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붓다의 비유설법

실론섬 2014. 3. 12. 15:08

붓다의 비유설법

안양규

 

머리말        

근자에 불교에 관한 많은 서적들이 출간되고 있다. 쉬운 입문서부터 매우 전문적인 전공서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다양하다. 필자는 여기에서 불교에 관하여 체계적인 지식이 없어도 읽을 수 있는 작은 책자를 구상해 보았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붓다와 그의 가르침에 친근한 감정을 가지며 일상 생활 속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게 되기를 원한다. 


붓다란 어떠한 분이었는가? 그리고 그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는가?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초기경전에 있는 주요한 말씀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붓다가 남긴 말씀을 담은 경전의 양은 방대하다. 따라서 여기 소책자에 소개된 가르침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선별된 내용은 비유를 중심으로 설해진 주요한 가르침들이다. 비유는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가르침을 쉽게 접근해 주는 역할을 한다. 붓다가 설한 비유는 한번 들으면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 비유가 일상적이고도 실제적인 생활영역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비유는 어떤 한 일면을 보여줄 뿐이므로 유념해야겠다. 붓다는 이러한 일상성에 기초한 비유를 이용하여 심오한 가르침을 베풀었다. 비유에 함축된 붓다의 가르침을 음미하면 현재 우리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은 크게 세 부분이다.

 

1. 붓다는 어떠한 분인가?

2.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3. 현대의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 부분이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리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이렇게 나누었다. 본문에 보이는 인용 부호는 단지 강조할 목적으로 표시한 것으로 경전의 문구를 정확하게 인용한 것은 아니다. 각 비유의 말미에 참고한 경전을 표기해 두었다. 팔리어 경전은 The Pali Text Society에서 간행된 것을 이용했으며 한역경전은 「대정신수대장경」(이하「대정장」)을 이용하였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어 가는 동안 마음이 맑아지고 부드러워져 붓다의 가르침에 더 관심이 생기기를 필자는 바라마지 않는다.


목    차
제1부:붓다(Buddha)

1. 의사로서의 붓다

2. 길 안내자로서의 붓다

3. 옛길의 발견자

4. 거문고 비유:중도

5. 연꽃의 비유:완전한 삶

6. 연못의 연꽃:설법의 결실

7. 싱사파 숲의 나뭇잎과 손안의 나뭇잎

8.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아라 

 

제2부:붓다의 가르침

1. 장님이 코끼리 더듬기:공허한 논쟁

2. 뗏목의 비유:가르침은 도구일 뿐

3 코끼리의 발자국:사성제

4. 강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나무토막

5. 갈대단 비유:연기

6. 세 가지 불꽃

7. 대양의 물과 중생의 눈물:무상

8. 독화살을 맞은 사람

9. 비파의 비유:무아

10. 무거운 짐 내려놓기 

11. 소금 덩어리 

 

제3부:수행과 실천

1. 눈 먼 거북이 널빤지 만나기

2. 날카로운 창보다 강한 것

3. 해가 떠오르는 비유:좋은 친구

4. 늑대를 만난 거북이

5. 화살보다 빠른 것

6. 독이 풀린 샘물

7. 광대의 과보

8. 못에 던져진 돌 떠올리기

9. 물그릇

10. 두 번째 화살 맞지 않기

11. 대접받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12. 현재 머물기  


제1부:붓다(Buddha)

 

1. 의사로서의 붓다 [참고 경전:잡아함경(대정장 II p.105上).]

붓다가 어떠한 분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지만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생과 관련하여 그분을 정의 내리면 고통을 치유하는 의사라고 비유하는 것이 적절한 것 같다. 


붓다는 흔히 대의왕(大醫王)으로 비유되고 있듯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그 주된 역할로 하고 있다. 세간의 의사는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에 비해 붓다는 생노병사라는 삶의 궁극적 문제를 다루는 의사이다. 붓다의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고 있는 사성제(四聖諦)에서 의사로서의 붓다의 역할을 볼 수 있다. 사성제 중 고성제(苦聖諦)는 병의 상태를 살펴보는 진찰의 단계로, 집성제(集聖諦)는 병의 원인을 찾아내는 단계로, 멸성제(滅聖諦)는 그 질병이 사라진 건강한 상태를 예상하는 단계로 도성제(道聖諦)는 건강한 상태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제시되는 처방의 단계로 비유된다. 훌륭한 의사가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을 내려 환자가 질병을 극복하게 할 수 있듯이 붓다도 중생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준다. 


붓다가 의왕이라고 비유되는 점에서, 우리 중생은 환자이다. 우리 자신이 환자임을 자각해야한다. 자신이 어떠한 병에 걸려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 지 스스로가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다. 병자가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의사를 찾지 않고 생활한다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고 말 것이다. 그땐 너무 늦다. 병자가 의사의 처방 없이 돌팔이 의사의 말만 믿고 약을 먹다 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훌륭한 의왕인 붓다의 말씀을 잘 받들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붓다의 역할과 그 한계이다. 의사의 처방만으로 환자의 병이 고쳐질 수 없고 의사의 처방에 따라 환자가 필요한 것을 충족되어야 하듯이, 붓다도 중생에게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할 뿐이고 중생을 직접 고통에서 구원할 수는 없다. 중생 각자가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해야 할 당위가 요청된다. 붓다는 중생에게 고통의 증상에 따라 약을 주지만 그 약을 복용하여야 하는 것은 환자인 중생의 몫이다. 


2. 길 안내자로서의 붓다 [참고 경전:Majjhima Nikāya III pp.3 ff; 산수목건련경(대정장 I, p.652 上).]

붓다는 과연 우리 중생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간혹 다른 유일신의 전지전능의 관념에 영향을 입어 붓다도 그러한 식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중생은 절대적으로 붓다에게 의존하기만 해도 붓다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중에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 이런 류의 불타관(佛陀觀)에 대해서 붓다 자신은 결코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자신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붓다의 제자들 중 어떤 이는 최고의 경지인 열반에 이르렀지만 어떤 제자들은 그러하지 못하니 붓다에게 어떤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한 외도가 붓다에게 물었다. 붓다는 자신을 길 안내자로 비유했다.


“여기 어떤 사람이 왕사성으로 가고자 하였다. 그래서 그는 왕사성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자세히 듣고 가르쳐준 대로 가서 목적지에 이르렀다. 또 어떤 사람은 똑같이 자세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길을 제대로 찾아가지 못하고 끝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유는 길을 일러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잘못 들은 자에게 있다. 마찬가지로 열반의 경지는 있다. 붓다는 그곳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줄뿐이고 제자들을 거기까지 데리고 갈 수 없다. 각자가 걸어야 하는 것이다. 여래는 단지 길을 제시할 뿐이다.”  


담마파다(Dhammapada)에서 “如來는 유일한 스승이다.”라고 말하듯이 무엇보다도 붓다는 훌륭한 스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초기 불교 경전을 살펴보면,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답하여 제자들을 진리의 문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붓다는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거나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근기에 맞추어 문답을 통하여 최상의 진리에 이끄는 진리의 안내자로 그려지고 있다.


여래십호(如來十號)를 통하여 스승으로서의 붓다를 볼 수 있다. 여래십호는 제자들이 붓다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명호(名號) 중 무상사(無上士), 천인사(天人師), 조어장부(調御丈夫)는 스승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가장 훌륭한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무상사로 일컫어진다. 天과 人으로 대표되는 모든 중생들의 스승이라는 의미에서 붓다를 천인사(天人師)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잘 훈련시키듯이, 붓다는 중생들을 잘 가르치고 이끈다는 의미에서 조어장부(調御丈夫)라고 일컫는 것이다. 나머지 명호는 스승이 갖추어야할 자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붓다의 명호에는 여래(如來)․응공(應供)․정편지(正遍智)․명행족(明行足)․선서(善逝)․세간해(世間解)․무상사(無上士)․조어장부(調御丈夫)․천인사(天人師)․불(佛)․세존(世尊)의 십호(十號)를 비롯하여, 대자비자(大慈悲者)․일체지자(一切智者)․일체견자(一切見者)․개도자(開道者)․대사문(大沙門)․대성인(大聖人)․양족존(兩足尊)․천중천(天中天)․인중인사자(人中人獅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3. 옛길의 발견자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 pp.104 ff; 성읍경(대정장 II p.80中; II p.718上).]

초기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자기 자신보다 당신이 깨달은 법에 더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 법 중심의 사상이 확립되어 있는 것이다. 당신이 깨달은 법은 결코 당신이 스스로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의 정각자(正覺者)들이 가르쳐 놓은 것을 다시 발견하여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붓다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에 법은 있었고 그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법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법의 증득은 어느 누구나 가능한 셈이다. 그래서 석가모니 붓다 이전 머나먼 과거에 몇 분의 정각자들이 있었고 미래엔 미륵불이라는 정각자가 탄생하리라는 예언이 있다. 결국 정각자의 탄생은 법의 실현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했던 때를 회상하며 옛길의 비유를 들었다. 


