(긴) 경(mahāvedallasuttaṃ)
*여기서 교리문답'으로 옮긴 단어는 vedalla(웨달라)이다. 이 웨달라는 구분교(九分敎) 즉 아홉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스승의 교법[navangasatthu-sasana)으로 불리는 경, 응송, 상세한 설명, 게송, 감흥어, 여시어, 본생담, 미증유법, 교리문답의 아홉 가지 가운데서 맨 마지막에 나타나는 것이다.(이 구분교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뱀의 비유 경(MN22)의 주해를 참조할 것)
44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마하꼿티까 존자는 해거름에 홀로 머묾에서 일어나 사리뿟따 존자에게 다가갔다. 가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함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신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서 마하꼿티까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하꼿타따(까) 존자(ayasma Mahakotthita, Mahakotthiko)는 앙굿따라 니까야 제1권 '하나의 모음(A1:3-10)에서 무애해(patisambhida)를 얻은 비구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언급되고 있는 분이다. 그는 사왓티의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세가지 베다에 통달했다고 하며 세존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여 곧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AA.i.286)
"도반이여, '지혜롭지 못한 자,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도반이여,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불립니까?"
"'꿰뚫어 알지 못한다(철저히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라고 해서, 도반이여,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불립니다. 무엇을 꿰뚫어 알지 못합니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알지 못합니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 꿰뚫어 알지 못한다.'라고 해서, 도반이여, 지혜롭지 못한 자라고 불립니다."
*꿰뚫어 알지 못하기 때문에(nappajanati) '지혜(통찰지)가 없는 자(duppanna)'라고 한다. 이 법은 모든 곳에 적용된다.
'이것은 괴로움이다(idam dukkham).'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것은 괴로움이고, 이만큼이 괴로움이고, 이 이상은 아니다.'라고 괴로움의 진리(dukkha-sacca)를 역활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yathava-sarasa-lakkhanato)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ayam dukkha-samudayo).'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곳에서 괴로움이 일어난다.'라고 현재의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갈애가 일어남의 진리라고 그 역활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ayam dukkha-nirodho).'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괴로움과 이 괴로움의 일어남은 이곳에 이르러 소멸한다. 그러므로 이 둘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열반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그 역활과 특징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ayam dukkha-nirodho-gamini patipada).'라고 꿰뚫어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도닦음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한다.'라고 도의 진리(magga-sacca)를 역활과 특징에 따라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는 것이다.(MA.ii.337)
"'고맙습니다, 도반이여.'라고 마하꼿티까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설명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도반이여, '지혜로운 자, 지혜로운 자'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지혜로운 자라고 불립니까?"
"도반 꼿티따여,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라고 해서, 도반이여, 지혜로운 자라고 불립니다. 무엇을 철저히 압니까?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꿰뚫어 압니다.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고 해서, 도반이여, 지혜로운 자라고 불립니다."
"도반이여, ‘의식(識),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도반이여, 어떻게 의식이라고 불립니까?"
"도반이여,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라고 하여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압니까? '즐거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로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고도 분별해서 압니다. 도반이여, '분볋래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라고 하여, 도반이여, 의식이라고 불립니다.”
"도반이여, 혜(慧)와 의식(識)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연결된 것입니까 아니면 분리된 것입니까? 이 법들을 잘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이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혜와 의식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연결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법들을 잘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공언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도반이여, 꿰뚫어 안 것을 분별해 알고, 분별해 안 것을 꿰뚫어 압니다. 그래서 이 법들은 연결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법들을 잘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무엇을 질문하는가? 성자(ariya-puggala)는 의식을 통해서 형성된 것들을 명상한 뒤에 지혜를 가진 자가 되는데 바로 그런 의식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다. 즉 성자가 도달하게 되는 위빳사나의 의식과 닦음이라는 본업을 행하는 마음에 대해서 물은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사리뿟따 장로는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 꿰뚫어 안다."(MN10)는 등의 방법으로 전승되어 오는 느낌을 통해서 정신의 명상주제를 들고 있다. 이것은 본서 제1권 「마음챙김의 확립 경」(MN10)에서 설한대로 알아야 한다."(MA.ii.339)
의식 혹은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주석서의 설명에서 보듯이 여기서 질문한 의식은 아무 대상이나 아는 그러한 일반적인 의식이 아니라 수행을 할 때 생겨나는 의식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마음챙김의 확립 경」(MN10)에서 마음챙김의 대상으로 정리된 몸.느낌.마음.법의 네 가지 가운데서 특별히 '느낌'을 알아차리는 그런 의식을 가지고 대답을 하는 것이다.
