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화엄(華嚴) II

解題 해제-신라화엄사상사

실론섬 2016. 11. 26. 13:06

解題 해제

신라 화엄사상사


1. 한국불교사와 화엄사상

2. 의상의 화엄사상

3. 원효의 화엄사상

4. 중대 화엄사상과 화엄종

5. 신라 화엄의 다양한 전개

6. 화엄과 선

7. 고려 균여의 화엄사상



1. 한국불교사와 화엄사상


인도에서 시작되어 중국에 수용된 불교는 남북조시대에 불교사상에 대

한 이해가 심화되었다. 반야 공관사상의 지속적인 연구에 따라 중관(中觀)

계 사상이 이해를 더해 갔으며, 섭론(攝論)과 지론(地論)을 중심으로 유식

(唯識)계 사상의 연구가 심화되었고 여래장(如來藏)사상에 바탕한 불성론

(佛性論)의 연구도 활발하였다. 6세기말에 남북조를 통합한 수나라에 들

어서서 남북조불교의 성과를 종합하고 교학(敎學)과 관행(觀行)을 체계화

한 지의(智顗)의 천태종(天台宗)이 일어나 종파불교의 장을 열었다. 7세기

전반 당의 개창 이후 현장(玄奘)에 의한 신유식의 소개를 바탕으로 법상종

(法相宗)이 형성되었고, 남북조의 유식사상을 계승하여 법장(法藏)은 화엄

종(華嚴宗)을 대성하여 중국불교 교학의 빼어난 성과를 이루었다. 이러한

중국불교의 동향은 신라불교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삼국기 신라불교의 중심을 이루었던 유식 교학의 기반 위에 고구려나 백

제에서 발달한 삼론학이나 천태학이 수용됨으로써 통일기 신라불교는 불

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심화되고 신유식과 화엄과 같은 중국의 신불교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신라 화엄사상은 그 한 성과이다.


삼국시대 자장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한 화엄은 통일기에 의상이 화엄사

상의 체계를 확립하여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래 신라 교학의 중요한 줄기

를 이루었다. 신라 하대 선종의 수용에 대응하여 고려초에 균여를 중심으

로 사상을 재정비한 화엄은 의천과 지눌의 사상 중심에 자리 잡았고, 조선

후기 교학 진흥의 추세에도 중추를 이루었다. 이는 화엄사상이 지속적으로

한국불교 사상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에 대한 이해는 한국불교사상의 이해에 중요한 바탕이 된다. 이와 같

은 한국 불교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화엄사상의 이해를 위해 신라 화엄사상

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의상의 화엄사상


한국 화엄의 이해는 자장(慈藏)에서부터 시작된다. 선덕왕대에 중국에

유학했던 자장은 오대산 문수신앙의 감응을 얻고 이를 전해왔으며, 신라

에 돌아온 후 자신의 집을 고쳐 절을 만든 낙성회에서『화엄경』을 강의하

였다. 후대의 윤색이 가해진 설화이지만 삼국시대 말에 신라에『화엄경』이

전래 소개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이행구, 1994)


신라 불교철학이 정립되는 통일신라기에 화엄사상을 주도한 것은 의상

(義相, 625~702)이었다. 의상은 화엄일승(華嚴一乘) 법계연기(法界緣起)의

핵심을 언어의 절제 하에 210자의 법계도시로 엮고 이를 상징적으로 형상

화한 법계도인을 만들어 그 내용을『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로 정리함으

로써 화엄일승 사상을 체계화하였다.(조명기, 1962) 이 저술은 지엄을 계승

하면서도 이전의 지론 교학에 영향을 받았고 초기선종과도 연관성을 갖는

다. 이 독특한 사상을 형상화한 법계도는 처음과 끝이 이어지는 상징적인

효과를 위해 당시 유행하던 회문시(回文詩) 형식을 채용하여 최신 기술이

던 목판 인쇄에 다라니를 강조하여 담아 낸 것이었다.(石井公成, 1996)