“숲 속을 헤치고 가던 여행객이 옛날 사람들이 다녔던 오래된 길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가보니 옛 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는 무척 아름답고 융성한 도시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이 여행객은 되돌아와서 왕에게 보고했다. 왕은 신하와 백성들을 보내 그 도시를 재건하게 하여 거기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했다.”


모든 정각자들의 가르침은 동일하며 석가모니 붓다는 과거의 정각자가 발견한 법을 다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붓다는 이 비유를 말하고 나서 옛길이 팔정도(八正道)라고 설명한다. 팔정도는 자신이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과거에 붓다들이 갔던 길을 다시 발견한 것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를 가리키는 것으로 초기불교의 수행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광대한 불교의 체계를 삼학(三學)으로 요약되는데 팔정도 체계 속에 계․정․혜(戒․定․慧) 삼학이 내재해 있다.


정어(바른 말), 정업(바른 행위), 정명(바른 직업)은 세속에서 마땅히 지켜야할 윤리덕목으로 자신의 외적인 활동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정정진(바른 노력), 정념(바른 명상), 정정(바른 정신집중)은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다. 그릇된 사고나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정지(靜止)하여 내면을 가꾸는 것이다. 정견(바른 견해), 정사(바른 생각)은 육체와 정신이 정화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지혜로서 인식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붓다는 팔정도를 통하여 고통에서 벗어난 열반에 이룰 수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상 팔정도의 실천을 보면 일상생활 가운데서 종교적 이상의 인간상을 구현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의 힘이나 신비적인 힘에 의해 구원받는 것과 같은 인간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4. 거문고 비유:중도 [참고 경전:AN III pp.374 ff; 사문이십억경(대정장 I p.611下).]

인간은 극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어떤 한가지 생각을 하게되면 그 생각을 더욱 굳건히 하고 다른 생각은 무시하거나 부정한다. 이렇게 고정화된 자신의 생각에 근거하여 행동하게 되면 극단주의자가 되고 만다. 정치적으로 보면 좌익사상가와 우익사상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한 개인의 생애를 살펴보더라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판이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특정 개인만 총애하고 다른 사람은 싫어하다가 어느 날 변하여 총애하던 사람을 격심하게 비난하는 것을 접하게 되면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극단에 치우치기 좋아하는 지를 알 수 있다.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직후 최초의 설법에서 중도를 가르치고 있다.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중도를 가르치고 있다. 고타마(Gotama)는 정각 직전 6년 간의 엄격한 고행이 마치 극단적인 쾌락주의 삶과 마찬가지로 무의미함을 자각하고 포기한다. 그리하여 열반에 이르는 길로 중도(中道)를 수행한다. 여기서 중도란 양극단(兩極端)을 떠난 중용의 길로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 할 수 있는 정도(正道)를 말한다. 쾌락적인 생활은 俗의 생활에 매몰되어 聖의 세계와 단절된 삶을 말하고 고행은 속의 생활을 단절하고 성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두 유형의 삶을 피하는 것이 중도이다. 聖俗의 조화로운 관계를 표출한 것이 중도라고 할 수 있다.

  
붓다의 제자 중 소나(Sona)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붓다의 가르침에 감화되어 출가한 후 매우 열심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의 열정에도 불구하고 수행의 진전은 더디었고 마침내 자포자기 상태에 빠지게 된다. 출가 수행의 생활은 그만 두고 환속하여 수행자에게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보시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붓다를 찾아가 이러한 생각을 알리자 붓다는 거문고 줄의 비유로써 중도를 설명하고 있다.


“거문고 줄은 지나치게 팽팽해도, 그와 반대로 지나치게 느슨해도 좋은 소리를 낼 수 없다. 거문고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도 극단적인 고행이나 지나친 쾌락적인 행동을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팔정도이다.”


소나는 붓다의 중도 가르침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출가 수행에 대한 지나친 열정도 오히려 조바심만 야기하여 결국 수행의 포기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야기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중도는 편협되게 치우쳐 생각하기 쉬운 것을 경계하는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일상사 속에서 어느 것이 중도에 근거한 행동인 지 분명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단순히 양극단의 중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 연꽃의 비유:완전한 삶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I p. 139.]

성인은 세간 속에 살면서도 번뇌를 단절하고 지혜로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세속에 오염되지 않는다. 이러한 성인의 삶을 붓다는 연꽃으로 비유하고 있다. 연꽃이 연못에서 태어나 수면 위로 성장하여 더러운 물에 오염되지 않듯이 여래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성장하였지만 이 세상의 더러움에 의해 오염되지 않고 세상으로부터 초월하여 머문다 이것이 초기불교 경전에서 묘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세속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측면에서 물질적인 복지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는 대승불교의 보살상과 대조적이다.   


붓다가 현실의 사회문제 내지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한 예는 무척 드물다. 설령 개입하더라도 그 방식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극적인 것이다. 붓다는 인도 전통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하였다. 카스트제도는 엄격한 신분계급 제도로 출생에 의해 개개인의 위치가 정해지고 죽을 때까지 신분 변화가 용납되지 않는다. 자신이 속한 계급 이외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최근에 계급이 서로 다른 두 남녀가 연애하다가 발각되어 친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 일어날 정도로 지금도 인도에서는 엄하게 지켜지고 있다. 


이러한 세습적인 신분제에 대해 붓다는 행위에 의거하여 인간의 지위가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출생에 의해 브라흐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業)에 의해 천한 사람도 되고 행위에 의해 브라흐만도 된다.”


붓다는 전쟁 등 사회 문제의 근본 원인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의 이기심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으므로 개인적인 수행의 완성을 가르치고 있다. “수천 번 전쟁에서 수천의 사람을 정복하는 자보다 자신을 정복하는 자가 가장 위대한 정복자이다.” 요컨대 붓다는 전쟁 문제에 대하여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고 또한 조직적인 차원에서 문제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고 있다. 붓다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전쟁 등 사회문제의 근본 원인은 그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개개인이 이기심에 근거하고 있다는 전제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사회 변혁보다 먼저 개인의 변혁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다.

6. 연못의 연꽃:설법의 결심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 pp.136 ff; 증일아함경(대정장 II p.593上).]

29세 출가를 한 붓다는 35세에 정각을 이룬다. 정각 직후 붓다는 자신이 이제 막 깨달은 법을 사람들에게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한다. 당신이 깨달은 법은 심오하여 욕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과연 자신의 설법에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이지 않고, 단지 당신 스스로만 피곤하고 고달프게 될 것이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으로 설법을 주저하고 있을 때 브라흐만 사함파티(Brahman Sahampati)라는 신이 붓다의 마음을 읽고 그에게 다가서서 법을 설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을 불교전승에서는 범천권청(梵天勸請)이라고 이름한다.  


붓다가 설법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멸망해 벌릴 것임을 걱정한 범천은 붓다에게 이 세상에는 눈에 티끌이 적게 가리어 있은 사람도 있으니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해 달라고 간청한다. 붓다는 범천의 말을 듣고 세상 사람들을 관찰했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양하여 한결 같지 않았으니 비유하면 연못의 연꽃들과 같았다. 연못에는 푸른 연(蓮), 붉은 연, 흰 연 등이 있다. 어떤 연은 물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라고 있고, 또 어떤 연은 수면과 같은 수준까지 자라고 있다. 또 어떤 연은 수면 위로 올라와 더러운 물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연못의 연꽃은 아름답지만 연꽃이 자라는 연못 그 자체는 깨끗하지 않다. 연못은 더러운 이 세상을 비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는 욕망이 적은 사람, 많은 사람, 가르침을 기꺼이 받으려는 사람, 그렇지 않은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 머리가 둔한 사람 등 천차만별이다. 


붓다는 자신의 설법에 관심을 보이며 열심히 귀를 기울일 자가 있음을 알고 법을 설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제 不死의 문을 열겠노라. 귀 있는 자 들어라.” 설법의 첫 번째 대상으로 붓다가 삼은 것은 물 속에서 벗어나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는 연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연못의 연 중 어떤 연에 해당하는 지 반성할 때이다. 붓다의 최초 설법의 결심은 우리 중생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만약 붓다가 법을 설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우리는 그의 깨달음을 몰랐을 것이고 苦에서 벗어나는 길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의 커다란 자비(慈悲)의 마음에 감사하고 그의 가르침을 소중히 여겨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연꽃의 비유와 관련하여 한가지 덧붙인다면 불교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삶은 비록 연못에 있지만 수면 위로 올라와 아름다운 꽃을 피우며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는 연꽃의 삶이다. 그래서 불교의 꽃은 연꽃이다. 

