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스리랑카 비구니 승가 소멸에 대한 고찰

실론섬 2021. 11. 10. 06:20

佛敎學報 第86輯

스리랑카 비구니 승가 소멸에 대한 고찰

* 이 논문은 2017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7S1A6A3A02079749). 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NRF-2017S1A6A3A02079749).

김한상/한국외국어대학교 HK연구교수

 

I. 들어가는 말
II. 테라와다 불교의 남성중심주의적 성향
III. 힌두교의 반여성주의와 남존여비사상
IV. 아란냐까 전통의 대두
V. 나가는 말

 

<한글요약>
이 논문에서 필자는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의 소멸에 대해 탐구한다. 비구니 승가는 거
의 1200년 동안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에서 번영하였다. 하지만 993년 아누라다푸라
가 쫄라(Cōḷa) 침략자들의 손에 넘어가고 아누라다푸라 왕국이 쫄라 제국에 합병되면서 비
구니 승가도 사라지게 되었다. 비구 승가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였지만, 위자야바후 1세
(Vijayabāhu I)가 쫄라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나서 복원되었다. 불행하게도 위자야바후 1세
와 (빠락끄라마바후 1세를 포함한) 그의 후임 왕들은 비구니 승가 복원을 위한 어떠한 조치
도 취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얀마 비문들이 13세기까지 미얀마에 비구니 승가가 존속했음을
입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싱할리즈 왕들과 비구들이 사라진 비구니 승가의 복원
에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복합적이지만 대체로 세 가지로 유추해볼 수 있다. 한 가지 이유는
여성의 종교적 실천에 대한 애매모호하고 상충하는 모델을 제시하고 여성의 종속성과 하열
한 업을 가리키는 간접적 힌트들이 존재하는 빨리 성전에서 찾을 수가 있다. 또 한 가지 이유
는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기에 증대된 힌두교의 반여성주의와 남존여비사상이다. 세
번째 이유는 아란냐까(araññaka) 전통의 대두이다. 이러한 이유들에서 싱할리즈 왕들은 어
려운 시기에 제한된 자원들로부터 더 많은 공덕(puñña)을 얻고자 비구 승가를 지원하는 쪽
을 선택했던 것 같으며, 비구 승가도 비구니 승가의 존속을 바라지 않았고 싱할리즈 왕들에
게 비구니 승가의 복원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권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I. 들어가는 말


스리랑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전통을 지닌 나라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의
데와남삐야띳사(Devānampiyatissa, r. BC. 250-210)의 통치기에 마힌다(Mahinda)에 의해서
처음 불교가 도입되고 현지인들의 출가가 뒤따르면서 비구 승가는 스리랑카에서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이 때 데와남삐야띳사 왕의 왕비 아눌라(Anulā)와 그녀의 시종들이 마힌
다에게 출가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마힌다는 비구니들을 대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출가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마힌다는 인도에 있던 자신의 여동생인 상가밋따(Saṅghamittā)
를 불러들여 이들에게 구족계를 주도록 하였다. 이로써 스리랑카는 세계에서 최초로 인도
아대륙 밖에서 비구니 승가가 설립된 나라가 되었다.


서기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초반에 무명의 비구니들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추정되는1)
「디빠왐사(Dīpavaṃsa)」는 위대한 스승들이자 학자로서 명망이 높아서 왕들의 존경을 받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아라한 비구니들을 언급하고 있다.2) 서기 6세기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
되는 「마하왐사(Mahāvaṃsa)」는 기원전 1세기에 왕실이 6만 명의 비구들과 3만 명의 비구
니들에 거행한 보시를 언급하고 있다.3) 이와 같은 비구니 승가의 번영은 10세까지 계속된 것
으로 보인다. 스리랑카 사료에 나타나는 비구니 승가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아누라다푸라
시대가 끝나갈 무렵에 마힌다 4세(Mahinda IV, r. 956-972)가 비구니들에게 정사(vihāra)를
지어주고 황폐한 건물들을 보수해주었다는 언급이다. 「쭐라왐사(Cūḷavaṃsa)」에 따르면, 마
힌다 4세 왕은 비구니 승가의 후원자였고, 테라와다 비구니들을 위해서 마하말라까
(Mahāmallaka)라는 정사를 지어주었다고 한다.4) 아바야기라 위하라(Abhayagiri-vihāra)의

한 비문은 마힌다 4세 왕이 비구니들을 위한 탁발용 건물(alms-hall)을 지어주었으며 비구니
들이 사용하는 황폐해진 건물들을 보수하였다고 말한다.5) 이러한 기술들은 비구니 승가가
절멸하기 직전까지도 비구니 승가에 대한 왕실의 후원이 계속되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러한 기록들을 마지막으로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에 대한 언급은 더 이상 사료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된 영문일까?

1) Gombrich(1988: 140)와 Bartholomeusz(1994: 18)와 같은 학자들은 「디빠왐사」가 비구니들의

   문제 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비구니들에 의해 편집되었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마하왐사(Mahāvaṃsa)」는 마힌다(Mahinda)와 함께 섬에 온 사람들의 이름들은 열거하고

   있지만, 인도에서 보리수의 묘목을 가져온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함께 온 사람들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반면에 「디빠왐사(Dīpavaṃsa)」는 상가밋따와 함께 온 비구니들을 웃따라 헤마(Uttarā

   Hema), 빠사다빨라(Pasādapāla), 악기맛따(Aggimatta), 다시까(Dāsika), 펙구 빱바따(Pheggu

   Pabbata), 맛따(Mattā), 말라(Malla), 담마다시야(Dhammadasiya)로 언급하고 있다. (Dīp.18: 11-12)

   이와 같이 상가밋따를 도와서 스리랑카에 불교를 포교하는데 힘쓴 비구니들의 이야기는 오직

   「디빠왐사」에만 나오기 때문에 오늘날 학계는 그 저자를 스리랑카의 비구니들로 추정하고 있다.
2) Dīp. 18: 9–44.
3) Mhv. 34: 7–8.
4) Cv. 54: 47, “upassayaṃ karitvāna mahāmallakanāmakaṃ, theravaṃsamhi jātānaṃ 

   bhikkhunīnaṃ adāpayī.”

