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어록
● 상당 上堂
● 시중 示衆
● 방산거사에게 보내는 답신(방산거사는 제학 오수) 答方山居士 吳提學倕
● 무제거사에게 주는 법어(무제거사는 원사 장해) 示無際居士 張海院使
● 최진사에게 주는 법어 示崔進士
● 사제거사에게 주는 법어 示思齊居士
● 염정당에게 주는 법어(염정당의 이름은 흥방) 示廉政堂 興邦
● 낙암거사에게 주는 염불의 간략한 요지에 대한 법어 示樂庵居士念佛略要
● 백충신거사에게 주는 법어 示白忠信居士
● 무능거사에게 주는 법어 (무능거사는 상공 박성량) 示無能居士 朴相公成亮
● 당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當禪人
● 진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眞禪人
● 의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宜禪人
● 담당숙장로에게 보내는 답신 答湛堂淑長老
● 문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文禪人
● 소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紹禪人
● 가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可禪人
● 상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詳禪人
● 안산군 부인 묘당에게 示安山君夫人妙幢
● 일본의 지성선인에게 示日本志性禪人
● 의선인에게 示宜禪人
● 시사에게 주는 경책 警侍司
● 가음명 歌吟銘
● 상당 上堂
법좌에 올라앉아 향을 사르고 난 다음 주장자를 가로로 잡고 말했다. “밝
고 분명하며 맑고 고요하다. 벌거벗고 걸친 것이 없으며 텅 비고 쓸쓸하다.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이미 이와 같이 사셨고, 현재의 모든 부처님도 이
와 같이 사시며, 미래의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이 사실 것이다. 내가 이와
같이 들먹이며 내세운 말이 이미 잠꼬대152)이거늘 대중들은 어째서 선 채
로 졸고 있는가!153)” 주장자를 올렸다가 세 번 내리치고 곧바로 법좌에서
내려왔다.
上堂, 拈香罷, 橫按拄杖云, “白的的, 靑154)廖廖;赤條條, 空
索索. 過去諸佛, 已當如是住;現在諸佛, 今當如是住;未來
諸佛, 亦當如是住. 利雄, 伊麽擧唱, 已是寐語, 大衆, 因甚立
地瞌睡!” 卓拄杖三下, 便下座.
152) 주석92) 참조.
153) 밝고 텅 비운 채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님이 산다는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
아들이는 대중을 비판하고 있다. 태고는 그 말이 진실인 듯이 가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빈말[虛言] 또는 잠꼬대와 같다는 뜻으로 제시한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의심을 가지고 대결해야 열리는 화두라는 관문(關門)일 뿐이다.
154) ‘靑’은 ‘淸’과 통한다.
● 시중155) 示衆
155) 懶翁語錄 주석194) 참조.
법좌에 올라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
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한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이 무(無)라는 글자
는 한 알의 환단(還丹)과 같아서 그것으로 쇠에 점을 찍으면 금이 된다.156)
이 무자(無字)를 들고 궁구하는 순간 삼세 모든 부처님의 진면목이 쏟아지
듯이157) 나타날 것이다. 그대들은 내 말을 수긍하는가? 만일 믿지 못하겠다
면 이 무자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158)을 품고 마치 만 길의 벼랑 아래로 떨
어질 때와 같이 몸과 마음을 모두 이 의심에 던지고, 마치 완전히 죽은 사
람과 같이 화두에 대한 분별이나 헤아림이 전혀 없어야 한다. 이러니저러
니 하는 모든 생각들을 던져버리고 오로지 무자만 들고서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다만 화두를 생명의 뿌리159)로 삼아 항상 뚜렷
하게 의식하며 어느 순간에나 살피면서 화두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상
태160)로 눈앞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
이 이어지게 하는 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몸과 마음이 동요하
지 않고 눈은 잠시도 쥐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161) 몸과 마음
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끼지도 못한 채 마음의 눈으로 화두를 한곳에 거두
어들이고 다만 이와 같이 뚜렷하면서도 분명하고 분명하면서도 뚜렷하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참구하라.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
과 같고,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여 생각나고 또 깊
이 생각날 것이니 이 어찌 억지로 만들어내는 마음이겠는가!162) 만일 이
와 같이 진실하게 공을 들이면 공부하는 데 힘이 덜 드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힘을 얻은 경지이기도 하다.163) 화두가 자연히 순수하
게 익어서 한 덩어리가 되면 몸과 마음이 홀연히 비고 응결된 듯이 움직이
지 않아서164)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질 것이다.165) 이것이 바로 화두
를 공부하는 당사자만 남아 있는 경계이니, 당사자가 만일 화두 이외의 다
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헛된 것에 미혹될 것이다. 166) 어떤 경우일지라
도 결코 약간의 다른 생각조차 하지 말고,167) 그당사자가 어떤 면목인지,
또한 조주가 말한 무자가 어떤 뜻인지 돌아보는 것이 좋다. 이 화두에서 무
명168)을 깨뜨린다면 마치 직접 물을 마셔 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만약 꿰뚫지 못한다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다만 화
두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화두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는지 없는지 또는 맛이 있는지 없는지는 따지지 말고,169)이 근본적인 의
심[大疑]을 품은 채 화두를 들고서 오로지 그것만 뚜렷하게 알아차리며 꾸
준히 대결하라. 걸을 때도 다만 이렇게 하고, 앉아 있을 때도 다만 이렇게 하
며, 죽을 먹거나 밥을 먹을 때도 다만 이렇게 하고, 남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도 다만 이렇게 하며, 모든 행위 양상과 시끄럽거나 고요한 경계에서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화두 공부의 모든 조건을 갖추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陞座, 擧,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這箇
無字, 如一粒還丹相似, 點鐵卽成金. 才擧箇無字, 三世諸佛
面目, 掀翻出來. 儞等諸人, 還肯也無? 若未肯信, 於此大疑之
下, 放下身心, 如墮萬仞崖下時相似, 無計較沒商量, 如大死人
相似. 放捨如何若何之念, 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四威儀
內, 只與話頭爲命根, 常常不昧, 時時檢察, 提撕話頭, 帖在眼
前. 如鷄抱卵, 使暖氣相續;如猫捕鼠, 身心不動, 目不暫捨.
不覺身心有之與無, 心眼話頭攝在一處, 但伊麽惺惺歷歷, 歷
歷惺惺, 密密參詳. 譬如嬰兒憶母相似, 如飢思食, 如渴思水.
休而不休, 思復深思, 豈是做作底心也! 若如此眞實用功, 則
便到省力處, 此是得力處也. 話頭自然純熟, 打成一片, 身心忽
空, 凝然不動, 心無所之. 這裏只是箇當人, 當人若起他念, 則
決定被影子惑矣. 千萬切忌絲豪異念, 正好回看, 渠何面目, 又
趙州道無, 意作麽生. 卽此言下, 打破無明, 則如人飮水, 冷暖
自知. 若透不得, 則更着精彩, 只要話頭, 聯綿不斷. 不論有疑
無疑, 有味無味, 卽此大疑之下, 提撕話頭, 單單不昧, 捱來捱
去. 行也但伊麽, 坐也但伊麽, 喫粥喫飯時但伊麽, 對人打話時
但伊麽, 一切施爲, 動靜境上, 皆悉如之, 則無有不辨矣.”
156) 환단 한 알로 쇠를 금으로 만들듯이 이 무자 화두를 타파하면 범부의 지위에서
성인의 지위로 올라간다는 뜻이다. 이 비유에 관해서는 眞覺語錄 小參 「주광세
의 별세한 처를 위하여」 주석220)·221) 참조.
157) 흔번(掀翻). 뒤집어엎는다는 말. 여기서는 그 어떤 것을 뒤집어엎어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이 쏟아진다는 뜻으로 쓰였다.
158) 의심은 의정(疑情) 또는 의단(疑團)이라고도 하며, 화두를 공부하는 방법적 기
초이다. 화두 공부는 분별하거나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심’하는 것에 의하여
본래의 궤도로 들어갈 수 있다. 이하의 내용은 화두가 어떻게 의심덩어리가 되
어 자신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태고선사의 설명이다.
159) 간화선에서 화두는 곧 생명의 뿌리이므로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 후대의 감산
덕청(憨山德淸 1546~1623)도 이 뜻을 전한다. “꿈을 꿀 때조차도 화두를 놓아
버려서는 안 된다. 오로지 화두라는 한 생각만이 당사자를 살리는 생명의 뿌리이
다.”(『憨山集』권6「示嵩璞恩山主」卍127 p.289b10. 乃至睡夢中, 亦不放捨.
唯有一念話頭, 是當人命根.)
160) 제시(提撕). 화두를 드는 가장 근본적인 요령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한순간도 놓
치지 않고 화두를 붙들고 있는 것을 말한다.
161) 닭과 고양이의 비유는 화두를 항상 뚜렷하게 의식하고 잠시도 의식에서 끊어지
면 안 된다는 공부의 요령을 나타낸다. “다만 오로지 이 무자만 들고서 하루 모
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뚜렷하게 깨어 있는 것이 마치 고양이가 쥐
를 잡거나 닭이 알을 품듯이 해야 하며, 때로는 끊어지고 때로는 이어지는 방식
이 되도록 하지 마라.”(『誡初心學人文』 「皚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大48 p.
1005a9. 只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四威儀內, 須要惺惺, 如猫捕鼠, 如鷄抱卵,
無令斷續.);“비유하자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마음과 눈을 주시하는
대상에 통일시키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쥐를 놓치기 때
문이다. 또한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이 이어지는 것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버리고 떠나면 병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天目明
本雜錄』「示徒」 卍122 p.724b4. 喩如猫捕鼠, 心目一於注, 少怠則失鼠矣;
如鷄抱卵, 暖氣貴於相接, 棄之則不成種子矣.)
162) 이상 화두 공부의 핵심적 방법과 그에 대한 비유는 고스란히 서산휴정(西山休
靜)에게 이어지는데, 그는 이것을 총괄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는 공부’(切心
做工夫)라 했다.『禪家龜鑑』 韓7 p.636b24 참조.
163) ‘힘이 덜 든다는 것’[省力]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화두가 들리고 애써 의
심하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살아 있다는 뜻이며, 그것은 화두를 공부
하는 데 힘을 얻었다[得力]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이것은 화두를 놓치지 않고 꾸
준히 의심한 결과로 나타나는 경지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와 고봉원묘(高峰原
妙)의 말에 이 뜻이 보인다. “일상생활 하는 모든 행위 반경에서 차별된 경계에
들어서 힘이 덜 든다고 느끼는 순간이 곧 힘을 얻은 경지입니다. 힘을 얻은 경지
에서 가장 힘이 덜 드는 것이니, 만약 조금이라도 기력으로 지탱한다면 반드시
삿된 법이며 불법은 아닙니다.”(『書狀』「答宗直閣狀」大47 p.933c11. 日用
四威儀中, 涉差別境界, 覺得省力時, 便是得力處也. 得力處極省力, 若用一毫毛
氣力支撐, 定是邪法, 非佛法也.);“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
두가 단지 화두에 대한 의심덩어리[疑團]일 뿐이다. 꾸준히 반복하여 화두를
의심하다가 의심하는데 힘이 덜 드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니 이것이 바로 힘
을 얻은 경지로서 의심하지 않아도 저절로 의심이 생기며 화두를 억지로 들지
않아도 저절로 들리게 될 것이다.”(『高峰禪要』「示衆」제2 卍122 p.706b2.
以至見聞覺知, 總只是箇疑團. 疑來疑去, 疑至省力處, 便是得力處, 不疑自發,
不擧自擧.)
164) 화두에 약간의 분별도 붙을 여지가 사라지고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안팎의 모
든 것이 화두로서 한 덩어리가 된 타성일편(打成一片)의 경계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앎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이다. 천목명본(天目
明本)의 법어에도 그 뜻이 보인다. “공부를 하면서 화두를 살피다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용맹하게 정진하여 한 덩어리가 되면 마치 은산철벽과 같아질 것이
다.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남김없이 하나
로 뒤섞여 앎의 대상은 전혀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한 덩어리라고 안다
면 다시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질 것이니, 어찌 남김없이 하나로 뒤섞인 이
치가 있겠는가!”(『天目明本雜錄』 「示雄禪人」 卍122 p.764a11. 做工夫看箇
話頭, 身心勇猛, 打成一片, 如銀山鐵壁相似. 旣是成一片, 身與心, 人與境, 覿體
混融, 不容有所知. 苟或知是一片, 則又是兩片三片了也, 安有混融之理哉!)
165) 심무소지(心無所之). 간화선 계열의 선사들 중에서도 오로지 대혜종고(大慧宗
杲)만이 즐겨 쓰는 용어이다. 화두에 대하여 언어와 관념의 기량을 다 써먹어 마
음에 남아 있는 수단이 하나도 없는 순간을 맞이하면 ‘갈 곳이 없는’ 막막한 경
계가 된다. 이것이 앞서 나온 은산철벽이며, 화두 공부의 절정이다. 이렇게 화
두라는 불길만 살아 있고 그 밖에 의지할 대상이 완전히 불타버린 경지가 결정
적인 소식이 오기 직전의 순간인 것이다.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는 ‘마음의
길이 끊어진 경계[心路絶]’ 또는 ‘아무 맛도 없는 경계[沒滋味處]’ 등이 있다.
“잡념이 일어날 때 다만 화두를 드십시오. 화두는 큰 불길이 모기나 땅강아지가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듯이 잡념을 태워버립니다. 화두를 들고 꾸준히 궁구
하다가 세월이 성숙되어 홀연히 마음이 갈 곳이 사라지면 자신도 모르게 분출
하듯이 한순간에 타파될 것입니다.”(『大慧語錄』권20「示羅知縣」大47 p.
898a27. 雜念起時, 但擧話頭. 蓋話頭如大火聚, 不容蚊蚋螻蟻所泊. 擧來擧去,
日月浸久, 忽然心無所之, 不覺噴地一發.);“마음을 쓸 여지가 전혀 없고, 마음
이 더 이상 갈 곳이 사라졌을 때 아무것도 없는 공(空)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
워할 것 없습니다. 여기가 오히려 좋은 소식이 다가올 경계입니다.”(『書狀』
「答張舍人狀」大47 p.941b15. 直得無所用心, 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裏却
是好處.)
166) 화두에 몸과 마음이 몰두해 있다가 화두를 놓친 빈틈으로 다른 생각이 파고
들면 갖가지 환영을 보게 되는 병폐를 가리킨다.『書狀』「答汪內翰狀」大47
p.929b18 참조.
167) 화두만 있고 그 화두를 처리할 어떤 무기도 없어 마음이 텅 비고 적막하다고 느
끼는 바로 이 순간에도 화두를 의심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혜심(慧
諶)이 그 뜻을 적절히 전한다. “아무 맛도 없고 더듬어 모색할 여지가 없는 상태
를 싫다 하지 마라. 다만 화두를 들고 놓치지 않은 채 의식하고 살피기만 하라.
홀연히 몸과 마음이 고요해지고 앞뒤의 경계가 끊어졌을지라도 그 고요한 상태
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여기서도 화두 살피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眞
覺語錄』「示空藏道者」韓6 p.31c19. 莫嫌沒滋味, 沒撈摸, 但提撕擧覺看. 忽
得身心寂滅, 前後際斷, 不得住在寂滅處, 看話不輟.)
168) 無明.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이치를
모르는 것. 무명으로 인하여 갈애(渴愛)를 일으키고 그 결과 윤회(輪廻)를 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명은 번뇌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다.
169) 화두는 단지 의식에서 알아차리고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것에 대
한 의심이 살아 있어야 한다. 또한 화두를 분별할 수 있는 어떤 관념의 맛도 붙
어 있지 않아야 이상적인 화두 공부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측면에서 잘
되고 있는지도 알려고 할 필요 없이 오로지 근본적인 의심을 화두에 붙이고 공
부하라는 뜻이다.
여러분은 네 가지 은혜170)가 깊고 두텁다는 것을 아는가?171) 사대172)로
이루어진 추한 몸이 찰나마다 쇠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여러분의
목숨이 겨우 호흡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아는가?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
타나신 기회를 만났는가? 태어난 이래로 최상의 종승을 들어 보았는가?
이 최상승을 듣고서 그것이 아주 드물고 귀하다는 생각을 일으켰는가? 승
당 안에서 결코 잡담을 하지 않고 어록을 읽었는가? 승당을 벗어나지 않
고 절조를 지켰는가?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모든 경우에 화
두를 점검해 보면 하루 어느 시각에도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가?173) 죽을
먹거나 밥을 먹을 때도 화두를 점검하는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도 화두를 뚜렷하게 알아차리고 있는가? 다급한 상황에서도 화두가 의식
에 남아 있는가? 승당에 앉아 참선할 때 옆자리 사람과 귓속말을 하지 않
는가? 때때로 남들과 쓸데없는 말로 잡담하며 자기주장을 내세우며 시비
를 걸지 않는가? 남들의 과오를 보지도 않고 그들의 잘못을 말하지도 않았
는가? 언제나 있는 힘을 다하여 나아가고 있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활동을 할 때 분명하게 화두를 알아차리며 모든 것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가?174) 화두를 타파하기 좋은 시절에 이르렀을 때 자기 자신을 돌이켜
보는가? 자신의 본래면목으로 어떻게 조주의 속뜻을 포착하는가? 조주가
제시한 무자의 뜻은 무엇인가? 이번 생에서 부처님이 주신 지혜의 생명을
이을 수 있는가? 상·중·하의 도반들이 서로 공경하는가? 불편함 없이 생
활할 때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상의 것들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점검해야 하는 도리이다. 진실하게 참선하는 자라면 반드시
이와 같이 공부해야 하니, 질문한 순서와 조목에 따라 하나하나 대답해 보
고, 대답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지나쳐버려서는 안 된다.”
