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1)
해동 조계산사문 지눌 지음
海東 曹溪山沙門 知訥 撰2)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제4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82)에
수록(pp.708b1-714c3)된『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
으로 갑본(甲本)은 성화(成化) 19년(1483) 벽운사(碧雲寺)에서 간행한『목우자
수심결(牧牛子修心訣)』이며, 을본(乙本)은 성화(成化) 3년(1467) 간경도감(刊經
都監)에서 간행한『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의 언해본(諺解本)이며, 병본
(丙本)은 탄허스님이 현토(懸吐)하고 역해(譯解)한『보조법어(普照法語)』(回想
社, 1978)에 수록된『수심결(修心訣)』이며, 정본(丁本)은 보조사상연구원(普照思
想硏究院)에서 펴낸『보조전서(普照全書)』(佛日出版社, 1989)에 수록된『수심결
(修心訣)』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갑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海東曹溪山沙門知訥撰」이라는 문구는 저본의 편집자가 보충해서 넣은 것이
다.(韓4, p.708c) 이 글의 가장 오래된 판본에도 찬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고,
서기(書記)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판본들에서 이 글의 제목에 지
눌스님의 법호인 목우자(牧牛子) 또는 보조국사(普照國師)를 붙이고 있다. 또 이
글의 구성과 내용, 사용된 문체도 지눌스님의 다른 저술과 대체로 유사하다. 이
러한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글은 지눌스님의 저술이라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삼계의 뜨거운 괴로움이 오히려 불타는 집과 같으니,3) 그 참음에 머물러
긴 고통을 달게 받겠는가. 윤회를 면하고자 한다면 부처를 구하는 것 만함
이 없으며, 만약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곧 마음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겠는가. 몸속을 벗어나지 않는다. 색신(色身)4)은 잠깐이어서 태
어남도 있고 죽음도 있지만, 참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온 몸[百骸]은 무너지고 흩어져서 불로 돌아가
고 바람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은 길이 신령스러워서 하늘을 덮고 땅을
덮는다.”5)라고 말한다.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
佛,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不離身中. 色身是假, 有
生有滅,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 “百骸潰散, 歸火歸風, 一
物長靈, 蓋天蓋地.”
3) 삼계를 불타는 집에 비유한 예는『법화경(法華經)』권2의「비유품(譬喩品)」에 나
온다.(大9, pp.10b-16b) 경에서는 장자의 집에 불이 나서 모두 타 없어질 지경인
데, 장자의 아이들은 장난치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집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
지 않는 것을 윤회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중생의 어리석음에 비유하고 있다.
4) 색신(色身, rūpa-kāya)은 물질로서의 신체・육신・육체로, 지(地)・수(水)・화
(火)・풍(風)・공(空) 등의 물질적 요소로 만들어져 있는 육신을 말한다. 이에 반
해서 형체가 없는 법의 몸・지혜의 몸을 법신(法身)・지신(智身)이라고 한다.
5)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20의「홍주천왕원화상
(洪州天王院和尙)」조에 보인다. 즉, “온 몸이 전부 무너져 흩어져도 한 물건은 길
이 신령스럽다는 것이 어떠한 것입니까?”(大51, p.368b24-25. 百骸俱潰散, 一物鎭
長靈, 如何?) 또『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0의「단하화상완주음(丹霞和尙翫
珠吟)」조에서도 비슷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온 몸이 비록 무너지고 흩어
져도 한 물건은 길이 신령스럽다.”(大51, p.463b29-c1. 百骸雖潰散 一物鎭長靈.) 이
외에『대혜어록(大慧語錄)』권8에서도『조주진제선사어록(趙州眞際禪師語錄)』
의 문답을 들어서 법문한 예가 보인다.(大47, p.843b19)
슬프다. 지금 사람들이 미혹하여 온 지 오래라서 자기 마음이 참 부처
인 줄 알지 못하고 자기 성품이 참 법인 줄 알지 못하여, 법을 구하고자 하
면서 멀리 모든 성인에게 미루고 부처를 구하고자 하면서 자기 마음을 관
(觀)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법이 있다’라고
말하며 이 생각을 굳게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비록
티끌만큼 많은 겁을 지내도록 몸을 태우고 팔을 태우며, 뼈를 두드려 골수
를 내며, 찔러서 피를 내어 경을 베끼며, 오래 앉아 눕지 않으며, 한 번 묘시
의 공양만 먹으며,6) 더 나아가 일대장경[一大藏]의 가르침을 모두 읽는 데
이르기까지 갖가지 고행을 닦아도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7)과 같아
서 다만 스스로의 수고로움만 더할 따름이다.
嗟夫. 今之人迷來久矣,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欲
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若言‘心外有佛, 性外有
法,’ 堅執此情, 欲求佛道者, 縱經塵劫, 燒身煉臂, 敲骨出髓,
刺血寫經, 長坐不臥, 一食卯齋, 乃至轉讀一大藏敎, 修種種苦
行, 如蒸沙作飯, 只益自勞爾.
6) ‘한 번 묘시의 공양만 먹는다[一食卯齋]’는 것은 하루 한 끼의 공양을 묘시(卯時
: 오전 5시부터 7시 사이)에 하는 것으로 배고픈 괴로움을 참으며 수행에만 전
념한다는 의미이다. 선문에서는 고행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오래 앉아 눕지 않
는 장좌불와(長座不臥)와 한 번 묘시의 공양만 먹는 일식묘제(一食卯齋)를 쓰
고 있다. 하지만 견성하지 못했거나 도안을 밝히지 못한 사람이 이러한 고행을
닦는다면 결국 외도(外道)의 유위업(有爲業)이 되거나, 업을 짓는 일이 될 뿐이
라고 경계하였다.[『소실육문(小室六門)』(大48, p.376a12) ;『임제록(臨濟錄)』
(大47, p.502a27) 참조.]
7)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은 원효(元曉, 617~686)스님의『발심수행장(發心修行
章)』에서도 보인다. 즉, “지혜 있는 사람의 행하는 바는 쌀을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지혜 없는 사람의 행하는 바는 모래를 삶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韓1, p.841b5. 有智人所行, 如蒸米作飯, 無智人所行, 如蒸沙作飯.)
다만 자기의 마음을 알면 항하사와 같은 법문과 한량없는 미묘한 뜻은
구하지 않아도 얻는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널리 모든 중생을 보니 여래의
지혜와 덕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8)라고 말씀하셨다. 또 “모든 중생의 갖가
지 환(幻) 같은 변화가 모두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미묘한 마음에서 나
왔다.”9)라고 말씀하셨다.
이로써 알아라. 이 마음을 여읜 밖에서는 부처를 이룰 수 없다. 과거의
모든 여래도 단지 마음을 밝힌 사람이었고,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또한 마
음 닦는 사람이며, 미래에 닦고 배울 사람도 마땅히 이와 같은 법을 의지해
야 한다. 원컨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은 결코 밖에서 구하지 말라. 심성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루어졌으니, 다만 허망한 인연만 여
의면 곧 여여한 부처[如如佛]10)이다.11)
但識自心, 恒沙法門, 無量妙義, 不求而得. 故世尊云,“ 普觀
一切衆生, 具有如來智慧德相.” 又云,“ 一切衆生種種幻化, 皆
生如來圓覺妙心.” 是知. 離此心外, 無佛可成. 過去諸如來,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當依
如是法.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
妄緣, 卽如如佛.
9)『원각경(圓覺經)』(大17, p.914a10-11).
10) 여여한 부처[如如佛]는 삼신(三身) 가운데 법신(法身)을 가리키는 것이다.『금광
명최승왕경소(金光明最勝王經疎)』 권2에서는 법신에 ‘법신(法身)・자성신(自性
身)・진실신(眞實身)・여여불(如如佛)・법불(法佛)’ 등의 다섯 가지 이름이 있다
고 하였다. 즉, ‘법신은 자성을 법신이라고 하는데 대공덕의 법이 의지할 바이기
때문이며, 자성신은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거나 하지 않거나 모두 자연스럽기
때문이며, 진실신은 불신에는 진실신(眞實身)과 가명신(假名身)의 둘이 있는 법
신은 진실이기 때문이며, 여여불은 『능가경(楞伽經)』에서 여여불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법불은 진여 자체를 부처[佛]라고 이름하는데 여(如)가 부처님의 몸
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大39, p.208c4-15)
11)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9의「복주고령신찬선사
(福州古靈神贊禪師)」조의 법어에서 보인다. 즉, “신령스런 빛은 홀로 빛나서 육
근과 육진에서 멀리 벗어났으며 본체가 드러남은 참되고 항상하여 문자에 얽매
이지 않는다. 심성은 물듦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하니, 다만 허망한 인연만
벗어버리면 곧 여여한 부처이다.”(大51, p.268a21-22. 靈光獨耀, 逈脫根塵, 體
露眞常, 不拘文字.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1.12)
12) 이 번호는 원문에는 없지만 역주자가 문답을 중심으로 구분하여 [1]부터 [9]까
지 붙인 것이다.
묻는다. 만약 불성이 이 몸에 나타나 있다면, 이미 몸 가운에 있어서 범
부를 여의지 않을 것인데, 무엇으로 인해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석하여 모두 깨닫게 해 주십시오.
問. 若言佛性, 現在此身, 旣在身中, 不離凡夫, 因何我今, 不
見佛性? 更爲消釋, 悉令開悟.
답한다. 그대의 몸 가운데 있지만 그대가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대는 하
루 열두 때[十二時]13) 가운데 배고픈 줄 알고 목마른 줄 알며, 추운 줄 알
고 더운 줄 알며, 혹 성내고 혹 기뻐하니 마침내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또
색신(色身)은 땅[地]・물[水]・불[火]・바람[風]의 네 가지 인연이 모인 것
으로 그 바탕은 무디고 생각이 없는데 어찌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겠
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알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
로 임제(臨濟)14)스님이 말하기를, “사대(四大)는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모르고, 허공도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모른다. 단지 그대의 눈앞에 뚜
렷이 홀로 밝아 형용할 수 없는 것이 비로소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
다.”15)라고 하였다. ‘형용할 수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법인
(法印)이며 또한 너의 본래 마음이다. 곧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찌 밖에서 구함을 빌리겠는가.
答. 在汝身中, 汝自不見. 汝於十二時中, 知飢知渴, 知寒知熱,
或嗔或喜, 竟是何物. 且色身, 是地水火風四緣所集, 其質頑而
無情, 豈能見聞覺知. 能見聞覺知者, 必是汝佛性. 故臨濟云,
“四大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只汝目前, 歷歷孤
明, 勿形段者, 始解說法聽法.” 所謂勿形段者, 是諸佛之法印,
亦是汝本來心也. 則佛性現在汝身, 何假外求.
13) 열두 때[十二時]는 하루 종일, 즉 24시간 전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열두 간지(干支)의 차례에 따라 두 시간 단위로 하루를 열두 때로 구분하고 있
으므로, 열두 때는 하루 종일을 가리킨다.
14) 임제(臨濟)는 임제의현(臨濟義玄, ?~867)을 가리키며, 중국 임제종(臨濟宗)의
조사이다. 당나라 조주 남화(南華) 사람으로 속성은 형(邢)씨이다. 황벽희운(黃
蘗希運, ?~850)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하북 진주의 임제원(臨濟院)에 머물
며 법을 펼쳤다. 임제스님의 법어를 모은『임제록(臨濟錄)』이 전한다.[『경덕전
등록(景德傳燈錄)』권12의 「진주임제의현(鎭州臨濟義玄)」(大51, pp.290a18-291a19)
참조.]
15) 이 부분은 『임제록(臨濟錄)』의 다음 내용을 간추려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스님은 만참에서 대중에게 보여 말하셨다. 어떤 때는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
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으며,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 대덕이
여, 여러분은 또한 빛과 그림자를 희롱하는 사람을 알아차려야 한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니 모든 곳이 도를 닦는 무리들이 돌아갈 집이다. 여러분
의 사대로 된 색신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모르며, 비위와 간과 쓸개도 법
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모르며, 허공도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모르니, 이 어
떤 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아는가. 여러분의 눈앞에 분명하고 분명하여
하나인, 형상으로 구분할 수 없는 홀로 밝은 이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만약 이와 같이 볼 수 있다면 바로 부처님・조사와 더불어 다르지 않을 것
이다.”(大47, p.497b26-c02. 師晩參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 有時奪境不奪人,
有時人境俱奪, 有時人境俱不奪. … 大德, 爾且識取弄光影底人. 是諸佛之本源,
一切處, 是道流歸舍處. 是爾四大色身, 不解說法聽法, 脾胃肝膽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是什麽解說法聽法. 是爾目前歷歷底, 勿一箇形段孤明, 是這
箇解說法聽法. 若如是見得, 便與祖佛不別.)
