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바다(Theravāda)의 붓다관―Pubbakammapiloti를 중심으로 (I)
박청환 (정덕, 동국대학교 강사)
I. 들어가는 말
붓다의 반열반(Parinibbāna)이래로, 불교 승단 내에서 붓다에 대한
이해가 나뉘어졌다. 한쪽에서는 인간적인 붓다가 있었고, 다른 한쪽
에서는 초인적인 붓다가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이들은 역사
적인 붓다에 중요성을 둔 반면에, 다른 이들은 절대적으로 초인화된
붓다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들이 초인적인 붓다를 선호하든 역사적인
붓다를 선호하든 모든 불교 부파들은 붓다의 일대기에서 어떤 모호한
점들을 해석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동시에, 이러한 모호성들은
각 부파에게 그들 자신의 이론을 수립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붓다
의 일대기에서 대부분의 모호한 점들은 초기 경전에서 붓다의 일부
행적에 관한 기록들과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는 붓다의 언설들에
관한 것이었다.
초기경전에서, 붓다는 기적을 행하고, 신체적으로 뛰어난 相들(32상
80종호)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질병과 고통에도 시달린다. 그래서
붓다에 관한 일관적인 해석을 찾는 것은 모든 불교 부파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들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불교 부파들은 초기 경
전을 수정하기까지 한 것 같다.1) 이것이 오늘날 동일한 이야기가 여
러 다른 판본들로 전해진 이유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들의 교리
가 어떠하던지 간에, 불교 부파들은 매우 세속적 고통으로 괴로워한
붓다에 관한 그들 자신의 해석을 제공할 것을 요구받은 것 같다.
1) 라모뜨는 석가모니가 그의 정각 후에 행한 身口意에 관한 의도적인 실수들에 관해
언급한다. 그는 “이런 허구의 과정 속에서, (논리의) 옹호(노력)이 후대의 자료들에
그럴듯하게 차용된, 비판이 없는 자료들을 생산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어떤
학파들은, 특히 설일체유부는 무엇보다도 석가모니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리고 그가 처할 비난들에 미리 응수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함경과 율장자료들을
재고하고 수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한다. Lamotte, Étienne, Le 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 de Nāgārjuna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Mppś),
(trans.) tome III (Louvain: Bureaux de Muséon, 1970), 1662쪽.
특히, 붓다가 겪은 질병과 고통에 관한 문제가 초기경전에서 만큼
이나 후대의 경전에서도 언급되어지고 있다. 그것들을 나열하자면,
발의 상처, 가시에 찔림, 빈 바루로 돌아옴, 순다리(Sundarī)의 비방,
찐짜(Cincā)의 비방, 보리 먹기, 6년 고행, 설사, 머리와 등의 통증2)
등이다. 이런 붓다가 겪은 어려움들은 묶어서 빨리어로 뿌바깜마삘로띠
(Pubbakammapiloti)3)라고 불린다.
2) Lamotte, Étienne, The teaching of Vimalakīrti, (trans) (London: PTS, 1976), 294-5쪽.
그는 또한 Le traité de la grande vertu de sagesse de Nāgārjuna (Mahāprajñāpāramitāśāstra:
Mppś), (trans.), tome I (Louvain: Bureaux de Muséon, 1944), 507-09쪽에서
관련문헌목록을 제공한다.
3) Pubbakammapiloti란 빨리어로 pubba란 ‘과거의’란 뜻이고, kammapiloti란 ‘업의 잔고’란
뜻으로, Pubbakammapiloti는 ‘과거에 지은 업의 잔고’란 의미이다. Pubbakammapiloti의
구체적 내용에 관해서는 후속 논문에서 다룰 예정이다.
어떻게 붓다와 같은 완벽한 존재가 고통에 매일 수 있을까? 붓다도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닌가? 이 문제는 불교 부파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리고 다양한 답변들이 주어졌다.
이 논문은 테라바다 불교에서 본 붓다의 본성에 관한 논쟁, 특히 일
부에서 수용하는 붓다의 업에 관한 논쟁을 통한 붓다의 개념을 이해
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왜 Pubbakammapiloti라는, 다시 말해 ‘붓다가
지은 業의 잔고’라는 이 개념이 테라바다 불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
니는지 두 차례에 걸쳐서 이해해 보려고 한다.
II. 비(非) 테라바다 부파들의 관점
1. 業 절대주위 관점
업의 과보(karmavipāka)의 원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이 관점의 설명은
이러한 고통과 질병을 통해서 붓다는 그가 과거세에 저지른 어떤 과오
들을 속죄한다는 것이다.『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大正藏』24,
권18, 94상-97상; Gilgit Manuscripts III, part 1, 211-8쪽4)),『흥기행경』
(『大正藏』4, 164상-174중)은 붓다가 전생에 비난받아 마땅한 그래서
그의 마지막 생 동안에 문제가 되는 열 가지 괴로움을 유발한 일련의 열
가지 악업을 서술한다. 이것이「디브야바다나」에서 말하는 위대한 자들
자신도 그들의 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karmabhis te 'pi jinā na
muktāḥ)5)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관점은 어떤 예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붓다는 다른 사람들처럼 업의 원칙에 지배를 받는다.5)
4) Gilgit Manuscripts [GM] vol. I, vol. III, parts 1, 2, 3, 4, ed. N. Dutt (Delhi: Sri
Satguru, 1984).
5) The Divyvadāna: A Collection of Early Buddhist Legends [Divy], E.B. Cowell and
R.A. Neil, (Amsterdam: Oriental Press NV & Philo Press, 1970), 416쪽
6) 빨리어로 쓰인 Apadāna의 Pubbakammapiloti (Apadāna [Ap], Part I, ed. Mary Lilley,
(London: PTS, 1925), 299-301쪽)은 이 관점을 수용한 것이다.
