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원효스님

대승육정참회 大乘六情懺悔

실론섬 2016. 9. 5. 16:45

대승육정참회 大乘六情懺悔 1)

석원효 지음
釋元曉撰
1) 저본(底本)은『한국불교전서』제1책(동국대학교출판부, 1979)에 수록(pp.842a1~
   843a7)된『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이다. 이에 대한 교감본으로 갑본(甲本)
   은『대정신수대장경』 제45권에 수록된『대승육정참회』이다.『한국불교전서』에
   서도 갑본(甲本)을 저본으로 하였다.

 

법계를 의지하여 비로소 유행하려는 사람이라면

사위의(四威儀)2)에서 한 가지도 헛되이 유행함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실상을 생각하여 업장(業障)3)을 녹이며,

널리 육도(六道)4)의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

若依法界, 始遊行者, 於四威儀, 無一唐遊,

念諸佛不思議德, 常思實相, 朽銷業障,

普爲六道無邊衆生, 歸命十方無量諸佛.

2) 사위의(四威儀)는 계율에 맞는 네 가지 행동을 가리킨다. 다니고[行], 머물고

   [住], 앉고[坐], 눕는[臥] 일을 대표로 들어 일상생활의 모든 몸짓이 부처님이 가

   르치신 계율에 꼭 들어맞음을 가리킨다.

3) 업장(業障)은 악업의 장애라는 뜻으로 말과 행동과 마음으로 악업을 지어 바른

   도를 방해하는 장애를 가리킨다.

4) 육도(六道)는 중생의 업에 따라 윤회하는 길을 여섯 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

   아귀·축생·아수라·인간·천상을 가리킨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르지 않으시나 또한 하나도 아니시니,

하나가 곧 일체이시고 일체가 곧 하나이십니다.

비록 머무르시는 바 없으나 머무르지 않으심이 없고,

비록 하시는 바가 없으나 하지 않으심도 없습니다.

낱낱 상호와 낱낱 털구멍이 가없는 법계에 두루하시고

미래제가 다하도록 막힘없고 걸림없으며 차별도 없으시고

중생을 교화하심에 휴식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시방삼세와 한 티끌 한 순간과,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으며,

대비와 반야는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으니

불공법(不共法)5)과 상응하기 때문입니다.

諸佛不異, 而亦非一, 一卽一切, 一切卽一.

雖無所住, 而無不住, 雖無所爲, 而無不爲.

一一相好, 一一毛孔, 遍無邊界,

盡未來際, 無障無礙, 無有差別,

敎化衆生, 無有休息. 所以者何,

十方三世, 一塵一念, 生死涅槃, 無二無別,

大悲般若, 不取不捨, 以得不共法相應故.

5) 불공법(不共法)은 부처님만이 지니신 부처님의 공덕을 말한다. 보통 열여덟 가

   지를 거론하여 성문, 연각, 보살과 다른 부처님만의 특징으로 설명한다. 십력(十

   力)·사무소외(四無所畏)·삼념주(三念住)·대비(大悲)의 18불공법이다.

 

지금 이 곳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6)에서

노사나불께서 연화대에 앉아

가없는 광명을 놓으시고 한량없는 중생을 모아

굴릴 것 없는 대승의 법륜을 굴리실 때에

보살대중은 허공에 두루 가득하여

받을 것 없는 대승의 법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희들은

한결같고 진실한 삼보의 허물없는 곳에 함께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귀머거리같고 장님같으니

불성이 없어서인가, 어째서 이러합니까.

무명으로 전도되어 허망하게 바깥 대상을 만들고

나와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갖가지 업을 지으니

스스로 [무명에] 덮고 가려서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이

마치 아귀가 강물을 대하면서 불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7)

그러므로 이제 부처님 앞에 깊이 부끄러움이 생겨

보리심을 일으켜 성심으로 참회(懺悔)8)합니다.

今於此處蓮花藏界, 盧舍那佛, 坐蓮花臺,

放無邊光, 集無量衆生, 轉無所轉大乘法輪,

菩薩大衆, 遍滿虛空, 受無所受大乘法樂.

而今我等, 同在於此一實三寶無過之處,

不見不聞, 如聾如盲, 無有佛性, 何爲如是.

