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구법승의 기록/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

실론섬 2016. 12. 9. 15:50

往五天竺國傳 왕오천축국전

慧超 혜초

 

* 원문의 교감은 필사본을 위주로 하여 부분만 남은 글자를 복원하거나 의미상  추정하기도 하였고, 필사본에서 잘못 썼다고 생각되는 글자를 추정하기도 하였다. 한국불교전서의 대본은韓3 p.374b1~381a2.
교감 글자의 표시는 다음과 같다.
 [ ]:불완전한 글자를 복원한 글자나 필사하면서 잘못된 것을 알고 수정부호를  붙인 글자를 바로잡은 글자
 ( ):의미상 빠진 글자를 추정하거나 잘못된 글자를 바르게 추정한 글자
** 주석은 기존의 연구를 많이 참조하였다. 구와야마 쇼신(桑山正進)의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慧超往五天竺國傳硏究)』
(1992,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장이(張毅)의『왕오천축국전전석(往五天竺國傳箋釋)』(1994, 中華書局), 정수일의 『혜초의 왕오천축국전』(2004, 학고재) 등을 주로 참조하였다.

 

1. (바이샬리)1)


〈여기까지 윗부분 떨어져 나감〉2) 삼보를 ….

맨발의 벌거벗은 모습으로, 외도(外道)3)는 옷을 입지 않는다. 〈16자 정도 아래쪽 떨어져 나감〉

먹을 것을 보면 보자마자 먹어버리고 스님들에게 공양하지 않는다. 땅이 모두 평평하고 〈16자 정도 아래쪽 떨어져 나감〉

노비가 없으며, 사람을 팔려는 죄가 사람을 죽인 죄와 다르지 않다. 〈15자 정도 아래쪽 떨어져 나감〉

〈上缺〉
寶. 赤足裸形, 外道不着[衣]4)〈下缺〉[逢]5)食卽喫, 亦不齋也.
地皆平〈下缺〉. (無)6)有奴婢, 將賣人罪, 与煞人罪不殊〈下缺〉
1) 나라 이름을 들 때, 당시 지명이 비교적 분명한 것은 원음 그대로 표기하는 것을 우선하되, 

   원음이 분명하지 않거나 이설이 있는 경우에는 혜초가 표기한 한자어를 그대로 두었다.
2) 바이샬리는 슈라바스티일 가능성도 있다. 이 부분은 앞 부분이 떨어져 나가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지만, 바이샬리가 불교와 자이나교가 성행했던 것과 견주어 나라에 대한 기술 중에서

   옷을 입지 않는 외도의 표현이 이와 일치하므로 바이샬리(Vaiśāli, 혜초는 비야리성毗耶離城으로

   기술. 현장은 폐사리국吠舍釐國으로 기록)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 경우 다음 쿠쉬나가라로 가는데

   1개월이라는 이동기간이 너무 길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바이샬리로 추정할 때, 혜초가 마가다

   지방의 여러 불적을 순례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므로 여정의 추정이 복잡해진다. 동인도에

   상륙하여 부다가야→왕사성→바이샬리→쿠쉬나가라→슈라바스티→카필라→바이샬리의 여정을

   생각할 수 있는데, 다시 바이샬리에 돌아와 바라나시로 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지 않다.

   혜초는 중천축의 4 대탑을 서술하면서 슈라바스티와 바이샬리, 카필라, 상카시야의 탑이나 나무를

   “보았고”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들을 직접 순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지역들에 대한

   일반적인 여정을 생각한다면 동인도→왕사성 일대(부다가야, 날란다 포함)→바이샬리→카필라→

   슈라바스티→쿠쉬나가라→바라나시가 더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대당서역기』에서 바이샬리는

   “천사가 수십개이고 이도가 섞여 있어 몸을 드러낸 무리가 매우 많다(天祠數十, 異道雜居, 露形之徒,

   寔繁其黨.)”고 하고, 슈라바스티는 “천사가 백개이며 외도가 매우 많다(天祠百所, 外道甚多.)”고 하여

   바이샬리에서 ‘몸을 드러낸다’고 한 표현이 이곳의 ‘벌거벗은(裸形)’이라는 표현과 더욱 유사하지만,

   외도가 번성하기는 슈라바스티가 더 심하여 이 첫 번째 부분을 슈라바스티로 볼 수도 있는 한 증거가

   된다.
3) 외도(外道): tīrthaka 또는 tīrthika. 외교(外敎)·외법(外法)·외학(外學)이라고도 쓴다. 불교 이외의 

   일체 종교를 가리킨다. 초기에는 단순히 다른 교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점차 모멸, 배척의 의미가

   추가되어 진리 이외의 삿된 법을 의미하게 되었다.
4) 衣로 추정됨
5) 辶만 보이는데 逢으로 추정됨
6) 의미상 有 앞에 無가 빠진 것으로 추정됨.

 

2. 쿠쉬나가라국

 

〈떨어져 나감〉 한 달을 가면 쿠쉬나가라[拘尸那, Kuśinagara]7)국에 도착하니 부처께서 열반에 드셨던 곳이다. 그 성은 황폐해져 아무도 살지

않는다. 

부처께서 열반에 드신 장소에 탑8)을 세웠는데, 어떤 선사가 탑을 청소하고 있었다. 해마다 8월 8일 9)이면 비구와 비구니, 출가자와 재가자가 탑에 가서 크게 공양을 베푸는데, 탑의 공중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깃발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함께 보고서 이 날을 맞아 발심(發心)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다.

이 탑 서쪽에 강이 하나 있어 이라바티[伊羅鉢底, Airāvatī]10)라고 하는데, 남쪽으로 2천 리 넘어 흘러가 강가[恒河, Gangā]강11)에 흘러 들어간다. 그 탑의 사방은 인적이 끊어져 사람이 살지 않는다. 너무나 황량한 숲이어서 탑에 가서 예배드리려는 사람은 코뿔소나 호랑이12)에게 해를 입는다. 이 탑 동남쪽 삼십 리에 절이 하나 있어 수바반다나[娑般檀寺, Subha-bandhana]13)라고 한다.

30여 명이 사는 마을 서너댓 곳이 있어 그 선사에게 늘 옷과 음식을 공양하고, 지금도 탑에서 공양받고 있다. 〈아래쪽12자 정도 떨어져 나감〉.

一月至拘尸那國, 佛入涅槃處. 其城荒廢, 無人住也. 仏入涅槃處置塔,

有禪師在彼掃灑. 每年八月八日, 僧尼道俗就彼, 大設供養, 於其空中,

有幡現不知其數. 衆人同見, 當此[之日]14), 發心非一. 此塔西有一河伊羅鉢底水,

南流二千里外, 方入恒河. 彼塔四絶, 無人住也. 極荒林木, 往彼禮拜者,

[被]15)犀牛大虫所損也. 此塔東南卅里, 有一寺名娑般檀寺. 有卅餘[人村庄三五所]16), 

常供養彼禪師衣食. 今在塔所供養〈下缺〉
7) 쿠쉬나가라[拘尸那, Kuśinagara]: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하『왕』으로 표기함)구시나(拘

   尸那),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구시나게라(拘尸那揭羅). 중인도의 도성 또는

   국명으로서, 부처가 입멸하신 곳이다. 현재 인도 북부 우타르 프라데쉬(Uttar Pradesh)주 

   데오리아(Deoria)의 북동쪽 35㎞, 고락푸르(Gorakhpur)의 동쪽 55㎞에 위치한 카시아(Kasia)

   이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이미 황폐해지기는 했지만 부처의 열반상과 아쇼카왕이 세운

   스투파가 있었다. 10~11세기 이후 완전히 황폐해진 것을 1861년 커닝햄(Cunningham)의

   발굴로 부처의 입멸지임을 확인하였고, 1904년부터 인도 고고학국에 의해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승원의 유적을 찾아내 열반당과 스투파 그리고 주변의 많은 유적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에 이르렀다.
8) 탑:현재 남아 있는 대열반탑(大涅槃塔, Mahāparinivāna Stūpa)은 아쇼카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부처가 열반한 자리에 세운 사원인 열반사(涅槃寺, Nirvāna Mandir)는 5c.초 하리발라

   (Haribala)라는 비구가 기증하였음을 명문에 의해 알 수 있다. 현재의 열반사는 1876년의 발굴을

   거쳐 1956년 미얀마 스님들에 의해 재건된 것으로, 남북으로 길고 동서로 좁게 만들어졌으며

   입구는 서쪽의 가운데에 있다. 시멘트로 건축하고 흰 페인트칠을 하였으며 건물 내부 벽 아래

   부분에 흰 대리석을 붙였다. 열반사 안에는 모래와 진흙으로 만든 길이 6.2m에 달하는 열반상

   있다. 열반사 뒤의 대열반탑은 아쇼카왕에 의해 만들어져 여러 차례 증축된 것이다. 1876년에 

   커닝햄의 조수 칼레일(Carlleyle)이 발굴했을 당시에는 둥그런 벽돌 무더기 위에 다른 벽돌

   무더기가 7.5m높이로 남아 있었는데, 미얀마 승려들이 1927년과 1972년에 증축하면서 높이

   15m의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1911년 발굴 조사 때 기단부의 감실에서 테라코타 좌불상이

   발견되었으며, 탑 안에서 원래 탑 형상의 모조탑과 함께 부장품, 대반열반당( Mahāparinirvāna-

   caitya)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동판 등이 나와 열반한 곳임을 확인해 주었다.
9) 8월 8일: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교단에서는 부처의 입멸일이 8월 8일이라고 

   한다. 설일체유부 율장『살파다비니비바사(薩婆多毘尼毘婆沙)』권2에 “부처는 2월 8일 불성

    (弗星)이 뜰 때 정각을 이루셨다. 또 2월 8일 불성이 들 때 태어나시고, 8월 8일 불성이 뜰 때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시고, 8월 8일 불성이 뜰 때 반열반에 드셨다.”(大 23 p.510b21~24. 佛以

   二月八日弗星現時, 初成等正覺. 亦以二月八日弗星出時生, 以八月八日弗星出時轉法輪, 以八

   月八日弗星出時取般涅槃.)고 하였다. 같은 부파불교에서도 상좌부는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

   婆沙)』에 따라 2월 15일을 열반일로 삼으며, 동아시아 불교권에 전승되는 2월 15일 열반일은

   『열반경』에 따른 것이다.(桑山, p.56)

10) 이라바티[伊羅鉢底, Airāvatī]:『왕』 이라발저(伊羅鉢底),『대당서역기』아시다벌저하(阿恃多

    伐底河). 부처가 열반에 든 지점 근처를 흐르는 강. 열반처 근처의 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부파의 전승에서는 히란야바티(Hiranyavati)라 하여『장아함경』에서는 희련선하(凞連禪河),

    아함계『대반열반경』에서는 희련하(熙連河)로 번역하였고, 대승 열반경 계통에서는 아지라바티

    ( Ajiravatī)라 하여『대반열반경』에서는 아리라발제하(阿利羅跋提河), 아이라발제하(阿夷羅跋提

    河)로 번역하였다. 그런데『왕오천축국전』에서는 열반탑 서쪽에 강이 있다고 하고, 현장은 동쪽에

    있다고 하여 서로 기록이 다른데, 이에 대해 강물의 흐름이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11) 강가[恒河, Gangā]:항하(恒河). 인도에서 가장 중요한 강. 중부 히말라야 산맥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델리 동쪽 지방인 힌두스탄평야로 흘러들어 동쪽으로 흘러 알라하바드에서

    야무나강과 합류하고 바라나시를 지나 파트나에서 고그라강·간다크강 등과 합류하여 벵골평야를

    관류하고 마지막에 여러 갈래로 나뉘어 벵골만으로 흘러든다. 길이 2,510㎞, 유역 면적 약 173만㎢

    이다. 힌두교에서는 선인들의 기도에 따라 비슈누( Visnu)신의 발 끝에서 흘러 나와 하늘에서 내려
    왔다고 하여 신성한 강으로 여긴다. 불교에서도 복된
 강으로 생각하여 불전에 자주 등장한다. 강가강

    일대는 인구가 조밀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교통이 발달하여 경제가 활발한 지역으로 힌두문명의

    중심지였고, 석가가 활동할 때 강가강 양안이 그 중심 지역이었다. 인도 사람들은 살아서 강가에서 

    목욕하고 물을 마시면 죄가 씻기고, 죽어서 강가 강변에서 화장하고 그 재를 강에 뿌리면 구원으로

    직행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강가강은 파괴의 신 쉬바( Śiva)가 창조의 신 브라마( Brahma)

    머리를 잘랐을 때 그 죄를 씻기 위하여 찾아왔던 곳이라 하여 더욱 성스럽게 여긴다. 두 강이 합쳐

    지는 알라하바드(Allahabad)나 바라나시( Vārānasī) 등이 가장 즐겨 찾는 성지로서 지금도 매년 
    수백만 명의 
힌두교도들이 이곳을 찾는다.

12) 호랑이:대충(大虫)은 큰 벌레나 늙은 호랑이를 가리킨다.
13) 수바반다나[娑般檀寺, Subha-bandhana]:또는 마쿠타 반다나(Makuta-bandhana). 『왕』사반단사

    (娑般檀寺)로 표기.『대당서역기』에는 나오지 않음. 부처의 유해가 화장된 장소인 다비처에 세운 절로

    추정된다. 부처의 다비처는 마쿠타 반다나로 표기되어 한역 경전에는 천관사(天冠寺), 천관탑(天冠塔)

    등으로 번역되기 하였다. 현재 열반처로 알려진 쿠쉬나가라의 열반당에서 동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다비처로 추정되라마바르(Rāmabhār)탑이 있는데, 혜초가 여기에 기록한 30리와는 
    차이가 있어 3리의 잘못이 아닌가 추정하기는 라마바르(Rāmabhār)탑이 있는데, 혜초가 여기에 기록한 30리와는 
    차이가 있어 3리의 잘못이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桑山, pp.60~61)

14) 필사본에는 日之로 썼으나 오른쪽에 순서가 바뀌었다는 수정부호 표시를 하고 있어 之日로 바로잡음
15) 분명하지 않으나 被로 추정됨
16) 여섯 글자는 모두 오른쪽 절반쯤 남아 있는데 人村庄三五所로 추정됨.

 

3. 바라나시국

 

〈떨어져 나감〉 일 가면 바라나시[彼羅痆斯, Vārānasī]17) 국에 도착한다. 이 나라도 황폐해져서 왕이 없으니, 바로 〈14자 정도 떨어져 나감〉 저 다섯 비구의18) 소상(塑像)이 탑 안에 있다.19) 〈15자 정도 떨어져 나감〉20) 위에는 사자상이 있는데, 석주(石柱)21)가 매우 커서 다섯 사람이 두 팔로 에워싸야 할 정도지만 새겨진 무늬는 섬세하다.〈13자 정도 떨어져 나감〉22) 탑을 세울 때 이 석주도 함께 만들었다. 절 이름은 다르마차크라[達磨斫葛羅, Dharmacakra]23)이고, 〈12자 정도 떨어져 나감〉

외도는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며 대천(大天)24)을 섬긴다.

이 절에 하나의 금동상과 오백 〈떨어져 나감〉 상이 있다. 마가다[摩揭陀, Magadha]25)국에 옛날에 왕이 있어 실라디티야[尸羅栗底, Śīlāditya]26)라고 했는데, 이 상을 만들었다. 아울러 하나의 금동〈떨어져 나감〉27)을 만들었는데, 테두리가 둥글고 일정하며 둘레가 30보쯤 된다.

이 성은 강가강을 굽어보는 북쪽 언덕에 있다.28) 녹야원(鹿野苑, Mrgadāva)29)쿠쉬나가라, 왕사성(王舍城, Rājagrha)30),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Mahābodhi Temple)31) 등 사대영탑(四大靈塔)32)이 모두 마가다국 왕의 영역 안에 있다.33) 이 나라는34) 대승(大乘)35) 소승(小乘)36)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이때 마하보리사에 도달하고 보니,37) 나의 본래 서원에 맞아서 매우 기뻤다. 나의 어리석은 뜻을 간략히 오언시로 적어 본다.

 

보리사가 멀다고 걱정하지 않는데
어찌 녹야원이 멀다 하리오
가파른 길 험해서 걱정되지만
마음과 달리 업의 바람 몰아치네
여덟 개 탑38)은 참으로 보기 어렵구나
이리저리 오랜 세월에 타버렸도다
어찌 사람이 소원 다 이루겠는가마는
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았구나.

日, 至彼39)羅痆斯國. 此國亦廢無王, 卽[六]〈下缺〉 彼五俱輪見素形像, 

在於塔中〈下缺〉 上有師子, 彼幢極麤, 五人合抱, 文里細〈下缺〉 塔時, 

幷造此幢. 寺名達磨斫葛羅, [僧]〈下缺〉 外道不着衣服, 身上塗灰, 

事於大天〈下缺〉. 此寺中有一金銅像五百□□□. 是摩揭陁國, 舊有一王, 

名尸羅栗底, 造此像也. 兼造一金銅□□□ 輻團圓正等卅餘步. 

此城俯臨恒河北岸置也. 卽此鹿野菀, 拘尸那, [王]40)舍城, 

摩訶菩提等 四大靈塔, 在摩揭陁國王界. 此國大小乘俱行.
于(時)41)得達摩訶菩提寺, 稱其本願, 非常歎喜. 略題述其愚志, 五言.
不慮菩提遠 焉將鹿菀遙
只愁懸路險 非意業風飄
八塔難誠見 參差經劫燒
何其人願滿 目覩在今朝
17) 바라나시[彼羅痆斯, Vārānasī]:『왕』 피라닐사(彼羅痆斯),『대당서역기』파라닐사(波羅痆斯).

    현장이 방문했을 때는 매우 번영한 도시였다. 바루나(Varuna)강과 아씨(Assi)강이 강가강과

    만나는 지점으로, 두 강 이름의 머리글자를 따서 바라나시라 불렀다. 그러다가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Aurangzeb) 황제에 의해 베나레스(Benare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바라나시로 부른다. 인도 북부의 우타르 프라데쉬주에 속한다. 석존이 처음 깨달음을 설법한

    사르나트(Sārnāth)가 불과 10㎞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바라나시의 영향권 안에 있으므로 석존

    이후 불교가 번성하였다. 지금은 힌두 성지로 유명하며 자이나교의 성지이기도 하여 ‘신성한

    도시’, ‘종교의 수도’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유명한 종교가, 철학자, 예술가 등이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해마다 수백만 명의 힌두교도들이 바라나시의 강가강을 찾아 강물에 몸을 씻고

    순례한다.
18) 오구륜(五俱輪)의 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는데, 여기서는 글의 흐름상 다섯 비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부처는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이전에 함께 수행하던 콘디니야

    (Kaund3 3 inya, 憍陳如) 등 다섯 비구를 녹야원(鹿野園)으로 찾아가 처음으로 불법의 뜻을

    설하였는데 그 결과 ‘처음으로 법륜을 굴리다(初轉法輪)’라는 일화가 생겼다.
19) 초전법륜의 성지인 사르나트에는 이를 기념하는 거대한 탑이 세워져 있었다. 황폐된 유적은

    1834년부터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하여 1904년 이후 인도

    고고국에 의해 여러 차례 발굴이 이루어졌다. 현재 유적지에는 사원 구역 서남쪽에 다르마라지카

    (Dharmarājikā)대탑의 거대한 탑지가 있고, 이들 유적과 다소 떨어져 약 33.5m 높이로 남아 있는

    다메크(Dhamekh)탑이 있고, 여러 개의 사원 유적과 세 동강 난 15m 길이의 아쇼카석주가 있다.

    다르마라지카대탑은 아쇼카왕이 최초로 건립한 것이라 하며, 직경 13.5m의 원래 탑은 이후 여섯

    차례나 확대되었다고 한다. 고고국 발굴 이전의 유물은 주로 캘커타 인도박물관에 수장되었고,

    5세기 굽타 시대의 불상 초전법륜상과 아쇼카왕 석주 사자주두 등 고고국이 발굴한 유물은 유적

    인근에 세운 사르나트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재 일부 파손되어 남아 있는 다메크탑은 기단부

    직경 28.5m 높이 33.5m의 크기로 6세기 경에 세운 것인데, 겉을 벽돌로 쌓았는데 아래쪽 3분의

    1쯤은 석재로 쌓고 표면에 장식도 새겼으며 8개의 감이 만들어져 있다. 혜초가 여기서 기록한

    “소상이 탑 안에 있다”는 표현이 현재 다메크탑의 형태와 비슷하다고 보기도 한다.
20) 떨어져 나간 부분에 당(幢)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21) 석주(石柱):당(幢)의 번역어. 아쇼카( Aśoka, 阿育)왕이 만든 돌기둥이다. 아쇼카왕은 마우리야

    ( Maurya) 왕조의 제3대 왕으로 서기전 약273~232년에 재위하였다. 그는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즉위 8년에 칼링가( Kalinga)국을 공략했는데, 사람들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왕은 불교를 배우고, 불법에 의한

    정복과 불법에 의한 통치를 결심하였다. 왕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지킬 것을 알리기 위해 영토 내의

    각처에 석주(Aśoka’s pillar, 아쇼카왕석주)를 세우고 바위면에 선정을 펼치겠다는 여러 종류의

    법칙을 새기게 하였다. 현재 20여개의 석주와 마애 법칙이 남아 있다. 석주 꼭대기의 주두에는 사자,

    코끼리, 황소 등을 새겼다.
22) 혜림의『일체경음의』중권에 파라닐사(波羅痆斯)에 이어 아수가(阿戍笴)가 나오는데, 현존하는

    필사본에는 이 말이 보이지 않는다. 아쇼카왕을 뜻하는 이 말은 바로 이곳 떨어져 나간 부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쇼카왕이 탑을 세우고 석주도 세웠기 때문이다.
23) 다르마차크라[達磨斫葛羅, Dharmacakra]:사르나트(Sārnāth)에 있는 다르마라지카( Dharamarājikā)

    탑 부근의 절 이름. 번역하면 법륜사(法輪寺)가 된다. 초전법륜지를 기념하여 세운 절이므로 그런

    이름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사르나트 유적지에는 여러 개의 사원 터가 있는데, 여기서 출토된

    유물 중에 불상 명문에 1026년에 다르마라지카탑과 다르마차크라사당을 완전히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어느 위치에 있는 사원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 지역에 있던 사원이었음을

    증명해주는 기록이다.
24) 대천(大天, Mahādeva):대자재천(大自在天, Maheśvara). 대자재천은 힌두교의 신 쉬바( Śiva)의

    다른 이름으로서 마혜수라(摩醯首羅)라고도 한다. 원래는 나라연천(那羅延天)과 같이 범천(梵天)의

    하위신이었는데 뒤에 최고 신격이 되어 범신론의 교지를 성립시켰다. 대자재천은 세계의 창조신으로,

    삼계(三界)의 일체가 대자재천에게서 태어난다고 한다. 허공은 그의 머리이고, 땅은 몸, 물은 오줌,

    산은 똥, 일체중생은 배 속의 벌레이다. 그러므로 그를 받들면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자재천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불에 태우므로 재를 바르는 외도[塗灰外道]라고도 한다. 힌두교의 쉬바파

    중에서 파슈파타( pāśupata)파가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른다고 한다.(桑山, p.67)
25) 마가다[摩揭陀, Magadha]:여러 기록이 마게타(摩揭陀)로 한역하여 표기하고 있다. 인도 동북부에

    있는 비하르(Bihar)주 남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왕국으로, 브리하드라타(Brihadratha)가 세웠다고

    전한다. 서기전 6세기에 빔비사라(Bimbisāra, 頻毘娑羅)왕이 왕사성(王舍城, Rājagrha)으로 도읍을

    옮기고, 인도 서부의 여러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한편 무력으로 동방의 앙가왕국을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 아자타샤트루( Ajātaśatru, 阿闍世)는 부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라, 코살라( Kosalā)국과

    카시( Kāsī)국을 합치고 부왕 이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바이샬리( Vaiśāli)국을 정복하였다. 이후

    난다( Nanda)왕조, 마우리야( Maurya)왕조를 거치면서 파트나(Patna)를 중심으로 북인도 통일제국을

    건설하고 수세기 동안 북인도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서기 4세기에 굽타( Gupta)왕조가

    마가다에서 일어나 북인도를 통일하고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여 번영을 누렸으나, 6세기 중엽에

    굽타왕조가 멸망하면서 마가다의 지위는 급속히 하락하였다. 7세기 전반 하르샤바르다나

    ( Harsavardhana)왕조를 창설한 하르샤(Harsa)왕이 수도를 카나우지(Kanauj)로 정하자 북인도의

    정치 중심도 이전의 파탈리푸트라에서 카나우지로 옮겨졌다. 하르샤가 647년에 죽은 후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 여러 제후 세력이 독립하여 왕국은 붕괴되었다. 이후 8세기 후반에 인도 지방은

    카나우지의 프라티하라(Pratihara)와 벵갈의 팔라(Pala)와 데칸의 라쉬트라쿠타(Rashtrakuta)의 세

    나라로 나뉘어 경쟁하게 되므로, 7세기 후반과 8세기 전반에 북인도는 통일된 세력이 없이 여러 나라가

    분립해 있던 것으로 이해된다. 마가다 지역은 대보리사나 왕사성 등 주요 불적이 집중되어 순례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 7세기에 이곳을 방문한 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마가다국에 대해 12권 중 2권의

    분량으로 상세하게 서술하기도 하였다. 혜초도 여전히 이 지역을 마가다국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여정이나 주요 불적에 대한 서술은 없는 것이 의문점으로 남는다.
26) 실라디티야[尸羅栗底, Śīlāditya]:하르샤바르다나( Harsavardhana, 戒日王)왕. 재위 606~647년.

    굽타 왕조 이후 서북 인도 지방에 바르다나 왕조를 세운 이. 강가강 유역에서 구자라트 지방에 걸친

    영역을 확보하여 지금의 라자스탄·펀자브·우타르 프라데쉬·비하르·오릿사 지역을 직접 통치하고 더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 남쪽으로 진출하다고 데칸지방에서 찰루키야( Cālukya) 왕조의 풀라

    케쉰( Pulakeśin)에게 저지되었다.(람 샤란 샤르마 지음·이광수 옮김,『인도고대사』, 1994, 김영사,

    pp.299~301) 현장이 인도를 순례할 때 이 왕을 만나 보고 궁중에서 몇 년을 체류하며 그에 대한

    생생한 기록을 남겼다. 이 왕의 통치기에 녹야원, 쿠쉬나가라가 모두 그 영역에 속하였다.
27) 여기 떨어져 나간 곳에는 뒤에 이어지는 글로 보아 법륜(法輪)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8) 현재 바라나시 시가지는 이곳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강가강의 북서쪽에 이루어져 있다.

