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提婆達多의 비범성 고찰/염중섭

실론섬 2016. 10. 19. 21:26

提婆達多의 비범성 고찰

염중섭 (자현 )/동국대학교

 

Ⅰ. 序論

Ⅱ. 태생적인 비범성

    1. 탄생의 날자

    2. 형태적인 특징

Ⅲ. 붓다와의 技藝競爭

    1. 기예경쟁

    2. 捔術爭婚

Ⅳ. 출가 후의 비범성

    1. 출가 후의 교단생활

    2. 제바달다에 관한 평가

       1) 사리불과 아난의 평가

       2) 목건련의 평가

       3) 붓다의 평가

 

Ⅴ. 結論

 

[요약문]

提婆達多는 붓다를 상대로 破僧伽를 단행한 전무후무한 인물이

다. 이를 통해서 불교전적들 속에는 제바달다가 일방적으로 악인으

로만 묘사되어 있어 사실적인 접근에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

나 제바달다와 관련된 기록들 중에는 단편적이나마 제바달다의 탁

월한 비범성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이는

제바달다의 파승가가 단순히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서 파생하는 것

이 아닌 승가와 승가라는 집단과 집단 사이의 문제라는 점에서 강한

타당성이 확보될 수 있는 부분이다. 즉, 반대파의 우두머리로서 제

바달다에게 인물적인 비범성이 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측면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제바달다에게 탁월한 비범성이 없었다면 파승가와 관련된

아사세의 지지나, 다수의 문도들을 확보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자

연스럽게 이를 통한 파승가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승가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의

미를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요약문 본고에서는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관하여 먼저 불전 유에 기록되

어 있는 태생적인 비범성과 왕궁시절의 붓다와의 경쟁관계에 대해

서 고찰해 보고, 다음으로 율장 유에 기록되어 있는 교단의 인식과

평가에 관해서 정리해 보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의 비

범성에 대한 기록은 불전 유의 상징적인 측면과 율장 유의 사실적인

내용의 두 가지 층차가 존재하며, 선행하는 율장의 사실적 측면이

후행하게 되는 불전의 종교적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을

인식해 보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이해는 破僧事의 전체 구조에 대한 이

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파승사는 불교라는 종교 내적인 사건이

지만, 동시에 교단사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판단과

더불어 사실적 판단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사실

적인 판단에 입각한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접근은 파승사에 대

한 기존의 관점적인 이해를 진일보시킬 수 있다고 하겠다.

 

Ⅰ. 序論

 

破僧伽는 교조인 붓다를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불교적으로 용납

될 수 없는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 불전 類의 전적들은 제바달다가

왕궁시절의 붓다와 技藝競爭, 혹은 捔術爭婚에서 패배하여 붓다에

게 악심을 품은 것을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1) 그러나 율장 유의 전

적들에는 제바달다가 출가 때부터 파승가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가 阿闍世의 지지를 얻어 다수의 문도들을 성취한 후 붓다에게 교단

승계 요구를 했다가 거절당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2) 그리

고 제바달다는 파승가를 단행한 결과로 인하여 결국 모든 善根이 단

절되어 무간지옥에서 1겁을 지내야 한다는 종교적 단죄를 설시하고

있다.3) 즉, 전체적으로 불전과 율장의 제바달다에 대한 기록들은 이

를 개인의 문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1)  廉仲燮,「破法輪僧의 원인에 관한 고찰-佛傳과 律藏의 관점차이와 화해를 중심으로」,
  『東洋哲學硏究』 제52집(2007), 384 ~ 396쪽.
2)「破法輪僧의 원인에 관한 고찰-佛傳과 律藏의 관점차이와 화해를 중심으로」,『東洋哲
   學硏究』제52집(2007), 396 ~ 410쪽
3)『四分律』46,「破僧揵度第十五」『大正藏』22, 909b·c) ;『十誦律』37,「雜誦中調達事之
   二」『( 大正藏』23, 265c~266a) ;『善見律毘婆沙』13, (『大正藏』24, 769a) ;『毘尼母經』4,
  『( 大正藏』24, 823a).

 

그러나 우리는 파승가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승가와 승

가라는 집단 간의 이견 차에 의한 문제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제바달다에게는 500명 이상이나 되는 다수의 동조자들이 존재

하고 있는 것이다.4) 제바달다가 이러한 다수의 문도들을 확보하는

데 있어서 아사세의 경제적 지원은 분명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

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제바달다의 인물적인 비범성 역시

한 몫 했다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경제적 지원만으로 붓다를 상

대로 하는 파승가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4) 제바달다의 파승사에는 핵심동조자 4인과 단순지지자 500명이라는 이중구조가 등장
   하고 있다. 그러므로 제바달다의 지지자들은 최소 500명 이상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
   이다.『四分律』46,「破僧揵度第十五」『( 大正藏』22, 909b) ;『五分律』25,「第五分初破
   僧法」『( 大正藏』22, 164a·b) ;『十誦律』37,「雜誦中調達事之二」『( 大正藏』23, 264b ~
   265a) ;『빨리율(Vinaya)』,「cullavagga」, 7破僧犍度, pp. 197 ~ 199 ; 『鼻奈耶』5,「僧
   殘法之三破僧戒」『( 大正藏』24, 859a) ;『毘尼母經』4, (『大正藏』24, 823a) ;『破僧事』20,
  『( 大正藏』24, 202c).

 

실제로 제바달다와 관련된 불전과 율장의 기록들은 제바달다에

대한 비판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

단편적이나마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러

한 기록들은 제바달다를 종교적으로 단죄하고 있는 불교 내의 기록

들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제바달다는 비판적인 관점에

서도 그 비범성이 인정될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소유한 인물인 것이다.

 

이 점이야 말로 제바달다가 붓다와 같은 위대한 인격을 상대로 파

승가를 하게 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제바

달다에게 탁월한 비범성이 없었다면 아사세의 지지나, 다수의 문도

들을 확보할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자연스럽게 이를 통한 파승가도

불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파승가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제바달

다의 비범성에 대한 고찰은 중요한 의미를 확보할 수가 있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관하여 먼저 불전 유에 기록되

어 있는 태생적인 비범성과 왕궁시절의 붓다와의 경쟁관계에 대해

서 고찰해 보고, 다음으로 율장 유에 기록되어 있는 교단의 인식과

평가에 관해 정리해 보았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의 파승가

에 대한 보다 타당성 있는 연결고리를 확보하게 된다고 하겠다.

 

Ⅱ. 태생적인 비범성

 

제바달다는 붓다의 만년인 72 ~ 73세 무렵5) 붓다를 상대로 破法輪

僧을 단행6)한 인물로 불교적으로는 逆罪를 통한 無間業7)이라는 ‘종

교적 단죄’를 거친 최대의 악인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전 類의 전적들에는 붓다의 대제자들에게나 있을 법한 태생적인 비

범함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된다.

5)『善見律』에 阿闍世王이 즉위하고 8년 후에 붓다가 入滅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붓다
   의 入滅을 보편적인 견해에 의거하여 80으로 잡고, 阿闍世의 즉위년에 提婆達多의 破僧
   伽가 이루어졌다고 가정하면 이때 붓다의 春秋는 73세가 된다.『善見律毘婆沙』2, (『大
   正藏』24, 687a), “爾時阿闍世王.登王位八年佛涅槃.” ; 장 부아슬리에 著, 이종인 譯,
  『붓다-꺼지지 않는 등불』, (서울: 時空社, 2004), 95쪽.
6)『四分律』46,「破僧揵度第十五」『( 大正藏』22, 909b) ;『五分律』25,「第五分初破僧
   法」『( 大正藏』22, 164a·b) ;『十誦律』37,「雜誦中調達事之二」『( 大正藏』23, 264b ~
   265a) ;『摩訶僧祇律』26,「明雜誦跋渠法之四」『( 大正藏』22, 443a) ;『빨리율(Vinaya)』,
  「cullavagga」, 7破僧犍度, pp. 197 ~ 199 ;『毘尼母經』4, (『大正藏』24, 823a) ;『破僧事』
   20, (『大正藏』24, 202c).
7)『阿毘達磨大毘婆沙論』115,「業蘊第四中惡行納息第一之四」『( 大正藏』27, 85a), “云何
   業障.謂五無間業.何等爲五.一害母.二害父.三害阿羅漢.四破僧.五惡心出佛身血.” ; 『阿
   毘曇心論經』2,「業品第三 別譯」『( 大正藏』28, 843b), “業障者五無間業.所謂殺母殺父殺
   阿羅漢破僧惡心出佛身血.作此業已必定次生無間地獄故名無間.” ;『大方等大集經』19,
  「寶幢分中往古品第二」『( 大正藏』13, 113a), “五逆無間重罪.”

 

일반적으로 붓다의 주목할 만한 대제자들에게는 붓다에게서와도

같은 숙세에 걸친 선업을 축적하는 인연을 성취하고, 그 결과로 금

생에 태생적인 비범함을 획득하게 된다는 본생과 관련된 측면이 수

반된다. 그런데 제바달다 같은 경우에는 본생담 역시 악역으로 가득

할 뿐, 선업이라고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들다.8) 그도 그럴 것이 제바

달다의 본생담은 보통 붓다와 대비되어 등장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럴 경우 붓다가 善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바달다는 필연적으로

惡이 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9)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바달다가 태

생적인 비범함을 성취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제바

달다가 일반적인 인격과는 차이가 있는 범상치 않는 인물이라는 한

방증이 되기에 충분하다.

