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화엄경

화엄 교학에서의 연기(緣起) 개념/고승학

실론섬 2017. 4. 4. 14:51

화엄 교학에서의 연기(緣起) 개념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

(NRF-2011-361-A00008).

고승학/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 연기 개념의 변용과 화엄의 법계연기 개념

Ⅲ. 인과동시로서의 일승 연기

Ⅳ. 성기 개념의 출현과 전개 양상

Ⅴ. 결론

 

[요약문]

본 논문은 화엄 교학 전통에서 연기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고찰하고 단일해 보이는 이 전통 내에 다양한 연기 개념이 존재하였음을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초기불교의 연기 개념이 시간의 흐름을 중시하여 고통의 발생과 소멸이 

특정한 조건에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면, 대승불교의 공 개념은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이 상호 의존하고 있다는 직관을 가지게 하였고 

연기로부터 시간성을 탈각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화엄 교학의 

진여연기와 법계연기, 그리고 성기 개념은 여기에 사물의 발생론적 

근원을 추구하는 중국적 사유가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법장이 체계화한 화엄 교학에는 자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고, 중중무진으로 특징지어진 법계연기를 

설명하기 위해 『화엄경』의 전체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 채 새로운

그러면서도 복잡한 이론 틀을 도입하여 이론을 위한 이론을 개진한 

한 느낌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 이통현이 인과동시로서 화엄 일승을 규정하면서 제시한 

중관적 논리 전개와 의상이 성기 개념을 논하면서 여래장사상과의 

화회를 시도한 사례들로부터 우리는 화엄 교학 전통 내의 연기 개념이 

지난 다양성을 확인할 수 있다.

 

Ⅰ. 들어가는 말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은 크게 교학 전통과 실천 전통으로 나뉘며,

천태와 화엄은 전자를, 정토와 선은 후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런데 이론 체계와 수행론을 기준으로 비교할 경우 이 전통들은 서로가

극명하게 구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비슷한 역사적・지역적 

락에서 탄생하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우선 이 전통들의 형성 

정에서 불교 교단이 내・외적으로 위기를 겪던 6~7세기 경 중국이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말법(末法) 의식이 유행하면서 중생의 현 상태에

대한 비관적 전망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뒤섞였던 심리적

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논서(śāstra)를 중심

으로 한 인도불교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토착화된 불교를 통해 중국인들이 

세계 문명의 중심으로 재진입을 시도한 일종의 중화의식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배경으로부터 중국에는 단일 경전(sūtra) 또는 단일한 

수행법(염불, 참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이 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그 과정에서 이 지역의 뿌리 깊은 조상 숭배 전통의 

영향을 받아 각 종파 내에서 종조(宗祖)를 중심으로 하는 계보가

만들어졌다는 점도 이 전통들 간의 또 하나의 공통점으로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1) 이런 관점에서는 각 전통들이 단지 어떤 경전 또는 

수행법을 지상(至上)의 것으로 간주하느냐에 따라 구분되며, 각 종파의 

사(祖師)들이 지닌 성향에 따라 특정한 경향성을 띠게 되었다는 식의

일반론적인 서술이 따르게 된다.

1)Paul Williams, Mahayana Buddhism: The Doctrinal Foundations (London: Routeledge, 
  1989), pp.116, 127

 

그러나 조사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일반론에 입각할 때 각 전통에 

내재된 상이한 양상들을 무시하게 될 우려가 있다. 화엄 전통의 경우 

제3조인 법장(法藏, 643-712)을 중심으로 그 교리적 틀이 확립된

이후 줄곧 정치(精緻)한 형이상학적 이론 체계가 그 특징인 것처럼 

식되어 왔는데, 이러한 관념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가진 학자들,

특히 일본의 비판불교 사상가들은 화엄을 사회적 갈등과 모순을 은폐하는 

위험한 철학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2) 그들은 나아가 초기불교의 

핵심적 가르침으로 간주되어 온 연기 사상은 어디까지나 “극히 주관적이며 

위기적인 종교적 시간”을 전제로 한 것이므로,3) 화엄 철학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은 ‘공간적 연기론’은 연기 개념의 남용을 보여주는 

것이며 불교가 될 수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2)  Shiro Matsumoto, “Critical Comments on Critical Buddhism,” 『1999년도 고려대장경
   연구소 불교학 세미나〈비판불교의 비판적 검토〉자료집』(서울: 고려대장경연구소, 1999), 
   p.4; Jamie Hubbard and Paul L. Swanson ed. Pruning the Bodhi Tree: The Storm over 
   Critical Buddhism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7), pp.339- 373. 
3)  마츠모토 시로 著, 혜원 譯,『연기와 공』(서울: 운주사, 1994), p.91.

 

그렇다면 화엄 사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 것인가? 논의의

편의상 우선 기무라 기요타카(木村淸孝)의 용어를 빌어 화엄 사상을

『대방광불화엄경』(이하『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전 자체를 신앙의 

상으로 삼은 초기의 ‘『화엄경』사상’과 이 경전을 해설하면서 나름의

이론 체계를 만들어낸 주석가들의 저술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의 ‘화엄

교학’으로 나누어 보자.4) 이 틀에 의거해서 살펴보면 위에 언급한 부정적 

평가는 화엄 사상을 화엄 교학 중에서도 이른바 화엄 5조에 속하는

주석가들의 교학에만 국한하여 판단한 결과로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의 텍스트와 함께 ‘비정통파’에 

속하는 이들의『화엄경』에 대한 연구를 폭넓게 비교・검토할 경우 

화엄의 교학 전통이 몇 마디 말로 특징지을 수 없는 복잡다단한

양상을 띠고 있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4)  木村淸孝, 「華嚴宗の成立―その思想史的考察」, 平川章 外 編, 『華嚴思想』, 講座大乘佛敎 3
   (東京: 春秋社, 1983), pp.261-262, 271; 木村淸孝, 『東アジア佛敎思想の基礎構 造』(東京: 
   春秋社, 2001), p.458.

 

그러한 반성의 결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의 화엄 교학은 법계연

(法界緣起)를 중심으로 하는 이론 불교로, 한국의 화엄 교학은 성기

(性起)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실천 불교로 규정하는 것이 오늘날 학계의 

일반적인 경향이다. 전자가 현상 세계의 존재자들 사이의 무한한

동일성과 포용의 원리를 나타낸다면, 후자는 그러한 원리와 부처의 

성이 현실 세계에 이미 구현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사실상 전자의 

립 근거가 후자에 있으므로 이 두 가지는 대결적인 구도로 설정하기

는 어렵지만, 현재 대부분의 화엄과 관련한 논의들은 이른바 ‘연성이기

(緣性二起)의 대립’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필자는

이것이 과연 동아시아 화엄 전통을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위에 언급한 화엄 전통에 대한 여러 고정 관념들이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화엄과 중국 화엄을 구분하여 

그 특징을 일반화하는 것 역시 또 다른 고정 관념을 고착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의상(義湘, 625-702)으로 대표되는 

한국 화엄가들이 중국 화엄가들처럼 법계연기에 대한 정밀한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하지 않고,『화엄일승법계도』에서와 같이 반시(磐詩)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 그 자체를 곧바로 보이는 것은 바로 성기를

중시한 것이며 실천 지향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헌적 증거가 부족하다. 실제로『화엄경문답』을 제외하고는 의상의 

존 저작에 ‘성기’라는 용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5) 

아가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는 지눌(知訥, 1158-1210)의 

사상을 성기라는 틀에 입각해서 이해할 경우 오히려 한국 화엄 내지 불교

일반을 더욱더 관념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릴 우려가 있다.6) 진찬(眞撰)

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원돈성불론』을 제외하고는7) 지눌의 

작에서 이 개념이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을 성기

사상으로 규정하는 것은 문헌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근거가 불충분

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한국 화엄 관련 저작들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들에 대한 번역과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기도 하지만,8) 법계 연기와 성기 

개념이 실제로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지를 면밀히 고찰하지 않은 

데에도 기인한다.