    혜초는 강의 북쪽에 성이 있다고 하여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도성이

    서쪽으로 강가강에 임해 있다고 하여 방향이 다르다.
29) 녹야원(鹿野苑, Mrgadāva):사슴동산이라는 뜻.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 칠칠일(七七日)이

    지난 뒤 처음에 함께 수행하다 자신을 떠났던 콘디니야 등 다섯명의 비구를 찾아와 사성제(四聖諦)

    등 깨달은 내용을 설한 곳으로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설법이 이루어진[初轉法輪] 역사적인 장소

    이다. 현재 바라나시(Vārānasī) 북쪽 10km 거리에 있는 사르나트( Sārnāth)이다. 탄생지 룸비니

    (Lumbinī), 성도지 보드가야( Bodhgaya), 열반지 쿠쉬나가라( Kuśinagara)와 함께 불교 4대 성지의

    하나이다.
30) 왕사성(王舍城, Rājagrha):왕의 성이라는 뜻. 부처 당시 가장 강대한 국가였던 마가다(Magadha)

    국의 도성이다. 아버지 빔비사라( Bimbisāra)왕이 쌓은 산 속에 둘러 싸인 구(舊)왕사성지와 아들

    아자타샤트루( Ajātāsatru)왕이 평지로 나가 만든 신(新)왕사성지가 있다. 구왕사성을 둘러싼 산중에

    유명한 설법처 영취산(靈鷲山)이 있고, 신왕사성 근처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있으며 신왕사성이

    내려다 보이는 산중에 처음으로 경전을 편찬한[結集] 칠엽굴(七葉窟)이 있어 왕사성은 불교 8대 성

    지의 하나로 꼽힌다.
31) 마하보리사(摩訶菩提寺, Mahābodhi Temple):서기전 250년경 마우리야왕조의 야쇼카왕이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인 보드가야를 찾아 보리수 나무 밑의 금강좌 자리에 세운 절이다. 아쇼카왕은

    석주와 승원을 세우고 보리수 주위에 돌담을 조성하였다. 서기 5세기 경 굽타( Gupta)왕조 기간에

    증축되어 사당형 고탑이 이루어졌고 이후 몇 번에 걸친 증축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러 높이

    52m의 탑이 되었다.
32) 사대영탑(四大靈塔):혜초가 마가다국 영역 내에 있다고 한 4대탑은 현재 불교 4대 성지와 관련

    있다.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처음 설법을 한 사르나트, 열반에 들어간

    쿠쉬나가라를 불교의 4대 성지라고 한다. 여기에 슈라바스티( Śrāvastī), 상카시야 (Samkāśya),

    왕사성( Rājagrha), 바이샬리( Vaiśāli)를 더하여 불교의 8대 성지라고 한다. 혜초가 마가다국의

    4대탑이라고 든 것은 사르나트 녹야원의 다메크(Dhamekh)탑, 쿠쉬나가라의 대열반탑, 보드가야

    마하보리사의 사당형 고탑(高塔), 그리고 왕사성의 탑이다. 그런데 왕사성은 부처가 태어난 곳도

    아니며, 탑도 없으므로 왕사성의 탑이란 왕사성 가까이에 있는 영취산의 설법화경탑(說法華經塔)을

    말하는 것올 보기도 한다. 그리고 『대당서역기』권9에서는 왕사성 부근에 취한 코끼리를 조복시킨

    탑[伏醉象塔]·자살비구탑(自殺比丘塔)·불사리탑(佛舍利塔)·아난반신사리탑(阿難半身舍利塔)등 불교

    유적이 많다고 하므로 이 가운데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혜초는 뒤에 중천축국의 4대탑으로 슈라바스티,

    바이샬리, 카필라, 카니야쿱자의 네 곳을 들었다. 또 이 기록의 바로 다음에 기록된 시에서는 8탑을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고승전 등에서는 인도를 순례한 이들의 행적 중에 4대탑과 8대탑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8대탑의 구체적인 이름을 든 경우는 없다. 오직 799년에 중국에 돌아온 오공(悟空)의 『입

    축기(入竺記)』에 탄생처 카필라바스투, 성도처 마가다 보리사, 전법륜처 바라나시 녹야원, 설법화경처

    영취산, 현부사의처 바이샬리, 삼도보계하강처 상카시야, 설반야경처 슈라바스티, 열반처 쿠쉬나가라

    (悟空,『入竺記』 大 51 p.980a27~b7. 從此南遊中天竺國, 親禮八塔. 往迦毘羅伐窣覩城, 佛降生處塔.

    次摩竭提國, 菩提道場成佛處塔, 於菩提寺, 夏坐安居. 次波羅泥斯城仙人鹿野苑中, 轉法輪處塔.

    次鷲峯山, 說法華等經處塔. 次廣嚴城, 現不思議處塔. 次泥嚩襪多城, 從天降下三道寶階塔. 次室羅

    伐城逝多林給孤獨園, 說摩訶般若波羅蜜多度諸外道處塔. 次拘尸那城娑羅雙林, 現入涅槃處塔.

    如是八塔右遶供養, 膽禮略周.)를 들고 있을 뿐이다. 이는 현재까지도 8대 불교성지로 알려져 있다.

    이 8탑은 혜초가 든 마가다국 4대영탑과 중천축국 4대탑을 합친 것과 같다. 다만 4대성지에 탄생지

    대신 왕사성이 들어간 것이 다르다. 또 혜초나 오공 모두 불탄지를 룸비니가 아닌 카필라를 들고

    있다. 이는 현장의『대당서역기』에서 말하는 것처럼 카필라국 안에 부처가 탄생한 룸비니가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大 51 p.902a20~22)
33) 이 네 영탑이 모두 마가다국에 있다는 것은 마가다국 전성기의 영역을 말하는 것이고, 혜초도

    녹야원은 바라나시국, 쿠쉬나가라는 쿠쉬나가라국으로 서술하고 있어 왕사성과 마하보리사만이

    마가다국에 있다고 파악하고 있다.
34) 이 기록은 바라나시국에 이어 나오는 기록으로 마가다국의 4대 영탑 기록에 이어 마하보리사에

    이르렀다는 기록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나라를 마가다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마가다국의 역사적 4대 영탑 서술이라고 본다면 이 나라는 바라나시국이 될 수도 있다. 마가다국에

    대한 다른 서술이 없기 때문이다.
35) 대승(大乘): mahāyāna.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연(摩訶衍)으로 음역한다. 승(乘, yāna)이란

    탈 것이란 의미로 중생을 번뇌의 차안으로부터 깨달음의 피안으로 데려가는 가르침을 가리킨다.

    재가자 중심의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한 이들이 원시불교와 부파불교를 폄하하는 의미에서 소승이라

    부르고, 자신들을 많은[大] 사람을 피안으로 태우고 간다[乘]는 의미에서 대승이라 불렀다.
36) 소승(小乘): hīnayāna. 성문승(聲聞乘)이라고도 한다. 대승(大乘)·보살승(菩薩乘)의 대칭으로

    대승운동을 일으키며 상대방인 부파불교를 지칭했던 이름으로서 원시불교 또는 부파불교를

    가리킨다. 현재는 대체로 상좌부(上座部, Theravāda)불교라고 부른다. 대승의 주장으로는 소승이

    자기 해탈 추구에 주력하는 점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모두 추구하는 보살도와 다르다고 한다.
37) 이 구절은 바라나시국이 아닌 마가다국의 기록이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혜초의『왕오천축국전』

    에는 따로 마가다국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바로 앞서 “4대 영탑이 모두 마가다국 왕의 영역 안에 있다”

    고 한 것은 마가다 번영 시절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지역의 서술과 비교해

    보면, “어느 나라에서 어느 방향으로 얼마를 가면 마가다국에 이른다”라는 표현이 보이지 않고, 다만

    이곳에서 마가다국 경내의 4대영탑을 거론하고 바로 마하보리사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떨어져 나간

    앞 부분에 마가다국이 있었는지, 아니면 혜초가 마가다국에 대해 다른 기술을 하지 않고 이곳의

    시로만 그쳤는지 알 수 없다. 부처가 깨달음을 이룬 곳으로서 불교가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불적지인 대보리사와 중요 불적이 많은 왕사성이나 당시 불교학의 산실이었던 날란다사

    에 대한 기술이 없다는 점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볼 수도 있다. 혜초는 중천축의 서술에서 중천축

    4대탑을 모두 보았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슈라바스티, 바이샬리, 카필라, 상카시야이다. 따라서 혜초는

    이들 유적지를  다 순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정으로 보면 카필라, 슈라바스티, 바이샬리에 대한

    서술은 떨어져 나간 앞 부분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바라나시에서 마하보리사가 있는 보드가야로

    왔다가 남천축으로 가려면 다시 카나우지 쪽으로 가야 하는 중복 여정이므로 마하보리사를 비롯한

    마가다 지역의 여러 유적은 떨어져 나간 앞 부분에 서술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마하보리사 자체에 대한 서술도 없이 시 한 수만으로 불교의 핵심 성지를 소개한 것은 구도자의 순례기

    로서는 너무 소략하다고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에서 혜초의 인도 초기 여정을 동인도 →

    왕사성 일대 (부다가야, 날란다 포함) → 바이샬리 → 카필라 → 슈라바스티 → 쿠쉬나가라 → 바라나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마하보리사에서의 감회를 읊은 시가 바라나시국 다음에 실려

    있으므로 바라나시 → 마가다(마하보리사 등)의 여정이 되어 다시 중복되는 문제가 있다.

38) 여덟 개 탑(八塔):석가모니가 인도의 쿠쉬나가라 사라쌍수 밑에서 입멸 후 유해를 다비(茶毘)하였고,

    이때 인도의 8국이 그 사리(舍利, śarīra)를 차지하기 위하여 쟁탈전이 벌어지자 드로나(Drona, 香姓)

    바라문의 의견에 따라 8국에 사리를 균등 분배하고 각기 탑을 세웠다. 이를 분사리(分舍利), 8분사리

    라고 한다. 이때 부터 사리신앙이 싹트고 불탑의 기원이 이루어졌다. 그 후 서기전 3세기에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왕이 인도에 대제국을 건설한 후 8대탑을 발굴하여 8만 4천으로 나누어 전국에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8탑은 부처의 생애와 관련된 중요한 성지에 세운 탑을 말한다. 탄생지

    카필라바스투, 성도지 대보리사, 전법륜처 사르나트, 열반처 쿠쉬나가라가 4대 성지이며, 법화경을

    설한 왕사성 영취산, 부사의탑이 있는 바이샬리, 삼도보계 하강처인 상카시야, 반야경을 설한

    슈라바스티를 더해 8대성지가 되고, 이곳에 건립한 탑이 8대탑이다. 
39) 『왕오천축국전』에서는 일관되게 彼를 썼으나『대당서역기』등 다른 기록에서는 波를 쓴다.『왕오천축

    국전』의 낱말을 수록한『일체경음의』의 해당 부분에도 波를 썼다.
40) 앞줄 마지막에 王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됨.
41) 時로 추정됨.

4. 중천축국

 

다시 이 바라나시국에서 서쪽으로 두 달 정도 가면 중천축국(中天竺國)42) 왕이 사는 성에 도착하는데, 그 이름은 카니야쿱자[葛那及自,

Kānyakubja] 43) 이다. 이 중천축 왕은 영토가 매우 넓고, 백성이 번성하다. 왕은 900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하고, 다른 대수령(大首領)은 각각 200마리나 300마리의 코끼리를 소유한다.44) 왕이 늘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싸우는데, 다른 네 천축국과 항상 싸우면 중천축왕이 언제나 이겼다.

그 나라 법에는 스스로 코끼리나 군대가 적은 줄 알면 곧 화해를 청하여 해마다 세금을 보내고 서로 맞서 싸우고 죽이지 않는다. 

의복과 언어, 풍속과 법률은 오천축국이 서로 비슷하다. 다만 남천축국의 시골 사람들의 말은 다르지만,45) 관리들의 말은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다. 오천축국의 법에는 목에 칼을 씌우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는 것이 없으니, 죄를 지은 자에게는 죄의 가볍고 무거움에 따라 벌금을 내게 하지 죽이는 일은 없다.46)

위로 국왕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에 이르기까지 돌아다니며 사냥하며 매를 날리고 사냥개를 내달리게 하는 등의 일을 보지 못했다. 길에 비록 도적이 많긴 하지만 물건만 빼앗고 곧 놓아주어 해치거나 죽이지 않는다. 만약 물건을 아끼다가는 곧 다치게 된다.

기후가 매우 따뜻하여 온갖 풀이 항상 푸르고 서리나 눈은 내리지 않는다. 음식은 멥쌀, 곡물, 빵, 보릿가루, 버터[蘇, ghrta]47), 젖[乳, ksīra], 요구르트[酪, dadhi]48) 등 뿐이고, 장(醬)은 없으나 소금은 있다. 모두 흙솥으로 밥을 지어 먹으며 무쇠솥 따위는 없다. 백성은 별도의 부역이나 세금을 내지 않고, 다만 땅에서 나는 생산에서 다섯 섬은 거두고 한 섬은 왕에게 바칠 뿐이다.49) 왕이 사람을 보내 운반해가고 땅 주인이 일부러 보내지 않는다.

이곳 백성들은 가난한 사람이 많고 부자가 적다. 왕이나 관리집안이나 부유한 사람들은 면직물 한 벌을 입고, 이밖의 사람들은 한 겹만 입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반조각만 입는데, 여자들도 마찬가지이다.50)

왕이 관청에 앉으면 수령과 백성이 모두 와서 왕을 둘러싸고 사방에 앉는다. 각자 도리로 다투고 소송이 많아서 매우 어지럽고 시끄럽지만 왕은 듣기만 하고 화를 내지는 않으며 느긋하게 “네가 옳고, 네가 틀렸다.”고 판결해주면 백성들은 왕의 한 마디 말을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두 번 다시 말하지 않는다.

왕과 수령들은 삼보를 매우 공경하고 믿는다. 스님들을 마주할 때면 왕과 수령들은 땅에 앉지 의자에 앉으려 하지 않는다. 왕과 수령들은 어디에 갔다 올 때 오고가는 모든 곳에 자신의 의자를 가지고 따르게 하여 이르는 곳마다 그 의자에 앉고 다른 의자에는 앉지 않는다. 절과 궁궐은 모두 삼층으로 짓는데, 아래의 첫 번째 층은 창고로 쓰고 위의 두 층은 사람이 산다.51) 여러 대수령들의 집도 그러한데, 집은 모두 지붕이 평평하며 벽돌과 나무로 짓는다. 이 밖의 사람들은 모두 초가집으로, 중국의 맞배집52)과 비슷하게 지으며 단층집이다.

이 나라 산물은 면직물[氎布]53)과 코끼리, 말 등 뿐이다. 이 곳 땅에서는 금과 은이 나지 않아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다. 또한 낙타, 노새, 나귀,

돼지 등의 가축도 기르지 않는다. 소는 모두 흰 색인데, 만 마리 가운데 한 마리 정도가 붉은 색이거나 검은 색이다. 양과 말은 아주 적어 왕만이 양

200~300마리, 말 60~70필을 가지고 있다. 이 밖의 수령들과 백성들은 모두 가축을 기르지 않는다. 오직 소 기르는 것을 좋아하여, 소에서 젖[乳]과 크림[酪]과 버터[蘇]를 얻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착해서 살생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장이나 가게에서 짐승을 잡아 고기를 파는 곳을 보지 못했다.

又卽從此彼羅痆斯國, (西行兩)54)月, 至中天竺國王住城, 名葛那及自.

此中天王, 境界極寬, 百姓繁鬧. 王有九百頭象, 餘大首領各有三二百頭. 

其王每自領兵馬鬪戰, 常与餘四天戰也, [中天]55)王常勝. 彼國法, 

自知象少兵少, 卽請和, 每年輸稅, 不交陣相煞也.
衣着言音人風法用, 五天相似. 唯南天村草百姓, 語(有)56)差別, 

仕(宦)57)之類, 中天不殊. 五天國法, 無有枷棒牢獄, 有罪之者, 

據輕重罰錢, 亦無(刑)58)戮. 上至國王下及黎庶, 不見遊獵放鷹走犬等事. 

道路雖卽足賊, 取物卽放, 亦不(傷)59)煞. 如若悋物, 卽有損也.
土地甚暖, 百卉恒靑, 無有霜雪. 食唯粳粮餠麨蘇乳酪等. 無醬有鹽. 

惣用土鍋煮飯而食, 無鐵釜等也. 百姓無別庸稅, 但抽田子五一石与王. 

王自遣人運將, 田主(勞)60)不爲送也. 彼土百姓, 貧多富少. 

王官屋裏及富有者, 着氎一雙, 自(外)61)一隻, 貧者半片, 女人亦然.
其王每坐衙處, 首領百姓, 惣來遶王, 四面而坐. 各諍道理, 訴訟紛紜, 

非常亂鬧. 王聽不嗔, 緩緩報云, 汝是汝不是, 彼百姓等, 取王一口語爲定, 

更不再言. 其王首領等, 甚敬信三寶. 若對師僧前, 王及首領等, 

在地而坐, 不肯坐床. 王及首領, 行坐來去處, 自將牀子隨身, 到處卽坐, 

他牀不坐. 寺及王宅, 竝皆三重作樓, 從下第一重作庫, 上二重人住. 

諸大首領等亦然, 屋皆平頭, 塼木所造. 自外□並皆草屋, 似於漢屋兩下作也, 

又是一重. 土地所出, 唯有氎布象馬等物. 當土不出金銀, 並從外國來也.
亦不養駝騾驢猪等畜. 其牛惣白, 万萬頭之內, 希有一頭赤黑之者. 

羊馬全少, 唯王有三二百口六七十疋. 自外首領百姓, 惣不養畜. 唯愛養牛, 

取乳酪蘇也. 土地人善, 不多愛煞. [於]62)市店間, 不見有屠行賣肉之處.
42) 중천축국(中天竺國):중천축국은 카니야쿱자(Kānyakubja)를 도성으로 두고 나르마다(Narmadā)강

    이북, 지금의 북인도 일대를 지배한 나라이다. 혜초가 방문한 무렵 중천축국의 왕은 야쇼바르만

    ( Yaśovarman, 재위 725~752)이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에서 중천축국, 남천축국, 서천축국을

    들고 하나의 나라로 기술하였고, 북천축국은 자란달라국이라고 나란히 표기하여 자란달라 이외에도

    북천축국이 이어진다는 생각으로 기술해 나간 것이 아닌가 추정하게 한다. 이런 기술은 현장의『대당

    서역기』와 같은 다른 기록과 큰 차이가 있다. 현장은 모두 138개국을 기술하면서 중인도 30, 동인도 6,

    남인도 15, 서인도 10, 북인도 19, 그리고 서역에서 중국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56국과 싱갈라와 페르샤를

    자신이 직접 세주를 붙여 기술하였다. 법현의 『불국기(佛國記)』는 대략 북천축 10, 중천축 12, 동천축 1,

    서역과 기타 8국 등으로 기술하였다. 혜초는 카니야쿱쟈가 중천축국 도성이라고 소개했지만 이에 앞서

    기술한 바라나시국이나 쿠쉬나가라국도 중천축에 속하는 나라들이다. 북천축도 마찬가지여서 자란달라국

    외에 카슈미르 등도 북천축에 속한다. 현장의 분류가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혜초의 중천축과 북천축

    기술은 한 나라가 아닌 여러 나라에 걸친 기술, 또는 중천축과 북천축을 대표하는 나라의 기술이라고

    보아야 한다.
43) 카니야쿱자[葛那及自, Kānyakubja]:곡녀성(曲女城). 지금의 우타르 프라데쉬주 카나우지(Kanauj).

    『왕』갈나급자(葛那及自), 『대당서역기』갈약국사(羯若鞠闍). 강가강 우안 칸푸르(Kanpur)에서 북서

    쪽으로 약 80㎞, 델리(Delhi)로 통하는 간선도로변에 있다. 7세기 초기에 하르샤바르다나( Harsavardhana)

    왕조의 수도로서 건설되어 북인도 정치, 군사,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르샤 왕조의 창시자 하르

    샤바르다나( Harsavardhana, 戒日王, 590~647)는 606년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강가 유역의 영토를

    확보한 후 서쪽의 카니야쿱자를 정복하고 벵갈에서 서부에 걸친 광범위한 영역을 확보하였다. 다시

    서데칸까지 진출을 시도했으나 찰루키야( Chālukya)왕조의 풀라케신( Pulakeśin) 2세에 의하여 저지

    되었다. 9~10세기 구르자라 프라티하라(Gurjara Pratihara)왕조 때 다시 수도가 되어 발전하다가,

    1194년 이슬람 세력에 의해 크게 파괴된 뒤부터 이 도시의 중요성이 감소되었다.
44) 고대 인도에서는 코끼리 보유 수가 군사력의 한 척도이기도 하였다. 코끼리가 갖는 엄청난 힘을 이용하여

    무기나 군량을 운반하기도 하고, 궁사와 창병 등 몇 명의 군사가 타고 돌격하는 임무를 주로 맡기도 하였다.

    인더스문명과 함께 인도에서 코끼리는 가축으로 사육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강한 힘을 이용하여 농사

    에 보조 역할로 이용되었다. 서기전 10세기 무렵부터 군용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을 산스크리트어 찬가를

    통해 알 수 있는데, 그후 인도에서 이란을 통해 서방에도 전파되어 지중해 세계에서도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인도와의 싸움에도 사용되었고,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이를 이용하기

    도 하였다. 인도에서는 상당 기간 동안 코끼리군대가 활용되었다. 최초의 통일국가인 마우리야왕조의 주력

    부대는 코끼리부대였으며, 기병의 등장으로 그 중요성이 줄어들기도 했으나 굽타왕조 때 다시 중시되기도

    하였다. 그후에도 16세기까지 전투에 사용되어 많을 때는 1천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되기도 하였다. 혜초가

    각 나라의 코끼리 수를 적은 것은 이런 사정을 알려주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45) 남천축국의 시골 사람들의 말은 차이가 난다:인도 북부, 서부, 중부, 동부의 언어는 모두 아리아( Arya)어계에

    속하므로 방언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더라도 기본적인 어법이 크게 다르지 않아 서로 통한다. 그러나 남인도

    언어는 드라비다( Dravida)어계에 속하므로 어법은 물론 표현이 아리안계와 완전히 다르다.
46) 인도의 고대 법전(法典)에는 일반적으로 타이름[說諭], 질책, 벌금, 체형(體刑)의 4가지 징벌 규정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체형이 없다고 한 것은 체형이 벌금으로 대신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桑山, p.71)
47) 원문의 소(蘇, ghrta)는 소나 양의 우유를 응고시켜 만든 제품으로, 버터와 유사하다. 소유(蘇油), 소유(酥油), 

    소(酥)라고도 쓴다.
48) 원문의 락(酪, dadhi)은 소, 양, 말 등의 우유로 만든 제품으로, 요구르트와 유사하다. 불전에서는 이치의

    옅고 깊음을 비유할 때 우유[乳, ksīra], 크림[酪, dadhi], 생버터[生酥, navanīta], 버터[熟酥, ghrta], 정제

    버터[醍醐, sarpirmanda]에 비유하였는데, 이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일정하지 않아서 일단 앞서의 구분을

    제시해 둔다.『장아함경』에 “우유에 비유하면 젖이 변하여 낙이 되며, 낙이 변하여 생소(生酥)가 되고, 생소가

    변하여 숙소(熟酥)가 되며, 숙소가 변하여 제호(醍醐)가 된다”(『長阿含經』권12 大1 p.112b1~5. 譬如牛乳,

    乳變為酪, 酪為生酥, 生酥為熟酥, 熟酥為醍醐, 醍醐為第一.『四分律』도 같음. 권40 大22 p.854c18~20)라고

    하였고,『대반열반경』에도 “비유하면 소에서 젖이 나오고, 젖에서 낙이 나오고, 낙에서 생소가 나오고,

    생소에서 숙소가 나오고, 숙소에서 제호가 나온다. 제호는 가장 좋아서 이를 먹으면 모든 병이 없어지므로

    모든 약에 들어간다”(『大般涅槃經』 권14, 大12 p.449a5~9. 譬如從牛出乳, 從乳出酪, 從酪出生穌, 從生穌

    出熟穌, 從熟穌出醍醐. 醍醐最上, 若有服者, 眾病皆除, 所有諸藥, 悉入其中.)고 하였다.『열반경』은 다시

    이 5단계에 12부경, 수다라, 방등경, 반야경, 열반경을 차례로 대비시켜『열반경』이 제호이며 불성이자

    여래라고 하였다. 
49) 다섯섬과 한섬:인도 고대사회는 전세(田稅)로 보통 6분의 1세( sadbhāga)를 징수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혜초가 “다섯섬을 (경작자가) 거두고 한섬을 왕에게 준다”고 기록한 것도 마찬가지이다.『대당

    서역기』권2에도 6분의 1세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수확 다섯섬 중에서 한섬을 왕에게

    바친다고 하여 5분의 1세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50) 이 나라 사람들의 옷 입는 풍속에 대해서는 의정(義淨)의『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권2에서

    여러 옷에 대해 말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참고가 된다. “서방의 풍속은 관인처럼 귀하고

    뛰어난 사람은 입는 옷이 다만 백첩(좋은 면직) 한 벌 뿐이고,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은 다만 천 하나만을

    입는다. (大54 p.214b1~3. 西方俗侶, 官人貴勝, 所著衣服, 唯有白氎一雙, 貧賤之流, 只有一布.)” 여기서

    일쌍(一雙)은 한 벌, 일포(一布)는 천 하나를 의미한다.
51) 인도 중부의 아잔타 석굴에 묘사된 궁궐 그림에서도 3층 구조가 확인된다. 현장도 『대당서역기』에서

    승원의 누각이 3층임을 말하고 있는데, 실제 사원 건축의 유적에서는 벽돌로 쌓은 단층 내지 2층 일부가

    확인된다.
52) 맞배집:양하(兩下)의 번역어. 지붕면이 양면으로 경사를 지어 두 개의 널판을 맞대어 놓은 팔(八)자형

    으로 되어 있는 가장 간단한 지붕형식의 집. 정면에서 보면 장방형의 지붕면이 보이며, 측면에서는 지붕

    면의 테두리(내림마루)만 보인다.
53) 첩(氎)은 가는 모직물을 말하기도 하고, 면직물을 말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주로 표기된 첩포(氎布)는

    면직물로 옮겼다. 원래 인도는 면화의 원산지이고 기후도 더워 면직물이 주요 직물이었기에 이렇게 번역

    한 것이다. 이와 대비하여 『왕오천축국전』의 후반부에 나오는 전삼(氈衫)이라는 표현은 모직물로 번역

   하였다.
54) 의미상 西行兩으로 추정됨
55) 필사본에서 天中은 中天을 잘못 쓴 것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56) 의미상 有로 추정됨.
57) 의미상 宦으로 추정됨.
58) 필사본의 形은 刑의 오사인 듯함
59) 필사본의 殤은 傷의 오사인 듯함
60) 의미상 勞로 추정됨
61) 의미상 外로 추정됨
62) 형태와 의미로 보아 於로 추정됨

 

이 중천축국은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중천축국63) 경내에 사대탑(四大塔)64)이 있는데, 강가강 북안에 세 개의 대탑이 있다.
첫째 탑은 슈라바스티[舍衛, Śrāvastī]65)국 급고독원(給孤獨園, Jetavana Anāthapindikārāma)66)에 있는데, 절도 있고 스님도 있는 것을 보았다. 둘째 탑은 바이샬리[毗耶離, Vaiśāli]67)성 암라(菴羅, Āmra)68)원에 있는데, 탑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절은 황폐해져서 스님이 없다. 셋째 탑은 카필라[迦毗羅, Kapila]69)국 즉 부처가 본래 태어난 성에 있는데, 무우수(無憂樹)70)는 보았으나 성은 이미 황폐해졌다. 탑은 있으나 스님은 없으며 백성도 없다. 이 성은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숲이 황량하고 길에 도적이 많아 그 곳에 가서 예배드리려는 이들이 찾아가기 어려워 곧잘 헤매곤 한다. 넷째는 삼도보계탑(三道寶階塔)으로, 중천축왕이 사는 성71)에서 서쪽으로 7일 정도 간 거리의 두 강가강72) 사이에 있다. 부처께서 도리천(忉利天)73)에서 오실 때 삼도보계74)를 만들어 염부제(閻浮提)75) 땅으로 내려오신 곳이다. 왼쪽은 금, 오른쪽은 은, 가운데는 유리로 만들어졌다.76) 부처는 가운데 길로 오시고, 범왕(梵王)77)이 왼쪽 길, 제석천(帝釋天)78)이 오른쪽 길에서 부처를 모시고 내려와서 이곳에 탑을 세웠다. 절도 있고 스님도 있는 것을 보았다.79)

此中天大小乘俱行. 卽此中天界內, 有四大塔, 恒河在北岸有三大塔. 

一舍衛國給孤薗中, 見有寺有僧. 二毗耶離城菴羅薗中, 有塔見在, 

其寺荒廢無僧. 三迦毗耶羅國, 卽仏本生城, 無憂樹見在, 彼城已廢. 

有塔無僧, 亦無百姓. 此城最居北, 林木荒多, 道路足賊, 往彼禮拜者, 

甚難方迷. 四三道寶階塔, 在中天王住城西七日程, 在兩恒河間. 

佛當從刀利天, 變成三道寶階, 下閻浮提地處. 左金, 右銀, 中吠瑠璃. 

