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법승의 기록/왕오천축국전

세계로 열린 길- 왕오천축국전 설명

실론섬 2016. 12. 9. 14:00

1. 세계로 열린 길- 왕오천축국전

 

1) 돈황문서와 왕오천축국전의 발견

 

지금부터 1300년 전의 먼 옛날에 저 멀리 인도를 여행하고 여행기를 남

긴 신라인이 있다. 일찍이 세계화의 문을 열고 넓은 마음으로 문화를 받아

들인 그는 혜초(慧超)였다. 그가 남긴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

傳)』이다.

 

광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지대의 오른쪽 끝이자 중국의 서쪽 변방에 오아

시스 도시 돈황(敦煌)이 있다. 돈황은 중국 문물이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첫걸음이자 서양 문물이 중국으로 들어오는 첫 관문으로 비단길의 길목이

었다. 돈황의 명사산(鳴沙山) 막고굴(莫高窟)은 남북조시대부터 수당을 거

쳐 원대까지 불상과 불화로 가득찬 수많은 석굴(石窟)이 있어 흔히 천불동

(千佛洞)으로 불린다.

 

1900년 봄에 천불동을 관리하던 도사 왕원록(王圓籙)은 석굴을 수리하

다 벽 너머의 새로운 굴을 찾아냈다. 진흙으로 바른 문을 열고 보니 가로

2.8m 세로 2.7m에 높이 3m되는 작은 방 안에 보자기에 싼 더미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돈황 제16동 내벽에 만들어진 작은 방 제17동 장경동(藏經洞)

의 발견이었다.

 

이 안에 들어 있던 엄청난 양의 사본(寫本)과 서화들은 알아보는 이 없

어 외면되다가 중앙아시아 침탈에 혈안이 되어 있던 서구 열강의 눈에 띄

어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1905년 러시아의 오브루체프(Obruchev)에 이어

1907년에 본격적으로 영국의 스타인(Stein)과 프랑스의 펠리오(Pelliot)가

수천 권의 방대한 사경과 회화 등을 본국으로 실어갔다. 

 

동양 문물에 정통한 동양학자였던 펠리오가 1909년에 북경에 가서 이 돈

황 사본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돈황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문화의 보고

(寶庫)가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불교 도교 유교의 사상과 지리 언어 그리

고 조각과 회화 공예 등 문화 전 방면에 걸친 돈황학(敦煌學)이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청나라는 1910년에 남은 돈황 문서 5, 6천 권을 북경

으로 가져갔고 1912년에는 일본 오타니(大谷光瑞) 탐험대가 5백여 권의 문

서를 가져갔다. 이렇게 하여 돈황의 소중한 문화재는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 수많은 돈황 사본 중에 동양 문물에 밝았던 펠리오가 찾아낸 것이

『왕오천축국전』이었다. 왕오천축국전 사본(寫本)은 한 권의 두루마리로 되

어 있다. 앞뒤가 떨어져나가고 현재 남은 것은 1행이 30자 남짓한 모두 227

행으로 된 기록이다. 세로 28.5cm에 한 장의 길이가 42cm되는 종이 9장을

붙여서 현재 남은 총 길이는 358.6cm가 된다.1)
1) 桑山正進,『慧超往五天竺國傳硏究』, 1992,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p.1

처음과 끝이 완전하지 않아 이름도 모르는 이 사본을 조사한 펠리오는

혜림(慧琳)의『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같은 어구가 있음을 확인하여

『왕오천축국전』의 실체를 밝혀냈다. 이후 『왕오천축국전』은 당대 중국의

석학이던 루오전유(羅振玉)에 의해 그 의의가 평가되어『돈황석실유서(敦

煌石室遺書)』에 실리게 되었고, 이어 일본의 다카쿠스 준지로(高楠順次郞)

에 의해『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에 실려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

게 되었다. 그리고 후지타 도요하치(藤田豊八)와 푹스(Fuchs)와 같은 일본

과 유럽 학자들에 의해 내용이 분석 연구되어 그 가치가 더욱 드러나게 되

었다.2)
2) 高柄翊,「慧超往五天竺國傳硏究史略」『白性郁博士頌壽記念 佛敎學論文集』,
   1959, pp.302~307

 

혜초(慧超)는『일체경음의』에서처럼 혜초(惠超)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혜초가 신라인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불공이 남긴 유서에 그의 법을 전승할

뛰어난 제자 6인을 꼽는 데서 ‘신라혜초(新羅慧超)’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이

와 함께 사본의 내용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일반적인 한문 문법에 어긋나는

구절이 보인다든가, 글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자주 눈에 뜨인다든

가 하는 것도 신라인인 혜초의 기술을 확인해주는 방증으로 지적된다.3)
3) 高田時雄,「慧超往五天竺國傳の言語と敦煌寫本の性格」『慧超往五天竺國傳硏
   究』, 1992, pp.205~209

 

삼국의 승려들은 일찍부터 중국에 가서 불법을 익혀 본국의 불교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남북조시대에 16명에 지나지 않던 중국 유학 구도승(求道

僧)은 수당시대(589~907)에 들면 185명에 이를 정도로 많아진다. 그중 7세

기에 43명, 8세기에 41명, 그리고 선종이 왕성해진 9세기에는 98명이 중국

에 가서 불법을 익혀 본국의 불교 이해와 발전에 앞장섰다.4)
4) 陳景富,『中韓佛敎關係一千年』, 北京:宗敎文化出版社, 1999, pp.22~23

 

이러한 구도열은 중국 땅에 그치지 않고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까지 이어

졌다. 6세기에 2명이었던 인도 구법승은 7세기에는 9명 그리고 8세기에는

4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15명의 인도 구법승들 중에 여행지 인도에서 혹은

왕래하던 여행길에서 객사한 이가 10명이나 되고 중국에 돌아온 이가 3명,

그리고 고국 신라에 돌아간 이는 불과 2명에 지나지 않는다.5) 이처럼 목숨

을 내건 구법 여행으로 이들 구도승들은 신라불교에 생동감과 활력을 불어

넣었다.