『일승법계도』는 화엄 법계연기설의 핵심인 일중다 다중일과 일즉다 다

즉일의 상입상즉(相入相卽)의 연기법을 수십전(數十錢) 등의 비유로 풀이

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일다(一多)의 상입상즉, 미진(微塵)과 시방(十

方), 일념과 무량겁, 초발심과 정각 및 생사와 열반으로 이루어진 다라니

이용(理用)·사(事)·세시(世時)·위(位)의 4가지 범주로 구성하였다. 의상

은 이들 자리행에 이타행과 수행문을 추가하여 강한 실천적 성격의『일승

법계도』를 완성하였다. 법계도가 의상의 저술이 아니라 지엄의 저술이고,

의상이 이에 대해 해석한 것이『일승법계도』라는 견해가 제기되었으나(姚

長壽, 1996), 의상의 저술이 분명함이 재차 확인되었다.(전해주, 1999 ; 佐藤

厚, 1999)


『일승법계도』에서 나타난 의상의 화엄사상은 교판설, 심식설(心識說),

이이상즉론(理理相卽論)과 십현육상론(十玄六相論), 단혹(斷惑)과 수도론

등으로 분류된다.(坂本幸男, 1956) 이중에서 의상 화엄사상의 독자적인 면

모는 다라니법의 강조와 수십전설과 육상의 등에 나타난다. 의상은 교판

과 십문현(十門玄)의 연기론 등은 지엄의 학설을 계승하였으나 수십전설

과 육상설을 중도의(中道義)와 함께 연기설의 중요한 교의로 정착시키는

독자적인 관점을 열었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실천행을 중시하였고 이는 사

상과 문도 형성으로 이룩한 화엄종단에서 경설에 토대를 둔 관음과 미타신

앙을 전개하는 것으로 나타나 통일기 신라사회가 지향하던 사회 안정에 부

응하였다. 의상 화엄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일과 다의 상입상즉의 법계연기

는 평등과 조화를 상징하는 논리로서 의상의 화엄교단에서 사회적으로 실

천되었다.(정병삼, 1998) 의상이 강조한 연기실상다라니법은 실천 중시의

신앙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진영유, 1995) 의상 사상의 특징인 중도의

는 일승과 삼승을 중도와 이변(二邊)으로 인식하는 핵심이며, 모든 상대법

이 각자의 형식을 지니면서 그대로 중도임을 인정하는 중층적 구조를 보였

다.(佐藤厚, 1996) 이 중층 구조는『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어가는 과

정을 상징하며, 보현에서 부처로 점차『화엄경』의 심오한 부분으로 들어가

최종적으로 법성에 귀착하는 구조를 보이는 것이었다.(佐藤厚, 1998) 의상

의 특징적인 이이상즉설은 일반적인 관점처럼 이(理)의 무분제(無分齊)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사(事)에 있어서의 본래성을 나타내려는 것으

로서, 화엄연기에서 모든 사물은 융통함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坂本幸

男, 1956 ; 오다 겐유, 2007) 의상에게 법계연기란 사와 이의 무분별을 인으

로 하여 일어나는 상즉상융(相卽相融)이고, 상즉을 중시하지만 상입은 중

시하지 않는다.(大竹晋, 2007)


해인삼매에 있어서의 육상원융한 연기관이라는 점에서 의상의『법계

도』는 실천적이며 종합적으로 화엄경에 기초한 해인삼매의 정신을 드러

내는 것이었다.(이기영, 1982) 성기(性起)사상의 관점에서 보면 의상의 연

기법은 실성(實性)의 성기세계를 드러내고자 한 법계도의 실천적 구조

와 밀접하게 연관을 맺으며 법성관과 구래성불설(舊來成佛說)과 해인삼

매론에 연계되어 구성된 것이었다.(전해주, 1993) 의상은 법성과 불성, 총

상과 별상, 시공의 중도를 제시하여 중도적 공관(空觀)을 보였다.(신현숙,

1989·1990) 의상의 융합사상은 성기취입적인 성향을 가진 횡진법계관(橫

盡法界觀)의 논리로 구조된 원융사상으로 관음신앙과 연결된 실천수행적

신앙을 지닌 것이었다.(김두진, 1995)