 

7. 싱사파 숲의 나뭇잎과 손안의 나뭇잎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V pp.437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108上).]

불교 경전은 방대하다. 붓다의 육성을 전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초기경전만 해도 그 분량은 상당하다. 45년간 붓다가 쉬지 않고 법을 설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경전의 방대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방대한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싱사파 숲의 비유에서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목적으로 설해졌고 그리고 그 설법의 범위를 알 수 있다.


붓다가 코살라(Kosala)의 수도인 코삼비(Kosambi)에 있는 싱사파(Siṃsapa) 라는 숲에 머물고 있었다. 붓다는 나뭇잎 몇 개를 손안에 쥐고 제자에게 물었다.


“내 손안에 있는 나뭇잎 수와 싱사파 숲의 나뭇잎 수 중 어느 것이 많은가?” 제자들이 당연히 숲의 나뭇잎 수가 많다고 하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바를 여러분에게 조금밖에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 왜 그러한 것들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붓다가 알고 있는 지혜의 양은 숲의 나뭇잎처럼 방대하지만 붓다가 우리에게 가르친 양은 한 움큼의 나뭇잎 수와 같다. 그럼 왜 붓다는 우리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하지 않은 것일까? 붓다가 알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들이다. 붓다의 유일한 관심사는 고의 해결에 있었다. 바른 지혜에 의하여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하여 완전한 행복에 이를 것을 원했던 것이다. 따라서 고의 해결에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하여서 붓다는 그 답을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순수하게 이론적이고 현실과 유리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하여 함구하고 있는 붓다의 자세에서 그의 실제적인 설법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독화살을 맞은 사람의 비유와 함께  음미하면 그 뜻이 더 분명해질 것이다.

 

8. 자신과 법을 섬으로 삼아라 [참고 경전: Dīgha Nikāya II p.100; 유행경(대정장 I p.15中).]

전통적으로 불교는 다른 종교 도덕과 달리 개인의 자율이 무엇보다도 중시된다. 카톨릭의 중앙집권적인 조직체계와 비교해 보면, 불교의 자율적인 운영체계는 자못 특징적이다. 수행자 개개인의 자율이 이렇게 강조되는 것은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 중의 하나인 자주․법주(自洲․法洲)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붓다의 사후 불교도들은 누구를(또는 무엇을)의지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설해지고 있다.


우안거 직후 붓다에게 격심한 질병이 발생하였다. 그 질병의 고통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격심한 것이었다. 붓다는 이 병고를 무사히 극복하였다. 아난다는 붓다의 병고에 무척 놀랐지만, 붓다가 교단에 관해 어떤 유언을 말하지 않고 그냥 입멸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아난다의 고백에 대하여 붓다는 승단의 존속․유지의 문제를 부정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아난다여! 비구 승단(Saṃgha)이 나로부터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아난다여, 나는 이미 법을 설했다. 무엇인가를 비밀스러운 가르침으로 남겨놓지 않고. 아난다여! 여래는 법에 관하여 사권(師拳:ācariya-muṭṭhi)을 만들지 않았다. 아난다여, 요컨대, 만약 누군가가 ‘나는 비구 승단을 지도한다’ 거나 ‘승단이 나에게 의지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로 하여금 승단에 관하여 어떤 말을 하도록 요청하여라. 그러나 여래(Tathāgata)는 자신이 승단을 지도한다거나 승단이 자신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왜 여래가 승단에 관하여 어떤 말을 해야 하겠는가?”


아난다는 붓다의 임박한 죽음을 목격하고 교단의 유지라는 관심사에서 붓다에게 교단의 존속에 관하여 질문을 하게 된다. 붓다는 아난다의 기대와는 달리, 승단의 유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개개인의 수행과 자율을 설하게 된다.


조직 내에서의 개인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자존성을 강조하게 된다. 붓다는 후계자 지정 대신에 아난다에게 가르친다. “너희들 개개인은 자신을 자신의 섬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 너희들 개개인은 법을 자신의 섬으로 만들지, 다른 어떤 것도 의지처로 삼지 말라.” 이상의 인용문에서 ‘자기 자신을 자신의 섬’으로 삼으라고 하는 것이나 ‘법을 자신의 섬’으로 삼으라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어떤 권위자나 조직의 수장에게 의존하지 말고 자기 자신이 먼저 자존과 자립을 확보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법주․자주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붓다는 사념처(四念處)를 가지고 설명한다. 사념처란 신념처(信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를 말한다. 정신적인 측면에서나 육체적인 측면에서 한 개인의 행동거지와 거기에 기인한 여러 심리상태를 빠트림 없이 관찰하는 것이다. 사념처의 수행은 철저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에는 어떤 외적인 권위나 조직의 필요성은 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노력에 의해 스스로를 계발하는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만약 외형적인 조직이나 스승이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수행자가 바른 수행을 하기 위할 때일 뿐이다. 결코 어떠한 조직도 스승도 수행자가 추구하는 열반을 증득시키지는 못한다. 붓다 자신도 이러한 스승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밝혔다. 자기 자신은 결코 길을 안내하는 도사(導師)에 불과할 뿐이라고 자신의 역할과 한계를 분명히 하였다.


자주(Atta-dīpa)와 법주(Dhamma-dīpa)는 한역 경전에서 자등명(自燈明)과 법등명(法燈明)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dīpa라는 말 자체가 ‘등불’과 ‘섬’이라는 두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되고 있는 것이다.


제2부:붓다의 가르침
 

1. 장님이 코끼리 더듬기:공허한 논쟁 [참고 경전:Udāna 6. 4.]

우리는 왕왕 자신의 견해나 지식을 믿고 다른 사람의 견해나 지식을 부정한다. 그래서 심한 말다툼이 일어나고 인간 관계가 서로 불편하게 되기도 한다. 특히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러한 논쟁을 자주 보게된다. 어느 견해가 옳고 다른 견해가 그른지 결론 내리지 못한 채 적대적인 감정만 남기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토론 문화에 익숙하지 못하여 생산적인 토론이 일어나지 못한 점을 고려할 때 이 장님과 코끼리 비유가 던지는 메세지의 의미는 매우 깊다. 붓다는 제자들이 우주의 기원과 같은 문제를 두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것을 다음의 비유를 설한다. 


“옛날에 어떤 왕이 신하에게 장님들을 모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장님들이 모이자 왕은 코끼리를 데리고 와서 그들로 하여금 만지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왕은 장님들에게 코끼리는 어떠한 모양의 동물인지를 물었다. 코끼리의 머리를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항아리 같다고 대답했다. 또 코끼리의 이빨을 만진 장님은 코끼리는 뿔난 소 같다고 대답했다. 또 코끼리의 귀를 만진 사람은 삼태기와 같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제각기 만진 것을 바탕으로 코끼리의 모습을 주장하면서 다투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논쟁하는 것도 이와 같다.”


우리들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며 양보하지 않는다. 자신의 견해가 무시되거나 부정되면 우리는 자기 자신이 무시된 것으로 여길 정도로 자신의 견해를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는 견해는 매우 부분적이고 조건 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할 때 우리는 보다 긍정적인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장님이 서로 협력하였더라면 좀 더 정확한 코끼리 모습에 접근할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2. 뗏목의 비유:가르침은 도구일 뿐 [참고 경전:Majjhima Nikāya I pp.134-5; MN i p.260;중아함경(대정장 I p.763中)]

붓다가 설한 비유 중 가장 널리 알려진 비유 중의 하나가 나그네와 뗏목의 비유이다. 앞서 우리는 장님과 코끼리 비유에서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투는 사정을 살펴보았다. 뗏목의 비유도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즉 어떠한 견해, 설령 그것이 붓다의 말씀일지라도 집착하지 마라고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강을 건너기 위한 뗏목에 비유하여 강을 건너면 그 뗏목을 버려야 하며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강을 건너가고자 했으나 저쪽 강가로 가는 배도 없고 다리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풀, 나무, 넝쿨과 나뭇잎을 엮어서 뗏목을 만들고 그 뗏목을 손수 저어서 저쪽 강가로 안전하게 건너갔다. 강을 건너간 다음 ‘이 뗏목으로 강을 건너올 수 있었으므로 이 뗏목을 짊어지고 가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면 뗏목에 대한 적절한 조치이겠는가? 강가에 뗏목을 두거나 떠내려보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가르침은 강을 건너면 버려야하는 뗏목과 같다. 나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버려야하는 뗏목과 같거늘 하물며 그릇된 가르침이야 두말할 나위조차 없는 것이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붓다의 위대함을 다시 엿볼 수 있다. 보통 교주나 이름난 학자들은 자신의 언설(言說)을 추종자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추종자들은 그 언설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집착한다. 그러나 붓다는 언설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무리 훌륭한 것일 지라도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우리 불자들도 경전을 공부할 때 불설(佛說)은 단지 열반을 얻기 위한 도구일 뿐이고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잘 명심하여야겠다.


