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상/계율

범망경고적기 2권 梵網經古迹記

실론섬 2018. 8. 9. 14:22

범망경고적기 2권

梵網經古迹記

 

1*. 십지 十地1)

* 1권 ㄷ : 십금강심에 이어지는 과목이나 번호를 새로 시작한다.

 

1) 체성평등지體性平等地

□노사나불께서 말씀하셨다. 천불들이여, 자세히 들으라. 그대들이 앞

서 묻기를 ‘십지(十地)에는 어떤 뜻이 있습니까?’ 하였나니, 불자들이여!

보리살타(菩提薩埵)가 평등한 지혜의 체성 경지[平等慧體性地]에 들어가

면 진실한 법으로 교화하여 일체의 행이 꽃과 같은 빛으로 만족해지고, 사

선천[四天]의 과(果)가 어우러져 교화에 임하나니 견줄 수 없는 이치[無方

理, 최상의 이치·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이치]로 교화하는 것이니라. 신통

(神通)과 십력(十力)과 십호(十號)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으로 부처님

의 정토에 머무르며, 한량없는 대원과 두려움 없는 변재와 일체 논과 일

체 행에 내가 다 들어가, 불가에 태어나 불성지(佛性地)에 앉으니, 온갖 장

애와 범부의 인과를 마침내 받지 않는구나! 하며 크게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니라.

일불토(一佛土)로부터 무량불토(無量佛土)에 들어가며, 일겁으로부터

무량겁에 들어가서 설할 수 없는 법으로 법을 설한다. 돌이켜 일체법을 비

추어 보고 역과 순으로 모든 법을 보며, 항상 이제(二諦)에 들어가지만 제

일의 가운데 있느니라. 하나의 지혜로써 십지의 차례를 알아 낱낱의 일을

중생들에게 보이지만 항상 마음과 마음은 중도(中道)이며, 하나의 지혜로

써 모든 불국토의 빼어난 품류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알아서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느니라. 하나의 지혜로써 십이인연과 십악종성(十惡種

性)을 알아서 항상 선도에 머무르고, 하나의 지혜로써 유와 무의 이상(二

相)을 보며, 하나의 지혜로써 십선지(十禪支)1)에 들어갈 줄 알며, 삼십칠

조도품(三十七助道品)2)을 행하여 일체색신을 육도(六道)에 나타내며, 하

나의 지혜로써 시방의 색(色)과 색(色)이 분분(分分)하게 일어나 색의 과

보를 받는 곳으로 들어가 마음과 마음에 속박이 없이 빛나는 광명으로 일

체를 비추므로 무생(無生)이라 하느니라.

1) 1권 97) 주(註) 참조.
2)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bodhi-pāksika-dharma)의 조도품(助道品)은 보리
   분(菩提分)·각지(覺支)·각분(覺分)이라고도 번역한다. 불교 최고의 목적인 깨
   달음의 경지[涅槃]를 실현하는 지혜를 얻기 위한 실천도라는 뜻으로, 여기에 37
   항이 있으므로 삼십칠도품(三十七道品)이라 하며,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
   分法)·삼십칠각지(三十七覺支)·삼십칠각분(三十七覺分)이라고도 한다. 사념처
   (四念處, 4念住)·사정근(四正勤, 四正斷)·사여의족(四如意足, 四神足)·오근(五
   根)·오력(五力)·칠각분(七覺分)·팔정도(八正道, 八聖道)를 합한 것이다.

 

신인(信忍)의 공혜(空慧)가 항상 앞에 나타나 일지(一地)와 이지(二地)

로부터 불계(佛界)에 이르도록 그 가운데 일체법문이 일시에 행하여진다.

평등한 지위의 공덕해장[平等地功德海藏]으로 행(行)과 원(願)을 간략하

게 나타내니 마치 털끝으로 바다의 물 한 방울을 찍어 낸 것에 불과하느

니라.

盧舍那佛言. 千佛諦聽. 汝先問, ‘地者有何義.’ 佛子, 菩提薩

埵, 入平等慧體性地, 眞實法化, 一切行, 華光滿足四天果, 乘

用任化, 無方理化. 神通十力十號, 十八不共法, 住佛淨土, 無

量大願, 辯才無畏, 一切論一切行, 我皆得 入, 生出佛家, 坐

佛性地, 一切障礙, 凡夫因果, 畢竟不受! 大樂歡喜. 從一 佛

土, 入無量佛土, 從一劫入無量劫, 不可說法爲可說法, 反照

見一切法, 逆順見 一切法, 常入二諦, 而在第一義中. 以一智

知十地次第, 一一事示衆生, 而常心心中道, 以一智知一切佛

土殊品, 及佛所說法, 而身心不變. 以一智知十二因緣, 十惡種

性, 而常住善道. 以一智見有無二相, 以一智知入十禪支, 行

三十七道, 而現一切色身六道, 以一智知十方色色, 分分了起,

入受色報, 而心心無縛. 光光照一切, 是故無生. 信忍空慧, 常

現在前, 從一地二地乃至佛界, 其中間一切法門, 一時而行故.

略出平等地功德海藏行願, 如海一渧毛頭許事.

 

■십지(十地)를 설명하는 가운데 거듭 질문한 것을 알아야 한다. 초지

(初地) 가운데 문장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평등혜체성지(平等慧體性地)’

의 ‘평등혜’는 능히 증득한 지혜이며 ‘체성’이란 증득한 바의 진여이고 ‘지

(地)’는 총괄하는 말이다.

다음 행상 가운데 ‘진실한 법’이란 안으로 증득하는 문이며, ‘진실한 교

화’란 밖으로 교화하는 문이다. 이 두 가지 이로움을 갖추었으므로 ‘일체

행’을 진실한 무루의 행이라고 한다. 바로 불과(佛果)를 감득하는 것을 ‘꽃

[華]’이라고 하고 실제로 어둠의 종자를 파괴하는 것을 ‘빛[光]’이라 하

며, 두루 법계를 증득하는 것을 ‘만족(滿足)’이라고 한다. ‘사천(四天)의 과

(果)’는 과보[報果]에 포섭된다. ‘어우러져 교화에 임한다.’는 것은 세속문

으로 교화하는 것이며, ‘견줄 수 없는 이치[無方理]로 교화하는 것’은 승의

문(勝義門)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십력(十力)’ 등에 ‘모두 들어간다.’는 것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

서 말하기를 ‘초지(初地) 이상에서 백사십 가지 불공법(不共法)3)을 부분적

으로 얻는다.’4)고 하였다. ‘정토대원(淨土大願)이란’ 능히 타수용토(他受用

土)에 머무를 만한 원력이다. ‘일체론(一切論)’이란 오명론(五明論)5)이며

‘일체행’이란 저 오명에 있는 여러 가지 행위이다. ‘불성지(佛性地)에 앉는

다.’고 한 것은 이미 큰 지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3) 백 사십 가지 불공법은 부처님만이 갖추고 있는 140가지의 뛰어난 특징을 말한
   다. 범부나 여타의 수행자들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불공(不共)’이라 한
   다. 삼십이상(三十二相)·팔십종호(八十種好)·십력(十力)·사무외(四無畏)·삼
   념처(三念處)·삼불호(三不護)·대비(大悲)·무망실법(無忘失法)·단번뇌습(斷
   煩惱習), 영해습기(永害習氣),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묘종지(一切妙種智) 등
   을 말한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49(大30 p.566c8), 『보살선계경(菩薩善戒
   經)』 권3(大30 p.975c26)
4) 『유가사지론』 卷第三十八 「本地分中菩薩地第十五初持瑜伽處菩提品」 第七(大
   30 p.499a9) “復有異門, 謂百四十不共佛法, 及如來無諍願智無礙解等, 是名無上正
   等菩提. 百四十不共佛法者, 謂三十二大丈夫相, 八十隨好, 四一切種淸淨, 十力,
   四無所畏, 三念住, 三不護, 大悲, 無忘失法, 永害習氣, 一切種妙智.”라 한다. 
5) 오명론(五明論)은 성명(聲明)과 공교명(工巧明)과 의방명(醫方明)과 인명(因明)
   과 내명(內明)이다.

 

‘모든 장애’는 분별기(分別起)6)의 장애이며 ‘범부의 인과’란 악취(惡趣)7)

와 북취(北趣)8), 무상천(無想天) 등이다. ‘일불토로 부터 무량불토에 들어

간다.’는 것은 한 국토에서 움직이지 않으면서 여러 나라에 이르기 때문이

다. ‘일 겁으로부터 무량겁에 들어간다.’는 것은 일념 속에 삼제를 포함하

기 때문이며, 혹은 일겁을 펴서 다겁을 삼기 때문이다. ‘가히 설할 수 없는

법으로 법을 설한다.’는 것은 능히 안으로 깊은 법을 증득했기 때문에 설

할 수 있는 것이다.

6) 분별기(分別起)는 후천적으로 일으키는 번뇌. 분별기로 발생하는 번뇌장(煩惱
   障)·소지장(所知障) 등 두 가지 장애를 견혹(見惑)이라 한다. 반면에 태어남과
   동시에[俱生] 갖추어지는 선천적인 번뇌[俱生起, 任運起]에도 번뇌장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가 있으며 이 두 가지 장애는 수혹(修惑) 또는 사혹(思惑)이라 한다.
   분별기의 번뇌는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어지는데 이것은 주로 잘못된 교설이
   나 스승 또는 그릇된 사유 등에 의하여 유발되는 분별에 따라 발생하므로 후천
   적이라 한다. 곧 『유가사지론』 권58(大30 p.621b8-10)에는 “분별기는 여러 외도
   들이 헤아려 일으킨다. 分別起者, 諸外道等, 計度而起.”라고 하고 있으며 또 『성
   유식론(成唯識論)』 권9(大31 p.48c26-29)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장애를 분별기
   는 견도위에서 끊을 대상으로 포섭하고, 임운기는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을 대
   상으로 포섭한다. 이승은 다만 번뇌장만 끊을 뿐이며, 보살은 두 가지 모두 끊으
   며, 영원히 두 종류를 끊는 것은 오로지 성도(聖道)일 뿐이다. 如是二障, 分別起
   者, 見所斷攝, 任運起者, 修所二斷攝. 二乘但能斷煩惱障, 菩薩俱斷, 永斷二種, 唯
   聖道.”라고 했다.
7) 악취(惡趣, durgati)는 악업에 의해 태어나는 세계. 삼악취(三惡趣)·사악취(四惡
   趣)·오악취(五惡趣)·육악취(六惡趣)가 있다. 악취는 고통과 우치 때문에, 북구
   로 주는 무상(無常)을 감득할 기회가 없어서, 무상천은 외도(外道)가 최고의 단계
   로 믿기 때문에, 능히 성도(聖道)와 그 가행(加行)으로 나아가는 것을 장애한다.
8) 북취(北趣)는 북구로주(北俱盧洲), 즉 사주(四洲) 가운데 즐거움이 가장 수승하
   므로 고통이 없어 불법을 만나지 못하므로 오히려 도에는 장애가 되는 곳이다.

 

법을 받아들여 지(智)에 돌아가게 하므로 ‘돌이켜 일체 법을 비추어 본

다.’고 하였으며 ‘항상 이제(二諦)에 들어간다.’고 하는 등은 이제에서 자

유자재하게 비추어보며 참된 마음9)을 지키기 때문이다. ‘십지(十地)의 차

례를 안다.’는 것은 지위이며, ‘낱낱의 일을 중생들에게 보인다.’는 것은 지

행(地行)이다. ‘몸과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 맛[一味]인줄 아는

것이며 ‘십악(十惡)’이란 살생(殺生) 등이니, 악업[黑品]을 알므로 선업[白

品]에 머무르는 것이다. ‘하나의 지혜로써 유(有)와 무(無)의 두 상[二相]

을 본다.’는 것은 삼성(三性)10)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분분(分分)하게 일

어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색(色)을 아는 것이니, 여러 가지 색(色)이 일

어나기 때문이다.

9) 『대일경소(大日經疏)』 2권의 육십심(六十心) 가운데 35번째 실택심(室宅心)이다.
   한결 같은 뜻으로 자신을 지키는 마음이다. 행자(行者)가 지계(持戒)하며 선(善)
   을 닦는 것은 다만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요, 이것은 악도(惡道)의 중고(衆苦)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마치 세간 사람들이 집을 지어 몸을 지키는 것과 같은데 이는
   대치의 도로써 일체 중생을 구호하는 수단이며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10)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색의 과보[色報]를 받는 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형상 있는 몸의 과보

를 받아 들어가므로 곧 무색계(無色界)에는 태어날 수 없다. ‘마음에 속박

이 없다.’는 것은 비록 정려(靜慮)에 머무르나 욕계 등에 태어나는 것이다.

혜광이 항상 비추는 것은 진리가 두루 가득 차는 것이다. ‘생겨남이 없는

진리 속에 신인(信忍)의 공혜(空慧)가 항상 앞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오인(五忍)11)에서 두 번째의 초지(初地)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일체법문’이라는 것은 십바라밀이다. ‘간략하게 나타내니’ 이하는 초지(初

地)의 대해(大海)를 결론지은 것이니, 지금 간략히 발췌한 것이다.

11) 오인(五忍)은 『호국인왕경(護國仁王經)』에서 보살(菩薩)의 계위(階位)를 5종류
    로 나눈 것이다. 보살이 법리를 깨닫고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는 정도에 따라 세
    운 계위로 복인(伏忍), 신인(信忍), 순인(順忍), 무생인(無生忍), 적멸인(寂滅忍)
    을 말한다. 복인(伏忍)은 번뇌를 끊지 못하였으나 관혜(觀慧)를 익혀 이것을 굴
    복시키고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지위(地位)로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
    (十迴向)에 해당된다. 신인(信忍)은 관(觀)하는 마음이 더욱 진전(進展)되어 증
    득(證得)할 법(法)을 믿고 의심치 않는 지위로 곧 초지(初地), 이지(二地), 삼지
    (三地)의 보살(菩薩)이 여기에 속한다. 순인(順忍)은 앞에서의 믿음에 의지하여
    다시 더 나은 지혜를 연마하여 무생(無生)의 증과(證果)를 순(順)하는 지위(地
    位)로 사지(四地), 오지(五地), 육지(六地)의 보살이 여기에 해당된다. 무생인(無
    生忍)은 제법무생(諸法無生)의 진리(眞理)를 깨달아 아는 지위(地位)로 칠지(七
    地), 팔지(八地), 구지(九地)의 보살(菩薩)이다. 적멸인(寂滅忍)은 갖가지 번뇌(煩
    惱)를 끊어버리고 청정무위 담연적정(淸淨無爲 湛然寂靜)에 안주(安住)하는 지
    위로 곧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의 지위를 말한다. 『열반경(涅槃經)』
    16권(大12 p462a), 『법원주림(法苑珠林)』 66권(大53 p.793a) 참조.

 

述曰, 明十地中, 牒問可知, 此初地中擧章門. 言平等慧體性

地者, 平等慧者, 能證智也, 體性者, 所證眞也, 地卽總也. 次

行相中, 眞實法者, 內證門也, 眞實化者, 外化門也. 具此二利,

言一切行, 眞無漏行. 正感佛果言華, 實破闇種名光, 徧證法界

言滿足. 四天果者, 攝報果也. 乘用任化者, 世俗門化, 無方理

化者, 勝義門化. 於十力等皆得入者, 如瑜伽云, 初地已上, 分

得百四十不共佛法故. 淨土大願者, 堪住他受用土願故. 一切

論者, 五明論也, 一切行者, 於彼五明多有所作. 坐佛性地者,

已入大地故. 一切障礙, 分別起障, 凡夫因果, 惡趣北趣無想天

等. 從一佛土入無量土者, 不動一國至諸國故. 從一劫入無量

劫者, 於一念中攝三際故, 或舒一劫爲多劫故. 不可說法爲可

說者, 堪說內證甚深法故. 攝法歸智, 名反照見一切法, 常入二

諦等者, 遊照二諦, 宅心眞故. 知十地次第者, 地位也, 一一事

示衆生者, 地行也. 身心不變者, 會一味故, 十惡者, 殺生等也,

雖知黑品住白品故. 一智見有無二相者, 達三性故. 分分了起

者, 別別了知色故, 別別生起色故. 入受色報者, 趣入領受有色

報故, 卽不生無色也. 而心無縛者, 雖住靜慮, 生欲界等. 慧光

恒照, 徧滿眞故. 無生理中, 信忍空慧常現前也, 卽五忍之第二

初故. 其中間一切法門者, 十度也. 略出下, 結初地大海, 今略

出也.

 

2) 체성선혜지 體性善慧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계를 잘 지키는 착하고 지혜로운 체성지[善

慧體性地]니라.

若佛子! 菩提薩埵善慧體性地.

 

■두 번째 지(地)에 세 가지가 있으니 장문(章門)과 지행(地行)과 지광

(指廣)이다. 이는 처음 문장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선혜(善慧)’라고 말하

는 것은 계를 범하는 악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述曰, 第二地中有三, 章門故, 地行故, 指廣故. 此初擧章. 言

善慧者, 離犯戒惡故.

 

□청정명달한 모든 선근은 소위 자애[慈]와 슬픔[悲, 측은지심]과 기쁨

[喜]과 평등[捨]12)이며 혜(慧)는 일체 공덕의 근본이니라.

淸淨明達一切善根, 所謂慈悲喜捨, 慧一切功德本.

12) 자비희사(慈悲喜捨)는 사무량심(四無量心)으로서 사무량(四無量)이라고도 한
    다. 자(慈, maitrī), 비(悲, karunā), 희(喜, muditā), 사(捨, upeksā)의 네 가지 마음이
    한없이 일어나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한없이 많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苦)의 미혹을 없애주기 위해 자(慈)·
    비(悲)·희(喜)·사(捨)의 네 가지 마음을 일으키며, 혹은 자(慈) 등의 네 가지 선
    정에 들어가는 것이다. 곧 자무량심(慈無量心)·비무량심(悲無量心)·희무량심
    (喜無量心)·사무량심(捨無量心) 가운데 즐거움을 주는 것을 자(慈), 고(苦)를 없
    애는 것을 비(悲), 다른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은 희(喜),
    타인에 대해 애증친원(愛憎親怨)의 마음없이 평등한 것이 사(捨)이다.