2.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의 견해
인간 붓다보다는 절대자로서의 붓다를 받아들이는 부파인 대중부와
북도파(北道派, Uttarāpathaka)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서 니까야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물에서 태어나 물에서 자라, 물에 더렵혀지지
않고 표면위로 피어오르는 푸르고, 붉고 또는 흰 연꽃처럼, 세상에 더
럽혀지지 않고 세상의 승리자로 남는다”(seyyathāpi uppalaṃ vā
padumaṃ vā puṇḍarīkaṃ vā udake jātaṃ udake saṃvaḍḍhaṃ udakāṃ
accuggamma ṭhāti anupalittaṃ udakena, evam eva kho loke jāto loke
saṃvaḍḍho lokaṃ abhibhuyya viharati anupalitto lokena).7) 이 부파들은
이 구절로부터 결론짓기를8) 깨달은 이들에게는 “모든 법은 순수하다”
(arahato sabbe dhammā anāsavā) 그리고 이득, 손실 등등의 世間八法
(lokadhamma)은 그들을 지배하지 못한다고 한다.9)
7) Aṅguttara-nikāya [AN] ii, 38쪽; Saṃyutta-nikāya [SN] iii, 140쪽.
8) Kathāvatthu [Kv], I, ed. A.C. Taylor (London: PTS, 1894-97), 271쪽.
9) Lamotte(1976), 앞의 책, 295-6쪽. Vasumitra에 따르면 네 개의 부파 ((Mahāsaṃghika,
Ekavyavahārika, Lokottaravāda 그리고 Kaukkuṭika)는 만장일치로 초세간적인
(lokottara) 붓다를 주장한다. 예를 들면, 1. 붓다들은 모두 초세간적(lokottara)이다.
2. 여래들에게는 부정한 법(sāsrava dharmas)은 없다. 3. 여래의 모든 언사는 정법을
설하고 있다. 4. 여래의 색신(rūpakāya)은 정말 무한하다. 5. 여래의 신성한 힘(prabhāva
또는 tejas)는 또한 무한하다. 6. 붓다들의 수명은 또한 무한하다 등등이다. Jiryo
Masuda, Origin and Doctrines of Early Indian Buddhist Schools: A Translation
of the Hsüan-chwang Version of Vasumitra’s Treatise, (trans.), Asia Major II
(Leipzig: Verlag der Asia Major, 1925), 18-21쪽.
대중부와 다른 부파들 사이의 차이에 관해서는, 덧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좌부와 설일체유부는 그들로부터 파생한 부파들과 함께 보드가야에서 정각
을 이루고 일체지를 성취한 인간으로서 붓다를 이해한다. 그때까지는 그도 모든
인간적인 결점들에 지배되는데, 이는 성스럽고 복을 많이 쌓은 사람에게 일반적
인 일이다. 대중부는 그들이 주장하듯이 이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떻게 지
식과 복덕에서 모든 성스런 존재들 중에 최고인 싯다르타 왕자 같은 이가 바로
전생에서 평범한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유한한 운명의 세계에서
그의 출현은 세속의 길을 따르기 위한 단지 허구적인 것이다. 그는 보살로서 그
의 전생에서 모든 완성을 이루었다.
대중부는 그리하여 고타마 붓다에게 초세간적 존재성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보드가야에서 정각을 이룬 것이 아닌 마야부인의 자궁에서부터 소위 그의 출생
때부터 모든 완성과 일체지를 부여했다. 대중부는 마음속에 대승부에게 받아들
여진 수많은 세간(lokadhātus)의 셀 수 없는 붓다가 아닌 사바세계(Sahā
lokadhātu)의 고타마 붓다를 가지고 있었다."10)
10) Nalinaksha Dutt, Buddhist Sects in India (Calcutta: Firma KLM, 1977), 76-7쪽.
3.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Vaibhāṣikas)의 견해
설일체유부는 대중부의 ‘초세간적 붓다’와는 반대로 주장한다. 즉
붓다의 태어난 몸(janmakāya)은 전적으로 불결하고(sāsrava), 무명으로
쌓여있고 (avidyānivṛta), 욕망의 족쇄에 채워져 있다(tṛṣṇāsaṃyojana).
대중부에 의해 위에서 인용된 니까야의 구절에 대한 논리적 반박을
위해, 설일체유부는 다음과 같은 차이를 내세운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경은 법신(dharmakāya)을 언급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결정적인 것
이 아니다. “속세에서 태어나 속세에서 성장한 여래”는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를 언급하는 것이다. “속세 위로 자신을 유지하고, 세간
법에 더렵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법의 몸을 의미한다.11) 붓다의 태어
날 때 받은 몸은 세간법에 종속된다. 이러한 세간법은 순수(無漏,
anāsrava)와 부정(有漏, sāsrava)로 나뉜다. 부정한 법(有漏法)은 존재를
부양하고 지지하는 것들, 다른 말로 하자면, 생로병사의 끊임없는
과정을 만드는 것들이다. 순수한 법(無漏法)은 반대로 생로병사에 연연히
않고 끊는 성격을 가졌다. 설일체유부는 붓다가 어떻게 세간팔법
(lokadharma)과 맞닥뜨렸는지를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보여주는데,
세간팔법이란 이익(利, lābha), 명예(譽, yaśas), 찬양(稱, praśaṃsā),
즐거움(樂, sukha)의 4순(順)과 손실(衰, alābha), 훼손(毁, ayaśas),
비방(譏, nindā), 괴로움(苦, duḥkha)의 4위(違)이다. 세간팔법 각각의
경우를 들어 설일체유부는 붓다는 “해탈하셨기 때문에 오염되지 않는
다고 하는 것이지, 생신(生身)까지 무루라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님의
생신은 漏로부터 생기셨기 때문에 유루라 하고, 능히 다른 누를 내기
때문에 유루라 하는 것이다(解脫此故說為不染 非謂生身亦是無漏 然佛生
身從漏生故說為有漏 能生他漏故名有漏)”라는 점을 강조한다.12)
11)『대비바사론』권76 (『大正藏』27[1545], 392상-중), “문: 만일 부처님의 생신이
유루라면 그것을 인용한 계경을 어떻게 회통해야 하는가? 답: 거기에서는 법신을 말했기
때문에 증명이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 경에서 ‘여래는 세간에 살아 계시고 세간에 오래
머무른다’고 한 것은 부처님의 생신을 말한 것이요, ‘출세간에 머무르면서 세간법에 오염
되지 않는다’고 함은 부처님의 법신을 말한 것이다”(問若佛生身是有漏者 云何通彼所引契經
答彼說法身故不成證 謂彼經說 如來生在世間長在世間者 說佛生身 出世間住不為世法所染污
者說佛法身).