無明顚倒, 妄作外塵, 執我我所, 造種種業,

自以覆弊, 不得見聞, 猶如餓鬼臨河見火.

故今佛前, 深生慚愧, 發菩提心, 誠心懺悔.

6)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padmagarbhalokadhātu)는 비로자나불이 주불(主佛)로

   계시는 세계를 말한다. 이 세계는 큰 연꽃으로 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 모든 나라

   와 모든 것이 간직되어 있으므로 연화장세계라고 한다. 그 세계의 형상에 대하

   여『화엄경(華嚴經)』에서는 “세계의 맨 밑에 풍륜(風輪)이 있고, 풍륜 위에 향수

   해(香水海)가 있고, 향수해 중에 큰 연화가 나고 그 속에 연화장세계가 있어 사

   방이 평평하고 깨끗하고 견고하며, 금강륜산(金剛輪山)이 둘렀다”고 한다. (大9,

   p.412b)

7) ‘항하의 강물을 사람은 물로 보나 아귀는 불로 본다’는 비유가 길장(吉藏, 549

   ~623)의『법화현론』(大34, p.442a18~28)과『이제의(二諦義)』(大45, p.99b27~c11)

   등에 보인다. 이후 이것은 ‘일수사견(一水四見)’으로 확장, 정형화되어 나타난

   다. 연수(延壽)의『심부주(心賦注)』에서는『유식론』을 인용하면서 하늘은 보배

   로 꾸며진 땅[寶嚴地]으로, 사람은 물로, 아귀는 불로, 물고기는 집[窟宅]으로 본

   다고 하였다.(卍63, p.143b20~22) 이 가운데 (아귀) 귀신은 고름 또는 불로 보고

   하천은 유리로, 물고기는 집으로 본다는 일수사견으로 바뀌기도 하였다.(卍50,

   p.874c10~12)

8) 참회(懺悔)의 참(懺)은 ksama의 음역이고 회(悔)는 의역으로서 음역과 의역을

   함께 표현한 말이다.

 

저와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무명에 취한 바 되어 죄를 지음이 한량없습니다.

오역(五逆)과 십악(十惡)9)을 짓지 않은 것이 없고,

스스로 짓고 남에게도 짓게 하였으며

남이 지음을 보고 따라 기뻐했습니다.

이와 같은 뭇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들께서는 깨달은 지혜로 아실 것입니다.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부끄러워하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절대로 짓지 않겠습니다.

我及衆生, 無始以來, 無明所醉, 作罪無量.

五逆十惡, 無所不造, 自作敎他, 見作隨喜.

如是衆罪, 不可稱數. 諸佛賢聖之所證知.

已作之罪, 深生慚愧, 所未作者, 更不敢作.

9) 십악(十惡)은 열 가지 악업으로서, 살생・도둑질・사음(邪婬)・거짓말・꾸미는

   말・나쁜 말・이간질하는 말・탐욕・화・어리석음의 열 가지이다. 앞의 셋은 몸

   으로 짓는 업, 다음 네 가지는 입으로 짓는 업, 마지막 세 가지는 생각으로 짓는

   업에 속한다.

 

이 모든 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뭇연이 화합한 것을 임시로 업이라고 합니다.

연에 즉해도 업이 없고 연을 여의어도 또한 없습니다.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생기지 않았으며

현재는 머무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은 것은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생함도 없습니다.

然10)此諸罪, 實無所有, 衆緣和合, 假名爲業.

卽緣無業, 離緣亦無. 非內非外, 不在中間.

過去已滅, 未來未生, 現在無住.

故所作以其無住, 故亦無生.

10) 판본의 결락으로 저본에서「□」로 표시되어 있으나「然」으로 추측된다.

 

앞서 있었다면 생한 것이 아니고

앞서 없었다면 무엇이 생한 것이겠습니까.

만약 ‘본래 없음’과 ‘이제 있음’의

두 가지 의미를 화합하여 ‘생겨남’이라고 한다면,

‘본래 없음’일 때에는 곧 ‘이제 있음’이 없고

‘이제 있음’일 때에는 ‘본래 없음’이 아니어서,

먼저와 나중이 미치지 않고, 있음과 없음이 합해지지 않아

두 가지 의미를 합할 수가 없으니 어디에서 ‘생함’이 있겠습니까.