5)  박태원, 「의상의 성기 사상―『화엄경문답』을 중심으로―」, 『철학』 49 (1996), 
   pp.7-8. 
6) 김천학은 이통현이 자신의 성기사상 때문에 지눌에 비해 행포문(行布門)보다는 
   원융문(圓融門)을 강조하며 따라서 점수(漸修)보다는 돈오(頓悟)에 치우치는 경
   향이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는 불성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얻은 후에도 철저
   한 이타적 보현행이 수반되어야 함을 강조한 그의 수행론 구조를 간과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반대로 이덕진은『원돈성불론』에 나타난 지눌의 성기사상을 
   강조하면서 그가 법장과 달리 불성의 존재를 유정(有情) 중생에게만 한정하였
   다고 보았지만, 이는 지눌이『화엄론절요』에서 유정과 무정(無情)을 분별하지 
   말 것을 권고한 이통현의『신화엄경론』의 문장을 그대로 전재한 점을 무시한 
   것이다. 이덕진의 주장에 대해서는 ‘성기’라는 말이 보통 부처의 본성이 삼라만
   상에 미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점을 근거로 “적어도『원돈성불론』의 저자는 
   이러한 일반적인 의미와 다른 뜻으로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 아닌가?”라는 반론
   을 제기할 수 있다. 김천학, 「지눌의 이통현 화엄사상 수용과 변용―『원 돈성불
   론』을 중심으로」,『보조사상』33 (2010), p.178; 이덕진, 「지눌의 성기설에 
   대한 일고찰―중국 화엄 교학과 연관하여―」,『보조사상』13 (2000), pp.395,
   402-405.
7) 권기종, 「지눌 사상의 재조명: 지눌을 다시 만나다」,『보조사상』31 (2009), pp.16-17.
8) 최연식, 「신라 및 고려시대 화엄학 문헌의 성격과 내용」,『불교학보』 60 (2011), p.237.

 

본 논문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기존의 연구 성과들을 검토하고, 

화엄 전통 내의 다양한 연기 사상의 양상을 포괄적으로 밝히고자 한다. 

특히 중국 화엄에서 방계 내지 이단으로 취급받았던 이통현(李通玄, 635

-730)이 삼승(三乘), 곧 화엄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대승불교 사상 

일반의 연기를 인과이시(因果異時)로 규정하면서 일승(一乘), 곧 화엄의 

연기론으로 제시한 인과동시(因果同時)의 이론이 다른 ‘정통’ 화엄가들의 

입장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고,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화엄경문답』에 나타난 연기와 성기에 대한 입장들을 재검토하고자 

한다.『화엄경문답』의 경우 기존 연구들은 이 저작에 나타난 의상 

내지 의상계 화엄가들의 입장을 성기와 연기 또는 일승과 삼승과의 

대비라는 키워드로 파악하려 하였지만, 그러한 간단한 개념 규정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교학적, 실천론적 함축을 찾을 수 있으므로 이 역시 화엄 

교학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먼저 연기 개념의 역사적 흐름에 대한 간단한 개관을 통

해 화엄 특유의 연기 개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Ⅱ. 연기 개념의 변용과 화엄의 법계연기 개념

 

우리는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pratītyā-samutpāda)’를 

교의 핵심 개념으로 파악하고, 초기불교에서는 그것이 12연기설로 

시되고, 나아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 이것이 생하므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한다”와 같은 정형화된 4구로 요약되었다는 주장을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이구사 미쓰요시(三枝充悳)는 이 개념이 붓다 재세 당시

에는 오늘날 널리 알려진 12지분(支分)의 체계로서 확립되어 있지 않

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연기와 법(法, dhamma/dharma)을 동일시하

는 사상 역시 후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9) 특

히 그의 두 번째 지적은 불교 문헌의 성립 시기와 관련하여 붓다 자신

의 목소리가 드러난 것은 산문보다는 운문 경전일 것이라는 가정을 전

제로 한 것으로서 초기불교의 사상을 다룰 때 문헌학적으로 보다 신중

한 접근이 요청됨을 강조한 것이다. 그는 또한 연기를 모든 존재자들

의 상호 의존성, 곧 상의성(相依性)과 동일시하는 우이 하쿠주(宇井伯

壽) 등의 주장에 대해서도 그러한 입장은 용수(龍樹, Nāgārjuna)에 의

해서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언급하며 비판을 가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는 초기불교의 연기 사상이 다소 혼란스럽긴 하지만 인과 관계를 구성

하는 각 지분들이 시간적으로 선・후의 관계에 놓여 있으며 비가역적

(非可逆的)이라고 보는 입장은 일관되었음을 강조하였다.10) 그는 이어

이러한 사상이 업과 윤회 개념과 결부되어 부파불교 시기에는 업감(業

感) 연기설로 발전하였는데, 이 시기부터 이전의 이시인과를 전제로

하는 연기 개념과 달리 한 순간에 모든 연기의 지분이 갖추어져 있다

는 사상이 출현하여 이른바 동시인과의 개념 내지 위에 언급한 상의성

으로서의 연기 개념에 근접하게 되었고, 그것은 용수에 의해 아비달마

의 실체론(svabhāva-vāda)에 대한 논리적 비판을 거쳐 공(空, śūnya)

의 논리를 통해 명료하게 제시되었다고 주장하였다.11)

9)   三枝充悳, 『緣起の思想』(京都: 法藏館, 2000), pp.12-13.
10)   위의 책, p.14. 
11)   위의 책, pp.17-22

 

동아시아의 불교 전통은 이러한 공으로서의 연기 개념이 변용되어

간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라이(Whalen Lai)에 따르면 인도의 중관학

파(Mādhyamika)에서는 용수 이후 존재들의 상호 의존 관계 그 자체를

실재(實在)와 동일시하고 그러한 인식을 공관(空觀)으로서 정립하였

는데, 그러한 사상은 중국불교에서는 삼론종과 천태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한대(漢代) 이후 성행한 본말론(本末論)과 유기체적 세계관으

로 인해 중국인들은 인과의 연쇄를 구성하는 대상들 간의 시간적・조건

적 관계보다는 발생의 근원에 대한 더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연기’라는

술어를 ‘유래(由來)’의 의미로 느슨하게 사용하였고, 그 결과 실상종과 

연기종, 그리고 유식(唯識)과 유심(唯心)의 구분이 생겨났으며, 그것

이 나중에 화엄에 의해 통합되었다.12) 그의 이러한 분석은 엄밀한 문헌

학적 분석에 근거한 것은 아니지만, 중국적 세계관이 인도불교의 연기

개념을 수용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해하는 데 유용한 통

찰을 제공한다.