이론이나 사상은 현상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언어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는 지식을 전달하고 전달받을 수 있다. 언어라는 것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어와 그 대상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과 상반되는 세계관을 만나면 우리는 분노하게 되거나 충돌하게 된다. 자신의 세계관의 벽을 허무는 것은 자아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느낄 정도로 관념에 집착한다. 사상의 대립은 갈등이나 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을 역사에서 많이 보아왔다. 종교간의 대립갈등은 지금도 쉽게 볼 수 있다. 중동에서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싸움이 그것이다. 

3. 코끼리의 발자국:사성제 [참고 경전:Majjhima Nikāya I pp.184 ff; 상적유경(대정장 p.464中).]

사성제는 붓다가 처음으로 법을 설한 내용이라고 많은 경전들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전들을 초전법륜경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설법을 주저했던 붓다가 처음으로 법의 바퀴를 굴렸다는 의미이다. 초전법륜경의 서두에 사성제를 코끼리의 발자국에 비유하고 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코끼리의 발자국이 가장 크고 넓어서 다른 동물의 발자국은 여기에 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사성제는 가장 넓고 커서 다른 모든 교리들을 포섭한다.” 


붓다가 설한 가르침은 십이연기(十二緣起), 삼법인(三法印),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등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모든 가르침은 모두 사성제(四聖諦)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사성제야말로 불교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사성제의 이해야말로 불교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 등 네 가지 진리를 의미한다. 고성제는 우리의 삶이 苦라는 진단이고 멸성제는 그 고의 원인이 욕망에 있다는 것이다. 멸성제는 고를 발생시킨 욕망이 제거되면 행복한 열반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이고 도성제는 그러한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사성제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르키고 있는 것으로 붓다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이었는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4. 강 중앙으로 흘러 들어가는 나무토막 [참고 경전:잡아함경(대정장 II p.314下).]

붓다가 큰 나무토막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 나무토막이 이쪽 강가에도 닿지 않고 저쪽 강가에도 닿지 않고 소용돌이에 빠지지도 않으며 썩지도 않고 흘러 내려간다면 큰바다에 다다를 것이다. 이쪽 강가는 육근(六根)이며 저쪽 강가는 육경(六境)이다. 소용돌이에 빠진다는 것은 속세의 일에 탐닉하는 것이다. 썩는다는 것은 도덕적 해동 규범을 지키지 아니하고 악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 비유의 가르침은 중도를 설명한 것으로, 중도에 의해 열반의 바다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무토막이 이쪽 언덕이나 저쪽 언덕에 닿아 정체하지 아니하고 강물을 계속 따라 흘러가면 결국 바다에 도달하는 것처럼, 우리도 육근과 육경에 집착하지 않고 세속의 일에 지나치게 탐닉하지 않고 도덕적으로 선한 삶을 살면 결국 열반에 이른다는 것이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가리키며 육경이란 육근의 대상이 되는 色, 소리, 냄새, 맛, 접촉의 대상, 사고의 내용을 말한다. 우리는 육근을 가지고 외부의 대상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눈 등 우리의 신체에 집착하기도 하고, 그 대상이 되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요즈음 여성사이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는 성형수술은 육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있다. 화려한 색상, 듣기 좋은 소리, 값비싼 향수, 맛있는 음식 등에 현대인은 정신을 팔고 있다. 우리의 눈과 귀는 무의식적으로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에 매몰되어 있다. 

 

5. 갈대단 비유:연기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 p.113; 잡아함경(대정장 II p.81上).]

연기(緣起)는 붓다의 가르침 중 가장 핵심 교리 중의 하나이다. 어떤 경전에 의하면 붓다는 십이연기를 통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또 어떤 경전에 의하면 십이연기가 붓다의 정각 내용이라고 한다. 여하튼 연기는 불교 사상사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초기불교의 연기는 부파불교, 대승불교에 이르면 다양하게 해석되어 각종 연기설이 발달하게 된다.


연기의 가르침은 한편으로 복잡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 매우 상식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제자 중에 어떤 이가 연기를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하자 붓다가 연기는 심오하여 그렇게 단순히 이해할 것이 아니라고 바로잡아 주는 경전이 있다. 이렇듯 난해한 연기의 가르침을 갈대단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 두개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그 두개의 갈대단은 서로 의존하고 있을 때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此有故彼有). 그러나 만약 두 갈대단을 분리한다면 서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此無故彼無).”


연기란 ‘...때문에 태어나는 것’, ‘...을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모든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이나 조건 때문에 생기는 것”이고,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서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연기의 가르침은 심오하고 방대하여, 그 적용범위도 또한 다양하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갈대단 비유에서 우리는 연기를 상의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와 남은 두 개의 갈대단과 같아 남의 존재 없이는 결코 나의 존재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해 이 세상은 모두 서로 서로 관계를 지니며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른 관계에서 행복한 삶이 보일 수 있다. 연기는 사물 내지 현상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붓다가 연기를 통해 가르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직면한 괴로움은 그 자체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인을 제거한다면 고(苦)라는 심리 현상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고는 神과 같은 절대자가 우리에게 준 것도 아니고 원인이 없이 우연히 발생한 것도 아닌 것이다. 일련의 잘못된 인식, 즉 무명(無明)에 의해서 노사(老死)라는 고가 야기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십이연기이다. 십이연기란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이다. 십이연기의 근본 목적은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인 ‘고(苦)’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고, 또 어떻게 해서 사라지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6. 세 가지 불꽃 [참고 경전:Majjhima Nikāya I pp.359 ff; 포다리경(대정장 I p.773上).]

붓다가 활동하였던 인도는 매우 무더운 날씨를 가진 나라이다. 따라서 인도인에게 있어 더위는 커다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붓다의 설법에는 불과 관련된 비유들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붓다에 의하면 우리 범부들은 세 가지 불꽃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즉 탐욕의 불꽃, 성냄의 불꽃, 무지의 불꽃 등에 의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의 작용을 횃불의 위험에 비유하고 있다. 


“마른 풀에 불을 붙인 횃불을 들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만약 손에서 횃불을 재빨리 떼지 못한다면 그 불은 손을 태울 것이다. 혹은 신체를 태워서 격심한 괴로움을 받을 것이다. 욕망은 건초의 횃불과 같은 것으로 괴로움을 준다. 따라서 욕망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아 세속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상 욕망의 횃불 비유는 분노나 무지에도 해당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주위에서 욕망에 사로 잡혀 부정한 짓을 행하여 언론 매체에 오르내리는 사람을 본다. 일시적인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발산하여 평생을 후회하는 사람도 흔히 볼 수 있다. 무지에 빠져 그릇된 미신이나 속임수에 빠져 고통받는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은 많은 번뇌 중에서 탐․진․치(貪․瞋․痴)는 가장 세력이 왕성하여 쉽게 경험된다. 더위보다 추위가 문제가 되는 중국인들은 세 가지 불꽃이라는 말 대신 세 가지 독(三毒)이라는 말로 표현하여 탐․진․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사람이 화를 내면 아드레날린 또 노르아드레날린이라는 호르몬이 몸 속에 분비되는데, 이 호르몬은 독성이 강하여 몸 속의 세포나 기관 등을 공격한다고 한다. 결국, 분노는 상대방에게도 해를 끼치지만, 그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의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분노의 위험성이 결코 비유로만 끝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화를 내거나 욕망이 있으면 우리의 두뇌는 매우 분주하게 된다. 두뇌의 활동량이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것이다. 일을 한만큼 열량은 증대되므로, 머리는 뜨거워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이다. 동양의학에서 건강의 비결로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뜻하게”라는 말이 있다. 탐욕과 분노로 머리가 더워져 있으니, 건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7. 대양의 물과 중생의 눈물:무상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 pp.179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240下).]