그대가 만약 믿지 못한다면 간략히 옛 성인이 도에 들어간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없애 줄 것이니, 그대는 반드시 진실로 믿어야 한다.
“옛날에 이견왕(異見王)16)이 바라제(婆羅提) 존자께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존자가 말하였다. ‘견성(見性)한 이가 부처입니다.’ 왕이 말하
였다. ‘스님은 견성하셨습니까?’ 존자가 말하였다. ‘저는 불성을 보았습니
다.’ 왕이 말하였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하였다. ‘성품은
작용하는 데에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작용하기에 저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말하였다. ‘지금도 나타나 작용하지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합니다.’ 왕이 말하였다. ‘저에게도 있습니까?’ 존자가 말하
였다. ‘왕께서 만약 작용한다면 이것 아님이 없지만, 왕께서 작용하지 않는
다면 본체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만약 작용할 때라면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가 말하였다. ‘만약 드러나 나타날 때라면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 여덟 군데 나타남을 저를 위해 말해
주십시오.’ 존자가 말하였다. ‘태(胎)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있으면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으면 본다고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다고 하고, 코
에 있으면 향기를 맡는다고 하고, 혀에 있으면 담론한다고 하고, 손에 있으
면 잡는다고 하고, 발에 있으면 움직이고 달린다고 하며, 두루 나타나면 항
하사와 같은 세계를 다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작은 티끌에도 있습
니다. 아는 사람은 이것이 불성인 줄 알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정혼(精
魂)17)이라고 부릅니다.’ 왕이 듣고 마음이 곧 열려 깨달았다.”18)
汝若不信, 略擧古聖入道因緣, 令汝除疑, 汝須諦信.“昔異見
王, 問婆羅提尊者曰.‘ 何者是佛?’ 尊者曰.‘ 見性是佛.’王
曰. ‘師見性否?’ 尊者曰. ‘我見佛性.’ 王曰. ‘性在何處?’
尊者曰.‘ 性在作用.’ 王曰.‘ 是何作用, 我今不見?’ 尊者曰.
‘今現作用, 王自不見.’王曰. ‘於我有否?’ 尊者曰. ‘王若作
用, 無有不是, 王若不用, 體亦難見.’王曰. ‘若當用時, 幾處
出現?’ 尊者曰. ‘若出現時, 當有其八.’王曰. ‘其八出現, 當
爲我說?’ 尊者曰.‘ 在胎曰身, 處世曰人, 在眼曰見, 在耳曰
聞, 在鼻曰辨香, 在舌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徧現俱該沙
界, 收攝在一微塵. 識者, 知是佛性, 不識者, 喚作精魂.’ 王
聞, 心卽開悟.”
16)『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3의「제이십팔조보리달마(第二十八祖菩提達磨)」
에 의하면, 이견왕(異見王)은 보리달마의 조카이며, 대대로 불법을 믿는 가문에
태어났으나 평소에 삼보를 경멸하고 비방함이 심하였다. 그러나 보리달마의 제
자인 바라제 존자의 가르침으로 깨달음을 얻고 이후로는 수행을 그치지 않았
으며, 또 병을 얻어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보리달마의 가르침으로 회복하였다고
한다.(大51, pp.218a11-219a11)
17) 정혼(精魂)은 정령(精靈)・정백(精魄)이라고도 한다. 죽은 사람의 넋, 원시 종교
에서 산천초목・무생물 따위에 붙어 있다고 믿던 혼령, 또는 만물의 근원이 된
다고 하는 불가사의한 기운을 말한다. 여기서는 만물의 근원이 되는 불가사의
한 기운을 가리킨다.
18)『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3,「제이십팔조보리달마(第二十八祖菩提達磨)」(大
51, p.218b10-23).
또 “어떤 스님이 귀종(歸宗)19)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귀종스님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해도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
정이다.’ 그 스님이 말하였다. ‘화상의 진실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
습니까?’ 귀종스님이 말하였다. ‘곧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그 스님이 말하
였다. ‘어떻게 보임(保任)20)합니까?’ 귀종스님이 말하였다. ‘하나의 티끌이
눈에 있으니 허공 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21)라고 하니, 그 스님이 그 말
끝에 깨달음이 있었다.
위에서 열거한 옛 성인들의 도에 들어간 인연은 명백하고 간단하며 쉬워
서 힘을 더는데 방해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공안(公案)으로 인하여 만약
신해하는 곳이 있다면, 곧 옛 성인과 더불어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又“僧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我今向汝道, 恐汝不
信.’ 僧云, ‘和尙誠言,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僧云, ‘如
何保任?’ 師云, ‘一翳在眼, 空華亂墜,’” 其僧, 言下有省. 上
來所擧, 古聖入道因緣, 明白簡易,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
信解處, 卽與古聖, 把手共行.
19) 귀종(歸宗)은 여산 귀종사의 지상(智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경덕전등
록(景德傳燈錄)』 권7의「여산귀종사지상선사(廬山歸宗寺智常禪師)」에 의하면,
귀종사의 지상선사는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법을 이었다고 하며, 그의 생
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스님이 눈에 병이 있어 약을 발랐는데
눈과 눈동자가 모두 붉게 변해서 세상에서 그를 가리켜 적안귀종(赤眼歸宗)이
라고 불렀으며, 입적한 후에는 칙명으로 지진선사(至眞禪師)라는 시호를 내렸
다’고 한다.(大51, pp.255c24-256b19)
20) 보임(保任)은 보호임지(保護任持)를 줄인 말로, 맡아서 간직한다, 온전하게 간직
하여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특히 선에서는 선사가 견성한 뒤 그 깨달
음을 잘 지니어 닦아나가는 것을 가리키며, 흔히 ‘보림’이라고 부른다.『대혜어
록(大慧語錄)』 권2에도 이러한 용례가 보인다. 즉, “몸과 말과 생각이 청정하면
이것을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라고 하고, 몸과 말과 생각이 청정하지
않으면 이것을 부처님이 입멸하신 것이라고 한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위해 이
일을 보임하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다. 자, 그러면 무엇이 이 일인가. 또 무엇이
보임인가.”(大47, p.820a1-3. 身口意淸淨, 是名佛出世, 身口意不淨, 是名佛滅度.
我今爲汝, 保任此事, 終不虛也. 且作麽生是此事. 又作麽生保任.)
21) 이 부분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0의「복주부용산영훈선사(福州芙蓉山
靈訓禪師)」조에 나오는 내용으로, 복주 부용산 영훈선사와 귀종화상과의 문답
을 인용한 것이다.(大51, p.280c23-27) 부용산의 영훈선사는 귀종사(歸宗寺) 지
상(智常)선사의 법을 이었다.
2.
묻는다. 그대가 말한 견성(見性)이 만약 참된 견성이라면 곧 성인이어서
응당 신통 변화를 나타내어 다른 사람들과 다름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 때
문에 요즘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 변화를 나타내는 이가 없습
니까?
問. 汝言見性, 若眞見性, 卽是聖人, 應現神通變化, 與人有殊.
何故, 今時修心之輩, 無有一人, 發現神通變化耶?
답한다. 그대는 경솔하게 미친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삿됨과 바름을
분간하지 못하는, 이것이 미혹하여 전도된 사람이다. 요즘 도를 배우는 사
람들은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은 물러나고 굽히는 생각을 내어
도리어 분수가 없다는 허물에 떨어지는 것이 모두 그대가 의심하는 바이
다. 도를 배우지만 선후를 알지 못하고, 이치를 설하지만 본말을 분간하지
못하는, 이것을 삿된 견해라 하며 닦고 배운다고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잘못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울러 다른 이까지 잘못되게 하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答. 汝不得輕發狂言. 不分邪正, 是爲迷倒之人. 今時學道之
人, 口談眞理, 心生退屈, 返墮無分之失者, 皆汝所疑. 學道而
不知先後, 說理而不分本末者, 是名邪見, 不名修學. 非唯自
誤, 兼亦誤他, 其可不愼歟.
무릇 도에 들어가는 문이 많지만 요점을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
修)의 두 가지 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돈수는 가장 뛰어난 근
기가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만약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
을 깨달음에 의지해 닦아 점점 훈습해 오다가 이번 생에 이르러 들으면 곧
깨달음이 열려 일시에 단박 마친다. 실제로써 말하면 이 또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이다. 곧 이 돈(頓)과 점(漸)의 두 문이 모든 성인들의 법칙
이다. 즉, 위로부터 모든 성인들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 그 닦음으로 인
해 증득하지 않은 이가 없다.
夫入道多門, 以要言之, 不出頓悟漸修兩門耳. 雖曰,‘ 頓悟頓
修, 是最上根機得入也,’若推過去, 已是多生, 依悟而修, 漸
熏而來, 至于今生, 聞卽開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是亦先悟
後修之機也. 則而此頓漸兩門, 是千聖軌轍也. 則從上諸聖, 莫
不先悟後修, 因修乃證.
신통 변화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아 점점 훈습하여 나타나
는 바이며, 깨달았을 때 곧 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경에 이르
기를, “이치로는 곧 단박 깨달음이어서 깨달음을 타고서 아울러 없어지지
만, 현상으로는 단박 없어짐이 아니어서 인하여 차례로 다한다”22)라고 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규봉스님이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뜻을 자세히 밝혀서
말한다. “얼음 연못이 전부 물인 것은 알지만 태양의 기운을 빌려서 녹고, 범
부가 곧 부처인 것은 깨닫지만 법력을 의지하여 익히고 닦는다. 얼음이 녹으
면 물이 흘러 윤택하여 바야흐로 물을 대고 씻는 공을 드러내고, 망념이 다
하면 마음이 신령스럽게 통하여 응당 신통 광명의 작용을 나타낸다.”23)
所言神通變化, 依悟而修, 漸熏所現, 非謂悟時, 卽發現也. 如
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事非頓除, 因次第盡.” 故圭峯,
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借陽氣以鎔消, 悟凡夫
而卽佛, 資法力以熏修. 氷消則水流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
心靈通, 應現通光之用.”
22) 이 구절은『능엄경(楞嚴經)』 권10에 나오는 내용이다.(大19, p.155a8-9) 또『대혜
어록(大慧語錄)』 권22의「시쾌연거사(示快然居士)」(大47, p.903b21-22), 권24의
「시성기의이공(示成機宜李公)」(大47, p.912c1), 권25의「답이참정(答李參政)」(大
47, p.920a12) 등에도 인용되어 있다.
23)『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3,「종남산규봉종밀선사(終南山圭峯宗密禪師)」(大
51, p.307b16-19).
이로써 알아라. 현상으로서의 신통 변화는 하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
니며 점점 훈습하여 발현하는 것이다. 하물며 현상으로서의 신통은 달인의
분상에서는 오히려 요망하고 괴이한 일이며, 또한 성인들의 끄트머리 일이
다. 비록 혹 그것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요긴하게 쓰지 않는다. 요즘 미혹하
여 어리석은 무리들이 망령되게, ‘한 생각 깨달았을 때 곧 따라서 한량없는
미묘한 작용과 신통 변화가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만약 이렇게 이해한다
면, 이른바 선후를 알지 못하고 또한 본말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면서 부처의 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치 모난 나
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다. 어찌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
겠는가. 이미 방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낭떠러지에 매달린 듯한 [어려운]
생각을 짓고 스스로 물러나고 굽히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의 종성(種性)을
끊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 밝히지 못하고 또한 다른 사람이 깨달
은 곳[解悟處]24)이 있다는 것도 믿지 못하여 신통이 없는 사람을 보면 바로
경솔하게 업신여기는 마음을 내어 현인을 속이고 성인을 속이니 진실로 슬
플 따름이다.