12)  Whalen Lai, “Chinese Buddhist Causation Theories: An Analysis of the Sinitic 
    Mahāyana Understanding of Pratītya-samutpāda,” Philosophy East and West 
    27, no. 3, pp.244-248. 여기에서 라이는 중국의 불교 종파들을 실상종(noumenal 
    schools)과 연기종(causative schools)으로 대별하고 삼론종과 천태종을 전자에, 
    법상종과 비담종 을 후자에 배대하면서 전자는 절대적 본체를 드러내고 후자는 현
    상의 인과를 밝히는 것이라고 구분한다. 나아가 그는 전자에 속하는 선종은 ‘유심’
    의 실상을 보이며, 후자 에 속하는 법상종은 ‘유식’의 연기를 드러내는데, 이 양자
    가 나중에 화엄의 ‘유심연기’, 곧 성기에 의해 통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어 1) 업감연기, 2) 아뢰야(阿賴耶, ālaya-vijñāna)연기, 3)

진여(眞如, tathātā)연기, 4) 법계(法界, dharma-dhātu)연기의 4종 연

기설을 제시한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특히 화엄 교학에서 논의된 3)과 4)의 연기 개념은 중국불교에만 있

는 독특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진여연기의 ‘진여’는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인도의 여래장 계통 경전

들에서는 생사와 열반의 의지(依止), 곧 그것에 대한 인식론적 근거 정

도로만 간주되었다. 그러나 중국불교에서 이 개념은 만물의 발생론적

근원을 궁구하는 유기체적 세계관과 결합하고『대승기신론』(이하 『기

신론』)에 등장하는 물과 파도의 비유[水波喩]에 힌트를 얻어 그 의미

가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으로 확장되었다.13)

13)   위의 논문, pp.249-251.

 

법장은『대승기신론의기』에서 이러한 진여연기에 기반한 사상을 

‘여래장연기종(如來藏緣起宗)’으로 부르면서 이를 화엄의 이사무애

(理事無礙)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가 제시한 것은 4

종 교판(敎判)인데, 1) 현상 세계의 존재, 곧 사법계(事法界)에 집착하

는 소승의 수상법집종(隨相法執宗), 2) 공관을 통해 이법계(理法界)

를 드러내는 반야 계통의 진공무상종(眞空無相宗), 3) 공의 이치를 드

러내기는 하지만 차별상에 머물고 마는 유식법상종(唯識法相宗)에 이

어 4) 현상과 실재 또는 이치의 자재한 융통, 곧 이사무애를 드러내는

『기신론』의 여래장연기종을 궁극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하고 있다.14) 다

른 한편으로 그는 이 책에서 불변과 수연 개념을 각각『기신론』의 일

심(一心)의 진여문과 생멸문에 배대하고, 수연은 다시 생멸문의 알라

야식의 각(覺)과 불각(不覺)을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15)

14)『  大乘起信論義記』 권1(『大正藏』 44, 243b22-c4), “第二隨敎辨宗者. 現今東流
    一切經 論, 通大小乘, 宗途有四. 一隨相法執宗, 卽小乘諸部是也, 二眞空無相宗, 卽般
    若等經, 中觀等論所說是也, 三唯識法相宗, 卽解深密等經, 瑜伽等論所說是也, 四如來
    藏緣起宗, 卽楞伽密嚴等經, 起信寶性等論所說是也. 此四之中, 初則隨事執相說, 二則
    會事顯理說, 三則依理起事差別說, 四則理事融通無礙說, 以此宗中許如來藏隨緣成阿
    賴耶識, 此則 理徹於事也, 亦許依他緣起無性同如, 此則事徹於理也.” 
15)『大乘起信論義記』권2(『大正藏』 44, 256a15-20), “問此中一識有二義, 與上一心
    有 二門何別耶. 答上一心中含於二義, 謂不守自性隨緣義, 及不變自性絶相義. 今此但就 
    隨緣門中染淨理事無二之相明此識也. 是則前一心義寬該收於二門, 此一識義陜局在於 一門.” 

 

그런데 그의 초기 저작인『화엄일승교의분제장』(이하 『오교장』)

에서는 이와 달리 소승교, 대승시교, 대승종교, 돈교, 원교의 5종 교판

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 「소전차별(所詮差別)」장의 “불과의상(佛果義

相)”에서『기신론』의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진여가 가진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을 대승종교에서 말하는 법신의 상(常)과 무상(無常)의 두 

측면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16) 또한 그는 「의리분제(義理分齊)」

장의 “삼성동이의(三性同異義)”에서 유식학파의 원성실성[眞如], 의

타기성[依他], 변계소집성[所執]에 각각 변하지 않음[不變]과 조건을

따름[隨緣],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음[無性]과 현상으로서 존재함

[似有], 이치로서는 없음[理無]과 망정(妄情)으로서는 있음[情有]의

두 가지 뜻이 있고 각 항들이 서로 대응됨을 밝혀 대승시교인 유식의

교리를 원교, 곧 화엄의 교리에 흡수시켜 버린다.17) 이를 통해 유식의

삼분설은 존재와 변화라는 현상[事]과 불변의 공한 원리[理]를 상정

하는 화엄의 이분설 아래 놓이게 되었다.

16)『  華嚴一乘敎義分齊章』 권3(『大正藏』 45, 496c29-497a24), “若依終敎有二義, 
    先別明 後總說, 別中修生功德是無常, 以修生故, 亦卽是常, 一得已後同眞如故. 何以
    故. 本從眞 流故, 無明已盡還歸眞體故. 梁攝論云, 無不從此法身流, 無不還證此法身
    等, 寶性論起 信論等盛立此義, 如彼應知. … 法身是常, 以隨緣時不變自性故. 亦是無
    常, 以隨染緣赴 機故. 何以故. 以諸功德旣並同是眞, 是故起用唯是眞作故. 起信論中, 
    釋報化二身唯屬 眞如用大攝. 又論云, 衆生心淨法身影現等. 又云, 復次本覺隨染分別
    生二種相, 與彼本 覺不相捨離. 謂一者智淨相, 二者不思議業相, 乃至廣說等. 二總說者, 
    由此法身隨緣義 故, 是故功德差別得成, 由不變義故. 是故功德無不卽眞, 如擧體隨緣
    全相不變, 二義鎔 融無障礙故, 是故佛果卽常卽無常, 具足四句或非四句, 隨義應知.” 
17)『華嚴一乘敎義分齊章』권4(『大正藏』 45, 499a9-23), “第十義理分齊者有四門. 
    一三 性同異義. … 初三性同異說有二門, 先別明後總說, 別中亦二, 先直說後決擇. 
    前中三性 各有二義. 眞中二義者, 一不變義, 二隨緣義. 依他二義者, 一似有義, 二無
    性義. 所執中 二義者, 一情有義, 二理無義. 由眞中不變・依他無性・所執理無, 由此
    三義故, 三性一際 同無異也, 此則不壞末而常本也. … 又約眞如隨緣・依他似有・所
    執情有, 由此三義亦無 異也, 此則不動本而常末也. … 由此三義與前三義是不二門也, 
    是故眞該妄末妄徹眞源, 性相通融無障無礙.”

 

이상으로부터 법장의 저작에 보이는 진여연기는 다분히 종파적 의

도를 가지고 설정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이처럼『기신론』으로

대표되는 진여연기를『화엄경』의 궁극적인 가르침과 대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당시 현장(玄奘, 602-664)을 중심으로 성행한 법상종

의 유식 철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가 이러한 진여/여래장연기가 가지는 한계를 자각했으리라

는 추정도 가능하다. 법장의 저작에는 진여연기를 포함한 삼승의 연기

와 법계연기를 뚜렷이 구분하고 있는 부분이 자주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여연기는 현상계가 보편적 원리(불성, 공)에 근거하

고 있음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개별적인 사물들 하나하나가 그러한 원

리를 완전히 구현하고 있으며 현상계 안에서 모두가 대등하고[相卽]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는[相入] 과정이 무한히[無盡] 이루어지고 있음

을 곧바로 보이는 가르침, 곧 화엄 일승의 법계연기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평가절하 되는 것이다.