12) 앞의 책, 같은 쪽; Lamotte (1976), 앞의 책, 296쪽; Louis De La Vallée Poussin, “Le
corps de l’arhat est-il pur?” in Mélanges Chinois et Bouddhiques (MCB), Vol. 1
(1931-2), 112-3쪽 참조.
4. 대승(大乘, Mahāyāna)의 견해
대승경전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법신(dharmakāya)이라는 테두리 속에
포함되는 실제 태어날 때 받은 몸과 시방세계(daśadhātukāya)에 현현
하는 화신(nirmāṇakāya)을 대조시킨다. 화신은 붓다들의 방편선교
(方便善巧, upāyakauśalya)13)로부터 나온 단순한 변형들이다. 법신은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다. 그것은 蘊(skandha), 界(dhātu), 處
(āyatana)도 아니고, 형상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시각적인 이해도 아
니다.14)『우빠데샤(Upadésa)』에서, 붓다는 두 개의 몸을 가진 것으로
말해진다: 태어날 때 받은 몸(janmakāya)은 악업의 과보에 종속된다.
그러나 본질적인 몸(dharmatākāya)는 악업의 과보에 종속되지 않는다.
붓다가 고통을 가장하는 것은 중생을 교화시키기 위한 방편(upāya)이다.15)
13) 붓다의 운이 나쁜 사건들은 다른 이들의 교화를 위해 붓다에 의해 의도된 업의
과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들은 그의 방편의 예들이다. M. Tatz, The Skill in Means
(Upāyakauśalya) sūtra (Delhi: Motilal Banarsidass, 1994), 2쪽.
14) Lamotte (1976), 앞의 책, 296-7쪽.
15) Lamotte (1976), 앞의 책, 298쪽.
마지막으로 라모뜨는 Devadahasutta에 기반한 시각을 제시한다: “만약
에 중생들이 그들의 과거업 때문에 즐거움 또는 괴로움을 경험한다면,
그때는 오 사문들이여, 과거에 여래는 선업만을 행하였고, 그리하여
현재 여래는 순수하고 즐거운 느낌만을 경험한다” (sace, bhikkhave,
sattā pubbekatahetu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enti, addhā, bhikkhave,
tathāgato pubbesukatakammakārī, yaṃ etarhi evarūpā anāsavā sukhā
vedanā vedeti).16) 그러나, 붓다에 의한 이 언급은 내러티브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붓다는 이 언급을 니간타교도들(Nigaṇṭhas)을 조롱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비록 라모뜨는 이 언급을 붓다의 몸에 관한 또 다른
견해로써 분리하였지만 다른 견해들처럼 이 견해를 지지했던 부파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16) Majjhima-nikāya [MN] ii, 227쪽;『중아함경』권4 (『大正藏』1, 444하), “彼衆生者
所受苦樂皆因本作 若爾者 如來本有妙業 因彼故如來於今聖無漏樂”; Lamotte (1976),
앞의 책, 295쪽 참조.
II. 테라바다의 관점
비바사사(毘婆沙師, Vaibhāṣikas)들과는 반대로, 테라바다는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이래로 붓다는 모든 부정한 것들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붓다의 몸은 아직 다섯 가지 감관
때문에 감각적인 경험에 지배되고 있다고 한다. 테라바다는 붓다가
그의 일생 동안 두 가지 열반, 즉 유여열반(有餘涅槃, sa-upādisesa)과
무여열반(無餘涅槃, an-upādisesa)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비구들이여, 유여열반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아라한인 비구는 모든 부정한
것을 파괴했으며,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고, 해야 할 일을 다 했으며, 모든 짐을
내려놓았고, 최고의 목표를 이루었으며, 윤회로 이끄는 속박을 파괴했고,
완벽한 지혜를 통해 자유로워진 사람이다. 그에게서는 아직까지 다섯 감각기관이
소멸되지 않았다. 그들이 파괴되지 않았음으로 이들을 통해서 그는 기쁘거나
슬프게 된다. 그는 또한 행복과 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무여열반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아라한인 비구는 … 비구들이여,
그가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모든 느낌들이 여기에서 가라앉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무여열반이라 한다.
katamā bhikkhave saupādisesā nibbānadhātu? idha bhikkhave bhikkhu arahaṃ hoti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
-jano sammadaññāvimutto. tassa tiṭṭhanteva pañcindriyāni yesaṃ avighātattā
manāpāmanāpaṃ paccanubhoti, sukhadukkhaṃ paṭisaṃvediyati. tassa yo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ayaṃ vuccati bhikkhave saupādisesā nibbānadhātu. katamā
ca bhikkhave anupādisesā nibbānadhātu? idha bhikkhave bhikkhu arahaṃ hoti khīṇāsavo
vusitavā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
-jano sammadaññāvimutto. tassa idheva bhikkhave sabbavedayitāni anabhinanditāni
sītibhavissanti, ayaṃ vuccati bhikkhave anupādisesā nibbānadhātu-Itivuttaka [It], ed. E.
Windisch, (London: PTS, 1948), 38쪽
여기서 고따마가 열반을 이루었을 때, 그는 열반을 ‘경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어떠한 신체적 변화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는 80세까지 다섯 가지 감관을 가지고 육체적으로 존재했다. 곰브
리치18)가 지적하듯이, “열반은 ‘물건’이 아니라 탐진치가 없는 상태의
경험이다.” ‘(탐진치가) 소멸되는’ 경험의 성과는 그가 더 이상 끊임
없는 윤회에 매달리지 않으리라는 강한 신념19)을 가지게 한다. 그는
“부정함은 다 소멸되고, 완성을 이루었으며, 해야할 일을 다한” 자로
보여진다. 이런 경험으로부터 이 비구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비록
정상생활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그는 이전과는 다르다. 그는 마음에
대해 확고한 통제를 한다(manoindriya). 그러나, 그는 아직도 그의 다섯
가지 감관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소통을 하고 있고, 그 결과로, 그는
때때로 고통이나 즐거움을 경험한다. 이것은 붓다의 몸에 관한 테라
바다의 이론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것은 붓다의 일생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붓다의 특별한 질병이나 고통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은 아닌 것 같다.