儞等諸人, 還知四恩深厚麽? 還知四大醜身, 念念衰朽麽? 還
知汝命 在呼吸麽? 値遇佛祖出世麽? 生來及聞無上宗乘麽?
得聞此最上乘, 生希有心麽? 僧堂裏切忌雜話, 看語錄麽? 不
離僧堂守節麽? 行住坐臥之際, 點檢話頭, 十二時中, 無有間
斷麽? 喫粥喫飯時點檢麽? 對人接話時不昧麽? 顚沛造次時
有話頭麽? 坐堂時不與隣單耳邊說話麽? 時中不與人閑言雜
話, 鼓扇是非麽? 不見他過, 不說他非麽? 時時着力進步麽?
見聞覺知時, 明明不昧, 打成一片麽? 若到好時, 返觀自己麽?
自己面目, 如何捉得趙州麽? 趙州道無意作麽生? 此生續佛慧
命麽? 上中下座, 互相恭敬麽?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麽?
此是參禪人, 日用中點檢底道理. 眞實參禪者, 須如此學, 隨問
程節, 一一下語來看, 下語不得處, 不得放過.”
170) 白雲語錄 주석151) 참조.
171) 이하의 내용은 수행자들이 일상적으로 스스로 점검해야 할 사항들을 질문 형식
으로 제시한 것이다. 수행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자세와 화두 공부상
의 요소 그리고 일상생활의 태도 등이 그 주요한 점검 조목들이다.
172) 四大.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
173)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이’[無間斷] 화두가 한순간도 의식에서 떨어지지 않고 이
어지는 것은 화두 공부가 바르게 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스스로 점검하는 요점은 모두 이것으로 귀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어록에는 이 점이 곳곳에 나타난다.
174) 타성일편(打成一片). 보고 듣는 등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과 밖의 대상
들이 한결같이 자신이 들고 있는 화두에 대한 의심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주석164) 참조.
● 방산거사에게 보내는 답신(방산거사는 제학175)오수)
答方山居士 吳提學倕
175) 提學. 고려 때 보문각(寶文閣)의 종2품(從二品)인 대제학(大提學) 아래의 정3품
(正三品) 벼슬. 문관(文官)과 무관(武官) 품계 전체에서 다섯 번째 등급.
산승은 악업을 저지른 결과로 생긴 질병 때문에 성(城)에 들어가 만날
수 없습니다. 저는 비록 인적이 드문 곳[野外]에 살지만 저의 마음176)은 당
신께 가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는데, 당신은 그 사실을 아십니까? 오늘 뜻
밖에 편지를 받고 당신의 존귀한 몸이 편안하게 거동하고 본분사에 마음을
두어 불도를 활용하는 것으로 일상생활을 삼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저 역시
기쁨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山僧亦因業疾, 不得入城相會. 某雖在野外, 眞吾無日不造閣
下矣, 閣下還肯麽? 今日忽逢來書, 已諳閣下尊體, 動止安穩,
留心此事, 以道用爲日用, 某亦歡喜無已.
176) 진오(眞吾). 외형적 자아가 아니라 본질적 자아를 가리킨다.
편지의 내용 중에 “잠시라도 생각이 일어나면 화두를 살핀다.”177)라고
하셨는데, 이 공부법은 매우 묘한 것입니다. 고덕178)이 말하기를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
이 늦지 않을까 염려하라.”라고 하였으며,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것으로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그 생각은 사라질 것이다.”179)라 하였고,
또한 “찰나마다 모든 경계를 대상으로 삼더라도, 마음마다 그에 대한 온갖
분별을 영원히 끊어라.”180)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작가181)들이
학인들을 가르치는 바른 이치입니다. 또한 노방182)은 “다만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공(空)으로 보기 바랄 뿐, 결코 없는 것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지 마라.”183)라고 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이 말들의 흑백을 잘 분간하고
그 득실을 살펴서 구경의 경지에 이르면 매우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書中來云,“ 念念瞥起, 看箇話頭.” 此功尤妙. 古德云,“ 不怕
念起, 唯恐覺遲.” 又云,“ 念起卽覺. 覺之卽無.” 又云,“ 念念
攀緣一切境, 心心永斷諸分別.” 此語皆作家爲人之端也. 又老
龐云,“ 但願空諸所有, 且勿實其所無.” 請閣下善分緇素, 察其
得失, 以至究竟幸甚.
177) ‘화두를 살핀다’[看話頭]라는 말 중 살핀다는 것은 간수(看守)·간호(看護) 등과
통한다. 화두가 달아나지 않도록 살피며 지킨다는 뜻이다.
178) 古德. 고성선덕(古聖先德)의 줄임말. 수행하여 높은 덕을 쌓은 옛날의 부처님과
조사 또는 고승 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규봉종밀(圭峯宗密)을 가리킨다.
179) 규봉종밀(圭峯宗密)이 무념(無念) 수행의 핵심을 가리키며 한 말에서 비롯된다.
곧 종밀은 “온갖 종류의 상(相)이 공(空)이라고 알아차리면 마음에 저절로 망념
이 없을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난 것으로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면 그 생
각은 사라질 것이다. 수행의 미묘한 문은 오로지 이 방법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비록 만행을 갖추어 닦더라도 오직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都序』
권상2 大48 p.403a5. 覺諸相空, 心自無念. 念起卽覺. 覺之卽無. 修行妙門, 唯在
此也. 故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라고 하였는데, 이 말을 대혜종고(大慧宗杲)가
『書狀』「答汪內翰狀」大47 p.929a4에서 간화선의 입장에서 변용하였고, 보조
지눌(普照知訥)도 『修心訣』 大48 p.1007c22에서 활용하고 있다. 본 어록의
구절은 지눌이 쓴 구절을 그대로 끌어왔지만 그 사유구조는 다르다. 지눌은 정
혜등지(定慧等持)에 이르는 방법으로 이 수행법을 제시했지만, 태고의 취지는
화두를 공부할 때 화두 이외의 어떤 생각이건 일어나면 다시 화두를 들고 궁구
하는 것 이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곧 그
런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곧바로 화두를 간수하여 궁
구하면 다른 생각은 저절로 사라진다고 한다. 대혜종고도 화두 공부를 할 때
생기는 병통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하여 오로지 화두를 간수하여 드는 것일 뿐
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갑자기 옛날의 악습이 잠깐이라도 일어나면
이 또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누르지 말고 다만 일어나려는 순간 ‘개에게 불성
이 있는가?’ ‘없다’라는 화두를 살피십시오. 바로 이럴 때, 일어나는 생각들은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송이같이 사라질 것입니다.”(『書狀』
「答劉通判狀」 大47 p.926a26. 忽爾舊習瞥起, 亦不著用心按捺. 只就瞥起處,
看箇話頭. 狗子還有佛性也無, 無. 正恁麽時, 如紅鑪上一點雪相似.)
180) 80권본 『華嚴經』 권71 大10 p.390c10 참조.
181) 作家. 선의 달인인 선장(禪匠)을 나타내는 말이다. 작가종사(作家宗師) 또는 작
가종장(作家宗匠) 등이라고도 한다. 장인(匠人)이 원하는 대로 물건을 만들어내
듯이 뛰어난 기량으로 학인을 단련하여 이상적 선사로 만들어낸다는 뜻에서 이
렇게 말한다.
182) 老龐. 방온(龐蘊 ?~808)에 대한 존칭. 보통 방거사(龐居士)라 하며, 마조도일(馬
祖道一)의 재가 제자이다.
183) 친구인 절도사 우적(于頔)에게 남긴 방거사의 임종게(臨終偈)이다.『景德傳燈
錄』권8 大51 p.263c15 참조. 대혜종고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이 두
구절을 깨닫기만 한다면 일생의 공부할 일을 마치게 될 것이다.”(『書狀』「答曾
侍郞狀」大47 p.918a20. 老龐云, ‘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 只了得遮兩句,
一生參學事畢.)
보내신 편지를 읽어보니 법문을 청하는 뜻이 너무도 절실하여 다시 말을
늘어놓겠습니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소멸하는 것을 생사(生死)라 하
는데,184) 이 생사와 마주치는 순간에 있는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어야 합니
다.185) 화두 하나만 순수하게 남으면186) 생각의 기멸(起滅)이 다하고, 기멸
이 다한 상태를 고요하다[寂]고 합니다. 고요한 상태라 하더라도 화두가 없
으면 의식에 아무 내용도 없는 무기187)에 불과하며, 고요한 상태에서도 화
두를 뚜렷하게 놓치지 않는 것을 영지(靈知)라 합니다. 이 텅 비고 고요한
상태[空寂]와 영지는 서로 파괴하는 일도 없고 뒤섞이는 일도 없습니다.188)
이렇게 공부하면 오래지 않아 공부가 완성될 것이니, 몸과 마음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어189) 의지할 상대가 없어지고 마음이 더 이상 갈 곳도 없어
지게 될 것입니다.190) 방산거사 자신만 남아 있는 바로 이 순간에, 만일 화
두 이외의 다른 생각을 일으키면 반드시 헛된 것에 미혹될 것입니다.191) 이
경계에서 ‘거사는 어디에 있는지’, ‘조주가 무(無)라고 한 뜻은 무엇인지’
자세히 참구하며 살피십시오. 만약 포착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니 그 뜻을
가지런히 정리하여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물을 직접 마셔 보면 차가
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아서 천 가지 의심이건 만 가지 의
심이건 한꺼번에 모두 꿰뚫게 될 것입니다.192) 만약 철저하게 꿰뚫지 못했
다면 어떤 경우에도 결코 어떻게 할 것인지 망설이지 말고, 다만 화두가 끊
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해야만 합니다.193)
承書中請意至切, 再下葛藤. 念起念滅, 謂之生死, 當生死之
際, 須盡力提起話頭. 話頭純一, 則起滅卽盡, 起滅盡處, 謂之
寂. 寂中無話頭, 謂之無記, 寂中不昧話頭, 謂之靈知. 卽此空
寂靈知, 無壞無雜. 如是用功, 則不日成功, 身心與話頭, 打成
一片, 無所依倚, 心無所之. 此時只是箇方山居士, 若起他念,
則決定被影子惑矣. 這裏仔細參看, 居士在那裏耶? 趙州道無
意作麽生? 若捉敗則已, 不用安排. 如人飮水, 冷暖自知, 千疑
萬疑, 一時透了也. 若未透徹, 則千萬切忌如何之念, 只要話頭
聯綿不斷.
184)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소멸하는 것은 본래 실체가 없는데, 만일 실체가 있
다고 여긴다면 생사의 마음이 발생합니다.”(『書狀』「答曾侍郞狀」 제3서
大47 p.918b22. 念起念滅, 本無實體, 若執爲實, 則生死心生矣.)
185) 대혜종고는 화두가 생사의 근원을 잘라버리는 칼이라 하면서 생각이 일어나면
화두를 드는 이외의 방법은 없다고 했는데, 태고가 이 편지에서 말한 전반적인
뜻과 일치한다. “바로 이 한 글자[無字]가 곧 생사의 길을 잘라버리는 칼입니다.
망령된 생각이 일어날 때 다만 무자를 들고 꾸준히 반복하여 궁구하다가 불현
듯 소식이 끊어지게 되면, 이것이 바로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앉아 있는 경지입
니다. 이것 이외에 특별히 기특한 방법은 없습니다.”(『大慧語錄』권22「示妙
心居士」大47 p.903c3. 只這一字, 便是斷生死路頭底刀子也. 妄念起時, 但擧箇
無字, 擧來擧去, 驀地絶消息, 便是歸家穩坐處也. 此外別無奇特.)
186) 화두순일(話頭純一). 오직 화두만 들려져 있고 다른 어떤 생각도 없이 그 화두에
안과 밖의 모든 대상이 통일되어 공부의 극치에 이른 경계를 가리킨다. 남석문
수(南石文琇)가 이 경계의 전체적인 맥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다만 허리를
구부리거나 고개를 숙이고 드는 때, 그리고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순간에 빈틈없이 화두를 참구하며 잠시도 잊지 않는다면, 충분한 세월이 지난
다음 자연스럽게 화두 하나만 순수하게 남게 되어 붙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
로 붙들게 되고, 들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들려서 정수리부터 발꿈치에 이르
기까지 온몸이 바로 이 하나의 화두 자체가 될 것이다. 이러한 시기가 되면 이전
의 번뇌와 망상이 한 터럭이라도 일어나는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南石文
琇語錄』권4 「示桂正眞」卍124 p.435a9. 但於折旋俯仰之際, 行住坐臥之間,
密密參究, 頃刻不忘, 日久歲深, 自然純一, 不提自提, 不擧自擧, 繇頂至踵, 通身
只是這一箇話頭. 到恁麽時, 從前塵勞妄想, 覓一絲毫起處, 了不可得.)
187) 無記. 선·악과 유·무 등의 양단에 대하여 어느 한편으로도 결정적으로 규정되
지 않는 것. 대표적인 것으로는 부처님께서 정의하지 않거나 응답하지 않은 10
가지 또는 14가지의 주제에 대한 무기가 있다. 어떤 대답도 이율배반을 일으키
고, 해탈과 열반에도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답을 하지 않았다. 그 주제는 세계
와 나[我]의 상주성과 유한성, 부처님의 사후 존재 여부, 영혼과 신체의 동일성
여부 등 크게 네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각각에 대한 입증과 반증이 모두 가능
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일으킬 뿐 고(苦)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무기로 일관
한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맥락을 활용하여 어떤 내용도 가지지 않는 공허한
의식 곧 화두가 들려 있지 않은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眞覺語錄 주석
246)·262) 참조.
188)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는 용어는 보조지눌(普照知訥)이 쓴 말인데, 태고는 이것
을 화두 공부의 이상적 경계를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지눌은 공적영지에
대하여 “청정한 마음의 본체” 또는 “본래면목”으로 보았으며, 공적은 체(體) 또
는 정(定)으로, 영지는 용(用) 또는 혜(慧)로 간주했다. 이상 지눌의『修心訣』
大48 p.1007a2·p.1007b9·p.1008a6 참조. 반면에 태고는 지눌의 이 용어를
빌려와 간화선의 입장에서 고요하면서도 화두가 항상 뚜렷하게 들려 있는 상
태를 공적과 영지가 모두 실현된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진각국사가「孫侍郞
求語」에서 화두라는 하나의 문에 정(定)과 혜(慧)가 모두 들어 있다고 한 관
점을 계승한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가장 큰 병통은 화두는 없고 고요하기만
한 무기(無記)에 빠지는 것이다.
189) 타성일편(打成一片). 주석174) 참조.
190) 심무소지(心無所之). 주석165) 참조.
191) 주석166) 참조
192) 모든 의심은 자신이 궁구하고 있는 하나의 화두에 대한 의심으로 귀착되므로
오로지 이 하나의 의심과 대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와 고
봉원묘(高峰原妙) 등이 강조한 점이다. “천 가지 의심이건 만 가지 의심이건 단
지 한 가지 의심일 뿐입니다. 하나의 화두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타파하면 천 가
지 의심이건 만 가지 의심이건 한꺼번에 타파됩니다.”(『書狀』「答呂舍人狀」
大47 p.930a14. 千疑萬疑, 只是一疑. 話頭上疑破, 則千疑萬疑, 一時破.);“천
가지 의심이건 만 가지 의심이건 다만 하나의 의심일 뿐이니 이 의심을 해결한
사람은 더 이상 의심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高峰禪要』「示信翁居士」
卍122 p.711b17. 千疑萬疑, 只是一疑, 決此疑者, 更無餘疑.)
193) 위의 각주 192)의 취지에 이어지는 논리로서, 하나의 화두를 의심하다가 화두를
바꾸어 궁구하거나 경론 등에서 해답을 찾으려 하면 안 된다는 뜻이다. 몽산덕
이(蒙山德異)가 완산장로(皖山長老)로부터 받은 가르침에 이 맥락이 있다. “철
저하게 꿰뚫지 못했을 때는 마치 쥐가 관의 재목을 갉아서 뚫는 것처럼 그 대상
을 옮기거나 바꾸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공부해 나가면 틀림없이 깨달을 시
절이 올 것이다.”(『禪關策進』「蒙山德異禪師示衆」大48 p.1099b4. 未透徹時,
如鼠咬棺材, 不可移易. 如此做去, 定有發明時節.)