 

법장이 법계연기를 최초로 논한 곳은『오교장』 「의리분제」장의 “십

현연기무애법(十玄緣起無礙法)”인데,18) 여기에서 법계연기는 1) 궁

극적인 부처의 깨달음의 영역으로서[究竟果證] 어떠한 가르침과도

상응하지 않으며[不與敎相應] 언표 불가능한[不可說] 십불(十佛)의

경계와 2) 조건에 따라 수행하는 인위(因位)와 관련된 가르침[隨緣

約因辯敎]으로서 언표 가능한[可說] 보현보살의 경계로 구분된다.19)

엄밀히 말해서 전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념 규정도 불가능하므로,

법장이『오교장』에서 설정한 십현문은 후자의 영역에 한정되고 상대

적인 현상 세계의 실상을 깨달은 이의 관점에서 논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8) 吉津宜英, 「法藏の法界緣起說の形成と變容」, 平川彰博士古稀記念會 編,『佛敎思想の 
    諸問題: 平川彰博士古稀記念論集』(東京: 春秋社, 1985), p.272. 
19)『  華嚴一乘敎義分齊章』권4(『大正藏』45, 503a16-25), “十玄緣起無礙法門義. 
    夫法界 緣起, 乃自在無窮.今以要門略攝爲二. 一者明究竟果證義, 卽十佛自境界也. 
    二者隨緣約 因辯敎義, 卽普賢境界也. 初義者, 圓融自在, 一卽一切一切卽一, 不可
    說其狀相耳. 如華 嚴經中究竟果分國土海及十佛自體融義等者, 卽其事也. 不論因
    陀羅及微細等, 此當不 可說義. 何以故. 不與敎相應故. 地論云, 因分可說果分不可
    說者, 卽其事也.”

 

이러한 법계연기는 보통 ‘사사무애(事事無礙)’ 또는 ‘중중무진’이라

는 용어와 함께 쓰이는데, 이시이 고세이(石井公成)가 지적한 것처럼

전자는 법장의 저작에 보이지 않으므로,20) 후자를 분석하는 것이 초기

화엄의 연기 개념을 이해하는 데 보다 적합할 것이다.

20) 화엄 교학의 집성자로 알려진 법장의 저작에는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법계, 사사무애
    법계의 분류는 등장하지 않는다. 石井公成, 「「事事無礙」を說いたのは誰か」, 『インド
    學佛敎學硏究』44, no. 2 (1996), p.583.

 

그에 따르면 중중무진, 곧 ‘무궁(無窮)’이라는 개념은 원래 무한소급

이라는 논리적 오류를 내포하므로 불교 인명학에서 배척되었으나, 법

장은『오교장』 「의리분제」의 “십현연기무애법”에서 다음과 같이 삼승

의 가르침과 대비하여 일승이 뛰어난 근거로서 ‘무궁’을 들고 있다.21)

21) 石井公成, 「無窮から法爾へ華嚴五敎章の緣起說」, 平川彰博士古稀記念會 編,『佛敎思想
    の諸問題: 平川彰博士古稀記念論集』(東京: 春秋社, 1985), p.285.

 

"삼승은 다만 그 근기를 따를 뿐이어서 모든 부처의 십신 자체의 경계를

드러내지 못하고, 부처 몸을 나타내지도 못한다. 또한 조그마한 근기에

따라 한 가지 모습, 한 가지 고요함, 한 가지 맛의 이치 등을 보일 뿐, 끝

까지 다 설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삼승은 무궁을 오류로 여기기 때문이

다. 그러나 이 일승은 무궁을 진실된 덕으로 여긴다. 또 경전에는 “한 세

계에서 일승을 설하는 것을 듣거나 또는 이, 삼, 사, 오, 내지 무량승에 이

른다”라고 하는데, 이는 근본과 말단의 나뉨에 의거하여 말한 것일 뿐이

다. 성스러운 가르침의 글과 뜻은 밝게 드러나는데, 집착하는 마음을 가

지고서 (이런 말을 듣고) 놀라거나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22)

22)『華嚴一乘敎義分齊章』권4(『大正藏』45, 507b25-c3), “三乘但隨機而已, 未顯諸佛 
    十身自境界故, 非現佛身. 又隨機少說一相一寂一味理等, 非窮盡說也. 何以故. 三乘以 
    此無窮爲過失故. 然此一乘以無窮爲實德故耳. 又此經云, 於一世界中, 聞說一乘者, 或 
    二三四五乃至無量乘. 此據本末分齊說耳, 聖敎文義顯然, 不可以執情而驚怪者矣.”

 

이 구절은 십현연기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나오는데,

여기에서 화엄 일승의 특징으로 언급된 ‘무궁’ 개념은 그 앞에 나오는

“연기인문육의(緣起因門六義)”에 언급된 상즉(相卽)과 상입(相入)의

원리, 그리고 동체(同體)와 이체(異體)의 개념에 기초하여 도입되며,

법장은 위에서와 마찬가지로 삼승과 일승을 대비하여 그 설명을 다음

과 같이 마무리한다.

 

"삼승에서 논하는 알라야식과 여래장과 같이 실체를 가지지 않는 원인

[因]의 경우에는 (원인의) 여섯 가지 뜻의 명칭과 의미는 있지만, 주체

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主伴]의 (원융함은) 다 갖추지 못하였다. 일승의

보현의 원만한 원인의 경우 주체적인 것과 종속적인 것을 다 갖추어 다

함없는 연기가 마침내 완전히 이루어져 있다. 또 공(空)과 유(有)의 뜻

으로 인해 상즉문이 있고, 힘이 있음[有力]과 힘이 없음[無力]의 뜻으로

인해 상입문이 있다. 조건을 기다림[待緣]과 조건을 기다리지 않음[不待

緣]의 뜻으로 인해 동체와 이체문이 있다. 이러한 뜻으로 인해 털구멍 속

에 세계의 모든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으니 생각해 보면 알 것이다.23)

23)『  華嚴一乘敎義分齊章』권4(『大正藏』 45, 503a9-16), “若三乘賴耶識如來藏法
    無我因 中, 有六義名義, 而主伴未具. 若一乘普賢圓因中, 具足主伴無盡緣起方究竟也. 
    又由空 有義故, 有相卽門也. 由有力無力義故, 有相入門也. 由有待緣不待緣義故, 有
    同體異體 門也. 由有此等義門故, 得毛孔容刹海事也. 思之可解.” 

 

이 단락에 대한 설명은 “연기인문육의” 전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

을 요하지만, 여기에서는 이시이 고세이의 분석을 요약해서 소개하

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그에 따르면 1) 어떤 인과 관계에서 하나

의 원인[因, hetu]이 상응하는 결과[果, phala]를 발생시킨다면 그 원

인은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 결과가 조건[緣,

pratiyaya]으로부터 생겨난다면 그 원인은 ‘공하다’라고 보아야 한다.

이 때 공한 조건은 존재하는 원인과 같아지고 반대로 공한 원인은 존

재하는 조건과 같아져서 상즉의 원리가 성립한다. 2) 어떤 결과를 발

생시키는 힘이 어느 한 쪽에 있다고 볼 경우 나머지 것들은 힘이 없다

고 보아야 하므로, 후자는 전자에 포섭되어 상입의 원리가 성립한다.

3) 어떤 결과를 발생시키는 데 있어 다른 조건에 의지하지 않을 경우

한 개체에 그와 관계를 맺은 다른 개체들이 다 구비되어 있다고 보아

야 하므로 후자는 전자에 대해 한 몸이 되어 동체문의 원리가 성립하

고, 그렇지 않을 경우 이체문이 설정된다. 4) 동체문의 경우 하나가 다

른 모든 것과 관계 맺은 것들을 포함할 때 그 하나는 다시 그것과 관계

맺은 것들을 포함하므로 하나 속에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겹쳐지게 된

다.24)

24)   石井公成, 앞의 논문, pp.291-296.

