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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과학에서 바라본 깨달음 / 양해림

실론섬 2017. 12. 27. 12:25

[깨달음에 관한 여덟 가지 담론]

인지과학에서 바라본 깨달음 / 양해림

불교평론 [66호] 2016년 06월 01일 (수)


1. 인지과학에서 마음의 지적 이해


21세기 들어 철학자를 비롯한 인문학자들이 뇌과학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마음이 뇌고 뇌가 곧 마음이라는 견해가 뇌과학의 근본 입장으로 점차 굳혀져 가고 있다. 우리말의 ‘마음(心)’ 하면 심장이 떠오르지만, 서양 말의 ‘마인드(mind)’는 기억, 생각, 의도의 의미를 그 어원에 담아 뇌를 떠올리게 한다. 전통적으로 동서양 철학을 막론하고 철학자들은 항상 마음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우리가 무엇을 주장하거나 마음속에 간직하거나 품는다는 것은 그것을 기억 속에 보유한다는 것이다. 무엇을 마음속에 불러온다는 것은 기억하거나 회상한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마음속에 제거하거나 버린다는 것은 그것을 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터놓는다는 것, 즉 누군가가 우리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우리가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바를 말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전념한다는 것은 그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쓴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숙고하거나 몰두하는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마음을 정했다는 것은 결정했다는 것이고, 변심했다는 것은 결정이나 판단을 뒤집는 것이다. 이렇듯 서양 말 마인드는 기억, 생각, 의도 등을 뇌에 담아낸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뇌=마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뇌 없이도 생명은 있다는 뇌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해 왔다. 예컨대 해면동물은 신경 없이 세포가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생명체를 형성한다. 또한, 우렁쉥이는 바닷속을 헤엄치는 유생 때에만 뇌를 갖고 있다. 우렁쉥이는 성장하면 대부분 한곳에 들러붙어 바닷물에 있는 미립자를 걸러 먹이로 하여 살아간다. 이런 생물들은 모두 아주 간단한 생명체들이지만, 대체로 편안한 삶을 살아간다. 왜냐하면 이 동물들은 그다지 인간처럼 삶에 대해 복잡하게 ‘신경 쓸 일’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로 한곳에서 움직이지 않는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뇌는 점차 소멸한다. 인간은 운동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상호관계, 판단, 의사결정 등을 위해 당연히 더 복잡한 뇌가 필요하다. 인간의 삶은 복잡하기에 훨씬 덜 편안할 수 있다. 덜 편안한 것이 우리 인간 삶의 운명이기도 하다. 흔히 우리가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뇌를 가상적으로 작동 없는 상태로 둔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이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본질과 지식이 이루어지는 전제조건을 탐구하는 ‘인지과학’이 더욱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주지하듯이, 인지과학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분야 중 하나인 인식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먼저 인지는 우리의 마음작용에서부터 비롯된다. 우리가 인지과학을 포괄적으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과학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인지 활동은 기호와 같은 정신적 표상에 의해 나타난다. 인지과학이 정신현상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기호에 의해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마음의 기호체계를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인지과학은 사고, 기억, 지각과 같은 다양한 인지 과정에서 기호를 조작한다. 따라서 인지과학은 마음이 기호를 조작하는 과정, 즉 특정한 정보를 처리하거나 그 밖의 정보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인지과학의 관점에서 인식론의 역사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철학자는 데카르트(Rene Descartes)이다. 데카르트가 이러한 인식론적 심신 문제를 300여 년 전에 공식화한 이래로 심리철학의 주된 주제로 다루어져 왔다. 데카르트는 그의 저서 《방법론 서설》(1637)에서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 즉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을 제창하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에서 맴돌았다.