5) 謙益, 義信/ 阿離耶跋摩, 慧業, 求本, 玄太, 玄恪, 慧輪, 玄遊, 미상 2인(義淨,『大唐
   西域求法高僧傳』 ; 覺訓,『海東高僧傳』)/ 慧超, 無漏, 元表, 悟眞. 陳景富, 위의 책,
   pp.44~54 참조

 

혜초는 밀교를 공부한 승려였는데, 인도 후기밀교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

하던 선무외(善無畏)는 716년에 장안에 들어왔고 금강지(金剛智)는 719년

에 광동에 도착해서 720년에 낙양에 이르러 전법활동을 펼쳤다. 당시 밀교

가 성행하던 인도 불교를 직접 순력한 혜초는 구법여행 후에 중국에서 밀

교를 펴고 있던 금강지와 불공(不空)에게 차례로 제자가 되어 밀교의 고승

이 되었다. 스승에게서 배움과 동시에 자신이 익힌 범어 실력으로 스승과

함께『만수실리천비천발경(曼殊室利千臂千鉢經)』등의 경전을 번역하는

데 참가하였고, 그 뜻을 8년 동안이나 익혔지만 그것도 모자라 무려 48여

년이나 그 탐구에 매달렸던 열렬한 구도자였다.6)
6) 정병삼,「慧超의 활동과 8세기 신라밀교」『한국고대사연구』37, 2005, p.162

 

2) 밀교 고승 혜초의 생애

 

신라 출신 혜초는 일찍이 당에 건너가서 구도에 열중하였다. 700년경에

태어나 780년대에 생을 마친 것으로 추측될 뿐 그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확

실한 자료가 없다. 혜초는 780년대까지 산 것으로 보아 20대의 젊은 나이

에 치열한 구도정신으로 인도 구법 여행을 이루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곧

혜초는 723년경에 중국 광주(廣州)를 떠나 바닷길로 수마트라를 거쳐 인도

동해안에 상륙하여 인도 각 지역의 유적을 순방하고, 육로로 서역을 거쳐

728년경에 당의 수도 장안에 돌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혜초는 인도 순력 후 5년쯤이 지난 733년에 장안의 천복사에서 금강지에

게 밀교 교법을 배워 칙명으로 시행된 범본 번역의 필수(筆受)를 맡을 만

큼 핵심적인 활동을 하였다. 인도 순력 여정에서 익힌 범어 구사와 밀교 교

학 연마로 익힌 능력이 인정된 결과였을 것이다.

 

이후 774년까지 30여 년 동안 혜초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없다. 

774년에 내도량(內道場) 사문으로 활동한 것을 고려하면 지속적인 밀교 수

행에 전념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774년 2월에 내도량 사문으로 활동하던 혜초는 성지 옥녀담(玉女潭)에

서 기우제를 주관하고「하옥녀담기우표(賀玉女潭祈雨表)」를 지어 황제에

게 올렸다.7) 옥녀담은 서안 서쪽 80km 지점의 주질현(盩厔縣, 지금의 섬서

성陝西省 주지현周至縣) 선유사(仙遊寺) 앞에 있었는데, 당시 혜초와 비슷

한 활동을 하였던 밀교승 담정(曇貞)도 선유사에 주석하며 이곳에서 기우

제를 올렸다. 선유사는 수 문제 때 세운 절로 601년에는 인수탑(仁壽塔)이

건립되었다. 그 후 당 현종 725년에 중건되었으나 원터가 댐을 만들면서 수

몰되어 1998년에 인근으로 이건하였다. 이때 탑에서「선유사사리탑명(仙

遊寺舍利塔銘)」기록과 진신사리가 출토되었다.8)

7) 慧超,「賀玉女潭祈雨表一首」(幷答)『代宗朝贈司空大辨正廣智三藏和上表制集』

   권5, 大52 p.855a

8) 趙克禮,『陝西古塔硏究』, 北京:科學出版社, 2007, pp.163~164

 

혜초는 칙령을 받아 옥녀담에 가서 제단을 시설하고 기도하였는데, 계

곡에서 소리가 나서 사리를 던졌더니 실낱 같은 빗줄기가 내려 하룻밤 새

에 초목이 빛나고 다음날 개울물이 넘쳐흘러 메마른 대지를 윤택하게 하였

다 한다. 이런 기도 감응을 두고 혜초는 자신의 정성이 아니라 황제의 덕이

하늘을 움직인 것이라며 비가 내리게 됨을 하례하는 표를 올렸다. 이를 기

뻐한 황제도 혜초에게 답글을 보냈다. 이 사실은 혜초가 내도량사문으로서

국가적인 행사의 주역을 맡았던 사정을 말해준다.9)
9) 정병삼, 앞의 글, 2005, pp.163~174

 

774년 10월에 혜초는 대흥선사에서 불공에게 다시「만수실리천비천발

경」의 내용을 묻고 정리하였다. 혜초는 이 경의 서문을 썼는데, 이 내용은

이 경에 대한 해제 내용과 거의 같아 혜초가 핵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불공이 금강지의 제자였기 때문에 혜초와는 동문이 되며, 출생

년도 720년대 전반에 인도 구법행을 나섰던 혜초가 705년 출생의 불공보다

빠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혜초는 밀교 조사 상승 관계에서 불공의 제

자로 전승되었다. 불공이 자신을 계승할 제자를 부촉하는 유서(遺書)에서

그의 뛰어난 제자 6인을 거명하였는데, 여기에 ‘신라혜초’를 명기하였다.10)

10) 不空,「三藏和上遺書一首」『代宗朝司空大辨正廣智三藏和上表制集』권3, 大52

    p.844b. 

 

불공의 제자로 혜초와 함께 거명된 이들은 모두 밀교 대가들이다. 두 번

째로 거명된 혜초의 다음에 니오는 혜과(慧果)는 중국 밀교를 집대성한 조

사이다. 이들 중국 밀교 조사들과 나란히 거명된 혜초는 당시 밀교 승려로

서 확고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불공이 774년에 입적하기 전에 자

신이 믿는 21인의 밀교 고승들에게 나라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는 데서도 

혜초는 두 번째로 등장한다.11)

11) 不空,「請於興善當院兩道場各置持誦僧制一首」『代宗朝贈司空大辨正廣智三藏

    和上表制集』권4, 大52 p.845b.

 

80을 넘은 고령으로 추정되는 780년에 혜초는 오대산(五臺山)에 입산하

여 수행에 들어갔다. 오대산은 불공이 오랫동안 체류하며 밀교 도량으로

정립한 곳이고 동문들이 이어 주석하며 밀교를 펴던 성지였다. 나이로 보

아 혜초는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왕오천축국전의 구성과 기행 경로

 

현존하는『왕오천축국전』사본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 본래는 3권 분량이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펠리오가 이『왕오천축국전』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

인 역할을 하였던 혜림의『일체경음의』에는 ‘혜초왕오천축국전(慧超往五天

竺國傳)’을 상·중·하 3권으로 나누어 주요 어귀를 설명하고 있다.12) 이 내

용과 비교하면 현존하는『왕오천축국전』사본은 중·하권에 해당한다.

