菩薩戒本持犯要記 보살계본지범요기
보살계본지범요기 菩薩戒本持犯要記1)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新羅國沙門 元曉述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1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pp.581a1~
585c17)된『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은 고야산대학(高野山大學)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보살계본지
범요기』이고, 을본(乙本)은『대정신수대장경』제45권에 수록된『보살계본지범
요기』이고, 병본(丙本)은 『대일본속장경』제1편 61투 3책에 수록된『보살계본지
범요기』이다.『한국불교전서』에서는 을본(乙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1. 서문
보살계2)란 흐름을 돌이켜 본원으로 돌아오는 큰 나루이며, 삿된 것을 버
리고 바른 데로 나아가는 핵심 문이다.
菩薩戒者, 返流歸源之大津, 去邪就正之要門也.
2) 보살계(菩薩戒)는 대승의 보살이 받아 지니는 계로서, 보살십선계(菩薩十善戒)
가 있다. 그리고 모든 계를 받아 지키는 계[攝律儀戒], 모든 선법을 닦는 계[攝善
法戒],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계[攝衆生戒]로 구성되는 삼취정계(三聚淨戒)가
대표적이다. 이를 담고 있는 계본으로는『범망경(梵網經)』계열과『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계열의 것이 널리 유통된다.『유가사지론』계열의 계본은 현장(玄
奘, 600~664)이 번역한『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본지분(本地分) 중「보살지초
지유가처계품(菩薩地初持瑜伽處戒品)」에 해당하는 계본으로, 북량(北涼)의 담무
참(曇無讖, 385~433)이 번역한『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과 유송(劉宋)의 구나
발마(求那跋摩, ?~431)가 역출한『우바새오계위의경(優婆塞五戒威儀經)』,『보살
선계경(菩薩善戒經)』등이 이에 속한다.『범망경』계열의 계본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범망경(梵網經)』중 하권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축불념(竺佛念)이 번역한『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도 여
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삿됨과 바름의 양상은 혼동되기 쉬우며, 죄와 복의 자성은 분별하
기 어렵다. 왜냐하면, 혹은 속뜻은 사실 삿되지만 바깥 행적은 바른 듯하며,
어떤 이는 드러난 업은 물든 것 같지만 속마음은 순박하고 깨끗하며, 혹은
업이 적은 복을 받게는 하나 큰 환란을 부르기도 하며, 어떤 이는 마음과 행
동이 깊고 먼 것은 따르면서도 얕고 가까운 것은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속되기만 한 도인이나 삿되기만 한 사문은 늘 [성인의 행적과] 비슷한 행
적만 오로지하여서 참된 바름을 잃고, 언제나 심오한 계를 훼손하며 비속한
행을 추구한다. 이제 비속한 일은 떨쳐버리고 심오한 [계]를 온전히 하며,
비슷한 행적을 버려서 진실됨을 좇고자 한다. 스스로 잊어버리지 않도록 핵
심을 뽑아서 적으니, 뜻을 같이 하는 자는 자세히 살펴 결단하기를 바란다.
然邪正之相易濫, 罪福之性難分. 何則, 或內意實邪, 而外迹似
正, 或表業同染, 而中心淳淨, 或有作業合少福, 而致大患, 或
有心行順深遠, 而違淺近. 是以專穢道人, 剋私沙門, 長專似迹
以亡眞正, 每剋深戒而求淺行. 今將遣3)淺事而全深, 去似迹而
逐實. 爲自忽忘撮要記別, 幸同趣者, 詳而取決矣.
3) 저본에는「遺」로 되어 있지만, 다른 교감본에 따라「遣」으로 바꾸었다.
2. 본문
지님과 범함의 요점에는 세 문이 있으니, 첫째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
이며, 둘째는 얕음과 깊음의 문이며, 셋째는 구경의 지님과 범함을 밝히는
문이다.
持犯之要 有三門, 一輕重門, 二淺深門, 三明究竟持犯門也.
1)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輕重門]
첫째 문에 두 구절이 있으니, 앞은 곧 가벼움과 무거움을 총괄적으로 가
리고 뒤는 차별을 따로 나타낸다.
初門之內, 有其二句, 先卽總判輕重, 後以別顯差別.
총괄적으로 가린다고 말한 것은, 가벼운 허물의 죄 중에서 자잘한 차이
를 자세히 논한다면 항목이 이에 팔만 사천이 있으나,4) 그 주요한 것을 묶
어서 열거하면 달리 세 종류가 있다. 혹은 마흔네 가지이니『달마계본(達
磨戒本)』5)에서 설한 것과 같고, 혹은 마흔여덟 가지이니『다라계본(多羅戒
本)』6)에서 가린 것과 같고, 혹은 이백마흔여섯 가지의 가벼운 것이 있으니
『별해탈계경(別解脫戒經)』7)에서 세운 것과 같다. 이 두 번째8)에는 공통된
것과 공통되지 않은 것이 있으니, 공통된 것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은 글에
의거해서 알 수 있다.9)
言總判者, 輕10)垢罪中, 細論支別, 頭類乃有八萬四千, 括擧其
要, 別有三類. 或四十四, 如達摩戒本所說, 或四十八, 如多羅
戒本所判, 或有二百四十六輕, 如別解脫戒經所立. 此第二中,
有共不共, 共不共相, 依文可解.
4) 가벼운 죄의 항목수와 관련하여『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등에서는
가벼운 계를 팔만사천 가지라고 하고 있다.(大24 p.1021b10~19)
5)『달마계본(達磨戒本)』은『유가사지론』본지분(本地分) 중「보살지초지유가처계
품(菩薩地初持瑜伽處戒品)」에 해당하는 계본이다. 이 계본의 이역(異譯)으로는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 385~433)이 번역한『보살지지경(菩薩地持經)』의
권4를 따로 별행한『보살계본』과 당(唐)의 현장(玄奘, 600~664)이 번역한『보살
계본』, 그리고 유송(劉宋)의 구나발마(求那跋摩, ?~424~431)가 역출한『우바새
오계위의경(優婆塞五戒威儀經)』과『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이 있는데 중계(重
戒)와 경계(輕戒) 항목수에 차이가 있다. 이 중 본문의 ‘마흔네 가지’라는 항목으
로 보아 현장의 것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6)『다라계본(多羅戒本)』은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 번역한
『범망경(梵網經)』의 하권, 즉「범망경노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梵網經盧舍那佛
說菩薩心地戒品)」을 일컫는다. 여기에서는 10종의 중계(重戒)와 48종의 경계(輕
戒)에 대해 설하고 있다.
7)『별해탈계경(別解脫戒經)』은 곧『계본(戒本)』을 일컫는 것으로, 5계(戒)・10계・
구족계(具足戒) 등을 받아 지녀서 몸・입・뜻으로 짓는 악업(惡業)을 하나하나
소멸시키는 것을『계본』이 설하기 때문에『별해탈계경』이라고도 한다.
8) 두 번째는『다라계본(多羅戒本)』을 가리킨다.
9) 공통된 것과 공통되지 않은 양상이란 가벼운 죄 중에서『다라계본』과 소승계와
의 공통여부를 의미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글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는 것은
『다라계본』과 소승계, 예를 들어『사분율』을 비교하면 알 수 있다는 뜻으로 생
각된다.
10) 저본에는 「重」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重」을 삭제하였다.
무거운 계 중에서 총괄적으로 설하면 열 가지11)가 있다. 그 종류의 다름
을 논하면 또한 세 가지가 있다. 혹은 소승과 공통되는 무거운 [계]가 있으
니 앞의 네 가지12)를 말하며, 혹은 [소승과] 공통되지 않는 무거운 [계]가
있으니 뒤의 네 가지13)를 말하며, 혹은 재가보살의 여섯 가지 무거운 [계]
를 세우니 열 가지 무거운 [계] 안에 앞에 있는 여섯 가지14)를 말한다. 이
중에는 [소승과] 공통되는 것15)과 공통되지 않는 것16)이 합해 있다. 가벼움
과 무거움의 뜻의 종류를 총체적으로 가린 것이 이와 같다.17)
重戒之中, 總說有十. 論其類別, 亦有三種. 或有共小之重, 謂
前四也, 或有不共之重, 謂後四也, 或立在家菩薩六重, 謂十重
內在前六也. 此中合有共與不共. 總判輕重義類如是.
11) 열 가지란『범망경』에서 설하는 열 가지 중계(重戒)를 말한다. 곧 ①살생하지 말
라는 계[不殺戒], ②훔치지 말라는 계[不盜戒], ③음행하지 말라는 계[不婬戒],
④거짓말하지 말라는 계[不妄語戒], ⑤술을 마시거나 팔지 말라는 계[不酤酒戒],
⑥재가·출가의 보살 및 비구·비구니의 죄과를 말하지 말라는 계[不說過罪戒],
⑦자기를 높이고 타인을 비방하지 말라는 계[不自讚毁他戒], ⑧인색하지 말라는
계[不慳戒], ⑨화내지 말라는 계[不瞋戒], ⑩삼보를 비방하지 말라는 계[不謗三
寶戒]이다.(大24, pp.1004b~1005a)
12) 앞의 네 가지는 곧 소승계와 공통되는 무거운 계로서, 앞의 열 가지 중계 중에
서 제1 불살계부터 제4 불망어계까지이다. 원효의『범망경』주석서인『범망경
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도 제1계부터 제4계를 소승계와 공통
된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범망경보살계본사기』는 이어서 제5계와 제7계도
소승계와 공통된다고 밝히고 있어서 약간의 상이점이 발견된다.(韓1, p.600a20 ;
p.601b10)
13) 뒤의 네 가지는 곧 소승계와 공통되지 않는 무거운 계로서 ‘뒤의’라는 말에 의해
우선 앞의 열 가지 중계 중에서 제7 불자찬훼타계부터 제10 불방삼보계까지라
고 생각해볼 수 있다. 신엔(眞円)이 저술한『보살계본지범요기조람집(菩薩戒本
持犯要記助覧集)』에서도 이와 같이 제7계부터 제10계라고 밝히고 있다.(日本大
藏經21, p.75a) 하지만『범망경보살계본사기』에서는 제7계가 소승계와 공통된다
고 밝히고 있다.(韓1, p.601b10) 이를 고려하면 제6, 제8, 제9, 제10계를 공통하지
않는 계로 볼 수도 있지만, 제6계는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재가보살의 무거운
계에 따로 포함되므로 이 또한 합당하지 않다.
14) 여섯 가지는 앞의 열 가지 중계 중에서 제1 불살계부터 제6 불설과죄계까지이다.