단적으로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현상을 경험하는 주체와 그 대상인 객체를 서로 나누어 생각했던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사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21세기 들어 철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벗어나고자 뇌=마음의 개념 틀에서 서로 상이한 논의를 진행 중이다. 인간의 사회적 인지 및 행동의 기초가 되는 생물학적 메커니즘은 뇌 연구와 인문학의 융합, 즉 사회심리학과 신경과학이 융합하여 출연한 학제 간 연구를 사회신경과학이라 일컫는다. 즉 인간의 사회생활과 뇌의 구조 관계를 연구하는 인문학과의 주제는 도덕적 행동, 모방심리, 정치 성향 등 점차 그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2. 마음의 이해와 모방이론


현대 인지과학에서 마음이라는 실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음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몸이나 뇌의 기능에 불과하다. 마음이 실제 대상이 아니라 그런 대상의 기능으로 흘러가고 있다. 즉 현대 인지과학이나 신경과학의 주도적 흐름은 물리주의, 기능주의, 제거주의들을 통해 이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현대 인지과학에서 인간의 마음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첫째 마음은 역사적 오해와 무관하게 사고 내지 인지의 영역만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둘째, 마음은 역사적 오해에서 연유된 의미를 지닌다. 이 경우 마음은 감정적, 정서적 측면을 지닌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마음은 인지, 감동, 동기의 3대 요소가 서로 뒤섞여 있는 것으로서 인식되어 왔다. 이 세 가지의 요소는 단일한 마음의 기능을 보여주는 다른 측면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서로 뚜렷이 구별되는 별개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마음이 이러한 정신과 연관되었다는 인식은 거의 사라졌다. 행동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심리학은 이러한 세 부분의 요소를 논쟁거리로 삼으면서 마음 전체를 무시했다. 21세기 인지혁명이 심리학에 다시 마음을 불러들였지만, 생각이나 인지 과정들만 강조되고 감정과 동기는 여전히 무시되었다. 우리가 왜 특정한 대상들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기억하며, 생각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마음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두 가지의 문제는 ‘우리에게 지능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리고 ‘우리에게 의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라는 물음이다.


현대사회에 인지과학이 출현하면서 지능의 비밀을 보다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지과학이 여전히 추상적인 분석의 지식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첫 번째 질문은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 혹은 감각력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예컨대 치통, 빨강, 짠맛, 음계와 같은 1차적 감각은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어떻게 의식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또한 의식의 감정 상태는 저절로 느껴지는 것일까? 이와 같은 물음들에 대해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뇌과학자 가자니가(Michael Gazzaniga)는 마음을 읽는 이론에서 마음의 정신적 · 감정적 상태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한다.


첫째, 마음은 모방이론(simulation theory)에서 나온다. 마음은 의도적이며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자기 마음속으로 재현해 보는 방식으로서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추론해 낸다. 모방이론의 근원지는 철학자 딜타이(Wilhelm Dilthey, 1833~1910)의 감정이입을 통한 이해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딜타이의 이해이론은 사회과학과 상식 사이에 놓여 있는 이해를 방어했다. 즉 모방이론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고 그 사람의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헤아려 낸다. 그렇게 하여 모방이론은 타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공감하거나 사상적 투사(投射)를 하거나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대체로 심리학자들이 어떠한 역할놀이나 ‘입장 바꾸기’의 용어를 사용하여 모방이론을 표현하곤 한다. 먼저 우리가 자료들을 갖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는 것이다. 모방이론은 행동을 판단하기 위해 이론이나 지시체, 혹은 규칙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방이론은 ‘우리 자신의 마음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조작 가능한 모형’으로 간주한다.


둘째, 마음은 이론-이론(theory-theory)을 정립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한 개인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자신만의 심리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과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같이 있는지, 과거는 어떠했는지 등의 다양한 물음을 통해 그 사람의 정신 상태를 추측하는 이론이다. 이는 인간의 행동 이해에 필요한 정신적 개념들을 설명하는 데에서 통속 심리학의 이론을 적용한다. 통속 심리학은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규칙이다. 여기서 통속 심리학은 우리가 지식을 갖고 태어났는가, 아니면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이 두 이론에서 마음의 이론은 개인의 의지에 근거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 상태를 실제로 평가하고 결정한다. 특히 지금까지 두 이론은 인지과학의 정보처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정보처리는 수학과 물리학을 비롯하여 언어학, 인류학 그 밖의 수많은 인문 · 사회 · 자연과학 연구자들에 의해 채택되어 왔다. 이러한 인지과학의 정보처리는 마음과 마음작용의 하위 양태인 지능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인간을 일종의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보고자 하는 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정보처리 시스템은 컴퓨터의 발전, 특히 인공지능의 발전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제를 추론하여 해결하는 데 인지프로세스 연구방법론의 정보처리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이렇게 정보처리 시스템은 그동안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해명하기 위한 학제적 접근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인지과학은 다음과 같이 새로운 마음의 과학이라 불리게 되었다.