절실하게 화두를 붙들고 놓치지 말아야 하니,194) 시끄럽거나 고요한 경
계와 말하거나 침묵하는 상황 등 모든 행위 방식에서 한결같이 화두를 잊
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렇게 뚜렷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들고서 언제나
점검해 보십시오. ‘하루에 빈틈과 끊어짐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하고 말
입니다. 만약 빈틈과 끊어짐이 있었다고 알게 되면 다시 용맹하게 정진할
마음을 일으켜 공을 더하고 힘을 붙여 빈틈과 끊어짐이 없도록 하십시오.
만약 하루에 한 번도 빈틈과 끊어짐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조금 정
신을 더 차리고 언제나 점검하여 매일같이 빈틈과 끊어짐이 없도록 하십
시오. 만약 3일 동안 법도 그대로 빈틈과 끊어짐이 없고, 시끄럽거나 고요
한 경계에서도 한결같으며, 말하거나 침묵하는 상황에서도 한결같다면 화
두는 항상 눈앞에 나타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급히 흐르는 여울에
비친 달그림자가 물결에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튀겨도 제거되지 않으며
휩쓸려도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195) 깨어 있을 때나 잠잘 때나 이렇게
한결같으면196) 크게 깨달을 시기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切切提撕, 於動靜語默, 一切施爲, 一如不昧. 但恁麽惺惺
歷, 提箇話頭, 時時點檢看. 一日之內, 間斷有幾度耶? 若記知
間斷, 則更發勇猛之心, 加功着力, 使無間斷. 若知一日一度,
也無間斷, 則添些精彩, 時時點檢, 日日無間斷. 若三日如法無
間斷, 動靜一如, 語默一如, 話頭常現在前, 猶急流灘上月華相
似, 觸不散, 撥不去, 蕩不失, 寤寐一如, 大悟時近矣.
194) 제시(提撕). 화두를 놓치지 않고 붙들고 있다는 말. 마치 소중한 물건을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어디를 가나 끌고 다니며 잠시도 놓치는 일이 없는 상태
에서 궁구한다는 뜻이다. 提·提起·擧覺 등도 모두 이러한 무간단(無間斷)의 취
지가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화두 공부의 본질을 나타내는 용어이며, ‘빈틈과 끊
어짐’이 있다는 것은 화두를 놓쳤다는 것과 다르지 않고, 그 빈틈으로 망상분별
이 파고들거나 끊어짐의 순간에 아무 생각도 없는 무기(無記)에 떨어지는 병통
으로 연결된다.
195) 어떤 상황에서도 빈틈과 끊어짐이 없이 항상 화두가 떠나지 않는다는 비유이
다. 이전에 몽산덕이(蒙山德異)가 이 비유를 가지고 움직이며 활동하는 중에도
화두가 떨어지지 않고 활발하게 살아 있어야 한다는 동중공부(動中工夫)의 뜻
을 나타냈다. “신도의 공양을 받으러 절을 나와 화두를 들고 가는데 나도 모르
게 공양할 집을 지나치면서부터 활동하는 중에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경지에 이르러서는 마치 물을 뚫고 비친 달그림자가 급히 흐르는 여울의 어
러운 물결 속에 있으면서 부딪혀도 흩어지지 않고 휩쓸려도 사라지지 않은 채
활발하게 비추며 남아 있는 것과 같았다.”(『禪關策進』「蒙山德異禪師示衆」
大48 p.1099c7. 因赴齋出門, 提話頭而行, 不覺行過齋家, 又做得動中工夫. 到
此, 却似透水月華, 急灘之上, 亂波之中, 觸不散, 蕩不失, 活潑潑地.)
196) 깨어 있을 때나 잠을 잘 때나 한결같이 화두가 이어지는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를 가리킨다. 무간단(無間斷)의 극치는 잠을 자면서도 항상 화두가 끊어지
지 않고 의식에 들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혜종고(大慧宗杲)는『書狀』
「答劉寶學狀」 大47 p.925a9에서 공부를 점검하는 하나의 조목으로 “꿈을 꿀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합일하는가?”(夢與覺合否)라고 물었던 것이다. 후대의
감산덕청(憨山德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와 같이 마음을 쓰다가 시기가
오래되어 순수하게 익으면 꿈속에서도 또한 화두를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깨어 있을 때나 꿈을 꿀 때나 한결같으면 공부가 빈틈이 없이 이어
져 모든 것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니, 이때가 바로 공부를 하는 데 힘
을 얻은 순간이다.”(『憨山集』권9「示修淨土法門」卍127 p.325a13. 如此
用心, 久久純熟, 乃至夢中, 亦不忘失. 寤寐一如, 則工夫綿密, 打成一片, 是爲
得力時也.)
이러한 결정적 시기에 도달했을 때 절대로 이 경계를 자세히 설명해 줄
사람을 찾지 말고, 또한 상관없는 사람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마십
시오. 다만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어리석거나 말을 더
듬는 것처럼 하여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하여 안의
것은 함부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밖의 것은 제멋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
십시오. 여기서도 화두를 잊으면 큰 잘못입니다.197) 근본적인 의심이 아직
타파되기 전에는 어떤 경우라도 화두를 잊으면 안 되니 내가 말한 그대로
하십시오. 진실로 이 경지에 이르면 문득 무명이 깨어지고 확 트인 듯이 크
게 깨달을 것입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반드시 본색(本色)을 갖춘 종장(宗
匠)198)을 친견하여 자신이 깨우친 경지가 궁극적인 뜻에 맞는지 점검 받아
야 합니다.199) 만일 종사를 친견하여 점검 받지 않는다면 열이면 열 모두
마구니가 될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랍니다.200)
到此時節, 切忌求人穿鑿, 又不與閑人打話. 但十二時中, 四
威儀內, 如愚若訥, 放下身心, 如同死人相似, 內不放出, 外不
放入. 這裏忘却話頭則大錯. 大疑未破已前, 千萬不昧話頭,
一如吾說. 實到此田地, 則驀然無明破, 豁然大悟矣. 悟後須
見本色宗匠, 決擇究竟. 若不見宗師, 則十箇五雙, 成魔去也.
至禱, 至禱.
197) 화두를 망각하고 화두가 들려 있던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서는 것을 간화선
에서 가장 근본적인 병통으로 여긴다. 이 역시 무간단(無間斷)의 법도와 필연적
으로 관련된다. “잠시라도 화두가 없으면 죽은 사람과 같다. 모든 경계가 몸으로
닥쳐들더라도 다만 화두를 들고 그것과 대결하며 언제나 화두가 들려 있는지
점검하라. 시끄러운 경계에서도 고요한 경계에서도 또는 힘을 얻었거나 힘을
얻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리고 선정(禪定) 중에서도 화두를 망각해서는 안 되니,
화두를 망각하면 잘못된 선정이기 때문이다.”(『禪關策進』「鐵山瓊禪師普說」
大48 p.1101c12. 暫時話頭不在, 如同死人. 一切境界, 逼迫臨身, 但將話頭, 與
之抵當, 時時檢點話頭. 動中靜中, 得力不得力, 又定中, 不可忘却話頭, 忘話頭則
成邪定.);“이 하나의 무자를 가슴에 품고 화두로 삼아 의심하며 한 찰나도 망
각하지 말고 마음마다 잊지 마라. 한가하거나 바쁘고 시끄럽거나 고요한 모든
경계와 대화하며 바쁜 중에도 다만 이 말 하나를 들고 거듭 의심하고 살피고
물으면서 꾸준히 반복하여 의심함으로써 다만 하나의 화두만 눈앞에 나타나
있도록 하라.”(『憨山集』권9「示魏聖期」卍127 p.322b18. 卽將此一無字,
懷在胸中作話頭, 下疑情, 念念不忘, 心心不昧. 一切閒忙動靜, 應酬忽遽中, 只
提此一語, 重下疑情審問, 疑來疑去, 只有一個話頭現前.)
198) 어디에도 물들지 않고 타고난 본분의 색[本色]을 그대로 실현하여 지니고 있
종장을 말한다. 종장이란 대장장이가 풀무질을 하여 원하는 물건을 마음대로
만드는 것과 같이 학인들을 제대로 이끌고 지도해 주어 본분을 깨닫도록 만드
는 종사(宗師)를 가리킨다.
199) 태고는 화두가 타파된 다음에 종사의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다른 곳에서
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200) 지도(至禱). 편지 끝에 붙여서 상대가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의 기원을
나타내는 말로 쓴다.
● 무제거사에게 주는 법어(무제거사는 원사201) 장해)
示無際居士 張海院使
201) 院使. 왕명(王命)의 출납(出納)·군기(軍機)·숙위(宿衛) 등의 일을 관장하던 기
관인 중추원(中樞院)의 종2품(從二品) 관직.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무자는 유·무의 무도 아니고 진무(眞無)
의 무도 아니니,202) 결국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이 경계에 이르러 반드
시 온몸을 다 놓아버리고 어떤 것도 하지 않으며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하
지 않으면 곧바로 고요하고 텅 빈 경지에 도달하겠지만, 여기서도 결코 생
각으로 판단하려 들지 마십시오. 과거의 생각은 이미 소멸했고 미래의 생
각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며 현재의 생각은 공(空)이지만, 공 또한 고수
하지 않으며, 고수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잊고, 잊었다는 의식 또한 내세우
지 않으며, 내세우지 않는다는 생각도 벗어나고, 벗어났다는 생각 또한 남
겨두지 마십시오. 이러한 때에 이르러서는 다만 뚜렷하면서 고요한 지혜의
신령한 빛만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這箇無字, 不是
有無之無, 不是眞無之無, 畢竟如何卽是? 到這裏, 直得通身
放下, 一切不爲, 不爲底也不爲, 直到閑閑地蕩蕩地, 切無擬
思. 前念已滅, 後念不起, 當念卽空, 空亦不守, 不守亦忘, 忘
亦不立, 不立亦脫, 脫亦不存. 到恁麽時, 只是箇惺惺寂寂底靈
光, 卓爾現前.
202) 유·무의 무와 진무의 무는 무자 화두를 궁구할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분별이면
서 고질적인 병통이다. 조주의 무자가 유(有)와 대립되는 의미의 무(無)라는 생
각에 바탕을 두고, 유와 무라는 양단 중 하나로서의 무라고 분별하는 것이 유·
무의 무이다. 또한 유·무의 상대적인 대립을 초월하여 별도의 실체를 가진 무
라고 분별하는 것이 진무의 무이다. 이 두 가지에 들어 있는 개념과 분별에 근거
하여 화두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병통을 초래하는 결정적 장애이다. 대혜종고
(大慧宗杲)는『대혜어록』권17 大47 p.886a7에서, 이 두 가지와 더불어 ‘아무것도
없이 텅 빈 무’(虛豁之無)라고 여기는 분별은 무자 화두에 대한 천착(穿鑿)에 불
과하다고 비판했다. 이 밖에『書狀』「答張舍人狀」大47 p.941b14 등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병통으로 거론하고 있다. 보조지눌(普照知訥)은 두 가지를 무자 화
두를 공부할 때 생기는 열 가지 병통[十種病]에 포함시키고 있다.『法集別行錄
節要』韓4 p.765c3 참조.
여기서도 결코 망령되게 지해(知解)203)를 일으켜서는 안 되며 단지 화두
를 들고 하루 온종일 사위의204) 안에서 오로지 그것만을 잊지 않고 절실하
게 궁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궁구하며 화두와 끊임없이 반복하여 대결하면
깨달을 시기에 도달할 것입니다. 반드시 조주가 말한 뜻이 무엇인지 자세
하게 돌아보아야 하니, 그러다가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빠진 것과
흡사하게 되면 거꾸로 뒤집어져 나아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것입니다.205)
영리한 근기의 소유자가 이 경계에 이르면 막힘없이 칠통206)을 때려 부수
고 조주의 뜻을 포착하여 세상사람들의 말에 더 이상 미혹당하지 않을 것
입니다.207) 그러나 이렇게 깨달았다고 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결
코 그 소식을 전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 점검 받아
야 합니다.
切莫妄生知解, 但擧話頭, 十二時中, 四威儀內, 單單不昧, 切
切參詳. 如是參去, 捱來捱去, 逗到好時. 宜細回詳看, 趙州道
無意作麽生, 猶老鼠入牛角相似, 便見到斷. 利根者到此, 豁然
打破漆桶, 捉敗趙州, 不疑天下人舌頭. 雖如是了悟, 無智人
前, 切忌道着, 須遇見本色宗師
203) 일정한 지식인 관념을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
204) 四威儀. 걷고 서 있고 앉고 눕는[行住坐臥] 등 네 가지 행위 양상을 가리키며, 이
것은 일상의 모든 거동을 총괄하는 말이다. 이 네 가지 중 어디서나 화두를 잠시
라도 놓쳐서는 안 된다.
205) 소뿔의 쥐틀에 빠진 쥐가 미끄러지다가 점차로 가장 뾰족한 끝에 처박히는 형상
을 비유로 썼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뒤로 돌아서지도 못하여 더 이상 탈
출할 방법이 없는 궁지를 비유한다. 자신이 궁구하던 화두에 분별하고 모색할 어
떤 관념도 붙어 있지 않아서 관념의 무기가 모두 떨어진 지경을 말한다. 마음이
갈 곳이 사라지고 모든 소식이 단절된 심무소지(心無所之)의 경계와 같다. 이것
이 은산철벽(銀山鐵壁)이며 어떤 맛도 없는 몰자미(沒滋味)한 화두의 본질이 그
대로 드러난 상태이다. 원오극근(圜悟克勤)이『心要』권상「示普賢文長老」卍
120 p.709a16에서 이 비유를 썼고, 그 뒤 대혜종고(大慧宗杲)도 화두가 타파되
기 직전의 경계를 이 비유로 나타낸 이래 간화선에서 회자되어 왔다. “반복하여
헤아리며 궁구하다가 더 이상 헤아리며 궁구할 수 없는 경계에 도달하여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빠진 것과 같은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이렇게 갑자기 분
별로 움직이던 마음이 끊어지면, 그것이 곧 당사자가 팔다리를 모두 바닥에 내려
놓고 쉬는 상태이며, 본래의 집으로 돌아와 편안히 앉아 있는 경계인 것이다.”
(『大慧語錄』권21「示鄂守熊祠部」大47 p.898c1. 推窮來推窮去, 到無可推窮
處, 如老鼠入牛. 驀地偸心絶, 則便是當人四楞塌地, 歸家穩坐處.) 대혜는『書狀』
「答張舍人狀」 大47 p.941b17에서도 이 상태가 깨달음의 소식이 오기 이전의
좋은 경계라 말했다.
206) 漆桶. 시커먼 통. 보통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이지만, 여기서는 어떤 소식도 통하지 않고 모든 분별이 차단된 본래의 화두 자
체를 가리킨다. 앞에서 비유한 소뿔에 떨어진 쥐가 처한 궁지와 같다.
207) 불의천하인설두(不疑天下人舌頭)에서 ‘疑’는 의혹(疑惑) 또는 미혹(迷惑)을 뜻한
다. 하나의 화두를 온전히 타파했으므로 남들이 어떤 화두를 제시하더라도 그
것에 미혹되어 지배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는 경지를 나타낸다. 원
오극근(圜悟克勤)이 이 맥락을 전한다. “이 경계에 이르러 만약 골수까지 더욱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자리에서 꿰뚫고 나간다면, 더 이상 세상사람들의 말에 미
혹당하지 않고 그들이 들먹이는 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일으켜 곧바로 제 갈
을 떠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 전체에 눌러앉을 수 있고, 하늘과 땅 사이에
서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거닐 수 있을 것이다.”(『圜悟語錄』권11
大47 p.764b8. 到這裏, 若深入骨髓底, 直下透脫, 不疑天下人舌頭, 聊聞擧著,
踢起便行, 可以坐斷十方, 可以乾坤獨步.)
● 최진사에게 주는 법어 示崔進士
공께서 스스로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208)은 무엇일까?’
라고 물으면서 이 화두의 한 소리를 일으키는 순간 곧바로 깨닫는다면 할
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워 있
는 경계와 하루 모든 시각에 마음마다 이 화두를 잊지 말고 찰나마다 이어
가기를 마치 닭이 알을 품거나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하십시오.209) 당장에
이와 같이 한다면 3일에서 7일 사이에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가 있을 것입
니다. 이 길이 바로 선생께서 가장 빠르게 깨우치는 실마리입니다. 그 구체
적인 방법을 말하자면, 공께서는 ‘사대로 이루어진 내 몸은 분명하게 부모
님께서 낳아주신 것이니 어떤 시기로 확정되어 있지는 않지만 반드시 사
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면목인
가?’라고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도 이 화두를 참구하며 잊지 마십시오. 이
와 같이 빈틈과 끊어짐이 없으면, 자연히 공부가 순수하게 익어 몸과 마음
이 맑고 시원한 것이 마치 고요한 가을 기운과 흡사할 것입니다. 이 경계에
이르면 영리한 근기를 소유한 자는 막힘없이 크게 깨달아 마치 물을 마셔
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아는 것과 같아서 다만 분명하고 뚜렷하게
스스로 인정할 뿐입니다. 이러면 비로소 ‘몸 전체 그 어디에도 의지할 대상
이 없다는 도리를 비추어 본다.’210)는 말을 믿을 것이며, 비로소 본래인211)
을 알게 될 것입니다.