 

이상의 설명을 통해 법계연기의 ‘중중무진’이라는 개념이 상당히 추

상적이고, 복잡한 논리적 장치에 의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무진’이라는 개념은 화엄가들이 소의 경전으로 삼았던

『화엄경』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가? 이에 대해 기무라 기요타카는

화엄 교학의 개념들은『화엄경』자체의 취지에서 볼 때는 반드시 중요

하다고 볼 수 없는 구절에 대해 이들 사상가들이 주의를 기울여 추상

화낸 측면이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25) 여기에서 “『화엄경』자체의 취

지”는 세간과 항상 함께 하는 부처의 모습을 수행자들이 내면화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위한 적극적인 실천(보현행)에 매진케 하려는 것이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

다”와 “하나 속에 일체가 들어있고, 일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와 같

은 문장들은『화엄경』자체의 문맥에서는 하나의 현상적 사물이 절대

적 진리를 구현하고 있음을 인식하거나 같거나 다른 모습에 동요하지

않는 보살의 정신적 경지를 나타내는 데 그치고 있으므로26) 경전의 궁

극적 취지를 충분히 구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엄 교학에서는 이 문장들이 위에서 언급한 무진연기로서

의 법계연기의 핵심적 원리인 상즉과 상입을 설명하기 위한 경전적 근

거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25) 木村淸孝, 앞의 논문, p.271. 
26)『  大方廣佛華嚴經』권5(『大正藏』 9, 423a1-2), “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展轉生
    非實, 智者無所畏.”; 『大方廣佛華嚴經』 권8(『大正藏』 9, 448b16-17), “若一卽多
    多卽一, 義 味寂滅悉平等, 遠離一異顚倒相, 是名菩薩不退住.” 

 

이와 같이 탈맥락적으로 법계연기의 설시를 위해 사용된 개념들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화엄에 대해 추상적이고 이론 지향적이라는 인

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이러한 개념들을 표현한 사변적인 언어

는 그것을 통해 동적인 세계상을 그려보고자 하는 경전 본래의 의도를

살리지 못한 채 법계연기를 정적인 틀에 가두어 두고 말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Ⅲ. 인과동시로서의 일승 연기

 

위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개념의 형성 과정과 그 문제점을 비판했는

데, 이 개념은 다른 한편으로 인과동시로 규정되기도 한다. 다음은『오

교장』 「의리분제」의 “육상원융의(六相圓融義)”를 논하는 대목에 나온

법계연기에 대한 설명이다.

 

"이 가르침은 일승 원교의 법계연기의 다함없는 완전한 융통[無盡圓融],

자재한 상호 동일성[自在相卽], 걸림 없는 용융[無礙鎔融] 내지 인다라

망의 끝없는 이치와 현상[無窮理事]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이 뜻

이 나타날 때 모든 의혹과 장애는 하나가 끊어질 때 일체가 끊어지고 9

세와 10세의 의혹이 소멸할 것이다. 실천의 덕용에 있어서는 하나가 이

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고, 이치의 본성에 있어서는 하나가 나타나면

일체가 나타날 것이다. 아울러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이 완전히 갖

추어지고 처음과 끝이 모두 고르게 되어서 처음 발심할 때에 곧 바른 깨

달음을 얻으니, 참으로 이러한 법계연기의 여섯 모습[六相]이 일체화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동시이며 서로 같아 자재롭고 역

(逆)과 순(順)을 다 갖추고 있다. 여기에서 ‘원인’은 곧 보현의 이해와 실

천이며, 깨달아 들어간 ‘결과’는 곧 열 부처의 경계로서 그 나타난 바가

무궁하니, 자세한 내용은『화엄경』에 설해진 것과 같다."27)

27)『華嚴一乘敎義分齊章』권4(『大正藏』 45, 507c10-19), “此敎爲顯一乘圓敎法界
    緣起 無盡圓融自在相卽無礙鎔融乃至因陀羅無窮理事等. 此義現前一切惑障, 一斷一
    切斷, 得九世十世惑滅, 行德卽一成一切成, 理性卽一顯一切顯, 並普別具足始終皆齊, 
    初發心 時便成正覺. 良由如是法界緣起六相鎔融, 因果同時相卽自在具足逆順, 因卽
    普賢解行, 及以證入果卽十佛境界所顯無窮, 廣如華嚴經說.” 

 

이것은 육상원융의 가르침이 일어난 뜻[敎興意]을 밝히는 맥락에서

동시인과를 설명한 것인데, 비록 실천 수행을 언급하고 인드라망의 비

유를 들고는 있지만 다소 추상적인 설명임을 알 수 있다. 왜 하나가 여

럿과 같으며, 왜 하나의 번뇌를 끊으면 나머지 모든 번뇌가 다 끊어지

는가, 그리고 왜 처음의 발심이 수행의 완성과 동일한가, 나아가 일승

의 수행자는 왜 그렇게 보아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는 충분한 해명이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장은 이러한 중요한 수행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총상(總相), 별상(別相) 등의 개념들을 도입하고 그러한 여

섯 범주[六相]들이 동시에 이루어짐을 보임으로써, 그리고 집과 서까

래 등의 비유를 듦으로써 설명을 대신하고 있다. 결국은 실천과 관련

된 논란을 새로운 이론를 통해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와 동시대인이면서 거사(居士)로서 보다 실천적인 화엄

철학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이통현은 법장과 달리 새로운 교리의 도

입 없이 중관 철학과 유사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인과동시와 반대되는

입장인 인과이시 또는 인과전후(前後)라는 틀에 내재된 모순을 보임

으로써 인과동시의 타당성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만약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뒤에 온다면 원인이 성립하지 않을 경우 결

과 또한 파괴될 것이다. (이 경우) 조건에 의해 이루어진 존재들은 서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처럼) 끊어져 소멸할 경우 자신과 다른 것들

(의 구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하나의 동전을 세고 뒤의 동

전을 세지 않는 경우와 같다. 뒤의 두 번째 (동전이) 없으면 첫 번째도 성

립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해서) 찰나라는 것은 (다음 찰나와) 서로 이어

지지 않는다. (한) 찰나에 존재하는 원인이 성립하지 않으면 (다음 찰나

의) 결과도 파괴된다. (찰나가 그러한 것처럼) 다겁(多劫) 또한 서로 이

어지지 않는다. 다겁에 존재하는 원인과 결과도 파괴된다. 뒤의 동전을

세어야만 앞의 첫 번째 (동전이) 비로소 성립한다. 원인과 결과도 마찬

가지이다. 하나의 시간이 끊어짐 없이 이어질 때 원인과 결과가 비로소

성립한다."28)

28)『新華嚴經論』권4(『大正藏』 36, 740b19-24), “若先因後果者, 因亦不成故果亦壞也, 
    緣生之法不相續故, 卽斷滅故, 自他不成故. 如數一錢不數後錢, 無後二者一亦不成. 爲 刹
    那不相續, 刹那因不成果亦壞, 多劫不相續, 多劫因果壞. 要待數後錢時前一始成. 因 果亦
    爾, 要待一時中無間者, 因果始成.”