5) Ez. I, p. 222, II. pp.32-33.


남인도의 타밀계 왕조인 쫄라(Cōḷa)는 서기 10세기 중엽부터 스리랑카에 대한 침입을 되
풀이하고 있었는데, 993년에 드디어 수도 아누라다푸라(Anurādhapura)를 완전히 함락시키
고 그곳을 철저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쭐라왐사」의 저자는 쫄라인들이 피를 빨아먹는 약카
(yakkha)처럼 불교 사원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고 기술할 정도로6) 불교 교단이 받은 피해
는 엄청났다.7) 하지만 1070년에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I, r. 1070–1110)가 쫄라 침략자
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자 왕은 불교를 복원하려고 한다. 하지만 수계식을 개최할 만큼 충
분한 수의 비구들이 소집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왕은 미얀마 바간(Bagan) 왕조의 아노
랏따(Anawrahta)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 답례로 아노랏따는 비구들을 보내주어 비구 승
가가 복원될 수 있었다.8) 불행하게도 왕은 비구니 승가의 복원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3세기까지는 미얀마에 비구니 승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비구니 승가가 복원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은 갖춰진 상태였다.9) 하지만 위자야바후 1세 왕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왕들도 비구니 승가를 복원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결국 13세기에 몽골의 침공
으로 미얀마에 최후까지 남아있던 비구니 승가마저 사라지면서 테라와다 불교계에서 비구
니 승가를 복원할 길은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10)

6) Cv. 55: 20-21, “Nikāyattitaye dhātugabbhe laṅkātale'khile Mahārahe suvaṇṇādipaṭibimbe 

   ca'nappake. Bhinditvā sahasā sabbe vihāre ca tahiṃ tahiṃ. Yathojohārino yakkhā laṅkāyaṃ

   sāramaggahuṃ.”
7) Panabokke(1993: 140-141)는 쫄라(Cōḷa)가 원래 정치적 목적에서 스리랑카를 침략했기 때문에 

   그들의 불교 탄압은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었으며, 스리랑카 대중들과 승가의 호의를 사기 위해서

   불교에 대체로 관용적인 편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쫄라의 침공이

   섬의 불교에 타격을 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8) Gunawardana(1979: 271-273)와 Panabokke(1993: 145)와 Berkwitz(2010: 146)와 같은 학자들은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I)가 재건한 승가가 미얀마 승가인지를 입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미얀마에서 초빙된 비구들은 전란을 피해 미얀마로 도피한 스리랑카 승려들이었거나 그들의

   제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9) Gunawardana(1979: 39)와 Gombrich(2006: 168)는 13세기까지 미얀마에 비구니 승가가 

   존속하였다고 보고 있다. Harvey(2000: 395)와 Crosby(2014: 225)도 이에 동의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바간(Bagan)에 대한 몽골의 공격으로 미얀마의 비구니 승가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본다. 일반적으로 태국 불교에서는 비구니 승가가 한 번도 성립된 적이 없다는 점이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Kabilsingh 1991: 36) 하지만 Skilling(1994: 37)의 연구에 따르면, 캄보디아에는

   비구니 승가가 존재했었을 것이라고 한다. 12세기 캄보디아의 왕비 인드라데비(Indradevī)가 서거한

   자매인 자야라자데비(Jayarājadevī)에게 바친 추모시가 새겨진 명문은 자야라자데비가 많은 소녀들의

   사미니 수계식을 후원했음을 말해주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이는 사미니 수계식이 행해지던 시기에

   정식 비구니들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10)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계에는 비구니 승가는 존재하지 않지만 여성 출가 수행자 집단이 존재한다.

     스리랑카의 다사 실마타(Dasa-silmātā), 미얀마의 틸라신(Thilashin), 태국의 메이치(Maechi)가

    그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에서 비구니 승가가 없다는 사실은 양성평등 경향이

    강한 현대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다. (황순일 2013: 11) 20세기와 21세기에 비구니 교단을 부활

    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지만 이에 대한 비구 승가의 저항과 비난도 만만치 않았으며 지금도

    테라와다 비구니 승가의 복원 문제는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타이완의 청웨이(鄭維儀)는 타이완과 스리랑카의 비구니에 대한 필드 리서치에서 “초기
불교에서 재가여성과 비구니의 활발하고 영향력 있는 역할이 문헌학적, 금석학적인 증거로
서 제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리고 어떻게 승원 생활에서 여성의 권익이 위자야바
후 1세 왕에 의해서 방치되었는지는 연구 과제로서 남아있다고 말한다.11) 이 문제는 스리랑
카의 테싸 바톨로뮤즈(Tessa Bartholomeusz)가 말한 대로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에서의 비구
니 승가의 부활에 대한 논쟁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만큼12)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
지만 이제까지의 연구들은 대체로 테라와다 불교의 비구니 승가 복원을 둘러싼 논쟁에 포커
스가 맞추어진 것으로서 왜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승가가 비구 승가와 서로 다른 운명에 놓이
게 되었는지를 천착한 논문은 사실상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그러한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것이다.

11) Wei-Yi, Cheng. Buddhist Nuns in Taiwan and Sri Lanka, A Critique of the Feminist Perspective

     (London: Routledge, 2007), pp.12-13.
12) Bartholomeusz, Tessa. Women Under the Bō tre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21


II. 테라와다 불교의 남성중심주의적 성향


일반적으로 인도에서 불교의 시대는 여성들이 더 많은 존경을 받았고 개인적 지위도 보장
받았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13) 붓다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우열이 있다는 사고를 거부
하고 남녀가 평등하게 깨달음의 길에 나아갈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인정했다.14) 이 자체는

