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보조국사 지눌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실론섬 2016. 8. 25. 13:23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1)

해동 조계산사문 지눌 지음

海東 曹溪山沙門 知訥 撰2)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4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82)에 수록(pp.724a-
   732b)된『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 만
   력(萬曆) 32년(1604)에 능인암(能仁庵)에서 개간(開刊)한『원돈성불론(圓頓成佛
   論)』이며, 을본(乙本)은 탄허스님이 현토(懸吐)하고 역해(譯解)한『보조법어(普
   照法語)』(回想社, 1978)에 수록된『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며, 병본(丙本)은
   보조사상연구원(普照思想硏究院)에서 펴낸『보조전서(普照全書)』(佛日出版社,
   1989)에 수록된『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갑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海東曹溪山沙門知訥撰」이라는 문구는 저본의 편집자가 보충해서 넣은 것이
   다.(韓4, p.724a)『원돈성불론』은 지눌스님이 입적한 후에 발견되었고, 제자인
   혜(慧諶, 1178~1234)스님에 의해서 1215년에 간행되었다. 혜심스님은『간
   화의론(看話決疑論)』의 발문(跋文)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韓4,
   p.737b14-24)

1.3)
3) 이 번호는 원문에는 없지만 역주자가 문답을 중심으로 구분하여 [1]부터 [5]까
지 붙인 것이다.

어떤 이가 목우자에게 묻는다. 그대가 세운 바를 들으니,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이 늘 사용하는 무명분별(無明分別)4)의 종자로
써 문득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不動智)5)를 삼은 후에 성품을 의지하여 선
을 닦는 것이 바야흐로 미묘함이 된다’라고 한다. 이 가운데 부동지의 불과
(佛果)는 본래 깨달은 이불(理佛)인가, 새로 이룬 사불(事佛)인가?
或問牧牛子曰. 聞汝所立,‘ 今時修心人, 先以自心日用之種,
便爲諸佛不動智然後, 依性修禪, 方爲妙爾.’ 此中不動智佛
果, 是本覺理佛耶, 是新成事佛耶?
4) 무명분별(無明分別)은 무명으로 인해 분별하는 것이다. 무명(無明, avidyā)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비롯한 모든 고통을 초래하는 원인이며, 진실을 보지 못
   하고 진리에 어두운 것을 가리킨다. 분별(分別, vikalpa)은 대상 경계를 사유하
   고 헤아리는 인식작용이다. 따라서 이 무명으로 인해 분별이 생겨나고, 이것은
   진여의 이치와 계합하지 않기 때문에 허망한 것이다.
5) 부동지(不動智, avicala-buddhi)는 번뇌에 동요하지 않는 굳건한 지혜를 가리킨
   다. 이 논에서 부동지는『화엄경(華嚴經)』의 십지불(十智佛) 가운데 하나인 동방
   금색세계의 부동지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大9, p.418b19) 이통현은 금색
   (金色)을 법신(法身)으로 보고, 부동지를 법신의 근본지에 의지하여 지혜의 작
   용을 일으키면 동요함이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4,
   大36, p.745a27 참조.]

 

청량(淸凉)6)조사는「성기품」7)에 의거하여 부처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
에 있다는 뜻을 세 번 거듭 세웠다. 첫 번째는 중생과 중생이 스스로 있다
는 것이며,〈시교(始敎)8) 가운데 사지(四智)9)의 보리종자(菩提種子)10)와『기신』11) 가운
데 염오를 따르지만 성품이 깨끗한 뜻을 취하여 뜻에 근거해 높이 판단한 것이다.〉 두 번
째는 래의 과보가 스스로 있다는 것이며,〈중생이 미래에 얻을 불과가 삼세에
융섭하기 때문에 무명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다른 과보가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중생의 본각(本覺)12)이 부처의 본각과 더불어 한 본체이기 때문에 노
사나불(盧舍那佛)13)의 지혜가 이치를 따라 널리 두루하여 닦지 않은 중생의 생멸하는 팔
식(八)14)의 마음에 있어서 인(因)도 짓고 과(果)도 지으니 이것을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
음이라고 한다.〉
淸凉祖師, 依性起品, 佛智在衆生心之義, 立三復次. 一生生自
有,〈取始敎中, 四智菩提種子, 起信中, 隨染性淨之義, 據義高判也.〉二當果
自有,〈衆生當來所得佛果, 三世融攝故, 在無明心中.〉三他果在我.〈衆生
本覺與佛本覺一體故, 盧舍那佛智, 隨理普遍, 在不修衆生生滅八識之心, 作因
作果, 是謂事事無碍也.〉
6) 청량(淸凉)은 중국 화엄종의 제4조인 징관(澄觀, 738~839)의 휘이다. 징관의 전
   기 자료 가운데 신뢰할 만한 것은 배휴(裴休)가 왕명으로 찬술한 『묘각탑기(妙
   覺塔記)』와『송고승전(宋高僧傳)』의「당대주오대산청량사징관전(唐代州五臺山
   淸涼寺澄觀傳)」(大50, p.737a-c)이다. 그는 당나라 현종(玄宗)으로부터 문종(文
   宗)까지의 9조(朝)를 거치면서 이 가운데 일곱 황제의 문사(門師)가 되었다. 또
   그는 덕종德宗)의 요청으로 40권본『화엄경(華嚴經)』의 요지를 설하였으며, 이
   를 들은 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그에게 붉은 가사를 하사하고 교수화상(敎授
   和尙)이라는 호(號)를 내렸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약 40여종에 이르며, 이 가
   운데 대표적인 것은 80권본 『화엄경(華嚴經)』을 주석한『화엄경소(華嚴經疏)』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이다.
7)「성기품(性起品)」은 60권본『화엄경(華嚴經)』의「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
   品)」을 줄인 말이며, 80권본『화엄경(華嚴經)』의「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대
   응된다. 청량은 80권본『화엄경』을 주석했으므로「여래출현품」에 의거한 것으
   로 보인다.
8) 시교(始敎)는 대승시교(大乘始敎)를 가리키는 것으로, 화엄종의 오교판(五敎判)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된다. 대승시교는 대승에 들어가는 첫 관문에 해당되며,
   공시교(空始敎)와 상시교(相始敎)로 나뉜다. 공시교는『반야경(般若經)』 등에서
   설한 가르침이며, 상시교는 『해심밀경(解深密經)』 등에서 설한 가르침이다.[『화
   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際章)』(이하『화엄오교장』) 권1, 大45, p.481b-c
   참조.]
9) 사지(四智, catvāri-jñān3 a)는 유식학파에서 설하는 네 가지의 지혜로, 불과(佛
   果)에 이르러 유루(有漏)의 마음인 팔식(八識)이 전의(轉依)해서 얻는 네 가지의
   무루지(無漏智)이다. 제8식이 전의해서 얻는 무루지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이고,
   제7식이 전의해서 얻는 무루지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이고, 제6식이 전의해서
   얻는 무루지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이고, 전오식(前五識)이 전의해서 얻는 무루
   지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성유식론(成唯識論)』 권10, 大31, pp.56-58 참조.]
10) 보리종자(菩提種子)는 보리를 실현할 수 있는 종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리종성
    (菩提種性)과 같은 뜻이다.
11) 『기신(起信)』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가리키며, 이 책의 저자 및 성립 배
    경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많다. 현존하는『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두 가
    지가 있는데, 하나는 진제(眞諦)가 한역한 것으로 구역(舊譯)으로 불리며, 다른
    하나는 실차난타(實叉難陀)가 한역한 것으로 신역(新譯)으로 불린다. 신역은 구
    역을 보충한 것으로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로 구역이 유행했
    으며, 5세기 이후 동아시아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 본각(本覺)은 본래 지니고 있는 각성(覺性)을 의미하며, 시각(始覺)과 대칭되
    는 말이다. 본각은 본래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번뇌에 오염되거나 모습에 미
    혹되지 않는 본래 청정한 깨달음의 본체이다.[『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大32,
    p.576b8 참조.]
13) 노사나불(盧舍那佛, rocana-buddha)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vairocanabuddha)
    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노사나는 두루 광명을 비춘다는 뜻을 가지므로
    변조광명(遍照光明)・대일변조(大日遍照) 등으로 한역된다. 노사나불은 보리심
    의 당체로서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부처님과 보살들의 심지(心地)를 가리키며,
   『화엄경(華嚴經)』을 비롯한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보리심을 비로자나불로 인격
    화하고 있다.
14) 팔식(八識, ast 3 3 ati-vijñān a)은 유식학파에서 나누는 여덟 가지의 식을 가리킨다.
    즉 전오식(前五識)인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
    識), 제6식인 의식(意識),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
    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뜻 가운데 어떤 뜻에 해당하는가? 만약 다만 성품
이 깨끗한 본각을 반조하여 부동지불과로 삼는다면 첫 번째에 해당하며,
만일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부처를 이루는 것이라면 이후 두 가지의 원
융성불에 해당한다. 대체로 교가(敎家)들이 논의한 바의 성불하는 원융과
항포의 뜻은15) 십주(十住) 초위(初位)의 성불이니,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
이 견성성불(見性成佛)16)하는 것도 십주의 초위에 오르는 것인가? 가르침
[敎] 가운데 논의한 바 신위(信位)17)를 빌리는 것은 반드시 일만 겁을 지나
도록 부지런히 닦아야 십신만심(十信滿心)을 이루거늘, 요즘 사람이 이미
십천 겁이 가득 차서 십주의 초위에 올라 성불한다고 함은 너무 차이가 심
해서 인정에 가깝지 않다.18) 이와 같은 의심을, 청컨대 해결해주시어 듣지
못했던 바를 듣게 해 주십시오.”
如是三義中, 當於何義耶? 若但返照性淨本覺, 爲不動智佛果,
則當初復次, 若成事事無碍佛, 則當後二復次圓融成佛也. 大
凡敎家, 所論成佛圓融行布之義, 是住初成佛也, 今時修心人,
見性成佛, 亦登住初位耶? 敎中所論信位假者, 須歷一萬劫勤
修, 乃成十信滿心, 今時人, 已滿十千劫, 登住初成佛, 大甚徑
挺, 不近人情. 如是等疑, 請垂開決, 聞所不聞.”
15) 화엄교학에서는 보살이 불위(佛位)에 이르는 과정을 원융과 항포로 설명한다.
    원융(圓融)은 원융상섭문(圓融相攝門)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 계위가 곧 일체 계
    위를 포섭하기 때문에 낱낱 지위가 원만하면 불위(佛位)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
    다. 항포(行布)는 차제항포문(次第行布門)을 가리키는 것으로, 각각의 계위를 차
    례대로 닦아나가야 불지(佛地)에 이른다고 보는 것이다.
16) 견성성불(性成佛)은 자기의 본성을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으로, 견성이 곧 성
    불이라는 뜻이다. 견성은 자신의 마음에 본래 있는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으로,
    선종에서 하는 깨달음을 가리킨다. 견성의 성은 본성(本性), 자성(自性), 본심
    (本心), 법성(法性) 등과 같으며, 이런 맥락에서 견성을 견자심불성(見自心佛性),
    견불성(見佛性), 견자본성(見子本性), 견법성(見法性)이라고도 한다.[『육조단경
    (六祖壇經)』 大48, pp.348c-362a 참조.]
17) 신위(信位)는 보살의 수행 계위인 52위 가운데 제1위부터 제10위까지에 해당하
    는 십신위(十信位)를 가리킨다. 십신의 용어와 차례는 경전에 따라서 약간 다르
    지만,『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 의하면 십신은 신심(信心), 정진심
    (精進心), 염심(念心), 혜심(慧心), 정심(定心), 계심(戒心), 회향심(廻向心), 호법
    심(護法心), 사심(捨心), 원심(願心)이다.(大24, p.1017a16-17) 화엄교학에서는 오
    교(五敎) 각각의 차이에 따라 십신위에 대해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교 가
    운데 세 번째인 종교(終敎)에서는 십신위의 설을 세우지 않고 그 대신 41위를
    세우며, 이 41위 가운데 초주를 불퇴전위로 삼는다. 십신위의 보살이 아직 불퇴
    전위의 경지를 증득하지 못했고 단지 행만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반면에 원교
    (圓敎)에서는 하나의 계위에 다른 모든 계위를 갖추므로 십신위를 원만하게 성
    취하는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고 보며, 이를 신만성불(信滿成佛)이라고 한다.
18) ‘차이가 나는 것’의 원문은 경정(徑挺)인데, 경정(徑庭)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
    인다. 이 표현은『장자(莊子)』의「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즉 견오가 접여에
    게서 들은 이야기가 너무 터무니가 없는 것을 ‘너무 차이가 나서 인정에 가깝지
    않다’(大有徑庭, 不近人情焉)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웃으면서 말한다. 산승이 젊어서 조사의 세계[祖域]에 들어와 익
힌 바가 각기 다르니, 어찌 요즘 강백들이 활발히 화엄성불을 논의하는 시
비의 문에 나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다만 선을 닦는 여가에 우연히『화엄
신론』19)을 얻었는데 문득 음미할 곳이 있었다. 이제 그대에게 시험 삼아
말하는 것이니, 그대는 마땅히 이전에 차별의 뜻과 이치를 배워 익힌 논쟁
하려는 마음을 영원히 없애고 듣고 살펴보아야 한다.『화엄론』은 과후(果
後)20)의 큰 성인인 이통현(李通玄)21) 장자가 지은 것이다. 장자는 당나라에
태어나 북경(北京)의 방산(方山) 토굴 속에 숨어 있었는데,22) 용녀(龍女)가
공양을 올리고 호랑이는 명령을 받들었으며, 밤이면 등불을 켜지 않고 이
빨 사이에서 빛을 내뿜어『화엄대론』40권을 찬집하였다.23) 그 문장은 질
박하고 이치는 깊어서 상식을 뛰어넘었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사람이 드
물었다. 나는 오랜 겁에 인연이 있어 용장(龍藏) 사이에서 찾아 얻어서 감
격하여 경사로 여겨 음미하여 싫증을 잊고 그 깊은 뜻을 궁구하니, 오직
말을 잊고 뜻을 요달하며 뜻을 잊고 마음을 요달한 사람이라야 우러러 믿
을 수 있을 것이다.
予笑曰. 山僧少投祖域, 所習各異, 豈能於今時講匠, 盛論華嚴
成佛, 是非之門, 而能詣談哉. 但修禪餘暇, 偶得華嚴新論, 輒
有翫味處. 今試語汝, 汝當永除前來學習差別義理諍論之心,
聽而瑩. 華嚴論者, 是果後大聖李通玄長者所撰. 長者降神
唐朝,隱於北京方山土窟中, 龍女供饌, 虎受使令, 夜則不炳燈
燭, 齒間放光, 撰集華嚴大論四十卷. 其文質而理詣, 度越常䂓
故, 人罕知之. 予宿劫有緣, 搜得於龍藏間, 感遇慶懷, 翫味忘
斁, 窮其旨趣, 唯忘言了義, 忘義了心者, 可以仰信矣.
19)『화엄신론(華嚴新論)』은 이통현이 저술한『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40권을 가
    리키며,『화엄론(華嚴論)』또는『화엄대론(華嚴大論)』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책
    은 80권본『화엄경(華嚴經)』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이며, 화엄종의 입장과는 다
    른 관점에서 화엄사상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송대(宋代)의 지녕(志寧)은『신화
    엄경론』과『화엄경』을 합본하여『화엄경합론(華嚴經合論)』120권을 편찬하였
    고, 이 합본은 당시의 지식인과 선자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다. 명대(明代)의
    방택(方澤)은 이 합본을『화엄경합론찬요(華嚴經合論纂要)』3권으로 요약했고,
    이지(李贄)는『화엄경합론간요(華嚴經合論簡要)』4권으로 요약하였다. 또 고려
    시대의 지눌스님도『신화엄경론』의 주요한 부분을『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
    3권으로 요약하였다.
20) 과후(果後)는 과후방편(果後方便)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부처
    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시 방편으로 중생의 몸을 나타내어 수행하는 모
    습을 보이는 것이다.
21) 이통현(李通玄, 635~730)은 중국의 당나라 때에『화엄경(華嚴經)』의 사상을 연
    구하고 실천해나간 인물이다.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며, 40
    세 이전까지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현존하는 그의 전기 자료에는 40세 전까
    지『주역(周易)』에 심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신화엄경론』을 저술할 당시
    에 해당하는 만년에 대한 기록만 남아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신화엄경론
    (新華嚴經論)』40권,『대방광불화엄경중권권대의약서(大方廣佛華嚴經中卷卷大
    意略叙)』1권,『약석신화엄경수행차제결의론(略釋新華嚴經修行次第決疑論)』(이
    하『화엄경결의론』) 4권,『해미현지성비십명론(解迷顯智成悲十明論)』(이하『십
    명론』) 1권으로 모두 4종이다.
22) 이통현은 개원(開元) 7년(719)부터 방산토굴에서『신화엄경론』을 저술하다가,
    11년 뒤인 개원 18년(730)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화엄경결의론(華嚴經決
    疑論)』大36, p.1049c4-6 참조.]
23) 이통현이『신화엄경론』을 저술할 당시의 정황에 대해『불조통기(佛祖統紀)』권
    40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을 가지고 한씨의 별장으로 가려고 하
    는데, 홀연히 호랑이 한 마리가 당도하여 장자는 경을 그 등에 싣고 방산토감이
    있는 곳으로 올라갔다. 그 가운데는 등불이 없었기에 입에서 하얀 광명을 내어
    [방을] 밝히고 [책을] 지었다. 두 여인이 매일 밥 한 상과 지묵을 제공하였다. 죽
    는 날 하얀 광명이 스스로 정수리부터 나와 아주 미세한 것까지 비추었다. 당시
    지은 것이『논』40권이다.”(大49, p.373c12-16. 將齎經往韓莊, 忽見一虎當道, 
    長者以經置其背, 引登方山土龕處. 其中室無燈燭, 口出白光炳照製作. 有兩女子, 
    日供食一盤及紙墨. 坐亡之日, 白光自頂上徹太微. 所造論四十卷.)

