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경전/법화경

범본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실론섬 2017. 1. 16. 14:53

『불교학리뷰(Critical Review for Buddhist Studies)』

18권(2015. 12) 49p~85p

범본 『법화경』 「여래수량품」에 나타난 석존의 보살행에 대한 연구

(본 논문은 필자가 2015년도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의 제4장 <불보(佛寶)의 재해석: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 중 일부 내용에 다소 수정을 더하여 작성한 것이다.)
하영수/(금강대학교)

 

[국문요약]

『법화경』 「여래수량품」은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중요한 교설을 설하는 품

으로 예로부터 중시되어 왔다. 그런데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나(=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라는 경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구절은 한역 법화경

에는 설해지지 않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본 논문

을 작성한 계기이다.

본 논문에서는 한역과 범어본 사이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몇 가지 단계를

설정하여 이를 검토했다.

먼저 원문 추정을 시도해 보았다. 원문에 관해서는 크게 두 종류의 독법이

있음을 확인했는데,『법화경』의 두 한역인『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의 독

법과 범어본『법화경』과 각종 범어사본,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이 그것이

다. 그 중 범어본 자료들은 독법이 일치했는데, 모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경

문을 포함하고 있다.「법화경론」의 경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를 통해 원문을

추정해 보았다.

이후 추정된 원문을 바탕으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 보았다. 그

결과 ‘붓다의 보살행’이란 다름 아닌 구원성불한 이래로 전개해온 ‘붓다의 교

화행’을 지시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붓다의 교화행을 보살행으로 명명

하는 범본의 내용전개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으로『법화경』에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설해진 배경에 대해서

검토했다.「법화경론」에서는 이를 본원(本願)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데, 이는

핵심을 간파한 것이라 생각된다. 다만 이 교설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므로, 붓

다의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교화라는 문맥을 보다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이를『비화경』을 참고하여 검토했다.

이러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함의하는 바는 붓다의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그대로 그의 자비의 교화행을 의미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아울러 일체

중생을 성불로 이끌겠다는 붓다의 서원(誓願)은 ‘일불승(一佛乘)’의 지혜를

밝히는 일(「방편품」)과 ‘붓다의 부단한 보살행’(「수량품」)이라는 두 축에 의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

 

종래에『법화경』은 구마라집의『묘법연화경』을 중심으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범어 사본을 교정한 비판적 편집본이 출간되면서『법화경』에 대한 연구

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범어본과 한역의 차이는 대개

근소한 것이며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정도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

되기 쉽지만, 그러나 실제로 양자를 대조해보면 형식과 내용 면에 있어서 종종

무시할 수 없는 차이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러한 차이점이 경전의

중요한 교설과 직접적으로 관련될 경우에는 단순히 내용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경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라는 해석학적인 문제로 이어지게 된다. 바로 그

러한 문제를 「제16여래수량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은 「제2방편품」과 더불어『법화경』의 근본 교설을 담고 있는 품

이라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는 석가모니 붓다에 대한 놀라운 사실이 밝

혀지는데, 붓다는 사실 현생에서 최근에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득히 먼 과거세

에 이미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실성(久遠實成)’과 앞으로 남은 ‘수명’에 관

한 법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붓다의 구원실성과 수명에 관한 교설을 둘러싸고

두 한역(『정법화경』과『묘법연화경』)과 범어본에 확연한 의미상의 차이가 발

견된다. 두 한역에서는 붓다의 수명에 방점이 놓여 있지만, 범어본에서는 “나

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설하면서 붓다가 보살행을 행하고 있음을 강조

하고 있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낯설고 또한 교리적인 모순을 내포하는 것

으로 생각되는 내용이 범어본『법화경』에 설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한역

과 범어본의 차이는 단순한 의미상의 상이함을 넘어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이

요청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인도논사의 주석서로는 유일하게 현존하는 세친(世親,

Vasubandhu)의「법화경론(法華經論)」Saddharmapuṇḍarīkasūtra-upadeśa에

다음과 같은 특징이 드러난다는 점이다.「법화경론」은 범본은 산실되었고, 한

역으로 보리유지(菩提流支, Bodhiruci) 역「묘법연화경우바제사(妙法蓮華經

憂波提舍)」와 늑나마제(勒那摩提, Ratnamati) 역「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妙

法蓮華經論優波提舍)」2종만이 전해지는데, 두 번역 모두 「여래수량품」의 해

당 구절에 관해『묘법연화경』의 번역어를 거의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내용상으

로는 범어본의 독법을 지지하고 있다.

 

이로써『법화경』에 있어 중요한 교설을 담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

절에 관해 몇 가지 문제가 노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래수량품」에서 설하는

붓다의 수명에 관해서 원문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어떤 것이며, 무엇을 함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내포하고 있는 「여래수량품」의 특정 구절에 관해 원문을

추정하고 그 의미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2. 「여래수량품」의 문제의 경문

 

「여래수량품」은 청중들에게 여래에 대한 믿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면서 시

작된다.1) 동일한 말을 세 번 반복하고, 이에 대해 미륵보살을 위시한 모든 보

살들이 여래에 대한 믿음을 보이면서 설법을 간청하기를 세 번 반복한 후에 설

법이 시작된다. 석가모니 붓다는 가야성 부근에서 이번 생애에 성불한 것이 아

니라, 사실은 수백천코티나유타의 겁 이전에 성불했다고 말한다.2) 이미 아득

한 과거세에 성불했다는 이른바 구원성불(久遠成佛)의 교설이다. 붓다는 오래

전에 성불한 이후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많은 세계에서

법을 설해왔고 또한 때때로 방편으로서 열반(죽음)에 들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때때로 붓다는 중생의 선근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어릴 적에

출가하여 최근에 깨달았다”고 설명하기도 하였으나, 그와 같은 법문은 중생들

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설한다.3) 그리고 여래의 방편은 진실한 것이

며 거짓말[虛言]이 아닌데, 그 이유는 여래의 교화가 세상 사람들이 보고 생각

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인 여래의 경계(如實知見)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

라고 설명된다.4) 그리고 본 논문에서 검토해보고자 하는 경문이 이어진다.5)