*"'결합되어 있는(samsattha)'이란 것은 함께 일어남(ekuppada) 등의 특징에 의해 결속되어 있다는 뜻에서 결합되어 있는지 혹은 분리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서 마하꼿티따 장로가 도의 지혜(magga-panna)와 위빳사나의 의식(vipassana-vinnana)인 이 두 가지의 세간적인 법과 출세간적인 법을 혼합하여 경지를 각각 나누어 교리를 알지 못하는 듯이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다. 도의 지혜가 도의 의식과 함께 결합되어 있는지, 또 위빳사나의 지혜가 위빳사나의 의식과 함께 결합되어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도 그 뜻을 설명하면서 이 법들은 결합되어 있다는 등으로 대답을 하셨다. '분리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na vinibbhujitva vinibbhujitva nanakaranam pannapetum)'는 것은 이 법들은 세간적인 도의 순간이건 출세간적인 도의 순간이건 함께 일어난다. 그러므로 따로 따로 분리해서 대상으로서나 토대로서나 일어남으로서나 소멸함으로서나 그들의 다른 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법들에는 차이점이 있다. 세간적인 법에 관한 한, 마음(citta)이 지도자(jetthaka)이고 선행하지만(pubbangama) 출세간적인 법에 관한 한 지혜가 지도자이고 선행한다. 정등각께서도 세간적인 법에 대해 질문하실 때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어떤 지혜를 얻었는가? 첫 번째 도의 지혜인가?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도의 지혜인가?'라고 질문하지 않으신다.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감각접촉, 어떤 느낌, 어떤 인식,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라고도 묻지 않으신다.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라고 오직 마음을 가지고 질문하신다. 유익함과 해로움을 드러내실 때에도 '마음이 모든 법을 선행하고, 맨 먼저이다.'라고 하셨고, '어떤 것이 유익한 법들인가? 욕계의 유익한 마음이 일어날 때에'라고 이렇게 마음을 가지고 드러내신다. 그러나 출세간적인 법에 대해 질문하실 때에는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감각접촉, 어떤 느낌, 어떤 인식,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라고 묻지 않으시고, '비구들이여, 그대는 어떤 지혜를 얻었는가? 첫 번째 도의 지혜인가? 혹은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도의 지혜인가?'라고 이와 같이 지혜를 가지고 질문하신다."(MA.ii.339-340)
"도반이여, 혜와 의식이라고 하는 연결된(결합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닌 이 법들에게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혜와 의식이라고 하는 연결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닌 이 법들 가운데 혜는 닦아야 하는 것이고, 의식은 철저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것들의 차이점입니다."
450. "도반이여, '느낌(감수작용. 受), 느낌'이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도반이여, 느낌이라고 불립니까?"
"'경험한다(느낀다), 경험한다.'라고 해서, 도반이여, 느낌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을 경험합니까? '즐거움도 경험하고, 괴로움도 경험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도 경험합니다. '경험한다, 경험한다.'라고 해서,도반이여, 느낌(수.受)이라고 불립니다."
*"'즐거움이라고도 느낀다(sukhampi vedeti)'는 것은 즐거운 대상(sukha arammana)이라고 느낀다, 체험한다(anubhavati)는 말이다. 나머지 두 가지 경우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
상윳따 니까야 제3권 마할리 경(S22.60)의 가르침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대상을 가지고 즐거움, 괴로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음으로 설하셨다. 나아가서 이전의 즐거운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즐거운 느낌이 느끼고, 이전의 괴로운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괴로운 느낌이 느끼고, 이전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대상으로 그 다음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느낀다고 이렇게 그 뜻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오로지 느낌이 느끼지(vedanayeva hi vedeti) 다른 어떤 것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하신 것이다.(MA.ii.342)
"도반이여, '인식(지각작용. 想), 인식'이라고 불립니다. 어떤 점에서 인식이라고 불립니까?"