8) 南傳의『밀린다왕문경』등에서 일부가 목격되기도 한다.이미령 譯,「7. 데바닷다와 붓
   다의 우열」, 『밀린다왕문경2』, (서울: 民族社, 2007), 37 ~ 43쪽 ; 藍吉富 著, 원필성 譯,
  『데바닷다, 그는 정말 惡人이었는가』, (서울: 雲舟社, 2004), 140 ~ 141쪽.
9) 일반적인 본생담들에서 제바달다는 언제나 악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럴 경우 과
   거세에 붓다에게 해를 끼친 제바달다가 금생에도 해를 끼치게 되어 인과론상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로 인하여『佛說興起行經』권下(「佛說地婆達兜擲石緣經第七」, 
  『大正藏』4, 170b·c) 등의 일부 본생담들에는 과거세에 붓다가 제바달다에게 악행을 
   하여 금생에 그 과보를 받게 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도 존재하고 있다.

 

1. 탄생의 날짜

제바달다의 태생적인 비범함으로 먼저 주목될 수 있는 것은 제바

달다의 탄생 일자에 관한 것이다. 제바달다의 탄생일에 대해서는

『佛說十二遊經』全1에 “조달은 4월 7일생이고 붓다는 4월 8일생이

며, 붓다의 아우인 난타는 4월  9일생이고 아난은 4월 10일생이다”

10)라는 구절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가 있다. 이 구절은 당나라 道宣이

편찬한『釋迦氏譜』全1에서도 살펴지는데,11) 이는『십이유경』의 해

당 구절을 옮겨 적은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확보할 수는 없

다. 즉, 제바달다의 탄생일을 적시하고 있는 기록은『십이유경』이

유일한 것이다.

10)『佛說十二遊經』全1卷, (『大正藏』4, 146c), “調達以四月七日生.佛以四月八日生.佛弟
    難陀四月九日生.阿難以四月十日生.”
11)『釋迦氏譜』全1卷, (『大正藏』50, 87a)

 

제바달다의 탄생일이 4월 7일이라는 것은 붓다의 탄신일인 4월 8

일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탄신일이 과연 며칠인

가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할만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12) 4

월 8일은 분명 4聖諦 8正道나, 혹은 8만 4천 법문에서와 같이 ‘완전

성의 의미’로 사용된 것에 분명하다. 즉, 붓다의 탄신일인 4월 8일은

완전성을 함유한 붓다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미라

고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

12) 이는 크게 8일 설과 15일 설로 대별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長阿含經』4,「遊行經第
    二後」『( 大正藏』1, 30a), “八日如來生 八日佛出家 八日成菩提 八日取滅度 八日生二
    足尊 八日出叢林苦 八日成最上道 八日入泥洹城 二月如來生 二月佛出家 二月成菩提 八
    日取涅槃 二月生二足尊 二月出叢林苦 二月得最上道 八日入涅槃城” ; 『佛般泥洹經』
    上, (『大正藏』1, 175c), “經曰佛以四月八日生.八日棄國八日得道八日滅度.” ; 『大唐
    西域記』6,「劫比羅伐窣堵國」『( 大正藏』51, 902a), “菩薩以吠舍佉月後半八日.當此
    三月八日.上座部則曰.以吠舍佉月後半十五日.當此三月十五日.”

 

그러나 불교에서는 붓다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제바달다의 4월 7

일은 붓다의 德에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그 역시도 탁월한 존재

라는 의미가 된다. 즉, 이 기록은 제바달다에게도 비범한 德性을 부

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제바달다의 4월 7일과 관련되어 주목되는

것 중 하나는 같이 기록되어 있는 아난의 탄생일이 4월 10일이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붓다가 기준이 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4월 7일은 4월

10일에 비해서 4월 8일에 더 근접해 있다. 그러므로 이는 곧 제바달

다가 아난보다도 더 뛰어난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가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아난은 붓다의 시자13)인 동시에 經

藏의 결집자14)로서 직계제자로는 특별히 장수하면서,15) 대가섭 이후

로 불교의 수장적인 인물이 되어16) 많은 업적을 남기는 인물이다. 그

결과 아난은『阿育王經』권2 등에서는 아소카왕으로부터 가장 많은

보시를 받는 인물로 등장하기에 이르는17) 근본불교와 초기불교에 있

어서 사리불·대가섭과 더불어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그런데

제바달다가 이러한 아난보다도 오히려 더 탁월한 덕성을 소유한 인

물이라는 것은, 제바달다의 비범성이 매우 뛰어남을 의미한다고 밖

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13)『中阿含經』8,「(三三)未曾有法品侍者經第二(初一日誦)」『( 大正藏』1, 471c ~ 475a) ;
   『佛般泥洹經』下, (『大正藏』1, 169a) ; 『Thera-gāthā(長老偈)』,「1039 ~ 1043」 ;
   『大智度論』2,「初品總說如是我聞釋論第三(卷第二)」『( 大正藏』25, 68a).
14)『四分律』54,「集法毘尼五百人」『( 大正藏』22, 966a ~ 971c) ;『五分律』30,「第五分之
    九五百集法」『( 大正藏』22, 190b ~ 192a) ;『十誦律』60,「五百比丘結集三藏法品第一」
   『( 大正藏』23, 445c ~ 453b) ;『摩訶僧祇律』32,「明雜跋渠法之十」『( 大正藏』22, 489c ~
    493a) ;『빨리율(Vinaya)』, 「cullavagga」, 11五百犍度, pp. 284 ~ 293.
15) 申星賢,「初期佛敎 敎團에서 迦葉과 阿難의 關係」,『佛敎學報』 제36호(1999), 256쪽,
    “(아난은)『法句經註』에 의하면 120세에 돌아갔다고 한다.”
16)『阿育王傳』4,「摩訶迦葉涅槃因緣」『( 大正藏』50, 114b).
17)『   雜阿含經』18,「弟子所說誦第四品-六○四」『( 大正藏』2, 168b) ;『阿育王經』2, 
   「見優波笈多因緣品第二」『( 大正藏』50, 138c).

 

물론 제바달다와 붓다, 그리고 난타와 아난의 탄생일이 실제로 하

루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충분

한 종교적 상징성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또한 이러한 기

록이 불교적인 관점에 의해 종교적 단죄를 거친 제바달다를 기술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우리는 이를 통해서 제바달다의 비범

성을 충분히 인식해 볼 수가 있게 된다고 하겠다.

 

2. 형태적인 특징

 

탄생일과 함께 제바달다의 태생적인 비범성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형태적인 특징이다. 제바달다의 형태적인 특징으로 관련

전적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은 ‘德相’에 관한 측면과 ‘身長’에 관한

것이 있다.

 

"붓다의 종제인 제바달다와 난타, 그리고 손타라난타 등은 혹 30相과 31

相이 있었고, 혹은 다시 비록 32相이 있었으나 (그) 相이 불분명하였

다.18) -같은 구절이『釋迦譜』全1에도 등장함."19)

18)『過去現在因果經』2, (『大正藏』3, 628b), “太子從弟提婆達多.次名難陀.次名孫陀羅難
    陀等.或有三十相三十一相者.或復雖有三十二相相不分明.”
19)『釋迦譜』2,「釋迦降生釋種成佛緣譜第四之二(出因果經)」『( 大正藏』50, 19b).

 

"난타와 제바달다 등에게는 모두 30상이 있었다."20)

20)『大智度論』4,「初品中菩薩釋論第八」『( 大正藏』25, 92a), “難陀提婆達等皆有三十相”

 

"(제바달다가) 스스로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30상이 있어서 붓다에게

비해 별로 부족하지 않다.’"21)

21)『大智度論』14,「釋初品中羼提波羅蜜義第二十四」『( 大正藏』25, 164c), “自念.我有
    三十相減佛未幾.”

 

"제바달다의 몸에는 30상이 있다."22)

22)『大智度論』14,「釋初品中羼提波羅蜜義第二十四」『( 大正藏』25, 165a), “提婆達多身有
    三十相.”

 

"제바달다와 난타에게는 30상이 있고 32상은 없었다."23)

23)『大智度論』88,「釋六喩品第七十七」『( 大正藏』25, 683a), “提婆達難陀.有三十相無
    三十二相.”

 

"나에게는 30상이 있어서 붓다에 비해 별로 부족하지 않다."24)

24)『大唐西域記』6,「室羅伐悉底國」『( 大正藏』51, 900a), “我相三十減佛未幾.”

 

이상의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가 30상을 갖춘 인물이

라는 것을 파악해 볼 수가 있다. 제바달다가 30상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붓다가 겸비한 32상에 비해 단지 2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32

상은 인도 상법의 영향 하에 파생된 위대한 인물이 갖춘다는 德相에

다름 아니다.25) 그런데 제바달다는 이러한 덕상을 무려 30종이나 갖

추고 있는 것이다.

25) 다카다 오사무 著, 이숙희 譯,『佛像의 誕生』, (서울: 예경, 1994), 49쪽 ; 벤자민 로울
    렌드 著, 이주형 譯,『印度美術史-굽타시대까지』, (서울: 예경, 1999), 150쪽.

 

물론 32相說이 근본불교시대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그 중

일부는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몇몇 相에 관한

것은 불상이 만들어지고 난 후에 불상을 보고서 역으로 성립된 것이

기 때문에 32상의 최종적인 완성은 불상의 성립과 보편보다도 오히

려 시기적으로 늦다고 할 수가 있다.26)

26)  최완수 著,『韓國佛像의 원류를 찾아서1』, (서울: 대원사, 2002), 44쪽.