12) 慧琳,『一切經音義』권100, 大54 pp.726c~927c

 

그러나 계속 이어져 있는 현존 사본 중에는 보이지 않는 어귀가『일체경

음의』에 여러 차례 나온다. 이를 토대로 류오전유가 현존하는 사본은 3권

으로 된 본래『왕오천축국전』을 1권으로 줄여 만든 절략본(節略本)이라고

추정한 이래 많은 연구자들이 이 견해를 따르고 있다.13) 이와는 달리 이 사

본이 원래의 초고본(草稿本)이고 혜초는 이를 토대로 3권으로 된 책으로

정리하였으며, 혜림은 이 3권본 정본을 대상으로 음의를 집성하였다는 주

장도 있다.14) 또 현존 사본이 3권으로 된 원본의 절략본이 아니라 권을 나

누지 않은 원본을 그대로 필사한 사록본(寫錄本)이라는 견해도 있다.15)

런데『일체경음의』의 어귀 수록 순서와 현존 사본에 나오는 어귀의 순서가

일치하지 않고, 사본에 안서대사 ‘조군(趙君)’으로만 나오는 것이『음의』에

는 그 이름인 ‘이정(頤貞)’이 실린 것 등은 현존 사본에 없는 구절들이 3권

본에는 수록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13) 정수일,『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48~49 ; 57~64
14) 高田時雄, 앞의 글, pp.207~209. 만약 절략본이라면 완본의 표현을 그대로 옮겼
    을 것이므로 같은 단어를 표기하는 데 필사본과 음의가 다를 이유가 없으며, 초
    고본을 완본으로 증보 윤색하였기에 이런 기술 차이가 생겼다고 본다.
15) 大谷勝眞,「慧超往五天竺國傳の一二に就いて」『小田先生頌壽記念朝鮮論集』,
    1934, pp.143~160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현존 사본이 여행의 일정에 따라 간략하게 기

술한 초본이고, 이를 토대로 다시 구체적인 사실을 서술한 3권본의『왕오

천축국전』이 이루어졌다는 추정이 더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사

본의 내용이 불교적 내용보다는 각 나라의 형세와 풍습을 간략하게 요점

식으로 서술하였고, 그런 가운데서도 찬자가 현장에서 느꼈던 감흥을 기

술한 시가 5수나 남아 있는 것 등이 현존 사본이 초본일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16)『왕오천축국전』의 구성을 보더라도 오천축에 대한 서술이 일관되

지 않고 오천축 전반에 대한 서술이 곳곳에 나뉘어 있어 아직 조직화되지

않은 것도 이런 추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3권본 완본이

아닌 이 초본이 필사되어 돈황문서에 포함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17) 현재

사본에는 필사하면서 글자 순서가 뒤바뀌어 수정표시를 한 곳이 10군데 있

고, 고치거나 삽입 중복된 곳도 있다.18)
16) 정병삼,「慧超와 8세기 신라불교」『世界精神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慧超』, 가
    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p.24
17) 이를 절략본으로 본다 하더라도 왜 완본 외에 따로 절략본을 만들어 필사 보관
    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는 마찬가지로 알 수 없다.
18) 수정표시를 한 10곳은 23, 48, 52, 72, 93, 122, 147, 148, 167, 170행에 있다. 수정
    자 9곳은 20, 44, 52, 58, 122, 138, 173, 191, 210행에, 삽입 4곳은 44행과 54행 그
    리고 195행에 2군데 있으며, 중복 2곳은 96행과 156행에 있다. 

 

완전하지 않은 현존 사본의 본래 모습을 추정하는 데는『일체경음의』가

많은 도움이 된다. 이 책은『왕오천축국전』에 대해 상권 39항목, 중권 18항

목, 하권 28항목의 모두 85항목의 어귀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중에서『일체

경음의』의 중권 중간 부분인 ‘피라닐사(彼羅痆斯)’ 항목이 현존 사본의 10

행에 나오는 것을 시작으로 중권의 4항목이 나오며, 하권에서는 사본 103

행에 나오는 ‘사파자(娑播慈)’와 130행에 나오는 ‘위오야차(餧五夜叉)’를

비롯하여 220행의 ‘명운(明惲)’ 항목까지 14항목이 보여 전체로는 18개 항

목이 나온다.19) 상호 대조가 가능한 ‘피라닐사’에서 ‘명운’까지의 부분만을 

비교해보면『일체경음의』의 34개 항목 중에서 18개 항목만 사본에 보이고

나머지 16개 항목은 보이지 않는다. 이는『일체경음의』가 대상으로 했던 3

권본이 현존 사본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현존 사본의 앞부분이 많게는 절반쯤 떨어져 나갔지만

뒷부분은 거의 남은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20) 현존 사본이 3권본의

중권 후반부터 하권 후반까지 남아 있다면 원책의 전체 분량은 적어도 지

금보다 두 배 이상 많았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 중권- 彼羅痆斯(10행-음의에는 波羅痆斯) 土鍋(28행-음의에는 土堝) 毛毯(89행-
    음의에는 一毯)毛褐(108행)
    하권- 娑播慈(103행-음의에는 婆簸慈) 氈帳(106행-음의에는 氈裝) 猫牛(107행-
    음의에는 犛牛) 蟣虱(111행-음의에는 牙囓蟣蝨) 餧五夜叉(130행) 謝䫻(147행) 匙
    筯(171행-음의에는 匙箸) 胡蜜(193행-음의에는 胡篾) 峭嶷(195행) 擘地烈(196행-
    음의에는 擘地裂) 爆布(19행-음의에는 瀑布) 播蜜(209행-음의에는 播蔑) 伽師祇
    離(212행-음의에는 迦師佶黎)明惲(220행)
    음의 중권에 수록된 어휘가 사본에는 彼羅痆斯(10행), 土鍋(28행), 毛毯(89행),
    毛褐(108행) 순서이나, 음의는 波羅痆斯, 一毯, 毛褐, 土堝로 순서가 다르다. 하
    권 수록 어휘도 氈帳은 謝䫻과 匙箸 사이에 실려 있고, 播蔑은 胡篾과 峭嶷 사이
    에 실려 있어 다르다. 또 음의 권상에 參差가 수록되어 있는데, 순서는 많이 다
    르지만 사본 20행에 나온다. 高田時雄은 사본의 憔杌(114행)이 음의 하권의 磽
    磕와 뜻이 통한다고 본다.(앞의 글, p.206) 적극적으로 보면 모두 20항목이 일치
    한다고 할 수 있다.
20) 앞부분이 많게는 절반쯤까지 떨어져 나갔다는 추정은『일체경음의』에 수록된
    어귀가 중권 중간 부분부터 시작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각 권마다 일정
    한 비율로 어귀를 추출한 것이 아니고, 남아 있는 인도와 서역의 여정이 더 중요
    하고 많은 나라를 거치기 때문에 실제 분량이 그렇지는 않을 것이나 대강 추정
    하자면 그런 예상도 가능할 것이다.