15) 공통되는 것은 앞의 열 가지 중계 중에서 제1 불살계부터 제4 불망어계까지이다.
16) 공통되지 않는 것은 앞의 열 가지 중계 중에서 제5 불고주계와 제6 불설과죄계
로 생각되며『보살계본지범요기조람집』에서도 그렇게 주석하고 있다.(日本大藏
經21, p.75b)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범망경보살계본사기』에서는 제5계를 소승
과 공통되는 계로 해석하고 있어서 상이점이 발견된다.(韓1, p.600a20)
17) 여기에서 밝힌 소승의 무거운 계와 공통되고 공통되지 않음을 밝힌 내용이 원
효의 다른 보살계 관련 저술인『범망경보살계본사기(梵網經菩薩戒本私記)』에서
설하고 있는 부분과 다르다.
만약 차별을 밝힌다면, 이제『달마계본』에 의해서 그 체성과 양상의 차
별을 분별한다. 글에서 “어기고 범함이 있음, 물듦과 물들지 않음, 하품[耎
品]·중품·상품18)에 대해 마땅히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19)고 하였다. 탐욕
과 연민은 비록 지은 업은 같지만 범함과 범하지 않음이 다르다. 범함이 있
다고 하는 것은 네 가지 인20)으로 말미암아 범한 여러 일들이고, 어기고 범
함이 없다는 것은 세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지은 여러 일들이다. 세 가지
연이란 무엇인가? 만약 그 마음이 증상만21)으로 미쳐서 혼란스럽거나, 무
거운 고통으로 핍박받고 있거나, 아직 깨끗한 계와 율의 위의를 받지 않았
다면, 이 세 가지는 범함이 없는 것이니 모든 계에 통한다22) .범함이 없음을
별도로 논한 것은 글에서 널리 설한 것과 같다.23)
若明差別者, 今依達摩戒本, 辨其性相差別. 文言, “於有違犯,
是染非染, 耎中上品, 應當了知.” 欲悲雖所作業同, 而犯無犯
異. 言有犯者, 謂由四因所犯諸事, 無違犯者, 謂由三緣所作諸
事. 三緣是何? 謂若彼心增上狂24)亂, 若重苦受之所逼切, 若
未曾受淨戒律儀, 此三無犯, 通一切戒. 別論無犯, 如文廣說.
18) 하품·중품·상품은 계를 어기고 범하는 정도에 따른 분류이며, 상품이 가장 계
를 심하게 범한 경우이다. 연품(耎品)은 하품(下品)과 같은 뜻이다.
19)『유가사지론』제41권에는 ‘어기고 범함이 있음’ 다음에 ‘어기고 범함이 없음’이
함께 열거되어 있다.(大30, p.516a8~9. 於有違犯及無違犯, 是染非染, 軟中上品.)
20) 네 가지 인[四因]은『유가사지론』의「섭사분(攝事分)」에서 밝힌 것이다. 즉,
죄를 범하는 원인으로, 첫째는 어리석기 때문이고, 둘째는 게으르기 때문이고,
셋째는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이고, 넷째는 경솔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설하고
있다.(大30, p.870a)
21) 증상만[增上]이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하거나, 자신에 대해 현재의
가치 이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22) 세 가지 연[三緣]에 대한 설명은『유가사지론』제41권의 구절을 인용한 것이
다.(大30, p.521a9)
23) 글이라고 한 것은『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보살지초지유가처계품(菩薩地
初持瑜伽處戒品)」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범함이 있음과 없음, 그리고 물듦과
물들지 않음을 다양한 경우에 대해서 상술하고 있다.
24) 저본에는「誑」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狂」으로 바꾸었다.
범함이 있는 것 중에 그 두 가지 무리25)가 있다. 무거움 안에 하품과 중
품과 상품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고, 가벼움 중에서 물듦과 물들지 않
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통틀어서 논하면, 네 가지 인 가운데 만약 어리
석음으로 말미암거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서 지은 여러 죄는 물든 것이 아
니고, 만약 번뇌가 치성하거나 경솔하고 교만함으로 말미암아 지은 여러
죄는 물든 것이다. 물듦과 물들지 않은 것을 별도로 논한 것은 또한 글에
의거하여 알 수 있다.
於有犯中, 有其二聚. 重內應知耎中上品, 輕中當識是染非染.
通而論之, 四因中, 若由無知, 及由放逸, 所犯衆罪, 是不染汚,
若煩惱盛, 及由輕慢, 所犯衆罪, 是其染汚. 別論染不染者, 亦
依本文可知.
25) 그 두 가지 무리란 계를 범하는 것 중에 ‘상품·중품·하품’과 ‘물듦과 물들지 않
음’의 두 무리가 있다는 의미이다. 이 중 ‘상품·중품·하품’은 무거움 내에서의
분류이고, ‘물듦과 물들지 않음’은 가벼움을 구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비록 그렇지만 한두 가지로 논한다면, 우선 처음의
계26)를 취하여서 그 양상을 보이고자 한다. 처음 칭찬하고 헐뜯음에 네 가
지 차별이 있다. 만약 저들로 하여금 신심으로 나아가도록 한 까닭에 자기
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었다면 이것은 복이지 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게으
름과 무기심으로 인한 까닭에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었다면 이것은
범한 것이지만 물든 것은 아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 대해서 좋아함과 성내
는 마음이 있어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으면 이것은 물든 것이지만
무거운 것은 아니다. 만약 이익과 공경을 탐하여 구하기 위해서 자기를 칭
찬하고 남을 헐뜯으면 이것은 무거운 것이며 가벼운 것이 아니다.
凡說雖然, 一二論者, 且就初戒, 以示其相. 於一讚毀, 有四差
別. 若爲令彼, 赴信心故, 自讚毀他, 是福非犯. 若由放逸無記
心故, 自讚毀他, 是犯非染. 若於他人, 有愛恚心, 自讚毀他,
是染非重. 若爲貪求利養恭敬, 自讚毀他, 是重非輕.
26) 처음의 계란『달마계본』에서 네 가지 무거운 죄 중에 첫 번째인 ‘자기를 칭찬
하고 남을 헐뜯음[自讚毁他]’을 뜻한다.[『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권40(大30
p.515b)]
27) 무기심(無記心)이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유루법(有漏法)이다. 분류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으나 대표적으로 성도(聖道)를 방해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따라서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무부무기(無覆無記)로 나뉜다. 여기에
서는 번뇌와 상응하여 범함이 있으므로 유부무기를 말한다.
네 번째 중에 세 품이 있으며, 세 가지가 되는 이유에 또한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일로 말미암은 까닭과 번뇌[纏]로 말미암은 까닭이다.
번뇌로 인한 까닭이란, 만약 번뇌가 현행하더라도 극도로 날카롭지 않아
서 간혹 부끄러워함을 일으키면 이것은 하품[耎品]이고, 비록 극도로 날카
로워서 부끄러워함이 없더라도 덕이 된다고 보지 않으면 오히려 중품에 있
으며, 도무지 부끄러워함이 없이 깊이 사랑하고 좋아해서 이것을 공덕이라
고 보면 상품이라고 이름한다.
第四之中, 有其三品, 成三之由, 亦有二途, 謂由事故, 及由纏故.
由纏故者, 若纏現行, 非極猛利, 或發慚愧, 是爲耎品, 雖極猛
利, 無慚無愧, 未見爲德, 猶在中品, 都無慚愧, 深生愛樂, 見
是功德, 是名上品.
일로 말미암은 까닭이란, 만약 개별적인 사람을 헐뜯으면 하품이 되고,
한 무리를 헐뜯으면 곧 중품이고, 널리 많은 이들을 헐뜯으면 이에 상품이
된다. 상품의 안에 죄가 한 가지가 아니어서 그것을 따라 분별하기 어렵지
만 간략히 세 쌍으로 나타낸다. 불법 안의 사람이 흔히 삼학(三學)28)에 의
지하다가 불도와 비슷한 마구니의 일을 일으키기 때문이니, 마치 사자 몸
안의 벌레가 곧 사자를 먹고 나머지는 먹을 수 없기 때문인 것과 같다.29)
由事故者, 若毀別人, 是爲耎品, 若毀一衆, 卽是中品, 普毀衆
多, 乃爲上品. 上品之內, 罪非一端, 隨其難別, 略示三雙. 佛
法內人, 多依三學, 起似佛道之魔事故, 猶如師子身內之虫, 乃
食師子, 餘無能故.
28) 삼학(三學, tisrah-śiksā)은 불도(佛道) 수행자가 닦아야 할 계학(戒學)・정학(定
學)・혜학(慧學)을 가리킨다. 계학은 몸・입・뜻으로 짓는 악업을 방지하고 선업을
닦으며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정학은 잡념을 제거하여 마음을 적정하게 하
는 것이며, 혜학은 지혜를 증장하여 번뇌를 끊고 모든 실상을 보는 것이다.
29) 아무도 백수(百獸)의 왕인 사자를 잡아먹을 수 없지만, 몸 안의 벌레에 의해서
죽을 수 있다는 의미로, 불법은 외도보다 불법 내부에 의해서 무너진다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첫 번째 쌍은 심학(心學)에 의한 것이니, 두 종류의 벌레가 있어서 불법
을 먹어 없앤다. 첫째는 탐욕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둘째는 교만을 말미암
은 까닭이다.
탐욕을 말미암은 까닭이란, 만약 한 무리가 고요한 곳에 한가히 머물며
모든 산란을 여의고 마음을 선문에 거두어 두면, 마음이 맑고 고요하기 때
문에 견식이 있는 듯하거나, 혹은 삿된 신통력이 도와서 알게 해준다. 이
때에 스스로 들은 것이 적음을 말미암아 삿됨과 바름을 구별하지 못하고,
또 명예와 이익과 공경을 끌어 들이고자 하여, 보고 아는 대로 다른 이들에
게 들려주고 알려줘서 모든 세상 사람들을 비추어, 모두 성인인가 하고 의
심한다. 이는 성인과 비슷한 행적을 홀로 드날림으로써 널리 여러 승려들
을 억누르고 귀의할 수 없게 만들어서 불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거운 죄
가 되니, 이를 모든 승려들의 큰 도적이라고 일컫는다.
第一雙者, 依於心學, 有二類虫, 食滅佛法. 一由貪故, 二由慢
故. 由貪故者, 如有一類, 閑居靜處30), 離諸散亂, 攝心禪門,
由心澄靜, 髣髴有見, 或由邪神加力令識. 于時由自少聞, 不別
邪正, 又欲引致名利恭敬, 隨所見識, 令他聞知, 耀諸世人, 咸
疑是聖. 此由獨揚似聖之迹, 普抑諸僧, 爲無可歸, 以破佛法,
故得重罪, 是謂諸僧之大賊也.