公自問云,‘ 那箇是父母未生前本來面目?’ 才擧起一聲, 便了
則已. 不然, 則行住坐臥之際, 十二時中, 心心不昧, 念念相續,
如鷄抱卵, 如猫捕鼠相似. 便直下如此, 不過三日, 乃至七日之
內, 必有相應分. 此路正是先生徑直發明之端也. 論其方便, 則
公作念云,‘ 是我四大色質, 灼然父母所生底, 不定某時, 必然
散壞去也. 那箇是父母未生前本來面目?’ 千萬參不昧參不昧.
如是無間斷, 則自然工夫純熟, 身心淸爽, 如秋天氣肅相似. 到
這裏, 利根者, 豁然大悟, 如人飮水, 冷暖自知, 但明明了了,
自肯而已矣. 方信道, 照盡體無依, 方見本來人.
208) 眞覺語錄 주석47) 참조.
209) 이 비유에 대한 설명은 주석161) 참조.
210) 굉지정각(宏智正覺)의 말이다. “몸 전체 그 어디에도 의지할 대상이 없다는 도
리를 비추어 보면, 온몸이 대도와 합일한다.”(『宏智廣錄』권3 大48 p.34c14.
照盡體無依, 通身合大道.) 이 밖에 같은 책 권1 p.4c8·권4 p.38a27·권5 p.65a11
등에도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211) 本來人.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말이다. 白雲語錄 주석141) 참조.
● 사제거사에게 주는 법어 示思齊居士
당신은 ‘모든 것이 무상하고 신속하게 변화하니, 생사윤회를 해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212)라는 뜻을 알고 난 다음, 특별히 나를 찾아와 “이
것이 진실로 대장부213)가 할 일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상한 생사를 아는 자는 누구입니까? 또한 특별히 찾아와 묻는 자는 누구
입니까? 거사께서 만약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하게 진실 그대로 깨닫는다
면 다음과 같은 경전의 뜻도 알게 될 것입니다. “대단히 기이하고 아름다운
생김새를 하시고, 시방세계를 광명으로 비추시는군요. 제가 아득한 과거세
에 몸을 태워 공양했다가, 이제 다시 돌아와 가까이 뵙습니다.”214) 그러나
이 네 구절에서 결코 사유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활발한 작용을 멈춘 채
로 우두커니 생각으로 헤아려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두커니 생각으로 헤
아린다면 본래의 뜻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활구
215)에서 참구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다음의 화두를 모르십니까? 어떤 학
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는 ‘없다[無]’라
고 대답했습니다. 이 무자는 유·무의 무도 아니고 진무(眞無)의 무도 아닙
니다.216) 말해 보십시오! 궁극적으로 이것은 무슨 도리일까요? 만약 이 말
을 들어 보이는 바로 그 순간에 그 뜻을 알았다면 그만이겠지만, 의심이 타
파되지 않았다면 오로지 의심이 타파되지 않은 경계에서 다만 무자만 들고
서 참구해 보십시오. 사위의217)의 경계와 하루 모든 시각에 항상 화두를 잊
지 말고 다만 이렇게 궁구해 보십시오. 만약 이 화두를 남김없이 꿰뚫는다
면 조주의 본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 점검 받아야 합니다. 돌!
旣知無常迅速, 生死事大, 特來問道, “此眞大丈夫之所爲乎?
然, 恁麽知無常生死的, 是阿誰? 特來問道的, 又是阿誰? 居
士若向這裏, 諦當分明, 則曰,“ 容顔甚奇妙, 光明照十方. 我
適曾供養, 今復還親近.” 然, 於此四句中, 切不可將心意識,
停機佇思. 若佇思則轉䟽轉遠矣. 然則不如向活句上參究. 不
見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這箇無字, 不
是有無之無, 亦不是眞無之無. 且道! 畢竟作麽生道理? 若
起便知則已, 若擬疑不破, 則只向疑不破處, 但擧無字參看. 四
威儀內, 十二時中, 常常不昧, 但伊麽參詳看. 若透徹則, 卽與
趙州相見了也. 於時, 宜見本色宗師. 咄!
212) 현각(玄覺)이 6조 혜능(慧能)을 친견했을 때 문답한 구절 중 하나이다. “생사윤
회를 해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니, 모든 것이 무상하고 신속하게 변화합니다.”
(宗寶本『壇經』大4 p.357c11. 生死事大, 無常迅速.)
213) 大丈夫. 세간에서는 원대한 뜻을 품고 강렬한 기개를 품은 남자를 아름답게 수
식하는 말이다. 출세간에서는 32상을 갖춘 부처님이 인간 가운데 가장 출중하
기 때문에 대장부라고 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뜻에 따라 불법수행이 원숙해져
서 불지견(佛知見)을 터득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며, 특히 선종에서는 어
디에도 의지하지 않고 독자적인 안목으로 선기(禪機)를 자유롭게 드러내는 인
물을 가리킨다.
214)『法華經』권6「藥王菩薩本事品」大9 p.53c4에 나오는 게송. 일체중생희견보살
(一切衆生憙見菩薩)이 일월정명덕불(日月淨明德佛)의 덕을 찬탄한 게송이다. 이
보살은 일월정명덕불로부터 『법화경』의 말씀을 듣고 1만 2천 년 동안 수행하여
현일체색신삼매(現一切色身三昧)를 얻었다.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이 보
살은 몸을 태워 공양하기로 결심하고 1천 2백 년 동안 몸을 태운 뒤에야 그 몸이
사라졌지만, 다시 화생(化生)하고 보니 그 부처님께서 아직도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뵙고 이렇게 찬탄한 것이다.
215) 活句. 사유분별로 포착할 수 없는 몰자미(沒滋味)의 화두를 가리킨다. 활구는 생
각으로 더듬어서 그 뜻을 알 수 있는 말이 아니며, 오히려 모든 생각이 끊어진
경계에 이르러야 비로소 그 몰자미의 본질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서, 생각으로
접근하면 활구도 사구(死句)로 전락하며, 모든 유형의 분별을 탈락시키는 ‘의심’
에 기초한 참구만이 활구를 활구로서 살아 있게 한다.
216) 주석202) 참조.
217) 주석204) 참조.
● 염정당218)에게 주는 법어(염정당의 이름은 흥방)
示廉政堂 興邦
218) 政堂.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줄임말.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관직. 염정당은 공민왕 6년(1357)에 진사가 되었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무자는 유·무의 무도 아니고 진무(眞無)
의 무도 아닙니다.219) 궁극적으로 이것은 무슨 도리일까요? 일단 이러한 의
심이 생겼을 때 절실하게 참구해 보십시오. 자연스럽게 아무것도 알 수 없
고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220)에 도달할 것이니, 여기가 바로 화두
를 타파하기 좋은 경계로서 영리한 근기의 소유자는 이 경계에 이르러 막
힘없이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만약 근본적인 의심[大疑]이 아직 타파되지
않았다면, 이것일까 저것일까 하는 생각들은 반드시 피하도록 하고 깨달음
을 구하겠다는 마음도 일으키지 말며, 다만 의정(疑情)221) 위에 오로지 화
두만 올려놓고서 간절하게 참구하십시오. 모든 행동거지를 할 때 어떤 경
우라도 화두를 잊지 말고 하루나 이틀 내지 7일222) 동안 법도 그대로 참구
하되 빈틈과 끊어짐이 없으면 꿈속에서도 화두를 기억하게 되는데,223) 이
와 같다면 크게 깨달을 시기가 가까워진 것입니다. 만일 의심이 타파되면
마치 물을 직접 마셔보고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알 수 있지만 다른 사
람에게 그 느낌을 집어 줄 수도 없고 또한 말로 설명해 줄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결정적인 시기에 이르면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 점
검 받아야 하며, 결코 지혜가 없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안 됩니다. 힘쓰
고 또 힘쓰십시오! 태고는 현명한 재상224)께서 청하신 뜻이 간절한 탓에 저
도 모르게 말이 길게 늘어졌습니다. 다시 시로써 말씀드리겠습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這箇無字, 不是
有無之無, 亦不是眞無之無, 畢竟什麽道理耶? 旣有此疑時,
切切參詳看. 自然逗到百不知百不會, 這裏便是好處. 利根者
到此, 豁然大悟. 若大疑未破, 則切忌如何若何之念, 亦莫生求
悟之心, 但向疑情上, 單提話頭, 切切參詳. 於一切施爲動靜
時, 千萬不昧, 若一日二日, 乃至七日, 如法參詳, 無間斷, 夢
中亦記得話頭, 如是則大悟時近矣. 若破疑, 如人飮水, 冷暖自
知, 拈與人不得, 說與人不得. 到此時節, 須遇見本色宗師, 切
不向無智人前說破. 勉之, 勉之! 太古因賢相請意勤勤, 不覺
縷縷. 復爲詞曰,
219) 주석202) 참조.
220) 백부지백불회(百不知百不會). 무자 화두에 대하여 더 이상 분별할 수단과 방법
이 남아 있지 않은 심무소지(心無所之)의 상태를 가리킨다. 주석165) 참조. 대혜
종고(大慧宗杲)는 이렇게 평가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하니 사유분별로 미칠 수 없고 이치의 길로 들어서지도 못하며, 다만 안락할
뿐입니다.”(『大慧語錄』권14 大47 p.869a7. 百不知百不會, 不涉思惟, 不入理路,
直是安樂.)
221) 주석158) 참조.
222) 고봉원묘(高峰原妙)는 화두 공부에서 승부를 내는 시간에 대해 최대한 길게 잡
으면 안거(安居) 90일, 최소한으로 짧게 잡으면 7일 이내라고 했다.『高峰禪要』
「結制示衆」제4 卍122 p.708a4. “大限九旬, 小限七日.”
223) 주석196) 참조.
224) 염정당을 가리킨다.
조주가 무(無)라고 한 뜻,
간절하게 궁구하여야 하리라.
궁구하다 어떤 분별도 할 수 없는 경계에 이르면,
본래 모양 그대로 드러난다네.
의심 다하고 분별 잊은 곳에
조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만일 별도로 생각을 일으킨다면
눈앞이 촉도(蜀道)처럼 험난하리라.225)
趙州道無意 正好切參看
參到百不會 便是露團團
疑盡情忘處 趙州是何顔
若也別生念 面前蜀道難
225) 촉도난(蜀道難). 지금의 중국 사천성(四川省) 지방에 해당하는 촉(蜀)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로 유명하다. 화두에 분별이 더 이상 붙지 않는 경계에서 방심하
여 다시 분별하면 촉의 길과 같이 험난해질 것이라는 비유이다. 이백(李白)은
이 촉도의 험난함을 소재로「蜀道難」이라는 제목의 시를 남겼다. “위태롭고
높구나! 험난한 촉의 길이여,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 험난하도다! 危乎高哉! 蜀道
之難, 難於上靑天!”
● 낙암거사에게 주는 염불의 간략한 요지에 대한 법어226)
示樂庵居士念佛略要
226) 염불(念佛)에 화두 공부의 방법을 적용시킨 염불선(念佛禪) 또는 선정일치(禪淨
一致) 사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법어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본성
[覺性]이 곧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자성미타(自性彌陀)사상에 근거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은 범어로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 한역한다.227)
불(佛) 또한 범어로서 각(覺)이라 한역한다.228) 이는 사람마다 각자의 본성
에 있는 크고 신령한 각으로서 본래 생사가 없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신령하게 밝으며 청정하고 미묘하며 안락하고 자유자재하다. 이것이 어찌
무량수불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이 마음을 밝히는 것을 불(佛)이라 하
고, 이 마음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가르침[敎]이라 한다.”라고 할 수 있
다. 부처님께서 대장경의 가르침을 설하신 것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는 자
각(自覺)의 본성을 지시하는 방편이었다. 방편은 비록 다양하지만 요점을
말하자면 유심정토(唯心淨土)와 자성미타(自性彌陀)이다.229) 마음이 청정
하면 불국토230)가 청정하고, 본성이 나타나면 불신231)도 나타난다는 말이
바로 이 뜻을 가리킨다. 아미타불의 청정하고 미묘한 법신232)은 모든 중생
의 심지(心地)에 두루 있다. 그러므로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233)라 하고, 또한 “마음이 부처요 부처가 마음이니,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 밖에 마음이 없다.”234)라고 합니다.
阿彌陀佛, 梵語, 此云, 無量壽佛. 佛者, 亦梵語, 此云, 覺. 是
人人箇箇之本性, 有大靈覺, 本無生死, 亘古今而靈明淨妙, 安
樂自在. 此豈不是無量壽佛也! 故云, “明此心之謂佛, 說此心
之謂敎.” 佛說一大藏敎, 指示人人自覺性之方便也. 方便雖
多, 以要言之, 則唯心淨土·自性彌陀. 心淨則佛土淨, 性現卽
佛身現, 正謂此耳. 阿彌陀佛, 淨妙法身, 徧在一切衆生心地.
故云,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亦云, “心卽佛, 佛卽心, 心
外無佛, 佛外無心.”
227) “이미타불<바른 음사어는 아미타바야(阿弭陀婆耶)이며, 무량수불이라 한역한다.>”
(『一切經音義』권22 大54 p.447b14. 阿彌陀佛<正云, 阿弭陀婆耶, 此云, 無量壽佛.>)
228) 불(佛)은 buddha의 음사어이며, 온전한 음사는 불타(佛陀·佛馱)·부다(浮陀)·부도(浮
屠·浮圖) 등이다.
229) 오로지 마음이 정토이며, 각자의 본성이 아미타불이라는 말이다. 정토와 그곳
에 거처하는 아미타불이 저편의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며 자각(自覺)에 의하여
실현되므로 어느 곳에나 없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이 두 개념은『樂邦文類』
권2 大47 p.172b5 등에도 보이는데, 선종에서 이러한 사상의 단서는 모든 것을
자성(自性)에 귀착시켜 선사상을 구축한 『壇經』의 자성불(自性佛)사상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내 마음에 부처가 있으니 이 자신의 부처[自佛]가 참된 부처이다.
자기에게 부처의 마음이 없다면 어디서 참된 부처를 찾을 것인가?”(宗寶本『壇經』
大48 p.362a2. 我心自有佛, 自佛是眞佛. 自若無佛心, 何處求眞佛?);“나는 한 몸
인 삼신(三身)의 자성불을 설하여 그대들로 하여금 삼신을 보고 분명하게 자신의
본성[自性]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리라.”(같은 책 p.354b13. 吾與說一體三身自性
佛, 令汝等見三身, 了然自悟自性.) 원오극근(圜悟克勤)이 “미타의 정토는 마음 밖
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니, 온 세상 전체가 모두 서방정토인 것이다.”(『圜悟語
錄』권4 大47 p.728c21. 彌陀非外得, 遍界是西方.)라고 한 말도 그 근거는 동일
하다. 후대의 감산덕청(憨山德淸)에게도 이 뜻이 보인다. “마음만이 정토요 자성
이 아미타불이니, 원래 당사자의 한 생각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진실하게 법
을 실천하는 것이다.”(『憨山集』권10 卍127 p.338a17. 唯心淨土, 自性彌陀, 元
不離當人一念. 是爲眞實法行.)
230) 佛國土. 불국(佛國)·불계(佛界)·불찰(佛刹)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상주하
는 정토, 또는 번뇌에 오염된 예토(穢土)일지라도 부처님이 교화하는 곳이면 모
두 불국토라 한다.
231) 佛身. buddha-kāya. 부처님의 몸. 모든 분별과 번뇌에서 해탈하여 무루(無漏)
의 공덕을 갖춘 몸. 여기에서는 견성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몸이 불신으로 바뀐다
는 뜻으로 쓰였다.
232) 法身. dharma-kāya. 부처의 삼신(三身)의 하나. 육신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부
님이 설한 정법(正法)과 그가 깨달은 무루법(無漏法)의 진리 그 자체를 말한다.
233) 60권본 『華嚴經』 권10 大9 p.465c29 참조
234)『血脈論』大48 p.373b28 참조.