논주의 깊은 뜻을 자세히 하면, 요컨대 화엄의 대의를 분석하여 말세에
큰 마음의 범부로 하여금 생사의 지면 위에서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를 단
박에 깨달아서 처음 깨달아 발심(發心)24)하는 근원을 삼게 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제2회는 보광명지(普光明智)로써 거처의 이름을 삼고,25) 십신(十
信)의 법문을 설하여 곧바로 여래 보광명지의 큰 작용이 방소[方]가 없어
거듭거듭 한없음을 보여 이로써 신심을 삼은 것이다. 또 십색(十色) 세계와
십지(十智) 여래와 십수(十首) 보살을 들어서26) 법을 나타내 보여 [그들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다. 먼저 동방의 금색세계를 든 것은 발심한 이로 하
여금 자기의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는 법신의 이치를 믿게 한 것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이 부동지불임은 곧바로 자기 무명분별의 종자가 본래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임을 믿게 한 것이며, 상수(上首) 보살이 문수사리(文殊師
利)27)임은 곧바로 자기의 근본지(根本智)28) 가운데 잘 간택하는 무상(無相)
의 미묘한 지혜임을 믿게 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이 넓은 법[普法]을 듣
고 발심하는 이는 낱낱이 스스로 이와 같은 법을 갖추고 있다. 이런 까닭
에 「광명각품」에서 “모든 곳이 금색세계이며, 모든 곳이 부동지불이며, 모
든 곳이 문수사리이다”29)라고 한 것이니, 갖춘 것은 논 가운데 자세히 밝
힌 것과 같다.
詳夫論主旨趣, 要以分析30)華嚴大義, 令末世大心凡夫, 於生
死地面上, 頓悟諸佛不動智, 以爲初悟發心之源也. 是故第二
會, 以普光明智爲殿名, 說十信法門, 直示如來普光明智大用
無方重重無限, 以爲信心. 又擧十色世界, 十智如來, 十首菩
薩, 表法示之, 令其易解. 先擧東方金色世界, 令發心者, 信是
自己白淨無垢法身之理也, 本所事佛, 是不動智佛, 直信自己
無明分別之種, 本是諸佛不動智也, 上首菩薩, 是文殊師利, 直
信自己根本智中, 善揀擇無相妙慧也. 一切衆生, 聞此普法, 發
心之者, 一一自具如是之法. 故光明覺品云,“ 一切處金色世
界, 一切處不動智佛, 一切處文殊師利,” 具如論中廣明.
24) 발심(發心, cittapāda)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줄인 말로, 위없는 보리를 얻으
    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초발의(初發意), 신발의(新發意), 신발심(新發心),
    초심(初心), 발의(發意) 등이라고도 한다.
25) 80권본『화엄경(華嚴經)』에서는 일곱 곳에서 아홉 번의 법회가 있었다고 보는
    데, 이를 칠처구회(七處九會)라고 한다. 이에 대해 이통현은 열 곳에서 열 번의
    법회가 있었다고 보는 십처십회(十處十會)를 주장하고 있다. 두 번째 법회가 있
    었던 곳이 보광명전(普光明殿)이며, 이곳은 고대 인도 마가다국 보리도량 근처
    에 있던 법당을 가리킨다.『화엄경(華嚴經)』에서는 “그때 세존께서는 마갈제국
    아란야법보리도량에 계시면서 처음 정각을 이루시고 보광명전의 연화장사자
    좌에 앉으셨다”(大10, p.57c23-24. 爾時世尊在摩竭提國阿蘭若法菩提場中, 始成正
    覺, 於普光明殿坐蓮華藏師子之座.)라고 말하고 있다. 이통현은 여래의 보광명지
    가 발현된 보광명전에 십처십회가 다 포섭된다고 보고 있다.[『신화엄경론(新華
    嚴經論)』권7, 大36, p.762b 참조.]
26)『화엄경(華嚴經)』의「여래명호품(如來名號品)」에서 십색(十色) 세계와 십지(十
    智) 여래와 십수(十首) 보살에 대해 설하고 있다.(大10, p.58a-c) 십색 세계는 동
    방의 금색(金色) 세계, 남방의 묘색(妙色) 세계, 서방의 연화색(蓮華色) 세계, 북
    방의 첨복화색(薝蔔華色) 세계, 동북방의 우발라화색(優鉢羅華色) 세계, 동남방
    의 금색세계, 서남방의 보색(寶色) 세계, 서북방의 금강색(金剛色) 세계, 하방의
    파려색(玻瓈色) 세계, 상방의 평등색(平等色) 세계이다. 십지 여래는 부동지불
    (不動智佛), 무애지불(無礙智佛), 멸암지불(滅暗智佛), 위의지불(威儀智佛), 명상
    지불(明相智佛), 구경지불(究竟智佛), 최승지불(最勝智佛), 자재지불(自在智佛),
    범지불(梵智佛), 관찰지불(觀察智佛)이다. 십수 보살은 문수사리(文殊師利) 보
    살, 각수(覺首) 보살, 재수(財首) 보살, 보수(寶首) 보살, 공덕수(功德道) 보살, 목
    수(目首) 보살, 정진수(精進首) 보살, 법수(法首) 보살, 지수(智首) 보살, 현수(賢
    首) 보살이다.
27) 문수사리(文殊師利, mañjuśrī)는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서 부처님의 지혜를
    대신해서 나타낸다. 보통 문수사리를 줄여서 문수라고 하며, 묘길상(妙吉祥), 묘
    덕(妙德), 묘락(妙樂) 등이라고도 한다.『화엄경(華嚴經)』의「제보살주처품(諸菩
    薩住處品)」에서는 문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북방에 청량산이
    있으니, 예부터 많은 보살들이 그곳에 있었다. 지금도 문수라는 보살이 청량산에
    서 일만 명의 권속보살과 함께 있으면서 항상 설법하고 있다.”(大10, p.241b20-23.
    東北方有處, 名淸涼山, 從昔已來, 諸菩薩衆於中止住. 現有菩薩, 名文殊師利, 與其眷
    屬諸菩薩衆一萬人俱, 常在其中而演說法.)
28) 근본지(根本智, mūlajñāna)는 진리에 계합하여 주관과 대상의 차별이 없는 일
    념의 진실한 지혜를 가리킨다. 이 지혜는 모든 지혜의 근본이 되고 후득지(後得
    智)의 근본이 되며, 일체의 법락(法樂)을 낳고 일체 공덕과 대비심을 일으키는
    모체이다.
29) 이 부분은『화엄경(華嚴經)』의「광명각품(光明覺品)」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려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시방에 각각 큰 보살이 있으며, 낱낱 [보살이] 각각
    열 부처 세계의 티끌 수만큼의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의 처소로 나아갔다. 그 큰
    보살은 수사리 등이며, 그 떠나온 국토는 금색세계 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
    님은 부동지여래 등이었다.”(大10, p.63a9-14. 十方各有一大菩薩, 一一各與十佛刹
    微塵數諸菩薩俱, 來詣佛所. 其大菩薩, 謂文殊師利等, 所從來國, 謂金色世界等, 本所
    事佛, 謂不動智如來等.)
30) 저본에는「拆」으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 병본에 따라「析」으로 바꾸었다.

 

2.
묻는다. 지금 마음을 닦는 사람이 부동지불을 반조한다고 말한 것은 본
래 깨달은 이불(理佛)인가, 이미 불과의 지혜[果智]를 이룬 부처인가? 만약
불과의 지혜에 근거해서 논한다면 비록 타과(他果)와 자과(自果)가 다름이
있지만 반드시 원융문의 이치를 따라 널리 두루하다는 뜻으로써 논해야 하
며, 또한 삼세를 융섭하는 뜻으로써 논해야 한다. 만약 항포문에 근거한다
면 이미 불과의 지혜를 이룬 노사나불이 박지위(縛地位)31) 가운데 닦지 않
은 중생들과 더불어 어떻게 섞일 수 있겠는가?
問. 今言修心人, 返照不動智佛, 是本覺理佛耶, 是已成果智佛
耶? 若約果智論, 則雖他果自果有殊, 須以圓融門隨理, 普遍
之義論之, 亦以三世融攝之義論之. 若約行布門則已成果智盧
舍那佛, 與縛地位中不修衆生, 云何混濫耶?
31) 박지위(縛地位)는 번뇌에 속박된 지위, 즉 궁극적인 지혜를 성취하지 못한 지위
    를 가리키며, 범부위(凡夫位)라고도 한다.

답한다. 이와 같은 의심을 굳게 붙들고서 버리지 못한다면, 어찌 논주가
보인 관행(觀行)32)의 문에 들어가겠는가. 반드시 생각을 잊고 텅 비어 밝으
며, [업장이] 녹고 [망념이] 쉬어서 충만하고 원융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
나 문에서 보인 뜻을 살펴보면 이른바 부동지가 또한 근본보광명지33)
고, 이 근본지에 대하여 이름하여 모든 불과의 지혜라 한 것이다. 이 근본
지가 이치와 현상·성품과 모습·중생과 부처·자기와 남·더러움과 깨끗
함·원인과 결과의 체성(體性)이기 때문에 단지 더러움에 따라 흘러 다니
는 동안에 성품이 깨끗함을 잃지 않는 이치만 취한 것이 아니라, 만약 화장
세계(花藏世界)34)의 주인에 근거해서 이름한다면 이 근본지가 노사나불이
되고, 만약 금색세계의 주인에 근거해서 이름한다면 이 근본지가 부동지불
이 되고, 만약 큰 마음의 중생이 반조하여 발현한 곳에 근거해서 이름한다
면 이 근본지가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불이 되고 또한 자기 마음의 부동지
불이며, 또한 이 자기 마음의 노사나불이니, 한 가지 이름을 듦에 따라 삼
신(三身)35)·십신(十身)36) 등을 다 갖춘 것이다.
答. 如是疑情, 堅執不捨, 則何預論主, 所示觀行之門. 須忘懷
虛朗, 消是根本普明智, 當此根本智, 名之爲諸佛果智也. 此根本智,
是理事性相佛自他染淨因果之體性故, 非單取隨染流轉中,
不失性淨之理, 若約花藏世界主爲名, 則此根本智爲盧舍那
佛, 若約金色界主爲名, 則此根本智爲不動智佛, 若約大心
衆生返照現處爲名, 則此根本智爲自心普光明智佛, 亦是自
心不動智佛, 亦是自心盧舍那佛, 隨擧一名, 皆具三身十身等.
32) 관행(觀行)은 주객의 모든 것을 법에 따라 관찰하여 실상에 이르는 수행법이
    며, 대표적인 것으로 신(身)・수(受)・심(心)・법(法)의 네 가지를 관찰하는 사념
    처관(四念處觀)이 있다. 이외에도 무상관(無常觀), 고관(苦觀), 공무아관(空無我
    觀), 생멸관(生滅觀), 불생불멸관(不生不滅觀), 유관(有觀), 무관(無觀), 비유비무
    관(非有非無觀) 등이 있다.[『대지도론(大智度論)』 권19, 大25, p205a 참조.]
33) 근본보광명지(根本普光明智)는 성품의 청정한 그 자체를 잃지 않는 근본지를 가
    리키며, 부동지(不動智), 제불과지(諸佛果智)라고도 한다.
34) 화장세계(華藏世界)는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또는 연화장장엄세계해(蓮華藏
    莊嚴世界海)를 줄인 말로, 석가모니불의 진신인 비로자나불의 세계를 가리킨
    다.『화엄경(華嚴經)』의「화장세계품(華藏世界品)」(大10, pp.39a-44a)에서는 
    보현보살이 화장세계의 장엄과 화장장엄세계해에 대해서 설하고 있다. 즉 이 화
    장장엄세계해는 비로자나불이 지난 세계해의 티끌같이 많은 겁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낱낱 겁마다 부처님을 친근하고 큰 서원을 닦아서 깨끗하게 장엄한
    것이다.
35) 삼신(三身, tri-kāya)은 불신(佛身)을 세 가지로 유형으로 나눈 것이다. 법신(法
    身)은 진리 그 자체, 또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나타낸 우주 그 자체를 의미한다.
    보신(報身)은 중생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를 의
    미한다. 응신(應身)은 때와 장소, 중생의 능력이나 소질에 따라 나타나 그들을
    구제하는 부처를 의미한다.
36) 십신(十身)은 『화엄경(華嚴經)』에 설해진 열 종류의 불신(佛身)으로 크게 두 가
    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깨달아 이해하는 경계[解境]에서의 십불은 중생신(衆生
    身), 국토신(國土身), 업보신(業報身), 성문신(聲門身), 연각신(緣覺身), 보살신(菩
    薩身), 여래신(如來身), 지신(智身), 법신(法身), 허공신(虛空身)이다.(大9, p.565b)
    다음으로 응화하여 나타나는 경계[行境]의 십불은 정각불(正覺佛), 원불(願佛),
    업보불(業報佛), 주지불(住持佛), 화불(化佛), 법계불(法界佛), 심불(心佛), 삼매
    불(三昧佛), 성불(性佛), 여의불(如意佛)이다.(大9, p.634b) 이러한 불신은 보살이
    수행을 완성해서 체달한 궁극의 불과(佛果)를 여러 방면으로 나누어서 이름을
    붙인 것으로, 결국 한 불신(佛身)에 귀결된다.

이 근본보광명지 가운데 본래 자기와 남·중생과 부처·더러움과 깨끗
함·원인과 결과·이치와 현상·성품과 모습·유정[情]과 유정 아님[非情]
이 갖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다. “이『불화엄경』 법문은 큰 근기
의 중생이 스스로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인 일진법계(一眞法界)의 도(道)를
믿는 것이다. 이 무리가 이 경을 받음을 감당하여 관행이 상응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以此根本普光明智中, 本具自他生佛染淨因果理事性相情非
情. 故論云.“ 此之佛華嚴經法門, 是大根衆生, 自信自心普光
明智一眞法界之道也. 當知, 此輩堪受此經, 觀行相應.”


또 말한다. “시방 모든 부처님의 의지하여 머묾이 없는 지혜로 환(幻)같
이 머무는 장엄문으로써 법계와 허공계에 두루하여 법성(法性)37)이 항상
시방에 두루함이 그림자가 색신(色身)을 상대해서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
자기 몸과 같기 때문이며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본체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시방 모든 부처님의 지혜의 몸이 그림자와 같고 말씀하신 바는
메아리와 같으니,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하여야 마땅히 성불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믿는 것도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믿고 이해한 것이니, 어찌 물러
섬이 있겠는가. 온 몸과 온 마음 나아가 모든 경계가 온전히 법신(法身)의
이지(理)이다. 본래 의지해 머묾이 없으며 본래 얻을 바가 없어서 모든
언어와 분별이 허공의 메아리와 같아서 지음이 없는 반연에 상응하며 물건
에 맡겨 리를 이루어 본래 의지해 머묾이 없다. 이러한 법을 알아서 믿고
이해함 내었으니, 어찌 물러섬이 있겠는가. 설사 습기(習氣)가 있어서
잠시 물러섬을 생각하더라도 신(信)과 주위(住位)에서 한결같이 물러서지
않는다.”38
又云.“ 以十方諸佛無依住智幻住莊嚴門, 遍法界虛空界, 法
性恒遍十方, 如影對現色身, 同自身故, 本不二故, 體無差別
故. 十方諸佛智身如影, 所言如響, 如是信解, 當得成佛. 我今
信者, 亦如是知, 如是信解, 云何有退. 全身全心, 及一切境界,
全是法身理智. 本無依住, 本無所得, 一切語言分別, 如空中
響, 應無作緣, 任物成聲, 本無依住, 了如斯法, 而生信解, 云
何有退. 設有習氣, 暫時念退, 信及住位, 一往不退.”
37) 법성(法性, dharmatā)은 법의 성품, 즉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을 가리킨다. 이
    는 우주 일체의 현상이 갖추고 있는 진실하고 불변하는 본성을 나타내는 것으
    로, 진여법성(眞如法性), 진법성(眞法性), 진성(眞性)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초기불교에서 법성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인 연기(緣起)로 표현되고 있
    다.[『잡아함경(雜阿含經)』권30, 大2, p.217c 참조.] 대승불교에서 법성은 반야공관
    의 입장에서 공(空)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모든 법에는 각각의 모습과 참된 모
    습이 있으며, 각각의 모습은 여러 가지 차별적인 모습이고, 참된 모습은 모든 모
    습을 분별하여 그 실체를 구하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
    든 법의 참된 모습은 공(空)이고, 이 공을 법성이라고 하는 것이다.[『대지도론(大
    智度論)』권32, 大25, 297b 참조.] 이외에도 법성은 열반(涅槃), 불성(佛性), 진여
    (眞如), 실제(實際)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법성이
    더욱 부각되어 ‘부처님 그 자체’로 표현되고 있다.(大10 p.81c 참조.)
38) 이 부분은『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16에 나오는 내용을 간추려서 인용한 것
    으로 보인다. “설령 습기로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가 잠시 물러섬을 생각하더
    라도 신위(信位)와 주위(住位)는 한 번 이르면 물러서지 않아서 자기의 몸과 마
    음이 전부 법계불(法界佛)의 자타 없는 성품임을 바로 믿게 된다. 그리하여 시
    방 모든 부처님의 의지하여 머묾이 없는 지혜로 환(幻)같이 머무는 장엄문으로
    써 법계・허공계와 동등함으로서 법성이 항상 시방에 두루하여 그림자처럼 색
    신을 대현하면서도 자신과 동등하기 때문에 본래 둘이 아닌 것이며, 본체가 차
    별이 없기 때문에 시방 모든 부처님의 지신(智身)이 그림자와 같고 말하는 바가
    메아리와 같은 것이니, 이렇게 믿고 이해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된다. 내가 지금
    믿는 것도 또한 이렇게 알고 이렇게 믿고 이해하는 것이니 어찌 물러섬이 있겠
    는가? 온 몸과 온 마음의 일체 경계가 총체적으로 이 법계의 한 참된 법신의 체
    용이지(體用理智)이니 어느 곳에 머물러 있으며 어느 곳에 물러서겠는가? 만약
    몸과 마음이 의지하거나 머묾이 있다면 의지하는 곳을 내버릴 때 즉시 물러섬
    과 상실이 있겠지만, 스스로 몸과 마음이 본래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고 본래 얻
    을 바가 없는 줄을 요달하면 일체의 언어 분별이 허공 속의 메아리 같아서 지음
    없는 반연에 하여 사물에 맡겨 소리를 이루어 본래 의지하거나 머묾이 없다.
    이 같은 법을 요달하여 믿음과 이해를 내면 물러섬이 없겠지만, 의지하는 법이
    있어서 발한 자는 얻은 바와 의지하여 집착하는 곳을 내버리면 이내 물러섬
    이 있다.”(大36, pp.825c22-826a6. 設習氣未淳熟者, 暫時念退, 信及住位一往不退, 
    爲正信己身心, 總是法界佛, 無自他性故. 以十方諸佛無依住智幻住莊嚴門, 等法界虛
    空界, 法性恒遍十方, 如影對現色身, 同自身故, 本不二故, 體無差別故, 十方諸佛智身
    如影, 所言如響, 如是信解, 當得成佛. 我今信者, 亦如是知, 如是信解, 云何有退. 全身
    全心一切境界, 總是法界一眞法身體用理智, 住在何所, 退至何處. 若也身心有所依住,
    放卻依處卽有退失, 自了身心本無依住本無所得, 一切語言分別, 如空中響應無作緣,
    任物成聲本依住. 了如斯法而生信解, 卽無退轉, 有所依法而發心者, 放卻所得所依
    著處, 卽有退轉.)