여성의 종교적 구원이 원칙적으로 막힌 고대 인도에서 획기적이고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
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빨리 성전에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남존여비적 시각
이 드러나는 문구들도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인오장설(女人五障說)과 팔경법(八
敬法, aṭṭha-garudhammā)이다. 여인오장설은 여자가 붓다(buddha), 전륜성왕(cakka-vattī),
삭까(sakka), 마라(māra), 범천(brahmā)이 될 수 없다는 교설을 말한다.15) 이 교설은 여성이
세속에서나 출세간에서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사상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16) 팔경법
은 붓다가 여성의 출가를 허용해달라는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의 간곡
한 요청을 마지못해 들어주면서 제정한 규칙이다.17) 이는 비구니 승가가 그 자체로 독립하
여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비구 승가의 하위 조직으로서의 절대적 복종을 강제하는
규칙이다.18) 그래서 출세간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을 인정하는 규칙이라고 볼 수 있
다. 초기 불교19)의 가부장적, 남존여비적 경향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위나야 삐따까
(Vinaya-piṭaka)」의 빠띠목카(pāṭi-mokkha)를 보면, 금지사항의 개수나 징벌의 무게에 있어서
비구니 쪽이 훨씬 더 엄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20) 붓다는 여인들만 겪는 특별한 괴로움들
(mātugāmassa āveṇikāni dukkhāni)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① 어리더라도 자신의 집안 식
구들과 떨어져 남편 집에서 살기(daharova samāno patikulaṃ gacchati, ñātakehi vinā hoti), ② 월
경(utunī), ③ 임신(gabbhinī), ④ 출산(vijāyati), ⑤ 남자 시중들기(purisassa pāricariyaṃupeti)이
다.21) 이 가운데 세 가지(②과 ③과 ④)는 생물학적인 것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①과 ⑤)는 혈
육을 떠나 어린 나이에 남편 집으로 가서 평생 남편 시중을 들어야 하는 여성에 대한 것이
다.22) 다시 말하면, 중간의 세 가지 항목들은 생물학적인 반면에 첫 번째와 마지막 항목들은

문화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23) 첫 번째와 마지막 항목들도 고대 인도사회의 가부장제적 일
면을 보여주고 있다.

13) Harvey, Peter. 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 Foundations, Values and Issue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p.356.
14) 이에 대해서는 김한상(2017: 225-250) 참조

15) MN.III, pp.65-66.; AN.I, p.8.
16) Chakravarti, Uma. The Social Dimensions of Early Buddhism (Delhi: Munshiram Manoharlal
     Publishers Pvt. Ltd, 1996), p.34.
17) Vin.II, pp.255-256.; 「十誦律」 卷47 (「大正藏」 23, 345b-c); 「摩訶僧祇律」 卷30 (「大正藏」 22,
     471a-476b); 「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雜事」 卷29 (「大正藏」 24, 350c-351a); 「四分律」 卷48 (「大
     正藏」 22, 923a-b); 「五分律」 卷29 (「大正藏」 22, 185c)
18) 사사키 시즈카, 원영 옮김, 「출가란 무엇인가?」 (서울: 민족사, 2016), p.316.
19) ‘초기 불교(Early Buddhism)’는 문헌적으로 남전의 4부 니까야와 「쿳다까 니까야(KhuddakaNikāya)」의

     일부, 「빠리와라(Parivāra)」를 제외한 「위나야 삐따까(Vinaya-piṭaka)」 전부, 그리고

     북전의 한역 아함경(阿含經)과 광율(廣律)에 의거한 불교이다. 연대적으로는 붓다 당시부터 서력
     초기까지의 불교로 정의할 수 있다. 필자는 붓다의 반열반(般涅槃, pari-nirvāṇa)이 기원전 400년
     에서 350년 사이에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20) 사사키 시즈카, 원영 옮김, 앞의 책, p.317.
21) SN.IV, p.239.
22) Chakravarti, Uma. op. cit., p.33

23) Harvey, Peter. op. cit., pp.369-370.


꼬살라 빠세나디(Kosala Pasenadi)가 붓다와 대화를 나누다가 그의 왕비 말리까(Malikā)
가 여자 아이를 낳았다는 보고를 받았다. 왕의 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붓다는 위로의 말을
건넨다. 붓다는 현명하고 계를 잘 지키는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말하면서도 그
러한 여성은 모름지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겨야 한다는 말24)로서 사실상 당시 인
도의 전통적인 현모양처로서의 여성상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빨리 성전은
여성의 종교적 실천에 대한 상이하고 상충하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24) “모든 백성의 왕이여, 여자일지라도 어떤 자는 남자보다 훨씬 뛰어나나니 그녀는 현명하고 계를 잘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노라. 그런 그녀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마땅히 영웅이 되
     리니, 사방의 주인이여 그런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 왕국을 제대로 통치할 것이로다.” (SN.I, p.86.)


테라와다 불교는 여성도 수행을 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빨리 성전의 견해를 인정하
면서도 여성이 정신적 진보를 위해서 반드시 가정을 버릴 필요가 없으며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성을 인정하는 또 다른 빨리 성전의 견해를 고취해왔다.25)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붓다
의 입멸 직후에 열린 제1차 결집(pathama-saṅgīti)에서 아난다(Ānanda)는 원로 비구들로부터
자신이 붓다로부터 여성의 출가를 허락받기 위해서 노력한 일이 악작(惡作, dukkaṭa)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난다는 자신의 행동을 악작으로 보지는 않지만 결집에 참석한 원로 비구들을
신뢰했기 때문에 이를 악작으로 인정한다.26) 그리고 제1차 결집에 참여한 500명은 모두 비구
들로서 비구니는 한명도 없었다는 사실도 당시 승가 내의 보수적인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스리랑카의 테싸 바톨로뮤즈는 위자야바후 1세 왕이 소멸된 비구니 교단을 부흥하는데
관심이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25) Bartholomeusz, Tessa. “The Female Mendicant in Buddhist Srī Laṅka,” in Buddhism, Sexuality, 

     and Gender, ed. by José Ignacio Cabezó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2),

     p.40. 26) Vin.II, p.289.


"위자야바후 왕이 현존하지 않는 비구니 승가를 복원하는데 관심이 없었던 이유는 여성의 종
교적 행위에 대한 상이하고 상충하는 모델들을 담고 있는 빨리 성전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붓
다에 의해서 비구니 승가가 성립된 이야기조차도 전통적으로는 붓다가 출가 수행자의 라이프
스타일이 여성에게 적절하다고 간주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고 해석되어 왔다. 비록 붓다는 마
침내 승가의 일원이 되고자 하는 그의 양모(養母)의 소망을 들어주었지만, ?위나야 삐따까?에
따르면, 아난다가 그녀를 대신하여 호소하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니 승가의 

설립에 대한 성전의 기술이 정확하든 정확하지 않든 간에,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붓다는
여성을 승가에 받아들이기를 꺼려했다는 점이다. (중략) 요컨대, 빨리 성전에는 여성도 수행에
서 진보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견해가 있긴 하지만, 불교계는 여성이 반드시 가
정생활을 저버릴 필요가 없다는 빨리 성전의 또 다른 견해를 지지해왔다. 그래서 빨리 성전에
서 발견되는 모호하고 상충되는 여성상이 11세기 비구니 승가의 복원에 우선권이 부여받지 못
한 사실을 설명할 것이다."27)

27) Bartholomeusz. Tessa. op. cit., pp.40-41.