 

이 단락은 이통현이『화엄경』이 어떤 점에서 뛰어난지를 열 가지 측

면에서 밝히는 부분 중 네 번째인 「시인원과만별(示因圓果滿別)」에

포함되어 있는데, 방편적 가르침[權敎]인 다른 경전들이 3아승지겁 동

안 수행을 하여 그 수행이라는 원인에 상응하는 상이한 과보를 결과로

서 받는다는 이론을 제시하는 것과 달리 진실을 바로 보이는 가르침

[實敎]인『화엄경』은 일념에 법계를 단박 깨닫게 되는 법문[一念頓證

法界法門]임을 강조하고 있다. 후자의 관점에서는 원인이 곧 결과이

므로[卽因卽果],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뒤따른다거나[先因後果] 어떤

원인에 의해 무엇인가가 얻어진다는 것[可得因果]은 방편적인 가르침

일 뿐, 궁극적인 교설이 아니다.29) 여기에서 이통현이 이러한 전제로부

터 인과동시의 타당성을 보이는 과정에 동원한 논리가 용수의『중론』

과 유사하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30) 위에 언급된 권교의 수행론은 우

리의 상식적 견해와 유사한데, 이에 따르면 원인은 결과에 선행하고

결과로부터 독립적이다. 그러나 원인이 원인으로서 의미를 가지기 위

해서는 그것과 연관된 결과가 알려져야 되며, 그렇기 때문에 한 찰나

에 한정해서 그것을 원인 또는 결과라고 상정하는 것은 순전히 자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통현은 나아가 ‘찰나’라는 개념을 인과에 도입

하게 될 경우 계속해서 찰나와 찰나 사이의 또 다른 찰나를 상정하게

되고 결국 인과의 연속성을 해치게 된다는 점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29)『  新華嚴經論』권4(『大正藏』36, 740a24-b19), “三從凡十住初心創證隨緣運用
    所成果者, 卽華嚴經是也. … 又如化佛所施因果敎行, 定經三僧祇所有佛功德總是修
    生, 百劫修 相好業. … 一一因果屬對相似具足, 仍對治種種法門, 始得見性成佛. 如
    華嚴經卽不然, 一念頓證法界法門. … 卽因卽果, 以此普門法界理智諸障自無, 無別
    對治別修別斷, 不見 變化. 變與不變無異性相故, 普觀一切無非法門, 無非解脫. … 
    是故餘敎先因後果, 不同 此敎因果同時, 爲法性智海中因果不可得故, 爲不可得中因
    果同時無有障礙也, 可得因 果卽有前後, 有所得者皆是無常, 非究竟說也.” 
30)『  중론』 「관인연품」의 다음 게송(특히 밑줄 그은 부분)과 비교해 보라.『中論』
    권1(『大 正藏』 30, 2c20-21), “결과는 조건에 대해서 선행하여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 다고도 할 수 없다. 선행하여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조건이 될 것이며, 선 행하여 존재한다면 조건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果先於
    緣中, 有無俱不可, 先無爲 誰緣, 先有何用緣.)” 

 

그렇다면 그와 반대되는 인과동시라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

는가? 이통현은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단지 원인과 결과가 동

일한 찰나에 있는 것을 인과동시로 보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다고 주

장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두 개의 동전을 동시에 세어 전후가 없는 경우와 같

을 것이다. 이 경우 어느 것이 첫 번째이고, 어느 것이 두 번째인가? 두

손가락을 세울 경우 어느 쪽이 원인이고, 어느 쪽이 결과인가? 두 손가락

이 똑같이 마음 작용[心數處, caitta]을 따른다는 사실이 원인이라면, 뒤

따르는 마음 작용은 결과가 될 것이다. 만약 이처럼 전후가 있으면 그 중

간이 있을 것이고, 다시 찰나마다 끊어짐이 있게 될 것이다. 끊어짐이 있

으면 원인과 결과를 성립시킬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동시라면 두 손가락

을 세우는 것과 같아서 앞과 뒤가 없을 터인데 어느 쪽이 원인이고 결과

인지 (하는 앎이)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화엄경』에서 말하는

인과동시라는 것은 전후 및 동시와 관련하여 감각적 소견[情量]으로 집

착한 망상을 떠난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존재,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것, 항상됨, 무상함 등 (관념에) 집착한 인

과를 떠한 것이다. 다만 법의 본체가 (인위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님을

알고, 인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인과’라고 이름한다. 이는 감각으로 세

운 동시 및 전후의 망상이 아닌 것이다."31)

31)『新華嚴經論』권4(『大正藏』 36, 740b24-c4), “若爾者, 如數兩錢同數無前無後, 
    誰爲 一二. 如竪二指誰爲因果. 如二指等隨心數處爲因, 後數爲果. 若是有前有後卽
    有中間者, 還有刹那間斷, 有間斷者不成因果. 若同時者如竪二指無前無後, 誰爲因果, 
    亦皆不成. 如此華嚴經因果同時者, 俱無如是前後及同時情量繫著妄想, 有無俱不俱
    常無常等繫著 因果. 但了法體非所施設, 非因果繫名爲因果, 非情所立同時前後之妄想也.” 

 

위의 인용문은 우리의 상식적인 인과 개념이 시간의 순차적 흘러감

을 전제로 한 것인데, 동시성을 추구하기 위해 이러한 시간 개념만을

버리고 원인과 결과를 추구하는 마음을 그대로 둘 경우 여전히 혼란은

그치지 않을 것임을 보여준다. 이통현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전후에

대한 분별을 엄밀히 정의할 때 그것은 아무런 인과적 연관성을 가지지

않은 찰나 개념으로 환원되어 결국 인과 자체를 논할 수 없게 됨을 상

기시키고 있다. 이시가 되었건 동시가 되었건 “인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인과’로 정의하는 마지막 문장은 인과에 대한 모든 이론적 분석

을 그만두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이통현의 인과동시에 대한 설명은 앞서 살펴본 법

장의 이론과 달리 새로운 개념을 전혀 도입하지 않으면서도 나름의 논

리성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주 사용하는 일진법

계(一眞法界)의 개념은『화엄경』 「광명각품」의 금색세계에 대한 언

급, “일체처문수사리(一切處文殊師利)”라는 표현, 그리고 「입법계품」

에 등장한 일부 보살의 피부색이 금색이라는 기술 등을 상징적으로 해

석하여 정립한 개념으로서32) 중생이 마주하는 세계가 바로 진속(眞

俗)의 구분이 없는 절대적 진리의 세계이자 깨달음의 장임을 보여주려

는 것이다. 이는 분명히 지엄, 법장 등 ‘정통파’의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분석과 체계화와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직

관적이고 상징적인『화엄경』 해석 때문에 그의 사상은 종종 이 세계에

불성의 충만함을 강조하는 성기 사상과 동일시되기도 하는데, 그의 주

저『신화엄경론』에서 ‘성기’가 언급된 경우는 극히 드물고, 자세한 설

명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한 해석은 설득력이 떨어

진다. 그런 점에서 그의 사상을 수용한 지눌의 사상 또한 성기의 관점

에서 분석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32)『大方廣佛華嚴經』권3(『大正藏』10, 62b28 이하), 권68(『大正藏』10, 369a27), 
    권72(『大正藏』10, 394a26-28) 등;『新華嚴經論』권 3(『大正藏』36, 739a27-
    b10),“又經云, 一切處文殊師利, 卽明法身遍也. 所從來國金色世界, 金爲白色其相黃, 
    體白而黃相者, 卽明法身佛性智也. … 若諸菩薩證如是性如是智身, 皆黃色, 爲黃爲福
    慶之色, 無貪嗔恚, 卽有和氣智慈益物之德也. 經云, 應眞菩薩皆眞金色也. 故言文殊
    表一眞法界也.” 참조.