 

혜초는 해로를 통해 인도를 돌아보고 서역지방을 거쳐 당에 돌아왔다.

『왕오천축국전』이 안서도호부가 있던 구자국에서 끝나는 것으로 보아 돌

아온 길이 육로였다는 것은 확실한 반면 갔던 길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

나 현존 사본의 시작 부분이 동인도 지방에서 시작하고 있고, 현존하지 않

는 부분 곧『일체경음의』에서 상권으로 분류한 부분의 어귀들이 ‘대모(玳

瑁)’·‘구별(龜鼈)’·‘원타(黿鼉)’ 등과 같은 해안 도서지방의 특산물이나 지

세와 주거 상황 등 해양에 관련된 것들이 많은 것은 간 길이 해로였음을 말

해주는 뚜렷한 증거이다. 펠리오는 일찍이『일체경음의』의 이와 같은 어귀

에 기초하여『왕오천축국전』이 중국에서 남해를 거쳐 인도를 돌아보고 투

르키스탄을 거쳐 중국으로 돌아온 기록이라고 추정하였다.21)

21) 高柄翊, 앞의 글, p.303

 

혜초의 인도와 서역 구법 행로는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혜초는 당나라 남방의 광주(廣州)에서 배를 타고 인도를 향해 떠난 것으

로 생각된다.22) 계절풍을 이용한 항해였기 때문에 대체로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출항하여 한 달이면 수마트라에 도착하였다. 구법승들은 현재의 팔

렘방(Palembang)이나 잠비(Djambi)로 추정되는 수마트라(Sumatra, 실리불

서室利佛逝) 지역에서 일정 기간 체류하며 열대 기후도 익히고 현지어와

산스크리트어도 배웠다. 혜초 역시 당시 구법승들의 예에 따라 이곳을 거

쳐 콜카타 인근 서남방의 탐라립티(Tamlalipti, 탐라립저耽羅立底, 지금의 탐

룩Tamluk)를 통해 인도에 상륙한 것으로 추정된다.23)
22) 의정(義淨)의『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는 65명중 40명이
    해로를 통해 인도에 간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당시 육로보다 해로를 선호했던
    구법승들의 경향을 알 수 있다.
23) 高柄翊,「慧超의 印度往路에 대한 考察」『佛敎와 諸科學』 東國大學校開校八十
    周年紀念論叢, 1987, pp.873~887

 

혜초는 동인도를 지나 먼저 강가(Gangā, 恒河)강과 야무나(Yamuna)강 일

대의 불적을 순례하였다.24) 가장 중요한 불적이 있는 마가다(Magadha, 마

게타摩揭陀) 지방을 이때 순례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남은 기록 중에 맨

먼저 나오는 부분은 바이샬리(Vaiśalī, 비야리毗耶離)에 대한 서술로 생각된

다. 이어 쿠쉬나가라(Kuśinagara, 구시나拘尸那)에서 바라나시(Vārānāsī, 피

라닐사彼羅痆斯)를 거쳐 2개월 걸려 중천축국의 왕성인 카나우지(Kanauj,

갈나급자葛那及自)에 도착하여 유적을 순례한 것이 724년경이었다. 중천축

에서 3개월 걸려 남천축국(지금의 나시크Nasik)을 순례하고, 여기서 2개월 

가서 아랍의 침입을 받고 있던 서천축국(신드Sindh)을 순례하였다.

24) 현재 남은 사본 중에서 바라나시와 중천축의 서술에서 슈라바스티, 카필라, 바
    이샬리, 상카시야의 4대탑을 보았다고 하였고, 마가다 4대 영탑으로 녹야원, 쿠
    쉬나가라, 왕사성, 마하보리사를 들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현존하는 확실한 첫
    부분인 쿠쉬나가라에 앞서 슈라바스티, 카필라, 바이샬리, 왕사성과 마가다 일
    대 유적에 대한 서술이 있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추정에 따르면 탐라
    립티의 동천축으로 상륙하여 왕사성 일대(부다가야, 날란다 포함)→바이샬리→
    카필라→슈라바스티→쿠쉬나가라→바라나시에 이르렀다는 여정이 그려진다.
    일반적인 여정은 왕사성에서 바이샬리를 거쳐 쿠쉬나가라로 가므로, 여기서 추
    정한 것과 같이 쿠쉬나가라 등 북쪽 유적지를 보고 나서 바이샬리로 다시 와서
    바라나시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여기서 3개월이 걸려 펀자브지방의 북천축국 잘란다라(Jālandhara, 사란

달라闍蘭達羅)에 이르고, 여기서 수바르나고트라(Suvarnagotra, 소발나구달

라蘇跋那具怛羅, 티베트)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다시 1개월이 걸려 탁샤

르(Takshar, 타사吒社, 지금의 파키스탄 시알코트Sialkot)를 지나고 또 1개월

만에 신드구자라트(Sindh-Gujārat, 신두고라新頭故羅, 지금의 펀치Punch)를

지나, 여기서 보름만에 카슈미르(Kashmir, 가섭미라迦葉彌羅)지방에 들어

갔다. 이곳 카슈미르에서 티베트(Tibet, 토번吐蕃)와 그 관할 하에 있던 대

발로르국(Balor Major, 대발률국大勃律國, 지금의 Baltistan), 양동(楊同, 지금

의 카슈미르 동남부와 서티베트), 사파자(娑播慈, 지금의 카슈미르 중부 라다

크Ladakh)의 소식을 듣고 나서 7일이 걸려 당의 통제를 받던 소발로르국

(Balor Minor, 소발률小勃律, 지금의 길기트Gilgit)에 갔다.

 

다시 카슈미르에서 산을 넘어 1개월 만에 간다라(Gandhāra, 건타라建馱

羅, 지금의 페샤와르Peshawar)에 이르니 725년 가을부터 726년 봄에 걸친 때

였다.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3일을 가서 우디야나(Uddiyāna, 오장烏長, 지금

의 스와트Swat)에 가고, 또 간다라에서 15일 걸리는 쿠위(Kuwi, 구위拘衛, 지

금의 치트랄Chitral)에 이르고, 다시 간다라에서 서쪽으로 7일을 가서 람파

카(Lampāka, 남파覽波,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라그만Laghman)에 이르렀다.