"도반이여, '인식한다(안다), 인식한다.'해서 인식이라고 해서, 도반이여, 인식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을 인식합니까(압니까)? '푸른색이라고도 인식하고, 노란색이라고도 인식하고, 붉은 색이라고도 인식하고, 흰색이라고도 인식합니다. 도반이여, '인식한다.'라고 해서, 도반이여, 인식이라고 불립니다."
"도반이여, 느낌과 인식과 의식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연결된 것입니까, 아니면 분리된 것입니까? 이 법들을 잘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합니까?"
"도반이여, 느낌과 인식과 의식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연결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법들을 잘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도반이여, 경험한 것을 인식하고, 인식하여 안 것을 분별해 압니다. 그래서 이 법들은 연결된 것이고,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 법들을 구별하고 구별하여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느낌이 어떤 대상을 느끼면 인식도 바로 그 대상을 인식한다는 말이고, 인식이 어떤 대상을 인식하면 의식도 바로 그 대상을 분별하여 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인식하다(sanjanati)'와 분별해서 알다(vijanati)'와 '꿰뚫어 알다(pajanati)'의 이 세 단어는 차이점이 없다. '안다'는 것에는 다름이 없고, 아는 형태가 다르다.
'인식(sanna)'은 '푸르다, 노랗다'라고 단지 대상을 인식하는 정도이며,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을 통찰(pativedha)하지는 못한다. 의식은 '푸르다, 노랗다'라고 대상을 알뿐만 아니라 특징을 통찰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도의 현전(magga-patubhava)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혜는 이미 설한대로 대상도 알고 특징을 통찰할 뿐만 아니라 노력하여 도의 현전에도 이르게 한다.
예룰 들면 어느 천진한 어린아이와 시골 농부와 금속 세공인 세 사람이 금속 세공인의 모루 위에 놓인 동전 더미를 보았다 하자. 천진한 어린아이는 동전이 아름답고 장식이 되어 있으며 길고 네모지고 둥글다는 정도로만 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용품이나 향락을 얻으려고 이것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사실은 모른다. 시골 농부는 이것이 아름답고 장직이 되어 있다는 것 등도 알고, 사람들이 일용품과 향락을 얻으려고 이것을 보배처럼 여긴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이것은 '진짜이고, 이것은 가짜며, 이것은 반쯤 섞인 혼합물이다.'라고 이들의 차이점은 알지 못한다. 금속 세공인은 이 모든 것을 다 안다. 그는 동전을 보기만 해도 알며 부딪히는 소리를 듣거나 냄새를 맡거나 혀를 대 보거나 손으로 무게를 어림잡아보아도 안다. 그는 이것이 어느 특정한 마을이나 성읍이나 도시나 산이나 강가에서 만들어졌는지도 알고, 어느 장인에 의해서 만들어 졌는지도 안다. 이와 같이 인식은 천진한 어린아이가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나타난 양상을 푸르다 등의 정도로만 알기 때문이다. 의식은 시골 농부가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양상을 푸르다 등으로도 알고 나아가 무상.고.무아라는 특징을 통찰함에 이르기 때문이다. 지혜는 금속 세공인이 동전을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대상의 양상을 푸르다 등으로 알뿐만 아니라 그것의 특징을 통찰함에 이르고 여기서 더 나아가 도의 현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MA.ii.343-344)
451. "참으로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음의 의식(意識)으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도반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난 청정한 마음의 의식으로 '무한한 허공'이라는 공무변처를 알 수 있고, '무한한 의식'이라는 식무변처를 알 수 있고, '아무것도 없다.'라는 무소유처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청정한 마음의 의식(parisuddha mano-vinnana)'란 눈.귀.코.혀.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서 벗어나 마음의 문에서 진행되는 오염원이 없는 마음의 의식, 즉 색계 제4선의 마음(rupa-avacara-catuttha-jjhana-citta)을 말한다."(MA.ii.345)
*"어떻게 색계 제4선의 마음으로 무색계의 증득(arupa-avacara-samapatti)을 알 수 있는가? 색계 제4선에 머무는 자는 무색계의 증득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머무는 자는 무색계 증득을 성취하기 때문에 공무변처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비상비비상처는 언급하지 않았는가? 이것은 지극히 미세하여 개별적으로 이것만을 천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MA.ii.345)
*「DN 2-사문과경」에는 이런 가르침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꿰뚫어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이어서 사대(四大)로 구성된 것이고, 부모에 속한 것에서 생겨난 것이고, 밥과 응유가 집적된 것이고, 무상하고 쇠퇴하고 부서지고 해체되고 흩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의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 다시 말해서 안식(眼識)~신식(身識)이 의지하고, 묶여 있음 ⇒ 안식~신식이 청정해져 풀려남 ⇒ 의식(意識)이 무색계(無色界)로 이끌림.