佛於中道, 梵王左路, 帝釋右階, 侍佛下來. 卽於此處置塔. 見有寺[有僧].
63) 이곳의 기술처럼 중천축 경내에 슈라바스티국, 바이샬리국(여기서는 비야리성으로 기술), 카필라국

    등이 따로 나라의 이름으로 꼽히고 있는 것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중천축이 여러 개의 나라로 이루

    어진 것임을 전제하고 기술한 것임을 알게 한다.
64) 사대탑(四大塔):중천축 경계 내의 슈라바스티, 바이샬리, 카필라, 카니야쿱자 4곳의 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4대탑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 Lumbinī), 깨달음을 이룬 보드가야( Bodhgaya), 처음

    설법을 한 사르나트( Sārnāth), 열반에 든 쿠쉬나가라( Kuśinagara)의 4대 불교성지에 세운 탑을 말한

    다. 여기에 슈라바스티( Śrāvastī), 상카시야( Samkāśya), 왕사성( Rājagrha), 바이샬리( Vaiśāli)를 더

    하여 불교의 8대 성지라고 한다. 룸비니는 카필라의 한 지역이고, 상카시야는 카니야쿱자 도성에 속한

    지방이며, 보드가야는 마하보리사가 있는 곳이다. 그런데 혜초는 마가다국의 4대영탑이라 하여 사르

    나트탑, 쿠쉬나가라탑, 마하보리사탑, 왕사성탑을 들었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4대탑을 들었다. 혜초의

    4대탑과 일반적인 4대탑의 차이는 룸비니(여기서는 카필라)와 왕사성이 바뀐 것이다.
65) 슈라바스티[舍衛, Śrāvastī]국:『왕』사위국(舍衛國),『대당서역기』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

    중인도 왕국이다. 본래는 코살라( Kosalā)국 도성 이름이었는데 남코살라( Daksina-Kosalā)국과

    구별하기 위해 도성 이름을 나라 이름으로 대신하였다. 부처가 살아 계실 때 프라세나짓(Prasenajit,

    波斯匿)왕이 이 나라를 통치하였다. 이 나라는 유명한 기원정사가 있어 부처는 성도 후 45년 설법하는

    동안 이곳에서 25년을 머물만큼 자주 와서 지냈고 많은 중요한 설법이 이루어졌다. 상업 요지이며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로서 경전에도 수만 채의 집이 있다고 묘사되었다. 그러나 7세기에 현장이 방문

    했을 때 이미 황폐화되어 사원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일부 승려가 정량부(正量部)를 배우고 있었고,

    외도는 많았다고 기록하였다.

66) 급고독원(給孤獨園, Jetavana-Anāthapindikārāma):중인도 슈라바스티의 남쪽에 위치한다. 부처가

    설법한 유적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이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약칭해서 기원정사(祇洹精舍,

    祇園精舍, Jetavana) 등으로 불린다. 코살라국의 제타(祇陀, Jeta) 태자가 소유한 숲에 급고독장자(給

    孤獨長者, Anāthapindada, 수닷타 Sudatta장자인데, 항상 어려운 이를 도와주기를 좋아하여 이렇게

    불렀음)가 세운 절이란 의미이다. 왕사성의 죽림정사(竹林精舍)와 함께 초기의 불교 사원을 대표하는

    곳이다. 부처가 이곳에서 여름 안거를 가장 많이 지냈고, 이곳에서 설했다고 하는 경전도 많다. 사원의

    주변에 깨끗한 못과 물이 흘러 수림이 울창하고 꽃이 많이 피어 아름다운 정경을 이루는 가운데 경행

    처(經行處)와 강당(講堂)을 비롯하여 식당과 주방 등 여러 건물이 갖추어져 있었다. 사원의 중앙에는

    향실(香室, gandha-kutī)이 있어 중심을 이루었다. 지금은 사원 터가 여럿 남아 있어 원모습을 짐작

    하게 한다.
67) 바이샬리[毗耶離, Vaiśāli]성:『왕』 비야리성(毗耶離城),『대당서역기』폐사리국(吠舍釐國). 고인도

    16국의 하나. 광엄(廣嚴)이라고 의역한다. 서기전 5세기 북인도 릿차비( Licchavi)족의 수도였다.

    강가강을 끼고 있어 상업이 크게 발달한 상업도시이자 북인도 일대의 교통,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다.

    재가불교운동이 태동한 곳이며, 유마(維摩, Vimalakirti)거사 같은 인물이 등장한 곳이다. 그래서 『유마

    경』과『약사경』이 이곳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부처가 열반에 든 1백년 후에 7백 현성이 모여 경전을

    새롭게 편집하는 제2차 결집(結集)을 이루었다고 한다. 현재 아쇼카왕이 세운 탑과 석주가 잘 남아

    있으며 유마거사의 고택 유적지 등이 남아 있다.
68) 암라(菴羅, Āmra)원:기녀(妓女) 암라팔리( Āmrapali, 菴羅波利, 菴沒羅女, 菴羅女라고도 함)가

    부처께 바친 망고나무 동산을 가리킨다. 암라팔리는 『사분율』 등에는 바이샬리에 사는 음녀(淫女)로

    이름난 사람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나녀기바경(奈女耆婆經)』에는 이야기가 바뀌었다. 바이샬리의

    범지원(梵志苑)에 암라팔리나무가 있는데 거기에서 한 여자 아이가 태어나 나수(奈樹) 곧 암라팔리

    나무에서 나왔다 하여 나녀라 하였다. 15세가 되니 용모가 뛰어나 인근 7국의 왕이 다투어 데려가려

    하였다. 빔비사라왕이 밤을 함께하여 아들을 낳으니 지바카라 이름하였다. 8세에 태자로 삼았으나

    2년 뒤에 바이데히부인이 아자타샤트루를 낳자 지바카는 태자 자리를 물려주고 의술을 배워 명의가

    되었다. 나녀는 부처에 귀의하여 자신의 동산을 보시하였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암라팔리는 마가다

    국 빔비사라왕의 부인으로서 의사 지바카( Jīvaka, 耆婆)의 어머니가 된다. 본래 지바카는 서역에서

    의술을 배워 왕사성에서 빔비사라왕과 아자타샤트루왕의 어의(御醫)를 했던 명의라고 한다. 기녀

    암라팔리와 명의 지바카를 연결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부처는 바이샬리에

    있는 암라원에서 『유마경』을 설했다고 한다. 지바카 역시 왕사성에 부처를 위해 망고동산을 기증

    하였다.
69) 카필라[迦毗羅, Kapila]국:그 성은 카필라바스투( Kapilāvastu).『왕』가비야라(迦毗耶羅),『대당서

    역기』겁비라벌솔도(劫比羅伐率堵). 카필라바스투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샤키야( Śākya, 釋迦)족의

    작은 공화국으로 석가모니 탄생 당시 슈도다나왕( Śuddodana, 淨飯王)이 통치하고 있었다. 카필라

    바스투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데, 법현의 기록과 현장의 기록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현

    재 네팔의 틸라우라코트(Tilaurakot)와 인도의 피프라하와(Piprahwa)에 각각 카필라바스투라고 주장

    하는 곳이 따로 있다.
70) 무우수(無憂樹):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어머니 마야부인이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아래에서 낳았다

    고 한다. 본래 아쇼카나무[阿輸迦樹, aśoka]였는데, 석가모니가 싯다르타태자로 아쇼카 나무 아래서

    태어나 어머니 마야부인과 태자가 모두 편안하게 되자 근심이 없는 나무라고 고쳐 불렀다고 한다.

    나무 줄기는 곧게 자라며 잎은 길쭉한 복엽이고, 꽃이 선홍색으로 피며 열매는 타원형이다. 인도 문학

    에서 흔히 상서로운 상징으로 여긴다고 한다.
71) 중천축국왕이 사는 성은 카니야쿱자이다.
72) 두 강가강:야무나( Yamuna)강과 강가( Gangā)강을 말한다.
73) 도리천(忉利天): Trāyastrimśa. 불교 우주관에서 욕계(欲界) 육천(六天) 가운데 두 번째 천(天)이다.

    제석천(帝釋天)이 살고 있는 천계(天界)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 있다. 모두 33곳으로 이루어져

    있어 33천이라고도 한다. 원래 인도 신화에 나오는 산이었는데 불교의 우주관에서 세계의 중심에 수

    미산(須彌山)이 우뚝 솟아 있고 수미산을 중심으로 주위에 여덟 개의 산과 여덟 개의 바다가 둘러 싸

    고 있어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고 한다. 일곱 번째의 산 바깥으로 짠 바다가 있고 그 바깥으로 철위산

    (鐵圍山)이 있어 수미산의 사대주를 이루는데 그 중의 남쪽인 염부제주(閻浮提洲)에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위에 사천왕천이 있고 그 위 곧 수미산 정상에 도리천이 있다고 한다. 도리천은 제석천

    (帝釋天)이 주인이 되어 사방에 팔천을 거느리고 있어 삼십삼천이라고도 부른다.
74) 삼도보계(三道寶階):금, 은, 유리로 만들어진 세 계단으로, 부처가 도리천에서 내려올 때 사용한

    세 길의 계단을 가리킨다. 삼도보제(三道寶梯)라고도 쓴다. 전하는 말에 부처가 도리천에 올라가 돌

    아가신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3개월 간 설법한 뒤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때 제석천이 금, 은, 유리

    세 길의 계단을 만들어 부처가 이것에 의지하여 내려왔다고 한다. 이 탑이 만들어진 곳은 상카시야

    ( Samkāśya)로서, 지금의 인도 우타르 프라데쉬(Uttar Pradesh)주의 파루카바드(Farrukhabad) 지구

    에서 47km 떨어진 곳이다. 카나우지에서 서북쪽 델리 방향으로 강가강 상류쪽에 있다.
75) 염부제(閻浮提):Jambu-dvīpa. 잠부(jambu)는 나무 이름이고 드비파(dvīpa)는 대륙의 뜻으로,

    염부나무가 자라는 대륙이라는 뜻이다. 수미산 사대주(四大洲) 가운데 남쪽에 위치한 주이다. 본래

    인도 땅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뒤에 인간 세계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76) 혜초는 탑에 삼도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현장은 이곳에 대가람이 있고 그 담장 안에 70척의 삼도

    보계가 경전에 설한 대로 만들어져 있다고 하였다.(『大唐西域記』권4 劫比他國, 大51 p.893a24)
77) 범왕(梵王): Brahmā. 범천(梵天). 인도 신화의 창조신이며 브라만교 3대신의 하나. 불교에 수용되어

    색계 초선천이 범천에 속하는데 범중천(梵衆天)·범보천(梵輔天)·대범천(大梵天)의 셋으로 나뉘며 통칭

    하여 범천이라 한다. 범천은 사바세계의 주인이라고도 한다.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정법(正法)을 옹호

    하는 신이 되어 부처에게 제일 먼저 설법하기를 청한다. 항상 부처를 오른편에서 모시며, 손에는 흰

    먼지털이(拂子)를 들고 있다고 한다.
78) 제석천(帝釋天):Śakra-devānām indra. 석가제환인다라(釋迦提桓因陀羅)라고 음역하여 석제환인

    (釋提桓因)이라 줄여 부르기도 하며 천제석(天帝釋) 또는 천주(天主)라고 하기도 한다. 수미산 정상

    도리천의 천주(天主)로서 사천왕과 32천을 통솔하면서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을 보호하며 아

    수라의 군대를 정벌한다는 하늘의 임금이다. 본래 힌두교의 인드라신으로서 불교에 들어와 제석천이

    라 불렀다. 경설에 따르면 제석천은 원래 마가다국의 브라만으로서 보시와 같은 공덕을 쌓아 마침내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 도리천 곧 33천의 천주(天主)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 들어와서는 범천(梵

    天)과 함께 불교를 지키는 주신이 되어 수미산 정상의 도리천 선견성(善見城)에 거주하며 십대천자의

    시위를 받는다고 한다. 한 달에 여섯 차례 육재일(六齋日)에 사천왕과 태자와 시자를 데리고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의 선악과 옳고 그름을 살펴 사람들이 효도나 보시나 재계행을 하지 않으면 수명을 줄이고

    반대로 열심히 정진하면 수명을 늘린다고 한다. 석존이 성도한 다음에는 수호신이 되어 석존이 돌아가

    신 모친을 위해 도리천에 설법하러 올라가자 제석천은 보개를 들고 시종하였다 한다.
79) 혜초는 여기서 중천축의 4대탑을 모두 직접 보았다고 하였다. 마가다국 4대영탑에서 말한 것처럼

    혜초의 인도 지역 초기 여정에 대한 한 가지 추정은 동인도→부다가야→왕사성→바이샬리→카필라→

    슈라바스티→쿠쉬나가라→바라나시의 여정이다. 그러나 바라나시 다음에 마하보리사에서 지은 시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고, 중천축 왕성인 카니야쿱자 다음 여정이어야 할 상카시야도 이 삼도보계탑에서

    탑에 대해서만 서술하고 있는 것이 문제점이다. 현재 사본으로만 판단하면, 중천축국은 왕성만 소개하

    고, 나머지 나라들은 탑만 소개한 셈이 된다.
80) 필사본의 僧有는 有僧을 잘못 쓴 것임을 수정 부호로 밝힘

5. 남천축국

 

중천축국에서 남쪽으로 석달 남짓 가면 남천축국(南天竺國)81) 왕이 사는 곳에 도착한다. 왕은 코끼리 8백 마리를 가지고 있다. 영토가 매우 넓

어 남쪽으로 남해에 이르고, 동쪽으로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 서해에 이르고, 북쪽으로 중천축·서천축·동천축 등의 나라와 경계를 접하는 곳까

지 이른다.

의복과 음식, 풍속이 중천축국과 비슷하고, 언어만 조금 다른데, 기후는 중천축국보다 덥다. 이 지방 산물로는 면직물[氎布], 코끼리, 물소, 황소가 있다. 또 양은 조금 있으나 낙타, 노새, 나귀 등은 없다.

논은 있지만 기장이나 조 등은 없다. 비단82) 같은 것은 오천축국 어느 나라에도 없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그 곳 산 속에 큰 절이 하나 있는데,

나가르주나[龍樹, Nāgārjuna]83)보살이 야차(夜叉)84) 신을 보내서 지은 절로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 모두 산을 깎아 기둥을 만들고85) 3층으로 누각을 지었는데, 사방의 둘레가 3백여 보나 된다. 나가르주나보살이 살아 있을 때 절에 3천 명의 스님이 있어서 공양미만 해도 열다섯 섬이나 되었는데 매일 3천 명의 스님에게 공양하는데도 쌀이 바닥나지 않고 쌀을 퍼내면 다시 생겨 원래 양에서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절은 황폐해져 스님이 없다. 나가르주나보살은 나이 7백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죽었다. 그때 남천축의 여로에서 오언시를 지었다.

 

달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 구름만 너울너울 돌아가는구나

구름가 편에 편지라도 부치려는데

바람이 거세어 돌아보지도 않네

내 나라는 하늘 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에 있네

따뜻한 남쪽에는 기러기 오지 않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숲으로86) 날아가리

卽從中天國, 南行三箇餘月, 至南天竺國王所住. 王有八百頭象. 

境土極寬, 南至南海, 東至東海, 西至西海, 北至中天西天
東天等國接界. 衣着飮食人風, 与中天相似, 唯言音稍別,

土地熱於中天. 土地所出, 氎布象水牛黃牛. 亦少有羊, 無駝騾驢等. 

有稻田, 無黍粟等. 至於綿絹之屬, 五天惣無. 王及[首領]87)百姓等, 

極敬三寶, 足寺足僧, 大小乘俱行. 於彼山中, 有一大寺, 

是龍樹菩薩(使)88)夜叉神造, 非人所作. 並鑿山爲柱,
三重作樓, 四面方圓三百餘步. 龍樹在日, 寺有三千僧,

獨供養以十五石米, 每日供三千僧, 其米不竭, 取却還生, 元不減少.
然今此寺廢, 無僧也. 龍樹壽年七百, 方始亡也.
于時在南天路, 爲言曰, 五言.
月夜瞻鄕路 浮雲颯颯歸
緘書忝去便 風急不聽廻
我國天岸北 他邦地角西
日南無有鴈 誰爲向林飛
81) 남천축국(南天竺國):나르마다(Narmadā)강 유역 남부의 남서부 인도를 지배한 서찰루키야

    (chālukya)왕조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카르나타카(Karnataka)주에 있는 바다미

    (Bādāmi)에 도읍을 두고 오랫동안 존속했던(543~757) 왕조이다. 혜초가 방문했을 때의 왕은

    비자야디티야(Vijayaditya, 696~733)로 추정한다.(桑山, p.80) 그러나 남천축 왕이 사는 곳을 지

    금의 인도 중서부에 있는 뭄바이 인근인 마하라슈투라(Maharashtra)주의 나시크(Nasik)로 보기

    도 한다.(정수일, p.200) 바다미는 석굴사원으로 이름난 곳이고, 나시크 근처에 모두 석굴사원이

    남아 있어 혜초의 기술과 일치한다. 혜초의 여정에서 중천축에서 3개월 거리를 고려하면 나시크일

    가능성이 크다.
82) 면(綿)은 햇솜으로 만든 비단이고 견(絹)은 생명주로 만든 비단으로 면견을 합쳐서 비단을 

    말한다.
83) 나가르주나[龍樹, Nāgārjuna]:인도 대승불교(大乘佛敎)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창시자이다.

    2~3세기경(150~250) 남인도의 브라만 출신으로 베다 등을 익히다 친구 3인과 은신술을 익혀

    궁녀를 희롱하려다 발각되어 다른 친구들이 모두 죽어 이 일로 인해 출가하였다고 한다. 출가 후

    삼장을 널리 익혔으나 만족하지 못하고 히말라야산에 갔다가 한 노비구에게서 대승경전을 얻었

    고, 뒤에 용궁에 가서 많은 대승경전을 얻어 교리를 체득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남천축왕이

   브라만교를 신봉하여 불법을 공격하자 이를 교화하였고, 이후 힘써 불법을 전파하고 대승경전의

    주석서를 써서 대승교학의 체계를 수립함으로써 대승 반야(般若) 학설을 전 인도에 두루 퍼뜨렸

    다. 이후 전개된 제 교학에 두루 큰 영향을 미쳐 팔종(八宗)의 조사로 추앙될 만큼 대승교학의 중

    심을 이룬다. 제자에 제바(提婆) 등이 있다. 저술로는『중론(中論)』·『공칠십론(空七十論)』·『회쟁

    론(迴諍論)』·『대승파유론(大乘破有論)』·『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등 매우 많아 천 부의 논주

    [千部論主]로 불리며,『대지도론(大智度論)』·『십이문론(十二門論)』·『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도 그의 저술로 보지만 논란이 있다.

84) 야차(夜叉):yaksa. 불법을 수호하는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 보통 나찰(羅刹, rākśasa)과 함께

    쓰인다. 지상이나 공중에 살면서 사람을 괴롭히고 해치는 무리였는데, 불교에 수용되어 정법을 수

    호하는 역할을 맡는다. 경전에서는 항상 정법을 수호하는 신으로서의 야차를 서술하고 있으며,

    약사 계통에서는 12 야차가 『약사경』을 수지하는 이들을 수호한다.
85) 산을 깎아 기둥을 만들고: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산의 바위를 깎아 동굴을

    만들고 탑을 조성하거나 불상을 안치하여 예불을 드리는 탑원굴(塔院窟, caitya, 支提)이나, 작은

    승방을 만들어 승려들이 수행하는 승원굴(僧院窟, vihāra, 精舍)을 만들었다. 나중에는 두 가지를

    한 굴에 합쳐 만들었다. 석굴사원은 서기전 1~2세기 인도에서 남서부에서 시작되었다. 혜초가

    기록한 이곳의 모습은 현재 남아 있는 엘로라(Ellora) 석굴에서 3층 형태의 석굴을 찾아 볼 수 있다.

    나시크 일대와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아잔타(Ajanta)와 엘로라 일대에 6세기 경까지 건설

    된 많은 석굴사원들이 있다. 
86) 이 숲은 새들이 깃드는 숲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중국에서 신라를 계림(鷄林)으로

    불렀으므로 이 ‘림(林)’은 혜초의 고향인 계림 곧 신라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87) 필사본의 領首는 首領을 잘못 쓴 것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88) 필사본의 便은 使의 잘못으로 추정됨.

 

6. 서천축국

 

다시 남천축에서 북쪽으로 두 달을 가면 서천축국(西天竺國)89) 왕이 사는 성90)에 도착한다. 이 서천축국왕도 코끼리 5,6백 마리를 가지고 있다.

이 지방에서 나는 산물로는 면직물과 은, 코끼리, 말, 양, 소가 있다. 보리와 밀, 콩 종류 등이 많이 나고, 벼는 매우 적다. 음식은 빵과 보릿가루, 젖, 크림, 버터기름을 많이 먹는다. 시장에서 매매할 때 은화나 면직물 등을 사용한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고 믿어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영토가 매우 넓어서 서쪽으로 서해까지 이른다.

이 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노래를 잘 부르는데, 다른 네 천축국 사람은 이 나라만 못하다. 또 목에 칼을 씌우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에 처하는 등의 일은 없다.

지금은 아랍[大寔, Arab]91)의 침입을 받아 나라의 절반이 파괴되었다.92) 또 오천축국 법에 외지에 가는 자는 양식을 가져가지 않고 도착하는 곳에서 바로 걸식하여 먹을 수 있다. 다만 왕과 수령들이 밖에 나갈 때는 스스로 양식을 가져가고 백성들이 바치는 음식93)을 먹지 않는다.

又從南天北行兩月, 至西天國王住城. 此西天王, 亦五六百頭象.

土地所出, 氎布及銀象馬羊牛. 多出大小二麥及諸荳等, 稻穀全少. 

食多餠麨乳酪蘇油. 市買用銀錢氎布之屬. 王及首領百姓等, 

極敬信三寶, 足寺足僧, 大小乘俱行. 土地甚寬, 西至西海. 

國人多善唱歌, 餘四天國, 不如此國. 又無枷棒窂獄(刑)94)戮等事. 

見今被大寔來侵, 半國已損. 又五天法, 出外去者, 不將粮食, 

到處卽便乞得食也. 唯王首領等出, 自䝴粮, 不食百姓祗糙.
89) 서천축국(西天竺國):『왕』서천축국,『대당서역기』신도국(信度國). 현재 파키스찬 남부 신드

    지방에 있었던 신드(Sind)국으로 추정한다. 7세기 초에 시하라스( Sīharas)왕이 통치하며 북

    쪽으로는 카슈미르, 동쪽으로는 카니야쿱쟈(Kanyakubja), 서쪽으로는 마르칸(Markān)과 접

    하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7세기 중반에 두 개로 나뉘었다가 711부터 아랍 무슬

    림군의 공격을 받아 이듬해에 두 왕성이 함락되었다. 이후 이곳에 부임한 아랍 총독과 일부

    지역을 되찾고 다시 뺏기는 일이 계속되었다.(桑山, pp.83~84).
90) 신드국의 왕성은 인더스강 중류쪽의 알로르(Alor)와 그보다 남쪽의 브라흐마나바드

    (Brahmanabad) 두 곳이 있었는데, 혜초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신드왕이 탈환하였던 브라흐

    마나바드로 추정된다.
91) 아랍[大寔, Arab]:대식(大寔)은 대식(大食)의 고자(古字)이다. 대식국이란 중국 당·송대의

    아랍을 가리킨다. 아랍의 본거지는 이란 서부 및 남부이다. 대식의 중국어 음인 따쉬(Tashi)는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의 뜻을 가진 타이지르(Taijr)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650년 이후

    아랍군이 중국의 서부변방에서 급속하게 영토 확장을 해나가자 이를 군사 야욕이라 규정한

    중국인들이 아랍을 ‘영토의 탐욕자’라는 모멸감 섞인 말인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등이 있다.

    아랍인을 사라센이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1세기경부터 그리스인과 로마인이 사용한 아랍에

    대한 호칭인 사라세니(Saraceni)에서 유래하였다. 처음에는 한 부족만을 가리켰으나 뒤에는

    아랍족과 이슬람교도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92) 아랍은 무함마드(Muhammad, 570?~632)가 주장한 이슬람 교의를 따르는 교단이 나라로

    발전한 경우다. 630년 무함마드가 신도군(信徒軍)과 함께 메카를 정복한 뒤 곧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이슬람교의 세력 하에 통일하였다. 632년 그가 메디나에서 병사하자, 예언자의 후계

    자(할리파Khalīfah)로서 교단의 장로인 아부 바크르(Abū bakr, 632~634)를 선출하였다. 그는

    단기간의 재임 중에 아랍 제부족을 평정하고, 다시 비잔틴제국령인 시리아와 사산왕조 페르시

    아의 본거지인 이라크에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대정복 사업은 제2대 할리파인 우마르(Umar)의

    재임 중(634~644)에 성공을 거두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750년까지 유지된 우마이야

    (Umawiyah)왕조 때는 동쪽으로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북서부, 서쪽으로 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이베리아반도와 프랑스에도 침입하였다. 또 비잔틴제국(Byzantine Empire)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지금의 이스탄불 Istanbul)에도 여러 번 진격하였다.(김정위,『중동사』, 대한교과

    서, 2005, pp.140~142) 710년에 이라크주의 총독 쿠타이바(Qutaybah)가 카심(Qasim)을 인더스강

    유역에 파견하여 신드주를 정복한 이후 혜초 방문 당시의 서천축은 아랍의 침입으로 일부는 정복

    당하고 일부는 다시 탈환하는 등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던 상태였다.
93) 바치는 음식:지조(祗糙). 시주하는 음식이나 바치는 음식 일반을 가리킨다.
94) 필사본의 形은 刑의 잘못으로 추정됨.

 

7. 잘란다라국

 

또 서천축국에서 북쪽으로 3개월 남짓 가면 북천축국95)에 도착하는데, 이름이 잘란다라[闍蘭達羅, Jālandhara]96)국이다.

왕은 코끼리 3백 마리를 가지고 있으며, 산에 의지해 성을 만들어 살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북쪽은 점점 산이 많아 나라가 좁아진다. 군대가 많지 않아 늘 중천축국이나 카슈미르[迦葉弥羅, Kashmir]97)국에게 거듭 병탄되므로 산을 의지해 살고 있다.

풍속과 의복, 언어가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지만 기후는 중천축국보다 조금 추운 편이어서 서리나 눈은 없지만 바람이 불어 춥다.

이 지방 산물로는 코끼리, 면직물, 벼, 보리 등이 있고, 나귀, 노새가 조금 있다.

왕은 말 100필, 수령은 서너 필을 가지고 있지만 백성들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서쪽은 평야이고, 동쪽은 히말라야산[雪山]98)에 가깝다.

나라 안에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又從西天北行三箇餘月, 至北天國也, 名闍蘭達羅國. 王有三百頭象, 

依山作城而住. 從玆已北, 漸漸有山, 爲國狹小. 兵馬不多, 

常被中天及迦葉弥羅國屢屢所呑, 所以依山而住. 人風衣着言音, 

与中天不殊. 土地稍冷於中天等也, 亦無霜雪, 但有風冷. 

土地所[出有]99)象氎布稻麥, 驢騾少有. 其王有馬百疋, 

首領三五疋, 百姓並無. 西是平川, 東近雪山. 國內, 足寺足僧, 大小乘俱行.
95) 여기서 말하는 북천축도 중천축과 마찬가지로 잘란다라 한 나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한다. 현장의 분류에 따르면 잘란다라 외에 탁샤르, 카슈미르, 간다라,   

    우디야나, 쿠위, 람파카 등이 북천축에 속한다. 그러나 혜초는 카슈미르 다음에 오천축의 풍속을

    정리하고 있어 카슈미르까지만 북천축으로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96) 잘란다라[[闍蘭達羅, Jālandhara]:『왕』사란달라(闍蘭達羅),『대당서역기』 사란달라(闍爛達羅).    

    현재 인도 북부 펀잡(Punjab) 지역의 잘란다라 지방에 해당    한다. 펀자브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다.