첫째, 인간의 인지(판단, 추론, 기억, 문제해결 등에서의 심적 활동)는 기본적으로 기호를 처리하는 과정이다.


둘째, 인지 과정에서 처리되는 기호는 컴퓨터의 기계 내부에서 처리하는 기호와 같다.


셋째, 인지 과정은 컴퓨터 프로그램과 같은 계열적인 기호 처리가 이루어진다.


넷째, 정보처리 과정은 적은 양의 정보를 일시적으로 보유하는 단기기억 시스템과 거대한 지식의 대부분을 영구적으로 보유하는 장기기억 시스템을 갖고 있다.


다섯째, 정보처리 과정은 정보처리의 효율성을 보다 높여서 정보처리 부하(예: 단기기억에서의 정보보유율)를 경감시키기 위해 휴리스틱(heuristic) 방법을 취한다. 즉 정보처리 과정은 대부분 가장 근접한 최선의 답변을 효과적으로 얻기 위해 최소한의 규칙을 정해 구성한다.


인지과학은 정보처리 과정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문학 텍스트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 문학은 인간 사고의 집약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문학 텍스트를 통한 인지 과정의 탐색이야말로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인지과학이 전통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인지 문학적 탐구결과를 융합하는 과정을 통해 문학적 소통의 장을 여는 데 중심축을 구축하고 있다.


3. 거울뉴런과 공감


나는 공감적인가 적대적인가? 이 물음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생리학자인 파르마 대학교의 자코모 리촐라티(Giacomo Rizzolati)가 지난 10년간 수행해 온 독창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연구를 통해 주목받아 왔다. 거울뉴런(mirror neuron, 거울신경세포)은 이탈리아 파르마 대학의 뇌신경과학자인 리촐라티를 주축으로 한 연구팀에 의해 발견되어 1996년 《브레인(Brain)》 4월호에 발표되었다. 원숭이를 대상으로 연구했던 리촐라티와 그의 동료들은 원숭이의 뇌 안에 있는 뉴런들 하나하나의 활동을 기록했다. 이 뉴런은 두뇌활동에 기록되는 원숭이나 그 밖의 다른 원숭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했다. 원숭이가 땅콩에 손을 뻗으면 그 원숭이의 전전두엽 부위의 신경이 발화되는 것이 기록된다. 기록장치를 스피커에 연결하면 어떤 뉴런이 발화할 때마다 딱딱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느 날 리촐라티는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동물 스스로 땅콩을 잡으려고 손을 뻗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이 동물의 눈앞에서 손을 뻗을 때도 같은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때부터 원숭이가 어떤 운동을 할 때도 반응하고, 사람이 하는 같은 운동을 원숭이가 관찰만 할 때도 반응하는 뉴런을 거울뉴런이라 일컬었다. 그리고 다른 원숭이나 인간이 포도에 손을 뻗을 때 그 행위를 관찰하는 원숭이의 뉴런 또한 발화된다. 이렇게 뉴런은 자신의 행위와 동일한 목표를 갖는 타인의 행위에 둘 다 반응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 연구팀은 원숭이의 뇌에서 운동지령을 보내는 부위에 전극을 삽입했다. 그들은 마카크 원숭이가 땅콩을 잡기 전에 전두피질의 F5 영역의 뉴런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이 영역은 전(前)운동피질이라 불리는 커다란 영역 안에 자리하고 있다. 이 영역에는 손에 쥐기, 들기, 찢기, 그리고 물건으로 입 가져가기 등의 손의 행위들을 전문적으로 부호화하는 뉴런들이 수백만 개나 들어 있다. 이어진 실험에서 연구팀은 원숭이가 땅콩을 까거나 다른 누군가가 땅콩 까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특정 부위의 세포가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뇌영상 실험을 통해 우리 인간에게도 다양한 몸동작에 반응하는 거울뉴런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 거울뉴런들은 우리에게 동작에서 반영되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느낌에 공명하는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인간의 감정이입과 마음의 이론을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즉 인간에게 자기공명영상촬영(fMRI)을 통해 다른 사람의 손동작과 표정 등을 보게 한 후, 원숭이들과 마찬가지로 F5에 해당하는 ‘전두엽’을 포함하는 뇌의 특정 부분이 마치 자기가 손을 움직이고 표정을 짓는 것처럼 같은 부위에서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팀은 이 뉴런을 거울신경세포라 이름 붙였다.