"그러면 도반이여, 무엇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까?"
"참으로 도반이여, 지혜의 눈[慧眼.혜안]으로 알아야 하는 법을 꿰뚫어 압니다."
*"'지혜의 눈으로 꿰뚫어 안다(panna-cakkhuna pajanati)'라고 했다. 여기서 지혜의 눈이란 바로 지혜를 말한다. 보는 것은 안내자를 뜻하는데 이러한 뜻을 가진 눈이라는 지혜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 지혜는 삼매의 지혜와 위빳사나의 지혜의 두 가지가 있다. 삼매의 지혜에 의해서는 역활과 미혹하지 않음을 통해서 꿰뚫어 알고, 위빳사나의 지혜에 의해서는 무상.고.무아의 특징을 통찰하여 대상을 아는 것을 설했다."(MA.ii.345)
"그러면 도반이여, 혜(慧)는 무엇을 위하 것입니까?"
"참으로 도반이여, 혜는 완전한 지혜와 철저한 지혜와 버림을 위한 것입니다."
*"완전히 알아야 할 법들을 완전히 안다(abhijanati)고 해서 '완전한 지혜(abhinna)'이다. 철저히 알아야 할 법들을 철저히 안다(parijanati)고 해서 '철저한 지혜(parinna)'이다. 버려야 할 법들을 버린다(pajahati)고 해서 '버림(pahana)'이다.(MA.ii.346)
452. "그러면 도반이여, 바른 견해[正見]가 생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과 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도반이여, 바른 견해가 생기게 하는 이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른 견해(samma-ditthi)'란 위빳사나의 바른 견해와 도(道)의 바른 견해를 다 포함한다."(MA.ii.346)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parato ghoso)'이란 유익한 가르침을 [다른 이로부터] 듣는 것(sappaya-dhamma-ssavana)'이고 '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임(yoniso manasikaro)'이라는 것은 스스로 수단을 주의를 기울임(attano upaya-manasikaro)인데, 이 두 가지가 바른 견해를 생기게 하는 조건(paccaya)이다.
그러나 벽지불들(paccekabuddha)이나 일체지를 얻은 부처님들(sabbannu-buddha)의 경우는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듣는 것은 필요 없고 오로지 지혜롭게 주의를 기울임만 있어도 된다. 그외에 법의 총사령관(dhammasenapati)인 사리뿟따 존자의 경우에도 두 가지 조건이 다 필요하다."(MA.ii.346)
"바른 견해는, 도반이여, 몇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을 받은 마음의 해탈[心解脫]의 결실[果]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기고,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의 결실과 지혜에 의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깁니까?"
"바른 견해는, 도반이여,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을 받은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기고, 지혜에 의한 해탈의 결실과 지혜에 의한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깁니다. 여기, 도반이여, 바른 견해는 계의 도움으로 생기고, 배움의 도움으로 생기고, 대화(담론, 법담)의 도움으로 생기고, 사마타의 도움으로 생기고, 위빳사나의 도움으로 생깁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구성요소들의 도움을 받은
마음의 해탈의 결실과 마음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기고, 지혜의 해탈의 결실과 지혜의 해탈의 결실의 이익으로부터 생깁니다."
*"'계(sila)'는 네 가지 청정한 계(catu-parisuddhisila)를 말하고, '배움(suta)'은 유익한 가르침을 듣는 것(sappaya-dhamma-ssavana)을, '대화(sakaccha)'는 명상주제에 확고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을 끊는 대화(khalana-pakkhalana-cchedana-katha)를, '사마타(samatha)'는 위빳사나의 토대가 되는 여덟 가지 증득을, '위빳사나(vipassana)'는 일곱 가지 수관(satthvidha anupassana)을 말한다.