30) 저본에는「慮」로 되어 있지만, 을본의 각주와 병본에 따라「處」로 바꾸었다.
교만을 말미암은 까닭이란, 만약 한 무리가 깊은 산에 오래 머물러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으로 고요한 업을 닦으면, 마구니가 그 마음을 움직여 무
너뜨릴 수 있음을 알고서 공중에서 소리를 내어 그 소행을 찬탄한다. 그 사
람은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높다는 마음[自高心]을 일으켜 널리 모든 승려
들을 억누르며, “인간 세상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누가 마땅히 너희들의 소
행을 칭찬하고 찬미하겠는가?”라고 한다. 이 사람의 죄는 앞의 것31)보다 더
욱 무거우니, 이를 보살의 전다라32)라고 한다.
由慢故者, 如有一類, 長住深山, 有所得心, 修寂靜業, 魔知彼
心可以動壞, 發空中聲, 讚其所行. 其人由是, 起自高心, 普抑
諸僧,“ 住人間者, 誰當稱美爾等所行?” 此人罪過重於前者,
是謂菩薩旃陀羅也.
31) 앞의 것이란 탐욕을 말미암은 까닭에 짓는 죄를 의미한다.
32) 전다라(旃陀羅, candāla)는 백정이나 포악한 사람을 뜻한다. 인도의 카스트 제
도에서 수드라(śūdra) 아래의 최하위 계급을 일컫는다. 여기에서 보살의 전다라
는 보살이라 할 수 없는 보살을 가리킨다.
두 번째 쌍은 계학(戒學)에 의한 것이니, 두 종류의 벌레가 있어서 불법
을 먹어 없앤다. 첫째는 삿된 계를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바른 계를 지키
는 것이다.
삿된 계를 지키는 것이란, 만약 한 무리가 성품이 곧고 바르지 못해서 혹
은 삿된 계를 잇거나 혹은 스스로 삿되게 생각하여, 비단과 삼베 옷을 입지
않고 오곡을 먹지 않으면서 도리어 이양과 공경을 탐하여 구하고자 한다.
스스로 견줄 이가 없다고 찬양하며 모든 어리석은 무리들을 속여서 뭇 어
리석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덕을 우러르기를 희망하고, 널리 모든 기이
한 행적이 없는 자들을 억누른다. 이로 인해 안으로는 참됨을 손상시키고,
밖으로는 사람들을 혼란시키니, 손상시키고 혼란시키는 죄가 이보다 앞서
는 것이 없다.
第二雙者, 依於戒學, 有二類虫, 食滅佛法. 一坐邪戒, 二坐正
戒. 坐邪戒者, 如有一類, 性33)非質直, 或承邪戒, 或自邪念,
不衣絲麻, 不食五穀, 反34)欲貪求利養恭敬. 自揚無比, 誑諸癡
類, 希望群愚咸仰己德, 普抑一切無異迹者. 由是內以傷眞, 外
以亂人, 傷亂之罪, 莫是爲先也.
33) 저본에는「生」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교감본에 따라「性」으로 바꾸었다.
34) 저본에는「變」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反」으로 바꾸었다
바른 계를 지키는 것이란, 만약 한 무리가 성품이 천박하여 세상의 큰 흐
름이 많이 교만하고 느슨해진 때에, 홀로 그 몸을 바로 하고 위의(威儀)에
결함이 없이 하고는 문득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서, 승급(乘級)은 급하게 하나 계는 느슨하게 하는 대중을 교만하게 헐뜯는
다. 이 사람은 작은 선을 온전히 해서 큰 금계(禁戒)를 무너뜨렸으니, 복이
바뀌어서 화가 되는 것이 이것보다 심한 것은 없다.
坐正戒者, 如有一類, 性是淺近, 於世大運, 多慢緩時, 獨正其
身, 威儀無缺, 便起自高陵他35)之心, 慢毀乘急戒緩之衆. 此人
全其小36)善, 以毀大禁, 轉福爲禍, 莫斯爲甚也.
35) 저본에는「湋池」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陵他」로 바꾸었다.
36) 저본에는「不」로 되어 있지만, 저본의 각주와 병본에 따라「小」로 바꾸었다.
묻는다. 삿된 계의 죄는 마땅히 설한 바와 같지만, 바른 계를 지니는 것
이 어떻게 반드시 죄가 되는가? 그 까닭은 만약 한 무리가 안으로 모든 번
뇌가 없고 다른 사람의 지음과 짓지 않음을 자세히 보지 않고 오직 자기의
마음만을 살펴서 홀로 바른 계를 지킨다면, 이와 같은 보살이 어떤 이유로
범하는 것이 되겠는가?
답한다. 만약 물든 마음이 없다면 앞에서 설한 것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
러나 이 사람에 대해서도 또한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
問. 邪戒之罪, 應如所說, 持正戒者, 何必是罪? 所以然者, 如
有一類, 內無諸纏, 不觀餘人作與不作, 唯察自心, 獨持正戒,
如是菩薩, 何由成犯?
答. 若無染心, 不在前說. 而於此人, 亦當分別.
만약 홀로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모든
승려들을 복전이 아니라고 말하게 하고, 이양과 존중을 치우쳐 자기에게만
돌아오게 한다면, 비록 성문의 스스로 제도하는 마음의 계는 따르지만 보
살의 광대한 마음의 계는 거스르는 것이다. 마치 성문의 무상(無常) 등의
관37)이 비록 얕은 일에는 전도됨이 없지만 법신에는 곧 전도된 것과 같으
니, 마땅히 이 중에서 따르고 거스름이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若由獨淨, 令諸世人普於諸僧, 謂非福田, 利養尊重, 偏歸於己
者, 雖順聲聞自度心戒, 而逆菩薩廣大心戒. 如似聲聞無常等
觀, 雖於淺事, 是無顚倒, 而於法身, 卽是顚倒, 當知此中順逆
亦爾.
37) 성문의 무상 등의 관이란 성문이 삼법인(三法印), 즉 모든 행은 영원하지 않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법은 자아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은 적정
하다는 열반적정(涅槃寂靜)을 관법의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 성문의 이러한 관
법으로는 무상하지 않은 구경의 법신을 증득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만약 홀로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간의 아직 믿지 않는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하고, 믿는 사람은 더욱 증장시키며 널리 여러 승려들에 대
해 평등히 공양하게 한다면, 다만 범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복을 내
는 것이다. 그러나 홀로 깨끗함으로 말미암아 물든 세간에 머물면서 이로
써 물든 중생을 억누르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또 다른 이들로 하여금 평등
히 공경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자 한다면, 마치 머리에 해와 달을 이고 다니
면서 그 어두움을 없애지 않으려고 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근기를 아는 큰
성인이 아니면 감히 그러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옛 큰 현인들은 자신의 아들을 경계하면서 이르기를, “삼
가 착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 아들이 대답해 아뢰기를, “마땅히 악하려고 해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착한 것도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악한
것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若由獨淨, 令諸世間未信者信38), 信者增長, 普於諸僧, 平等
供養者, 非直無犯, 乃生多福. 然由獨淨, 居雜染間, 以此望得
不抑染衆, 又欲令他生等敬心者, 猶如頭戴日月而行, 而欲不
却其暗者矣. 自非知機大聖, 尠能得其然也. 以是之故, 古之
大賢, 誡其子云,“愼莫爲善.”其子對曰,“當爲惡乎?”親言,
“善尙莫爲, 況爲惡乎?”
38) 저본에는 없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者」 다음에「信」을 추가하였다.
세 번째 쌍은 혜학(慧學)에 의한 것으로, 또한 두 부류의 자신을 칭찬하
고 남을 헐뜯음이 있다. 첫째는 증익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둘째는 손감으
로 말미암은 것이다.
증익으로 말미암은 것이란, 만약 한 무리가 성품이 삿되지만 총명하여
다른 사람을 이기고자 하는 까닭에 여러 논을 널리 익히면, 모든 법이 모두
언설을 여의었음을 알지 못해서 말씀대로 자성의 차별이 있다고 집착하고
명예와 이익을 얻고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삼세 모든 부처님의 뜻과 교설을 얻었다. 만약 이것과 다르면 모두
낭설이다.”
第三雙者, 依於慧學, 亦有二輩自讚毀他. 一由增益, 二由損
減. 由增益者, 如有一類, 性是邪聰39), 爲勝他故, 廣習諸論,
不解諸法皆離言說, 執有如言自性差別, 爲得名利, 作如是言.
“我得三世諸佛意說, 若異此者, 皆是漫說.”
39) 저본과 을본에는「斜聽」으로 되어 있지만, 병본에 따라「邪聰」으로 바꾸었다.
이 사람은 하나의 칭찬과 헐뜯음에서 네 가지 전도됨을 갖추어서 불법
을 어지럽게 하기 때문에 무거운 죄가 되는 것이다. 곧 그 허망하게 집착하
여 얻을 것이 있다는 견해는 부처님의 뜻에서 멀기가 하늘과 땅과 같으나
“내가 부처님의 뜻에 가깝다”고 말하니, 이것이 첫 번째 전도이다. 부처님
의 뜻은 매우 깊어서 모든 희론을 끊어 일체법에 대해 도무지 얻을 것이 없
으나 자기의 허망한 견해와 같다고 주장하니, 이것이 두 번째 전도이다. 이
두 가지 전도된 견해를 선양해서 사부대중의 위에 놓으니, 이것이 세 번째
전도이다. 모든 양변을 여읜 설을 억눌러서 자기의 편견과 집착 아래에 두
니, 이것이 네 번째 전도이다.
此人於一讚毀, 具四顚倒, 以亂佛法, 故成重罪. 謂其妄執有所
得見, 去佛意遠, 如天與地, 而謂,“ 我近佛意, ” 是一倒也. 佛意
甚深, 絕諸戲論, 於一切法, 都無所得, 而引同己妄見, 是二倒
也. 揚此二倒之見, 加於四部之上, 是三倒也. 抑諸離邊說者,
置其偏執之下, 是四倒也.
손감에 의한 것이란, 어떤 한 무리가 품성이 편협하고 열등하여 착한 벗
을 가까이 하지 않고 학문을 넓히지 않으며, 일부의 심오한 경론만을 치우
쳐 익히지만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대로 뜻을 취하여서, 모든 법의
의타기성의 도리를 비방하고 부정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삼성40)과 삼제41)가 단지 가르침일 뿐으로 있는 것이 없는 중에 임시로
이름을 세운 것이다. 이같이 이해하면 바로 진실이 되지만 이 설과 다르면
모두 희론이다.”