是知. 事上神通變化,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況事
上神通, 於達人分上, 猶爲妖怪之事, 亦是聖末邊事. 雖或現
之, 不可要用. 今時迷癡輩, 妄謂一念悟時, 卽隨現無量妙用
神通變化, 若作是解, 所謂不知先後, 亦不分本末也. 旣不知
先後本末, 欲求佛道, 如將方木逗圓孔也. 豈非大錯. 旣不知
方便故, 作懸崖之想, 自生退屈, 斷佛種性者, 不爲不多矣.
自未明, 亦未信他人有解悟處, 見無神通者, 乃生輕慢, 欺賢
誑聖, 良可悲哉.
24) 깨달은 곳[解悟處]은 견성하여 돈오한 곳을 가리키며, 이는 아래 다섯 번째 문답
에서도 나타난다. 즉, “그대가 만약 믿음이 다다름을 얻어서 의심의 생각이 단
박에 쉬어 장부의 뜻을 내고 참되고 바른 견해를 내어 몸소 그 맛을 보아 스스로
자신이 수긍하는 지위에 이르면, 이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깨달은 곳이다. 다시
는 계급과 점차가 없기 때문에 돈(頓)이라고 한다.”(韓4. p.711a7-9. 汝若信得及,
疑情頓息, 出丈夫之志, 發眞正見解, 親嘗其味, 自到自肯之地, 則是爲修心之人, 解悟
處也. 更無階級次第, 故云頓也.) 그러므로 깨달은 곳[解悟處]에서의 해오(解悟)는
최초로 자기의 성품을 깨달은 돈오의 의미로 읽어야 한다.
3.
묻는다. 스님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들의 법칙이다’라고 하
였는데, 깨달음이 이미 단박 깨달음이라면 왜 점차 닦음을 빌리며, 닦음이
점차 닦음이라면 왜 단박 깨달음이라고 말합니까? 돈과 점의 두 가지 뜻을
다시 베풀어 설하시어 남은 의심이 끊어지게 해주십시오.
問. 汝言,‘ 頓悟漸修兩門, 千聖軌轍也,’ 悟旣頓悟, 何假漸修,
修若漸修, 何言頓悟? 頓漸二義, 更爲宣說, 令絶餘疑.
답한다.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할 때에는 사대(四大)를 몸이라 하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
의 신령스러운 앎이 참 부처임을 알지 못하여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
결 따라 떠다니다가, 홀연히 선지식이 들어가는 길을 가리켜 보임을 입어
서 한 생각에 빛을 돌이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 성품은 원
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성(無漏智性)25)이 본래 스스로 구족해서 곧 모든 부
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고 한다.
答. 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性是眞法
身, 不知自己靈知是眞佛, 心外覓佛,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
性, 本自具足,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25) 무루지성(無漏智性)은 중생의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품을 가리킨다.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는 “만일 자신의 마음
이 본래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고 무루지성을 갖추고 있음을 단박에 깨달으
면 이 마음 그대로 부처여서 궁극적으로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大48, p.399b.
若頓悟自心, 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라고
말하고 있다.
점수라는 것은 비록 본래 성품이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깨달았지만 비롯
함이 없는 습기는 갑자기 단박 제거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
하여 닦아서 점차 훈습하는 공덕을 이루고 성인의 태(胎)를 기름이니, 오래
하고 오래하면 성인을 이루기 때문에 점수라고 한다. 비유하면, 어린아이
가 처음 태어난 날에 모든 감관이 구족해 있음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지
만, 그러나 그 힘이 아직 충분하지 못해서 자못 세월이 지나야만 비로소 성
인이 되는 것과 같다.26)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 故依悟
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比如孩
子, 初生之日,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其力未充, 頗經歲月,
方始成人.
26) 이 비유는 종밀(宗密)의『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권2에 보인다. 즉,
“마치 어린아이가 나면 곧 단박에 사지와 육근이 갖추어지지만 성장하면 점점
뜻과 기운과 공업이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大48, p.407c19-20. 如孩子生, 即
頓具四肢六根, 長即漸成志氣功業.) 또 비슷한 내용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13의「종남산규봉종밀선사(終南山圭峯宗密禪師)」조에도 보인다. 즉, “처음
태어난 어린아이가 하루만에 사지와 몸이 이미 완전하지만 점점 닦아 다 자란 성
인같이 되고 여러 해가 되어야 뜻과 기운이 바야흐로 선다.”(大51, p.307b12-13.
如初生孩子, 一日而肢體已全, 漸修如長養成人, 多年而志氣方立.) 따라서 이 법어는
종밀선사의 법어인 것으로 추정된다.
4.
묻는다.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 생각에 근기를 돌이켜 문득 자기의 성품
을 깨닫습니까?
問. 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답한다. 단지 그대 스스로의 마음일 뿐이니, 다시 무슨 방편을 짓겠는가.
만약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알기를 구하는 것은,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
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여겨서 다시 보기를 구하려는 것과 같으
니, 이미 자기의 눈인데 어찌 다시 보려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본 것이다. 다시 보기를 구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찌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는가. 자기의 신령스러운 앎[靈知]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미 자
기의 마음인데 어찌 다시 알기를 구하겠는가. 만약 알기를 구하고자 하면
문득 앎을 얻지 못한다. 다만 알지 못함을 알면 이것이 곧 견성이다.
答. 只汝自心, 更作什麽方便. 若作方便,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如何更見. 若知不
失, 卽爲見眼.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自己靈知, 亦復
如是, 旣是自心, 何更求會. 若欲求會, 便會不得, 但知不會,
是卽見性.
5.
묻는다. 높고 높은 사람은 들으면 곧 쉽게 알지만 중간이나 그 아래의
사람들은 의혹이 없지 않습니다. 다시 방편을 말씀하시어 미혹한 사람들
로 하여금 나아가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問. 上上之人, 聞卽易會, 中下之人, 不無疑惑.27) 更說方便,
令迷者趣入.
27)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답한다. 도는 알고 알지 못하는데 속하지 않는다.28) 그대는 미혹을 지닌
채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버리고 내 말을 들어라. 모든 법은 꿈과 같고
또한 환(幻)같은 변화이다. 그러므로 망념은 본래 고요하고, 티끌 같은 경
계는 본래 공(空)하며,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서 신령스러운 앎은 어둡지
않다. 곧 이 공적영지의 마음[空寂靈知之心]29)이 그대의 본래면목(本來面
目)30)이며,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와 천하의 선지식들이 비
밀스럽고 비밀스럽게 서로 전한 법인(法印)이다. 만약 이 마음을 깨달으면
참으로 ‘차례를 밟지 않고 빠르게 부처님의 경지에 올라, 걸음걸음마다 삼
계를 뛰어넘어 집으로 돌아가 단박에 의심을 끊고, 문득 인간과 천상의 스
승이 되어 자비와 지혜가 서로 도와 두 가지 이익을 구족하여, 인간과 천상
의 공양을 받아 감당함이 하루 만 냥의 황금을 녹인다’라고 할 것이다. 그
대가 만약 이와 같다면 진정한 대장부라서 일생 동안 해야 할 일을 이미 마
친 것이다.
答. 道不屬知不知. 汝除却將迷待悟之心, 聽我言說. 諸法如
夢, 亦如幻化故, 妄念本寂, 塵境本空. 諸法皆空之處, 靈知不
昧, 卽此空寂靈知之心, 是汝本來面目, 亦是三世諸佛, 歷代祖
師, 天下善知識, 密密相轉底法印也. 若悟此心, 眞所謂不踐階
梯, 徑登佛地, 步步超三界, 歸家頓絶疑, 便與人天爲師, 悲智
相資, 具足二利, 堪受人天供養, 日消萬兩黃金. 汝若如是, 眞
大丈夫, 一生能事已畢矣.
28) 이 구절은 조주종심(趙州從諗, 778~897)의 깨달음에 계기가 되었던 남전보원
(南泉普願, 748~834)의 법어로,『고존숙어록(古尊宿語錄)』 권13에 수록되어 있
다. 즉, “(조주)스님이 남전스님께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남전스님이 말
하였다. ‘평상의 마음이 도이다.’ 스님이 물었다. ‘향해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
까?’ 남전스님이 답했다. ‘헤아리면 어긋난다.’ 스님이 물었다. ‘헤아리지 않고
어떻게 도인 줄 압니까?’ 남전스님이 말했다. ‘도는 알고 알지 못하는데 속하지
않는다. 안다는 것은 망령된 느낌이며, 알지 못한다는 것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
다. 만약 참으로 의심하지 않는 도를 통달했다면 커다란 허공과 같이 확연하고
탕활할 것인데, 어찌 굳이 시비를 따지겠는가.’ 스님은 그 말끝에 현묘한 뜻을
단박 깨달아 마음이 환한 달과 같았다.”(卍118, p.306a-c. 師問南泉, 如何是道?
泉云, 平常心是道. 師云, 還可趣向不? 泉云, 擬卽乖. 師云, 不擬爭知是道? 泉云,
道不屬知不知. 知是妄覺, 不知是無記. 若眞達不疑之道, 猶如太虛, 廓然蕩豁, 豈
可强是非也.師於言下頓悟玄旨, 心如朗月.)
29) 공적영지의 마음[空寂靈知之心]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로, 이 글에서는
자심(自心)・불성(佛性)・자성(自性)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앞에서는 이
를 ‘티끌 같은 경계는 본래 공(空)하고 망념이 본래 고요한[寂] 곳에서 신령스러
운 앎[靈知]은 어둡지 않다’라고 설명하였다.
30)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본래의 얼굴, 본래의 생김새라는 말로, 본래의 자기를 뜻
한다.『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혜능이 “선도 악도 생각하기 이전에 어떤 것
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라고 혜명(慧明)에게 묻는 법어(大48, p.349b24-28)를
남긴 이후 불법(佛法)의 근본을 묻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이후 『원오불과선사
어록(圓悟佛果禪師語錄)』에서는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나란히 사용되었고,(大
47, p.735a, 751c, 761c 등) 『무문관(無門關)』에서는 혜능의 대표적인 법어로
수록하였다.(大48, pp.295c22-296a11)
6.
묻는다. 저의 분상에 의거하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의 마음입니까?
問. 據吾分上, 何者, 是空寂靈知之心耶?
답한다.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그대의 공적영지의 마음인데, 어
찌 반조하지 않고 오히려 밖에서 찾는가. 내가 지금 그대의 분상에 의거해
서 바로 본래 마음을 가리켜서 그대로 하여금 문득 깨닫게 할 것이니, 그대
는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고 내 말을 들어라.
答. 汝今問我者, 是汝空寂靈知之心, 何不返照, 猶爲外覓. 我
今, 據汝分上, 直指本心, 令汝便悟, 汝須淨心, 聽我言說.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열두 때 가운데 혹 듣고 혹 보며, 혹 웃고 혹 말
하며, 혹 성내고 혹 기뻐하며, 혹 옳다고 하고 혹 그르다고 하며, 갖가지로
베풀어 행하고 움직인다. 말해 보라. 필경에는 무엇이 이렇게 움직이고 베
풀어 행할 수 있는가? 만약 색신이 움직인다고 하면, 무슨 까닭으로 어떤
사람이 한 순간에 목숨을 마쳐서 전부가 아직 허물어지고 썩지도 않았는
데, 곧 눈은 스스로 보지 못하고, 귀는 들을 수 없으며, 코는 향기를 맡지 못
하고, 혀는 담론하지 못하며, 몸은 움직이고 흔들지 못하며, 손은 잡지 못
하며, 발은 움직이고 달리지 못하는가? 이에 알아라. 보고 듣고 동작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본래 마음이며, 그대의 색신이 아니다. 하물며 이
색신은 사대(四大)의 성품이 공하여 거울 속의 형상과 같고 또한 물속의
달과 같은데, 어찌 분명하고 분명하게 항상 알며 밝고 밝아 어둡지 않아서
느끼는 대로 항하의 모래와 같은 미묘한 작용에 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
로 “신통과 묘용이여, 물 긷고 나무 하는 것이네”31)라고 말한다.