의미를 합하는 것이 이미 논파되었고

따로 떼어놓는 것 역시 성립하지 않으니

합할 수도 없고 떼어낼 수도 없어 ‘있음’도 아니며 ‘없음’도 아닙니다.

‘없음’일 때에는 ‘있음’이 없으니 무엇을 상대하여 없다고 할 것이며,

‘있음’일 때에는 ‘없음’이 없으니 무엇을 의지하여 있다고 하겠습니까.

먼저와 나중, 있음과 없음의 의미가 모두 성립할 수 없습니다.

先有非生, 先無誰生. 若言本無, 及與今有,

二義和合, 名爲生者, 當本無時, 卽無今有,

當今有時, 非有本無, 先後不及, 有無不合,

二義無合, 何處有生. 合義旣壞, 散亦不成,

不合不散, 非有非無. 無時無有, 對何爲無,

有時無無, 待誰爲有. 先後有無, 皆不得成.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업의 자성은 본래 생함이 없습니다.

본래부터 ‘생함’이 있을 수 없으니

어느 곳에 ‘생함이 없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생함이 있음’과 ‘생함이 없음’을 모두 얻을 수 없으며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조차 얻을 수 없으니

업의 자성이 이와 같으며 모든 부처님도 또한 그러합니다.

當知. 業性本來無生. 從本以來, 不得有生,

當於何處, 得有無生. 有生無生, 俱不可得,

言不可得亦不可得, 業性如是, 諸佛亦爾.

 

경에서 이렇게 설하셨습니다.

“비유하면 중생이 업을 지을 때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지만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니라.

이와 같이 업의 자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본래 없던 것이 지금 있는 것도 아니고

원인없이 생긴 것도 아니니라.

지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지만

시절이 화합하기 때문에 과보를 받느니라.” 11)

如經說言.

“譬如衆生, 造作諸業, 若善若惡, 非內非外.

如是業性, 非有非無, 亦復非是12), 本無今有,

非無因生. 無作無受, 時節和合, 故得果報.”

11) (북본)『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권32(大12, 555b26~c1). ; (남본)『대반열반경』

    권30(大12, p.801b25~28).

12) 저본에는「亦復如是」로 되어 있으나 인용한『대반열반경』경문에 따라「亦復非

    是」로 바꾸었다.

 

수행자가 만약 이와 같은 실상을 자주자주 생각하면서 참회할 수 있으면

사중죄(四重罪)13)나 오역죄도 저지를 수 없으니

마치 허공이 불에 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방일하고 뉘우침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으며

업의 실상을 사유할 줄 모르면

비록 죄의 자성이 없지만 장차 지옥[泥梨]에 떨어질 것이니,

마치 환술로 만든 호랑이가 도리어 환술사를 삼켜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방 부처님 전에

깊이 참괴심을 내어 참회합니다.

行者, 若能數數思惟如是實相, 而懺悔者,

四重五逆, 無所能爲, 猶如虛空不爲火燒.

如其放逸, 無慚無愧, 不能思惟業實相者,

雖無罪性, 將入泥梨, 猶如幻虎還呑幻師.

是故當於十方佛前, 深生慚愧, 而作懺悔.

13) 사중죄(四重罪)는 네 가지 무거운 죄라는 의미로서 출가자의 사바라이죄를 가

    리킨다. ‘바라이’는 pārājika의 음역으로 ‘단두(斷頭)’, ‘불공주(不共住)’ 등으로

    번역한다. 살인・도둑질・음행・대망어의 네 가지로, 이것을 어기면 출가자에게

    는 목숨을 잃는 일로서 승단에 함께 살 수 없다는 의미를 갖는다. 도둑질의 경우

    부처님 당시의 사회에서 사형으로 처리될 만큼의 도둑질을 가리키며, 대망어는

    깨닫지 못하고 깨달았다고 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참회할 때에 참회한다고 여기지 말고

마땅히 참회의 실상을 사유해야 합니다.

참회할 대상인 죄가 이미 없는데

어찌 참회하는 주체가 있겠습니까.