由損減者, 如有一類, 稟性狹劣, 不近善友, 不廣學問, 偏習一
分甚深經論, 不解密意, 如言取義, 誹撥諸法依他道理. 起如是
見, 作如是言. “三性三諦, 但是敎門, 無所有中, 施設假名. 如
是解者, 乃爲眞實, 異此說者, 皆是戲論.”
40) 삼성(三性)은 유식학파에서 모든 존재의 본성과 상태를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한
것이다. 곧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으
로, 이 삼성을 설명하면서 사람이 노끈을 뱀으로 알고 놀랐을 때, 뱀을 변계소집
성에, 노끈을 의타기성에, 노끈의 실제인 삼을 원성실성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
나 삼성 각각의 성격을 둘러싸고 유식학파 내에서도 다양한 주장이 있다.
41) 삼제(三諦)는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79)가 확립한 공(空)・가(假)・중(中)의
‘삼제’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것은 법의 실상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것으로 공제(空諦)는 곧 진제(眞諦)로서 모든 법이 본래 공하다는 것이고, 가제
(假諦)는 속제(俗諦)로서 모든 법이 본래 공하나 인연의 모임에 의해서 공 가운
데 모든 법을 세운다는 것이고, 중제(中諦)는 곧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로
서 중관으로써 모든 법을 보면 모든 법은 본래 양변을 여의어서 진제도 아니고
속제도 아니고 또한 진제이기도 속제이기도 하여 원융무애하다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홀로 자기의 견해만 믿고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설령 근기가 둔하고 들은 것이 적은 사람이어서 그가 논파한 것에
떨어져서 그가 말한 바를 따르는 자를 만나면 곧 이르기를, “이 사람은 정
신이 밝고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한다. 만약 총명하여 글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어서 능숙히 주장을 세워 그 논파함에 떨어지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문득 말하기를, “딴 데로 벗어났다”라고 하고, “마음이 미혹하다”라고 한다.
자신의 이해가 어둡고 둔하여서 뜻을 따라가며 논파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
고, “저들의 마음이 바르지 않아서 내 뜻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것
은 마치 집의 개가 토끼를 쫓다가 따라잡지 못함을 바라보고는 문득 “이미
앞섰다”라 하고 멈추고서 뒤돌아 보는 것과 같다.
由是, 獨恃42)自見, 不受他言. 設遇鈍根少聞之人, 墮其所破,
從其所言者, 卽云,“ 此人神明正直.” 若值聰明解文義者, 巧能
立義不墮其破者, 便言,“ 脫失,” 謂,“是心惑.” 未識自解昧鈍,
不能逐破意, 謂,“ 彼心不正未及我意.” 此猶家狗逐㝹, 望不能
及, 便謂,“已超,” 止而顧見.
42) 저본에는「特」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恃」로 바꾸었다.
이 손감의 사람은 간략히 두 가지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불법을 잃어
버리고 파괴하는 까닭에 무거운 죄가 된다. 첫째는 낮은 것을 들어서 높은
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이고, 둘째는 적은 것을 믿어서 많은 것을 비방하
는 어리석음이다.
此損減人, 略由二愚, 失壞佛法, 故成重罪. 一擧下爲高愚, 二
恃43)小誹多愚.
43) 저본에는「特」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恃」로 바꾸었다.
첫째 어리석음이란 이 손감의 견해가 모든 견해 중에서 가장 아래에 있으
며, 또한 외도의 ‘아견(我見)’만 못한 것이니,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사람
은 극심한 약을 복용하다가 도리어 중병에 걸린 것이다. 중병의 상태는 병
이 없는 것과 극히 비슷하다. 그러므로 다시 이 병을 고칠 수 있는 의술이
없고 또한 스스로 이 병을 깨닫는 사람도 드물다. 마치 근본무명의 극도의
어두움이 반야의 밝음과 그 상태가 매우 비슷하니 주체와 객체가 없기 때문
이다. 주체와 객체가 함께 없기 때문에 저 무명이 가장 없애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이 병이 치료하기 어려운 것도 또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第一愚者, 此損減見, 於諸見中, 最在底下, 亦復不如外道我
見, 其故何耶? 此人服最深藥 反44)成重病. 重病之狀, 極似無
病. 是故更無醫術能治此病, 亦尠有人自覺是患. 猶如根本無
明極闇, 與般若明, 其狀極似同, 無能所故. 俱無能所故, 故彼
無明最難可滅. 此病難治, 當知亦爾.
게송으로 설하여 이른 것과 같다.
“있다는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까닭에 여래께서는 공을 설하셨으니, 만약
사람이 다시 공에 집착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도 교화하지 못할 바이다”.45)
如偈說云.“爲除有執故, 如來說其空, 若人復執空, 諸佛所
不化.”
45) 이 게송과 유사한 게송이『중론(中論)』「관행품(觀行品)」에 보인다. “큰 성인께
서는 공법(空法)을 설하셨으니, 모든 견해를 벗어나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 다
시 ‘공(空)’이 있다고 본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도 교화하지 못할 바이다.”(大30,
p.18c16~c17. 大聖說空法, 爲離諸見故, 若復見有空, 諸佛所不化.)
또 다시 이 견해는 그 이해가 우매함으로 말미암아 멋대로 신심을 일으
킨다. 만약 이 견해에 의지하여 마음을 닦아서 밝고 예리해지면 반드시 신
심을 없애서 큰 삿된 견해에 떨어져 수없는 겁 동안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
다. 그러므로 보살은 남은 [다른] 사람들이 저 [견해를] 따르는 것을 깊이
슬퍼하니, 그래서 미리 경계하여 말한다. “모든 지혜있고 범행을 함께 하는
자들은 마땅히 함께 머물러서는 안 된다.”46) 모든 외도가 일으키는 아견은
비록 이치에는 어긋나지만 이 근심은 없다.
又復此見, 由其解昧, 漫起信心. 若依此見, 修心明利, 必撥信
心, 墮大邪見, 於無數劫, 受無間苦. 是故菩薩, 深悲餘人有隨
彼, 故預誡之言. “一切有智同梵行者, 不應共住.” 一切外道所
起我見, 雖有乖理, 而無是患.
46)『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본지분(本地分)」에 있는 구절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없다는 사람과는, 모든 지혜 있고 범행을 함께 하는 자들은 마땅히 함께 말
해서도 안 되며 함께 머물러서도 안 된다.”(大30, p.488c8~9. 如是無者, 一切有智
同梵行者, 不應共語, 不應共住.)
게송으로 설하여 이른 것과 같다.
“차라리 아견 일으키기를 수미산처럼 할지라도, 공의 견해는 털끝만큼
일으키지 않는다”.47)
如偈說云.“寧起我見, 如須彌山, 不起空見, 如毫釐許.”
47) 이 게송과 유사한 게송이『대보적경(大寶積經)』 등에 보인다. “차라리 아견 일으
키기를 수미산처럼 쌓을지라도, 공의 견해로 증상만을 일으키지 않는다”(大11,
p.634a14. 寧起我見, 積若須彌, 非以空見, 起增上慢.)
이 두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가장 아래에 있으면서 그는 깨닫지 못하고
증상만을 일으키니, 마치 가장 아래의 사미48)가 화상49)의 위에 있다고 말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낮음을 들어서 높은 것이라고 하는 어리석음’이라
고 한다.
由此二緣, 最在底下, 而其不了, 起增上慢, 如似最下沙彌, 謂
居和上之上. 是謂擧下爲高愚也.
48) 사미(沙彌, śrāmanera)는 출가하여 사미계를 받은 후부터 구족계를 받은 비구
가 되기 이전까지의 예비승을 일컫는다. 20세가 되어야 구족계를 받을 수 있다.
49) 화상(和尙, upādhyāya)은 본래 바라문교에서 친히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일컫
는 말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제자에게 구족계를 주는 스승이나 제자를 취할 자
격이 있는 스님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법납 10년 이상에 덕과 지식과 계(戒)를
갖춘 스님을 가리킨다.
두 번째 어리석음이란, 그런데 불도는 넓고 호탕하여 장애도 없고 방소
(方所)도 없으며 길이 의거할 것도 없으나 해당되지 않음도 없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모든 다른 뜻은 다 부처님의 뜻이다”50)라고 한다. 백가51)의 설
은 옳지 않은 것이 없으니 팔만 법문이 모두 이치에 들어갈 수 있으나, 저
사람은 스스로 적게 들어서 좁은 견해만을 오로지하여, 그 견해와 같으면
곧 얻었다고 하고 그 견해와 다르면 모두 벗어나 잃어버렸다고 하니, 마치
어떤 사람이 갈대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는52) 그 대롱 안을 보지 않는 모든
이는 모두 하늘을 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적은 것을
믿어서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다.
第二愚者, 然佛道廣蕩, 無礙無方, 永無所據, 而無不當. 故曰,
“一切他義, 咸是佛義.” 百家之說, 無所不是, 八萬法門, 皆可
入理. 而彼自少聞, 專其狹53)見, 同其見者, 乃爲是得, 異其見
者, 咸謂脫失, 猶如有人葦管窺天, 謂諸不窺其管內者, 皆是不
見蒼天者矣. 是謂恃小誹多愚也.
50)『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섭사분(攝事分)」에 있는 구절과 유사하다. “모든
세간이 다른 이의 뜻과 다른 것을 자기의 뜻이라고 하기 때문에 다툼을 일으킨
다. 여래께서는 곧 모든 다른 이의 뜻을 곧 자신의 뜻으로 삼으시므로 다투시는
바가 없다.”(大30, p.794a10. 由諸世間違返他義, 謂爲自義, 故興諍論. 如來乃以一切他
義, 卽爲自義, 故無所諍.)
51) 백가(百家)란 일반적으로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여러 사상가를 일컫는 말이지
만, 여기에서는 불교 내부의 여러 사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52)『장자(莊子』의「추수(秋水)」편에 용례가 보인다. “이는 곧 대롱으로 하늘을 보고,
송곳으로 땅을 가리키는 것이니 또한 작지 아니한가?”(是直用管闚天, 用錐指地
也, 不亦小乎?)
53) 저본에는「狹」 앞에「樣」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 삭제하였다.