 

한편 빨리 성전에는 비구니 승가에 대한 보시가 비구 승가에 대한 보시보다 공덕(puñña)
이 적다는 사고도 발견된다.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āya)」의 「닥키나위방가 숫따
(Dakkhiṇāvibhaṅga-sutta)」에 나타나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바로 그것이다.


"아난다(Ānanda)여, 그런데 일곱 가지 승가를 위한 보시(satta saṅghagatā dakkhiṇā)가 있다.
붓다를 우두머리로 하는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첫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여래가 반열
반에 들고 나서 비구와 비구니 두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두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 승
가에 보시하는 것이 세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비구니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네 번째 승가
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들과 비구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다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들을 제게 정해주십
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여섯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 ‘승가에서 이 정도의 비구
니들을 제게 정해주십시오.’라고 말하고 보시하는 것이 일곱 번째 승가를 위한 보시이다."28)

28) MN.III, pp.255-256, “Satta kho pan’im’, Ānanada, saṅghagatā dakkhiṇā. Buddhapamukhe ubhato
     saṅghe dānaṃ deti, ayaṃ paṭhamā saṅghagatā dakkhiṇā. Tathāgate parinibbute ubhato saṅghe
     dānaṃ deti, ayaṃ du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saṅghe dānaṃ deti, ayaṃ tatiyā saṅghagatā
     dakkhiṇā. Bhikkhunīsaṅghe dānaṃ deti, ayaṃ catutt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ū ca
     bhikkhuniyo ca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ṃ deti. Ayaṃ pañc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akā me
     bhikkhū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ṃ deti, ayaṃ chaṭṭhī saṅghagatā dakkhiṇā. ’Ettikā me
     bhikkhuniyo saṅghato uddissathā’ti dānaṃ deti. Ayaṃ sattamī saṅghagatā dakkhiṇā.” 한글 번역은
     필자가 대림스님의 번역본을 다소 수정한 것이다. (대림스님, ?맛지마니까야 4?, 울산: 초기불전
     연구원, 2012, pp.526-527.)


여기서 보듯이 비구니는 항상 비구 다음에 온다. 이는 비구니에 대한 보시에서 오는 공덕
이 비구에 대한 보시에서 오는 공덕보다 적다는 생각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피터 하비
(Peter Harvey)가 지적한 대로, 이러한 성전의 언급은 붓다 당시 인도 사회의 남성중심주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29) 「위나야 삐따까」에 따르면, 우바새(upāsaka)나 우바이(upāsikā)가
승가에 물건을 기증하면 그것은 비구니가 아니라 비구들에게만 귀속된다는 점30)도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구니 승가의 태동에
서부터 비구니 승가가 사라지는 순간까지 비구니에 대한 보시가 비구에 대한 보시보다 더 적
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나야 삐따까」에는 여성들은 어렵게 시주를 받는다고 하는 언급들이
나타나고 있다.31) 그리고 비구니들을 위한 충분한 기숙시설이 없기 때문에 비구니들은 매년
새로운 비구니들을 출가시켜서는 안 된다는 서술도 보인다.32) 이러한 기술들은 모두 붓다
당시부터 이미 비구니 승가에 대한 사회적 후원이 비구 승가에 비해서 적었음을 방증한다. 7
세기 중국의 구법승 의정(義淨)의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서 드러나듯이,33)
이러한 상황은 인도에서 불교가 멸망할 때까지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29) Harvey, Peter. op. cit., p.391.
30) Vin.II, p.268.
31) Vin.IV, pp.175-176, “kathañ hi nāma bhaddantā bhikkhuniyā hatthato āmisaṃ paṭiggahessan-ti,
     kicchalābho mātugāmo’ ti.”; Vin. III, p.208, “mayaṃ kho bhante mātugāmā nāma kicchalābhā, idañ
     ca me antimaṃ pañcamaṃ cīvaraṃ, nāhaṃ dassāmīti.”
32) Vin.IV, p.336.
33) 의정(義淨)은 인도에서 비구니들이 비구들만큼의 물질적 후원을 얻지 못한다고 고찰하였다.
     (Falk 1980: 209-211)


타이완의 청웨이는 타이완과 스리랑카 비구니에 대한 필드 리서치에서 여성이 열등한 업
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비구 승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비구니 승가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했고, 이는 어쩌면 많은 나라들에서 비구니 교단의 쇠퇴와 소
멸에 일조했을 것이라고 고찰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비구 승가에게 보시하는 것이
비구니 승가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했고, 이는 어쩌면 많은 나
라들에서 비구니 교단의 쇠퇴와 소멸에 일조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7세기 중국의 구법승인 의
정(義淨)은, 인도에서 부유한 승원에서 사는 비구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가난하고 소박한 생
활을 영위하던 비구니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여성의 열등한 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은
재가신자들로 하여금 비구니 승가가 비구 승가에 비해서 작은 ‘복전(福田)’이라고 생각하게 하
였고, 비구니들을 덜 후원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자원이 한정되는 고난의 시기에 재가신자들은
한정된 자원으로부터 더 많은 공덕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큰 ‘복전’을 지원하기를 선택했었을
것이다."34)

34) Wei-Yi, Cheng. op. cit., p.58.

 

미국의 낸시 아우어 포크(Nancy Auer Falk)도 팔경법이 불교 교단의 비용을 부담하는 외
부세계35)에 비구니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였으며, 비구들이 더 중요하고 가치
가 있는 존재라고 확인해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비구가 비구니보다 더 보시를 많이 받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고찰한다.36) 이러한 성찰은 스리랑카의 비구니 승가에도 동일하게 적용
될 수 있다.