불교의 윤회관에 의하면 우리는 나고 죽기를 반복한다. 전생에 지은 업에 의거하여 현생의 몸을 받고 현생의 업에 따라 내생의 몸을 받는다. 사성제중 고성제는 우리 중생의 삶이 고(苦)라고 진단하고 있다. 붓다는 이러한 고로 가득찬 윤회의 실상을 넓고 깊은 대양에 비유하고 있다. 생사 윤회 속에서 한 개인이 흘린 눈물은 4대양의 물보다 비할 바 없이 많을 정도로 윤회는 고통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우리들은 길고 긴 전생 속에서 수없이 많은 부모의 죽음을 겪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또 우리는 생사 윤회의 반복 속에서 수 없이 많은 자식의 죽음을 겪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절친한 친구의 죽음도 있었을 것이고 친척의 죽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면서 흘린 눈물은 오대양의 물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특별히 무수한 세월을 통하여 맺은 부모자식 간의 인연에 관한 비유도 여기에서 소개하면 적절할 것이다. 이 세상의 흙으로 대추씨 만한 크기로 환(丸)을 만들어서 과거 세상의 부모를 센다고 하여도 그 환이 모자랄 정도로 우리는 헤아리기 어려운 과거로부터 부모인연 자식인연을 맺으며 서로서로 사별할 때마다 우리는 숱한 고통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현재 우리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여 현생에서 만의 고통을 경험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는 전생에서 겪은 고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셈이다. 지금과 같이 계속 살아간다면 우리는 앞으로 계속 더 많은 이별의 눈물을 흘릴 것이므로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8. 독화살을 맞은 사람 [참고 경전:Majjhima Nikāya I pp.427 ff; 전유경(대정장 I p.804上).]

우리는 종종 우주의 기원이나 종말 또는 죽고 난 이후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고 사색하기도 한다. 현대의 발달된 과학에서는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이론을 제시하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인간의 사후 존재나 사후세계에 대하여 다양한 믿음이나 이론이 있지만 여전히 모든 이가 한결같이 받아들이는 것은 없다. 한마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논의는 공허하고 결론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지금 여기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은 고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무관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독화살의 비유가 전하려고 하는 교훈이다. 


말룬키아풋타(Māunkyāputta)라는 수행자가 이상과 같은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붓다가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만이었다. 그래서 어느 날 그는 붓다를 찾아가 붓다가 이런 문제에 관하여 답을 주지 아니한다면 붓다를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붓다는 상념에 젖어 있는 제자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독화살에 맞은 사람의 비유를 말했다. 


“말룬키아풋타여! 여기 독화살에 맞은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그때 그의 친구들은 그를 위해 급히 의사를 데리고 왔다. 그러자 그는 ‘나를 쏜자는 누구인가? 나를 쏜 화살은 어떤 활인가? 화살은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가? 화살의 재료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이 해결되기까지는 의사가 독화살을 뽑아서는 안된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말룬키아풋타여! 그는 그런 것들을 알기 전에 죽지 않겠느냐?말룬키아풋타여! 세계는 유한인가 무한인가?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가 별개인가? 인간은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등의 문제에 대답한다고 해서 우리들의 인생고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현재 여기서 苦를 우선 해결해야한다.”


말룬키아풋타가 알고자 했던 질문들은 누구나 한번씩 의문을 가져보았을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문제에 정신을 집중하지 말고 지금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우리 발등의 불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온갖 논의에 정신을 팔며 살아가고 있다.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에 따라 먼저 고의 실상에 눈과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가르침이다. 

9. 비파의 비유:무아 [참고경전:Saṃyutta Nikāya IV pp. 197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312中).]

우리는 언제나 자아의식(自我意識)을 가지고 생활한다. 나(我)란 존재가 내 몸 어딘가에 있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다. 영혼과 같은 실체가 자신의 내부에 머물면서 모든 사고와 감정을 그리고 행동을 감독하고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라는 존재는 독특하고 유일한 존재로 다른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여기는 자아의 의식은 고를 발생시키는 원인이 된다. 즉 자아의식은 분리의식으로 나와 남을 분리시키고 상대방을 경쟁상대로 여기게 된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우리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느끼며, 자만심과 질투심을 가지게 된다. 요컨대 먼저 붓다의 무아설(無我說)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붓다는 비파의 비유로 뿌리깊은 자아관념을 없애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비파 소리를 들은 왕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이렇게도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것이 무엇이냐?”신하들이 그것은 비파라고 대답하자 왕은 비파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신하가 비파를 가져오자 왕은 비파말고 그 소리를 가져오라고 명했다. 신하들은 이 비파는 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으로 연주자에 의해 적당히 연주될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고 대답했지만, 왕은 그 음악 소리를 찾기 위해 비파를 조각조각 내었지만 아무 것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불태워 강물에 띄워 보냈다.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五蘊), 즉 색(色:육체), 수(受:감정), 상(想:인식), 행(行:의지작용), 식(識:의식) 하나 하나를 쪼갠다고 해서 “我”가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왕의 어리석음은 사물이나 현상을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에 말미암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연관 없이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서로서로 얽혀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연기이다. 특히 우리는 모두 자아라는 관념 내지 자아의식을 가지며 살아간다. 나와는 독립된 존재가 있어 사고나 감정이나 행동을 움직이고 있다고 여긴다. “나”라는 존재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므로 타자와 경쟁 관계에 있다고 당연히 여긴다. 뿌리깊은 이기심이 자리잡게 된다. 이기심은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업의 배후자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 의하면 “나”라는 것은 육체(色) 정신 (受想行識)의 배후에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요소들이 적절히 결합될 때 “자아의식”이 발생한다고 가르친다. 비파의 음악 소리가 개별적으로 비파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가 굳건하게 가지고 있는 자아라는 고정관념, 즉 이기심을 제거하기 위해 이런 가르침을 베풀고 있다. 


무엇인가 하는 자아(自我)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 중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것은 무아(無我)이다. 무아의 가르침은 불교사에서 윤회와 같은 가르침과 상충되는 것 같아 부파불교 시대에서는 다양한 해결방안이 제시되었다. 붓다 당시에도 외도들은 무아의 가르침을 곡해하여 붓다를 허무주의자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무아의 가르침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는데 가장 평면적인 이해 방식은 그릇된 자아관념을 제거하기 위함 가르침이다. 

 10. 무거운 짐 내려놓기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I pp.25 f; 잡아함경(대정장 II p.19上).]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은 힘든 일이다. 만약 그 짐이 무거울수록, 그리고 가야할 길이 멀수록 짐을 지고 가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할 것이다. 따라서 그 무거운 짐을 벗어 놓으면 갈 길이 훨씬 쉬워질 것이다. 붓다는 우리에게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괴로움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있다. 


“무거운 짐이란 무엇인가? 생을 구성하는 오온이 무거운 짐이다.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재생의 과보를 초래하는 애착과 탐욕과 환락에 빠지는 것이다. 환락에 빠지고 몸을 태우고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를 일으킨다. 이것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은 무엇인가 이른바 아무개라는 성과 이름을 가진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은 태어나서 사는 동안에 즐거움과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명을 마친다. 이런 사람을 일러 무거운 짐을 진 짐꾼이라고 말한다.”


오온이란 색, 수, 상, 행, 식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인자다. 색은 육체를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작용을 일컫는 것이다. 한마디로 심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오온을 자신으로 여기고 애착하고 보호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오온을 붓다는 무거운 짐으로 비유했다. 짐을 진다는 것은 오온에 대한 애착이며, 그 반대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짐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범부들은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힘겹게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은 오온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소유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태도이다. 좋지 아니한 것은 버리라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재빨리 버릴 줄 안다. 우리가 오온을 소중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비록 그 짐이 무거워도 짊어지고 가려고 할 것이다. 


붓다는 그 오온이라는 짐을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오온을 종기나 고름과 같이 더럽고 괴로움을 야기 시키는 것이라고 하여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짐을 내려놓기 위해 우리는 먼저 오온을 자신 내지 자신의 일부로 여기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애착이라는 작용의 실상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육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자신의 육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야 할 것이다. 육체를 아름다움으로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붓다는 육신이 부정하다고 하는 부정관을 가르친다. 티벳이나 동남아시아의 수행자들은 사람의 뼈를 늘 가까이 두며 육신의 실상을 깨달아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육체는 지혜를 받아들이는 그릇일 뿐이므로 그릇을 늘 깨끗이 비워두고 깨끗이 할 필요는 있지만 그릇인 몸을 목적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1. 소금 덩어리 [참고경전:Aṅguttara Nikāya III pp.99; 염경(대정장 I p.433上).]

자신이 지은 업의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이전시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한다. 그러나 업을 운명론이나 결정론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은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조각의 소금 덩어리가 작은 그릇의 물 속에 들어가면 그 물은 짜게 될 것이다. 같은 양의 소금이 갠지스 강에 녹는다면, 그것은 강물을 짜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 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까지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다르다.  

 

제3부:수행과 실천

 

1. 눈먼 거북이 널빤지 만나기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V pp.456 ff; Saṃyutta Nikāya II p.263;잡아함경(대정장 II p108下).]