참회할 주체와 참회할 대상이 모두 다 성립할 수 없으니

어느 곳에 참회의 법이 있겠습니까.

作是悔時, 莫以爲作, 卽應思惟懺悔實相.

所悔之罪, 旣無所有, 云何得有能懺悔者.

能悔所悔, 皆不可得, 當於何處, 得有悔法.

 

모든 업장에 대해 이같이 참회하고서는

육정(六情)14)의 방일함에 대해서도 참회해야 합니다.

저와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부터

모든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알지 못하고

망상으로 전도되어 나와 나의 것을 헤아려서

안으로는 육정을 세워 의지하여 식(識)을 내고

밖으로는 육진(六塵)15)을 만들어 실유라고 집착합니다.

이것이 모두 제 마음이 지어 낸 것으로

허깨비 같고 꿈 같아서 결국에는 있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하고

그 가운데 남자다 여자다 하는 등의 모습을 멋대로 헤아려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스스로 얽매이고 묶임으로써

오래도록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으면서도 벗어나기를 구하지 않으니

고요히 생각할 때 매우 기이합니다.

於諸業障, 作是悔已, 亦應懺悔六情放逸.

我及衆生, 無始已來, 不解諸法本來無生,

妄想顚倒, 計我我所, 內立六情, 依而生識,

外作六塵, 執爲實有.

不知皆是自心所作, 如幻如夢氷無所有,

於中橫計男女等相, 起諸煩惱, 自以纒縛,

長沒苦海, 不求出要, 靜慮之時, 甚可怪哉.

14) 육정(六情)은 육근을 가리키는 또 다른 번역어이다. 원효는 육정을 일심으로 환

    원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기신론소』에서도 귀명(歸命)을 설명하면서 “귀명이

    란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중생의 육근이 일심에서 일어나 스

    스로의 근원을 등지고 육진으로 치달아 흩어지는데 이제 목숨을 들어 육정을

    모두 거두고 그 본래의 일심인 근원에 돌아가기 때문에 귀명이라고 하며 귀명

    의 대상인 일심은 바로 삼보이다.”(大44, p.203b16~19. 又復歸命者, 還源義. 

    所以者, 衆生六根, 從一心起而背自原, 馳散六塵, 今擧命總攝六情, 還歸其本一

    心之原, 故曰歸命, 所歸一心, 卽是三寶故也.)라고 하고 있다.

15) 육진(六塵)은 육근의 인식 대상인 육경(六境)을 말한다. 육경이 육근을 통하여

    우리들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고, 참된 본성을 덮어 흐리게 하므로 진(塵)이라

    표현한다.

 

비유하면, 잠이 들었을 때에는 잠이 마음을 덮어서

망녕되이 제 몸이 큰 물에 떠내려 가는 것을 보면

단지 꿈꾸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실제로 물에 빠져 떠내려 간다 하면서 큰 두려움을 냅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다시 다른 꿈을 꾸며

내가 본 것이 꿈이고 실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심성은 총명하기 때문에 꿈 속에서 꿈인 줄 알고

물에 빠졌다 해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아직 몸이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지 못하고

머리를 흔들고 손을 내저으면서 완전히 깨어나려고 애를 씁니다.

완전히 깨어났을 때에는 지난 꿈을 좇아서 생각하고

물과 물에 떠다니던 몸이 없으며,

오직 본래 침상에 고요히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猶如眠時, 睡蓋覆心, 妄見己身大水所漂,

不知但是夢心所作, 謂實流溺, 生大怖懅.

未覺之時, 更作異夢, 謂我所見, 是夢非實.

心性聰故, 夢內知夢, 卽於其溺, 不生其懅,

而未能知身臥床上, 動頭搖手, 勤求永覺.

永覺之時, 追緣前夢, 水與流身, 皆無所有,

唯見本來靜臥於床.

 

긴 꿈도 또한 그러합니다.

무명에 덮인 마음이 망녕되이 육도를 만들고 팔고(八苦)에 흘러다닙니다.

안으로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훈습을 원인으로 하고

밖으로 모든 부처님의 대비원력에 의지하여야

비슷하게나마 믿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중생은 오직 잠자리의 긴 꿈을 실재라고 잘못 헤아립니다.