묻는다. 저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비유하면 가난한 거지 아이가 밤낮으
로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세는 것과 같아서, 설한 대로 행하지 못하면 많이
듣는 것 또한 이와 같다”54)고 하며, 또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음
욕과 어리석음과 도를 분별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으로부터 멀기가 마치
하늘과 땅과 같다”55)고 한다.이에 알아야 하니, 많이 들어서 얻을 것이 있
다는 견해는 거지 아이와 가깝고 불도로부터 멀다. 비록 뜻을 얻었다고 하
여도 말을 잊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을 멋대로 구하는 것이 세속 사람보다
심하다면, 그것은 편견과 집착에 떨어진 것으로 일이 명확하다.
問. 如經言, “譬如貧乞兒 日夜數他寶, 不能如說行 多聞亦如
是.” 又言, “若有人分別婬癡及道, 是人去佛遠, 猶如天與地.”
是知, 多聞有所得見, 與乞兒近, 去佛道遠. 雖曰得意, 而不忘
言, 橫求名利, 甚於俗人, 其墮偏執, 事在灼然.
54)『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게송과 유사하다.“비유하면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다른 이의 보물을 세지만, 스스로는 반푼의 몫도 없으니 많이 듣는 것
또한 이와 같다”(大9, p.429a3~4. 譬如貧窮人, 日夜數他寶, 自無半錢分, 多聞亦如是.)
55)『대지도론(大智度論)』의「서품(序品)」에 있는 게송과 유사하다. “만약 어떤 사람
이 음욕, 분노, 어리석음과 도를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으로부터 멀기가 마치
하늘과 땅과 같다”(大25, p.107c23~24. 若有人分別, 婬怒癡及道, 是人去佛遠,
譬如天與地.)
우리 학도들은 저 하나의 다른 이들과 함께, 이제 명예와 이익을 탐하지
않고 세속의 일을 버리고 불법을 깊게 믿으며 오로지 적정만을 구하여 오
직 분수에 따라 마음을 닦고 행동을 정결히 함을 좋아하니, 이해한 것이 삿
되지 않고 옳다는 것을 증험(證驗)하여 알겠다. 또한, 있음에 집착하는 것
을 증(增)이라 하고, 없음에 취착(取著)하는 것을 손(損)이라 한다. 우리가
수행하는 핵심은 있음과 없음을 모두 보내고 고요히 의거함이 없음으로써
관하는 바를 삼는다. 관하는 모습이 이와 같으니 어찌 병이 되겠는가?
今我學徒, 與彼一殊, 不殉名利, 捐棄俗事, 深信佛法, 專求寂
靜, 唯樂隨分修心潔行, 驗知所解非邪是正. 且復執有曰增, 取
無曰損. 我所趣宗, 有無俱遣, 簫然無據, 以爲所觀. 觀狀如是,
何得爲患?
답한다. 명예와 이익을 좇는 자는 도를 등지고 세속을 향하는 것으로, 그
것은 도리를 잃어버린 것이니 무엇이 애석하겠는가? 감히 세속의 그물을
끊고 장차 도의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면서 약을 복용한 것이 병이 되니 매
우 안타깝다. 또 스스로 미혹하다는 것을 깨달은 이는 크게 미혹한 것이 아
니고, 스스로 어둡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히 어두운 것이 아니다. 설사 그
대의 마음 씀이 법상(法相)을 어기지 않고 실로 의타의 도리를 비방하여
부정하지 않는 까닭에, 있음에도 집착하지 않고 없음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대 스스로 양변을 여의어 오묘히 중도에 들어맞아서 저 무리
에 있지 않으니 어찌 갑자기 [저 무리로] 나아가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스
스로 중도에 대해 옳다 하고 다른 것에 대해 그르다는 것은 도리어 양변의
집착에 떨어지고 오히려 청정한 지혜가 아니다.
答. 逐名利者, 背道向俗, 其爲失理, 何足可惜? 堪絶世網56),
將趣道方, 服藥成疾, 甚爲可傷. 且覺自迷者, 非大迷矣, 知自
闇者, 非極闇矣. 設使子之心行, 不違法相, 實不誹撥依他道理,
故不執有, 而不墮無者, 子自離邊, 玄會中道, 不在彼類, 那忽
跳赴? 雖然, 自是於中, 而非於他者, 還墮邊執, 猶非淨智.
56) 저본에는「綱」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網」으로 바꾸었다.
경의 게송에 이른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의 법을 즐겨 받지 아니하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이름하며,
모든 희론이 있는 이는 다 크게 어리석은 사람이다. 만약 자기만 옳다는 견
해에 의지하면 모든 희론을 생겨내고, 설령 이것을 깨끗한 지혜라고 한다
면 깨끗한 지혜가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57)
如經偈云.“不肯受他法, 是名愚癡人, 諸有戲論者, 皆是大愚人,
若依自是見, 而生諸戲論, 設此爲淨智, 無非淨智者.”
57) 이와 비슷한 게송이『대지도론(大智度論)』의「서품」에『중의경(衆義經)』의
게송으로 인용되어 있다.『중의경』은 현재 한역으로 전해지지 않는다.(大25,
pp.60c13~61a2)
설사 그대의 견해가 악취공58)에 떨어져서 연하여 있음[緣有]을 비방하
고 부정하며 또한 그 없음도 부정하여 가장 극도로 손감된 것이나, 자각하
지 못한다면 그대야말로 도에서 가장 멀며, 이에 도리어 거지 아이와 가깝
다. 거지 아이가, “보물이 많은 자는 부유하고 재물이 적은 자는 가난한데,
나는 보물이 많지도 않고 또한 재화가 적지도 않으니, 고요히 의거할 것이
없으므로 나는 가난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과 같으니, 지금 그대가 말한 것
이 저 아이와 같다. 이에 알아야 한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것이 가장
극도로 빈궁한 것이며, 있음도 부정하고 없음도 부정하는 것이 가장 극도
로 손감된 것이다.
設使子之見解, 墮惡取空, 誹撥緣有, 亦撥其無, 最極損減, 而
不自覺者, 唯子最遠於道, 乃還近於乞兒. 如乞兒云,“ 多寶者
富, 少財者貧, 我無多寶, 亦無少財, 簫然無據, 故我非貧,” 今
子所言, 與彼同焉. 是知. 無多無少者, 最極貧窮也, 撥有撥無
者, 最極損減也.
58) 악취공(惡取空, durgrhītā śūnyatā)이란 공(空, śūnyatā)을 잘못 이해하여 인과
의 도리를 부정하고 단멸(斷滅)의 치우친 견해에 빠진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극한 도는 아득하고 아득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고, 마
음의 행함은 은밀하고 은밀하여 얻고 잃음을 나누기 어렵다. 오직 오랫동
안 심은 선근이 있어서 품성이 바르고 곧으며 아만을 깊이 조복하며 선지
식을 가까이 하는 사람만, 성전(聖典)을 우러러 의지하여 마음의 거울로 삼
음으로써 스스로 안을 자세히 관찰하고 미묘한 마음의 행함에 익숙하게 된
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다행히 악취공의 병을 치료할 것이다.
전에 “모든 부처님께서도 교화하지 못하실 바이다”라고 설한 것은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안에서 경책하여 고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도리
어 모든 부처님의 교화하시는 바가 되니, 교화하지 못하신다는 말씀으로써
스스로 교화하게 하는 까닭이다.
然至道昏昏, 是非莫分, 心行密密59), 得失難別. 唯有宿殖善
根, 稟性質直, 深伏我慢, 近善知識者, 仰依聖典, 以爲心鏡,
自內審觀, 熟微心行. 若能如是之人, 幸治惡取空病. 向說,“諸
佛所不化”者, 爲欲令彼自內驚改. 是故還爲諸佛所化, 以不化
言, 使自化故.
59) 저본에는「蜜蜜」로 되어 있지만, 병본에 따라「密密」로 바꾸었다.
묻는다. 만약 이에 스스로 마음의 병을 살피고자 한다면 어떤 경전에 의
지해야 가장 밝은 거울이 되겠는가?
답한다. 『해심밀경』에 이르기를, “만약 모든 유정이 성품이 바르고 곧지
못하다면, 바르고 곧지 못한 부류는 비록 힘이 있어서 능히 생각하여 택하
며 폐하고 세울 수 있더라도 다시 자기의 견해로 집착한 가운데에 안주한
다. 매우 깊고 비밀스런 뜻의 설을 들어도 힘이 없어서 능히 여실하게 이해
하여 깨닫지 못하며, 이러한 법에 비록 믿음과 이해를 내었더라도 그 뜻에
대해서 말을 따라 집착한다. ‘일체 법이 결정코 다 자성이 없고, 결정코 생겨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어서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다’라고 한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체 법에 없다는 견해와 상(相)이 없다는 견해를 얻으
며, 이 견해를 말미암은 까닭에 모든 상을 부정해서 모두 상이 없다고 하여
모든 법의 세 가지 자성[性]과 형상[相]을 비방하여 부정한다. 무슨 까닭인
가?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이 있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변계소집상이 비로소
시설될 수 있으니, 만약 두 가지 상에 대해서 상이 없다고 보면 저들은 또한
변계소집상도 비방하여 부정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저들이 세 가지 상을
비방하여 부정한다고 말하는 것은, 저들이 비록 법에 대해서 믿음과 이해를
일으키기 때문에 복과 덕은 증장되지만, 그러나 뜻이 아닌 것에 대해서 집
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혜를 퇴실(退失)시키고, 지혜가 퇴실되기 때문에
광대하고 무량한 선법을 퇴실시킨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60)
問. 若欲於此自察心病, 依何等典, 最爲明鏡?
答. 如深密61)經言,“ 若諸有情, 性非質直, 非質直類, 雖有力能
思擇廢立, 而復安住自見取中. 聽聞甚深密意之說, 而無力能如
實解了, 於如是法, 雖生信解, 而於其義, 隨言執著. 謂‘一切法,
決定皆無自性, 決定不生不滅, 本來寂靜, 自性涅槃.’ 由此
緣, 於一切法, 獲得無見及無相見, 由是見故, 撥一切相, 皆爲無
相, 誹撥諸法三種性相. 何以故? 由有依他起相及圓成實相故,
故遍計所執相, 方可施設, 若於二相, 見爲無相, 彼亦誹撥遍計
所執相. 是故, 說彼誹撥三相, 彼雖於法起信解故, 福德增長, 然
於非義, 起執著故, 退失智慧, 智慧退故, 退失廣大無量善法.”
60)『해심밀경(解深密經)』「무자성상품(無自性相品)」에 있는 구절이다.(大16,
pp.695c12~696a2)
61) 저본에는「蜜」로 되어 있지만, 병본에 따라「密」로 바꾸었다.