    현장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프라야가(Prayaga)로부터 잘란다라 국왕인 우디타(Udita)

    군대에 경전과 불상을 맡기기도 하였고, 하르샤바르다나 실리디티야는 우디타에게 큰 코끼리와 금

    전 은전을 맡겨 현장의 여비에 쓰도록 하였다. 7세기 중엽에 현조(玄照)는 티베트에서 잘란다라국에

    와서 4년간 머물며 경률과 범문을 배우고 마하보리사로 갔다. 이런 사실들은 이곳이 교통의 요지였

    음을 말해 준다.(桑山, p.87)
97) 카슈미르[迦葉彌羅, Kāśmīra]:인도 평야에서 신장(新疆)과 티베트로 들어가는 통상로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현재의 스리나가르(Srinagar) 일대이다.
98) 히말라야산: Himālaya. 설산(雪山)의 번역어. 눈( hima)이 있다( ālaya)는 뜻이다. 인도 서북부에

    가로로 뻗어 있는 산맥으로, 처음에는 강가강 연변의 수원(水源)지대를 가리키는 좁은 뜻으로 사용

    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넓은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히말라야산맥은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

    으로 활 모양을 그리며 파키스탄과 인도 북부·네팔·시킴·부탄·티베트 남부를 뻗어 내리면서 몇 갈

    래의 산계로 나누어진다. 설산은 경우에 따라 가리키는 곳이 다른데, 여기서는 파미르 서남부에서

    힌두쿠시 산맥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아쇼카왕 시대 이 일대에 불교가 널리 퍼졌다. 예로부터 중국

    에서 육로로 서역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99) 필사본의 有出은 出有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8. 수바르나고트라국

 

또 한 달을 가서 히말라야산을 지나면 동쪽에 작은 나라가 하나 있는데, 이름이 수바르나고트라[蘇跋那具怛羅, Suvarnagotra]100)이다. 티베트[土蕃,Tibet]101)의 관할에 속한다. 의복이 모두 북천축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다르다. 기후가 매우 춥다.

又一月程過雪山, 東有一小國, 名蘇跋那具怛羅. 屬土蕃國所管.

衣着與北天相似, 言音卽別. 土地極寒也.
100) 수바르나고트라[蘇跋那具怛羅, Suvarn3 agotra]:『왕』소발나구달라(蘇跋那具怛羅),『대당서역

     기』소벌랄라발구달(蘇伐剌拏跋瞿呾). 그 의미는 “김씨, 황금의 성씨”라고 한다. 왕성이 김씨이기

     때문이다. 티베트 서쪽에 있던 나라로 왕이 여자이기 때문에 여국(女國)이라 불렀다. 부군도 왕이긴

     하지만 정사에는 간여하지 않았다. 티베트에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통로였기 때문에  650년대에

     티베트에 병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이 파악한 여국은 이밖에 티베트 동부에서 사천성에 걸쳐 있

     던 동여국(東女國)이 있었다. 티베트의 동서 지역에 있던 이 작은 여국들은 같은 계통이었다. 중국의

     역대 사서에서는 이 두 여국이 뒤섞여 나타나기도 한다.
101) 티베트[土蕃, Tibet]:『왕』 토번(土蕃), 『대당서역기』토번(吐蕃).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

     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에 대한 당(唐)·송(宋) 때의 호칭이다. 티베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

     (Boe)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이 호칭은 티베트왕국이 망한 후에도

     14세기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토번의 조상은 원래 네팔 북서부에서부터 카슈미르 동쪽 사이에 거주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4, 5세기 경에는 동부 티베트의 캄으로 이동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6세기 후반에는 중앙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하기 시작한 이들 일부가 왕조의 기초를 만들

     고, 손첸캄포왕 말기부터 국가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이 왕이 죽은 후 토욕혼

     (吐谷渾)의 귀속을 둘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 조직과 기마

     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

     였으나 같은 무렵 성행하기 시작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2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이상적 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군사국가로서 운영상의 모순으로 846년 붕괴되었다.

 

9. 탁샤르국

 

또 이 곳 잘란다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 가면 탁샤르[吒社, Takshar]102)국에 도착한다.

언어는 조금 다르지만 대부분 비슷하다. 의복과 풍속, 토산물, 절기와 기후가 북천축국과 비슷하다.

역시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왕과 수령과 백성 등이 삼보를 크게 공경하고 믿는다.

又從此闍蘭達羅國西行經一月, 至(吒社]103)國. 言音稍別, 大分相似.

衣着人風, 土地所出, 節氣寒暖, 与北天相似. 亦足寺足僧, 大小乘俱行. 

王及首領百姓等, 大敬信三寶.
102) 탁샤르[吒社]:Takshar. Takka, Takkadeśa라고도 표기한다.『왕』 타사(吒社), 『대당서역기』책가

     (磔迦). 동쪽은 비아스(Bias)강, 서쪽은 인더스강의 지류인 체나브(Chenab)강에 이르는 현재 파키

     스탄의 펀자브(Punjab) 지방에 해당하는 둘레 1만여 리의 넓은 영역을 보유하고 있던 나라로 수도

     는 샤칼라(Śākala, 사갈라(奢羯羅)였다. 지금의 시알코트(Sialkot)를 그 중심지로 추정한다.
103) 필사본의 一社吒에서 社吒는 吒社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혔고, 一자는 잘못 들어간 글자로 

     추정됨.

 

10. 신드구자라트국

 

또 이곳 탁샤르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신드구자라트[新頭故羅,Sindh-Gujarāt]104)국에 도착한다.

의복과 풍속, 절기와 기후가 북천축국과 비슷하나 언어는 조금 다르다.

이 나라에는 낙타가 매우 많아서, 사람들이 낙타에서 젖과 요구르트를 얻어 즐겨 먹는다.

왕과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스님도 많다.「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105)을 지은 상가바드라[衆賢,

Sanghabhadra]106) 논사가 이 나라 사람이다. 이 나라는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지금은 아랍이 침략하여 나라의 절반이 손상을 입었다.

이 나라를 비롯하여 오천축국에서는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오천축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술 취해서 서로 싸우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비록 술

을 마셨다 하더라도 얼굴색이 붉어지고 기운이 좋아질 뿐 노래하고 떠들썩하게 자리를 벌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又從此吒國西行一月, 至新頭故羅國. 衣着風俗, 節氣寒暖, 与北天相似,

言音稍別. 此國極足駱駝, 國人取乳酪喫也. 王及百姓等, 大敬三寶, 

足寺足僧. 卽造順正理論衆賢論師, 是此國人也. 此國大小乘俱行. 

見今大寔侵, 半國損也. 卽從此國, 乃至五天, 不多飮酒. 遍歷五天, 

不見有醉人相打之者. 縱有飮者, 得色得力而已, 不見有歌儛作劇飮宴之者.
104) 신두고라(新頭故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어 확정하기 어렵다. 지금의 라즈푸타

     나(Rājputana, 인도 서부의 라자스탄주)로 보는 견해도 있고, 고라를 『대당서역기』의 구절라(瞿

     折羅)로 보아 지금의 구자라트(Gujarāt)로 보는 신드-구자라트( Sindh-Gujarāt)의 견해도 있는데,

     현장은 이 두 나라를 서인도 영역에서 서술하였다. 지금의 파키스탄 남부가 신드주이고, 그에 이

     어지는 인도서부가 구자라트주이다. 그런데 탁샤르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는 곳이고, 이곳에

     서 북쪽으로 15일을 가면 카슈미르라고 한 혜초의 기록으로 추정하면 파키스탄 펀자브 북부의     

     탁실라(Taxila)와 젤룸(Jhelum)과 스리나가르(Srinagar) 사이에 있는 펀치(Punch, 현장의『대당서

     역기』에 나오는 반노차(半笯蹉) 근처로 보기도 한다.(桑山, pp.90~91) 젤룸과 그 남쪽의 라호르

     사이에 현재 구즈라트(Gujrat)라는 지명이 있는데, 탁샤르에서는 바로 이웃해 있는 지역이어서

     혜초가 기록한 15일 걸리는 일정과 차이가 크다. 위치로 보아서는 펀치가 가장 가능성 있는 견해

     로 생각되지만 그 표기가 혜초가 제시한 신두고라와 너무 다른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서는 다른

     나라의 경우 가능하면 원어에 따라 표기하였으므로 일단 나라 이름은 신드구자라트설을 따라

     표기해 둔다.
105) 아비달마순정리론(阿毘達磨順正理論):Abhidharma-nyāyānusāra-śāstra. 모두 80권이다.

     인도인 상가바드라( San3 ghabhadra, 衆賢)가 짓고 현장(玄奘)이 번역하였다.『수실론(隨實論)』,

     『구사포론(俱舍雹論)』이라고도 부르고, 줄여서 『순정리론(順正理論)』,『정리론(正理論)』이라고도

     한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입장에서 세친(世親)의『구사론(俱舍論)』을 논파하여 설일체유부

     의 주장을 선양하고자 한 책으로서 변본사품(辯本事品), 변차별품(辯差別品), 변연기품(辯緣起品),

     변업품(辯業品), 변수연품(辯隨緣品), 변현성품(辯賢聖品), 변지품(辯智品), 변정품(辯定品)의 8품

     으로 구성되어 있다.
106) 상가바드라[衆賢, Sanghabhadra]:『대당서역기』에서는 상가바드라가 캬슈미르에서 『순정리론』

     을 저술했고, 중인도에 속하는 말저보라(秣底補羅, Mandawar)국에서 임종했다고 하였으며, 『바수

     반두법사전』에서는 아요디야에서 책을 썼다고 되어 있어 활동 지역에 대한 전승이 서로 다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명성이 있었는데『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을 깊이 탐구하였다. 바수반두

     (世親,Vasubandhu)가 『구사론』을 지어 설일체유부의 교의를 일부 수정하고 경량부 교의를 포함

     시켜 비바사 논사를 비판하자, 상가바드라는 12년 동안 열심히 갈고 닦아 정통 유부의 입장에서

     바수반두를 다시 비판한 『순정리론』을 지었다. 그리고 동학 몇 명과 함께 바수반두에게 토론하러

     갔는데 바수반두가 다른 곳으로 가버려 바수반두에게 책을 보냈고, 바수반두는 결국 그 논지를

     인정하였다고 한다.

 

또 북천축국에107)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타마사바나[多摩三磨娜,Tamasāvana]108)라 한다. 부처가 살아 계실 때 이곳에 오셔서 설법하시어 인천(人天)109)을 널리 제도하셨다.

이 절 동쪽 계곡의 시내에 있는 샘물 가에 탑이 하나 있는데, 부처가 자른 머리카락과 손톱이 이 탑 안에 있다. 이 절에는 현재 300여 명의 스님이 있고, 절에는 대벽지불(大辟支佛)110)의 어금니와 뼈 사리111) 등이 있다. 또 7,8개의 절이 더 있는데 각각 5,6백 명의 스님이 불법을 잘 지키고 있다.112) 왕과 백성들이 대단히 공경하고 믿는다.

또 산중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나가라다나[那揭羅䭾娜, Nagaradhana]113)이다. 어떤 중국인 스님 한 분이 이 절에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곳의 대덕이 말하기를, “그 스님은 중천축국에서 왔으며 삼장(三藏)114)성스러운 가르침에 밝았습니다. 장차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나서 곧바로 입적하고 말았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파 사운(四韻)의 시를 지어 그의 저승 길을 슬퍼하였다. 오언시는 다음과 같다.

 

고향집 등불은 주인을 잃고

타향의 보배나무 꺾어졌구나

신령스런 혼령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던 모습은 이미 재가 되었구나

생각하니 슬픈 마음만 간절하도다

그대 소원 못 이룸이 서럽구나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리오

돌아가는 흰구름만 부질없이 바라보네.

又從北天國, 有一寺, 名多摩三磨娜. 仏在之日, 來此說法, 廣度人天. 

此寺東澗裏於泉水邊, 有一塔, 則仏所剃頭及剪爪甲, 在此塔中. 

此見有三百餘僧, 寺有大辟支仏牙及骨舍利等. 更有七八所寺, 

各五六百人, 大好住持. 王及百姓等, 非常敬信.
又山中, 有一寺, 名那揭羅馱娜. 有一漢僧, 於此寺身亡, 彼大德說,

“ 從中天來, 明閑三藏聖敎. 將欲還鄕, 忽然違和, 便卽化矣.”
于時聞說, 莫不傷心, 便題四韻, 以悲冥路, 五言.
故里燈無主 他方寶樹摧
神靈去何處 玉皃已成灰
憶想哀情切 悲君願不隨
孰知鄕國路 空見白雲歸
107) 북천축에:현장의『대당서역기』에 “(치나북티국의) 대성 동남으로 5백 여리를 가면 타마사바나

     승가람에 이른다. 승려 3백 여인이 설일체유부를 배운다(『大唐西域記』권4 大51 p.889 b28~29.

     大城東南行五百餘里, 至答秣蘇伐那僧伽藍 [唐言闇林]. 僧徒三百餘人, 學說一切有部.)”고 한 구절

     을 들어 이 북천축 다음에 ‘치나북티[至那僕底, Cinabhukti]국에 가면’이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

     도 있다.
108) 타마사바나[多摩三磨娜, Tamasāvana]:『왕』 다마삼마나(多摩三磨娜), 『대당서역기』지나복저

     (至那僕底)국의 답말소벌나승가람(答秣蘇伐那僧伽藍). 현장이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는 3백 여명

     의 승려들이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학설을 배우고 있었다.
109) 인천(人天):인간계(人間界)와 천계(天界)를 가리킨다. 육도(六道) 중의 두 곳으로 모두 중생이

     깨달음을 얻지 못해 업(業)에 따라 윤회하는 미망(迷妄)의 세계 로서, 지옥, 아귀, 축생, 수라에 이어

     등장하는 선도(善道)에 속한다.
110) 벽지불(辟支佛): pratyeka-buddha. 연각(緣覺), 독각(獨覺)이라 의역한다. 성문(聲聞)·연각·보살

      (菩薩)의 삼승(三乘)의 하나이고, 소승을 둘로 나눈 성문·연각의 이승(二乘)의 하나이다. 스승 없이

     스스로 깨달은 성인을 말한다. 두 가지 뜻이 있는데, 하나는 부처가 없는 시대에 태어나 불법이 이미

     없어졌으나 전생에 닦은 인연으로 스스로의 지혜로 깨달았음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들은 것을 따르지 않고 스스로 깨달아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터득함을 의미한다.
111) 사리(舍利):śarīra. 원래는 죽은 시체나 유골을 뜻한다. 부처가 열반에 든 후 다비하여 얻은 유골을

     8대탑으로 만들어 경배한 후 불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처의 유골을 불골(佛骨)

     또는 불사리(佛舍利)라 한다. 고승이 죽은 뒤 화장하고 남은 뼈 또한 사리라고 하며 이를 봉안한 승탑을

     만들기도 한다. 『금광명경(金光明經)』권4 사신품(捨身品)에는 사리란 계(戒)·정(定)·혜(慧)를 닦아야

     나오는 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112) 주지(住持)는 흔히 절의 책임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나 본래 경전에서 말하는 뜻은 여기서 보는

     것처럼 불법 또는 삼보를 견실하게 지키고 간직하는 것을 말한다.
113) 나가라다나[那揭羅䭾娜, Nagaradhana]:『왕』나게라타나(那揭羅䭾娜), 『자은사삼장법사전』권2에는

     나가라타나(那伽羅馱那). 절 이름이다.『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잘란다라국에 있는 절로서 전달라벌마

     [旃達羅伐摩, Candravarman 한자로는 月胄]라는 삼장이 있어 현장은 이곳에서 넉 달 동안 비바사를 배

     웠다고  하였다.(『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 권2 闍爛達那國 大50 p.232b6~8)

     이에 비해『대당서역기』에는 잘란다라국에 가람 50여개 소가 있다고 하였으나 절 이름은 들지 않았다.
114) 삼장(三藏): tri-pitaka. 경(經)·율(律)·론(論)의 가르침. 장(藏)을 뜻하는 피타카(pitaka)는 그릇, 곡창,

     바구니 등을 뜻한 것이었다. 불교 성전을 분류하는데 경·율·론의 세 가지로 구분하면서 일체의 아는

     것을 모두 담고 있기 때문에 ‘장(藏)’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또는 법을 외워 스승과 제자 사이에

    구전되어 왔으므로 암송을 뜻하는 말로 ‘장’을 사용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일체 교법을 모두 담기 때문에

     그릇의 의미로 ‘장’을 사용했다고도 한다. 삼장 중 경은 부처가 설한 경전으로서 부처의 이치와 중생의

     근기에 맞는 것이라 한다. 율은 부처가 정한 율의(律儀) 곧 교단 생활의 규칙으로서 중생의 잘못을 다스

     리고 중생의 심성을 고르게 하는 것이다. 논은 불전의 뜻에 논의를 더하고 설명한 것으로 후인들의 풀

     이가 더해져 체계화된 해석을 말한다.

 

11. 카슈미르국

 

또 이곳에서 북쪽으로 15일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카슈미르[迦葉彌羅,Kashmir]115)국에 도착한다. 이 카슈미르도 북천축국에 속하는데, 이 나라

는 조금 크다. 왕116)은 코끼리 3백 마리를 가지고 있고, 산 속에서 산다. 길이 험악하여 외국의 침략을 받지 않는다. 인구가 매우 많은데, 가난한 이가 많고 부유한 이는 적다.

왕과 수령과 여러 부자들은 의복이 중천축국과 다르지 않으나 그 밖의 백성들은 모두 모포로 몸의 추한 곳을 가린다.

이 지방 산물로는 구리와 철, 면직물, 모포, 소, 양이 있고, 코끼리, 작은 말, 멥쌀, 포도117) 등이 있다.

기후가 매우 추워 이전의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가을에는 서리가 내리고 겨울에는 눈이 내리며, 여름에는 찬 비가 많이 내려 온갖 초목이 늘 푸르다가 잎이 시들고 겨울이 되면 풀들이 모두 말라 버린다.

시내와 골짜기가 좁아 남북으로는 5일 정도 걸리고, 동서로는 하루만 가면 땅이 끝나며118) 나머지는 모두 산으로 덮여 있다. 지붕은 모두 나무 널

판자로 덮고, 짚이나 기와는 쓰지 않는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매우 공경한다. 나라 안에 용(龍)이 사는 못119)이 하나 있는데, 그 용왕이 매일 천 명의 아라한120) 스님을 공양한다. 아무도 성승(聖僧)들이 음식을 먹는 것을 본 사람은 없지만 공양이 끝나고 나면 빵과 밥이 어지러이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공양이 끊어지지 않고 있다.

왕과 대수령은 외출할 때 코끼리를 타고, 낮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걸어간다. 나라 안에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又從此北行十五日入山, 至迦羅國. 此迦弥羅, 亦是北天數, 此國稍大. 

王有三百頭象, 住在山中. 道路險惡, 不被外國所侵.
人民極衆, 貧多富少. 王及首領諸富有者, 衣着与中天不殊, 自外百姓, 

悉(枝)121)毛毯, 覆其形醜. 土地出, 銅鐵氎布毛毯牛羊,
有象少馬粳米蒱桃之類. 土地極寒, 不同已前諸國. 秋霜冬雪,
夏足霜雨, 百卉亘靑, 葉彫, 冬草悉枯. 川谷狹小, 南北五日程,
東西一日行, 土地卽盡, 餘並蔭山. 屋並板木覆, 亦不用草瓦.
王及首領百姓等, 甚敬三寶. 國內有一龍池, 彼龍王, 每日供養[一千]122)羅漢僧. 

雖無人見彼聖僧食, 亦過齋已, 卽見餠飯從水下紛紛亂上, 

以此得知. 迄今供養不絶. 王及大首領出外乘象, 小官乘馬, 

百姓並皆途步. 國內足寺足僧, 大小乘俱行.
115) 카슈미르[迦葉彌羅, Kashmir]:『왕』가섭미라(迦葉彌羅),『대당서역기』 가습미라(迦濕彌羅). 『왕오

     천축국전』에서는 가라(迦羅), 가미라(迦彌羅)라고도 표기하고 있다. 한위(漢魏) 때는 이 지역을 계빈

     (罽賓)이라 불렀다. 인도 평야에서 신장[新疆]과 티베트로 들어가는 통상로에 해당하며, 중앙아시아

     에 불교를 전한 경로로 추정된다. 현재 인도 서북부인 스리나가르(Srinagar)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현재의 카슈미르 지역은 상당히 넓은 지역을 말하는데 남부는 인도가, 북부는 파키스탄이 각각 점유

     를 주장하고 있어 잠정적으로 나누어 관리하고 있고 아직까지도 국경 분쟁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116) 혜초가 방문했을 때의 카슈미르왕은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지배한 카르코타(Kārkota)왕조의 랄리

     타디티야(Lalitāditya, 724~760)로 추정하지만, 전승에 따라 찬드라피다(Candrāpīda)나 무크타피다

     (Muktāpīda)로 추정하기도 한다.(桑山, p.98)
117) 포도:흔히 포도(葡萄)라고 쓰나『사기(史記)』에서는 포도(蒲陶)라고 하였으며 남북조시대에는

     포도(蒲桃)라고 썼다. 여기서 사용한 포도(蒱桃)는 포도(蒲桃)의 다른 표기이다. 당송대에 쌀과 포도

     는 이곳 카슈미르의 특산으로 알려졌다.
118) 카슈미르 분지는 북서로부터 동남 방향으로 길게 벋어 있는데 길이 135㎞, 너비 40㎞ 정도가 된

     다.
119) 용이 사는 못:당시 카슈미르의 중심지였던 인도 서북 지방 스리나가르(Srinagar)에서 북서쪽

     약 35㎞ 지점에 있는 것으로, 카슈미르 분지 최대의 호수인 울라르(Wular)호를 가리킨다. 예로부터

     카슈미르에서는 용( Nāga)을 이 지역 수호신으로 존숭하였고, 용은 물에 산다고 생각하였다. 용

     숭배는 예부터 이 지역의 민족종교로 여겨져 지금도 지명에는 용이 들어간 이름이 많다고 한다.

     (桑山, p.102)
120) 아라한(阿羅漢):arhat. 성문(聲聞) 사과(四果)의 하나이며, 여래(如來) 십호(十號)의 하나이다.

     응공(應供), 불생(不生), 무생(無生), 무학(無學),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한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윤회 유전하는 욕계·색계·무색계의 삼계(三界)에서 이치를 보고서 끊는 견혹(見惑)과 수도하여

     끊는 감각적·육체적·정의적안 사혹(思惑)을 다 끊고 참 앎을 증득하였으므로 마땅히 세간의 큰

     공양을 받을 만한 성인을 가리킨다. 이 과위(果位)는 대승(大乘)·소승(小乘)에 공통되지만 일반적

     으로 소승불교에서 얻는 최고의 과위를 뜻한다.
121) 필사본의 枝는 被의 잘못으로 추정됨.
122) 필사본의 千一은 一千의 잘못임을 수정 부호로 밝힘.

 

오천축국의 풍습

 

오천축국의123) 법에 위로는 국왕과 왕비, 왕자에서부터 아래로는 수령과 그의 처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각기 스스로 절을 짓는데, 서로따로 짓지 함께 절을 짓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기를, “각자의 공덕인데 어찌 함께 지어야 하는가?” 라고 하니 이 말도 그럴 듯하다. 다른 왕자들도 그러하다. 절을 지어 공양하는 경우에는 곧 마을과 백성을 보시(布施)하여 삼보를 공양하도록 하는 것이며, 헛되이 절만 짓고 백성을 보시하지 않는 일은 없다.

외국의 법은 왕과 왕비는 각각 따로 마을과 백성을 소유하고, 왕자와 수령도 각각 백성을 소유한다. 보시하는 것은 자유여서 왕에게 묻지 않는다.124) 절을 짓는 것도 마찬가지로 절을 지어야 하면 짓고 왕에게 묻지 않으며, 왕도 감히 막지 못하니 죄를 받을까 두려워해서이다. 만약 부유한

백성이 마을에 보시하지 않았다면 힘써 절을 지어 스스로 경영하여 얻은 물건으로 삼보에게 공양한다. 오천축국에서는 사람을 팔지 못하기 때문에

노비가 없어서 반드시 백성과 마을에 보시해야 한다.

五天國法, 上(至國王)125)王妃王子, 下至首領及妻, 隨其力能,
各自造寺也. 還別作, 不共修營. 彼云 “各自功德, 何須共造?”
此旣如然. 餘王子等亦爾. 凡造寺供養, 卽施村庄百姓供養三寶, 

無有空造寺, 不施百姓者. 爲外國法. 王及妃姤, 各別村庄百姓, 

王子首領, 各有百姓. 布施自由, 不(問)王也. 造寺亦然,
須造卽造, 亦不問王, 王亦不敢遮, 怕招罪也. 若富有百姓,

雖無村庄布施, 亦勵力造寺, 以自經紀得物, 供養三寶. 爲五天不賣人, 

無有奴婢, 要須布施百姓村薗也.
123) 여기서 오천축의 풍속을 정리하여 기술한 것은 혜초가 카슈미르까지를 천축의 범위로 여겼던

     것을 말해준다. 이는 현장이 발로르나 간다라, 우디야나, 람파카등까지 북인도에 포함하여 보았

     던 것과 다르다.
124) 이 부분의 원문은 ‘不(問)王也’로 ‘問’자가 빠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 줄에 바로 이어진 문장에 

     ‘亦不問王’이란 구절이 이를 반증한다.
125) 필사본에 이에 이어 기록된 至國王 3자는 중복된 글자라서 삭제함.
12. 대발로르국·양동국·사파자국

또 카슈미르에서 동북쪽으로 산을 넘어 15일을 가면 곧 대발로르[大㔜律, Balor]126)국과 양동(楊同)127)국과 사파자(娑播慈)128)국이다. 이 세 나라는 모두 티베트 관할에 속한다.129) 의복과 언어, 풍속이 모두 다르며, 가죽외투와 면직물 상의, 가죽신, 바지 등을 입는다. 땅이 협소하고 산천이 매우 험하다.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삼보를 공경하고 믿는다. 

여기보다 동쪽에 있는 티베트 같은 곳은 전혀 절이 없고 불법을 모르지만130), 이 땅은 호(胡)131)인들이므로 불법을 믿는다.132)
又迦葉弥羅國東北隔山十五日程, 卽是大㔜律國, 楊同國,

娑播慈國. 此三國, 並屬吐蕃所管. 衣着言音人風並別, 

着皮裘氎衫靴袴等也. 地狹小, 山川極險. 亦有寺有僧, 敬信三寶. 

若是已東吐番, 惣無寺舍, 不識佛法, 當土是胡, 所以信也.
126) 대발로르[大㔜律, Balor]국:『왕』 대발율(大㔜律),『대당서역기』발로라(鉢露羅). 지금의

     발티스탄(Baltistan) 지방으로 카슈미르 지방의 북쪽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교통의 요충지여서

    여러 문헌에 이름이 등장한다.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는 발로륵(鉢廬勒),『신당서(新唐書)』

     「서역전(西域傳)」(권221하)은 포로(布露)라고 하였다. 7세기 중엽 이후 발로르[㔜律, Balor]는

     대발로르와 소발로르로 분열하여, 대발로르는 현재의 발티스탄(Baltistan) 지방을 근거로 하였

     고 소발로르는 대발로르보다 서북 지역으로 현재의 파키스탄 동북부 끝 지역인 길기트(Gilgit)

     지방을 근거로 하였다. 이후 대발로르는 티베트 지배하에, 소발로르는 당의 세력권 안에 들어

     갔다.(桑山, p.108) 당에서는 발로르의 통치자를 왕으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인도의 소

     통에 이곳이 중요한 지역이고 서쪽으로 아랍, 남쪽으로 티베트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이들 지금의 발티스탄 지방은 동쪽은 라다크, 서쪽은 길기트 지방과 접한 지역으로 히말라야

     산계의 서쪽에 해당하며 해발고도 7,000m 이상의 고봉이 솟아 있고 빙하지대가 있다. 인더스

     강의 상류지역에 해당하며, 마을은 계곡 사이에 드문드문 있다.
127) 양동(楊同):『당서(唐書)』에서는 양동(羊同)이라고 쓴다. 카슈미르 동남부에서 서티베트에

     이르는 지역 곧 라다크(Ladakh) 동부에서 구게(Guge)에 이르는 사이의 지역으로 추정한다.

     (桑山, p.107)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교류가 있었으나 7세기 중반에 티베트에 멸망당하였다.
128) 사파자(娑播慈):인도 서북부의 라다크(Ladakh) 지방에 있는 레(Leh)의 서쪽으로, 인더스강

     에서 알치(Alchi) 대안에 있는 근세에 사포체(Sa spo rtse)로 불리는 지역으로 추정한다.(桑山,

     p.107) 카슈미르의 중부 지역으로 카슈미르의 중심지인 지금의 스리나가르에서 동쪽에 있다.

     『일체경음의』의 해당 부분에는 파파자(婆簸慈)로 되어 있다.
129) 이 세 나라는 모두 티베트 관할에 속한다:티베트는 7~9세기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교통의 간선을 장악하였다. 발로르, 양동, 사파자 등은 모두 중앙 티베트에서 서북으로 향한

     길에 존재하고 있다. 티베트에서 가장 가까운 양동이 티베트에 복속된 것은 643~645년이다.