의상의 원융사상이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압집권적 통치체제를 뒷

받침하기에 적당하다는 관점도 있지만,『법계도』의 일과 다의 상입상즉한

관계는 조화와 평등이 강조되는 관점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김상현, 1991)


3. 원효의 화엄사상


원효(元曉, 617~686)는 모든 경론의 존재 의의를 인정하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종합적인 입장을 가졌다. 원효는『화엄경』을 원만무상의

돈교(頓敎)법문으로서 법계법문을 널리 열고 무변(無邊)의 행덕(行德)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무장무애한 법계법문은 일체법이 공

간적인 대소(大小), 시간적인 촉사(促奢), 운동면의 동정(動靜), 수량적인

일다(一多)의 제 범주에 아무런 걸림 없는 것을 말한다. 원효의 4교판에서

그 최상에 자리하는 원만교는 곧 보법(普法)을 갖춘 것이고, 보법이란 일미

진과 일체세계, 일찰나와 삼세제겁과 같이 일과 일체가 상입상즉하여 혼융

무애한 것이다. 이처럼 일체법이 공간적・시간적인 제 범주에 아무런 걸림

없이 무장무애한 법계법문의 화엄 세계가 원효사상의 정점에 있다고 보았

다.(고익진, 1989) 원효는『기신론』연구에 기반을 두고 섭론교학과 삼론학

에 힘입어 독자적인 보법화엄사상을 성립시켜 십종인, 수십전유, 육상설,

사교판, 법계론 등으로 구체화하였다. 원효의 화엄사상은 의상의 화엄을

일부 수용하면서 법장에 영향을 미쳤다.(석길암, 2003)


4. 중대 화엄사상과 화엄종


의상은『법계도』를 중심으로 부석사와 태백산 소백산 등지에서 여러 제

자들에게 화엄사상을 강의하여 신라 화엄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 대표

적인 제자들이 십대제자로 불리는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

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常元)·능인(能人)·범

체(梵體)·도신(道身)들이다.


표훈은 의상의 지도에 따라 새로운 해석을 전개하기도 했던 고제(高弟)

였다. 그러나 경덕왕대에 활동한 자취를 보여주어 직제자가 아닐 수도 있

다.(김복순, 1990) 진정은 기층민 출신으로 문하의 사상을 주도하던 제자였

다. 지통(655~?)은 가노(家奴)로서 화엄을 깨치고 관행을 닦던 수행인으

로 스승의 강의를 기록한『추동기』(혹은『錐穴問答』,『要義問答』)를 지었고,

도신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도신장(道身章)』(『一乘問答』)을 남겼는데,

일부가 남아 있는 이들 저술은 의상과 지엄이나 제자들의 문답과 학설들이

실려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김상현, 1991) 이들 문헌과 『화엄경문답』

은 비슷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분량이 어느 정도 남아 있

는『도신장』을 보면 이들이 의상의 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을

추구하였음을 알 수 있다.(박서연, 2003a) 이들 외에 상원은 의상 문하의 강

의에서 많은 문답을 남겼고, 양원은『법계도』에 주석을 남겼다. 다시 이들

에 이어 신림(神琳)과 법융(法融) 등이 의상의 화엄 전통을 널리 계승하여

8세기에 왕성한 흐름을 이루었다.