만약 상공께서 진실하게 염불하고자 한다면 다만 바로 지금 자기 본성의
아미타불(自性彌陀)을 염불의 대상으로 삼기만 하면 됩니다. 하루 모든 시
각 중의 사위의 안에서 아미타불이라는 네 글자를 마음의 눈235)앞에 붙여
두고, 마음의 눈과 아미타불이라는 네 글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마음마다
이어지고 찰나마다 잊지 않을 때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빈틈없
이 돌이켜 관찰하십시오.236) 이렇게 공부한 지 오래되어 공이 이루어지면
자기도 모르는 순간에 모든 생각이 단절되어 아미타불의 진실한 몸만 우뚝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 순간을 맞이하면 비로소 “옛날부터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부처라 한다.”237)라고 한 말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若相公眞實念佛, 但直下念自性彌陀. 十二時中, 四威儀內, 以
阿彌陀佛名字, 帖在心頭眼前, 心眼佛名, 打成一片, 心心相
續, 念念不昧時, 或密密返觀, ‘念者是誰?’ 久久成功, 則忽爾
之間, 心念斷絶, 阿彌陀佛眞體, 卓爾現前. 當是時也, 方信道,
“舊來不動名爲佛.”
235) 심두안(心頭眼)·심안(心眼). 마음이 마치 눈과 같이 생생하게 관찰한다는 뜻에
서 마음의 눈이라 한다. “그때 대왕은 비록 유폐되어 있었지만 마음의 눈에는 장
애가 없어 먼발치에서 세존을 보고 이마를 바닥에 대고 절을 올리자 자연스럽게
수행이 증진되어 아나함(阿那含 anāgāmin)을 이루었다.”(『觀無量壽佛經』
大12 p.341c3. 爾時, 大王雖在幽閉, 心眼無障, 遙見世尊, 頭面作禮, 自然增進,
成阿那含.)
236) ‘아미타불’이라는 네 글자와 ‘염불하는 자’를 화두로 들고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
는 방법은 화두 참구법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자성미타(自性彌陀)사상에 입
각하여 화두 참구의 방법을 염불에 적용한 예는 태고 당시에 유행했던 것이며,
동시대의 나옹(懶翁)에게도 이 수행법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자성의 아미타불
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 순간 어떤 찰나에도 이 의심 놓치면 안 된다네. 홀연히
어느 날 품었던 모든 생각을 잊으면, 존재 하나하나에서 가려지지 않고 드러나
리라. 자성미타를 빈틈없이 기억에 담아 두고, 하루 어느 시각에나 자세하게 살
펴라. 어느 날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마음에 붙어 있게 되면, 동서의 거리가 한
터럭의 간격도 없는 것과 같으리라.”(『懶翁和尙歌頌』 韓6 p.743a9. 自性彌陀
何處在? 時時念念不須忘. 驀然一日如忘憶, 物物頭頭不覆藏. 彌陀憶念不須閒,
二六時中子細看. 驀得一朝親憶着, 東西不隔一毫端.)
237) 신라(新羅) 때 의상(義湘)이 지은 『華嚴一乘法界圖』의 마지막 구절이다. 韓2
p.8b18 참조.
● 백충신 거사에게 주는 법어238) 示白忠信居士
238) 이 법어 역시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선정일치의 사상에 입각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극락239)이라는 이름의
세계가 있다. 그 국토에 아미타라는 명호의 부처님이 지금 설법하고 계시
다.”240)라고 운운하셨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는 매우 은밀한 뜻이 있는데,
백충신거사는 그것을 아십니까? 아미타불이라는 명호를 마음에 놓아 두고
언제나 잊지 않으며 찰나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빈틈이 없이 절실하게
참구하며 생각하십시오. 만약 생각이 고갈되고 지향할 의지가 막히면241)
‘염불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돌이켜 관찰하고, 다시 ‘이렇게 돌이켜 관
찰하는 자는 누구인가?’ 하고 관찰하십시오. 이와 같이 빈틈없이 궁구하고,
또 빈틈없이 궁구하십시오. 이렇게 궁구하는 마음이 불현듯 끊어지면 자기
본성의 아미타불이 우뚝하게 눈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하
십시오.
佛言,“ 過十萬億佛土, 有世界, 名曰極樂. 其土有佛, 號阿彌
陀, 今現在說法.”云云. 佛之此語中, 深有密意, 忠信居士, 還
知麽? 阿彌陀佛名, 當在心頭, 常常不昧, 念念無間, 切切參
思, 切切參思. 若思盡意窮, 則返觀念者是誰? 又觀能恁麽返
觀者, 又是阿誰? 如是密密參詳, 密密參詳. 此心忽然斷絶, 卽
自性彌陀, 卓爾現前. 勉之, 勉之.
239) 極樂. Sukhāvatī. 아미타불의 정토를 말한다. 극락정토(極樂淨土)·서방정토(西
方淨土) 등이라고 한다.
240) 『阿彌陀經』 大12 p.346c10 참조.
241) 화두에 덧붙일 더 이상의 분별이 남아 있지 않아 마음이 갈 길이 끊어진 심로
(心路絶) 또는 심무소지(心無所之)의 경계와 같다.
● 무능거사에게 주는 법어242)(무능거사는 상공 박성량)
示無能居士 朴相公成亮
242) 앞의 여러 곳에서 제기된 무자 화두의 취지와 같은 법어이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無]’라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이 무자는 유·무의 무도 아니고 진무
(眞無)의 무도 아닙니다.243) 말해 보십시오! 결국은 무슨 도리이겠습니까?
궁구하다가 여전히 의심이 타파되지 않았을 때는 다만 오로지 무자만을 들
고서 걸어가거나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마십시오. 궁구하다가 무자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것도 이해
하지 못하는 상태244)가 되어 갑자기 마음이 갈 곳이 사라졌을 때245)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여기가 오히려 좋은 소식이 다가
올 경계이니, 결코 이러니저러니 분별하지 마십시오. 만약 조주가 설정한
관문을 꿰뚫는다면 마치 물을 직접 마셔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알
게 되는 것과 같아서 세상사람들의 말에 더 이상 미혹당하지 않을 것입니
다.246)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어떤 경우에도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서 말하
지 말고,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서 점검을 받아야 합니다.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只這箇無字, 不
是有無之無, 亦不是眞無之無. 且道! 畢竟什麽道理? 參詳去,
旣疑情未破時, 但單單提個無字, 行住坐臥, 千萬不昧. 參到百
不知百不會, 忽然心無所之時, 莫怕落空. 這裏便是好處, 切忌
如何若何. 若透得趙州關, 則如人飮水, 冷暖自知, 不疑天下人
舌頭去在. 到此時節, 千萬無智人前莫說, 宜見本色宗師.
243) 주석202) 참조.
244) 주석220) 참조.
245) 주석165) 참조
246) 주석207) 참조.
● 당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當禪人
옛날에 출가한 사람들은 이 일에 대해 한 번 듣기만 하면 아주 특별나고
귀하다는 생각을 하여 용맹하게 정진할 마음을 일으키고 곧바로 실천에 옮
기면서 물러서지 않으리라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지혜의 생명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마음의 등불도 꺼지지 않고 전해졌기에 부처님과 조사의 문하에
는 뛰어난 인물들이 부족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출가한 무리
들은 열이면 열 모두 스스로 자신이 열등하다는 장애를 가지지 않은 자가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하여 나태하여 성인의 경지는 높다
고 헤아리면서 자신은 하열하다고 달게 받아들인다. 또한 신체는 아침 이
슬처럼 허망하고 목숨은 석양처럼 빠르게 사라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이
몹시도 애쓰고 조급히 굴지만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이 모두 삼악도(三惡
途)247)의 업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7정(情)248)이 발산되는 대로 놓아
두고 3업249)을 부리기 때문에 망령된 업을 저지르기는 쉽지만 미래세의
언젠가는 도산·검수·확탕·양동 등의 지옥250)에 떨어진 다음 여섯 가지 과
보251)를 받을 것이니 몸과 마음을 핍박하는 고통252)이 가장 험난할 것이다.
古之出家之士, 一聞此事, 生大希有, 發大勇猛, 直截而去, 誓
不退轉故, 有慧命不絶, 心燈無窮, 佛祖門下, 不乏其人. 今之
出家之流, 十箇五雙, 無不自有自劣之障, 人多懈怠, 於此事
上, 高推聖境, 甘爲下劣. 又似不信, 形同朝露, 命速西光, 孜
孜矻矻, 愡愡忙忙, 自好爲之者, 皆是三途業因也. 縱此七情,
而使其三業故, 造妄業雖易, 他時刀山劍樹鑊湯洋銅, 受六交
報, 苦苦最難.
247) 여섯 가지 윤회의 길 중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 등 세 가지 길[三途]
을 말한다.
248) “7정:기쁨·노여움·근심·두려움·애착·증오·욕망<정(情)이란 시비를 일으키
는 주체이고 이해를 다투는 근본이다.>”(『釋氏要覽』권하 大54 p.296c11.
七情:喜·怒·憂·懼·愛·憎·欲<情者, 是非之主, 利害之根.>)
249) 三業. 신체적 활동[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저지르는 업.
250) 도산지옥은 산에 있는 칼이 손과 발을 비롯하여 모든 신체의 부분을 잘라버리
는 지옥이다. 검수지옥은 나뭇가지가 모두 칼과 같아서 그곳에 떨어진 죄인들
에게 신체의 곳곳을 찌르는 고통을 주는 지옥이다. 확탕지옥은 가마솥에 물을
끓여 죄인을 그 안에 넣고 괴롭히는 지옥이다. 양동지옥은 끓는 물을 입에 부어
넣어 입술과 혀를 시작으로 모든 내장을 태워버리는 지옥이다.
251) 6교보(交報). 6보(報)라고도 한다.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등 6식(識)이 지은 업에 따라 초래되는 악한 과보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
에서 뒤섞여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순서대로 견보(見報)·문보(聞報)·취보(嗅
報)·미보(味報)·촉보(觸報)·사보(思報) 등 여섯 종류의 과보이다.
252) 고고(苦苦). 괴고(壞苦)·행고(行苦)와 함께 3고(苦)의 하나.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그 무엇이 지금 모든 조건을 갖춘 상태와 비
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충분히 편의롭게 수행할 수 있을 때 용맹하게 정
진할 마음을 일으키고 단호한 뜻을 세워 한칼에 두 동강내듯이 망념을 버
리고 본분사를 참구하라. 한 찰나에 깨달으면 생사윤회의 굴레가 끊어져
더 이상 세상사람들의 말에 미혹당하지 않고, 부처님이나 조사라도 그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이 어찌 궁극적으로 할 일을 마쳐 안락하게 된
자가 아니겠는가!
汝旣出家, 爭似今日是事具足! 十分便宜時, 發勇猛心, 立決定
志, 放捨情念, 一刀兩段, 參究此事. 一念悟破, 則生死卽絶, 更
不疑天下人舌頭, 佛祖奈儞不得, 豈不是究竟無事安樂者哉!
● 진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眞禪人
그대는 이미 출가하였으니 반드시 대장부의 뜻을 세우고 용맹하게 정진
할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신속하게 변화하니, 생사윤
회를 해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253)임을 깊이 믿고,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등 모든 때에 오로지 이 일을 잊지 말고 절실하게 궁구하
여야 한다. 마치 천 길 깊이의 우물에 떨어진 사람이 이리저리 무수히 생각
하고 궁리하며 오로지 빠져나갈 방법에만 골몰하는 것과 같이 한다면 멀지
않은 기간 안에 반드시 그 생각에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공을 들이고도 성취하지 못한다면 불법에 영험한 효과가 없는
것이리라.254)
汝旣出家, 須立丈夫之志, 發勇猛心, 深信無常迅速, 生死事
大, 行住坐臥, 一切時中, 單單不昧此事, 切切參詳. 如人墮在
千尺井中, 千思萬想, 只是箇單單求出之心, 不日內必有相應
分. 如是用功, 若未成辨, 佛法無靈驗矣.
253) 주석212) 참조.
254) 동일한 비유와 취지가 고봉원묘(高峰原妙)의 법어에 보인다. 마음에 다른 어떤
생각도 들어서지 않고 오로지 화두만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뜻을 나타낸
다. “참선하여 정해진 기간 안에 기대한 공을 이루려면 마치 천 길의 우물 밑에
떨어진 것과 같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아침까지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오로지 빠져나갈 마음뿐이고 결코 다른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진실로 이와 같이 공을 들이기를 3일이나 5일 또는 7일이 되어도 꿰뚫지
못한다면 나는 오늘 큰 거짓말을 한 죄를 범하여 영원히 혀를 뽑아 밭을 가는 지
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高峰語錄』 권하 卍122 p.692a3. 參禪若要剋日成
功, 如墮千尺井底相似, 從朝至暮, 從暮至朝, 千思想, 萬思想, 單單則是箇求出之心,
究竟決無二念. 誠能如是施功, 或三日, 或五日, 或七日, 若不 徹去, 西峰今日犯大
妄語, 永墮拔舌犁耕.)
옛날에 향엄지한(香嚴智閑)은 대나무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달았고, 영운지근(靈雲志勤)은 복숭아꽃을 보고 마음을 밝혔다.255) 이와
같이 되려면 당사자가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사위의 안에서 다만 이렇게 뚜
렷하고 분명하게 이 일을 잊지 말고 순수하게 화두만 있고 다른 생각은 섞
이지 말아야 한다. 활동하거나 일이 없을 때도 다만 이와 같이 하고, 말하거
나 침묵할 때도 이와 같이 하며, 깨어 있거나 잠을 자거나 한결같다면256) 소
리를 듣거나 현상을 볼 때 어찌 향엄이나 영운과 같은 깨달음이 없을 것인
가!257) 참선하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 쌓은 역량이 옛날에 깨달은 사람의
그것과 대등한지 그렇지 않은지 스스로 따지고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
다. 만약 잘못된 구석이 있다면 결코 스스로 책망하지 말고 다시 대장부의
뜻을 일으켜 어느 순간 어떤 찰나에도 일체의 선과 악을 모두 생각하지 마
라.258) 바로 이러할 때 ‘어떤 것이 내가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본래
면목일까?’ 하는 의심만을 오로지 잊지 말고 절실하게 궁구하다가 홀연히
마음이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면,259) 그 의심과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근기
가 영리한 자가 이 경계에 이르면 무명을 타파할 것이지만, 그 뒤에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 점검 받아야 한다.
昔日, 香嚴, 聞竹聲而悟道, 靈雲, 見桃花而明心. 如此則當
人, 但十二時中, 四威儀間, 但伊麽惺惺歷歷, 不昧此事, 純一
無雜. 動靜時, 但伊麽;語默時, 但伊麽, 寤寐一如, 則聞聲見
色, 豈無香嚴靈雲! 參禪人, 須時時自責自點看, 自己功力, 與
古人侔與不侔. 若有敗闕處, 則千萬自責, 更發丈夫之志, 時時
念念, 一切善惡, 都莫思量. 正當伊麽時,‘ 那箇是我父母未生
前本來面目?’ 單單不昧, 切切參詳, 忽然心無所之, 打成一片.
利根者, 到這裏, 打破無明, 向後須見本色宗師.
255) 白雲語錄 주석200)·201) 참조.
256) 주석196) 참조.
257) 오로지 화두라는 한 생각에 소리와 색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현상을 통일시키
고 갖가지 생각도 화두 하나에 녹여버려 전체가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 타성
일편(打成一片)의 경지가 되면, 우연한 기회에 마주치는 하나의 대상에서 깨달
음이 촉발된다는 뜻이다. 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는다는 문성오도(聞聲悟道)와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는 견색명심(見色明心)이 간화선의 맥락에서 수용된
것이다.
258) “一切善惡, 都莫思量.” 6조 혜능(慧能)의 말. 이 말 역시 화두 공부의 맥락에서
재해석된 것이다. 곧 선한 생각이 되었건 악한 생각이 되었건 모두 물리치고 오
로지 화두만 궁구할 것을 지시하는 말로 수용되었다. 이것은 『壇經』에 나오는
구절로서 돈황본(敦煌本)·대승사본(大乘寺本)·흥성사본(興聖寺本) 등에는 없
으며, 유포본(流布本)인 덕이본(德異本)·종보본(宗寶本)에만 나온다. 종보본
『壇經』大4 p.360a13 및『慧能硏究』 p.369 참조.
259) 주석165) 참조.
● 의선인에게 주는 법어 示宜禪人
본사260) 세존께서 아난(阿難)261)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비록 삼세의
여래께서 설하신 12부경262)을 기억하여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하루 동안
무루업263)을 닦는 것만 못하다.”264) 이것은 네 가지 진실한 말265)에서 나온
참으로 거짓이 없는 마음속의 말씀이 아닌가! 모든 부처님과 조사들이 주
고받으며 전한 미묘한 뜻은 문자와 언어 자체에는 없다. 그러나 부처님과
조사는 큰 자비심이 있기에 다양한 근기를 대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문
자와 언어를 사용한다. 바로 이 문자와 언어는 중근기와 하근기만을 위하
여 그 방편을 잠시 빌리지만 심지(心地)를 곧바로 가리키는 수단이다. 그러
므로 학인들이 방편을 빌리는 것을 가지고 진실한 법[實法]이라 여기고 버
리지 않는다면 이 어찌 큰 병통이 아니겠는가!266)
本師世尊, 語阿難曰,“ 汝雖復憶持, 三世如來, 十二部經, 不
如一日, 修無漏學.267)” 是四實語中, 眞赤心之語乎! 諸佛諸
祖, 授受相傳的妙義, 不在文字語言之上. 然, 佛祖以大悲故,
對機不得已, 而乃以文字語言. 只這文字語言, 偏爲中下之機,
借其方便, 而直指心地. 然則大凡學人, 借其方便, 以爲實法不
捨, 則豈不是大病!