     혜초가 방문한 무렵(725~728년경)에는 이미 발로르·양동·사파자·수바르나고트라가 티베트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혜초의 이 기록이 앞의 세 나라가 티베트의 영역이 되었다고

     명시한 최초의 기록이라고 한다.
130) 티베트에 절이 없고 불법을 모른다고한 것은 정확하다고 할 수 없다. 티베트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손첸 캄포왕(재위 629~650)의 왕비인 당의 문성(文成)공주에 의해서였고 현조

     (玄照)를 후원하여 사란달라국에 보냈다는 등의 설화가 알려져 있다. 그리고 라사에는 7세기

     불교 사원이 건립되었던 것이 확실하며 혜초가 순력한 시기의 왕인 티데 츠쿠첸왕(재위 712~

     754)은 당의 금성(金城)공주를 맞아들여 이때 불교를 지원하였으나 왕이 죽은 후 다시 위축

     되었다. 그래서 티베트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다음 대인 티손 데첸왕(재위 755~796) 때였다.

     이때까지는 일반인들에게 불교가 잘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혜초가 전해 들었던 카슈미르에는

     티베트 불교의 사정이 상세하게 알려지지 않았고, 그래서 혜초는 불법을 모른다고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131) 호(胡):중국에서 진한(秦漢) 이전에는 흉노(匈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는데, 진대부터

     사이(四夷)가 공식화됨에 따라 서융(西戎) 또는 서호(西胡)라고 불리게 되어 서쪽의 외국인을

     가리키게 되었다. 남북조시대에는 서방의 이란인 특히 소그드인을 가리키기도 하고, 나아가

     변경 밖 민족의 범칭으로 사용되었다. 수당(隋唐) 때는 특히 신장[新疆], 티베트[西藏], 내몽고

     (內蒙古) 등과 몽고에서 러시아에 이르는 일대를 가리켰다. 수대 이후에는 인도는 호에 포함

     되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호는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과 국가를 가리킨다.
132) 호인들이므로 불법을 믿는다:투르크[突厥]인이 불교를 믿지 않는 데 대한 상대적 표현인

     듯하다. 현재 서티베트를 포함한 파미르 남부에 불교 내용을 포함한 암벽화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13. 티베트국

 

이보다 동쪽에 있는 티베트[吐番, Tibet]133)국은 순전히 얼어붙은 산과 눈 덮인 산과 골짜기 사이에서 사는데, 모직 천막을 치고 산다. 성곽이나 가옥은 없어서 거처하는 곳이 투르크[突厥, Turk]134)와 비슷하다. 물과 풀을 따라 이동하여 왕은 비록 한 곳에 있지만 역시 성이 없고, 모직 천막135)에 의지해 생활할 뿐이다.

이 지방 산물로는 양과 말, 야크,136) 모포, 베 등이 있다. 의복은 털옷과 베옷과 가죽외투인데, 여자들도 그러하다.

다른 나라와 달리 기후가 매우 춥다. 집에서는 항상 보릿가루 음식을 먹고 빵과 밥은 가끔 먹는다.

국왕과 백성들이 모두 불법을 알지 못해 절이 없다.

이 나라 사람들은 모두 땅을 파서 구덩이를 만들어 누워 자고 침대나 의자는 없다.

람들이 매우 검고, 흰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언어가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다들 이[虱] 잡아먹는 것을 좋아하는데, 털옷과 베옷을 입기 때문에 이가 매우 많다. 이를 잡으면 바로 입 안에 던져 넣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已東吐番國, 純住氷山雪山川谷之間, 以氈帳而居, 無有城墎屋舍.

處所与突厥相似, 隨逐水草. 其王雖在一處, 亦無城, 但依氈帳以爲居業. 

土地出, 羊馬猫牛毯褐之類. 衣着毛褐皮裘, 女人亦爾. 土地極寒, 

不同餘國. 家常食麨, 少有餠飯. 國王百姓等, 惣不識仏法, 無有寺舍. 

國人悉皆穿地作坑而臥, 無有床席. 人民極黑, 白者全希. 言音与諸國不同. 

多愛喫虱, 爲着毛褐, 甚饒蟣虱. 捉得便抛口裏, 終不棄也.
133) 티베트[吐番, Tibet]:『왕』토번(吐番)·토번(吐蕃),『대당서역기』토번(吐蕃). 7세기 초에서

     9세기 중엽까지 활동한 티베트왕국 및 티베트인에 대한 당(唐)·송(宋) 때의 호칭이다. 티베

     트인들은 스스로를 보에(Boe)라고 불렀으나 중국 사람들은 이들을 토번이라 칭했으며 이

     호칭은 티베트왕국이 망한 후에도 14세기 무렵까지 사용되었다. 토번의 조상은 원래 네팔

     북서부에서부터 카슈미르 동쪽 사이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4,5세기 경에는

     동부 티베트의 캄으로 이동하여 더욱 강성해졌다. 6세기 후반에는 중앙 티베트 남부에 거

     점을 두고 대두하기 시작한 이들 일부가 왕조의 기초를 만들고, 손첸캄포왕 말기부터 국가

     체제를 정비하여 강대한 나라를 이룩하였다. 동왕이 죽은 후 토욕혼(吐谷渾)의 귀속을 둘

     러싸고 당나라와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에 의한

     기동력을 활용하여 8세기 후반 이후에는 당나라로부터 서역(西域)의 지배권을 빼앗기도

     하였으나 같은 무렵 성행하기 시작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2년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이상적 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군사국가로서 운영상의 모순으로

     866년 당에 멸망당하였다.  
134) 투르크[突厥, Turk]:『왕』 돌궐(突厥),『대당서역기』돌궐(突厥). 민족 이름이자 나라

     이름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철륵(鐵勒)·돌궐(突厥)의 각 부족을 포괄하고, 좁은 의미로는

     돌궐칸국(突厥汗國)만을 가리킨다. 6세기 초 금산(金山, 지금의 아미태산)서남쪽 산기슭

     에서 처음 일어나 하나의 유목부락이 되었고, 552년 오르혼(Orkhon)강 유역에 정권을

     세워 6세기 후반에 서역 제국을 지배하고 요동만에서 카스피해, 바이칼호에서 고비사막

     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였다. 문자를 만들고,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중원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서역과 교역하는 등 동서문

     명 교류에 큰 자취를 남겼다. 583년에 분열하여 동투르크, 서투르크로 나뉘었다. 서투

     르크는 658년 당나라에 복속되었고, 동투르크는 8세기 중엽에 분열하여 745년에

     그중에서 위구르제국이 일어났다.(정수일, pp.400~403) 이때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타지키스탄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쿤두즈(Kunduz) 지방에 본거를 두고 25주를 통치

     하였다.
135) 유목을 하고 사는 티베트인들의 거처는 중국 사서에 불려(拂廬)로 나오는 이동식 

     텐트인 장막이다.
136) 야크:yak. 묘우(猫牛). 티벳에 많이 서식하는 털이 길고 많은 소. 소와 비슷하나

     몸집이 크고 어깨가 솟아올라 있으며 네 다리는 짧고 단단한데 몸 아래쪽에 긴털이 났고

     몸 빛깔은 검은빛을 띤 갈색이다. 인도 북부와 중앙아시아, 티베트의 고원에서 많이

     자라며 야크에서 젖·고기·가죽·털 등을 얻고 짐을 나르는 데  이용한다. 이 털을 이용

     하여 옷이나 천막 등을 만든다.

 

14. 소발로르국

 

또 카슈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 산을 넘어 7일을 가면 소발로르[小勃律, Balor]137)국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중국의 관할에 속한다. 의복과 풍속, 음

식과 언어가 대발로르국과 비슷하다. 면직 상의와 가죽신을 착용한다. 수염과 머리를 자르고 머리 위에 면직 천을 한 장씩 두르며, 여인은 머리를

기른다. 가난한 이가 많고 부유한 이는 적다.

산천이 협소하여 농사가 많지 않다. 산이 메마르고 황량하여 원래부터 나무나 여러 가지 풀이 없다.

발로르국은 원래 소발로르국 왕이 사는 곳이었는데 티베트의 침입을 받아 (대발로르국 왕이) 소발로르국으로 도망와서 주저앉았다. 수령과 백성은 대발로르국에 남고 오지 않았다.

又迦葉弥羅國西北隔山七日程, 至小㔜律國, 此屬漢國所管.
衣着人風飮食言音, 与大㔜律相似. 着氎衫及靴. 剪其鬚髮,
頭上纏疊布一條, 女人在髮. 貧多富少. 山川狹小, 田種不多.
其山憔杌, 元無樹木及於諸草. 其大㔜律, 元是小㔜律王所住之處, 

爲吐番來逼, 走入小㔜律國坐. 首領百姓, 在彼大㔜律, 不來.
137) 소발로르[小㔜律, Balor]:『왕』소발율(小㔜律),『대당서역기』발로라(鉢露羅), 『신당서

     (新唐書)』 「서역전(西域傳)」(권221하) 포로(布露). 지금의 파키스탄 동북부 끝 지역인

     길기트(Gilgit) 지방. 7세기 중엽 이후 발로르(㔜律)는 대발로르와 소발로르로 분열하여

     대발로르는 현재의 발티스탄(Baltistan) 지방을 근거로 하였고 소발로르는 현재의 길기트

     (Gilgit) 지방을 근거로 하였는데, 대발로르는 티베트 지배하에, 소발로르는 당의 세력권

     안에 들어갔다. 당(唐)의 서쪽 관문에 해당하는 나라로,『신당서(新唐書)』「토번전(土蕃傳)」

     (권141)에는 722년에 소발로르국을 공격하면서 발로르는 당의 서문(西門)이니 이를 잃으

     면 서문의 모든 나라가 티베트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니 지켜야 한다고 하기도 하였다.

     혜초가 이 지역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소발로르가 당의 관할이 되었다.(桑山, p.114)

     지금의 길기트 지방은 인더스강의 원류인 길기트강과 훈자(Hunza)강 유역으로서 북쪽은

     타림분지, 서쪽은 아프가니스탄, 동쪽은 티베트, 남쪽은 인더스강 유역과 연결되어 고대

     부터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다. 길기트 강가의 도시인 길기트가 이 지역의 중심지이다.

 

15. 간다라국

 

또 카슈미르국에서 서북쪽으로138) 산을 넘어 한 달 정도 가면 간다라[建馱羅, Gandhāra]139)에 도착한다.

이곳의 왕과 군대는 모두 투르크인이고, 토착민들은 호인(胡人)이며 브라만[婆羅門, brāhmana]140)도 있다.

이 나라는 옛날에 카피시[罽賓, Kāpiśī]141)국의 왕이 다스렸는데142) (당시) 투르크왕의 아버지143)가 한 부락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카피시국왕에게 투항하였다가 그 뒤 투르크 군대가 강성해지자 카피시국왕을 죽이고 스스로 나라 왕이 되었다. 이 일로 (간다라는) 투르크 패왕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144)

이 나라 북쪽은 모두 산 속에 살고 있는데, 산은 모두 메말라서 풀과 나무가 없다. 의복과 풍속, 언어와 기후가 다른 나라와 다르다. 의복은 가죽외

투나 면직물 상의, 가죽신, 바지 등을 입는다. 토질은 보리와 밀에 적합하고, 기장이나 조, 벼는 전혀 없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릿가루와 빵을 먹는다.

카슈미르국, 대발로르국, 소발로르국, 양동국 등을 제외하고, 이 곳 간다라국이나 오천축국, 곤륜국(崑崙國)145) 등에는 모두 포도는 전혀 없고,

사탕수수는 있다.

이 투르크왕은 코끼리 5백146) 마리를 가지고 있고, 양과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며, 낙타, 노새, 나귀들도 매우 많다.

중국 지역에서 호(胡)와 무역147)할 때는 (5자 쯤 빠짐) 돌아서 지나가지 못한다.

남쪽을 향하면 도로가 험악해져서 습격하는 도적이 매우 많다. 여기에서 북쪽으로는 악업(惡業)을 짓는 자가 많아 시장, 상점에서 짐승을 도살하는 자가 매우 많다.

이곳 왕은 비록 투르크인이지만 삼보를 깊이 공경하고 믿는다. 왕과 왕비, 왕자, 수령들이 각각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다. 이 나라 왕은 매

년 두 번 무차대재(無遮大齋)148)를 열어 몸에 지니고 즐겨 사용하던 물건과 처, 코끼리, 말 등을 모두 내어 보시한다. 다만 처와 코끼리만은 스님에게 값을 매기게 하여 왕이 값을 치르고 다시 돌려받으며, 그 밖에 낙타, 말, 금, 은, 의류, 가구는 스님들이 팔게 하여 자신들의 생활에 사용하도록 한다. 이왕은 다른 북쪽의 투르크왕과 같지 않다. 여자도 마찬가지여서 각자 절을 지어 공양을 베풀고 보시한다.

이 성은 인더스(Indus)149)강[辛頭大河]을 굽어보는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 성에서 서쪽으로 3일 정도 가면 큰 절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바수반두[天親, Vasubandhu]150)보살과 아상가[無着, Asanga]151)보살이 살던 절로서 절 이름을 카니슈카[葛諾歌, Kaniska]사152)라 부른다. 절에는 큰 탑이 하나 있는데, 항상 빛을 발한다. 이 절과 탑은 옛날에 카니슈카왕이 만들었으므로 왕의 이름을 따라 절의 이름을 붙였다.153)

또 이 성에서 동남쪽으로 (글자 빠짐)리 가면 부처가 과거에 시비[尸毗, Śibi]왕154)이 되어 비둘기를 구해 주던 곳이니, 현재 절도 있고 스님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부처가 과거에 머리를 보시하였던 곳155), 눈을 보시하였던 곳156), 다섯 야차(夜叉)가 먹게 한 곳157)도 모두 이 나라 안에 있으니158) 이 성의 동남쪽 산 속에 있다. 각각 절이 있고 스님이 있어 지금도 공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나라는 대승과 소승이 함께 행해지고 있다.

又從迦葉弥羅國西北隔山一月程, 至建馱羅. 此王及兵馬, 惣是突厥,

土人是胡, 兼有婆羅門. 此國舊是罽賓王王化, 爲此突厥王阿耶, 

領一部落兵馬, 投彼罽賓王, 於後突厥兵盛, 便煞彼罽賓王, 自爲國主. 

因玆國境突厥覇王. 此國已北並住(山)159)中, 其山並燋, 無草及樹.

衣着人風言音節氣並別. 衣是皮毯氎衫靴袴之類. 土地宜大麥小麥, 

全無黍粟及稻. 人多食麨及餠. 唯除迦葉弥羅大㔜小㔜楊同等國, 

卽此建馱羅國乃至五天崑崙等國, 惣無[蒱](桃)160), (唯有)161)甘蔗. 

此突厥王象有五(百)162)頭, 羊馬無數, 駝騾驢等甚多.

漢地興胡□□□□□迴不過. 向南爲道路險惡, 多足劫賊. 從玆已北, 

(惡)163)業者多, 市店之間, 極多屠煞. 此王雖是突厥, 甚敬信三寶. 

王王妃王子首領等, 各各造寺, 供養三寶. 此王每年兩廻設無遮大齋, 

但是緣身所愛用之物妻及象馬等, 並皆捨施. 唯妻及象, 令僧斷價, 

王還自贖, 自餘駝馬金銀衣物家具, 聽僧貨賣, 自分利養. 

此王不同餘已北突厥也. 兒女亦然, 各各造寺, 設齋捨施. 

此城俯臨辛頭大河北岸而置. 此城西三日程, 有一大寺, 

卽是天親菩薩无着菩薩所住之寺, 此寺名葛諾歌. 有一大塔, 每常放光. 

此寺及塔, 舊時葛諾歌王造, 從王立寺名也. 又此城東南□里, 

卽是佛過去爲尸毗王救鴿處, 見有寺有僧. 又佛過去捨頭捨眼, 

餧五夜叉等處, 並在此國中, 在此城東南山裏. 各有寺有僧, 

見今供養. 此國大小乘俱行.
138) 현재의 지역으로 보면 간다라는 카슈미르에서 서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간다고 해야 맞다.

     아마 혜초는 직선 방향인 서쪽으로 바로 가지 않고 당시 경로를 따라 방향을 바꾸어 가느라

     그렇게 표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39) 간다라[建馱羅, Gandhāra]:『왕』건타라(建馱羅), 『대당서역기』건타라(健馱邏).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로, 인도 옛 문헌에 일찍부터 등장한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는 카불국의
     속국이었다. 푸루샤푸라( Puruśapura)에 도성이 있다. 현재는 파키스탄 북서변경주(North-
     West Frontier Province)의 페샤와르(Peshwar)현에 속하며, 인더스강의 지류인 카불강 하류
     평원지대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이 지역에서 고대 중앙아시아와 서부아시아의 여러 문화가
     교류하였다. 이민족이 서쪽에서 인도로 오는 통로이기도 했으며, 북쪽으로 서역을 지나 중국

     에 이어졌고, 불교와 같은 인도문화가 동쪽에서 와서 다른 세계로 전파되는 길목이기도 하였

     다. 특히 서기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Alexandros)대왕이 침입한 이후 헬레니즘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서기 1세기 쿠샨왕조 때부터 인도 불교미술과 서방 문화가 결합한 독특

     한 간다라 불교문화를 이루게 되었고, 이는 2세기 카니슈카( Kaniska)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

     다. 간다라식 불상과 불탑 그리고 불교사원이 간다라 중심지 페샤와르를 중심으로 스와트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지금도 수많은 유적지가 남아 있다. 5세기 중반에 에프탈

     (Hephtalites)에게 점령되었고 7세기에는 투르크가 지배하였다.
140) 브라만[婆羅門]: brāhmana. 정행(淨行)·범행(梵行)·범지(梵志)라 한역한다. 인도 4종성(種

     姓) 가운데 최상위인 승려, 학자 계급이다. 범천(梵天)의 입에서 태어났다고 전하며, 용모가

     단정하고 청정·고결하며, 제사 주관을 업으로 한다. 『마노법전』에 규정된 바라문의 6가지     

     의무는 베다를 익힘, 베다를 가르침, 자신을 위해 제사 주관, 다른 사람을 위해 제사 주관, 보

     시를 행함, 보시를 받음이다. 여기서 말하는 간다라의 브라만이 인도 사성계급의 브라만을 가

     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41) 카피시[罽賓, Kāpiśī]:『왕』계빈(罽賓),『대당서역기』가필시(迦畢試). 카피시의 토착왕조인 

     킹갈(Khin3 gāl)조가 7세기 말에 카불(Kābul)왕조에 의해 찬탈되어, 7세기말~8세기의 계빈은

     카불을 가리킨다. 7세기 중반에 카피시는 당에 조공하며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하의 수선

     도독부(修鮮都督府)에 예속되었다. 719년에 당 조정이 카피시 왕을 책봉하여 투르크 계통의

     호칭인 갈라달지특근(葛羅達支特勤)을 가졌는데, 이후 이 칭호는 계속 이어졌다. 738년에는

     카피시왕 오산특근쇄(烏散特勤灑)가 자신이 연로하여 아들인 불림계파(佛林罽婆)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을 당에 요청하여 이를 허락하였다고 한다.(桑山, pp.117~118)
142) 원래 카피시 왕이 다스렸다는 것은, 토하라에서 북서인도에 걸쳐 위세를 과시한 에프탈

     (Hephthalites)이 서투르크의 침공으로 6세기 중엽에 쇠락한 뒤에 새롭게 일어난 카피시가

     카피시 지방으로부터 인더스강 서안까지의 카불강 유역을 지배하였던 토착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143) 아버지:아야(阿耶)는 아버지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투르크 왕의 아버지는 바르하 테긴

     (Barha Tegin)으로 추정된다.(桑山, p.118)
144) 투르크 패왕과 나라 경계를 접하게 되었다:투르크 패왕은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서부 

     쿤두즈(Kunduz) 지방에 본거를 두고 25주를 직접 통치하던 투르크 전체의 지배자를 말한다.

     이 투르크 패왕이 간다라와 경계를 맞대게 되었다는 것은 혜초가 방문했을 때의 일이 아니라

     그 이전 7세기 말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라고 한다.
145) 곤륜국(崑崙國):중국의 곤륜에는 곤륜산(崑崙山)으로 유명한 서역지방의 곤륜과 남양의 

     곤륜이 있는데, 여기서는 서역의 곤륜을 말한다.『서경(書經)』에 등장하는 말로, 춘추전국시대에

     청해(靑海) 방면에 살던 민족을 가리킨다. 당시 중국인은 청해 방면에서 구슬을 수입하였는데,

     한(漢)나라 때 중앙아시아의 사정을 알게 되어 구슬의 원산지인 호탄[于闐]의 남산(南山)에 이

     이름을 붙였다. 곤륜산맥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146) 원문에는 ‘五’이지만 왕이 소유한 코끼리 숫자로는 너무 적어 다른 나라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五百’의 잘못으로 추정된다.
147) 무역:興의 번역어. 이익을 일으키는 무역, 상업으로 해석한다.
148) 무차대재(無遮大齋): pañca-vārsika-maha. 불교에서 거행하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큰 행사로, 

     보시(布施)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무차란, 일체를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모든 악에서 벗어나며,

     신분의 귀하고 천함[貴賤], 출가자와 재가자[僧俗],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선악(善惡)을 구분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등하게 대함을 의미한다. 재(齋)는 스님과 일반인에게 음식을 공양하는 것을 뜻

     하는데, 어떤 차별도 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특히 어려운 이들에게 공양하는 행사로 실시되었다.

     인도에서는 원어의 뜻에서 보는 것처럼 5년마다 열리는 무차대재가 있었다하며, 중국에서는

     양나라 무제(武帝)가 529년에 동태사(同泰寺)에서 사부대중(四部大衆, 출가한 남녀승, 재가의

     남녀 신도)을 모아 무차대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많이 열렸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개최되었다.
149) 인더스(Indus)강:신두대하(辛頭大河)로 번역한다. 인도 북서부와 파키스탄 지역을 흐르는 큰 

     강으로 강가( Gangā)·브라마푸트라( Brahma-putra)와 함께 인도 지방의 3대강을 이루고 있는

     강이다. 인디아(India)라는 말도 이 강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티베트 남서쪽 카일라스 산맥 북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1,100㎞를 북서방향으로 흘러 카슈미르 지방의 북부를 거쳐 시작하여 라다크

     (Ladakh) 산지를 횡단하여 북쪽에서 남쪽으로 파키스탄 전체 영역을 흘러 카라치 근처의 아라비

     아해로 들어간다. 길이 3,180㎞, 유역 면적 116만 5,500㎢이다. 중류 지역은 5개의 강이 나뉘어

     흐르다 합쳐지므로 펀자브(Punjab, 다섯 개 강의 땅이라는 뜻)지방으로 부른다. 서기전 2500년경

     에 꽃피었던 인더스문명이 이 강을 모체로 이루어졌다. 그 후 북서쪽으로부터 진입해 온 아리아인

     이 가장 먼저 정주한 곳도 인더스강 중류의 펀자브 지방이며,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인도 원정을

     시작으로 20세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침략이나 전쟁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150) 바수반두[天親, Vasubandhu]:현장 이전에는 천친(天親)으로 한역(漢譯)하였는데, 현장부터 

     세친(世親)으로 번역하였다. 혜초는 다시 천친의 번역어를 쓰고 있다. 인도 대승불교(大乘佛敎)

     유가행파(瑜伽行派)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다. 4~5세기경 북인도 간다라국 사람으로 국사(國師)인

     바라문 카우시카( Kauśika, 憍尸迦)의 둘째아들이다. 처음에 형 아상가[無着]와 함께 설일체유부

     (說一切有部)에 출가하였다가 무착은 바로 대승(大乘)에 들어가고 세친은 경량부(經量部)에 들어

     갔다. 이 때 바수반두는 대승은 부처가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며 비방하였는데, 아상가에게 교화되

     어 대승의 이치를 깨닫고 대승불교 유가행파의 기초를 닦았다. 주요 저술로는『아비달마구사론

     (阿毘達磨俱舍論)』30권,『십지경론(十地經論)』12권,『법화경론(法華經論)』2권,『정토론(淨土論)』

     1권,『섭대승론석(攝大乘論釋)』15권,『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1권,『불성론(佛性論)』4권 등이 있

     다.
151) 아상가[無着, Asanga]:인도 대승불교 유가행파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바수반두의 형이다. 

     처음에 설일체유부에 출가하여 소승공관(小乘空觀)을 깨달았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신통력으로 도솔천(兜率天)에 가서 미륵보살(彌勒菩薩)로부터 대승공관(大乘空觀)을 받아왔다고

     한다. 뒤에도 자주 도솔천에 가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등 대승의 깊은 뜻을 배워와 사람들에

     게 전파하였다. 주요 저술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3권,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20권, 『대승

     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7권, 『금강반야경론(金剛般若經論)』2권, 『순중론(順中論)』

     2권 등이 있다.
152) 카니슈카[葛諾歌, Kaniska]사:카니슈카왕이 세운 절. 카니슈카는『왕』 갈락가(葛諾歌), 『대당

     서역기』 가니색가(迦膩色迦)로 번역. 대월지(大月氏)인들이 세운 쿠샨( Kusāna)왕조의 제3대 왕.

     펀자브지역에서 파미르와 파르티아에 걸친 큰 나라를 이룩하였다. 대외 교통을 크게 열어 로마에

     까지 사신을 보내고 풍족한 경제로 동서문화를 융합한 간다라 불교미술을 꽃피우게 하였다. 불교

     를 보호하여 절과 탑을 세우고 카슈미르에서 5백 나한을 모아 『대비바사론』을 편찬하였다. 카니슈

     카왕의 불교 신앙은 아쇼카왕에 버금가는 것으로서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쿠샨왕조가

     북인도의 힌두쿠시지방을 차지하고 있을 때 인도와 중국과의 문화교류가 촉진되어 불교가 중국으

     로 전해지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서기 1세기 중반에 대월지국에 사신을 보내 불전을 전해오도록

     한 것이 중국불교의 초전이라고 전해온다. 지루가참(支婁迦讖)과 지겸(支謙) 등 대월지 출신  

     승려들이 중국에 많이 건너와 중국불교의 초석을 다졌다.
153)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도 카니슈카왕이 세운 절을 소개하였다. 간다라국 편에서 유명한 카니슈

     카대탑(작리부도雀離浮圖라 기록, 페샤와르 인근 샤지키데리 Shāh-jī-ki-Dherī에서 이 탑의 유적이

     발굴되어 카니슈카대왕 사리용기가 출토되었음)을 소개하고 그 탑 서쪽에 카니슈카왕가람이 있다고

     하였다.(『大唐西域記』권2 健馱邏國 大51 p.880 b15) 그리고 혜초와는 달리 이 절에 협(脇)존자의 방,

     세친이 『구사론』을 지은 방, 여의(如意)논사가 『비바사론』을 지은 곳 등이 있다고 하였다.
154) 시비[尸毗, Śibi]왕:부처가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의 이름이다. 부처의 본생담으로 유명하며, 

     인도 고대 문학에 자주 등장한다. 하루는 시비왕이 매가 비둘기를 쫓아 잡아먹으려는 것을 보았는데,

     비둘기가 날아와 왕의 겨드랑이 아래로 피하자 왕은 자신의 살을 베어 매에게 주어 비둘기를 살려주었

     다고 한다. 이때 비둘기는 화신(火神)이 변한 것이며 매는 제석천이 변한 것으로서 왕의 자비심을 시험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 이 이야기는 『현우경(賢愚經)』(권1, 1 梵天請法六事品)이나『보살본행경(菩

     薩本行經)』등에 실려 있다. 『법현전(法顯傳)』에서는 시비왕 이야기를 서술하고, 이 곳에 세운 탑이 인도

     4대탑 가운데 하나라고 하였다. 『대당서역기』도 같은 내용을 싣고 있는데,그 위치는 우디야나국이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155) 부처가 과거에 머리를 보시하였던 곳:부처가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 월광왕(月光王)으로서 머리를 

     보시하였다는 본생담. 부처가 과거세에 발타기바성(跋陀耆婆城)의 월광왕이 되어 통치를 잘 하였는데,

     이웃 나라의 비마사나(毘摩斯那)왕이 이를 시기하여 바라문을 보내 왕의 머리를 달라고 하자 월광왕은

     자기가 과거세에 9백99두를 보시하고 이제 머리를 보시하면 천개를 채운다고 하면서 스스로 머리를 주

     었다고 한다. 『현우경(賢愚經)』(권6, 31 月光王頭施品)이나 『보살본연경(菩薩本緣經)』등에 실려 있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법현의 『불국기』에서는 이곳이 타크실라(Taxila)라고 하였다.
156) 눈을 보시하였던 곳:부처가 과거에 보살행을 닦을 때 눈을 보시하였다는 본생담. 부처가 과거세에 

     수제라(須提羅, 快目이라는 뜻)왕이 되어 나라를 잘 다스렸는데, 이웃에 파라타발미(波羅陀跋彌)라는

     왕이 있어 통치를 잘못하므로 한 대  신이 왕을 죽이려 하다 발각되자 수제라왕 밑에 와서 있게 되었다.