35) 여기서의 외부세계는 승가 밖의 세속 세계, 즉 승가를 물질적으로 후원하는 재가자 사회를 말한다.
     특히 고대와 중세 스리랑카에서 승가를 후원하는 가장 유력한 집단은 전제군주제의 수장인 왕과
     귀족들이었다.
36) Falk, Nancy Auer. “The Case of the Vanishing Nuns: The Fruits of Ambivalence in Ancient Indian
     Buddhism,” in Nancy A. Falk and Rita Gloss ed., Unspoken Worlds: Women’s Religious Lives in
     Non-Western Cultures (New York: Harper & Row: 1980), p.216


불교 교단의 비용을 부담하는 외부세계가 풍족하고 안정되어 있다면 사실 이 문제는 그다
지 심각하지 않다. 이는 10세기 쫄라의 침공 직전까지 스리랑카 연대기와 비문에 많이 언급
되는 비구니 승가에 대한 왕가의 후원에 의해 증명된다. 하지만 일단 외부세계가 외침이나
국내의 소요와 같은 위협에 직면하게 되면 한정된 자원을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 어느 쪽
에 먼저 배분해야 하는 가라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러한 경우에 외부세계는 공덕이
보다 높다고 생각되는 비구 승가에 한정된 자원을 투자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쫄라를 가까
스로 몰아낸 위자야바후 1세 왕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위자야바후 1세 왕은 스스로가 명
망 있는 불교학자로서 아비담마(abhidhamma)를 공부하였다고 하는데,37) 그러한 그가 빨리
성전에 나타나는 이러한 기술들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37) Gunaratne, Panabokke. History of Buddhist Sangha in India and Sri Lanka (Kelaniya, Sri Lanka:
     Postgraduate Institute of Pali and Buddhist Studies, 1993), p.142. ?쭐라왐사(Cūḷavaṃsa)?에 따르
     면, 위자야바후 1세 왕은 매일 국왕의 업무를 보기 전에 아침 일찍 ?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
     를 공부하곤 했으며,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싱할리어 번역본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Cv.58:
     42f.)


III. 힌두교의 영향력 증대


힌두교의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악업과 부족한 공덕에 의한 결
과이다. 왜냐하면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은 윤회로부터의 탈출인 해탈(mokṣa)이 불가능함을
뜻하기 때문이다.38) 힌두교 성전(聖典)들의 하나이자 안티페미니스트 문헌인 「마누법전

(Manu-smṛti)」은 여성이 베다(Veda)를 읽는 것을 금지시켰고 혼자서 신들을 숭배하거나
제사를 지낼 수도 없게 만들었다.39) 이는 여성에게는 슈드라(śūdra)와 마찬가지로 힌두교가
설정한 구원이 원칙적으로 막혀 있음을 말해준다. 여성이 구원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현세에서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좋은 아내가 되고40) 내생에서 남성으로 다시 태어
나는 것이다.41) 게다가 「마누법전」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힌두교에서는 보편적으로 여자
의 본성이 나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여성은 더 높은 정신적 성취를 얻을 자질이
없다고 보았다.42)

38) D.L.카모디, 강돈구 옮김, 「여성과 종교」 (서울: 서광사, 1992), p.55.
39) Dewaraja, L.S. The Position of Women in Buddhism (Kandy: BPS, 1981), p.4.
40) 이 점은 「마누법전(Manu-smṛti)」의 제5장 154에서 166까지의 게송들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41) D.L. 카모디, 강돈구 옮김, 앞의 책, p.55.
42) 「마누법전」에 나오는 대표적인 구절들을 열거해본다. “여자들의 본성이란 남자들을 타락하게 하
     므로 여자들에 대해 방심하지 말고 방만한 여자들을 멀리해야 한다.” (2․134) “욕심이 없는 자라면
     누구든 증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는 여럿일지라도 그리고 설령 그들이 깨끗하다고 할지라도
     여자의 지성이란 믿을 수 없으므로 증인이 될 수 없다. 그 외 다른 부족함이 있는 자들도 마찬가지
     이다.” (8․77) “잠자리, 앉는 자리, 장신구, 욕정, 분노, 부정직, 사악함, 나쁜 행동거지는 마누가 (여
     자의 것으로) 정한 것이다.” (9․17) “여자들에게는 다르마로 정해진 베다 구절로써 행하는 의식이
     없다. (여자는) 분별력이 모자라고 베다 구절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허구이다. 이것은 정해진 바이
     다.” (9.18)


이러한 힌두교는 스리랑카에서 불교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불교와 상호 배타적이거나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전체적으로는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통속적인 수준에서는 특히 그러
하다.43) 4세기의 왕인 마하세나(Mahāsena, r. 334–361)처럼 힌두교 사원을 부수고 불교 사원
을 세운 사례도 있었지만,44) 대체적으로 힌두교는 왕들을 비롯하여 섬의 주민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특히 폴론나루와(Polonnaruwa) 시기45)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 힌두교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었다.46) 힌두교는 쫄라의 점령 기간 동안에 스리랑카에서 크게 장려되

었으며, 쫄라인들이 위자야바후 1세 왕에 의해 쫓겨난 뒤에도 힌두교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힌두교 영향력의 증대는 왕들의 후원, 남인도로부터 계속 들어오는 힌두
교 신자들의 이민,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위를 가진 타밀 상인과 군인과 예
술가 공동체의 번영 덕분이었다.47)

43) Pathmanathan, S. “Hinduism in Sri Lanka (Circa A.D: 1000-1250): Indian Influences on the
     development of Saivism”, Modern Sri Lanka Studies Vol. 2 (Sri Lanka: University of Peradeniya,
     1987), p.57.
44) Mhv. 37: 41.
45) 폴론나루와 시기는 스리랑카의 싱할리즈 왕조가 남인도 타밀계 왕조인 쫄라(Cōḷa)의 침공으로 아
     누라다푸라(Anurādhapura)가 함락되고서 폴론나루와(Polonnaruwa)로 왕도를 옮긴 1056년부터
     깔링가(Kāliṅga)의 마가(Māgha)의 침략을 겪은 123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46) 폴론나루와 시기에 싱할리즈 불교문화에 미친 힌두교의 영향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들을 참조하
     라. Pathmanathan, S. “Hinduism in Sri Lanka (Circa A.D: 1000-1250): Indian Influences on the
     development of Saivism”, Modern Sri Lanka Studies Vol.2 (Sri Lanka: University of Peradeniya,
     1987), pp.52-66.; Holt, Clifford John. “Hindu Influences on Medieval Sri Lankan Buddhist Culture”

     in Mahinda Deegalle, ed., Buddhism, Conflict and Violence in Modern Sri Lanka (London:
     Routlege, 2006), pp.38-66.
47) Pathmanathan, S. op. cit., pp.56-57