 

불교에서의 불상은 無佛像時代라는 불멸 후 500년간의 공백기를

거친 후인 기원전후에야 비로소 발생되기 때문에 32상의 최종적인

완성은 그 이후라야 가능하게 된다.27) 그러므로 이와 같은 기록 역시

기원후에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7)『佛像의 誕生』, (서울: 예경, 1994), 185 ~ 186쪽.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후대에 부가된 것이라는 측

면이 아니다. 왜냐하면, 32상설이 후대의 소산일 뿐이라고 한다면

붓다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

기에서 주목되어야 할 부분은 제바달다가 승단의 호의를 입을 수 없

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30상이나 갖추고 있다는 기록의 측면일 것

이다. 왜냐하면, 이는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모종의 전승이 반

영된 결과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붓다와 경쟁, 혹은 대립되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제바달다

를 의도적으로 탁월한 인물로 묘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제바달다

를 붓다와 대립하는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제바달다에게 덕상을 부

여한다는 것은 납득되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왜냐하면, 30상이나

되는 덕상을 가진 인물이 파승가라는 악행을 할 수 있다면, 붓다에

게 있는 32상 역시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大智度論』권4에 언급되어 있는 제바달다와 난타가 공히

30상을 가지고 있다는 점 역시 주목되어야 할 점이다.28) 난타는 붓

다의 이복아우로서 불전 유의 전적들에서는 붓다의 출가이전 붓다

와 더불어 가장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로 등장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

물이다. 그런데 제바달다는 이러한 난타와 대등한 위치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는 제바달다의 비범성이 붓다를 제외하고는 최상급이라

는 의미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와 같은 측면은 불전 유의 전적들이 성립될 당시의 승단인식과도 결

코 유리되는 것이 아닐 것이며, 현장의 인도순례시점까지도 이와 같

은 전승이 답습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제바달다의 비범성

에 대한 인식이 후대까지도 보편적으로 편재해 있었다는 것을 파악

할 수 있게 해준다.

28) 難陀가 30相을 갖추고 있었다는 기록은『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권11에서도 살
    펴진다.『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11,「第二門第十子攝頌之餘難陀因緣」『( 大正
    藏』24, 251a), “世尊有弟名曰難陀.身如金色具三十相短佛四指.”

 

다음으로는 제바달다의 신장에 관한 것으로, 이는『십이유경』全

1에 “조달의 신장은 1장 5척 4촌이고, 붓다의 신장은 1장 6척이며,

난타의 신장은 1장 5척 4촌이고, 아난의 신장은 1장 5척 3촌이었

다”29)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도『釋迦氏譜』全1에서도 살펴지

는 바이다.30)

29)『佛說十二遊經』全1卷, (『大正藏』4, 146c), “調達身長丈五四寸.佛身長丈六尺.難陀身
    長丈五四寸.阿難身長丈五三寸.”
30)『釋迦氏譜』全1卷, (『大正藏』50, 87a).

 

제바달다의 키가 1장 5척 4촌이라는 것은 당연히 붓다의 신장인 1

장 6척에 대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신장이 1장 6척이

라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것으로 역시 신장에 있어서 완전성을 의

미한다고 할 수 있다.31) 그런데 제바달다는 이와 얼마 차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또한 아난은 제바달다 보다 작은 1장 5척 3촌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제바달다의 형태적인 비범성을 여실히 드러

내는 점이라고 하겠다.

31)『大智度論』10,「初品中十方菩薩來釋論第十五之餘」『( 大正藏』25, 127c) ;『佛說灌頂
    伏魔封印大神呪經』7, (『大正藏』21, 515a) ;『大唐西域記』9,「摩伽陀國下」『( 大正藏』
    51, 920a), “其先有婆羅門聞釋迦佛身長丈六.常懷疑惑未之信也.乃以丈六竹杖欲量佛
    身.恒於杖端出過丈六.如是增高莫能窮實.”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의 태생적인 비범성에 관한 측면

을 ‘덕상’과 ‘신장’의 측면에서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내용들 역시 다분히 상징적인 것으로 實在적인 측면은 아니다. 그러

나 종교적 상징의 측면에서 조차 제바달다의 비범성을 완전히 삭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역으로 제바달다의 비범성을 반증하는 역

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악의 본생담만을 갖춘 제바달다가 태생적인 비범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를 파생하면서까

지도 승단은 제바달다의 비범성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은 제바달

다가 붓다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충분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Ⅲ. 붓다와의 技藝競爭

 

인도문화는 윤회론이라는 배경문화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성립

시키게 되는데,32) 이는 어떤 드러난 사건의 이면적인 원인에 대한 해

법을 제공하는 것이다. 붓다가 제바달다에게 파승사와 관련된 불합

리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게 되는 것은 붓다의 신성성과 완전성에

비추어 볼 때, 쉽게 납득될 수 없는 일이다. 이로 인하여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붓다와 제바달다 간에 얽힌 전세의 숙업에 관한 모종의 본

생담이 만들어지게 된다.

32) 廉仲燮,「불교의 윤회론 수용에 있어서의 재고점」,『文學/史學/哲學』제9호(2007),
    252 ~ 256쪽 ; 尹浩眞 著,『無我·輪廻問題의 硏究』, (서울: 民族社, 1996), 30쪽 ; 泰本
    融,「原始佛敎の無我硏究」,『東洋學術硏究』, 제13권 5호(1974), p. 16.

 

본생담은 불교경전의 형식적 갈래를 규정짓는  9分敎, 내지 12分

敎의 하나로서 독립된 범주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성립시

기가 비교적 이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33) 특히 고층의 경전들 속

에서도 붓다가 현상적인 불합리한 사건들34)에 대해서 본생담을 끌어

들여 해법을 제시하는 모습을 다수 보이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본생담에 관한 측면의 성립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라고 할 수가 있

다. 그렇지만 물론 이와 같은 본생담들이 모여서 독립된 범주를 구성

한다는 것은 당연히 후대의 정리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3) 平川彰 著,『インド佛敎史上』, (東京: 春秋社, 2006), pp. 100 ~ 103 ; 에띠엔 라모뜨
    著, 浩眞 譯,『印度佛敎史1』, (서울: 時空社, 2006), 283 ~ 290쪽.
34) 붓다를 시해하기 위한 암살자의 파견이나, 술 취한 코끼리를 이용한 사건, 또는 靈鷲
    山에서 바위를 던져 出佛身血하는 사건이나 破僧伽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제
    바달다의 붓다 시해시도가 전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는 전적은 다음과 같다.『四分律』4,
   「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2b ~ 593a) ;『五分律』3,「第一分之二第」『( 大正藏』
    22, 19a ~ 20a) ;『十誦律』36,「雜誦第一(調達事上)」『( 大正藏』23, 259a ~ 262c) ; 빨리
    율(Vinaya)』,「cullavagga」, 7破僧犍度, pp. 189 ~ 196 ;『鼻奈耶』5,「僧殘法之三破僧
    戒」『( 大正藏』24, 869b ~ 872b) ; 『毘尼母經』4, (『大正藏』24, 823c) ; 『破僧事』14, 
    (『大正藏』24, 173c) ;『破僧事』16 ~ 20, (『大正藏』24, 184c ~ 201c).

 

본생담은 보통 그 대다수가 붓다와 관련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는

데, 이 중 보살행과 관련된 3大阿僧祗劫(3阿僧祇劫)35) 547生을 다루

고 있는 남방경전인「小部」의『Khuddaka-Nikāya』가 가장 방대

하다.36)『대정장』에서는 권3~4의「本緣部」가 본생담과 관련되어서

집취되어 있으며, 이 속에는 또한 붓다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불전

유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붓다의 생애 역시 본생담과 상호

유리될 수 없는 관계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5) 菩薩道의 수행기간이 3大阿僧祗劫이라는 것은『增壹阿含經』권16·30(「高幢品第
    二十四之三-八」,『大正藏』2, 630a ;「莫畏品第四十一-五」,『大正藏』2, 746b) 
    등의 이른 시기의 전적에서부터 발견되는 것이다.
36) 3大阿僧祗劫說이 547생과 연관되는 것은 남방의『본생담』이 547생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譯經委員會 譯,『本生經1 ~ 5』, (서울: 東國譯經院, 1988), 參照.

 

이와 같은 본생담에서 주목되는 것 중 하나는 본생담 속에서 惡役

을 담당하는 거의 전형적인 인물로 제바달다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본생담 속에서 붓다의 수행을 방해하는 것으로 등장하는 제바달다

는 英雄神話에서 영웅을 방해하는 방해꾼37)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37) Joseph Campbell 著, 이윤기 譯,『千의 얼굴을 가진 英雄』, (서울: 民音社, 1999), 45쪽.

 

본생담에서 제바달다의 출현빈도는 제바달다의 파승가가 승단에

남긴 깊은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것인 동시에 붓다와 제바달다를 상

호 경쟁적, 혹은 대립적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는 불전의 기록자들 이전에 이미 승단 내에 붓다와 제바달다를 경쟁

과 대립적 인식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 기예경쟁

붓다와 제바달다 간에 다수의 숙세에 걸친 악연의 본생담이 갖추

어졌다면, 윤회론에 입각하여 현생에서도 당연히 경쟁과 대립의 양

상이 초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현생에서의 붓다와 제바달다 간의 무술과 관련된 경쟁양상에 대

한 불전 類 전적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전적                                                내용                                                       

1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권3. 38):      여러 석가족들이 輪刀로 나무 베는 것을 겨루고

                                                                           다시금 활쏘기를 하는데, 첫째가 붓다, 둘째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가 됨.                                              

2  過去現在因果經』 권2. 39):                           정반왕이 개최한 무술시합에서 500석가족들이

                                                                           활쏘기와 씨름을 겨룸. 첫째가 붓다가 되고, 난타와

                                                                           제바달다는 백중세를 보임.                                       

3  『佛說衆許摩訶帝經』 권4. 40):                       여러 석가족들의 활쏘기에서 첫째가 붓다, 둘째

                                                                           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가 됨.                              

4  『大唐西域記』 권6. 41):                                  여러 석가족들의 힘과 기예를 겨루는 시합에서

                                                                           제바달다가 붓다에게 패함.                                      

38)『破僧事』3, (『大正藏』24, 111b).
39)『過去現在因果經』2, (『大正藏』3, 628b·a).
40)『佛說衆許摩訶帝經』4, (『大正藏』3, 942b·c).
41)『大唐西域記』6,「劫比羅伐窣堵國」『( 大正藏』51, 901a).

