解題 해제
1. 머리말
2.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저자와 내용
3. 『일승법계도』의 주석서와 그 구성 내용
4. 본서에 수록된 『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에 담긴 핵심교의
5.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전통사상총서『정선화엄I(精選華嚴I)』은 대한불교조계종에서 한
국불교의 전통 사상을 알리는 총서로 기획하여 『한국불교전서』1)를 저
본으로 역주한 것이다. 이 책은 한국불교 가운데 화엄 전통을 알리기 위
한 기획 의도에 따라서 먼저 한국 화엄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한국불
교 역사상 꾸준히 연구·전승되며 큰 영향을 미쳐 온 의상(義湘 또는 義相,
625~702)스님의 대표 저술인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2)(이하
『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 등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되었다..3)
1) 이 책에 수록된 『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 등은 모두 『한국불교전서』(권 2, 4, 6,
7)에 실려 있는 본을 저본으로 하였다.
2)『화엄일승법계도』의 제목이『고려대장경』제45권에 수록된『법계도기총수록
(法界圖記叢髓錄)』(이하『총수록』)에 인용된 원문에는『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오
십사각 이백일십자(一乘法界圖合詩一印五十四角二百一十字)』로 되어 있다.
3) 이 책에는 의상스님과 의상계 화엄사상을 담고 있는 전적을 수록하였고, 그 외 이
책에 수록되지 않은 다른 화엄전적은 화엄Ⅱ에서 정선하여 수록하기로 하였다.
삼국(또는 가야를 포함한 사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로 불교는 종
교적 차원을 넘어 문화와 사상 전반에 걸쳐 우리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
할을 담당해 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화엄 전통은 한국불교의 근간을 이루
는 것으로서, 특히 신라의 의상스님 및 그 법손들에 의해 전개된 화엄은
한국화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자장(慈藏, 590~658)스님과 원효
(元曉, 617~686)스님 등의『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하『화엄
경(華嚴經)』) 탐구와 홍포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의
상스님은 화엄교학을 신라에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화엄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화엄승가(華嚴僧家 : 華嚴宗, 浮石宗, 義持宗 등으로도 명명됨)
를 이 땅에 세움으로써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로 숭앙되고 있다.
의상스님의 현존 저술 가운데『일승법계도』는 스님의 화엄사상을 가장
잘 살펴볼 수 있는 저술이다. 의상스님은 『화엄경(華嚴經)』을 일승의 가르
침으로 보고 그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 보였는데, 그 그림을 ‘법계(法界)’라
고 이름붙였다. 스님은 그 법계를 특히 법성(法性)으로 읊어낸 30구 210자
의「법성게(法性偈)」와「법계도인(法界圖印)」을 합한「반시(槃詩)」(「일승
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로 그려 보였다.「법성게」에서는 법
계를 성기(性起)와 연기(緣起)의 두 측면으로 펼쳐 보이며, 그러한 스님의
실천적 성기사상이 법성관(法性觀), 구래성불설(舊來成佛說), 해인삼매론
(海印三昧論) 등을 통해 구체적이고 독자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4) 이러
한 의상스님의 화엄성기사상은 스님의 법손들에 의해서 꾸준히 전승되어
갔다.5) 신라시대에 이루어진『일승법계도』의 주요 주석서들과 그 관련 저
술들을 모은 『총수록』이 고려시대에 집성되었으며, 균여(均如, 923~973)
스님도『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
通記)』를 지어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을 계승하였다. 또한 조선 초의 설잠
(雪岑) 김시습(金時習, 1425~1493)은『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
幷序)』(이하 『법계도주』)를 지어서 의상스님의「법성게」에 대해 선적(禪的)
해석을 하고 있으니, 의상스님의 화엄성기사상이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전통 속에서 면면히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의 도봉(道峯)
유문(有聞)스님은「법성게」를 분과하고 주석한『대방광불화엄경의상법사
법성게과주(大方廣佛華嚴經義湘法師法性偈科註)』(이하『법성게과주』)』를
지어 조선시대 중·후기에도「법성게」가 널리 유통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
다. 영·정조 시대에「법성게」가 전국 사찰에서 대소설재(大小設齋)에 독
송되고 있었다는 기록6)이 전해지며, 오늘날에도「법성게」는 전국 사찰에
서 거의 매일 독송되고 있다.
4)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153.
5)『일승법계도』에 담긴 사상은 지엄(智儼, 602~668)스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중
국 화엄종을 대성시킨 법장(法藏, 643~712)스님의 화엄교학 체계화에 도움을
주었으며[高翊晋,『韓國古代佛敎思想史』(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pp.293-301; 鎌
田茂雄,「一乗法界の思想的意義」,『新羅 義湘の華厳思想』, 대한전통불교연구원 주최
제3회 국제불교학술회의, 1980, pp.66-67], 일본에 전래되어 명혜(明惠, 1173~1233)
스님을 비롯한 일본의 화엄승려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일승법계도』가 일
본에 전래된 사실은 일본의 경록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영초(永超, 1014~?)가
1094년 집성한 『동역전등목록(東域傳燈目錄)』(大55)에『화엄일승법계도』가 표
기되어 있으며,『증보제종장소(增補諸宗章疏)』와『화엄경론장소목록(華嚴經論
章疏目錄)』·봉담(鳳潭, 1659~1738)이 지은『부상장외현존목록(扶桑藏外現存目
錄)』(大正藏 別卷昭和法宝総目録二)·『고산사성교목록(高山寺聖敎目錄)』(大正藏
別卷昭和法宝総目録三) 등에는『일승법계도장(一乘法界圖章)』이라 되어 있다.
현재 일본에 유통되고 있는 판본으로서는『대정신수대장경』에서 저본으로 한
『만속장경』본이 있으며,『한국불교전서』제2책에 수록된『일승법계도』의 교감
본이기도 한 정덕(正德) 2년(1507) 필사본이 오오타니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의
상화엄이 일본에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로서는 최연식의「日本 古代華嚴과 新羅
佛敎 - 奈良·平安시대 華嚴學 문헌에 반영된 신라불교학」(『한국사상사학』 vol.21,
한국사상사학회, 2003, pp.23-30) 등이 참조된다.
6) 현척(賢陟),「법성게서(法性偈序)」(韓10, p.386c16-19).
이 책은 이처럼 한국화엄사상의 주류가 되는 의상스님의『일승법계도』
전문과 이에 대한 주석의 주요 부분을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총 네 부
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첫째는『일승법계도』전문7)이고, 둘째는『일승
법계도』의 주석서이다. 주석서는 지면 관계상『일승법계도』의 사상을 압
축적으로 볼 수 있는「법성게」에 대한 주석 부분만을 뽑아 실었다. 대상
주석서로는『총수록』 중 삼대기(三大記 : 「大記」·「法融記」·「眞秀記」)8)와
『일승법계도원통기』9)와『법계도주』10)를 선택하였다.11) 셋째는『일승법계
도원통기』가운데 저자 관련 부분과 제목 해석 부분이며 넷째는『일승법
계도』의 저자인 의상스님과『일승법계도원통기』의 저자인 균여스님의 행
장 가운데 주요 부분12)을 가려 뽑아 수록하였다.
7) 의상스님의 『일승법계도』(韓2, p.1-8)에 대한 기존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기
영(『韓國의 佛敎思想』, 世界思想全集 vol.11, 삼성출판사 1977); 성낙훈(『대승기신
론소 외』, 韓國의 思想大全集 vol.1.); 김지견(『一乘法界圖合詩一印』, 초롱, 1997);
Steve Odin(Process metaphysics and Hua -yen Buddhism: a critical study cumulative
penetration vs. interpenetration , State Univ. of New York Press, Albany, 1982); 鎌田
茂雄의 일역(『華厳一乗法界図』,『國譯一切經』和漢撰述部 諸宗部 四, 大東出版社,
1979) 등이 있다. 그 중 김지견의 번역은『고려대장경』제45권의『총수록』에 실
린『일승법계도』원문을 저본으로 하고, 나머지는『대정신수대장경』제45권의
『일승법계도』가 저본이다.
8)『총수록』(韓6,「법성게」주석부분만을 발췌).『일승법계도』는 제목·「자서(自
敍)」·「반시」·반시에 대한 설명인 「석문」·「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총수
록』은 이 순서에 따라서 설명해 나간다. 여기에서는「석문」중「법성게」에 대한
주석 부분만을 소개한다. 이 책의 한글 번역은 김호성·윤옥선의 번역(『법계도
기총수록 외』, 한글대장경 제238책, 동국역경원, 1998)과 이기영의 번역(『韓國의
佛敎思想』, 世界思想全集 vol.11, 삼성출판사, 1977. 이 번역은 상권부분만이고 그
안에서도 누락된 부분이 있다.)이 있다.
9)『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p.7b13-9c11).『일승법계도원통
기』는 제목·지은이·「자서」·「반시」·「석문」·「발문」의 순서로 주석을 해나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석문」 중「법성게」에 대한 주석 부분만을 소개한다. 이 책
의 한글 번역은 현재 출판되지 않았다.
10)『법계도주(法界圖註)』(韓7, pp.303a10-307a4). 이 책의 한글 번역은 김지견의 번
역(『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金時習의 禪과 華嚴』, 大韓傳統佛敎硏究院 編, 金寧
社, 1983)이 있다.
11) 유문스님의『법성게과주』는「법성게」의 증분을 연기분적으로 해석하는 등 다
른 주석서의 내용과 약간의 사상적 차이를 보여 이 책에 포함하지 않았다.
12) 의상스님과 균여스님의 행장에 관련된 문헌은 생애 편에서 자세히 소개하기
로 한다. 이 책에 수록된 관련문헌의 저자 중에서『총수록』의 저자는 체원(體元,
?~1338~?) 또는 천기(天其, 13세기)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아 실지 않았
다.『법계도주』의 저자 설잠 김시습은 지면 관계상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2.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저자와 내
1) 『일승법계도』의 저자, 의상(義湘)스님
(1) 의상스님의 생애와 저술
의상스님은 해동화엄초조·부석(浮石)존자·의지(義持) 등으로 불리며,
시호는 ‘원교국사(圓敎國師)’13)이다. 의상스님의 생애에 대해서는「부석
본비(浮石本碑)」14)『부석존자전(浮石尊者傳)』15)『송고승전(宋高僧傳)』의
「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16)『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의「안함전(安
含傳)」17) 등의 전기류와『삼국유사(三國遺事)』18)『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
(海東華嚴初祖忌晨願文)』19)『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20)
등의 관련 문헌을 통해서 알 수 있다.21) 이 문헌들은 의상스님의 생몰 연
대와 입당구법시기, 성씨 등에 있어서 상이한 부분이 없지 않지만, 그동안
의 연구 자료를 참조하여 간략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13) 『고려사(高麗史)』 권11, 세가(世家) 제11, 숙종(肅宗) 6년(1101) 8월조
14) 「부석본비」는 의상스님의 전기 자료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나 현존하
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의 일부가 『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
(韓6, p.327b) 등에 수록되어 있다.
15) 『부석존자전』은 최치원(崔致遠, 857~?)이 저술한 것으로『신편제종교장총록(新
編諸宗敎藏總錄)』(韓4, p.632c),『삼국유사』「의상전교」(韓6, p.348b),『해동고승
전』「안함전(安含傳)」(韓6 p.99c),『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韓
6, p.570c) 등에 그 기록이 보이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16) 찬영(贊寧, 919~1002)의『송고승전(宋高僧傳)』에「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
(大50, p.729a3-c3)이 수록되어 있다. 의상스님에 관한 다른 자료들과 상이한 부
분이 가장 많은 저술이다.
17) 각훈(覺訓, ?~1215~?)이 1215년에 지은『해동고승전』에「의상전」은 없으나「안
함전(安含傳)」에서 의상의 출생 연대 등을 언급하고 있다.(韓6 p.99c)
18) 일연(一然, 1206~1289), 『삼국유사』「의상전교(義湘傳敎)」(韓6, pp.348b20-
349b22);「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일부(韓6, pp.325c7-326a3);「낙산이대성
관음정취조신(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일부(韓6, pp.330c6-331a3).
19) 『해동화엄초조기신원문』은 최치원이 지은 것으로 의천(義天, 1055~1101)의『원
종문류(圓宗文類)』권22(韓4, pp.645-646)에 수록되어 있다.
20) 『백화도량발원문약해』(韓6, p.570-577)는 체원(體元, 14세기경)스님이 의상스님
의『백화도량발원문』을 주석한 것으로 최치원의『부석존자전』에 의거하여 의
상스님의 간략한 전기를 싣고 있다.
21) 의상스님의 생애에 대한 관련 자료와 연구 문헌으로서는 다음이 참조된다. 明
惠(1173~1232),『華厳縁起』;『義相』, 僧伽學資料集 法語篇 1, 中央僧伽大學校
僧伽學硏究院, 2007; 全海住, 앞의 책, pp.73-98; 조명기,「義湘의 傳記와 著書」,
『一光』 제9호, 1939, p.20; 김영태,「說話를 통해 본 新羅 義湘」,『新羅佛敎硏究』
(민족문화사, 1986), pp.285-302; 김지견,「義相傳 再考」,『亞細亞에 있어서 華嚴
의 位相』(第10回 國際佛敎學術會議 자료집, 大韓傳統佛敎硏究院 編, 1991), pp.369-
382; 정병삼,『의상화엄사상연구』(서울대학교 출판부, 1998), pp.69-116. 2000년
경까지의 의상스님에 대한 현대 연구 목록은 다음이 참조된다. 최연식,「義相
연구의 현황과 과제」,『韓國思想史學』vol.19, 韓國思想史學會, 2002; 김천학,
「일본의 의상연구 어디까지 왔나」,『義相萬海硏究』vol.1, 2002.
의상스님은 신라 진평왕 47년(625)에 신라의 왕족인 김한신(金韓信)의
아들22)로 태어나 성덕왕 원년(702) 78세로 입적하였다. 스님은 관세(丱歲
: 15세 전후)에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하였다. 스님의 법명 ‘의상’의 한
자 명칭은 문헌마다 다르게 표기되어 있는데,『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
술 및『백화도량발원문약해』에는 ‘의상(義相)’이라 되어 있고, 의천(義天,
1055~1101)스님의 저술에는 ‘의상(義想)’이라 되어 있으며,『삼국유사』와
『송고승전』에는 ‘의상(義湘)’으로 되어 있다.23) 의상스님은 원효스님과 함
께 보덕(普德)스님에게서『열반경』과『유마경』을 배우기도 하였다.24) 스님
은 25세(650) 때 원효스님과 함께 입당유학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36세(661) 때 재차 시도하여25)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서 당시 화엄대가였
던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의 지엄스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22)『송고승전』「당신라의상전」(大50, p.729a4)에서는 의상스님의 성(姓)을 ‘박(朴)’
씨로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의상스님이 왕족 출신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
로 추정되기도 한다.
23) 金知見,「義相의 法諱考」,『(曉城趙明基博士追慕) 佛敎史學論文集』(동국대학교,
1988), pp.213-260 참조.
24)『삼국유사』「보장봉노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
25) 원효스님은 이 때 토굴 무덤에서의 깨달음을 계기로 유학하려는 마음을 접고
되돌아오게 된다.『송고승전』「당신라국의상전」(大50, p.729a13-15).
의상스님이 지엄스님을 찾아가자 지엄스님은 특별한 예로 의상스님을
맞이하였으니, 전날 밤 꿈에 해동(海東)에 큰 나무가 자라나서 신주(神州),
즉 중국을 덮었는데, 그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
니보주가 있어서 그 광명이 멀리 비치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튿날
의상스님이 찾아와 이미 화엄의 오묘한 지취(旨趣)를 깊은 데까지 분석해
내니, 지엄스님은 영특한 재질을 만난 것을 기뻐하였다고 한다. 의상스님
은 지엄스님이 67세(668)로 입적할 때까지 지엄스님 문하에서 약 10년간
화엄교의를 탐구하고 지엄스님으로부터 ‘의지(義持)’라는 호를 받았다. 당
시 함께 수학하던 법장스님은 ‘문지(文持)’라는 호를 받았다. 의상스님이
『일승법계도』를 지은 것은 스님 나이 44세(668) 되던 해, 총장 원년 7월 15
일로 이는 지엄스님 입적 3개월 전이었다.
의상스님은『일승법계도』를 저술한 3년 후인 문무왕 11년(671)에 당의
침공 소식을 고국에 알려주려고 급히 귀국하였다.26) 의상스님은 귀국 후
화엄의 가르침을 펼 곳을 두루 찾아 다니다가 문무왕 16년(676) 태백산 아
래에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창건하였다.27) 한편『송고승전』에 의
하면 이 때의 부석사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왕실과의 관계가 나타나지 않
으며, 부석사의 자리는 이미 권종이부(權宗異部) 500여명이 자리하고 있
던 대가람이었다. 이 때 의상스님을 신라 귀국 때부터 항상 수호하던 선묘
용(善妙龍)이 의상스님의 화엄도량 창건의 뜻을 알고 큰 돌로 변하여 공
중에 떠서 권종이부들을 위협하여 쫓아냄으로써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
었다는 설화도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부석사를 본찰로 한 화엄십찰(華嚴十
刹)28)을 중심으로 화엄교가 널리 융성하게 되었다.