『유가론(瑜伽論)』62)에 이르기를, “혹 어떤 무리는 난해한 공성(空性)과
상응하여도63) 아직 극히 비밀한 뜻의 의취(義趣)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매우 깊은 경전 설함을 듣고서, 설한 바 의취를 실답게 이해할 수 없어서
이치와 맞지 않은 허망한 분별을 일으킨다. 교묘하지 않은 방편으로 끌어
들인 살피고 생각함[尋思]64)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고 이
와 같은 논리를 세운다. ‘모든 것은 오직 가(假)이니 이것이 진실이다. 만약
이 관을 한다면 바른 관[正觀]이라고 이름한다.’ 그들이 허망한 가(假)에
의지하는 바이고 머무르는 바이어서 실로 있는 것은 오직 사상(事相)뿐이
니 부정해서 있지 않다고 한다. 이는 곧 모든 것이 허망한 가유(假有)여서
다 없는 것이니, 어찌 마땅히 ‘모든 것이 오직 가이니 이것이 진실이다’라
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도리를 말미암아 저들은 진실과 허망한 가
에 있어서 두 가지를 모두 비방하여 도무지 있는 것이 없다. 마땅히 알라.
이를 가장 극도로 없다 하는 사람이라고 이름하니, 이러한 없다 하는 사람
과는, 모든 지혜있고 청정한 행을 같이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함께 머물러서
는 안 된다. 세존께서는 이 비밀스런 뜻에 의거하여 설하여 말씀하시기를,
‘차라리 한 무리의 아견을 일으키는 사람과 같이할지언정, 한 무리의 악취
공의 사람들과는 같이하지 말라. 무엇을 악취공의 사람이라고 하는가? 사
문이나 혹 바라문이「그것을 말미암은 까닭에 공」65) 또한 믿어서 받지 않
고 「이것에 대해서 공」66) 또한 믿어서 받들지 않으면 이와 같은 것을 악취
공의 사람이라고 이름한다. 무슨 까닭인가? 「그것을 말미암은 까닭에 공」의
「그것」은 실제로 없는 것이며, 「이것에 대해서 공」의 「이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다. 이 도리를 말미암아 공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모두가 도
무지 있는 것이 없다면 어느 곳에서, 어느 것을, 어떤 이유로 공이라고 하겠
는가? 또한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곧 공이라고 설한다」67)고 마땅
히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 까닭에 악취공의 사람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
으며 이에 널리 설하였다.
瑜伽論云, “如有一
甚深經典, 不能如實解所說義趣, 起不如理虛妄分別. 由不巧
便所引尋思, 起如是見, 立如是論.‘ 一切唯假, 是爲眞實, 若
作是觀, 名爲正觀.’ 彼於虛假所依所處, 實有唯事, 撥爲非有.
是則一切虛假皆無, 何當得有,‘ 一切唯假, 是爲眞實?’ 由此
道理, 彼於眞實, 及與虛假, 二種俱謗, 都無所有. 當知. 是名
最極無者, 如是無者, 一切有智同梵行者, 不應共住. 世尊依此
密意說言, ‘寧如一類起我見者, 不如一類惡取空者. 云何名爲
惡取空者? 謂有沙門或婆羅門, 「由彼故空,」亦不信受, 「於此
而空,」亦不信受, 如是名爲惡取空者. 何以故?「 由彼故空,」
彼實是無, 「於此而空,」 此實是有. 由此道理, 可說爲空. 若說
一切都無所有, 何處何者何故名空? 亦不應言,「由此於此卽
說爲空.」 是故名爲惡取空者,’” 乃至廣說.
62)『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의「진실의품(眞實義品)」에 나오는 구절이다.(大30,
p.488b28~c28)
63) 이 구절은『유가사지론』에서는 “혹 어떤 무리는 난해한 대승과 상응하고 공성
과 상응하여도”(如有一類, 聞說難解, 大乘相應, 空性相應)로 되어 있다.
64) 살피고 생각함[尋思]에 대해서 『유가사지론』에서는 모든 법은 이름・일・자성・
차별에 의해 설해질 수 있으며, 이것들에 대해서 살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설
한다.(大30, p.490b)
65) ‘그것을 말미암은 까닭에 공[由彼故空]’에 대해서『유가사지론』의 주석서들은
‘그것’을 변계소집성으로 보아서, “변계소집성이 없음을 말미암은 까닭에 공이
라고 이름한다”(由遍計所執無故名空)고 해석하고 있다. [규기(窺基),『유가사지
론약찬(瑜伽師地論略纂)』권10(大43, p.137b27) ; 석둔륜(釋遁倫),『유가론기
(瑜伽論記)』 권9(韓2, p.690b21; 大42, p.508c17)]
66) ‘이것에 대해서 공[於此而空]’의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하여, ‘이것’을
‘의타기성’만으로 보는가, 아니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유가사지론』의 주석이 양분된다. 전자의 경우는 ‘의타기성에 대해서 변계소집
성은 없으나 원성실성은 있기 때문에 공’이라는 해석이고, 후자는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에 대해서 변계소집성이 없어서 공’이라고 풀이한다. [규기(窺基),『유
가사지론약찬(瑜伽師地論略纂)』권10(大43, p.137b27) ; 석둔륜(釋遁倫), 『유
가론기(瑜伽論記)』권9(韓2, p.690b23; 大42, p.508c19)]
67)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곧 공이라고 설한다[由此於此卽說爲空]’는 악
취공자의 주장이다.『유가사지론』의 저자는 악취공자가 ‘그것을 말미암은 까닭
에 공’과 ‘이것에 대해서 공’ 모두를 부정하여 다 없다고 한다면, ‘공’이라고 설할
수 없다고 논박한다. 이에 악취공자가 다시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곧
공이라고 설한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이미 일체 모두를 다 부정해버렸기 때문
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곧 공이라
고 설한다’의 ‘이것’에 대해서는 주석서에 따라서 해설이 다르다. 당(唐)의 규기
(窺基, 632~682)는 ‘이 변계소집성으로 말미암아, 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에 대
해서’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신라(新羅)의 둔륜(遁倫, 생몰년 미상)이 인용하고
있는 신라(新羅)의 혜경(惠景, 생몰년 미상)은 ‘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으로 말
미암아, 이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에 대해서’라고 풀이하고 있다. [규기(窺基),『유
가사지론약찬(瑜伽師地論略纂)』권10(大43, p.137c5) ; 석둔륜(釋遁倫),『유가
론기(瑜伽論記)』권9(韓2, p.690312; 大42, p.509a1)]
이제 간접적인 논의는 멈추고 본래의 종취로 돌아가 결론짓겠다. 지님과
범함의 가벼움과 무거움의 간략한 양상이 앞과 같다.
且止傍論, 還結本宗. 持犯輕重, 略相如前.
2) 얕음과 깊음의 문[淺深門]
다음 두 번째로 지님과 범함의 얕음과 깊음을 밝힌다는 것은, 앞에서
설한 칭찬하고 헐뜯는 계로써 지님과 범함의 얕음과 깊음의 양상을 드러
낸 것이다.『다라계본』에 이르기를, “항상 중생을 대신하여 헐뜯음과 욕함
을 받으며, 나쁜 일은 스스로 자기에게 향하게 하고 좋은 일은 남에게 준
다. 만약 스스로 자기의 덕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숨기며, 다
른 사람으로 하여금 헐뜯음과 모욕을 받게 한다면 이것은 바라이죄68)가
된다”69)고 하였다. 이 인용한 글에 의지해서 얕음과 깊음을 다르게 이해한
다. 왜 그런가?
次第二明持犯淺深者, 乘前所說讚毀之戒, 以顯持犯淺深之
相. 如多羅戒本云, “常代衆生 受加毀辱, 惡事自向己, 好事與
他人. 若自讚揚己德, 隱他人好事, 令他受毀辱者, 是爲波羅夷
罪.” 依此一文 淺深異70)解. 何者?
68) 바라이(波羅夷, pārājika)는 ‘다른 것보다 수승하다’는 의미이다. 계율 가운데에
가장 무거운 죄로서, 만약 범한 경우에는 승단에서 쫓겨나게 된다.『마하승기율
(摩訶僧祇律)』,『사분율(四分律)』에서는 비구의 경우에 살(殺), 도(盜), 음(淫),
망(妄) 등의 네 가지를 4바라이로 꼽으며, 비구니의 경우에는 4바라이에 다시 네
가지를 더하여 8바라이라고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다라계본』에 의지하여
십중계를 의미한다.
69)『범망경』권2에 십중계(十重戒)를 설명하는 중에 7번째로 나오는 구절이다.(大
24, p.1004c19)
70) 저본에는 없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深」 다음에「異」를 추가하였다.
하사(下士)는 그것을 듣고서 말과 똑같이 이해해서, “자기를 헐뜯고 남
을 칭찬하는 것은 반드시 복된 업이고,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은
결정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고 한다. 이처럼 한결같이 말을 따라서 취한
까닭에 장차 그 복을 닦아도 복된 행은 적고 죄업은 많다. 그 죄를 버리려
고 하지만 죄를 하나 물리치면 복은 셋을 없앤다. 이것을 지님과 범함을 얕
게 아는 허물이라고 한다.
상사(上士)는 그것을 듣고서 의취(意趣)를 잡아 이해하여, 한 모퉁이를 들
면 곧 세 모퉁이로써 돌이키며, 한 문장에 나아가면 늘 네 구절을 이용하여 판
단한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서 분별함이 혼동됨이 없기 때문에 복이 남음이
없고 죄도 가림이 없다. 이것을 지님과 범함을 깊이 이해하는 덕이라고 한다.
下士聞之, 齊言取解,“ 自毀讚他, 必是福業, 自讚毀他, 定爲
犯罪.” 如是一向, 隨言取故, 將修其福, 福行少而罪業多. 欲
捨其罪, 却罪一而除福三. 是謂淺識持犯過也. 上士聞之, 掬解
意趣, 擧一隅, 便以三隅而反71), 就一文, 每用四句而判. 由是
審別無所濫故, 無福而遺, 無罪而辨. 是謂深解持犯德也.
71) 저본에는「變」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反」으로 바꾸었다.
‘네 구절로써 판단한다’고 하는 것은, 혹은 자기를 헐뜯고 남을 칭찬하는
것이 복이고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이 죄이며, 혹은 자기를 헐뜯
고 남을 칭찬하는 것이 죄이고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것이 복이며,
혹은 [자기를] 헐뜯고 [남을] 칭찬하거나 혹은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
뜯는 것은 죄이기도 하고 복이기도 하며, 혹은 [자기를] 헐뜯지도 [남을] 칭
찬하지도 않으며 [자기를] 칭찬하지도 [남을] 헐뜯지도 않는 것은 복이기
도 하고 죄이기도 하다.