260) 주석34) 참조.
261) 아난존자. Ānanda. 한역하여 경희(慶喜)·환희(歡喜)라고도 한다. 석가모니 십
대 제자 중 한 명이다. 석가모니의 사촌동생으로서, 출가한 후 대중들의 천거에
의하여 20여 년 동안 석가모니의 시자를 맡았다. 석가모니를 가까이 모시면서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으며, 설법을 가장 정확하게 기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이유로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일컬어진다. 불입멸(佛入滅) 후 1차 경전결집에
참여하여, 불법(佛法)을 경전화하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남겼다.
262) 十二部經. dvādaśān3 ga-dharma-pravacana. 부처님이 설한 법을 그 서술방식과
내용에 따라서 열두 가지로 분류한 것인데, 부처님의 교설을 총칭한다. 12분교
(十二分敎)·12분경(十二分經) 등이라고도 한다.
263) 無漏業. 선악[黑白業]의 인과를 완전히 끊고 선·악의 상을 떠나서 청정하고 번
뇌가 없는 업이다. 열반의 경지에 도달해야 닦을 수 있는 경계이다.
264)『楞嚴經』의 구절을 뜻에 따라 변용한 것으로 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다. 대
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취합한 것이다. “아난아, 그대가 비록 겁의 세월에 걸
쳐 여래의 비밀스러운 묘엄(妙嚴)을 기억하여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는 것만 못하다.”(『楞嚴經』권4 大19 p.122a4. 阿難, 汝雖
歷劫, 憶持如來秘密妙嚴, 不如一日, 修無漏業.);“비록 시방 여래가 설하신 12부
경의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기억하여 지니고 있지만 …… 사람들이 그대를 많이
아는 것으로는 가장 뛰어난 자[多聞第一]라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겁의 세월 동안
많이 알고 익히더라도 마등가(摩登伽)의 유혹을 벗어날 수는 없다.”(『楞嚴經』
권4 大19 p.121c27. 雖復憶持, 十方如來, 十二部經, 淸淨妙理 …… 人間稱汝, 多
聞第一, 以此積劫多聞熏習, 不能免離摩登伽難.) 묘엄이란 제불(諸佛)과 십지(十
地) 보살이 성취한 삼매 곧 수능엄정(首楞嚴定)을 가리키며, 마등가의 유혹이란
마등가의 여인이 아난을 유혹하여 그의 계체(戒體)를 무너뜨리려고 한 것을 말
한다.
265) 진실한 말[實語]·부드러운 말[軟語]·꾸미지 않는 말[不綺語]·이간질하지 않는
말[不兩舌] 등 네 가지 말을 가리킨다. “또한 네 가지 법이 있으니 입으로 행하는
네 가지 선행이다. 첫째는 실어, 둘째는 연어, 셋째는 불기어, 넷째는 불양설이
다.”(『長阿含經』 권8 「衆集經」 大1 p.50b25. 復有四法, 謂口四善行. 一者,
實語, 二者, 軟語, 三者, 不綺語, 四者, 不兩舌.)
266) “산승이 말하는 내용은 모두 일시적으로 병을 치료하는 약과 같은 방편이니 실
(實)을 가진 법은 아무것도 없다.”(『臨濟語錄』大47 p.498b18. 山僧說處, 皆
是一期藥病相治, 總無實法.) 더 이상 분별할 도리가 끊어진 몰자미한 화두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 깨달은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학인들이 근본을
모르고 허망한 현상을 진실로 오인하는 잘못을 본 까닭에 방편을 세워서 그들
을 유인함으로써 자신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알고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분
명하게 보도록 한 것일 뿐이며, 결코 실체가 있는 법[實法]을 전해 준 일은 없
었다.”(『大慧語錄』권23「示妙明居士」大47 p.910a27. 古人不得已, 見學者
迷頭認影, 故設方便誘引之, 令其自識本地風光, 明見本來面目而已, 初無實法與
人.);“선지식이 총명한 의식으로 사량분별하는 것을 벗어난 경지에서 본분의
바탕으로 보여주면 흔히 그것이 눈앞에 던져져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옛날부터 덕이 있는 성인들은 실법(實法)을 사람들에게 주었다.’라고 착각한다.
가령 조주(趙州)의 방하착(放下著)이나 운문(雲門)의 수미산(須彌山)과 같은 종
류의 화두가 그것이다.”(『書狀』「答曾侍郞狀」第二書 大47 p.917b21. 乍聞
知識, 向聰明意識, 思量計較外, 示以本分草料, 多是當面蹉過, 將謂從上古德,
有實法與人. 如趙州放下著, 雲門須彌山之類, 是也.)
267) ‘學’은 『楞嚴經』에는 ‘業’으로 되어 있다.
비유하자면 빈궁한 아들이 부자 아버지를 버리고 달아나268) 나그네들의
숙소에 살면서 그것을 자신의 집으로 잘못 생각한다면 집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집에 돌아올 날도 없는 것과 같다. 아! 안타깝다! 손가락을
달이라 집착하는 자들이여.269) 그대는 이제 그래서는 안 되니, 부처님과 조
사의 언어는 모두 심지를 곧바로 가리키는 방편이라 확고하게 알고, 이전부
터 배워서 이해한 문자와 언어는 한칼에 두 동강 낸 다음 심지를 참구하여
이번 생에 일대사를 알아차려야 생사윤회를 끊을 수 있고 네 가지 은혜270)
를 보답할 수 있다.
譬如窮子, 捨父逃逝, 寄托旅亭, 妄謂自家, 則非但失家, 那有
到家之日. 嗟夫! 惜哉! 執指爲月者也. 公今不然, 定知佛祖
言, 皆直指心地之方便, 從前學解文字語言, 便一刀兩段, 宜參
心地, 一生須辨大事, 可以斷生死, 可以報四恩也.
268)『法華經』「信解品」大9 p.16b25에 나오는 비유.
269) 집지위월(執指爲月).『證道歌』에 나오는 말로서, 경전적 근거는『楞嚴經』이다.
“그대들은 오히려 대상을 분별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고 있으니, 이 법 또한 대
상일 뿐이기에 법성(法性)을 얻지 못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손가락으로 가
리켜 누군가에게 달을 보여주면, 그 사람은 손가락을 따라서 달을 보아야 한다.
만약 다시 손가락을 보며 달 자체라고 여긴다면, 이 사람이 어찌 달만 놓치겠는
가? 달 또한 그 손가락을 놓친 것이다. 왜인가? 손가락이 표시하며 가리킨 대상
은 밝은 달이기 때문이다. 어찌 손가락만 놓친 것인가? 또한 밝음과 어두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인가? 곧 손가락 자체를 달의 밝은 성질이라 여겨,
밝은 성질과 어두운 성질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楞嚴經』
권2 大19 p.111a8. 汝等, 尚以緣心聽法. 此法, 亦緣, 非得法性. 如人, 以手指月示
人, 彼人, 因指當應看月. 若復 觀指以爲月體, 此人, 豈唯亡失月? 輪亦亡其指. 何以
故? 以所標指爲明月故. 豈唯亡指? 亦復不 識, 明之與暗. 何以故? 卽以指體爲月明
性, 明暗二性, 無所了故.);“외도는 총명할지라도 지혜가 없으니, 또한 어리석고
어린아이와 같다. 빈주먹 속에 그 무엇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를 일으키며, 손가락
을 달이라 집착하며 공연히 노력만 허비한다.”(『證道歌』 大48 p.396c9. 外道聰
明無智慧, 亦愚癡亦小騃. 空拳指上生實解, 執指爲月枉施功.)
270) 사은(四恩). 白雲語錄 주석151) 참조.
사람의 심지는 지극히 미세하고 지극히 오묘하여 언어로 이해할 수 없고
생각으로 알 수 없으며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271) 다만 모든 시각에 오
로지 이 일만 놓치지 않고 들고서 어떤 경우에도 잊지 않는다면 자연히 모
든 것이 그것과 한 덩어리가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어떤 것도 이
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272) 결코 어떻게 할까 분별하지 말고 다
만 뚜렷하면서도 분명하게 모든 행위 방식에서나 활동하거나 조용히 있거
나 말하거나 침묵하는 순간에 화두를 이어가기만 하면 된다. 한 번 힘을 얻
으면273)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지만, 지혜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결코
말하지 말고 나중에 반드시 본색을 갖춘 종사를 만나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점검 받아야 한다. 이것이 대장부가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다.
人之心地, 至微至妙, 不可以語言解, 不可以思想得, 不可以寂
默通. 但一切時中, 單提此事, 千萬不昧, 千萬不昧, 自然打成
一片了也. 到百不知百不會時, 切忌如何, 但惺惺歷歷, 一切施
爲, 動靜語默時節, 但能相續. 如一得力, 則便有好時, 無智人
前, 切忌道着, 向後須遇見本色宗師, 密密決擇. 此是大丈夫之
平生事業也.
271) 언어와 침묵과 생각 등 어떤 수단으로도 접근이 차단된 경계라는 뜻이다. 대혜
종고(大慧宗杲)에게 유사한 구절이 있다. 眞覺語錄 주석377), 白雲語錄 주석99)
참조.
272) 주석205) 참조.
273) 득력(得力). 주석163) 참조.
● 담당숙장로에게 보내는 답신 答湛堂淑長老
개천당(開天堂)의 사도(司徒)274) 노선옹(老禪翁)275)의 문안 편지를 공경
하는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 편지에 “늙어서 병든 몸이라는 이유로 슬프
게 한탄할 뜻은 거의 없고, 깨달음의 전기가 되는 결정적인 한마디 말276)을
구하여 마지막 양식277)으로 삼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어찌
까닭 없이 한 말이겠습니까? 저 역시 한탄스럽게 느낍니다. 옛날이나 지금
이나 세간의 사람들은 12월 30일이 되면 ‘묵은해는 이미 끝났고, 새해가 되
었다.’라고 말하며, 다만 이렇게 서로 경하하며 상식적인 생각에 따라갈 뿐
입니다. 선옹께서는 이미 본분사에 들어선 분이시고 또한 본분사로써 세속
의 무리를 경각시키기 위해 진실한 말씀을 하십니다. 선옹께서 어찌 자기
마음의 신령한 본질278)이 높고도 우뚝하며,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
도 없이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이 전혀 없는 것279)이라는 진
실을 모르겠습니까? 이것에 어찌 옛날과 지금의 차이나 새것과 묵은 것의
차별이 있겠으며, 본래 범부와 성인을 가르는 견해가 없거늘 어찌 생사의
허망함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옛사람이 그것을 무위진인(無位眞人)280)이
라 부른 것도 오히려 맞지 않으니, 이제 무엇이라 불러야 하겠습니까? 물을
직접 마셔 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과 같으니, 한 소리
내어 웃어넘기시기 바랍니다.
敬奉開天堂上司徒老禪翁問慰之書. 其中云, “以老病緣故, 小
有傷歎之志, 求一轉語, 以爲末後資糧.” 此語豈徒然哉? 余亦
歎之感矣. 古今世間人人, 到臘月三十日, 謂言舊年已終, 新歲
到來, 但伊麽互相慶賀, 以當人情. 禪翁旣是箇中人, 亦以箇中
事, 警其時流, 而乃發眞實語也. 禪翁豈不知, 自己靈明, 巍巍
堂堂, 露裸裸, 赤酒酒, 沒可把者也? 這箇, 豈有古今之異, 新
舊之別, 本無凡聖之見, 何關生死之妄耶? 古人, 喚作無位眞
人, 尙亦不中, 如今喚作什麽? 如人飮水, 冷暖自知, 請下笑一
聲看.
274) 고려(高麗) 때 삼공(三公)의 하나. 정1품(正一品). 행정 실무는 맡지 않고 왕실의
고문 역할을 하는 명예직이다.
275) ‘老’는 경칭, ‘禪翁’도 선수행자에 대한 경칭. 답신의 상대자인 담당숙장로를 가
리킨다.
276) 일전어(一轉語). 난관을 타개하거나 곤경을 반전시키는 한마디. 대부분의 경우
또 하나의 난관과 곤경의 선어(禪語)를 제시하는 것이 조사선의 수법이다.
277) 말후자량(末後資糧). 깨달음에 이르는 궁극적인 수단을 비유하는 말. 직접적으
로는 입적하기 전에 할 공부 과제를 말한다.
278) 자기영명(自己靈明). ‘영명’은 신령하게 아는 마음의 본질 곧 총명·지혜 등을 나
타내는 말이다.『圓覺經』大39 p.533b28에 나오는 자기 마음의 영명함[自心靈
明]과 유사한 뜻이다. “자기 마음의 신령한 지혜는 본래 대상을 분별하는 작용
이 아니다. 대상을 분별하는 작용이 곧 자신의 마음이라 오인하여 찰나마다 그
작용을 따르니,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다.”(自心靈明, 本非緣慮.
今認緣慮, 謂是自心, 念念隨之, 漂沈苦海.)
279) 白雲語錄 주석4) 참조.
280) 眞覺語錄 주석48) 참조.
조주고불(趙州古佛 )281)은무자(無字)를 말하여 천하 납승들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개천당에는 납자의 안목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얼
마나 되는지 저282)는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지요? 그중에 만약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자가 있다면 제가 그들을 위해 게송 한 수를 읊겠습
니다.
趙州古佛, 道箇無字, 以開天下衲僧眼. 迦智未知, 開天堂中,
有數衲子眼. 卽今如何? 其中若有未開的, 余爲頌曰,
281) 白雲語錄 주석288) 참조.
282) 가지(迦智). 이 편지를 쓸 당시 태고선사는 가지산(迦智山)에 주석하고 있었으
므로 ‘가지’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와 같은 호칭을 산호(山號)라 하
는데, 선사들이 자신을 가리킬 때 일반적으로 쓴다.
모든 일의 실마리를 놓아버리고
조주의 관문을 뚫어야 하리라.
궁구하다 어떤 분별도 할 수 없는 경계에 이르면,
본래 모양 그대로 드러난다네.
곧바로 이와 같이 정진한다면
잠깐 사이에 의심덩어리 타파되리라.
납승 가문에서 해야 할 일이
이와 같으면 편안히 마친다네.
섣달 그믐날에
잘 지은 저녁밥을 먹으며,
서로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도 좋지만
스스로 기쁨을 느껴보는 것만 하리오?
맨발로 얼음을 밟아보아야
비로소 뼛속까지 시리게 느끼리라.
스님께서 미리 스스로 준비하셨으니
나 또한 그 틈에 돕는 것이라오.
放下萬事端 須度趙州關
參到百不會 便是露團團
直載如斯去 須臾破疑團
衲僧家中事 如是乃安閑
臘月三十日 亦可爲精飡
對人相慰賀 何似自怡看
赤足踏氷雪 方知徹骨寒
師豈不預備 余亦助其間
● 문선인에게 주는 게송283) 示文禪人
283) 이 게송의 전반적인 뜻은 이전의 법문에서 제시한 공부법과 다르지 않다. 발심으
로부터 시작하여 화두를 들고 마음의 길이 막힌 곳에 이르고, 오매일여(寤寐一如)
의 경계가 되기까지 오로지 반복하여 화두만 들며, 마지막에는 본색을 갖춘 종사
를 만나 점검 받으라는 말 등은 태고선사가 항상 내세우는 기본적인 공부법이다.
그대는 이미 그릇된 것을 알고 명리를 떠났으니,
이번 생에 반드시 불조의 은혜를 갚아야 하리라.
오늘은 3일 내일은 4일 하며 한가하게 보낸다면,
어느 때 무명의 뿌리를 완전히 끊어버리리오?
그대는 이제 대장부의 뜻을 이미 일으켰으며,
때마침 날카로운 취모검284)도 빼어 들었으니,
항상 손에 지니고285) 이같이 공부해 나아간다면,
어떤 마구니나 외도가 그 이치를 어지럽힐까?
곧바로 길 막힌 곳에 이르고 철벽에 부딪히면,286)
인연에 얽힌 망상과 분별 영원히 사라지리라.
공부가 강물을 뚫은 밝은 달그림자와 같다면,
점차 깨었거나 잠자거나 한결같은 경계가 되리라.287)
번뇌가 그치면서 지혜의 빛이 일어날 것이니,
여기에 이르러 슬픔이나 기쁨 일으키지 마라.
지각으로 알려는 마음도 일으키지 말아야 하니,
지각을 일으키자마자 공부의 효력을 잃으리라.
다만 오로지 화두만 들고 눈을 뚜렷이 뜨고서,
반복하여 그가 어떤 형상인지 살피고 또 살펴라.
홀연히 조사의 관문을 타파한 다음에는
다만 한 번의 웃음소리만 필요할 뿐이라네.