從朝至暮, 十二時中, 或聞或見, 或笑或語, 或嗔或喜, 或是或
非, 種種施爲運轉. 且道. 畢竟, 是誰能伊麽運轉施爲耶? 若言
色身運轉, 何故, 有人, 一念命終, 都未壞爛, 卽眼不自見, 耳
不能聞, 鼻不辨香, 舌不談論, 身不動搖, 手不執捉, 足不運奔
耶? 是知. 能見聞動作, 必是汝本心, 不是汝色身也. 況此色
身, 四大性空, 如鏡中像, 亦如水月, 豈能了了常知, 明明不昧,
感而遂通恒沙妙用也. 故云, “神通幷妙用, 運水及般柴.”
31) 이 부분은『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권8의「양주거사방온(襄州居士龐蘊)」조에
수록된 내용으로, 방거사가 석두희천 선사에게 올린 게송이다. 즉, “어느 날 석
두스님이 물었다. ‘자네가 노승을 만난 이후로 나날이 하는 일은 어떠한가?’ 대
답하였다. ‘만약 나날이 하는 일을 물으신다면 입을 열 곳이 없습니다.’ 다시 게
송 하나를 올리면서 말하였다. ‘나날이 하는 일은 다른 것 없어 오로지 내 스스
로 만나는 대로 어울릴 뿐, 온갖 것 취하거나 버리지 않고 처하는 곳마다 어긋남
이 없네. 붉은색 옷・자주색 옷 누가 이름하였나, 구산에는 티끌 한 점 없네. 신
통과 묘용이여, 물 긷고 나무하는 것이네.’ 석두스님은 그렇다고 하면서 물었다.
‘자네는 스님이 될 것인가, 속인이 될 것인가?’ 거사는 말하였다. ‘바램에 따르
겠습니다.’ [그는] 마침내 삭발염의하지는 않았다.”(大51, p.263b6-12. 一日石頭問
曰, 子自見老僧已來, 日用事作麽生. 對曰, 若問日用事, 卽無開口處. 復呈一偈云, ‘日
用事無別, 唯吾自偶諧, 頭頭非取捨, 處處勿張乖. 朱紫誰爲號, 丘山絶點埃. 神通幷妙
用, 運水及般柴.’ 石頭然之曰, 子以緇耶素耶. 居士曰, 願從所慕. 遂不剃染.) 이 내용
은『대혜어록(大慧語錄)』권20의「시확연거사(示廓然居士)」에도 그대로 인용되
고 있다.(大47, p.896c19-24)
또 이치에 들어가는 실마리가 많지만 그대에게 한 문을 가리켜서 그대로
하여금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겠다. “그대는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
는 소리를 듣느냐?” “듣습니다.” “그대는 돌이켜서 그대가 듣는 성품을 들
어라. 도리어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느냐?”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
와 모든 분별을 다 얻을 수 없습니다.” “기이하고 기이하다. 이것이 소리를
관하여 이치에 들어가는 문이다. 내가 다시 그대에게 물을 것이니, 그대는
말해보라.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리와 모든 분별을 다 얻을 수 없다고
하니, 이미 얻을 수 없다면 이러한 때에 당해서는 허공이 아니겠는가?” “원
래 공하지 않아서 밝고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이 공하지 않은
본체인가?” “또한 모양이 없어서 말로는 미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의 목숨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이미 모양이 없
다면 도리어 크고 작음이 있겠는가? 이미 크고 작음이 없다면 도리어 끝이
있겠는가? 끝이 없기 때문에 안과 밖이 없고, 안과 밖이 없기 때문에 멀고
가까움이 없고,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에 저것과 이것이 없다. 저것과 이
것이 없으면 가고 옴이 없고, 가고 옴이 없으면 나고 죽음이 없고, 나고 죽
음이 없으면 예전과 지금이 없고, 예전과 지금이 없다면 미혹과 깨달음이
없고, 미혹과 깨달음이 없다면 범부와 성인이 없고, 범부와 성인이 없다면
물듦과 깨끗함이 없고, 물듦과 깨끗함이 없다면 옳고 그름이 없고, 옳고 그
름이 없다면 모든 이름을 다 얻을 수 없다. 이미 전부 없어서 이와 같은 모
든 감관과 경계, 모든 망념, 나아가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이름에 이르기까
지 다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이 어찌 본래 공하고 고요하며 본래 물건 없음
이 아니겠는가.”
且入理多端, 指汝一門, 令汝還源. “汝還聞鴉嗚鵲噪之聲麽?”
曰,“ 聞.” 曰,“ 汝返聞汝聞性. 還有許多聲麽?” 曰,“ 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俱不可得.” 曰,“ 奇哉奇哉. 此是觀音入理之
門. 我更問儞, 儞道. 到這裏, 一切聲一切分別, 㧾不可得, 旣
不可得, 當伊麽時, 莫是虛空麽?” 曰, “元來不空, 明明不昧.”
曰,“ 作麽生, 是不空之體?” 曰,“ 亦無相貌, 言之不可及.” 曰,
“此是諸佛諸祖壽命, 更莫疑也. 旣無相貌, 還有大小麽? 旣無
大小, 還有邊際麽? 無邊際故, 無內外, 無內外故, 無遠近, 無
遠近故, 無彼此. 無彼此, 則無往來, 無往來, 則無生死, 無生
死, 則無古今, 無古今, 則無迷悟, 無迷悟, 則無凡聖, 無凡聖,
則無染淨, 無染淨, 則無是非, 無是非, 則一切名言, 俱不可得.
旣㧾無, 如是一切根境, 一切妄念, 乃至種種相貌, 種種名言,
俱不可得, 此豈非本來空寂, 本來無物也.”
그러나 모든 법이 다 공한 곳에서도 신령스러운 앎은 어둡지 않으니, 무
정(無情)과는 같지 않아서 성품이 스스로 신이하게 안다. 이것이 그대의 공
하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다. 이 청정하고 공
하고 고요한 마음이 삼세 모든 부처님의 수승하고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며, 또한 중생의 본래 근원인 깨달음의 성품이다. 이것을 깨달아 그것을 지
키는 사람은 한결같은데 앉아 움직이지 않고 해탈하며, 이것을 미혹해 그
것을 등지는 사람은 육취(六趣)32)에 나아가 오랜 겁을 윤회한다. 그러므로
“한 마음에 미혹하여 육취로 가는 사람은 감이고 움직임이며, 법계를 깨달
아 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옴이고 고요함이다”33)라고 말한다.
然諸法皆空之處, 靈知不昧, 不同無情, 性自神解. 此是汝空寂
靈知, 淸淨心體. 而此淸淨空寂之心, 是三世諸佛, 勝淨明心,
亦是衆生本源覺性. 悟此而守之者, 坐一如而不動解脫, 迷此
而背之者, 往六趣而長劫輪廻. 故云,“ 迷一心而往六趣者, 去
也動也, 悟法界而復一心者, 來也靜也.”
32) 육취(六趣, s3 ad3 -gati)는 육도(六道)와 같은 말로 중생이 업에 의해 윤회하는 여
섯 종류의 세계를 일컫는다. 즉,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
修羅)・인간(人間)・천상(天上)의 여섯 세계이다. ①지옥취는 팔한(八寒)・팔열
(八熱) 등의 고통을 받는 곳으로 지하에 있다. ②아귀취는 항상 밥을 구하는 귀
신들이 사는 곳으로 사람과 섞여 있어도 보지 못한다. ③축생취는 금수가 사는
곳으로 인간의 세계와 사는 곳을 같이 한다. ④아수라취는 항상 진심을 품고 싸
움을 좋아한다는 대력신(大力神)이 사는 곳으로 심산유곡을 의지처로 한다. ⑤
인간취는 인류가 사는 곳으로 사대주가 의지처이다. ⑥천상취는 몸에 광명을
갖추고 자연이 쾌락을 받는 중생이 사는 곳으로 육욕천과 색계천과 무색계천이
있다.[『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172(大27, p.868b-c) 참조.]
33) 이 구절은 징관(澄觀)이 저술한『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
疏演義鈔)』권1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大36, p.1b22-24) 지눌스님은 원문의
법계(法界)를 일심(一心)으로 바꾸었다.
비록 미혹과 깨달음의 다름이 있지만 본래의 근원은 하나이다. 그래서
“말한 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심(衆生心)이다”34)라고 말한다. 이 공하
고 고요한 마음은 성인에게 있어도 늘어나지 않고 범부에게 있어도 줄어들
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에 있어도 빛나지 않고 범부의 마음에 숨
어도 어둡지 않다. 이미 성인에게서 늘어나지 않고 범부에게서 줄어들지
않는다면 부처님과 조사가 어찌 사람과 다르겠는가. 사람과 다른 이유는
스스로 마음[心念]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만약 믿음이 다다름을
얻어서 의심하는 생각이 단박에 쉬고, 장부의 뜻을 내며, 참되고 바른 견해
를 일으켜서 몸소 그 맛을 보아 스스로 자기가 수긍하는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면, 이것이 마음 닦는 사람의 깨달은 곳[解悟處]이다. 다시는 계급이나
차례가 없기 때문에 단박[頓]이라고 부른다. 마치 “믿음의 인(因)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과덕(果德)에 계합하여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아야 바야흐
로 믿음을 이룬다”35)고 한 것과 같다.
雖迷悟之有殊, 乃本源則一也. 所以云, “所言法者, 謂衆生
心.” 而此空寂之心, 在聖而不增, 在凡而不減. 故在聖智而不
耀, 隱凡心而不昧. 旣不增於聖, 不少於凡, 佛祖奚以異於人.
而所以異於人者, 能自護心念耳. 汝若信得及疑情頓息, 出丈
夫之志, 發眞正見解, 親嘗其味, 自到自肯之地, 則是爲修心之
人, 解悟處也. 更無階級次第, 故云頓也. 如云, “於信因中, 契
諸佛果德, 分毫不殊, 方成信也.”
34)『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75c21).
35) 이 구절은『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14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大36,
p.809b6-7) 지눌스님은 원문의 ‘분호불류(分毫不謬)’를 ‘분호불수(分毫不殊)’로
바꾸었다.
7.
묻는다. 이미 이 이치를 깨달았으면 다시 계급이 없는데, 어찌하여 뒤의
닦음을 빌어서 점차 훈습하고 점차 이루어야 합니까?
問. 旣悟此理, 更無階級, 何假後修, 漸熏漸成耶?
답한다. 깨달은 후에 점차 닦는 의미는 앞에서 이미 갖추어 설하였지만,
다시 의심하는 생각을 아직 풀지 못했다고 하니, 거듭 설하는 것도 거리낄
게 없다. 그대는 반드시 마음을 깨끗이 하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범부는 비롯함이 없는 광대한 겁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오도(五
道)36)를 유전(流轉)하며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나라고 하는 생각[我相]을
굳게 집착하여 망상으로 전도되고 무명의 종자로 훈습함을 오래하여 성품
을 이루었다. 비록 이번 생에 이르러 자성이 본래 공하고 고요하여 부처님
과 다름이 없음을 단박 깨달았지만, 이 오래된 습기는 갑자기 제거하여 끊
기 어렵다. 그러므로 역・순의 경계를 만나면 성냄과 기뻐함, 옳음과 그름
이 불꽃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니, 객진번뇌(客塵煩惱)37)가 이전과 다름없
다. 만약 반야로써 공력을 더하고 힘을 붙이지 않으면 어떻게 무명을 상대
해 다스려서 크게 쉬고 크게 쉬는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마치, “단박 깨
달음은 비록 부처와 같지만 여러 생의 습기가 깊으니, 바람은 멈추었지만
파도가 오히려 솟구치고 이치는 나타났지만 망념이 오히려 침범한다”38)라
고 한 것과 같다.
答. 悟後漸修之義, 前已具說, 而復疑情未釋, 不妨重說. 汝須
淨心, 諦聽諦聽. 凡夫, 無始廣大劫來, 至于今日, 流轉五道,
生來死去, 堅執我相, 妄想顚倒, 無明種習, 久與成性. 雖到今
生,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 而此舊習, 卒難除斷. 故
逢逆順境, 嗔喜是非, 熾然起滅, 客塵煩惱, 與前無異. 若不
以般若, 加功著力, 焉能對治無明, 得到大休大歇之地. 如云,
“頓悟雖同佛, 多生習氣深, 風停波尙湧, 理現念猶侵.”