言四句而判者, 或有自毀讚他是福, 自讚毀他是罪, 或有自毀
讚他是罪, 自讚毀他是福, 或有若毀讚若讚毀, 或罪或福, 或
有非毀讚非讚毀, 或福或罪.
첫 번째 구절은, 만약 어떤 이가 중생이 욕을 받는 것을 깊이 불쌍히 여
겨 다른 사람이 욕을 받는 것을 끌어다가 자기에게 향하게 하고 자기가 응
당 받아야 할 영예를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주고자 하여, 이 뜻에서 자기를
헐뜯고 남을 칭찬한다면 이것은 복이다. 만약 자기가 그 영예를 받고 남으
로 하여금 욕을 받게 하고자 하여 이 뜻에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다면 이것은 죄이다.
第一句者, 如人深愍衆生受辱, 欲引他所受辱向己, 推自所應
受榮與他, 此意自毀讚他, 是福. 若欲自受其榮, 令他受辱, 此
意自讚毀他, 是罪.
두 번째 구절은, 그때 세간의 풍속이 익숙한 바가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헐뜯는 사람을 매우 미워하고 자기를 겸손히 하고 남을 찬양하는 사람을
늘 공경하는 것임을 안다. 또 남을 헐뜯으면 남도 반드시 나를 욕하고, 내
가 만약 남을 찬양하면 남도 도로 나를 찬미할 것임을 안다. 이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가 높아지기를 교묘히 구하여서 자기를 헐뜯고 남을 칭찬한다
면, 이것은 무거운 죄가 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집착하는 것이 이치가 아
니어서 버려야 하고 자기 안에서 이해한 바가 도리여서 마땅히 닦아야 함
을 알고, 바로 불법을 세워서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여 자기를 칭찬
하고 남을 헐뜯는다면 이것은 큰 복이 된다.
第二句者, 如知時世風俗所習, 多憎自讚毀他之人, 每敬自謙揚
他之士, 又知毀彼, 彼必呰我, 我若讚他, 他還美我, 由此知故,
巧求自高, 自毀讚他, 是爲重罪. 若知他人所執非理可捨, 自內
所解是道應修, 直欲建立佛法, 饒益有情, 自讚毀他, 是爲大福.
세 번째 구절은, 한 무리가 성품이 속임과 거짓이 많아서 세간의 모든 사
람들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고자 하여, 남의 장점은 업신여기고 자기의 단
점은 덮어 둔다. 이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속이고 혼란시키는 말을 지어서
자기의 작은 장점은 허물이라고 헐뜯고 남의 단점은 공이라고 칭찬하며,
자기의 많은 단점을 덕이라고 찬양하고 남의 장점을 과실이라며 억누른다.
또 어떤 한 무리는 품성이 바르고 곧아서 세간의 모든 사람들을 깨우쳐 인
도하고자, 선을 식별하고 악을 구별하여 죄를 버리고 복을 닦는다. 이 뜻을
말미암은 까닭에 곧게 말하여 치우침이 없고 자기의 악을 보면 반드시 꾸
짖고 남의 선을 들으면 곧 찬탄한다. 자기의 덕을 깨달으면 바로 기리고 남
의 죄를 알면 곧 폄하한다. 앞 사람이 [자기를] 헐뜯고 [남을] 칭찬하며 [자
기를] 찬양하고 [남을] 억누르는 것은 바로 속이고 아첨하는 죄이다. 뒷 사
람이 [자기를] 꾸짖고 [남을] 찬탄하며 [자기를] 기리고 [남을] 폄하하는 것
은 아울러 충실하고 정직한 복이 된다.
第三句者, 如有一類, 性多誑偽, 爲欲誑惑世間諸人, 陵72)他
所長, 覆自所短. 由此意故, 作矯亂言, 毀己小長爲過, 讚他所
短爲功, 揚己多短爲德, 抑他所長爲失. 又有一類, 稟性質直,
爲欲開導世間諸人, 識善別惡, 捨罪修福. 由斯志故, 直言無
僻, 見自惡而必呰, 聞他善而卽歎. 覺己德而還褒, 知彼罪而
直貶. 前人毀讚揚抑, 直是誑諂之罪. 後士呰歎褒貶, 並爲忠
直之福也.
72) 저본에는「凌」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陵」으로 바꾸었다.
네 번째 구절은, 어떤 훌륭한 사람이 성품은 넓고 훌륭하며 거리낌없는
정신은 포용하고 순박하여 끝을 알 수 없으니, 화와 복을 섞어서 하나로 돌
아가고 저와 나를 잊어 둘이 아니게 한다. 그 정신은 항상 즐거우며 바른
곳에 노니는 까닭에, 자기를 헐뜯지도 남을 칭찬하지도 않으며, 또 자기를
찬양하지도 남을 억누르지도 않는다. 또 어떤 하열하고 어리석은 이는 품
성이 둔박(鈍朴)하여 옳고 그름을 알지 못하고 콩과 보리를 구별하기 어려
워서, 선의 선함을 알지 못하고 악의 악함을 깨닫지 못한다. 그 뜻이 항상
어두워서 미움도 사랑도 잊었기 때문에 또한 자기를 겸양하고 남을 찬미함
도 없고, 또는 자기를 기리고 남을 폄하함도 없다. 이는 하열한 어리석음의
흐리고 무딘 죄가 되며, 저것은 뛰어난 지혜의 순박한 복이다.
第四句者, 如有高士, 性是弘懿, 放神苞朴, 不知端倪73), 混禍
福而歸一, 忘彼我爲無二. 其神常樂, 遊是處故, 亦不自毀讚
他, 亦不自揚抑彼. 又有下愚稟性鈍74)朴, 莫知是非, 難別菽
麥, 不識善之爲善, 不了惡之爲惡. 其意常昏, 忘憎愛故, 亦無
自謙美他, 復無自褒貶他. 此爲下愚渾鈍之罪, 彼是上智純朴
之福也.
73) 저본에는「兒」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倪」로 바꾸었다.
74) 저본에는「純」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을본과 병본에 따라「鈍」으로 바꾸었다
이것을 네 구절로써 죄와 복을 판단한 것이라고 한다. 앞의 두 구절에 의
지하면 곧 복의 업이 도리어 무거운 근심을 짓고 죄의 행이 다시 큰 선이
되며, 뒤의 두 구절을 생각하면 곧 속이는 말과 충직한 말이 간격이 없으며
뛰어난 지혜와 하열한 어리석음이 행적을 같이 한다. 이에 알라. 수행자의
지님과 범함의 주요한 것은 다만 마땅히 자기의 얻고 잃음을 미세하게 관
찰하는 것이며, 바로 남의 덕과 근심을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지님과
범함의 얕음과 깊음의 의취가 그러하다.
是謂四句以判罪福. 依前兩句, 則福業反75)作重患, 罪行更爲
大善, 尋後二句, 則誑語與忠談無隔, 上智共下愚同迹. 是知.
行者持犯之要, 只應微察自之得失, 不可輒判他之德患. 持犯
淺深意趣然矣.
75) 저본에는「變」으로 되어 있지만, 갑본과 병본에 따라「反」으로 바꾸었다.
3) 구경의 지님과 범함을 밝히는 문
세 번째는 구경의 지님과 범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앞에서 설한 법문
에 의지하여 가벼움과 무거움의 성품을 능히 알고 얕음과 깊음의 형상을
겸하여 알더라도, 계의 상(相)에 대해서 여실히 이해하지 못하고 죄와 죄
아닌 것에 대해서 양 변을 여의지 못한다면, 능히 구경에 지녀서 범함이 없
는 것이 아니며 청정한 계바라밀에 나아간 것이 아니다. 그 까닭은 무엇인
가? 곧 계는 스스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여러 연에 의탁하므로 결
정코 자상(自相)이 없으니, 연에 즉해도 계가 아니고, 연을 여의어도 계가
없으며, 즉함을 없애고 여읨을 없애고 중간에서도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계를 구하면 영원히 있지 않으니, 자성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여러 연에 의탁해서 또한 계가 없는 것도 아니다. 토끼의
뿔76)처럼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第三明究竟持犯者. 雖依如前所說法門, 能識輕重之性, 兼知
淺深之狀, 而於戒相, 不如實解於罪非罪, 未離二邊者, 不能究
竟, 持而無犯, 不趣淸淨戒波羅蜜. 其故何耶? 然戒不自生, 必
託衆緣, 故決無自相, 卽緣非戒, 離緣無戒, 除卽除離, 不得中
間. 如是求戒, 永不是有, 可言自性不成就故. 而託衆緣, 亦不
無戒. 非如兔角無因緣故.
76) 토끼의 뿔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에 따라 범부가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논파할 때도 쓰인다. 토끼의 뿔과 함께
거북의 털도 많은 경론에서 같은 비유로 쓰인다.『대지도론』권12에서는 “이름
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사실[有實]과 사실이 아님[有不實]이다. 사실이 아닌 이
름이란, … 마치 또한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처럼 다만 이름만 있고 실제로는
없는 것과도 같다.”(大25, p.147b20~23. 名有二種, 有實, 有不實. 不實名, … 如
兔角, 龜毛, 亦但有名而無實.)고 하였다.
계의 상(相)을 설한 것처럼 죄의 양상도 또한 이러하다. 계와 죄의 양상
처럼 사람의 양상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이중에서 있지 않음에 의지해서
도무지 없다고 보면 비록 범함은 없더라도 길이 계를 잃어버리니, 계의 사
상(事相)만을 비방하고 없애기 때문이다. 또 이중에서 없지 않음에 의지해
서 있다고 헤아린다면 비록 능히 지닌다고 하더라도 지님이 곧 범함이니,
계의 참다운 상에 거스르기 때문이다.
如說戒相, 罪相亦爾. 如戒罪相, 人相亦然. 若於此中, 依不是
有, 見都無者, 雖謂無犯, 而永失戒, 誹撥戒之唯事相故. 又於
此中, 依其不無, 計是有者, 雖曰能持, 持卽是犯, 違逆戒之如
實相故.