18) Richard Gombrich, Theravda Buddhism: A Social History from Ancient Benares to
Modern Colombo (London: Routledge & Kegan Paul, 1988), 64쪽.
19) K. R. Norman, “Mistaken Ideas about Nibbāna,” in The Buddhist Forum 3 (London,
1993), 214쪽.
붓다의 질병들과 고통들을 설명하는 경우에, 테라바다는 또 다른 설명을
선호하는 듯하다. 그것들은 단지 그때 당시의 신체적 상태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붓다 자신이 SN에서 시바까(Sīvaka)에게 설명하는 데에서
나타난다.20) 그 경에서 시바까는 질문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즐거움,
고통 또는 정신 상태는 무엇이나 다 과거의 행위 때문입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붓다는 업 이외에도 사람이 아플 수 있는 일곱 가지 다른 이유를
준다: “시바까여, 또한 이러한 관계 속에서, 고통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노여움(pitta)으로부터, 냉담함(semha)으로부터, 바람(vāta)으로부터,
신체적 기질들의 조합(sannipāta)으로부터, 계절들의 변화(utu)로부터,
운이 나쁜 사건들의 스트레스(visama)로부터, 급작(opakkamika)으로부터,
그리고 또한 네가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 업의 성숙으로부터이다. 시바까여.”
이것이 왜 붓다가 모든 즐거움과 고통을 과거의 행위와 연결 짓는 것이 틀
리다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것들은 개인적인 경험과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들을 넘기 때문이다.”21) 이것은 업보 이론의 무조건적인 적용
에 대한 붓다에 의한 반대의 표현이다. 명백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경은 단지 날씨 같은 외부적 조건들이나 신체적 조건들 때문에도 붓다가
불편함에 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22) 이것은 또한『밀린다팡하』의 주제
이다.23) 여기서는 단지 붓다의 질병들만을 상기한다-발 상처, 설사 (DN.
ii.127쪽),24) 몸의 고통(Vinaya,i.278-80쪽),25) 풍병 (SN.i.174쪽) 등이다.
이것은 곧 붓다에 의해 느껴진 감각들중 아무것도 그의 업에서 파생한
것은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이다.(natthi bhagavato kammavi-pākajā
vedanā).26)
20) SN iv, 230-01쪽;『잡아함경』권99 (『大正藏』 2, 252하-253상);『별역잡아합경』
권11 (『大正藏』2, 452중-하).
21) Yaṃ ca sāmaṃ ñātaṃ taṃ ca atidhāvanti yaṃ ca loke saccasammataṃ taṃ ca
atidhāvanti. SN iv, 230쪽.
22) Paul Demiéville, et. al., ed., Hôbôgirin: Dictionnaire encyclopedique du bouddhisme
d’après les sources chinoises et japonaises (Tokyo: Maison franco-japonaise, 1929),
Byô, 234쪽 참조.
23) Milinda-pañho [Mil], ed. V. Trenckner (London: PTS, 1962), 134-6쪽.
24) Dīgha-nikāya [DN].
25) Vinayapiṭaka [Vin], ed. H. Oldenberg (London: PTS, 1879-1883).
26) Lamotte (1976), 앞의 책, 295쪽.
III. 테라바다 불교에서의 Pubbakammapiloti
테라바다 불교는 보수적으로 알려져 있고, 인간적인 붓다보다는
절대자로서의 붓다만을 받아들이는 시각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러나 테라바다 불교에서 역사적 붓다의 개념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테라바다가 어떻게 붓다를 보았는지, 특히 그들이 어떻게
붓다의 질병들과 고통들을 설명해야하는 딜레마를 풀려고 시도했는지,
그리고 특히, Pubbakammapiloti라는 개념이 어떻게 테라바다 불교
안에서 다루어져 왔는지 연대기적인 순서에 따라서 살펴볼 것이다.
테라바다 불교는 삼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다. 경전의(canonical) 시기,
후기 경전의(postcanonical) 시기 그리고 주석서의(commentarial) 시
기이다.
1. 경전의 시기
『까타바뚜(Kathāvatthu: Kv)』는 붓다의 개념에 대해서 다룬 가장
초기 텍스트들 중의 하나이다. 전통에 따르면, 붓다의 대반열반
(Mahāparinibbāna) 후에 218년이 지나서 목갈리뿌따띠사(Moggali-
puttatissa)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테라바다
전통 내에서 연도가 정확하게 밝혀진 유일한 경전 자료이다.27)
27) Oskar v. Hinüber,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 (Berlin, New York: Walter de
Gruyte, 1996), 71쪽.
비 테라바다 계열의 초세간적인 시각에 반대해서, Kv는 붓다의 인간
적인 면을 강조한다. 그들은 붓다가 어떤 다른 인간들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이려고 시도한다. 비록 Kv가 인간 붓다를 보이지만,
Kv 안에서 묘사된 붓다는 완전한 인간으로 등장한다. Kv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Kv의 입장으로부터 우리는 초기 테라바다 불교의 태도를
알 수가 있다.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Kv가 인용하는 일부
예들은 후기 테라바다 불교의 입장과도 또한 다르다. 여기에 한 예가
있다:
논쟁점: 저 고귀한 붓다의 평범한 말(vohāra)28)은 초세간적이다(lokuttara)(II-
10). 주석서-대중부 安達羅派(Andhakas)는 붓다의 일상적인 어법이
초세간적인 어법이라는 것을 지지한다.29)
28) vohāro는 일반적으로 평범하고 세속적인 문제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예에서는 말에
관한 것이다. Shaw Zan Aung and Rhys Davids, C.A.F. Points of Controversy, trans.