 

■이지(二地)의 행(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총표(總標)와 별석(別釋)이

다. 이 부분은 첫째이다. ‘청정명달(淸淨明達)한 모든 선근’이란 행의 체

[行體]를 든 것이니 세 종류가 있다. ①자(慈)는 즐거움 주는 것을 으뜸으

로 여긴다. ②사(捨)는 더러움의 근본을 떠난 것이다. 혹 어떤 경본에는

사무량을 다 말하기도 한다. ③혜(慧)이니 통달하여 증득하는 근본이다.

‘모든 공덕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위에 나온 ‘선근(善根)’의 이름[名]과

뜻[義]을 해석한 것이다.

述曰, 第二地行中有二, 總標故別釋故. 此初也. 淸淨明達, 一

切善根者, 擧行體也, 謂有三種. 一慈與樂爲最故. 二捨離染之

本故. 或有經本, 具四無量. 三慧 證達之原故. 一切功德本者,

釋上善根名義也.

 

□처음 관(觀)함으로부터 대공혜방편도지(大空慧方便道智) 속에 들어

가 모든 중생들을 보니 고제(苦諦) 아님이 없는지라, 모두 식심(識心)이

있어서 삼악도의 칼과 몽둥이로 일체를 괴롭게 하는 것을 반연하여 식

(識)이 일어나므로 고제(苦諦)라고 한다. 세 가지 고의 상[三苦相]13)이란

같기로 말하자면 마치 몸으로 처음 느끼는 감각[身初覺]과 같아서 칼과

몽둥이와 몸의 색음(色陰)인 두 가지 연을 따라서 생기는 느낌을 행고(行

苦)의 연이라고 한다.

13) 삼고(三苦)는 살아 있는 존재가 느끼는 세 가지의 괴로움으로 고고(苦苦)는 좋
    아하지 않는 대상에게서 느끼는 괴로움, 행고(行苦)는 세상이 세월에 따라 변화
    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 괴고(壞苦)는 좋아하는 것이 파괴되는 것을 보
    고 느끼는 괴로움을 말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大12 p.266a), 『구사론(俱舍
    論)』 권22(大29 p.114b5-22),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권15(大31 p.551a-b) 등에
    서 설명하고 있다.

 

다음은 의지각(意地覺, 意識覺)이니 몸의 느낌[身覺]의 소연(所緣)을 반

연해서 일어나는 것으로 칼과 몽둥이 및 몸의 상처 등 법을 얻은 까닭으로 

고고연(苦苦緣)을 느끼게 되나니 거듭되기 때문에 고고(苦苦)라고 한다.

다음은 수행각(受行覺)이니, 이심(二心, 行苦·苦苦)의 연(緣)으로 몸의

색음이 무너지고 상처가 난 곳를 향하여 괴롭다는 느낌[苦覺]을 내기 때

문에 괴고(壞苦)의 연(緣)이라 하나니 이 세 가지 느낌[三覺, 身初覺·意識

覺·受行覺]이 차례대로 삼심(三心, 苦苦·行苦·壞苦)이 나게 하므로 고고

고(苦苦苦)라고 하는 것이니라.

從初觀, 入大空慧方便道智中, 見諸衆生, 無非苦諦, 皆有識

心, 三惡道刀杖, 一切苦惱, 緣中生識, 名爲苦諦. 三苦相者,

如者如身初覺, 從刀杖身色陰, 二緣中生覺, 爲行苦緣. 次意地

覺, 緣身覺14)所緣, 得刀杖及身瘡腫等法故, 覺苦苦緣,重故苦

苦. 次受行覺, 二心緣向, 身色陰壞瘡中, 生苦覺故, 名爲壞苦

緣, 是以三覺, 次第生三心故, 爲苦苦苦.

14) 卍 p.392b16에는 ‘覺重’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33a10에는 ‘覺’으로 되어 있다.

 

■따로 해석함에[別釋]에 세 가지가 있으니 차례를 거슬러 혜(慧)와 사

(捨)와 자(慈)를 해석한 것이다.

첫 번째에 또한 두 가지가 있으니 관찰과 교화로 이끄는 것[化導]인데

이 부분은 첫째이다. ‘대공혜(大空慧)에 들어가 관한다.’는 것은 처음 최승

진여대공혜(最勝眞如大空慧)에 들어가 관찰하는 것이니, 처음 마음이 들

어가 드디어 후득지(後得智)의 교묘한 방편도지[巧方便道智]를 일으키

는 가운데 모든 중생들을 보니 고제 아님이 없다. 왜냐하면 모두 괴로움을

인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삼도(三途, 三惡道)에서 선취(善趣, 三善

道)에 이르기까지 고(苦)의 연(緣) 가운데 식이 일어남을 알기 때문이다. 

무엇이 고인가? 말하자면 삼고(三苦, 苦苦·行苦·壞苦)가 있다. ‘같다(如)’

고 하는 것은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비슷[相似]하여 같은 것’이니, 현상

[事]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몸으로 처음 느낀다[身初覺]’는 것은 오식

(五識)이요, ‘칼과 몽둥이를 따르는’ 것은 외연(外緣)이며, ‘몸을 따라서[從

身]’라고 한 것은 내연(內緣)이니 근(根)과 경(境)이 모두 색(色)이므로 색

음(色陰)이라고 한다. 이연(二緣, 내연과 외연) 속에서 느낌이 생겨나는 줄

알기 때문에 이 식(識, 앎)의 이름을 행고(行苦)의 연(緣)이라고 하니, 이

로부터 여러 가지 사수(捨受)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다음은 의식각(意識覺)이다. 마찬가지로 칼이나 몽둥이 및 몸의 상처 등

을 함께 반연하여 오식(五識)을 이끌어 내고 고수(苦受)와 함께 자신의 근

심에 상응하므로 고고(苦苦)의 연이라고 한다. 거듭해서 고고(苦苦)라고

하는 것은 핍박이 거듭됨을 해석하여 고고(苦苦)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세 번째 추념의식(追念意識)을 일으키는 것을 수행각(受行覺)이라

하니 앞에서 느낀 연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다. 앞의 이각(二覺)에 반연한

몸 등은 일찍이 미묘하던 것이 무너지는 속에 근심과 괴로움을 내므로 괴

고(壞苦)의 연이라고 한다.

이로써 삼위(三位)의 식(識)이 점차로 삼고(三苦)를 발생시키므로 고고

고(苦苦苦)라고 한다. 이 세 개의 고자는 차례대로 앞의 행고(行苦) 등의

삼고(三苦)를 결론지은 것이다.

別釋有三, 逆次第釋慧捨慈故. 初亦有二, 觀察故化導故, 此初

也. 言觀入大空慧者, 謂初觀入於最勝眞如大空之慧, 從初入

心, 遂起後得巧方便道智中, 見諸衆生, 無非苦諦. 何以故, 皆

有識苦之心. 三途乃至善趣, 苦緣中生識領故. 何等爲苦? 謂

有三苦. 言如者, 相傳云, 相似如也, 指事言故. 言身初覺者,

五識也, 從刀杖者外緣也, 從身者內緣也, 根境並色, 故言色

陰. 二緣中生識覺故, 此識名爲行苦之緣, 率爾多分起捨受故.

次意識覺. 同緣刀杖及身瘡等, 引生五識, 相應苦受及自憂根,

名苦苦緣. 重故苦苦者, 釋逼迫重, 名苦苦也. 次起第三, 追念

意識, 名受行覺. 於前所受, 追緣行故. 於前二覺所緣身等, 曾

妙壞中, 生憂惱故, 名壞苦緣. 是以三位識, 漸生三苦故, 爲苦

苦苦. 此三苦字, 如次結前行等三苦.

 

□마음이 있는 모든 중생은 이 삼고(三苦)를 한량없는 고뇌를 일으키는

인연으로 보기 때문에 내가 이 속에서 교화도삼매(敎化道三昧)에 들어가

일체색신을 육도 속에 나타내어 열 가지 변재(辯才)로 온갖 법문을 설하

리라.

말하자면 고의 식별[苦識]과 고의 연[苦緣]인 칼과 몸둥이의 연이 갖추

어지고, 고의 식별[苦識]이 몸에 행해져서 상처가 생겨 썩기 시작하면 내

외의 촉(觸) 중에서 혹은 갖추어지기도 하고 갖추어지지 않기도 한다. 두

가지 연을 갖춘 속에 식별을 일으키고, 식별을 짓고[識作] 식별을 느끼며

[識受] 접촉으로 식별[觸識]하는 것을 고통의 식별[苦識]이라 하느니라.

두 가지 연[二緣]이 행해지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색(色)을 반연하고,

마음이 부딪쳐 괴로워져서 번뇌의 독을 받을 때를 고고(苦苦)라고 한다.

마음이 식을 반연함에 처음 감관이 알아차리는 연이 있으므로 고의 알아

차림이라 이름한다. 마음으로 짓고 마음으로 느끼며 부딪치고 식별하여

부딪힘을 알아차리나[覺知] 아직 번뇌의 독을 받지 않았을 때를 바로 행

고(行苦)라고 하느니라.

핍박으로 알아차림(覺知)이 생기는 것이 마치 돌을 쪼갤 때 일어나는

불꽃과 같아서 신심이 순간순간 생멸하여 몸이 부서져 흩어지고 변화하

면, 식(識)이 무너지는 연에 들어간다. 연(緣)이 모이고 흩어지면 마음이 

괴롭고 번뇌스러워 받아들이는 생각마다 염착(染著)을 반연하여 마음에

서 버리지 못한다. 이것이 괴고(壞苦)가 되나니, 삼계가 모두 고제니라. 다

시 무명을 관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이 모여 일체 업을 짓나니 습

기의 인[習因]과 업을 모으는 인[集因]이 서로 이어지고 연결된 것을 집제

(集諦)라고 한다. 바른 견해로 해탈하여, 공한 것 까지 공[空空]한 지도(智

道)의 심심(心心)은 지도(智道)로써 도제(道諦)라고 이름한다. 유(有)의 과

보도 다하고 유(有)의 인(因)도 다하여 청정하므로 한결같이 체성을 비추

면 묘한 지혜가 적멸한 하나의 진제가 된다. 혜품(慧品)이 구족한 것을 근

(根)이라 이름하고, 온갖 혜의 성품이 공(空)에서 일어나 관(視)에 들어가

니 이것이 첫 번째 선근이니라.

一切有心衆生, 見是三苦, 起無量苦惱因緣故, 我於是中入敎

化道三昧, 現一切色身於六道中, 十種辯才, 說諸法門. 謂苦

識苦緣, 刀杖緣具, 苦識行身, 瘡腫發壞, 內外觸中, 或具不具.

具二緣中, 生識識作, 識受觸識, 名爲苦識. 行二緣故, 心心緣

色, 心觸觸惱, 受煩毒時爲苦苦. 心緣識, 初在根16)覺緣, 名爲

苦覺. 心作心受, 觸識覺觸, 未受煩毒時, 是名行苦. 逼迮生

覺, 如斲石火, 於身心念念生滅, 身散壞轉變化, 識入壞緣. 緣

集散, 心苦心惱, 受念後緣染著, 心心不捨. 是爲壞苦, 三界一

切苦諦. 復觀無明, 集無量心, 作一切業, 相續相連, 習因集因,

名爲集諦. 正見解脫, 空空智道心心, 名以智道道諦. 盡有果

報, 盡有因淸淨, 一照體性, 妙智寂滅一諦17). 慧品具足名根,

一切慧性, 起空入觀, 是初善根.

16) 卍60 p.393b18에는 ‘煩’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33b18에는 ‘根’으로 되어 있다. 
17) 卍60 p.394b6에는 ‘識’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33c4에는 ‘諦’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교화하여 이끄는 것’에서 ‘마음이 있는 모든 자’는 이 삼고

(三苦)나 팔고(八苦)18) 등이 일어나는 인연을 보기 때문이다.

18) 팔고(八苦)란 생(生)·노(老)·병(病)·사(死)의 사고(四苦)와 애별리고(愛別離
    苦)·원증회고(怨憎會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한 것이
    다. 『열반경(涅槃經)』 권12(大12 p.435a3-5)에 보인다.

 

이 지(地)의 보살은 ‘교화도삼매(敎化道三昧)’에 들어가 여러 가지 재난

을 설하므로 싫어함이 생겨서 버리게 된다. 그 가운데 선정에 들어가 의업

(意業)이 자재해지고, 몸을 육도에 나타내므로 신업(身業)이 자재해지며,

열 가지 변재로 법을 설하므로 어업(語業)이 자재해진다.

‘열 가지’는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①자상(自相)이니 현상[事]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고, ②동상(同相)이니 이치[理]의 상을 말하는 것이며, ③행상

(行相)이며, ④설상(說相)이며, ⑤지상(智相), ⑥무아만상(無我慢相), ⑦대

소승상이며, ⑧보살지상(菩薩地相), ⑨여래지상(如來地相), ⑩작주지상(作

住持相)이니 곧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러한 모습[相]이다.19)

19) 원주(原註)에 “십지경론(十地經論)과 같다[如十地論].”라고 했는데, 『십지경론(十
    地經論)』(大26 p.190b6)에 보면 구업성취(口業成就)를 설명하면서 “十種差別, 一
    依自相, 二依同相, 三行相, 四說相, 五智相, 六無我慢相, 七小乘大乘相, 八菩薩地
    相, 九如來地相, 十作住持相. 後五是淨相.”의 열 가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통의 식별[苦識]’이란 고의 체성[苦體]이니, 여기에서는 우선 사제문

(四諦門)을 설하기 때문이다. ‘고의 반연[苦緣]’이란 의지하는 것이니, 자

신의 심왕(心王)20)과 근에 의지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칼이나 몽둥이

등의 연이 갖추어진다.’는 것은 외촉(外觸)의 경계[境]이다. ‘고의 식별[苦

識]이 행해져 상처가 생겨 썩는다.’는 것은 내촉(內觸)의 경계[境]이다. 고

의 식별을 알아차리므로 행(行)해지는 집수(執受)로써 내신(內身)이 접촉

되기 때문이다. ‘칼’ 등은 몸을 무너뜨리므로 두 가지 촉[二觸]이 ‘갖추어

지나’, ‘창(瘡, 종기나 상처)’ 등은 저절로 생기기 때문에 ‘갖추어지지 않는

다.’고 하였다. 의지하는 연[所依緣]을 갖추면 요별이 생기기 때문에 ‘식별

을 일으킨다[生識]’고 하고 ‘식별을 짓는 것[識作]’은 생각[思]이고 ‘식별

을 느끼는 것[識受]’은 수(受)이며 ‘접촉하여 식별하는 것[觸識]’은 촉(觸)

이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로 모여 합해진 것을 ‘고의 식별[苦識]’이라고 한

다. 수승하게 나타난 것을 따라 다만 세 가지 의지처[三心所]21)만 들었을 

뿐이다.

20) 심왕(心王)은 마음작용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의 본체를 말한다.
21) 『구사론(俱舍論)』의 심소(心所) 중에 십대지법(十大地法)인 수(受)·상(想)·사
    (思)·촉(觸)·욕(欲)·혜(慧)·념(念)·작의(作意)·승해(勝解)·삼마지(三摩地)에
    서 수(受)·사(思)·촉(觸)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 

 

述曰, 第二化導, 諸有心者, 見是三苦, 起八苦等之因緣故. 此

地菩薩, 入敎化道三昧, 說諸過患, 令生厭背. 於中入定, 意業

自在, 現身六道, 身業自在, 十辯說法, 語業自在. 十者傳說,

一自相說事相故, 二同相說理相故, 三行相, 四說相, 五智相,

六無我慢相, 七大小乘相, 八菩薩地相, 九如來地相, 十作住持

相, 卽古今恒爾相也. 苦識者苦體也, 於此且說四諦門故. 苦緣

者所依也, 依自心王及根起故. 刀杖緣具者, 外觸境也. 苦識行

瘡腫發壞者, 內觸境也. 以覺苦識所行執受, 內身觸故. 刀等破

身, 故具二觸, 瘡等自生, 故言不具. 具所依緣, 生了別故, 名

爲生識, 識作思也, 識受受也, 觸識觸也. 如是一聚, 合名苦識.

以隨顯勝, 且擧三心所.

 

■그러나 이 고제의 차별에 세 가지가 있다. ①‘고고(苦苦)’이니 근(根)

과 경(境)에 의지하기 때문에 ‘두 가지 연[二緣, 根은 內緣·境은 外緣]의

고를 행한다.’고 하며 이 생각마다 몸의 상처를 반연하기 때문에 ‘마음과 

마음이 색을 반연한다.’고 하였고 ‘이 마음이 부딪치는 번뇌의 경계에 닿

아 번뇌의 독(毒)을 받아들이므로 고고(苦苦)’라고 한다.

②행고(行苦)이니 두 가지 고[二苦]의 근본이므로 중간에 설명한 것이

다. ‘마음이 식(識)을 반연한다’고 말하는 것은 차별된 이름이다. 처음 감

관[根]이 발할 적에 다분히 이로부터 소연(所緣)의 경계를 깨닫는 것을 행

고(行苦)의 알아차림이라 부른다. ‘사(思)와 수(受) 및 촉(觸)으로 겨우 경

계에 닿음을 느끼고 아직 독(毒)을 받지 않았을 때’ 사수(捨受)가 현전함

을 이름하여 행고(行苦)라고 한다.