26) 의상스님의 당나라 수학 연도와 기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전후소장사리」
에 인용되어 있는「부석본비」에 의거했다.『송고승전』에서는 의상스님의 입
당연도(669년)만을 밝히고 있으며,『삼국유사』「의상전교」에서는 영휘(永徽,
650~655) 초년에 입당하여 670년에 귀국하였다고 전한다.
27)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 7, 문무왕(文武王) 16년;『삼국유사』(韓6, pp.
348c17-349a1).
28) 화엄십찰(華嚴十刹)은 화엄십산(華嚴十山)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
지 기록이 있으니,『삼국유사』「의상전교」(韓6, p.349b2-4)에서는 원주 비마라사
(毘摩羅寺),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금정산 범어사(梵魚
寺), 남악 화엄사(華嚴社)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
尙傳)』(大50, p.285a29-b2)에서는 ①중악공산(中岳公山)의 미리사(美理寺), ②남
악 지리산의 화엄사, ③북악 부석사, ④강주(康州) 가야산 해인사 및 보광사(普
光寺), ⑤웅주(熊州) 가야협(迦耶峽) 보원사(普願寺), ⑥계룡산 갑사(岬寺), ⑦낭
주(良州) 금정산 범어사, ⑧비슬산 옥천사, ⑨전주 무산(母山) 국신사(國神寺),
⑩한주(漢州) 빈아산(貧兒山) 청담사(淸潭寺)를 열거하고 있다.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에 바탕을 둔 실천적 교화행은 신라로 귀국한 이
후의 삶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의상스님은 부처님의 정법(正法)으로써
당시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졌다. 문무왕이 전답과 노
비를 하사하였을 때 의상스님은 부처님 법은 위·아래가 모두 고르며, 귀
하고 천함이 같다29)고 하면서 하사품을 받지 않았다. 신라의 삼국통일전
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생각하며 수행자의 본분을 지켜나간
의상스님의 이러한 태도는 대중과 함께 한 부처님의 근본 정신을 철저히
계승한 것이었으니, 그 결과 신분 계급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의상스
님에게로 출가하였다. 의상스님은 제자들의 교육을 매우 중시하였으니,
스님이 소백산 추동(錐洞)에서『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할 때 3천 명이나
운집하였다는 기록만 보아도 이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29)『송고승전』「당신라의상전(唐新羅義湘傳)」(大50, p.729a3-c3).
이처럼 의상스님은 화엄행자로서의 실천과 제자들의 교육을 중시하
였고 저술은 그다지 많이 남기지 않았다. 그 중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①『일승법계도』1권(현존), ②『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1권(일실),
③『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일실), ④『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일실), ⑤「백화도량발원문(白華道場發願文)」1편(현존), ⑥「제반청문(諸
般請文)」(일실), ⑦「화엄일승발원문(華嚴一乘發願文)」1편(현존), ⑧「투사
례(投師禮)」(현존)로 총 8부(部)가 확인된다.30) 이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발원문류31) 외에는『일승법계도』뿐이지만 솥 전체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충분하다는 일연스님의 평32)처럼 이 글에는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이 간명하게 잘 드러나 있다.
30) 의천,『신편제종교장총록』(韓4, ① p.681a23, ② p.681c10, ③ p.681a12, ④ p.
687c21);『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동국대학교 출판부, 1976), pp.38-39(① - ⑥)
이 외에 의상스님의 강설을 받아 적은『지통기』와『도신장』등을 위시하여 의상
스님의 직설(直說)이『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술 등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법장스님 저술로 전해져 왔던『화엄경문답』이『지통기』인『지통문답』의 이본
이라는 설이 근래에 주장되었다.(김상현,「『錐洞記』와 그 異本『華嚴經問答』」,
『한국학보』vol.22, 1996 등)
31) 의상스님의 발원문류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조된다. 전해주,「義相和尙 發
願文 硏究」,『佛敎學報』vol.29,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2; 김상현,
「의상의 신앙과 발원문」,『(龍巖車文燮敎授 華甲紀念)史學論叢』(華甲紀念
論叢 刊行委員會 編, 1989).
32)『삼국유사』「의상전교」(韓6, p.349b4-7).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서 의상
스님의 화엄사상에 대해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조
된다. 전해주,「一然의 華嚴思想」,『亞細亞에 있어서 華嚴의 位相』(第10回 國際
佛敎學術會議 자료집, 大韓傳統佛敎硏究院 編, 1991), pp.341-367
(2) 의상스님의 사법제자(嗣法弟子)
『총수록』과『일승법계도원통기』의 특징적인 점 중 하나가 의상스님과
제자들의 문답을 많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도신장(道身章)』33)과『지통
문답(智通問答)』과「고기(古記)」등에 보이는 의상스님과 법손들의 문답
은 의상스님이 어떻게 승가의 수행공동체를 이끌면서 제자들을 교육하였
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의상스님은 태백산의 부석사를 비롯한 여러 곳에
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당시 의상스님의 명성이 신라 전역에 널리 퍼
져 스님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추동에서의 3천여 명을 위시하여 학인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그 많은 제자들 중에 특히 아성(亞聖)34)이라고 불리는
10대 제자로서 오진(悟眞),35) 지통(智通),36) 표훈(表訓),37) 진정(眞定),38) 진
장(眞藏),38) 도융(道融),39) 양원(良圓),40) 상원(相源),41) 능인(能忍),42) 의적(義
寂)43) 등이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진정, 상원, 양원, 표훈은 사영(四英)으
로 특히 존숭받았음을 알 수 있다.44)
33)『도신장』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조된다. 박서연,『『道身章』의 華嚴思想 硏
究』(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34)『삼국유사』「의상전교」(韓6, p.349b12).
35) 오진(悟眞)스님에 대해서는 지금의 안동 지역에 위치한 하가산(下柯山) 학암
사(鶻巖寺)에 살면서 영주 부석사의 석등을 밤마다 팔을 뻗어 껐다는 신이(『삼
국유사』의상전교」, 韓6, p.349b12-13)와 80권『화엄경(華嚴經)』이 신라에
전래된 뒤 문제된 이 경의 품수에 대해 당나라의 요원(了源)스님에게 편지로 문
의했다는 기록만이 전해진다.(균여,『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
韓4, p.120a19-b11)
36) 지통(智通)스님은 태백산 미리암굴(彌理岩窟)에서 화엄관을 닦을 때 삼세(三世)
가 일제(一際)임을 깨닫고 이로 인해 의상스님으로부터 「법계도인」을 물려받
은 제자이다.(『석화엄지귀장원통초』, 韓4, pp.139c16-140a1) 또한 지통스님은
소백산 추동에서 행해진 의상스님의『화엄경(華嚴經)』강의를 기록하여『지통문답』
(『지통기』,『추동기(錐洞記)』,『추혈기(錐穴記)』 등이라고도 한다.) 2권을 남겼는
데,『도신장(道身章)』과 함께『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술에 다수 인용되면서
의상스님의 화엄교학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37) 표훈(表訓)스님은 의상스님의 훌륭한 제자를 전하고 있는 자료, 즉 『삼국유사』
의 십대제자,『법장화상전』의 사영(四英),『송고승전』의 당에 올라 심오함을
본 이들[登堂覩奧者]에 모두 속하는 유일한 제자일만큼 의상스님의 뛰어난 제자이
다. 또한 경주 흥륜사(興輪寺)의 금당(金堂)에 신라의 십성(十聖) 가운데 한 분
으로서 의상스님과 함께 그 상이 안치될 정도로 신라에서 존숭받았다. ‘움직이
지 않는 내 몸이 곧 법신자체이다’라는 구절에 대한 의상스님의 해설인 사구게
(四句偈)에 대해 오관석(五觀釋)을 지어서 의상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술에 표훈스님의 설이 두루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38) 진정(眞定)스님에 대해서는『삼국유사』「진정사효선쌍미」에 보면, 진정스님의
출가인연으로 인해 의상스님이 소백산 추동에서 3천여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약 90일간『화엄경(華嚴經)』을 강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진정스님은 의
상에게서「법계도인」을 배운 후 삼문석(三門釋)을 짓기도 하고 의상에게서 십
불(十佛)에 대해 강의를 들은 바도 있다.『총수록』에는 또한 진정스님과 상원스
님과의 문답 및 진정스님의 삼생멸설(三生滅說)이 인용되어 있기도 하다.
39) 진장(眞藏)스님과 도융(道融)스님에 대해서는 이름 이외에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40) 양원(良圓)스님의 생애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균여스님
의『석화엄지귀장원통초』에 나무 등이 부처님의 행덕(行德)이므로 나무가 설한
다고 하는 양원스님의 설이 남아 있으며, 또『일승법계도원통기』에 법성과 진성
의 차이에 대해서『양원화상기』가 인용되어 있다.
41) 상원(相源)스님은 ‘常元, 相圓, 相元’ 등 여러 표기가 혼재되어 있으나 같은 인물
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석사 40일회에 참석하여 의상스님으로부터 일승십
지(一乘十地) 법문을 듣는 등 동문인 진정스님과 함께 의상스님에게 문답한 내
용이『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술에 남아 있다.
42) 능인(能忍)스님에 대해서는 이름 이외에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43) 의적(義寂)스님은 의상스님의 제자로서 화엄학승이라기보다 법상학인(法相學
人)으로 더 알려져 있다.
44)『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大50, p.285a23).
의상스님은 실천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제자들을
이끌었는데 일방적인 주입이 아닌 쌍방간의 소통을 중시하였고, 나아가
제자들이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그리하여 표
훈·진정 등 10여 명의 제자들이 의상스님에게서「법계도인」을 배울 때에
표훈스님은 오관석(五觀釋)45)을, 진정스님은 삼문석(三門釋)46)을 각각 지
어서 의상스님의 인가를 받아 스승의 가르침을 계승해 나갔다.47) 오관석·
삼문석 등의 명칭을 통해 볼 때, 의상스님의 제자들은 스승의 지도하에 관
법(觀法)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의상스님은 태백산 대로방(大
蘆房)에 머무를 때에 진정스님과 지통스님 등에게『화엄경(華嚴經)』의 열
부처님[十佛]을 뵙고자 하면『화엄경(華嚴經)』으로써 자기의 안목을 삼아
야 함을 강조하고, 문문구구(文文句句)가 모두 열 부처님이며 이것 밖에서
부처를 보고자 하는 자는 생생겁겁(生生劫劫)에 끝내 보지 못할 것이라고
설하였다.48) 이것은 의상스님과 그 제자들이『화엄경(華嚴經)』에 근거하여
실제로 견불(見佛)하고자 하는 수행을 하였고, 그것은 언어 문자에 국집
되지 않는 실천적인 행법이었음을 보여준다.
45) 오관석(五觀釋)은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곧 법신 자체이다[不動吾身, 卽是法身
自體.]’의 뜻을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의상스님이 답한 ‘모든 연(緣)의 근본은 나
이고, 일체 법의 근원은 마음이다. 말[語言]은 크게 중요한 종지이고, 진실은 선
지식이다.[諸緣根本我, 一切法源心. 語言大要宗, 眞實善知識.]’의 4구게를 표훈스
님이 다섯 가지 관법(觀法)으로서 풀이한 것이다. 곧 내가 모든 연(緣)으로써 이
루어진 법이고 모든 연이 나[我]로써 이루어진다는 인연관(因緣觀), 연으로써
나를 이루어 나는 체가 없으며 나로써 연을 이루어 연은 성(性)이 없다는 연기
관(緣起觀), 모든 법의 있고 없음[有無]이 원래 하나이고 있고 없음의 모든 법이
본래 둘이 없다는 성기관(性起觀), 있을 때 있지 않아서 도리어 없음과 같고 없
을 때 없지 않아서 도리어 있음과 같다는 무주관(無住觀), 모든 법이 본래 이동
하지 않고 관(觀)하는 마음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는 실상관(實相觀)이 그것이
다. 표훈스님이 이 오관석을 지어 의상스님에게 바치자 의상스님이 인가하였다
고 한다.[『총수록』(韓6, p.775b9-c3)]
46) 진정스님이 지은 삼문석(三門釋)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이법과 현상이 덕을 갖
추는 문[理事具德門], 둘째는 현상을 융섭하여 이법을 나타내는 문[事融現理門],
셋째는 수행을 증장하는 문[修行增長門]이다. 표훈스님은 여기에 움직이지 않
고 세우는 문[不動建立門]을 덧붙여 사문석을 지었는데, 자리행 중 증문은 움직
이지 않고 세우는 문에, 연기분은 이법과 현상이 덕을 갖추는 문과 현상을 융섭
하여 이법을 나타내는 문에, 이타행과 수행자의 방편 및 이익 얻음은 수행을 증
장하는 문에 배대하였다.[『총수록(叢髓錄)』(韓6, pp.775c6-776a5)]
47)『총수록(叢髓錄)』(韓6, pp.775b10-776a1).
48)『총수록(叢髓錄)』(韓6, p.834b11-17).
이와 같이 의상스님의 제자 교화의 전통은 시대를 따라 계속 전승되
어 화엄십찰의 성립과 함께 해동화엄의 주류를 이루어 나갔다. 의상스님
의 직제자의 뒤를 이은 제3세 법손으로서 신림(神琳)스님이 주목된다. 신
림스님의 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8세
기 중엽쯤 활약한 부석적손으로 상원스님에게 배운 바 있다.49) 신림스님
의 교설은 균여스님의 저술과『총수록』에 다수 인용되는 등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4세 법손으로서는 신림스님의 제자인 법융(法融)·
숭업(崇業)·융수(融秀)·질응(質應)·대운법사군(大雲法師君) 등이 알려져
있다. 법융스님은『일승법계도』의 주석서인『법융기』를 남겨 이것이
『총수록』의 삼대기 중 하나로 중시되어 전해졌다. 또한 해동화엄의 전승은
이후에도 제5세손인 범체(梵體), 융질(融質) 등을 비롯하여 균여스님에까
지 이르고 있다. 부석사를 본찰로 한 북악의 후예인 균여스님은 화엄수행
자들이 신라 말과 고려 초에 남악과 북악으로 잠시 갈라진 것을 통합하여
의상스님의 수행전통이 고려에 계속 이어지게 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에 설잠스님과 유문스님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화엄수행전통이 면면
히 이어지고 있다.
49)『총수록(叢髓錄)』(韓6, p.805a-b). 또한 신림스님은 다른 의상스님의 직제자들과
는 달리 입당하여 융순(融順)에게서 수학하고 왔다.(韓6, p.798c)
(3)『일승법계도』의 저술 배경과 저자 논란
한국화엄의 주류를 이루어 간 의상계 화엄의 근본이며 의상스님의 화엄
사상이 온전히 담겨 있는『일승법계도』에는 찬자(撰者)의 이름이 적혀 있
지 않은데, 이에 대해『일승법계도』 말미의 발문에 “연생(緣生)의 모든 법
에는 지은이[主者]가 없기 때문에 이름을 적지 않는다”50)라고 그 이유가 언
급되어 있다. 이처럼 지은이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저자에 대
한 논란이 있어 왔다. 균여스님은『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일승법계도』의
저자에 대한『원상록(元常錄)』의 설51)과 최치원의 설52)을 소개한 후,53) 『일
승법계도』「자서」의 구절인 ‘이치에 의지하고 가르침에 근거하여 간략히
반시를 짓는다’는 것만 보더라도「반시」또한 의상스님의 찬술임이 명백
하다고 밝히고 있다.54)
50)『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8b).
51) 균여스님이 인용한『원상록(元常錄)』에서는 지엄스님이 7언30구의 시를 지어
의상스님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의상스님이 이를 흰 종이 위에 검은 글자
로 배치하고 붉은 인을 그려 바치니,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하여 부처님의 뜻
을 통달했다고 지엄스님이 찬탄하면서 그것에다 주석을 지으라고 권했다. 이에
40여장의 주석을 지어 바치자, 지엄스님은 그 해석이 부처님의 뜻에 맞는가 보
고자 불사르니 모두 타버렸다. 다시 60여장의 주석을 지어 불사르니 다시 모두
탔다. 또다시 80여장의 주석을 지어 불사르니 타지 않고 남는 글이 있어 세상에
유통되었다는 것이다.[『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a6-15)]
52) 최치원의「부석존자전」에서는 의상스님이『대승장(大乘章)』10권을 짓고 이를
다시 윤색하여『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고 이름한 후, 불전에 나아가 불사르니
210자가 남아서 이를 다시 태워도 타지 않아 이를 게송으로 엮은 것이 7언 30구
「법성게」라고 하여「법성게」또한 의상스님 저술임을 전하고 있다.[『일승법계도
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a15-b10)]
53) 이 외에도『일승법계도』의 저자와 관련하여 다음의 설이 전해진다.『총수록』
「법융기」(韓6, p.771a4-6)에 언급된 설로서, 지엄스님의 73인(印)에 근거하여
의상스님이 하나의 근본인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체원의『백화도량발원문약
해』(韓6, p.570c8-11)에 인용된 최치원의『부석존자전』에는 의상스님이
『일승법계도』를 지어서 지엄스님에게 바치니, 법성을 궁극적으로 증득하고
부처님의 뜻을 통달하였다고 찬탄하면서 의상스님에게 해석을 지으라고 하여
지은 것이 지금 세상에 유통되는『일승법계도』1권이라고 전하고 있다.
54)『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b11-15).