1)『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 諸善男子 汝等當信解如來誠諦之語.
2)『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2-13): 善男子 我實成佛已來無量無邊百千萬億那由他劫.
3)『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b13-c9).
4)『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2-13): 諸所言說 皆實不虛 所以者何 如來如實知見
   三界之相.
5)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한 연구는 매우 적은 실정이다. 따라서 본문
   중에 선행연구를 개관하지 않고, 다만 각주에 국내외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를 대신하기
   로 한다.
   먼저 국내에서 「여래수량품」의 해당 구절에 대한 연구는 필자가 아는 한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
   았다. 다음으로 해외의 연구동향을 언급하자면, 범어본 법화경에 대한 번역본 중에서 Kern의 영
   역, 土田와 岩本의 일역, 그리고 松濤의 일역 등에서 범본의 표기대로 해당구절을 번역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 Kern 1963, 302.; 土田&岩本-下
   1965, 21.; 松濤-Ⅱ 2001, 109-110. 그러나 이러한 번역본에서 구체적인 해설이나 논의를 하고 있
   지는 않다. 필자가 아는 한 다음의 두 연구에서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田村芳朗의『법화경』해설서에서는 붓다가 보살행을 하고 있으므로『법화경』에서 보살
   행이 강조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는 취지의 언급을 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이유로부터『법화경』의
   중심사상에 기존의 진리(방편품), 생명(수량품)과 더불어 실천(보살행)을 포함시켜 이를『법화경』
   의 3대사상이라고 해설한다. 그러나 그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문제를 그 특이성과 중요성에 비해
   지나치게 간명하게 언급하고 있어, 심도 있는 논의라고 보기는 어렵다. 田村 1969, 115ff.
   두 번째 연구로는 松本史朗의 「久遠實成の佛について」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이 논문은
   필자가 아는 한 「여래수량품」의 해당 경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한 최초의 연구이다. 또한 필자
   가 이 문제에 착목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논문이기도 하다. 松本는『정법화경』『묘법연화경』이라
   는 기존의 한역과 세친의「법화경론」을 대조하고, 여기에 범어본 및 범어사본을 활용하여 논의를
   전개한다. 본 논문에서 범어 원문을 추정하기 위해 채용한 방법은 松本가 그의 논문에서 취한 방법
   과 같다. 필자는 여기에 범어본 자료를 더욱 보강하여 논의를 전개했다. 松本와 필자는 문헌 활용에
   있어 기본적으로 동일한 방법을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는 범어본
   에 誤記가 있다고 보고,『묘법연화경』의 독법을 지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松本 2012, 243-254.

 

문제의 경문

[1]『묘법연화경』: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T.9, 42c22-23)

[2]『정법화경』: 又如來不必如初所說 前過去世時行菩薩法 以爲成就壽命限也.

    (T.9, 113c23-25)

 

인용문 [1]은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이 주어, “今猶未盡”이 술어가 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해석은 “내가 본래

행했던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지금도 오히려 끝나지 않았다”가 될 것이

다. 위 번역문은 과거에 행했던 보살도라는 인행(因行)에 의해 수명을 얻었는

데(所成壽命), 그 수명이 지금도 다 끝나지 않았음(今猶未盡)을 밝히고 있다

고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전체가 한 문장으로 되어 있고, 중점은

수명에 있으며, 문장의 부정어가 “未” 하나라는 점이다.

 

한편,『정법화경』의 한역은 번역이 쉽지 않으나, 이를 시도하면, “또한 여래

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 이전의 과거세 때에 행했던 보살법으

로 성취한 수명의 한도(限)를 삼는다”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앞 문장

“또한 여래가 반드시 처음 설한 바와 같지 않으니”의 부분은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방식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중생이 선근

이 적고 번뇌가 많을 경우에는 방편으로 “젊을 때에 출가하여 깨달았다”6)고

설한다고 하였는데, 약 2500년 전에 출현하여 29세에 출가한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 역시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그런데 붓다의 실제 성불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므로, “처음 설한 것과는 다르다”고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뒤

의 “前過去世”로 시작되는 문장은 붓다의 수명이 과거에 보살법(보살행)에 의

해 성취한 것을 한도로 삼는다고 하여, 붓다의 수명이 보살행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인상을 주는데,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전체적으로는

여래가 처음 설한 바, 즉 보드가야에서 최근에야 깨달음 얻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여래의 수명의 한도는 과거의 보살행에 의해 결정(성취)되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다고 번역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용문 [2]

역시 붓다의 실제 수명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에 보살행을 행했다는 설명을 덧

붙이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붓다의 수명(成就壽命)에 중점이 있다고 할 수

있고, 문장 전체의 부정어가 “不” 하나이다.

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7): 我少出家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의 비교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한역의 번역이 의미상 반드시 일치하

는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지만, 두 번역문 모두 붓다의 실제 수명에 방점이 있

으며, 그것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하나의 부정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법화경』에 대한 세친의 주석서「법화경론」(보리유지 역)에서 해당

부분을 살펴보기로 한다.

 

[3]「법화경론」: 내가 전생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은 [내가 세웠던] 본원 때문이다. [제

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다 채워지

지 않았다고 하는 것(言未滿者)이 깨달음을 완전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非謂菩提不滿足). 이룬 수명이 또한 앞의 수의 두 배라는 것(所成壽命

倍上數者)이란, 이 문장은 여래의 수명이 영원함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뛰어

난 방편으로 많은 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7)

7)『묘법연화경우바제사』권2 「제3비유품」(T.26, 9b27-c2):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衆
   生界未盡 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也 所成壽命復倍上數者 此文示現如來命常 善巧
   方便顯多數故.
  「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은 어구의 가감에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본 논문에서 문제로 삼는
   ‘보살행’에 관해서는 번역이 일치한다. 늑나마제 역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묘법연화경론우바제사』권1 「제3비유품」(T.26, 19a2-6): 我本行菩薩道今猶未滿者 以本願故 眾
   生界未盡願非究竟故 言未滿者 非謂菩提不滿足故 所成壽命復倍上數者 示現如來常命方便顯多數
   過上數量不可數知故.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부분이『묘법연화경』의 원문에 해당하는데, [1]의

인용문에서 “今猶未盡”이 “今猶未滿”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묘법연

화경』의 한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주의를 끄는 것은「법화경론」의

주석은 번역어에 있어『묘법연화경』과 거의 일치하지만, 문장의 구성과 내용

이 다르다는 점이다.『묘법연화경』은 “과거에 보살도를 행함으로 얻은 수명

지금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반해,「법화경론」에서는 “내가 전생

에서 행했던(本行) 보살도가 지금도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즉, 끝나지 않았다고 하는 술어의 주어가『묘법연화경』에서는 ‘수명’으로 되

어 있고,「법화경론」에서는 ‘보살도’로 되어 있어 서로 다르다.「법화경론」에

서는 과거에 행한 보살도가 다 완수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내가 세웠던] 본

원 때문이다.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가 아직 남아 있어 [본]원이 완성되지 않

은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서,8) 그러나 이것이 보리(bodhi), 즉 깨달음을 완전

히 갖추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에

의해] 이룬 수명(所成壽命)이 위의 수의 두 배라고 주석하고 있다(復倍上數).

즉『묘법연화경』에서 [과거에 성취한] 수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번역되었

던 하나의 문장을,「법화경론」에서는 ① 보살행이 다 완수되지 않았고, ② [보

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所成壽命)이 두 배가 남았다고 하여, 두 가지 내용

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중에서 ①의 내용은 교리적으로

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붓다란 과거세에 본원

(本願, 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육바라밀을 수행하여, 보살도를 완성하였

기 때문에 그 과보로서 붓다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인데, ①의

내용은 성불한 붓다의 보살행이 아직 다 완수되지 않았다고 하여, 교리적인 혼

선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정법화경』,『묘법연화경』,「법화경론」이 각기

내용이 서로 다르고, 교리적으로도 혼란이 예상되는 이 경문을 범어본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8) 번역은 大竹晋 2011, 86-88을 참조.

 

[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a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SP, p.319,2-3)

 

위 범어문은 Kern&Nanjio 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이에 대한 번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

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이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api)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ṇam).9)

9) 번역은 松濤 2001, 109-110 참조. 괄호 안의 보충은 필자에 의함.