거울뉴런 덕분에 우리는 웃고, 춤추고 운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거울뉴런을 이해하면 왜 다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면 전염되어 입을 벌리게 되고, 슬픈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면 왜 감정이입(empathy)이 되어 울게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책을 보거나 읽을 때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그의 고통을 마치 자기가 당한 것처럼 느끼기 때문에 종종 눈물을 흘린다. 우리는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한에게 쫓기거나 정신적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때, 마치 자신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공포와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게 사람은 거울뉴런을 이용하여 남의 행동을 모방할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거울뉴런은 곧 인간의 감정을 주관하는 변연계에 신호를 보낸다. 얼굴은 드디어 표정을 짓고 슬픔, 기쁨을 느낀다. ‘관찰하고 흉내를 내십시오!’ 이는 로스앤젤레스의 데이비드 제펜 의학전문대학원의 야카보니(Maro Iacaboni)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의 거울뉴런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에게 두 가지의 과제를 제시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피실험자들은 자기공명 단층촬영기 속에 누운 상태에서 기쁨, 놀라움, 두려움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첫 번째 단계에서 피실험자들은 단지 그 얼굴들을 관찰만 해야 했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흉내 내고 내적으로 공감해야 했다. 그 결과 두 과제 모두의 경우에서 활동한 신경세포의 네트워크가 광범위하게 일치하였다. 전운동영역과 전뇌의 경계 부위, 즉 일부 측두엽과 섬엽 그리고 편도체가 관련되어 있었다. 관찰과 내적인 공감의 유일한 차이는 이 영역들에서의 활동이 약간 더 활발했다는 것이다. 야카보니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표현에서 지각한 것을 깊이 공감함으로써 이해한다. 분명히 공감은 외부의 관찰을 통해 신경시스템에서 강화되고 반영되는 것에서 드러난다. 거울뉴런과 관련이 없는 다른 한 실험은 정반대로 사회적인 태도가 얼마나 깊숙이 뇌에 고착되어 있는지를 분명히 해 준다.


야카보니에 의하면, 자기와 타자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상호의존성을 가리키는 뇌세포인 거울뉴런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서 구성하게 하는 필수요건이라 본다. 예컨대 전화 도중에 상대방이 보지 않음에도 몸짓을 하거나 심지어 맹인에게 이야기할 때조차 제스처를 취하는 경향이나 각종 모방중독 현상, 자폐증 등도 거울뉴런의 작동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몸짓을 한 번도 본 적 없고 날 때부터 맹인인 사람까지도 말을 할 때 몸짓을 하는 현상 또한 감정이입과 공감의 메커니즘에 거울뉴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아의식의 개발은 공감의식과 얽혀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공감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여 다른 사람의 행위에 대해 일종의 내적 ‘모방(mimesis)’을 촉진하는 것이 거울뉴런의 기능이다. 따라서 야카보니는 인간 두뇌의 자기공명영상촬영을 하여 ‘거울뉴런-대뇌피질의 섬(insula)-변연계’로 이어지는 해부학적 연결망을 발견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우리가 모방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방하면서 다른 사람과 공감한다.