최근 방산석경의 발견(1957)과 함께『일승법계도』의 친저자 문제가 재
론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의 학자가 의상스님의 저술로 결론짓고 있다.55)
55) 운거사(雲居寺)의『방산석경』에『일승법계도』의「자서」와「반시」부분이 각인
되어 있고 그것이 ‘지엄 법사 지음[儼法師造]’으로 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하여
姚長壽가 이를 지엄스님의 글이라고 발표하였다.(「房山石經における華嚴典籍
について」,『中國佛敎石經の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1996, p.413) 그러나
Jonh Jorgensen은 이에 대해 지엄스님 작(作)이나 의상스님 작(作)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The problem of the authorship of the Ilsungpopgyedo」,
『한국불교사상의 보편성과 특수성』,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전해주는
인도학불교학회에서 의상스님 작(作)이 맞다고 재반박을 하였으며(「一乘法界圖
の著者について」,『印度学仏教学研究』vol.94, 日本印度学仏教学会, 1999), 佐藤
厚는『일승법계도』텍스트의 변천을 살펴서『일승법계도』는 기존의 견해대로
의상스님의 저술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일승법계도의 텍스트문제」,
『불교춘추』통권15호, 1999.8, pp.136-137.) 전해주는 다시 이를 보강하여
『일승법계도』는 그 전체가 의상스님 작(作)임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일승
법계도의 저자에 대한 재고(再考)」,『한국불교학』제25집, 1999, pp.211-215)
2) 『일승법계도』의 구성 내용
『일승법계도』는「반시(槃詩)」와「법계도기(法界圖記)」로 이루어져 있
다.「반시」는「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이라고도 하며,
하나의「법계도인(法界圖印)」과 7언30구 210자의「법성게(法性偈)」가 합
해진 것이다.「법계도기」는 이「반시」에 대한 의상스님 자신의 주석 부분
으로서「자서」와「석문(釋文)」그리고「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석문」은 다시「도인」의 뜻을 통틀어 해석하는「총석인의(總釋
印意)」와「도인」의 모양을 나누어 풀이하는 「별해인상(別解印相)」으로 구
분되며,「별해인상」은 또「도인」의 모양을 해설하는「설인문상(說印文相)」
과 글자의 모양을 밝히는「명자상(明字相)」과 글의 뜻을 풀이하는석문
의(釋文意)」로 나누어져 있다. 이를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槃詩 法界圖印+法性偈
一乘法界圖
自敍
總釋印意
法界圖記 釋文 說印文相
別解印相 明字相
跋文 釋文意
표1> 『일승법계도』의 구성
그런데 현존하는『일승법계도』에는「반시」가「자서」와「석문」사이에
놓여져 있으니, 자서→ 반시→ 석문→ 발문 의 순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이 구성되어 있는『일승법계도』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
음과 같다. 먼저「자서」에서 의상스님은『일승법계도』를 저술하는 목적과
「반시」를 읽어가는 독시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의상스님은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기 위
해서「반시」를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56) 독시법은「반시」의 한가운데 있는
‘法’자에서 시작하여 굴곡을 따라가 ‘佛’자에서 끝나도록 읽으라고 한다.
끝으로 협주에서「반시」가 54각 210자로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다음에「반시」를 주석한 석문이「반시」 다음에 이어진다.
56)『총수록』에는 이 54각 210자까지 제목에 포함시키고 있다. 즉『일승법계도 합시
일인 오십사각 이백일십자(一乘法界圖合詩一印五十四角二百一十字)』 전체를 제
목으로 하고 있다.
석문에서는「반시」가 석가여래의 교망(敎網)에 포섭되는 기세간(器世
間)·중생세간(衆生世間)·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의 삼종세간이 해인삼
매에 의하여 드러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반시」에서 기세간은 흰 바탕
으로, 중생세간은 검은 글자로, 지정각세간은 붉은 도인으로 되어 있는데,
「반시」 어느 곳에서도 종이와 글자와 도인을 구분해 낼 수 없는 것처럼 해
인삼매에 의해 드러난 기세간과 중생세간과 지정각세간 또한 서로 여의
지 않는 융삼세간불의 경계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법계도인」
의 모양[印文]이 한 길인 것은 여래의 일음(一音)을 나타내며, 구불구불한
굴곡은 중생의 근욕이 같지 아니함을 따르는 것이며, 한 길에 처음과 끝이
없음은 선교가 일정한 방도가 없음을, 사면(四面)·사각(四角)은 각각 사
섭법과 사무량심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도인의 모양은 삼승에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다고 한다. 또한 이「법계도인」은 육상원융(六相圓融)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글자의 모습 또한, 글자에 처음과 끝이 있는 것은 수행방편을 보
이고, 글자에 굴곡이 많은 것은 삼승의 근욕(根欲)이 차별되어 같지 않음
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처음[‘法’]과 끝[‘佛’]의 두 글자를 가운데 둔 것
은 인과의 두 자리가 법성가내의 진실한 덕용(德用)으로서 그 성(性)이 중
도(中道)에 있음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법성게」30구 210자의 뜻을 해석하는 석문의(釋文意)에서는 30구 210
자 전체를 자리행(自利行)·이타행(利他行)·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
[修行者方便及得利益]을 밝힌 것으로 분과하고, 자리행은 다시 증분과 연
기분으로 세분하여 설명하고 있으니 이를 도시하면 <표2>와 같다.
科門 法性偈
約自利行 現示證分 ①②③④
顯緣起分 指緣起體 ⑤⑥
約陀羅尼理用 以辨攝法分齊 ⑦⑧
釋文意 卽事法明攝法分齊 ⑨⑩
約世時示攝法分齊 ⑪⑫⑬⑭
約位以彰攝法分齊 ⑮⑯
總論上意 ⑰⑱
利他行 ⑲⑳21.22
辨修行者方便及得利益 明修行方便 23.24.25.26
辨得利益 27.28.29.30
<표이처럼『일승법계도』는 전체적으로 자리행·이타행·수행 등 행문(行
門)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일승법계도』의 실천적 구조는 의상스님의 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구체적 의미는『일승법계도』
와 그 주석서의 화엄사상을 밝히는 부분에서 자세히 고찰하기로 한다.
3.『일승법계도』의 주석서와 그 구성 내용
1)『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
(1)『법계도기총수록』의 편자
『총수록』은 한국의 화엄학 연구에 있어 귀중한 저술이지만, 언제 누구
에 의해서 편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대략 고려 후기인 14세기에 활
약한 체원(體元)스님57) 또는 13세기 중엽의 천기(天其)스님58)이라고 추정
되어 왔다.
57) 체원스님(?~1338~?)은 속성이 이(李)씨이고 법호는 목암(木庵) 또는 향여(向
如)이며 시호는 각해대사(覺海大師)이다. 이제현(李齊賢)의 바로 윗형이기도 하
다. 정확한 출가 연도는 알 수 없으나 20세 이전에 출가한 듯하며, 출가 이후 선
불장(選佛場)에서 높은 성적으로 합격하였다. 충숙왕 복위 7년(1338) 양가도승
통(兩街都僧統)의 지위에 있으면서『화엄경(華嚴經)』사경의 공덕주(功德主)를
맡았던 사실과 남긴 저술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 후기 화엄사상계에서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의 저술로
서는『백화도량발원문약해(白花道場發願文略解)』(1328년),『화엄경관자재보살
소설법문별행소(華嚴經觀自在菩薩所說法文別行疏)』,『화엄경관음지식품(華嚴經
觀音知識品)』(1331년),『삼십팔분공덕소경(三十八分功德疏經)』(1331년)이 있다.
이들 4종의 저술은 모두 해인사 사간본(寺刊本)으로 남아 있다. 특히『백화도량
발원문약해』는 의상스님이 찬술한『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약해
한 것이다.(채상식,「體元의 저술과 화엄사상」,『규장각』vol.6, 1982 참조.)
58) 천기스님(?~1250~?)은 그 생애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균여스
님 계통의 화엄학승으로서 1250년경에 계룡산 갑사의 고장(古藏)에서 균여스님
의 저술을 찾아내어 방언을 삭제하고『고려대장경』보유판에 입장시켰으며, 또
한 그 당시 유통되었던『일승법계도원통기』의 여러 이본들을 대조하여 3권으로
된 목판본을 각간(刻刊)한 기록이『일승법계도원통기』말미의 간기에 남아 있
다.(韓4, p.39a1-4)
먼저 체원스님이『총수록』의 편자라고 추정된 것은 체원스님의 저술로
서 의상스님의『백화도량발원문』을 주석한『백화도량발원문약해』와『화
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등의 주석방법이『총수록』과 유사하다
는 점에서이다.59) 그러나『총수록』은 고려 고종 41년(1254) 전후 무렵에 조
판된『고려대장경』보유판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1330년 전후로 활동한 체
원스님의 저술로 보기는 어렵다.
59) 김지견,「신라화엄학의 계보와 사상」,『학술원논술집』12, 1973, p.42; 蔡印幻,
「義湘華嚴敎學의 特性」,『韓國華嚴思想硏究』(동국대학교 출판부, 1982), p.95.
천기스님을『총수록』의 편자로 본 것은『총수록』이 수록된『고려대장
경』보유판이 조성되던 시기에 천기스님이 활동하였으며, 또 균여스님의
저술을 정리하고 수장하는데 앞장섰던 균여스님의 직계후손이었다는 점
에 근거한 것이다.60)
60) 채상식, 『高麗後期佛敎史硏究』(一潮閣, 1991), p.202; 김상현,「法界圖記叢髓錄
考」,『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私學論叢』(정음문화사, 1985), pp.37-38
그러나『총수록』에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으므로 편자를 확정하기가 쉽
지 않으며,『고려대장경』 권45 보유판의 수록본 이외에 그 이전의 초간본
이나 그 이후의 별행 간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혀 없다. 다만 편
찬 시기는『총수록』에 10세기경에 활동한 균여스님의 저술이 실려 있으므
로 위로는 대략 10세기 후반부터, 아래로는 보유판이 조판된 13세기 중엽
사이로 추정된다.
(2)『법계도기총수록』의 구성 내용
『총수록』은 의상스님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를 모은 것이기 때
문에 그 체제도『일승법계도』의 내용에 의거하고 있다.『일승법계도』의
내용에 따라『총수록』은 상하의 총 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상의 1에서
는『일승법계도』의 제목 및「자서」와「반시」까지를 수록하고, 권상의 2에
서는『일승법계도』석문(釋文) 가운데 명자상(明字相)까지61)를, 권하의 1
에서는 석문의(釋文義) 가운데 수행자의 방편까지62)를, 권하의 2에서는 마
지막까지『일승법계도』의 원문과 그 주석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61)『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p.1b1-2c13).
6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p.2c14-5b21).
『총수록』의 체제는 원문을 실은 뒤 한 칸 아래에 삼대기(三大記)라고 불
리는 「대기」·「법융기」·「진수기」를 나누어 싣고, 또 그 한 칸 아래에 삼대
기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서 『총수록』 편찬 당시까지 전승된 화엄
관련 문헌들의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총수록』에 실려 있는 여러 글들 가운데 가장 중심되는 삼대기(三大記)
는『일승법계도』에 대한 수문석(隨文釋)이므로 이 주기들의 내용을 통해
의상의 화엄사상이 어떻게 전승되고 연구되어 갔는지를 알 수 있다.
「대기」는『총수록』에 54회 인용되어 있으니, 삼대기 가운데 가장 분량
이 많다. 그러나 언제 누구에 의해서 저술되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며,
「대기」의 저술 연대는 9세기 중엽 이후의 신라 하대로 추정된다.「법융기」
의 저자 법융스님 역시 그 행적이 자세하게 전해지지 않지만 대략 8백 년
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한 화엄학승으로서, 의상-상원-신림-법융으로 이
어지는 부석적손이다.「법융기」는『총수록』에서「법융대덕기」·「법기」·
「융기」등으로 표기되기도 하는데,『총수록』에 총 47회 인용되어 있다.「진
수기」는「진수대덕기」·「진수덕기」·「진기」등으로 표기되기도 하며,『총
수록』에 24회 인용되어 있다. ‘진수’는 법명인 듯하나, 다른 문헌에서는 확
인되지 않으며 편찬 시기 또한 확정하기 어려우나 신라 하대의 문헌일 것
으로 추정된다.
삼대기의 전적을 뒷받침해 주는 논의이거나 아니면 보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두 칸 낮추어 판각된 부분에는 의상스님의『화엄경(華嚴經)』
강설을 받아 적은『도신장』,『지통문답』을 비롯한 한국과 중국의 화엄관
련 문헌 30여 종이 50여 회 정도 인용되어 있다.63)
63)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158; 金相鉉,「法界圖記叢髓錄
考」,『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私學論叢』(정음문화사, 1985), pp.37-38
이와 같이『총수록』은 비록 편찬자의 주석이 부연되어 있지는 않지만,
『총수록』의 문헌적 가치는 매우 높으며 화엄관련 고금의 주석들을 분석하
여 많은 주석서들을 한데 집성해 놓은 것으로도 화엄학 연구에 지대한 영
향을 주고 있는 문헌이다.『총수록』은 인용된 여러 문헌을 통해서 의상스
님의 화엄세계뿐만 아니라 신라와 고려 초기까지 유통되었던 화엄교학까
지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
(1) 균여(均如)스님의 생애와 저술
균여스님64)은 혁련정(赫連挺)이 지은『균여전』65)에 의해서 그 생애의 대
강을 알 수 있다.『균여전』은 ①태어나신 영험[降誕靈驗], ②출가하여 이
익을 청함[出家請益], ③누이와 동생이 모두 현명함[姉妹齊賢], ④뜻을 세
우고 근본을 정함[立義定宗], ⑤여러 글을 해석함[解釋諸章], ⑥감통과 신
이[感通神異], ⑦노래를 펼쳐 세상을 교화함[歌行化世], ⑧노래를 번역하
여 덕을 드러냄[譯歌現德], ⑨감응으로 마라를 항복시킴[感應降魔], ⑩변
역생사[變易生死] 등의 총 열 부분으로 나누어 균여스님의 생애를 설명하
고 있다.
64) 균여스님에 대한 연구논문으로는 김두진,『均如華嚴思想硏究 : 性相融會思想』
(일조각, 1983) ; 김천학,『均如의 華嚴一乘義 硏究: 根機論을 中心으로』(한국정신
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9); 최연식,『均如 華嚴思想硏究: 敎判
論을 중심으로』(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이선이(태경),『均如의 圓通 論
理와 그 實踐』(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등이 있다.
65)『균여전』의 갖춘 이름은『대화엄수좌원통양중대사균여전병서(大華嚴首坐圓通兩
重大師均如傳并序)』(韓4, pp.511a1-517a9)이다. 이 책의 한글역은 김지견(『均如大師
華嚴學全書』「解題」, 東京:後樂出版社, 昭和52)과 이병주(『均如傳』, 國語國文學資料
叢書 vol.4, 二友出版社, 1981)와 이재호(『삼국유사』下, 世界古典全集 vol.11, 光文出
版社, 1965)와 최철·안대회(『(譯注) 均如傳』, 새문사, 1986) 등의 번역이 있으며,
영역은 Adrian Buzo and Tony Prince(Kyunyŏ-jŏn: The Life, Times and Songs of a
Tenth Century Korean Monk , University of Sydney East Asian Series Number 6, Sydney,
2007)의 번역이 있다.
균여스님의 속성은 변씨(邊氏)이며, 고려 태조 6년(923)에 황주 북쪽 형
악에 위치한 둔대엽촌에서 태어나 광종 24년(973)에 입적하였다. 스님은
원통수좌(圓通首座)라고도 불리며, 해동화엄의 정통을 이은 화엄학승이다.
스님은 선균(善均)스님을 따라 부흥사(復興寺)의 식현(識賢)화상에게
출가하였고, 뒤에 영통사(靈通寺)의 의순(義順)스님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신라 말 해인사에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 된 관혜(觀惠)스님
과 고려 태조의 복전이 된 희랑(希朗)스님의 두 화엄조사가 있었는데, 그
법문을 각각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이라 불렀다. 균여스님은 북악의 법
통을 계승하면서 남악까지 함께 수용하여 남악과 북악의 분열로 인한 폐
해를 없애고 의상계 화엄의 전통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66)
66) 남·북악의 분열과 균여스님에 의한 통합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가 참조된다. 해
주,「羅末麗初 南·北岳의 華嚴思想」,『한국불교학』vol.32, 2002; 최병헌,「高麗
時代 華嚴學의 變遷-均如派와 義天派의 대립을 중심으로」,『韓國史硏究』30,
1980, pp.65-66; 김상현,「新羅華嚴學僧의 系譜와 그 活動」,『新羅文化』1, 동국
대학교 신라문화연구소, 1984, pp.77-83; 蔡印幻,「新羅華嚴宗北岳祖師 希郞」,
『伽山學報』제4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pp.11-43.
또 왕륜사(王輪寺)에서 승시(僧試)를 볼 때에도 균여스님의 설을 정통
으로 할 정도로 국가에서 널리 존숭받았으며, 광종 14년(963)에 귀법사(歸
法寺)가 창건되자 광종의 요청으로 그곳의 주지로 있었다. 균여스님의 제
자는 3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 중에 담림(曇琳)과 조(肇)는 일대의 고승으
로 수좌에 올랐다고 한다.
