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맛지마 니까야

MN 44. 교리문답의 작은(짧은) 경(cūḷavedallasuttaṃ)

실론섬 2016. 4. 12. 16:28

MN 44. 교리문답의 작은(짧은) 경(cūḷavedallasuttaṃ)

 

460.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웰루와나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를 만나러 갔다. 가서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담마딘나여(스님), '존재 다발(유신.有身), 존재 다발'이라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다발이라고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 오취온]을 존재 다발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적 요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色取蘊], 감수작용(느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受取蘊], 지각작용(인식)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想取蘊], 형성작용(형성)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行取蘊], 의식작용(식별)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識取蘊]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을 존재의 다발이라고 하셨습니다."

 

*위사카 청신사(Visaka upasaka)는 담마딘나(Dhammadinna)의 남편이었다. 그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장자였는데 세존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뒤 첫 번째로 라자가하에 와서 빔비사라 왕을 만날 때 함께 참석했다. 그때 그는 설법을 듣고 예류자가 되었으며 나중에 불환자까지 증득했다. 그는 불환자를 증득한 후 아내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아내에게 그의 모든 재산을 물려주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자유를 주었다. 그녀는 출가하기를 원했고 위사카는 빔비사라 왕에게 이 말을 전했으며, 왕은 그녀의 출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온 도시를 장식하도록 하고 황금 가마를 태워서 그녀를 출가하게 했다고 한다.(MA.ii.355)  
*담마딘나 비구니(Dhammadinna bhikikhuni)는 라자가하의 부유한 장자인 위사카의 아내였다. 그녀는 세존의 설법을 듣고 불환자가 된 남편의 동의를 받아 출가했다. 남편은 그녀를 황금가마에 태워서 출가시켰다고 한다. 출가하여 숲 속에서 홀로 거주하며 수행을 하여 무애해를 갖춘 아라한이 되었다. 아라한이 되어 라자가하로 세존을 친견하러 갔다가 남편을 만나서 나눈 대화가 바로 본경이다.(MA.ii.355-358)

비구니의 설법이 경으로 남은 경우는 드문데 본 교리문답의 짧은 경은 담마딘나 장로니의 깊은 지혜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경이다. 이 경을 통해서 왜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 「하나의 모음」(A1.14)에서 담마딘나 장로니를 두고 "법을 설하는 비구니들 가운데서 담마딘나가 으뜸이다."라고 칭찬하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리고 니까야에서 전해오는 대표적인 비구니 스님들의 설법으로는 케마 비구니 스님(Khema bhikkhuni)이 설하신 「상윳따 니까야」 제4권의 「케마 경」(S44.1)과 「앙굿따라 니까야」 제6권에 전해오는 까장갈라 비구니 스님(Kajangala bhikkhuni)의 「큰 질문 경」(A10.28)와 본경을 들 수 있다.     

 

"감사합니다, 담마딘나여."이라고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설명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담마딘나여, '존재 다발의 일어남(유신(有身)의 자라남), 존재 다발의 일어남'이라고 불립니다. 담마딘나여, 무엇이 존재 다발의 일어남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 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그것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다시 존재로 이끌고), 소망(所望)과 탐역(貪)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에서 즐거워하는 갈애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도반 위사카여, 존재 다발의 일어남이라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담마딘나여, '존재 다발의 소멸, 존재 다발의 소멸'이라고 합니다. 세존께서는 무엇을 존재 다발의 소멸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그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함, 버림(포기),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붙잡지 않음)이, 도반 위사카여, 존재 다발의 소멸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담마딘나여, '존재 다발의 소멸에 이르는 길, 존재 다발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담마딘나여, 무엇이 존재 다발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이것,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 존대 다발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마딘나여, 그러면 집착이 곧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입니까, 아니면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과 다른 것이 집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집착이 곧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인 것도 아니고,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으로부터 다른 곳에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도반 위사카여,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에 대한 열망과 탐욕이 거기서 집착입니다."

 

461. "담마딘나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유신견]가 생깁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거룩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한 무지한 범부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지 못해, 물질(色)을 나(我.자아)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물질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이, 혹은 물질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느낌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느낌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느낌이, 혹은 느낌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인식(想)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인식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인식이, 혹은 인식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형성들(行)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형성들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들이, 혹은 형성들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의식(識)을 나로 간주한다거나, 나를 의식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의식이, 혹은 의식에 내가 있다고 여깁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겨납니다."