 

또 말한다. “대체로 항상 반드시 스스로 자기의 몸·말·뜻의 경계와 모든
행의 분별이 다 여래의 몸·말·뜻의 경계와 모든 행의 분별 가운데서 나오
며, 모두 본체가 없고 성품도 없으며 나[我]도 없고 사람[人]도 없으며, 다
만 법계의 지음이 없는 자성으로써 반연해 생기니, 본래 근기와 처소도 얻
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성품이 스스로 법계여서 안팎과 중간이 없음을 믿어
야 한다.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관찰하여 자기를 관찰하고 남을
관찰함에 동일한 체성이여서 나와 내 것이 없다. 선정[定]과 지혜[慧]의 힘
으로써 이와 같이 수행하고 이미 스스로 알았으면 중생의 고통을 관찰하여
스스로 이롭고 남을 이롭게 함을 다 보현(普賢)39)의 광대한 행원(行願)처럼
할 것이니, 한결같이 이 경전의 오위(五位) 법칙과 같다.”40)
又云. “大體常須自信自己身語意境界, 一切諸行分別, 皆從如
來身語意境界, 諸行分別中生, 皆無體無性無我無人, 但以法
界無作自性緣生, 本無根機處所可得, 性自法界, 無有內外中
間. 應如是知, 如是觀察, 觀自觀他, 同一體性, 無我我所. 以
定慧力, 如是修行, 旣自知己, 觀衆生苦, 自利利他, 皆如普賢
廣大行願, 一如此經五位法則也.”
39) 보현(普賢, samantabhadra)은 문수보살(文殊菩薩)과 함께 석가보니불의 협시로
    일컬어지는 보살의 이름이다.『화엄경(華嚴經)』에서 보현보살은 경의 처음과
    끝에 등장하면서 비로자나여래를 대신하여 화엄의 세계를 드러내는 역할을 한
    다. 앞부분에서는 옛날 비로자나여래 밑에서 보살행을 실천하던 보살들을 대표
    하여 비로자나여래가 현현한 화엄장장엄세계해(華嚴藏莊嚴世界海)의 의미를
    설명한다. 뒷부분에서는 여러 선지식을 두루 친견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방문
    한 선재동자를 위해 법계를 열어 보인다. 이와 같이 『화엄경』에서 실질적인 설
    법자의 역할을 하는 보현보살은 ‘행원(行願)’을 상징한다. 보현의 행원은 위없는
    깨달음을 증득하고 모든 중생을 남김없이 구제할 때까지 노력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보현행원은 열 가지 광대한 행원으로 집약되며, 40권본『화엄
    경』의「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에 수록되어 있다. “첫째는 모든 부처님께 예경
    하는 것이며, 둘째는 여래를 칭찬하는 것이며, 셋째는 널리 공양하는 것이며, 넷
    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을 따르는 공덕이며, 여섯째는 법
    륜을 굴려 주실 것을 청하는 것이며, 일곱째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머물러 주실
    것을 간청하는 것이며, 여덟째는 언제나 부처님을 모시고 배우는 것이며, 아홉
    째는 항상 모든 중생을 따르는 것이며, 열째는 널리 모두를 회향하는 것이다.”
    (大10, p.844b24-28. 一者禮敬諸佛, 二者稱讚如來, 三者廣修供養, 四者懺悔業障, 
    五者隨喜功德, 六者請轉法輪, 七者請佛住世, 八者常隨佛學, 九者恒順衆生, 十者普
    皆迴向.)
40)『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32(大36, p.941c3-10).

또 말한다. 이 경의「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보살마하살은 응당 자
기 마음의 생각 생각에 항상 부처님이 정각(正覺)을 이룸이 있는 줄 알아
야 한다”41)라고 하였으니, 모든 부처님 여래가 이 마음을 여의지 않고 정각
을 이룸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다. 또 말한다. “모든 중생도 마음이 또한 이
와 같아서 다 여래가 정각을 이룸이 있다. 이것은 범부와 성인의 마음이 자
체가 청정하여 다름이 없는데 다만 미혹함과 깨달음이 있을지언정 털끝만
큼도 차이나지 않으며, 다만 한 마음에 망령된 생각이 나지 않으면 마음과
경계가 탁 트여서 성품이 스스로 생겨남이 없으며,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어서 곧 정각을 이룸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다. 문득 이 법으로 널리 중생
을 이롭게 하는 것이 보현행이다. 그러므로 심성의 이치가 없는 미묘한 지
혜로 일승(一乘)과 삼승(三乘)·인간과 천상의 인과를 간택하는 것을 문수
(文殊)라 이름하며, 차별의 지혜를 따라 동행하여 근기를 알아 중생을 이롭
게 해서 휴식이 없는 것을 보현이라 이름하며, 대비로써 모든 중생을 구호
하기를 서원하는 것을 관음(觀音)42)이라 이름한다. 이 세 가지 마음으로써
일시에 닦아 익힘을 비로자나(毘盧遮那)라 이름하며, 관습(慣習)의 마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자재(自在)라고 이름하며, 법이 밝지 않음이 없는 것을 무
애(無碍)라고 이름하며, 지혜가 근기를 따라 응하여 널리 시방에 두루하되
성품이 오고 감이 없는 것을 신통(神通)이라 이름한다. 닦음이 처음에 있지
만 관습을 모두 얻고, 망령되어서 많은 겁을 내지만 지혜의 해는 옮기지 않
는다. 이것은 모두 어렵지 않은데 어찌 반드시 짓지 않겠는가. 배워서 얻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복은 인간과 천상보다 뛰어나겠지만 믿지 않고 닦지 않
으면 괴로움이 어찌 다하겠는가.”43)
又云. 此經如來出現品云,“ 菩薩摩訶薩, 應知自心念念, 常有
佛成正覺,” 爲明諸佛如來, 不離此心, 成正覺故. 又云, “一切
衆生, 心亦如是, 悉有如來成正覺. 此明凡聖心, 自體淸淨無
異, 但有迷悟, 不隔分毫, 但一心妄念不生, 得心境蕩然, 性自
無生, 無得無證, 卽成正覺故. 便以此法, 廣利衆生, 是普賢行.
故無心性理妙慧, 簡擇一乘三乘人天因果, 名爲文殊, 隨差別
智同行, 知根利生, 無有休息, 名爲普賢, 願以大悲救護一切
衆生, 名爲觀音. 以此三44)心, 一時修習, 名毘盧遮那, 慣習心
成, 名爲自在, 無法不明, 名爲無碍, 智隨根應, 普遍十方, 性
無來往, 名曰神通. 修之在初, 慣習惣得, 妄生多劫, 智日不遷.
此惣非難, 何須不作. 學而不得, 猶福勝人天, 不信不修, 苦窮
何盡.”
41)『화엄경(華嚴經)』권52,「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大10, p.275b23-24).
42) 관음(觀音, avalokiteśvara)은 자비심으로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보
    살을 가리킨다. 관음이라는 말은 아박로지저습벌라(阿縛盧枳低濕伐羅)로 음사
    하며, 구역에서는 광세음(光世音), 관세음(觀世音), 신역에서는 관자재(觀自在),
    관세자재(觀世自在), 관세음자재(觀世音自在) 등으로 번역한다.『화엄경(華嚴
    經)』에서는 관음보살이 머무는 곳을 남인도의 말라바르 지방에 있다는 마리야
    산 속의 보타락가(補陀落迦)라고 하고 있다.(大10, p.366c) 그렇지만 관음신앙이
    동북아권 전역에 크게 유행함에 따라 중국, 한국 등에 관음의 주처로 불리는 영
    험한 도량이 수없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43)『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32(大36, p.941b5-17).
44) 저본에는「四」로 되어 있으나 을본과『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에 따라「三」으
    로 바꾸었다

또 말한다. “이 경은 불과(佛果)의 문이나 도리어 범부 가운데 즐겁게 배
워 생사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어서 생사의 바다 가운데에서 모든
지혜를 취하게 한다. 만일 진실로 이승(二乘)이 모임에 있다면 귀머거리와
같아서 듣지 못하고, 삼승보살은 비록 육바라밀(六波羅密)45)을 행하여 육
신통(六神通)46)을 얻을지라도 괴로움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세간을
싫어하여 정토에 왕생하며, 설사 자비심이 있는 사람이 애착의 습기[愛習]
를 간직함으로써 세상에 머물러 중생을 이롭게 하더라도 비록 이 가르침을
듣지만 믿음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니, 경 가운데서 스스로 밝힌 것과 같
다. 이 경은 그렇지 않아서 모든 중생은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본지로부터
생겨서 도리어 근본보광명지로써 보리심(菩提心)47)을 일으키는 시초로
삼는다.”
又云. 經是佛果門, 還授與凡夫中, 樂學不厭生死者, 於生死
海中, 取一智也. 若實二乘在會, 如聾不聞, 三乘菩薩, 雖行
六波羅密, 得六神通, 有畏苦之心, 厭患世間, 往生淨土, 設有
慈悲心者, 以留愛習, 住世利生, 雖聞此敎, 不能生信, 如經中
自明. 此經不爾, 以一切衆生, 從一切諸佛根本智生, 還以根本
普光明智, 爲發菩提心之初也.
45) 육바라밀(六波羅蜜, śad3 -pāramitā)은 대승보살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닦아
야 하는 여섯 가지 실천행으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지계바라밀(持戒波羅
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다. 이 가운데 보시바라밀・지계바라밀・인욕바라밀
은 계학(戒學)에 포섭되고, 선정바라밀은 정학(定學)에 포섭되고, 반야바라밀은
혜학(慧學)에 포함된다. 그리고 정진바라밀은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
學)에 모두 포섭된다.
46) 육신통(六神通, sad-abhijñā)은 부처님과 보살이 갖춘 여섯 가지의 자유자재한
    신통력을 말한다. ①신족통(神足通)은 자유자재로 마음이 바라는 대로 몸을 나
    투는 능력이다. ②천안통(天眼通)은 모든 중생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의 모습과
    세간의 갖가지 형상을 보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능력이다. ③천이통(天耳通)
    은 모든 중생의 생사고락(生死苦樂)의 소리와 세간의 갖가지 소리를 듣는 데 아
    무런 장애가 없는 능력이다. ④타심통(他心通)은 모든 중생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을 자유자재로 아는 능력이다. ⑤숙명통(宿命通)은 자신과 모든 중생의 숙세
    (宿世)와 행위를 장애 없이 아는 능력이다. ⑥누진통(漏盡通)은 삼계(三界)의 모
    든 미혹을 끊어서 다시는 삼계의 생사(生死)를 받지 않는 능력이다.
47) 보리심(提心, bodhi-citta)은 정각을 성취하기 위하여 일으키는 마음이며, 도
    심(道心) 또는 도의(道意)라고도 한다.『화엄경(華嚴經)』의「입법계품(入法界
    品)」에서는 “보리심이란 종자와 같으니 모든 불법을 일으키기 때문이며, 보리심
    이란 좋은 밭 같으니 중생의 순수하고 청정한 법을 기르기 때문이다”라고 말
    하고 있다.”(大10, p.429b25-27. 菩提心者, 猶如種子, 能生一切諸佛法故, 菩提
    心者, 猶如良田, 能長衆生白淨法故.)

위와 같은 논문의 뜻에 의거하여 세 번을 깊이 생각하니, 이 논주가 보인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한다는 뜻은, 요컨대 마음을 관하여 도(道)에 들어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항상 반드시 자기의 몸·말·뜻과 나아가 경계의 모
습은 모두 여래의 몸·말·뜻·경계 가운데서 나옴을 스스로 믿게 하려는
것이다. 모두 본체가 없고 성품이 없으니, 본래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본체
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법계의 지음 없는 자성으로 반연해 나왔기
때문에 인연과 인연의 모양은 온전히 성품이 일어난 것이고 성품이 스스로
법계여서 안팎과 중간이 없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관찰해
야 한다. 이러한 즉 부처와 중생은 본래 근본보광명지의 성해(性海)로부터
환(幻)같이 나타났기 때문에 중생과 부처의 모습과 작용에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온전히 근본보광명지의 모습과 작용이다. 그러므로 본래 한 본체이
지만 작용을 일으킴이 거듭 거듭하니, 이것은 성기문(性起門)에 해당한다.
據如上論文之義, 三復深思, 此論主所示, 生佛互融之義, 要令
觀心入道之者, 常須自信自己身語意, 及境界之相, 皆從如來
身語意境界中生. 皆無體無性, 本不二故, 體無差別故. 但以法
界無作自性緣生故, 緣緣之相, 全性而起, 性自法界, 無內外中
間, 應如是知, 如是觀察也. 此則佛及衆生, 本從根本普光明智
性海幻現故, 生佛相用, 似有差殊, 全是根本普光明智之相用
也. 故本是一體而起用重重, 此當性起門也.


다른 곳에서 논의한 바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한다는 뜻은 이미 불과
의 지혜를 이룬 노사나불이 중생의 생멸하는 팔식(八識) 가운데 있으며, 중
생도 부처의 지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 이치와 다르지 않은 한 현상[一
事]이 온전히 이치의 성품을 포섭할 때에 저 이치와 다르지 않은 많은 현상
[多事]으로 하여금 의지한 바의 이치를 따라서 모두 하나 가운데에 나타나
게 한다. 이는 곧 중생과 부처는 본체가 다르지만 이치를 따라 널리 두루함
이 마치 인다라망 가운데 구슬과 구슬이 본체가 다르지만 그림자와 그림자
가 섞여 펼쳐진 것과 같다. 이는 연기문(緣起門)의 현상과 현상이 융섭함에
해당하는 것이다. 뜻과 이치를 발전시켜 논의하고 또 논의한 즉 비록 한 이
치에 돌아가지만 관행해 도를 얻는 문 가운데엔 뜻이 가깝고 멂이 있으니,
청컨대 모든 의론을 버리고 묵묵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他處所論生佛互融之義, 已成果智盧舍那佛, 在衆生生滅八識
之中, 衆生亦在佛智之中者. 是不異理之一事, 全攝理性時, 令
彼不異理之多事, 隨所依理, 皆於一中現也. 此則生佛體殊而
隨理普遍, 如因陁羅網中, 珠珠體別而影影交羅也. 此當緣起
門事事融攝也. 義理展轉, 論之又論則雖歸一致, 觀行得道門
中, 意有親疎, 請捨諸議論, 黙而思之.

또 다른 곳에 서술된 성불의 이치는 ‘먼저 비로자나의 법계를 깨닫고, 뒤
에 보현의 행해(行海)를 닦는 것이다’라고 말한다.48) 비로자나의 법계를 밝
히면 널리 연기문 가운데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모습을 늘어놓고, ‘먼
저 반드시 생각을 일으켜 관할 것이니, 만약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불과
(佛果)의 걸림 없고 원만한 덕을 잃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크게 그
렇지 않으니, 어찌 불과의 원만한 덕을 망상으로 인하여 나타내겠는가. 만
약 생각으로 인하여 나타내는 것이라면 이는 무상법(無常法)이다. 경에도
이르지 않았던가? “만약 어떤 사람이 부처의 경계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맑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며,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고 마음
이 향하는 바가 다 걸림 없도록 하라.”49)
又他處所述成佛之義曰,‘ 先悟毘盧法界, 後修普賢行海.’ 明
毘盧法界, 則廣陳緣起門中, 事事無碍之相, 乃曰‘先須起想
觀之, 若不起想, 則失佛果無碍圓德.’ 此大不然, 何得佛果圓
德, 因妄想而現. 若因想而現者, 是無常法也. 經不云乎? “若
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
皆無碍.
48) 이 구절과 유사한 부분이 요(遼)의 도진(道㲀)이 편찬한『현밀원통성불심요집
    (顯密圓通成佛心要集)』에 보인다. 즉 “처음 비로의 법계를 깨닫고, 뒤에 보현의
    행해를 닦는다.”(大46, p.990a25. 初悟毘盧法界, 後修普賢行海.)
49) 이 부분은『화엄경(華嚴經)』 권50의「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 나온다. 즉 “만
    약 부처님의 경계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맑히기를 허공과 같이 하며,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고 마음이 향하는 바가 다 걸림 없도록 하라.”(大10,
    p.265b10-11. 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礙.)

만약 하열한 사람이 자기 마음의 부처 지혜를 반조해 밝혀낼 수 없음에
대하여 [그에게] 권하여 생각을 두어서 우러러 믿어 물러서지 않도록 한다
면 또한 옳을 것이다. 이 논의 뜻은 그렇지 않아서 단지 큰 마음의 범부로
하여금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인 일진법계의 도(道)를 반조하게 하면
곧 문득 노사나불과 부동지불 등을 깨달을 것이다. 시방 모든 부처님이 비
록 명호의 차이와 의보[依]·정보[正]의 장엄이 각각 다름이 있지만 모두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의 모습과 작용이니, 모두 바깥 물건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가 양이 허공 법계와 같음으로써 한 부처님도 근본 지혜로
부터 일어나지 않음이 없으며, 한 중생도 근본 지혜로부터 생겨나지 않음
이 없다. 그러므로 부처와 중생이 지혜를 의지해 환(幻)같이 생겨나며, 지
혜를 의지해 환(幻)같이 머물러 생겨나지만 비롯한 바가 없으며, 사라지지
만 이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다. “자기 마음과
경계의 자타가 널리 참된 줄을 요달하면 널리 중생의 마음·자기의 마음·
여래의 마음과 몸이 동일한 본체의 모습이여서 모두 환(幻)같은 모습과 같
음을 보아서 생기고 머물고 사라지고 파괴되는 모습을 보지 않으면 가까운
것이고, 여기에 미혹하여 따로 구한다면 먼 것이니, 이와 같은 법은 경에
자세히 밝힌 것과 같다.”
若對下劣人, 未能返照自心佛智發明者, 勸令存想, 仰信不退,
亦得也. 此論之意, 則不然, 只令大心凡夫, 返照自心根本普光
明智一眞法界之道, 則便悟盧舍那佛不動智佛等. 十方諸佛,
雖有名號差殊, 依正莊嚴各別, 皆是自心普光明智之相用, 俱
非外物也. 以自心普光明智, 量同虛空法界, 無有一佛, 不從本
智而起, 無有一衆生, 不從本智而生. 故知佛及衆生, 依智幻
生, 依智幻住, 生無所從, 滅無所至也. 故論云.“ 達自心境自
他普眞, 則普見衆生心自心如來心及身, 同一體相, 皆如幻相,
不見生住滅壞相則近, 迷此別求則遠, 如是之法, 如經廣明.”

또 논주가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는 중생 마음속의 부처이며, 자기 근기
의 감당함을 따라 다른 물건이 없다. 일체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려고 한다
면 자기의 무명이 본래 부처인 줄 깨달아라.” 이 게송의 뜻을 자세히 생각
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마음을 관하는 사람이 자기의 무명을 깨
달아 이룬 바 불과의 지혜가 곧 이불(理佛)이고 곧 사불(事佛)이며, 곧 자
불(自佛)이고 곧 타불(他佛)이며, 곧 인불(因佛)이고 곧 과불(果佛)이다. 그
러므로 “처음의 물과 나중의 물이 한 성품의 물이며, 인불(因佛)과 과불(果
佛)이 한 성품의 부처이다”50)라고 말한다. 이미 “부처는 중생 마음속의 부
처이며, 자기 근기의 감당함을 따라 다른 물건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50)『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7(大36, p.764a1-2).

又論主頌云.“ 佛是衆生心裏佛, 隨自根堪無異物. 欲知一切
諸佛源, 悟自無明本是佛.” 將此頌意, 字細思看, 可以知之.
今日觀心之士, 悟自無明所成果智, 卽理佛卽事佛, 卽自佛卽
他佛, 卽因佛卽果佛. 故云,“ 初水後水一性水, 因佛果佛一性
佛.” 旣云,“ 佛是衆生心裏佛, 隨自根堪無異物.”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불과의 지혜를 이룬 노사나불의 십신상해(十
身相海)가 온전히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불이며, 다만 근기의 감당할 바를
따라서 나타난 바깥 모습과 비슷하지만 의보와 정보의 장엄은 본래 바깥
물건이 아니다.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는 양이 법계·허공계와 같고, 모습과
작용이 자재하여 하나일 수도 있고 많을 수도 있으며,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며, 중생일 수도 있고 부처일 수도 있으며, 자기일 수도 있고 남
일 수도 있으며, 나타날 수도 있고 숨을 수도 있으며, 말 수도 있고 펼 수도
있으며, 거스를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으며, 착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
며, 더러울 수도 있고 깨끗할 수도 있다. 이 부사의한 큰 광명의 갈무리
는 모든 법을 포섭하여 온갖 변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當知. 已成果智盧舍那佛十身相海, 全是自心普光明智佛, 但
隨根所堪, 現似外相, 依正莊嚴, 本非外物也. 以自心普光明
智, 量同法界虛空界, 相用自在, 能一能多, 能大能小, 能生能
佛, 能自能他, 能現能隱, 能卷能舒, 能逆能順, 能善能惡, 能
染能淨. 是不思議大光明藏, 含攝諸法, 爲萬化之源.