 

인용한 범어문은 두 가지 사실, 즉 ①과거세에 행했던 보살행이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는 것과 ②수명의 양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

고 있다. 위에 인용한 범문 [4]가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과 수명이라는 두 가

지 내용을 설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말로 “~도”라고 번역할 수 있는 “api”가

위 문장 안에 두 번 나온다는 것에서도 예상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위에 인용

된 범문은「법화경론」의 인용(인용문[3])과 내용적으로 거의 같다고 할 수 있

다. 다만 인용문[3]에서 마지막의 “復倍上數”는 범문의 이어지는 문장에, “그

리고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아직까지도 나에게는 수명이 다 만료되기까지

는 그 두 배(tad-dviguṇa, 復倍上數)의 수백·천·나유타의 겁이 남아 있다”10)

라는 문장을 앞 문장과 연결시켜서 주석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제시한 두 개의 한역과 주석서「법화경론」중에서 현존하는 범문과 가

장 가까운 것은「법화경론」임을 알 수 있다.

10) SP. 319, 3-4: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

다고 하는, 매우 생소하고 교리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가 위 문장

에는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11) 그렇지만 이 문제에 대해, 교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위의 문장을 억지로 교리적으로 맞도록 번역할 수는 없는

일이다. 위 경문의 범어원문의 형태에 대해 결론을 내리자면, 필자는『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이 아닌, 지금의 범문, 그리고 범문과 거의 흡사한「법화경

론」의 해당번역을 더 타당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먼저 범어본의 사본 등을

통해 살펴본 후에, 경전의 내용을 검토함으로써 이러한 독법의 타당성을 제시

하도록 하겠다.

 

3. 범어본에 의한 해당 구절의 재해석

 

1) 범어본에 의한 원문 추정

『법화경』은 중앙아시아나 네팔 등에서 많은 범어 사본이 발견되었고, 현재

사본을 로마자로 전사(轉寫)하여 출판한 판본들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여기

서는 교정본과 전사본들의 표기를 확인해보도록 한다.

 

-교정본-

① Kern&Nanjio 본과 더불어 널리 활용되는 Wogihara&Tsuchida 교정본은 다

음과 같다.12)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2) SP(WT). 1958, 271,16-272,1.

 

② Dutt가 중앙아시아의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3)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3) Dutt, Nalinaksha 1953, 209,15-16.

 

③ Vaidya가 네팔 사본을 바탕으로 작성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4)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

14) Vaidya, P.L. 1960, 290,27-28.

 

세 개의 교정본은 구절의 띄어쓰기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구문 전체에

대한 독해는 모두 Kern&Nanjio의 인용문 [4]와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사본류

에 관해서는『법화경』사본의 주요 출토지인 카시미르, 중앙아시아, 네팔계통

의 사본 독법을 제시하도록 한다.

 

-사본류-

① Watanabe Shoko(渡辺照宏)가 Gilgit에서 발견된 사본을 교정하여 로마자로

전사(轉寫)한 교정본은 다음과 같다.1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vikī bodhisattvacarī pariniṣpāditā 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5) Watanabe, Shoko 1975, 113,11-12.

 

② Toda Hirohumi(戸田博文)의 중앙아시아 사본 로마나이즈본은 다음과 같다.16)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ū)r(v)i(kā )yuṣpramāṇam api me kulaputrā

aparipūrnam/

16) Toda, Hirohumi 1981, 156.

 

③ 네팔계 사본을 중심으로 집성한 Toda에서는 18개의 사본이 거의 일치한다.17)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 āyuṣ-

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17) Toda, Hirohumi 1994-2002, Vol.Ⅶ, 4-7.

 

먼저 ①에 관해서 말하자면, 와타나베는 자신의 전사본에서 위와 같이 표기

를 하고, 각주에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로 읽어야 한다고 추가하고 있다.18) 이를 해석하면 “과거의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도 다 채워지지 않았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독해가 한역의 “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盡”과 부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와타나베는 위의 전사본을 출판하기 전에 사본의 위 구절에 대한 독해방

식을 문제로 삼아 논한 적이 있다.19) 와타나베는 사본의 위 구절이 교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을 표하면서, 이를 위와 마찬가지로

“paurvika-bodhisattvacarī-pariniṣpāditāyu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으로

읽어야 할 것이라는 견해를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독해가 사본에 의해

지지되지는 않는다고 부연하고 있다.20)

18) Watanabe, Shoko 1975, 113의 각주12) 참조.
19) 渡辺照宏 1970, 85-86.
20) 위의 책, 같은 곳.

 

②의 특징은 “me kulaputrā”가 두 번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위 구

절에 두 개의 문장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나에게 선남자들이여(me kulaputrā)”

와 같이 문장을 이끄는 말을 반복한다는 것은 ‘과거에서부터 행해오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음’과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지 않았다’는 두 가지 내용이 설해

지고 있음을 명백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③에 관해서 말하자면, 전체 18개의 사본 중에서 15개의 사본이 위의 독해

와 일치한다. 그리고 15개 중에서 10개의 사본이, “pariniṣpāditā”와 “āyuṣpramāṇam”

사이에 단다(“/”)를 넣어, 이 구절을 두 가지 내용이 설해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3개의 사본에 이독(異讀)이 보이는데, 문장 후반부의

“apy aparipūrṇam”가 “adhy aparipūrṇam”으로 되어 있는 사본이 1개, “asya

paripūrṇam”의 형태를 보이는 사본이 2개 있다. 여기서 adhy aparipūrṇam의

“adhy”는 의미를 형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apy의 오기(誤記)로 생각되며, asya

paripūrṇam의 “asya”는 ‘s’가 ‘p’와 유사하므로, “apy+a(paripūrṇam)”의 오

기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교정본과 사본들을 종합하여 판단을 내리자면 현존하는 교정본과

사본들은 모두 인용 [4]의 범어문을 지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와타나베는

이 구절이 함의하는 교리적 특이성으로 인해 사본의 표기에 의문을 표하면서

『묘법연화경』의 문의(文意)와 통하는 독법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그 독해는

자신이 밝히고 있듯 사본에 의해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여기서 인용문

[4]에 대한「법화경론」의 주석방식의 특이점을 상기할 볼 필요가 있다. 보리류

지 역과 늑나마제 역과 모두『묘법연화경』의 번역어 “我本行菩薩道所成壽

命”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주석에 있어서는 “我本行菩薩道”와 “所成

壽命”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이를 해석하고 있다. 이는 곧 두 역자가 번역어에

관해서는『묘법연화경』의 것을 그대로 채용하되, 독해에 있어서는『묘법연화

경』의 이 구절을 오독(誤讀)으로 보고 이에 따르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은 다음의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첫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두 부류의 독법이 존재한다. ① 현

존하는 범어본의 교정본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의 독법과 ②『정법화

경』『묘법연화경』의 독법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현존하는 범어 사본과 교정

본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고, 한역「법화경론」의 독법도 이를 지지하므로 범

어본의 독법을 필사과정에서 우연히 발생한 오류라고 보기 어려우리라 생각된

다. 따라서 범어본 『법화경』의 해당 경문은 타당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며,

이로써 「여래수량품」 해당 경문의 원문을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여래수량품」의 상기 구절에 관해 거의 모든 사본이 일치한다는 점으

로부터, 범어본을 통해『법화경』을 읽고 신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이해되었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상

정할 수 있다.「법화경론」의 두 번역본이 오역(誤譯)이 아니라면, 이 점은 한역

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에 의해 「여래수량품」에서 묘사되는 붓다에 대해 ‘석가모니 붓

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라는 입장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렇다면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이 과연『법화경』속에서 어떻게 자리 잡고 있고,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지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한다.