 

"담마딘나여,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나지 않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거룩한 이를 알아보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알고 거룩한 이의 가르침을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있습니다. 그는 훌륭한 스승을 알아보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알고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물질을 나로 간주하지 않으며, 나를 물질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물질이, 혹은 물질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느낌을 나로 간주하지 않으며, 나를 느낌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느낌이, 혹은 느낌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인식을 나로 간주하지 않으며, 나를 인식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인식이, 혹은 인식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형성들을 나로 간주하지 않으며, 나를 형성들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형성들이, 혹은 형성들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의식을 나로 간주하지 않으며, 나를 의식을 지닌 자로, 혹은 나에게 의식이, 혹은 의식에 내가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해서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는 견해[有身見]가 생기지 않습니다."

 

462. "담마딘나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支聖道]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오직 이것,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가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입니다."

 

"담마딘나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은 형성된 것(有爲.유위)입니까. 아니면 형성된 것이 아닙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은 형성된 것입니다."  

 

*"'형성된(sankhata)'이런 의도된(cetita), 사유된(kappita), 상정된(pakappita), 적집된(ayuhita), 만들어진(kata), 생긴(nibbatita), 증득되어야 하는(samapajjitabba)의 뜻이다."(MA.ii.363)  
"이러한 7가지 단어들로 이 성스러운 도(ariya-magga)는 조건에 의해서 생긴 것임(paccaya-nibbattita)를 보여주고 있다."(MAT.ii.260)

 

"담마딘나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에 세 가지 온(蘊)이 포함됩니까, 아니면 세 가지 온에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포함됩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에 세 가지 온이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세 가지 온에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 포함됩니다. 도반 위사카여,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이 세 가지 법은 계의 무더기[戒蘊.계온]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이 세 가지 법은 삼매의 무더기[定蘊.정온]에 포함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의 이 두 가지 법은 지혜의 무더기[慧蘊.혜온]에 포함됩니다." 

 

*"'바른 정진(samma-vayama)'등 세 가지 법 중에서 삼매(samadhi)는 자기의 성질로는 대상에 하나 된 상태(ekagga-bhava)로서 집중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진(viriya)이 노력하는 역활을 성취하고 마음챙김이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역활을 성취할 때 그것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예를 들면 '축제를 벌이자.'라고 하면서 세 친구가 정원에 들어갔을 때 친구가 꽃이 활짝 핀 짬빠끼 나무를 보고 손을 뻗어서 꺾으려 해도 꺾을 수 없자 두 번째 친구가 등을 구부려준다. 그가 그의 등에 올라섰지만 불안정하여 꽃을 꺾을 수 없자 세 번째 친구가 어깨를 대준다. 그는 한 친구의 등에 올라서서 다른 친구의 어깨를 잡고 마음껏 꽃을 꺾어 치장을 하고 축제를 벌이는 것과 같다.  
이 비유의 적용은 다음과 같다. 바른 정진 등 함께 생긴 세 가지 법들은 함께 정원으로 들어간 친구와 같다. 대상은 활짝 핀 짬빠끼 나무와 같다. 자기의 성질만으로는 대상에 하나 된 상태로 집중할 수 없는 삼매는 손을 뻗어보지만 꽃을 꺾을 수 없는 사람과 같다. 정진은 [자기 등에 올라서도록] 등을 구부려준 친구와 같다. 마음챙김을 어깨를 주면서 옆에 서 있는 친구와 같다. 마치 한 사람의 등에 올라서서 다른 사람의 어깨를 잡고 또 다른 사람이 원하는 만큼 꽃을 꺾을 수 있듯이 정진이 노력하는 역활을 하고 마음챙김이 대상에 깊이 들어가는 역활을 할 때 그 도움을 받아 삼매는 대상에 하나 된 상태로 집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삼매는 여기서는 같은 종류로 삼매의 무더기에 포함되었고, 정진과 마음챙김은 역활로 포함되었다."(MA.ii.362)   
*"'바른 견해(samma-ditthi)'와 '바른 사유(samma-sankappa)'에서도 지혜는 자기의 성질로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라고 대상을 꿰뚫을 수 없다. 일으킨 생각(vitakka)이 대상을 계속해서 떠올려줄 때 가능하다.  
마치 금속세공인이 동전을 손바닥에 놓고 이모저모 살펴보길 원하지만 눈동자의 표면으로는 그것을 뒤집을 수 없으며 손가락으로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야만 이모저모를 살필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지혜는 자기 성질로는 대상을 무상 등으로 꿰뚫을 수 없다. 일으킨 생각은 마음을 대상에 기울이는 특징을 가지고 치고 때리는 역활을 한다. 이런 일으킨 생각의 도움으로 치고 뒤집는 것처럼 주어진 대상을 계속해서 받아서 [무상 등으로] 꿰뚫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바른 견해는 같은 종류로 지혜의 무더기에 포함되었고 바른 사유는 역활로 포함되었다."(MA.ii.362)
"바른 사유의 역활이 바른 견해의 역활과 비슷하기 때문에 포함되었다. 앞 문단의 정진과 마음챙김이 역활로 포함되었다는 것은 삼매를 돕는 역활이라는 것이 차이점이다."(Pm.568)