     그 대신이 파라타발미를 치려 하자 파라타발미는 눈 먼 바라문을 보내 보시하기 좋아하는 수제라왕의

     눈을 달라고 하였고, 이에 수제라왕이 두 눈을 내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현우경(賢愚經)』(권6, 32

     快目王眼施緣品)이나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등에 실려 있다. 현장은『대당서역기』에서 간다라국의

     카니슈카왕 가람 근처라고 하였다.
157) 다섯 야차가 먹게 한 곳:부처와 초전법륜 대상인 교진여(憍陳如) 등 다섯 비구와의 과거세 이야기이다. 

     옛날 미구라발라(彌佉羅拔羅)왕이 있어 항상 십선(十善)으로 백성은 물론 역귀(疫鬼)들도 가르쳐 태평하

     였는데 영내에 다섯 야차가 있어 항상 사람의 피를 먹고 살았다. 백성들이 십선을 행하므로 야차들이 이를

     먹을 수 없어 굶주림에 지쳐 왕에게 가서 배고픔을 해소해줄 것을 부탁하였고, 왕은 자신의 신체 다섯 곳을

     베어 야차들이 신선한 피를 마시게 하였다. 미구라발라왕은 부처의 전신이고, 다섯 야차는 부처가 처음

     설법했던 다섯 비구의 전신이다. 『현우경(賢愚經)』(권2, 13 慈力王血施品)이나 『보살본생만론(菩薩本生

     鬘論)』등에 실려 있다.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우디야나국의 몽게리성 근처라고 하였다.
158) 혜초는 부처의 전생담으로 유명한 이 네 가지 유적지가 모두 간다라국 경내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장은 머리 보시한 곳과 눈 보시한 곳이 간다라국에 있고, 시비왕 본생처와 다섯 야차 먹인 곳은 우디

     야나국에 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인다. 이곳 간다라지방은 카니슈카왕 시대에 불교미술의 중심지가 되고

     대승경전이 편찬되는 등 대승불교가 크게 발달하여 불교 중심 지역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곳이 부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전승들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발자취인 불족석(佛足石, 우디야나국에

     있었다 한다)이 있다고 하는 것 등이 그런 예이다. 여기서 든 네 가지 이야기는 부처의 전생 이야기이므로

     부처의 실제 생애 곧 부처가 활동했던 지역과 직접 연관될 필요는 없지만, 이런 이야기 역시 이곳이 불교의

     중심지라는 의식에서 생겨난 것으로 이해된다.
159) 山이 누락된 것으로 추정됨
160) 蒱桃로 추정됨.
161) 唯有로 추정됨.
162) 의미상 五는 五百의 잘못으로 추정됨
163) 필사본의 西는 惡의 잘못으로 추정됨

 

16. 우디야나국

 

또 이 간다라국에서 정북쪽으로 산으로 들어가 3일 정도 가면 우디야나[烏長, udyāna]164)국에 도착하는데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

울지인나(鬱地引那)라 부른다. 이 나라 왕은 삼보를 매우 공경하며, 백성과 마을 사람들은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여 공양하고,

작은 몫은 집에 남겨두어 (스님에게) 의식을 공양한다. 재(齋)를 올려 공양하는 것은 매일의 일상사이다.

절도 많고 스님도 많은데 스님이 속인보다 조금 많다. 오로지 대승법만 행해지고 있다.

의복과 음식, 풍속이 간다라국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같지 않다.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등이 풍부하다. 기후가 매우 차다.

又從此建馱羅國, 正北入山三日程, 至烏長國, 彼自云鬱地引那.

此王大敬三寶, 百姓村庄多分, 施入寺家供養, 少分自留,
以供養衣食. 設齋供養, 每日是常. 足寺足僧, 僧稍多於俗人也. 

專行大乘法也. 衣着飮食人風, 与建馱羅國相似, 言音不同. 

土地足駝騾羊馬氎布之類. 節氣甚冷.
164) 우디야나[烏長, Uddiyāna]:『왕』 오장(烏長), 『대당서역기』오장나(烏仗那). 파키스탄 북부의 스와트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로서 지금의 스와트(Swat) 지방이다. 조금 아래의 페샤와르를 중심으로한

     간다라 지역과 동일 문화권에 속해 사원건축과 불상 등 불교문화가 발달하여 지금도 유적지가 많다.

     역대의 여행기에서 불교가 융성하다고 하였는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불교가 점점 쇠퇴하는 중에

     있다고 하였지만 주술에 능하다고 하여 밀교계 불교가 있었음을 말해주며 소승 5부파의 계율이 전해지

     고 있다고도 하였다. 혜초는 왕성한 불교신앙과 행사를 기록하고 있어 이때는 다시 불교가 부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혜초가 지날 때는 이미 당의 책봉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책부원귀(冊府元龜)』권964

     에는 혜초가 여행하던 무렵인 720년에 오장국왕과 골돌(骨咄)국왕, 구위(俱位)국왕에게 당에서 사신을

     보내 책봉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이 세 나라가 중국의 서쪽에 있으면서 아랍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아랍에 따르지 않고 당과 친선 관계를 갖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745년 기사에서는

     계빈국왕이 오장국왕을 겸하도록 하여 정세가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桑山, p.127)

 

17. 쿠위국

 

또 우디야나국에서 동북쪽으로 산에 들어가 15일 정도 가면 쿠위 [拘衛,Kuwi]국165)에 도착하는데, 그곳 사람들은 스스로

사마갈라사(奢摩褐羅闍)166)국이라 부른다.

이 나라 왕도 삼보를 공경하고 믿어 절도 있고 스님도 있다.

의복과 언어가 우디야나국과 비슷하여 면직 상의와 바지 등을 입는다.

양과 말 등도 있다.

又從烏長國東北入山十五日程, 至拘衛國, 彼自呼云奢摩褐羅闍國.

此王亦敬信三寶, 有寺有僧. 衣着言音, 与烏長國相似, 着氎衫袴等. 

亦有羊馬等也.
165) 쿠위[拘衛, Kuwi]:『왕』구위(拘衛), 『대당서역기』 상미(商彌). 『당서(唐書)』 구위(俱位).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 쿠나르(Kunar)강 상류의 치트랄(Chitral) 지방, 치트랄과 마스투지(Mastuj) 사이로

     비정된다.(桑山, p.128) 지금의 스와트 지방인 우디야나의 서북쪽에 있으므로 혜초가 동북으로 15일

     간다고 한 것과 방향이 다르다.
166) 사마갈라사(奢摩褐羅闍):정확한 추정은 어렵지만 사마라자( Śamarājā), 즉 사마( Śama, 商彌)의 

     성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18. 람파카국

 

다시 이 간다라국에서 서쪽으로 산에 들어가 7일을 가면 람파카[覽波, Lampāka]167)국에 도착한다.

이 나라에는 왕은 없고 대수령이 있는데, 역시 간다라국 관할에 속한다.

의복과 언어가 간다라국과 비슷하다.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삼보를 공경하고 믿는다.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又從此建馱羅國西行入山七日, 至覽波國. 此國無王, 有大首領,
亦屬建馱羅國所管. 衣着言音, 与建馱羅國相似. 亦有寺有僧, 
敬信三寶. 行大乘法.
167) 람파카[覽波, Lampāka]: 『왕』람파(覽波), 『대당서역기』람파(濫波).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카불(Kābul) 인근 카불강 중류 지역의 라그만(Laghmān) 지방으로 추정된다.(桑山, p.129) 카불과

     가깝고 카이버 고개(Khyber Pass)를 넘어 간다라와도 이어진다. 현장은 히말라야산을 등에 지고

     나머지 세 면은 눈이 없는 산이라 하였는데, 히말라야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다. 이 시기에 카불지방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카불과 통하는 람파카의 위상도 커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19. 카피시국

 

또 이 람파카국에서 서쪽으로 가서 산에 들어가 8일이 지나면 카피시국[Kāpiśī, 罽賓國]168)에 도착하는데, 이 나라도 역시 간다라국왕의 관할이다. 이 왕은 여름에는 카피시국에 있으면서 서늘한 곳을 따라 지내고 겨울에는 간다라국에 가서 따뜻한 곳을 따라 지낸다.169) 그곳에는 눈이 없고 따뜻하여 춥지 않지만, 카피시국은 겨울에 눈이 쌓여 추워진다.

이 나라의 토착민은 호인(胡人)이고, 왕과 군대는 투르크인이다.170)

의복과 언어, 음식이 토하라[吐火羅, Tokhara]171)국과 대부분 비슷하고 조금 다르다. 남자, 여자 구분 없이 모두 면직물 상의와 바지, 가죽신을 착용하여 남녀 의복이 차이가 없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나귀, 소, 면직물, 포도, 보리, 밀, 울금향(鬱金香)172) 등이 난다.

나라 사람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하고 믿어 절도 많고 스님도 많다. 백성들은 집집마다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다. 큰 성 안에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사히스[沙糸, Śāhis]173)사이다. 절 안에 현재 부처님의 나발(螺髮)174)과 뼈175) 사리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왕과 관리와 백성들이 매일 공양한다. 이 나라는 소승이 행해지고 있다.

이 곳 사람들도 산 속에 사는데, 산 정상에 초목이 없어 마치 불에 탄 산 같다.

又從此覽波國(西)176)行入山, 經於八日程, 至罽賓國,

此國亦是建馱羅王所管. 此王夏在罽賓, 逐凉而坐, 冬往建馱羅,

趂暖而住. 彼卽無雪, 暖而不寒, 其罽賓國, 冬天積雪, 爲此冷也.
此國土人是胡, 王及兵馬突厥. 衣着言音食飮, 与吐火羅國大同少異. 

無問男之与女, 並皆着氎布衫袴及靴, 男女衣服, 無有差別. 

男人並剪鬚髮, 女人髮在. 土地出駝騾羊馬驢牛氎布蒱桃大小二麥鬱金香等. 

國人大敬信三寶, 足寺足僧. 百姓家各並造寺, 供養三寶. 大城中有一寺, 

名沙糸寺. 寺中見佛螺髻骨舍利見在, 王官百姓每日供養. 此國行小乘. 

亦住山裏, 山頭無有草木, 恰似火燒山也.
168) 카피시국[ Kāpiśī, 罽賓國]: 『왕』계빈(罽賓), 『대당서역기』 가필시(迦畢試). 카피시(Kāpiśī)는 현장

     [迦畢試]과 의정 등 몇 경우 외에는 한자로 옮길 때 모두 계빈으로 기록하였으며, 카불을 옮긴 것으로

     생각되는 말은 없다고 한다. 7세기말~8세기의 계빈은 카불(Kābul) 지방을 가리키는데, 카피시의

     토착왕조인 킹갈(Khingāl)조가 7세기 말에 카불왕조에 의해 찬탈되었기 때문이다. 카피시 지방의

     도시 유적으로는 베그람(Begram)이 있고, 지금의 카불시 지역인 발라 히사르(Bālā Hisār) 주변에

     성벽과 불교 유적이 남아 있어 그곳을 구체적인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桑山, p.130)
169) 현장은 간다라국왕이 철따라 다른 곳에서 지내니 봄가을에는 간다라, 여름에는 인도 여러 나라,

     겨울에는 카피시국에서 지낸다고 하였다.(『大唐西域記』권1 迦畢試國, 大 51 p.873c27~29)
170) 이 나라 토착민은 호인(胡人)이고, 왕과 군대는 투르크인이다:카피시국은 호(胡)에 해당하지만

     간다라의 지배를 받고 있으므로 카피시왕이 곧 간다라왕이다. 당시 간다라왕은 투르크인이었기

     때문이다.
171) 토하라[吐火羅, Tokhara]: 『왕』 토화라(吐火羅), 『대당서역기』도화라(都貨邏).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 일대의 넓은 지역에 해당한다. 넓게 볼 때 하토하라(아무다리야강 남쪽, 발흐 서쪽)와 상토하라

     (발흐 이동, 힌두쿠시 이북)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172) 울금향(鬱金香):백합과의 식물, 또는 백합으로 만든 향수를 말한다. 『대당서역기』권 2에도 울금향

     향수를 뿌린다는 기록이 있다.
173) 사히스사[沙糸寺, Śāhis Temple]:지금의 카불시 일대에 불교사원 유적은 테페 카자나(Tepe Khazana)

     등 몇 군데가 있어 이들이 사히스사의 후보가 될 수 있다.(桑山, p.132) 현장의 『대당서역기』 가필시국

     (迦畢試國)에는 옛 왕의 절[舊王伽藍]에 여래의 정골(頂骨) 한 쪽과 머리카락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옛 왕의 절을 사히스사로 보기도 한다.
174) 나발(螺髮):혜초는 나계(螺髻)라고 기술하였는데, 이는 부처의 머리가 소라모양처럼 오른쪽으로

     돌아나 말려 있는 모습을 말하는 나발(螺髮)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비해 부처의 머리 위에

     둥근 상투 모양의 살이 솟아난 것을 육계(肉髻, usnīsa-śiraskatā)라 하는데, 이 육계는 선행을 하고 중

     생을 교화하는 등의 수행의 결과로 생기는 것으로서 존귀함을 상징한다. 나발과 육계는 부처의 형상을

     상징하는 32상 80종호의 하나이다.
175) 뼈:부처의 진신 뼈.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옛 왕의 절[舊王伽藍]에 머리뼈[頂骨] 한 조각이

     있는데, 너비 한 치 남짓에 황백색이며 머리카락 구멍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처의 머리카락도

     있는데, 색깔은 청감색으로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말려 있어 길이가 펴면 한 자, 말면 5푼 정도가 된다고

     하였다.(『大唐西域記』권2 迦畢試國 大51 p.875a16~18. 其伽藍東南有一伽藍, 亦名舊王. 有如來頂骨一片,

     面廣寸餘, 其色黃白, 髮孔分明. 又有如來髮, 髮色青紺, 螺旋右縈, 引長尺餘, 卷可半寸.) 혜초가 말한 나계

     골(螺髻骨)은 이 정골과 머리카락이 소라처럼 말려 있는 모습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176) 필사본의 而는 西의 잘못으로 추정됨.

 

20. 자불리스탄국

 

또 이 카피시국에서 서쪽으로 7일을 가면 자불리스탄[謝䫻, Zābulistān]177)국에 도착하는데, 그 곳 사람들은 스스로 사호라살타나(社護羅薩他那)178)라고 부른다.

토착민은 호인(胡人)이고, 왕과 군대는 투르크인이다. 그러나 왕은 카불왕의 조카로, 스스로 부락과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이 나라에 살면서 다른 나라에 복속되지 않고 숙부에게도 복속되지 않았다. 이 나라 왕과 수령은 비록 투르크인이지만,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투르크 출신 대수령이 한 사람 있어 이름이 사탁간(娑鐸幹)이라고 하는데, 매년 한 번씩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금은을 보시하는데 그곳 왕보다도 많다.

의복과 풍속, 토산물이 카피시 국과 비슷하지만 언어는 매우 다르다.

又從此罽賓國西行[七日至]179)謝䫻國, 彼自呼云社護羅薩他那.

土人是胡, 王及兵馬卽是突厥. 其王卽是罽賓王姪兒, 自把部落兵馬, 

住[於此]180)國, 不屬餘國, 亦不屬阿叔. 此王及首領, 雖是突厥, 

極敬三寶, 足寺足僧, 行大乘法. 有一(大突厥)181)首領名娑鐸幹, 

每年一廻設金銀無數, 多於彼王. 衣着人風土地所出, 与罽賓王相似, 

言音各別.
177) 자불리스탄[謝䫻, Zābulistān]: 『왕』 사율(謝䫻), 『대당서역기』 조구타(漕矩吒).『신당서(新唐書)』에

     의하면, 측천무후(則天武后) 시대에 지금의 호칭 즉 사율(謝䫻)로 고쳤다고 한다. 현재 아프가니스탄

     남부지역에 카불 남서쪽의 가즈니(Ghazni)와 칸다하르 사이에 자볼(Zābol)주가 있다. 이런 위치로

     보면 혜초가 카피시에서 서쪽으로 7일을 갔다는 것은 처음에 서쪽길로 향해서 가다가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갔다고 해야 맞는다.
178) 사호라살타나(社護羅薩他那):자불리스탄을 도성을 뜻하는 일반명사인 사흐리스탄(Śahristān, 페

     르시아어 계통)으로 불렀거나, 자구리( Jāghūri)라는 지명을 음역한 것으로 추정한다.(桑山, p.139)

     살타나(薩他那)는 스타나( sthāna) 즉 지방, 나라의 뜻을 지닌다.
179) 필사본의 至七日은 七日至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180) 필사본의 此於는 於此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181) 필사본의 大突厥은 突厥大의 잘못으로 추정됨.

 

21. 바미얀국

 

또 자불리스탄국에서 북쪽으로 7일을 가면 바미얀[犯引, Bāmiyān]182)에 도착한다. 이 나라 왕은 호인(胡人)이다.

다른 나라에 복속되지 않았으며,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여러 나라가 감히 침략하지 못한다.

의복은 면직물 상의와 가죽외투와 모직물 상의 등을 입는다.

이 지방 산물로는 양, 말, 면직물 등이 있고 포도가 매우 많다.

기후는 눈이 오고 매우 추워 대개 산에 의지해서 산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법과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와 자불리스탄국등의 사람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는다.

풍속은 대부분이 카피시국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도 많다. 이 곳의 언어는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又從謝䫻國北行七日, 至犯引國. 此王是胡. 不屬餘國, 兵馬强多, 

諸國不敢來侵. 衣着氎布衫皮毬氈衫等類. 土地出羊馬氎布之屬, 

甚足蒱桃. 土地有雪極寒, 住多依山. 王及首領百姓等, 大敬三寶, 

足寺足僧, 行大小乘法. 此國及謝䫻等, 亦並剪於鬚髮. 人風大分, 

与罽賓相似, 別異處多. 當土言音, 不同餘國.
182) 바미얀[犯引, Bāmiyān]: 『왕』범인(犯引), 『대당서역기』범연나(梵衍那). 6세기 후반 북방의 토하라를

     서투르크가 침략하여 약화시키자 일어난 나라이다. 힌두쿠시 산맥 서단,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지역으로 카불과 토하라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현장이 방문했을 때 높이 1백 4,50척과 1백척의 큰 두

     불상이 있다고 하였는데, 최근까지 잘 남아 있다가 2001년에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이 일부러 폭파

     하여 높이 53m와 35m의 불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22. 토하라국

 

또 이 바미얀국에서 북쪽으로 20일 가면 토하라[吐火羅, Tokhara]183) 이 사는 성에 도착하는데, 이름이 박트리아[縛底耶, Bactria]184)이다. 지금 아랍 군대에게 진압당하여185) 왕은 쫓겨나 동쪽으로 한 달 걸리는 바다흐샨[蒱特山, Badakhshān]186)에 살고 있다. 그래서 아랍 관할에 속한 것을 볼 수 있다.

언어가 여러 나라와 다르며,187) 카피시국과 조금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같지 않다.

의복은 가죽외투와 면직물 등으로 만든 옷을 입는데,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죽외투를 겉옷으로 입는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포도가 풍부하다. 음식은 오직 빵을 좋아한다.

기후가 추워 겨울에는 서리와 눈이 내린다.

국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깊이 공경하여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지만 외도를 섬기지는 않는다.

남자는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이 지방에는 산이 많다.

又從此犯引國北行卄日, 至吐火羅國, 王住城, 名爲縛底耶.
見今大寔兵馬在彼鎭押, (其王被)188)逼, 走向東一月程,

在蒱特山住. 見屬大寔所管. 言音與諸國別. 與罽賓國少有相似,
多分不同. 衣着皮毬氎布等, 上至國王, 下及黎庶, 皆以皮毬爲上服. 

土地足駝騾羊馬氎布蒱桃. 食唯愛餠. 土地寒冷, 冬天霜雪也. 

國王首領及百姓等, 甚敬三寶, 足寺足僧, 行小乘法. 

食(肉)189)及蔥(韮)190)等, 不事外道. 男人並剪鬚髮, 女人
在髮. 土地足山.
183) 토하라[吐火羅, Tokhara]: 『왕』 토화라(吐火羅), 『대당서역기』도화라(都貨邏).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에 걸쳐 있던 나라. 아무 다리야  강의 북부 지방이다. 토하라라는 이름은

     서기전 2세기 박트리아 기록에서 나오기 시작하며,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4세기까지는 쿠샨왕조에

     속하였다. 5~6세기에는 에프탈의 통치 하에 있었고, 7세기에는 투르크의 통치를 받다 아랍에 정복당

     하였다. 당나라 때 중국과 교류하여 『당서』에 토화라(吐火羅)전이 수록되어 있다. 중국 기록에는 지중

     해에 이르는 세 갈래 길 중에서 천산남로를 지나 와한-토하라-바미얀 등을 거쳐 지중해에 이르는 길이

     소개되기도 하였다. 『대당서역기』에는 토하라가 27개국으로 나뉘어 있으며, 동쪽은 파미르, 서쪽은

     페르시아, 남쪽은 힌두쿠시, 북쪽은 철문(鐵門)에 이르는 지역으로서 동서 3천리, 남북 1천리에 이른

     다고 하였다. 이때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에서 타지키스탄 일대에 이르는 지역으로 쿤두즈(Kunduz)

     지방에 본거를 두고 25주를 통치하였다.
184) 박트리아[縛底耶, Bactria] 『왕』박저야(縛底耶), 『대당서역기』박갈(縛喝).토하라의 수도 남씨성

     (藍氏城)으로,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발흐(Balkh)를 가리킨다고 보는데, 왕이 사는 성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桑山, p.147) 박트리아는 서기전 3세기에 그리스인이 세웠다가 서기전 2세

     기에 대월지(大月氏)에게 멸망한 나라로서 대하(大夏)라고 알려졌는데, 그 도읍이 이 박트리아였다.
185) 아랍-무슬림군의 동방 진출은 651년부터 시작되어 바스라(Basra) 총독 압둘라 이븐 아미르(Abd

     Allāh ibn Amir)의 군대가 호라산(Khorāsān)에 진군하고 그후 발흐까지 원정하였다. 이후 아랍 지배에

     대한 반란과 재공격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704년에 ‘중앙아시아의 정복자’로 불렸던 호라산 총독

     쿠타이바(Qutaybah)가 파견되어 하 토하리스탄(아무다리야강 남쪽, 발흐 서쪽)과 부하라(Bukhara),

     상 토하리스탄(발흐 이동, 힌두쿠시 이북), 사마르칸드(Samarqand), 페르가나(Ferghana) 등을 지배

     하였다. 715년 새 할리파의 즉위에 따라 쿠타이바가 죽은 뒤에도 아랍은 주요 지역을 계속 지배하였고

     730년에는 쥬네이드(Junayd)가 호라산 총독에 취임하였다. 이들 아랍의 지배를 받던 나라들은 과중한

     세금 부과에 힘들어 하며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아랍과 고구려 출신의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이끄는 당 사이에 751년에 탈라스(Talas)전투가 벌어졌는데, 여기서 이슬람군이

     승리함으로써 이 지역 일대의 이슬람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혜초의 이곳 방문은 쿠타이바와

     쥬네이드 사이의 시기에 해당한다.(桑山, pp.147~150)
186) 바다흐샨[蒱特山, Badakhshān]: 『왕』 포특산(蒱特山), 『대당서역기』 발탁창나(鉢鐸創那).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동부 끝 지역의 좁고 긴 지역이 바다흐샨(Badakhshān)주이고, 이와 국경을 맞댄

     타지키스탄의 동부도 바다흐샨 주이다. 금, 은, 루비 등의 보석 광산이 있어 부유한 사람이 많고

     상인들이 모여든다.
187) 박트리아어는 토하라국의 문어(文語)이고, 힌두쿠시 남쪽으로부터 아무다리야강 북쪽, 소그드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桑山, pp.153~154)
188) 필사본에 이어 있는 其王被의 3자는 중복된 글자로 추정되어 삭제함.
189) 필사본의 內는 肉의 잘못으로 추정됨.
190) 필사본의 蕜는 韮의 잘못으로 추정됨.

 

23. 페르시아국

 

또 토하라국에서 서쪽으로 한 달을 가면 페르시아[波斯, Persia]191)국에 도착한다.

이 나라 왕이 예전에는 아랍을 관할하여 아랍은 페르시아왕의 낙타를 방목하는 처지였으나 뒤에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왕을 죽이고 자립하여 왕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라는 도리어 아랍에게 병탄되었다.

의복은 옛부터 폭이 넓은 면직 상의를 입고, 수염과 머리를 깎는다.

음식은 빵과 고기만 먹어 비록 쌀이 있어도 갈아서 빵을 만들어 먹는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이 나고, 덩치가 큰 나귀와 면직물, 보물이 난다.

언어가 유별나서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이 지방 사람들의 성품이 교역을 좋아하여 항상 서해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들어가 싱할라[師子, Sinhala]192)국에 가서 여러 보물을 가져오므로 그 나라에서 보물이 난다고들 말한다.

또한 곤륜국(崑崙國)193)에 가서 금을 가져오고, 배를 타고 중국에도 가는데 곧장 광주(廣州)194)에 가서195) 무늬 있는 비단과 비단, 명주실과 면 등을 가져온다.

이 지방 산물로는 가늘고 질 좋은 면직물이 난다.

나라 사람들이 살생을 좋아하며, 하늘을 섬기고 불법은 알지 못한다.