(London: PTS, 1979), 134쪽.
29) 앞의 책, 같은 쪽
이것은 Kv의 논쟁점들 가운데 하나이다. Kv의 요점은 비록 붓다의 일부
언설이 초세간적이었지만, 그의 언설은 대부분 평범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 Kv는 붓다의 습관적인 언설에 모욕을 받은
자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물론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게나
어리석은 사람아(mogha-purisa)! 여기서의 너의 실수가 얼마나 멀리
까지 미치는가!”30) 그러나, 테라바다 불교 안에서도 그 어느 곳에서도
붓다의 이런 종류의 표현이 Kv에서처럼 해석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승경전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테라바다의 다른 경전들에서 조차도
이런 논쟁을 발견할 수가 없다.31)
30) SN I, 160쪽; DN iii, 3쪽, “Passa mogha-purisa yāvañ ca te idaṃ aparaddhan ti.”
31) Lamotte (1970), 앞의 책, 1668쪽에 따르면, 이 표현은 관련된 중생들을 위한 것이다.
“다양한 계율위반에 대하여, 붓다는 종종 비구들을 <어리석은 사람들>로 취급했다.
(Sanskrit는 mohapuruṣa; Pāli는 moghapurisa). 별명은 말투의 일부분이 될 정도로
매우 평범한 것이고, 상투적인 문구 속에서 관례로 되어있다. (Vin. I, 45, 58, 60, 78,
154, 159-160, 189, 218, 301, 305쪽; ii, 2, 14, 105, 161쪽; iii, 20-21, 45, 111,
188쪽 참조): kathaṃ hi nāma tvaṃ moghapurisa...; n’etaṃ moghapurisa appasannānaṃ
vā pasādāya pasannānaṃ vā bhiyyobhāvāya. (너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어리석은 사람아,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교화에도, 믿음을 가진 이들의 증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친 표현을 쓰는 것에 대해 붓다에게 불평을 할 수는 없다. 두 교단(대소승)의
시각에서 붓다의 모든 언사들은―부드러운 것은 물론 거친 것도―단지 중생들의
이익 됨을 목적으로 한다. 대승의 시각에서, 존재와 사물들(pudgala와 dharma-
nairātmya)이 이중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시각을 결코 잃지 않는다. 모욕
당하는 이도 없고, 비난받는 이는 더더구나 없다.”고 한다.
Kv에서, 우리는 붓다에 관한 어떠한 복잡한 이론적인 논쟁도 찾아 볼
수가 없다. 예를 들어 Kv는 業을 언급하지 않는다. 붓다가 초세간적
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차라리 테라바다와 다른 부파들 사이의
간단한 논쟁이다. Kv는 붓다는 현실에서 존재했지만 유일한 방식으로
존재하였던 인간이었다는 관점을 고수한다.32)
32) 자기 관점을 고수하기 위하여, Kv는 때때로 극단적인 예에 의지한다: “논쟁점: 붓다의
대소변(uccārapassāva)은 다른(añña) 향기들(gandhajāta)을 훨씬(ativiya) 뛰어넘는다
(adhigganhāti) (xviii-4). 주석서: 붓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인하여, 일부
安達羅派(Andhakas)들과 北道派(Uttarāpathakas)들은 이 관점을 지지한다.”
Aung (1979), 앞의 책, 326쪽.
Kv는 붓다는 우유죽을 공양한다고 말하면서 이 관점을 부정한다. 이런 종류의 논쟁은 후에
보이지 않는다.
Kv에서 Pubbakammapiloti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어떤 논쟁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언급들을 통하여 우리는 Kv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즉 Kv의 시대에 Pubbakammapiloti와 관련된 논쟁들은 아직 나타
나지 않았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2. 후기경전 시대
『밀린다팡하(Milinda-pañha: Mil)』33)는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텍
스트로 여겨질 수 있다. Mil에서 붓다에 관한 대부분의 모호함들은 좀더
발전된 방식으로 다뤄진다. Mil은 업이나 신체조건 같은 주요 이론들을
사용해서 붓다를 설명한다. Kv와 비교해서 Mil은 다른 부파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대신에 일관적인 테라바다식의 설명을 제공하는데
관심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Kv처럼 Mil도 인간 붓다를 설정하려고 시도
하지만 또한 모든 부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존재를 설정하려 했다.
예를 들어 이런 타협은 붓다는 일체지를 성취했고 신통을 보일 수 있으
나 이는 매우 제한적인 상황에서라는 식의 설명이 보인다.
33) 밀린다팡하의 성장은 매우 대략적으로 추적될 수 있다. 한역본은 다섯 개의 텍스트중
단지 첫 부분만을 포함한다. 이것은 기원전 1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 사이에
작성된 것 같다. 남은 네 개의 부분은 5세기 주석서(Aṭṭhakathā)의 시대에 존재했다.
Hinüber (1996), 앞의 책, 86-87쪽.
Pubbakammapiloti에 관해서, Mil은 Pubbakammapiloti의 주제들과 유사한
주제들을 토론했다. 그리고 붓다고사 이전의 어떤 다른 후기 경전들보다도
좀 더 직접적으로 그런 주제들을 다루었다. 실수하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붓다는 당시 테라바다 불교도들에게 이미 매우 논란이 많은 주제였던 것
같다. 붓다의 이런 면은 비록 각기 해결책들은 매우 달랐지만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에서도 논의되고 있었다.
Pubbakammapiloti는 세 종류로 크게 나뉘어지는데 이는 비방과 데바다타
(Devadatta)에 의한 공격 그리고 신체적인 병이다. 비록 에피소드들이
Pubbakammapiloti의 그것들과는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Mil은 이
세 가지 종류를 모두 다룬다. Mil은 Pubbakammapiloti의 에피소드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업보(karmavipāka)이론을 찾지는 않는다. 붓다에 의한
거친 언사의 경우에서 조차도, 붓다는 상대방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라
고 한다.34) 붓다가 ‘어리석은 사람(mogha-puriso)’라는 용어를 사용해
서 어떤 사람들을 비방했다는 Kv의 입장을 고려할 때, Mil은 반대 입장을
취한다.