③괴고(壞苦)이니, 경계의 절박으로 고(苦)가 생겨나는 것이 ‘마치 돌을

쪼갤 때의 불꽃 같다.’고 하였다. 연(緣)이 핍박하여 행고(行苦)의 돌을 쪼

개는 것으로 인하여 부서지는 것 같은 고(苦)가 발생하여 신심(身心)을 태

우는 것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찰나의 생멸은 곧 미세한 괴고(壞

苦)이다. 만약 어느 한 기간에 몸이 무너지고 흩어져 변해서 환화와 같아

지면 식이 그 안에서 알게 되기 때문에 ‘식은 무너지는 연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다. 아내와 자식과 보배 등이 존재함을 ‘연이 모인다.’고 하고 그것

이 나중에 무너지는 것을 ‘연이 흩어진다’고 한다. 그 때 마음의 고뇌가 더

욱 증가하여 마음을 괴롭히나니, 비록 현재에 생각을 받아들인다고 하더

라도 나중에 연이 흩어져 무너지면 전(前)에 있을 때를 연연하고 집착하

면서 ‘생각마다 버리지 못하므로 괴고(壞苦)’라고 한다. 위의 것을 총히 결

론 지어 말하면 ‘삼계는 모두 고제(苦諦)’인 것이다.

다음에는 집제(集諦)를 밝힌다. 무명을 관해 보니 무명은 한량없는 선

악의 마음을 끌어 모아 일체 업을 지으므로 습기22)가 상속23)된다. 번뇌는 

습(習)의 인(因)이다. ‘모든 업을 모으는 인’을 집제라고 한다.

22) 1권 18) 주(註) 참조. 
23) 상속(相續, sam3 tati)은 인과(因果)가 차례로 연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업의 잠재 
    적인 힘의 훈습에 의해 남겨진 세력으로 연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다음은 도제(道諦)를 밝히겠다. ‘바른 견해’는 인이며 ‘해탈’은 과이며,

‘공한 것까지 공[空空]한 지도(智道)’는 체이다. 두 가지 공의 지(智)란 세

간의 ‘정견(正見)’을 인(因)으로 삼고 출세간의 ‘해탈’을 과로 삼는 것이다.

여러 성인들의 자취를 ‘도(道)’라고 하며 견도(見道)나 수도(修道) 등은 달

리 ‘심심(心心)’이라 한다. 총히 결론 지어 ‘지도(智道)로써 도제(道諦)’라

고 이름한 것이다.

다음으로 멸제(滅諦)를 밝히겠다. ‘유(有)의 고과(苦果)’를 다하고 ‘유

(有)의 업을 모으는 인[集因]’을 다하여 장애에서 벗어나 ‘청정해져서 한

맛으로 체성을 비추면 성묘지(聖妙智)의 택력(擇力)으로 적멸한 하나의

진제’라고 한다.

‘혜품이 구족하다.’고 한 것 아래는 총결이니, ‘첫 번째 혜의 선근’을 결

론지었다. ‘공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속지(俗智)이며, ‘관에 들어간다.’는

것은 진지(眞智)이다.

然此苦諦差別有三. 一者苦苦, 依根境故, 言行二緣, 由此念念

緣身瘡等故, 言心心緣色, 此心觸對觸惱之境, 領受煩毒, 爲苦

苦也. 二者行苦, 二苦本故處中說. 言心緣識者, 名之差別. 初

在根發, 多分率爾覺所緣境, 名行苦覺. 思受及觸, 纔覺境觸,

未受毒時, 捨受現前, 名爲行苦. 三者壞苦, 境切生苦, 如斲石

火. 謂由緣逼, 斲行苦石, 出壞等苦, 燒身心也. 此有二種, 刹

那生滅, 卽細壞苦. 若一期身散壞, 轉變如幻化, 識於中了故,

言識入壞緣也. 妻子珍等, 存名緣集, 彼後敗壞, 名爲緣散. 爾

時心苦轉增心惱, 雖現受念, 後散壞緣, 戀著前存, 念念不捨,

是爲壞苦. 總結上云三界一切苦諦也. 次明集諦. 謂觀無明, 引

集無量善惡之心, 作一切業, 習氣相續. 煩惱習因. 諸業集因名

爲集諦. 次明道諦. 正見因也, 解脫果也, 空空智道體也. 謂二

空智, 以世間正見爲因, 出世解脫爲果. 羣聖之迹名道, 見修

等別名心心. 總結名以智道道諦. 次明滅諦. 盡有苦果, 盡有集

因, 離障淸淨, 一味所照體性, 以聖妙智擇力, 寂滅一諦也. 慧

品具足已下, 總結初慧善根. 起空者俗智, 入觀者眞智.

 

□두 번째 일체 탐착을 버리고 일체 평등한 공을 행하는 사(捨)를 관하

는 것이다. 반연이 없는 모든 법의 공한 경계[空際]를 하나의 상으로 관하

는 것이다. ‘내가 모든 시방의 땅을 관하니 모두 나의 옛 몸이 쓰던 옛 흙

이며, 네 개의 큰 바다 물은 내가 옛날에 쓰던 물이며, 일체의 겁화(劫火)

도 나의 옛 몸이 쓰던 불이며, 모든 바람은 내가 예전에 쓰던 기운이니,

내가 지금 이 땅 가운데에 들어가니 법신이 만족하다. 나의 옛 몸을 버리

되 마침내 사대(四大)로 분단(分段)된 깨끗하지 않은 옛 몸을 받지 않으리

라.’하시니 이것이 사품(捨品)의 구족이니라.

第二觀捨一切貪着, 行一切平等空捨. 無緣而觀諸法空際一

相.24)‘我觀一切十 方地土, 皆吾昔身所用故土, 四大海水, 是

吾故水, 一切劫火, 是吾昔身故所用 火, 一切風輪, 是吾故所

用氣, 我今入此地中, 法身滿足. 捨吾故身, 畢竟不受四大分段

不淨故身.’是爲捨品具足.

24) 卍60 p.394cb16에는 ‘一切相’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34b8에는 ‘一相’으로 되어
    있다.

 

■거꾸로 두 번째의 버리는 선근[捨善根]을 관하는 것이다. 처음은 총히

표시하여 말하기를 ‘두 번째는 일체 탐착하는 장애를 버려 평등한 공을 행

하는 사(捨)를 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행상을 밝히겠다. ‘반연함이 없는 행(行)으로써 법의 공한 경

계가 하나의 진여상인줄 관하는 것’은 또한 세속의 평등을 관찰하는 문

(門)이니 말하자면 땅을 관하기를 ‘나의 옛 몸이 쓰던 옛 흙’이라고 한 것

등은 사대(四大)가 모두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이 땅 가운데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이구지(離垢地)25)이다.

‘마침내 깨끗하지 않은 몸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은 『십주비바사론(十住

毘婆沙論)』26)에서 “초지보살(初地菩薩)은 오욕(五欲) 가운데서 번뇌로 근

심하나 상지(上地)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 것과 같다. 비롯함이 없는 음

애(婬愛)로 수태(受胎)하여 몸이 태어났다가 버려진 시신으로 대지를 이

루는 것 등이다. 이제는 오욕의 잘못을 짓지 않으므로 다시 태(胎)로 태어

나는 몸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25) 이구지(離垢地, vimalā-bhūmih)는 보살 수행위의 10지 가운데, 제2위(位)로 수
    혹(修惑)을 끊고 범계(犯戒)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몸을 깨끗하게 하는 지위.
26)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2권(大26 p.30a21) 「정지품(淨地品)」 제4에 “菩薩
    在初地, 勢力未足, 善根未厚, 修習善法未久故, 眼等諸根, 猶隨諸塵心,未調伏. 是
    故諸煩惱, 猶能爲患, 如人勢力未足, 逆水則難. 又此地中, 魔及魔民, 多爲障礙故,
    以方便力, 勤行精進. 是故此地, 名爲難治.”라 하여 초지(初地)의 상태를 “번뇌가
    오히려 근심이 된다.”고 했으나, 여기 인용된 이지(二地)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구지(離垢地)를 해석하면서(大26 p.95a15) “一離垢者, 地名也. 二
    離垢者, 於此地中, 離十不善道, 罪業之垢. 三離垢者, 離貪欲瞋恚等 諸煩惱垢故,
    名爲離垢.”라 하여 탐욕(貪欲) 등 모든 번뇌(煩惱)에서 벗어난 단계라고 한다.
   『범망경고적기』에서는 위 초지(初地)에 관한 해석과 이지(二地)의 세 번째 해설
    을 뜻만 취한 것 같다. 

 

述曰, 逆次第二, 觀捨善根. 初總標云, 第二觀彼捨一切貪障,

而行平等空之捨也.

次明行相. 以無緣行, 觀法空際一眞如相, 又觀世俗平等之門, 

謂觀地土, 吾所已用舊故土等, 四大皆然. 我今入此地者, 離

垢地也. 畢竟不受不淨身者, 如十住論, “初地菩薩, 於五欲中,

煩惱作患, 上地不然.” 無始婬愛, 受胎生身, 所棄尸身, 成大地

等. 今於五欲不作過患, 更不應受胎生身故.

 

□세 번째는 차례로 교화할 일체중생에게 인천의 즐거움과 십지의 즐

거움과 십악의 두려움을 여윈 즐거움[離十惡畏樂]과 묘화삼매를 얻은 즐

거움[得妙華三昧樂]에서 부처님의 즐거움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겠다고 관

하나니, 이렇게 관하는 것은 자품(慈品)을 구족한 것이니라. 보살은 그 때

이 지(地) 가운데 머무르며 어리석음이 없어지고 탐욕도 없어지고 성냄도

없어져서 평등한 하나의 진리인 지(智)로 일체행의 근본에 들어가 부처님

의 일체세계에 노닐면서 한량없는 법신을 변화시켜 나타내느니라.

第三次觀於所化一切衆生, 與人天樂, 十地樂, 離十惡畏樂, 得

妙華三昧樂, 乃至佛樂, 如是觀者, 慈品具足. 菩薩爾時住是地

中, 無癡無貪無瞋, 入平等一諦智, 一切行本, 遊佛一切世界,

現化無量法身.

 

■거꾸로 세 번째 자선근(慈善根)을 관하는 것이다. ‘묘화삼매(妙華三

昧)’라는 것은 일승의 삼매이니 총괄적으로 인(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즐거움은[佛樂]’은 과[果]이다.

뒤에 결론 지어 말하기를 ‘어리석음도 없어지고 탐욕도 없어지고 성냄

도 없어진다.’고 한 것은 차례대로 앞의 혜품(慧品)과 사품(捨品)과 자품

(慈品)의 선근이 이루어졌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평등지에 들어가는 것이

모든 보살행의 근본이다. ‘한량없는 법신을 변화시켜 나타낸다.’는 것은

물 가운데 달과 같아서 법신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述曰, 逆次第三, 觀慈善根. 妙華三昧者, 一乘三昧, 總攝因也.

佛樂, 果也. 後結成言無癡無貪無瞋, 如次結前慧捨慈品善根

成也. 入平等智, 諸菩薩行本也. 現化無量法身者, 如水中月,

法身影故.

 

□「일체중생천화품(一切衆生天華品)」에서 설한 것과 같느니라.

如一切衆生天華品說.

 

■세 번째 자세하게 설명한 품을 지적한 것이니 다른 지(地)도 이에 준

한다.

述曰, 第三指廣, 餘地準此.

 

3) 체성광명지 體性光明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광명을 발하는 체성지[光明體性地]니라. 삼

매해료지(三昧解了智)로써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법문과 십이법품(十二法

品)의 명미구(名味句)를 아나니, 중송(重誦)과 기별(記別, 授記)과 직어(直

語)와 게(偈)와 청하지 않아도 설하는 것[不請說]과 율계(律戒)와 비유(譬

喩)와 불계(佛界)와 석사(昔事)와 방정(方正)과 미증유(未曾有)와 담설(談

說)이다. 이것은 법의 체성으로서 이름은 하나이지만 뜻은 다르나니라.

若佛子! 菩提薩埵光明體性地. 以三昧解了智, 知三世一切

佛法門, 十二法品名味句, 重誦, 記別, 直語, 偈, 不請說, 律

戒, 譬喩, 佛界, 昔事, 方正, 未曾有, 談說. 是法體性, 名一切

義別.

 

■제삼지(第三地)를 ‘광명(光明)’이라고 부른 것은 ‘발광지(發光地)’이기

때문이다.

다음 행상 가운데 두 가지가 있으니 자리와 이타이다. 처음의 것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능전(能詮)을 아는 것과 소전(所詮)을 아는 것이다. 여

기서는 처음의 것이다. 삼매해료지(三昧解了智)란 수승한 정(定)에 의하

여 세 가지 지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의 법문’이란

십이분교의 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27)이니 능전(能詮)을 두루

섭하기 때문이다. ‘중송(重誦)’이란 응송(應訟)인데 이것은 불요의(不了

義)로서 기별(記別)에 대응 하므로 앞에 두 가지를 세워 두었다. ‘직어(直

語)’란 경전으로 이것은 다만 장항(長行, 산문체의 경문)일 뿐이니 풍송(諷

誦)과 게(偈)에 대응되므로 차례대로 두 가지를 세웠다. ‘청하지 않아도

설한다[不請說]’는 것은 스스로 설[無問自說, 제자들이 묻지 않아도 부처님

스스로 설하심]하는 것이다. ‘계율’이란 인연이며, ‘불계(佛界)’란 본생(本

生)이요, ‘석사(昔事)’는 본사(本事)이며, ‘방정(方正)’이란 바르고 넓은 것

[方廣]이고, ‘미증유(未曾有)’란 희귀한 법[希法]이며, ‘담설(談說)’이란 논

의(論議)이다.

27) 유부(有部)와 유식설(唯識說)에서 심불상응법(心不相應法)에 해당하는 명(名,
    nāma)·구(句, pada),·문(文, vyañjana)으로서 이 세 가지가 각각 두 개 이상 모이
    게 되면 덩어리라는 뜻의 신(身, kāya)을 붙여서 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
    身)이라고 한다. 음성의 짜임새에 있어서 임시로 세운 것으로 명(名)은 주어, 구
    (句)는 주어와 술어, 문(文)은 음소를 말하며, 신(身)은 모임이다. 또 유부(有部)
    에는 명(名)·구(句)·문(文)의 차제를 실유(實有)라고 주장하나 경량부나 유식
    설에서는 가유(假有)라고 한다.

 

‘이름은 하나’라는 것은 한 종류의 명구문(名句文)이기 때문이며, ‘뜻이

다르다.’는 것은 펼치면 십이분교가 되기 때문이다.

述曰, 第三地名光明者, 發光地故. 次行相中有二, 自利故利他

故. 初亦有二, 知能詮故知所詮故. 此初也. 三昧解了智者, 以

依勝定發三慧故. 三世佛法門者, 十二分敎, 名句文身, 徧攝能

詮故. 重誦者應頌, 此不了義, 對記別故, 在前立二. 直語者契

經, 此唯長行, 對諷頌偈, 故次立二. 不請說者自說. 戒律者因

緣, 佛界者本生, 昔事者本事, 方正者方廣, 未曾有者希法, 談

說者論議. 言名一者, 一種名句文故, 義別者, 開爲十二分故.

 

□이 명미구(名味句) 가운데에서 모든 유위법을 설하리라. 분분(分分,

分段)하게 생을 받되 처음 식(識)이 태(胎)에 들어가면 사대(四大)가 색

(色)과 심(心)을 자라나게 한다. 명색(名色)과 육입(六入)이 근(根) 가운데

머물러서 실제로 알아차림을 일으키나 아직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촉식이라 이름하며, 또한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아차리는 식

(識)을 삼수(三受, 樂과 苦와 不苦不樂)28)라고 부르며 잇달아 알아차리고

집착하여 느끼는 것이 끝이 없다. 욕(欲)과 아(我)와 견(見)과 계(戒)와 취

(取)와 선악(善惡)의 유(有)를 쓰므로 식(識)의 처음을 생(生)이라 부르며

식(識)의 마침을 사(死)라고 부른다. 이 십품(十品)은 현재의 고(苦)와 인

연(因緣)과 과(果)라고 관(觀)하느니라.

28) 삼수(三受)는 락(樂, sukha)과 고(苦, duhkha)와 불고불락(不苦不樂, aduhkhaasukha)의
    세 가지 감각이다. 곧 쾌락[樂受]과 불쾌감[苦受]과 괴롭지도 즐겁
    지도 않은 것[不苦不樂]이다. 삼수(三受)는 『유식삼십송(唯識三十頌)』(大31
    p.60b21), 『성유식론(成唯識論)』 권5(大31 p.27a25-28)에 보인다.

 

是名味句中, 說一切有爲法. 分分受生, 初入識胎, 四大增長色

心. 名六住於根中, 起實覺, 未別苦樂名觸識, 又覺苦樂識名三

受, 連連覺著受無窮. 以欲我見戒取善惡有, 識初名生, 識終名

死. 是十品, 現在苦因緣果觀

 

■두 번째는 소전(所詮)을 아는 것이다. ‘분분(分分)하게 생(生)을 받는

다.’는 것은 분단생(分段生)이다. ‘처음 식(識)이 태(胎)에 들어간다.’는 것

은 곧 식지(識支)의 지위이다. ‘사대(四大)가 색(色)과 심(心)을 자라게 한

다.’는 것은 명색지(名色支)이다. ‘명색(名色)과 육입(六入)이 근(根) 가운

데 머물러서 실제로 알아차림을 일으킨다.’는 것은 능히 식을 낼만한 자리

이므로 육처지(六處支)라고 한다. ‘아직 괴로움과 즐거움을 구별하지 못하

는 것을 촉식이라 이름한다’는 것은 촉지(觸支)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을 알아차리는 식(識)을 삼수(三受)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수지(受支)이다. ‘잇달아서 알아차리고 집착하여 느끼는 것이 끝이

없다.’는 것은 애지(愛支)이니 항상 애욕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욕(欲)’은

욕취(欲取)29)이고, ‘아(我)’는 아어취(我語取)이다. ‘견(見)’은 견취(見取)

이고 ‘계(戒)’는 계금취(戒禁取)이니 합하여 취지(取支)라고 한다. ‘선악의

유’란 유지(有支)이며 ‘식의 처음을 생이라 부름’은 생지(生支)이며 ‘식의

마침을 사(死)라고 부름’은 사지(死支)이다.