 

이를 통해서 우리는 여러 석가족들이 참가한 활쏘기, 혹은 활쏘기

와 씨름대회에서 붓다와 제바달다가 경쟁 끝에 붓다가 승리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활쏘기가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석가족이 활에 능했다는 전승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42)

42)『佛本行集經』13,「捔術爭婚品下」『( 大正藏』3, 710c) ;『四分律』41,「衣揵度之三」
   『( 大正藏』22, 860c).

 

이 외에도 역량의 우열을 드러내 주는 사건으로『파승사』권3에

는 가비라(劫比羅)와 天示城(天臂城) 사이에 있는 盧奚多라는 물줄

기를 善堅樹가 가로막아 생기는 물난리에 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이때에 善堅樹를 제거하고 물길을 트기 위해 힘센 여러 석가족들이

도전하게 되는데, 이때 제바달다는 조금 끌어내고, 난타는 조금 땅

에서 들어 올리는데 반해서, 붓다는 손으로 공중에 던져 두 동강을

내게 된다.43) 이와 같은 유사한 내용은『중허마하제경』권4에서도

등장하고 있는데,44) 이 또한 양자 간 역량의 우열을 분명히 하는 사

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3)『破僧事』3, (『大正藏』24, 112a·b).
44)『佛說衆許摩訶帝經』4, (『大正藏』3, 942c ~ 943b).

 

석가족의 기예경쟁과 우열관계를 보면, 붓다가 최고이고 그 다음

이 난타이거나 혹은 난타와 제바달다가 백중세라는 것이다.적인론

붓다와 난타·제바달다 사이에는 많은 나이차이가 있으므로45) 붓다

가 왕궁시절 이들과 기예경쟁을 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불교의

최고 이상인격인 붓다와 경쟁할 수 있다는 설정만으로도 제바달다

의 비범성에 대한 승단인식을 우리는 확인해 볼 수가 있다. 특히 제

바달다와 같은 경우는 종교적 단죄를 거친 인물로 크게 폄하된 인식

하에 있다는 점에서 더욱이 주의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난

타가 붓다의 이복아우로서 붓다의 후광을 입어 긍정적으로 평가되

는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바라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바달

다의 비범성은 난타와 비견될 정도인 것이다. 또한 『維摩經』 권上의

「弟子品」에서 소위 10대 제자로 일컬어지는 인물들46) 중 5명이나 석

가족(가비라국) 출신이라는 점47)을 감안한다면, 석가족의 경쟁구조

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바달다의 비범성은 크게 두드러진다

고 할 수 있겠다.

44)『佛說衆許摩訶帝經』4, (『大正藏』3, 942c ~ 943b).
45) 붓다의 종제들의 순서와 나이에 관해서는 廉仲燮,「‘4男 8子’의 順序에 관한 고찰」,
     『佛敎學硏究』 제18호(2007)을 참조하라.
46)『維摩詰所說經』上,「弟子品第三」『( 大正藏』14, 539c ~ 544a).
47) 10대제자의 출신국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①智慧第一舍利弗:마가다국·②神
    通第一摩訶目犍連:마가다국·③頭陀第一摩訶迦葉:마가다국·④解空第一須菩提:고
    살라국의 사위성·⑤說法第一富樓那:가비라국·⑥論義第一摩訶迦旃延:阿般提國·
    ⑦天眼第一阿那律:가비라국·⑧持律第一優波離:가비라국·⑨密行第一羅睺羅:가비
    라국·⑩多聞第一阿難:가비라국

 

2. 捔術爭婚

불전에 따라서 붓다와 제바달다의 기예경쟁 내용은 붓다의 결혼

이라는 역사적 사실과 결합되어 각술쟁혼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즉, 기예의 경쟁이 단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결혼에

이르기 위한 신부의 쟁취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당

시의 풍습에 결혼당사자를 취하는 방법으로 무술대회를 개최하여 

우승자에게 권리가 주어진다는 대전제에 의한 것48)으로 이를 통해서

爭婚의 양상이 파생하게 된다.

48) 이에 관해서는 의론의 여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사료된다.자닌 오브와예 著, 임정재
    譯,『古代 印度의 日常生活』, (서울: 우물이 있는 집, 2004), 58쪽, “… 크샤트리아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특권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두 가지 결혼 형
    태를 들 수 있다. 그 하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군사작전을 하는 도중
    에 여성을 강제로 납치하여 결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술시합에서 1등한 사람
    이 신부를 차지하는 것이다.”

 

결혼을 전제로 하여 무술시합이 벌어지게 된다는 전적들의 내용

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전적                                     내용                                                                                

1    『佛本行集經』 권12~13. 49):      ① 耶輸陀羅(Yaśodharā)의 부친인 摩訶那摩가 석가족의 풍

                                                             습상 기능을 겨루어 우수한 사람과만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하여, 500

                                                             석가족들이 야쇼다라를 얻기 위해 기예를 경쟁함 ② 첫째로 학문적 기능을

                                                             겨룸 ③ 둘째로 무예를 겨룸. 활쏘기·코끼리 다루기·말 다루기·씨름을

                                                             겨루어 첫째가 붓다, 둘째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 넷째가 아난이 됨.

                                                             권13. 50)51): ④ 釋種大臣인 檀荼波尼의 딸 瞿多彌를 얻기 위해서 다시 붓

                                                             다·난타·제바달다가 경쟁함. 이때에도 첫째가 붓다, 둘째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라는 우열이 나옴. 고타미에 의해서 붓다가 선택됨.

2 『方廣大莊嚴經』 권4. 52):           ① 야쇼다라의 부친인 執杖大臣이 家法에 의거하여, 기능을 겨루어

                                                           우수한 사람과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함 ② 輸檀王이 시합을 개최하고,

                                                           500석가족들이 야쇼다라를 얻기 위해 기예를 경쟁함 ③ 첫째로 학문적 기

                                                           능을 겨룸 ④ 둘째로 무예를 겨룸. 씨름과 활쏘기를 겨루어 첫째가 붓다, 둘

                                                           째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 넷째가 아난이 됨                                              

3. 『佛說普曜經』 권3. 53):             ① 俱夷의 부친인 執杖大臣이 가법에 의거하여, 기능을 겨루어 우

                                                          수한 사람과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고 함 ② 白淨王이 시합을 개최하고,

                                                         500석가족들이 俱夷를 얻기 위해 기예를 경쟁함 ③ 첫째로 학문적 기능을

                                                         겨룸 ④ 둘째로 무예를 겨룸. 씨름과 활쏘기를 겨루어 첫째가 붓다, 둘째가

                                                         난타, 셋째가 제바달다가 됨.                                                                         

4.  『修行本起經』 권上. 54):         ① 善覺王의 딸 裘夷에게 청혼자가 많이 있자, 裘夷가 기능을 겨룰

                                                        것을 제안함 ② 시합이 개최되고, 500석가족들이 裘夷를 얻기 위해 기예를

                                                        경쟁함 ③ 첫째로 예법과 음악이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만 겨루는 내용은 없

                                                        음 ④ 둘째로 무예를 겨룸. 씨름과 활쏘기를 겨루어 첫째가 붓다, 둘째가 난

                                                        타, 셋째가 제바달다가 됨.                                                                       

49)『佛本行集經』12 ~ 13,「捔術爭婚品第十三上 ~ 捔術爭婚品下」『( 大正藏』3, 708b ~
    712c).
50)『佛本行集經』13,「常飾納妃品第十四上」『( 大正藏』3, 714a·c).
51) 붓다의 婦人에 관해서『佛本行集經』卷12 ~ 14는 ① 耶輸陀羅 ② 摩奴陀羅 ③ 瞿多
    彌의 세 명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중 摩奴陀羅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으며, 등
    장도 卷14(「常飾納妃品下」,『大正藏』3, 715b·c)에만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52)『方廣大莊嚴經』4,「現藝品第十二」『( 大正藏』3, 562b ~ 564c). 
    이는 앞선 기예경쟁과 내용적으로 상호 유사하지만, 시합의 규모
    가 좀 더 커지고 목적이 여성의 쟁취, 혹은 결혼과 관계된다는 점에
    서 주목된다.
53)『佛說普曜經』3,「王爲太子求妃品第九 ~ 試藝品第十」『( 大正藏』3, 500c ~ 502a).
54)『修行本起經』上,「試藝品第三」『( 大正藏』3, 465b ~ 466a). 

 

왕족이 正妃를 맞아들임에 있어서 시합을 한다는 것은 일견 납득

되지 않는다. 전쟁에서 얻은 여성이라면 몰라도 일반귀족도 아닌 왕

족의 결혼이 시합을 통해서 진행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극적인 허구

가 아닌가 한다. 이는 정반왕이 자매를 동시에 취하는 결혼을 한 것

과 비교해 보면, 그 변화가 단기간 내에 너무 크다고 할 수 있다는 점

에서 더욱 그렇다.55) 특히나 붓다와 제바달다의 경쟁은 그렇다 치고

라도 붓다와 난타는 이복형제인데, 동일한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같은 시합에 임한다는 것은 이치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하겠다.56)

55) 자매가 동시에 한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은 중국 舜임금의 혼례에서도 나타나 보이는
    양상으로 이는 문화권을 초월한 고대의 일반적인 유풍 중 하나라고 하겠다.司馬遷 著,
    丁範鎭 譯,「本紀」,『史記』, (서울: 까치, 2003), 15쪽 ; 워앤커 著, 전인초·김선자 譯,
   『中國神話傳說(譯註本)1』, (서울: 民音社, 2002), 411쪽.
56)『佛本行集經』卷13의 瞿多彌를 얻는 내용에서는 황당하게도 붓다와 難陀의 父親이
    서로 다른 것으로 설정되어 상호 대립하는 양상까지도 보이고 있다.『佛本行集經』13,
   「常飾納妃品第十四上」『( 大正藏』3, 713c ~ 714a).