람파카에서 8일만에 카피시(Kāpiśī, 계빈罽賓, 지금의 카불Kabul)에 이르고,

여기서 7일을 가서 자불리스탄(Zābulistān, 사율謝䫻, 지금의 가즈니Ghazni)

을 거쳐 다시 7일을 가서 바미얀(Bāmiyān, 범인犯引)에 이르렀다. 여기서 20

일을 더 가서 토하라(Tokhara, 토화라吐火羅)의 발흐(Balkh)에 들어간 것은

726년에서 727년초까지의 겨울이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1개월 가서 페르시아(Persia, 파사波斯, 지금의 이란 파

르스Fars주 쉬라즈Shiraz 일대)에 이르고, 다시 북쪽으로 10일을 가서 아랍

(Arab, 대식大寔, 지금의 이라크 남부 쿠파Kufa 일대)에 이르렀다.25) 여기서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 대불림大拂臨)의 이야기를 듣고, 아랍 동쪽

에 있던 소그드(Sogd)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호국(胡

國)이라는 이름으로 전하였다. 그 호국 여섯 나라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있던 부하라(Bukhara, 안국安國), 카부단(Kabudhan, 조국曹國), 키쉬

(Kish, 사국史國), 타쉬켄트(Tashkent, 석나국石騾國), 펜지켄트(Penjikent, 미

국米國), 사마르칸드(Samarqand, 강국康國)였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우즈

베키스탄의 페르가나(Ferghāna, 발하나跋賀那), 타지키스탄의 쿠탈(Khuttal,

골돌骨咄, 지금의 카틀론Khatlon)과 투르크(Turk, 돌궐突厥, 지금의 카자흐

스탄 일대)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토하라에서 동쪽으로 7일을 나아

가 파키스탄의 와한(Wakhan, 호밀胡蜜)의 서울인 이슈카심(Ishkāsim)에 이

르고, 여기서 북쪽에 있는 타지키스탄의 아홉 쉬그난(Shighnān, 식닉識匿)

의 소식을 전해 듣고, 와한에서 보름을 더 가서 중국 영역인 타슈쿠르간

(Tashukurghan, 갈반단渴飯檀 ; 총령진蔥嶺鎭, 지금의 타시쿠르간塔什庫爾干)

에 이르렀다.

25) 이 페르시아와 아랍 지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당시 페르시아는 651년에 아
    랍에게 멸망하였고, 옛 페르시아 지역은 파르스 호라산 등 여러 지역으로 나뉘
    어 총독이 파견되어 다스렸다. 토하라의 중심지 발흐 역시 호라산 지역에 속한
    다. 토하라에서 ‘서쪽으로 1개월’ 간다는 혜초의 기술을 ‘서남쪽으로 2개월’로
    바꾸면 페르시아의 중심지였던 파르스 지방에 닿게 된다. 다시 여기서 ‘북쪽으
    로 10일’ 간다는 혜초의 기술을 ‘서북쪽으로 20일’로 바꾸면 7세기 중반에 아랍
    의 중심지였던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쿠파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혜초가 갔던
    페르시아나 아랍 지역을 이란 동부의 호라산 치하 니샤푸르(Nishapur)로 보는
    견해도 있다.(정수일, 앞의 책. p.99에서는 아랍 순례지의 서쪽 끝으로 니샤푸르를,
    p.343에서는 페르시아를 니샤푸르로 추정하였다.) 이 추정은 혜초가 기술한 일정
    과 차이가 나는 문제가 있지만, 아랍에 이어 비잔틴제국을 기술한 것을 보더라
    도 아랍 서술의 중심을 아랍 중요 지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타슈쿠르간에서 1개월을 더 가서 안서(安西) 4진의 하나인 카슈가르

(Kashgar, 소륵踈勒, 지금의 카시喀什)에 이르고 다시 1개월을 더 가서 안서

도호부가 있는 쿠차(Kucha, 구자龜玆, 지금의 쿠처庫車)에 이른 것이 727년

11월이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타클라마칸 사막 너머에 있는 호탄(Khotan,

우전于闐, 지금의 허톈和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쿠차에서 1개월을 가서 카

라샤르(Kharashar, 언기焉耆, 지금의 옌지)에 이르렀다.26)『왕오천축국전』

의 현존 사본은 여기서 끝난다. 그런데 『일체경음의』에 이어 나오는 ‘성국

(姓麴)’이 바로 고창(高昌)의 왕성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혜초의 귀로는 카

슈가르에서 쿠차와 카라샤르로 서역북도를 따라 와서 고창과 돈황을 거쳐

728년 경에 장안으로 돌아온 것으로 추측된다.

26) 여정은 추정된 당시 국명을 앞에 표기하고 그에 대한 혜초의 한자 표기와 현재
    의 지명을 덧붙였다. 당시 국가의 비정은 여러 연구 성과를 종합한 것인데, 구
    와야마 쇼신(桑山正進)의 견해가 큰 도움이 된다(桑山正進,『慧超往五天竺國傳硏
    究』, 1992, pp.4~10).

 

이런 여정을 정리하면 혜초는 언급한 36개 지역 중에서 26개 지역을 직

접 순례하였고, 수바르나고트라, 대발로르국·양동국·사파자국, 티베트,

비잔틴제국, 호국, 페르가나, 쿠탈, 투르크, 쉬그난, 호탄의 10개 지역의 이

야기는 전해 들은 것으로 생각된다.27)
27) 이에 더하여 페르시아, 아라비아 그리고 남천축과 서천축의 서술도 전해 들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桑山正進, 위의 책, p.4)

 

혜초의 역정 중에서 서쪽으로 어디까지 순력했느냐에 대해 이견이 많다.