又從吐火羅國西行一月, 至波斯國. 此王先管大寔, 大寔是波斯王放駝戶, 

於後叛, 便煞彼王, 自立爲主. 然今此國, 却被大寔所呑. 衣舊着寬氎布衫, 

剪鬚髮. 食唯餠肉, 縱然有米, 亦磨作餠喫也. 土地出駝騾羊馬, 

出高大驢氎布寶物. 言音各別, 不同餘國. 土地人性, 愛興易, 常於西海, 

汎舶入南海, 向師子國取諸寶物, 所以彼國云出寶物. 亦向崑崙國取金, 

亦汎舶漢地, 直至廣州, 取綾絹絲綿之類. 土地出好細疊. 國人愛煞生, 

事天, 不識佛法.
191) 페르시아[波斯, Persia]: 『왕』파사(波斯), 『대당서역기』 파랄사(波剌斯). 여기서 말하는 페르시아는

     사산조 페르시아에 해당하는데, 사산조 페르시아는 651년에 아랍에게 멸망당하여 이때는 나라의

     실체는 없던 때이다. 그러나 혜초가 페르시아에 이어 아랍을 나란히 기술한 것처럼 중국에서는

     아랍시대 이후에도 아랍과 페르시아를 병칭하기도 하였다.(張毅, pp.106~107) 아랍은 이란 동부

     일대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동부 지역에 호라산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이슬람 지리서에

     따르면 토하라에서 호라산의 4대 도시(발흐Balkh, 메르브Merv, 헤라트Herat, 니샤푸르(Nishapur) 중

     가장 서쪽에 있는 니샤푸르(이란 북동부 끝에 있는 라자비 호라산Razavi Khorasan 주의 도시 네이샤

     부르(Neyshabur)에 이르는데 30일 전후가 걸린다는 기록이 혜초가 1개월만에 페르시아에 도착한다고

     기록한 여정과 같다고 한다. 한편 페르시아라는 말이 파르스(Fārs)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 이란의

     남서부에 위치한 파르스주의 중심 도시 쉬라즈(Shiraz)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경우 2개월이 걸려

     야 갈 수 있다고 한다.(桑山, pp.155~156) 혜초가 기술한 1개월 여정으로 보면 페르시아를 호라산 소속

     의 니샤푸르로 볼 수도 있다.(정수일, p.343) 그런데 그 다음에 기술한, “아랍이 여기서 북쪽으로 10일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나온다”는 것과 견주어 보면 아랍의 위치를 비정할 수 없다. 그래서 혜초의 기술

     중에서 방향과 시간을 변경하여 토하라에서 서남쪽(원문은 서쪽)으로 2개월(원문은 1개월) 걸리는

     페르시아의 중심지로서 페르세폴리스가 있던 이란 남서부 파르스 주의 쉬라즈로 볼 수 있고, 여기서

     서북(원문은 북쪽)으로 20일(원문은 10일) 걸려 7세기 중반 한때 아랍의 도읍이었던 이라크 쿠파(Kufa)

     지방에 이른다는 기술로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桑山, pp.155~156) 페르시아는 서기전 2세기에 파르티

     아(Parthia, 安息)를 성립시켜 한 무제의 서역 진출로 중국과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이곳 출신의 안세고

     (安世高)와 같은 승려들이 중국불교의 초기 전래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기 2세기에 파르티아에

     이어 등장한 사산조 페르시아도 지속적으로 중국과 교류를 가졌다.
192) 싱할라[師子, Sinhala]:싱할라 드비파(Sinhala dvīpa, 사자의 섬이라는 뜻), 즉 실론(Ceylon) 섬, 현재

     의 스리랑카(Sri Lanka)를 가리킨다. 이곳에는 진주 어장이 있고 산에는 루비와 사파이어 광산이 있으며

     침향, 황금, 보석 등의 진귀한 물건이 많이 난다고 전하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93) 곤륜국(崑崙國):중국의 곤륜에는 곤륜산(崑崙山)으로 유명한 서역지방의 곤륜과 남양의 곤륜이

     있는데, 여기서는 남양의 곤륜을 말한다. 지금의 메콩 델타 지역 동남쪽에 있는 콘 손(Con Son)섬으로

     추정한다.(桑山, p.158) 이 섬에는 살고 있던 흑인종이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피부가 검고

     곱슬머리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으며, 여기서 나아가 남해 해상 일대의 흑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였다. 족명 외에 지명이나 바다 이름으로도 불렸으며, 이런 유래에 따라 중국에서는 삼국시대

     이후에 남해의 흑인노예를 곤륜노(崑崙奴)라고 불렀다.
194) 광주(廣州):현재 중국 광동성(廣東省)의 성도(省都)이자 화남(華南) 지방 최대의 무역도시이다. 일찍이

     한(漢) 때부터 외국무역을 시작하였고, 당(唐)·송(宋)때 급격히 발전하여 멀리 페르시아, 아랍과도 교역하

     였다. 해로로 인도에 가는 구법승들의 대륙 출발지이기도 하여 혜초도 이곳에서 바닷길을 시작했을 것이

     라고 추정한다.
195) 페르시아와 광주의 직항로 개통은 당의 출현 이후라고 한다. 중국의 가탐(賈耽, 730~805)이 지은「광주

     통해이도(廣州通海夷道)」에는 33곳의 경유지를 거쳐 1백일 걸리는 해로의 노정과 일정을 상세하게 기술

     하였다고 한다.(정수일, p.355)

 

24. 아랍국

 

또 페르시아국에서 북쪽으로 10일을 가서 산으로 들어가면 아랍[大寔, Arab]국196)에 도착한다. 그 왕은 본국에 살지 않고 현재 소비잔틴제국[小拂

臨國]197)에 살고 있는데 그 나라를 쳐서 얻기 위해서다. 소비잔틴제국에서도 섬에 사는데, 거처하는 곳이 너무나 짐승우리 같지만 그 나라를 얻기 위해 이렇게 한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모포가 생산되고, 보물도 있다.

의복은 가는 모직으로 만든 통이 넓은 상의를 입고, 상의 위에 또 면직물 한 장을 걸쳐 겉옷으로 한다. 왕과 백성의 의복이 한가지로 구별이 없다. 여자도 통이 넓은 상의를 입는다. 남자는 머리는 깎고 수염은 기르며,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음식을 먹을 때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같이 한 그릇에 함께 먹고, 손으로는 수저도 잡는다.

성질이 아주 나빠 자기 손으로 잡아 먹어야 무량한 복을 얻는다고 말할 정도로 나라 사람들이 살생을 좋아한다.

하늘을 섬기며198), 불법을 알지 못한다. 국법에 무릎 꿇고 절하는 법이 없다.

又從波斯國北行十日入山, 至大寔國. 彼王[不住]199)本國, 

見向小拂臨國住也, 爲打得彼國. 彼國復居山島, 處所極窂, 

爲此就彼. 土地出駝騾羊馬疊布毛毯, 亦有寶物. 衣着細疊寬衫, 

衫上又披一疊布, 以爲上服. 王及百姓衣服, 一種無別, 女人亦着寬衫. 

男人剪髮在鬚, [女人]200)在髮. 喫食無問貴賤, 共同一盆而食, 

手把亦匙筯耶. 見極惡, 云自手煞而食, 得福無量, 國人愛煞. 事天, 

不識佛法. 國法無有跪拜法也.
196) 이때의 아랍국은 우마이야(Umawiyah)왕조의 말기인 히샴(Hishām, 724~743) 치하이다.(김정위,

     앞의 책, p.143) 당시 아랍의 우마이야 왕조는 지금의 시리아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두고 각지에

     총독을 파견하여 통치하였다. 혜초가 여기서 말한 아랍 본국은 쿠파(혹은 메디나)로 생각된다. 왕이

     본국에 살지 않고 다마스쿠스에 살고 있다고 한 표현이 이를 말해 준다. 혜초가 페르시아에서 북쪽

     으로 10일을 가면 아랍에 이른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아랍은 다마스쿠스가 아닌

     7세기 일시 아랍의 중심지였던 이라크의 쿠파 일대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97) 소비잔틴제국[小拂臨國]: 『당서(唐書)』에 불림(拂菻)·불림(拂臨)·불림(拂菻)·불림(拂林) 등으로

     표기된다. 이란어족이 로마를 지칭하는 프롬(Frōm/Hrōm)에 대해서 자주 사용하는 한자 표기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 Byzantine Empire)을 가리킨다. 대불림이 동로마 본부 지역을 가리킨 데

     비해 소불림은 소아시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다마스쿠스(Damascus)를 중심으

     로 한 시리아 지방에 해당한다. 7세기에 아랍의 중심이 메디나에서 쿠파로 옮겼다가 7세기 후반     

     우마이야왕조 때는 다마스쿠스에 도읍을 두었다. 혜초의 기술은 이 사실을 말하고 있다.
198) 페르시아 사람들이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조로아스터교(Zoroaster)를 믿는 것을 말한다. 배화교

     (拜火敎) 혹은 현교(祆敎)라고 하는 조로아스터교는 서기전 7세기 경 예언자 짜라투스트라

     (Zarathustra, 그리스어로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서,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믿는데 인간은 선신(善神)의 축복과 보호 아래 악신(惡神)과 싸우며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에 오늘날의 이란 동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페르시아에

     이르는 지역에 전파되었고, 후에 사산조 페르시아시대에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아 발전시켰다.

     불을 숭배한다는 뜻인 배화교라는 이름은 신자들은 불이 타오르는 제단 앞에서 제례를 치르며 봉헌

     물에 불꽃과 냄새를 피워 경배했던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199) 필사본의 住不는 不住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200) 필사본은 人女는 女人의 잘못임을 수정부호로 밝힘.

25. 비잔틴제국

 

또 소비잔틴제국에서 바다를 끼고 서북쪽이 곧 비잔틴제국[大拂臨國, Bynzantine Empire]201)이다.

이 나라 왕은 군대가 강하고 많아서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아랍이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정복하지 못했고, 투르크도 침입하였으나 정복하지 못했다.

이 지방 산물로는 보물이 많고,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등이 매우 풍부하다.

의복은 페르시아국이나 아랍국과 비슷하고, 언어는 각각 달라 같지 않다.

又小拂臨國傍海西北, 卽是大拂臨國. 此王兵馬强多, 不屬餘國.

大寔數廻討擊不得, 突厥侵亦不得. 土地足寶物, 甚足駝騾羊馬疊布等物. 

衣着与波斯大寔相似, 言音各別不同.
201) 비잔틴제국[大拂臨國, Byzantine Empire]:대불림(大拂臨)은 동로마제국 곧 비잔틴 제국(Byzantine

     Empire)을 가리킨다. 중국 사서에 나오는 불림(拂臨) 또는 불름(拂菻)이라는 표기는 이란어족이 로마를

     지칭하는 프롬(Frōm/Hrōm)을 말할 때 사용하는 한자 표기로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가리킨다.

     소불림이 소아시아 지방을 가리킨 데 비해, 대불림은 동로마 본부 지역을 가리킨다. 지금의 이스탄불인

     비잔티움(Byzantium,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도읍을 마련하고 4세기부터 15세기까지 1천년

     이상 존속하였다. 그리스와 터키를 중심으로 넓은 영역을 차지하던 비잔틴 제국의 지정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로마 제국의 고전적 전통 및 중세 가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동방문화가 교차하였다. 스텝의 유목

     민족과 슬라브족, 동방의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랍 이슬람 및 투르크와 끊임없이 접촉하며 다원화된

     제국으로 성장했으며, 실크로드와 지중해 상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26. 호국[부하라국, 카부단국, 키쉬국, 타쉬켄트국, 펜지켄트국, 사마르칸드국]

 

또 아랍국 동쪽은 모두 호국(胡國)202)이니, 부하라국[安國, Bukhārā]203), 카부단국[曹國, Kabūdhan]204), 키쉬국[史國, Kish]205), 타쉬켄트국[石騾國, Tashkent]206), 펜지켄트국[米國, Penjikent]207), 사마르칸드국[康國, Samarqand]208) 등이다. 비록 각자 왕이 있지만, 모두 아랍 관할에 속한다.209) 나라가 협소하고 군대가 많지 않아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등이 난다. 의복은 면직물 상의와 바지등과 가죽외투를 입는다.

언어가 여러 나라와 같지 않다.

또한 이 여섯 나라는 모두 조로아스터(Zoroaster)교210)를 섬기며, 불법은 알지 못한다.211)

사마르칸드국에만 절이 하나 있고 스님도 한 분 있지만, 불법을 이해하고 공경하지 않는다.

이들 호국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면직212) 모자 쓰는 것을 좋아한다.

풍속이 지극히 나빠서 혼인을 서로 뒤섞여 하여 어머니나 누이나 여동생을 처로 맞아들이기도 한다. 페르시아국도 어머니를 처로 맞아들이고, 토하라국·카피시국·바미얀국·자불리스탄국 등에서는 형제가 10명이건 5명, 3명, 2명이건 함께 한 명의 처를 맞이하고 각각 한 명의 부인을 맞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집안 살림이 무너질까 염려해서이다.

又從大寔國已東, 並是胡國, 卽是安國, 曺國, 史國, 石騾國,
米國, 康國等. 雖各有王, 並屬大寔所管. 爲國狹小, 兵馬不多,
不能自護. 土地出駝騾羊馬疊布之類. 衣着疊衫袴等及皮毬.
言音不同諸國.
又此六國, 惣事火祆, 不識佛法. 唯康國有一寺有一僧, 又不解敬也. 

此等胡國, 並剪鬚髮, 愛着白氎帽子. 極惡風俗, 婚姻交雜, 

納母及姉妹爲妻. 波斯國亦納母爲妻, 其吐火羅國乃至罽賓國 犯引國 謝䫻國等, 

兄弟十人五人三人兩人, 共娶一妻, 不許各娶一婦, 恐破家計.
202) 호국(胡國):타쉬켄트를 제외하면 아랄해에서 발원하는 두 강인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사이의

     땅인 트란스옥시아나에 위치한 소그드(Sogd) 오아시스 도시국가들을 호국이라 하고 있다. 간다라,

     바미얀, 카슈미르 등에 호인(胡人)이 있다고 한 것은 호(胡)의 넓은 의미의 용법이고, 호국(胡國)이라

     서술한 것은 소그드 지방뿐이라고 한다(森安孝夫,「당대 불교적 세계지리와 ‘호’의 실태」, 『실크로드

     의 삶과 종교』, 2006).
203) 부하라국[安國, Bukhārā]: 『왕』안국(安國),『대당서역기』 보갈(捕喝).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보소로

     (Boxoro)이다. 제라프샨(Zeravshan)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는데, 제라프샨강의 흙과 모래가 쌓여서

     생긴 땅에 세워진 사원을 중심으로 교역지로서 발달하였다. 실크로드 여정상의 주요 오아시스 국가

     중 하나이다. 부하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수도원’이라는 뜻이다. 7세기 전반에 당에 사신을 보내 교류

     하였는데, 708년 아랍인들의 침입을 받아 언어와 종교가 이슬람화되었다.
204) 카부단국[曺國, Kabūdhan]: 『왕』조국(曺國),『대당서역기』겁포달나(劫布呾那). 당대에는 동·중·서

     세 조국(曹國)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이 가운데 중조국(中曹國)이 카부단이다.(桑山, p.163) 동조국

     (東曹國)은 우스루샤나(Usrūshana, 窣堵利瑟國), 서조국(西曹國)은 이쉬티칸(Ishtikhan, 瑟底痕城)

     이다.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속한다.
205) 키쉬국[史國, Kish]: 『왕』사국(史國), 『대당서역기』갈상나(羯霜那). 카스카루드(Kaska-rud)강

     남쪽에 위치한 나라로, 북으로 펜지켄트, 남으로 토하라와 접하고 있었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연간(605~617)에 중국과 처음으로 통교하였고 당대에는 그곳 군주를 자사로 책봉하기도 하였다.

     키쉬국 동쪽 경계인 철문(鐵門)은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하여 인도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철문이란 가파른 산에 철색깔의 돌이 관문을 이루어 경계를 나누고 있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철문은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에서 테르메즈로 가는 중간의 다르밴드(Darband)

     근처로 비정된다.
206) 타쉬켄트국[石騾, Tashkent]: 『왕』석라국(石騾國), 『대당서역기』자시(赭時).석국(石國)을 이렇게

     표기한 것으로 추정한다. 『수서』에 이 나라의 왕의 성이 석(石)이고 이름이 녈(湼)이라 한데서 이를

     합쳐 말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정수일, p.378) 수당과 교류를 가져 당에서 왕을 책봉하기도

     하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로서 시르다리야 강의 지류인 치르치크 강변에 자리잡은 오아시

     스 국가이다. 우즈벡어로 ‘돌의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207) 펜지켄트국[米國, Penjikent]: 『왕』 미국(米國), 『대당서역기』 미말하(弭秣賀).미말하(弭秣賀)나

     『당서』의 미말(彌末)은 마이말하(Maimargh)의 음역으로, 미(米)는 그 약칭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드 남쪽에 해당하며 제라프샨강 연변에 있다. 수당과 교류하여 사서에 그곳 사정이 실려

     있다.
208) 사마르칸드국[康國, Samarqand]:『왕』 강국(康國), 대당서역기』 삽말건(颯秣建).사마르칸드는

     바벨론이나 로마와 같은 시대에 건설된 유서 깊은 곳으로, 소그드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도시이다. 소그드지방은 파미르고원과 천산산맥의 서쪽, 이란고원과 카스

     피해와 아랄해 사이에 아랄해로 흘러드는 아무 다리야(Amu Darya)강과 시르 다리야(Syr Darya)

     강 사이의 지방을 지칭하는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이 지

     역에는 6~7세기경부터 이란계의 소그드인들이 소그드 문자를 쓰며 살았는데 실크로드의 십자로

     에 해당하는 지역 여건을 바탕으로 상업을 행하여 많은 부를 축척하였다. 중국과 교역이 많았는데,

     특히 당 초기인 624년부터 650년경 사이에는 중국에 온 사절단이 35차례에 이른다. 또 당 고종

     영휘 연간(650~655)에 이 지역에 강거도독부(康居都督府)를 설치하고 국왕 와후만(Wahuman)을

     도독으로 삼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사마르칸드 인근 아프라시압(Afrasiab) 유적의 궁전

     벽화에 당 사신과 함께 2인의 고구려(혹은 신라) 사신이 그려져 있어 우리나라와도 교류가 있었음

     을 알게 한다.
209) 아랍-무슬림군의 동방 진출은 651년부터 시작되어 압둘라 이븐 아미르의 군대가 호라산에 이어

     발흐까지 원정하였다. 이후 아랍 지배에 대한 반란과 재공격이 여러 차례 반복된 후 704년에 호라     

     산 총독 쿠타이바(Qutaybah)가 토하리스탄, 부하라, 사마르칸드, 페르가나(Ferghana) 등을 정복하

     여 지배하였다. 혜초가 이곳 사정을 전해 들은 것은 시기의 상황을 말해 준다.
210) 조로아스터(Zoroaster)교:배화교(拜火敎) 혹은 현교(祆敎)라고도 한다. 서기전 7세기 경 예언자

     짜라투스트라(그리스어로 조로아스터)에 의해 창시된 이원론적 종교이다. 인간은 선신(善神) 아후

     라 마즈다(Ahura Mazdā)의 축복과 보호아래 악신(惡神) 앙그라 마이뉴(Angra Mainyu)와 싸우며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말한다.
211) 혜초는 이 여섯 나라가 불교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으나 바로 다음에 사마르칸드에는 절이 하나

     있다고 기술한 것처럼 이곳에는 불교가 알려져 있었다. 일찍이 중국 불교 초기 전래시대에 강승회

     (康僧會)와 같은 사마르칸드 출신 역경승들의 활약이 매우 컸다. 혜초의 기술은 이 경우를 제외하고

     는 호국 여러 나라들이 불교보다 조로아스터교와 같은 다른 종교를 믿고 있던 사정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된다.
212) 면직:백첩(白氎)은 백첩포(白氎布, 白疊布)라고도 하며, 목화의 일종인 초면(草棉)의 면섬유로

     짠 가는 면직물을 말한다.(민길자,「白疊布·白氎布考」, 『교육논총』7, 1988, 국민대 교육연구소, pp.

     79~98)

27. 페르가나국

 

또 사마르칸드국 동쪽은 곧 페르가나[跋賀那, Ferghāna]213)국인데, 왕이 둘이다.

아무다리야[縛叉, Amu Darya]214)라는 큰 강이 나라 한 복판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가는데, 강 남쪽의 왕은 아랍에 복속되었고 강 북쪽의 왕은

투르크 관할에 속한다.215)

이 지방 산물도 낙타, 노새, 양, 말, 면직물 등이다.

의복은 가죽외투와 면직물 옷이며, 음식은 빵과 보릿가루를 많이 먹는다.

언어가 유난히 달라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불법을 몰라 절이나 스님이 없다.

又從康國已東, 卽跋賀那國, 有兩王. 縛叉大河, 當中西流, 河南一王屬大寔,

河北一王屬突厥所管. 土地亦出駝騾羊馬疊布之類. 衣着皮裘疊布. 食多餠麨. 

言音各別, 不同餘國. 不識佛法, 無有寺舍僧尼.
213) 페르가나[跋賀那, Ferghāna]: 『왕』발하나(跋賀那), 『대당서역기』패한(㤄捍). 동·남·북 세 방향이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그 중앙을 시르다리야강이 흐르고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 파르고나

     (Farghona)주와 타지키스탄 서부의 레니노보드(Leninobod)주에 이어지는 지역이다. 일찍부터

     이란계 주민에 의한 농경 문화가 발달한 동서교통의 요지였다. 서기전 2세기에 한(漢)의 장건(張騫)

     이 이 지방에 관한 일을 대완(大宛)이라는 명칭하에 처음으로 중국에 전하였다.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당에서는 왕을 책봉하고 이 지역 안에 도독부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214) 아무다리야[縛叉, Amu Darya]:중앙아시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아랄해로 흘러드는 총 2,540㎞의

     강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아무’는 페르시아어로 광기(狂氣), ‘다리야’란 강(江)으로,

     즉 ‘미친 강’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현재 이 강이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갈라놓고

     있다. 그런데 페르가나 한복판을 지나 서쪽으로 흐르는 강은 아무다리야강이 아니라 시르다리야

     (SirDarya, 錫爾河)강인데, 혜초는 이 두 강을 혼동하였다. 시르다리야강의 옛이름은 락사르테스

     (Laxartes)인데 진주하(眞珠河)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215) 8세기의 이 지역은 지역 세력과 아랍, 투르크, 당의 세력이 뒤섞여 복잡한 전개를 보였다. 721년

     부터 아랍군과 페르가나가 격돌하여 724년에 시르다리야강 남부는 아랍이 지배하게 되고 북부는

     투르크계 세력이 유지되었다. 727년에는 북부에 있던 투르크계의 소록(蘇祿)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사마르칸드를 제외하고 아무다리야강까지 세력을 확보하였다.(桑山, p.173)

28. 쿠탈국

 

또 페르가나국 동쪽에 한 나라가 있으니 이름이 쿠탈[骨咄, Khuttal]216)이다.

이 나라 왕은 원래 투르크 종족이고, 이 나라 백성은 반은 호인, 반은 투르크인이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나귀, 포도, 면직물, 모포 등이 난다.

의복은 면직물 옷과 가죽외투를 입는다.

언어는 토하라어와 투르크어와 토착어가 섞여 있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삼보를 공경하고 믿어서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이 나라는 아랍 관할에 속한다.

외국에서는 비록 나라라고 말하지만, 중국의 한 개의 큰 주와 비슷하다.

이 나라 남자는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카락을 기른다.

又跋賀那國東有一國, 名骨咄國. 此王元是突厥種族, 當土百姓,
半胡半突厥. 土地出駝騾羊馬驢蒱桃疊布毛毯之類. 衣着疊布皮裘. 
言音半吐火羅半突厥半當土. 王及首領百姓等, 敬信三寶, 有寺有僧, 
行小乘法. 此國屬大寔所管. 外國雖云道國, 共漢地一箇大州相似. 
此國男(人)217)剪鬚髮, 女人在髮.
216) 쿠탈[骨咄, Khuttal]:『왕』골돌(骨咄),『대당서역기』가돌라(珂咄羅). 아무 다리야(Amu Darya)강 

     상류의 북쪽, 현재 타지키스탄의 서남부 지역으로 수도 두샨베의 동남부쪽인 바크쉬(Vakhsh)

     강과 판지(Panj)강 사이의 쿨로브(Kulob)를 중심으로 한 카틀론(Khatlon)주 지역이다. 계곡과

     구릉에 양질의 목초지를 가지고 있고, 그 곳에서 자라는 말이 유명하다고 전해져『당서』에도

     실려 있다.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당에서는 왕을 책봉하고 이 지역 안에 도독부를 설치하

     기도 하였다.
217) 원문의 女는 人의 잘못으로 추정됨.

 

29. 투르크

 

또 이 호국의 북쪽은 북으로는 북해에 이르고, 서로는 서해에 이르고, 동으로는 중국에 이르는데, 이 북쪽은 모두 투르크[突厥, Turk]218)인이 사는

영역이다.

이들 투르크인은 불법을 알지 못하여 절도 없고 스님도 없다.

복은 가죽외투와 모직 상의를 입고, 고기를 먹는다.

성곽이나 일정한 주거지가 없고 털담요로 만든 천막을 집으로 삼아 가거나 머물 때 몸에 지니고 다니는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닌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언어가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며, 선과 악을 알지 못한다.

이 지방 산물로는 낙타, 노새, 양, 말 등이 많다.

又從此胡國已北, 北至北海, 西至西海, 東至漢國, 已北惣是突厥所住境界.

此等突厥, 不識佛法, 無寺無僧. 衣着皮毬氈衫, 以虫爲食. 亦無城墎住處,

氈帳爲屋, 行住隨身, 隨逐水草. 男人並剪鬚髮, 女人在頭. 言音与諸國不同.

國人愛煞, 不識善惡. 土地足駝騾羊馬之屬.
218) 투르크[突厥, Turk]: 『왕』돌궐(突厥), 『대당서역기』돌궐(突厥). 민족 이름이자 나라 이름이다.

     넓은 의미에서는 철륵(鐵勒)·돌궐(突厥) 각 부족을 포괄하고, 좁은 의미로는 돌궐칸국(突厥汗

     國)만을 가리킨다. 6세기 초 금산(金山, 지금의 아미태산)서남쪽 산기슭에서 처음 일어나

     하나의 유목부락이 되었고, 552년 오르콘(Orkhon)강 유역에 정권을 세워 6세기 후반에 서역     

     제국을 지배하고 요동만에서 카스피해, 바이칼호에서 고비사막에 걸치는 광대한 지역을 차지

     하였다. 문자를 만들고, 관제(官制)를 정비하여 중원과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를 장악하여 서역과 교역하는 등 동서문명 교류에 큰 자취를 남겼다. 583년에 분열하여

     동투르크, 서투르크로 나뉘었다. 서투르크는 7세기 중엽 당나라에 복속되었고, 동투르크는 8세

     기 중엽에 분열하여 그중에서 위구르 제국이 일어났다. 여기서 서술하는 곳은 대체로 지금의

     카자흐스탄(Kazakhstan)과 키르기즈스탄(Kyrgyzstan)에 해당한다.

 

30. 와한국

 

또 토하라국에서 동쪽으로 7일을 가면219) 와한[胡蜜, Wakhan]220) 왕이 사는 성221)에 도착한다.

마침 토하라국에서 올 때, 외국222)에 들어가는 중국사신을 만났다.223) 간략히 사운체로 오언시를 지었다.

 

그대는 서쪽 번국이 멀다 원망하고

나는 동쪽 길이 길다고 탄식하네

길은 거칠고 산마루엔 눈이 가득한데

험한 골짜기에 도적떼가 날뛰는구나

새도 날다가 깎아지른 산에 놀라고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지나기 어렵네

평생 눈물 훔쳐본 적 없지만

오늘은 천 길 눈물을 뿌리누나

 

겨울 어느날 토하라에서 눈을 만난 감회를 오언시로 읊었다.

 

차가운 눈은 얼음을 끌어 모으고

찬 바람은 땅이 갈라지도록 매섭구나

큰 바다는 제단마냥 얼어붙고

강물은 낭떠러지를 깎아먹네

용문에는 폭포수마저 끊기고

우물가는 서린 뱀처럼 얼었구나

불을 벗삼아 땅 끝에 올라 노래한다마는

어찌 저 파미르를 넘을 수 있을까.

又從吐火羅國東行七日, 至胡蜜王住城. 當來於吐火羅國, 

逢漢使入蕃. 略題四韻取辭, 五言.
君恨西蕃遠 余嗟東路長
道荒宏雪嶺 險澗賊途倡
鳥飛驚峭嶷 人去偏樑難
平生不捫淚 今日灑千行
日在吐火羅, 逢雪述懷, 五言.
冷雪牽氷合 寒風擘地烈
巨海凍墁壇 江河凌崖囓
龍門絶(瀑)224)布 井口盤蛇結
伴火上(垓)225)歌 焉能度播蜜
219) 토하라에서 와한까지는 적어도 1천 5백리 쯤 되는 거리로서 보통 30일 걸린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 거리를 7일만에 갔다는 혜초의 기록은 문제가 있게 된다. 그래서 필사본의

     ‘七日’이 ‘卄日’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桑山, p.176)
220) 와한[胡蜜, Wakhan]:Wakhkhān으로도 표기. 『왕』호밀(胡蜜), 『대당서역기』 달마실철

     제국(達摩悉鐵帝國). 도읍은 혼타다성(昏馱多城, Khandut). 당의 현경(顯慶, 656~660) 연간

     에는 조비주(鳥飛州)라 불렀다. 아무 다리야강 상류에 있는 와한 다리야(Wakhān Darya) 계

     곡에 연해 있는 가늘고 긴 나라이다.(桑山, p.176) 현재 아프가니스탄 북동부의 바다흐샨주

     끝 지역으로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 사이에 좁고 길게 자리잡아 파미르고원에 이어지는

     지역이다.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고대부터 다양한 세력이 침입하였다.