 

또한 난타의 결혼에 관해서는 붓다가 성도한 후 6년 뒤 본국으로

귀향했을 때,57) 결혼직전, 혹은 직후였다는 분명한 기록58)이 남아 있

기 때문에 이때가 난타의 결혼 정년기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붓다

와 결혼을 위해서 겨룬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

므로 우리는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종교적 상징성에 입각

해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57) 붓다의 歸鄕을 成道 후 약 6년으로 잡는 근거는 成道 때에 출생한 羅睺羅가 붓다의 歸
    鄕時 6세(혹은 7세)였기 때문이다. 붓다의 歸鄕 시기에 관해서는 成道 후 6년으로 보
    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외에도 成道 후 이듬해(渡邊照宏 著,『新釋尊伝』, 東京: ち
    くま學藝文庫, 2005, p. 305)와 12년이라는 설도 있다. 이와 같은 혼란상은『佛本行集
    經』을 통해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佛本行集經』55,「羅睺羅因緣品第五十六上」
   『( 大正藏』3, 906b), “其羅睺羅.如來出家六年已後.始出母胎.如來還其父家之日.其羅睺
   羅.年始六歲爾時如來.至迦毘羅婆蘇都城.” ;『方廣大莊嚴經』12,「轉法輪品之二」『( 大
    正藏』3, 562a ~ 564c), “耶輸陀羅攜羅睺羅年已七歲.來至佛所稽首佛足.瞻對問訊而白
    佛言.久違侍奉曠廢供養.諸眷屬皆有疑心.太子去國十有二載.何從懷孕生羅睺羅.” ;『破
    僧事』12, (『大正藏』24, 159a), “若佛世尊六年苦行.成覺之後更住六年.滿十二歲重還
    於此.我令諸人目驗虛實.” ;『佛本行集經』55,「羅睺羅因緣品第五十六上」『( 大正藏』3,
    910a), “然佛世尊.已證阿耨多羅三藐三菩提.過十二年.然後方還迦毘羅城.欲於眷屬現
    憐愍故.”
58)『新釋尊伝』, (東京: ちくま學藝文庫, 2005), pp. 306 ~ 307 ;『印度佛敎史1』, (서울: 時
    空社, 2006), 60쪽 ;『佛本行集經』56 ~ 57,「難陀出家因緣品第五十七上 ~ 難陀因緣品
    下」『( 大正藏』3, 911b ~ 918a) ;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11,「第二門第十子攝頌
    之餘難陀因緣」『( 大正藏』24, 251a).

 

각술쟁혼의 구조에는 시합의 규모가 커짐으로 인하여 아난도 등

장하는 경우들도 보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아난은 붓다와의 나

이 차이가 많은 인물59)이기 때문에 붓다가 결혼하는 나이인 16~19

세60) 무렵에는 아직 출생하지도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61) 즉, 결혼

과 관련해서 붓다와 제바달다를 대립적 구도로 만들고 있는 기록들

은 붓다의 생애에 대한 보다 긴박한 극적구성을 위해서 구조된 것일

뿐, 그것이 곧 實在일 확률은 없는 것이다.

59) 平川彰은 붓다와 아난의 나이 차이를 20 ~ 30년 정도로 보고 있다.平川彰 著,『原始佛
    敎とアビダルマ佛敎』, (東京: 春秋社, 1991), p. 151.
60) 붓다의 결혼 연령에 관해서는 17歲 說이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17세 설을 제시
    하는 경전은『修行本起經』 등이며, 19歲 說은『佛本行集經』에서 나타나 보인다. 그러
    나 붓다에게는『大智度論』등에서 보이는 19歲 出家說도 있기 때문에 19歲 結婚說 보
    다는 17歲 結婚說이 더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16세와 18세 설에 대한 측
    면도 존재한다(宮坂宥勝 著, 안양규 譯,『부처님의 생애』, 서울: 佛敎時代社, 1992, 59
    쪽).『修行本起經』上,「試藝品第三」『( 大正藏』3, 465b) ; 『佛本行集經』12,「捔
    術爭婚品第十三上」『( 大正藏』3, 707a·c) ;『大智度論』3, 「共摩訶比丘僧釋論第六」
   『( 大正藏』25, 80c), “爾時世尊以偈答曰 我年一十九 出家學佛道 我出家已來 已過五十
    歲” ;『修行本起經』下,「出家品第五」『( 大正藏』3, 467c), “至年十九.四月七日.誓欲
    出家.至夜半後.明星出時.諸天側塞虛空.勸太子去”
61)  廉仲燮,「阿難의 나이에 관한 고찰」,『佛敎學硏究』제19호(2008), 291 ~ 319쪽.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되는 것은 아나율 같은 경우에는

아예 등장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아나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것이 곧 불교교단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승단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불전

의 기록자들은 석가족의 우열을 ‘붓다 → 난타 → 제바달다 → 아난’

의 순서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 속에는 10대

제자 중 한 명인 아나율과 같은 경우는 아예 배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전 기록자들의 인식은『佛本行集經』권13을 통해서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瞿多彌의 부친인 檀荼波尼의 다

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다.

 

"세 사람의 석가족 동자는 모두 다 단정하고 환희롭기 짝이 없으며, 일

체 기예가 다 각각 구족하여 실달태자가 가장 제일이고, 그 다음에 난

타가 둘째요, 제바달다는 곧 셋째이다."62)

62)『佛本行集經』13,「常飾納妃品第十四上」『( 大正藏』3, 714a), “如是思惟.此等三
    人釋種童子.皆悉端正.可喜無雙.一切技能並各具足.悉達太子最爲第一.其次難陀復爲第
    二.提婆達多卽是第三.”

 

이는 제바달다의 실로 지울 수 없는 비범성에 대한 불전 기록자들

의 가장 단적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63)

63)『데바닷다, 그는 정말 惡人이었는가』, (서울: 雲舟社, 2004), 132쪽, “그(제바달다)는
    재능 방면에서 난타와 석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석가족의 三傑이었다.”

 

Ⅳ. 출가 후의 비범성

 

제바달다는 역죄라는 불교적인 최상의 종교적 단죄를 거친 인물

이다. 5역죄의 항목 중 出佛身血과 破僧伽는 공히 붓다의 재세시에

만 가능하다는 점과 제바달다 사건이 붓다의 만년인 72 ~ 73세에 발

생하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한다면, 이는 제바달다 1인을 겨냥한 종

교적 단죄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관련전적들은 단편적이나마

제바달다의 출가 후에 대해 매우 긍정적 논평을 서술하고 있다. 또

한 이와 같은 기록들이 반제바달다적인 입장에서 기술되어진 전적

들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서 제

바달다의 비범성과 더불어 출가 후의 일정 기간 동안 유지된 성실성

에 관해 인식해 볼 수가 있게 된다.

 

1. 출가 후의 교단생활

율장을 중심으로 하는 제바달다의 파승사 관련기록 등에는 제바

달다의 출가 후 교단생활에 대한 평가가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이는

불전의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언급과는 변별력이 확보될 수 있는 기

록이라는 점에서 제바달다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실질적이고 중요

한 자료라고 할 수가 있다.

 

제바달다 출가 후의 교단생활에 관한 ‘비범성’ 관련 자료들의 내

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바달다가 출가해서 12년 동안 善心으로 수행하여 讀經·誦經·問

疑·坐禪하니, 이때 붓다께서 설하신 바의 모든 법을 독송하게 되었다."64)

64)『 十誦律』36,「雜誦第一(調達事上)」『( 大正藏』23, 257a), “是調達出家作比丘.
    十二年中善心修行.讀經誦經問疑受法坐禪.爾時佛所說法皆悉讀誦.”

 

"이때 제바달다는 12년 동안 誦經하고 불법을 배웠는데, 가르침을 받음

에 있어서 쉬거나 게으르지 않아서 붓다께서 설하신 경전을 모두 암송

하게 되었다. (또한) 바위굴이나 고요한 나무아래, (수행하기 좋은) 空

閑處나 시체를 유기하는 곳을 친근하여, 사리불·목건련·아나율·발

제·금비라비구 등과 함께 벗하였다. 제바달다가 붓다께 惡意를 일으

키지 않았던 처음에는 털끝만큼도 계율을 범하지 않았다."65)
65)『鼻奈耶』2, (『大正藏』24, 857c), “爾時調婆達兜十二年誦經學道.稟受敎授無有休懈.
    於其間聞佛所說經.盡皆諷誦.親近巖穴無事樹下空處塚間.舍利弗.目揵連.阿那律.難提.金
    鞞羅比丘等共侶.此調達於世尊不起惡意時.初不犯戒如毫毛.(後正起惡心於世尊.於是便
    犯戒.)

 

"제바달다는 총명하고 널리 배워서 12년 동안 坐禪入定하여 마음이 흐

트러지지 않았으며, 12두타행66)에 있어서 이지러짐이 없었고 不淨觀과

數息觀을 수행하여 세간의 제1법에서 頂法에 이르기까지 낱낱을 분명

하였다. (그) 암송하는 경전이 6만이나 되어 코끼리에도 다 실을 수가

없었다."67)

66) 12頭陀의 細目에 관해서는 전적상에 있어서 출입의 편차가 존재한다.『佛說十二頭陀
    經』全1卷, (『大正藏』17, 720c) ;『摩訶般若波羅蜜經』14,「兩過品第四十七」
   『( 大正藏』8, 320c) ;『大方廣佛華嚴經』33,「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 大正藏』10, 814b ~816c) ;『毘尼母經』1, (『大正藏』24, 804c) ;『大比丘三千
   威儀』下, (『大正藏』24, 919b); 京性 著,『佛敎修行의 頭陀行 硏究』, (서울: 藏經閣, 
    2005), 44 ~ 65쪽.
67)『出曜經』14,「利養品第十四」『( 大正藏』4, 687b), “爾時有比丘.名曰調達.聰明廣
    學.十二年中坐禪入定心不移易.十二頭陀初不缺減.起不淨觀了出入息.世間第一法乃至
    頂法一一分別.所誦佛經六萬.象載不勝.後意轉轉退漸生惡念.意望供養深著世利.”