 

2) 「여래수량품」 문맥의 재구성

‘붓다의 보살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이미 깨달음을 얻어 성불한 붓다가 여

전히 보살행을 한다는 이 낯선 교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 문제를 해

결하기 위해서는 이 교설, 붓다의 보살행이 설해진 인용문[4]를 중심으로 그

전후 문맥을 재구성해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인용문[4]

앞에서는 구원성불과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고, 인용문[4] 이후에는 우리에게

알려진 역사적 붓다에 관해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둘을 각기 ‘구원실성불(久

遠實成佛)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으로 나누어 검토

하도록 한다.

 

(1) 구원실성불(久遠實成佛)의 보살행

「여래수량품」에서 석가모니 붓다가 먼 과거에 이미 성불했다는 사실이 밝

혀졌는데, 이러한 구원실성의 붓다가 인용문 [4]에서 보살행을 계속 전개하고

있다고 설하였다. 이 표현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이미 깨달

음을 이룬 붓다가 구원성불한 후에 실제로 어떤 활동을 펼쳐왔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구원실성불의 구체적인 행적에 관해서는 마츠모토 시

로(松本史朗)의 연구가 유용하다.21)

21) 松本, 앞의 논문 참조.

 

마츠모토는 그의 논문 전반에 걸쳐 구원실성의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가

대비적으로 이해되거나, 구원실성의 붓다에 대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이해하

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다. 마츠모토는『법화경』에 제시된 구원실성의 붓다가

과거에 깨달음을 얻은 장소가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의 보리수 아래”임을

다음의 경문을 들어 밝히고 있다.22)

22) 경문 [5]와 [6]은 松本의 위 연구에 인용된 것이다. 위의 논문, 243-244.

 

[5] 아지타(아일다=미륵)여, 나는 이 사바세계에서 무상정등각을 깨닫고서, 이 모

든 보살 마하살들(=종지용출의 보살들)을 무상정등각을 향하여 교화하고, 고무시

키고, 환희케 하고, 교도(敎導)한 것이다.23)

23) SP. 309,4-6: mayaite ajita sarve bodhisattvā mahāsattv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āv anuttarāṃ
    samyaksaṃbodhim abhisaṃbudhya samādāpitāḥ samuttejitāḥ saṃpraharṣitā anuttarāyāṃ
    samyaksaṃbodhau pariṇāmitāḥ /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a2-3): 是諸大菩薩摩訶薩 無量無数阿僧祇 從地涌
    出 汝等昔所未見者 我於是娑婆世界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已 敎化示導是諸菩薩.

 

[6] 그리고 나는 가야(성)에 있는 그 나무(보리수)의 뿌리 부근에서 무상의 법륜을

굴리고서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이 최상의 보리를 위해 숙련시켰다.(게

송 42)

 

너희들 모두 나의 번뇌로부터 자유롭고(無漏), 진실한 말을 듣고서 나를 믿으

라. 나는 그와 같이 오래 전에(evaṃ ciram) 최상의 보리를 얻었으며, 그리고

그와 같이 오래 동안(evaṃ ciram) 나는 그들 모두(=종지용출의 보살들)를 [무

상정등각을 향하여] 숙련시킨 것이다.(게송 43)24)

24) SP. 301,9-12: mayā ca prāpya imam agrabodhiṃ nagare gayāyāṃ drumamūli tatra/
    anuttaraṃ vartiya dharmacakraṃ paripācitāḥ sarvi ihāgrabodhau//42//
    anāsravā bhūta iyaṃ mi vācā śruṇitva sarve mama śraddadhadhvam/
    evaṃ ciraṃ prāpta mayāgrabodhi paripācitāś caiti mayaiva sarve//43//
   『묘법연화경』권5 「제15종지용출품」(T.9, 41b23-28): 我於伽耶城 菩提樹下坐 得成最正覺 轉無
    上法輪 爾乃敎化之 令初發道心 今皆住不退 悉當得成佛 我今說實語 汝等一心信 我從久遠來 敎化
    是等衆.

 

위 경문에서 붓다의 성불이 사바세계의 가야성 부근에 있는 보리수 아래에

서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장소는 경전에서 붓다가 아

주 먼 과거세에 성불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종지용출의 보살들을

교화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런데 위 경문들은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즉 붓다가 성불한 이후에 지속적으로 행한 것은 주로 설법을 통한 중생의 교화

(samādāpana)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구원실성불의 교화는 매우 다양

한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7] 이때부터 줄곧 나는 선남자들여, 이 사바세계(娑婆世界, Sahā-lokadhātu)와

다른 수백·천·코티·나유타의 세계에서 중생들에게 법을 설시해온 것이다.25)

25) SP. 317,9-10: yataḥ prabhṛty ahaṃ kulaputrā asyāṃ sahāyāṃ lokadhātau sattvānāṃ dharmaṃ
    deśayāmi anyeṣu ca lokadhātukoṭīnayutaśatasahasreṣu/
   『묘법연화경』권 5 「제16여래수량품」(T.9, 42b26-28): 自從是來 我常在此娑婆世界說法敎化 
    亦於餘處百千萬億那由他阿僧祇國導利衆生.

 

위 인용문에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구체적으로는 앞의 ‘오백진점겁(五百

塵點劫)’의 비유를 지시한다. 오백진점겁이란 석가모니 붓다의 성불과 수명이

라는 시간적 문제를 공간적 개념을 통해 설명하는 비유인데, 그 내용은 오백천

만억나유타로 표현되는 무한에 가까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루

로 만들어 가루 하나를 일겁(一劫)으로 치더라도 붓다가 성불하고서 경과한

시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26) 따라서 “이때부터 줄곧”이란 ‘아주 오래

전에 성불한 이래로 계속해서’라는 의미가 된다. 즉 구원(久遠)에 성불한 이후

붓다는 사바세계와 다른 수많은 세계에서 중생에게 법을 설해왔다. 그리고 헤

아릴 수 없이 오래전에 성불한 이후 계속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가운데, 때때로

열반(죽음)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설해진다.

26)『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 T09, 42b11-26.

 

[8] 그리고 또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계속해서 찾아오는 중생들의 능력(indrya)

과 지혜의 높고 낮음, 정진을 시작한 [시간의] 길이를 관찰하고서, 곳곳에서(각각

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그리고 곳곳에서 자신의 완전한 열반

(parinirvāṇa)을 선언하였으며, 그리고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중생들을 다양한 법

문으로 만족시켰던 것이다.27)

27) SP. 317,13-318,1: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ḥ tathāgata āgatāgatānāṃ sattvānām indriyaparāpara    
     jñatāṃ vīryārabdhimātratāṃ vyavalokya tasmiṃs tasminn ātmano nāma vyāharati
    tasmiṃs tasmiṃś cātmanaḥ parinirvāṇaṃ vyāharati tathā tathā ca sattvān paritoṣayati
    nānāvidhair dharmaparyāyaiḥ/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5): 諸善男子 若有衆生來至我所 我以佛眼 觀其
    信等諸根利鈍 隨所應度 處處自說 名字不同 年紀大小 亦復現言當入涅槃 又以種種方便說微妙法
    能令衆生發歡喜心.