29) 욕취(欲取)는 사취(四取)의 하나. 취(取, upāpāna)는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외계
    의 대상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취(四取)란 ① 욕취(欲取, kāmaupāpāna), 색
    (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다섯 가지 대상에 집착하는 애욕(愛欲).
    ② 견취(見取, drstiupāpāna), 오온(五蘊)의 법(法)에 대해서 아견(我見)·변견
    (邊見) 등을 망집(妄執)으로 하는 그릇된 견해. ③ 계금취(戒禁取, śila-vrata
    upāpāna), 그릇된 계(戒)를 수행하는 것. ④ 아어취(我語取, ātma-vāda upāpāna),
    아견(我見)·아만(我慢)에 집착하는 것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백팔번뇌
    를 사취(四取)로 나눈다. 『연기경(緣起經)』 (大2 p.547c), 『집이문론(集二門論)』
    권8(大26 p.399c), 『구사론(俱舍論)』 권20(大29 p.107b24)에 보인다.

 

‘이 십품(十品)’이란 무명지(無明支)와 행지(行支)를 제외하였기 때문이

다. ‘현재의 고(苦)와 인연과 과(果)라고 관(觀)’한다는 것은 식(識) 등 오

지(五支)는 ‘현재의 고(苦)’ 라고 이름하며, 애(愛)와 취(取)와 유(有)의 세 

가지는 ‘현재의 인연’이라고 이름하고, 생(生)과 노사(老死)의 두 가지는

‘인연의 과(果)’라고 이름하며, 능히 저들을 잘 관찰하므로 ‘관(觀)한다.’고

한다.

述曰, 第二知所詮也. 分分受生者, 分段生也. 初入識於胎, 卽

識支位也. 四大增長色心者, 名色支也. 名六住於根中, 起實覺

者, 堪發識位, 爲六處支故. 未別苦樂, 名觸識者, 觸支也. 覺

苦樂識, 名三受者, 受支也, 連連覺著, 受無窮者愛支也, 恒著

愛故. 欲謂欲取, 我謂我語取. 見卽見取, 戒卽戒禁取, 合取支

也. 善惡有者, 有支也, 識初名生, 生支也, 識終名死, 死支也.

言是十品者, 除無明行支故. 現在苦因緣果觀者, 識等五支, 名

現在苦, 愛取有三, 名現在因緣, 生老死二, 名因緣之果, 能觀

察彼, 名之爲觀.

 

□이 행상을 중도(中道)로써 내가 오래 전에 이미 벗어났으므로 자체의

성품이 없느니라. 신통총지변재(光明神通總持辯才)에 들어가 마음과 마음

으로 공(空)을 행하면서 시방 불토 가운데 겁의 변화를 나타내며, 더욱 백

겁 천겁토록 변화하여 국토 가운데서 신통을 기르고 부처님 앞에 예경 드

리며 법의 말씀을 물어서 받았느니라. 다시 육도에 몸을 나타내어 한 음성

속에서 한량없는 법품(法品)을 설하였나니, 중생이 각기 자신[自分]의 몫

이 있어 마음에 하고자 하는 법으로 고(苦)와 공(空)과 무상(無常)과 무아

(無我)의 한결같은 진리의 소리를 듣지만, 국토가 같지 않으므로 몸과 마

음의 교화가 다르나니라.

是行相中道, 我久已離故, 無自體性. 入光明神通總持辯才, 心

心行空, 而十方佛土中現劫化, 轉化百劫千劫, 國土中養神通,

禮敬佛前, 諮受法言. 復現六道身, 一音中說無量法品. 而衆生

各自分分, 得聞心所欲之法, 苦空無常無我, 一諦之音, 國土不

同, 身心別化.

 

■두 번째는 이타(利他)이다. 보살은 ‘이 연으로 생겨나는 행상에 대해

중도지(中道智)를 써서, 내가 오래 전에 이미 유무의 집착을 벗어났으므로

자체의 성품이 없다.’고 생각한다. 증득할 바[所證]를 알고 나서 또한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총지변(總持辯)에 들어가 부처님을 섬기고 법을 받는

다. ‘육도에 몸을 나타내어’ 근기에 따라 응하여 법을 설한다고 한 것이다.

‘겁의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은 『유마경(維摩經)』에서 “하루를 펴서 칠대

겁(七大劫)을 삼는다.”고 한 것 등과 같다. 점차로 변화하기 때문에 ‘더욱

백겁 천겁토록 변화한다.’고 한 것이다. ‘국토가 같지 않으므로 몸과 마음

의 교화가 다르다.’ 는 것은 그 나라의 욕망을 따라서 삼업을 교화함이 다

르다는 것이다.

述曰, 第二利他也. 菩薩念言, ‘於是緣生行相, 以中道智, 我

久已離有無著故, 無自體性.’ 知所證已, 亦爲利他, 入總持辯,

事佛受法. 現身六道, 隨應說法. 現劫化者, 如維摩經, “一日

舒爲七大劫.”等. 展轉化故, 言轉化百千劫. 國土不同, 身心別

化者, 隨其國欲, 三業別化.

 

□이는 「묘화광명지(妙華光明地)」 가운데에서 간략하게 한 털끝만큼만

열어서 설명한 것이다. 「법품(法品)」과 「해관법문천삼매품(解觀法門千三

昧品)」에서 설한 것과 같나니라.

是妙華光明地中, 略開一毛頭許. 如法品 解觀法門千三昧

品說.

 

■세 번째는 간략히 해두고 자세하게 한 것을 지적하였으니, 저 두 품에

서 이미 자세하게 설하였기 때문이다.

述曰, 第三存略指廣, 如彼二品, 已廣說故.

 

4) 체성이염지 體性爾焰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체성지(體性地) 속에서 진을 아는 것[爾眞]

과 속을 아는 것[焰俗]이 단멸하지 않고 항상하지도 않나니, 생(生)에 상

즉(相卽)하고 주(住)에 상즉하며 멸(滅)에 상즉하여 일세(一世), 일시(一

時), 일유(一有)에 종자가 각기 다르나니라. 나타난 것이 다르므로 인연의

중도가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며 범부도 아

니고 부처도 아니니, 부처의 세계와 범부의 세계 낱낱을 이름하여 세제(世

諦)라고 하는 것이다. 저 지도(智道)로 관(觀)하면 하나도 없고 둘도 없으

니, 그윽한 도의 선정 종류가 이른바 제불의 심행(心行)이니라. 처음 깨달

음의 정인(定因)을 신각(信覺)과 사각(思覺)과 정각(定覺)과 상각(上覺)과

염각(念覺)과 혜각(慧覺)과 관각(觀覺)과 의각(猗覺)과 낙각(樂覺)과 사각

(捨覺)이라고 한다.

여러 가지 종류의 방편도로 마음과 마음이 정과(定果)에 들어가면 이

사람은 선정 가운데 머물러 밝고 밝게 법을 보고 공을 행하게 된다. 만약

염정(念定)을 일으켜서 중생의 심정에 들어가면 사랑[愛]으로 도(道)를 따

르므로 도법으로 중생 교화함을 법락인(法樂忍)과 주인(住忍)과 증인(證

忍)과 적멸인(寂滅忍)이라 하느니라.

若佛子! 菩提薩埵體性地中, 爾眞焰俗, 不斷不常, 卽生卽住

卽滅, 一世一時一有, 種異異. 現異故因緣中道, 非一非二, 非

善非惡, 非凡非佛故. 佛界凡界一一, 是名爲世諦. 其智道觀, 

無一無二, 玄道定品, 所謂諸佛心行, 初覺定因, 信覺思覺, 靜

覺上覺, 念覺慧覺, 觀覺猗覺, 樂覺捨覺. 是品品方便道, 心心

入定果, 是人住定中, 燄燄見法行空. 若起念定, 入生心定, 生

愛順道, 道法化生, 名法樂忍住忍, 證忍寂滅忍.

 

■제사지(第四地)의 행상(行相)에 두 가지가 있다. 자분행(自分行)30)과

승진행(勝進行)이니 이 부분은 첫 번째[初, 自分行]이다.

30) 자분행(自分行)은 자기 자신이 실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범어(梵語)로 ‘이염(爾焰)’은 알아야 할 대상[所知]의 뜻이다. 여기에서

는 이제(二諦)에 배대하므로 ‘진(眞)을 아는 것[爾眞]과 속(俗)을 아는 것

[焰俗]’이라고 한다. 증감에서 벗어났으므로 ‘단멸하지 않고 항상하지 않

다’고 하며 무량겁이 곧 일념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생(生)과 주(住)와 멸

(滅)31)의 일세(一世)와 일시(一時)와 일유(一有)’이겠는가! ‘일유(一有)’는

일묘유(一妙有)이다. 비록 참된 일미[一味]이나 인연에 섞이지 않으므로

‘종자가 다르고 다르다’라고 하니 인연이 다르면 과도 또한 같지 않으므로

‘나타난 것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31) 생주이멸(生住異滅)은 유부(有部)의 사상(四相)으로 생(生)·주(住)·이(異)·멸
    (滅)의 네 가지를 말한다.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무상(無常)한 존재로서, 미래의
    위(位)로부터 인연의 힘으로 현재의 위(位)에 생겨나지만 그 태어난 다음 순간
    에 멸하여 과거의 위(位)로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유위법(有爲法)은 무상하
    며, 미래·현재·과거의 삼세(三世)로 흘러간다. 그 때 미래의 위(位)에서 현재의
    위(位)로 태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생상(生相)이라 한다. 이와 같이 유위
    법으로서 현재의 위(位)에서 머물게 하는 것을 주(住) 또는 주상(住相), 현재의
    자리에서 변이(變異)케 하는 것을 이(異) 또는 이상(異相), 현재의 위(位)가 과거
    의 위로 멸하는 것을 멸(滅) 혹은 멸상(滅相)이라고 한다. 이 사상(四相)은 자체
    가 유위법이므로 이것을 생주이멸 시키는 법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모습이 없으나 가명을 무너뜨리지 않기 때문에 ‘인연의 중도’라고 

하며, 이미 정해진 성품이 없으므로 ‘중도’라고 부른다. ‘하나도 아니고 둘

도 아니며’ 라고 한 등은 문장 그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시로

모인 상을 따라 부처와 범부 등이 낱낱이 차별되므로 ‘세제(世諦)’라고 하

며 승의(勝義)의 ‘지도(智道)로 관(觀)하면 하나도 없고 둘도 없다’ 고 하

였으니 어떤 법으로 저 진(眞)을 관하겠는가? 그러므로 총히 들어서 ‘그

윽한 도의 선정 품목[定品]’을 말한 것이다. ‘현(玄)’은 반연할 바이고 ‘도

(道)’는 혜(慧)이며 ‘정(定)’은 의지하는 바이다.

‘부처님의 심행’이란 과를 들어서 인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였다. ‘처

음 깨달음의 정인(定因)’이란 처음으로 공의 이치를 깨우침에 정(定)이 곧

인(因)이니, 깨달음의 인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품(品)이라고 부르는가?

열 가지가 있으니, 처음 세 가지는 차례대로 문사수(聞思修)32)의 혜이고,

다음은 칠증위(七證位)의 칠각지(七覺支)33)이다. ‘상각(上覺)’은 정진(精

進)이니 위로 올라가기 때문이요, ‘관각(觀覺)’은 정(定)이니 과(果)를 따

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의각(猗覺)’은 편안함[安]이니 옛 번역에서는 ‘의

(倚)’라고 했으며 낙각(樂覺)은 기쁨[喜]을 말한다. 

32) 문사수(聞思修, śruta-cintā-bhāvanā, śruta-prayoga, śrutādi, suta-cintā-bhāvanā)는
    교법을 듣고[聞] 그 이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思] 실제로 닦아 익히는 것[修]
    을 뜻한다. 또는 그 문·사·수로 얻어진 지혜를 가리킨다. 문사수란 무루(無漏)
    의 지혜를 얻기 위한 기본 방법이다. 즉 수행자는 경전에서 전래되는 교설을 듣
    고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하여, 다시 교설의 의미와 이치를 사유하게
    되고, 나아가 실제로 명상 수행을 한다. 이것을 통해 진리에 대한 판단력이 점차
    로 고양됨과 동시에 불선(不善)과 탐욕을 제거하고 무루의 지혜에 나아갈 수 있
    다. 이 문사수에 의해 얻어진 지혜의 본성은 유루(有漏)의 세속지이지만 이는
    무루의 지혜를 낳는 근본이기도하다.
33) 칠각지(七覺支, sapta-body-angāni)는 37도품 가운데 제6의 행법으로 각(覺)은
    깨달음의 지혜를 의미한다. 니까야(Nikāya)에 기술되고 있는 ① 념(念) ② 택법
    (擇法) ③ 정진(精進) ④ 희(喜) ⑤ 경안(輕安) ⑥ 정(定) ⑦ 사(捨)이다. 이 7종의
    법이 깨달음의 지혜를 도와주므로 각지(覺支)라고 한다

 

사지보살(四地菩薩)이 점차로 장애를 끊을 때 방편도의 힘으로 생각마

다 선정의 결과[定果]인 깨달음의 혜에 들어간다. 이 사람이 정(定)에 머

물러서 혜의 불꽃을 일으켜 세속법을 보고 승의공(勝義空)을 행한다. ‘만

약 염정(念定)을 일으켜서’라고 하는 것은 정(定)이 친인(親因)이나 염

(念)을 아울러 든 것이다. ‘일으킨다는 것’은 출생하는 것으로 앞에서 말한

법을 반연하고, 공을 반연하는 정을 내는 것이니, 곧 유정이 마음에 정(定)

을 반연하여 자애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내어 도법을 따라 중생을 교화하

는 것이다. 이미 법락(法樂)을 사랑하면 ‘법락인(法樂忍)’이라 부르며 덕을

갖추어 물러나지 않으면 ‘주인(住忍)’이라고 하고, 진(眞)에 들어가면 증

인(證忍)이라 하며, 허망에서 벗어나면 ‘적멸인(寂滅忍)’이라 부르니 그 이

름이 다를 뿐이다.

述曰, 第四地, 行相中有二. 自分行故, 勝進行故, 此初也. 梵

云爾焰, 卽所知義. 今配二諦, 故言爾眞燄俗. 離增減故, 言不

斷不常, 如無量劫, 卽是一念, 况生住滅, 一世一時一有! 一有

者一妙有也. 雖眞一味, 因緣不雜, 故言種異異, 如因緣別, 果

亦不同, 故言現異. 旣雖無相, 不壞假名, 故言因緣中道也, 旣

無定性, 名中道故. 非一二等, 如文可知. 然隨假相, 佛與凡

等, 一一差別, 名爲世諦, 然勝義智道觀, 彼無一二, 如何等

法, 觀彼眞耶? 故總擧言, 玄道定品也. 玄卽所緣, 道謂慧也,

定謂所依. 言佛心行者, 擧果顯因. 初覺定因者, 初悟空理, 定

卽因也, 覺之因故. 何等名品? 謂有十種, 初三如次, 聞思修

慧, 次七證位, 七覺支也. 上覺精進, 以上昇故, 觀覺定也, 從

果名故. 猗34)覺安也, 舊翻倚故, 樂謂喜也. 四地菩薩, 漸斷障

時, 方便道力, 念念進入定果覺慧. 是人住定, 起慧焰故, 見世

俗法, 行勝義空. 若起念定者, 定之親因, 幷擧念也. 起者出也,

出前緣法, 緣空定者, 卽入有情, 緣心定中, 生慈心愛, 以順道

法化生. 旣愛法樂, 名法樂忍, 持德不退, 名爲住忍, 入眞名爲

證忍, 出妄名寂滅忍, 名之差別也.

34) 卍60 p.397b9에는 ‘掎’로 되어 있으나 韓3 p.436a9에는 ‘猗’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입광광화삼매(入光光華三昧) 속에서 무

량불을 나투시고 손으로 정수리를 어루만지며 한 목소리로 법을 설하신다.

백 천 가지를 일으키나 정(定)에서 나오지 않으시고, 정의 맛에 머물러

정을 즐기며 정에 집착하고 정을 탐하면서, 일겁 천겁 가운데 정에 머무르

며 부처님께서 연화좌에서 온갖 법문 설하시는 것을 보나니, 이 사람이 공

양을 올리고 법을 들으며, 일겁에 이르도록 정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 때 모든 부처님께서 광명 속에서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시며 정품(定

品)의 출상(出相)과 진상[進相]과 거향상[去向相]을 일으키는 연고로, 없

어지지 않으며, 물러나지 않으며, 떨어지지 않으며, 머무르지 않으며, 정삼

매법(頂三昧法)에서 최상의 낙인[上樂忍]으로 길이 다하여 나머지가 없다.

곧 모든 불토에 들어가 한량없는 공덕품들을 수행하니 행마다 모두 광

명이다. 좋은 방편[善權方便]에 들어가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능히 부처

님의 체성인 상락아정을 볼 수 있게 하느니라.

이 사람은 이 땅 안에 태어나 머무르면서 교화를 행하고 법문하는 것

이 점점 깊고 미묘해지는 공화관지(空華觀智)와 체성중도(體性中道)에 들

어가 모든 법문품을 만족하는 것이 마치 금강과도 같나니 위의 「일월도품

(日月道品)」 에서 이미 이 뜻을 밝혔느니라.

故諸佛於入光光華三昧中, 現無量佛, 以手摩頂, 一音說法.

百千起發而不出 定, 住定味樂定, 著定貪定, 一劫千劫中住

定, 見佛蓮華座說百法門, 是人供養聽法, 一劫住定. 時諸佛光

中摩頂, 發起定品出相進相去向相故, 不沒不退, 不墮不住, 頂

三昧法, 上樂忍, 永盡無餘. 卽入一切佛土中, 修行無量功德

品, 行行皆光明. 入善權方便, 敎化35)一切衆生, 能使得見佛體

性常樂我淨. 是人生住是地中, 行化法門, 漸漸深妙, 空華觀

智, 入體性中道, 一切法門品滿足, 猶如金剛,上日月道品, 已

明斯義.