성기사상의 중요한 전적으로 평가되는『화엄경문답(華嚴經問答)』은 그

동안 법장의 저작으로 알려져 왔다. 그런데 그 문체와 인용 문헌이나 삼승

인이 성불한 후 일승에 들어간다는 극과회심(極果迴心) 또는 방편을 중시

하는 반정(返情) 등의 사상이 의상 계통의 사상과 공통점을 보인다.(石井

公成, 1996) 의상의 강의를 필록하였다는『추동기(錐洞記)』(『지통기(智通

記)』)의 내용이『화엄경문답』과 일치하는 점에서 이를『추동기』의 이본으

로 보기도 한다.(김상현, 1996) 그러나 『화엄경문답』의 일승연기법 해석은

『도신장』의 것과 같지만, 시불(十佛)설은 의상계『고기』에서 말하는 범부

의 오척의 몸을 중심으로 시불을 해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므로 의상계

문헌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박서연, 2003b)


의상계 화엄의 교리적 특색은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대기(大

記)』·『법기(法記)』·『진기(眞記)』를 모아 편집한『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

記叢髓錄)』과 그 계승 관계에 있는 균여의『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

圓通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총수록』은 의상계 화엄사상이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이론 토의를 거치며 부단히 전승되던 사실을 알려준다.

균여 저술의 인용이 있어 고려 중후기에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총수록』

은 2차에 걸쳐 편집되었다. 1차적으로『대기』와『법기』와『진기』의 주석서

를 모으고, 다시 이에 부수적인 보충 자료를 추가하여 2차 편집이 이루어져

현재와 같은 구성이 되었다.(김상현, 1991) 세 주석서는『법기』『진기』『대

기』의 순서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균여는 특히『대기』를 기반으로

『원통기』를 저술하였다.(佐藤厚, 1994)


의상계 화엄에서는 중국의 화엄과는 다른 독자적인 사상 경향도 나타난

다. 무주(無住)의 개념이 무자성과 같이 상즉상입의 근거로서 의상의 직제

자로부터 균여에 이르기까지 널리 수용되었다.(사토 아츠시, 1999) 의상계

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오해인(五海印)설은 선종과 지론 및 삼론

학의 영향이 나타나며, 이는 의상 문하에서『화엄경』을 절대시하고 경문을

관심석(觀心釋)하는 특색으로 나타난다.(石井公成, 2003) 이처럼 의상계 화

엄에서 강조된 구래성불(舊來成佛)과 무주(無住) 등은 중국 화엄에서는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의상계 화엄에서는 원효의 사상을 그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고익진, 1989) 예를 들면 진리를 오척(五尺)과 같은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일심 등의 추상적인 원리로 파악하는『기신론』과 차별

화를 의도하여 원효 계통과는 다르게 파악했다.(佐藤厚, 2000)


신라 하대에 이르기까지 의상을 계승하는 화엄종단에 의해 건립된 전교

십찰(傳敎十刹)은 화엄의 성세를 대변한다. 부석사(浮石寺)·화엄사(華嚴

寺)·해인사(海印寺)·범어사(梵魚寺)·옥천사(玉泉寺)·미바라사(毘摩羅

寺)·미리사(美理寺)·보광사(普光寺)·보원사(普願寺)·갑사(岬寺)·화산

사(華山寺)·국신사(國神寺)·청담사(靑潭寺)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시기

에 따라 그 위상이 다소 달랐다.


5. 신라 화엄의 다양한 전개


의상의 화엄을 계승한 의상계는 신림 법융 순응 등으로 나누어 보기도

하고 부석사계와 표훈계 및 해인사계 등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의

상의 직계 제자들과는 사상의 내용을 달리 하는 신라 화엄도 많아 여러 갈

래로 파악된다.


일차적으로 의상을 계승한 주류와 그렇지 않은 부류로 구분된다. 비주류

는 원효계(고익진, 1989), 비의상계(김상현, 1991), 황룡사계(김복순, 1990)

등으로 나눈다. 이중 원효계는 원효와 법장의 융합에 따른 화엄과 기신의

융합이 특징이며, 비의상계는 다시 원효계, 오대산·지리산·천관산계, 기

타의 셋으로 구분한다.