 

이 외에도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관한 단편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달은 종종의 外書와 星宿, (그리고) 사람의 길흉과 천지의 변화를 보

는 것에 있어서 밝게 알았다."68)

68)『十誦律』36,「雜誦第一(調達事上)」『( 大正藏』23, 257c), “調達素知種種外書星宿.
    相人吉凶天地怪相.”

 

"조달은 총명함이 지나쳐서 天文과 地理, (그리고) 虛空의 星宿에 대해

서까지도 모두 다 밝게 통달하여 알았다."69)

69)『鼻奈耶』2, (『大正藏』24, 859b), “調達至聰明飜揵.天文地理虛空星宿盡明達知.”

 

"(제바달다는) 능히 6만이나 되는 香象에 (실어야 될 정도의) 경전들을 

多讀誦하였다."70)

70)『大方便佛報恩經』4,「惡友品第六」 (『大正藏』3, 147a), “能多讀誦六萬香象經.”

 

"(제바달다는) 출가하여 도를 배워서 6만 법장을 암송하고, 정진·수행

한 것이 12년에 이르렀다." 71)

71)『大智度論』14,「釋初品中羼提波羅蜜義第二十四」『( 大正藏』25, 164c), “出家學道誦六
    萬法聚.精進修行滿十二年.”

 

"(제바달다는) 12년에 이르도록 精勤하여 8만 법장을 암송하여 지녔

다."72)

72)『大唐西域記』6,「室羅伐悉底國」『( 大正藏』51, 900a), “精勤十二年已誦持八萬法藏.”

 

위에서 정리한 기록들은 제바달다를 지지하던 동조자들의 견해

따위가 아닌 파승사 관련전적의 일반적인 서술에서 등장하는 기록

들이다. 즉, 이는 출가 후의 제바달다에 대한 교단의 평가로 생각해

볼 수가 있는 부분인 것이다. 또한 이를 통해서 우리는 관련전적들

의 신뢰성도 대단히 높은 전적들에 이와 같은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는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게 된다.

 

이를 내용적으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바달다는 출가 후 12년 동안 열심히 수행하였다.

둘째, 두타행과 계율 등에 있어서 매우 철저했다.

셋째, 不淨觀·數息觀·禪定 등에 통달하였다.

넷째, 모든 경전을 암송하고 진리를 잘 분별했다.

다섯째, 천문과 지리 등의 外學에도 밝았다.

 

내용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다섯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최상급

의 출가수행자들에게나 주어질 수 있는 것들이라고 하겠다. 특히나

이러한 기록을 전하고 있는 전적들이 제바달다에 대한 극도로 안 좋

은 인식을 표출하고 있는 전승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중간

에 이와 같은 최상급의 평가가 나타나 보이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

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아라한은 붓다의 재세시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의해 菩薩이라는 새

로운 이상인격이 정립되기 전까지 한결같이 불교의 이상인격이었

다. 그런데 근본불교, 혹은 초기불교의 내용을 다수 간직하고 있다

고 할 수가 있는 4대광율이나 4아함과 같은 전적들이 전하는 아라한

상에는 나름대로 한계를 드러내는 측면들이 다수가 존재하고 있다.

예컨대, 周利槃特과 같은 경우는 교단 내에서 신통은 목건련 다음이

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지능이 낮아서 아라한이 된 뒤로도 하나의

게송 외에는 암송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73)

73)『十誦律』11,「九十波逸提法之三(二十一)」『( 大正藏』23, 80b) ;『善見律毘婆沙』16,
   『( 大正藏』24, 782c ~ 783c).

 

아라한이라는 불교의 이상인격을 획득한 인물들도 나름의 한계를

가지고 있게 되는데, 제바달다는 수행과정에 있는 인물로서 敎와 禪

과 律에 공히 통달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제바달

다의 비범성에 대한 부정하기 힘든 측면이라고 하겠다.

 

타고난 비범성만으로 경전을 모두 다 암송하거나 특히 계율을 털

끝만큼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자신을 살피는 부단한 노력이 전제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

다. 왜냐하면, 지능이 높은 것과 행실이 견실한 것은 서로 다른 층차

를 갖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즉, 제바달다는 출가 후에도 상당 기간

은 그 누구보다도 성실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제바달다가 견실한 출가자의 삶을 산 기간은 12년이라고 기록되

어 있다. 이는 전적상에 있어서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양상이

다. 여기에서의 ‘12년’은 단순히 햇수로서의 12년이 아니라 ‘오랜 기

간 동안’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실제로 붓

다께서는 4월 8일에 탄생하시어74) 32상과 80종호를 갖추시고,75) 4성

제와 8정도의 가르침을 시설하셨으며,76) 가장 중요한 핵심교리인 緣

起法은 12연기이고,77) 1장 6척의 신장으로 16대국을 순유하시다가78)

일평생 8만 4천 법문79)을 설하시고는 8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는

것 등의 4의 배수가 ‘완전함’의 의미로 불교 내에서 사용되는 경우가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4와 그 배수들은 실질적인 숫자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곧 완전성이 설시되기도 하는 것이다.80) 그러

므로 12년이라는 햇수는 다분히 상징적인 내포의미의 선상에서 이

해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은가 한다.

74)『佛說十二遊經』全1卷, (『大正藏』4, 146c).
75) 秦弘燮 著,「32吉相, 80種好」,『韓國의 佛像』, (서울: 一志社, 1992), 70 ~ 79쪽 ; 張忠
    植 著, 『韓國의 佛像』, (서울: 東國大學校 附設 譯經院, 1983), 96 ~ 107쪽.
76)『中阿含經』7,「(三○)舍梨子相應品象跡喩經第十(初一日誦)」『( 大正藏』1, 464b), “爾
    時.尊者舍梨子告諸比丘.諸賢.若有無量善法.彼一切法皆四聖諦所攝.來入四聖諦中.謂
    四聖諦於一切法最爲第一.所以者何.攝受一切衆善法故.諸賢.猶如諸畜之跡.象跡爲第
    一.所以者何.彼象跡者最廣大故.如是.諸賢.無量善法.彼一切法皆四聖諦所攝.來入四聖
    諦中.謂四聖諦於一切法最爲第一.”
77)  崔鳳守 著,『原始佛敎의 緣起思想硏究』, (서울: 經書院, 1997), 22 ~ 43쪽.
78)『大智度論』35, 「釋習相應品第三之一」『( 大正藏』25, 320b), “(答曰.)算數譬喩所不能
    及者是其極語.(譬如人有重罪先以打縛楚毒然後乃殺.)如聲聞法中常以十六不及一爲
    喩.大乘法中則以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大智度論』35,「釋習相應品第三之一」
   『( 大正藏』25, 319c), “(答曰.)略說則十六.廣說則無量.”
79)『Thera-gāthā(長老偈)』, 1024.
80) 廉仲燮,「Kailas山의 須彌山說에 관한 종합적 고찰」,『佛敎學硏究』 제12호(2005), 
    324 ~ 325쪽.

 

붓다의 제자 중 8만 4천 법장을 모두 암송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인물은 제바달다와 아난 형제 뿐이다.81) 그런데 아난은 출가 전의 기

록이나 출가 후의 기록에서 공히 제바달다와 상응하는 위치를 확보

하고 있는 것으로는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는 아난이 제바

달다의 동생인 점도 있겠지만, 제바달다 역시 능력 면에서 무척이나

비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81)『Thera-gāthā(長老偈)』, “1024:나는 붓다로부터 8만 2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수행자들로부터 2천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8만4천의 가르침이 행해
    지고 있는 것입니다.” ;『五分律』25,「第五分初破僧法」『( 大正藏』22, 165a), “目
    連白佛言.奇哉世尊.調達從佛聞法誦八萬四千法藏得五神通.如何而反憍慢世尊.”

 

붓다의 제자 중 사리불이 지혜제일로 “붓다를 제외하고는 사리불

의 지혜에 비교하여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82)고 기록되어 있

으며,『대지도론』권2와 같은 경우에는 사리불이 제2의 붓다83)로까

지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리불에게도 8만 4천의 법장을

암송했다는 것과 같은 기억적인 비범성은 확인되지 않는다. 물론 지

혜와 기억력은 논리적 층차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8만 4천

법장의 암송이라는 것은 태생적인 비범성이 확보되지 않는 이상은

가능한 일로 사료되지 않는다.