스님은 다방면에 해박하였으며, 특히 불교 이외의 학문인 외학(外學)에
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사뇌가67)에 있어서도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68)
를 지을 만큼 원숙한 일가를 이루었으니 향가 등을 통한 포교에도 적극적
이었던 스님의 면모를 알 수 있게 한다.
67) 사뇌가(詞腦歌)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으니, 곧 첫째, 향가의 원래 명칭으로
신라의 노래라는 설과 둘째, 향가 중 10구체 형식의 향가만을 일컫는 명칭이라
는 설과 셋째, 시나위의 다른 이름이라는 설 등이다. ‘사뇌’는 ‘동쪽 천(川)’ 또는
‘동쪽 땅’을 뜻하는 신라의 고어이며 따라서 사뇌가는 동쪽지역의 노래라는 설
이 첫째, 둘째 설의 주장이다. 이중 둘째는 그중에서도 신라의 서울이었던 사뇌
야(詞腦野) 지방에서 유행했던 10구체 형식의 노래만이 사뇌가라는 주장이다.
셋째 설은 본래 정악(正樂) 또는 당악(唐樂)에 대한 토속음악이라는 뜻의 ‘시나
위’가 소리가 바뀌어 ‘사뇌’가 되어 이를 ‘사뇌가’라고 지칭한다는 주장이다. 그
러나 세 주장이 사뇌가를 신라에서 발생한 중국음악과 다른 신라의 음악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68)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는 고려 광종 연간에 균여스님이 지은 사뇌가이다. 보
현십종원왕가(普賢十種願往歌)·원왕가(願往歌) 등으로 불리기도 하나, 원왕가
(願王歌)만이『균여전』에 기록된 명칭이고, 나머지는『균여전』의 ‘보현십종원왕
에 의거하여 노래 11장을 지었다[依普賢十種願王 著歌十一章]’는 기록에 의한 후
대의 명명이다.『화엄경(華嚴經)』「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어려운 종취(宗
趣)를 사뇌가의 형식을 빌려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고『균여전』에서 창작동기
를 밝히고 있다. 전체 11수로 되어 있으며, 10구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체재
는『화엄경(華嚴經)』「보현행원품」에 기초하여, 그 10행원의 순서를 그대로 하
고, 제목은 ‘○○○○품’을 ‘○○○○가’로 고친 후[네 번째는 예외로, 참제업장
(懺除業障)을 참회업장(懺悔業障)으로 고침], 마지막에 「총결무진가(總結無盡歌)」
를 더하여 전체 11수로 짜고 있다. 전체 11수의 구체적인 제목은 다음과 같다.
①「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②「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 ③「광수공양가(廣修
供養歌)」, ④「참회업장가(懺悔業障歌」, ⑤「수희공덕가(隨喜功德歌)」, ⑥「청전법
륜가(請轉法輪歌)」, ⑦「청불주세가(請佛住世歌)」, ⑧「상수불학가(常隨佛學歌)」,
⑨「항순중생가(恒順衆生歌)」, ⑩「보개회향가(普皆廻向歌)」, ⑪「총결무진가
(總結无盡歌)」이다. 赫連挺 撰,『大華嚴首座圓通兩重大師均如傳』(韓4, pp.513a7-
514b7) 참조.
균여스님은 이전의 화엄가들이 지은 저술을 강의하고 주석하는 것에
주력하였으니,69) 균여스님의 저술 가운데「보현십원가」를 제외한 대부분
은 의상스님을 비롯하여 지엄스님과 법장스님의 화엄관련 저술에 대한
주석서들이다. 현존하는 것으로서는『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
記)』2권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鈔)』10권,『석화엄지귀
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2권,『석화엄삼보장원통기(釋華嚴三寶章
圓通記)』2권,『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2권 등이 있으며,70) 일실본으
로서는『수현방궤기(搜玄方軌記)』10권,『공목장기(孔目章記)』8권,『오십
요문답기(五十要問答記)』4권,『탐현기석(探玄記釋)』28권,『입법계품초기
(入法界品抄記)』1권 등이 있다.
69)『균여전』(韓4, p.512a13-23)에 의하면 균여스님은 선학(先學)들이 기록해 놓은
30여 가지의 화엄교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석을 했던 것으로 보인
다.[李永洙, 「均如大師伝の研究(下二)」,『東洋学研究』vol.8, 東洋大学東洋学研究所,
1974, pp.75-84]
70) 韓4, p.512b. 현존본의 제목은『한국불교전서』권4에 수록된 것이다.『균여전』에
보이는 저술명은『법계도기(法界圖記)』2권,『교분기석(敎分記釋)』7권,『지귀장
기(旨歸章記)』2권,『삼보장기(三寶章記)』2권,『십구장기(十句章記)』1권 등이다.
균여스님의 저술은 거의가 주석서 형태이기는 하나, 스님의 화엄사상 또
한 무르녹아 있으며, 그 속에『지통문답(智通問答)』이나『도신장(道身章)』
등 의상계 문헌을 비롯하여 한국과 중국의 많은 불교문헌들이 인용되어
있어 당시 유통된 화엄교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2)『일승법계도원통기』의 구성 내용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는 상·하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71)『법계도원통기』·『원통기』·『일승법계도기석(一乘法界圖記釋)』
이라고도 한다.『일승법계도원통기』는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발문과 간
기에 의하면 고려시대에 이미 여러 이본(異本)72)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본들 중 1287년에 간행된 판본은 13세기 중엽에 해인사 주지였던 승통
(僧統) 천기스님이 화엄업(華嚴業) 내의 여러 대덕들과 함께 당시 유통되
던 필사본들을 상세히 교증하여 3권으로 나누어 조판(彫板)한 것인데, 이
판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 이 천기 교증본을 다시 필사한 것으로 보이는
상·하 2권본만 전하는 것이다.
71) 김지견은 현재 전해지는 상·하 2권의『일승법계도원통기』는 그 내용으로 보아
본래는 상·중·하 3권이었던 것이 어떠한 사정으로 중권이 도중에 빠져버린 것
이라고 추정한다.(金知見, 「法界圖圓通記のテキストの再考-その中卷の落帙を
めぐって-」,『印度学仏教学研究』38-2, 1990)
72) 간기에는 국현기록본(國賢記錄本), 법진기(法璡記), 금생사(金生寺) 고장본(古
藏本), 혜보기록본(惠保記錄本), 반룡사(盤龍寺) 일당(日幢) 교증본(校證本), 해
인사(海印寺) 천기(天其) 교증본 등을 열거하고 있다.(『일승법계도원통기』, 韓4,
pp.38c5-39a4)
『일승법계도원통기』는 크게「지은이를 정함[定造者]」과「제목을 해석함
[釋題]」과「글을 따라 해석함[隨文釋]」의 세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처음「지은이를 정함[定造者]」에서는『일승법계도』의 저자에 대해서 밝
히고 있으니,「반시」를 포함해서『일승법계도』전체가 의상스님이 지은
것이라고 단정한다.
두 번째「제목을 해석함[釋題]」에서는 ‘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
圖合詩一印)’이 바른 제목[正題目]이고 ‘오십사각이백일십자(五十四角
二百一十字)’는 제목의 주석[題却]이라고 한다. 그리고 바른 제목인 ‘일승
법계도합시일인’을 해석하고 있다. 즉 ‘일(一)’은 곧 다른 것이 없다[無他]
는 뜻이고, ‘승(乘)’은 실어 나른다는 뜻이다. 법계는『화엄경(華嚴經)』의
근본이며 ‘도(圖)’는 그림이라는 뜻이니, 그림으로 세 가지 세간을 구족한
해인삼매의 법계를 나타냈기 때문에 ‘법계도’라고 한다. 그리고 ‘합시일
인’은 30구 210자의 시와「도인」을 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을 따라 해석하는 수문석에서는 인문(印文) 전체를 서분(序分)·정종
분(正宗分)·유통분(流通分)으로 나누어 해설한다.73) 균여스님은「법성게」
30구에 대해 2구씩, 혹은 4구씩 나누어 문장을 따라가며 해석하였다. ‘법
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으로 시작되는 증분 4구는 거듭하여 의심
을 없애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첫 구(①) ‘법성원융무이상’은 두 변을 막은
것이니, 법성은 본래 진(眞)·속(俗), 염(染)·정(淨) 등의 모든 상대되는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다. 다음 구(②)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은 움직임을 가려내며, 그 다음 구(③)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는 이름과 모양을 가려내고, 마지막 구(④)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智非餘
境)’은 아직 증득하지 못함을 가려낸 것이라고 설명한다.
73) 본서는「정조자」와「석제목」 부분 전체와「수문석」중 정종분 내에서「법성게」
를 주석하고 있는 부분을 뽑은 것이다.
다음 연기분 14구는 의상스님이 연기의 체(體)와 다라니의 이치[理]·작
용[用], 사법(事法), 시간[世時], 계위를 기준으로 하여 법을 포섭하는 영
역을 밝힌 것과 위의 뜻을 통틀어 논한 것으로 분과한 것에 따라서 연기
의 자체(⑤-⑥)·다라니의 인과도리문(因果道理門)인 중문(中門)과 덕용
자재문(德用自在門)인 즉문(卽門)(⑦-⑧)·크고 작음의 무애(無礙)의 뜻
(⑨-⑩)·시간의 상즉의 뜻(⑪-⑭)·처음 발심과 정각, 생사와 열반이 모두
구경의 과(果)인 뜻(⑮-⑯)·연기분의 총론(⑰-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그리고 이타행 4구(⑲- )에 대해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해인삼매 중
에서 일음(一音)의 여의교(如意敎)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풀이
하고 있다.
끝으로 수행방편과 득이익의 8구( - )에 대해서는 법성의 자리인 본
제로 행자가 돌아와서 반연없이 여실히 수행하는 것이 성자의 뜻을 얻기
위한 수행자의 방편이며, 인위(因位)에서 보리분의 자량을 닦아 과위(果
位)에 이르러서 다함없는 보배를 얻어, 법계의 실보전(實寶殿)을 장엄하
고 법계의 궁극의 자리에 칭합하는 것이 옛부터 부처인 수행자의 이익이
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균여의「법성게」 해석은 의상의 법성성기사상을 계승하는 한편,
기타 화엄관련 문헌들을 인용하여 다양하게 의상의 화엄사상을 해석하고
있다.
3)『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幷序)』
(1) 설잠(雪岑)스님의 생애와 저술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시습(時習)인 설잠스님의 자는 열향(悅鄕)이
고,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벽산청은(碧山淸
隱)·췌세옹(贅世翁) 등이다. 설잠스님의 행적에 대해서는 윤춘년(尹春年,
1514~1567)의『매월당선생전(梅月堂先生傳)』과 이이(李珥, 1536~1584)의
『김시습전(金時習傳)』을 비롯해서『매월당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설잠스
님의 저술과 제가의 평 등74)을 통해서 알 수 있다.75)
74) 정병욱은 그의「김시습연보(金時習年譜)」(『국어국문학』vol.7, 국어국문학회, 1953,
pp.6-7)에서 설잠스님에 관한 문헌 중 이이(李珥)가 선조(宣祖)의 교지를 받아
작성한『김시습전』(1582) 이전의 문헌은 근본적인 자료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
은 것으로 보고, 이 외에 남효온, 김안로, 윤근수 등의 저술들도 더 들고 있다. 그
러나 이들의 설잠스님에 대한 평은 다분히 유가(儒家)의 편견에 의한 것임을 면
할 수 없다.
75)『한국불교전서』권11과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소 편『매월당전집』(1973)에
설잠 김시습의 저술과 관련 문헌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매월당전집』을 저본으
로 하여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국역 매월당집』(1978)을 간행하였다. 김시습
관련 연구로는 양은용의「김시습 관계 연구문헌 목록」을 포함한 다수의 논문들
이 수록되어 있는『梅月堂-그 文學과 思想』(강원대학교출판부, 1989) 등이 있다.
설잠스님은 본관이 강릉이며, 김일성(金日省)과 선사(仙槎) 장씨(張氏)
를 부모로 하여 세종 17년(1425)에 경도(京都) 반궁(泮宮 : 現 성균관)의 북
쪽에서 태어나 성종 24년(1493) 홍산현(鴻山懸) 무량사(無量寺)에서 입적
하였다. 설잠스님의 일생은 태어나 자라며 공부한 시기[生長修學期](10
대)·출가하여 수행한 시기[出家修行期](20대)·금오산에 정착한 시기[金
鰲定着期](30대)·은거하여 저술한 시기[隱居著述期](40대)·만년의 안주
기[晩年安住期](50대)의 다섯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76)
76) 全海住, 『義湘華嚴思想史硏究』(민족사, 1993), p.201.
설잠스님은 5세 때에 이미 시를 지을 줄 알아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졌다. 세종이 승지를 시켜 시험을 해보
고는 장차 크게 쓸 재목이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당부하고 선물을 내렸다
고 하여 ‘5세’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설잠스님이 출가한 21세 때는 단종이 3년 만에 손위(遜位)하고 세조(世
祖)가 즉위하던 해였다. 대군(大君) 당시에 이미 불경(佛經)을 언해하는
등 불심이 깊었던 세조가 즉위한 이후 14년간은, 숭유억불의 조선시대 중
잠시 흥불(興佛)의 시대가 된다. 이 시기와 겹쳐지는 설잠스님의 생애는
20세 이전 성장수학기를 제외하고는 방랑의 일생으로 간주되어 왔다. 설
잠스님에게 있어서 방랑과 은거가 시작된 것은 그의 출가가 시발점이 된
다. 스님은 단종의 손위와 자모(慈母)와의 사별(13세 혹은 15세)로 인한 가
정문제, 건강, 사회적 부조리, 난세, 과거의 실패77) 등과 산수(山水)를 좋아
하고 당대의 선문(禪門) 노숙(老宿)인 준상인(峻上人)에게 선관(禪關)을
캐물어 참선 지도를 받으며(18세, 1452)78) 출가인을 벗으로 삼는 성정 등이
그를 출가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설잠스님의 출가에
있어서는 석문(釋門)의 의범(儀範)에 따라 수계(受戒)하였음을 증명할 만
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스님은 비구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고 있으
니, 그의『법계도주』(『대화엄법계도주병서(大華嚴法界圖註幷序)』)와『십현담
요해서(十玄談要解序)』79) 등에서도 ‘청한 필추 설잠(淸寒苾芻雪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스님은 23세 때80) 동도(東都 : 지금의 경주)를 지나가던 중
“선리(禪理)가 사뭇 깊어서 5년을 사량(思量)한 끝에 투개(透開)할 수 있
었다”81)라고 하였다. 이후 스님은 전국을 유행하였으며, 그 때에 남긴『사
유록(四遊錄)』82) 등에서 스님의 산사 편력과 수행의 자취를 찾아볼 수 있
다. 스님의 선사로서의 면목과 수행은 스님의 시문 곳곳에 드러나 있다.
77) 鄭鉒東,『梅月堂 金時習硏究』(新雅社, 1965), pp.55-58.
78)『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권3(『매월당전집(梅月堂全集)』 p.75, 韓7, p.349a8-19).
79) 韓7, p.309a11.
80) 설잠스님의 오도(悟道)는 앞서 준상인에게서 선관을 참구한 때로부터 헤아린다면
23세경이라고 할 수 있다.(全海住, 『義湘華嚴思想史硏究』, 민족사, 1993, pp.200-201)
81) 이자(李耔),「매월당집서(梅月堂集序)」(『매월당전집』, p.3).
82)『매월당전집(梅月堂全集)』, pp.166-227(韓7, pp.326-343).
31세 때인 1465년 봄에 경주로 내려가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칩거하였다. 이 때 ‘매월당’이란 호를 사용하
였다. 이곳에서 37세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로 불리는『금오신화』
를 비롯한 수많은 시편들을『유금오록(遊金鰲錄)』에 남겼다.
그 뒤 성종이 즉위한 이듬해 스님은 서울로 올라와 성동(城東)의 수락
산(水落山)에서 10년간 은거하며 불교에 더욱 침잠하게 된다. 그 때 이후
로 『법계도주』·『십현담요해』·『연경별찬(蓮經別讚)』83)·『화엄석제(華嚴釋
題)』 등과 같은 선교(禪敎)에 관한 설잠스님의 노작(勞作)들이 쏟아져 나
온다. 설잠스님이『법계도주』를 저술한 것은 42세 되는 1476년이다.『법계
도주』는 의상스님의「법성게」를 설잠스님 특유의 선적(禪的) 입장에서 주
해(註解)한 것이다.『법계도주』에는 선승(禪僧) 설잠스님의 선지(禪旨)가
번뜩이고 있으며, 동시에 20여 년간 간경(看經) 수행한 스님의 정신세계가
투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83)『연경별찬(蓮經別讚)』이라는 제목은『한국불교전서』를 기준으로 한 것이며,
『매월당전집』(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所, 1973)에는『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
華經別讚)』으로 되어 있다.
스님은 잠시 2년간(47~49세) 환속하였다가 다시 산사에서 만년을 보내
며 59세 때 무량사에서 입적하게 된다.
(2)『대화엄법계도주병서』의 구성 내용
설잠스님의 화엄사상은 스님의 저술 가운데『화엄석제』와『법계도주』
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화엄석제』는『대방광불화엄경』의 제목에 대한
스님의 견해를 여러 인용문의 소개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설잠
스님이 자신의 화엄관을 직접 펼쳐 보인 것은『법계도주』에서이다.『법계
도주』는 의상스님의「법성게」를 설잠스님 특유의 선적(禪的) 세계로 이해
하여 선의 입장에서 주석한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84)
84) 김지견,「沙門 雪岑의 華嚴과 禪의 世界」,『梅月堂-그 文學과 思想』, 강원대학
교 인문학연구소 編, 1989, p.92; 睦楨培,「雪岑의 法界圖注考」,『韓國華嚴思想硏
究』, 佛敎文化硏究院 編, 1982, p.275.