 

"담마딘나여, 무엇이 삼매[定]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의 표상이고, 어떤 법들이 삼매를 보호하는 것들이고, 무엇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마음이 한 곳에 집중됨[心一境性.심일경성]이 삼매입니다.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이 삼매의 표상입니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이 삼매를 보호하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이런 법을 많이 익히고 행하는 것이 삼매를 닦는 것입니다."

 

463. "그러면 담마딘나여, 얼마나 많은 작용들[行. 형성작용]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작용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작용[身行], 말의 작용[口行], 마음의 작용[心行]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무엇이 몸의 작용이고, 무엇이 말의 작용이고, 무엇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尋. 거친 사유]과 지속적 고찰[伺. 미세한 사유]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想. 지각작용]과 느낌[受. 감수작용]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무슨 이유로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몸에 묶여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인식과 느낌은 마음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마음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464. "그러면 담마딘나여, 어떻게 상수멸(想受滅)의 증득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을 증득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을 증득했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그렇게 마음을 닦은 그것이 그런 상태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첫 번째로 소멸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을 증득하는 비구에게 말의 작용이 첫 번째로 소멸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소멸하고, 그 다음에 마음의 작용이 소멸합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어떻게 상수멸의 증득으로부터 출정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하는 비구에게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할 것이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다.'라거나 '나는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했다.'라는 이런 것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에 그렇게 마음을 닦은 그것이 그런 상태로 인도합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하는 비구에게 어떤 법들이 첫 번째로 일어납니까? 몸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말의 작용입니까, 아니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마음의 작용이 첫 번째로 일어나고, 그 다음에 몸의 작용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말의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몇 가지 감각접촉[觸]들이 닿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세 가지 감각접촉들이 닿습니다. 그것은 공한 감각접촉, 표상 없는 감각접촉, 바람 없는 감각접촉입니다."

 

*"'공한 감각접촉(sunnata phassa)' 등은 본질적인 특성과 대상에 의한 것이다. 본질적인 특성에 의하면, 공함(sunnata)이라는 것은 과의 증득(phala-samapatti)을 말하고, 그 과의 증득과 함께 생긴 감각접촉을 두고 공한 감각접촉이라 한다. 대상에 의하면, 열반은 탐욕 등이 비어있기 때문에 '공(sunna)'이라 하고, 탐욕의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 '표상 없음(animitta)'이라 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바람 없음(appanihita)'이라 한다. 그 공한 열반을 대상으로 일어난 과의 증득에서 감각접촉은 공이라 한다."(MA.ii.367)  

 

"그러면 담마딘나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마음은 무엇으로 향하고, 무엇으로 기울고, 무엇으로 이끌립니까?"

"도반 위사카여, 상수멸의 증득에서 출정한 비구에게 마음은 멀리 떠남(여읨)으로 향하고, 멀리 떠남으로 기울고, 멀리 떠남으로 이끌립니다."