82)『雜阿含經』22,「五九三」『( 大正藏』2, 158c), “爾時.世尊以尊者舍利弗故.而說偈言 一
    切世間智 唯除於如來 比舍利弗智 十六不及一” ; 『雜阿含經』23, 「六○四」『( 大正藏』2,
    167c), “一切衆生智 比於舍利弗 十六之一分 以除如來智”
83)『大智度論』2,「初品總說如是我聞釋論第三(卷第二)」『( 大正藏』25, 68b), “舍利弗是第
    二佛”

 

이와 같은 제바달다의 탁월한 비범성으로 인하여 현장이 인도에 
갔을 때도 제바달다가 8만 법장을 암송했다는 전승이 유전되고 있었
을 것으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8만 법장’84)과 같은 내용은 현장의 기록 속에서만 살펴

지는 다소 독특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는 현장이 인도순례기간 중

에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다수의 소문을 접한 것이 아닌가 하

는 추론을 가능케 해주는 측면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법현과 현장의

기록에는 제바달다가 참선하던 동굴을 답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

다.85)

84) ‘8만 법장’이라는 것은「侍者經」『( 中阿含經』8,「[三三]未曾有法品侍者經第二[初一
    日誦]」,『大正藏』1, 473a·b)에서의 아난의 진술과 같은 의미를 확보하는 것일 것이다.
85) 이곳 유적은 ‘Devadatta’s Stone House’라는 명칭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으며,
    필자도 직접 답사한 바가 있다.『高僧法顯傳』全1卷,「王舍城」『( 大正藏』51, 863a), 
    “時阿難在門外不得入.其處起塔今亦在.搏山亦有諸羅漢坐禪石窟甚多.出舊城北東下三
    里.有調達石窟.” ;『大唐西域記』9,「摩伽陀國下」『( 大正藏』51, 921c ~ 922a), 
    “毘布羅 山上有窣堵波.昔者如來說法之處.今有露形外道.多依此住.修習苦行夙夜匪懈.
    自旦至昏旋轉觀察.山城北門左南崖陰東行二三里至大石室.昔提婆達多于此入定."

 

이는 제바달다에 관한 측면들이 이들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에도

많은 부분 유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제바달다의 비범

성에 관한 측면들은 후대까지도 유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는 후대의 불전 유 전적들이 제바달다의 태생적인 비범성을 기록하

고 있는 것과 상호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즉, 제바달다

의 비범성에 대한 후대까지의 지속적인 膾炙가 불전에 투영되어 제

바달다의 태생적인 비범성이나 붓다와의 경쟁과 대립 양상을 파생

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이해된다.

 

2. 제바달다에 관한 평가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관해서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제바달다

에 대한 불교교단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도 있다. 율

장을 필두로 하는 고층의 자료들에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제바달

다에 대한 교단의 핵심적인 인물들의 긍정적인 평가가 발견되고 있

어서 크게 주목되는 바가 있다. 이들의 제바달다에 관한 평가는 분

명 계속해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교단 내에서 비중이

큰 인물들이 한 때나마 제바달다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는 것은 제바달다의 비범성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고 하겠다. 특히나 불교교단이 파승가 이후 제바달다에 대해 극도로

안 좋은 인식을 성립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록들이

잔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주목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교단의 핵심적인 인사들의 제바달다에 관한 평가를 관련 문

헌들을 통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NO       전적                                                     내용                                                                          

1      『四分律』  권4. 86):                        사리불은 평소 신도들에게 제바달다에 대해 찬탄하여「大

                                                               姓으로 출가하여 총명하고, 큰 신력이 있으며 얼굴이 단정하다」

                                                               라고 말하였다고 붓다께 말함. 붓다께서 사리불에게 제바달다를 

                                                               찬탄했느냐고 묻자, 사리불은 그렇다고 답함                            

2     『彌沙塞部和醯五分律』 권3. 87):     사리불이 평소에 승려들에게 제바달다를 찬탄하였다고 진

                                                               술하고, 붓다께서 확인하여 묻자 그렇다고 답함.

                                                               권25. 88): 목련이 조달은 붓다로부터 法을 들어 8만 4천의 법장을

                                                               외우고, 5가지 신통이 있었다고 말함.                                            

3    『빨리율(Vinaya)  cullavagga89):     사리불은 평소에 왕사성에서 제바달다를 찬탄하여

                                                              「제바달다는 大神通이 있고 大威力이 있다」라고 말하였다고 붓

                                                              다께 말함. 붓다께서 사리불에게 제바달다를 찬탄했느냐고 묻자,

                                                              사리불은 그렇다고 답함.                                                              

4    『鼻奈耶』 권5. 90):                          아난이 전에는 조달을 찬탄하였는데, 나쁘다고 말하기가

                                                             곤란하다고 붓다께 말하자, 붓다께서는 전에는 착했는데 지금은

                                                             나쁘기 때문이라고 답하라고 하심.                                             

5     『根本說一切有部 권14. 91):          붓다가 아난에게 왕사성에 가서 제바달다의 일은 불            

         毘奈耶破僧事』                            교와 무관하다고 말하게 하고, 제바달다를 두둔하여 신통과 위엄과 덕

                                                             망이 있다고 반론하는 이에게는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라

                                                            고 말하라고 지시하심.                                                                           

6      『增壹阿含經』 권13. 92):              붓다께서 길에서 제바달다를 회피하시자, 아난이 제바달

                                                            다가 여래보다 더 뛰어나냐고 여쭈어 봄.

                               권47. 93):             “제바달다는 고금의 일에 두루 밝고 외워 익힌 바가 많

                                                            으며, 제법을 모두 지녀서 들은 것을 잊지 않았다”라는 언급이

                                                            보임.

                             권47. 94):               “제바달다가 (살아 있을) 때에 큰 威神力이 있어서 지극

                                                            한 神德이 있어서 능히 33천에 올라가고, (그) 변화가 자재하였

                                                           다”라는 언급이 보임.                                                                      

7      『出曜經』 권15. 95):                    (붓다께서) 조달은 數息을 통해서 일체가 不淨하다는 생    

                                                            각을 일으켜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하였다고 하심.                

86)『四分律』4,「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3b), “僧已忍.差舍利弗向諸白衣
    大衆說提婆達所作事.非佛法僧竟.僧忍黙然故是事如是持.時舍利弗聞此語已心疑.卽往
    至世尊所.頭面禮足在一面坐白佛言.世尊我當云何在白衣衆中說其惡.何以故.我本向諸
    白衣讚歎其善言.大姓出家聰明有大神力顔貌端正.佛告舍利弗.汝先讚歎提婆達聰明有
    大神力大姓出家.實爾以不.答言.大德實爾.是故舍利弗汝今應往至白衣大衆中語言.提
    婆達先時如是.今日如是.當知提婆達所作非佛法僧.是提婆達所作.”
87)『五分律』3,「第一分之二第」『( 大正藏』22, 19a), “舍利弗.汝往調達衆中.作是
    唱言.若受調達五法敎者.彼爲不見佛法僧.舍利弗言.我昔已曾讚歎調達.今日云何復得
    毁訾.佛言.汝昔讚歎爲是實.答言是實.佛言.今應毁訾.而毁訾亦復是實.”
88)『五分律』25,「第五分初破僧法」『( 大正藏』22, 165a), “目連白佛言.奇哉世尊.
    調達從佛聞法誦八萬四千法藏得五神通.如何而反憍慢世尊.”
89)『빨리율(Vinaya)』,「cullavagga」, 7破僧犍度, p. 189, “khamati... dhārayāmīti.
    atha kho bhagavā āyasmantaṃ sāriputtaṃ āmantesi: tena hi tvaṃ sāriputta
    devadattaṃ rājagahe pakāsehīti. pubbe mayā bhante devadattassa rājagahe
    vaṇṇo bhāsito mahiddhiko godhiputto mahānubhāvo godhiputto ’ti, kathāhaṃ
    bhante devadattaṃ rājagahe pakāsemīti. nanu tayā sāriputta bhūto yeva
    devadattassa rājagahe vaṇṇo bhāsito mahiddhiko godhiputto mahānubhāvo
    godhiputto ’ti. evaṃ bhante ’ti. evam eva kho tvaṃ sāriputta bhūtaṃ ñeva
    devadattaṃ rājagahe pakāsehīti. evaṃ bhante ’ti kho āyasmā sāriputto
    bhagavato paccassosi.”
90)『鼻奈耶』5,「僧殘法之三破僧戒」『( 大正藏』24, 870b·c), “時世尊見三十二人去不
    久.顧語阿難.汝往入羅閱城.往大市四街巷頭.作是唱言.若調達所作行身口意所爲.莫呼
    佛法僧敎.使爲調達自有親信弟子.時阿難白佛.前歎譽調達.今復說其惡.衆人有譏者.當
    云何答.世尊告阿難曰.有此語者.以此語答.本雖習善今復習惡.何足怪耶.”
91)『破僧事』14, (『大正藏』24, 173c), “世尊旣聞此語告阿難陀曰.汝將一苾芻隨行.入王
    舍城街街曲曲.人間若見婆羅門及長者居士.說如是語.提婆達多及同伴.若作非法罪惡
    人.不須謗佛法僧.何以故.此人非行佛法行人.若有人說提婆達多有神通威德.汝報彼.提
    婆達多先有神通今悉退失.無一神驗.”
92)『增壹阿含經』13,「地主品第二十三-六」『( 大正藏』2, 613c), “阿難白世尊曰.
    何故欲遠此巷.世尊告曰.提婆達兜今在此巷.是以避之.阿難白佛言.世尊.豈畏提婆達
    兜乎.世尊告曰.我不畏提婆達兜也.但此惡人不應與相見.阿難曰.然.世尊.可使此提婆
    達兜乃可使在他方.爾時.世尊便說此偈言 我終無此心 使彼在他方 彼自當造行 便自
    在他所阿難白世尊曰.然提婆達兜有過於如來所.世尊告曰.愚惑之人不應與相見.”
93)『增壹阿含經』47,「放牛品第四十九今分品-九」『( 大正藏』2, 804c), “何況提
    婆達兜博古明今.多所誦習.總持諸法.所聞不忘.”
94)『增壹阿含經』47,「放牛品第四十九今分品-九」『( 大正藏』2, 804b), “提婆達
    兜在時有大威神.極有神德.乃能往至三十三天.變化自由.”
95)『出曜經』14,「利養品下」『( 大正藏』4, 688c), “謂調達比丘.通出入息起不淨想.
    乃至頂法亦復如是.以其神通貪著利養自陷乎罪 ”; Cv. 7. 3-4, Dhp. A. I. p. 133. 