특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폴론나루와 시기 싱할리즈 왕들의 힌두교에 대한
호의적, 관용적 태도이다. 위자야바후 1세 왕은 쫄라의 침공 이후에 절멸할 뻔한 비구 승가
를 복원하고 불교를 열렬히 후원한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힌두교는 그의 통치 하에서 꾸준
히 번영을 구가한 것으로 보인다. 「쭐라왐사」는 위자야바후 1세 왕이 신들의 사원들(deva-

kula)에 과거에 바쳤던 보시를 중단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48) 위자야바후 1세 왕은 나중에
위자야라제슈와람(Vijayarājeśvaram)이라 불리게 된 칸탈라이(Kantalai) 지역의 한 힌두교
사원을 후원하였다고 전해진다.49) 위자야바후 1세 왕은 남인도로부터 학자들을 초빙하였
는데, 그 결과 산스끄리뜨어와 타밀어 연구의 붐이 일어났다.50) 위자야바후 1세 왕 다음의
싱할리즈 왕들은 빤드야(Pāṇḍya)나 깔링가(Kāliṅga)의 왕자나 공주의 자제들이었으며, 힌
두교의 실천들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많은 힌두교 사원들을 건립하기까지 했다.51) 특히 위
자야바후 1세 왕의 아들인 위끄라마바후 2세(Vikramabāhu II, r. 1116-1137)는 힌두교의 사
이비즘(Śaivism)에 더 열성적이었던 것 같다. 예컨대 위끄라마바후 2세 왕이 시바교 사원을
지은 시기에 만들어진 부두따와 석조 비문(Budutāva Rock Inscription)은 그가 시바교도의 이
름을 가졌음을 언급하고 있다.52) 그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불교 교단의 재산을 몰수
한 것53)도 이러한 그의 종교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힌두교의 사이비즘에 대한 왕가
의 후원은 그 다음 왕인 가자바후 2세(Gajabāhu II, r. 1137-1153)에 의해서 계속된다. ?쭐라왐
사?에 따르면, 그는 외국에서 외도 귀족들을 데려와서 스리랑카 북부를 채웠다고 한다.54) 심
지어 타밀 전승은 그가 사이비즘으로 개종했다고 말한다.55) 힌두교에 대한 호의적, 관용적 

태도는 13세기에 승가 정화(sāsana-suddhi)를 이룩한 빠락끄라마바후 I세 (Parākramabāhu I,
r. 1123–1186)에게서도 보인다. 「쭐라왐사」는 왕이 빤드야 왕국에서 그의 군대가 성취한 성
공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브라만들에게 보시를 했다고 기록한다.56) 더 나아가 「쭐라왐사」는
왕이 (힌두교) 신들을 위해서 13개의 사원들을 지었고 황폐해진 힌두교 사원들을 복원하였
다고 말한다.57) 또 다른 곳에서 「쭐라왐사」는 왕이 (힌두교) 신들의 24개의 사원들을 보수하
였다고 말한다.58)

48) Cv. 60: 77.
49) Gunaratne, Panabokke. op. cit., p.143에서 재인용. Ez. IV, pp. 191-196.
50) Gunaratne, Panabokke. op. cit., p.148.
51) Mendis, G. C. The Early History of Ceylon and Its Relations with India and Other Foreign Countries
     (New York: AMS Press, 1970), p.61.
52) Ez. II, pp. 302-312.
53) Cv.70: 55-58.
54) Cv.70: 53-55.

55) Gunaratne, Panabokke. op. cit., p.149.
56) Cv.77: 104.
57) Cv.79: 21-22.
58) Cv.79: 81.


폴론나루와 시기 싱할리즈 왕들이 힌두교에 대해 보인 호의적, 관용적 태도는 바로 이들
이 힌두교의 반여성주의적, 남존여비적 성향에 노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일 시사한다.
이는 이 시기 왕들이 비구니 승가의 복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
다.


IV. 아란냐까 전통의 대두


비구 승가에는 전통적으로 두 부류의 비구들이 있어왔다. 하나는 도시와 마을에 사는 비
구인 가마와신(gāmavāsin)과, 다른 하나는 숲에 사는 비구인 아란냐까(araññaka)59)이다. 비
구의 두 가지 임무(dve-dhurāni) 가운데서 가마와신은 주로 교학의 임무인 간타두라(gantha-

dhura)에 전념하고, 아란냐까는 주로 수행의 임무인 위빳사나두라(vipassanā-dhura)에 전념
한다. 아란냐까의 기원은 초기불교 승가의 네 가지 생활 원칙인 사의(四依, cattāro nissayā)60)
가운데 수하좌(樹下坐, rukkha-mūlikaṅga)로 소급될 수 있다. 붓다는 보리수(bodhi-rukkha)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기 전 숲에서 6년 동안 고행하면서 아란냐까로 지냈으며, 깨달음을 얻
고 나서는 마을과 도시에 머물면서도 종종 대중들과의 접촉을 멀리하고 숲에서 은둔생활을
하기도 했다.61) 이와 같이 아란냐까의 전통은 불교의 시작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좋
다.