35) 卍60 p.398b4에는 ‘化敎’로 되어 있으나 韓3 p.436b3에는 ‘敎化’로 되어 있다.

 

■두 번째 승진행(勝進行)이니, 저 보살이 들어간 정(定) 속에 모든 부처

님이 그림자를 나타내어 일어나기 때문이다. ‘백 천 가지를 일으킨다.’는

것은 정진법문(精進法門)이다. ‘정에 집착한다.’는 것은 정에 머무름을 해

석한 것이며 ‘정을 탐(貪)한다.’는 것은 정의 맛을 즐기는 것을 해석한 것

이다. 그러나 선법(善法)의 욕구로서 탐욕의 번뇌가 아니니 이미 정애(定

愛)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일으킨다는 것’은 깨우쳐 일어나게 하는 것이

니[覺發], 저 정[定品]의 삼종상(三種相)을 깨우치기 때문이다. 보살이 선

정의 힘으로 삼유(三有)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이름하여 ‘출상(出相)’이

라 한다.

述曰, 第二勝進行, 於彼菩薩所入定中, 諸佛現影而起發故.

百千起發者, 精進法門也. 著定者, 釋住定也, 貪定者, 釋味樂

定也. 然善法欲, 非貪煩惱, 已斷定愛故. 發起者, 覺發也, 警

彼定品三種相故. 菩薩定力超三有故, 名爲出相. 

 

■이승의 적멸을 뛰어넘는 것을 ‘진상(進相)’이라 하고, 대승의 과로 향

하게 하는 것을 ‘거향상(去向相)’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광명으로 출상을 경각케 하였으므로 보살이 생사에 ‘빠지

지 않고’, 열반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진상(進相)을 경각케 하였으므로

이승에 ‘떨어지지 않으며’, 거향상(去向相)을 경각케 하였으므로 인위(因

位)에 ‘머무르지 않나니’라고 한 것은, 이는 정품(定品)의 공덕이 만족해

진 것이다. 정수리를 어루만져 일으킴으로 ‘정삼매법(頂三昧法)’이라 하고

‘몰등(沒等)’의 하열한 것에서 벗어난 것을 ‘최상의 낙인[上樂忍]’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공덕이 원만하게 갖추어졌으므로 ‘길이 다하도록 나머지

가 없다’고 한다.

超二乘滅, 名爲進相, 向大乘果, 名去向相. 佛光覺發出相之

故, 菩薩不沒生死, 不退涅槃, 覺發進相之故, 不墮二乘, 覺發

去向相故, 不住因位, 是則定品功德滿足. 謂摩頂發起, 名頂三

昧法, 離沒等劣, 名上樂忍. 功德圓備, 名永盡無餘.

 

■‘한량없는 공덕품[無量功德品]’은 복(福)이며, ‘행과 행이 모두 광명’

인 것은 지(智)이다. ‘부처님의 체성(體性)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는 것이다. 나머지 문장

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상일월도품(上日月道品)」’ 아래는 다른 품

(品)을 가리킨다.

無量功德品, 福也, 行行皆光明, 智也. 見佛體性常樂我淨者,

令心解故. 餘文可解. 上日月下, 指餘品也.

 

5) 체성혜조지 體性慧照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지혜로 비추는 체성지[慧照體性智]니라. 법

에는 열 가지의 힘이 나게 하는 품[力生品]이 있어 일체공덕의 행을 일으

키게 하느니라. 하나의 지혜 방편으로 선악의 두 가지 업의 각각의 행을

아는 처력품(處力品), 선을 짓고 악을 짓는 업을 아는 지력품[業智力品],

일체 욕구와 육도에 나기를 구하는 과욕력품(果欲力品), 육도의 성품이 같

지 않음을 분별하여 아는 성력품(性力品), 일체 선악의 근기가 낱낱이 같

지 않음을 아는 근력품(根力品), 삿된 정[邪定]과 바른 정[正定]이 일정하

지 않음을 아는 것이니 이것을 정력품(定力品)이라 한다. 일체 인과는 이

인을 타고 이 과에 올라 과처(果處)에 이르러 인의 도에 오르는 것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도력품(道力品)이다.

오안(五眼)37)으로 일체 법을 알고 일체 생 받는 것을 보는 까닭에 천안

력품(天眼力品)이라하며 백겁의 일을 낱낱이 아는 것은 숙세력품(宿世力

品)이라 하고, 일체 생(生)에서 번뇌가 사라짐과 일체 수(受)에서 무명이

사라짐을 아는 것을 해탈력품(解脫力品)이라고 한다. 이 십력품(十力品)38)

의 지(智)로 스스로 닦은 인과를 알며, 또한 일체 중생의 인과를 알아 분

별하느니라.

37) 오안(五眼)은 다섯 가지 안력(眼力)이다. ① 육안(肉眼)은 육신(肉身)에 있는 눈.
    ② 천안(天眼)은 색계(色界) 천인(天人)의 눈으로 중생의 미래생사를 아는 능력
    이 있는 눈. ③ 혜안(慧眼)은 이승인(二乘人)의 안(眼)으로서 진공무상(眞空無
    相), 곧 일체의 현상은 공(空)에 있어서 결정된 특질이 없다고 꿰뚫어 보는 눈.
    ④ 법안(法眼)은 보살이 일체중생을 구제하기 때문에 일체의 법문(法門)을 조견
    (照見)하는 눈. ⑤ 불안(佛眼)은 앞의 네 가지 눈을 전부 갖춘 눈이다. 삼론종(三
    論宗)의 길장(吉藏)은 ① 육안(肉眼)은 인간(人間) ② 천안(天眼)은 천신(天神)
    ③ 혜안(慧眼)은 성문(聲聞), 연각(緣覺) ④ 법안(法眼)은 보살(菩薩) ⑤ 불안(佛
    眼)은 부처님의 눈으로 보고 있다.
38) 위에서 설명한 일체공덕(一切功德)을 내게 하는 열 가지의 힘을 말하니 처력품
    (處力品), 업지력품(業智力品), 과욕력품(果欲力品), 성력품(性力品), 근력품(根力
    品), 정력품(定力品), 도력품(道力品), 천안력품(天眼力品), 숙세력품(宿世力品),
    해탈력품(解脫力品)이다. 

 

若佛子! 菩提薩埵慧照體性地. 法有十種力生品, 起一切功德

行. 以一慧方便, 知善惡二業別行, 處力品, 善作惡作業, 智

力品, 一切欲求願六道生生, 果欲力品, 六道性分別不同, 性力

品, 一切善惡根一一不同, 根力品, 邪定正定不定, 是名定力

品. 一切因果, 乘是因, 乘是果, 至果處乘因道, 是道力品. 五

眼知一切法, 見一切受生故, 天眼力品, 百劫事一一知, 宿世力

品, 於一切生煩惱滅, 一切受無明滅, 解脫力品. 是十力品智,

知自修因果, 亦知一切衆生因果分別.

 

■제오지(第五地)의 문장을 시작하는 부분을 ‘혜조(慧照)’라고 말한 것

은 처음부터 두 가지로 비추기 때문이다. 지행(地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자분(自分)과 승진(勝進)이다. 처음에 또한 둘이 있으니 지력(智力)과 신

통력(神通力)이니 이 부분은 첫째이다.

총히 표해서 ‘열 가지 힘이 나게 하는 품[十種力生品]’이라 한 것은 일체

공덕을 일으키는 행이기 때문이다.

①‘하나의 지혜’로부터 ‘처력품(處力品)’까지는 이치에 맞음과 맞지 않

음을 아는 지혜의 힘[處非處智力]이다. ②스스로 업을 아는 지력[自業智

力]이며, ③갖가지를 훌륭하게 아는 지혜의 힘[種種勝解智力]이니 능히

육도에서 행해지는 의지의 수승하고 열등함을 알기 때문이다. 육도에 태

어나고 의지대로 하고자 함을 이름하여 과욕(果欲)이라 한다. ④갖가지 

세계를 아는 지혜의 힘[種種界智力]이니 종성을 알기 때문이다. ⑤근기의

상하를 아는 지혜의 힘[根上下智力]이며 ⑥선정과 해탈을 아는 지혜의 힘

[靜慮解脫智力]이다. 능히 범부와 성인의 선정의 차별을 알기 때문이니 올

바른 선정이란 성인(聖人)의 정(定)이다. ⑦온갖 취의 행을 아는 지혜의

힘[徧趣行智力]이니 능히 과에 나아가는 방편을 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인에 의지하여 반드시 과처(果處)에 이르는 줄 안다. 이 과에 오르려

면 인의 도에 올라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대법(對法, 俱舍論)』에서 “대소

승교의 경계를 깨달아 들어간다.”고 한 것과 같다. ⑧죽고 사는 것을 아는

지혜의 힘[死生智力]이다. ‘오안(五眼)으로 일체법을 안다.’는 것은 유사한

총수(總數)를 든 것이니 혜안과 법안 등으로 모든 법을 알고 천안으로 모

든 생 받음을 보기 때문이다. ⑨과거의 일을 기억하여 아는 지혜의 힘[宿

住隨念智力]이며 ⑩번뇌의 다함을 아는 지혜의 힘[漏盡智力]이니, ‘일체

수(受)’란 순현수(順現受)39) 등이니 생을 윤습하게 하는 번뇌가 사라지면

업을 일으키는 무명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39) 순현수업(順現受業)의 줄인 말이다. 현재 세상에서 업을 짓고 현재 세상에서 그
    과보를 받는 업으로 순생(順生)과 순후(順後)와 함께 삼종 과보라고 말한다.

 

述曰, 第五地, 擧章云慧照者, 始雙照故. 地行有二, 自分故勝

進故. 初亦有二, 智故通故, 此初也. 總標云十力生品者, 起一

切功德行故. 一以一慧至處力品者, 處非處智力也. 二自業智

力, 三種種勝解智力, 能知六道意樂勝劣故. 現行意樂, 名爲果

欲. 四種種界智力, 知種姓故. 五根上下智力, 六靜慮解脫智

力. 能知凡聖定差別故, 正定聖也. 七徧趣行智力, 能知趣果方

便故. 謂知乘是因, 必至果處. 及乘是果, 由乘因道故. 如對法

云, “悟入大小乘敎所攝境故.” 八死生智力. 言五眼知一切法

者, 類擧總數, 慧法眼等, 知一切法, 以天眼見諸受生故. 九宿

住隨念智力, 十漏盡智力, 一切受者, 順現受等, 潤生煩惱滅,

發業無明滅故.

 

□그러나 신(身)과 심(心)과 구(口)를 쓰는 것이 달라 청정한 국토[淨國

土]를 더러운 국토[惡國土]로 만들고 더러운 국토를 미묘하고 즐거운 국

토[妙樂土]로 만들며, 능히 좋은 것을 바꾸어 나쁜 것으로 만들고 나쁜 것

을 바꾸어 좋은 것으로 만든다. 색(色)이 색 아닌 것[非色]이 되게 하고 색

아닌 것[非色]으로 색(色)이 되게 하며, 남자를 여자가 되게 하고 여자를

남자가 되게 하며, 육도(六道)를 육도 아닌 것이 되게 하고 육도 아닌 것

을 육도가 되게 하며, 더 나아가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지수화풍 아닌 것

이 되게 한다. 이 사람이 그때 큰 방편의 힘을 써서 일체중생들에게 불가

사의한 것을 보게 하나 아래 지위에서는 능히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일

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느니라.

而身心口別用, 以淨國土爲惡國土, 以惡國土爲妙樂土,40) 能

轉善作惡, 轉惡 轉惡作善, 色爲非色, 非色爲色, 以男爲女, 以

女爲男, 以六道爲非六道, 非六道 爲六道, 乃至地水火風, 非

地水火風. 是人爾時以大方便力, 從一切衆生, 而見不 可思議,

下地所不能知, 覺擧足下足事.

40) 卍60 p.399b8에는 ‘樂國土’로 되어 있으나 韓3 p.4137a10에는 ‘樂土’로 되어 있다.

 

■두번째는 신통력[神通力]이다. 삼업(三業)을 변화시켜 자유롭게 쓰기

때문이다. (삼업의 변화가) 이미 중생에게 불가사의를 나타내므로 ‘아래

지위에서는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일조차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하였다.

述曰, 第二通力. 三業變化, 自在用故. 旣從衆生, 現不可議,

下地不知, 覺擧足下足事.

 

□이 사람은 크게 지혜가 밝아져서 차차 나아가 낱낱의 지혜[分分智]와

온갖 광명이 한량없고 한량없어서 가히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는 법문

이 현재 눈앞에서 행하여지느니라.

是人大明智, 漸漸進, 分分智光光, 無量無量, 不可說不可說法

門, 現在前行.

 

■두 번째 승진분(勝進分)의 행(行)이다. ‘지혜가 크게 밝아졌다.’는 것

은 총괄하여 든 것이다. ‘차차 나아간다[漸漸進]’는 것은 가행도(加行道)이

고, ‘낱낱의 지혜[分分智]’란 무간도(無間道)이다. ‘온갖 광명이 한량없고

한량없다.’는 것은 해탈도(解脫道)이며 ‘가히 설할 수 없고, 설할 수 없는

법문[不可說不可說法門]’은 승진도(勝進道)41)이다.

41) 승진도(勝進道)는 『구사론』 권26(大29 pp.138c17-139c12)에 번뇌를 끊어서 해탈
    의 진리를 증득하는 과정(過程)인 사도(四道) 가운데 하나이다. ① 가행도(加行
    道)는 방편도라고도 하며, 번뇌를 끊기 위한 예비적 수행단계이다. ② 무간도
    (無間道)는 무애도(無礙道)라고도 하며, 바로 번뇌를 끊는 도로서 단도(斷道)
    라는 것이다. 이 도의 직후에 번뇌가 끊어지므로 무간격(無間隔)의 의미로 무
    간(無間)이라 한다. ③ 해탈도(解脫道)는 번뇌를 끊어서 해탈의 진리를 증득하
    는 도(道). ④ 승진도(勝進道)는 승도(勝道)라고도 하며, 다시 나아가서 다른 이
    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혹은 만족하게 이미 끊어진 것을 관찰하는 도(道). 유식
    설에서는 수행과정을 아홉단계로 나누어 설하고 있는데, 『유가사지론』 권13(大
    30 p.346c25-28)에서는 “一世間道, 二出世道, 三方便道, 四無間道, 五解脫道, 六
    勝進道, 七軟品道, 八中品道, 九上品道.”라고 하고,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
    100 (大30 p.881a21-24)에서는 “一世間道, 二出世道, 三加行道, 四無間道, 五解脫
    道, 六勝進道, 七下品道, 八中品道, 九上品道.”라고 한다. 또 수도(修道)에 대하
    여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권5(大31 p.683a27-29)에서는 다음과 
    같이 9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세간도(世間道, laukiko mārga), ② 출세간도(出世
    間道, lokottaramārga), ③ 탄도(歎道, mrdumārga), ④ 중도(中道, madhyamārga), ⑤
    상도(上道, dhimātro mārga), ⑥ 가행도(加行道, prayogamārga), ⑦ 무간도(無間道,
    ānantaryamārga), ⑧ 해탈도(解脫道, vimuktimārga), ⑨ 승진도(勝進道, viśesamārga).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10(大31 p.737c28-738a6)에서는
    번뇌의 제거가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이 서술되고 있다. 가행도에서는 번뇌
    가 부분적으로 제거되고, 무간도에서는 완전하게 제거된다. 그리고 모든 번뇌가
    배제된 다음 단계인 승진도에서는 완전한 해탈의 수행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述曰, 第二勝進分行. 大明智者, 總擧也. 慚慚進者, 加行道也,

分分智者, 無間道也. 光光無量無量者, 解脫道也, 不可說不可

說法門, 勝進道也.

 

6) 체성화광지 體性華光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반야의 정인(正因)인 화광으로 무명을 깨뜨

리는 체성지[體性華光地]에서는 능히 일체세계 가운데서 열 가지 신통명

지품(十神通明智品)42)으로 모든 중생에게 여러 가지 변화를 보인다.

천안명지(天眼明智)로써 삼세국토의 미진과 같은 온갖 물질이 낱낱이

[分分] 육도중생의 몸을 이루며, 낱낱 몸의 미진과 미세한 물질이 큰 물질

을 이루는 것을 낱낱이[分分] 아느니라.

42) 체성화광지(體性華光地)에서 십신통명지(十神通明智)로 모든 중생에게 여러 가
    지 변화를 보이는 것으로써 아래에서 밝힌 열 가지이다. 천안명지(天眼明智), 천
    이지(天耳智), 천신지(天身智), 천타심지(天他心智), 천인지(天人智), 천해탈지
    (天解脫智), 천심지(天心智), 천각지(天覺智), 천념지(天念智), 천원지(天願智)의
    열 가지이다.

 

천이지(天耳智)로써 시방삼세 육도중생의 고락 음성과 비비음(非非音)

과 비비성(非非聲)과 온갖 법의 소리를 아느니라.

천신지(天身智)로써 일체색(一切色)의 색(色)과 비색(非色)과 비남(非

男)과 비녀(非女)의 형태를 알고, 일념(一念) 가운데 시방삼세에 두루한

국토의 겁 수량과 크고 작은 나라의 미진(微塵) 같은 몸을 다 아느니라.

천타심지(天他心智)로써 삼세의 중생들이 마음속으로 행하는 것과 시

방 육도(十方六道) 가운데 일체중생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괴로

움과 즐거움, 선과 악 등의 일을 아느니라.

천인지(天人智)로 시방삼세의 국토 가운데 일체중생들이 과거세에 받

은 괴로움과 즐거움과 받은 수명을 알며 수명이 이어진 백겁을 낱낱이 아

느니라.