보살이 계를 닦는 것은 곧 이와 같지 않다. 비록 지니는 주체와 지니는
대상이 있다고 헤아리지는 않지만, 계의 사상만을 비방하고 없애지도 않
는다. 이 때문에 마침내 계를 잃어버리는 큰 허물이 없다. 비록 죄와 죄 아
님이 없다고 보지는 않지만, 계의 참된 상을 어기어 거스르지도 않는다. 이
때문에 계를 범하는 미세한 죄를 길이 여읜다. 이 교묘한 방편과 깊은 지혜
의 방편으로 말미암아 삼륜(三輪)77)을 길이 잊고 두 변에 떨어지지 않아야,
비로소 계바라밀을 구족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菩薩修戒, 則不如是. 雖不計有能持所持, 而不誹撥戒之唯事.
是故終無失戒巨過. 雖不見無罪與非罪, 而不違逆戒之實相.
是故永離犯戒細罪. 由是巧便深智方便, 永忘三輪, 不墮二邊,
方趣具足戒波羅蜜.
77) 삼륜(三輪)은 흔히 주는 사람[施者]·받는 사람[受者]·주고 받는 물건[施物]을
가리키고, 또는 신(身)·구(口)·의(意)의 삼업(三業)을 가리킨다.『대반야바라
밀다경(大般若波羅蜜多經)』에서는 바라밀과 관련하여 보살 수행의 주체와 행
위나 내용, 그리고 행위의 대상을 지칭하며, 보시・지계 등이 바라밀이 되기
위해서는 이 ‘삼륜’이 청정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보시바라밀의
경우, 보시의 주체와 보시의 대상, 그리고 보시 내용을 ‘삼륜’이라고 한다.
계바라밀에 있어서는 계를 지니는 자, 지니는 계, 그리고 지니는 행위를 말한다.
(大5, p.424c)
경에 이르기를, “죄와 죄 아님을 얻을 수 없는 까닭에 마땅히 계바라밀을
구족하는 것이다”78)라고 한 것과 같다.『계본』에 이르기를, “계의 광명이
입으로부터 나오니, 연이 있고 인이 없는 것이 아니며, 색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원인도 결과도 아닌 법이니,
모든 부처의 근원이며, 보살의 근본이다”79)라고 하였다.
如經言,“ 罪非罪不可得故, 應具足戒波羅蜜.” 戒本云,“ 戒光
從口出, 有緣非無因, 非色非心, 非有非無, 非因果法, 諸佛之
本原, 菩薩之根本.”
78)『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에 나오는 구절이다.(大8, p.218c24)
79)『범망경』권2에 나오는 구절이다.(大24, p.1004b2)
이중에서 ‘계의 광명’이라고 말한 것은 계와 광명이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고 청정함과 잡된 더러움이 한 맛임을 밝히기 위한 까닭이
다. 따라서 계의 광명을 연하여 계의 실상을 나타내니 계는 자성이 없어서
반드시 다른 연을 빌린다. 따라서 ‘연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연이 있다’는
말은 있음에 의거한 것이 아니고 그 따라나온 바 인이 없지 않음을 바로 나
타낸 것이다. 따라서 ‘인이 없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인이 없지 않은 계
의 자성은 질애80)도 아니고 또한 연려81)도 아니다. 따라서 ‘색도 아니고 마
음도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색도 마음도 아니지만 색과 마음을 떠
나서 길이 얻을 수도 없다. 비록 얻을 수 없지만 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따
라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계가 없는 것은 아
니지만 결과를 떠나서 원인은 없고 원인을 떠나서 결과는 없다. 따라서 ‘원
인도 결과도 아닌 법’이라고 말한 것이다. 계가 원인이 되는 자성을 비록
얻을 수는 없지만 모든 부처의 과위(果位)가 반드시 계를 원인으로 빌린다.
따라서 ‘모든 부처의 근원’이라고 말한 것이다. 계가 결과가 되는 자성을
비록 얻을 수는 없지만 계는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원인으로 빌린다. 따라
서 ‘보살의 근본’이라고 말한 것이다.
此中言戒光者, 爲顯戒之與光無二無別, 明淨雜染同一味故.
故緣戒光, 顯戒實相, 戒無自性, 必藉他緣. 故曰有緣. 有緣之
言, 非據是有, 直顯不無其所從因. 故曰非無因. 非無因戒性,
非質礙, 亦非緣慮. 故曰非色非心. 雖非色心, 而離色心, 永不
可得. 雖不可得, 而非無戒. 故曰非有非無. 雖非無戒, 而離果
無因, 離因無果. 故曰非因果法. 戒爲因性, 雖不可得, 而諸佛
果, 必藉戒因. 故言諸佛之本原也. 戒爲果性, 雖不可得, 而戒
要藉菩提心因. 故言菩薩之根本也.
80) 질애(質礙)는 물질의 성질[質]을 지녀서 그로 인해서 다른 물질과 서로 장애[礙]
가 되기 때문에 ‘질애(質礙)’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물질을 일컬으며 다른 물질
과는 동일 시간에 동일 공간을 점유하지 못한다.
81) 연려(緣慮)는 경계를 인식[緣]하고 사물을 생각[慮]하는 마음을 일컫는다.
묻는다. 계의 상이 이와 같아서 매우 깊어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하기도
오히려 어려운데 하물며 수행하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알라. 앞에서 설
한 것과 같은 행상(行相)은 오직 큰 지위의 보살만이 닦을 것이며, 모든 새
로 뜻을 일으킨 이가 행할 것과는 관계가 없다.
問. 戒相如是, 甚深難解. 解之尙難, 況乎修行? 故知. 如前所
說行相, 唯是大地菩薩所修, 不關諸新發意所行.
답한다. 경에서 그대의 질문과 같은 것에 바로 답하여 이르기를,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킨 이래로 항상 얻을 것 없는 법을 행하여 얻을 것 없는 법
으로 인한 까닭에 보시와 지계를 닦으며, 내지 얻을 것 없는 법으로 인한
까닭에 지혜를 닦는다”82)고 하였다. 이 답의 뜻은, 만약 저들로 하여금 행
하게 하는데도 아직 일찍이 닦지 않았기 때문에 행하기가 어려워서 지금
닦지 않는다면, 지금 익히지 않기 때문에 뒤에도 또한 닦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래오래 하면 더욱 어렵게 된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 어려움을 우러
러 익히게 해서 익혀 행함이 점차 더해가면 쉬운 것으로 바뀌게 된다. 이것
을 새로 행하고 일으켜 나아가는 큰 뜻이라고 말한다. 구경의 지님과 범함
을 간략히 밝힌 것이 이와 같다.
答. 經中正答如汝問言,“ 菩薩從初發意已來, 常行無所得法,
因無所得法, 故修布施持戒, 乃至因無所得法, 故修智慧.” 此
答意者, 若使彼行, 由未曾修, 難可行故, 今不修者, 今不習
故, 後亦不修. 如是久久, 彌在其難. 故令從初仰習其難, 習
行漸增, 轉成其易. 是謂新行發趣大意. 究竟持犯, 略明如是.
82)『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권21「삼혜품(三慧品)」에 나오는 구절
이다.(大8, p.373c21)
3. 유통게(流通偈)
우러러 성전(聖典)의 요의의 글을 의지하여
계장(戒藏)을 대강 서술해서 주요한 문을 열었습니다.
두루 위하여 법계에 한 등을 사루니
등을 전하여서 시방에 두루하기를 원하옵니다.
네 구절83)로 삼취정계(三聚淨戒)가 원만하고
여섯 가지 뜻84)과 다섯 가지 닦음85)이 갖춰지게 되어서
멀리 두 변을 여의어 모든 죄를 없애고
평등히 한 맛을 맛보아 방외에 노닐게 하소서.
仰依聖典了義文, 粗述戒藏開要門.
普爲法界燃一燈, 願用傳燈周十方.
四句三聚戒圓滿, 六意五修爲成辦86).
遠離二邊滅諸罪, 等飡一味遊方外.
83) 네 구절은 앞의 ‘얕음과 깊음의 문’에서 상사가 계의 얕음과 깊음을 네 구절로
판단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84) 여섯 가지 뜻[六意]은『보살계본지범요기』의 주요 주제인 지님과 범함의 가벼움,
무거움, 얕음, 깊음, 구경의 지님과 범함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보살계본
지범요기조람집』에서는『섭대승론』 등에서 나오는 여섯 뜻으로 다음과 같이 해
설하고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①광대한 뜻[廣大意]이니, 보살이 육바라밀에 있어
서 만족함이 없이 싫증내지 않는 것이다. ②긴 시간의 뜻[長時意]이니, 보살이 앞
의 광대한 뜻을 초발심부터 성불에 이르기까지 지니는 것이다. ③환희의 뜻[歡喜
意]이니, 보살의 육바라밀로 말미암아 자신과 모든 중생이 한없이 기뻐하는 것이
다. ④은덕이 있음의 뜻[有恩德意]이니,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함으로써 중생에게
한량없는 은덕이 있음을 보지만 자기에게 은덕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다. ⑤큰
마음의 뜻[大志意]이니, 보살이 육바라밀로부터 생긴 공덕을 모두 중생에게 보시
하고 애착없는 마음으로 회향하여 거듭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⑥참 좋은 뜻
[善好意]이니, 보살이 육바라밀의 공덕을 모든 중생이 평등하게 얻게 하고 그들을
위하여 위없는 보리를 회향하는 것이다.(日本大藏經21, pp.99a~101a)
85) 다섯 가지 닦음[五修]에 대해『보살계본지범요기조람집』에서 육바라밀을 닦는 다
섯 가지 방법을 말하고 있다. ①가행하는 방법의 닦음[加行方法修]이니, 한 순간도
끊김없이 육바라밀을 가행하여 닦는 것이다. ②믿고 즐거워하는 닦음[信樂修]이
니, 육바라밀을 설하는 가르침을 의심없이 믿고, 즐거워하며 닦는 것이다. ③사유
하는 닦음[思惟修]이니, 여섯 가지 뜻을 사유하며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④방편
을 갖춘 수승한 지혜의 닦음[方便勝智修]이니, 광대하고 청정하며 빠른 방편을 갖
춘 지혜로써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다. ⑤남을 이익되게 하는 닦음[修利益他事修]
이니, 모든 여래는 이미 육바라밀을 원만히 구족하였으나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려는 본원력으로 항상 육바라밀을 닦는 것이다.(日本大藏經21, pp.99a~101a)
86) 저본에는「辨」으로 되어 있지만, 병본에 따라「辦」으로 바꾸었다.
『지범요기』 일권
持犯要記一卷87)
87)『한국불교전서』에는 저본으로 사용한『대정신수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간기
(刊記)가 소개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생략하였다.
끝
'한국전통사상 > 원효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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