59) 아란냐까(araññaka)는 숲을 뜻하는 ārañña에 소속 등을 나타내는 접미사인 ka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로서 ‘숲에 속하는’ 또는 ‘숲속에 사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숲속에서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으로 알려진 엄격한 수행을 실천하는 승려’를 직접적으로 가리킨다. 아란냐까는 아란니까
     (āraññika), 아란냐와신(āraññavāsin), 와나와시(vanavāsi) 라고도 불리며, 스리랑카의 연대기
     (Vaṃsa)에서는 따빳신(tapassin), 완따지와까(vantajīvakā), 요긴(yogin) 등으로도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는 서술의 편의를 위해서 아란냐까로 통일한다.)
60) 사의(四依, cattāro nissayā)는 ① 걸식(乞食, piṇḍapātikaṅga), ②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ikaṅga),
     ③ 수하좌(樹下坐, rukkha-mūlikaṅga), ④ 진기약(陳棄藥, pūtimutta-bhesajja)의 네 가지를 말한
     다. (Vin.I, p.58, 96.; AN.II, p.26)

61) 예컨대 붓다는 웨디까(Vedika)의 인다살라구하(Indasāla-guhā)라는 동굴에서 명상에 들곤 했다.
     (DN. II, p.263)


스리랑카에서 아란냐까 전통은 마힌다와 그 일행들에 의해 불교가 도입되면서부터 시작
되었다. 이들이 스리랑카에 처음 도착하였을 때는 한 동안 미힌탈레(Mihintale)의 동굴에 거
주하였다.62) 스리랑카 중북부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브라흐미 비문들(Brāhmī inscriptions)63)
은 기원전 3세기부터 재가자들이 아란냐까들을 위하여 암자를 마련해주었으며 재가 신자들
의 후원을 받는 아란냐까의 전통이 시작되었음을 말해준다.64)

62) Rāhula, Walpola. History of Buddhism in Ceylon: The Anurādhapura Period, 3rd Century BC-10th
     Century AC (Colombo: M.D. Gunasena & Co. Ltd., 1956), p.112.
63) 스리랑카의 초기 브라흐미 비문들은 프라나위타라(S. Pranavitara)에 의해서 편집되고 영역되었
     다. S. Paranavitana, Inscriptions of Ceylon, Volume I: Early Brāhmī Inscriptions (Colombo: Ceylon
     Department of Archaeology, 1970).
64) Holt, Clifford John, “Sri Lanka” in Encyclopedia of Buddhism, ed. R.E. Buswell, Jr., Vol. I (New
     York: Macmillan, 2004), p.795.


비록 아란냐까 전통이 스리랑카에 불교의 도입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아누라다푸라 시기
의 말엽인 서기 10세기부터65) 아란냐까가 ‘이상적 승려’의 대표로서 칭송되기 시작한다. 예
를 들면, 깟사빠 4세(Kassapa IV, r. 912-929)의 치세에 세나 일랑가(Sena Ilaṅga)라는 장군이
「쭐라왐사」의 저자가 크게 존경하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아란냐까 승려에게 숲속
암자를 지어 주었다.66) 「쭐라왐사」의 저자는 깟사빠 4세 왕의 왕비인 데와(Devā)가 아란냐
까들에게 거처(vāsa)를 마련해준 사실을 언급하면서 아란냐까들을 ‘장로들의 계보의 등불
(theravaṃsappa-dīpa)’이라고 칭송하고 있다.67) 또한 「쭐라왐사」의 저자는 마힌다 4세(Mahinda
IV)가 다타나가(Dāṭhānāga)라는 이름의 아란냐까 장로에게 아비담마(abhidhamma)를 강연
하도록 했음을 언급하면서 그를 ‘랑까의 보석 같은(laṅkā-laṃkārabhūta)’이라고 칭송하고 있
다.68) 「쭐라왐사」에 따르면, 마힌다 4세 왕은 아란냐까들에게 정기적으로 좋은 음식, 정제

버터로 데운 당밀, 마늘 엑기스, 구장나무잎(betel)을 보냈으며, 병든 아란냐까를 돌보도록
의사들을 위임하였다.69) 이와 같이 아란냐까는 마힌다 4세 왕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던 것
같다. 위자야바후 1세 왕의 치세나 그 바로 뒷 시기에 살았다고 추정되는 한 아란냐까는 땀바
빤니(Tambapaṇṇi)의 기치이자 타밀 지방의 등불과 같다고 언급되고 있다.70)

65) Gunawardana, R.A.L.H. Robe and Plough: Monasticism and Economic Interest in Early Medieval
Sri Lanka (Tucson, AZ: University of Arizona Press, 1979), p.39.
66) Cv.52: 22, “Vāsaṃ araññe kāretvā attano vaṃsanāmakaṃ Mahāvihāre bhikkhūnaṃ vane nivasataṃ
     adā.”
67) Cv.52: 64, “Sakkasenāpatīmātā devā'raññakabhikkhunaṃ Theravaṃsappadīpānaṃ akā'vāsaṃ
     sanākamaṃ.”

68) Cv.54: 36, “Dāṭhānāgābhidhānena therenā'raññavāsinā Laṅkālaṅkārabhutena abhidhammaṃ kathāpayī.”
69) Cv.54: 20-22.
70) Gunaratne. Panabokke, op. cit., p. 147에서 재인용. Ez. IV, p.68 ff


공교롭게도 아란냐까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시기는 남인도의 타밀계 왕조인 쫄라의 반
복된 침략과 국내의 소요로 스리랑카의 정세가 점점 불안정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그리
고 이 시기는 비구니 승가가 사료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시기와도 겹친다! 이 시기의 전란
으로 마을과 도시의 많은 승원들이 파괴되고 재산이 약탈당하였기 때문에 가마와신은 쇠퇴
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란냐까는 숲속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피해를 덜 입었을 것
이며, 이로써 아랸냐까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71) 아누라다푸라 시기의
말엽에 흥기한 아란냐까 전통은 그러지 않아도 쇠퇴해가던 비구니 승가에 치명타를 날렸을
것이다.

71) 김한상, 「스리랑카 승가에서 아란냐까의 연속성과 정통성」, 「불교학보」 제78집(서울: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2017), p.120.