     혜초가 방문한 당시에는 당, 티베트, 아랍이 이 지역을 둘러싸고 경쟁하고 있었고, 그 얼마

     전에는 투르크가 간여하기도 하였다.
221) 와한 왕이 사는 성을 혜초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대당서역기』에서는 혼타다성(昏馱多城)

     곧 현재의 칸두트(Khandut)라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그보다 훨씬 서쪽에 있는 새가심성(塞

     迦審城) 곧 지금의 이슈카심(Ishkāsim)이라고 하였는데, 혜초가 토하라에서 가는 길로는 이슈

     카심을 지나 칸두트에 이르게 된다.
222) 외국:번(蕃)은 일반적으로 서역(西域) 일대 및 중원 서부 변경 지역을 가리킨다.
223) 혜초가 토하라에서 와한으로 오는 도중에 만난 중국 사신은 외국의 입조(入朝)에 대한 답례사

     (答禮使)로 추정된다. 책봉사(冊封使)는 사서에 기록되는데, 이에 비길 수 있는 예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혜초가 여행한 시기인 724년부터 727년에 이르는 시기에 이 길을 통해 중국에

     입조한 나라는 페르시아, 아랍, 토하라, 쉬그난의 네 나라이므로, 그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桑山, p.178)
224) 필사본의 爆은 瀑의 잘못으로 추정됨.
225) 필사본의 胲는 垓의 잘못으로 추정됨.

 

이 와한왕은 군대가 적고 약해서 스스로 지키지 못하여 아랍의 관할에 속해 있으므로, 해마다 세금으로 비단 3,000필을 바친다.226)

산골짜기에 살아서 사는 곳이 좁고227) 가난한 백성이 많다.

의복은 가죽외투와 모직 상의를 입으며, 왕은 비단과 면직 옷을 입는다.

음식은 빵과 보릿가루만 먹는다.

기후가 매우 추워 다른 나라보다 심하다.

언어가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산물로는 양과 소가 있는데 아주 작고 크지 않으며, 말과 노새도 있다.

님도 있고 절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

왕과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부처를 섬기고 외도에 귀의하지 않기 때문에 이 나라에는 외도가 없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들은 머리를 기른다.

산 속에서 사는데, 그 산에는 나무나 여러 가지 풀들이 없다.

此胡蜜王, 兵馬少弱, 不能自護. 見屬大寔所管, 每年輸稅絹三千疋.

住居山谷, 處所狹小, 百姓貧多. 衣着皮裘氈衫, 王着綾絹疊布. 

食唯餠. 土地極寒, 甚於餘國. 言音與諸國不同. 所出羊牛, 極小不大, 

亦有馬騾. 有僧有寺, 行小乘法. 王及首領百姓等, 惣事佛, 不歸外道, 

所以此國無外道. 男並剪除鬚髮, 女人在頭. 住居山裏, 其

山無有樹(木)228)及於百草.
226) 이때 비단은 옷감으로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화(通貨)로서의 기능도 가졌다.
227) 와한은 동서로 길게 옥서스(Oxus)강의 협곡을 따라 전개된 나라이므로 살 수 있는 땅이 좁다.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동서 1천 5,6백 리이고 남북은 넓은 곳이 4,5리이고 좁은 곳은 1리

     를 넘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228) 필사본의 水는 木의 잘못으로 추정됨. 소발로르국에도 “원래부터 나무나 여러 가지 풀이 

     없다(元無樹木及於諸草)”라는 표현이 있음.

 

31. 쉬그난국

 

또 와한국 북쪽 산 속에 아홉개의 쉬그난[識匿, Shighnān]229)국이 있다.

아홉 왕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며 사는데, 한 왕만 와한왕에게 복속되었고 그 밖에는 각기 독립하여 살고 다른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

근래에 굴에서 생활하는 두 왕[兩窟王]230)이 중국에 투항하여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231)에 사신을 보내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왕과 수령만 면직 옷과 가죽외투를 입고, 그 밖의 백성은 가죽외투와 모직 상의만 입는다.

기후가 몹시 춥고, 눈 덮인 산에 살아서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이곳에도 양, 말, 소, 나귀가 있다.

언어가 유별나 다른 나라와 같지 않다.

왕은 항상 200~300명을 대파미르[大播蜜, Pamir] 평원232)에 보내 그 곳 교역상과 사신을 습격한다. 가령 습격하여 얻은 비단이라도 창고 안에 쌓아 두고 못쓰게 되도록 내버려 둘 뿐 옷을 지어 입을 줄 모른다.

이 쉬그난국 등에는 불법이 없다.

又胡蜜國北山裏, 有九箇識匿國. 九箇王各領兵馬而住, 有一箇王, 

屬胡蜜王, 自外各並自住, 不屬餘國. 近有兩窟王, 來投於漢國, 

使命安西, 往來(不)233)絶. 唯王首領, 衣着疊布皮裘, 自餘百姓, 

唯是皮裘氈衫. 土地極寒, 爲居雪山, 不同餘國. 亦有羊馬牛驢. 

言音各別, 不同諸國. 彼王常遣三二百人於大播蜜川, 劫彼興胡及於使命. 

縱劫得絹積在庫中, 聽從壞爛, 亦不解作衣着也. 此識匿等國, 無有佛法也.
229) 쉬그난[識匿, Shighnān]: 『왕』식닉(識匿), 『대당서역기』 시기니(尸棄尼). 지금의 파미르강

     북쪽 파미르고원 서남 경사지역의 타지키스탄 쉬그난 일대이다. 『신당서(新唐書)』에 “처음

     에는 고한성(苦汗城, Kurghan)에 중심을 두었으나 나중에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았다. 다섯

     개의 큰 골짜기가 있고 추장이 스스로 다스려 다섯 식닉(識匿)이라 한다”(『新唐書』권221하

     西域傳下)라고 하였고, 또 파미르천 네 골짜기는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굴 속에서 생활

     하는 풍속이 있다고도 하였다. 혜초는 여기서 9개국을 들었는데, 중국 사서류에서는 5개국을

     들었다.
230) 굴에서 생활하는 두 왕[兩窟王]:위의 『당서』에 나오는 굴 속에서 생활하는 쉬그난국 가

     운데 두 곳을 가리키는 듯하다.
231)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당이 쿠차에 설치한 서쪽 요충지. 『책부원귀(冊府 元龜)』에

      따르면 이 즈음에 쉬그난국에서 당에 보낸 사신은 724, 725, 727년 세 차례 있었다.
232) 대파미르[大播蜜, Pamir] 평원: 『왕』 파밀천(大播蜜川), 『대당서역기』 파미라천(波謎羅川).

     파미르천은 본래 파미르강을 말한다. 와한 지방의 북쪽으로 타지키스탄과 경계를 이루며 흐르는

     강이다. 그런데 천(川)에는 평원의 뜻도 있으므로 파미르강 연안을 대파미르(Great Pamir) 평원,

     그 동쪽을 소파미르(Little Pamir) 평원으로 부르기도 한다.

233) 필사본은 絶인데, 의미상 不絶이라 해야 자연스러움.

32. 총령진

또 와한국에서 동쪽으로 15일 가서 파미르평원234)을 지나면 곧 총령진(蔥嶺鎭)235)에 도착한다. 이 곳은 중국에 속하여 지금 그 군대가 장악하고 있다. 이 곳은 옛날에는 배성(裴星)236)왕의 영역이었는데, 왕이 배반하고 티베트로 달아나 투항하였으므로 지금 나라 안에 백성이 없다. 외국인들은 타슈쿠르간[渴飯檀, Tāshukurghān]237)국이라 부르는데, 중국 이름은 총령(蔥嶺)이다.
又從胡蜜國東行十五日, 過播蜜川, 卽至蔥嶺鎭. 此卽屬漢, 兵馬見今鎭押. 
此卽舊日王裴星國境, 爲王背叛, 走投土蕃, 然今國界, 無有百姓.
外國人呼云渴飯檀國, 漢名蔥嶺.
234) 파미르는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지로 이루어진 고원지대이다. 파미르

     고원은 천산(天山)과 캐라코럼(Karakoram)과 곤륜(崑崙)과 힌두쿠시(Hindu Kush)산맥이 만나

     는 교차 지점으로 해발 5,000m가 넘는 10여 갈래의 복잡한 흐름을 가진 산맥들로 구성되어 있

    다. 중국에서는 총령(葱嶺)이라 불렀다. 파미르고원의 대부분이 지금의 타지키스탄 동부인 고르

     노 바다흐샨(Gorno Badakhshan)주에 속하며, 동쪽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

     治區], 서남쪽은 키르기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에 속한다. 최고봉은 동부의 중국

     카시 서남쪽에 있는 콩구르봉[公格爾山, 7,719m]이며, 서쪽에는 타지키스탄의 이스모일 소모니

     봉(Ismoil Somoni Peak, 1998년까지는 코뮤니즘봉Communism Peak으로 불렸다. 7,495m)이

     가장 높다. 
235) 총령진(葱嶺鎭): 『왕』총령진(蔥嶺鎭), 『대당서역기』 총령(葱嶺). 타슈쿠르간(Tāshukurghān)국

     이 있던 총령(葱嶺), 즉 파미르 고원에 설치했던 진(鎭). 당(唐)은 군대를 변방에 배치할 때 큰 지역

     에는 군(軍), 작은 지역에는 수착(守捉)·성(城)·진(鎭)을 두고 총괄하는 곳을 도(道)라 하였다(『新唐

     書』 권50 兵志). 개원(開元) 연간(713~741)에 당시 서쪽 변방 지역의 방어를 위해 파미르 고원에

     수착(守捉)을 두어 안서지역의 끝을 지키도록 하였다고 한다.
236) 배성(裴星):배씨(裵氏)는 독립한 오아시스 도시국가였던 카슈가르(Kashgar)의 왕족으로 유명

     하다.(桑山, p.183) 타슈쿠르간국은 카슈가르인이 대대로 왕위에 올랐다(『唐書』·『통전(通典)』).

     배성도 카슈가르의 왕성 배씨의 일족으로 생각된다.
237) 타슈쿠르간[渴飯檀, Tāshukurghān]: 『왕』 갈반단(渴飯檀), 『대당서역기』 걸반타(朅盤陀). 현재의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 서쪽 끝에 있는 도시인 타시쿠르간[塔什庫爾干]. 서역에서 중국에 갈 때

     와한 지방에서 타림(Tarim)분지에 뻗어 있는 파미르 고원를 넘어 남도(南道)로 갈 때 반드시 통과해

     야 하는 지점으로 일찍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사리 콜(Sar-i Kol) 계곡에 자리하고 있다.(桑山, p.184)

 

33. 카슈가르

또 총령에서 걸어서 한 달을 가면 카슈가르[踈勒, Kashgar]238)에 도착한다. 외국에서는 스스로 가사기리(伽師祇離)239)국이라고 부른다. 이 곳 역시 중국 군대가 지키고 있다.240) 절도 있고 스님도 있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241)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242) 토착민들은 면직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又從蔥嶺步入一月, 至踈勒. 外國自呼名伽師祇離國. 此亦漢軍馬守捉.
有寺有僧, 行小乘法. 喫肉及葱韮等. 土人着疊布衣也.
238) 카슈가르[踈勒, Kashgar]: 『왕』소륵(踈勒), 『대당서역기』거사(佉沙), 『당서』 소륵(疏勒). 신장

     웨이우얼자치구 북서쪽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로 현재 이름은 카시[喀什]이다. 한(漢) 때부터

     서역 36국의 하나로 등장한다. 천산산맥 자락의 타클라마칸사막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타클라

     마칸사막의 남도와 북도가 만나는 동서 교통의 요지로서 크게 발전하였다. 현재 캐라코럼 고속

     도로(Karakorum Highway)의 시작점으로 이 도로는 파키스탄과의 국경인 쿤자랍 고개를 넘어

     이슬라마바드까지 연결된다.
239) 가사기리(伽師祇離):카슈가르를 소륵(疏勒)이라고 옮기는 것은 음이 일치하지 않는데, 혜초

     의 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음을 전하고 있어 이 기록의 정보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일체경음의』

     에서는 가사길려(迦師佶黎)로 표기했다.
240) 수착(守捉)은 지키고 있다는 뜻으로 풀 수 있다. 그런데 당대의 변경 군사 조직에서 작은 지역

     에는 설치한 수착(守捉)·성(城)·진(鎭)의 이름과도 같다.
241)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당시에는 카슈가르에서 가람 수백개소의 승려 만 여인이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학습한다고 하였다.
242) 고기나 파와 부추 등의 오신채(五辛菜, 익혀 먹으면 음한 기운을 내고 날로 먹으면 화를 키우며 

     불전을 익히더라도 천선들이 그 냄새를 싫어하여 멀리 하는 것이기에 불자가 먹어서는 안 되는

     매운 맛을 내는 다섯 가지 야채)를 먹는다는 데서 소승이 행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34. 쿠차국

또 카슈가르에서 동쪽으로 한 달을 가면 쿠차[龜玆, Kucha]243)국에 도착한다. 바로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244)로 중국 군대의 대규모 집결처이다. 이 쿠차국에는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245),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246) 고기와 파, 부추 등을 먹는다. 중국 스님이 대승법을 행하고 있다.
又從踈勒東行一月, 至龜玆國. 卽是安西大都護府, 漢國兵馬大都集處. 
此龜玆國, 足寺足僧, 行小乘法. 食肉及蔥韮等也. 漢僧行大乘法.

243) 쿠차[龜玆, Kucha]: 『왕』구자(龜玆), 『대당서역기』 굴지(屈支).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중심부 북쪽의 도시로 현재 이름은 쿠처[庫車]. 서기전 1~2세기부터 중국

     사서(史書)에 등장한다. 전한 때 서역 36개국 중 9개 대국의 하나였다. 서역의 중심으로 중국은

     서역과의 관계 때문에 항상 이 지역을 중시하였다. 후한 명제 때 쿠차를 점령하고 서역도호부

     (西域都護府)를 설치하였으나, 곧 독립 왕국을 이루었다. 전진(前秦) 때도 중국과 접전을 하였

     는데, 이 때 쿠차에서 중국으로 초빙해 온 사람이 쿠차 왕실 출신의 구마라집(鳩摩羅 什,

     Kumarajiva)이다. 구마라집은 중요한 경전을 많이 한역하여 중국불교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244)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중국의 서쪽 변방을 지키기 위한 안서도호부의 설치는 그

     이동이 잦았다. 설치와 이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640년에 국씨(麴氏)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킨 뒤 그 수도 고창(高昌)을 서주(西州)로 하고 그곳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다. 648년

     에 안서도호부를 쿠차로 옮기고, 651년에 쿠차에서 서주로 옮겼다가 658년에 다시 쿠차에

     설치하였다. 670년에 티베트가 서역에 진출하자 안서도호부를 다시 서주로 옮겼다가, 692년에

     다시 쿠차로 옮겼다. 이후 안사난(安史亂)이 일어날 때까지는(755년) 계속 쿠차에 있었다.

     그러므로 혜초가 쿠차에 이르렀던 727년에는 안서도호부가 쿠차에 있었다.(桑山, p.187) 당은

     안동(安東), 안서(安西), 안남(安南), 안북(安北), 선우(單于), 북정(北庭) 여섯 개의 대도호부

     (大都護府)를 두었다.
245) 이 쿠차국의 불교의 성황은 타클라마칸 북쪽 지역에서 출토된 산스크리트 사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730종의 사본 중 절반 가까이가 쿠차국 계통이라고 한다.
246)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쿠차에서는 가람 백여 개 소의 승려 5천여 인이 소승의 설일체유

     부(說一切有部)를 학습한다고 하였다.

 

35. 호탄국

 

또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에서 남쪽으로 호탄[于闐, Khotan]247)까지는 이천 리이다.248) 이 곳에도 많은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다.249) 고기를 먹지 않는다.250)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나라 영역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又安西南去于闐國二千里, 亦足漢軍馬領押. 足寺足僧, 行大乘法. 

不食肉也. 從此已東, 並是大唐境界. 諸人共知, 不言可悉.
247) 호탄[于闐, Khotan]:『왕』우전(于闐), 『대당서역기』구살단나(瞿薩旦那). 신장웨이우얼자치구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의 요지에 자리잡은 도시로 현재 이름은 허톈[和田]. 예로부터 중국인이

     가장 귀하게 여긴 연옥(軟玉)의 산지로 유명하다. 호탄은 전한 말부터 급격히 세력을 신장한 야르

     칸드[莎車, Yarkand]국에게 한때 지배되었으나, 이윽고 독립하여 야르칸드를 무너뜨리고 니야[尼

     雅,Niya]·카슈가르 사이의 13국을 복속시켜 선선국(鄯善國)과 아울러 서역남도의 대국으로 발전

     하였다. 중국의 서역에 대한 영향력이 쇠퇴한 3세기 무렵에는 동서교역으로 번영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던 타림분지의 5대국 중 하나였다. 당나라 초기에는 북의 서투르크에 복속되었으나,

     당의 타림분지 진출에 따라 다른 오아시스국가와 함께 멸망하고 안서사진(安西四鎭)의 한 곳이

     되었다. 그 뒤 티베트의 타림분지 진출로 790년 안서도호부와 북정(北庭)도호부가 함락됨에 따라

     호탄도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48) 이곳 호탄은 쿠차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질러 반대편에 있어 바로 가기는 매우 어렵다.

     혜초는 이곳을 직접 방문한 것이 아니라 사정을 전해 듣고 기록하였다.
249) 대승법이 행해지고 있다:중국 안서(安西) 사진(四鎭)의 서쪽 4개 지방 중에서 실크로드의 서역

     북도(西域北道)에 속하는 카슈가르, 쿠차, 카라샤르는 소승의 설일체유부가 행해지지만 이곳 서역

     남도(西域南道)의 호탄만은 대승이 행해지고 있어 차이를 보여준다.
250) 대승이 행해지므로 고기를 먹지 않아 소승이 행해지는 다른 3국이 고기를 먹는 것과 비교된다.

안서 사진의 불교

 

개원 15년(727) 11월 상순에 안서대도호부에 도착하였는데, 그때 절도대사(節度大使)251)는 조군(趙君)252)이었다.

또 안서에는 두 절에 중국 스님이 주지하고 있는데, 대승법을 행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운사(大雲寺)253) 사주(寺主)254) 수행(秀行)은 강설을 잘 하고, 전에는 서울 칠보대사(七寶臺寺)255)의 승려였다.

대운사 도유나(都維那)256) 의초(義超)는 율장(律藏)257)을 잘 이해하고, 전에는 서울 장엄사(莊嚴寺)258)의 승려였다.

대운사 상좌(上座)259) 명운(明惲)은 계율을 크게 불도를 닦았는데, 그 역시 서울의 승려였다.

이들 스님들은260) 불법을 잘 지키고 도심이 매우 깊으며 즐거이 공덕을 쌓았다.

용흥사 사주는 이름이 법해인데 비록 안서에서 태어난 중국인이지만 학식과 인풍이 중원(華夏) 사람과 다르지 않다.

호탄에도 중국 절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용흥사(龍興寺)261)이다. □□라 하는 중국 스님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주로서 불법을 잘 지킨다.

그 스님은 하북 기주(冀州)262) 사람이다.

카슈가르에도 중국 대운사가 있다.

중국 스님 한 사람이 주지하고 있는데, 그는 혼주(崏州)263) 사람이다.
開元十五年十一月上旬, 至安西. 于時節度大使趙君. 且於安西,
有兩所漢僧住持, 行大乘法, 不食肉也. 大雲寺主秀行, 善能講說, 
先是京中七寶臺寺僧. 大雲寺都維那名義超, 善解律藏, 
舊是京中庄嚴寺僧也. 大雲寺上座名明惲, 大有行業, 亦是京中僧. 
此等僧, 大好住持, 甚有道心, 樂崇功德. 龍興寺主名法海, 
雖是漢[兒]264)生安西, 學識人風, 不殊華夏. 于闐有一漢寺,
名龍興寺. 有一漢僧, [名]□□, 是彼寺主, 大好住持, 彼僧是河北冀州人士. =
踈勒亦有漢大雲寺. 有(一漢)265)僧住持, 卽是崏州人士.
251) 절도대사(節度大使):관직명으로 일반적으로 절도사(節度使)라 한다. 당의 초반에 북주(北周)와 

     수(隋)의 제도를 본따 중요 지구에 총관(總管)을 설치하고 뒤에 도독(都督)으로 이름을 바꾸어 여러

     개 주(州)의 군사(軍事)를 총감독하게 하였다. 당 예종 경운(景雲) 2년(711)에 하발연사(賀拔延嗣)를

     양주도독(涼州都督)으로 삼고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에 임명하였는데 이때부터 절도사(節度使)라

     는 명칭이 생겼다. 처음에는 변경 지역에만 절도사를 두었는데, 안사난 이후에는 국내에도 두루

     설치되었다. 한 명의 절도사가 하나의 도 또는 여러 개의 주를 총관하여 군사, 백성, 재정을 총감독

     하였다.
252) 조군(趙君):726년에 안서 부대도호(副大都護, 종3품)에 임명된 조이정(趙頥貞)을 가리킨다. 

     그는 727년 티베트가 투르크와 함께 안서성을 포위하자 그들을 막아냈고, 728년에는 곡자성(曲子

     城)에서 티베트를 격파하였다(『舊唐書』권8 ; 『資治通鑑』 권213). 당시 안서대도호는 왕족이 임명

     되어 변경에 부임하지 않아 부대도호(副大都護)가 실질적인 대도호(大都護) 역할을 하며 도호로

     불렸다. 도호는 군정과 민정을 겸하였는데 8세기 들어 군사적 역할이 비대해졌다.(桑山, p.192)『일

     체경음의』에는 이정(頤貞)이라는 항목이 있어 이 약본이 아닌 『왕오천축국전』의 정본에는 조이정

     (趙頤貞)이라는 이름이 성과 이름 모두 수록되었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253) 대운사(大雲寺): 『대운경(大雲經)』을 통치 이데올로기의 기반으로 삼았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재초(載初) 원년(690) 7월에 승려들이 여자가 국왕이 된다는 내용을 부각시킨 위경 『대운경(大雲經)』

     을 지어 올리자 전국의 모든 주에 대운사를 두게 하였다(『舊唐書』 권6). 이곳 혜초의 기록을 통해

     쿠차와 카슈가르에도 대운사가 세워졌고, 장안의 승려가 파견되었음을 알 수 있다.
254) 사주(寺主):사원(寺院)의 사무를 관장하는 세 승직(僧職)을 삼강(三綱)이라 하는데, 상좌(上座), 

     사주(寺主), 도유나(都維那)로 구성되어 있다. 삼강 제도는 4세기 말 전진(前秦) 시대에 처음 시작되

     어 당대에는 법전에도 반영되었다. 그래서 절마다 상좌 1인, 사주 1인, 도유나 1인을 있어 함께 여러

     일을 총괄하도록 하였다.(『大唐六典』권4) 사주는 원래 사원을 세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원 건립

     및 관리 등의 일을 책임진 사람을 말한다.
255) 칠보대사(七寶臺寺):의봉(儀鳳) 2년(677)에 세운 광택사(光宅寺)를 가리킨다. 측천무후 때 

     광택사에 칠보대(七寶臺)를 세우고, 절의 이름을 칠보대사로 바꾸었다.
256) 도유나(都維那):유나(維那)라고도 한다. 유(維)는 강유(綱維)에서 온 한자어이고, 나(那)는 산스

     크리트어 갈마다나(羯磨陀那)에서 온 말로, 한자어와 범어가 함께 이룬 말이다. 열중(悅衆)이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승려들의 기강을 담당하고 잡무를 맡는다.
257) 율장(律藏):계율장(戒律藏)이라고도 하는데, 계율(戒律)을 기록한 경전을 가리킨다.
258) 장엄사(莊嚴寺):인수(仁壽) 3년(603) 수(隋) 문제(文帝)가 전 해에 죽은 왕후 문헌(文獻)황후를 

     위해 선정사(禪定寺)를 지었는데, 무덕(武德) 원년(618)에 장엄사(莊嚴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안의 대표적인 절 중의 하나였다.
259) 상좌(上座):원래 법랍(法臘)이 높은 비구라는 의미로, 법랍이 높고 덕망(德望)을 갖추고 있으

     므로 승려들을 통솔하는 일을 맡는다. 본래 불교 초기부터 출가하여 수행한 순서를 중시하여

     먼저 출가한 자가 덕망도 갖추었으므로 윗자리에 앉도록 한데서 유래하였다.
260) 여기서 대운사 소속 삼강직 승려를 모두 소개하였다. 당대 8세기 전반에 지방주에 삼강직이 

     설치 운영되었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다. 당대의 삼강직은 일정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상좌·

     사주·도유나의 순서였는데, 여기서는 사주·도유나·상좌의 순서로 소개하고 있다.
261) 용흥사(龍興寺):신룡(神龍) 원년(705)에 장안과 낙양과 전국의 모든 주에 불교와 도교 사원인 

     대당중흥사(大唐中興寺)·대당중흥관(大唐中興觀)을 두게 하였고(『唐會要』권48), 신룡(神龍) 3년

     (707)에 중흥(中興)을 용흥(龍興)으로 바꾸게 하여 용흥사가 되었다.(『舊唐書』권7)
262) 기주(冀州):지금의 하북성(河北省) 남쪽의 형수시(衡水市)에 속하는 기주시(冀州市)이다.
263) 민주(崏州):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동부 정서시(定西市)에 속하는 민현(岷縣)이다.
264) 글자의 모양과 의미로 보아 兒로 복원함.
265) 떨어져 나가 보이지 않으나 의미상 一漢으로 추정됨.

 

36. 카라샤르국

 

또 안서대도호부에서 동쪽으로 〈2자 정도 떨어져 나감〉266) 가면 카라샤르[焉耆, Kharashar]267)국에 도착한다.

이곳도 중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왕이 있고, 백성은 호인이다.

절도 많고 스님도 많으며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268) 〈5자 정도 떨어져

나감〉 이곳은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4진(鎭)269)에 해당되니, 이름은 첫째 안서대도호부, 둘째 호탄, 셋째 카슈가르,
째 카라샤르이다. 〈아래 16자 정도와 다음 줄 위 3자 정도 떨어져 나감〉 대체로 중국 법에 따라서, 속에 치마를 입는다.
〈여기서부터 아랫부분은 떨어져 나감〉

又從安西東行□□, 至焉耆國, 是漢軍兵(馬)270)領押. 有王, 百姓是胡. 

足寺足僧, 行小乘法. □□□□□, 此卽安西四鎭名[數]271), 

一安西 二于闐 三踈勒 四焉耆. 〈下缺〉 〈上缺〉[大]272)依漢法, 裏頭着裙.
〈下缺〉
266) 『대당서역기』에서는 카라샤르에서 쿠차에 이르는데 9백 리라 하고 『신당서』에서는

     630리라고 하여 차이가 있다. 하루에 50리를 가는 것으로 기준하면 보름 남짓 걸리므로

     ‘반월(半月)’이라는 글자가 떨어져 나갔다고 추정한다.
267) 카라샤르[焉耆, Kharashar]: 『왕』 언기(焉耆), 『대당서역기』아기니(阿耆尼). 신장웨이

     우얼자치구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 동북쪽의 도시로 현재 옌지회족자치현(焉耆回族自

     治县)으로 구분되어 있다. 천산산맥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천산산맥 남부를 지나가는

     서역북도(西域北道)가 동쪽에서 투르판 분지를 빠져나가 타림분지로 들어서는 요지에

     해당하므로 서기전 1세기에는 흉노 서역 경영의 중심지가 되었고, 한족과의 사이에 쟁탈

     전도 벌어졌다. 최초에는 흉노의 나라였지만 서기전 59년 이후에는 한(漢)의 서역도호부

     였으며,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흉노와 한 사이에서 자립하여 국력을 키우기도 하였으나

     당(唐) 때는 안서도 호부에 속했다.
268) 현장은 『대당서역기』에서 카라샤르에서는 가람 백여 개 소의 승려 3천여인이 소승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학습한다고 하였다.
269)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4진(鎭):당대(唐代)에 서역(西域)의 네 개 지역에 설치된

     군사상 중요한 진(鎭)을 말한다. 649년에 호탄·카슈가르·쿠차·카라샤르에 4진을 설치하였으

     나 670년에 티베트가 이 지역에 진출하자 4진을 폐지하였다. 679년에 서부 천산(天山) 지방

     에 쇄엽성(碎葉城)을 설치하고, 692년에 다시 안서도호부를 쿠차에 두어 호탄·카슈가르·쿠차·

     쇄엽을 4진으로 삼았다. 719년에 투르크에게 쇄엽성을 내주고 카라샤르를 4진으로 복구하

     였다. 이곳 혜초의 기록은 이 시기의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안서 4진은 안사난(安史亂) 이후

     티베트에게 완전히 함락되었다.
270) 의미상 馬로 추정됨.
271) 형태가 완전하지는 않으나 數로 추정됨.
272) 형태가 완전하지는 않으나 大로 추정됨.


왕오천축국전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