법장의 제자인 승전(勝詮)은 690년대에 당에서 귀국하면서 법장이 의상

에게 보내는 서신과 함께 집필 중인『탐현기』등의 저술을 가져왔다. 심상

(審詳, ?~742) 역시 법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본 화엄종

의 초조가 되었다.


화엄사의 연기(緣起)는 754년에 화엄 사경(寫經)을 주도했는데『개종결

의(開宗決疑)』『화엄경요결(華嚴經要決)』『진류환원락도(眞流還源樂圖)』

와『기신론』관계 저술을 남겨 원효의 사상과 연관된 면모를 보였다. 화엄

사에서는 이밖에도 정행(正行)·정현(定玄)·영관(靈觀) 등이 활동하였다.

황룡사에는 경덕왕 13년(754)에 법해(法海)가 활동하였으며 원성왕대

에 지해(智海)는 화엄을 강의하였다. 경덕왕 말년(759 경)에 보림사를 창건

한 원표(元表)는 천관(天冠)보살 신앙을 지녔던 화엄행자였으며, 원성왕 3

년(787)에 소년서성(少年書省)을 지낸 범여(梵如)는『화엄경요결(華嚴經要

決)』6권을 지었고, 범수(梵修)는 소성왕 원년(799)에 징관의 화엄소를 강

의하였다.


의상의 화엄과 다른 사상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한 부류를 이룬다. 8세

기 중반 경에 활동한 황룡사의 표원(表員)은 화엄사상의 중요 과제에 대한

제 학설을 집대성하여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을 편찬

하였다. 표원은 화엄경의 구조·설시(說時)·설불(說佛)에 대한 문제, 화엄

교설의 중심사상인 육상·수십전유(數十錢喩)·연기·탐현·보법 등의 문

제, 그 진리성으로서의 실제 여여(如如) 법계의 문제, 일승론과 교판 문제,

대승보살의 수행도 문제 등을 18과로 묶어 각 과목을 석명(釋名)·출체(出

體)·문답(問答)으로 설명하였다. 표원은 80화엄을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법계연기의 근원을 밝히고 각종 법계와 역대 교판을 두루 이해하였으며,

보살의 수행 계위에도 정통하였다.(김인덕, 1982) 표원은 신라화엄학의 주

류인 의상의 사상을 위주로 하지 않고 법장의 사상을 토대로 하면서 원효

와 혜원 안름 등의 학설을 집중적으로 인용하고 있어 의상계가 아닌 원효

계의 화엄학승으로 생각된다.(고익진, 1989) 이처럼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한 형태가 태현-표원-견등으로 계승되어 한 흐름을 이루었다.(吉津宜

英, 1991) 표원은 법장의 교학을 대체로 수용하였지만 다른 사상가들의 이

론도 자신의 취지에 따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독자성을 보였으니, 예를

들면 일승의(一乘義)에서 법장의 5교판 위에 혜원과 원효의 교판을 수용하

여 구성한 것이 그런 예이다.(김천학, 1998)


원효와 의상계의 사상을 통합해 보려는 시도는 나말여초에 찬술된 것

으로 생각되는 『건나표하일승수행자비밀의기(健挐標訶一乘修行者秘密義

記)』에서도 엿보인다. 화엄과 기신론 사상을 바탕으로 밀교적 요소와 주

술적 요소를 가미한 이 책은 이런 시도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해 이

후 계승되지 못한 한계와 노력을 동시에 보여준다.(佐藤厚, 2002 ; 최연식,

2004)


명효(明皛)는『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을 저술하였는데 형식상 의상의

법계도인과 같은 상징적 형상을 취하고 있으나『기신론』과 상통하는 해석

을 하였다. 따라서 의상의 계통보다는 화엄과 기신을 동일한 경계로 보았

던 원효와 같은 계통에 속한다.(이기영, 1982「법계도인」과『해인삼매론』

은 양자가 모두 도인(圖印)을 사용하여 성불을 지향한 것은 동일하지만, 내

용상으로는 의상이 원교 화엄을 법성 성기의 구래불(舊來佛)로 드러냈고

명효는 생사즉열반의 연기 구성불(舊成佛)을 주장하였다.(전해주, 1993)