 

위 인용문에서 붓다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교화를 했는데 색신(色身,

rūpakāya)의 소멸, 즉 육체적 죽음을 통해 성취되는 완전한 열반(parinirvāṇa,

般涅槃)도 그의 교화 방법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붓다는 헤아릴 수 없이 오

래 전에 성불을 이룬 이후로 계속해서 중생을 제도해 왔는데, 때때로 육체적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열반에 든

붓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가? 다음의 경문을 보도록 한다.

 

[9] 실로 선남자들이여, 여래는 여래가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토록 오래전에 깨닫고, 헤아릴 수 없는 수명(ayuṣpramāṇa)을 가지고 항상(sadā)

머물러 있었으며, 여래는 열반에 든 적이 없으나 중생들을 교화하고자 완전한 열

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28)

28) SP. 318,14-315,1 : yad dhi kulaputrās tathāgatena kartavyaṃ tat tathāgataḥ karoti/ tāvac
    cirābhisaṃbuddho 'parimitāyuṣpramāṇas tathāgataḥ sadā sthitaḥ/ aparinirvṛtas tathāgataḥ
    parinirvāṇam ādarśayati vaineyavaśena/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9-21): 所作佛事 未曾暫廢 如是我成佛已來 甚大
    久遠 壽命無量阿僧祇劫 常住不滅.

 

위 인용문은 붓다가 중생 교화를 위해 열반에 들기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열

반에 든 적이 없으며, 언제나 상주하고 있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밝혀지는

것은 붓다의 열반이 소멸이 아니라 교화의 한 방편(方便, upāya)이라는 점이

다. 이상의 경문들은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실제로 열반에 들지

않고 언제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하는 붓다의 이미지를 전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언급한 인용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자면, 위의 인용문 [7]

[8] [9]는 모두 인용문 [4]의 앞의 내용들이다. 그 중에서 인용문 [7]은 “그때부

터 줄곧”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백진점겁에 비유될 만큼 먼 과거에 성

불을 이룬 붓다의 교화활동이 시작된 시기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인용문 [9]

는 인용문[4]의 “나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구절 바로 앞의 문장이다.

따라서 인용문들의 내용을 정리하면, 앞에서 오백진점겁에 비유되는 아득한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나서, 이 시기부터 계속해서 교화활동이 지속되었

음을 인용문[7]이 설명하고, 인용문 [8]에서 때때로 과거에 열반에 들었음을

설하나, 인용문 [9]에서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상주하여 법을 설함을 밝

히고, 마지막에 인용문 [4]에서 앞의 내용을 모두 포괄하여 이를 “나의 보살행

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용문[4] 앞에 내용은 모

두 과거에 깨달음을 성취한 이후 붓다가 펼쳤던 다양한 ‘교화행(敎化行)’을 지

시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로부터 펼쳐왔던 다양한 교

화행을 인용문[4]에서 “나의 보살행(菩薩行)은 끝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밝

히고 있다. 즉 과거로부터 행해왔던 ‘교화행’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인용문[4]의 맥락인 것이다.

 

(2) 가야근성불(伽倻近成佛)의 보살행

석가모니 붓다가 구원성불한 이래로 쉼 없이 중생을 교화한 것을 붓다 자

신이 보살행으로 규정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현재불, 그러니까 지금

으로부터 약 2500년 전에 인도에서 출현하여, 가야성 근처의 보리수 아래에

서 최근에 성불한 것으로 알려진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0] 게다가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지금도(adyāpi) 과거의(=과거에서부터

계속해온) 보살행(bodhisattvacaryā)은 완성되지 않았고(na pariniṣpāditā), [보살

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의 양(āyuṣpramāṇam)도 또한 다 채워지지 않았다(aparipūr-

ṇam). 그런데 실로 또한 선남자들이여, 나에게는 앞으로도(adyāpi) 수명의 양이

다 채워지기까지 그것(지금까지의 수명의 양)의 두 배에 달하는 수백·천·코티·나

유타의 겁이 남아있다. 실로 또한 나는 지금(idānīm) [실제로는] 결코 완전한 열반

에 들지 않음에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고 선언하는 것이다.29)

29) SP. 319,2-5: na ca tāvan me kulaputrā adyāpi paurvikī bodhisattvacaryā pariniṣpāditāyu-
    ṣpramāṇam apy aparipūrṇam/ api tu khalu punaḥ kulaputrā adyāpi taddviguṇena me
    kalpakoṭīnayutaśatasahasrāṇi bhaviṣyanti āyuṣpramāṇasyāparipūrṇatvāt/ idānīṃ khalu
    punar ahaṃ kulaputrā aparinirvāyamāṇa eva parinirvāṇam ārocayāmi/
   『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22-24): 諸善男子 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 今猶未
    盡 復倍上數 然今非實滅度 而便唱言 當取滅度.

 

위 인용문에는 가야성 부근에서 최근에 성불한 붓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붓다의 수명과 열반에 대한 교설이 담겨 있다. 우선 석가모

니 붓다의 남은 수명에 관해 구원에 성불한 이후 현재까지 아직 그 수명이 다

채워지지 않았음은 인용문 [4]에서 설해진 바이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는

앞으로 남은 붓다의 수명은 그것의 두 배(taddviguṇa)가 더 남아 있다고 설해

지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붓다의 수명을 설명한 그 다음의 문장인데, 이

문장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지금(idānīm)”이라는 단어이다. “지금(idānīm)”

이란 말은 과거세에 이미 성불을 이룬 붓다가 선언한 열반에 대해 대비적으로

사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때의 “지금”이란 말은 곧 “바로 이번 생에

있어서”의 의미이며, 직접적으로는 「제11견보탑품」에서의 열반에 대한 선언

을 지시하는 것으로 보인다.30) 그리고 열반에 든다는 것의 실질적인 의미는 인

용문[9]에서 그 의미가 밝혀졌듯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을 보여줄 뿐,

실제로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고, 항상 우리 곁에 머무르며 중생교화를 위해

쉼 없이 노력하고 있음을 의도하고 있다.