 

Ⅳ. 성기 개념의 출현과 전개 양상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화엄의 연기는 중중무진의 법계연기가 중심

이 되고, 그것은 종종 ‘인과동시’라는 키워드로 부연되기도 한다. 그러

나 법장 이전과 이후의 화엄 사상에는 현상계의 시공간적 사물들이 서

로 동일하며 서로를 포섭하는 것[相卽相入]만을 강조하지 않고 『오교

장』에서 다소 소홀히 다루어진, 여래장 또는 불성(佛性)이 세간에 출

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진여연기의 사상에 오히려 가까워지는 경향

도 존재했다. 이러한 사상을 ‘성기’라 하는데, 그 명칭은 60권본『화엄

경』의 「보왕여래성기품」(이하 「성기품」, 80권본에서는 「여래출현품」)

과 지론종 승려인 혜원(慧遠, 523-592)이 사용한 ‘진성연기(眞性緣

起)’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33)  吉津宜英, 「『華嚴經問答』の[→に]おける性起と緣起の比較について―中國華嚴敎學
    の視點からの檢討―」, 금강대불교문화연구소 편,『화엄경문답을 둘러싼 제문제』(서울: 
    씨아이알, 2013), p.181; Imre Hamar, “The Manifestation of the Absolute in the 
    Phenomenal World: Nature Origination in Huayan Exegesis.” Bulletin de l'Ecolefrançaised'
    Extrême-Orient 94 (2007), p.229.

 

성기의 개념을 체계화한 사람은 법장의 스승인 지엄(智儼, 602-

668)인데, 그는『대방광불화엄경수현분제통지방궤』에서『화엄경』 

십지품」을 해설하면서 법계연기를 범부의 번뇌[凡夫染法]와 부처의

청정한 깨달음[菩提淨分]의 측면으로 양분하고 후자를 본유(本有),

본유수생(本有修生), 수생(修生), 수생본유(修生本有)로 세분한다.34)

34)『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 권 3(『大正藏』 35, 62c25-29), “依大經本, 
    法界緣起乃有衆多, 今以要門略攝爲二. 一約凡夫染法以辨緣起, 二約菩提淨分以明緣
    起. 約淨門者要攝爲四, 一本有, 二本有修生, 三名修生, 第四修生本有.”

 

나아가 그는 본유와 본유수생만을 「성기품」과 관련시키고 있으므로35)

성기는 법계연기 개념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36) 이 중 본유와 본유수

생에 관한 지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35)『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권 3(『大正藏』35, 63a26-29), “上來四義
    於此緣 生理實通有. 若對經分文, 此十番緣生唯有二門, 一修生, 二修生本有. 餘二在
    性起品.” 
36)  平川彰, 「緣起と性起」,『南都佛敎』61/62 (1989), p.21.

 

"‘본유’란 연기의 근본 실체가 언설와 망정를 떠나 법계에 확연히 드러나

삼세에 걸쳐 움직이지 않음을 말한다. 「성기품」에서 “중생의 마음속에

티끌 같은 수의 경전이 있고, 깨달음의 큰 나무가 있어 중생과 성인이 함

께 증득한다”고 하였으니 사람이 증득하기 전과 후가 다르지만, 그 나무

는 달라짐이 없으니 본유(의 불성이 있음)을 알라.

‘본유수생’이란 그런즉 모든 초지 이상의 선(善)[淨品]은 본래 (부처와)

다른 성품이 없는데, 여기에서는 여러 조건들이 새로운 선을 발생시킨다

는 점에 입각한다. 저 조건들에 의거한 것은 곧 망법에 의해 생겨난 참다

운 지혜로서 곧 보현(의 실천행)과 부합한다. 불성의 본체는 본래 분별

이 없고, 닦아서 얻은 지혜 또한 분별이 없다. 따라서 지혜는 이치에 따르

며, 여러 조건들에는 따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수생이 곧 본유를 따르

며, 동일한 성품에서 생겨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성기품」에서

“보리심이 성기이다”라고 말하였다."37)

37)『  大方廣佛華嚴經搜玄分齊通智方軌』권 3(『大正藏』 35, 62c29-63a9), “言本有者, 
    緣起本實體離謂情, 法界顯然三世不動故. 性起云衆生心中有微塵經卷, 有菩提大樹, 衆
    聖共證. 人證前後不同, 其樹不分別異, 故知本有. 言本有修生者, 然諸淨品本無異性, 今
    約諸緣發生新善. 據彼諸緣乃是妄法所發眞智乃合普賢. 性體本無分別, 修智亦無分別,
    故 智順理不順諸緣. 故知修生卽從本有, 同性而發. 故性品云名菩提心爲性起故.”

 

곧 지엄에게 있어서 본유와 본유수생으로서의 성기는 중생들이 시

간을 초월한 여래장을 원리의 차원에서 가지고 있으며, 그 여래장의

지혜가 수행을 통해 나타남을 말한다. 다만, 그는 이러한 성기를 초지

이상의 수행자들에게 한정하고 있는데, 이후 법장 및 징관(澄觀, 738-

839)에 의해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하마르(Imre Hamar)의 분석

38)에 따르면 법장은『탐현기』에서 ‘여래(如來)’의 ‘여’와 ‘래’를 각각 ‘성

(性)’과 ‘기(起)’의 의미로 풀이하여 ‘성기’를 ‘여래’, 곧 중생 구제를 위

해 이 세상에 출현한 부처와 동일시하고39) 이 세상의 모든 대상들에게

그러한 여래의 자비가 미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징관은 한 걸음 더 나

아가 연기와 성기의 구분 자체를 없애 버리는데, 그는 성기, 곧 부처의

출현은 중생이라는 조건을 만나야 성립할 수 있고, 반대로 연기, 곧 어

떤 특정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 역시 실체성[自性]이 없어서 부처의

본성이 나타남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40)

38)  Hamar, 앞의 논문, pp.240-247. 
39)『華嚴經探玄記』권16(『大正藏』35, 405a10-13), “佛性論如來藏品云, 從自性
    住來至 來至得果故名如來. 不改名性, 顯用稱起, 卽如來之性起. 又眞理名如名性, 
    顯用名起名來, 卽如來爲性起.” 
40)『  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권79(『大正藏』36, 615a9-15), “立理卽不相違
    門. 然出 現義亦名緣起, 亦名性起. 若取相說覽緣出現故名緣起, 謂由衆生業感如來
    大悲而出現故. 八相成道從法性生故名性起. 今以從緣無性緣起, 卽名性起. 又淨緣
    起常順於性, 亦名性起故, 云應雖從緣不違性故.”

 

한편, 의상의 강의록으로 알려진『화엄경문답』에도 성기와 연기의

관계에 관한 논의가 전개되는데, 기존 연구들은 지엄이 성기를 연기의

일부로 다룬 것과 달리 의상은 두 개념을 병렬적으로 논하고 있음을

부각시키면서41)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문답

을 들고 있다.42)

41) 장진영, 「연기와 성기의 관계―『화엄경문답』을 중심으로」,『선문화연구』10
    (2011), p.235; 吉津宜英, 앞의 논문(2011), p.192.
42) 이하의 번역은 김상현 역,『교감번역 화엄경문답』(서울: 씨아이알, 2013)을 
    참고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이다.

 

1) 질문: 성기와 연기, 이 두 말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 성기란 곧 자체이니 조건을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연기는 이것

(성기)에 들어가기 위한 가까운 방편이다. 말하자면 존재는 조건으로부

터 발생하지만 실체성이 없으므로 곧 그 존재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여 들어가게 한다. 성기는 그러한 존재의 본성으로서 일어나지 않

음을 본성으로 하므로,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일어남을 삼는 것이다. ……

 

2) 질문: 만약 무분별심에 의지해야만 비로소 본래(의 성품)과 같아져

다름이 없이 (그 본성이) 일어난다고 설한다면 왜 경전에서는 티끌 같은

경전을 비유로 들어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 가운데 저절로 생겨난 지혜

[自然智], 스승 없이 가지게 된 지혜[無師智] 등 성기의 지혜가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까?