『법계도주』는「서문」과「법성게」 각 구에 대한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서는『일승법계도』주석의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일승법계도』는
하나의 『해인도(海印圖)』로서 가없는 가르침의 바다를 원만히 섭수하였다
고 전제하고, 의상법사가 처음 이 도(圖)를 만든 것은 몽매한 사람들을 인
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의상법사가 이『일승법계도』를 지음으로써
불법(佛法)의 원융한 본래면목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대
의 제가(諸家)에서 각각의 입장에서 억해하여 그 본의가 상실되게 되었으
므로 설잠스님이『법계도주』를 짓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서문에서는
「법성게」210자의 종지는 법성에 지나지 않을 뿐이고, 그 법성을 추구하면
수연(隨緣)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한 점이 특히 주목된다.85) 이어서「법성
게」각 구절의 해석에서는 선교일치적 입장에서 여러 선어록의 구절을 인
용하면서 스님 자신의 화엄관을 피력하고 있다.
85)『법계도주(法界圖註)』(韓7, p.302a-b).
설잠스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일승법계도』의 중핵을 법성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교리적 해석이 아니라 가장 간명한 표현을 통해
서 드러내고 있는데 그 특징이 있다. 설잠스님은 ‘말은 마음의 일어남이고
마음은 말의 종지’86)라고 하면서 원융한 법은 본래 이름과 모습이 없는 것
이지만 언어를 빌려 설하면 경론이 되며 경론이 아니면 원융한 법을 천명
할 수 없기 때문에 경론은 원융법성의 드러난 모습[風規]이며 삼세제불의
대의가 된다고 한다. 이러한 스님의 안목에서『일승법계도』의 중핵을 법
성으로 보면서『일승법계도』의 전체 내용을 선교일치로 풀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86)『법계도주(法界圖註)』(韓7, p.302a
4.『법성게과주(法性偈科註)』
도봉 유문(道峰有聞)스님은 그 자세한 전기는 전하지 않으며, 스님이
「법성게」에 대해서 주석을 한『법성게과주』와 관련된 주변 사정으로 미루
어 18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법성게과주』의 필사본에 영파화상성규(影波和尙聖奎)스님의 증정
(證正)87)과 제자 현척(賢陟)의「법성게서(法性偈序)」88) 및『연담화상논변
(蓮潭和尙論卞)』89)이 부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87)『법성게과주(法性偈科註)』(韓10, p.387a4).
88)「법성게서(法性偈序)」(韓10, p.386c).
89)「연담화상논변(淵潭和尙論卞)」(韓10, p.389a-b).
「법성게서」말미에 부기되어 있는 간기에 의하면 이 제자 현척은「법성
게서」를 순조 9년(1809)에 지었는데, 이 당시 이미 도봉 유문스님은 입적
하였음을 「서」에서 밝히고 있다. 또『법성게과주』에 증정을 하고 서사유
포(書寫流布)를 권한 영파성규 스님은 영조 4년(1728)에 태어나 순조 12년
(1812)까지 살았으며,『법성게과주』에 논변을 가한 연담화상은 숙종 46년
(1720)에서 정조 23년(1799) 사이에 생존하였는데, 스님의 만년에 『연담화
상논변』을 지었다.90) 따라서 유문스님은 연담유일 스님이나 영파성규 스
님과 동시대에 살았으나 영파스님보다는 먼저 입적하였으며,『법성게과
주』는 적어도『법성게과주』에 논변을 가한 연담화상이 입적한 해인 정조
23년(1799) 이전에는 저술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91)
90)『연담화상논변(淵潭和尙論卞)』(韓10, p.389a).
91) 李杏九(도업),「有聞の法性偈科註について」,『印度学仏教学研究』32-2, 日本印
度学仏教学会,1984;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p.217-218.
『법성게과주』에서 보이는「법성게」의 과분을 보면「법성게」전체를 <가>
총상으로서의 법체[總相法體], <나> 교주의 개화[敎主開化], <다> 교화되
는 근기의 이익[所化機益], <라> 중첩해서 위의 뜻을 맺음[牒結上義], <마>
새로움을 떨치고 근본으로 나감[拂新就本]의 다섯 부문으로 나누고 있다.
「법성게」구절을 배대하면, <가>는 ①구~⑱구까지, <나>는 ⑲구~ 구까
지, <다>는 구~ 구까지, <라>는 구~ 구까지, <마>는 구에 해당한다.
유문스님은 이처럼 5분으로 분과된 30구를 조술법성(祖述法性)( ~ ),
개시법성(開示法性)( ~ ), 오입법성(悟入法性)( ~ ), 자기법성(自己
法性)( ~ )으로 재해석해나가고 있으니「법성게」30구 전체를 법성과
관련지은 것이다. 이 점은 의상스님이『일승법계도』 전체를 법성으로 드
러내고 설잠스님이『일승법계도』의 중핵을 법성이라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유문스님은 법성이 원융하므로 이사무애하며 사사무애하게 된다고
하며, 또 진성수연은 이(理)에 의지하여 사(事)를 이루는 것을 보인 것으
로 사사무애의 이유가 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법성에 두 상이 없음[法性無
二相]과 이(理)와 사(事)가 무분별한 도리로써 법계를 원만히 증득하도록
한 것이 화엄무장애(華嚴無障碍)·법화일불승(法華一佛乘)을 꿰뚫어 본 의
상스님의 안목이라고 유문스님은 피력하고 있다.92)
92)『법성게과주(法性偈科註)』(韓10, p.388a).
그런데 유문스님의 견해는 본유(本有)에 치우쳐서 법성을 파악한 점이
없지 않다.「법성게」의 첫 구 ‘법성원융무이상’에 대해서 ‘법(法)’은 사법
계, ‘성(性)’은 이법계로 보아서 이사(理事)가 융통하여 이사무애하고 사
사무애해서 그윽히 일상에 합한다고 하여 이를 총상으로서의 법체[總相法
體]라고 한 점 등은 의상스님이 법성을 연기가 아닌 성기로 이해한 것과
는 약간의 거리가 없지 않다고 하겠다.93)
93) 이러한 이유와 함께 지면관계상 이 책에서는『법성게과주』의「법성게」해석은
생략하였다.
5. 본서에 수록된『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에 담긴 핵심교의
이 책에 수록된 저술 내용을 부연한다면, 제1장은 의상스님의『일승법
계도』 전문이고, 제2장은『일승법계도』가운데「법성게」에 대한 주석모음
이며, 제3장은 균여스님의『일승법계도원통기』중「지은이를 정함[定造
者]」과「제목을 해석함[釋題]」부분이고, 제4장은 의상스님과 균여스님의
행장이다.『일승법계도』의 서문에서 밝혔듯이 의상스님은 이름에 집착하
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이치에 의거하고
가르침에 근거해서「반시」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이 저술 목적인 참된 근
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수행법이『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에 담긴 핵심교
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저술 목적에 의해서 저술된 전체 내용을 ‘일승
법계’라고 이름하고 법성을 통해서 그 일승법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에서 담아낸 일승화엄의 핵심은 법계(法
界)와 법성(法性)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의상스님의 분과에 의하면「법성게」중 자리행의 증분은 깨달은 지혜의
경계인 법성성기(法性性起)의 세계이며, 자리행의 연기분은 그 법성으로
돌아가는 방편인 진성수연(眞性隨緣)의 세계이다. 이타행과 수행의 방편
및 득이익 역시 이러한 법성성기와 진성연기의 두 측면을 벗어나지 않는
다. 자리가 이타행이며 이타가 자리행으로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덕
행이 수행의 방편이며,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은 것이 증분법성으로 돌
아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을 ‘구래
부동명위불’로 대응시키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94)「반시」에서 ‘법(法)’
자와 ‘불(佛)’자를 한 가운데 같은 자리에 둔 것이 법성가(法性家) 내 진실
한 덕용을 드러낸 것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저술 내용의 핵심교의를 일승법계관과 그 일승법계의 두
측면인 법성성기와 진성연기의 세 가지로 살펴본다. 이 점이 바로 한국화
엄의 주류를 이루는 의상계 화엄의 주요 사상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94)『총수록(叢髓錄)』(韓6, p.789c6-10).
1) 일승법계관(一乘法界觀)
(1) 일승사상(一乘思想)
『일승법계도』는 곧『화엄경(華嚴經)』의 세계인 일승의 법계를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다.『일승법계도』, 즉『화엄일승법계도』에서 ‘화엄일승법계’는
소전(所詮)이 되며 ‘도(圖)’는 능전(能詮)이 된다. 따라서『일승법계도』전
체의 내용은 바로 일승법계를 밝힌 것이다.
의상스님은『화엄경(華嚴經)』을 별교일승원교의 가르침으로 교판하고
있다.95)『일승법계도』에는 오승(五乘), 삼승(三乘), 일승(一乘)에 대한 언급
이 많은데 그것은 ‘오승이 모두 일승에 들어가 포섭된다,’ ‘삼승에 의거하
여 일승을 드러낸다,’ ‘삼승 이외에 별도로 원교일승의 분제가 있다’는 등
의 말에서도 보이듯이 다 일승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96)『일승법계도』는
「도인」의 설명에서 먼저 일승과 삼승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95) 의상스님은 지엄스님의 교판설인 점교(漸敎)·돈교(頓敎)·원교(圓敎)의 삼교판
(『수현기』, 大35, p.13c), 소승교·초교(初敎)·숙교(熟敎)·돈교(頓敎)·원교(圓敎)
의 오교판(『공목장』, 大45, p.537a), 동별이교판(同別二敎判)(『공목장』, 大45,
p.538a)등 다양한 교판설을 일단 수용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의상스님은 소승·
삼승에 대해서는 일승을 강조하고, 점교·돈교에 대해서는 원교를 중시하여, 지엄
스님의 동별이교가 함께 하는 원교로부터 별교일승 독존(獨存)의 원교에 역점
을 두고 있으며, 이 점이 지엄스님과는 다른 의상스님의 특징적인 교판사상으로
강조되기도 한다.(吉津宜英,『華厳禅の思想史的研究』, 大東出版社, 1985, p.82.)
96)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127.
묻는다. 어째서 도인에 오직 한 길[一道]만 있는가?
답한다. 여래의 일음(一音)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훌
륭하고 교묘한 방편이다.
어째서 번다하게 도는 굴곡이 많이 있는가?
중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곧 삼승(三
乘)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어째서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가?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은 [일정한] 방법이 없어서, 법계에 응하여 걸
맞고 십세에 상응하여 원융만족함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곧 이 뜻
은 원교(圓敎)에 해당한다.
어째서 네 면과 네 모서리가 있는가?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뜻은 삼승을 의지하여
일승을 나타낸 것이다.97)
97)『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b).
이처럼『일승법계도』에서 삼승은「도인」의 굴곡으로 나타나며, 이는 중
생의 근기와 욕망이 같지 않은 것을 따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가르침은 여래의 일음으로 오직 한 길만이 있으며 시작과 끝이 없기도 하
다. 바로 일승의 원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의상스님은 글자 가운데 굴곡이 많은 것은 삼승의 근기와 욕망
이 달라서 같지 아니함을 보인 것이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한가운
데 둔 것은 비록 인과가 같지는 않지만 인과의 두 자리가 법성가 내의 진
실한 덕용이며 성(性)이 중도에 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도리를 도인의 육상원융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도인 전체는 총상으로
서 그 뜻이 원교에 해당하며, 나머지 굴곡은 별상으로서 삼승에 해당한다.
총상과 별상 등 육상이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不卽不離]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어서[不一不二] 항상 중도에 있듯이 일승과 삼승도 이와
같다고 한다. 삼승방편을 의지하면 높고 낮음[高下]이 같지 않지만 일승
원교를 의지하면 앞뒤[前後]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의상스님의 별교일승원교관을 알 수 있으니, 구불구불한
도인은 바로 시작과 끝이 없는 오직 한 길로서 여래의 일음이며 원교를
보인 것이다. 한 길에 시작과 끝이 없는 것은 방편이 법계에 응하여 걸맞
고 십세에 상응하여 원융만족하기 때문이다. 동교일승에서처럼 삼승이 있
고 이것을 돌이켜 별도의 일승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승 자체
가 바로 일승이고 일승 외에 따로 삼승이 없는 별교일승이다. 곧 「반시」에
서 구불구불한 부분을 제거하고 나면 한 줄로 이어진 「도인」도 없는 것처
럼, 삼승을 제외하고 따로 일승원교도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의상스님의
일승사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2) 법계관(法界觀)
『일승법계도』는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일승의 교설이라 불리는
『화엄경(華嚴經)』의 세계를 법계(法界)라 하고 그 법계를 그림으로 그려
보인 것이다. 따라서 법계가『일승법계도』의 전체 내용이다.
부석적손인 법융스님이 지은『법융기(法融記)』에서는「법성게」의 첫 구
절 ‘법성원융무이상’을 풀이하면서 ‘법(法)’은 내 몸과 마음이고, ‘계(界)’
는 이 몸과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고 포용되어 상대를 여의고 전후의 한계
를 넘어선 것으로서 곧 법의 궁극적인 끝이란 뜻이며, ‘도(圖)’는 그림이라
고 한다. 따라서 ‘법계도’는 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바로 법계불(法界
佛)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법계불의 그림을 그려서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이라고 풀이한다.98)
98)『총수록(叢髓錄)』(韓6, p.769b-c)
균여스님은『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이 법계를 일승화엄원교의 종요
(宗要)로 보고,『화엄경(華嚴經)』의 종지(宗旨)인 법계로써『일승법계도』
라는 제목을 삼고 있음에 유의하고 있다. 그리하여 일승의 법계는 열 부
처님이 증득하신 경계이고 보현보살이 행하는 바로서 범부가 능히 헤아
리지 못하나 모든 불보살이 설하신 바 이치와 가르침에 의거하여『일승
법계도』를 지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99) 따라서 미혹한 자가 이로 인
해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되는데,100) 그 이름 없는 참된 근
원은 법성원융의 증분으로서 내증(內證)을 뜻하며 증분 내증은『화엄경
(華嚴經)』의 마지막 도달처[所極處]라고 밝히고 있다.101) 또 균여스님은 일
승화엄원교의 종요인 ‘법계’에 대해 의상스님의 설은 횡진법계(橫盡法界)
로, 법장스님의 설은 수진법계(竪盡法界)로 규정한 후 의상스님의 횡진법
계관을 근간으로 법장스님의 수진법계를 융합하여 주측법계(周側法界)를
설하고 있다. 이 주측론은 균여스님의 원융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균여스
님의 법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102)
99)『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5c).
100)『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a).
101)『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6a); 全海住, 『義湘華嚴思想史硏
究』(民族社, 1993), p.179.
102)『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鈔)』(韓4, p.106b17-20) 등; 고영섭, 「균여
의 주측학 : 인간 이해와 세계 인식의 틀」,『한국불학사 [2] 고려시대편』(연기사,
2002).
『화엄경(華嚴經)』은 부처님께서 모습을 나투신다는「여래현상품(如來
現相品)」에서 “부처님이 법계에 충만하시어 모든 중생들 앞에 나타나셔서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시지만 항상 이 보리좌에 앉아 계시다”고 한다.103)
부처님은 대법계를 몸으로 삼기 때문에 보리수를 떠나지 않고서 일체처
에 두루하며, 일체처를 떠나지 않고서 보리수 아래에 앉아 계시다는 것
이다.104) 선재동자가 선지식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해탈문을 증득하는 것
이 바로 이 법계에 들어가는 것임을「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잘 보여주
고 있다. 부처님이 중생연(衆生緣)을 따라 나타나셔서 두루하심이 여래출
현이며 여래성기이다. 인연 따라 나타난다는 면에서는 연기라고 하겠으나
부처님의 인연 따라 나타나심은 성기이다.105)
103)『화엄경(華嚴經)』(高8, p.460c24-25; 大10, p.30a6-7).
104) 징관,『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大方廣佛華嚴經隨疏演義鈔)』(大36, pp.30c15-
31a25). 징관스님은 또한 여래께서 보리수에서 일어나지 않으신 채『화엄경(華
嚴經)』의 설처인 칠처(七處)의 법계에 펼쳐져 있으시다고 하면서 이 법계를 『화
엄경(華嚴經)』의 설처로도 풀이하고 있다.(『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
疏)』, 大35, p.503a13)
105) 법장,『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大35, p.405b18-28).
의상스님은 법계가 법계일 수 있음을 법성으로 노래하고 있으니, 법성
은 법성성기로서 의상스님의 성기사상을 말해주는 것이다.『일승법계도』
에 보이는 법계는 증분의 법성성기와 연기분의 진성수연 세계를 함께 포
섭한다.『일승법계도』의 법계는 법계연기로 말하는 법계만이 아니라 법성
성기로서의 법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 연기와 성기를 함께 화엄법
계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의상스님은「법성게」의 증분과 연기분의 법
이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함을 보이고 있다. 증분의 법은 실상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니 오직 증득한 이라야 알 수 있는 것이고, 연기
분의 법은 뭇 연을 따라 생하니 자성이 없는지라 근본과 더불어 다르지
아니하다는 것이다.106) 그리하여 진성수연의 방편으로 법성성기 세계로
인도함으로써 성기에 연기를 포섭하고 있다.