마땅히 알아야 한다. 노사나불이 범부의 지위로부터 비로소 스스로 발심
하여 살도를 행해서 불과의 지위[果地]에 이르기까지, 소유한 큰 자비·
큰 지혜·큰 서원과 낱낱 생각·낱낱 행·낱낱 법·낱낱 때·낱낱 곳은 모두
자기 마음의 보광명지가 움직이는 것이다. 보광명지는 크게 사무쳐 텅 비
고 밝으며, 신령하고 미묘하여 방소[方]가 없으며, 큰 작용은 자재하여 법
그대로 한결같으니, 겨우 한 법이 반연하여 생김이 있어도 자기 마음의 성
품이 일어난 공덕이 아님이 없다. 전체[摠]와 개별[別]·같음[同]과 다름
[異]·이루어짐[成]과 무너짐[壞]이 동시에 자재하므로 지혜로써 그것을
비추어야 볼 수 있으며, 정식(情識)으로 생각해서는 알지 못한다.
當知, 盧舍那佛, 從凡夫地, 始自發心, 行菩薩道, 至於果地,
所有大悲大智大願, 一一念一一行一一法一一時一一處, 皆是
自心普光明智之運爲也. 以普光明智, 廓徹虛明, 靈妙無方, 大
用自在, 法爾恒然, 纔有一法緣生, 無非自心性起功德. 以摠別
同異成壞, 同時自在故, 以智照之可見, 情識思而不知.

또 자기 마음속 모든 부처의 보광명지로써 널리 모든 중생을 비추면, 중
생의 모습이 곧 여래의 모습이며, 중생의 말이 곧 여래의 말이며, 중생의
마음이 곧 여래의 마음이며, 나아가 생산을 다스리는 업과 숙련된 기술의
재주 모두 여래의 보광명지가 움직이는 모습과 작용이여서 도무지 별다
름이 없다. 다만 중생이 자기 업으로 스스로 속아서 범부와 성인·자기와
남·원인과 결과·더러움과 깨끗함·성품과 모습 등을 스스로 보아서 스스
로 분별을 내어 스스로 물러섬을 내는 것이며, 보광명지가 일부러 이와 같
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용맹스러운 마음을 일으켜 자기 무명이 본래
신이하고 본래 진실하여 공(功)이 없는 큰 작용이 항상 그러한 법임을 깨
달으면 곧 문득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이다.
又以自心內諸佛普光明智, 普照一切衆生, 則衆生相卽如來相,
衆生語卽如來語, 衆生心卽如來心, 乃至治生産業工巧技藝,
皆是如來普光明智運爲之相用, 都無別異也. 但是衆生, 自業
自誑, 自見是凡是聖, 是自是他, 是因是果, 是染是淨, 是性是
相等, 自生分別, 自生退屈, 非由普光明智, 故作如是. 若能發
勇猛心, 悟自無明, 本神本眞, 無功大用恒然之法, 則便是諸佛
不動智.

그러므로 논주가 대비심으로써 간곡하게 “모든 중생은 본래 모든 부처
의 근본지로부터 나온 것이니, 도리어 근본보광명지로써 보리심을 일으
키는 시초를 삼는다”라고 말한다. 또 “일체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려고 하
거든, 자기 무명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어찌 지혜
로운 사람이 옛 성인의 이와 같이 간곡한 말을 듣고 믿음을 내지 않으며,
또한 자기 마음을 관하지 않고 담론을 종일토록 하여 헛되이 일생을 보내
겠는가?
故論主以大悲心, 叮嚀之曰,“ 以一切衆生, 本從諸佛根本智
生, 還以根本普光明智, 爲發菩提心之初也.” 又云,“ 欲知一
切諸佛源, 悟自無明本是佛.” 何有智者, 得聞先聖如是懇苦之
言, 而不生信, 亦不觀自心, 談論終日, 虛過一生耶?

3.
묻는다. 그대가 말한 바를 들으니, 매우 깊어서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단지 같은 본체의 뜻이며 다른 본체의 뜻은 없다. 왜냐하면 지금 십계(十
界)의 의보와 정보의 염(染)・정(淨) 연기51)가 분명히 차별되기 때문에 자
타의 상속이 각각 다른데, 어떻게 이미 불과의 지혜를 이룬 노사나불로써
한결같이 자불(自佛)을 삼겠는가? 평범한 무리들이 논한 바 노사나과지(盧
舍那果智)에 의거하는 이치와 중생과 더불어 생멸하는 팔식(八識)에 의거
하는 이치가 한 본체인 까닭에 의거하는 이치에 따라 닦지 않는 중생의 마
음 가운데서 인(因)을 짓고 과(果)를 짓는다고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問. 聞汝所說, 甚深難思. 然只是同體之義, 無異體之義也. 所
以然者, 現今十界依正染淨緣起, 歷然差別故, 自他相續各異
也, 何得以已成果智盧舍那佛, 一往將爲自佛耶? 不若常徒所
論盧舍那果智所依理, 與衆生生滅八識所依理一體故, 隨所依
理在不修衆生心中, 作因作果也.
51) 염(染)・정(淨) 연기는 염문연기(染門緣起)와 정문연기(淨門緣起)를 가리키며,
    이는 법계연기(法界緣起)를 두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중국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儼)은 연기적 존재양상 전체가 법계연기에 포섭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범부염법(凡夫染法)의 입장과 보리정분(菩提淨分)의 입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범부염법은 염문(染門)의 법계연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연기일심
    문(緣起一心門)과 의지일심문(依持一心門)으로 나뉜다. 보리정분은 정문(淨門)
    의 법계연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유(本有)・본유슈생(本有修生)・수생(修生)・
    수생본유(修生本有)의 네 가지로 나뉜다. 이는 중생에게 청정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그 청정성이 자각되는 과정을 네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 것이
    다.[『수현기(搜玄記)』 권3, 大35, pp.62c-63a 참조.]

답한다. 앞에서 이미 논했으니, 다만 마음을 쉬어 다툼을 없애고 생각을
비워 안으로 비춰서 미묘한 과보를 이루는 것이 요점이 되는데 어찌 다시
묻는 것인가? 이미 물었으니, 내가 다시 말하리라. 만약 연기문 가운데 융
섭하는 뜻을 논한다면 진실로 힐난하는 바와 같다. 지금 이 논주의 근본 취
지는 단박에 부처 지혜를 깨달은 큰 마음의 범부를 위하여 곧바로 모든 부
처의 보광명지과해(普光明智果海)인 일진법계의 도(道)를 보여 말을 여읜
가운데 부득이하게 말한 것이다.
答. 前已論之, 但息心無諍, 虛懷內照, 成辦妙果爲要, 何更問
耶? 旣以伸問, 吾更言之. 若論緣起門中, 融攝之義, 則誠如所
難. 今此論主旨趣者, 爲頓悟佛智大心凡夫, 直示諸佛普光明
智果海一眞法界之道, 於離言中, 不得已而說也.

만약 말한 대로 집착한다면 같음 가운데 다름이 없고 다름 가운데 같음
이 없으며, 자기를 말하면 곧 남이 아니고 남을 말하면 곧 자기가 아니다.
만약 뜻을 얻어 안다면 곧 같음이고 곧 다름이며 곧 자기이고 곧 남이다.
지금 뜻을 얻어 아는 사람을 위하여 이상(異相)을 갖춘 동상(同相)과 타불
(他佛)을 갖춘 자심불(自心佛)을 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선 지금 단박에
깨달은 이는 두렷이 법계를 비춘 자기 마음의 경계가 본래 자기와 남・범부
와 성인・원인과 결과를 갖춘 것에 근거해서 자기 마음이 보광명지불과임
을 설한 것일 뿐이다. 구경에는 같음도 아니고 다름도 아니며 자기도 아니
고 남도 아니니, 말을 여읜 지혜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若如言執之, 則同中無異, 異中無同, 言自則非他, 言他則非自
也. 若得意會之, 則卽同卽異, 卽自卽他也. 今爲得意會之者,
說具異相之同相, 具他佛之自心佛也. 然且約今時頓悟者, 圓
照法界自心之境, 本具自他凡聖因果, 說自心普光明智佛果耳.
究竟非同非異, 非自非他, 以離言智境界故.

그대가 만약 지금 범부와 성인의 상속이 각각 다르다는 견해를 고집하여
‘자불(自佛)과 타불(他佛)・동상(同相)과 이상(異相)을 섞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면, 완연히 그릇된 인식이어서 정집(情執)을 잊지 못한 것이니, 어느
때에 중생과 부처가 원만히 갖추어지고 같음과 다름이 자재한 본래 지혜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만약 오직 인과문(因果門)만 논하여 입씨름을
종일토록하면 가능할 것이다. 만약 관행문에 의하여 빨리 보리를 증득하여
번뇌[塵勞]에서 벗어나고 널리 중생의 미혹함을 제도하여 부처님의 수명
을 이으려고 한다면 항상 자기의 한 마음으로써 범부와 성인・원인과 결과
・의보와 정보의 차별을 융통해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육상(六相)52)의 뜻
을 갖추어 정식(情識)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나중에 마땅히 다시 밝힐 것
이니, 이는 경론의 요지이며 모든 성인의 공통된 근본이다.
汝若執現今凡聖相續各別之見云, ‘自佛他佛, 同相異相, 不可
混濫,’ 則宛是遍計, 情執未忘, 何時得入生佛圓具, 同異自在
本智之境界耶? 若唯論因果門, 口諍終日則可矣. 若依觀行門,
速證菩提, 透脫塵勞, 廣度群迷, 續佛壽命者, 恒以自己一心,
融會凡聖因果依正差別. 其中具六相義, 非情識知. 後當更明,
此是經論要旨, 千聖通宗也.
52) 육상(六相)은 모든 존재가 다 갖추고 있는 여섯 가지 모습이며, 각각의 명칭은
   『화엄경(華嚴經)』에서 유래한다.(大9, p.545b) 즉 총상(總相, sān3 ga)은 전체인
    모양이고 별상(別相, upān3 ga)은 각각의 모양이며, 동상(同相, salaks3 an3 a)은 같
    은 모양이고 이상(異相, vilaks3 an3 a)은 다른 모양이며, 성상(成相, vivarta)은 이
    루는 모양이고 괴상(壞相, sam3 varta)은 무너지는 모양이다. 세친(世親)은『십
    지경론(十地經論)』에서 육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며,(大26, pp.124c-125a) 혜원
    (慧遠)은 이를 수용하여 발전시키게 된다. 화엄종에서는 지엄(智儼)이 처음으로
    육상의 원융을 설하고, 법장(法藏)이 조직화하고 있다. 즉 총별・동이・성괴라는
    세 쌍의 대립되는 모양이 서로 원융무애한 관계에 놓여 있어 하나가 다른 다섯
    을 포함하면서도, 여섯이 그 나름의 모습을 잃지 않음으로써 법계연기가 성립
    한다는 것이다.[『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권4, 大45, pp.507c-509a 참조.]

「여래출현품」에 이르지 않았던가? “보살마하살이 이 법을 듣고서 곧 큰
관찰로써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동일한 체성인 줄 알며, 곧 선근을 회향하
는 지혜로써 널리 이와 같은 법에 들어가되 들어가지 않고서 들어가며, 한
법에 반연이 있지 않고 항상 한 법으로써 모든 법을 관한다. 불자야,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면 조금 공력(功力)을 지어서 무사자연
지(無師自然智)53)를 얻을 것이다.”54)
如來出現品, 不云乎?“ 菩薩摩訶薩, 聞此法已, 卽能以大觀察,
知三世諸佛同一體性, 卽能以善根廻向智, 普入如是法, 不入
而入, 不於一法而有攀緣, 恒以一法, 觀一切法. 佛子, 菩薩摩
訶薩, 成就如是功德, 少作功力, 得無師自然智.”
53) 무사자연지(無師自然智)는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이 본래 스스로
    가지고 있는 지혜를 뜻한다. ‘무사’란 스승이나 타인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자연’이란 조작하지 않은 본래 그대로의 모습이다.
54) 이 부분은『화엄경(華嚴經)』권52의「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의 내용을 간추
    려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보살마하살이 이 법을 들으면 능히 평등한 지혜로
    써 한량없는 법을 알며, 정직한 마음으로써 모든 분별을 여의며, 뛰어난 욕구와
    즐거움으로써 모든 부처님을 친견하며, 생각을 내는 힘으로써 평등한 허공계에
    들어가며, 자유자재한 생각으로써 그지없는 법계에 행하며, 지혜의 힘으로써
    모든 공덕을 구족하며, 자연지로써 모든 세간의 때[垢]를 여의며, 보리심으로
    써 모든 시방의 그물에 들어가며, 큰 관찰로써 삼세의 부처님들이 동일한 체성
    인 줄 알며, 선근을 회향하는 지혜로써 두루 이와 같은 법에 들어가되 들어가지
    않고서 들어가며, 한 법에 반연이 있지 않고 항상 한 법으로써 모든 법을 관찰한
    다. 불자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면 조금 공력을 지어서 무사
    자연지를 얻을 것이다.”(大10, pp.277c25-278a6. 菩薩摩訶薩, 聞此法已, 則能以
    平等智, 知無量法, 則能以正直心, 離諸分別, 則能以勝欲樂, 現見諸佛, 則能以作意
    力, 入平等虛空界, 則能以自在念, 行無邊法界, 則能以智慧力, 具一切功德, 則能以
    自然智, 離一切世間垢, 則能以菩提心, 入一切十方網, 則能以大觀察, 知三世諸佛同
    一體性, 則能以善根迴向智, 普入如是法, 不入而入, 不於一法, 而有攀緣, 恒以一法, 
    觀一切法. 佛子, 菩薩摩訶薩, 成就如是功德, 少作功力, 得無師自然智.)

또 경에 이르기를, “삼라(森羅) 및 만상(萬象)은 한 법의 도장 찍힘이다”
라고 하였다.55) 현수(賢首)56)국사가 말한다. “한 법이란 이른바 한 마음이다.
이 마음은 곧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하니, 곧 한 법계의 대총상법
문체(大摠相法門體)57)이다. 오직 망령된 생각에 의하여 차별이 있으니, 만약
망령된 생각을 여의면 오직 한 진여이기 때문에 해인삼매(海印三昧)58)라고
말한 것이다.59) 해인(海印)은 진여본각(眞如本覺)이다. 망령됨이 다하고 마
음이 맑으면 온갖 형상이 가지런히 나타남이 마치 큰 바다가 바람으로 인해
물결을 일으키다가 만약 바람이 그쳐서 바닷물이 맑고 깨끗해지면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은 까닭에 해인삼매라고 한다.”60)
又經云,“ 森羅及萬像, 一法之所印.” 賢首國師云.“ 言一法
者, 所謂一心也. 是心, 卽攝一切世間出世間法, 卽是一法界
大摠相法門體. 唯依妄念, 而有差別, 若離妄念, 唯一眞如故,
言海印三昧也. 海印者, 眞如本覺也. 妄盡心澄, 萬像齊現,
猶如大海, 因風起浪, 若風止息, 海水澄淸, 無像不現, 故云
海印三昧也.”
55) 이 부분은 현수법장이 저술한『수화엄오지망진환원관(修華嚴奧旨妄盡還源觀)』
    (이하『망진환원관』)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大45, p.637b25)
56) 현수(賢首)는 중국 화엄종의 제3조인 법장(法藏, 643~712)의 자이며, 호는 국일
    법사(國一法師)이다. 그는 스승인 지엄(智儼)으로부터 문지(文持)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현수보살(賢首菩薩), 향상대사(香象大師), 강장국사(康藏國師), 화엄
    화상(華嚴和尙) 등으로도 불렸다. 현수의 전기 자료는 최치원(崔致遠)의『법장
    화상전(法藏和尙傳)』, 염조은(閻朝隱)의「강장법사지비(康藏法師之碑)」를 비롯
    하여 약 20여 종이 있다. 그는 스승인 지엄의 법을 이어 화엄교학을 크게 융성
    시켰으며, 약 30부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60권본
   『화엄경』을 주석한『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20권이다.
57) 대총상법문체(大總相法門體)는 대총상법문의 본체로, 진여의 실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여는 광대하여 일체를 포함하므로 ‘대’라고 하고, 통틀어서 한 맛으
    로 평등하여 차별된 모양이 없으므로 ‘총상’이라고 하고, 수행자의 궤범이 되므
    로 ‘법’이라고 하고, 통틀어서 열반에 들어가므로 ‘문’이라고 한다.『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서는 “심진여(心眞如)는 곧 한 법계의 대총상법문체이다”(大32,
    p.57a8. 心眞如者, 卽是一法界大總相法門體.)라고 말하고 있다.
58) 해인삼매(海印三昧, sāgaramudrāsamādhi 또는 sāgarasamr ddhisamādhi)는 
    모든 삼매의 근원이며, 그 삼매를 다 포섭하는 것으로써 해인삼마지(海印三摩地), 
    해인정(海印定), 대해인삼매(大海印三昧)라고도 한다. 해인삼매는 여러 대승경전
    에서 설해지고 있지만, 특히『화엄경(華嚴經)』의 세계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삼매
    로 간주된다. 해인삼매는『화엄경』의 총정(總定)으로 부각되는데, 경 전체가 이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해인삼매는『화엄경』의「현수품(賢首
    品)」・「십지품(十地品)」・「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입법계품(入法界品)」 
    등에서 설해지고 있다. 즉 큰 바다에 모든 중생들의 색상이 다 현현하는 것처럼 
    시방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무상보리해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을 해인이라 하고
    있다.(大9 p.627b 참조.)
59)『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大45, p.637b25-28).
60) 이 부분은『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에서 인용한 것이다. 즉 “해인(海印)은 진여
    본각(眞如本覺)이다. 망령됨이 다하고 마음이 맑으면 온갖 형상이 가지런히 나
    타남이 마치 큰 바다가 바람으로 인해 물결을 일으키다가 만약 바람이 그쳐서
    바닷물이 맑고 깨끗해지면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기신론』에
    서는 ‘한량없는 공덕의 창고이고 법성 진여의 바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름을
    해인삼매라고 한다.”(大45, p.637b21-25. 言海印者, 眞如本覺也. 妄盡心澄 萬象齊
    現, 猶如大海, 因風起, 若風止息, 海水澄淸, 無象不現. 起信論云, 無量功德藏, 法性眞
    如海. 所以名爲海印三昧也.)