30)『묘법연화경』권4 「제11견보탑품」(T.9, 33c13-14): 誰能於此娑婆國土廣說妙法華經 
    今正是時如來不久當入涅槃.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의 주요 내용을 인용문[4]를 중심으로 하여 구원실

성불의 보살행과 가야근성불의 보살행이라는 관점에서 재구성해보았다. 결론

을 말하자면, 구원성불한 붓다와 가야근성의 붓다의 보살행은 동일하며, 그 핵

심은 중생에 대한 교화, 즉 ‘교화행’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중생을 교화

하기 위해 항상 상주하며 법을 설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열반에 드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다양한 방편으로 중생을 돕는다. 그와 같이 구원성불한 이래 무수

한 시간동안에 걸친 ‘교화행’을 인용문[4]에서 붓다 자신이 ‘보살행’이라고 불

렀던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도 중생에게 법을 설하고, 또한 과거와 똑같은 방

식으로 중생교화의 일환(一環)으로써 열반을 보여줄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리

고 붓다에게는 앞으로도 무한에 가까운 수명이 남아있다. 과거에 행했던 교화

활동을 붓다 스스로가 보살행이라고 불렀으므로, 가야근성불의 교화행도 마찬

가지로 보살행이 된다. 따라서 붓다의 보살행은 과거로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

에까지 그의 수명이 남아 있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상에서 범어본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내용을 한역의 그것과 비교하여 검

토해보도록 한다. 범어본의 내용전개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로 다양한 중생교

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그 교화행을 가리켜서 보살행이라 부르면서 앞으로

도 수명이 매우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 수명 동안에 붓다의 교화행, 즉 보살행

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의 경우에는 과거에 성불한 이래

로 다양한 방식으로 교화행을 펼쳐왔음을 설하고서, “내가 과거에 행한 보살

도에 의해 이룬 수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我本行菩薩道所成壽命今猶未

盡)”는 흐름이 된다. 그 경우에, 앞에서 자세하게 과거의 ‘교화활동’을 설명하

다가 갑자기 ‘보살도에 의해 성취한 수명’ 문제로 넘어가게 되므로 내용전개가

매끄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또한 그 직전의 내용은 분명히 구원에 성불했다는

것이었는데, 갑자기 구원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을 언

급한다면, 과거에 성불했다는 내용과 성불 이전의 과거에 보살행을 했다는 두

개의 과거사(過去事)가 등장하므로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게 된다. 그러므로 「여

래수량품」의 내용전개는 먼저 서두에서 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

히고, 그 오랜 시간동안 붓다 자신이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교화했음을 설명

하고, 그것을 보살행이라고 규정하고, 앞으로도 수명이 그에 두 배가 넘게 남

았으므로, 자신의 교화행/보살행이 계속되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범어본의 내

용 전개가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것이 「여래수량품」의 문맥이라고

생각하며, 이러한 이해가 적어도 범본을 중심으로『법화경』을 이해해온 사람

들에 의해 지지되어왔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4. 석가모니 붓다의 현재진행형 보살행

 

1) 석가모니 붓다의 서원과 예토성불-비화경의 설명

이상으로 「여래수량품」에서 언급되는 석가모니 붓다의 보살행에 대해 검토

해보았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법화경』에는 다른

경전에서는 보이지 않는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독특한 교설이 설해지고 있는

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해 인용문 [3]의「법화경론」에서는 “본원(本願)을

가지기 때문이다, [즉] 중생계가 다하지 않으니 원(願)이 궁극적으로 끝난 것

(究竟)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bodhi)가 다 구족되지 않았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즉「법화경론」에서는 붓다의 보살행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시절에 세웠던 본원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31) 붓다는 보리(bodhi)를

성취했지만, 제도되어야 할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한량없는 중생을 성불로

이끌기 위해 보살 때 세웠던 원행을 계속한다는 해석은 경전의 문의(文意)를

잘 드러내는 탁월한 주석으로 생각된다.

31)『법화경』에서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은 모든 중생이 붓다와 동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 본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밝히고 있다.『묘법연화경』권1 「제2방편품」(T.9, 8b4-7): 
    舍利弗當知 我    本立誓願 欲令一切衆 如我等無異 如我昔所願 今者已滿足 化一切衆生 
    皆令入佛道.

 

다만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왜냐하면 중생계가 끝이 없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붓다가 보살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한다고 한다면, 이는 다른 불국토의 붓다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기 때

문이다. 즉 서방 극락(極樂, Sukhāvatī)정토에서도 중생계는 끝이 없으므로 아

미타불(阿彌陀佛, Amitābha) 역시 쉼 없이 보살행을 행해야 할 것이고, 동방

묘희국(妙喜國, Abhirati)의 아촉불(阿閦佛, Akṣobhya)도 마찬가지일 것이

다.32) 따라서 모든 불국토의 붓다들은 예외 없이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는 교

리가 성립할 것이며, 그러한 교리가 불교의 교리사에 있어서 이미 정설로서 확

립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체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리는 성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붓다의 보살행을 본원과 연결시켜 설명하는「법화경론」의

주석은 어떤 특정한 맥락이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그 작업은 무엇보

다도 석가모니 붓다가 보살 시절에 세운 본원이 어떤 고유의 특징을 지니는가

에 대해 검토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32) 붓다와 그들의 국토에 관해서는 다음의 저서들을 참조. 시즈타니 마사오·수구로 신죠 2008,
    199-210.; 폴 윌리암스·앤서니 트라이브 2009, 269-274.

 

석가모니 붓다의 현저한 특징 중 하나로 예토(穢土)에서의 성불과 중생교화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화성유품(化城喻品)」에는 대통지승(大通智勝, Mahā-

abhijñājñānābhibhū)여래의 아들인 16왕자들이 대통지승여래에게 출가하여

법을 청문하고 성불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 중 석가모니 붓다는 예토인 사

바세계에서 성불했다고 명시하고 있다.33)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성불

및 중생교화의 인연에 대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경전으로『비화경(悲

華經)』을 들 수 있다.

33)『묘법연화경』권3 「제7화성유품」(T.9, 25c5-6): 第十六我釋迦牟尼佛 於娑婆國土
    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비화경』의 범어 경전 제목은 Karuṇāpuṇḍarīka-sūtra이다. 제목에서 karuṇā

는 자비, puṇḍarīka는 연꽃들 중에서도 흰 연꽃(白蓮)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

전 제목은 ‘자비(慈悲)의 흰 연꽃(白蓮)에 관해 설하는 경전(經)’으로 풀이될

수 있다.『비화경』에는 총 4종류의 한역이 있다고 전해지는데,『비화경』의 원

형으로 추측되는 축법호 역의『한거경(閑居經)』(1권), 역자불명의『대승비분

타리경(大乘悲分陀利經)』, 도공(道龔) 역『비화경』, 담무참 역의『비화경』(10

권)이다.34)『정법화경』을 번역한 축법호가 이 경전의 원형으로 추정되는『한

거경』을 번역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여기서는 경전의 내용을 상세히 소

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사전의 해설로 이를 대신하고자 한다.『비화경』에 대한

「大乘經典解說事典」의 내용 소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정토에서 깨달은 붓다임에 반해,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이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깨닫고, 괴로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려고 한다. 그

석가모니불이 대비(大悲, mahākaruṇā)의 보살임을 찬탄하는 것이 주제이다.35)

35) 勝崎裕彦 외 3인 편 1997, 232f.

 

『비화경』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과거 보살이었을 시기에 500가지의 서원

(誓願)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경전에 그 구체적인 항목들이 소개되지는 않지

만, 요점은 그의 본원(本願, pūrvapranidhāṇa)이 정토(淨土)가 아닌 예토(穢

土)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아미타불이나 아촉불이 과거 보살

이었을 시절에 정토(淨土)에서 성불할 것을 서원했는데 반해, 석가모니의 전

신인 보해(寶海, Samudrareṇu)보살은 예토, 그 중에서도 번뇌가 가장 치성한

사바세계에서 성불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할 것을 서원했다고 한다.

이에 당시의 붓다인 보장(寶藏, Ratnagarbha)여래는 보해보살의 자비심을 크

게 칭찬하여, 그를 대비보살(大悲菩薩)이라고 부른다.36)『비화경』은 석가모

니 붓다가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게 된 인연이 그의 본원에 의한 것

이며, 그 본원은 그의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36) 위의 책, 같은 곳.