육진에 이기고 따르는 것과 남녀의 두 모습이

모두 저의 꿈이고 길이 실재 일이 없으니

무엇을 걱정하고 기뻐하며 무엇을 탐내며 성내겠습니까.

이와 같은 몽관을 자주자주 사유하여

점점 닦아서 꿈과 같은 삼매를 얻으며,

이 삼매를 의지하여 무생인(無生忍)16)을 얻어

긴 꿈에서 활연히 깨어나면

곧 본래 길이 유전함이 없으며

다만 일심(一心)17)이 일여(一如)의 침상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長夢亦爾.

無明覆心, 妄作六道, 流轉八苦.

內因諸佛不思議熏,

外依諸佛大悲願力,

髣髴信解.

我及衆生, 唯寢長夢, 妄計爲實.

違順六塵, 男女二相, 並是我夢, 永無實事,

何所憂喜, 何所貪瞋.

數數思惟, 如是夢觀, 漸漸修得如夢三昧,

由此三昧, 得無生忍, 從於長夢, 豁然而覺,

卽知本來永無流轉, 但是一心, 臥一如床.

16) 무생인(無生忍)은 무생법인이라고도 한다. 이 때의 ‘인(忍)’은 ‘지혜’, ‘깨달음’의

    의미이다.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실상법을 잘 알고, 그 진리에 머물러서 흔

    들리지 않는 지혜이다. 무생법인을 얻으면 낮은 계위로 떨어지는 일이 없는 불

    퇴전(不退轉)의 위치가 된다.『대지도론』에서는 “무생법인의 과를 얻으면 불퇴

    전의 지위에 머물러 수기를 받고 십지를 완성하게 되며 도량에 앉아 금강삼매

    를 얻는다.”(大25, p.235a14~16. 從是得無生法忍果, 住阿鞞跋致地得受記, 乃至

    滿十地, 坐道場得金剛三昧.)고 하였다.

17) 일심(一心)은 마음을 세계의 근본 원리로 설명하면서 만유의 실체인 진여(眞如)를

    표현한 말이다. 일심이 단순한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머물지 않고 깊은 사유가 담긴

    용어가 된 것은,『십지경(十地經)』의 “삼계가 오직 마음이다[三界唯心]”라는 부분을

    번역하면서 번역자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가 ‘심(心)’을 ‘일심’으로 번역하면

    서라고 한다. 일심이 전면으로 등장한 것은 『대승기신론』이다.『대승기신론』에서

    는 “일심법에 의지하여 심진여문과 심생멸문이 있다”고 하였다. 일심을 통해 본체

    인 진여의 모양과, 만유가 전개되는 상태를 설명한 것이다. 이 일심에 대해 원효스

    님은『대승기신론소』에서 “일심법을 세운 것은 처음의 의심(법에 대한 의심)을 제

    거하는 것이다. 이는 대승법엔 오직 일심만이 있으니 일심 밖에는 다시 다른 법이

    없으나 다만 무명이 자기의 일심을 미혹하여 모든 물결을 일으켜서 육도에 유전하

    게 됨을 밝히는 것이다. 비록 육도의 물결을 일으키지만 일심의 바다를 벗어나지

    아니하니, 진실로 일심이 움직여 육도를 일으키기 때문에 널리 구제하는 서원을 발

    하게 되는 것이요, 육도가 일심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

    는 것이다.”(大44, p.204b18~23. 立一心法者, 遣彼初疑. 明大乘法, 唯有一心, 一心

    之外, 更無別法, 但有無明, 迷自一心, 起諸波浪, 流轉六道. 雖起六道之浪, 不出一心

    之海, 良由一心動作六道, 故得發弘濟之願, 六道不出一心, 故能起同體大悲.)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벗어날 줄 알고 자주자주 생각하면

비록 육진을 반연하지만 실재라고 여기지 않으며

번뇌가 부끄러워 스스로 게으름을 피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을 ‘대승육정참회’라고 합니다.

若離能如是, 數數思惟, 雖緣六塵, 不以爲實,

煩惱羞愧, 不能自逸, 是名大乘六情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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