천해탈지(天解脫智)로써 시방삼세 중생이 해탈하여 일체번뇌를 끊어

없앤 것이 혹은 많고 적은 것을 알며, 일지(一地)부터 십지(十地)에 이르

도록 멸(滅)하고 멸(滅)하여 모두 다한 것을 아느니라.

천정심지(天定心智)로써 시방 삼세의 국토 가운데 중생심의 정과 정에

들지 못함과, 비정(非定)과 정에 들지 않음이 없음과 정을 일으키는 방법

과 받아들이는 삼매와 백삼매(百三昧)가 있음을 아느니라.

천각지(天覺智)로써 모든 중생이 이미 성불한 것과 아직 성불하지 못한

것과 그 외에 모든 일체 육도(六道) 중생들의 마음과 마음을 알며 또 시방

의 부처님 마음 속과 말씀하신 법을 아느니라.

천념지(天念智)로써 백겁 천겁 대겁 소겁 가운데 일체 중생이 받은 수

명과 수명의 길고 짧음을 아느니라.

천원지(天願智)로써 모든 중생과 현성인(賢聖人)의 십지(十地)와 삼십

심(三十心, 십발취심·십장양심·십금강심 또는 십주·십행·십회향) 가운데

낱낱 행원(行願)의 고락을 구하며 혹은 법과 비법의 일체를 구하며 십원

(十願)과 백 천 가지의 대원품(大願品)이 구족함을 아느니라.

이 사람이 지(地)와 열 가지 신통명(神通明) 가운데 머무르며 한량없는

몸과 마음과 말의 차별된 사용을 나타내어 지공덕(地功德)을 설하기를 백

천만겁토록 할지라도 다함이 없느니라. 여기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신통명

품(神通明品)을 간략하게 펴서 설하였으니 「관십이인연품(觀十二因緣品)」

가운데서 말한 것과 같나니라.

若佛子! 菩提薩埵, 體性華光地, 能於一切世界中, 十神通明

智品, 以示一切衆 生種種變化. 以天眼明智, 知三世國土中,

微塵等一切色, 分分成六道衆生身, 一 一身微塵細色成大色,

分分知. 以天耳智, 知十方三世, 六道衆生, 苦樂音聲, 非 非音

非非聲, 一切法聲. 以天身智, 知一切色, 色非色, 非男非女形,

於一念中,徧十方三世國土劫量, 大小國土中微塵身. 以天他心

智, 知三世衆生心中所行, 十 方六道中, 一切衆生, 心心所念,

苦樂善惡等事. 以天人智, 知十方三世國土中,一切衆生, 宿世

苦樂受命, 一一知命續百劫. 以天解脫智, 知十方三世衆生解

脫,斷除一切煩惱, 若多若少, 從一地乃至十地, 滅滅皆盡. 以

天定心智, 知十方三世 國土中, 衆生心定不定, 非定非不定,

起定方法, 有所攝受三昧百三昧. 以天覺智, 知一切衆生, 已成

佛未成佛, 乃至一切六道人心心, 亦知十方佛心中所說法. 以

天 念智, 知百劫千劫大小劫中, 一切衆生受命, 命久近. 以天

願智, 知一切衆生,賢聖十地, 三十心中, 一一行願, 若求苦樂,

若法非法一切求, 十願百千大願品 具足. 是人住地中, 十神通

明中, 現無量身心口別用, 說地功德, 百千萬劫不可 窮盡. 而

爾所釋迦, 略開神通明品, 如觀十二因緣品中說. 

 

■제육지(第六地)의 문장을 시작하는 말에 ‘화광(華光)’이라 한 것은 반

야의 정인(正因)이니 경계를 비추어 어두움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다음

지행(地行)은 먼저 총괄적으로 표해 마쳤다. 

‘천안명(天眼明)’ 이하는 따로 십통(十通)을 나타낸 것이다. ‘십통(十通)’

이란 ①천안통(天眼通)이니 미진수(微塵數) 대색(大色)의 부분이 나누어

져 육도 중생의 몸을 이루며, 낱낱 몸의 미세한 부분이 큰 것을 이루어가

는 것을 낱낱이 아는 것이다.

②천이통(天耳通)이니 ‘비비음(非非音)과 비비성(非非聲)’이라는 것은

전해오는 말로는 “음성이 공함을 모두 알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갖 법의

소리’란 그 밖의 모든 소리이니, 어떤 사람은 “법으로 이어진 가르침을 듣

는 것”이라고 하였다.

③천신통(天身通)이니 곧 신경통(神境通)이다. 일체 색을 알며 색과 비

색(非色)의 성품을 안다. 일념 가운데에 시방 국토의 양(量)과 삼세 겁의

양(量)을 통달하여 나라의 크고 작음에 따라 때에 맞게 미진수의 몸을 나

타내는 것이다.

述曰, 第六地, 擧章云華光者, 般若正因, 照境破闇故. 次地行

中, 初總標已. 天眼明下, 別顯十通. 十通者, 一天眼通, 知微

塵數大色, 分成六道衆生身, 及一一身細分成大, 亦分分知. 二

天耳通, 言非非音非非聲者, 傳說, 幷知音聲空故. 一切法聲

者, 餘一切聲, 有說, 聞法蠡等敎也. 三天身通, 卽神境通. 知

一切色及知色之非色等性. 於一念中, 通於十方國土之量, 三

世劫量, 隨國大小, 現齊爾所時塵數身故.

 

■④천심통(天心通)이니 곧 타심지(他心智)이다. ⑤천인통(天人通)으로

다른 사람의 일을 아는 것이니 숙주지(宿住智)라고도 한다. ⑥천해탈통

(天解脫通)으로 곧 누진지(漏盡智)이니, 여러 중생의 해탈방편(解脫方便)

을 아는 것이다.

‘멸(滅)하고 멸(滅)하여 다 했다.’는 것은 열 가지 장애가 사라졌기 때문

이다.

四天心通, 卽他心智. 五天人通, 知人事故, 卽宿住智. 六天

解脫通, 卽漏盡智, 知諸衆生解脫方便故. 滅滅皆盡者, 滅十

障故.

 

■이 후 네 가지 신통은 모두 타심통의 다른 것들이니, 차례대로 다른

사람의 정(定)과 혜(慧)와 염(念)과 원(願)을 아는 것이므로 네 가지를 세

웠다. ‘정(定)이 아님’과 ‘정(定)에 들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은 위 두 마

음의 체성이 공하기 때문이다. ‘삼십심’이란 십지(十地) 이전의 마음이다.

‘일체를 구한다.’는 것은 법과 비법을 닦아 끊기를 구하는 것이다. ‘여기

서’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여기를 밝힌 것이고, ‘십통명(十通明)’은 석가모

니 부처님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다.

已後四通, 皆是他心通之差別, 如次知他定慧念願, 立爲四故.

非定非不定者, 以上二心, 體性空故. 三十心者, 地前心也. 一

切求者, 於法非法求修斷也. 言而爾所者, 但明爾所, 十通明

者, 於釋迦略說也.

 

7) 체성만족지 體性滿足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실천과 교화가 만족스러운 체성지[滿足體性

地]이다. 이 법 가운데 ‘열여덟 가지 성인의 지혜[十八聖人智品]’에 들어가

면 낮은 지위와는 함께하지 않는다. 이른바 몸에 번뇌의 허물이 없고 입에

말의 죄가 없으며 생각에는 잊어버림[失念]이 없으며, 팔법(八法, 팔풍)43)

에서 벗어나 모든 법 가운데서 평등하며[捨], 항상 삼매(三昧)에 있으므로

이 지(地)에 들어가면 육품(六品)이 구족(具足)하여 이 지(智)로부터 여섯

가지 족한 지[六足智, 欲具足·進心足·念心足·智慧足·解脫足·大明具足]를

내느니라.

43) 팔법(八法)은 팔풍(八風)이라고도 한다. 이양[利]·명예[譽]·칭찬[稱]·즐거움
    [樂]의 네 가지 순(順)하는 것과 쇠퇴[衰]·헐뜯음[毁]·비방[譏]·괴로움[苦]의
    네 가지 어기는 것[違]을 말한다.

 

①삼계(三界)의 번뇌와 습기를 끝내 받지 않으므로 욕(欲)이 구족한 것

이며, ②일체공덕과 일체법문을 구하는 것마다 만족하게 하므로 진심(進

心)이 구족한 것이다. ③일체 법의 일과 일체 겁의 일과 일체 중생의 일을

일심(一心) 가운데서 일시(一時)에 알기 때문에 염심(念心)이 구족한 것이

며, ④이 이제(二諦)의 모습이 육도(六道) 중생의 일체 법이므로 지혜가

구족한 것이며, ⑤십발취인(十發趣人)으로부터 그 밖의 모든 부처님에 이

르기까지 번뇌가 없고, 습기가 없음을 알기 때문에 해탈이 구족한 것이다.

⑥일체중생을 보되, 다른 사람이나 본래 나의 제자들이 번뇌가 없고 모든

번뇌의 습기가 없는 줄 알기 때문에 지혜롭게 다른 사람의 몸을 아는 해

탈이 구족되느니라.

이 사람이 여섯 가지 만족으로 밝은 지혜 가운데에 들어가면 문득 지

(智)를 일으켜서, 몸은 육도중생의 심행을 따르며, 입으로는 한량없는 법

문품을 설하여 일체중생들에게 보이며, 일체 중생의 심행을 따라 항상 삼

매에 들어가니 시방대지가 진동하고 허공이 꽃으로 변하여 능히 중생으

로 하여금 마음으로 행하게 하며, 대명(大明)이 구족하여 과거 일체겁 가

운데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심을 보게 하며, 또한 일체 중생심을 보고 집

착함이 없는 지혜로써 현재 시방의 모든 국토 가운데 모든 부처님과 모든

중생의 마음과 마음으로 행하는 것을 보게 하며, 신통한 도의 지혜[神通道

智]로써 미래의 일체 겁 동안에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고 일체중생

들이 이 부처님들을 따라 도를 받고 법을 듣는 것을 보게 하느니라.

若佛子! 菩提薩埵滿足體性地. 入是法中, 十八聖人智品, 下

地所不共. 所謂身 無漏過, 口無語罪, 念無失念, 離八法, 一切

法中捨, 常在三昧, 是入地六品具足, 復從是智生六足智. 三界

結習畢竟不受故, 欲具足, 一切功德, 一切法門, 所求滿 故, 進

心足. 一切法事, 一切劫事, 一切衆生事, 以一心中一時知故,

念心足. 是 二諦相, 六道衆生一切法故, 智慧足, 知十發趣人,

乃至一切佛, 無結無習故, 解 脫足. 見一切衆生, 知他人自我

弟子, 無漏無諸煩習故, 以智知他身, 解脫足. 是 人入六滿足

明智中, 便起智, 身隨六道衆生心行, 口辯說無量法門品, 示一

切衆生 故, 隨一切衆生心行, 常入三昧, 而十方大地動, 虛空

化華故, 能令衆生心行, 以 大明具足, 見過去一切劫中佛出世,

亦是示一切衆生心, 以無着智, 見現在十方一 切國土中, 一切

佛一切衆生心心所行, 以神通道智, 見未來中一切劫, 一切佛

出世, 一切衆生從是佛, 受道聽法故.

 

■제칠지(第七地) 가운데 문장을 시작하는 곳에 ‘만족(滿足)’이라 한 것

은 공용이 만족하기 때문이다. 지행(地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실천행[實

行]과 교화하는 상[化相]이니 이 부분은 첫째이다.

‘열여덟 가지 성인의 지혜[十八聖人智]’라고 하는 것은 분(分)을 따라 십

팔불공법(十八不共法)을 얻기 때문이다. 옛날에 지은 소(疏)에서는 ①“여

섯 가지 가운데 ‘몸에 번뇌의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은 살도음업(殺盜婬

業)의 습기를 떠났기 때문이며 ②‘입에 말의 죄(語罪)가 없다.’는 것은 망

어 등 네 가지 죄가 되는 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며, ③‘생각에서 잊어버

림이 없다.’는 것은 탐욕에서 벗어나고 성냄과 사견에서 벗어났기 때문이

다.”라고 자세하게 말하고 있으나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십악은 앞의 제

이지(第二地, 菩提薩埵善慧體性地)에서 이미 영원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지금 해석하기를 ‘몸에 번뇌의 허물이 없다’는 것은 몸에 잘못과 실수

가 없다는 것이며 ‘입에 말의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갑작스럽거나 난폭

한 소리가 없다는 것이며 ‘생각에 실념(失念)이 없다.’는 것은 잊어버린

[忘失]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팔법(八法, 팔풍)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가

리거나 버리지 않음이 없는 것으로 아라한은 세간의 팔법(八法)에 집착

함으로 인하여 오로지 자기의 이익만 구하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

을 버리나, 보살은 팔법성[八法性]에서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모든 법 가

운데서 평등하다.’는 것은 가지가지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생사와 열반

에 차별상이 없는 연유로 제일의 큰 평등[第一大捨]에 머무르기 때문이다.

‘항상 삼매에 있다.’는 것은 정심(定心)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이 여섯 가

지로 칠지(七地, 菩提薩埵滿足體性地)에 들어가 만족하게 된다.

두 번째의 여섯 가지는 ①욕(欲)의 구족(具足)이니 삼계의 번뇌를 두

려워하지 않고 능히 소지장(所知障)44)의 청정을 구할 만하기 때문에 ‘구

족’이라 하나 지금은 모자람이 없다[無減]는 말을 쓴다. ②정진의 구족이

니 구하는 것을 능히 만족하게 하기 때문이다. ③념(念)의 구족이니 모든

법과 겁과 사람의 일을 오래도록 기억하기 때문이다. ④혜(慧)의 구족이

니 ‘중생’이란 세제(世諦)이고 일체법(一切法)이란 제일의제(第一義諦)이

다. 사중(四重) 가운데서 우선 첫 번째만 들었다. ⑤해탈구족이니 모든 해

탈을 얻지 못한 줄 알면 물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⑥다른 사람의 해탈을

아는 구족이니 곧 정(定)에서 물러나지 않는 것이다. 반드시 선정의 힘[定

力]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마음이 물듦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44) 소지장(所知障, jñeya-āvarana)이란 알아야 할 것에 대하여 방해하는 것을 말한
    다. 일체의 소지(所知)에 대해서 지혜의 활동을 방해하는 불염오(不染汚)의 무
    지(無知)를 말한다. 이것을 제멸 했을 때 일체의 지자(智者)가 되는 것이요, 또는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소지장(所知障)이란 변계소집인 실체의 법으로
    집착하는 아견(我見)을 첫 번째로 하는 악견(惡見)·의심·무명·탐애·성냄·교
    만 등이다. 인식의 대상과 뒤바뀜이 없는 성품을 덮어서 능히 깨달음을 장애하
    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성유식론(成唯識論)』권9 (大31 p.48c9-11) “所知障
    者, 謂執遍計所執實法, 薩迦耶見而爲上首, 見疑無明愛恚慢等. 覆所知境無顚倒
    性, 能障菩提, 名所知障.”

 

이 사람은 이 속에서 여섯 가지 구족에 들어가 다시 다음의 만족분인 여

섯 가지를 일으키려고 할 때 문득 지혜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①몸이

육도의 심행을 따라 나타난다. ②입으로 법을 설하여 중생들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③중생의 마음을 따라 정(定)에 들어가면 진동하니, ‘허공(虛空)

이 꽃으로 변한다.’는 것은 ‘꽃비가 내려 능히 중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 세 가지는 차례와 같이 삼업(三業)이 지혜를 따라 행

(行)하여지기 때문이다. ④대명지(大明智)가 구족하니 옛 부처님을 친견

하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심안(心眼)으로 볼 수 있게 한다. ⑤무착지(無

著智)로써 현재의 부처 등을 보는 것이다. ⑥신통지(神通智)로써 미래의

부처 등을 보는 것이다. 이 가운데 ‘대명(大明)’, ‘무착(無著)’, ‘신통(神通)’

이란 삼세를 통달한 지혜로서 이름이 다를 따름이다.

述曰, 第七地中, 擧章云滿足者, 功用滿故. 地行有二, 實行故

化相故, 此初也. 言十八聖人智者, 以隨分得十八不共法故. 古

有作疏云, “初六中身無漏過者, 離殺盜婬業及習故, 二口無

語罪者, 離妄語等四罪語故, 三念無失念者, 離貪離瞋及邪見

故.” 乃至廣說, 非也. 如此十惡, 前第二地, 已永離故. 今解身

無漏過者, 身無誤失也, 口無語罪者, 無卒暴音也, 念無失念

者, 無忘失念也. 離八法者, 無不擇捨, 羅漢由執世間八法, 專

求自利, 捨利他事, 菩薩遠離八法性故, 一切法中捨者, 無種

種想也. 於生死涅槃, 無差別想由, 住第一大捨故. 常在三昧

者, 無不定心也. 此六入地之所滿足. 第二六者, 一欲具足, 於

三界結無所怖畏, 堪求所知障淸淨故, 言具足者, 今云無減也.

二精進具足, 所求能滿故. 三念具足, 遠憶諸法劫人事故. 四慧

具足, 衆生者世諦也, 一切法者, 第一義諦也. 四重之中, 且擧

初故. 五解脫具足, 知諸解脫未得, 不退故. 六知他解脫足, 卽

定不退也. 必由定力, 知弟子心亦無染故. 是人入此中六足中,

更欲起後滿分六故, 便起智也. 一身隨六道心行而現. 二口辨

說法示衆生故. 三隨衆生心, 入定振動, 言虛空化華者, 以雨華

故, 能令衆生心有所行. 上三如次三業隨智行也. 四以大明具

足, 見過去佛, 亦令衆生心眼得見. 五以無著智見現在佛等. 六

以神通智見未來佛等. 此中大明無著神通者, 達三世智, 名之

差別也.