 

필자는 석가모니 붓다 본원의 특징인 예토에서의 성불 및 중생제도가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과 관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토의 중생을 제

도한다는 것은 자신이 인행(因行)으로 성취한 과보를 향유할 여유도 없이, 쉼

없이 중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대단히 수고스럽고 어려운 일이다.『법화경』에

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많은 중생에게] 여러 선근이 생기도록, 여러 인연과 비유와 온갖 말로써 가지가지

법문을 하는 것이니라. 붓다로서 해야할 일을 지금까지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느

니라.37)

37)『묘법연화경』권5 「제16여래수량품」(T.9, 42c17-21): 欲令生諸善根 以若干因緣 譬喻 
    言辭種種說法 所作佛事 未曾暫廢.

 

예토에서 성불하여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쉼 없이 헌신하는 석가모니 붓다

의 교화는 철저하게 이타행으로 일관된 것이며, 이는 대자비심의 발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의 이타행은 문수보살이나 관세음보살과

같은 일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의 관념과도 유사성이

인정된다.38) 예를 들어 문수보살은 본래 성불을 이룬 붓다이지만, 중생제도를

위해 보살의 모습으로 교화하며 때때로 열반을 보여주기는 했는데,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교화행을 계속 펼치고 있다.39) 석가모니 붓다가 열반을 보여

주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열반에 들지 않고 예토에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는 것

과 문수보살과 같은 대보살이 열반을 미루면서 예토에서 중생교화에 힘쓰는

것은 ‘붓다’와 ‘보살’이라는 명칭의 차이는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차이가 거의

없다.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수한 교설은 불보살의 본원과 대자비심, 자유

자재한 구제력, 예토라는 환경의 특수성 등을 함께 고려한다면 수긍하기 어려

운 것은 아닐 것이다.

38) 一闡提(icchantika)란 일반적으로 반열반의 성질이 없는 자, 또는 성불의 원인을 가지지 않은 자
    라고 설명된다. 한편,『능가경(楞伽經)』에서는 두 유형의 일천제에 대해 설하고 있다. 첫째는 일
    체의 선근을 끊어(斷善根) 반열반할 수 없는 범부중생 일천제이다. 두 번째 유형의 일천제는 중생
    구제의 本願(pūrva-pranidhāṇa)을 세우고, 그 원력에 의해 윤회 속에 머무르며 대비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보살들이다. 이 대보살들은 중생제도를 위해 자발적으로 열반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
    천제보살(一闡提菩薩, icchantikabodhisattva), 또는 대비천제(大悲闡提)’라고 불린다. 두 종류
    의 일천제는 모두 열반에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그 이유가 업력(業力)이냐, 원력(願力)이
    냐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일천제의 의미 및 능가경에서 설명된 두 종류의 일천제에 관
    해서는 다음의 논문들을 참조. 小川一乘 1968, 340-343.; 가라시마 세이시(辛嶋静志) 2012,
    301-319.
39)『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에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龍種上佛)이었을 시절에 많은
    중생을 교화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용종상불이 열반에 들자 중생들은 무수한 탑을 세워 공양했지
    만, 그는 실제로 열반에 들었던 것은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붓다를 도와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 平
    川彰는 문수보살이 과거에 용종상불이었다는 점, 그리고『수능엄삼매경』에서 묘사되는 문수보
    살의 열반 시현(示現) 등을 근거로 문수보살의 경지를 붓다의 경지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平
    川彰 1991, 43ff. 참고로『수능엄삼매경』에서 문수보살이 중생제도를 위해 열반을 시현(示現)
    한 것과『법화경』 「여래수량품」에서 설명하는 열반에 관한 묘사는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석가모니 붓다에게 자신이 보살 시절에 닦은 공덕을 붓다가

된 후에 스스로 향유하는 자수용(自受用, svasaṃbhoga)이 존재하는가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40) 석가모니 붓다는 성불하여 많은 공덕을 성취하

였지만, 예토라는 환경은 그것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라고 보기는 어려

울 것이다. 따라서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의 성불 및 중생제도’라는 서원이 결

과적으로, 어떤 의미에서 필연적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특유의 교설을 낳

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40) 붓다의 세 가지 신체(자성신, 수용신, 변화신) 중에서 법락을 수용하는 수용신(受用身, 
    sāṃbhogikakāya)에는 스스로 법락을 수용하는 자수용(自受用)과 타인에게 법락을 수
    용케 하는 타수용(他受用)이 있다. 자수용은 자리적인 성격의 것이며, 타수용은 이타적 
    행위이다. 히라카와 아키라 등편 2001, 132.

 

2) 석가모니 붓다의 예토교화와 「신해품」

여기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예토인 사바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는 모습을

경전 속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제4신해품」에는 유명한 장자궁자(長子窮子)

의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는 붓다 자신이 설한 것이 아니라 가섭과 수보리 등

대제자들이 설한 것인데, 위대한 지혜와 공덕을 갖춘 붓다를 부유한 자산가(장

자)에, 성문제자들을 가난한 아들(궁자)에 비유하고 있다. 그 줄거리를 간략히

소개하면, 장자의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우연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가난한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사자좌에 앉아 많은 귀족들에게 공경을 받으며 위엄스럽게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 도망치게 된다(아들은 그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인

줄 알지 못한다). 도망치다 결국 기절까지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집

에 들어와 일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유한 자산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고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서 오물청소의

일을 하고 있는 아들을 보고서, 아버지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취하는 장면이

설해지는데, 그에 대한 묘사가 주의를 끈다.

 

그리고 그 부유한 남자는 둥근(gavākṣa, 소의 눈처럼 둥근) 창문을 통해 자신의 아

들이 오물통을 청소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고서 한편으로 기특하게 생각했습

니다. 그리하여 그 장자는 자신의 저택에서 내려와서(avatīrya), 화환과 장신구를

내려놓고 부드럽고(mṛduka) 깨끗하고(caukṣa) 화려한(udāra) 옷을 벗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서 오른손에 바구니(piṭaka)를 들고서 먼지(pāṃsu)로 자신의 몸 곳곳

(gātra)을 더럽히고서 아주 멀찍이서 말을 걸면서 그 가난한 사내에게로 다가갔습

니다. 다가가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대들은 바구니를 가지고 있게. 서

있지 말고 오물(pāṃsu)을 치우게.” 이러한 방법(upāya)으로 그 아들에게 말을 걸

고 서로 얘기를 할 것입니다.41)

41) SP. 106,2-8: sa cāḍhyaḥ puruṣo gavākṣavātāyanena taṃ svakaṃ putraṃ paśyet saṃkāradhānaṃ
    śodhayamānam/ dṛṣṭvā ca punar āścaryaprāpto bhavet/ atha khalu sa gṛhapatiḥ svakān
    niveśanād avatīrya apanayitvā mālyābharaṇāni, apanayitvā mṛdukāni vastrāṇi, caukṣāṇy
    udārāṇi malināni vastrāṇi prāvṛtya, dakṣiṇena pāṇinā piṭakaṃ parigṛhya pāṃsunā svagātraṃ
    dūṣayitvā dūrata eva saṃbhāṣamāṇo yena sa daridrapuruṣas tenopasaṃkrāmet upasaṃkramyaivaṃ
    vadet/ vahantu bhavantaḥ piṭakāni, mā tiṣṭhata, harata pāṃsūni/ anenopāyena taṃ
    putram ālapet saṃlapec ca/
   『묘법연화경』권2 「제4신해품」(T.9, 17a14-19): 又以他日 於窓牖中遙見子身 羸瘦憔悴 糞土塵坌
    污穢不淨 卽脫瓔珞 細軟上服 嚴飾之具 更著麁弊垢膩之衣 塵土坌身 右手執持除糞之器 狀有所畏
    語諸作人 汝等勤作 勿得懈息 以方便故 得近其子.