에델만(Gerald M. Edelman)은 《신경과학과 마음의 세계》(1992)에서 뇌의 발생 과정을 통해 뇌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는 뇌, 특히 감각 입력과 운동 출력에 관한 접근방법을 말한다. 즉 지금까지 지각과 인지, 행위는 완전히 별개이며 각각의 과정은 다른 상자에 담긴 기계에서 차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거울뉴런의 발견은 이런 근대적 단계론을 전복시켰다. 다른 사람이 움직이면 ‘성급한’ 거울뉴런은 그대로 따라 하고 본다. 사람들이 실제로 행위를 할지, 하지 않을지는 후차적인 문제다. 다시 말해 뉴런은 자동으로 모방한다. 흉내는 인식을 앞선다. 사랑의 기초 신경도 거울뉴런이다. 예컨대 실험실 안에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실험을 했다. 실험 대상자로 가장한 연구원이 잠입해 턱을 괴거나 하품을 하거나 기지개를 켠다. 일부 사람들이 따라 하기 시작한다. 실험이 끝나고 연구원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했다. 모방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호감도가 높았다. 그러고 보면 연인들은 서로를 따라 한다. 음악을 좋아하면 음악을 따라 듣고 책을 좋아하면 책을 따라 읽는다. 부부가 닮아가는 이유도 이런 경우다. 하지만 거울뉴런은 인간 자율성에 대한 근대적 믿음을 위협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우리는 ‘나는 자동 모방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세계에 사는 모방자들(미러링 피플)이었던 것이다. 이는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 )가 처음 쓴 복제자 ‘밈(meme)’과도 통한다. 거울뉴런은 이번 세기를 결정지을 과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리촐라티가 거울뉴런을 발견함으로써 우리가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모방할 경우, 마치 그것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아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경험에 그치지 않는다. 다른 자극이 없는 상태에서도 정신적 표상은 지각에 직접 관련된 것과 똑같은 신경세포를 작동시킨다. 우리가 어떤 것을 모방하지 않고 단지 모방하는 상상만 한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그것을 모방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처럼 어떤 일을 상상하는 것, 누군가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는 것, 직접 그 일을 하는 것은 신경세포의 형성과 발달에 중요한 토대를 형성한다.


따라서 거울뉴런은 무의식적 공감 내지 감정이입의 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결정을 할 때 자유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뇌 영역들이 서로 어떻게 협력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인지과학자들은 공감을 하나의 도구적 가치로 간주하여 공감이 자신의 사회적 관심을 높이고 적절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취하는 조치라고 본다. 이렇게 공감은 뇌에 내재된 인식기능이지만, 문화적 조율을 거친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동과 의도를 판단하기 위해 그 사람의 역할을 떠맡고, 그렇게 해서 적절한 대응 방법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이루는 물질을 이해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진화이론으로부터 다소 상대적으로 격리되어 있었다.


마크 바넷(Mark Barnett, 1987)은 공감을 ‘다른 사람의 정서와 조화되어야 하지만 반드시 동일할 필요가 없는 정서의 대리경험’이라고 정의한다. 많은 사람이 공감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얼마나 합당한 것인지는 보다 면밀하게 고찰해야 한다. 예컨대 공감적 상태들이 주어진 행위자의 감정 상태와 ‘유사한’ ‘조화되는’ 혹은 ‘상응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공감 상태들이 유사성과 조화를 나타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물론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주지하듯이, 공감 상태는 인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가드너(Howard Gadner)의 주장대로 인지가 ‘마음의 과학’으로서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대가 요구하는 인지문화혁명은 마음의 과학이 가졌던 이전의 패러다임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지과학에서 공감에 대한 관심은 주로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인지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어 왔다. 인간은 자칫 타인의 겉모습만을 직접적으로 보고 지각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내면에 대해 이해하고 함께 체험한다는 공감의 능력은 신비로운 능력이기도 하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경험적, 실증적 방법론을 토대로 심리현상을 탐구하는 데에서 공감을 관찰 가능한 사실로 파악하고 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해 오고 있다. 따라서 공감은 현대 심리학자들에 의해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정의되어 왔다. 첫째, 공감은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들, 내적인 사상, 감정, 지각, 의도들에 대한 인지적 자각이다. 둘째, 공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대리적 · 정의적 대응이다. 정의적 공감은 타자들이 느끼는 것을 단지 느끼는 것이라는 단순한 개념처럼 보이며, 많은 작가들은 그것을 단순히 결과적 측면에서 정의를 내린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느낌과 다른 사람의 느낌이 일치하는 정도만큼만 공감한다.


4. 인지과학의 지적 이해와 불교의 깨달음


인지과학에서 마음의 과학이론을 살펴보았듯이, 최근 불교계에서 오랫동안 있어 왔던 화두(話頭) 논쟁도 마음의 본성에 대한 논의였다.


주지하듯이, 불교의 목표는 깨달음이다. 불교에서 연기설(緣起說)의 원리 위에 깨달음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중생의 모든 문제는 깨달음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먼저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정토, 보리에서부터 묘리(妙理)까지’이며 정토와 보리를 하나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보리(bodhi)와 진여가 유식사상이 얻고자 하는 2대 목표이다.