106)『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4c).
이와 같은 의상스님의 법계관은 『일승법계도』의 「반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반시」는 흰 종이 위에 붉은 줄로 된「법계도인(法界圖印)」과
검은 글씨로 된 7언 30구 210자의「법성게」를 합한 것이다. 여기에서 종이
는 기세간(器世間)을 의미하며,「도인」은 불보살의 지정각세간(智正覺世
間),「법성게」는 중생세간을 가리킨다. 의상스님은 이 세 가지 세간이 모
든 법을 다 포섭한다고 하고 있으므로,107) 이 세 가지 세간이 바로 법계를
구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종이와「도인」과
「법성게」의 배치이다. 예를 들어「법성게」 중 ‘법(法)’자가 놓인 자리를 보
면, 이 자리는 종이와「도인」과 ‘법’자를 따로 나누어 볼 수 없다.「법성게」
의 ‘법’의 자리가 바로 종이가 있는 곳이며, 종이가 있는 곳에 바로「도인」
이 위치한다. 이것은 종이와「도인」과「법성게」로써 상징되는 세 가지 세
간이 본래 나누어지지 않는 융삼세간불의 세계임을 나타내려는 의상스님
의 의도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의상스님이『일승법계도』에서 나
타내고 있는 법성성기의 세계는 부처가 중생이고, 중생이 기세간인 융삼
세간불의 법계임을 알 수 있다.
107)『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b).
2) 법성성기사상(法性性起思想)
(1) 법성관(法性觀)
『일승법계도』의 핵심이 되는「일승법계도 합시일인」가운데 시(詩)인
「법성게」는 ‘법성(法性)’으로 시작하여 법성을 읊어낸 것이다. 그런데 이
법성(法性)은 성기(性起)의 다른 표현이다.『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108)
에서는 법성과 성기의 관계에 대해, “성기는 곧 법성이니 일어나지 않음을
성으로 삼기 때문이다.108) 곧 그 법성은 모두 일어나지 않음으로써 일어남을
삼는다”109)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의상스님의 법성관은 여래성기(如來性
起)로서 법성성기(法性性起)인 것이다.
108)『화엄경문답』은 법장스님의 저술로 전해져 오지만 친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다.
9세기 전반에서 10세기 전반의 저술로 추정되는 견등(見登)의 『화엄일승성불묘
의(華嚴一乘成佛妙義)』에 법장의 저술임을 뜻하는『향상문답(香象問答)』이라는
이름으로『화엄경문답』이 인용되어 있다.(韓3, p.723a17-b2) 경록 중에는 圓超스
님의『화엄경장소병인명록(華嚴經章疎幷因明錄)』(914년)(大55, p.1133b)에 처음
으로『화엄경문답』의 명목이 보이는데 중국의 법장스님 지음으로 기록하고 있
다. 그러나 凝然(1240~1321)은『오교장통로기(五敎章通路記)』에서 이 책의 필격
(筆格)이 조잡하다는 이유로 후인의 위작설을 강하게 제기하였다.(大72, p.333c)
한편 芳英(1764~1828)은 위작설을 부인하고 문장이 고르지 못한 이유는 법장의
초기저술이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탐현기남기록(探玄記南記錄)』,『일본대장
경(日本大藏經)』권1, p.1550a) 근래에 鎌田茂雄는 芳英의 설을 바탕으로 이 책
을 법장의 초기 저작으로 본 것에 반해(「法蔵撰華厳経問答について」, 『印度学仏
教学研究』 7-2, 1959, pp.241-247) 吉津宜英은 신라찬술설을 제기하였다.(「舊來成
仏について」,『印度学仏教学研究』 32-1, 1983, p.243) 그 후『화엄경문답』의 저자에
대해서 논란이 이어졌으니, 그 가운데 石井公成는『화엄경문답』을 문체와 인용
의 측면에서 검토하여 이 책은 법장의 저작이 아니라 의상스님의 문답을 제자
가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며(『華厳思想の研究』, 春秋社, 1996, pp.270-291)
김상현은 현재『총수록』과 균여스님의 저술에 남아 있는『지통문답』의 일문(逸
文)과『화엄경문답』을 비교·대조하여『화엄경문답』이『지통문답』의 이본이라
고 주장하였다.(「『錐洞記』와 그 異本『華嚴經問答』」,『한국학보』vol.22, 1996)
109) 大45, p.610b20-21, ‘其性起者即其法性, 即無起以爲性故. 即其法性皆以不起爲起.’
의상스님은 법성이 무분별(無分別)을 상(相)으로 삼고,110) 법성가(法性
家)의 성(性)이 중도(中道)에 있다고 설하면서,111) 법성의 성(性)과 상(相)
을 중도와 무분별로 해석하고 있다. 또 중도는 무분별이며 무주(無住)라
고 풀이하여,112) 곧 중도·무분별·무주를 동일한 의미로 보고 법성과 연결
시키고 있는 것이다. 스님은 이 무주로 인해 하나의 티끌 가운데 시방 세
계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티끌과 시방 세계가 각각 자성이 없어 무
주일 뿐이라고 하여 모든 것이 무주실상(無住實相)임을 강조하고 있다.113)
110)『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8b).
111)『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b).
11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6b).
113)『총수록(叢髓錄)』(韓6, p.780c9-21).
의상스님은 이 중도·무분별·무주의 법성을 범부의 몸과 마음에 바탕
하여 설하기도 한다. 곧『총수록』「진수기」에서는「법성게」의 법성을 풀이
하면서 의상스님의 “오늘 나의 오척되는 몸이 움직이지 않음을 무주라고
한다”114)는 설을 인용하고 있다. 또한 표훈, 진정 등의 10여 제자가 의상스
님으로부터「법계도인」을 배울 때,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곧 법신 자체
라는 뜻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115)라고 질문하고 있는데, 이는 범부 몸
의 움직이지 않음이 바로 법신이라 함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
라서 의상스님은 움직이지 않는 범부의 몸이 그대로 법신 자체이며 무주
로서 법성의 현현인 것으로 파악하여 독자적인 법성성기사상을 형성한
것이라고 하겠다.116)
114)『총수록(叢髓錄)』(韓6, p.776c. 約今日五尺身之不動, 爲無住也.).
115)『총수록(叢髓錄)』(韓6, p.775b9-15. 問云. 不動吾身即是法身自體之義, 云何得見?).
116)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153.
「법성게」가운데 이 법성세계는 의상스님의 분과에 의하면 우선 증분
(證分)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법성게」전체가 법성성기
를 노래한 것이다. 증분은「법성게」의 구절처럼 언어가 끊어진 본래의 법
계로서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부처님의 경계이다. 부처님 세계로
서 불가설인 법성성기의 증분 경계가 언어로 가설되는 곳에 연기분이 성
립된다. 곧 법성성기가 진성연기의 방편에 의해 전개되는 것이다. 따라서
‘증분과 연기분은 차별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차별되지 않는다’117)고 의상
스님은 설하고 있다. 증분의 법에는 언어가 미치지 않고 언어의 법은 현상
[事] 가운데 있으니, 증분과 교분은 두 변에 떨어져 있는 듯하지만, 의상
스님은 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옛부터 중도이고 무분별이라고 하여,118) 증
(證)·교(敎) 양법의 관계 또한 중도와 무분별을 통해서 법성성기의 경계
로 파악하고 있다.
117)『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4c).
118)『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4b).
『총수록』의 삼대기는 의상스님의 법성성기사상을 이어받아 더욱 구체
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을 보인다.「법융기」에서는 의상스님의 법성설을 계
승하여 법성이란 나의 몸과 마음을 말하며, 이 나의 몸과 마음이 진불(眞
佛)이며,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라고 보고 있다.119) 법융스님은 일승의 법
이 증분과 교분에 모두 통하지만 법계라고 할 때는 교분은 가려낸 것이라
고 하여 『일승법계도』 전체가 증분의 경계로서 증분법성의 성기세계로 파
악하고 있다. 또한 법융스님은 진성수연의 연기와 증분법성의 성기를 구
별하여, 연(緣)에 나아가 논하면 연(緣) 이전에는 법이 없으나 성(性)에 나
아가 논하면 연(緣) 이전에 법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연(緣)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금일의 연(緣) 가운데 나타나는 오척(五尺)이 연기의 본법
이며 곁이 없이[無側] 이루어지기 때문에 연(緣) 이전에는 한 법도 없지
만, 성(性)에 나아가 논하는 때에는 성기의 법체가 본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20)
119)『총수록(叢髓錄)』(韓6, p.834a).
120)『총수록(叢髓錄)』(韓6, p.779b21-24).
『대기(大記)』는 의상스님의 십현문(十玄門)을 해석하는 부분에서 법성
성기사상을 더욱 뚜렷이 나타내고 있으니, 십현문 가운데 제9 유심회전선
성문(唯心迴轉善成門)의 유심(唯心)을 성기심(性起心)으로 파악하여 마음
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일체 모든 법이 모두 성기심으로부터 일어난 것이
며, 따라서 여래출현의 경계임을 밝혀서 의상스님의 법성성기사상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121)
121)『총수록(叢髓錄)』(韓6, p.843b14-16).
『진수기』또한『일승법계도』를 법성성기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진수기』에서는 일승의 궁극적인 진원인 법성으로 돌아가는 것이 ‘귀가
(歸家)’이고,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이며, 내 오척되는 몸의 법
성이 바로 구래부동의 부처임을 설한다.122) 『일승법계도』에서 언급하는
‘일심(一心)’을 열 가지의 성기심123)으로 해석하여 연기의 구극을 성기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삼대기 모두가『일승법계도』의 ‘마음[心]’을
성기심으로 설명하여 연기가 구극에는 성기에 포섭됨을 보여주고 있다.
122)『총수록(叢髓錄)』(韓6, p.783b; p.787c; p.789c; p.790a 등).
123)『화엄경(華嚴經)』(高8, pp.744a24-746c11; 大10, pp.271a23-273b22).
균여스님 또한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 『일승법계도』가 나타내고 있
는 일승원교(一乘圓敎)를 성기사상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일승
법계도』에서 원교를 ‘여래의 일음교(一音敎)’라고 설하는 것에 대해 균여
스님은 이 ‘여래의 일음’을 ‘어업성기(語業性起)’로 주석하여124) 『화엄경(華
嚴經)』「보왕여래성기품(寶王如來性起品)」의 어업성기에 비유하고 있으니
『일승법계도』가 성기의 어업에 의한 현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24)『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4a).
설잠스님은「법성게」첫 구절인 ‘법성원융무이상’을 해석하여, ‘법’이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접하고 있는 삼라만상으로서의 모든 존재이며, ‘성’이
란 우리의 인식기관이 끊임없이 수용하고 있지만 대상화하여 분석할 수
없는 본래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법성이 원융하다는 것에 대해 일체법이
곧 일체성이며 일체성이 일체법으로서 지금 오늘의 청산녹수(靑山綠水)
와 본래성이 본래 한바탕으로 둘이 아니라고 주석한다.125) 설잠스님도『법
계도주』에서 선과 교가 일치하는 경계도 바로「법성게」의 종지인 원융법
성에 의한 것임을 보이고 있다.
125)『법계도주(法界圖註)』(韓7, p.303a10-22).
(2) 중도(中道)와 구래불(舊來佛)
의상스님의「법성게」는 처음의 증분과 마지막의 수행자의 이익 얻음이
대응되고 있다.126) 법성이 원융하고 본래 적정한 경계를「법성게」에서는
‘구래부동명위불’로 다시 한 번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법성게」에서는
본래 적정인 증분법성의 성기 세계가 선교방편에 따라 연기로서 현전하
고 있다. 그 연기의 도리를 기반으로 하여 일체 중생이 근기에 따라서 이
익을 얻는 이타행도 있고 또한 수행의 방편과 성취도 있다. 그리하여 궁극
적으로 실제 중도 자리에 앉으니 옛부터 움직이지 않음을 부처라고 한다
는 것이다.
126) 吉津宜英, 『華厳禅の思想史的研究』(大東出版社, 1985), p.81.
『일승법계도원통기』에서는「법성게」에서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의
자리에 앉는다[窮坐實際中道床]’는 것이 법계의 궁극적인 자리에 칭합하
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의상스님의 중도설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해석
한다. ①인과가 같지 않지만 무분별하여 성이 중도에 있는 것이며, ②일
승과 삼승이 일체여서 둘이 아닌 중도이며, ③증분과 교분의 두 법이 무
분별인 중도이며, ④바른 뜻과 바른 교설이 무분별인 중도이며, ⑤이(理)
와 사(事)가 그윽하여 무분별인 중도이며, ⑥하나와 많음이 둘이 아니고
무분별한 중도이며, ⑦일체법의 중도이다.127) 균여스님은 이 일곱 가지 중
도를 설함에 있어서 일관되게 무분별을 중시하면서 무주법성의 중도로
통일하고 이 중도에 칭합하면 그것이 바로 옛부터 움직이지 않는 부처라
는 것이다.
127)『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14b-c).
의상스님은 중도에 칭합한 구래불(舊來佛)을 무착불(無着佛)·원불(願
佛)·업보불(業報佛)·지불(持佛)·화불(化佛)·법계불(法界佛)·심불(心
佛)·삼매불(三昧佛)·성불(性佛)·여의불(如意佛)의 십불(十佛)128)로 밝히
고 있다. 의상스님은 제자들에게 열 부처님을 보고자 한다면『화엄경(華
嚴經)』으로 스스로의 안목을 삼도록 하며,『화엄경(華嚴經)』의 문문구구가
다 부처임을 관하는 실천 수행으로서의 관불(觀佛)을 강조하고 있다.129)
열 부처님[十佛]의 ‘열[十]’은 일체불(一切佛)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니,130)
다만 십불(十佛)만이 아니라 다불(多佛)이며 미진불(微塵佛)이며 중중무
진불(重重無盡佛)이다.
128) 이 십불에 대한 의상스님의 자세한 설명이『일승법계도』(韓2, p.5c)와『총수록』
「고기」(韓6, pp.834b-835a)에 실려 있다. 이 십불은『화엄경(華嚴經)』「이세간품」
(高8, p.292a. ; 大9, p.663b)의 십불설과 같다.『화엄경(華嚴經)』에는 여러 십불설
이 있으니 지엄스님은 이를 해경십불(解境十佛)과 행경십불(行境十佛)의 이종
십불설(『공목장』, 大45, p.560a)로 정리하였다.『일승법계도』에 나타나는 십불설
의 구체적인 명목과 간략한 설명은『화엄경(華嚴經)』과 지엄스님의 행경십불설
과 같으나,『총수록』에 실려 있는 구체적인 설명으로 의상스님의 독자적인 십불
설을 알 수 있다.
129)『총수록(叢髓錄)』(韓6, p.834b).
130)『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5c).
의상스님은「반시」에서 불보살을 지정각세간에 배속하고「법성게」의
분과에서 십불(十佛)을 연기분으로 배속하였다. 그리고 십불과 보현의 관
계를 내증(內證)과 외화(外化), 내향(內向)과 외향(外向) 등으로 상정하고
있다.131) 불의 외화가 보현이고 보현의 내증이 십불이며, 십불의 외향이 보
현이고 보현의 내향이 십불이니, 내외를 통틀어 ‘십불보현대인경’이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불외향심이 보현심과 명합하여 나눌 수 없으므로 연기
분 중에 십불을 아울러 열거한 것이니, 보현보살의 대인경계는 교분 즉 연
기분이고 십불의 대인경계는 증분이지만 부처와 둘이 아닌 보현보살을 취
하면서 보현보살과 둘이 아닌 부처를 함께 연기분에서 들어 보인 것이다.
따라서 증분의 십불은 구래불로서 수행자가 이익을 얻은 경계인 것이다.
131)『총수록(叢髓錄)』(韓6, p.785a-b).
이처럼 구래불이 증분의 십불이라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한 범부는 어
째서 구래성불(舊來成佛)인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의상스님
은 “번뇌가 아직 끊어지지 않으면 성불이라고 하지 않으며, 번뇌를 다 끊
고 복지(福智)를 이루어 마쳐야 그때부터 구래성불이라고 한다”132)고 답한
다. 의상스님은 이 구래성불을 ‘초발심한 때에 바로 정각을 이룬다’는 상
즉상입의 무애도리에 의해서도 나타내고 있다.133) 초발심이란 믿음의 지
위에 있는 보살로서 제자위이며 정각을 이룸은 불지(佛地)로서 대사위이
니, 위와 아래가 같지 않은데 어째서 머리와 다리를 같은 곳에 놓는가라
고 질문하고, 이에 대해 원교일승법은 삼승의 방편설과 달라서 머리와 다
리가 하나[一]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태어난 날이 같다[同]고 한다. 그리고
하나로서 같다[同一]는 뜻을 풀이하면서 ‘하나’는 무분별의 뜻이며, ‘같다’
는 무주의 뜻이라고 규정한다. 무분별·무주이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자리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맞대고 있다고 하여 원교일승 연기법의
극설은 바로 성기와 통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34)
13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5c).
133)『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7b).