34) 스물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나가세나는 답변한다, “세존께서는 Sudinna를 어리석은
사람(mogha-puriso)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만한 성격(duṭṭha-kittena)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 (그의 행동의) 참 본성을
단지 지적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엄격할 때 조차도 여래의 말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하고 온화하게 합니다. 왕이시여, 뜨거운 물이 부드러워질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든
부드럽고 온화하게 하듯이 엄격할 때 조차도 여래의 말은 그와 같아서, 아버지의 말이
그의 자녀들에게 그렇듯이 자비와 이익으로 가득 차있습니다.”-Rhys Davids, T. W,
The questions of King Milinda, (London: PTS, 1925), 238-9쪽, (각주)22 참조.
Mil은 에피소드의 원인들을 붓다에게서가 아니라 신체적인 상태나
데바다타에게서 찾는다. 붓다가 자신의 몸의 고통을 느끼는 가에 대한
질문에 관하여, 나가세나(Nāgasena)는 붓다가 여러 번 고통을 겪었
음을 확인한다. 그러자 왕은 묻는다.
그렇다면 존자여, 만약에 여래가 그가 붓다가 되는 중에 그 자신 내부의 모든
사악함을 소멸시켰다면, 그의 발이 조각에 찔렸다던가, 그가 설사를 했다 던가
등등의 언급들은 모두 거짓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언급들이 사실이
라면, 그때 붓다는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업이 없으면 고통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고통은 업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고통이 일어나는 것은
업 때문이다.
Yadi bhante Nāgasena Tathāgato sabbaṁ akusalaṁ jhāpetvā sabbaññutaṁ patto, tena
hi: Bhagavato pādo sakalikāya khato lohitapakkhandikā ca ābādho uppanno ti yaṁ
vacanaṁ taṁ micchā. Yadi Tathāgatassa pādo sakalikāya khato lohitapakkhandikā ca
ābādho uppanno, tena hi: Tathāgato sabbaṁ akusalaṁ jhāpetvā sabbaññutaṁ patto
ti tam―pi vacanaṁ micchā, na-tthi bhante vinā kammena vedayitaṁ, sabban―taṁ
vedayitaṁ kammamūlakaṁ, kammen’eva vediyati. (Mil, 134쪽.)
이에 관해서 나가세나는 당시의 붓다의 신체적 상태를 언급한다.
SN에서 언급된 여덟 가지 종류의 원인들에 대해 추가적인 설명을
하면서, 그는 결론짓는다.
그리하여 업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은 다른 원인들로 해서 일어나는 것보다 훨씬
적습니다.
Iti kho mahārāja appaṃ kammavipākajaṃ, bahutaraṃ avasesaṃ. (Mil, 135쪽.)
예를 들어, Pubbakammapiloti의 주제중의 하나인 바위 조각에 상처
입는 것은, Mil에 따르면, 붓다의 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데바다타의 증오 때문이다. 데바다타와의 관계에 있어서, 붓다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모든 잘못은 데바다타의 업 때문이고, 그리고 더
욱이 그의 업은 무한해졌는데 왜냐하면 그가 승단에 들어갔기 때문이
다. 그래서 Mil은 제안하기를 붓다의 병의 원인들은 그의 신체적 상태
나 데바다타의 행위로부터 생긴 것이라 한다. Mil은 붓다가 마주친 사
건들이 혹시라도 그 자신의 악업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 어떤 개연성도
주지 않는다.
아래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어떻게 Mil이 업 이론으로부터 붓다를
조심스럽게 분리했는가를 볼 수가 있다:
"세존의 발이 바위 조각에 의해 찢어졌을 때, 뒤이은 고통은 제가 언급한 여덟
가지 원인 중에 그 어느 것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외부적인 요소에 의해 생
긴 것입니다. 왕이시여, 왜냐하면 데바다타는 수백 수천의 생을 이어오는 동안에
여래에 대하여 적의를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붙잡고
여래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으로 그것을 민 것은 그의 미움 때문
입니다. 그러나 두 개의 다른 바위들이 함께 굴러와서 그것이 여래에게 닿기
전에 가로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격의 힘에 의해, 바위는 조각이 났고, 세존의
발에 떨어져 피를 흐리게 했습니다. 당시 그 고통은 세존 자신의 업의 결과이거나
(kammavipākato vā Bhagavato esā vedenā nibbattā kiriyato), 다른 이의 행위의
결과로서 생겨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종류의 고통은 없습니다. 씨가 발아되지 않을 때에는 토양이 나쁘거나 씨에 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음식이 소화되지 않을 때에는 위에 결점이 있거나
음식이 상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비록 세존이 자신의 업의 결과로 생긴 고통
(Api ca na-tthi Bhagavato kammavipākajā vedanā)이나 운이 나쁜 사건들의
스트레스(visamaparihārajā)가 야기한 고통 때문에는 결코 괴로움을 당하지 않
는다고 했지만, 그는 아직도 다른 여섯 가지 이유들 때문에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가 겪는 고통에 의해 그가 목숨을 잃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37)
37) Rhys Davids (1925), 앞의 책, 193-94쪽.
Mil은 업 이론에 의해서 사람들이 붓다의 고통은 붓다 자신의 업의
결과라고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Mil은 붓다가
결코 자신의 업 때문에 고통 받지 않았음을 추가한다. 붓다는 단지
외부적인 원인들에 의해서만 심각하지 않은 방향에서 고통 받을 수
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조띠빨라(Jotipāla)의 출생 이야기에서 잘
보인다:
"만약에 단 음료가 毒 근처에 놓이면 맛이 쓰게 되고, 찬물이 불 근처에
놓이면 따뜻해지듯이....(비록) 브라만 청년 조띠빨라(Jotipāla)가 지혜와
믿음을 갖추었고, 그의 지식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믿음도 없고,
믿지도 않으려는 가족에게 태어났을 때, 그는 가족들이 하는 방법으로
무지하게 여래를 비방하고 모욕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그가 여래에게
접근하자, 그때 붓다의 특별한 자질을 알게 됨으로써 그는 시종같이 되
었다."