 

*"여기서 '멀리 떠남(viveka)'은 열반을 말한다."(MA.ii.367)

 

465. "담마딘나여, 몇 가지 느낌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세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그것은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무엇이 즐거운 느낌이고, 무엇이 괴로운 느낌이고, 무엇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마음에 속한 것인 즐거움과 편안함, 이것이 즐거운 느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마음에 속한 것인 괴로움과 불편함, 이것이 괴로운 느낌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몸에 속한 것이거나 마음에 속한 것인 편안함도 아니고 불편함도 아닌 것, 이것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즐거운 느낌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고, 괴로운 느낌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은 어떤 즐거움과 어떤 괴로움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느낌은 유지되면 즐거움이고 변화하면 괴로움입니다. 괴로움의 느낌은 유지되면 괴로움이고 변화하면 즐거움입니다.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은 알면 즐거움이고 모르면 괴로움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즐거운 느낌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로움의 느낌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 의해 어떤 잠재성향이 잠재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느낌에 의해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로움의 느낌에 의해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 의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합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모든 즐거움의 느낌에 의해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모든 괴로움의 느낌에 의해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 의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움의 느낌에 의해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괴로움의 느낌에 의해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 의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즐거움의 느낌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하고, 괴로움의 느낌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하고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서 무엇이 버려져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움의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괴로움의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합니다." 

 

"담마딘나여, 모든 즐거움의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모든 괴로움의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합니까?"

"도반 위사카여, 모든 즐거움의 느낌에서 탐욕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로움의 느낌에서 적의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니고, 모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의 느낌에서 무명의 잠재성향이 버려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해로운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을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것에 의해 탐욕을 버립니다. 그때 탐욕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숙고합니다. '성자들이 지금 성취해 머무는 그 경지를 나는 언제 성취하여 머물 것인가?'라고. 이렇게 위없는 해탈에 대한 염원을 확고히 할 때 염원의 조건을 원인으로 고뇌(정신적 고통)가 일어납니다. 그것에 의해 적의를 버립니다. 그때 적의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여기 비구는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제4선을 성취하여 머뭅니다. 그것에 의해 무명을 버립니다. 그때 무명의 잠재성향이 잠재하지 않습니다."    

 

*"'염원의 조건을 원인으로 고뇌가 일어난다(uppajjati piha-paccaya domanassam)'는 것은 염원(patthana)을 일으키지만 얻지 못한 자에게 얻지 못한 것에 바탕을 둔 고뇌가 일어난다는 말이다. 비록 고뇌는 전적으로 해로운 것이지만 여기서는 닦아야 할 고뢰라고 말하고 있다."(MA.ii.368)   
*"'그것에 의해 적의를 버린다(patigham tena pajahati)'는 것은 고뇌(domanassa)로 적의를 제거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적의로서는 적의를 버릴 수 없고 고뢰로써는 고뇌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이 비구는 석 달 혹은 여섯 달 혹은 아홉 달의 도닦음을 취하여 다음과 같이 숙고해 본다. '나는 계행도 저열하고 정진도 약하고 지혜도 약하다. 그러니 참으로 계행을 청정히 하고 정진을 하고 지혜를 증장 시키리라.'라고. 그리하여 그는 정진을 굳건히하여 석 달 혹은 여섯 달 혹은 아홉 달 이내에 불환도를 얻어 적의의 잠재성향을 근절한다. 이런 방법으로써 적의를 버리고, 고뇌로써 고뇌를 버린다고 한다."(MA.ii.369)  

 

466. "그러면 담마딘나여, 즐거운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즐거운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괴로운 느낌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괴로운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로운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즐거운 느낌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괴롭지도 즐겁지도않은 느낌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명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무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무명에게 대응하는 것은 명지(明知)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명지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명지에게 대응하는 것은 해탈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해탈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해탈에게 대응하는 것은 열반입니다."

 

"그러면 담마딘나여, 열반에게 대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 버렸습니다. 그런 질문들의 끝을 잡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도반 위사카여, 왜냐하면 청정범행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을 궁극으로 하고 열반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반 위사카여, 그대가 원한다면 세존께 가서 이것의 의미를 여쭈어보십시오. 세존께서 말씀해주시는 대로 그대는 받아들이십시오(명심하십시오)."

 

467. 그러자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담마딘나 비구니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공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떠난 뒤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위사카 청신사는 담마딘나 비구니와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이렇게 말씀드리자 세존께서는 위사카 청신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위사카여, 담마딘나 비구니는 현자이다. 담마딘나 비구는 큰 지혜를 가졌다. 위사카여, 만약 그대가 나에게 이것의 의미를 물었더라도 나도 그것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담마딘나 비구니가 설명한 것이 그것의 의미이다그러니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여라."라고.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위사카 청신사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교리문답의 작은(짧은) 경(M44)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