네 가지 청정한 계를 원만히 하고(purenta), 유익한 가르침을 듣고(sunanta), 명상주제에 확고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것을 끊고(chindanta), 위빳사나의 기초가 되는 여덟 가지 증득에 대해 익히며 닦고, 일곱 가지 수관을 닦는 자의 경우 아라한도가 일어나고 과를 얻는다."(MA.ii.346)
일곱 가지 수관은 본서 제1권 「원한다면 경」(MN6)을 참조할 것.
453. "도반이여, 몇 가지 존재[有.유]가 있습니까?"
"도반이여, 이런 세 가지 존재가 있습니다. 욕계 존재, 색계의 존재, 무색계의 존재입니다."
*"'욕계 존재(kama-bhava)'란 욕계 존재에 태어날 업과 이미 업에서 태어난 무더기를(kamma-abhinibbatta upadinna-kkhandha), 이 둘을 한데 묶어서 욕계 존재라고 말했다. 색계 존재 등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MA.ii.347)
"도반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까?"
"도반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중생들이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있습니다."
*"'미래에 다시 태어남(ayatim punabbhava-abhinibbatti)'이라고 했다. 이것을 통해서 윤회(vatta)를 질문한 것이다."(MA.ii.347)
여기서는 12연기에서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들고 있다.
*"'여기저기서 즐기기 때문에(tatra-atatra-abhinandana)'라는 것은 형색을 즐기고, 소리를 즐기면서 이와 같이 여기저기서 즐긴다는 뜻이다. 이 문구는 윤회를 한다(vattam vattati)는 것에 대한 그 근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반면에 바로 앞의 두 문구인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avijja-nivarananam tanha-samyojananam)'은 중생들을 수식하는 말이다."(MA.ii.347)
"도반이여, 어떻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까?"
"도반이여, 무명이 사라지고 명지(明知)가 생기고 갈애가 소멸하기 때문에 이렇게 미래에 다시 태어남이 없습니다."
454. "도반 사리뿟따여, 무엇이 초선(初禪)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이여, 초선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초선에는 몇 가지 구성요소가 있습니까?"
"도반이여, 초선에는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있습니다. 여기, 도반이여, 초선을 성취한 비구에게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와 기쁨과 즐거움과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됨[心一境性]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초선은 이런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있습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초선은 몇 가지 구성요소가 버려졌고 몇 가지 구성요소가 갖춰졌습니까?"
"도반이여, 초선은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버려졌고, 다섯 가지 구성요소가 갖춰졌습니다. 여기, 도반이여, 초선을 성취한 비구에게 감각적 쾌락이 버려지고, 성냄이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졌고, 들뜸과 후회가 버려졌고, 의심이 버려졌습니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와 기쁨과 즐거움과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됨이 있습니다."
455. "도반이여,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지는 눈의 근(기능), 귀의 근, 코의 근, 혀의 근, 몸의 근의 다섯 가지 근은 서로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지는 이런 다섯 가지 근에게 무엇이 의지처이고, 무엇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까?"
"도반이여,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지는 눈의 근, 귀의 근, 코의 근, 혀의 근, 몸의 근의 다섯 가지 근은 서로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서로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는,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지는 이런 다섯 가지 근에게 마음(의,意)이 의지처이고, 마음이 그것들들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마음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이다(mano patisaranam).'라는 것은 속행의 마음(javana-mano)이 그들 각자의 의지처가 됨을 말하고, '마음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한다(mano ca nesam gocara-visayam paccanubhoti).'라는 것은 마음의 문(意門)을 통한 속행의 마음이나 다섯 가지 문을 통한 속행의 마음이 그들 각자의 영역과 대상을 애착하거나 싫어하거나 경험한다는 말이다.눈의 의식은 형색을 볼 뿐 애착하거나 싫어하거나 미혹함이 없기 때문이다. 귀의 의식등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ii.349)
456. "도반이여, 눈의 근, 귀의 근, 코의 근, 혀의 근, 몸의 근의 다섯 가지 근(기능)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근은 무엇을 연(緣)하여 유지됩니까?"
"도반이여, 눈의 근, 귀의 근, 코의 근, 혀의 근, 몸의 근의 다섯 가지 근(기능)이 있습니다. 도반이여, 이런 다섯 가지 근은 수명(생명력)을 연(緣)하여유지됩니다."
"다시 도반이여, 수명은 무엇을 연(緣)하여 유지됩니까?"
"수명은 온기(체열)를 연(緣)하여 유지됩니다."