 

□이 열여덟 가지 성인의 지혜 가운데에 머무르며 심심삼매(心心三昧)

로 ‘삼계의 미진(微塵)과 같은 색(色)이 바로 나의 옛 몸이요, 일체중생이

나의 부모’라고 관한다. 지금 이 지(地) 가운데 들어가서 온갖 공덕과 온

갖 신광(神光)과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법과 팔지(八地)와 구지(九地)

가운데 일체 법문품(一切法門品)에 이르기까지 내가 이미 다 들어갔기 때

문이다.

일체 불국토에서 부처가 되어 성도하여 법륜 굴리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고, 멸도에 드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며 타방의 과거·미래·현재의 모

든 국토에서 교화하느니라.

住是十八聖人中, 心心三昧, 觀三界微塵等色, 是我故身, 一切

衆生, 是我父 母. 而今入是地中, 一切功德, 一切神光, 一切佛

所行法, 乃至八地九地中, 一切 法門品, 我皆已入故. 於一切

佛國土中 示現作佛成道, 轉法輪, 示入滅度, 轉化他 方過去來

今一切國土中.

 

■둘째, 교화하는 상[化相] 가운데 처음에는 평등한 자비문을 관하고[觀

平等慈悲門], 다음은 자기의 힘과 능력을 헤아리며, 나중에는 변화를 나타

내는 것이다. 능력[力能] 가운데 ‘온갖 공덕’이란 복품(福品)이고 ‘온갖 신

광(神光)’이란 지품(智品)이다. ‘모든 부처님이 행하시는 법’이라는 등은

증과(證果) 법문이며, 승진(勝進) 법문 가운데 이미 들어갔으므로 아는 것

이다.

述曰, 第二化相中, 先觀平等慈悲門, 次量自力能, 後現變化.

力能之中, 一切功德者, 福品也, 一切神光者, 智品也. 一切佛

所行法等者, 證果法門, 及勝進法門中已入解也.

 

8) 체성불후지 體性佛吼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법왕 위 삼매에 들어간 사자후체성지[佛吼

體性地]이니, 법왕위삼매(法王位三昧)에 들어가면 그 지혜가 부처님의 불

후삼매(佛吼三昧)와 같기 때문에 열 가지 크게 밝은 선정의 문이 항상 앞

에 나타나며 화광음(華光音)으로 심삼매(心三昧)에 들어간다.

若佛子! 菩提薩埵佛吼體性地, 入法王位三昧, 其智如佛, 佛

吼三昧故, 十品大明定門, 常現在前, 華光音入心三昧.

 

■제8지 가운데 오종행이 있다. 여기는 첫째 정행(定行)이니, 처음에는 

공용이 없으므로 ‘법왕위삼매(法王位三昧)에 들어간다.’고 하니 그 지혜는

과(果)와 유사하게 법을 설하는 정(定)이기 때문이다. 비록 설한 것이 있

다고 하여도 무상(無相)과 무공용(無功用)45)에 머무르기 때문에 ‘불(佛)과

같다.’고 한다. 다음의 내공(內空) 등은 열 가지 크게 밝은 지혜에 들어가

는 선정의 문이니 마음대로 흐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과를 얻

고 어둠을 제거하는 가르침의 음성으로 보살심정(菩薩心定)에 들어가게

한다. 꽃은 능히 열매를 맺고 빛은 어둠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45) 무공용(無功用, anābhoga); 공용(功用)이란 신(身) 구(口) 의(意)로 의식적인 조
    작이나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을 말한다. 무공용(無功用)은 이러한 조작을 하려는 마음과 의도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살의 십지(十地) 중 제8 부동지(不動地)에 오른 보살은 수행력과 본
    원력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수행이 이루어지고
    저절로 이타행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의 제8지 이상을 무공용지라고 부른
    다. 또한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부처님께서 어떤 의도나 분별을 일
    으키지 않고 자연히 이루어지는데 역시 무공용의 한 예이다. 무공용은 마음의
    평정[捨]을 이룸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한다.

 

述曰, 第八地中, 有五種行. 此初定行, 初無功用名, 入法王位

三昧也, 其智似果, 說法定故. 雖有所說, 而於無相無功用住,

故言似佛. 下內空等, 十大明慧所入定門, 任運流故. 諸佛得

果, 除闇敎音, 入菩薩心定也. 華能得果, 光除闇義.

 

□그 공혜(空慧)란 내공혜문(內空慧門)과 외공혜문(外空慧門)과 유위공

혜문(有爲空慧門)과 무위공혜문(無爲空慧門)과 성공혜문(性空慧門)과 무

시공혜문(無始空慧門)과 제일의공혜문(第一義空慧門)과 공공혜문(空空慧

門)과 공공부공혜문(空空復空慧門)과 공공부공공혜문(空空復空空慧門)이

다. 이러한 열 가지 공문(空門)은 낮은 지(地)에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니,

허공과 같이 평등한 경지[虛空平等地]이므로 가히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느니라.

其空慧者, 謂內空慧門, 外空慧門, 有爲空慧門, 無爲空慧門,

性空慧門, 無始空慧門, 第一義空慧門, 空空慧門, 空空復空慧

門, 空空復空空慧門, 如是十空門, 下地所不知, 虛空平等地,

不可說不可說.

 

■둘째 혜행(慧行)이니, 내공(內空)46) 등이라 한 것은 『변중변론(辨中邊

論)』과 『대지도론(大智度論)』47)에서 자세하게 논한 것과 같다. 제십지(第

十地) 중에서 제구지(第九地)는 없다. 열 가지 공성의 평등지를 전체적으

로 결론지었는데, 열 가지 문으로 임시 설하였으니 집착할 것이 아니며 또

한 가히 설할 것도 아니다.

46) 내공(內空, adhyātma-śūnyatā, ajjhatta-suñña)은 십팔공(十八空)의 하나이다. 단
    십팔공(十八空)은 경전에 따라 십공(十空)·십일공(十一空)·십삼공(十三空)·십
    육공(十六空)·이십공(二十空) 등 숫자가 다양하지만, 집착을 낳는 일을 총괄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그 의미가 같다. 내공(內空)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이 공
    한 것을 말한다. 『대지도론(大智度論)』 권31(大25 p.285b11-13)에서는 “내공(內
    空)이란 내법(內法)이 공(空)하다는 것이다. 내법(內法)이란 육입(六入)으로 안
    (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등을 말한다. 안(眼)이 공(空)하여
    아(我)도 없고 아소(我所)도 없으며 안법(眼法)도 없다. 이(耳)·비(鼻)·설(舌)·
    신(身)·의(意) 등도 이와 같다. 內空者, 內法空. 內法者, 所謂內六入, 眼耳鼻舌身
    意. 眼空, 無我無我所, 無眼法. 耳鼻舌身意, 亦如是.”라고 한다.
47) 『변중변론(辨中邊論)』 상권 「변상품(辯相品)」 1(大31 p.465c28)에서는 공성(空
    性)의 차별을 열여섯 가지로 분석하면서 “論曰, 空性差別, 略有二種, 一雜染, 二
    淸淨. 此成染淨, 由分位別, 謂有垢位, 說爲雜染, 出離垢時,說爲淸淨. 雖先雜染,
    後成淸淨, 而非轉變成無常失, 如水界等, 出離客塵. 空淨亦然, 非性轉變. 此空差
    別, 復有十六, 謂內空, 外空, 內外空, 大空空空, 勝義空, 有爲空, 無爲空, 畢竟空,
    無際空, 無散空, 本性空, 相空, 一切法空, 無性空, 無性自性空. 此等略義, 云何應
    知.” 하였고 『대지도론』 30권 『석초품중십팔공의(釋初品中十八空義)』 48(大25
    p.285b11)에서는 『대반야경』을 인용하여 공성(空性)을 해설하면서 “內空者內法,
    內法空. 內法者, 所謂內六入, 眼耳鼻舌身意. 眼空無我無我所無眼法, 耳鼻舌身意
    亦如是. 外空者外法, 外法空. 外法者, 所謂外六入, 色聲香味觸法. 色空者無我無
    我所無色法, 聲香味觸法亦如是. 內外空者內外法, 內外法空. 內外法者, 所謂內外
    十二入, 十二入中無我無我所, 無內外法.”이라고 한다. 

 

述曰, 第二慧行, 謂內空等, 如辨中邊智論廣說. 於此第十, 泯

第九也. 總結十空性平等地, 可以十門假說, 而不著故, 亦不

可說.

 

□신통도지는 한 생각의 지혜로써 일체법이 나누어져 낱낱이 다른 줄

알아서 한량없는 불토 가운데 들어가 낱낱의 부처님 앞에서 법을 묻고 받

는 것이다.

법을 굴려 모든 중생들을 건지고, 법의 약[法藥]을 일체중생들에게 베

풀어 주며, 대법사와 대도사(大導師)가 되어서 사마(四魔)를 물리친다. 법

신이 구족하므로 변화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며 이 모든 부처님의

수(數)와 구지(九地)와 십지(十地)의 수(數) 속에서 법신을 기르는 것이다.

백천다라니문과 백천삼매문과 백천금강문과 백천신통문과 백천해탈문

으로 이와 같이 백천의 허공평등문(虛空平等門) 속에서 크게 자재하여 일

념으로 일시에 수행하느니라.

神通道智, 以一念智, 知一切法分分別異, 而入無量佛國土中,

一一佛前諮受法. 轉法度與一切衆生, 而以法藥施一切衆生,

爲大法師爲大導師, 破壞四魔. 法身具足, 化化入佛界, 是諸佛

數, 是諸九地十地數中, 長養法身. 百千陀羅尼門,百千三昧門,

百千金剛門, 百千神通門, 百千解脫門, 如是百千虛空平等門

中, 而 大自在, 一念一時行.

 

■셋째 신통행[通行]이니, 신통지(神通智)로 모든 일을 두루 알아 한량

없는 국토에 들어가 신통으로 경계를 비추는데 눈으로 색을 보는 것과 같

다. 그 밖에 진실지48)로 현상[事]에 통달하고 이치에도 통달하여 수행과

깨달음이 깊고 미세해져서 뜻대로 아는 것이다.

48) 진실지(眞實智)는 근본지(根本智)와 마찬가지로 무분별지(無分別智)의 이명(異
    名)이다.

 

‘법을 굴려 모든 중생들을 건져 준다.’는 것은 자기가 이해한 것을 중생

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보살이 법신으로 여러 변화를 나타내 보여주

어 과(果)가 비슷하므로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것이 ‘모든 부처님의 수(數)’이니 하물며 ‘구지(九地)와 십지(十地)의 수’

이겠는가! ‘평등문’이란 다라니문 등이니 행하는 바 진여문에서 ‘크게 자

재(自在)하여 일념으로 일시에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述曰, 第三通行, 謂神通智徧知諸事, 入無量土, 神通照境, 如

眼見色. 餘眞實智, 達事達理, 行解深細, 如意識了. 轉法度與

一切衆生者, 以己之解, 授與衆生也. 菩薩法身示現諸化, 與果

相似, 言入佛界49). 是諸佛數, 况是九地十地數也! 平等門者,

陀羅尼門等, 所行眞如門中, 而大自在, 一念一時而修行也.

49) 卍60 p.404a3과 大40 p.698b19와 藥師寺藏本에는 ‘果’로 되어 있으나 韓3 p.439
    b15에는 ‘界’로 되어 있다.

 

□겁(劫)을 겁이 아니라고 말하고, 겁이 아닌 것을 겁이라고 말하며, 도

(道) 아닌 것을 도라고 말하며, 도를 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육도중생이 아

닌 것을 육도중생이라고 말하며, 육도중생을 육도중생이 아니라고 말한다.

부처가 아닌 것을 부처라고 말하며, 부처를 부처가 아니라고 말하느니라.

劫說非劫, 非劫說劫, 非道說道, 道說非道. 非六道衆生說六道

衆生, 六道衆生說非六道衆生, 非佛說佛, 佛說非佛.

 

■넷째는 설하는 행[說行]이다. 겁이 공하므로 겁이 아니다. 그러나 완

전하게 없는 것도 아니어서 ‘겁 아닌 것을 겁이라고 말한다.’고 하였다. 나

머지도 모두 이것에 준한다.

述曰, 第四說行. 劫空非劫. 然不都無, 非劫說劫. 餘皆準此.

 

□모든 부처님의 체성삼매 가운데 출입하며 돌이켜 비추어 보되, 수순

하여 비추기도 하고, 거슬러서 비추기도 하며, 앞에서 비추기도 하고, 뒤

에서 비추기도 하며, 원인으로 비추기도 하며, 결과로 비추기도 하고, 공

으로 비추기도 하며, 유(有)로 비추기도 하고, 제일중도의제로 비추기도

하나니, 이 지(智)는 다만 팔지(八地)에서만 증득하는 것이요. 낮은 지(地)

들은 미치지 못하며, 움직이지 않고, 이르지 않으며, 벗어나지 않고, 들어

가지 않으며, 생겨나지 않고, 없어지지도 않느니라.

이 지(地)의 법문품은 한량없고 한량없어 가히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

다. 지금 간략하게 팔지(八地) 가운데 백천 분의 한 터럭만큼의 일만 설명

하였으니 「아라한품(阿羅漢品)」에서 이미 밝혔느니라.

而入出諸佛體性三昧中反照, 順照逆照, 前照後照, 因照果照,

空照有照, 第一中道義諦照, 是智唯八地所證. 下地所不及, 不

動不到, 不出不入, 不生不滅. 是地法門品, 無量無量, 不可說

不可說. 今以略開地中, 百千分一毛頭許事, 羅漢品中已明.

 

■다섯째는 비추는 행[照行]이니 ‘모든 부처님의 체성삼매’란 전해오기

를 ‘과덕이 상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돌이켜 비춘다[反照]’고 하는

것은 돌이켜 자신을 비추기 때문이며 ‘순역’이란 순과 역으로 연기를 관하

는 것과 같다. 나머지도 모두 경계를 따른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

것 아래는 지행력(智行力)을 밝힌 것으로 공용에서 벗어났으므로 ‘움직이

지 않는다’고 하였다. 길이 물듦[染汚]을 조복 받았으므로 ‘이르지 않는다’

고 하였고, 항상 생공(生空)을 증득하므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법공(法空)이 이어지지 않으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였고 영원히 다

시 분단생사(分段生死)50)를 받지 않으므로 ‘불생불멸’이라고 하였다. 문장

의 결론은 가히 알 수 있을 것이다.

50) 분단생사(分段生死)는 육도윤회(六道輪廻)하는 범부들의 생사로 분단생사(分
    斷生死)라고도 한다. 유루(有漏)의 선악업(善惡業)을 인(因)으로 하고 번뇌장(煩
    惱障)을 연(緣)으로 하여 삼계 내에서 거친 과보를 받는데 그 과보는 수명의 장
    단(長短)과 신체의 대소(大小) 등 일정한 한계를 갖기 때문에 분단(分段)이라고
    한다. 이러한 분단신(分段身)을 받아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한
    다. 변역생사(變易生死)와 함께 이종생사(二種生死)로 불린다. 『대승의장(大乘
    義章)』 권8(大44 p.615c3)에 의하면 “두 가지 생사(生死)는 『승만경(勝鬘經)』에서
    나온 말인데 하나는 분단생사(分段生死)라 하고 다른 하나는 변역생사(變易生
    死)라 한다. 분단생사(分段生死)란 육도(六道)의 과보(果報)가 삼세(三世)로 나
    뉘어 다르게 되는 것을 분단(分段)이라 하며 분단(分段)의 존재가 처음 일어나
    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마지막 흩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 二種生死, 出勝
    鬘經. 名字是何. 一分段生死, 二變易生死. 言分段者, 六道果報, 三世分異, 名爲分
    段. 分段之法, 始起名生, 終謝稱死.”라고 하였다.

 

述曰, 第五照行, 諸佛體性三昧者, 傳說, 果德相應故. 反照者

還照自故, 言順逆者, 如順逆觀緣起. 餘皆隨境. 不動已下, 明

智行力, 離功用故言不動, 永伏染故言不倒51), 恒證生空言不

出, 法空不續言不入, 永不復受分段生死故, 言不生不滅也. 結

文可解.

51) 韓3 p.439c3. 경문(經文)에는 ‘이르를 도(到)’자로 나왔으나 기문(記文)(韓3 p.439
    c11.)에는 ‘전도될 도(倒)’자로 나와 있다. 기문의 오자를 감안하여 경문을 따라
    번역하였으나 문장의 의미상 ‘倒’자를 재고해 볼 여지가 있다.

 

9) 체성화엄지 體性華嚴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사무애(四無碍)의 꽃으로 장엄한 체성지[佛

華嚴體性地]는 부처님의 위의로 여래삼매자재왕왕정(如來三昧自在王王

定)에 무시(無時)로 출입하나니라.

若佛子! 菩提薩埵佛華嚴體性地, 以佛威儀, 如來三昧自在王

王定, 出入無時.

 

■제구지(第九地) 가운데 ‘불화엄(佛華嚴)’이란 네 가지 걸림 없는 장엄

행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구지(九地)의 행에 두 가지가 있으니 안으로 증

득하는 것[內證]과 밖으로 교화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처음이다. ‘부처님

의 위의’를 나타내는 정(定)과 설법자재왕정(說法自在王定)이 항상 현전

하기 때문에 다시 출입함에 특별한 때가 없다.

述曰, 第九地中, 言佛華嚴者, 具四無礙莊嚴行故. 地行有二,

內證故, 外化故. 此初也. 現佛威儀定, 及說法自在王定, 恒現

前故, 更無出入別時也.

 

□시방의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백억의 일월(日月)과 백억의 사천하에

서 일시에 성불하여 법륜을 굴리며 멸도에 이르기 까지 모든 불사(佛事)

를 일심 가운데, 일시에 일체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인다.

일체색신의 팔십종호와 삼십이상이 자재하여, 허공을 즐기는 것[樂虛

空]과 같아서 한량없는 대비 광명으로 상호를 장엄한다.