36) 오도(五道, gati pañcaka)는 오취(五趣)라고도 한다. 오도는 지옥・아귀・축생・
인간・천상의 다섯을 말하며, 여기에 수라도를 더한 것을 육도(六道)라고 한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천상의 육도 가운데 수라를 지옥에 넣은 것이다.
다섯 가지 나쁜 것, 다섯 가지 미혹의 세계를 의미한다.
37) 객진번뇌(客塵煩惱, āgantu-kleśa)는 우연적인 번뇌・외래적인 번뇌・비본래적
인 번뇌를 말하며, 줄여서 객진(客塵)이라고도 한다. 번뇌는 본래 이치에 미혹하
여 일어났기 때문에 ‘객(客)’이라고 하며, 번뇌로써 심성을 오염시키는 것이 마
치 티끌 먼지가 만물을 오염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진(塵)’이라고 한다.『주
유마경(注維摩經)』권5에서는 “마음이 외연(外緣)을 만나 번뇌가 멋대로 일어나
므로 객진이라고 한다”(大38, p.378b10)라고 하였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염오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원래 청정한 마음에
는 존재하지 않는 객진번뇌가 외부로부터 마음을 염오시키기 때문이다.
38) 종밀(宗密),『원각경도량수증의(圓覺經道場修證儀)』권3(卍128, p.747b11-12).
또 고(杲)선사39)가 말하기를, “가끔 영리한 근기의 무리가 많은 힘을 허
비하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하면 문득 용이한 마음을 내어 다시는 닦고 다스
리지 않으니,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지면 이전대로 흘러 다니다가 윤회
를 면치 못한다.”40)라고 하였다. 그러하다면 어찌 한 번 깨달은 바로써 문
득 뒤의 닦음을 내버려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은 후에 길이 반드시
비추고 살펴야 하니,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면 절대 그것을 따르지 말고, 그
것을 버리고 또 버려서 함이 없는데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이다. 천하 선지
식들의 깨달음 후의 목우행(牧牛行)41)이 이것이다.
又杲禪師云,“ 往往, 利根之輩, 不費多力, 打發此事, 便生容
易之心, 更不修治, 日久月深, 依前流浪, 未免輪廻.” 則豈可
以一期所悟, 便撥置後修耶? 故悟後, 長須照察, 妄念忽起, 都
不隨之, 損之又損, 以至無爲, 方始究竟. 天下善知識, 悟後牧
牛行, 是也.
39) 고(杲)선사는 대혜종고(大慧宗杲, 1088~1163) 선사를 가리킨다. 송(宋)대 임제종
양기파(楊岐派)의 스님으로 자는 담회(曇晦), 호는 묘희(妙喜), 또는 운문(雲門)
이다. 동산미(洞山微), 담당문준(湛堂文準), 원오극근(圜悟克勤) 등 여러 선사를
참방하였고, 크게 깨달은 후에는 원오극근의 법을 이었다. 이때 극근선사는『임
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부촉하였다. 정강 원년(1126)에 ‘불일대사(佛日大師)’
라는 호를 받았고, 소흥 7년(1137)부터 경산(徑山)의 능인사(能仁寺)에 주석하
면서 종풍을 크게 떨쳤다. 소흥 11년(1141)에는 무고를 받아 소흥 26년(1155)까
지 형주(衡州)에 유배를 당하였으며, 이 시기에『정법안장』6권을 저술하였다.
소흥 26년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승복을 입고, 28년(1157)에 조칙으로 다시 경
산에 머무르게 되어 예전처럼 종풍을 떨치자 ‘경산대사(徑山大師)’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만년에 경산에 머물면서 간화선법을 선양하였고 효종(孝宗)으로
부터 ‘대혜선사(大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융흥 원년(1163) 입적하니 세수 75
세, 법납 58세였으며, 시호는 ‘보각선사(普覺禪師)’였다.『대혜어록(大慧語錄)』,
『정법안장』,『종문무고』등의 저술을 남겼으며, 법을 이은 제자가 90여명이었
다.[『대명고승전(大明高僧傳)』권5의「임안부경산사문종고전(臨安府徑山沙門
釋宋杲傳)」(大50, pp.915c-916b) ;「속전등록(續傳燈錄)』권27의「임안부경산
묘희대혜종고선사(臨安府徑山妙喜大慧宗杲禪師)」(大51, pp.649a-654a) 참조.]
40) 이 부분은『대혜어록(大慧語錄)』 권25의 내용을 간추려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가끔 근기가 영리하여 지혜가 높은 사람은 그것을 얻으면 힘을 쏟지 않고
드디어 용이한 마음을 내어 바로 수행하지 않아, 대부분 눈앞의 경계에 마음이
뺏겨버리고 말아 주재할 수 없게 된다.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지면 미혹을 돌이
키지 못하여 도력이 업력을 이기지 못하고, 마장이 기회를 얻어 결국 마장에 끌
려가게 된다.”(大47, p.920a7-11. 往往, 利根上智者, 得之, 不費力, 遂生容易心,
便不修行, 多被目前境界奪將去, 作主宰不得. 日久月深, 迷而不返, 道力不能勝業
力, 魔得其便, 定爲魔所攝持.)
41) 목우행(牧牛行)은 깨달음 이후 계속되는 수행을 소를 먹이는 데 비유한 말이다.
자기의 본래 성품을 깨닫고, 이 깨달음에 의지해서 돌이켜 자기의 성품을 살피
고 다스리는 오후수(悟後修)를 가리킨다.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고 이름을 지
어 부른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지눌스님이 깨달음 이후 나타날 수 있는 번뇌
습기의 장애를 없애 나가는 계속된 수행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한
편 중국에서는 선 수행을 목동이 소를 치는데 비유하여 그림으로 남기기도 하
였는데, 양산곽암(梁山廓庵)의『십우도(十牛圖)』가 대표적이다.
비록 뒤의 닦음이 있지만 이미 먼저 망념이 본래 공하며 마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함을 돈오해서, 악을 끊고 끊어도 끊음이 없고 선을 닦고 닦아도
닦음이 없다. 이것이 참된 닦음이며 참된 끊음이다. 그러므로 “비록 온갖
행을 갖추어 닦지만 오직 무념(無念)으로 근본을 삼는다”42)라고 말한다.
규봉스님은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의미를 총괄적으로 판별해서 말한
다. “이 성품이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구
족하여 부처님과 다름이 없음을 단박 깨닫고, 이를 의지하여 닦는 것을 최
상승선이라 이름하고, 또한 여래청정선이라 이름한다. 만약 생각 생각마다
닦고 익힐 수 있다면 자연히 점차 온갖 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계속해서 서로 전한 것이 이 선이다.”43) 곧 돈오와 점수의 뜻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雖有後修, 已先頓悟妄念本空, 心性本淨, 於惡斷斷而無斷, 於
善修修而無修. 此乃眞修眞斷矣. 故云,“ 雖備修萬行, 唯以無
念爲宗.” 圭峯, 㧾判先悟後修之義云.“ 頓悟此性,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與佛無殊, 依此而修者, 是名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也.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
門下, 轉展相傳者, 是此禪也.” 則頓悟漸修之義, 如車二輪,
闕一不可.
42)『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권상(大48, p.403a6).
43) 이 부분은『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의 내용을 간추려서 인용한 것으
로 보인다. 즉, “자기의 마음이 본래 청정하고 원래 번뇌가 없으며 번뇌 없는 성
품이 본래 스스로 구족해서 이 마음이 곧 부처라서 결국에는 다름이 없다는 것
을 단박 깨닫고, 이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 것은 최상승선이며 또한 여래청정
선이라 이름하며 또한 일행삼매라 이름하며, 또한 진여삼매라 이름한다. 이것
이 모든 삼매의 근본이다. 만약 생각 생각마다 닦고 익힐 수 있다면 자연히 점차
로 온갖 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계속해서 전한 것이 이 선이다.”(大
48, p.399b17-22. 頓悟自心, 本來淸淨,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此心卽佛,
畢竟無異, 依此而修者, 是最上乘禪, 亦名如來淸淨禪, 亦名一行三昧, 亦名眞如三昧.
此是一切三昧根本. 若能念念 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摩門下展轉相傳者, 是此禪也.)
어떤 사람은 선과 악의 성품이 공함을 알지 못하고, 굳게 앉아 움직이지
않으며 몸과 마음을 억눌러 조복하기를 마치 돌로 풀을 누른 듯이44) 하면
서 마음 닦음이라 하니, 이는 크게 미혹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문은 마음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끊는 마음이 도적이다”45)라고 말한다. 다만 살생
・도둑질・음행・망어가 성품으로부터 일어났음을 자세히 관하면, 일어남
이 곧 일어남이 없어서 그 자리가 문득 고요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다시
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생각이 일어남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깨달음
이 더딜까 걱정하라”46)고 말한다. 또 “생각이 일어나면 곧 알아차려라, 알
아차리면 곧 없다”47)고 말한다.
或者, 不知善惡性空, 堅坐不動, 捺伏身心, 如石壓草, 以爲修
心, 是大惑48)矣. 故云, “聲聞, 心心斷惑49), 能斷之心是賊.”
但諦觀殺盜媱妄, 從性而起, 起卽無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所以云,“ 不怕念起, 唯恐覺遲.” 又云,“ 念起卽覺, 覺之卽無.”
44) ‘돌로 풀을 누른 것 같다[如石壓草]’는 비유는『대혜어록(大慧語錄)』권26의「답
부추밀 계신(答富樞密 季申)」에서 볼 수 있다. 대혜스님은 겉모양에 마음을 뺏
긴 수행을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원컨대 공은 등허리를 곧게 세우는데 집착
해서 이 수행을 해나가지는 말라. 이렇게 수행해 나가는 것은, 비록 이 몸뚱이를
잠깐 얽어매어 머물러 둘 수 있는 것으로 구경이라 여기겠지만, 마음속의 생각
이 이리저리 날뛰는 것은 마치 아지랑이 같다. 비록 그렇게 마음속의 생각을 잠
시 머무르게 했다할지라도 마치 돌로 풀은 눌러 놓은 것처럼 모르는 사이에 또
생긴다.”(大47, p.921b27, 願公硬著脊梁骨, 莫作這般去就. 作這般去就底 雖暫
拘得箇臭皮袋子住 便以爲究竟, 而心識紛飛 猶如野馬. 縱然心識暫停, 如石壓草,
不覺又生.)
45)『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9,「양보지화상대승찬십수(梁寶誌和尙大乘讚十
首)」(大51, p.450a1).
46) 연수(延壽), 『종경록(宗鏡錄)』 권38(大48, p.638a18-19).
47)『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 권상(大48, p.403a5-6).
48)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49)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의 분상에는 비록 객진번뇌가 있더라도 모두 제호
(醍醐)50)를 이룬다. 다만 미혹이 근본이 없음을 비추어 보면 허공 꽃과 같
은 삼계가 바람에 안개 걷히듯 하고, 환(幻)같이 변화한 육진(六塵)은 끓는
물에 얼음이 녹는 듯하다. 만약 이와 같이 생각 생각마다 닦고 익히며 비추
어 돌아봄을 잊지 않아 정혜(定慧)를 고르게 지닐 수 있다면, 좋고 싫음이
자연히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자연히 더욱 밝아지며, 죄업이 자연히
끊어져 없어지고, 공행이 자연히 더하여 나아가서 번뇌가 다할 때에 나고
죽음이 곧 끊어진다. 만약 미세한 [번뇌의] 흐름이 영원히 끊어지고 원만한
깨달음의 큰 지혜가 밝고 환하게 홀로 드러나면, 곧 천백억 화신을 시방의
국토 가운데 나타내어 간절함에 나아가고 근기에 상응함이 마치 달이 하늘
[九霄]51)에 나타나면 그림자가 온갖 물에 비치는 것과 같아서, 상응하여 작
용함이 끝없으며 인연 있는 중생을 제도함이 기쁘고 즐거우며 근심이 없는
이를 이름하여 대각세존이라 한다.
故, 悟人分上, 雖有客塵煩惱, 俱成醍醐. 但照惑52)無本, 空花
三界, 如風卷煙, 幻化六塵, 如湯消氷. 若能如是, 念念修習,
不忘照顧, 定慧等持, 則愛惡自然淡薄, 悲智自然增明, 罪業自
然斷除, 功行自然增進, 煩惱盡時, 生死卽絶. 若微細流注永
斷, 圓覺大智, 朗然獨存, 卽現千百億化身, 於十方國中, 赴感
應機, 似月現九霄, 影分萬水, 應用無窮, 度有緣衆生, 快樂無
憂, 名之爲大覺世尊.