견등(見登)은 화엄사상의 성불의(成佛義)를 밝힌『화엄일승성불묘의(華

嚴一乘成佛妙義)』와『기신론동이략집(起信論同異略集)』을 저술하였다고

알려졌다. 견등은 법장의 저술을 집중적으로 인용하며 삼승 유가교의 경계

와는 판연히 다른 화엄의 성불의를 해석하며 원효와 법장의 사상을 융합

수용하였다.(고익진, 1989) 그러나 견등은 의상계와 비의상계 화엄을 고루

익혀 일본에서 활동하였으며,『기신론동이략집』은 견등이 아닌 지경(智憬)

의 저술이라고도 한다.(최연식, 2002)


6. 화엄과 선


9세기 이래 남종선이 본격적으로 신라에 수용되어 불교계가 개편되면서

화엄과 유식이 중심이 된 중대 교학은 교학의 관념화로 인한 사상 자체의

문제와 지지기반의 변화로 사회적 기반이 크게 축소되었다. 화엄종은 이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한편으로 왕실과 연계하여 지엄과 의상 등 신라 화엄

사상의 기반을 이루는 조사들에 대한 추모사업을 일으키고 화엄경을 사경

하는 결사(結社)운동을 추진하였다.


결사운동은 해인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현준(賢俊)과 결언(決言)은

884년에 지엄을 추모하는 보은(報恩)결사를 조직하였고 886년에는 헌강왕

의 명복을 비는 화엄경결사를 조직하였다. 결언은 861년에 경문왕의 초청

으로 곡사(鵠寺)에서 원성왕의 명복을 비는 강의를 하였으며『교분기(敎

分記)』를 강의하였다. 895년에 해인사는 도적의 침입을 받아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사원을 보호하였는데 승훈(僧訓)이 이 일을 주도하였다. 최치원

도 만년에 해인사에 머물며 법장의 덕을 기리는 일을 주도하였다.(김상현,

1993)


선종의 부상에 대응하여 화엄종의 교리와 조직 및 신앙을 강조하며 정체

성 확립의 노력으로 나온 것이『신중경(神衆經)』의 성립이었다. 9세기 후반

화엄종단의 중심으로 부상한 해인사에서는 전장과 승군을 바탕으로 지역

사회에서 강력한 사원공동체를 구축하고, 그들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키

기 위해『화엄경』에 나오는 40류의 신중과 입법계품의 53선지식 그리고 39

품의 이름을 더하여『신중경』을 만들었다. 해인사의 희랑이 왕건에 협력함

에 따라『신중경』은 고려에 전승되어 균여에게도 이어졌다.(남동신, 1993)

후삼국 시기에 해인사에는 두 계통의 화엄학풍이 공존하고 있었다. 하나

는 희랑(希朗)으로 왕건의 복전이 되었고, 다른 하나는 관혜(觀惠)로 견훤

의 복전이 되었다. 희랑은 의상계 화엄학의 정통을 주도하던 태백산 부석

사 학풍을 계승하여 북악(北岳)이라 불렸고, 관혜는 지리산 화엄사 학풍을

계승하여 남악(南岳)으로 불렸다. 남북악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데, 화엄

기신을 토대로 하는 화엄사 연기계를 남악으로, 법계도기를 중심으로 하는

부석사의 의상계를 북악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최병헌, 1980 ; 고익진,

1989) 신라말의 화엄학은 삼교·진부진(盡不盡)·육상·정토·성기·공양

등 30여 화엄 교학의 개념에 대해 이견들이 전개되어 있었고(李永洙, 1984)

이를 균여가 정리함으로써 사상체계의 재정립과 화엄 교단의 통합이 이루

어졌다.