Yathā amataṁ visam―āsajja tittakaṁ hoti, yathā ca sītūdakaṁ aggim―āsajja uṇhaṁ
hoti......evam―eva kho mahārāja Jotipālo māṇavo puññavā saddho ñāṇa-
vipulasappabhāso assaddhe appasanne kule paccājāto, so kulavasena andho
hutvā tathāgataṁ akkosi paribhāsi, upagantvā ca buddhaguṇam―aññāya ceṭakabhūto
viya ahosi. (Mil, 223쪽.)
우리는 MN이나 ?중아함경?의 위 구절과 상응하는 텍스트에서 이런
부분을 찾을 수 없다. Mil의 저자나 저자들의 의도는 그들이 업을 짓
는 붓다를 원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확하다. 이제 조띠빨라는 명석
했으나 가족들 때문에 그가 가섭(Kassapa)붓다를 비방하게 되었다고
추론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조띠빨라는 가섭붓다를 비방했지
만 조띠빨라는 그를 비방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되었
다. 그의 나쁜 행위는 그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
면, Mil은 붓다가 그의 과거 악업으로 인해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3. 주석서(Aṭṭhakathā) 시대
주석서 문헌에서도 역시 붓다는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남아있다. 그
러나 붓다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절대적으로 초인화 되었다. 그는 평범한 인간 이상으로 묘사되기에
이르렀다. 주석서 문헌의 시기에, 그는 경전 자료들에서 발견되는 위
인들의 서른두 가지 신체적 상호(mahāpurisalakkhaṇa)를 부여받았
을 뿐 아니라 팔십종호(asīti anuvyañjana)와 백 개의 공덕상
(satapuññalakkhaṇa)을 부여받았다.39) 이 시기의 대표적 인물인
붓다고사(Buddhaghosa)는 붓다의 고통에 대해 업을 이용한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SN의 구절, “내 등이 결리는구나. 등을 펴야겠다”40)
에 대해 그는 언급하기를,
39) Toshiichi Endo, Buddha in Theravāda Buddhism: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in the Pali Commenatries (Dehiwela: Buddhist Cultural Centre, 1997), 108쪽.
40) piṭṭhi me āgilāyati tam aham āyamissāmīti. (SN iv, 184쪽.)
왜 [붓다의 등이] 그를 괴롭게 하는가? [사문으로서] 육년 동안의 크나큰 고행에
자신을 헌신했던 붓다는 엄청난 신체적 고통을 겪었다. 후에, 늦은 노년기에,
그는 등에 고통을 느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등창]은 [업에 의한] 원인이
아니다(akāraṇaṃ etaṃ).41)
41) F. L. Woodward, ed., Sārattha-ppakāsinī, Buddhaghosa’s Commentary on the
Saṃyutta-nikāya, Vol. 3, 52쪽: kasmā āgilāyati? Bhagavato hi chabbassāni
mahāpadhānaṃ padahantassa mahantaṃ kāyadukkhaṃ ahosi, athassa aparabhāge
mahallakakāle piṭṭhivāto uppajjīti. Akāraṇaṃ vā etaṃ.
J. S. Walters는 붓다고사를 붓다가 어떠한 이유 없이도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대안적인 인과원칙의 입장조차도 거부하는 인물로 해석한다.
“The Buddha’s Bad Karma,” Numen 37/1 (1990), 94쪽.
붓다의 등창에 대한 이런 생리학적인 설명과 출가 초기의 고행주의
이외의 더 다른 심각한 원인은 없었다는 언급은 붓다의 병에 대한
붓다고사의 태도를 보여준다. 비록 그가 대중부와 다른 부파들에 의해
지지되는 초인화한 붓다보다 역사적인 붓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붓다고사는 Pubbakammapiloti에서 다뤄지는 주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붓다고사의 설명은 때때로 초인화한 붓다를 암시하는 것 같다.
대반열반경(Mahāparinibbāna)에 대한 그의 주석을 보자:
"붓다에게 부채질하기: 그의 의무인 붓다에게 부채질을 하면서 아난다 존자는
서 있었다. 그러나 세존은 추위도 열도 느끼지 않았다."42)
42) Bhagavantaṃ vījamāno ti thero vatta-sīsena ṭhatvā Bhagavantaṃ vījati. Bhagavato
pana sītaṃ vā uṇhaṃ vā n’atthi. T. W. Rhys Davids, J. E. Carpenter & W. Stede, eds.,
Sumaṇgala-vilāsinī (Dīgha-nikāya commentary) [Sv] (London: PTS, 1886-1932),
517쪽; Yang-gyu An, “Buddhology in the Mahāparinibbāna Suttanta and its
Commentary” (PhD thesis, Oxford University, 1998), 150쪽 참조.
우리가 이 문장을 볼 때, 붓다고사의 의도는 그리 명확하지 않다.
그러므로, 붓다고사가 초인화한 붓다를 묘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안양규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쓰기를:
"주석서와 이에 대한 복(復)주석서(subcommentary)가 이 매우 간단한 사건에
대해 언급을 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붓다고사는 붓다가 더위나 추위에 의
해 고통 받았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마도 매우 어렵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역사적인 붓다보다는 초인화한 붓다로서의 붓다를 생각했다. 복주
석서는 붓다고사의 언급에 대해 다시 언급을 한다. '그 때 붓다들이 쌓은 복덕
덕분에 계절은 언제나 더위와 추위가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의미
한 것이다.'”43)
43) An, 위의 논문, 같은 쪽.