그 뒤에 본색종사를 찾아 그 경지를 물어야 하니,
본분의 핵심을 인정받으면 같은 가지에서 태어나리.288)
君旣知非去名利 此生須報佛祖恩
若也今日三明日四 幾時了斷無明根
君今已發丈夫志 時復提起吹毛利
常持如是做將去 有甚魔外亂其理
直到路窮當鐵壁 緣慮妄念都永寂
功如透水皎月華 漸至寤寐一如域
塵將息而光將發 到此莫生悲悅懌
亦莫生知覺心 才生知覺失功力
但但提撕眼惺惺 反復看渠渠何形
忽然捉敗佛祖關 只消得箇一笑聲
向後宜尋參本色 決擇巴鼻兮同條
284) 분별과 망상을 잘라내는 화두라는 무기를 취모검에 비유한다. 취모검이란 머
리카락을 불어 그 칼날에 대면 잘려나갈 정도로 예리한 칼을 말한다. 대혜종
고(大慧宗杲)가 “무(無)라는 한 글자가 무수하게 많은 잘못된 지각을 꺾어버리
는 무기”라고 한 뒤로 종종 화두를 무기에 비유한다.(『書狀』「答富樞密狀」
大47 p.921c8. 此一字子,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
285) 화두를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들고서 의심하는 것을 말한다.
286) 노궁(路窮)·철벽(鐵壁)은 화두를 궁구하는 모든 수단이 통하지 않게 된 경계를
나타낸다. 길이 막혀 더 이상 나갈 수 없고, 철벽이 가로막아 뚫을 수 있는 방법
이 없다는 것은 분별이 더 이상 파고들 수 없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287) 본 어록 「答方山居士」에 이와 동일한 비유가 있다. 주석196)·197) 참조.
288) 동조생(同條生). 뿌리가 같은 가지에서 태어난다는 말. 계통이 같다는 뜻인 동문
(同門)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는 자신을 인가해 준 종사와 서로의 마음을 알아
주는 사이가 된다는 뜻이다.
● 소선인에게 주는 게송289)示紹禪人
289) 무자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에 대한 태고의 일반적 생각이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는 게송이다.
부처님께서는 계·정·혜 290)를설하시어,
신·구·의 3업291)을 청정하게 만드셨네.
몸 세 가지, 입 네 가지, 생각 세 가지 업 있으니,292)
그 낱낱의 업 저지르지 말고 청정한 계율 지켜라.
매 찰나마다 조주가 제시한 무자(無字)를 들고
모든 시각에서 무자를 잊어서는 안 된다네.
가거나 섰거나 앉거나 눕거나 대소변을 볼 때,
옷을 입거나 밥을 먹거나 항상 무자를 들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거나 닭이 알을 품듯이293)
어떤 경우에도 잊지 말고 다만 무자를 들어라
이와 같이 화두가 빈틈과 끊어짐이 없게 하고,
어째서 무라고 했는지 의심을 일으켜 궁구하라.
의심이 타파되지 않아서 마음이 답답할 때가294)
바로 오로지 이 화두만 들기 좋은 기회이다.
화두가 계속 이어져 정념295)이 완성된 상태로,
궁구하고 또 자세히 궁구하며 화두를 간수하라.
의심과 화두를 한 덩어리로 만든 다음,
동정어묵(動靜語默)296)에 항상 무자를 들다가,
점차 깨었을 때나 잠잘 때나 한결같게 된 다음에는,297)
화두가 마음에서 떨어져 나가지만 않으면 된다.
의심하다가 분별을 잊고 마음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한밤중에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리라.298)
그때 슬퍼하거나 기뻐하는 마음 일으키지 말고,
반드시 본색종사를 만나 영원히 의심을 해소하라.
佛說戒定慧 淨身口意業
身三口四意三業 一一莫作持淨戒
念念提起趙州無 一切時中不昧無
行住坐臥二便時 着衣喫飯常提無
如猫捕鼠鷄抱卵 千萬不昧但擧無
如是話頭不間斷 起疑參因甚道無
疑不破時心頭悶 正好單提這話頭
話頭聯綿正念成 參復參詳看話頭
疑與話頭成一片 動靜語默常提無
漸到寤寐一如時 只要話頭心不離
疑到情忘心絶處 金烏夜半徹天飛
於時莫生悲喜心 須參本色永決疑
290) 수행자가 반드시 닦아야 하는 계학(戒學)·정학(定學)·혜학(慧學) 등 삼학(
學)을 말한다. 계학( adhiśīla)은 삼업(三業)의 악을 저지르지 않고 선을 닦는 것
이고, 정학( adhicitta)은 산란한 마음을 잡아 잡념을 없애고 정신을 맑게 하는
것이며, 혜학( adhiprajñā)은 올바른 견해로 번뇌를 제거하고 법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291) 주석249) 참조.
292) 열 가지 악업(惡業)을 신·구·의 3업에 배대한 것이다. 신업은 살생(殺生)·투도
(偸盜)·사음(邪婬) 등 신삼(身三), 구업은 양설(兩舌)·악구(惡口)·망어(妄語)·
기어(綺語) 등 구사(口四), 의업은 탐욕(貪欲)·진에(瞋恚)·우치(愚癡) 등 의삼
(意三)으로 합하여 모두 10악업이 된다.
293) 주석161) 참조.
294) 이 맥락에서 ‘마음이 답답할 때’[心頭悶]라는 용어는 오로지 대혜종고(大慧宗
杲)만이 쓴 것이다. “화두에 잡을 수단이 전혀 없고 어떤 맛도 없어 마음이 답답
할 때가 공부에 힘을 붙이기 좋은 기회이니 결코 화두 이외의 다른 것을 따라가
면 안 된다. 바로 이렇게 답답한 때가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어 세상사람들의 혀
에 짓눌러 앉아 아무 말도 못하게 만들 경계인 것이다.”(『書狀』「答曾宗丞」
大47 p.934b4. 覺得沒巴鼻, 沒滋味, 心頭悶時, 正好著力, 切忌隨他去. 只這悶處,
便是成佛作祖, 坐斷天下人舌頭處也.)
295) 正念. samyak-smrti, sammāsati.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정념이라는 뜻이다. 정념은 팔정도의 하나로서 모든 법의 본질과 차
별상을 기멸하는 그대로 놓치지 않고 ‘주시하며 알아차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화두를 무간단(無間斷)의 상태로 간수(看守)하며 이어가는 것과 유사하다.
296) 본 어록 「答方山居士」 참조.
297) 주석204) 참조.
298) 고봉원묘(高峰原妙)의 말이다.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
가는가? 다만 뚜렷하게 생각을 붙이고 의심하기만 하라. 의심이 분별을 잊고 마
음이 끊어진 곳에 이르면, 한밤중에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리라.”(『高
峰語錄』권상 卍122 p.674a9,『高峰禪要』卍122 p.717a3. 萬法歸一一何歸?
只貴惺惺著意疑. 疑到情忘心絶處, 金烏夜半徹天飛.)
● 가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可禪人
그대에게 권하니 반드시 장부의 뜻을 세워
현생에 부처님의 은혜를 모두 갚아야 한다.
오늘날 정법이 추락하려고 하니
속히 밝은 등불 이어 생사의 이 언덕299) 건너
세상의 갖가지 삿된 그물300)을 밟아 부순 뒤
간절히 밝은 눈을 가진 스승을 만나야 한다.
눈 안에 황금의 가루301)를 붙여 두지 말고,
마음에서 번뇌의 뿌리를 단번에 뽑아내어라.
고해에다 항상 반야302)의 배를 띄우고 있으면,
두 가지 이익303)의 공업(功業)이 나날이 새로우리라.
장부의 공업은 바로 이와 같아야 하니,
이와 같은 뜻을 알기는 맹세코 쉽지 않으리라.
勸君須立丈夫志 此生了報大師
如今正法將欲墜 早續明燈度迷津
踏碎天下群邪網 切須要見明眼人
眼裏莫着黃金屑 心田頓拔煩惱根
苦海常泛般若艇 二利功業日日新
丈夫功業只如是 如是之義誓不容易
299) 미진(迷津). 미혹의 나루터. 해탈의 피안(彼岸)에 대하여 생사윤회가 벌어지는
미혹된 세계인 차안(此岸)을 가리킨다.
300) 사망(邪網). 잘못된 견해에 근거한 가르침을 비유한다. 본래는 고해(苦海)에
빠진 중생을 건져 구제하는 그물이라는 뜻의 교망(敎網)에서 파생된 것이다.
301) 황금설(黃金屑). 훌륭한 말씀을 비유한다. 금가루가 아무리 귀해도 눈에 들어가
면 눈을 가리는 이물질이 되듯이 아무리 탁월한 교설과 이론일지라도 그것에
집착하면 또 하나의 장애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마치 눈동자에 그 어떤 것도
머물면 안 되는 것과 같다. 금가루가 비록 진귀한 보배일지라도 눈에 붙으면 또
한 병이 된다.”(『景德傳燈錄』 권7 「惟寬傳」 大51 p.255b3. 如人眼睛上, 一
物不可住. 金屑雖珍寶, 在眼亦爲病.);“금가루가 비록 귀하다고는 하지만, 눈에
떨어지면 눈을 가리는 이물질이 된다.”(『臨濟語錄』 大47 p.504a1. 金屑雖貴,
落眼成翳.)
302) 般若. prajñā. 팔정도(八正道)·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을 수행하여 나타나게 되
는 진실한 지혜. 여기서는 고해를 건너게 해주는 지혜를 배에 비유한 말이다.
303) 스스로 이롭게 하는 자리(自利)와 남들을 구제하는 이타(利他)를 가리킨다.
● 상선인에게 주는 게송 示詳禪人
그대가 처음 나를 스승으로 삼아 머리를 깎을 때,
그대의 양친은 슬픈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흘렸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산과 같이 무거운데,
출가하도록 허락한 심정을 무엇과 비교하겠는가?
그대는 이와 같은 부모의 은혜를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기를 불 끄듯이 급하게 하라.
그대가 명예와 이익을 구하느라 수행을 멀리하면,
이는 곧 무간304)에 떨어지는 악업의 습기305)가 된다.
사람의 한평생을 누가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안타깝게도 허망한 목숨은 호흡에 매달려 있구나.
그래서 우리의 본사이신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왕위를 버리고 성읍을 벗어나
입산하여 고행의 6년을 보내시는 동안
거미가 눈썹에 그물을 치고 참새는 어깨에 집을 지었고,
갈대 싹이 무릎을 뚫었지만306) 그대로 여유로웠으니,
어디 조금이라도 이익과 명예에 전도된 일이 있었던가!
그대는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이 수행을 배웠으니,
양친과 9족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307)
그대가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고,
다시 머리털 없는 속인이 된다면,
스스로 스승과 부모에 누를 끼쳐
함께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汝初依吾落髮時 雙親感歎便垂泣
父母恩愛重如山 放汝出家情何及
汝知如是父母恩 勤修精進如火急
汝求名利踈道行 便是無間黑業習
人生誰是久長生 可憐浮命在呼吸
是以於我本師尊 捨其王位出城邑
入山苦行示六年 蛛網於眉雀巢肩
蘆芽穿膝任從容 有甚毫釐利名顚
汝今依師學此行 雙親九族必生天
汝違師敎 還作無髮俗
自累師親 同墮無間獄
304) 무간지옥(無間地獄). Avīci. 아비(阿鼻) 또는 아비지(阿鼻旨)라 음사한다. 쉴 틈
도 없이[無間] 괴로움이 이어지는 지옥이라는 뜻이다.
305) 習氣. vāsanā. 줄여서 ‘習’이라고 한다. 갖가지 생각과 행위의 과보로써 훈습된
습관과 성격을 말한다. 고뇌의 직접적인 원인이 사라져도, 그 번뇌의 업으로 인
해 발생한 습기는 남아 있다.
306) 고행하며 곧 성도하기 이전의 깊은 삼매에 들어간 경지를 나타낸다. “앉은 자리
에 풀이 자라 보살의 살을 뚫고 위로 팔꿈치까지 자라났다.”(『觀佛三昧海經』
권1 大15 p.650c3. 見地生草, 穿菩薩肉, 上生至肘.);“뒤에 설산으로 가서 임시
방편으로 고행을 함으로써 마구니와 외도를 아울러 항복시키고, 여러 가지 상을
드러내어 중생을 조복시켰다. 정수리에 까치집을 허용하고, 미간에는 거미줄이
걸려 있으며, 갈대 싹이 무릎에서 자라고, 하얀 곰팡이가 입 주위에 났다.”(『法
界觀門頌』大45 p.694a22. 後乃往詣雪山, 假以苦行, 兼降魔外, 現種種相, 調伏
衆生. 容鵲巢於頂上, 掛蛛網於眉間, 蘆芽長於膝中, 白醭生於口畔.)
307) 자식 하나가 출가하면 9족이 모두 천계(天界)에 태어난다는 동산양개(洞山良
价)의 말에 따른다. 9족은 고조부·증조부·조부·부모·자신·아들·손자·증손
자·현손자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경에 ‘자식 하나가 출가하면 9족이 천계에 태
어난다.’라고 하였으니, 저 양개는 금세의 목숨을 버리고 맹세코 속가로 돌아가
지 않겠나이다.”(『洞山語錄』「辭北堂書」大47 p.516b17. 故經云, ‘一子出家,
九族生天.’ 良价, 捨今世之身命, 誓不還家.)
● 안산군308)부인 묘당에게 示安山君夫人妙幢
308) 安山君. 고려 말 문신 안진(安震 ?~1360)을 말한다.
참선을 하려면 모름지기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도를 배우려면 반드시 마음의 길이 끊어진 경계를 궁구해야 한다.309)
마음의 길이 끊어지는 순간 전체가 나타날 것이니,
물을 직접 마셔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아는 것과 같으리라.
이 경계에 이르면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말고,
반드시 본색종사를 친견하여 그 기틀을 드러내어 보라.
參禪須透祖師關 學道要窮心路斷
心路斷時全體現 如人飮水知冷暖
到此田地莫問人 須參本色呈機看
309) 무문혜개(無門慧開)가 무자 화두를 궁구하는 요령을 가리킬 때 했던 말이다.
『無門關』1則「評唱」大48 p.292c25 참조. 두 번째 구절은 “묘하게 깨달
으려면 반드시 마음의 길이 끊어진 경계를 궁구해야 한다.”(妙悟要窮心路絶)
라고 되어 있지만, 대의는 통한다.
● 일본의 지성선인에게 示日本志性禪人
밝은 태양은 부상310)에서 떠오르니,
그대는 꼭 눈앞의 그것 보기 바라노라.311)
돌이켜 살펴서 분명하게 보고 나면,
다리 아래가 모두 보리의 도량이리라.312)
白日出扶桑 請君須見當
返觀明明了 脚下卽是菩提場
310) 扶桑. 전설상의 나무이지만, 이 나무가 태양이 뜨는 근거지에 있다고 전하므로
태양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동방에 있는 신선국(神仙國)을 나타내기도 한다.
문헌에 따라서는 중국의 동쪽에 있는 섬이라고 하여 현재의 일본이라 보기도
하지만 전설에서 출발한 추정 중 하나이므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탕
곡(湯谷:暘谷·崵谷) 위에는 부상<부상은 나무의 일종이다>이 있는데, 이곳은
열개의 태양이 목욕을 하는 장소로 흑치국(黑齒國)의 북쪽에 있다. 물 중심부에
큰 나무가 있는데 아홉 개의 태양은 아랫가지에 있고 한 개는 윗가지에 있다.”
(『山海經』권9. 湯谷上有扶桑<扶桑, 木也>, 十日所浴, 在黑齒北. 居水中有大
木, 九日居下枝, 一日居上枝.);“부상(浮桑):『회남자』에 ‘부상은 태양이 뜨
는 근거가 되는 장소로서 양곡에서 부상 나무들이 서로 부지함으로써 떠오른
다.’라고 한다. 부(浮)는 부(扶)라고 해야 옳다.”(『祖庭事苑』 권1 卍113 p.9a3.
浮桑:淮南子云, ‘扶桑:日所出也. 在陽谷中, 其桑相扶而生.’ 浮, 當作扶.)
311) 매일 떠오르는 태양을 분명하게 목격할 수 있듯이 곳곳이 도를 실현하는 터전
이라는 뜻을 보이고 있다.
312) 자기 자신이 현실적으로 서 있는 가장 가까운 주변 모두가 깨달음이 실현된 세
계라는 뜻이다. ‘보리의 도량’ 곧 보리장(菩提場 Bodhi-manda)은 보리도량(菩
提道場)을 줄인 말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한 도량을 가리킨다. 중인도
붓다가야( Buddhagayā)에 있는 보리수 아래의 금강좌(金剛座)를 가리킨다.