만약 다만 한 중생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 삼대(三大)61)의 같음과 시각
[始]62)・본각[本]이 둘이 아닌 뜻을 밝혀서 논한다면, 『기신론』에서 밝혀 말
하기를, “이른바 법이란 중생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포섭해서 이 마음에 의하여 마하연(摩訶衍)의 뜻을 나타내 보인다”63)
라고 한 것과 같다. 만약 한 중생의 마음 가운데 갖추어 중생과 부처가 서
로 융섭함과 인과가 동시라는 뜻을 밝힘을 논한다면, 화엄논주가 밝혀 말
하기를, “부처가 이 중생의 마음속 부처라서 자기 근기의 감당함에 따라 다
른 물건이 없으니, 일체 모든 부처의 근원을 알려고 한다면 자기 무명이 본
래 부처임을 깨달아라”고 한 것과 같다.
若但論於一衆生心中, 具明三大攸同, 始本不二之義, 則如起
信論所明曰, “所言法者, 謂衆生心, 是心卽攝一切世間出世間
法, 依於此心, 顯示摩訶衍義等.” 若論於一衆生心中, 具明生
佛互融, 因果同時之義, 則如華嚴論主所明曰, “佛是衆生心裏
佛, 隨自根堪無異物, 欲知一切諸佛源, 悟自無明本是佛.”
61) 삼대(三大)는 체대(體大), 상대(相大), 용대(用大)를 의미한다.『대승기신론(大乘
    起信論)』에서는 대승(大乘)을 법(法)과 의(義)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법을
    중생심(衆生心)으로, 의를 체대・상대・용대로 나누고 있다. 체대는 일체의 법은
    진여로서 평등하여 증감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며, 상대는 여래장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이 갖추어져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용대는 일체의 세간과 출세
    간의 착한 인과를 잘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大32, pp.575c20-576a1)
62) 시각(始覺)은 후천적으로 닦아 익혀서 차례대로 미혹을 끊어 점차 타고난 마음
    의 근원을 알아차리고 계발하는 것이다. 또 발심수행하여 차례대로 미혹을 끊
    는 지혜를 일으켜서 무명을 끊고 본각의 청정한 체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대
    승기신론(大乘起信論)』, 大32, p.576b15-26 참조.] 대승보살이 수행하는 단계에 
    배대하면 시각에는 불각・상사각・수분각・구경각의 점차적 지위가 있다. ①불각
    (不覺)은 십신위(十信位)의 수행자가 비록 악업이 고과(苦果)를 초래함을 알아
    서 악업을 멀리 여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번뇌를 끊는 지혜를 일으키지 못
    한 것이다. ②상사각(相似覺)은 이승과 삼현위의 보살은 비록 아집(我執)을 멀
    리 여의어 아공(我空)의 이치를 깨달았지만 여전히 법집(法執)과 분별심을 버리
    지 못한 것이다. ③수분각(隨分覺)은 초지부터 9지에 이르기까지의 보살이 이
    미 법집을 멀리 여의고 모든 법이 오직 마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이치를 분
    명히 알았으며, 진여 법신의 이치에 대하여 닦아서 증득하는 경지에 따라서 더
    욱 상승하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 ④구경각(究竟覺)은 제10지
    의 보살이 이미 인행을 만족하고 일념에 상응하는 지혜로 마음이 처음 일어남
    을 알고 미세한 생각을 멀리 여의어 심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대승기신론별
    기(大乘起信論別記)』, 大44, p.231b 참조]
63)『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大32, p.575c21-23).

또「여래출현품」의 게송에 이르기를, “부처님의 지혜도 또한 이와 같아
중생의 마음에 두루 있지만 망상으로 얽혀서 자각하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
다. 모든 부처님이 대자비로 이 망상을 없애려고 이와 같이 출현하시어 모
든 보살을 요익하게 한다”64)라고 한다. 이것이 낱낱 중생의 마음 가운데 중
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하여 항상한 뜻이다. 또 논에 말한다. “비록 십신과
오위(五位)의 차례와 필경에 보현행을 이루어 인(因)이 가득함에 과(果)가
마쳐짐을 안립했지만, 때도 또한 옮기지 않으며 보광명지도 또한 다르지
않다. 이는 관행하여 이른 이가 이 열 가지 신심으로 곧바로 불과의 보현행
이 가득함에 이르는 것을 요달하여 일시에 전부 앎을 이름하여 신심이라고
한다. 이것이 오늘 큰 마음의 중생이 처음 신심을 일으킴이며 인(因)과 과
(果)가 동시이다.”
又如出現品偈云.“ 佛智亦如是, 遍在衆生心, 妄想之所纏, 不
覺亦不知. 諸佛大慈悲, 令其除妄想, 如是乃出現, 饒益諸菩
薩.” 此是一一衆生心中, 生佛互融恒然之義也. 又論云. 雖然
安立十信及五位次第, 畢竟成普賢行, 因滿果終, 時亦不移, 普
光明智亦不異. 此觀行及者, 了知此十種信心, 直至佛果普賢
行滿以來, 一時摠解, 名爲信心也. 此是今日大心衆生, 初發信
心, 因果同時也.
64)『화엄경(華嚴經)』 권51,「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大10, p.273b19-22).

위와 같은 뜻을 살펴보면,『화엄』과『기신』에서 논의된 한 마음・삼대(三
大)의 뜻이 자세함과 간략함・엶과 합함이 중생[機]을 힘쓰게 하여 다름을
이루지만 모두 지금 범부의 마음 가운데 포섭되는 뜻이다. 다만 말의 가르
침에 따라 종일토록 쟁론하여 아만과 승부의 마음을 증장하여 헛되이 일생
을 보내며, 반조하여 부지런히 청정한 행[梵行]을 닦아야 함을 알지 못하니
부끄럽지 않겠는가. 예전 성인이 어찌 이른바 법은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
라고 말할 줄 몰랐겠으며, 어찌 부처님의 지혜가 보살의 마음 가운데 있다
고 말할 줄 몰랐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이 하지 않고 간곡하게 중생의 마음
이라 가리킨 것이 그대로 하여금 입을 열어 종일토록 쟁론하고 관행을 닦
지 않아 도리어 다시 빠지게 함이겠는가. 만약 믿음의 뿌리가 있거든 세 번
다시 생각하라.
審如上之義, 華嚴起信所論一心三大之義, 廣略開合, 務機成
異, 皆是現今凡夫心中, 含攝之義. 但隨言敎終日諍論, 增長我
慢勝負之心, 空過一生, 不解返照懃修梵行, 可不慚愧乎. 先聖
豈不知道所言法者, 謂諸佛心, 豈不知道佛智在菩薩心中乎.
然不如是而叮嚀指衆生心者, 使汝張口, 終日諍論, 不修觀行,
還復沈淪耶. 如有信根, 三復思之.

4.
묻는다. 지금까지 설한 것은 이미 대답[命]을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선
문에 통달한 사람이 성품을 보아 성불함이 어찌 일부분 성품이 깨끗한 본
체가 모습과 작용을 갖추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問. 向來所說, 旣聞命矣. 古今禪門達者, 見性成佛, 豈非一分
性淨之體, 不具相用耶?

답한다. 그렇지 않다. 그대는 어찌 듣지 못했는가? 영가진각(永嘉眞覺)65)
은 하루 조계(曹溪)에서 묵으면서 본래 마음을 깨달아 노래를 지었으니, 이
를 간략히 말한다. “마음 거울이 밝아 비침이 걸림 없음이여, 탁 트이고 밝
게 사무쳐 사바세계[沙界]에 두루하네. 만상과 삼라의 그림자가 그 가운데
나타나니, 한 덩이 원만한 광명은 안과 밖이 아니네.66) 한 성품이 모든 성품
에 원만히 통하고, 한 법이 모든 법을 두루 머금네. 하나의 달이 모든 물에
두루 나타나니, 모든 물의 달이 하나의 달에 포섭되네. 모든 부처님의 법신
이 내 성품에 들어오니, 내 성품이 도리어 여래와 합하네.”67) 또 영소무(英
邵武)68)도 본래 마음을 깨달아 게송을 지었으니, 이를 간략히 말한다. “시방
이 가지런히 한 터럭 끝에 나타나니, 화장세계가 거듭 거듭하여 제석천의
그물이 차다.”
答. 不然. 汝豈不聞? 永嘉眞覺, 一宿曹溪, 開悟本心作歌, 其
略曰.“ 心鏡明鑒無礙, 廓然瑩徹周沙界. 萬像森羅影現中, 一
顆圓光非內外. 一性圓通一切性, 一法遍含一切法. 一月普現
一切水, 一切水月一月攝. 諸佛法身入我性, 我性還共如來
合.” 又英邵武, 開悟本心作偈, 其略曰. “十方齊現一毛端, 華
藏重重帝網寒.”
65) 영가진각(永嘉眞覺)은 영가현각(永嘉玄覺, 657~723) 선사를 가리킨다. 그는 절
    강성(浙江省) 온주부(溫州府) 영가현(永嘉縣) 사람이며, 성은 대씨(戴氏)이고, 이
    름은 현각(玄覺)이고, 자는 명도(明道)이고, 별호는 일숙각(一宿覺)이고, 시호는
    무상대사(無相大師), 또는 진각대사(眞覺大師)이다. 그는 어려서 출가하여 삼장
    (三藏)에 해박하였고, 특히 천태지관(天台止觀)에 정통하여 선관을 잘 닦았다.
    좌계현랑(左溪玄朗, 673~754)의 권유로 동양현책(東陽玄策)과 함께 조계 혜능을
    참방하여 곧 인가를 받았다. 인가받는 날, 혜능의 권유로 하루를 묵었기 때문에
    일숙각(一宿覺)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는 용주 용흥사(龍興寺) 별원(別院)에
    서 세수 49세로 입적하였다. 현존하는 그의 저서는『증도가(證道歌)』와『선종영
    가집(禪宗永嘉集)』이다.[『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권5의「온주영가현각선사
    (溫州永嘉玄覺禪師)」, 大51, pp.241a27-242b19 참조.]
66) 현각(玄覺),『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大48, p.396a25-27).
67)『영가증도가(永嘉證道歌)』(大48, p.396b7-9).
68) 영소무(英邵武)는 홍영소무(洪英邵武, 1012~1070)를 가리키며, 송대(宋代) 임제
    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의 선사이다. 그는 이통현이 저술한『십명론(十明論)』
    을 읽고 깨달음을 얻었으며, 황룡혜남(黃龍慧南)의 법을 이었다.[속전등록(續傳
    燈錄) 권15, 大51, p.565b-c 참조.]

또 대혜(大慧)선사는 불자(拂子)를 잡고서 말한다. “불성의 뜻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시절의 인연을 관해야 하나니, 시절이 만약 이르면 그 이치
가 스스로 드러난다.69) 나아가 반드시 알아야 한다. 티끌만큼의 모든 부처
님이 세상에 출현하셔서 왕궁에 강림하고 도량에 앉으며, 법륜을 굴리고
마군에게서 항복받으며, 중생을 제도하고 열반에 드심이 모두 이 시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만약 믿어서 이르면, 가없는 국토의 경계는
나와 남이 털끝만큼도 차이나지 않으며 십세 고금은 처음과 끝이 당념(當
念)을 여의지 않는다.”70)
又大慧禪師秉拂云.“ 欲識佛性義, 當觀時節因緣, 時節若至,
其理自彰. 乃至須知, 微塵諸佛出世, 降王宮坐道場, 轉法輪降
魔軍, 度衆生入涅槃, 摠不出這箇時節. 諸人若信得及, 無邊刹
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於當念.”
69)『대혜어록(大慧語錄)』(大47, p.848a12-13).
70)『대혜어록(大慧語錄)』(大47, p.848a16-20).

이와 같이 본래 마음을 깨달아 자기 마음의 거울 속에 제석천의 그물이
겹쳐진 다함없는 법계를 얻어 본 이는 선문의 전기 가운데 셀 수 없다. 어
리석은 이는 그 근원을 알지 못하고 선어록을 열람하지 못하며, 또한『화엄
대론』의 취지를 보지 못한 까닭에 겨우 참선하는 이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는 것을 들어도 성품이 깨끗한 부처에 지나지 않다고 하니, 크게 어리
석고 미혹함이다.
如是等開悟本心, 得見自心鏡內, 帝網重重無盡法界者, 禪門
傳記中, 不可勝數. 昧者不知其源, 不覽禪錄, 亦不見華嚴大論
之旨故, 纔聞禪者說卽心卽佛, 以謂不過性淨佛也, 是大愚惑.

화엄교문에서 이치를 설함이 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만 학자가 말
의 가르침과 뜻과 이치의 영역에 막혀 있어서 뜻을 잊고 마음을 요달하여
빨리 보리를 증득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달마가 서쪽에서 와서 달
이 손가락에 있지 않으며 법이 내 마음인 줄 알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문자
를 세우지 않고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한 것뿐이다. 이로써 선문에서는 다
만 집착을 부수고 근본[宗]을 드러냄을 귀하게 여기고, 번거로운 말과 의리
를 시설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유한 집착을 부수는
언구가 일부분 이치의 성품[理性]과 말을 여의고 생각이 끊어진 뜻에 가깝
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 뜻을 알지 못하고 매번 유사한 말의 용례로 문득
돈교(頓敎)71)와 같다고 하니, 이는 크게 그렇지 않다. 설사 화엄의 다함없는
법계의 거듭 현묘한 법문이라도 법의 애착[法愛]을 내어서 알음알이[解分]
를 잊지 못하면 또한 부수어야 할 바이다.
非謂華嚴敎門說理未盡, 但學者, 滯在言敎義理分際, 未能忘
義了心, 速證菩提. 所以達摩西來, 欲令知月不在指, 法是我心
故, 不立文字, 以心傳心耳. 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
辭義理施設. 故所有破執言句, 近於一分理性離言絶慮之義,
昧者, 不知其義, 每將相似語例, 便謂同於頓敎, 是大不然. 設
於華嚴無盡法界重玄法門, 生於法愛, 解分未忘, 亦爲所破也.
71) 돈교(頓敎)는 일정한 수행 단계를 차례대로 밝아 닦지 않고 곧바로 깨달음에 이
    르게 하는 가르침을 의미한다.『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에서는 돈교란 ‘화엄경’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大46, p.774c17) 또 돈교는 화엄종에서 주장하는 오교(五
    敎) 가운데 하나로 문자와 언어를 떠나 바로 진여를 가리키는 교법을 지칭한다.

천태의 가르침[台敎]에서도 또한 “원문(圓門)에 집착을 내더라도 오히려
초교(初敎)의 부수어야 할 바가 된다”72)라고 말한다. 다만 성해과분(性海果
分)73)은 이 법계의 증득한 곳이어서 미리 말할 수 없으며, 또한 마음으로 생
각하고 뜻으로 이해함으로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청량조사가 또한 “원음
(圓音)은 질문이 아니지만 항상 연설하고, 과해(果海)는 생각을 여의지만
마음을 전한다”라고 말한다. 또 “부처님은 말을 여읨을 증득하셨다”74)라고
말한다. 이로써 알아야 한다. 선문에 생각을 여의어 서로 전함이 단박에
법계를 증득하는 곳이니, 결코 돈교 가운데서 법의 모양을 설하지 않고 오
직 참된 성품만 보아서 한 생각도 나지 않음이 곧 이름이 부처가 되는 것
은 아니다.
台敎亦云, “圓門生着, 尙爲初敎所破.” 但性海果分, 是法界證
處, 不可預談, 亦不是心思意解所及. 故淸凉祖師亦云,“ 圓音
非扣而常演, 果海離念而心傳.” 又云,“ 佛證離言.” 是知. 禪
門離念相傳, 是頓證法界處也, 決非頓敎中, 不說法相, 唯見眞
性, 一念不生, 卽名爲佛也.
72) 이 구절과 비슷한 내용이『마하지관(摩訶止觀)』의 제3권에 나온다. 즉 “원문에
    집착을 내더라도 오히려 삼장 초문의 부수어야 할 바가 된다.”(大46, p.32c20-21.
    圓門生著, 尙爲三藏初門所破.)
73) 성해과분(性海果分)은 불과(佛果)의 공덕이 광대함을 바다에 비유한 것으로,
    곧 깨달음의 경계 또는 부처님의 경계・경지를 가리킨다. 이는 과분성해(果分性
    海), 과분원만(果分圓滿), 과분리언(果分離言) 등이라고도 한다.『화엄오교장』
    에서는 ‘성해과분을 말할 수 없는 뜻’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 이유로 가르침
    과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며, 열 부처님의 경계이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大48,
    p.477a 참조) 즉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원인이 되는 수행인 인분(因分)은 설
    명할 수 있지만, 깨달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과분(果分)은 설명할 수 없다는 것
    이다.
74) 징관(澄觀),『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권1(大36,
    p.7b5).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선에는 삼현문(三玄門)이 있으니, 첫째는 체
중현(體中玄)이고, 둘째는 구중현(句中玄)이고, 셋째는 현중현(玄中玄)이
다.75) 처음 체중현(體中玄)의 문에 ‘가없는 국토의 경계는 자기와 남이 털
끝만큼도 차이나지 않으며, 십세 고금은 처음과 끝이 당념(當念)을 여의지
않는다’는 등의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문을 인용하여 첫 근기의 깨달
아 들어가는 문으로 삼았다. 이 또한 말의 가르침 가운데 알음알이를 잊지
않은 까닭에 구중현(句中玄)의 자취 없이 평상하여 깨끗한[洒落] 언구로
그 집착을 부수게 하여 단박에 부처님 법의 알음알이를 잊게 한다. 이 또한
깨끗한 지견과 깨끗한 언구가 있기 때문에 현중현(玄中玄)의 양구(良久)와
침묵과 방(棒)과 할(喝)76)의 작용으로 단련하나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 단
박에 이전 두 번째 현문(玄門)의 깨끗한 지견과 깨끗한 언구를 잊는다. 그
러므로 “뜻을 얻어 말을 잊음에 도(道)와 친하기 쉽다”77)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단박에 법계를 증득한 곳이다.〈이 가운데 삼현은 비록 임제(臨濟)의 본 뜻은
아니지만 또한 고(古)선사78)의 뜻을 따라 밝힌 것이다.〉
何以知其然? 禪有三玄門, 一體中玄, 二句中玄, 三玄中玄. 初
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 始終不離
於當念等, 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未忘故, 以句中玄, 無跡平常, 洒落言句, 令其破執, 頓忘
佛法知解也. 此亦有洒落知見, 洒落言句故, 以玄中玄, 良久黙
然棒喝作用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 洒落知見洒
落言句. 故云, “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此中三
玄, 雖非臨濟79)本意, 且順古師之意, 明之.〉
75) 삼현문(三玄門)은 임제의현(臨濟義玄, ?~866) 선사가 학인을 제접할 때 사용
    한 방법으로,『임제록(臨濟錄)』 권1의「상당(上堂)」에 보인다. 즉, “선사가 또
    말하기를, ‘일구어(一句語)는 반드시 삼현문(三玄門)을 갖추고, 일현문(一玄
    門)에는 반드시 삼요(三要)를 갖추어 방편이 있고 쓰임이 있어야 한다.”(大47,
    p.497a19-21. 師又云, 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임제록』
    에서 삼현과 관련된 내용은 이 법어뿐이며, 삼현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
    고 있지 않다. 현재 전해지는 삼현문 각각의 명칭인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
    中玄)・현중현(玄中玄)은 후대에 정리된 것으로 보인다. 『분양무덕선사어록(汾
    陽無德禪師語錄)』 권1에서는 삼현 각각의 명칭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삼현의 의
    미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大47, p.597c2-10)『원오불과선사어록(圓悟佛果禪師語
    錄)』권7에서는 삼현 각각의 명칭을 밝히면서 문답으로 그 의미에 대해 설명하
    고 있다.(大47, p.744b14-17) 삼현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체
    중현은 사물의 모습과 도리를 언어나 문자 등으로 표현한 것으로, 경전의 말씀
    이 여기에 속한다. ②구중현은 일반적인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한 구절의
    말을 통해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으로, 고칙(古則)이나 공안(公案)
    이 여기에 속한다. ③현중현은 일체의 모습을 여읜 진리의 소식을 언설 이외의
    방편으로 알리려고 하는 몸짓이나 작용으로, 방(棒)・할(喝)・양구(良久)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눌스님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韓4, p.743b15-c2)과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韓4, pp.765c19-766a19)
    에서도 삼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76) 방(棒)과 할(喝)은 선사들이 자신의 경지를 드러내거나 상대를 점검하기 위해
    언어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분을 펼치는 수단이다. 방(棒)은 주장
    자 등으로 납자를 제접할 때 몽둥이질을 하는 것이고, 할(喝)은 크게 소리를 내
    지르는 것이다. 덕산선감(德山宣鑑)은 방으로 가풍을 삼았으며, 임제의현(臨濟
    義玄)은 할로써 지도 방법을 삼았다.
77)『분양무덕선사어록(汾陽無德禪師語錄)』(大47, p.597b7).
78) 고(古)선사는 천복승고(薦福承古, ?~1045) 선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승고
    선사는 운문종(雲門宗)의 선사로 고탑주(古塔主)라고도 불린다. 그는『선림승보
    전(禪林僧寶傳)』에서 삼현(三玄) 각각의 명칭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를 체중현(體
    中玄), 구중현(句中玄), 현중현(玄中玄)으로 해석하고 있다.(卍79, pp.516b-517a)
79) 저본에는「際」로 되어 있으나 을본에 따라「濟」로 바꾸었다.