안양규의 설명은 매우 이해할만 하다. 붓다고사는 붓다의 몸에 관한
논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Pubbakammapiloti의 주제들과
함께, 붓다가 더위나 추위로부터 고통을 겪었는가 하는 것은 논쟁적
인 문제였다. 논쟁은 Mppś에서도 야기된다:
"게다가 겨울(hemanta)에 [보름달] 전후의 팔일 동안에 찬바람(śītavāyu)이
대나무들(veṇu)을 부러뜨릴 때, 붓다는 추위를 막기 위해서 세 개의 옷
(tricīvara)을 입었다.44) 숨 막힐 듯한 더위 속에서 아난다는 붓다의 뒤에
서서 붓다에게 부채질을(vījati) 하고 있었다.45) 따라서 붓다는 세상의
모든 자잘한 고통들을 겪었다."46)
44) 율장에도 붓다가 찬바람으로 고생한 이야기가 있다: Vinaya of Sarvāstivāda (『십송율』
권27 (『大正藏』23, 195상)); Vinaya of Mahīśāsaka (『오분율』, 권20 (『大正藏』22,
136상)); Vinaya of Dharmagupta (『사분율』권40 (『大正藏』22, 856하-857상));
Pāli Vinaya i, 288쪽.
45) 이것은 아주 일상적인 장면이다. 예를 들어, “tena kho pana samayena āyasmā
Sāriputto bhagavato piṭṭhito ṭhito hoti bhagavantaṃ vījamāno”(MN I, 501쪽).
46) Lamotte (1944), 앞의 책, 511-512쪽.
이 딜레마에 대답하면서, 붓다고사는 붓다를 신체적 조건에 영향
받지 않는 존재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후에 담마빨라(Dhammapāla)
에 의해서 붓다는 계절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있는 것으로 묘사
되었다. 붓다고사와 담마빨라의 이런 태도들은 붓다를 초세간적인 존재
로서 묘사한다.
그러나 붓다의 몸에 대해서, 붓다고사는 신체적 조건들이 붓다의 몸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것이 왜 붓다들의 삶이
계절(기후)와 음식에 매달려있는 이유이다. 붓다고사는 날씨와 음식이
수명의 길이를 늘일 수도 줄일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들의 수명이
무한하더라도, 붓다들이 인간 세상에 사는 한에는 그들의 물리적 신체
는 그들이 사는 환경에 의해 영향 받는다. 궁극적으로 그들의 수명은
평범한 사람들의 수명과 같다.47) 그러나 붓다의 몸(rūpa-kāya)에 대
한 이런 설명은 어떤 특정한 질병이나 고통을 설명하는데 실제로 적용
되지는 않는다.
47) An (1998), 앞의 논문, 8쪽.
붓다고사 이후에는 담마빨라(Dhammapāla)가 주석서 시대에 가장 중
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그의 생존 연대가 불확실하지만 그는
붓다고사 보다는 확실히 후대 인물이다.48) 엔도는 비록 같은 시각에서
의 발전이라도 담마빨라는 붓다의 타고난 몸(rūpa-kāya)과 법신
(dhamma-kāya)에 대해 붓다고사가 언급한 특성을 확대한다고 한다.49)
한편 그는 Pubbakammapiloti에 대해 쓴 최초의 주석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텍스트는 Paramattha-Dīpanī Udānaṭṭhakathā로 제목이 달려있
다. Udāna에 대한 이 주석서는 비방하는 여인인 Sundarī의 이야기를
전하는 후대경전 자료 중 가장 초기의 것이다. 그가 業에 의한 설명을
지지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48) Hinüber는 비록 담마빨라의 연대가 불확실하지만 담마빨라는 붓다고사 보다 후대이고
서기 500년 이후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Hinüber (1996), 앞의 책, 169쪽.
49) Endo (1997), 앞의 책, 109쪽.
"소위 ‘업의 잔고(karmic remnants)’라고 이야기되는 이전에 행해진 행위의
남겨진 모든 것들이 따라서 괴로움으로서 남고, 그들은 비난들과 같은 형태
로 붓다에게 나타나게 되는데, 찐짜마나비까(Ciñcamāṇavikā)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들에 대한 것들이 있다."50)
50) Yathā c’etaṃ evaṃ Ciñcamāṇavikādīnaṃ vikārak’itthīnaṃ Bhagavato
abbhakkhānādīni dukkhāni nipphannāni sabbāni pubbe katassa kammassa
vipāk’āvasesāni, yāni kammāni pilotikānī ti vuccanti. F. L. Woodward, ed.,
Paramatthadīpanī nāma Udānaṭṭhakathā (Udāna commentary) [Ud-a]
(London: PTS, 1977), 263쪽; Peter Masefield, trans., The Udāna Commentary
(Oxford: PTS, 1995), 632쪽 참조.
그러나, Pubbakammapiloti를 언급할 때조차도 담마빨라는 Apadāna에서
전체 Pubbakammapiloti 부분을 인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부가적인
설명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에 대해 대단히
조심스러워 한다. 그는 Pubbakammapiloti 개념에 대해 확실히 우호적이
나 그의 일반적 태도는 그의 텍스트를 동해 볼 때 항상 명확한 것은 아니
다.
연대기적인 개관에서 볼 때, 뛰어난 인간으로서의 붓다와 인간적인 약점에
매여 있는 인간으로서의 붓다에 관한 테라바다의 딜레마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IV. 맺는 말
대중부가 붓다는 세속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반면에 설일체유부는
붓다가 그의 부정함(漏, āsava) 때문에 그가 속세에서 존재할 동안에는
세속법에 매여 있다고 생각했다. 테라바다는 이 두 시각을 잘 절충한 듯하다.
그들의 붓다에 대한 해석은 붓다가 다섯 개의 감관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그는 정각 후에도 감각적인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점을 정당화
하기 위해 테라바다는 두 종류의 열반 이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붓다의
질병과 고통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테라바다의 딜레마는 두 종류의 열반
이론이 붓다의 그러한 어려움들을 설명하는데 그리 적당치 않다는 것이
다. 그리하여 테라바다는 신체적 조건부터 초인화 까지에 이르는 다양
한 해석들을 제공했다. 이러한 해석들의 요점은 그것들이 業의 인과성이
붓다에게 적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이다. 테라바다 불교
에서 붓다는 열반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그는 업에 매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Pubbakammapiloti라는 즉 붓다의 과거
악업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다음
논문에서는 Pubbakammapiloti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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