일정이나 여행 목적 등에 비추어 페르시아나 아라비아에까지 가지는 않았

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러나 이에 대한 기술이 혜초가 직접 순례

했던 지역에 대한 서술 방식과 같고 기술 내용이 정확하며 아랍에 대한 인식

이 정확하다는 점 등을 볼 때 혜초가 아랍 지역에 갔을 가능성이 더 크다.28)

28) 정수일, 앞의 책, pp.89~99. 김상영도 파사국과 대식국 그리고 호국 가운데 강국

    등 일부는 탐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慧超의 求法行路 檢討」『世界精神

    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慧超』, 1999, pp.46~48). 이때의 아랍은 호라산 총독부의

    서쪽 끝인 니샤푸르로 본다. 이 아랍 지역은 이라크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4) 왕오천축국전의 내용과 특성

 

‘왕오천축국전’이라는 이름은 오천축(五天竺) 곧 인도를 왕래한 기록이

라는 의미인데 당나라 때는 인도를 이렇게 오천축이라고 불렀다. 파미르

서북쪽의 3만리쯤 되는 지역을 다섯으로 나누어 중천축·동천축·남천축·

서천축·북천축으로 불렀다는 것을『당서』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29) 이런

당대의 인식에 따라 혜초는 오천축의 이름을 붙인 구법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사본은 실제 인도 오천축에 대한 기록은 삼분의 일

에 지나지 않고 서역 지방에 대한 기사가 더 많이 남아 있다. 떨어져 나간

앞부분에 일부 중천축과 동천축 기사가 있었다 하더라도 인도 이전의 동남

아 지방 기사가 있었던 것을『일체경음의』에 견주어 추정해보면 천축의 비

중은 더욱 줄어든다. 이런 점에서 법현의『불국기』는 물론 현장의『대당서

역기』와 같은 대표적인 구법기가 인도의 순례에 많은 비중을 두어 서술한

것과는 차이가 난다.30)
29)『舊唐書』권198 列傳 西戎-天竺 ;『新唐書』권221上 列傳 西域上-天竺.
30) 법현과 현장의 간략한 여정 비교와 의의는 나가사와 가즈도시(長澤和俊) 지음·
    이재성 옮김,『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0, pp.89~105 참조. 

 

동진의 법현(法顯)은 399년에 서역을 통해 육로로 인도에 가서 불적지를

돌아보고 공부한 후 412년에 해로로 당나라에 돌아왔다. 법현의 이 구법 여

정을 기록한『불국기(佛國記)』에 등장하는 지역은 중국 4개 지역, 서역 6개

국, 북천축 10개국, 중천축 14개 지역, 동천축 1개국, 그리고 스리랑카 등 2

개 지역을 합해 모두 37개 지역을 기록하였다.31) 당의 현장(玄奘)은 629년

에 육로로 서역을 통해 인도에 가서 645년에 다시 육로로 돌아오기까지 17

년 동안 각 지역을 순례하고 불법을 배웠다. 이를 기록한 가장 방대한 구법

여행기인『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서는 순력한 나라를 자신이 직접 5

인도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그중 중인도는 30개국, 동인도 6개국, 남인도

15개국, 서인도 10개국, 북인도 19개국이며, 중앙아시아와 기타 58개국을

합쳐 모두 138개국이 된다.32) 당의 오공(悟空)은 혜초보다 30년쯤 뒤인 750

년에 사행(使行)의 일원으로 안서로를 따라 인도에 갔는데, 총령을 넘어 호

밀·구위·남파·오장나·신도 등을 지나 간다라에 이르렀다. 인도에 가서

병을 얻어 그곳에서 출가하여 수행한 후 790년에 귀국하였는데,『오공입축

기(悟空入竺記)』에서 그의 여정과 순력 지역을 소략하게 기록하였다.33)
31) 法顯,『高僧法顯傳』(佛國記), 大51 pp.857~866
32) 玄奘,『大唐西域記』, 大51 pp.868~947
33) 圓照 集,『悟空入竺記』, 大51 pp.979b~981b

 

이런 구법여행기와 비교해보면『왕오천축국전』은 독자적인 특색이 있

다.『왕오천축국전』은 인도와 서역에 대한 8세기 전반의 유일한 견문기이

자,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온 특색 있는 구법기이다. 

 

현존하는 사본『왕오천축국전』은 모두 36개 지역의 이야기를 담고 있

다.34) 이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34) 이 36개 지역은 나라만은 아니다. 중국의 지역으로 분류되는 것도 있다. 또 한
    지역 안에 여러 나라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기도 한다. 따라서 이를 가지고 몇 나
    라의 기행기라고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글에서는 지역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나라’로 부르기로 한다. 혜초가 직접 간 지역과 전해 들은 지역은 기술 중
    의 “어디로부터 어느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어느 나라에 이른다(從---國 --行
    --日 至---國)”는 표현이 명확한 경우는 직접 간 곳으로 본다. 다만 페르시아와
    아랍을 어느 지역으로 보느냐에 따라 직접 갔다는 견해와 전해 들었다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원문의 기록                                                현재의 지역                                   거리                       분량                
1 (비야리성 毗耶離城 Vaiśalī)                인도 (바이샬리 Vaiśalī)                                                             3
2 구시나국 拘尸那國 Kuśinagara           인도 쿠쉬나가라Kuśinagara              1개월                              6
3 피라닐사국 彼羅痆斯國 Vārānasī       인도 바라나시 Vārānasī                     □일                                 7    
  마게타국 摩揭陁國 Magadha               보드 가야 Bodhgaya 등                                                            4 
4 중천축국 中天竺國                              인도 카나우지 Kanauj                       바라나시에서                 28
  갈나급자성 葛那及自城                                                                                 서쪽으로 2개월                    

5 남천축국 南天竺國 Chālukya              인도 나시크 Nasik                            중천축에서 남쪽으로       11
                                                                                                                             3개월                                  
6 서천국 西天國 Sindh                           파키스탄 신드 Sindh                         남천축에서 북쪽으로       7
                                                                                                                                2개월                              
7 북천국 北天國                                      인도 잘란다라                                  서천축에서 북쪽으로        6
  사란달라국 闍蘭達羅國                         Jālandhara                                                3개월                            
8 *소발나구달라 蘇跋那具怛羅               티베트 수바르나고트라                    동쪽으로 1개월                2 
                                                                   Suvarnagotra                                                                                 
9 타사국 吒社國 Takshar                        파키스탄 시알코트                            자란달라에서 서쪽으로   3 
                                                                        Sialkot                                         1개월                                      
10 신두고라국 新頭故羅國                      파키스탄 펀치 Punch                       탁샤르에서 서쪽으로       5+8
                                                                 SindhGujārat                                         1개월                                  
11 가섭미라국 迦葉彌羅國 Kaśmīra        인도 카슈미르                                   북쪽으로 15일               9+7
                                                                    Kashmir                                                                                         
12 *대발률국 大勃律國 양동국                인도 발티스탄 Baltistan                     카슈미르에서 동북으로      4
       楊同國 사파자국 娑播慈國                     라다크 Ladakh                                 15일      사포체 Sa spo rtse
13 *토번국 吐番國 Tibet                          티베트 시짱 西藏                                동쪽                                  6
14 소발률국 小勃律國 Balor Minor             파키스탄 길기트                            카슈미르에서 서북으로      5
                                                                         Gilgit                                                   7일                               
15 건타라국 建馱羅國 Gāndhāra              파키스탄 페샤와르                          카슈미르에서 서북으로      16
                                                                       Peshwar                                                       1개월                        
16 오장국 烏長國 Uddiyāna                       파키스탄 스와트 Swat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3일    4
17 구위국 拘衛國 Kuwi                           파키스탄 치트랄                                우디야나에서 동북으로        2
                                                                    Chitral                                               15일                                      
18 남파국 覽波國 Lampāka                     아프가니스탄 라그만                        간다라에서 서쪽으로           2
                                                                  Laghman                                                    7일                               
19 계빈국 罽賓國 Kāpiśī                           아프가니스탄 카불                          람파카에서 서쪽으로           8
                                                                       Kabul                                                      8일                               
20 사율국 謝䫻國 Zābulistān                   아프가니스탄 가즈니                        카피시에서 서쪽으로 7일     5
                                                                    Ghazni                                                                                         
21 범인국 犯引國 Bāmiyān                     아프가니스탄 바미얀                         자불리스탄에서 북쪽으로     5
                                                                    Bāmiyān                                                        7일                            
22 토화라국 吐火羅國 Tokhara               아프가니스탄 발흐                              바미얀에서 북쪽으로            6
                                                                     Balkh                                                           20일                            
23 파사국 波斯國 Persia                         이란 파르스 Fars                                 토하라에서 서쪽으로          6