선문에도 첫 근기의 하열한 사람을 위하여 흐름을 따라 망령되이 물드
는 가운데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한 마음이 있음을 가리켜 보여서 그로 하
여금 쉽게 알아 믿어 들어가게 하니, 믿어 들어간 후에 알음알이를 잊어야
바야흐로 친히 증득함이 된다. 만약 알음알이를 잊지 못하면 해탈의 깊은
구덩이에 앉아서 만행의 연기문 가운데 몸을 바꾸어 머묾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禪門亦有爲初機下劣人, 指示隨流妄染中, 有性淨妙心, 令其
易解信入, 信入然後, 忘其解分, 方爲親證. 若不忘解分, 坐在
解脫深坑, 不能於萬行緣起門中, 轉身無滯故也.

가르침[敎] 가운데서도 성품이 깨끗한 본각으로써 법계의 걸림 없는 연
기의 근원을 삼았다. 현수국사가 저술한『화엄오지망진환원관』가운데 먼
저 한 본체를 내세웠으니, 자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이다. 그러나
이것은 여래장(如來藏)80) 가운데 성품이 깨끗한 본체이다. 근본으로부터 이
미 나옴에 성품이 스스로 만족하여 더러움에 있어도 때 묻지 않으며 닦아 다
스려도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이며, 성품의 본체가
두루 비추어 어둠을 밝히지 않음을 없기 때문에 ‘두렷이 밝다’고 한 것이다.
번뇌로 이를 덮으면 숨고 지혜로 이를 요달하면 나타나니, 생인(生因)81)이 낸
바가 아니라 오직 요인(了因)82)이 요달할 바이다.『기신론』에 “진여자성은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두루 법계를 비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기 때문이다”83)라고 하였다. 널리 설함이 이와 같기 때문
에 ‘자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라고 한 것이다.84)
敎中亦有以性淨本覺, 爲法界無碍緣起之源. 如賢首國師所述,
依華嚴奧旨妄盡還源觀中, 先標一體, 謂自性淸淨圓明體. 然
此則是如來藏中, 性淨之體. 從本已來, 性自滿足, 處染不垢,
修治不淨, 故云‘自性淸淨’也, 性體遍照, 無幽不燭, 故曰‘圓
明’也. 煩惱覆之則隱, 智慧了之則現, 非生因之所生, 唯了因
之所了. 起信論云,“ 眞如自性, 有大智慧光明義故, 遍照法界
義故, 眞實識知義故,” 廣說如彼, 故曰‘自性淸淨圓明體’也.
80)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garbha)은 여래의 태아라는 의미로, 모든 중생의 번뇌
    가운데 숨겨져 있는 본래 청정한 여래법신(如來法身)이다. 여래장은 번뇌에 더
    럽혀지지도 않고 본래 청정한 영원에도 변하지 않는 깨달음의 본성이다.
81) 생인(生因, kāraka-hetu)은 실재근거를 가리키며, 결과를 생기게 하는 원인 또
    는 사물을생성시키는 원인이다. A가 원인이 되어 B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면 A
    는 B의 생인인 것이다.
82) 요인(了因, jñāpaka-hetu)은 인식근거를 뜻한다. A를 통해 B를 추정할 경우, A
    가 B의 요인이 된다.
83) 이 부분은『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에 인용된『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내용이다. 논에서는 진여의 자체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즉 “또
    한 진여의 자체상이란 일체의 범부・성문・연각・보살・모든 부처에게 증감됨
    이 없고 앞에서 나는 것도 아니며, 뒤에서 멸하는 것도 아니어서 필경에 늘 변함
    이 없어서 본래부터 성품이 스스로 일체의 공덕을 가득 채운 것이다. 이른바 자
    체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치는 뜻이 있기 때문
    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성청정심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
    (常)・락(樂)・아(我)・정(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청량하고 불변하고 자재한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항하의 모래알보다 많은 불리(不離)・부단(不斷)
   ・불이(不異)・부사의(不思議)한 부처님 법을 구족하고 나아가 만족하여 부족
    한 바가 없는 뜻이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하며, 또한 여래법신이라 이름하는 것
    이다.(大32, p.579a12-20. 復次眞如自體相者, 一切凡夫聲聞緣覺菩薩諸佛, 無有
    增減, 非前際生, 非後際滅, 畢竟常恒, 從本已來性自滿足一切功德. 所謂自體, 有大
    智慧光明義故, 遍照法界義故, 眞實識知義故, 自性淸淨心義故, 常樂我淨義故, 淸涼
    不變自在義故. 具足如是過於恒沙不離不斷不異不思議佛法, 乃至滿足無有所少義故, 
    名爲如來藏, 亦名如來法身.)
84) 이 부분은『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의 내용을 간추려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한 본체를 드러냄이란 자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를 말한다. 그
    러나 이것은 여래장 가운데 성품이 깨끗한 본체이다. 근본으로부터 이미 나옴
    에 성품이 스스로 만족하여 더러움에 있어도 때 묻지 않으며 닦아 다스려도 깨
    끗하지 않기 때문에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이며, 성품의 본체가 두루 비추어
    어둠을 밝히지 않음을 없기 때문에 ‘두렷이 밝다’고 한 것이다. 또 흐름을 따라
    염오를 더해도 때 묻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염오를 없애도 깨끗해지지 않으며,
    성인의 몸에 있다 해도 늘어나지 않고 범부의 몸에 있다 해도 줄어들지 않으니,
    비록 숨고 나타남의 다름은 있으나 차별되어 달라짐은 없다. 번뇌가 이를 덮으
    면 숨고 지혜가 이를 요달하면 나타나니, 생인이 낸 바가 아니라 오직 요인이 요
    달할 바이다.『기신론』에 ‘진여 자체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두
    루 법계를 비춘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기 때문이며, 자성
    이 청정한 마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널리 설함이 이와 같기 때문
    에 ‘자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라고 한 것이다.”(大45, p.637b9-19. 一顯
    一體者, 謂自性淸淨圓明體. 然此卽是如來藏中法性之體. 從本已來性自滿足, 處染不
    垢, 修治不淨, 故云自性淸淨, 性體遍照無幽不燭, 故曰圓明. 又隨流加染而不垢, 返流
    除染而不淨, 亦可在聖體而不增, 處凡身而不減, 雖有隱顯之殊, 而無差別之異. 煩惱覆
    之則隱, 智慧了之則顯, 非生因之所生, 唯了因之所了. 起信論云, 眞如自體, 有大智慧
    光明義故, 遍照法界義故, 眞實識知義故, 自性淸淨心義故. 廣說如彼, 故曰自性淸淨圓
    明體也.)

둘째는 앞의 깨끗한 본체에 의하여 두 가지 작용을 일으킴이다. 첫 번째
는 해인삼라상주용(海印森羅常住用)이니, 해인이란 진여본각이다. 망령됨
이 다하고 마음이 맑아서 온갖 형상이 가지런히 나타남이 마치 바닷물이
맑고 깨끗하여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다.『기신론』에 “한량
없는 공덕장이고 법성진여(法性眞如)의 바다이다”85)라고 하니, 이런 까닭
으로 이름을 해인삼매라고 한다.86) 두 번째는 법계원명자재용(法界圓明自
在用)이니, 화엄삼매이다. 널리 온갖 행을 닦아 이치에 부합해 덕을 이루어
서 널리 법계에 두루하여 보리를 증득하기 때문에 ‘법계원명자재용’이라고
한 것이다.87)
二依前淨體, 起於二用. 一者海印森羅常住用, 言海印者, 眞如
本覺也. 妄盡心澄, 萬像齊現, 猶如海水澄淸, 無像不現. 起信
論云,“ 無量功德藏, 法性眞如海,” 所以名爲海印三昧也. 二者
法界圓明自在用, 是華嚴三昧也. 謂廣修萬行, 稱理成德, 普周
法界而證菩提, 故云‘法界圓明自在用’也.
85) 이 부분은『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맨 처음에 나오는 게송 가운데서 인용한
    것이다. 즉 “온 시방에서 가장 수승한 업과 변지를 갖추시고, 색이 걸림 없이 자
    재하신 구세의 대비하신 이와 및 저 신체상의 법성진여의 바다와 한량없는 공
    덕을 갖춘 이의 여실한 수행 등에게 귀명하옵니다.”(大32, p.575b12-15. 歸命
    盡十方, 最勝業遍知, 色無礙自在, 救世大悲者, 及彼身體相, 法性眞如海, 無量功
    德藏, 如實修行等.)
86)『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大45, p.637b20-25).
87) 이 부분은『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의 내용을 간추려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는 법계가 두렷이 밝아 자재한 작용이니, 화엄삼매이다. 온갖 행을 널리
    닦아 이치에 부합해 덕을 이루어서 널리 법계에 두루하여 보리를 증득하는 것
    을 말한다. 화엄이란 꽃[華]은 열매를 맺는 작용이 있고 행은 과보를 부르는 공
    능이 있어서 현상에 의탁해서 드러내도록 하기 때문에 꽃을 들어서 비유로 삼
    은 것이다. 꾸밈[嚴]은 행이 이루어지므로 과보가 가득해지며 이치에 계합하고
    참됨에 들어맞아 성품과 모습의 두 가지가 없고, 주관과 객관이 모두 끊어져 환
    히 밝게 빛나므로 꾸밈이라 한다. 진실로 참된 흐름의 행이 아니라면 참됨에 계
    합하지 못할 것인데, 어찌 참됨을 꾸미는 행이 참됨을 따르지 않고 일어날 수 있
    겠는가. 참됨이 허망한 끝을 거두니 행에 닦지 않음이 없고, 허망함은 참된 근원
    에 사무치니 모습에 고요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법계가 두렷이 밝아 자재
    한 작용’이라고 한다.(大45, p.637c4-12. 二者法界圓明自在用, 是華嚴三昧也. 
    謂廣修萬行, 稱理成德, 普周法界 而證菩提. 言華嚴者, 華有結實之用, 行有感果
    之能, 令則託事表彰, 所以擧華爲喩. 嚴者, 行成果滿, 契理稱眞, 性相兩亡, 能所
    俱絶, 顯煥炳著, 故名嚴也. 良以非眞流之行, 無以契眞, 何有飾眞之行, 不從眞起
    此. 則眞該妄末, 行無不修, 妄徹眞源, 相無不寂. 故曰法界圓明自在用也.)

셋째, 세 가지 변(遍)을 보인 것은 앞의 두 가지 작용에 의하여 낱낱 작용
가운데 널리 법계에 두루하기 때문에 ‘변(遍)’이라 한다.88) 첫 번째는 한 티
끌이 널리 법계에 두루하는 변이고, 두 번째는 한 티끌이 다함없이 출생하
는 변이고, 세 번째는 한 티끌이 공(空)과 유(有)를 함용하는 변이니, 이는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음을 밝힌 것이다.89)
三示三遍者, 謂依前二用, 一一用中普周法界, 故云‘遍’也. 一
者一塵普周法界遍, 二者一塵出生無盡遍, 三者一塵含容空有
遍, 此明事事無碍也.
88)『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大45, p.637c17-18).
89)『망진환원관(妄盡還源觀)』에서는 세 가지 변(遍)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
    고 있는데, 이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한 티끌이 널리 법계에 두루하
    는 변은 티끌이 자성이 없어서 참됨을 잡아 이루어짐을 말하며, 참됨이 이미 가
    없고 티끌도 이를 따를 뿐이다. 두 번째, 한 티끌이 다함없이 출생하는 변은 티
    끌은 자체가 없고 일어남에 반드시 참됨을 의지한다. 진여가 이미 항하사의 온
    갖 덕을 갖추었으니, 참됨을 의지해 작용을 일으킴도 만 가지로 차별된다. 세 번
    째, 한 티끌이 공(空)과 유(有)를 함용하는 변은 곧 티끌에 자성이 없으므로 곧
    공함이며, 허깨비 같은 모습이 뚜렷하므로 곧 있음이다.(大45, p.637c18-638b18)

현수가 세운 뜻에 의하면, 이와 같은 두 가지 작용과 세 가지 변 등의 널
리 법계에 두루하고 융합하여 걸림 없는 덕이 모두 중생의 마음 가운데 자
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만약 화엄에서 논
의한 일진무장애법계(一眞無障碍法界)가 결정코 중생의 마음 가운데 성품
이 깨끗한 본각과 그 본체가 각각 다르다면, 현수조사가 이런 말을 지은 것
은 눈멀고 귀먹은 이를 속여 달래며 망령되이 말을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
러므로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베풂이 자세하고 간략함이 조금 다르지만 근
원은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據此賢首所立之義, 如是二用三遍等, 普周法界容融無碍之
德, 皆從衆生心中, 自性淸淨圓明體起也. 若是華嚴所論一眞
無障碍法界, 定與衆生心中性淨本覺, 其體各別, 而賢首祖師,
作是說者, 則是誑誘盲聾妄語人矣. 故知隨機設敎, 廣略稍異
其源一也.

또 의상(義湘)90)법사는『법계도(法界圖)』에서 게송으로 말한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고,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
다.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모든 것이 끊어져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다른 경계가 아니다. 참 성품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하여 자기 성품을 고수
하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룬다. 하나 가운데 일체이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
이며, 하나가 곧 일체이고 많은 것이 곧 하나이다. 하나의 작은 티끌 가운
데 시방을 머금고 모든 티끌 가운데서도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생각이고 한 생각이 곧 한량없는 겁이다.……”91)
又義湘法師法界圖偈曰.“ 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眞性甚深極微妙, 不守自性
隨緣成.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 云云〉
90) 의상(義湘, 625~702)은 해동화엄(海東華嚴)의 초조(初祖)로서 한국 화엄은 의상
    의 법계(法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의상의 전기 자료는『삼국유사(三國遺事)』
    의「의상전교(義湘傳敎)」(韓6, pp.348b-349b),『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
    願文略解)』(韓6, p.570c),『송고승전(宋高僧傳)』의「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
    (大50, p.729a-c) 등이 있다. 그는 15세 이전에 황복사에서 출가하였으며, 당나라
    로 유학을 가서 화엄종의 제2조인 지엄(智嚴, 602~66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의상은 지엄의 입적 3개월 전에『화엄경』의 핵심사상을 간명하게 드러낸『화엄
    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지어 인가를 받았으며, 지엄의 입적 후 신라로
    돌아와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91) 의상(義湘),『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大45, p.711a; 韓2, p.2a).

이 가운데 처음에 ‘법성은 원융하여 두 가지 모습이 없다’고 내세운 것은
현수의 이른바 ‘자성이 청정하고 두렷이 밝은 본체’이다. 또한 중생이 본래
가진 참된 성품이 두렷이 밝고 청정하여 더러움에 있어도 때 묻지 않고 닦
아 다스려도 깨끗하지 않아서 번뇌로 덮으면 숨고 지혜로 요달하면 나타나
니, 생인(生因)이 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요인(了因)이 요달하는 바이다. 만
약 사람이 자기 마음의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반조하여 망령됨이 다하고
마음이 맑으면, 온갖 형상이 가지런히 나타남이 마치 바닷물이 맑고 깨끗
하여 형상이 나타나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니, 해인삼라상주용이라고 이
름한다. 나머지 법계원명자재용과 나아가 세 가지 변 가운데 현상과 현상
이 걸림 없음에 이르기까지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여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의상법사가 세운 ‘법성이 원융하여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모든
상대[待對]가 끊어져서 오직 증득한 지혜로 알 바이고 나머지 경계가 아니
라는 것’도 친히 자성의 본래 담적하여 이름을 여의고 모습이 끊어진 곳을
증득해서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碍法界]92)의 근원을 삼는
것이다. 어찌 말을 여읨으로써 돈교와 같다고 하겠는가.
此中首標法性圓融無二相, 是賢首所謂自性淸淨圓明體也. 亦
是衆生本有眞性, 圓明淸淨, 處染不垢, 修治不淨, 煩惱覆之則
隱, 智慧了之則現, 非生因之所生, 唯了因之所了者也. 若人返
照自心淸淨覺性, 妄盡心澄, 萬像齊現, 猶如海水澄淸, 無像不
現, 則名海印森羅常住用也. 其餘法界圓明自在用, 乃至三遍
中事事無碍, 不離淸淨覺性, 可知矣. 湘師所立‘法性圓融, 無
名無相, 絶諸待對, 唯證智所知非餘境界’者, 亦是親證自性本
來湛寂離名絶相處, 而爲事事無碍法界之源. 豈以離言, 同於
頓敎耶.
92)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碍法界]는 사종법계(四種法界) 가운데 하
    나이다. 화엄종에서 법계(法界)는 일심(一心)이라는 근원에서 연기하는 만유이
    며, 이는 곧 우주만유의 낱낱 법이 자성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 조화를 이
    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법계를 이(理)와 사(事)의 구별을 세워 네 가지로
    설명한 것이 사종법계설이다. 사종법계는 사법계(事法界), 이법계(理法界), 이
    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이며, 이 가운데 화엄
    의 다함없는 법계는 사사무애법계를 말한다. 사사무애법계는 개체와 개체가 자
    재융섭하여, 현상계 그 자체가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라는 뜻이다. 즉, 모든 법은
    서로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하나가 되어 원융무애한 연기를 이루고 있음을 의미
    한다. 이 사사무애법계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과 실천행을 통해 현현하는
    세계이다.