대답: 성인은 중생의 성기법을 보기 때문에 이렇게 설한 것이니 무슨 문

제가 있는가?

 

3) 질문: 만약 중생들이 자신의 성기의 지혜를 아직 얻지 못한 때에 먼저

성기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설한다면, 이 성기의 지혜는 연기한 법이 아

니라는 말입니까?

대답: 성인은 그 중생이 나중에 (보리심을) 일으킬 때 (자신이 불성을)

본래 가지고 있음[本有]을 알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중생이 단지 스

스로 (불과를) 이루는 때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 법을 얻는다면 이는 곧 

연기한 법이다.43)

43)『  華嚴經問答』권2(『大正藏』45, 610b17-c18), “問, 性起及緣起, 此二言有何別耶. 
    答, 性起者卽自是言, 不從緣言. 緣起者, 此中入之近方便. 謂法從緣而起, 無自性故, 卽
    其法 不起中令入解之. 其性起者, 卽其法性。卽無起以爲性故, 卽其以不起爲起. / … / 
    問, 若待 無分別心方與本同無異起說者, 何故經中以微塵經卷爲喩, 顯示於衆生無明心
    中有自然 智無師智等性起智乎. 答, 聖人能見衆生性起法故, 如是說, 有何妨也. / 問, 
    若衆生未得 自性起智時中, 先說有性起智者, 此性起智卽非緣起法耶. 答, 聖者卽能見
    其衆生後起時 卽知本有, 故其衆生雖不知自成時而得其法, 卽緣起法也.”

 

인용문 1)에서 의상은 연기를 어디까지나 성기에 들어가기 위한 방

편으로 보고, 성기를 조건에 의해 ‘일어나지 않은 것[不起]’으로 정의

하여 연기와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인용문 2)와 3)에서 질문자는 부

처의 본성이 중생에게 출현하는 것, 곧 성기는 무분별심에 의지하므로

이런 측면에서는 그것은 ‘일어남’으로서 규정된 연기와 어떻게 다른지

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해 의상은 아직 부처의 지혜가 갖추어지지 않은

이들에게는 그것이 연기로 보일 뿐이라고 답변함으로써 연기와 성기

의 대립을 해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44)

44) 장진영은『화엄경문답』에 나타난 의상의 본유, 수생 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하고 
    그가 “성기와 연기의 관계를 고정된 선후와 본말의 관계가 아닌 필요에 따라 그러
    한 것임 을 명확히 하고 있다”고 평가하여 이와 비슷한 결론을 도출하였다. 장진영, 
    앞의 논문, pp.239-243.

 

그렇다면 의상이『화엄경문답』에서 시도한 것은 단지 성기와 연기

개념을 교학 차원에서 부연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가? 이와 관련하

여 위의 문답 직전에 제시된 다음과 같은 문답은 주목할 만하다.

 

4) 질문: 중생의 괴로운 과보는 중생 자신의 악한 마음의 업이 불러들인

것인데, 어찌하여 부처의 자비 때문에 얻은 것이라 합니까?

대답: 중생의 모든 괴로움은 단지 여래장불이 지은 것이니, 그밖에 중생

의 괴로운 과보를 지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 때문에 경에서는 “법이 갖

가지 괴로움을 심었다”고 말한 것이다. ……

 

5) 질문: 이익이 된다는 뜻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중생이 고통을 받는

것이 어떻게 부처의 자비가 됩니까?

대답: 만약 부처가 (중생들이) 고통을 받게 하지 않는다면 그 중생은 고

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반드시 고통을 받게 하여

야 고통을 싫어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으로 인해 중생

의 고통은 곧 부처의 자비 때문에 받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서 말하는 여래장 등은 종교(終敎)에 의거하여 말하는 것이고, 만약 일

승에 의거하면 성기법이 지은 것이 된다.45)

45)『  華嚴經問答』권2(『大正藏』 45, 610b4-16), “問, 衆生苦果以衆生自惡心業所感, 
    云何 佛慈故所得乎. 答, 衆生諸苦但以如來藏佛作, 無餘法能作衆生苦報. 故經云, 法種
    衆苦 也. / … / 問, 益義可爾, 然而其衆生受苦者何佛慈乎. 答, 若佛令不受苦者, 其衆生
    不得厭 苦求樂. 要令受苦方得生厭苦心. 以此義故, 得其衆生苦卽佛慈故令受也. 此言如
    來藏等, 且約終敎等言之, 若一乘者, 卽性起之法作也.” 

 

앞의 1)~3)의 문답이 연기와 성기를 단지 ‘관점’의 차이로 해석하여

그 교리적 대립을 해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위의 4)~5) 두

문답은 실천론과 관련하여 악과 고통의 현실 세계를 불성의 나타남,

곧 성기로 해석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해소한 것이다.

 

그런데 위의 두 문답은 햇빛이 그것을 보지 못하는 맹인에게도 이익

을 준다는『화엄경』 「성기품」의 비유와 관련하여 제시된 것이다. 여기

에서 질문자는 ‘맹인’을 사견(邪見)을 가진 중생의 괴로운 과보를 비유

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은 자신의 업보 때문이지 부처의 출현, 곧 성

기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취지로 묻고 있다. 의상은 이 문제를 여

래장 사상의 입장에서 해명하는데, 마치 기독교에서 신의 존재와 악

의 관련성을 논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을 연상케 한다. 위의 문

답은 또한 법장이 대승종교와 일승별교 또는 원교를 구분하려 했던

것과 달리 두 사상을 회통하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는 점에서도 주의

를 끈다.

 

Ⅴ. 결론

 

이상에서 화엄 교학에서 제시한 연기의 개념들을 개략적으로 살펴

보았다. 초기불교의 12연기가 중생의 고통이 조건에 의지하여 순차적

으로 발생하고 소멸해가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

후의 대승불교에서는 공 개념이 대두됨으로써 현상계의 모든 사물들

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확산되었고 연기의 시간성이 무시되

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화엄 교학은 그러한 연기 사상의 변용 과

정의 정점을 보여주는데, 화엄 사상가들이 제시한 진여연기와 법계연

기의 개념은 사물의 발생론적 근원을 추구하고 현실 긍정적인 동아시

아인들의 사유에 공 개념이 결합하여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법장의 교판과 법계연기 개념에는 화

엄종과 경쟁 관계에 있던 타 종파, 특히 유식의 정치한 개념적 도구들

을 빌어 자종(自宗)의 우월성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

나 있고, 이론을 위한 이론을 개진한 듯한 인상을 준다. 다른 한편으로

1) 법계연기 개념에 내포된 인과동시를 새로운 개념의 도입 없이 중관

의 변증법을 이용하여 증명하려한 이통현의 사례와 2) 성기를 논하면

서 여래장 사상과의 화회를 시도한 의상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화엄가

들의 연기관을 한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 논문의 논의가 결국 연기와 성기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전개되었

으므로 두 개념을 대립적 구도로 설정하여 화엄의 교학을 이해하려는

기존의 틀을 대체했다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의 고찰

을 통해 ‘연기’ 및 ‘성기’가 넓은 의미의 화엄 전통 내에서 결코 단일한

의미로 규정될 수 없음은 확인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앞으로의

연구는 그동안의 종조들의 텍스트만을 분석하는 경향에서 벗어나 이

러한 다양한 화엄 사상의 모습을 규명하고 그 안에 제시된 연기를 비

롯한 여러 개념들이 해탈과 수행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보다 면밀히

탐구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