"다시 도반이여, 온기는 무엇을 연(緣)하여 유지됩니까?"
"온기는 수명을 연(緣)하여 유지됩니다."
"도반이여, 이제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이렇게 압니다.
'수명은 온기를 연하여 유지된다.'라고. 다시 도반이여, 이제 우리는 사리뿟따 존자의 말을 이렇게 압니다. '온기는 수명을 연(緣)하여 유지된다.'라고. 그렇다면, 도반이여, 어떻게 이 말씀의 의미를 보아야 합니까?"
"도반이여, 그렇다면 그대에게 비유를 말하겠습니다. 비유에 의해서도 어떤 현명한 사람들은 말의 의미를 압니다. 예를 들면, 도반이여, 기름 등불이 타고 있을 때 불꽃을 연(緣)하여 빛이 나타납니다. 빛을 연(緣)하여 불꽃이 나타납니다. 이처럼, 도반이여, 수명은 온기를 연(緣)하여 유지되고, 온기는 수명을 연(緣)하여 유지됩니다."
457. "도반이여, 수명(생명력을 가진 것)이라는 것은 느낌(경험되는 법들)과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수명과 느낌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도반이여, 수명이 느낌과 같은 것이라면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출정(出定)이 알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도반이여,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출정이 알려집니다."
*'수명'은 ayu-sankhara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ayu(수명)+sankhara(형성된 것들)로 나뉘어진다. 이것은 '수명의 상카라들'이나 '수명의 형성들' 또는 '생명력을 가진 것들'로 직역할 수 있다. 주석서는 "그 뜻은 그냥 수명이다(ayum eva)."(MA.ii.350)라고 설명하고 있다.
*'상수멸(想受滅. sanna-vedayita-nirodha. 인식과 느낌의 소멸)'은 불환자나 아라한만이 들 수 있는 증득으로 여기서는 모든 심소법들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온기가 남아있기 때문에 죽은 자와 다르다. 그러므로 만약 수명이 느낌과 동일한 것이라면 상수멸에서 수명도 가라앉아버려 다시 그 증득에서 출정할 수가 없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수명과 느낌은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도반이여, 몇 개의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무감각한(무정물인) 나무토막처럼 던져지고 팽개쳐져 누워있게 됩니까?"
"도반이여, 수명과 온기와 의식의 세 개의 법들이 이 몸을 떠날 때 이 몸은 무감각한 나무토막처럼 던져지고 팽개쳐져 누워있게 됩니다."
"도반이여, 죽은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도반이여, 죽은 자에게 몸의 작용[身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말의 작용[口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마음의 작용[心行]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수명이 다하고, 온기는 식고, 감각기능들은 파괴됩니다.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에게 몸의 작용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말의 작용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마음의 작용은 그치고 진정됩니다. 수명은 다하지 않고, 온기는 식지 않고,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합니다. 도반이여, 이것이 죽은 자와 상수멸을 증득한 비구의 차이점입니다."
458.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心解脫)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몇 가지입니까?"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네 가지입니다.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捨念淸淨]을 지닌 제4선(四禪)에 성취하여 머뭅니다. 도반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이런 네 가지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마음의 해탈을 증득함(adukkhamasukhaya cetovimuttiya samapatti)'이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무엇을 질문한 것인가? 상수멸(nirodha)에 대해서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이 되는 비상비비상처를 질문한 것이다. 그러나 사리뿟따 존자의 대답은 '즐거움이 끊어지고' 등의 제4선을 통한 네 가지 (즐거움, 괴로움, 기쁨, 근심(슬픔)) 버림이라는 조건들을 말하고 있다."(MA.ii.352)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몇 가지입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모든 표상(상.相)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표상이 없는 요소[界]에 주의를 집중함입니다. 도반이여,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의 증득을 위한 조건은 이런 두 가지입니다."