50) 제호(醍醐)는 우유를 정제하는 과정에 나타나는 유(乳)・락(酪)・생수(生酥)・숙
수(熟酥)・제호(醍醐) 등의 다섯 가지 맛 가운데 마지막에 나타나는 최고의 맛을
일컫는 말이다. 여기서 깨달은 분상에서는 모두 제호라고 한 것은, 지눌스님이
이 글에서 밝히고 있듯이 돈오하는 그 순간 중생과 부처가 차별 없는 본성을 깨
닫기 때문에, 자성을 깨달아 돈오한 그 순간부터 대각세존을 이루는 구경의 경
지에 이르기까지 본래의 마음은 똑같음을 강조한 말이다.
51) 하늘[九霄]은 구천(九天)과 같은 말로, 아주 멀거나 높은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52)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8.
묻는다. [돈오한] 후에 닦는 문 가운데 정혜(定慧)를 고르게 지니는 의미
를 진실로 아직 분명하게 알지 못하겠습니다. 다시 베풀어 설하여 자세히
보이고 미혹을 열어서 해탈의 문으로 이끌어 들여 주십시오.
問. 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實未明了. 更爲宣說, 委示開迷,
引入解脫之門.
답한다. 만약 법과 의미를 시설하면 들어가는 이치가 천 가지 문이지만
정혜(定慧) 아님이 없으며, 그 요점을 취하면 자성 위의 체(體)와 용(用)의
두 가지 의미이니, 앞에서 말한 공적영지(空寂靈知)가 이것이다. 정(定)은
체(體)이고 혜(慧)는 용(用)이다. 체(體) 그대로인 용(用)이므로 혜(慧)가
정(定)을 여의지 않고, 용(用) 그대로인 체(體)이므로 정(定)이 혜(慧)를 여
의지 않는다. 정(定)이 곧 혜(慧)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혜(慧)가 곧
정(定)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마치 육조[曹溪]스님이 “마음[心地]
이 어지러움 없음이 자성의 정(定)이며, 마음이 어리석음 없음이 자성의 혜
(慧)이다”53)라고 말한 것과 같다. 만약 이와 같이 깨달아서 자유로이 고요
하고 알며 막음과 비춤이 둘이 없으면, 곧 이것이 돈문 수행자가 정혜(定
慧)를 함께 닦는 것이다.
答. 若設法義, 入理千門, 莫非定慧, 取其綱要, 則自性上體用
二義, 前所謂空寂靈知, 是也. 定是體, 慧是用也. 卽體之用故,
慧不離定, 卽用之體故, 定不離慧. 定則慧故, 寂而常知, 慧則
定故, 知而常寂. 如曹溪云,“ 心地無亂自性定, 心地無癡自性
慧.” 若悟如是, 任運寂知, 遮照無二, 則是爲頓門箇者, 雙修
定慧也.
53)『육조단경(六祖壇經)』(大48, p.358c12-13).
만약 ‘먼저 적적(寂寂)으로써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뒤에 성성(惺
惺)으로써 혼침에 머묾을 다스려, 먼저와 뒤로 상대해 다스려서 혼침과 산
란을 고루 조화시켜 고요함에 들어간다’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점문의 하
열한 근기가 행하는 바이다. 비록 ‘성성과 적적을 고르게 지닌다’라고 말하
지만 고요함을 취해서 행으로 삼음을 면하지 못한다면, 어찌 일을 마친 사
람이 본래 고요함과 본래 앎을 여의지 않고 자유로이 함께 닦는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육조[曹溪]스님이 말하기를, “스스로 깨닫는 수행은 고
요함에 있지 않다. 만약 먼저와 뒤로 고요히 한다면 곧 미혹한 사람이다.”54)
라고 하였다.
若言‘先以寂寂, 治於緣慮, 後以惺惺, 治於昏住, 先後對治,
均調昏亂, 以入於靜’者, 是爲漸門劣機所行也. 雖云‘惺寂等
持,’未免取靜爲行, 則豈爲了事人, 不離本寂本知, 任運雙修
者也. 故曹溪云,“ 自悟修行, 不在於靜. 若靜先後, 卽是迷人.”
54)『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정(靜)’을 ‘쟁(諍)’으로 표기하여 ‘고요함’이 아니
라 ‘다툼’의 의미로 읽게 하였다. 즉, “스스로 깨닫는 수행은 다툼에 있지 않다.
만약 선후를 다툰다면 곧 미혹한 사람과 같다.”(大48, p.352c19-20. 自悟修行, 不
在於諍, 若諍先後, 卽同迷人.) 그렇지만 『육조단경』의 뜻은 선정과 지혜를 닦는
순서에 대한 다툼[諍]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이고, 지눌스님의 이 법문은 고요
함[靜]을 이루는 것을 수행이라고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를 담은 내용이
어서 고요함[靜]이 중심이 된다. 따라서『육조단경』의 ‘쟁(諍)’을 저본에서처럼
‘정(靜)’으로 읽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구절의 ‘즉동미인
(卽同迷人)’을 ‘즉시미인(卽是迷人)’으로 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하다면 달인의 분상에서 정혜(定慧)를 고르게 지니는 의미는 공용
에 떨어지지 않고 원래 스스로 함이 없어서 다시 특별한 경지의 시절이
없다. 형상을 보고 소리를 들을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옷을 입고 밥을 먹
을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똥 누고 오줌 눌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사람을
대하여 서로 말을 할 때에도 다만 이러하며, 나아가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고, 혹 말하고 혹 침묵하고, 혹 기뻐하고 혹 성내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 가운데 낱낱이 이와 같다. 마치 빈 배를 물결에 띄움에 따라 오르고
따라 내리는 듯하며, 마치 흐르는 물이 산을 구름에 굽은 데를 만나고 곧
은 데를 만나는 것 같이 마음 마음마다 앎이 없다. 오늘도 자재롭고 자유
로우며 내일도 자유롭고 자재하여 온갖 연을 수순함에 막힘없고 걸림 없
다. 선과 악을 끊지 않고 닦지 않아 질박하고 곧으며 거짓이 없어서 보고
들음이 항상하다면, 하나의 티끌도 상대를 지음이 끊어졌으니 어찌 버리
고 없애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며, 한 생각도 망정을 일으킴이 없으니 연을
잊는 힘을 빌지 않는다.55)
則達人分上, 定慧等持之義, 不落功用, 元自無爲, 更無特地
時節. 見色聞聲時, 但伊麽, 著衣喫飯時, 但伊麽, 屙屎送尿
時, 但伊麽, 對人接話時, 但伊麽, 乃至行住坐臥, 或語或黙,
或喜或怒, 一切時中, 一一如是. 似虛舟駕浪, 隨高隨下, 如流
水轉山, 遇曲遇直, 而心心無知. 今日騰騰任運, 明日任運騰
騰, 隨順衆緣, 無障無礙. 於善於惡, 不斷不修, 質直無僞, 視
聽尋常, 則絶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
假忘緣之力.
55)『종경록(宗鏡錄)』 권45(大48, p.680b16-17).
그러나 장애가 두텁고 습기가 무거우며, 관(觀)함이 적고 마음이 들뜨며,
무명의 힘이 크고 반야의 힘이 적어서 선과 악의 경계에서 움직임과 고요
함이 서로 바뀌게 됨을 면하지 못하여 마음이 편안하고 맑지 못한 사람은
연을 잊고 버려 없애는 공부가 없지 않다. 마치 “육근(六根)이 경계를 거두
어도 마음이 연을 따르지 않음을 정(定)이라 하고, 마음과 경계가 다 공하
여 비추고 봄에 미혹이 없음을 혜(慧)라고 한다”56)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것이 비록 수상문의 정혜(定慧)라서 점문의 하열한 근기가 행하는 바이지
만, 상대해 다스리는 문 가운데에는 없을 수 없다.
然障濃習重, 觀劣心浮, 無明之力大, 般若之力小, 於善惡境
界, 未免被動靜互換, 心不恬淡者, 不無忘緣遣蕩功夫矣. 如
云,“ 六根攝境, 心不隨緣, 謂之定, 心境俱空, 照鑑無惑 57),
謂之慧.” 此雖隨相門定慧, 漸門劣機所行也, 對治門中, 不可
無也.
56)『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9,북조대천복사홍변선사(京兆大薦福寺弘辯禪
師)」(大51, p.269b8-9).
57)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만약 도거(掉擧)58)가 치성하면 먼저 정(定)의 문으로써 이치에 맞게 산
란을 거두어 마음이 연을 따르지 않고 본래의 고요함에 계합하며, 만약 혼
침이 더욱 많아지면 다음으로 혜(慧)의 문으로써 법을 가려 공을 관하여
비추고 봄이 미혹이 없이 본래의 앎에 계합한다. 정(定)으로써 어지러운 생
각을 다스리고, 혜(慧)로써 무기(無記)를 다스려 움직임과 고요함의 모습
이 없고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을 마치면 경계를 상대해도 생각 생각이 근
본으로 돌아가고, 인연을 만나도 마음 마음이 도에 계합하여, 자유로이 함
께 닦아야 바야흐로 일 없는 사람이 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참으로 정혜
(定慧)를 고르게 지녀 밝게 불성을 본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若掉擧熾盛, 則先以定門, 稱理攝散, 心不隨緣, 契乎本寂, 若
昏沈尤多, 則次以慧門, 擇法觀空, 照鑑無惑59), 契乎本知. 以
定治乎亂想, 以慧治乎無記, 動靜相亡, 對治功終, 則對境而念
念歸宗, 遇緣而心心契道, 任運雙修, 方爲無事人. 若如是, 則
眞可謂定慧等持, 明見佛性者也.
58) 도거(掉擧, auddhatya)는 마음을 들뜨고 불안정하게 하여 사마타(奢摩他)를 방
해하는 심소(心所)를 일컫는다. 이는 부파의 5위75법 가운데 대번뇌지법(大煩惱
地法)의 하나이며, 유식의 5위100법 가운데 수번뇌(隨煩惱)의 하나이다.『구사
론(俱舍論)』에서는 마음을 적정하지 않게 하는 심소를 도거라고 하였고,(大29,
p.19c11)『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는 탐욕(貪欲)의 일부로써
과거의 즐거웠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이 적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하며 사마타를 방해하는 작용을 하는 것을 도거라고 하였다.(大31, p.699b1) 또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도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마음
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해 적정하지 않게 하는 것을 본질로 하며 행사(行捨)와
사마타를 장애하는 작용을 한다.(大31, p.34a7)
9.
묻는다. 그대가 판별한 것에 의거하면, 깨달은 뒤에 닦는 문 가운데 정혜
(定慧)를 고루 지니는 의미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정혜며, 둘째
는 수상정혜다. 자성문에서는 곧 ‘자유로이 고요하고 알아 원래 스스로 함
이 없어서 하나의 티끌도 상대를 지음이 끊어졌으니 어찌 버리고 없애는
공력을 수고로이 하며, 한 생각도 망정을 일으킴이 없으니 연을 잊는 힘을
빌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판별하여 ‘이것은 돈문의 수행자가 자성을 여의
지 않고 정혜(定慧)를 고르게 지님이다’라고 말한다. 수상문에서는 곧 ‘이
치에 맞게 산란을 거두고 법을 가려 공을 관하여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화
시켜서 함이 없는데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판별하여 ‘이것이 점문
의 하열한 근기가 행하는 바이다’라고 말한다.
問. 據汝所判, 悟後修門中, 定慧等持之義, 有二種, 一自性定
慧, 二隨相定慧. 自性門, 則曰, ‘任運寂知, 元自無爲, 絶一塵
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判云,
‘此是頓門箇者, 不離自性, 定慧等持也.’ 隨相門, 則曰,‘ 稱
理攝散, 擇法觀空, 均調昏亂, 以入無爲.’ 判云, ‘此是漸門劣
機所行也.’