하늘도 아니며 사람도 아니며 육도도 아니어서 온갖 법 밖에 있으나, 항

상 육도(六道)에서 행하며, 한량없는 몸과 한량없는 입과 한량없는 뜻을

나타내어 한량없는 법문을 설한다. 능히 마구니의 세계를 굴려 부처님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마구니의 세계에 들어가게 하며,

또 온갖 지견을 굴려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가게 하고, 부처님의 지견으로

온갖 지견에 들어가게 하며, 부처님의 성품을 중생의 성품에 들어가게 하

고 중생의 성품을 부처님의 성품에 들어가게 하기도 한다.

그 지(地)의 광명은 밝게 비추며 슬기롭게 비추며 불꽃처럼 밝아서 열

가지 무외[無畏]와 사무량심[無量]과 십력(十力)과 십팔불공법(十八不共

法)으로 해탈열반(解脫涅槃)하여 함이 없는 하나의 도[無爲一道]가 청정

하게 된다.

모든 중생들을 부모와 형제를 삼아 그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기를 모든

겁이 다하도록 하여 도과(道果)를 얻게 하고 또 일체국토에 나투어 일체

중생이 서로 보기를 부모처럼 여기며, 천마외도가 서로 보기를 부모처럼

여기게 하느니라.

이 지(地) 가운데 머무르며 생사의 끝[際]에서 일어나 금강에 이르기까

지 한 생각 가운데 이와 같은 일들을 나타내어 능히 한량없는 중생계에

변화하여 들어간다. 이와 같은 것이 한량 없으나 간략하게 설하였나니 바

다의 물 한방울[渧]과 같을 뿐이니라.

於十方三千世界52), 百億日月, 百億四天下, 一時成佛轉法輪,

乃至滅度, 一切 佛事, 以一心中一時, 示現一切衆生. 一切色

身, 八十種好三十二相, 自在樂虛空 同, 無量大悲光明, 相好53)

莊嚴. 非天非人非六道, 一切法外, 而常行六道, 現無 量身, 無

量口, 無量意, 說無量法門. 而能轉魔界入佛界, 佛界入魔界,

復轉一切 見入佛見, 佛見入一切見, 佛性入衆生性, 衆生性入

佛性. 其地光光光照, 慧慧照, 明燄明燄, 無畏無量, 十力十八

不共法, 解脫涅槃, 無爲一道淸淨. 而以一切衆生, 作父母兄

弟, 爲其說法, 盡一切劫得道果, 又現一切國土, 爲一切衆生相

視如父如 母, 天魔外道相視如父母. 住是地中, 從生死際起,

至金剛際, 以一念心中, 現如 是事, 而能轉入無量衆生界. 如

是無量略說, 如海一渧.

52) 卍60 p.404b16에는 ‘十世界中’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39c21에는 ‘三千世界’로
    되어 있다.
53) 卍60 p.405a4에는 ‘相’으로 되어 있으나 韓3 p.440a4에는 ‘好’로 되어 있다.

 

■둘째는 밖으로 교화하는 것[外化]이다. ‘십세계’란 시방의 대천세계

이다. 나타낸 몸이 특별히 상호를 구족하여 자재하게 걸림이 없으므로 허

공과 같다는 것이다. ‘한량없는 대비와 지혜광명’은 복상(福相)과 지상(智

相)으로 법신을 장엄하는 것이다.

‘온갖 법 이외 등’이라고 말하는 것은 육취에 나는 법[趣生法]은 아니나

육취에 나는 일을 행하는 것이다. ‘마구니의 세계 등을 굴려 부처님의 세

계에 들어간다.’고 한 것 등은 성품이 평등하기 때문에 걸림이 없음을 설

한 것이다. ‘밝게 비춘다’는 것은 이공(二空)이기 때문이고 ‘슬기롭게 비춘

다’는 것은 그 후득지[後智]이기 때문이며, ‘불꽃같이 밝다[明燄]’는 것은

무간해탈(無間解脫)이기 때문이다. ‘십무외[十無畏]와 사무량[四無量]과

십력(十力)과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과 팔해탈(八解脫)’ 등을 갖춘 것은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두 극단에도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함이 없는 하

나의 도’는 소지장(所知障)이 깨끗한 것이다.

‘모든 중생들로써 부모를 삼는’ 등은 법 설하기를 겁이 다하도록 하여

도과를 얻게 하는 것이다. ‘생사의 끝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초발심으로

부터 금강심에 이르기까지 있는 바 원행(願行)을 한 마음 속에 나타내어

중생계에 들어가서 교화하는 것이다.

述曰, 第二外化. 十世界者, 十方大千故. 所現身別, 相好具足, 

自在無礙, 與虛空同. 無量大悲智慧光明, 福相智相, 莊嚴法

身. 言一切法外等者, 非趣生法而行趣生. 轉魔界等入佛界等,

性平等故, 說無礙也. 光光照者, 二空故, 慧慧者, 彼後智故,

明焰明焰者, 無間解脫故. 備四無畏, 四無量十力, 十八不共

法, 八解脫等, 無住涅槃, 不住二邊. 無爲一道, 所知障淨. 爲

諸衆生作父母等, 說法窮劫, 令得道果. 從生死際起者, 從初發

心至金剛心, 所有願行, 於一心現, 入衆生界而敎化也.

 

10) 체성입불계지 體性入佛界地

□불자들이여! 보리살타의 불과에 들어가는 체성지[佛界體性地]에 들

면 그 대혜공(大慧空)으로 공이 다시 공하여 공한 것까지 다시 공하므로

허공과 같다. 성품의 평등한 지혜는 여래성이 있어서 열 가지 공덕품(功德

品, 如來十號)을 구족하느니라.

공하여 동일한 모양이며 체성이 함이 없고[無爲] 신령스럽게 텅 비어

바탕이 하나이며, 법과 법성이 같기 때문에 여래라고 하느니라. 마땅히 사

제(四諦)와 이제(二諦)를 따라 생사윤회의 끝이 다하고, 법으로 법신을 장

양함이 둘이 아니니 이것을 응공이라고 한다. 두루 모든 세계의 모든 일을

덮어주고 바른 지혜[正智]와 성스러운 해탈지로써 일체법의 유무와 일체

중생의 근기를 알기 때문에 이것을 정변지(正遍知)라고 하느니라.

밝고 분명하게[明明] 불과[佛果]를 수행할 때 만족스럽기 때문에 이것

을 명행족(明行足)이라 한다. 삼세 부처님들의 법에 잘 나아가니 법이 과

거 부처님들과 같으며, 부처님께서 돌아가심[去佛]에 돌아가실 때에도 선

(善)하고 선하며, 오실 때[來時]도 선(善)하고 선하므로 이것을 선서(善逝)

라고 한다. 이 사람은 뛰어난 덕을 행하여 세간 가운데 들어가 중생을 교

화함에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결박에서 해탈하게 하므로 세간해탈이라고

한다. 이 사람은 모든 법이 으뜸이며 부처님의 위신(威神)에 들어가 몸가

짐과 모습이 부처님과 같아 대사(大士)의 행처(行處)로 세간을 해탈하게

하나니 무상사(無上士)라고도 하느니라.

모든 중생들을 잘 조복하여 길들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장부라고 하며,

천인(天人) 가운데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법의 말씀을 묻거나 가르침을

받게 하므로 천인사(天人師)라고 한다. 묘한 근본이 둘이 없고 그윽하게

불성을 깨달아 항상 크고 원만하여 일체중생이 예배하고 공경하므로 불

세존(佛世尊)이라고도 하나니, 온갖 세상 사람들이 물어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에 이것을 불지(佛地)라고 하고, 이 지(地) 가운데 일체성인(一切聖

人)들이 들어가는 곳이므로 불계지(佛界地)라고 하느니라.

若佛子! 菩提薩埵入佛界體性地, 其大慧空, 空復空空復空,

如虛空. 性平等智, 有如來性, 十功德品具足. 空同一相, 體性

無爲, 神虛體一, 法同法性, 故名如來. 應順四諦二諦, 盡生死

輪際, 法養法身無二, 是名應供. 徧覆一切世界中一切事, 正智

聖解脫智, 知一切法有無, 一切衆生根故, 是正遍知. 明明修行

佛果時, 足故是明行足. 善逝三世佛法, 法同先佛, 去佛去時善

善, 來時善善, 是名善逝. 是人行是上德, 入世間中, 敎化衆生,

使衆生解脫一切結縛, 故名世間解脫. 是人一切法上, 入佛威

神, 儀形如佛, 大士行處, 爲世間解脫, 名無上士. 調順一切衆

生, 名爲丈夫, 於天人中, 敎化一切衆生, 諮受法言故, 是天人

師. 妙本無二, 佛性玄覺, 常常大滿, 一切衆生, 禮拜故尊敬故,

是佛世尊, 一切世人, 諮受奉敎 故, 是佛地, 是地中, 一切聖人

之所入處故, 名佛界地.

 

■제십지(第十地) 가운데 문장을 시작하는 곳에 ‘불계(佛界)에 들어간

다.’라고 한 것은 직위를 받기 때문이다. 다음 지행(地行) 가운데 두 가지

가 있으니 행공덕(行功德)과 행의 수승한 이익[行勝利]이니 이 부분은 처

음이다.

먼저 체용을 드러내어 ‘대혜공(大慧空)’이라 한다. 그러나 이공(二空)의

용(用)도 또한 다시 공하기 때문에 ‘공이 공한 것까지 다시 공하다’고 하

며, 다시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도 공(空)하므로 이미 평등한 공이기 때

문에 허공과 같다고 한다. ‘성품의 평등한 지혜’에는 과덕의 성품이 있어

십덕(十德)을 구족하니 이는 총표이다. ‘십(十)’은 여래의 십호[十號]이다.

①‘여래(如來)’이니 청정한 법계54)에 한 모양도 ‘함이 없다[無爲].’ 그 가

운데 법신이 ‘신령스럽고 텅 비어 바탕이 하나이므로’ 일체현상의 법이 끊

어져 ‘법성이 같아’ 오고 감이 없으므로 여래(如來)라고 부른다. 그러나 경

전에서는 뜻을 들어 뒤에 이름을 배치한 것이다. ②‘응공(應供)’이니 지

(智)가 마땅히 경계를 따라 끊어서 반드시 후유(後有)를 받지 않으니 ‘법

으로 법신을 장양함이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③‘정변지(正遍知)’이니 유

정과 기세간(器世間)의 일을 ‘두루 덮고’ 제법과 유정을 ‘두루 알기 때문

에’ 정각으로 아는 것을 이름 하여 정지(正知)라 하고 물들어 집착함이 없

는 것을 ‘성해탈지(聖解脫智)’라고 한다.

54) 청정법계(淸淨法界, dharma-dhātu-viśuddhi)는 법계가 청정하다는 뜻. 법계(法
    界)란 분절된 의식에 의해 왜곡되기 이전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말한다. 법계
    청정이란 이러한 세계의 청정성을 형용한 말이다. 『유가사지론』 권73(大30
    p.701c4-9)에 의하면 “어떤 것을 법계청정(法界淸淨)이라 하는가? 바른 지혜를
    닦아서 모든 상(相)을 여의고 진여를 증득한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
    이 잠에서 꿈을 꾸면서 스스로 그 몸이 크고 사나운 물결 속에 떠다니는 것을 보
    고 이와 같이 사나운 물에서 벗어나기 위해 크게 정진하려는 마음을 발하니, 곧
    크게 정진하려는 마음을 발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곧 깨어났다. 깨고보니 저 사
    나운 물결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상(相)을 제거하는 도리도 이와 같다. 云何名
    爲法界淸淨? 謂修正智, 故永除諸相, 證得眞如. 譬如有人, 於眠夢中, 自見其身, 爲
    大暴流之所漂溺, 爲欲越渡如是暴流, 發大精進, 卽由發起大精進故, 欻然便覺. 旣
    得覺已, 於彼暴流, 都無所見, 除相道理, 當知亦爾.”고 한다.

 

④‘명행족(明行足)’이니 인행이 더욱 밝아져 이미 원만에 이르렀기 때

문이다. ⑤선서(善逝)이니 삼세의 불법에 잘 나아가 그 이른 바[所至]의

법이 ‘과거 부처님들과 같고’ 부처가 세상을 떠날 때 다분히 (중생을) 이익

되게 함이 있어서 ‘돌아가실 때도 선(善)하고 선하다.’고 하였으며, 와서 세

간에 나타날 때도 또한 이익 되게 함이 있어 ‘올 때도 선하고 선하다’라고

한 것이니 ‘선선’이라 이름 한 것은 선서(善逝)를 결론지은 것이다. ⑥‘세

간해(世間解)’이니 보살이 수행(修行)에서 다섯 가지 덕행(德行)을 설하여

세간 가운데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여 해탈하게 하기 때문이다. ⑦‘무상사

(無上士)’이니 제행법에서 ‘위신[威神]에 들어가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뜻

과 형상과 처소’가 유사하기 때문이다.

⑧‘조어장부(調御丈夫)’이니 ‘세간을 해탈’하게 하기 위하여 중생의 억

세고 강한 번뇌를 ‘조복하여 길들이기’ 때문이다. ⑨‘천인사(天人師)’이니

그 ‘법언을 물어서 가르침을 받는’ 스승이므로 사(師)라고 말하는 것이다.

⑩불세존이니 법신(法身)이 둘이 아니고 지신(智身)이 항시 크게 원만하

기 때문에 불이라 부르며 일체가 ‘예배하며 또 존경하므로 세존’이라고 부

른다.

述曰, 第十地中, 擧章云入佛界者, 受職位故. 次地行中有二,

行功德故, 行勝利故, 此初也. 先出體用, 言大慧空. 然二空用,

亦復空故, 言空空復空, 復空所取能取, 旣平等空故, 言如虛

空. 性平等智, 有果德性, 十德具足, 此總標也. 十者十號. 一

者如來, 淸淨法界, 一相無爲. 其中法身, 神虛體一, 一切事法,

泯同法性, 無所去來, 名如來故. 然經擧義, 末後配名. 二者應

供, 智應順境, 斷應不受後有, 法身無二, 應正法養故. 三者正

徧智, 徧覆有情及器世事, 周知諸法及有情故, 正覺所知, 名爲

正知, 無所染著, 名聖解脫智. 四者明行足, 因行增明, 已到滿

故. 五者善逝, 善逝於三世佛法, 其所至法, 同於先佛, 佛去世

時, 多有所益, 言去時善善, 來現世時, 亦有所益, 言來時善善,

名善善者, 結善逝也. 六者世間解, 菩薩修行上說五種德行, 入

世間中, 敎化衆生, 令解脫故. 七者無上士, 諸行法上入威神,

似佛所行義形處故. 八者調御丈夫, 爲世間解脫, 調順衆生剛

强煩惱故. 九者天人師, 彼所諮受法言師故. 十者佛世尊, 法身

無二, 智身恒時大滿名佛, 一切禮拜及所尊敬, 名世尊故.

 

■다음은 총히 결론 지어 ‘불계지(佛界地)’라는 이름을 해석하였다. 모

든 세상 사람들이 가르침을 받는 곳이기 때문에 이 지(地)는 깨달음의 지

위[覺地]이다. 낮은 지에서 들어가도 또한 계지(界地)라고 이름 하는 것은

능히 여러 성인(聖人)들의 원만한 곳[圓滿處]이기 때문이다.

次總結釋佛界地名. 一切世人, 受敎之處, 是故此地, 是覺地

也. 下地來入, 亦名界地, 能持羣聖圓滿處故.

 

□그 때 보련화에 앉은 일체 모든 이들에게 수기를 주시니 환희하였다.

법신불께서 손으로 그 정수리를 어루만져 주시고, 지견이 같고 배움이 같

은 보살들이 이구동음으로 둘이 없음[無二]을 찬탄하였다. 또 백 천억 세

계 가운데 모든 부처님과 모든 보살들이 있어, 일시에 구름같이 모여들어

가히 말할 수 없는 법륜을 굴려 허공장화도법문(虛空藏化導法門)을 청하

였다.

이 지(地)에는 가히 말할 수 없는 기묘한 법문품과 기묘한 삼명삼매문

(三明三昧門)과 다라니문(陀羅尼門)이 있으니 낮은 지위의 범부 심식으

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부처님과 부처님의 헤아릴 수 없는 몸과

입과 마음과 뜻이라야 그 근원을 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광음천품(光音天

品)」 가운데 설한 것과 같으니 열 가지 무외[十無畏]와 불도(佛道)가 같다.

爾時坐寶蓮華上, 一切與授記歡喜. 法身手摩其頂, 同見同學

菩薩, 異口同音, 讚歎無二. 又有百千億世界中, 一切佛一切菩

薩, 一時雲集, 請轉不可說法輪, 虛空藏化導法門. 是地有不可

說奇妙法門品, 奇妙三明三昧門, 陀羅尼門, 非下地凡夫心識

所知. 惟佛佛無量身口心意, 可盡其原. 如光音天品中說, 十無

畏與佛道同.

 

■둘째는 수행이 수승해지는 이익이니 십지보살이 ‘보련화에 앉으니’

‘법신불(法身佛)께서 수기하며 이마를 어루만져 주심’을 입었고 ‘지견이

같고 배움이 같은 보살들의 찬탄’을 받은 것이다.

‘법신(法身)’이란 마치 얇은 명주로 가려진 것처럼 과보의 몸을 나타낸

것이니 안으로 덕[內德]이 이미 원만해진 것을 말한다. 다시 ‘모든 부처님

과 보살들이’ 법륜 굴리기를 청하는 것은 세간을 넉넉히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굴리는 법륜이다. 허공장(虛空藏)이라고 이름하는 것은 두루 포용

하여 받아들이고 이끌어 교화하는 문[周徧容受化導門]이기 때문이다.

述曰, 第二行勝利, 十地菩薩, 坐蓮華上, 蒙法身佛授記摩頂,

及蒙同見同學讚歎. 言法身者, 如隔輕縠見報身故, 內德已滿.

更得一切佛菩薩, 請轉法輪, 饒益世間, 所轉法輪. 名虛空藏,

周徧容受, 化導門故.

 

 

梵網經古迹記 卷第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