윤회에 의하면 5종류의 중생(지옥에 사는 중생, 아귀, 축생, 인간, 천상에 사는 신)이 있다. 여기 5종의 중생에 아수라를 더하여 6도 중생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중생은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후생을 받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축생이 죽어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인간이 죽어 아귀의 몸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자신의 업에 따라 생사를 반복하면서 여러 종류의 몸을 받는다. 물론 이런 생사윤회에서 벗어난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여러 중생 중에서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을 성취할 수 있는 최적의 중생은 인간이라고 한다. 지옥 중생, 아귀, 축생은 너무 괴로워 열반을 성취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천상의 신은 너무 풍족하고 즐거워 깨달음의 마음을 내지 못하는데 인간은 고락이 격심하지 않으므로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다.


중생이 윤회하면서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보여주는 것이 눈먼 거북이 비유이다. 붓다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멍이 하나난 널빤지를 커다란 대양에 던졌다고 하자. 그리고 그 넓은 바다에는 눈먼 거북이가 한 마리 있어 100년에 한번씩 해면 위로 머리를 내민다고 하자. 그 눈먼 거북이가 해면 위로 떠올라 널판지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는 일이 어느 정도 가능할까?” 제자들로부터 거의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자 붓다는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으니, 그것은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 출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는 비유를 또 하나 살펴보자. 붓다는 한 때 손톱 끝 약간의 흙을 집어 들고서 제자들에게 물었다. 손톱 끝으로 집어든 흙과 땅위의 흙 중 어느 것이 더 많으냐고 묻는다. 제자들이 땅위의 흙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대답하자 붓다는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태어난 중생의 수는 매우 적고 인간이 아닌 중생으로 태어난 중생의 수는 훨씬 많다.”며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얼마나 힘든가를 말하고 있다. 물론 비유의 요지는 인간으로 태어날 때 열심히 수행하여 고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인간은 짐승과 같은 짓을 하기도 하여 지탄을 받는다. 이 비유를 받아들이면 인간으로 태어난 지금 우리의 삶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되새기게 된다. 거북이가 살고 있은 물밑은 삼악도(지옥, 아귀, 축생)를 가리키고 있다. 삼악도에서 벗어나 인간이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염두에 두면 설령 더 나은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악도에 다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선한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악도에서 벗어나는 길은 불법을 실천하는 것이다.  


지구상의 생물이 모두 몇 종류인지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수치임에 틀림없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150만 여 종류라고 한다. 이 수치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150만 분의 1의 확률을 돌파하여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엄청난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날 확률은 1조 분의 1이다. 인간은 그렇게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행운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설령 인간으로 태어나더라도 붓다의 가르침과 인연이 없는 곳에 태어나거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인간으로의 출생과 불법의 만남의 중요성을 감사히 여기고 현재를 소중히 하며 한 순간 한 순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열반의 증득에 힘써야 할 것이다. 

2. 날카로운 창보다 강한 것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 pp.264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344下).]

붓다는 제자들에게 매우 날카로운 창을 상상하라고 제안한 뒤, 이 날카로운 창을 맨 손으로 구부리거나 토막내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묻는다. 제자들이 가능하지 않을 뿐더러 그리할 자가 있다면 헛되이 고생만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에 붓다는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자비심으로 마음을 해탈시키면, 어떠한 귀신도 그 수행자를 해치려고 하여도 헛된 수고만 하는 셈이 될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일체 중생에 대하여 자비심을 갖추고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존재도 (여기서는 귀신) 그를 해칠 수 없음을 가르치고 있다. 사랑이 칼보다도 더 강하다는 말이 이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자비심을 갖추고 있으면 어떠한 해를 입지 않는다는 가르침이 다른 경전에서는 도적의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집을 도적은 공격하듯이, 자비심을 갖추고 있지 않은 수행자를 귀신들이 공격하기 쉽다. 그러나 남자가 많고 여자가 적은 집을 도적은 공격하기 어렵듯이, 자비심으로 마음을 해탈하려는 수행자를 귀신들이 공격하기는 어렵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각각 100그릇의 음식을 공양하는 것보다 아침 점심 저녁 중 황소를 끌 정도의 짧은 시간일지라도 자비심으로 마음을 해탈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자비심의 효능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 

3. 해가 떠오르는 비유:좋은 친구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V pp.29 ff.]

좋은 친구를 갖는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가 그립고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친구가 반가운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 때 사귀었던 친구들은 어떤 목적의식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이해관계를 염두에 두지 않고 사귀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해득실에 따라 크게 좌우되지 않았던 것이다. 신의가 돈독한 친구는 그 어떤 보배도 소중하다. 그래서 좋은 친구 하나를 사귄다면 그 인생은 의미가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더 나은 세계를 향하여 같이 동행하는 친구가 있다면 서로 많은 용기를 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무섭고 외로운 일이다. 아무리 그 길이 옳다고 믿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그 길을 끝가지 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이때 뜻을 같이하는 동행자가 있다면 그 여로는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붓다와 제자들의 하루 생활은 해가 떠오르기 전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붓다는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비유하여 좋은 벗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먼저 동쪽 하늘이 밝아온다. 그리고 나서 햇빛이 쫙 비치면서 해가 떠오르고 어두움이 사라진다. 즉 동녘이 밝아오는 것은 해가 떠오르는 징조이다. 마찬가지로 팔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에 이르기 전에 징조가 있다. 그 징조는 훌륭한 벗을 사귀는 것이다. 선우(善友)를 가지고 있는 수행자는 오래지 않아 팔정도를 수행하여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인격을 알려면 그 친구를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느껴진다. 하물며 최고의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조언자의 존재는 얼마나 더 소중하겠는가? 진리를 추구하는 선우들의 모임이 승가이다. 승가가 삼보(三寶:佛․法․僧)중의 하나로 소중히 여겨지는 것은 선한 벗이 없이는 진리의 실현이 어렵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를 구하여 사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다른 친구들에게 선우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만약 같이 동행할 선우가 없다면, 혼자서 용감하게 가야 할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숫타니파타라는 초기경전은 가르치고 있다.

4. 늑대를 만난 거북이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V pp.178 f; 잡아함경(대정장 II p.311下).]

종일 먹이를 구하려고 쏘다니던 늑대가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왔다가 거북을 보 고 달려들었다. 그러자 거북은 목을 움츠리고 네 발을 모두 오므렸다. 굶주린 늑대는 거북의 단단한 껍질 때문에 물어뜯을 수가 없었다. 늑대는 거북의 둘레를 돌며 거북이 머리나 발을 내밀기를 기다렸다. 거북은 늑대가 옆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고 머리나 발을 내밀지 않고 늑대가 가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지친 늑대는 다른 먹이를 찾아 거북을 떠났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빈틈이 생기면 거북을 노리는 늑대처럼 악마는 마음의 빈틈을 엿본다. 눈, 코, 귀, 혀, 몸, 마음을 조심하여야 한다.” 


거북이 늑대를 두려워하여 머리와 발을 껍질 안에 감추어 보호하듯이, 우리 중생들도 눈 등 감각기관이 쾌락을 주는 대상에 정신이 팔려 악마와 같은 사악한 존재가 우리를 해친다는 이야기다. 언제나 거북이 머리와 손을 밖으로 내밀지 못한 채 살수는 없다. 단지 머리와 손을 내밀 땐 조심해야 하며, 어떤 대상에 정신이 팔려 자신을 해치는 자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한 상태로 되어서는 안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도 눈을 감거나 귀를 틀어막는 등 우리의 감각기관을 사용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단지 유념해야할 것은 눈이 어떤 대상에 집착하게 되면 오히려 해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귀 등도 마찬가지이다. 독버섯이 더 아름답고 화려해 보이지만,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독을 지니고 있는 위험한 존재이다. 


외계의 사물이나 현상에 의해서 눈 등 감각기관이 끌려 다니지 않도록 제어 할 수 있다. 감각이 일어날 때 마음이 함께 작용한다. 무엇인가를 볼 때 마음도 함께 일어나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 온갖 사고나 상상을 한다. 이리하여 마음은 산만하게 되고 온갖 망상 속에 사로잡히게 된다. 눈뿐만 아니라 귀, 코 등 다른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다. 외계의 대상을 향하여 무의식적으로 달려드는 모든 감각은 일단 정지하여 살펴보라고 이 비유는 가르치고 있다. 여우 앞에서 거북이가 자신의 팔 다리를 거두어들이고 고요하게 있듯이 눈 등 감각기관이 의식 없이 무작정 대상으로 향하여 가는 것을 제어하라고 하는 것이다. 밖의 대상으로 향하던 마음을 내면으로 돌리는 것이다. 

5. 화살보다 빠른 것 [참고경전:Saṃyutta Nikāya II p.265; 잡아함경(대정장 2 p.171上)]

나이 드신 어른들이 세월만큼 빠른 것이 없다며 자신들의 늙음을 한탄하는 것을 듣게 된다. 젊은 사람들은 세월의 빠름에 대해서 그렇게 느끼지 못한다. 어린아이들은 빨리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막상 나이를 먹게 되어 지나간 젊은 날들을 회상해 보면 모든 일들이 얼마 전에 일어났던 것처럼 생각되나, 산술적으로는 몇 십 년이 무상하게 흘러가 버렸다. 