 

이상에서 제바달다를 좋게 평가했거나, 혹은 그것이 간접적으로

나마 드러나고 있는 경우를 정리해 보면 다소 관점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다.

 

사리불 3회(1·2·3), 아난 2회(4·6), 목건련 1회(2), 붓다 3회(4·5·7).

 

제바달다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이들은 한결같이 근본불교

의 핵심적인 인물들이자, 불교교단 최대의 인물들임에 분명하다. 그

런데 제바달다는 이와 같은 분들에게 한때라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

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 자체만으로도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면, 6·7의 경우와 2의 목련 평가가

다소 이질적이고, 1 ~ 5까지는 상호 유사한 상황에서 발생되는 내용

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1) 사리불과 아난의 평가

1~5의 경우는 제바달다가 파승가에 앞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게

되자, 붓다께서 사리불, 혹은 아난에게 제바달다의 일은 불교와 무

관하다는 것을 출가인, 혹은 재가인들에게 공지하게 시키는 가운데

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사리불과 아난이 제바달다를 찬탄했다는 것

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제바달다의 교단 내의 위치가 사리불이나 아난의 찬탄을 들을 정도

로 확고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사리불과 아난이 제바달다와 어느 정

도이상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이다. 사리불과 아난은 붓다 생존시에

각각의 위치에서 최상의 지위를 누렸던 인물이다. 사리불은 교단을

 

총괄하고 붓다를 대신하여 설법하기도 하는96) 수제자로서의 위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97) 그리고 아난 같은 경우는 55세의 붓다에 의해

선택되어 25년간 시자를 한 인물로 法藏의 전지자이자 붓다의 최측

근 인물이다.98) 그런데 이와 같은 인물들이 공히 제바달다를 찬탄하

였다는 것은 제바달다가 자체적인 비범함과 아울러 교단 내에서의

위상 등이 매우 탁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96)『長阿含經』9,「(一○)第二分十上經第六」『( 大正藏』1, 52c) ;『中阿含經』22,「(八八)
    穢品求法經第二」『( 大正藏』1, 570b) ;『增壹阿含經』18,「四意斷品第二十六[之一-九」
   『( 大正藏』2, 639a).
97)『雜阿含經』45, 「一二一二」『( 大正藏』2, 330b), “汝今如是.爲我長子.鄰受灌頂而未灌
    頂.住於儀法.我所應轉法輪.汝亦隨轉.” ; 『七佛父母姓字經』全1卷, (『大正藏』1, 160a) ;
   『大智度論』2,「初品總說如是我聞釋論第三(卷第二)」『( 大正藏』25, 68b).
98)『中阿含經』8,「(三三)未曾有法品侍者經第二(初一日誦)」『( 大正藏』1, 471c ~ 475a) ;
   『佛般泥洹經』下, (『大正藏』1, 169a) ;『Thera-gāthā(長老偈)』,「1039 ~ 1043」.

 

2) 목건련의 평가

목건련 같은 경우는 제바달다와 친분관계가 돈독했던 것으로 추

정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제바달다가 붓다에게 교단의 승계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 찾아갈 때, 이의 문제점을 목건련이 먼저 찾아와

서 고하는 측면이 관료자료들에는 다수 나타나 보이고 있다.99) 또한

『사분율』권4에는 제바달다가 문도들을 거느리기를 원하자, 이 또

한 목건련이 붓다에게 고하는 대목이 확인된다.100) 이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목건련 같은 경우는 제바달다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해석해 볼 수가 있겠다.

99)『四分律』4,「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1c ~ 592a) ;『五分律』3,「第一分之二
    第」『( 大正藏』22, 18a) ;『十誦律』36,「雜誦第一(調達事上)」『( 大正藏』23, 258a·b) ;
   『빨리율(Vinaya)』,「cullavagga」, 7破僧犍度, pp. 185 ~ 186 ; 『根本說一切有部毘奈
    耶』14,「破僧違諫學處第十」『( 大正藏』23, 701b·c) ;『鼻奈耶』2, (『大正藏』24, 859c ~
    860a) ; 『破僧事』13, (『大正藏』24, 169a·b).
100)『四分律』4,「十三僧殘法之三」『( 大正藏』22, 591c ~ 592a).

 

목건련의 제바달다에 대한 평가 역시 사리불이나 아난과 같은 찬

탄이 아니라, 제바달다가 파승가를 행했다가 결국 곤란한 상황에 처

한 뒤에 제바달다는 출중한 능력을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저렇게 되

었느냐고 붓다께 여쭙는 대목에서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서 분명해지는 것은 목건련과 같은 반제바달다의 성향을 보이는 인

물조차도 제바달다의 비범성만은 고스란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

다. 그것도 그 시점은 파승가가 발생한 이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제바달다의 비범성은 그대로 인정되고 있을 정도로 제바달다는

대단히 뛰어남을 확보한 인물임에 분명했다고 하겠다.

 

3) 붓다의 평가

제바달다에 대한 마지막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분은 다름 아

닌 붓다이다. 『출요경』 권15를 통해서 드러나고 있는 붓다의 평가는

제바달다가 매우 성실한 수행자였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하겠다.

붓다의 제바달다에 대한 평가 중『증일아함경』권47의 내용은 제

바달다가 아비지옥에 가기 직전의 마지막 참회에 의해서 지옥고를

거친 이후에 ‘南無’라는 벽지불이 될 것이라는 내용에 관하여 아난

이 물은 것에 대한 답변에서 나오는 것이다. 즉, 제바달다의 악행에

비해 참회가 적은데, 어떻게 벽지불의 수기가 내려지는가에 관한 것

이다. 이에 대한 붓다의 답변은 제바달다가 박학다식한 총명한 두뇌

의 소유자로서 출가 후의 신심있을 때의 행동에 대해서 언급하고, 이러

한 장점이 최후의 참회와 연결되어 상승작용을 일으켜 적은 참회로도

능히 수승한 과보의 결실을 쉽게 맺을 수 있었다고 말씀해 주신다.101)

101)『增壹阿含經』47,「放牛品第四十九今分品-九」『( 大正藏』2, 804c), “計彼提
     婆達兜昔所怨讎.起殺害心向於如來.復由曩昔緣報故.有喜悅心向於如來.由此因緣
     報故.六十劫中不墜墮三惡趣.復由提婆達兜最後命終之時.起和悅心.稱南無故.後作
     辟支佛.號名曰南無.”

 

우리는 붓다의 이와 같은 언급을 통해서 제바달다가 총명과 노력

을 겸비한 인물로 출가 후에는 매우 견실한 노력을 견지했었다는 것

을 확인해 볼 수가 있게 된다.

 

붓다의 제바달다에 대한 마지막 평가인『파승사』권14의 기록은

『사분율』권4나『오분율』권3, 그리고『빨리율』의 7파승건도나『비

나야』권5와 통하는 사건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특이

하게도 아난의 공포에 대하여 반론이 제기되는 경우를 붓다가 미리

상정하여 “전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아니다”라고 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붓다 스스로도 제바달다가 예전에는 훌륭한 수행자였다

는 것은 인정하는 측면이라고 할 수가 있다.

 

『파승사』의 기록은 후대에 여러 자료들이 조합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10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져 있다는

것은 제바달다의 출가 후 삶이 대단히 견실해서 『파승사』의 성립시

기까지도 이를 완전히 부정하기에는 다소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 수가 있게 해준다고 하겠다.

102) 권영대 譯,「解題」,『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外』, (서울: 東國譯經院, 2004),
     8~9쪽.

 

Ⅴ. 結論

 

이상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정리를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

가 매우 비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또한 제

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기록은 불전 유의 상징적인 측면과 율장 유

의 사실적인 내용의 두 가지 층차가 존재하며, 선행하는 율장의 사

실적 측면이 후행하게 되는 불전의 종교적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되

었다는 것을 인식해 볼 수가 있었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보면, 제Ⅱ장을 통해서 우리는 제바달다

의 탄생과 관련된 상징성 및 30상호의 구족과 신장에 의한 측면을

확인해 보았다. 이는 불교에 있어서 붓다가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가 있는 부분

이다.

 

그리고 제Ⅲ장에서는 붓다 왕궁시절의 경쟁자로서의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관해서 살펴보았다. 이는 물론 붓다와 제바달다의 나이차

이 등에 입각하여 허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종교라는 범주 안에서

의미적인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요구된다.

 

끝으로 제Ⅳ장을 통해서 우리는 율장에서 보다 사실적인 측면의

제바달다에 관한 비범성을 확인해 볼 수가 있었다. 특히 이를 전하

는 율장의 특성상 반제바달다의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또한 사실성

을 높이 담지하고 있는 문헌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검토는 제바달

다에 관한 주의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

 

제바달다는 불교에 있어서는 교조인 붓다와 맞선 악인이다. 그러

나 붓다와 맞섰다는 그 사실 자체에도 이미 제바달다에게는 비범성

이 존재했다는 추론을 해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제바달다가

붓다와 맞선 악인이라는 것과 제바달다에게 비범성이 있었다는 것

 

은 논리적인 층차를 달리하는 별개의 두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칫 파승사와 관련하여 이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종교적인

감정의 측면에서는 용인될 수 있을지 모르나, 학문적인 정확한 사실

판단에 있어서는 분명 문제가 있는 부분이다.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이해는 파승사의 전체 구조에 대한 이

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불교의 관련전적들에는 제바달

다가 너무 악인으로만 일방적으로 묘사됨으로 인하여 이에 대한 사

실판단에 어려움이 초래되고 있다. 파승사는 불교라는 종교 내적인

사건이지만, 동시에 교단사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판단과 더불어 사실적 판단 역시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므

로 사실적인 판단에 입각한 제바달다의 비범성에 대한 접근은 파승

사에 대한 기존의 관점적인 이해의 진일보를 위해서도 필연성이 확

보되는 측면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