                                                                                                                                           1개월                          
24 대식국 大寔國 Arab                            이라크 쿠파 Kufa                                페르시아에서 북쪽으로        6
                                                                                                                                          10일                           
25 *대불림국 大拂臨國                             터키 비잔틴제국                                소비잔틴 서쪽                      3
                                                                 Byzantine Empire                                                                               
26 *호국(胡國-安 曹 史                            (우즈베키스탄                                      아랍 동쪽                            7
     石騾 米 康)Sogd                                     Uzvekistan)                                                                                    
27 *발하나국 跋賀那國                            우즈베키스탄 파르고나                       사마르칸드 동쪽                  3
                                                                   Ferghāna                                              Farghona                             
28 *골돌국 骨咄國 Khuttal                       타지키스탄 카틀론                              페르가나 동쪽                     5
                                                                     Khatlon                                                                                                
29 *돌궐 突厥 Turq                                  (카자흐스탄                                         호국 북쪽                            4
                                                                  Kazakhstan)                                                                                       
30 호밀국 胡蜜國 Wakhan                     아프가니스탄 와한                              토하라에서 동쪽으로         10
                                                                     Wakhan                                                      7일                               
31 *식닉국 識匿國 Shighnān                  타지키스탄 쉬그난                               와한 북쪽 산                     6
                                                                     Shighnān                                                                                             
32 총령진 蔥嶺鎭                                   중국 타시쿠르간 塔什                         와한에서 동쪽으로 15일       3
                                                                  Tashukurghan(Pamir)                               庫爾干                            
33 소륵 踈勒 Kashgar                            중국 카시 喀什                                    중국 총령에서 1개월            2
34 구자국 龜玆國 Kucha                        중국 쿠처 庫車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2
                                                                                                                                     1개월                              
35 *우전국 于闐國 Khotan                     중국 허톈 和田                                    쿠차에서 남쪽으로 2천리     2+7                                         
36 언기국 焉耆國 Kharashar                  중국 옌지 焉耆                                   쿠차에서 동쪽으로 □              4                                            
* 표는 전해 들은 지역. 분량은 원본의 줄 숫자. 

 

현존 사본에 나타난 『왕오천축국전』의 서술은 어느 부분에서는 체계적

인 구성이 부족하다. 인도의 오천축 지역에 대한 서술은, 떨어져 나간 것으

로 추정되는 동천축을 제외한 중·남·서·북천축에 대한 서술이 있다. 그

러나 중천축국 왕성으로 소개한 카나우지 지역의 서술에서 중천축 영내에

있는 4대탑으로 슈라바스티·바이샬리·카필라·상카시야의 유적이 서술

되어 있고, 이보다 앞서 바라나시국에 이어서는 마가다국의 4대 영탑이 소

개되고 있다. 일반적인 분류에서 이들은 모두 중천축에 속한 지역들이다.

중요 불교 유적은 마가다에 가장 많은데 이를 따로 드러내지 않고35) 4대탑

만 소개한 것도 적절한 구성은 아니다. 북천축의 경우는 ‘북천축 잘란다라

국’만이 아니라 이어지는 탁샤르·신드구자라트·카슈미르도 북천축으로

보고 있다. 카슈미르 서술에서 “이 캬슈미르국 역시 북천축국에 속한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슈미르 다음에 오천축국의 일반적인 사찰

조성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또 신드구자라트국의

서술에서도 중간에 “이 나라를 비롯하여 오천축국의 사람들은” 이라는 서

술이 있고, 같은 신드구자라트국 서술에서 다시 “또 북천축국에 절이 하나

있는데” 라고 서술하고 있어 이 나라도 북천축국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

다. 오천축 일반에 대한 서술은 중천축국의 중간에 나오는데, 여기서는 의

복과 언어, 풍속, 법률, 형벌 등에 대한 전반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35) 저자가 5인도의 어디에 속한 것인지 명기한 『대당서역기』와는 달리『왕오천축
    국전』은 이런 구분을 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한 “따로 드러냈다”는 것은 ‘어디에
    서 얼마를 가면 어디에 이른다’는 형식에 따라 제시한 나라를 말한다. 

 

이렇게 보면 중천축과 북천축은 여러 나라를 소개하고, 남천축과 서천축

은 한 나라의 소개에 그친 것이 된다. 오천축 전체를 놓고 볼 때 불적이 많

은 중천축과 서역으로 통하는 불교 중심 지역인 북천축에 대해서는 여러

나라를 소개하고, 남천축과 서천축은 개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또 오천

축 전반에 걸친 내용을 이곳저곳에 나누어 서술하였다. 이는『왕오천축국

전』의 서술이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36) 바라나시

국 서술에서도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바라나시의 녹야원 초전법륜

처에 대한 서술에 이어 절 안에 봉안된 불상이 마가다국의 실라디티야왕이

만들었다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바로 이어 녹야원을 비롯한 4대 영탑이 마

가다국에 있다고 하고 이때 마하보디사에 이르렀다고 기술하였다. 이 서술

에서는 바라나시국과 마가다국이 구분되지 않는다. 물론『왕오천축국전』

의 모든 기술이 어떤 나라를 구분하여 기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순례한 나라는 “어느 나라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다시 어느

나라에 이른다”라고 기술하고 있어, 이를 기준으로 나라를 구분 지을 수 있

다. 이 책의 번역에서도 이에 따라 번호를 붙여 구분하였다. 