붓다가 독신 수행자 집단인 승가를 창설하는데 토대가 된 이상은 범행(梵行, brahma-

cariya)72)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비구들에게 있어 범행의 최대 장애는 여성이다. 붓다 당
시에 세속에서 각각 어머니와 아들이었던 비구니와 비구가 가깝게 지내다가 사랑에 빠져 성
관계를 맺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사실이 붓다에게 보고되자 붓다는 여성을 남자를 유
혹하는 ‘마라의 그물(samantapāso mārassā)’이라고 비난한다.73) 5세기 주석가인 붓다고사
(Buddhaghosa)는 비구와 비구니 간의 잦은 접촉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한 내러티브를 소개
하고 있다.74) 그래서 아누라다푸라 시기의 말엽부터 아란냐까 전통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하게 되면서 싱할리즈 왕들과 비구 승가는 비구니 승가가 엄격한 수행자들에 불필요한 요소

이거나 심지어 장애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어려움에 처한 비구니 승가를 적
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비구니 승가가 소멸하고 나서도 이를 복원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72) 범행(梵行, brahma-cariya)은 원래 고대 브라만교에서 성관계(methuna-dhamma)를 완전히 멀리
     하는 독신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불교에서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괴로움을 끝내고 열반의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출가자의 삶을 뜻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경에는 다음과 같은 상투적 어구가
     나타난다.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
    아오지 않을 것이다.(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m itthattāyāti
    pajānātīti)” (SN.III, p.21)
73) AN.II, p.60.
74) Ps.II, p.145.

 

비구 승가에 대한 아란냐까의 영향력은 12세기 빠락끄라마바후 1세가 딤불라갈라
(Dimbulāgala)의 아란냐까 지도자인 마하깟사빠(Mahā-kassapa)를 수장으로 승가 정화
(sāsana-suddhi)를 단행하였을 때 절정에 달한다. 앞서 말한 대로, 늦어도 13세기까지는 미얀
마에 비구니 승가가 남아 있었기 때문에, 빠락끄라마바후 1세 왕과 비구 승가가 마음만 먹었
다면 미얀마로부터 비구니 승가의 계맥을 다시 이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조치는 끝
내 취해지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모한 위자야라트나(Mohan Wijayaratna)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게다가 숲에 사는 비구들(vanavāsī)75)이 비구니들을 도와야 할 때가 되었을 때 열정을 보여
주지 못한 것 같다. 처음부터 그들은 비구니 승가가 엄격한 수행자에 불필요한 요소이거나 심
지어 장애임을 발견했던 것 같다. 일부 행실이 올바르지 못한 비구니들의 행동이 그러한 비구
들의 내켜하지 않음을 정당화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숲에 사는 비구들이 영향력이
나라에서, 때로는 국왕의 행정에서 커나가자, 그들은 비구니 승가의 존속을 고무하거나 비구니
승가의 안전을 담보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라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조언하지 않았음에 틀림
이 없다."76)

75) 와나와시(vanavāsī)는 아란냐까(araññaka)의 동의어이다.
76) Wijayaratna, Mohan. Buddhist Nuns: The Birth and Development of a Women's Monastic Order
     (Kandy: BPS, 2010), p.147. 

 

V. 나가는 말


남인도의 타밀계 왕조 쫄라의 반복된 침공과 국내의 소요로 인한 외부세계의 불안정은 비
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로 이루어진 불교 교단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다만 비구 승가는 쫄
라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다시 싱할리즈 왕실을 회복한 위자야바후 1세 왕의 노력으로 복원
될 수 있었던 반면에 비구니 승가는 끝내 복원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렇
게 비구 승가와 비구니 승가의 운명이 엇갈리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스리랑카에서 불교
교단과 왕실이 전통적으로 맺어온 상호 협력과 의존의 관계를 고려해야만 한다. 스리랑카에

서 불교 교단은 토지 수여와 수리공사(水利工事)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왕실의 후원에 의존
하였고, 왕실은 자신들의 통치에 대한 대중적 후원과 적법성을 얻고자 승가에 의존하였다.
이와 같은 공생관계 때문에 외국의 침략과 국내의 소요로 왕실이 불안정하게 되면 불교 교단
의 존립은 뿌리부터 흔들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때에 비구니 승가가 받은 타격은 비구 승
가가 받은 타격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구들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외국이나 국내의 다른 지방으로 피신할 수 있었지만77) 비구니들은 안전상의 문제로 그러한
장거리 여행을 떠나기 매우 어려웠거나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78) 게다가 비구 승가는
비구니 승가와 달리 숲에 사는 승려들인 아란냐꺄가 있었다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전란
으로 마을과 도시의 많은 승원들이 파괴되고 재산이 약탈당하자 아랸나꺄들은 마을과 도시
에 사는 가마와신보다 피해를 덜 입을 수 있었고, 이들이 나중에 불교 승가의 부흥과 개혁에
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에서 비구니들은 반드시 도시나
마을에 거주해야만 했는데,79) 전란으로 마을과 도시의 많은 승원들이 파괴되고 재산이 약탈
당함으로써 마을과 도시에 기반을 두고 있던 비구니 승가의 존립 기반은 송두리째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본문에서는 논의하지 않았지만, 만약 일부 학자들의 주장하는 대로 13
세기까지 미얀마에 존속했던 비구니 승가가 테라와다 소속이 아닌 딴뜨라(Tāntra) 불교 소
속이거나,80) 설령 테라와다 소속이었다 하더라도 (재가와 출가로 이루어진) 스리랑카 불교
인들의 관점에서 이론과 실천에서 충분하게 정통이지 않아서81) 미얀마로부터 비구니 승가
의 계맥이 도입되지 않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이유밖에 되지 못한다.
설사 미얀마에 이론과 실천에서 충분하게 정통인 테라와다 비구니 승가가 존재했다고 하더
라도, 재가자와 출가자로 이루어진 스리랑카의 불교인들은 그러한 비구니 승가의 계맥을 적
극적으로 가져오려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테라와다 불교 전통은 기본적으로
출가 수행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생각을 완전하게 긍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힌두교의 영향력 증대와 아란냐까 전통의 대두로 인하여 더욱 가속화되었다고 생각
된다. 다만 이 논문에서는 오늘날 테라와다 불교에서 비구니 승가의 복원 문제는 다루지 않
았는데, 이는 향후의 연구 과제이다. 

77) Gunaratne, Panabokke. op. cit., p.142.
78) 전란의 시기에 비구니들이 겪었을 고초에 대해서는 Wijayaratna (2010: 147-148) 참조.
79) Vin. II, p.278.
80) Wijayaratna, Mohan. op. cit., p.145.
81) Gunawardana, R.A.L.H. op. cit.,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