원시불교 이래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얻어 열반에 든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무상정각에 상응하는 것이 보리이며 열반에 상응하는 것이 진여(眞如)이다. 진여는 전인격적 영역에서 진리이며, 그 진리를 인식하는 지혜, 즉 깨달음이 보리이다. 구체적으로 진여는 마음의 진실, 진리이다. 본래적인 마음의 청정, 즉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진여이다. 진여는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우리 마음을 오염된 상태에서 본래 청정 상태로 변화시킴으로써 마음 자체를 원상태로 회복함으로써 얻어지는 마음 자체의 존재방식이 진여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은 다양하게 표현된다. 정각(正覺),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대각(大覺), 원각(圓覺), 상각(常覺), 정각(淨覺), 구경각(究景覺), 열반(涅槃), 견성(見性), 성불(成佛) 등 다양한 명칭들로 지칭한다. 깨달음은 수행에 의해 이루어지고, 수행은 깨달음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다. 수행 없는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 없는 수행도 없다. 수행과 깨달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그런데 깨달음의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깨달음이 빠르게 되는 것을 돈(頓)이라 하고 느리게 점차적으로 되는 것을 점(漸)이라 한다. 돈점의 문제는 불교의 실천수행에서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중생교화의 방편에서도 중요한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돈점설은 청량징관(淸涼澄觀, 738~839),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 보조지눌(普照知訥, 1158~1210) 등에 의해 자세히 거론되었다. 돈오, ‘단박에 깨친다’라고 하는 말은 깨달음이란 시간의 틀이 적용되지 않는 초시간이라는 뜻이다.


선사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깨달음에는 준비가 필요 없다거나 깨달음에는 준비가 필요 없다거나 짧은 순간 안에 얻어진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이 강조한 것은 깨달음이 ‘초시간적인 순간’ 즉 시간을 초월한 영원 속에서 일어나며, 그것은 우리 자신의 행동이 아니라 절대자 자신의 행동이라는 일반적인 신비적인 진실이었다.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엄격한 생활과 명상이 해탈을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같다. 깨달음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그것은 한정된 조건이나 영향의 중재를 받지 않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간이다. 깨달음은 공덕을 점진적으로 쌓아서가 아니라 ‘문득 알아챔’을 통해 달성된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깨달음은 마음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이다. 불교에서 돈오점수나 점오돈수는 모두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을 뜻한다. 불교의 교의는 의식이 뇌와 떨어져 존재할 수 있고, 어느 정도 독립적일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이원론과 본질적으로 연계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인지과학에서 마음은 불교에서처럼 단순히 마음을 갈고 닦아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인 지(知), 정(情), 의(意) 즉, 마음의 과학을 일컫는다.


21세기 들어 인간의 거주공간으로 개척되고 있는 사이버스페이스가 인간 친화적인 인터넷 소통 문화공간으로 불교나 인지과학 모두 이미 깊숙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공감해야 한다. 새로운 사이버스페이스는 인간+기계의 가능성의 점층적 확대에 의한 새로운 포스트 휴먼의 출현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인간과 기계의 만남”36)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체성을 더욱 요구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교나 인지과학에서도 마음의 규명 작업을 보다 새롭게 떠안게 되었다. 이는 불교에서 “연기와 무아, 공성(空性)을 완전히 이해하고 이 원리대로 행하면 대승적 깨달음”에 이르는데, 이는 “거울신경체계를 통한 공감의 연대에서 매개”37)에 의해 진일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불교나 인지과학에서 거울신경체계를 통한 공감의 연대에서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닌 새로운 마음의 개념을 발휘하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지과학이나 불교에서 거울신경체계의 기능에 따라 모방한 공감 혹은 깨달음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뇌와 마음에 대한 인지과학과 불교의 발견들은 점차 “인격적이고 감성적인 인문학”38)을 통해 새로운 학습을 해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


 

양해림 / 충남대 철학과 교수. 강원대 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 훔볼트대학교(Humboldt) 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4 · 16 세월호 참사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국가〉 〈지구적 기후변화와 탈핵의 정치〉 〈세계시민주의와 세계시민〉 〈니체의 권력이론〉 등이 있고, 저서로 《해석학적 이해와 인지과학》 《대학생을 위한 서양철학사》 등이 있다. 현 한국니체학회 회장, 충남대 인문과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