이 두 문의 정혜(定慧)에 대해서 의심이 없지 않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행하는 바라고 한다면, 다시 먼저 자성문을 의지해서 정혜(定慧)를 함께 닦
은 연후에 다시 수상문의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을 써야 하는 것입니까? 다
시 먼저 수상문을 의지해서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화시킨 연후에 자성문으
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 먼저 자성문의 정혜(定慧)를 의지해야 한다면, 자유로이 고요하고
알아서 다시는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이 없을 것이니, 어찌 반드시 수상문
의 정혜(定慧)를 취해야 합니까? 마치 밝은 구슬을 가지고서 무늬를 새겨
덕을 잃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먼저 수상문의 정혜(定慧)로써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이 이루어진 연후에 자성문으로 나아간다면, 완연히 이것은
점문 가운데 하열한 근기가 깨닫기 이전에 점차 익히는 것입니다. 어찌 ‘돈
문 수행자가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서 공력 없는 공력을 쓰는 것’이라고 하
겠습니까?
就此兩門定慧, 不無疑焉. 若言一人所行也, 爲復先依自性門,
定慧雙修, 然後, 更用隨相門對治之功耶? 爲復先依隨相門,
均調昏亂, 然後, 以入自性門耶? 若先依自性定慧, 則任運寂
知, 更無對治之功, 何須更取隨相門定慧耶? 如將皓玉, 彫文
喪德. 若先以隨相門定慧, 對治功成, 然後, 趣於自性門, 則宛
是漸門中劣機, 悟前漸熏也. 豈云,‘ 頓門箇者, 先悟後修, 用
無功之功’也?
만약 일시라서 앞과 뒤가 없다면, 두 가지 문의 정혜(定慧)가 돈・점이 다
른데 어떻게 일시에 아울러 행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러하다면 돈문의 수
행자는 자성문을 의지하여 자유로이 공력이 없고, 점문의 하열한 근기는
수상문을 취해서 상대해 다스려 공력이 수고로우니, 두 수행문의 근기가
돈(頓)과 점(漸)으로 같지 않고 우열이 분명합니다. 무엇 때문에 먼저 깨닫
고 뒤에 닦는 문 가운데 아울러 두 종류를 판석하였습니까? 청컨대 통하여
알게 해서 의심하는 생각이 끊어지게 해 주십시오.
若一時無前後, 則二門定慧, 頓漸有異, 如何一時並行也? 則
頓門箇者, 依自性門, 任運亡功, 漸門劣機, 取隨相門, 對治勞
功, 二門之機, 頓漸不同, 優劣皎然. 云何先悟後修門中, 並釋
二種耶? 請爲通會, 令絶疑情.
답한다. 해석한 바가 분명한데 그대가 스스로 의심을 내는구나. 말에 따
라 앎을 내면 더욱 의심과 미혹만 생기고, 뜻을 얻어서 말을 잊으면 수고스
럽게 따지지 않는다.
答. 所釋皎然, 汝自生疑. 隨言生解, 轉生疑惑60), 得意忘言,
不勞致詰.
60)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만약 두 문에 나아가 각각 행하는 바를 판별한다면, 자성정혜를 닦는 것
은 돈문에서 공 없는 공을 써서 아울러 움직이고 함께 고요하게 하여 스스
로 자기의 성품을 닦아서 스스로 불도를 이루는 것이다. 수상문의 정혜(定
慧)를 닦는 것은 아직 깨닫기 이전 점문의 하열한 근기가 상대해 다스리는
공을 써서 마음 마음마다 미혹을 끊어 고요함을 취해서 수행으로 삼는 사
람이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수행문의 행하는 바는 돈과 점으로 각각 달라서
뒤섞여 혼란스러울 수 없다.
그러나 깨달은 뒤에 닦는 문 가운데 아울러 수상문의 상대해 다스림을
논하는 것은, 온전히 점문 근기의 행하는 바를 취함이 아니라 그 방편을 취
해서 길을 빌리고 잠자리를 의탁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이 돈문에도 또한
근기가 뛰어난 사람도 있고 또한 근기가 하열한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예
로 그 행리(行李)61)를 판단할 수 없어서이다.
若就兩門, 各判所行, 則修自性定慧者, 此是頓門, 用無功之
功, 並運雙寂, 自修自性, 自成佛道者也. 修隨相門定慧者, 此
是未悟前漸門劣機, 用對治之功, 心心斷惑62), 取靜爲行者.
而此二門所行, 頓漸各異, 不可叅亂也. 然悟後修門中, 兼論
隨相門對治者, 非全取漸機所行也, 取其方便, 假道托宿而已.
何故, 於此頓門, 亦有機勝者, 亦有機劣者, 不可一例, 判其行
李也.
61) 행리(行李)는 행장(行狀) 또는 품행(品行)과 같은 말로 성품과 행실을 의미한다.
62) 저본에는「或」으로 되어 있으나 갑본・을본・병본에 따라「惑」으로 바꾸었다.
만약 번뇌가 엷고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여 선에서 선을 여의고 악에
서 악을 여의어 팔풍(八風)63)에 움직이지 않고 삼수(三受)64)에 고요한 사람
이라면, 자성정혜를 의지하여 자유로이 함께 닦는다. 천진하여 지음이 없으
며 움직이고 고요함이 항상 선이어서 자연의 이치를 성취하니, 어찌 수상문
의 상대해 다스리는 뜻을 빌겠는가. 병이 없으면 약을 구하지 않는다.
若煩惱淡薄, 身心輕安, 於善離善, 於惡離惡, 不動八風, 寂然
三受者, 依自性定慧, 任運雙修. 天眞無作, 動靜常禪, 成就自
然之理, 何假隨相門對治之義也. 無病不求藥.
63) 팔풍(八風)은 사람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여덟 종류의 행복하고 불행한 상태나
경향을 말한다. 즉,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
의 여덟 가지이다
64) 삼수(三受, tri-vedanā)는 고(苦)・낙(樂)・불고불락(不苦不樂) 등 세 종류의 느
낌을 말한다.
비록 먼저 돈오하였지만 번뇌가 두텁고 습기가 굳고 무거워, 경계를 대
하면 생각 생각마다 망정을 일으키고 연을 만나면 마음 마음마다 상대를
지어서 저 혼침과 산란의 부림을 입어 고요함과 앎이 항상 그러함을 모르
는 사람이라면, 곧 수상문의 정혜(定慧)를 빌려 상대해 다스림을 잊지 않
고 혼침과 산란을 고루 조화시켜 함이 없는데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다. 비
록 상대해 다스리는 공부를 빌려 잠시 습기를 조화시키지만, 먼저 마음의
성품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텅 비었음을 돈오하였기 때문에 점문의
하열한 근기의 번뇌에 물든 닦음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雖先頓悟, 煩惱濃厚, 習氣堅重, 對境而念念生情, 遇緣而心
心作對, 被他昏亂使殺, 昧却寂知常然者, 卽借隨相門定慧,
不忘對治, 均調昏亂, 以入無爲, 卽其宜矣. 雖借對治功夫, 暫
調習氣, 以先頓悟, 心性本淨, 煩惱本空故, 卽不落漸門劣機
汚染修也.
무슨 까닭인가? 닦음이 깨닫기 이전에 있다면 비록 공력을 쓰는 것을 잊
지 않고 생각 생각마다 익하고 닦지만 [생각이] 붙는 것마다 의심이 생겨서
걸림이 없을 수 없다. 마치 어떤 한 물건이 가슴 속에 걸려 있어서 불안한
모습이 항상 나타나 앞에 있는 것처럼,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져 상대해
다스리는 공력이 익어지면 몸과 마음의 대상 경계가 가볍고 편안한 듯하
다. 비록 가볍고 편안하지만 의심의 뿌리가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른 것과 같아서, 오히려 나고 죽는 세계에 자재할 수 없는 것
과 같다. 그러므로 “닦음이 깨닫기 이전에 있다면 참된 닦음이 아니다”65)
라고 말한 것이다.
何者? 修在悟前, 則雖用功不忘, 念念熏修, 着着生疑, 未能無
礙. 如有一物, 礙在胸中, 不安之相, 常現在前, 日久月深, 對
治功熟, 則身心客塵, 怡似輕安. 雖復輕安, 疑根未斷, 如石壓
草, 猶如生死界, 不得自在. 故云,“ 修在悟前, 非眞修也.”
65) 이 부분은『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만약 아직 깨닫지 못하고 닦는다면 참된 닦음이 아니다.”(大48, p.407c21. 若
未悟而修, 非眞修也.)
깨달은 사람의 분상에서는 비록 상대해 다스리는 방편이 있지만 생각 생
각마다 의심이 없어서 오염에 떨어지지 않으니, 날이 오래되고 달이 깊어
지면 자연스럽게 계합하여 천진하고 미묘한 성품이 자유로이 고요하면서
안다. 생각 생각마다 일체의 경계를 반연해도 마음 마음마다 영원히 모든
번뇌를 끊으니, 자성을 여의지 않고 정혜(定慧)를 고르게 지녀 위없는 보리
를 성취함이 앞의 근기가 뛰어난 사람과 더불어 다시 차별이 없다. 그러하
다면 수상문의 정혜(定慧)가 비록 점문 근기가 행하는 바이지만, 깨달은 사
람의 분상에서는 쇠를 다루어 황금을 만드는 것66)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이
와 같음을 안다면, 어찌 두 문의 정혜(定慧)로써 선후와 차례의 두 가지 견
해의 의심이 있겠는가.
悟人分上, 雖有對治方便, 念念無疑, 不落汚染, 日久月深, 自
然契合, 天眞妙性, 任運寂知. 念念攀緣一切境, 心心永斷諸煩
惱, 不離自性, 定慧等持, 成就無上菩提, 與前機勝者, 更無差
別. 則隨相門定慧, 雖是漸機所行, 於悟人分上, 可謂點鐵成
金. 若知如是, 則豈以二門定慧, 有先後次第二見之疑乎.
66) 쇠를 다루어 황금을 만드는 것[點鐵成金]은 광석에 환단이라는 약품을 넣어 황
금을 추출해 내는 것으로, 나쁜 것을 고쳐서 좋은 것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을 비
유한 말이다.
원컨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 말을 상고하고 음미하여 다시는 여
우같은 의심으로 스스로 굽히고 물러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장부의 뜻을
갖추고 위없는 보리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을 버리고서 어찌하겠는
가. 간절히 글에 집착하지 말고 바로 반드시 뜻을 요달하여 하나하나 자기
로 돌아가서 근본 종지에 계합하면, 스승 없는 지혜가 자연스럽게 앞에 나
타나고 천진한 이치가 분명히 어둡지 않아, 지혜의 몸을 성취함이 다른 이
의 깨달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그러니 이 미묘한 뜻이 비록 모든 사람의
분상이지만, 만약 숙세에 반야 종자의 지혜[般若種智]를 심은 대승 근기의
사람이 아니라면 한 생각에 바른 믿음이 생길 수 없으니, 어찌 헛되이 믿지
않겠는가.
願諸修道之人, 硏味此語, 更莫狐疑, 自生屈退. 若具丈夫之
志, 求無上菩提者, 捨此奚以哉. 切莫執文, 直須了義, 一一歸
就自己, 契合本宗, 則無師之智, 自然現前, 天眞之理, 了然不
昧, 成就慧身, 不由他悟. 而此妙旨, 雖是諸人分上, 若非夙植
般若種智, 大乘根器者, 不能一念而生正信, 豈徒不信.
또한 이에 비방하고 원망하여 도리어 무간업을 초래하는 사람이 자주
자주 있다. 비록 믿고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한 번 귀에 지나가게 해서 잠
깐 동안이라도 연을 맺으면 그 공과 그 덕이 헤아릴 수 없다. 『유심결』에서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 종자의 인(因)을 맺고, 배워서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인간과 천상의 복을 덮어서 성불의 바른 인(因)을 잃지
않는다”67)라고 말한 것과 같다. 하물며 듣고서 믿고 배워서 이루며 지키고
보호해 잊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공덕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亦乃謗讟, 返招無間者, 比比有之. 雖不信受, 一經於耳, 暫時
結緣, 其功厥德, 不可稱量. 如唯心訣云,“ 聞而不信, 尙結佛
種之因, 學而不成, 猶盖人天之福, 不失成佛之正因.” 況聞而
信, 學而成, 守護不忘者, 其功德, 豈能度量.