● 의선인에게 示宜禪人
고금의 근본 지혜를 성취한 이들은
찰나마다 헛된 몸을 알고 있었으니,
헛것이라 알면 곧 헛것을 떠나게 되어,
당당하게 본래의 참된 몸이 드러나리.313)
古今大智人 念念知幻身
知幻便離幻 當當現本眞
313) 이 게송은 전체적으로『원각경』의 다음 취지를 근거로 하고 있다. “헛것이라
알면 즉시 그것을 여의게 되어 수행의 방편을 빌릴 필요가 없으며, 헛것을 여의
게 되면 즉시 깨닫게 되니 또한 점차적으로 올라갈 단계가 없다.”(『圓覺經』
大17 p.914a20.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헛것이라 알고 헛것
을 떠나면 그것이 곧 진실이기에 더 이상의 점차적 방편이 필요 없다는 뜻이다.
● 시사에게 주는 경책 警侍司
팔십 평생 사람의 목숨이여!
봄날 한바탕 꿈꾸는 순간이라.
그대는 이 일을 오래전부터 참구했으니,
앉으나 누우나 산처럼 굳은 뜻 가져라.
八十人生命 一場春夢間
汝曹參此事 坐臥志如山
● 가음명 歌吟銘
태고암가(太古庵歌)314)
314) 태고선사 자신이 거처하던 암자와 그 주변의 풍경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선풍
을 드러내 보인 낙도가(樂道歌)의 일종이다. 이 시 전체에서 ‘태고’는 태고선사
자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만물이 차별화되기 이전의 시기를 나타내기도 한다.
곧 개별적 존재들이 나누어지기 이전의 무차별한 상태이므로 어떤 분별도 통
하지 않는 경계를 말한다. 태고는 이 시를 자신의 스승 석옥청공(石屋淸珙)에
게 보냈는데, 그 답변으로 1347년 8월 1일에 석옥이 붙인 다음과 같은 게송이
전한다. “이 암자가 먼저 있고서야, 비로소 세계가 생겼으니, 세계가 무너질
때도, 이 암자는 무너지지 않으리라. 암자 안의 주인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
고, 달은 아득한 허공을 비추고, 바람은 갖가지 소리를 일으킨다네.” (『太古
語錄』권상 韓6 p.683b4. 先有此菴, 方有世界, 世界壞時, 此菴不壞. 菴中主人,
無在不在, 月照長空, 風生萬籟.)
내 이 암자에 사나 아무도 나를 모르고,
매우 깊고 은밀하지만 옹색하지 않다네.
하늘과 땅을 머금어 앞뒤 구별이 없고,
동서남북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네.
주루와 옥전315)도 이에 비하지 못하고,
달마대사의 선풍 또한 본받지 않았노라.
팔만사천의 법문까지 모두 녹여버리니,
저 구름 너머 청산은 푸르기만 하고,
산 위에 뜬 흰 구름은 희고 또 희며,
산속에 흐르는 샘물은 졸졸 소리 나네.
어떤 사람이 흰 구름의 참 모습 알아볼까?
맑았다 비 내렸다 때때로 번개 치듯 변하네.
어떤 사람이 이 샘물 소리를 알아들을까?
천만 번 굽이돌며 쉼도 없이 흐르네.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이라 해도 벌써 거짓이거늘,
나아가 한마디 하려 들면 더 어지럽게만 된다네.
서리에 시달리고 비를 맞으며 몇 해를 지났던가?
얼마나 쓸모없는 일인지 오늘에야 알았다네.
거친 밥도 지었고 맛난 밥도 만들어 놓았으니,
각 사람마다 좋을 대로 골라 먹게 맡기노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인들316)
암자의 맛없는 음식과 비교하랴?317)
본래 이와 같이 오래 이어져 온 가풍이거늘,
누가 그대와 그 기특함을 따질 수 있으랴?
하나의 털끝에 놓인 태고암이여!
넓은 듯 넓지 않고 좁은 듯 좁지 않다네.
겹겹의 국토들이 이 안에 숨어 있고,
과량기318)가 걷는 길이 하늘을 찌르며 뻗었구나.
삼세의 부처님들도 전혀 알지 못하고,
역대의 조사들도 벗어날 수 없다네.
어리석은 말더듬이 주인공이여!
뒤집어 행했다가 거꾸로 펼치며319) 규범에 매이지 않는구나.
청주의 찢어진 베적삼을 입고,320)
등나무 그림자 안에서 절벽에 기대고 있네.321)
눈앞에는 법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322)
아침저녁 공연히 청산만 마주하고 있다네.
꼼짝하지 않고 일없이 이 노래를 부르니,
달마의 가락은 더욱 단적인 소식323) 전하네.
세상 전체에 누가 함께 이 노래에 화답할까?
영산과 소실324)에서 가만히 박수를 치는구나.
누가 태고의 줄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여,
지금의 구멍 없는 피리소리에 응할까?325)
그대는 모르는가?
태고암에 있는 태고의 일을.
바로 이렇게 지금 분명하고 뚜렷이 드러났고,
무수하게 많은 삼매가 그 안에 들어 있다네.
중생을 이롭게 하고 인연에 응하면서도 항상 고요하니,
이 암자는 노승만 사는 곳이 아니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와 조사가 풍격을 함께하기에,
결정적으로 그대에게 설하니 의심하지 마라.
지혜로도 알지 못하고 분별로도 헤아릴 수 없으니,
빛을 돌려 되돌아보아도 오히려 아득할 뿐이로다.
여여하게 무딘 바위와 같이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것 내려놓고 망상 일으키지 마라.
그것이 바로 여래의 크고 원만한 깨달음이니,
겁의 세월 지나도록 문 밖을 나선 적 있던가?
잠시 지금의 길에 떨어져 머물 뿐이라네.
이 암자는 본래 태고라 하지 않았으니,
오늘의 이 모습을 따라 태고라 한다네.
하나에 일체가 있고 여럿 중에 하나 있으니,
그 하나까지 얻지 못할 때 항상 뚜렷하리라.
모나게도 되고 둥글게도 될 수 있으니,
흐름을 따라 변하는 것마다 모두 깊은 뜻 있도다.326)
그대가 나에게 산속의 풍경에 대하여 묻는다면,
소나무 바람소리 쓸쓸하고 하늘엔 달빛 가득하다 하리라.
도를 닦지도 않고 선을 참구하지도 않으니,
향327)이 다 타고 나면 향로에 연기가 남지 않노라.
다만 걸림 없이 움직이며 이렇게 지낼 뿐,
어찌 구구하게 그렇게 되기를 바라겠는가?
뼛속까지 깨끗하고 뼛속까지 가난하니,
살림살이는 위음왕불 이전328)에 두고 왔다네.
평상시에 늘 태고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무쇠소를 거꾸로 타고 인계와 천계에서 노닌다.
어린아이가 자세히 보고 온갖 기량을 다 부렸지만,
끌고 가지 못하여 부질없이 눈꺼풀이 뚫어져라 쳐다본다네.329)
암자 안의 부끄러운 모습은 다만 이 정도일 뿐이니,
알면 될 일을 어찌 거듭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춤도 마치고 곡조도 거두어 돌아간 다음에,
청산은 이전 그대로 숲과 샘물을 마주하고 있도다.
吾住此庵吾莫識 深深密密無壅塞
函盖乾坤沒向背 不住東西與南北
珠樓玉殿未爲對 少室風規亦不式
爍破八萬四千門 那邊雲外靑山碧
山上白雲白又白 山中流泉滴又滴
誰人解看白雲容 晴雨有時如電擊
誰人解聽此泉聲 千回萬轉流不息
念未生時早是訛 更擬開口成狼籍
經霜勁雨幾春秋 有甚閑事知今日
麤也飡細也飡 任儞人人取次喫
雲門胡餠趙州茶 何似庵中無味食
本來如此舊家風 誰敢與君論寄特
一毫端上太古庵 寬非寬兮窄非窄
重重刹土箇中藏 過量機路衝天直
三世如來都不會 歷代祖師出不得
愚愚訥訥主人公 倒行逆施無軌則
着卻靑州破布衫 藤蘿影裏倚絶壁
眼前無法亦無人 旦暮空對靑山色
兀然無事謌此曲 西來音韻愈端的
徧界有誰同唱和 靈山少室謾相拍
誰將太古沒絃琴 應此今時無孔笛
君不見 太古庵中太古事
只這如今明歷歷 百千三昧在其中
利物應緣常寂寂 此菴非但老僧居
塵沙佛祖同風格 決定說君莫疑
智亦難知識莫測 回光返照尙茫茫
如如不動如頑石 放下着莫妄想
卽是如來大圓覺 歷劫何曾出門戶
暫時落泊今時路 此菴本非太古名
乃因今日云太古 一中一切多中一
一不得中常了了 能其方亦其圓
隨流轉處悉幽玄 君若問我山中境
松風蕭瑟月滿天 道不修禪不參
水沈燒盡爐無煙 但伊騰騰恁麽過
何用區區求其然 徹骨淸兮徹骨貧
活計自有威音前 閑來浩唱太古歌
倒騎鐵牛遊人天 兒童觸目盡伎倆
曳轉不得徒勞眼皮穿
菴中醜拙只如許 可知何必更重宣
舞罷三臺歸去後 靑山依舊對林泉
315) 주루(珠樓)는 화려한 누각(樓閣), 옥전(玉殿)은 궁전(宮殿)을 아름답게 수식하여
이르는 말이다.
316) 두 화두가 유래된 문답은 다음과 같다.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부처와 조사를
넘어서는 경지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이 ‘호떡이다.’라고 대답했다.”
(『雲門廣錄』권상 大47 p.548b5. 僧問雲門, ‘如何是超佛越祖之談?’ 門云, ‘餬
餅.’);“조주가 처음 찾아온 학인에게 물었다.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와
본 일이 있습니다.’ ‘차나 마시게.’ 같은 질문을 다른 학인에게 하자 그가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주는 이번에도 ‘차나 마시게.’라고 말했다.
후에 원주(院主)가 물었다. ‘어째서 와 보았다 해도 「차나 마시게」라고 하고,
와 보지 않았다 해도 「차나 마시게」라고 하십니까?’ 조주가 ‘원주!’하고 부르
자 원주가 ‘예!’라고 대답했다. 조주가 말했다. ‘차나 마시게.’”(『五燈會元』
권4「趙州從諗章」卍138 p.131b17. 師問新到, ‘會到此間麽?’ 曰, ‘會到.’ 師曰,
‘喫茶去.’ 又問僧, 僧曰, ‘不會到.’ 師曰, ‘喫茶去.’ 後, 院主問曰, ‘爲甚麽會到也,
云喫茶去, 不會到也, 云喫茶去?’ 師召院主, 主應喏, 師曰, ‘喫茶去.’
317) 어떤 인식 수단이나 분별의 관념으로도 맛볼 수 없는 화두를 나타낸다. 비단 태
고의 암자에만 이 화두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운문의 호떡과 조주의 차도 모두
아무 맛도 없는 화두인 것이다. 아무 맛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입을 벌리고 먹거
나 말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동산의 이 안에서는 말에도 맛이 없고 음
식에도 맛이 없으며 법에도 맛이 없으니, 맛이 없는 구절이 사람들의 입을 틀어
막았던 것이다.”(『洞山守初語錄』古尊宿語錄38 卍118 p.647a7. 蓋緣洞山這裏,
言無味, 食無味, 法無味, 無味之句, 塞斷人口.)
318) 過量機. 어떤 헤아림의 척도로도 잴 수 없는 ‘탁월한 사람’을 말한다.
319) 도행역시(倒行逆施). 정해진 법도와 규범에 속박되지 않고 정해진 틀을 거스르
며 역량을 발휘하는 선사의 자유자재한 작용을 나타낸다.
320) 조주(趙州)의 다음 화두를 활용한 구절이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물었다. ‘모
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趙州語錄』古尊宿語
錄 13 卍118 p.318b9. 問, ‘萬法歸一, 一歸何所?’ 師云, ‘我在靑州, 作一領布衫,
重七斤.’)
321) 조주의 ‘베적삼 화두’를 들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절벽 끝, 곧 말과 분별이 끊
어진 경지에 이르도록 궁구한다는 뜻이다. 대혜종고(大慧宗杲)는 이 화두에 대
하여 “납자들이 머리를 모으고 그 핵심적인 뜻을 찾지만, 모기와 등에가 쇠못에
부리를 꽂고 빠는 것과 같다.”(『大慧語錄』 권4 大47 p.828a4. 衲子聚頭求的旨,
却似蚊虻咬鐵釘.)라고 평가했다. 아무리 빨아도 모기는 한 방울의 피 맛도 볼 수
없다. 이것은 화두의 본질을 나타낸 말인 동시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철벽이기
도 하다.
322) 객관으로서의 법과 주관으로서의 사람 등 두 가지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다는
뜻. 곧 법집(法執)과 인집(人執:我執)이 없다는 말이다.
323) 단적(端的). 다양한 방편에 의지하지 않고, 곧바로 핵심이 되는 종지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324) 영산(靈山)은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법을 전했던 곳, 소실(少室)은 달마대
사가 살던 소림사(少林寺)의 거처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선종이 발흥했던 상징
적 장소이다.
325) 줄 없는 거문고와 구멍 없는 피리로 지시하려는 의미는 모두 같다. 두 가지 모두
악기로서 소리를 낼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이들은 태고부터 지금까지 소리나 말
로 드러나기 이전의 소식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326) 변하는 것은 일체(一切)·다(多), 깊은 뜻[幽玄]은 일(一)에 상응한다.
327) 수침(水沈).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향이다.
328) 眞覺語錄 주석191) 및 白雲語錄 주석250) 참조.
329) 눈꺼풀이 뚫어져라 쳐다본다[眼皮穿]는 말은 자신이 가진 기량을 모두 써먹었
어도 끌고 갈 도리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을 묘사한다. 모든 분별의 수단이 소진
된 경계를 나타낸다. “어떤 학인이 물었다. ‘세존께서 12월 8일에 정각을 이루시
고, 산 앞에서 새벽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셨다는데, 이 뜻은 어떤 것입니
까?’ 서암수가 게송으로 답했다. ‘샛별이 나타난 곳을 눈꺼풀이 뚫어져라 쳐다
보고, 이치에 닿지도 않는 소리를 무수하게 하는구나. 졸지에 부자가 된 거지여,
꿈 이야기는 하지 마라. 어느 집 부엌에 연기 없는 불이 나겠는가?’”(『續傳燈錄』
권35「瑞岩壽傳」大51 p.708c7. 因僧問, ‘世尊臘月八日正覺, 山前夜覩明星悟道,
此意如何?’ 師答以偈曰, ‘明星現處眼皮穿, 漢語胡言萬萬千. 暴富乞兒休說夢, 誰家
竈裏火無煙.’)
참선명(參禪銘)
세월은 번갯불과 같이 빠르게 가니,
흘러가는 시간이 자못 안타깝도다.
삶과 죽음은 호흡에 달려 있으니,
하루아침과 저녁도 보장하지 못한다.
가거나 머물고 앉거나 눕는 사이에,
짧은 시간도 헛되게 내버리지 마라.
용맹함에 더욱 용맹함을 덧붙여서,
우리 본사인 석가모니와 같이 하고,
정진하고 또 다시 정진하여,
마음에 뚜렷함과 고요함을 고르게 갖추어라.
부처님과 조사의 뜻을 깊이 믿고,
그 단적인 소식330)을 반드시 가려내라.
마음 자체가 타고난 그대로 부처이거늘,
어찌 애써 밖에서 찾는가?
만사의 집착을 내려놓고 살펴보면,
모든 길이 막혀 철벽과 같으리라.331)
망념이 모두 소멸하여 사라지고,
사라진 것을 다시 지워 없애면,
몸과 마음을 허공에 맡긴 것과 같아,
고요한 빛이 번득이게 되리라.
본래면목은 무엇일까?
제기하자마자 화살이 돌에 박히듯 하여,
의심덩어리가 산산이 부서지면,
하나의 그 무엇이 하늘을 덮으리라.
지혜가 없는 자에게 말하지 말고,
또한 기쁜 마음을 일으키지도 말며,
반드시 종사를 만나서
기틀을 드러내고 다시 가르침을 청하라.
그런 다음에야 조사를 계승했다 할 만하여,
가풍이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으리라.
피곤하면 다리 뻗고 자고
배고프면 입맛 나는 대로 먹으리니,
누군가 그것이 무슨 종지인가 물으면,
빗방울 떨어지듯이 방과 할을 퍼부어라.
日月似電光 光陰良可惜
生死在呼吸 難以保朝夕
行住坐臥間 寸景莫虛擲
勇猛加勇猛 如我本師釋
精進復精進 心地等惺寂
深信佛祖意 須要辨端的
心卽天眞佛 何勞向外覓
放下萬事看 路窮如鐵壁
妄念都滅盡 盡處還抹卻
身心如托空 寂然光達赫
本來面目誰 纔擧箭沒石
疑團百雜碎 一物蓋天碧
莫與無智說 亦莫生悅懌
須訪見宗師 呈機復請益
然後名繼祖 家風不偏僻
困來展脚眠 飢來信口喫
人問是何宗 棒喝如雨滴
330) 주석323) 참조.
331) 분별의 길이 막혀 화두가 타파되기 직전의 경계를 말한다. 주석286) 참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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