134) Ven. Hae-ju, ‘Uisang’s View of Buddha in the Silla Period,’ International Journal of
Buddhist Thought & Culture , vol.7,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buddhist thought
& culture, 2006, pp.95-112.
『총수록』「법융기」에서는 ‘중도(中道)’란 세 가지 세간으로 자기의 몸
과 마음을 삼는 것이니, 이는 한 물건도 자기의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어떤 이가 침상에 누워 꿈을 꾸니 꿈속에서 30여 역
을 돌아다녔으나 깨고 나서야 비로소 침상에서 본래 움직이지 않았음을
안 것에 비유하여, 본래의 법성으로부터 30구를 지나 다시 법성에 이르렀
으니 한결같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옛부터 움직이지 않은 것이라고 하
였다.135)
135)『총수록(叢髓錄)』(韓6, p.789c).
「진기」에서는 옛부터 움직이지 않음을, 본래 깨달았으나[本覺] 발심의
연(緣)에 의해 비로소 깨닫는 것[始覺]으로 이해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일
승에서는 어떠한 법도 고정되지 않아서 근본과 지말로서 정해진 것이 없
다고 설한다.136)
136)『총수록(叢髓錄)』(韓6, p.790a).
「대기」에서는 처음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불(佛)’자에 이르니
처음과 마지막의 이르름이 한 곳이기 때문에 ‘구래부동명위불’이라고 하
고, 의상스님의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이르고 이르러도 출발한 곳이다
[行行本處, 至至發處]’라는 설을 인용하고 있다.137)
137)『총수록(叢髓錄)』(韓6, p.790a).
균여스님 또한 중도에 칭합한 ‘구래성불’에 대해서 ‘본래 부처이다[本來
是佛],’ ‘옛부터 부처이다[從古是佛]’라고 표현하면서, 옛부터 부처이나 미
혹[迷]한 까닭에 알지 못하니 번뇌를 영원히 끊으면 비로소 옛부터 깨달
았음을 안다고 한다. 의상스님의 구래성불설을 ‘본래불(本來佛)’로 계승함
으로써 증분법성의 성기사상을 이어가고 있다.
설잠스님은 ‘궁좌실제중도상’의 ‘궁(窮)’을 깊이 법성의 바다에 들어가
마침내 구경처가 없는 것으로 풀이함으로써 ‘궁좌실제중도상’의 경계가
법성성기의 경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불사(佛事)의 문 가운데에
서는 한 법도 버리지 않는다”고 하고, 또 “한 법도 보지 않으니 곧 여래이
다”라고 하였다.138) 설잠스님 또한『총수록』의 꿈 비유를 들어 설명함으로
써 ‘구래부동명위불’을 여래성기의 세계로 천명하고 있다.
138)『법계도주(法界圖註)』(韓7, p.306c).
(3) 해인삼매(海印三昧)
의상계 화엄사상의 특징인 법성성기사상은 해인삼매에 대한 이해에서
도 잘 드러나고 있다.『일승법계도』는『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하니, 해
인삼매 역시 의상스님의 전체 화엄사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큼을 미루
어 알 수 있다. 이는『화엄경(華嚴經)』전체의 총정(總定)이 해인삼매이
고,『화엄경(華嚴經)』은 ‘해인삼매일시병현(海印三昧一時炳現)’의 법이라
고 하는 화엄교가의 설139)이 증명되는 것이라고도 하겠다.『화엄경(華嚴
經)』「현수품(賢首品)」에서는 신(信)을 완성하여 현수의 지위를 얻은 보살
이 중생을 위하여 갖가지 모습으로 나투어 설법 교화하는 것이 해인삼매
의 힘 때문이라고 하며,140)「보왕여래성기품」에서는 부처님의 깨달음이 중
생들을 다 비추는 것을, 큰 바다가 일체 중생의 모습을 다 비추는 것에 비
유하고 있다.141) 이 때 해인은 여래의 무상보리해(無上菩提海)로서 과해인
(果海印)이다. 곧 해인삼매는 여래의 출현인 여래성기인 것이다.
139) 징관(澄觀),『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大35, p.520c24-29).
140) 60권『화엄경(華嚴經)』(高8, p.42c; 大9, p.434b-c).
141) 60권『화엄경(華嚴經)』(高8, p.249c; 大9, p.627b).
의상스님은『일승법계도』가 도인의 형식을 한 이유로서『화엄경(華嚴
經)』에서 설한 바와 같이 석가여래께서 가르치신 교망(敎網)이 포섭하는
세 가지 세간이 해인삼매로부터 나타난 것임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설
하고 있다.142) 이러한 해인삼매가 「법성게」에서는 이타행에서 표현되고 있
으나 실은 해인 가운데 자리와 이타를 구족하였으니 「반시」에서 보이는
세 가지 세간의 법을 섭입하는 것은 자리이고, 세 가지 세간의 법을 나투
는 것은 이타이다.143)『일승법계도』에서 의상스님은 이 해인삼매를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14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b).
143)『총수록(叢髓錄)』(韓6, p.785c).「법융기」에서는 이어서 일승 가운데에는 이타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교화되는 중생이 바로 스스로 안으로 증득한 오해(五海)
가운데의 중생이기 때문에 근기에 응하여 일어나고, 능히 교화를 입히는 가르
침도 스스로의 해인정으로부터 일어난 바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인(海印)’이란 비유를 들어서 이름 붙인 것이다. 왜냐하면, 큰 바다
는 매우 깊고 밝고 맑아 밑바닥까지 비치니, 천제(天帝)와 아수라가 싸
울 때 모든 병사들과 모든 무기들이 그 가운데에 나타나 분명히 드러남
이 마치 도장으로 글자를 찍은 것과 같기 때문에 ‘해인’이라고 이름 붙
인 것이다. 능히 삼매에 들어가는 것 또한 이와 같다. 법성을 완전히 증
득하여 밑바닥이 없으므로 끝까지 청정하고 맑고 밝아서, 세 가지 세간
이 그 가운데 나타나므로 이름하여 ‘해인’이라고 한 것이다.144)
144)『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3c).
이처럼 해인삼매가 법성을 증득함에 의한 것이라는 의상스님의 해인삼
매설은 『일승법계도』가 바로 법성성기 그 자체임을 말해 주고 있다.145)
『총수록』가운데대기」는『일승법계도』를 3중의 ‘오중해인(五重海印)’
에 배대시켜 해석하는데 특징이 있다.『일승법계도합시일인오십사각이백
일십자』라는 제목에 대하여「대기」는 먼저 ‘일승법계’는 ‘망상해인(忘像海
印),’ ‘도’는 ‘현상해인(現像海印),’ ‘합시일인’은 ‘외향해인(外向海印),’ ‘오
십사각’은 ‘정관해인(定觀海印),’ ‘이백일십자’는 ‘어언해인(語言海印)’에
배대한다.146) 다시 이 가운데 제5해인인 ‘어언해인’ 210자에 오중해인을 배
대하고,147) 또다시 두 번째 오중해인 중 제4해인인 이타행 4구에 오중해인
을 배대하여148) 총 3중의 오중해인으로 풀이하고 있다.149) 여기서 제1중의
오중해인에서는 일승법계를 ‘망상해인(忘像海印),’ 제2중의 오중해인에서
는 증분 중 2구인 ‘법성원융무이상’과 ‘무명무상절일체’를 ‘영불현해인(影
不現海印),’ 제3중의 오중해인에서는 ‘능입해인삼매중’을 ‘영리해인(影離
海印)’에 배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망상해인과 영불현해인, 그리고 영
리해인은 같은 의미이니, 이에 따라 일승법계와 원융법성과 해인삼매는
동일한 경계임을 알 수 있다.
145) 전해주,「諸經典에 보이는 海印三昧 小考」,『백련불교논집』제1집, 백련불교문
화재단, 1991.
146)『총수록(叢髓錄)』(韓6, p.768b-c).
147)『총수록(叢髓錄)』(韓6, p.775a12-22).
148)『총수록(叢髓錄)』(韓6, p.786b16-c13).
149) 이 3중 오중해인을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제1중 오중해인〉 〈제2중 오중해인〉 〈제3중 오중해인〉
1.망상해인(일승법계)
2.현상해인(도)
3.외향해인(합시일인) 제1영불현해인(증분중 2구)
4.정관해인(54각) 제2영현해인(증분중 여2구) 초 영이해인(능입해인삼매중)
5.어언해인(210자,30구) 제3중해인(연기분 14구) 제2영현해인(번출여의부사의)
제4중해인(이타행 4구) 제3중해인(우보익생만허공)
제5중해인(수행방편 4구) 제4중해인(중생수기)
제5중해인(득이익)
「대기」는 또한 ‘법계’의 본래 자리는 바로 나의 오척되는 몸이며, 이 뜻
을 드러내고자 모든 법계가 한 몸임을 나타내는 그림을 그린 것이 이『일
승법계도』라고 하였으며,150) 의상스님의 법성성기사상을 이어받아 법성을
내 몸과 마음으로 설명하고 있다.151) 삼대기 중에서「대기」는 특히 의상스
님의 법성성기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50)『총수록(叢髓錄)』(韓6, p.768c).
151)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168.
3) 진성연기사상(眞性緣起思想)
(1) 중문(中門)과 즉문(卽門)
의상스님은 법성성기로 일승법계를 드러내고 있는데 일승법계의 또 한
측면으로 진성수연의 법계연기를 보이고도 있다. 법성은 증득한 지혜로
알 수 있는 불가설의 경계이므로 가설의 진성을 통해 법성에 도달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진성연기를「법성게」에서는 연기분에서 보이고 있으며 또
한「반시」에서「법계도인」을 육상으로 해석해 보이고 있다. 의상스님은
연기분의 내용을 연기의 체(體)·연기다라니의 이법과 묘용[理用]·사법
(事法)·때[世]·계위[位]를 기준으로 법을 포섭하는 영역을 밝힘·총론 등
6부문으로 나누고 있다. 즉「법성게」의 연기분에서는 먼저 진성이 수연(隨
緣)한다는 연기의 체(體)를 보이고, 이를 하나와 많음[一多], 티끌과 시방
세계, 찰나와 한량없이 긴 겁, 초발심과 정각, 생사와 열반, 이법과 현상 등
의 여러 분제를 통해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연기의 체(體)인 진성은 매우 깊고 극히 미묘해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
고 연(緣)을 따라 이루는데 이렇게 이루어진 법계연기의 모든 법을 다라
니법이라고 부르며, 이 다라니의 이법과 묘용을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
多中一)의 중문(中門)과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의 즉문(卽門)으
로 보이고 있다. 즉문은 연기법에 있어서 체(體)의 측면으로서 상즉(相卽)
또는 상시(相是)라고 하며, 중문은 용(用)의 측면으로서 상입(相入) 또는
상용(相用)으로도 말해진다. 의상스님은 연기실상다라니법을 보고자 하
면 먼저 수십전법(數十錢法)152)을 깨치라고 한다. 수십전법은 동전 열 개
를 헤아리는 비유로서 ‘일중십 십중일(一中十十中一)’과 ‘일즉십 십즉일
(一卽十十卽一)’의 두 문, 즉 중문과 즉문을 하나에서 열로 헤아리는 향상
문과 열에서 하나로 헤아리는 향하문으로 설명하고 있다.153) 이를 도시하
면 <표3>과 같다.154)
152) 수십전법은 의상스님이 최초로 체제를 갖춘 것이다.『화엄경(華嚴經)』(高8
p.74a10; 大9 p.465a22-23)에 용례가 보이는 수십법에 주목한 지엄스님의 수십법
(『수현기(搜玄記)』, 高47 p.13a24-b1; 大35 p.27b2-7)을 발전시켜 동전의 비유를
이용한 수십전법을 의상스님이 처음 창안한 것이다. 지엄스님의 저술로 알려져
있는『일승십현문」은 수십전법을 동체(同體)와 이체(異體)로 나누어 설명하는
등 의상스님의 수십전법보다 더욱 분화된 모습을 보이므로, 그 사상사적 맥락에
서 살펴보았을 때 지엄스님의 저술이 아닌 것으로 추정되며, 오히려『일승십현
문』의 수십전법은 의상스님의 수십전법에서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전해주,「화엄교학의 수십전유에 대한 고찰 - 지엄과 의상설을 중심으로」,『명성
스님 고희기념 불교학논문집』(운문승가대학, 2000); 鎌田茂雄, 「一乘法界圖の思
想的意義」,『新羅義湘の華厳思想』, 제3회 국제불교학술회의, 1980, pp.66-67.
153)『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p.6a-c).
154) 全海住,『義湘華嚴思想史硏究』(民族社, 1993), pp.129-132.
이러한 중문과 즉문의 상입과 상즉에 대하여 공간적으로는 티끌 가운
데 시방(十方)을 머금고 또한 모든 티끌 중에도 이와 같다고 설하며, 시간
적으로는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순간[一念]이고, 한 순간이 곧 한량없는
먼 겁이며 구세(九世)와 십세(十世)가 서로 상즉하면서도 그로 인해 혼잡
하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고 한다. 또 수행의 계위로는 처음 발심할
때가 곧 정각이며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연기
를 통틀어서 이법과 현상이 무분별하며 십불과 보현보살이 내증과 외화
로서 둘이 아닌 경계로 결론짓고 있다. 의상스님은 이법과 현상이 무분별
하여 무애함을 이사무애(理事無礙), 사사무애(事事無礙), 이이무애(理理 無
礙)로 구체화하여 사법계와 이법계를 합해서 다섯 가지로 연기 세계를 설
명하였다. 그 가운데 사사무애 법계연기세계가 십현연기와 아울러 육상원
융을 통해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2) 육상원융(六相圓融)과 십현연기(十玄緣起)
진성이 수연하는 진성연기인 법계연기는『일승법계도』에서 육상원융과
십현연기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육상이란 총상(總相), 별상(別相), 동상(同相), 이상(異相), 성상(成相),
괴상(壞相)이니, 이 육상설은『화엄경(華嚴經)』「십지품」의 초환희지에서
일으키는 십대원 중 네 번째 원에 그 명목이 보인다.155) 즉 ‘보살이 모든 바
라밀을 총상 내지 괴상의 육상으로 닦아서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이 증장
케 하여지이다’라는 원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화엄경(華嚴經)』「십지품」
의 별행경인『십지경』에서 보이는 육상의 명목은 세친의『십지경론』156)에
서 그 의미가 구체화됨을 거쳐 화엄종의 육상원융설로 발전하게 된다.157)
155) 60권『화엄경(華嚴經)』(高8, pp.165c22-166a5; 大9, p.545b25-c3); 80권『화엄경(華
嚴經)』(高8, p.636c20-25; 大10, p.181c23-28). 경에 보이는 이 네 번째 원을 지엄스
님은 『수현기』(高47, p.37a25; 大35, p.54a13)에서 ‘지중생심(知衆生心)’이라고 하
였으며, 징관스님은『대방광불화엄경소』(大35, pp.762c19-763a17)에서 ‘수행이리
원(修行二利願)’ 또는 ‘심증장원(心增長願)’이라고 이름하여 주석을 가하고 있다.
156) 高15, p.3a22-c13; 大26, pp.124c3-125a6.
157) 자세한 내용은 다음이 참조된다. 전호련,「華嚴 六相說 硏究 I」,『불교학보』
vol.3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4; 전해주, 「華嚴 六相說 硏究 Ⅱ」,『불교
학보』 vol.33,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6.
지엄스님이 60권『화엄경(華嚴經)』에 대한 주석서인『수현기』를 지은
이유도 바로 이 육상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며,158) 지엄스님의 육상
송(六相頌)이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159)
158) 속법(續法),『법계종오조약기(法界宗五祖略記)』(卍134, p.544a11-b4).
159) 법장스님은 그의『화엄일승교의분제장』말미에 이 육상송을 소개하고 있지
만(大45, pp.508c24-509a3), 저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총수록(叢髓
錄)』에서는 이 육상송을『육상장(六相章)』에서 인용하여 소개하고 있으며(韓6,
p.799a12-16), 의천스님의『신편제종교장총록』(韓4, p.681b5)에서는『육상장』
을 지엄스님의 작(作)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송의 선희(善熹)스님이 지은『화엄일
승교의분제장복고기(華嚴一乘敎義分齊章復古記)』(卍103, pp.573b10-574a10)에서
는 의천스님이『원종문류(圓宗文類)』제21권(일실)에서 이 육상송이 지엄스님
의 작(作)이며 법장스님은 이것을 이어받아 사용한 것이라고 밝힌 것을 인용하
여 이 육상송이 지엄스님의 작(作)임을 확정하고 있다.
하나가 곧 많음을 갖추는 것을 총상이라 이름하고, 많음이 곧 하나가
아닌 것이 별상이다.
많은 종류가 스스로 같음[同]에 총을 이루고, 각각 체가 다름[別異]에
같음을 나타낸다.
하나와 많음의 연기 도리가 묘한 이룸[成]이고, 무너짐[壞]은 스스로
의 법에 머물러 항상 짓지 않는다.
오직 지혜의 경계일 뿐 현상[事]으로 아는 것이 아니니, 이 방편으로
일승을 안다.160)
160) 법장,『화엄일승교의분제장(華嚴一乘敎義分齊章)』(大45, pp.508c22-509a3);『총수
록(叢髓錄)』(韓6, p.799a12-16) 등. 一卽具多名總相, 多即非一是別相. 多類自同成
於總, 各體別異現於同. 一多緣起理妙成, 壞住自法常不作. 唯智境界非事識, 以
此方便會一乘.