7. 고려 균여의 화엄사상


균여(均如, 923~973)는 나말 이래의 사상적으로 분열된 화엄교단의 내

부적 과제와 교 선간의 갈등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러한 과제에 대응하는

사상체계를 정립하였다.


균여는 화엄의 초기 종장들인 지엄과 의상 법장의 주요 전적에 대해 10

종 65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이루어 신라 화엄에 대한 주석서인『법계

도원통기(法界圖圓通記)』와『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 그리고 중국

화엄의 대성자인 법장의 저술에 대한 주석서들인『교분기원통초(敎分記圓

通鈔)』『지귀장원통초(旨歸章圓通鈔)』『삼보장원통기(三寶章圓通記)』등을

남겼다. 균여는 이들 저술에서 지엄과 의상 법장의 견해를 인용하며 자신

의 입론 기초로 삼았다.


균여의 화엄사상은 신라 화엄의 전통을 의상의 화엄사상에서 확인하면

서 그에 부가하여 중국 법장의 화엄사상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균여는 전

체적인 내용 체계에서 법장의 해석을 따라 풀이하는 경우가 많지만 구체적

인 해석에 들어가면 법장의 해석과 아울러 다른 견해를 함께 제시하고, 이

를 바탕으로 자신의 견해를 개진하였다. 이는 신라 화엄의 저술에 대한 태

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것으로 균여는 이와 같은 독자적 사상 정립

을 바탕으로 고려 초기 사회에서 화엄의 위상 확립을 의도하였다.


균여는 화엄사상의 정리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향가 보현십원가(普賢十

願歌) 11수를 지어『화엄경』보현행원(普賢行願)의 실천을 대중에게 전파

하고자 하였다. 의상 이래 신라 화엄의 전통이 교학 연마보다 실천행을 중

시한 결과로 신라말의 교학 재정비가 필요하게 되었고 이는 균여에 의해

실현되었다. 균여는 동시에 실천행에 대한 관심을 보현행의 추구로 나타내

보였다. 이처럼 균여의 화엄사상은 초기 화엄교학의 기본 성격인 성상융회

(性相融會)에 중심을 둔 것으로 이론면에서 약점을 보였던 신라 화엄학의

한계를 보완하면서 그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었다.(최병헌, 1980)


균여 화엄사상의 특징은 교판론에서 드러나는데 균여는『화엄경』만이

가장 높은 가르침인 원교(圓敎)이고 나머지는 그보다 낮은 하사교(下四敎)

에 해당한다는 독자적인 별교일승절대론(別敎一乘絶對論)과 함께『화엄

경』이 점교에 해당하는 다른 경전과 구분되는 우월성을 갖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돈원일승론(頓圓一乘論)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교판론을 통

해 균여는『화엄경』과 화엄사상의 정당성과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화엄사

상에 모든 법이 포섭될 수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신라 하대 이후 크게 위축

된 화엄종의 위상 강화를 의도하였다. 아울러 균여는 화엄사상의 핵심을

십현과 육상으로 설명하고 이를 체득하는 수행으로 자신의 몸을 분석함으

로써 이해할 수 있다는 관법을 강조하였다.(최연식, 1999) 균여가 돈원일승

을 강조한 것은 원교와 하사교라는 이분법에 기초하면서 동시에 근기론적

동교론(同敎論)을 전개함으로써 모든 근기를 화엄의 세계로 진입시키려

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균여의 이러한 의식은 법장과 징관 등 중국의 조직

화된 화엄 이론을 활용하여『도신장』과 같은 의상계 신라 화엄의 구제지향

적인 사상 전통을 계승한 데서 성립된 것이었다. 도신과 징관의 영향을 받

아 도입한『법화경』의 인식으로 균여는 의상계 근기론과 구별되는 논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중하근의 중생까지 포함하는 다수의 종교를 구축하려한

균여의 화엄학은 향가를 지어 중생을 제도하였던 행동과도 통하는 것이었

다.(김천학,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