세월의 신속한 흐름과 수명의 짦음을 경고하면서, 지금 당장 긴박한 마음을 내어 부지런히 수행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비유는 이렇게 시작된다. 


“매우 재주 있는 궁술사 4명이 활을 동서남북 사방으로 쏜다고 하자. 그때 손살같이 날아가는 활들이 땅에 들어지기 전에 모두 붙잡아오는 자가 있다면 그 활보다 빠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도 해와 달의 움직임만큼 빠르지는 않다. 귀신은 해와 달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그러나 그렇게 빠른 귀신도 사람 수명의 소진만큼 빠르지 않다.”


수명의 끝은 죽음이다. 죽음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된다. 출생한 자는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지위가 낮든 높든 모든 사람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로 사람의 수명이 과거 보다 길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더라도 사람의 육신은 죽어 부패할 수 밖에 없다. 


노인이 반드시 먼저 죽는 것은 아니다. 사고나 질병으로 젊은이가 죽는 것이나 심지어 갓 태어난 신생아가 죽는 일도 있다. 죽음은 언제나 불쑥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청춘의 자만에 빠져 시간의 소중함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지나 간 날들을 회상하며 회한에 빠진다.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의지력도 육신의 힘도 미약하여 간신히 육신의 보존에 급급하다. 살아 있는 동안, 특히 젊었을 때 온 힘을 다하여 인생의 의미를 추구하여 윤회에서 벗어나도록 수행해야한다고 붓다는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평균 수명을 대략 70세로 잡아보더라도 수면시간을 빼고 나면 실제로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은 훨씬 줄어들게 된다. 좀 더 긴장하는 마음으로 지금 당장 수행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독이 풀린 샘물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II pp.107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82中).]

어떤 목적을 설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한 대상에 집중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을 무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다른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가 추구하는 목적이 해로운 것이라고 듣더라도 그것을 단념하지 못한다. 어떤 대상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에 다른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각 시기마다 특정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려고 욕망한다. 사람마다 설정한 인생의 목표가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어느 것이 더 열등한가의 우위를 쉽게 판별하기 어렵다. 그러나 대체로 권력, 재산, 명예 등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대상이 되며, 그러한 것을 성취한 다른 사람들은 부러워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 재력, 명예를 쥔 자들이 그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사람들의 원망의 대상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권력에 오른 자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 불안하여 무력으로 탄압한다. 재력을 모은 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어떤 재벌의 회고록에 “재산을 모으는 것보다 유지하기가 더 힘들다.”라고 하는 자신의 경험을 쓴 것을 본 일이 있다. 근래 우리나라의 경제계에서 큰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업가들이 감옥에 보내지는 것도 목격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사람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연예인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고투하는 연예인들이 많다. 그러나 인기라는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들은 곧 잊혀지고 말 것이다. 결국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재산, 권력, 인기 등은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목표로 삼기에는 어딘가 부족한 점이 있지 않나 싶다. 붓다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길가에 맑고 시원한 샘이 있는데, 그 샘물에는 독이 풀어져 있다고 하자. 길 가던 사람이 피곤에 지치고 갈증이 나서 그 물을 마시려고 할 때 한 사람이 그 물이 맑고 시원해 보이지만 독이 풀어져 있으니 마시지 말라고 하면서, 만일 마시면 병고에 시달리거나 심지어는 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렸다. 그러나 그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을 마신다면 잠시는 시원하고 기갈을 면하겠지만 그 샘물의 독으로 인해 죽을 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들이 독이 풀려 있는 샘물은 아닌 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것이 독이 든 샘물인지 아닌 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는 붓다의 가르침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나에게 유익한 샘물이라고 확신이 설 때 마시는 조심성이 필요하며, 일시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독이 든 샘물이 아닌 지 분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로 한다.  

7. 광대의 과보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V pp.306 ff; 잡아함경(대정장 p.420上).]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은 대체로 좋은 일로 여겨진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주면 우리는 보람을 느낀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항상 그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으로는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해를 끼치는 것들이 있다. 마약이 대표적인 예가 되 것이다. 마약 복용자는 마약을 건네 받고 즐거워 할 것이지만, 결국 그는 마약 중독에 의해 결정적인 해를 입게 될 것이다. 그리고 뚜렷하게 해도 이익도 주지 않으면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이익을 주면서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후자로는 가난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을 위해서 무료 치료를 해주는 것과 같은 행위 일 것이다. 불교에선, 이것을 보시라고 이름한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한다고 모두 좋은 과보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오히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는지 모르지만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준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볼일이다. 최상의 행동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이다.


광대가 모여 사는 마을의 촌장이 붓다를 찾아와 물었다.


“우리에게 노래하며 춤추며 익살을 부리는 광대 짓을 가르쳐 준 나이든 광대들이 말하기를, 어린 광대들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익살을 떤 그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면 그 일의 공덕으로 인해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광대 짓을 하면 정말 그 과보로 천상에 태어나게 됩니까?” 붓다는 대답을 회피하려고 했지만 계속 묻는 바람에 마지못해 대답했다.


“옛날부터 이 마을의 광대들은 탐욕의 밧줄에 묶이어 탐욕을 부리고, 화의 밧줄에 묶이어 화를 내고, 어리석음의 밧줄에 묶이어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었소. 이를 보고 배운 어린 광대들이 구경꾼 앞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연출하여 사람들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었다면 어린 광대나 구경꾼들이 과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밧줄에서 풀려나겠소? 아니면 더욱 단단히 결박되겠소?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밧줄에 묶여 있는데 그 밧줄에 물을 자주 뿌리면 그 밧줄은 점점 조여들어 묶여 있는 사람은 더 고통을 받게 되듯이 광대들의 연기를 보고 웃고 즐긴 사람들은 더 탐욕스러워지고 더 성을 내고 더욱 어리석어 질 것이오?” 


탐(貪), 진(瞋), 치(痴)의 삼독에 빠져 있는 광대들의 우스꽝스러운 짓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번뇌를 야기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여기 경전에서 짐작되는 광대 짓의 내용이 음담패설 류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을 보고들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영향을 받아 따라하게 된다. 어린이들을 보면 그것을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우리는 텔레비전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유익한 정보와 오락을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우리 시청자들은 유익한 교육용 프로그램을 기꺼이 시청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광대 짓에 눈이 팔려 자신을 조여 오는 밧줄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8. 못에 던져진 돌 떠올리기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V pp.311 ff; 가미니경(대정장 I p.439下).]

우리 삶을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의 믿음이 존재한다. 각 개인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을 지니고 있다. 각 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 외에도 어떤 운동선수는 시합장에 갈 때 항상 목걸이를 해야 승리한다고 믿는 자가 있으며, 또 어떤 자는 어떤 식물을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고 믿으며, 또 어떤 자는 아침에 장례 차를 보면 행운이 생긴다고 믿는다. 헤아릴 수 없는 믿음들이 존재한다. 그러한 믿음들이 과연 옳은 지 그른 지 확연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러한 믿음들은 개인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것을 하니까 그런 결과가 발생하더라고 하는 인과법칙에 바탕에 둔 것이다. 어떤 한 일과 다른 일의 인과 관계를 보고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 믿음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인과 관계가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이 되지 않기 때문에 믿음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만약 그 사물들 사이의 인과관계가 참으로 검증이 된다면 교단은 하나의 법칙으로 될 것이고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어떤 믿음이 참으로 검증된 법칙에 거스르게 되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이 된다. 이런 거짓 믿음을 이용하여 돈을 모으는 자기 있다면 그는 사기꾼인 셈이다. 한 청년이 붓다를 방문하고 물었다. 


“저희 마을에 한 바라문이 있는데, 그는 어떤 神을 섬기고 있다고 합니다. 누가 죽었을 때 그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빌면 죽은 자가 하늘에 나게 된다고 합니다. 세존께서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붓다는 대답했다. 


“여기 한 쌍의 내외가 있다고 하자. 그들은 생전에 무지하고 게으르고 악한 일을 많이 하다가 죽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합장을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천상에 태어나라고 축원한다면 그들이 천상에 태어나겠는가? 비유하자면 저기 깊은 물에 무거운 돌을 던지고 사람들이 모여 합장을 하고 그 돌을 향해 축원한다면 그 인연으로 무거운 돌이 물 위로 떠오르겠느냐?”