의상스님은「반시」가운데 지정각세간을 상징하는 「법계도인」을 육상
으로 설명함으로써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나
타내는 영역을 보이고 있다. 곧, 총상은 근본이 되는 인(印)을 가리킨다.
별상이란 나머지 굴곡들이니, 별(別)이 인(印)을 의지하되 그 인(印)을 만
족케 하기 때문이다. 동상이란 한 가지 인[同印]이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굴곡은 다르지만 한 가지 인이기 때문이다. 이상이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첫 번째, 두 번째 등 굴곡들이 달라서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성상이란 간략히 설하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인(印)을 이루기
때문이다. 괴상이란 널리 설하기 때문이니, 번다하게 도는 굴곡들이 각각
스스로 달라서 본래 짓지 않기 때문이다.
의상스님은 육상원융설을 연기다라니법(緣起陀羅尼法)의 중요한 문
으로서 다루고 있는데,『일승법계도』에서는 ‘모든 연생법이 육상으로 이
루어지지 않음이 없다’161)고 하고 ‘육상은 연기의 도리를 나타내려고 한
것’162)임을 강조하여 육상설을 연기법으로서 중시하고 있다.
161)『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c).
16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2b).
『일승법계도』에서는 이 육상원융설을 교판과 관련시켜 일승과 삼승을
육상설을 통한 중도의 뜻으로써 포섭한다. 즉, 총상은 뜻이 원교(圓敎)에
해당하고, 별상은 뜻이 삼승교(三乘敎)에 해당한다. 총상, 별상, 성상, 괴
상 등이 즉(卽)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
니하여 항상 중도에 있듯이, 일승과 삼승도 또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일
승과 삼승이 서로 도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
르지도 않으니, 비록 중생을 이롭게 하나, 오직 중도에 있어서 주(主)와 반
(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낸다고 한다.163)
163)『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p.1c-2a).
의상스님은 이와 같이「법계도인」을 육상으로 설명한 것이 세친(世親,
320~400, 또는 400~480)스님의『십지경론』에 의한 것임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164)
164)『십지경론』(高15 pp.3b1-c13; 大26 pp.124c5-125a6)에서는『십지경』에서
금강장보살(金剛藏菩薩)이 삼매에 드니 시방의 금강장불이 삼매에 드는 열 가지
인연을 들어 칭찬하는 내용을 육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일체 보살이 불가사의한
불법을 밝게 설하여 십지(十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 근본입이
며, 이 근본입에 의해서 나머지 구입이 있다고 한다. 구입인 포섭의 들어감[攝
入], 생각하고 헤아림의 들어감[思議入], 법의 모양의 들어감[法相入], 교화의 들
어감[敎化入], 깨달음의 들어감[證入], 게으르지 않음의 들어감[不放逸入], 지
(地)에서 지(地)로 옮김의 들어감[地地轉入], 보살로서 마지막의 들어감[菩薩盡
入], 부처로서 마지막의 들어감[佛盡入] 등이다. 근본입은 총상이고 나머지 구입
은 별상이니, 개별[別]이 근본[本]에 의지하여 저 근본[本]을 만족시키는 까닭
이다. 동상은 들어감이기 때문이고, 이상은 늘어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성상
은 간략히 설하는 까닭이고, 괴상은 널리 설하는 까닭이니, 세계가 이루어지고
무너지는 것과 같은 까닭이다. 이처럼 나머지 모든 열 구절도 육상으로 이루어
진다고 한다.
의상스님은 육상설을 법계연기론의 중도의(中道義), 주반상성(主伴相
成), 다라니법(陀羅尼法) 등의 성립 근거로까지 부상시키고 있어 이후 중
국 화엄교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165)
165) 高翊晋,『韓國古代佛敎思想史』(동국대학교 출판부, 1989), pp.293-301.
의상스님의 육상설에 있어서 특히 중시되는 점은 이 육상설이 연기무
분별의 도리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며, 법성가(法性家)에 들어가는 요문(要
門)임을 밝히기 위한 것166)이라는 사실이다.「반시」에서 첫 글자와 끝 글
자가 가운데에 놓인 것이 인과의 두 자리가 법성가 내의 진실한 덕용이며
그 성(性)이 중도임을 나타내기 위한 방편으로 의상스님은 육상을 설하
고 있다.167) 즉 육상은 중도를 설명하여 이를 통해서 부동(不動)의 법성과
부처의 경계를 설하기 위한 방편이 된 것이다.168) 육상으로 설명하고 있는
「법계도인」은 지정각세간을 상징하는 것이고 지정각세간은 불보살의 세
계이다. 여기서 불세계는 법성성기이며 보살세계는 진성연기이니,169) 이
또한 의상스님은 연기문인 육상원융의 방편을 통해 성기문인 법성가로
이끌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166)『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2b).
167)『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b).
168) 이는 바로 여래출현, 성기와 이어지는 것으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육상설을 통
해 진성연기를 드러냄으로써 법성성기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의상스님의 의도
가 잘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전해주,「華嚴六相說硏究I」,『불교학보』vol.31,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1994)
169) 성기와 연기를 대조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해주스님,『화엄의 세계』, 민족사,
1998, p.242) ①연기는 법을 상호 관련 속에서 보고, 성기는 법을 각 법의 자체상
에서 본다. ②연기는 인연을 기다려 생기하나, 성기는 성 그대로가 기며, 기 그
대로가 성이다. 성 외에 별기가 없고 기 외에 별 성이 없다. ③연기는 법상(法相)
면에서 연으로 출현함이고, 성기는 법성(法性)면에서 자체 출현함이다. ④연기
는 가설인 인분이며, 성기는 불가설인 과분이다. ⑤연기는 수생(修生)과 수생본
유(修生本有)이고, 성기는 본유(本有)와 본유수생(本有修生)이다. ⑥연기는 차
별인과이고, 성기는 평등인과이다. ⑦연기는 해행이며, 성기는 증입이다. ⑧연
기문은 연기상유이므로 초발심 위에서 일체 위를 다 포섭하여 정각을 이룬다.
성기문은 법성융통이므로 본래성불이다. ⑨연기문에서는 즉신성불을 설하고,
성기문에서는 즉신시불을 설하여 구래성불을 논한다. ⑩연기문은 사사무애 법
계연기에 증입하고, 성기문은 성기 만과(滿果)에 증입한다.
『총수록』「대기」에서는 이 육상을 풀이하여 총상과 별상은 법의 다함
없음[無盡]을, 동상과 이상은 법의 걸림 없음[無礙]을, 성상과 괴상은 법
에 곁이 없음[無側]을 나타내며, 일승의 법과 의미는 이 세 가지를 벗어나
지 않는다고 한다. 또 각각을 해석하여 총상은 곧바로 머무름이 없는 법
의 자체를 표방하는 것이고, 별상은 머무름이 없는 총상의 다함없음을 가
리키는 것이며, 동상은 다함없음의 걸림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상은
걸림 없음의 어긋남 없음[無違]을 해석하는 것이고, 성상은 어긋남 없음
의 곁이 없음[無側]을 해석하는 것이며, 괴상은 곁이 없음의 움직이지 않
음[不動]을 표방하는 것이라고 한다.170) 이처럼「대기」는 육상을 다함없음
[無盡], 머무름 없음[無住], 걸림 없음[無礙], 어긋남 없음[無違], 곁이 없음
[無側], 움직이지 않음[不動]으로 이해하여 육상이 무주 중도와 구래부동
의 법성성기로 들어가기 위한 방편임을 나타내고 있다.
170)『총수록(叢髓錄)』(韓6, p.796c).
「법융기」에서는「도인」의 원만함은 총상이고, 원만한 「도인」의 모든 각
곡(角曲)은 별상이며, 모든 각곡들이 나란히 같은「도인」이 되는 것은 동
상이고, 나란히 같은「도인」이지만 움직이지 않아서 각기 다른 것은 이상
이며, 다름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치우치는 바가 없음은 곧 정인(正印)이
니 이것은 성상이고, 곧 정인이면서 각기 스스로 머물러서 지음을 일삼지
않는 것은 괴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육상문이 바로 일승의 함께 하지 않는
방편인 동시에, 또한 함께 하지 않는 법체(法體)라고 설한다.171) 법융스님
은 이러한 육상을 관법에 배대하여 실천적 수행법으로 발전시키고 있는
데, 별상은 변계이며, 동상과 이상은 인연관이고, 성상과 괴상은 연기관이
며, 근본이 되는 총상은 성기관이라고 하여,172) 진성수연을 설명하는 방편
인 육상설로써 법성성기의 경계로 이끌고자 하는 것이다. 이어서 이러한
관법의 차이는 곧 지위에 기대어서 하는 말이니, 만약 일승의 입장이라면
인연관·연기관·성기관의 삼관에 깊고 얕음은 없는 것이라고 한다.173)
171)『총수록(叢髓錄)』(韓6, p.800a19-b3).
172)『총수록(叢髓錄)』(韓6, p.800b3-6).
173)『총수록(叢髓錄)』(韓6, p.800b6-7).
「진수기」는 육상을 노사나불과 중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곧 노사
나불은 총상이며 중생은 별상이다. 중생의 몸은 따로 자체가 없어서 온전
히 노사나불의 몸으로써 이루어져 있다. 동상이란 중생신(衆生身)의 입장
에서는 다른 사물이 없으며 오직 불신(佛身)이므로 중생신이 그러한 부처
를 거느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이란 비록 중생신이 그 불신을 거느리고 있
으나 움직이지 않으면서 능히 거느리는 것이니 언제나 중생인 것이다. 이
때 거느린다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같음이 있다고 하며, 중생이라는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름이 있다. 성상이란 하열한 중생신이 곧 바로 존엄한 불
신인 것이며, 괴상이란 법계의 차별된 법이 각각 스스로 움직이지 않음을
일컫는다.174)
174)『총수록(叢髓錄)』(韓6, p.798c).
균여스님은 육상의 분제에 대해서 육상은 연기문을 들어서 법체에 들
어가게 하고자 하여 육상의 차별을 이룬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이 육상으
로서 차별의 뜻을 따르면 삼승에 즉하고 육상 자체의 덕을 드러내면 일승
에 즉한다고 한다.175)
175)『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韓4, pp.16c-17a).
『일승법계도』에서 의상스님은 원교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나타내는
주요 방편으로 육상원융뿐 아니라 십현문(十玄門)도 시설하고 있다. 이 십
현문은 지엄스님의 설을 계승한 것으로 명칭과 순서도『수현기』176)에서
설하는 것과 동일하다. 단지 아홉 번째 문에서 ‘유심(唯心)’을 ‘수심(隨心)’
이라고 명명한 것만 다를 뿐이다.177) 그 십현문의 구체적인 명목을 소개하
면 다음과 같다.
176) 지엄,『수현기(搜玄記)』(高47 p.2b11-c8; 大35 p.15a22-b24).
177)『고려대장경』의『총수록(叢髓錄)』(高45 p.211b12)에는 ‘수심(隨心)’이 아니라 ‘유
심(唯心)’으로 되어 있다.
①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同時具足相應門].
② 인다라 그물의 경계인 문[因陀羅網境界門].
③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袐密隱顯俱成門].
④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微細相容安立門].
⑤ 십세(十世)가 법을 사이해서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
⑥ 모든 장(藏)에 순수[純]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 문[諸藏純雜具德門].
⑦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문[一多相容不同門].
⑧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諸法相卽自在門].
⑨ 마음을 따라 회전하여 잘 이루는 문[隨心廻轉善成門].
⑩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託事顯法生解門].
이 열 가지 문은 일체법에 사람[人]과 법(法), 이법[理]과 현상[事], 가르
침[敎]과 뜻[義], 앎[解]과 행(行), 원인[因]과 결과[果]의 열 가지가 상응
하여 앞과 뒤가 없음을 다 갖추고 있다.178) 단지 동시구족상응문 외에 다
른 문들은 차례로 비유[喩]·연(緣)·모양[相]·때[世]·현상[事]179)·이법
[理]·작용[用]·마음[心]·지혜[智] 등을 따라서 달리 시설한 것뿐이라고
한다.180)
178) 지엄스님의『수현기』에는 이외에도 분제와 경계와 지위[分齊境位]·스승과 제
자와 법의 지혜[師弟法智]·주와 반과 의보와 정보[主伴依正]·거스름과 따름과
체용의 자재[逆順體用自在]·중생의 근욕 따라 나타내 보임[隨生根欲示現]의 모
두 갖춤 등이 설해져 있다.(高47, p.2b19-21; 大35, p.15b3-5)
179) 지엄스님의『수현기』에는 현상[事]이 아니고 문(門)으로 되어 있다.(高47,
p.2b27)
180)『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8a-b).
법장스님은『화엄일승교의분제장』에서는 지엄스님의 십현문을 그대로
수용하였으나『화엄경탐현기』에서는 두 개의 명목을 바꾸고 있다. 즉 ‘제
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을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礙門)’으로,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은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으
로 변경하고 차례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181) 그리하여 『화엄경탐현기』 이
전의 십현문을 ‘고십현(古十玄)’으로,『화엄경탐현기』이후의 것을 ‘신십
현(新十玄)’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미 의상스님은『일승법계도』에서 후
에 신십현 가운데 수용되는 주반원명구덕문의 경계를 자주 언급하고 있
다. 즉 “일승과 삼승이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내는 영역
을 보인다,”182) 또는 “주(主)와 반(伴)이 서로 도와 즉하지도 않고 여의지
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니, 비록 중생을 이롭게 하나, 오
직 중도에 있어서 주(主)와 반(伴)을 서로 이루어 법을 드러냄이 이와 같
다”183)는 것이다. 이처럼 의상은 십현문의 명목 외에 주반구족(主伴具足)
으로도 법계의 연기를 드러냈던 것이다.
181) 大45, pp.505a-507b.
182)『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c4-5).
183)『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韓2, p.1c16-18).
의상스님은「법성게」중 ‘집으로 돌아가 분수 따라 자량을 얻는다[歸家
隨分得資量]’를 풀이하여 성자가 의지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집이라고 이
름한다고 하였는데, 법융스님은 이 성자가 머무르는 집을 십현문이라고
주석하고, 이 십현문은 남을 위하여 설하면 교분이고 자증(自證)을 기준
으로 하면 증분임을 밝히고 있다.184)
184)『총수록(叢髓錄)』(韓6, p.829a).
의상스님은『일승법계도』의 발문에서『일승법계도』의 집자(集者)는 밝
히지 않고 저술 연월은 명시한 까닭을 모든 법은 연으로 생겨난 것[緣生]
임에 의거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며, 일체 모든 법은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
을 보이려는 까닭이라고 한다. 이어서 연(緣)은 전도된 마음에서, 전도된
마음은 무명(無明)에서, 무명은 여여(如如)에서 오며, 여여는 스스로의 법
성(法性)에 있다고 한다.
이처럼 의상스님은 연기를 통하여 법성가로 돌아오게 한다. 이 법성은
분별이 없음[無分別]으로 모양을 삼으며, 그러므로 일체는 중도에 있으니
무분별 아님이 없다고 한다. 그러한 까닭에 의상스님은 글 첫머리의 시에
서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 내지 “옛부터 움직이지 아니함
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고 하였다는 것으로『일승법계도』를 마무리하
고 있다.
5. 맺음말
한국에서 화엄교는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한국불교의 주류를 형성하여
한국불교의 발전을 이끌어 왔으며 이후 선(禪)과 함께 한국불교의 두 축
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한국화엄의 전통은 의상스님으
로부터 비롯되어 그 뒤를 이은 의상계 화엄학승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해
동화엄 초조라고도 불리는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은『일승법계도』에 그 전
모가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의상스님의 법손들도 이『일승법계도』
의 연구와 주석에 힘을 기울여 왔다. 『법계도기총수록』·『일승법계도원통
기』·『대화엄법계도주병서』·『법성게과주』등『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
가 신라·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계속 저술되었던 것이다.
『일승법계도』는『화엄경(華嚴經)』의 세계를 일승법계로 나타낸 것으로,
이름에 집착하는 무리가 이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고자 이
치에 의거하고 가르침에 근거해서 지은 것이다. 따라서『일승법계도』와
그 주석서들은 참된 근원인 법계를 핵심으로 하고 있으며, 법계가 법계일
수 있음을 법성으로 드러내고 그 법성으로 돌아가는 방편을 진성수연으
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법성게」의 이타행과 수행의 방편 및 득이익 역시
이러한 법성성기와 진성연기의 두 측면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리가 이타
행이며 이타가 자리행으로서,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공덕행이 바로 수행
의 방편이며, 수행으로 인한 이익을 얻은 것이 증분법성의 세계이기 때문
이다. 이것은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의 법성성기 세계를 ‘구래
부동명위불’의 구래불로 마무리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상스님의 화엄사상은 단순히 법손들의 저술과 주석 등을 통
해서 전승된 것만이 아니라, 의상스님으로부터 비롯되는 화엄승가를 통해
사자상승의 모습으로 계승된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의상스님의 사상
과 교화행이 화엄승가에 바탕하여 면면히 이어짐으로써 화엄교학의 내용
과 화엄승가라는 형식을 모두 갖추어 이 땅에 화엄에 바탕한 실천행이 신
라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 있는 전통으로 성립될 수 있었던 것
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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