67) 연수(延壽),『유심결(唯心訣)』(大48, p.996c21-22).
돌이켜 과거에 윤회했던 업을 생각해보니, 그 몇 천 겁을 흑암(黑暗)에
떨어지고 무간(無間)에 들어가68) 갖가지 괴로움을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
다. 또 그 얼마동안을 불도를 구하고자 하였지만 좋은 벗을 만나지 못하여
오랜 겁을 윤회에 빠져 어둠속에서 깨달음 없이 모든 악업을 지었는지 알
지 못하겠다. 간혹 한 번 생각하고 모르는 사이에 길게 탄식할 따름이다.
어떻게 [긴장을] 놓고 [생각을] 느슨하게 해서 다시 이전의 재앙을 받을 수
있겠는가. 또 누가 다시 나로 하여금 지금 사람으로 태어남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참됨을 닦는 길에 어둡지 않게 하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실로
눈먼 거북이가 나무를 만나고, 작은 겨자에 바늘을 던진 것이라 하니, 그
경사스럽고 다행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追念過去輪廻之業, 不知其幾千劫, 墮黑暗, 入無間, 受種種
苦. 又不知其幾何, 而欲求佛道, 不逢善友, 長劫沈淪, 冥冥無
覺, 造諸惡業. 時或一思, 不覺長吁. 其可放緩, 再受前殃. 又
不知誰復使我, 今値生人, 爲萬物之靈, 不昧修眞之路, 實謂盲
龜遇木, 纖芥投針, 其爲慶幸, 曷勝道哉.
68) ‘흑암(黑暗)에 떨어지고 무간(無間)에 들어감’은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
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흑암은 미혹 또는 무명의 어두움을 의미하며, 무간
은 괴로움을 받는 일이 끊임없고 즐거움이 그 사이에 섞이는 일이 없음을 의미
한다.
내가 지금 만약 스스로 물러나고 굽히는 생각을 내거나 혹은 게으름을
내면서 항상 후생만 바라다가 잠깐 동안에 목숨을 잃고 악취(惡趣)에 떨
어져서 모든 고통을 받을 때에는 비록 한 구절의 부처님 법을 들어 믿어
알고 받아 지녀서 어려움을 면하고자 해도 어찌 다시 얻을 수 있겠는가?
위험에 이르러서는 후회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원컨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게으름을 내지 말고, 탐냄과 음행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의 불
을 끄는 것 같이 하여 비추어 돌아봄을 잊지 말라. 무상(無常)은 빠르고
빨라 몸은 아침 이슬과 같고 목숨은 서녘 노을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있
지만 내일은 또한 보존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두고 간절히 마음에
둘지니라.
我今, 若自生退屈, 或生懈怠, 而恒常望後, 須臾失命, 退墮惡
趣, 受諸苦痛之時, 雖欲願聞一句佛法, 信解受持, 欲免辛酸,
豈可復得乎? 及到臨危, 悔無所益. 願諸修道之人, 莫生放逸,
莫著貪婬69), 如救頭然, 不忘照顧. 無常迅速, 身如朝露, 命若
西光, 今日雖存, 明亦難保, 切須在意, 切須在意.
69) 저본에는「媱」로 되어 있으나 을본・병본에 따라「婬」으로 바꾸었다.
또 세간의 함이 있는 선에 기대어도 또한 삼악도의 괴로운 윤회를 면할
수 있어서 천상과 인간에서 수승한 과보를 얻어 모든 쾌락을 받는데, 하물
며 이 가장 뛰어난 가르침의 깊고 깊은 법문에 잠깐이라도 믿음을 내어 이
룬 공덕이겠는가! 비유로는 조금도 말할 수 없다. 마치 경에서 이르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의 칠보로써 그만한 세계의 중생들에게
보시하고 공양하여 모두 충만을 얻게 하고, 또 그만한 세계의 모든 중생들
을 교화하여 모두 사과(四果)70)를 증득하게 하면,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
고 끝없지만, 밥 한 끼 먹는 사이에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해서 얻어지는 공
덕만 같지 못하다”71)라고 한 것과 같다. 이로써 알아라. 나의 이 법문은 가
장 높고 가장 귀하여 모든 공덕에 비교하여도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
에서 이르기를, “한 생각의 바른 마음이 도량이니 항하사와 같은 칠보탑을
세우는 것보다 뛰어나다. 보탑은 결국 부수어져 티끌이 되지만 한 생각의
바른 마음은 정각을 이룬다”72)라고 하였다.
且憑世間有爲之善, 亦可免三途苦輪, 於天上人間, 得殊勝果
報, 受諸快樂, 況此最上乘甚深法門, 暫時生信, 所成功德! 不
可以比喩, 說其小分. 如經云,“ 若人, 以三千大千世界七寶,
布施供養爾所世界衆生, 皆得充滿, 又敎化爾所世界一切衆生,
令得四果, 其功德, 無量無邊, 不如一食頃, 正思此法, 所獲功
德.” 是知. 我此法門, 最尊最貴, 於諸功德, 比況不及. 故經云,
“一念正心是道場, 勝造恒沙七寶塔. 寶塔畢竟碎爲微塵, 一念
正心成正覺.”
70) 사과(四果)는 소승의 성문이 수행하여 도달하는 네 종류의 과보이다. ①수다원
과(須陀洹果, srota-āpanna)는 삼계의 견혹(見惑)을 끊은 성자로, 처음 성자의
계열에 들었으므로 예류(預流)라고 한다. ②사다함과(斯陀含果, sakr3d-āgāmin)
는 욕계의 수혹(修惑)을 대부분 끊은 성자이지만, 아직 그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천상의 경지에 이르렀다가 다시 인간계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고 하여 일래(一來)라고 한다. ③아나함과(阿那含果,
anāgāmin)는 욕계의 수혹(修惑)을 완전히 끊은 성자여서 다시는 욕계에 되돌아
오지 않는다고 하여 불환(不還)이라고 한다. ④아라한과(阿羅漢果, arhat)는 삼
계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이다.
71) 이 부분은『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수보리야, 내가 지금 진실한 말로써 너에게 말하겠다. ‘만약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칠보로써 그만큼 가득한 항하 모래 수만큼의 삼천대천세계에 그것을
써서 보시하여 얻는 복이 얼마이겠느냐.’ 수보리가 말한다. ‘매우 많습니다. 세
존이시여.’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이 경전
가운데서와 나아가 사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남을 위해 설하면, 이 복덕이 앞의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大8, p.749c28-750a2. 須菩提, 我今實言告汝, 若有善男子
善女人,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得福多不. 須菩提言, 甚多世
尊.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72)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송고승전(宋高僧傳)』권20의「당대주오대산화엄사무
착전(唐代州五臺山華嚴寺無著傳)」에도 보인다.(大50, p.837a17-19)
원컨대 모든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 말을 상고하고 음미하여 간절히 마
음에 둘지니라. 이 몸을 이번 생에 제도하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
려 이 몸을 제도하겠는가.73) 지금 만약 닦지 않는다면 만겁이 어긋나며, 지
금 만약 힘써 닦는다면 닦기 힘든 행이 점차 어렵지 않아 공행이 스스로 나
아갈 것이다. 슬프다. 요즘 사람이 굶주림에 왕의 음식을 만났지만 입을 댈
줄 모르고, 병에 가장 좋은 의사를 만났지만 약 먹을 줄 모른다. ‘어찌 할까,
어찌 할까’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도 어찌 하지 못할 뿐이다.74)
願諸修道之人, 硏味此語, 切須在意.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
生度此身! 今若不修, 萬劫差違, 今若强修, 難修之行, 漸得不
難, 功行自進. 嗟夫, 今之人, 飢逢王饍75), 不知下口, 病遇醫
王, 不知服藥. 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73)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대혜어록(大慧語錄)』권30의「답탕승상 진지(答湯丞
相 進之)」에 보이며, 다만 ‘대(待)’가 ‘향(向)’으로 되어 있다.(大47, p.942a21-22)
74) 이 부분은『논어(論語)』의「위령공(衛靈公)」편에 나온다. 공자가 장문중(臧文仲)
과 유하혜(柳下惠)의 벼슬에 관해서 말하면서 “자신에게는 엄하게 꾸짖고 남에
게는 가볍게 꾸짖으면 원망이 멀어진다”(窮自厚, 而薄責於人, 則遠怨矣)라고 말
한 후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다.
75) 저본에「善」으로 되어 있으나, 정본에 따라「饍」으로 바꾸었다.
또 세간의 함이 있는 일은 그 모양을 볼 수 있고 그 공덕을 증험할 수 있
어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얻으면 희유함을 찬탄하지만, 우리들의 이 마음
근본[心宗]은 형상을 볼 수 없고 모양을 볼 수 없어 말의 길이 끊어지고 마
음 가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하늘 마군이나 외도가 헐뜯고 비방하려 해도
문이 없고, 제석과 범천과 모든 하늘이 칭찬해도 미치지 못한다. 하물며 범
부와 앎이 얕은 무리가 흉내낼 수 있겠는가.
且世間有爲之事, 其狀可見, 其功可驗, 人得一事, 歎其希有,
我此心宗, 無形可觀, 無狀可見, 言語道斷, 心行處滅. 故天
魔外道, 毁謗無門, 釋梵諸天, 稱讚不及. 況凡夫淺識之流,
其能髣髴.
슬프다. 우물 안 개구리가 어떻게 큰 바다의 광활함을 알 것이며, 들소가
어떻게 사자의 포효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알아라. 말법 세계 가운
데서 이 법문을 듣고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어 믿어 알고 받아 지니는 사람
은 이미 한량없는 겁 동안에 모든 성인을 받들어 모시고 모든 선근을 심어
깊이 반야의 바른 인(因)을 맺은 최상근기의 성품이다. 그러므로『금강경』
에서 이르기를, “이 구절에서 신심을 내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라, 이미 한
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다”76)라고 한다. 또 이르기를,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을 위해 설하고, 최상승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
을 위해 설한다”77)라고 한다.
悲夫. 井蛙焉知滄海之闊, 野牛何能師子之吼. 故知. 末法世
中, 聞此法門, 生希有想, 信解受持者, 已於無量劫中, 承事諸
聖, 植諸善根, 深結般若正因, 最上根性也. 故金剛經云,“ 於
此章句, 生信心者, 當知, 已於無量佛所, 種諸善根.” 又云,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76) 이 부분은『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다음 내용을 간추려서 인
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 구절에서 신심을 일으킬 수 있는, 이것이 진실한 것
이다. 마땅히 알아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두 부처님・셋・넷・다섯 분의 부처
님에게서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부처님의 처소에서 모든 선
근을 심은 것이다.”(大8, p.749a29-b2. 於此章句, 能生信心, 以此爲實. 當知.
是人, 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而種善根, 已於無量千萬佛所種諸善根.)
77)『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大8, p.750c13-14).
원컨대 모든 도를 구하는 사람은 겁약한 마음을 내지 말고 반드시 용맹
한 마음을 내야 한다. 오랜 겁 동안의 좋은 인(因)은 알 수 없지만, 만약 수
승함을 믿지 않고 하열함을 달게 여기고 어렵다는 생각을 내어 지금 그것
을 닦지 않는다면, 비록 숙세의 선근이 있어도 지금 그것을 끊었기 때문에
더욱 그 어려움이 남아 점점 멀어질 것이다. 지금 이미 보배 있는 곳에 이
르렀다면 빈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한 번 사람 몸을 잃으면 만겁동안
회복하기 어려우니, 반드시 삼가기를 바란다. 어찌 지혜 있는 사람이 그 보
배 있는 곳을 알고도 도리어 그것을 구하지 않고 길이 외롭고 가난함을 원
망하겠는가. 만약 보배를 얻고자 한다면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아라.
願諸求道之人, 莫生怯弱, 須發勇猛之心. 宿劫善因, 未可知
也, 若不信殊勝, 甘爲下劣, 生艱阻之想, 今不修之, 則縱有宿
世善根, 今斷之故, 彌在其難, 轉展遠矣. 今旣到寶所, 不可空
手而還. 一失人身, 萬劫難復, 請須愼之. 豈有智者, 知其寶所,
反不求之, 長怨孤貧. 若欲獲寶, 放下皮囊.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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