*"'표상 없는[無相, animitta]'이라고 한 것은 상수멸에서 출정하는 과의 증득(nirodhato vutthanaka-phala-samapatti)에 대해 묻는 것이다. 나머지 다른 증득에서 출정할 때에는 잠재의식을 통해 하지만 상수멸에서 출정할 때에는 과의 증득을 통해 하기 때문에 그것을 질문하는 것이다."(MA.ii.352) *"'모든 표상(sabba-nimitta)'이란 형색 등 모든 대상을 말하고, '표상이 없는 요소에 주의를 기울임(animittaya dhatuya manasikara)'이란 모든 표상에서 벗어난 열반의 요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과의 증득과 함께 생긴 주의를 기울임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에서 상수멸의 토대가 되는 초선을 설명했고, 상수멸에게 틈 없이 뒤따르는 조건이 된 비상비비상처를 설명했고, 여기서는 상수멸에서 출정하는 과의 증득을 다루었다."(MA.ii.352)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의 유지를 위한(지속시키기 위한) 조건은 몇 가지입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의 유지를 위한 조건은 모든 표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표상이 없는 요소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과 이전의 준비(결심) 세 가지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의 유지를 위한 조건은 이런 세 가지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한 조건은 몇 가지입니까?"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한 조건은 모든 표상들에 주의를 기울임과 표상이 없는 요소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의 두 가지 입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에서 출정하기 위한 조건은 이런 두 가지입니다."
459. "도반이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무소유심해탈.無所有心解脫)과 공한 마음의 해탈(공심해탈.空心解脫)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이라고 하는 이 법들은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입니까?"
"도반이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과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과 공한 마음의 해탈과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 도반이여, 이 법들을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고, 도반이여, 이 법들을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기서 문자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다. 뜻으로 보면, '무량한 마음의 해탈(appamana cetovimutti)'은 경지(bhmantara)로는 고귀한(mahaggata) 색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중생과 개념을 대상으로 가진다.
'무소유(akincanna)'의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고귀한 무색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상으로 가진다. 복주석서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욕계의 것 등이나 과거의 것 등이나 안의 것 등으로 그 대상을 말할 수 없다. 열반을 대상으로 하는 과의 증득이기 때문이다."(MAT.ii.277)라고 설명하고 있다.
'공한(sunnata)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욕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형성된 것들을 대상으로 가진다. 여기서 공함은 위빳사나와 동의어이다.
'표상 없는(animitta) 마음의 해탈'은 경지로는 출세간에 속하고 대상으로는 열반을 대상으로 가진다."(SA.iii.98)
"도반이여, 어떤 방법이 이 법들을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자애(자비)를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자애를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 연민을 수반하는 마음을 ··· 기뻐함을 수반하는 마음을 ···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한 방향으로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그와 같이 두 방향, 그와 같이 세 방향, 그와 같이 네 방향, 위 아래와 사방 모든 곳에, 일체의, 일체의 세간에, 광대하고 크고 무량한, 악의 없고 해치고자 함이 없는, 평정을 수반하는 마음을 퍼지게 하면서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이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무량심해탈.無量心解脫)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무소유심해탈.無所有心解脫)은 무엇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일체의 의식에 걸림이 없는 경지인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이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면 도반이여, 공한 마음의 해탈(공심해탈.空心解脫)은 무엇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 가거나 빈 집으로 가서 이렇게 숙고합니다.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라고. 이것이, 도반이여, 공한 마음의 해탈이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자아에 속한 것(attaniya)'이란 옷 등의 필수품이라 불리는 것을 말한다."(MA.ii.353)
"그러면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무상심해탈.無相心解脫)은 무엇입니까?"
"여기, 도반이여, 비구는 모든 표상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를 성취하여 머뭅니다. 이것이,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입니다. 이 방법이, 도반이여, 이 법들을 의미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입니다."
"도반이여, 어떤 방법이 이 법들을 의미는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으로 설명하는 방법입니까?"
"도반이여, 탐욕도 한계를 만들고, 성냄도 한계를 만들고, 어리석음도 한계를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그것들은 제거되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도반이여, 무량한 마음의 해탈들이라고 하는 한 부동(不動)의 마음의 해탈이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 부동의 마음의 해탈은 탐욕에 의해 공하고 성냄에 의해 공하고 어리석음에 의해 공합니다(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공합니다).