선문의 종사가 근기를 대하는 문 가운데 방편[權]으로 낮은 근기를 위하
여 비록 더러움을 따르는 마음 가운데 청정한 깨달음의 성품을 설해 보였
지만, 단지 배우는 이로 하여금 자성을 반조하게 함이 요점이 되고, 이치를
설함의 깊고 얕음을 귀하게 여지지 않는다. 만약 한 마디의 말에 자성을 반
조하여 단박에 말과 알음알이를 잊으면, 자기 마음의 거울 안에 십계의 의
보[依]와 정보[正]의 연기 차별이 환하게 가지런히 나타나 법계의 걸림 없
는 연기를 거기에서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한갓 원교(圓敎)의 장애
없는 법계를 내세우면서 말한다. “선자가 논의한 것은『기신』가운데 더러
움을 따르되 성품이 깨끗하다는 뜻에 불과하며, 또한 일부분 이성(理性)의
말을 여의고 모습이 끊어진 뜻에 불과하다.” 모두 언교의 자취에 집착하고
막혀 예전 성인의 근기를 따라 가르침을 시설함에 자세함과 간략함이 비록
다르지만 한 마음을 가리켜 돌아가지 않음이 없음을 알지 못할 뿐인 것이다.
禪門宗師對機門中, 權爲下根, 雖有說示隨染心中淸淨覺性,
只令學者, 返照自性爲要, 不貴說理深淺也. 若一言下, 返照自
性, 頓忘言解, 則自心鏡內, 十界依正緣起差別, 煥然齊現, 法
界無碍緣起, 於斯可見也. 昧者徒標圓敎無障碍法界曰. “禪者
所論, 不過起信中, 隨染性淨之義, 亦不過一分理性, 離言絶相
之義.” 皆是執滯言敎之跡, 不知先聖隨機設敎, 廣略雖異無不
指歸一心耳.


만약 단박에 말의 가르침으로 시설한 뜻과 이치의 분별을 잊고 어두운
방에 고요히 앉아 흉금을 비우고 생각을 맑혀서 자기 마음을 반조하여 그
연원을 얻으면, 곧 지금 한 생각에 성품이 깨끗하고 미묘한 마음을 가지고
서 더러움에 따르는 본각을 짓더라도 옳으며, 성품이 깨끗한 본각을 짓더
라도 옳으며, 장애 없는 법계를 짓더라도 옳으며, 부동지불을 짓더라도 옳
으며, 노사나불을 짓더라도 옳다. 곧 이(理)이고 곧 사(事)이며, 곧 자기이
고 곧 남이니, 드는 데 따라 방해로움이 없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기
신』의 ‘성품이 깨끗한 본각’을 현수는 이를 얻으면 두 가지 작용과 세 가지
변의 근원이 된다고 여겼으며, 돈교의 ‘말을 여의고 모습이 끊어짐’을 의상
법사는 이를 증득하면 또한 성해과분은 부처님의 지혜로 알 바의 경계가
된다고 여겼다.
若能頓忘言敎施設義理分別, 密室靜坐, 虛襟澄慮, 返照自心,
得其淵源, 則將現今一念性淨妙心, 作隨染本覺亦得, 作性淨
本覺亦得, 作無障碍法界亦得, 作不動智佛亦得, 作盧舍那佛
亦得. 卽理卽事, 卽自卽他, 隨擧無妨也. 故知. 起信性淨本覺,
賢首得之, 則爲二用三遍之源, 頓敎離言絶相, 湘師證之, 則亦
爲性海果分, 佛智所知之境.

작은 근기가 말한 대로 집착하면 다르고, 통달한 이가 뜻을 얻어 이해하
면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물며 지금 큰 마음의 범부가 착한 벗이 열
어 보임을 만나서 빛을 돌이켜 반조할 수 있다면 오랜 겁 이래의 무명주지
번뇌(無明住地煩惱)93)가 문득 모든 부처님의 보광명지가 되니, 중생의 번
뇌무명의 갖가지 환(幻)같은 변화가 모두 여래의 보광명지로부터 생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반조함이 온전히 자체이며 본래 바깥 물건이 아니
니, 마치 담수가 물결을 일으킴에 물결이 온전히 물이며 꽃이 허공에 생김
에 꽃이 온전히 허공인 것과 같다.
是知, 小根如言執之則異, 達士得意會之則同也. 況今時大心
凡夫, 遇善友開示, 能廻光返照, 則曠劫已來無明住地煩惱, 便
爲諸佛普光明智, 以衆生煩惱無明種種幻化, 皆從如來普光明
智之所生起故. 今日返照, 全是自體, 本非外物, 如湛水生波,
波全是水, 花生空界, 花全是空.
93) 무명주지번뇌(無明住地煩惱)는 일체 무지(無知)의 근원이 되는 번뇌이며, 근본
    무명(根本無明)에 해당한다. 모든 번뇌의 의지처이며, 변이생사(變異生死)의 원
    인이 되기 때문에 ‘무명주지’라고 한다.

원효[曉公]스님이 이른바 “고요함과 비춤은 밝음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
으니, 어찌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없애 지혜의 밝음을 얻겠는가”라고 함이
이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깨달으면 초심(初心)의
정각불(正覺佛)이다. 논에서 “보리(菩提)의 미묘한 지혜로 두루 도장 찍으
면 삿된 생각과 망령된 행동이 스스로 날 곳이 없으니, 이름을 정각(正覺)
이라 한다”94)라고 말한다.
曉公所謂寂照無明無不明, 詎滅痴闇得慧明是也. 如是開悟自
心根本普光明智, 則是謂初心正覺佛也. 論云, “以菩提妙智普
印, 邪思妄行, 自無生處, 名爲正覺也.”
94)『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32(大36, p.941b24-25).

묻는다. 오늘 범부가 마음을 깨달아 성불하는 것이 구경인가, 구경이 아
닌가? 만약 구경이라면 어떻게 초심이라고 이름하며, 만일 구경이 아니라
면 어떻게 정각이라 이름하겠는가?
問. 今日凡夫悟心成佛者, 是究竟耶, 未究竟耶? 若是究竟, 何
名初心, 若未究竟, 何名正覺?

답한다. 지금 구박범부(具縛凡夫)95)가 생사의 지면 위에서 일상생활 가
운데 무명분별의 종자로써 문득 모든 부처님의 근본보광명지를 이룸은 모
든 부처님의 근본지가 중생의 무명의 마음과 더불어 본래 한 본체이기 때
문이다. 이런 까닭에 오늘 범부가 근본지과의 바다로써 처음 깨달아 발심
하는 근원을 삼은 것이다. 만약 단박에 자기 마음의 번뇌성을 스스로 여의
고, 무루지성(無漏智性)이 본래 스스로 구족함을 깨달은 이가 아니라면, 어
찌 일불승(一佛乘)의 원돈문(圓頓門) 가운데 과(果)로써 믿음을 이룬 이라
고 이름하겠는가.
答. 今時具縛凡夫, 於生死地面上, 以日用中無明分別之種, 便
成諸佛根本普光明智, 以諸佛根本智, 與衆生無明之心, 本一
體故. 所以, 今日凡夫, 以根本智果海, 爲初悟發心之源. 若非
頓悟自心煩惱性自離, 無漏智性本自具足者, 何名於一佛乘圓
頓門中, 以果成信者也.
95) 구박범부(具縛凡夫)는 온갖 번뇌를 갖추고 있는 범부라는 뜻으로, 곧 생사윤회
    에서 괴로워하는 범부를 가리킨다. 여기서 박(縛)은 박(博)으로도 쓰이며, 속박
    의 속성을 가진 번뇌를 나타낸다.

논에서 말한다. “근본지로써 처음 보리심을 일으킴을 삼으니, 근본지가
원만하기 때문에 때가 또한 널리 사무쳐 모든 지혜의 큰 본체가 되며, 모든
행의 처음과 끝을 이루며, 모든 법의 원시(元始)를 낸다. 모든 만행을 지혜
가 선도하기 때문에 지혜의 바다와 모든 행의 바다와 보리심의 바다와 대
자대비의 바다가 근본지과의 바다를 말미암아 나지 않음이 없음을 잘 알
아야 한다.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오위(五位)의 뒤에 두고, 일승의 가르침에
서는 십신(十信)의 처음에 둔다. 다만 중생의 종성이 영리하고 둔함이 같지
않기 때문에 가르침이 근기를 따라 세워진 것이다.” 이것이 그 증거이다.
論云.“ 以根本智, 爲初發菩提心, 以根本智圓故, 時亦普徹,
爲一切智之大體, 成一切行之始終, 生一切法之元始. 一切萬
行智爲先導故, 善知智海, 一切行海, 菩提心海, 大慈大悲海,
莫不由斯根本智果海而生也. 三乘敎, 置之於五位之後, 一乘
敎, 置之於十信之初. 但衆生種性利鈍不同故, 敎隨根立.” 此
其證也.

일승의 원돈문을 빌린 것은 십신심(十信心)의 처음에 근본지과의 바다
를 얻고, 십천 겁 동안 닦은 뒤에 십신만심(十信滿心)에 이르는 것이 아님
이 분명한 줄 알아야 한다. 논 가운데 다만 한 생에 공(功)이 끝남을 밝히
고, 본래 십천 겁이라는 글자가 없다. 다만 초심의 범부가 인연을 만나 바
야흐로 자기 마음의 근본보광명지를 요달하고, 점차 닦음의 공(功)에 이른
후에 깨닫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치와 지혜가 비록 나타나지만 여러
생애의 습기가 생각 생각에 여전히 침투하여 행위가 있고 지음이 있어서
물질과 마음이 아직 다하지 않는다. 이것을 십신범부가 알음알이의 장애를
받는 곳이라고 한다.
是知, 此一乘圓頓門假者, 十信心初得根本智果海, 非由十千
劫歷修然後, 至十信滿心明矣. 論中但明一生功終, 本無十千
劫之文也. 但初心凡夫會緣, 方了自心根本普光明智, 非由漸
修功至然後悟也. 故理智雖現, 而多生習氣, 念念猶侵, 有爲有
作, 色心未殄. 是謂十信凡夫, 爲解礙處也.

그러나 자기 무명이 본래 신이하고 본래 진실하여 공(功)이 없는 큰 작용
이 항상 그러한 법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스스로 십신 가운데 방편지관(方
便止觀)96)을 닦아서 자유로이 공(功)이 이루어져 선정과 지혜가 두렷이 밝
음을 문득 발심주(發心住)97)라고 이름한다.「범행품」에 “처음 발심할 때에
곧 아뇩보리를 얻는다”98)라고 한 것이 이 지위에 해당한다. 십주에 들어간
후에 보광명지로써 항상 세상에 있으면서 근기를 따라 널리 응하여 중생
을 교화하지만 물들고 집착함이 없어서 자비와 지혜가 점점 밝아지고 공
행(功行)99)이 점점 늘어나 필경에는 보현행을 이루어 인(因)이 가득하고 과
(果)가 마쳐져 보(報)로 한량없는 상호와 한량없는 장엄을 얻음이 빛과 같
고 그림자와 같아서 항상 시방에 두루하여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항상함도 아니고 끊어짐도 아니니, 큰 서원과 큰 지혜의 자재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然以悟自無明本神本眞, 無功大用恒然之法故, 自修十信中方
便止觀, 任運功成, 定慧圓明, 便名發心住. 梵行品云,“ 初發
心時, 卽得阿耨菩提者,” 當此位也. 入十住之後, 以普光明智,
恒處世間, 隨根普應, 敎化衆生而無染著, 悲智漸明, 功行漸
增, 畢竟成普賢行, 因滿果終, 報得無量相好無量莊嚴, 如光如
影, 恒遍十方, 非有非無, 非常非斷, 以大願大智自在用故.
96) 방편지관(方便止觀)은 십신(十信)의 범부가 십주(十住)의 처음인 발심주(發心
    住)에 들어가기 위해 닦는 방편으로서의 지관이다. 이미 자신이 갖추고 있는 깨달음
    의 근원은 완성되어 있어서 더 이상 수행의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
    지만, 과거 생에 축적된 습기를 제거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방편지관이라고 한다.
97) 발심주(發心住)는 십주(十住)의 첫 번째에 해당하는 계위로, 초발심주(初發心
    住)라고도 한다.『화엄경(華嚴經)』 권16의「십주품(十住品)」에서는 보살의 발심
    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이 보살은 부처님・세존의 모습이 단정하고
    위엄이 있으며, 상호가 원만하여 사람들이 즐겨 보려고 하며, 만나 뵙기 어렵고
    큰 위력이 있음을 본다. 또는 신통을 보고 또는 수기를 들으며, 또는 가르침을
    듣고 또는 중생들이 온갖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며, 또는 여래의 광대한 불법을 듣
    고 보리심을 일으켜 일체지를 구한다.”(大10, p.84a26-b1. 此菩薩見佛世尊形貌端
    嚴, 色相圓滿, 人所樂見, 難可值遇, 有大威力, 或見神足, 或聞記別, 或聽教誡, 或見衆
    生受諸劇苦, 或聞如來廣大佛法, 發菩提心, 求一切智.)
98)『화엄경(華嚴經)』 권17의「범행품(梵行品)」에서는 “처음 발심할 때에 아뇩다라
    삼먁삼보리를 얻는다”(大10, p.89a1. 初發心時, 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
    고 있다.
99) 공행(功行)은 공(功)을 수반하는 행실로서의 수행, 또는 수행의 선한 결과를 가
    리키는 말이다.『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는 무념(無念)의 지견(知
    見)을 얻으면 애착과 증오가 자연히 담박해지고 자비와 지혜가 스스로 점점 밝
    아지고 죄업이 자연히 끊어지며 공행이 자연히 증진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大
    48, p.403a)

이와 같이 큰 작용이 자재함은 처음 깨달은 근본보광명지 가운데 항상
그러한 행을 여의지 않는다. 지혜의 본체가 원만하기 때문에 때도 옮기지
않고 지혜도 다르지 않다. 그 가운데 습기를 연마해 다스리니, 자비와 지혜
가 점점 두렷하여 승진하는 계급이 없지 않다. 그러나 초발심으로부터 때
없는 지혜의 문에 들어가기 때문에 비록 구경의 지위에 이르더라도 당초에
옮겨 바뀜이 없으니, 마치 왕의 보배 도장이 한 번 찍힘에 문채가 이루어져
전후가 없는 것과 같다. 모든 중생의 근기를 따라 같고 다름을 맡겨서 육상
(六相)의 뜻으로서 회통하면 볼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근본지가 오위
(五位)를 거두어들임에 근거하여 논한다면 점차 닦는 행을 허락하지 않으
니, 이는 다만 총상(摠相)만 아는 것이다. 만약 행해승진(行解昇進)의 계위
차례에 근거해서 논한다면 때도 옮기지 않고 지혜도 다르지 않음이 마치
왕의 보배 도장이 한 번 찍힘에 문채가 이루어져 전후가 없는 것과 같은 취
지를 허락하지 않으니, 이는 다만 별상(別相)만 믿는 것이다. 모두 정견(情
見)을 여의지 못하여 이지(理智)가 원만하지 않음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如是大用自在, 不離初悟根本普光明智中恒然之行. 以智體圓
故, 時亦不移, 智亦不異, 於中鍊治習氣, 悲智漸圓, 昇進階級
非無. 然從初發心, 以入無時智門故, 雖至究竟位, 初無移易
也, 如王寶印, 一印文成, 無前後也. 任一切衆生隨根同別, 以
六相義會通可見. 昧者, 約根本智該收五位論, 則不許漸修之
行, 是但知摠相者也. 若約行解昇進階位漸次論, 則不許時不
移智不異, 如王寶印一印文成, 無前後之旨, 是但信別相者也.
皆由未離情見, 理智不圓故也.

논에서 말한다. “이 초지(初地)의 육상(六相) 법문에 들어가는 이와 나아
가 맨 처음에 구족범부(具足凡夫)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원행(願行)을 일
으킬 수 있고 취향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계위[地] 이전의 행해(行解)를
인하여 오는 것을 말미암지 않는다. 뜻으로 가르침을 베풂을 밝히며, 수행
이 막히고 장애됨의 절차와 안전하고 위태로움을 갖추어 밝혔다. 그러나
발심한 이가 한 때에 모두 단박에 닦아서 한 때와 한 행의 안에 있으며, 종
요로이 절차와 차례를 따라 닦아 오는 것이 아니다. 전체와 개별・같음과
다름・이루어짐과 무너짐의 법으로써 원융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섯 글자와 세 댓구의 법 가운데 한 글자가 여섯이 있으니, 사람의
몸에 근거해서 비유하면 나머지는 추측해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사람
의 몸에 육상(六相)의 뜻이 구족한 것과 같다. 머리・몸・손・발・눈・귀・코
・혀 등의 작용이 각각 다른 것은 별상(別相)이고, 온전히 한 몸이고 네 가
지 요소[四大]인 것은 총상(摠相)이며, 한결같이 공하여 본체가 없는 것은
동상(同相)이고, 이와 같이 다름이 없는 성품을 버리지 않고 머리・몸・손・
발・눈・귀・코・혀 등의 작용이 다름이 있음은 이상(異相)이며, 머리・몸・
손・발・눈・귀・코・혀 등이 함께 한 몸을 이룸은 성상(性相)이고, 다만 지
음 없는 반연을 따라 있어 각각 자성이 없어서 본체도 없고 모습도 없으며
생겨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음은 괴상(壞相)이다.
또 모든 중생은 이름이 총상(摠相)이 되고,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의 구
분은 이름이 별상(別相)이 되며, 모두 부처의 지혜와 같이 있음은 이름이
동상(同相)이 되고, 집착을 따라 업이 다른 것은 이름이 이상(異相)이 되
며, 지은 바의 업으로 인해 과보를 받아 태어나는 것은 이름이 성상(性相)
이 되고,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어 업 자체에 성품이 없는 것은 괴상(壞
相)이다.
또 시방의 보신불[報佛]은 이름이 총상(摠相)이 되고, 온갖 보배로 장엄
된 몸과 국토의 차별은 이름이 별상(別相)이 되며, 동일한 법신이 이지(理
智)가 둘이 없는 것은 이름이 동상(同相)이 되고, 지혜가 행을 따라 다른 것
은 이름이 이상(異相)이 되며, 중생을 이루는 것은 이름이 성상(成相)이 되
고, 주체와 대상이 모두 공하여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 것은 이름이 괴
상(壞相)이 된다.
또 한 지혜로써 오위(五位)를 싸서 거두는 것은 이름이 총상(摠相)이 되
고, 행해(行解)로 승진하는 것은 이름이 별상(別相)이 되며, 부처의 근본지
와 같은 것은 이름이 동상(同相)이 되고, 차별지를 닦는 것은 이름이 이상
(異相)이 되며, 대보리를 이루어 보현행을 구족하는 것은 이름이 성상(成
相)이 되고, 지혜의 본체가 의지함이 없어 작용하지만 짓지 않는 것은 이름
이 괴상(壞相)이 된다.
또 삼세의 오랜 겁 동안의 차별은 이름이 별상(別相)이 되고, 지혜로써
널리 관함에 한 찰나에 있는 것은 이름이 총상(摠相)이 되며, 업을 따라 길
고 짧은 것은 이름이 이상(異相)이 되고, 감정도 없고 견해가 다하여 길고
짧은 때가 없는 것은 이름이 동상(同相)이 되며, 지혜가 의지해 머무는 것
이 없음은 이름이 괴상(壞相)이 되고, 근기에 응하여 법을 주는 것은 이름
이 성상(成相)이 된다.……”100)
論云. “入此初地六相法門者, 乃至創始具足凡夫, 能發廣大願
行, 能趣入故, 非是由因地前行解而來. 意明設敎, 備明修行
滯障, 節級安危. 然發心者, 一時摠頓修, 居一時一行之內, 非
是要從節級次第修來. 以摠別同異成壞法, 圓融可見. 於此六
字三對法中, 一字有六, 且約人身類之, 餘可准知. 如一人身,
具足六相義, 頭身手足眼耳鼻舌等用, 各別是別相, 全是一身
四大, 是摠相, 一空無體, 是同相, 不廢如是無異性, 頭身手足
眼耳鼻舌等用有殊, 是異相, 頭身手足眼耳鼻舌等, 共成一身,
是成相, 但隨無作緣有, 各無自性, 無體無相, 無生無滅, 是壞
相. 又一切衆生, 名爲摠相, 愚智區分, 名爲別相, 皆同佛智而
有, 名爲同相, 隨執業異, 名爲異相, 因所作業, 受報得生, 名
爲成相, 心無所依, 業體無性, 名爲壞相. 又十方報佛, 名爲摠
相, 衆寶所嚴身土差別, 名爲別相, 同一法身, 理智無二, 名爲
同相, 智隨行異, 名爲異相, 成就衆生, 名爲成相, 能所皆空,
無得無證, 名爲壞相. 又以一智慧, 該收五位, 名爲摠相, 行解
昇進, 名爲別相, 同佛根本智, 名爲同相, 修差別智, 名爲異
相, 成大菩提, 具普賢行, 名爲成相, 智體無依用而不作, 名爲
壞相. 又三世久劫差別, 名爲別相, 以智普觀在一刹那, 名爲摠
相, 隨業長短, 名爲異相, 情亡見盡, 長短時無, 名爲同相, 智
無依住, 名爲壞相, 應根與法, 名爲成相.”〈云云〉
100)『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권24(大36, pp.885c23-886a21).