36) 이처럼 아직 체계화되지 않았다는 이해는 현존하는 필사본이 원본이 아니라 초
    고본 또는 절략본일 가능성을 더해준다.

 

『왕오천축국전』에서 소개한 여러 나라의 기술 내용은 위치와 정치 상황,

기후와 지형, 특산물과 생활 풍속, 불교 신앙 여부 등이다.37) 불교에 대해서

는 소승과 대승을 구분하여 신행 사정을 기술하였다. 36개 나라 중에서 소

승이 7개국, 대승이 4개국, 대소승을 겸한 나라가 10개국, 그냥 절과 승려가

있다고 기록한 것이 4개국, 불교가 없다고 한 것이 7개국이며 4국은 아무런

기록도 하지 않았다. 이에 따르면 인도 지역은 대체로 대소승이 함께 행해

지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대승보다 소승이 더 널리 행해지고 있었고,

중국 영향권에서는 대승만이 행해지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장이 1세기

전에 기록한 것과 차이가 있어 이 시기 인도와 서역의 불교계 변화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38) 전체적으로 보아 인도 지역은 힌두교의 교세가 확장되고

불교는 점차 약해지는 추세였고, 이에 비해 북인도와 서역 지방은 불교가

점차 성행하는 추세였다. 이처럼『왕오천축국전』은 전반적인 불교의 전파

와 유행의 변화상을 알려준다.

37) 『대당서역기』가 전반적인 국가 정황과 풍정 및 종교 상황 등을 개괄적으로, 그
    리고 불교와 관련된 유적이나 설화 등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한 반면『왕오천축
    국전』은 일반적인 정황에 대한 기술이 중인도를 제외하면 불적에 대한 기술보
    다 오히려 많다. 그리고 같은 나라의 서술이 두 기록이 상당히 다른 것도 다른
    시대적 배경과 관점의 차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검토의 대상이 된다.
38) 『대당서역기』에는 100개국 중 대승 25, 소승 60, 대소승 15국으로 기록하였다.
    서역(5:12:1), 북인도(9:7:1), 중인도(7:26:6), 동인도(1:2:0), 남인도
    (1:7:5), 서인도(2:7:2)로 나타나 북인도가 대승이 성한 반면 중인도나 남인도·
    서인도·서역은 소승이 성한 것으로 기록하였다(水谷眞成 역,『大唐西域記』, 東京:
    平凡社, 1971, pp.417~420)

 

『왕오천축국전』이 갖는 의의는 8세기 전반의 인도와 서역 상황을 생생

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혜초가 순력할 때의 인도는 하르샤바라다나왕조

의 패망 이후 분열의 시대였다. 6세기 중엽에 멸망한 굽타왕조에 이어 7세

기 전반에 하르샤바르다나(HarsaVardhana)왕조가 등장하여 수도 카나우지

(Kanauj)가 북인도의 정치 중심으로 성황을 누렸으나, 하르샤가 647년에 죽

은 후 왕위계승 분쟁이 일어나 여러 제후 세력이 독립하여 왕국은 붕괴되

었다. 이후 8세기 후반에 북인도 지방은 카나우지의 프라티하라(Pratihara)

와 벵갈의 팔라(Pala)와 데칸의 라쉬트라쿠타(Rashtrakuta)의 세 나라로 나

뉘어 경쟁하게 되므로, 7세기 후반과 8세기 전반에 북인도는 통일된 세력

이 없이 여러 나라가 분립해 있던 것으로 이해된다. 혜초가 ‘나라[國]’로 표

기한 여러 지역은 이런 상황을 보여주기에 적합하다. 중천축에서 서술한

재판 광경 같은 경우가 특히 현장감이 넘치는 예이다.

 

혜초가 기록한 아랍에 대한 사실도 그 의미가 크다. 당시 중동 지역

은 사산조 페르시아가 패망하고 아랍에 복속되었으며, 아랍은 우마이야

(Umawiyah) 왕조의 히샴왕(Hishām, 724~743) 시대로서 다마스커스 지역에

중심을 두고 여러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그 영역은 동쪽으

로 인더스강 유역과 중앙아시아 곧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까

지 이르렀음을 혜초의 서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혜초는 페르시아와 아

랍 지역을 순력하여 견문록을 남김으로써 동아시아 문명과 이슬람 문명 간

의 교류에 중요한 자취를 남긴 선구자적 역할을 수행하였다.39)
39) 정수일, 앞의 책, pp.91~100

 

지금 전하는 기록이 완본이 아니라는 점도 연관이 있겠지만 혜초의 서술

은 매우 사실적이다. 그 지방에 대한 사실을 감정을 섞지 않고 그대로 기술

할 뿐이다. 그러나 5수의 시는 여정에서 느낀 감회를 잘 표출하고 있다. 순

례 중 만났던 여러 난관 앞에서 구도자 혜초는 이런 장벽을 헤쳐 나가 순례

의 서원을 완성하고자 하였고, 그 생생한 감정을 진솔하게 시 속에 담아내

구도자의 정서가 담긴 훌륭한 서정시를 남겼다.40) 혜초의 기술은 객관적 

관찰과 주관적 정서를 엄격히 구분하였는데 이 두 부분은 여행기 전편에

걸쳐 완벽한 짜임새를 갖추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41) 산문에서는 자신의

경험보다 대상 지역의 제반 사항을 전반적으로 기술하는 데 치중하여 사실

적인 묘사가 적고 객관적인 기술에 충실한 반면, 시에서는 고향에 대한 그

리움이나 여정의 험난함을 걱정하는 정서적 표현과 개인적 체험을 잘 그려

냈다.

40) 林基中,「大唐西域記와 往五天竺國傳의 文學的 意味」『佛敎學報』 31, 1994, p.26
41) 이진오,「『往五天竺國傳』硏究의 글쓰기 방식과 저술의도」『고전산문 연구』1,
    1998, pp.183~194

 

혜초가『왕오천축국전』에 남긴 인도와 중앙아시아 지역의 문화에 대한

간략하지만 정확한 기록은 이 시기 연구의 중요한 사료이자 목숨을 내건

험난한 여정을 따뜻한 마음에 담아 생생하게 전하는 구법여행기이다. 『왕

오천축국전』은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8세기 전반의 유일한 견문기이

자 독특한 매력을 가진 문화유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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