악한 행위를 하면 악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가르침이 인과응보이다. 평소 악한 행위를 한 자가 받아야 할 나쁜 과보를 기도 따위로 바꿀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들이 지은 업은 반드시 그들 스스로가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리석은 믿음에 빠져있는 사람이 악한 자를 위하여 기도한다고 더 나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붓다는 계속해서 인과응보의 법칙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선한 행위를 많이 하다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모여 합장을 하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지옥에 날 것이라고 축원한다면 그들이 지옥에 태어나겠는가? 여기 기름이 든 항아리가 있다고 하자. 이 기름 항아리를 물에 던지고 사람들이 모여서 기름은 가라앉고 깨진 항아리는 떠오르라고 축원한다면 물에 뜬 기름이 가라앉고 깨진 항아리가 물에 뜨겠느냐?" 


이번에는 선한 행위는 선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강조하고 있다. 선인선과(善因善果)의 법칙을 기도 따위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흑주술(black magic)의 무능을 밝히는 부분이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어떤 결과가 초래한다는 믿음 만능주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믿음은 건전한 이성이나 뛰어난 통찰력에 근거한 법칙과 벗어날 때, 무익하거나 해를 가져올 수 있다. 

9. 물그릇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V pp.121 ff.]

물은 대상을 비추어주는 성질이 있다. 물의 작용 중 이런 작용 때문에 불교에서는 호수를 마음에 비유하기도 한다. 바람이 불면 호수에 물결이 일어나 주위의 사물들을 제대로 비추어 주지 못한다. 바람이 불지 아니하면 수면은 일그러짐 없이 온전하게 사물을 비추어준다. 물론 바람에 일어난 물결이란 번뇌가 일어난 마음이다.


“물이 담겨 있는 그릇에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 물감을 풀었다면 그 물에 얼굴을 비치고 관찰할 때 얼굴을 바르게 볼 수도 없고 바르게 알 수도 없다. 이와 같이 마음이 탐욕에 사로잡히면 자신에게 이로운 일도 분별하지 못하고 남에게 이로운 일도 분별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바르게 보지 못할 것이다. 여기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이 끓고 있다면 김이 나고 거품이 들끓어 그 물에 얼굴을 비추고 관찰할 때 얼굴을 바르게 볼 수도 없고 바르게 말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분노에 사로잡히면 자신과 남을 위한 이로운 행동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여기 물에 담긴 그릇에 물풀과 이끼가 끼여 덮여 있다면 그 물에 얼굴을 바르게 비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이 어리석음에 덮여있다면 마음은 제대로 분간하지 못한다.”


깨끗한 그릇에 깨끗한 물이 담겨져 있을 때 사물을 가장 잘 비추어 준다. 건강한 육신에 맑고 밝은 마음이 깃들 때 우리는 나 자신과 나 주위의 세계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나와 남에게 동시에 이로운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청소하려하지 말고 오염된 물을 간직하려 하지말고 과감하게 한번 쏟아 부어 버리면 어떨까?

10. 두 번째 화살 맞지 않기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V pp.207 ff:잡아함경(대정장 II p.119下).]

우리는 종교 수행자를 특별한 존재로 보통 사람과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길을 가지 않은 종교인들을 우리는 존경하며 동경하기도 한다. 자신의 삶 대신에 먼저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종교인의 모습은 이기심으로 움직이는 각박한 세상에 푸른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다. 그러면, 보통 사람의 상식 내지 기대와 달리 행동하는 종교 수행자는 우리 보통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


붓다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출가한 수행자도 불법을 듣지 못한 보통 사람처럼 즐거워하고 괴로워한다. 아름다운 꽃을 보고 종교수행자나 보통사람이나 즐거움을 느끼고, 고통스러운 장면을 접하면 다같이 괴로워한다. 어떤 물체나 대상을 접하여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에서 수행자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붓다의 말씀을 들어 보자.


“아직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은 괴로움을 느끼면 비탄에 잠기면서 정신을 잃게 된다. 그것은 마치 첫 번째 화살을 받고 난 뒤에 다시 두 번째 화살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반대로 이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괴로운 느낌을 받아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 두 번째 화살을 받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한 개인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관계가 언제나 화목하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관계일지라도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서로 불편해지기도 하고 필요에 따라 가깝게 지내기도 한다. 개개인들이 자신의 욕심에 따라 살아가는 한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괴로움을 주고 살아가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느끼는 고통은 심리적인 것들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치료와 함께 끝난다. 그러나 심리적인 고통은 두고두고 지속된다.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다시 나타나 괴롭힌다. 이것이 이른바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인 것이다. 종교수행자는 괴로운 상황을 접하고 그리고 그 괴로움을 느끼는 순간 거기서 해방되어 버리는 반면에 우리 보통 사람들은 그 일과 그 일에서 일어난 감정들을 두고 두고 기억하면서 괴로워하게 된다. 좋지 않은 일이 생길 때 술과 같은 것에 기대어 잊어버리려고 노력하나 그것은 진정한 해결방식이 아닐 것임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럼 어떻게 제2, 제3의 화살을 맞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와 주의력이 요한다고 가르친다. 괴로운 감정이 일어날 때 그것을 피하려하지 말고, 그렇다고 억누르려고도 하지말고 그 괴로운 감정을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라고 한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게되면 괴로운 감정의 실상을 알게되어 다시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한다. 좀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사념처 수행법을 참고해 보자.

11. 대접받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참고 경전:Saṃyutta Nikāya I pp.161 ff; 잡아함경(대정장 II p.307上).]

원만한 인간관계가 깨트려지면 서로 비방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다. 자기가 실수를 하거나 잘못을 한 것에 대해 비난을 받으면 고통스럽지만 참을 만하다. 그런데 전혀 근거 없이 또는 잘못된 소문에 근거하여 비난을 하게되면 우리는 분노하게 되고 견디기 어렵게 된다. 결국 싸움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붓다도 재세시 여러 외도로부터 헐뜯는 얘기를 듣곤 하였다. 붓다는 근거 없는 비방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였을까? 


한 외도가 붓다에게 심한 욕설을 하면서 비방하였다. 붓다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상대방이 조용해지자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그대의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  음식으로 대접할 것이다. 그런데 그 손님이 먹지 않는다면 그 음식은 누구의 것이 되겠는가? 그대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그대는 오른 나에게 온갖 악한 말을 하였지만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말들은 그대의 것이다. 만약 내가 욕을 먹고 또한 욕을 되돌려주었다면 주인과 손님이 함께 식사를 한 것이 된다. 그러나 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았다.”


비방하는 사람에게 비방으로 되갚는 것은 선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즈음 우리는 정치권에서 이런 여야의 상호비방을 많이 접하게 된다. 보기 흉한 일임에 틀림없다. 붓다는 전쟁터에서 천 번 백 번 적군을 이기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 것이 더 훌륭하다고 했다. 상대방이 비방할 때 바로 똑같이 비방하지 말고 조용히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격한 감정들을 조절할 수 있다면 비방의 불청객을 더 이상 불러들이지 않게 될 것이다. 

12. 현재 머물기 [참고경전:Majjhima Nikāya II pp.187 ff; 온천림경(대정장 I p.696中).]

인간의 마음이 이 나뭇가지 저 나뭇가지로 분주히 옮아다니는 원숭이에 비유되듯이 우리마음은 끊임없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분주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지지만 대별해 보면 과거와 미래에 관한 것이다. 지나간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미래의 일에 대해 근심하고 있다. 시계추처럼 과거와 미래의 양지점을 오가며 움직이고 있어 결코 현재에 머물러 살지 못하고 있다. 


붓다는 게송으로 인간이 “현재”에 살아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비록 몸은 “지금 여기”(here and now) 에 살고 있지만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현재에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 일을 생각하지 마라.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바라지 마라.과거 일은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현재의 일을 마땅히 관찰하라.흔들림 없이 힘있게 관찰하라.오늘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내일 죽을 지 모르지 않는가?저 죽음을 만나기 이전에 고통을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이와 같이 수행하면아침저녁으로 나태함이 없다.”


나이가 든 사람은 지나간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젊은 사람들은 미래에 성취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이러한 것은 현재에 살고 있지 못하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과거에 구속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날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가 그 기억을 끊임없이 재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것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미래의 계획도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우리 마음이 “절대현재”에 머물게 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정확하게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곧 바로 무엇을 할 것인 지 알아 실천하게 될 것이다. 그럼 절대 현재에 머무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전에서는 “念” (sati)라고 가르치고 있다. sati는 영어에서 mindfulness, awareness, meditation 등으로 번역되지만, 현재 우리기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한역에서는 念이라고 했다. 염은 지금(今) 과 마음(心)이 결합되어 있으니 마음이 현재에 머물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면 어떨까?

 

붓다의 비유설법(안양규지음/80쪽/값3,000원)

일상에 기초한 비유를 통해서 붓다의 심오한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현재 자신의 삶 속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친근하게 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