 

자산가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집에서 내려와 깨끗하

고 부드러운 옷을 벗고, 장신구를 내려놓고, 더러운 옷을 걸치고 온 몸에 먼지

를 묻히고서 아들에게 말을 건네는 이 장면은 석존의 교화가 어떠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예토에서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중생들에게 교화를 한다는 것은

석가모니 붓다가 자신의 복덕과 안락을 내려놓고, 아들과 똑같이 더러운 옷을

입고 온 몸에 흙먼지를 묻히고 다가가 함께 땀 흘려 일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석존의 교화는 보살들에 둘러싸여 자신이 지은 인행의 과보를 향유

하면서 법을 설하는 정토의 붓다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예토에서는 중생들이

선업이 적고, 근기가 낮으므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붓다는 위 비유에서 집

으로 표현된 자신의 거처에서 내려와서, 자신이 성취한 복덕과 장엄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예토의 거친 풍토 속에서 많은 고통을 감내하면서 법

을 전해야 했다. 즉 예토에서의 교화란 붓다가 자신의 성취 속에 머무르는 것

이 아니라,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운동을 동반함으로 가능한 것이다. 필자

는 석가모니 붓다의 교화에 대해서 예토가 지니는 특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

다고 생각되며, 「신해품」의 위 비유는 「여래수량품」의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는 문구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은 방식

의 교화란 예토 교화의 필연적인 양상이며, 예토 교화를 서원한 석가모니 붓다

에게는 일종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경전에서는 붓다 자신이 “나의

보살행은 끝나지 않았다”고 표현했지만,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사실상 보살행

의 연속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필연적인 측면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5. 맺음말: 요약 및 그 함의에 대해서

 

이제『법화경』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이상의 논의를 정

리하고 그 함의에 대해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범어본 「여래수량품」에는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고 설해지고 있다.

이 내용은 한역본에는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따라서 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

가를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 번째 단계로서 먼저 원문을 추정해보았는데, 범어본 교정본과 사본류 그

리고「법화경론」을 근거로 하여 범어본이 원문을 전하고 있을 가능성을 제시

했다. 또한 범어본『법화경』과 사본들, 그리고「법화경론」이 모두 일치하고 있

으므로, 경전(범어본『법화경』)과 논서(「법화경론」)의 가르침대로 ‘붓다의 보

살행’이라는 교설을 신앙하던 전통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

았다.

 

이러한 입장을 확인하고서 다음으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내용을 중심으

로 「여래수량품」의 내용을 재구성해보았다. 범본의 내용에 따르면, 「여래수량

품」의 내용 전개는 ①붓다가 아주 먼 과거에 성불했음을 밝히고, ②그 후에 다

양한 방법으로 중생교화를 펼쳐왔음을 설하고, ③그러한 ‘교화행’을 붓다 스

스로가 ‘보살행’으로 규정하고서 ④붓다에게는 아직도 많은 수명이 남아 있음

을 알리고, ⑤따라서 앞으로도 붓다의 보살행/교화행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하

는 흐름으로 진행된다. 이러한 내용 전개는 붓다의 교화와 수명을 일목요연하

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한역의 내용 전개는 ①과 ②는 동일

하나 ③과 ④를 하나로 묶어 과거에 닦았던 보살행에 의해 얻은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고 설하는 흐름이 된다. 과거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갑자기 보살행에

의해 성취한 수명이 많이 남아 있다는 교설이 전개되는 것은 흐름상 돌연한 느

낌을 주며, 더욱이 구원성불한 붓다의 교화행을 설하다가 구원성불 이전의 보

살행을 언급하는 것은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붓다

의 보살행’이라는 범어본의 맥락이 다소 생소하기는 하지만, 경전의 흐름상으

로는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후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법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에 대해 검

토해보았다. ‘본원’에 의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라는「법화경론」

의 주석은 핵심을 간파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붓다의 보살행은 그다지 일

반적인 내용이 아니므로,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석가

모니 붓다가 세운 본원의 특징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문

제에 관해『비화경』의 설명을 참조하여, 석가모니 붓다의 본원인 ‘예토에서의

성불과 교화’가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구체

적인 모습이 「신해품」의 장자궁자의 비유에 잘 묘사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즉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붓다가 머물고 있는 예토라

는 환경이 고려되어야 하는데, 예토라는 특수한 환경은 불과(佛果)를 성취한

붓다가 과보의 향유에 머무르지 않고, ‘내려옴’이라는 하향적인 활동을 통해서

만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므로 예토에서의 교화에는 보살

행의 연속이라 할 만한 행(行)의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붓다의 보살행’이라는『법화경』의 교설이 함의하는 것은 무엇인

가?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여래수량품」은 석가모니 붓다의 무한한 수명을 설하는 것으로 유명

하지만, 범어본을 통해 볼 경우 그 풍경에는 미세한 변화가 발생한다. 그 변화

란 ‘붓다의 보살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문장이 「여래수량품」 내에 도입되면서

붓다의 수명이 무한하다는 교설이 곧 붓다의 무한한 보살행을 지시하게 된다

는 것이다. 즉 ‘여래의 수명=보살행’의 등식이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붓다가 그의 위대함을 칭송받기 위해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중생구제

를 위해 우리 곁에 머문다는 「여래수량품」의 대의(大義)는 ‘붓다의 보살행’을

매개로 하여 보다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여래의 수명=보살행’이라는 함의와 관련하여 다음의 내용에 대해 검

토해 보겠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법화경』『에서 붓다 교화의 궁극적인 목적

은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지(一切智)를 성취하도록 하여 모두 성불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대한 목표를 경전에서는 ‘일불승(一佛乘)’이라는 용어로 표

현하는데, 일불승은 다음의 두 계기를 통해 확립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

저 지혜의 관점에서 일불승의 이치를 밝히고서(「방편품」), 실제로 붓다가 상

주하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중생을 도와 성불로 이끄는 방편교화행, 즉 보살행

을 펼침으로써(「여래수량품」) 일체중생의 성불은 완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 같이 「방편품」(지혜)과 「여래수량품」(방편)이 하나가 됨으로써 ‘일체중생

을 구제하겠다는 붓다의 본원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경전의 문구는 온전하

게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여래수량품」의 ‘붓다의 보살행’이라는 교설에 대해 대

강의 문맥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본 연구에서 다루지 못한 문제들,

예를 들어 법화경에서의 보살행에 관한 보다 면밀한 검토, 그리고 붓다들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리라는 서원을 실현해가는 구체적인 방식 등에 관해서

는 차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