*"'한계를 만든다(raga pamana-karana).'라고 말했다. 예를 들면 산기슭에 썩은 나뭇잎들이 쌓여 있는 물이 있는데 검은색으로 변해 있어서 쳐다보면 100길이나 되는 깊은 곳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무 막대기나 밧줄로 재어보면 등짝 정도에도 미치지 못하듯이, 탐욕 등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인식할 수가 없다. 그는 마치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그에게 탐욕 등이 일어나면 그가 탐하는 자(ratta)인지, 성내는 자(duttha)인지, 어리석은 자(mulha)인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라고 사람에게 한계(pamana)를 보여주는 것처럼 일어나기 때문에 한계를 만든다고 했다."(MA.ii.354)
*"'모든 무량한 마음의 해탈(yavata appamana cetovimuttiyo)'이란 열두 가지 마음의 해탈을 말한다. 즉 네 가지 거룩한 마음,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를 말한다. 이중에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은 확장하는 범위가 무량하기 때문이고, 나머지는 한계를 짓는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무량하다.(MA.ii.354)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akuppa ceto-vimutti)'이란 아라한과의 마음의 해탈을 말한다. 이것이 그들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에 '최상'이라 한다(aggam akkhayati)."(MA.ii.354)
도반이여, 탐욕도 있는 것이고(그 무엇이 있는 것이고), 성냄도 있는 것이고, 어리석음도 있는 것입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그것들은 제거되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도반이여,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들이라고 하는 한 부동의 마음의 해탈이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해탈은 탐욕에 의해 공하고 성냄에 의해 공하고 어리석음에 의해 공합니다.
*"'탐욕은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rago kho kincano)'에서 탐욕은 일어나면 사람을 방해하고(kincati) 밝아 뭉개고(maddati) 훼손한다(palibundhati). 그래서 그 무엇(kincana)이라고 한다."(MA.ii.354)
이처럼 주석서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란 방해하고 장애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무소유의 마음의 해탈(akincanna cetovimutti)'에는 9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무소유처(akincann-ayatana)와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이다. 이 가운데 무소유처는 어떤 것도 대상으로 가지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라 불린다. 도와 과는 어떠한 괴롭히고 방해하는 오염원들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소유이며, 열반도 무소유이다."(MA.ii.354)
도반이여, 탐욕도 표상을 만들고, 성냄도 표상을 만들고 어리석음도 표상을 만듭니다. 번뇌 다한 비구에게 그것들은 제거되고, 뿌리 뽑혔고 윗부분이 잘린 야자수처럼 되었고,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도반이여, 표상 없는 마음의 해탈들이라고 하는 한 부동의 마음의 해탈이 그들 가운데 최상이라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 부동의 마음의 해탈은 탐욕에 의해 공하고 성냄에 의해 공하고 어리석음에 의해 공합니다.
*"'탐욕은 표상을 만들고(rago nimitta-karano)'등이라 했다. 예를 들면 두 가문에 비슷한 두 마리 소가 있다 하자. 그들에게 특징을 표시해 놓지 않으면 '이것은 어떤 집안의 소이고, 이것은 어떤 집안의 소이다.'라고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뚝 등에다 어떤 표시를 해두면 알 수가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탐욕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이 사람이 성인인지 범부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탐욕은 일어나는 순간 '이 사람은 탐욕을 가졌다.'라고 인식하는 표상을 만들듯이 일어나기 때문에 표상을 만든다고 한 것이다. 성냄과 어리석음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된다."(MA.ii.354-355)
*"'표상없는 마음의 해탈(animitta cetovimutti)'이란 위빳사나, 네 가지 도, 네 가지 과의 13가지 법을 말한다. 이 중에서 위빳사나는 영원하다는(常, nicca) 표상, 행복이라는(樂, sukha) 표상, 자아라는(我, atta) 표상을 부수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네 가지 무색계는 색계의 표상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이라고 하고, 도와 과는 표상을 짓는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것이라 한다."(MA.ii.355)
도반이여, 이것이 이 법들이 의미는 같고 표현만 다르게 되는 방법입니다."
*"'뜻이 같다(ekattha)'는 것은 대상(arammana)을 통해서 그렇게 말했다. 무량과 무소유와 공함과 표상 없음의 이 모든 법들은 열반의 다른 이름이다. 이와 같이 이러한 방법에 따라서는 뜻이 같다.
"표현이 다른다(nanabyanjana)'라는 것은 이처럼 어떤 곳에서 무량하다고 했고, 다른 곳에서는 무소유라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공하다고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표상이 없다고 한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이러한 방법에 따라서는 표현이 다른 것이다."(MA.ii.355)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마하꼿티까 존자는 즐거워하면서 사리뿟따 존자의 말씀을 기뻐했다.
교리문답의 큰 경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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