오늘 깨달아 안 보광명지의 불과(佛果)가 법계를 증득한 곳에 대해서는
말을 여의었기 때문에 비록 미리 말하지 못하지만 뒤에 닦는 연기문 가운
데 근거해서 논한다면 원융과 항포의 두 가지 뜻이 서로 이루고, 구경과 구
경이 아닌 두 가지 뜻이 서로 이루며, 이불(理佛)과 사불(事佛)의 두 가지
뜻이 서로 이루고, 타과(他果)와 자과(自果)의 두 가지 뜻이 서로 이루며,
십주성불에 이르러서도 또한 이와 같다.
今時悟解普光明智之佛果, 當於法界證處, 離言故, 雖未預談,
具約後修緣起門中論, 則圓融行布二義相成, 究竟未究竟二義
相成, 理佛事佛二義相成, 他果自果二義相成, 至於十住成佛,
亦復如是.

논에서 말한다. “만약 이『대방광불화엄경』의 불과(佛果)인 보광명지의
경계 위에 예전을 두고 지금을 세워 멀고 가까운 시간인 앞과 뒤・과거와
미래・삼세와 부처가 있는 곳・부처가 없는 곳과 정법(正法)・상법(像法)・
말법(末法)을 지으며, 나아가 시방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예전 부처・새로
운 부처와 정토・예토 등을 짓는 이는 장차 믿음을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또 말한다. “신인(信因)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과덕에 계합하되 털끝
만큼도 그르치지 않아서 바야흐로 믿는 마음이라고 이름하니,101) 마음 밖
에 부처가 있음은 믿음이라고 이름하지 않으며, 크게 그릇된 견해를 지닌
이라고 이름한다.”102) 또 말한다. “처음에 비로소 보리심을 일으켜 근본지
의 대원명경(大圓明鏡)을 가져서 널리 모든 법을 비춘다.” 이로써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금 자성을 반조하는 십신(十信)의 초심(初心) 범부의 지위
에 이와 같이 생각하기 어려운 과덕을 갖추어 논한 것이니, 처음 발심할 때
에 무명주지번뇌로 문득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를 삼기 때문이다.
論云. “若於此大方廣佛華嚴經佛果, 普光明智境界之上, 存古
立今, 作遠近時分前後去來三世, 有佛處無佛處, 正法像法末
法, 及於十方三世諸佛, 作舊佛新佛, 淨土穢土等者, 將知未
能成信也.” 又云.“ 信因中, 契諸佛果德, 分毫不謬, 方名信心,
心外有佛, 不名爲信, 名爲大邪見人也.” 又云.“ 初始發菩提
心, 以持根本智大圓明鏡, 普照諸法.” 以是當知. 今時返照自
性十信初心凡夫之位, 具論如是難思果德也, 以初發心時, 無
明住地煩惱, 便爲諸佛不動智故.
101) 이 부분은『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14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즉, “신인
     가운데 모든 부처님의 과법에 계합하되 털끝만큼도 그르치지 않아서 바야흐로
     믿는 마음이라고 이름한다.”(大36, p.809b6-7. 以信因中, 契諸佛果法, 分毫不謬, 
     方成信心.)
102)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권8(大36, p.768b16-17).

서원을 말미암아 행을 일으킬 때에 망령된 습기는 비록 다하지 않았지만
온전히 근본지가 움직이는 법이 반연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 지혜는 처음
에 서원으로써 일어나서 나아가 공(功)이 마치고 서원이 가득함에 이르기
까지 보광명지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온전히 근
본지의 응용법이며, 반연을 따라 항상 그러한 행임을 알아야 한다. 소유한
보신[報]과 화신[化]의 모습과 작용이 공(功) 없는 지혜와 대비의 행이다.
모든 중생들이 보는 바에 따라 서원을 말미암아 행을 일으키니, 자비로운
선근력인 크고 작은 연기의 구체적인 모습과 온갖 차이가 빛과 같고 그림
자와 같아서 숨음과 나타남이 자재하고, 마치 허공 가운데 메아리가 물건
에 따라 소리를 이루는 것과 같다. 항상함과 항상하지 않음이 아니며 심식
(心識)으로 아는 바의 경계가 온전히 근본지의 큰 작용이다.
由願起行時, 妄習雖未盡, 全是根本智之運爲法隨緣. 故云,
“其智以願興, 乃至功終願滿, 以普光明智, 利衆生故.” 是知
全是根本智之應用法, 隨緣恒然之行也. 所有報化相用, 是無
功之智大悲之行. 任一切生所見, 由願起行, 慈善根力大小緣
起具相萬差, 如光如影, 隱現自在, 如空中響, 任物成音. 非常
無常, 心識所知境界, 全是根本智之大用.

이른바 보현이 차별지란 것은 근본보광명지의 전체가 움직이는 작용에
근거해서 말한 것이어서 앞과 뒤가 없다. 그러므로 말한다. “보광명지는 그
양이 법계와 허공계와 같아서 중간과 가장자리가 없으며, 본체가 모든 중
생의 마음과 같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따르는데, 마땅히 무슨 몸을 보며 마
땅히 무슨 법을 듣겠는가. 시방 세계에 항상 동일하게 상대하여 나타나 때
를 잃지 않는다.”
所言普賢是差別智者, 且約根本普光明智擧體, 運爲之用言之,
無有先後. 故云.“ 普光明智, 量同法界虛空界, 無有中邊, 體
同一切衆生心, 恒隨一切衆生, 宜見何身, 宜聞何法. 十方世界
恒同對現, 而不失時.”

비록 이와 같이 초발심으로부터 서원을 말미암아 행을 일으켜서 이에 공
(功)이 마치고 서원이 가득함에 이르기는 하지만, 이는 중생의 마음 밖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는 중생의 본체를 증득하여 중생의 작용을 쓴
다”라고 말한다. 또 “부처는 중생의 마음속의 부처여서 자기 근기의 감당함
을 따라 다른 물건이 없다”라고 말한다. 모든 중생의 무명과 망상은 자성과
다름이 없어서 온전히 이 시방 모든 부처님의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의
본원이다. 그러므로 “일체 모든 부처님의 근원을 알려고 하거든 자기 무명
이 본래 부처임을 깨달아라”고 말한다. 근본 지혜의 부처님이 스스로 삼대
(三大)・성품과 모습・이(理)와 사(事)의 덕을 갖춘 까닭에 다만 자기 업을
따라 숨음과 나타남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雖有如是從初發心, 由願起行, 乃至功終願滿, 非是衆生心外
之事. 故云,“ 佛證衆生之體, 用衆生之用.” 又云,“ 佛是衆生
心裏佛, 隨自根堪無異物.” 一切衆生無明妄想, 無別自性, 全
是十方諸佛三身四智之本源. 故云, “欲知一切諸佛源, 悟自無
明本是佛.” 以本智佛, 自具三大性相理事之德故, 但隨自業,
隱現有殊耳.

중생이 악을 지음에 악은 작용을 거스른 것이기 때문에 과보가 염오된
부분[染分]을 얻어서 의보와 정보의 차별이 비록 이 작용을 거스르지만 또
한 이 근본 지혜 가운데 본래 악한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의 모습과 작용이
줄어들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이 선을 닦으시어 과보가 장엄을 얻어서 선
은 작용을 따르기 때문에 모습과 작용이 담연하여 청정하다. 비록 행을 일
으켜 과보를 얻는 것이지만 또한 근본지 가운데 본래 갖춘 선한 작용이기
때문에 늘어나지도 않는다.
衆生作惡, 惡是違用故, 報得染分, 依正差別, 雖是違用, 亦是
本智中本惡用故, 智之相用不減也. 諸佛修善, 報得藏嚴, 善是
順用故, 相用湛然淸淨. 雖是起行報得, 亦是根本智中 本具善
用故, 不增也.

그러나 각각 자기 업의 선악을 따르기 때문에 깨끗함과 더러움・괴롭고
즐거움의 차이는 있지만, 그 지혜의 본체・모습・작용은 염(染)・정(淨)의
연기에 본래 늘어남과 줄어듦이 없어서 항상 나타나 이(理)와 사(事)가 걸
림 없고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섭하기 때문이다. 오늘 깨달아서 안 부동지
의 불과(佛果)는 삼신(三身)과 사지(四智) 등이 단박에 두렷한 것이다. 〈십
신(十身)과 십지(十智)가 곧 삼신(三身)과 사지(四智) 가운데 갖춘 덕이다.〉 육조(六祖)
스님이 설하신 바와 같으니, “삼신(三身)이 원래 내 몸이며, 사지(四智)가
본래 마음의 밝음이다”103)라고 말하였다. 또한 나중에 닦아 과보를 얻는 것
도 무방하다.
然各隨自業善惡故, 有淨穢苦樂差殊, 而其智之體相用, 於染
淨緣起, 本無增減, 恒常現露, 理事無碍, 生佛互融故. 今日悟
解不動智佛果, 三身四智等頓圓. 〈十身十智, 卽三身四智中, 具德也.〉
如六祖所說, 故云,“ 三身元我體, 四智本心明.” 亦不妨後修
報得也.
103)『육조단경(六祖壇經)』(大48, p.356b19).

이 근본보광명지의 불과(佛果)는 중생과 부처의 본체이기 때문에 이(理)
와 사(事)・성품과 모습・선과 악・더러움과 깨끗함이 함께 원만하고 함께
사라지니, 원효[曉公]스님이 세운 하나의 큰 법신불과 같다. 지혜의 본체
가 본래 삼대(三大)를 갖춘 까닭에 단지 성품이 깨끗한 본각의 이불(理佛)
일 뿐만 아니라 지혜의 본체는 본래 십세의 멀고 가까움과 느리고 빠름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과보가 포섭되어 있는 것도 아니며, 근본지가 자기 마
음의 부처이기 때문에 다른 과보가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현
수와 청량이 판별한 「성기품」 가운데 부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에 있다는
뜻은 장자의 논의 취지와 조금 다르다.
此根本普光明智佛果, 是生佛之體故, 理事性相善惡染淨, 俱
圓俱泯, 如曉公所立, 一大法身佛也. 以智體本具三大故, 非但
性淨本覺理佛也, 以智體本無十世遠近延促故, 非當果攝在也,
以根本智是自心之佛故, 非他果在我也. 故知賢首淸凉, 所辨
性起品中, 佛智在衆生心之義, 與長者論之旨稍異也.

그러나 만약 연기문 가운데 융섭한다는 뜻에 근거해서 논한다면, 중생이
오늘 깨달아 안 보광명지 가운데 중생과 부처가 원융하기 때문에 남의 결
과가 나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옳으며, 십세가 원융하기 때문에 미래의 결
과가 스스로 있다고 하더라도 옳으며, 염오를 따르되 성품이 깨끗하기 때
문에 중생과 중생이 스스로 있다고 하더라도 옳다. 그러나 오늘 단박에 깨
달은 보광명지불은 원융과 항포의 연기문에 근거해서 논할 바가 아니니,
법계를 증득한 곳에서 과보를 어찌 미리 말하겠는가.
然若約緣起門中融攝之義論, 則以衆生, 今日悟解普光明智中,
生佛圓融故, 謂他果在我亦得, 十世圓融故, 謂當果自有亦得,
以有隨染性淨故, 謂生生自有亦得. 然今日頓悟普光明智佛,
非約圓融行布緣起門之所論, 以法界證處, 果豈預談.

이 가운데 논한 깨달음이란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解悟)이다. 비록 해오(解悟)라고 하더라도 단박에 깨달음을 일으킨
곳이기 때문에 곧 불가설의 과분성해(果分性海)와 같다. 또 일승의 불과
(佛果)는 법 그대로 십신(十信)의 초심(初心)에 있어서 미래의 과보가 융
섭하는 논이 아니다.
此中所論悟者, 非先修而後悟故, 是解悟也. 雖是解悟, 以頓發
悟處故, 卽不可說果分性海同也. 又以一乘佛果, 法爾在十信
初心, 非當果融攝之論也.

만약 뒤에 닦는 연기문 가운데 공(功)이 마치고 서원이 가득한 과덕에
근거해서 논하고, 또 근본 지혜의 본체 가운데 삼세의 일이 두렷함에 근거
해서 논한다면, 미래의 과보가 스스로 있음이 또한 미륵의 누각 가운데 나
타난 미륵의 삼세 인과와 같다. 그러므로 논에서 “지혜 가운데 삼세의 고금
과 안팎의 멀고 가까움의 헤아림이 없기 때문이며, 또 참된 본체는 두렷하
여 십세의 일이 사귀어 사무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은 비록 갖추었지만 오늘 단박에 깨달음은 처음 뜻에 적당하다.
若約後修緣起門中功終願滿果德論之, 又約本智體中圓三世
事論之, 則當果自有, 亦如彌勒樓閣中所現彌勒三世因果. 故
論云,“ 智中無三世古今內外遠近量故. 又以眞體圓十世事交
參徹故.” 如是二義雖具, 今日頓悟的於初義.

만약 점차 닦는 연기문에 근거하면 십신의 초심에 먼저 깨달은 뒤에 부
지런히 지관(止觀)을 닦아서 물질과 마음의 번뇌[有漏]가 전부 다하여 십
주의 처음에 이르러 선정의 힘을 이미 이뤄서 알음알이의 장애가 전부 없
어지고 깨달아 지위에 들어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
지(十地)를 지나가면서 닦아 등각위(等覺位)104)에 이르기까지 자기 업으로
본 바 참된 본체를 닦는 가운데 나타난 바 자기의 삼세 인과와 보불(報佛)
의 경계 등을 눈앞에 대하는 것과 같다.
若約漸修緣起門, 則十信初心先悟之後, 勤修止觀, 色心有漏
摠盡, 至住初定力已成, 解礙摠亡, 證悟入位, 歷修十住十行十
廻向十地, 至等覺位, 是修自業所見眞體中, 所現自己三世因
果及報佛境界等, 如對目前.
104) 등각위(等覺位)은 보살의 수행단계 가운데 마지막인 묘각위(妙覺位)에 이르기 전
     단계이다. 아직 부처의 자리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와 거의 같은 단계에 이르렀
     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등각은 삼아승기겁의 기나긴 수행을 마치고
     묘각을 얻기 직전의 계위로서 극과(極果)에 인접해 있기 때문에 인극(隣極)이라
     고도 한다. 등각위는 위에 묘각위의 단계가 있다는 뜻에서 유상사(有上士)라고 하
     고, 현재의 일생을 지낸 후에는 부처의 지위에 오른다는 뜻에서 일생보처(一生補
     處)라고도 하며, 금강과 같은 견고한 마음으로 모든 번뇌를 부순다는 뜻에서 금강
     심(金剛心)이라고도 한다.[『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 韓4, p.524b 참조.]


그러므로 논에서 말한다. “이 가르침은 비로자나보신이 설하신 것이며,
문수사리가 기원(祇園)105)으로부터 각성(覺城)106)에 와서 그 가르침을 굴려
설한 것이다. 보신여래는 다함없는 장엄 공덕의 자수용신(自受用身)107)
되며, 범부・사람과 하늘・삼승의 볼 바가 아니다. 큰 마음의 중생은 다만
그 가르침을 듣고 그 몸을 보지 못하니, 여래의 가지(加持)108)로 볼 수 있고
자기의 업력을 의지해서는 볼 수 없다. 큰 마음의 중생이 각성 동쪽의 문수
사리 처소에서 가르침을 갖추어 듣고, 만약 가르침을 받들어 수행하여 한
생애에 공(功)을 마치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눈앞에서 대하는 것과 같으
니, 곧 선재(善財)가 자씨(慈氏)의 누각 가운데 이르러서 본 부처님의 경계
가 이 모양이다.”
故論云.“ 此敎是毗盧遮那報身所說, 文殊師利, 從祇園往覺
城, 轉其敎說. 爲報身如來, 是無盡莊嚴功德自受用身, 非是凡
夫人天三乘所覩. 大心衆生, 但聞其敎, 不見其身, 除爲如來加
持得見, 依自業力不能得見. 大心衆生, 於覺城東文殊師利所,
具聞得敎, 若也承敎修行一生功終, 十方諸佛如對目前, 卽善
財至慈氏樓閣中, 所見佛境, 是其樣也.”
105) 기원(祇園)은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vihāra)를 가리키며, 중인도에 있는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에서 남쪽으로 1.6km 지점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
     자리하고 있다. 당시 수달다(須達多) 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한 후에 기타(祇陀)
     태자의 동의를 얻어 태자가 소유한 정원림을 개인 재산으로 사들인 뒤에, 그 정
     원림에 정사를 건립해서 헌납한 것이다.
106) 각성(覺城)은 복성(福城)이라고도 하는데, 마가다국의 가야(伽倻)에서 9마일쯤
     남쪽에 있는 붓다가야를 가리킨다.『화엄경(華嚴經)』의「입법계품(入法界品)」
     에서는 각성의 동쪽 언덕에서 선재동자가 처음으로 오백 동자들과 함께 놀다가
     문수보살을 만나 발심하였으며,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110개의 성을 지나면서
     53선지식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107) 자수용신(自受用身)은 부처님께서 오랜 겁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과 지혜
     의 자량을 닦아서 일으킨 끝없이 진실한 공덕과 지극히 원만하고 청정하여 항상
     어디에나 두루 존재하는 색신이며, 이것은 고요히 이어져 미래의 시간이 다하도
     록 항상 광대한 법락을 수용한다.[『성유식론(成唯識論)』 권10, 大31, p.57c 참조.]
108) 가지(加持, adhist hāna)는 가호, 지배하는 힘, 신비한 주술의 힘, 상응하는 것 등
     을 의미한다. 곧 부처님과 보살이 중생을 가호하고 교화할 목적으로 자비심으
     로부터 초자연적인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또 부처님의 대비력이 중생
     에게 주어지고, 중생의 신심에 부처님께서 응답하여 서로 계합하는 것을 뜻하
     기도 한다.

만력 32년(1604) 갑진 가을 능인암에서 개간해서 쌍계사로 옮겼다.
萬曆三十二年甲辰秋能仁庵開刊移鎭雙溪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