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인도에서의 불교 흥망사

실론섬 2014. 3. 15. 14:14

고대 인도 ( 붓다 탄생전의 사회 )

 

인더스문명(B.C.3000-2000)은 정연하고도 장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청동기 시대의  문명을 형성하였으며 주로 드라비다人인 그들은 모계적인 부족을 구성하고 각지에 작은 촌락들을 이루어 정착하였다.

 

그러다가 기원전2000년경 아리아인(Arya)이 인도 서북부 인더스강 유역의 펀잡(Panjab)지방에 유입된다. 이들은 B.C.15세기 이후 인도 문화 형성에 주체적인 지위를 자치하게 되는데, 사회 생활은  주로 가부장 제도에 의해 운영하고 생업은 목축을 하였다. 점차로 농경도행해지면서 무사, 사제, 중간계층 그리고 원주민인 노예 계층을 자연스럽게 이루어 후에 사성 계급제도(Varna)(사제자(Bramana),왕족(Ksatriya),서민(Vaisya),노예(Sudra))를 형성시킨다.

 

사성(Varna)은  “피부색의 차이로” 대체로 흰색의 아리아인이 상위의 세 계급을 차지하고 검은색의 원주민이 하위의 계급을 이루었다. 이들의 잡혼으로 B.C.6-7세기경에 “태어남의 의미”의 뜻인 자티(jati)즉, 카스트가 성립된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이상 제도는 바르나(Varna;빛깔)이고, 현실의 사회체제에 관한 제도는 카스트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카스트는 지배계급의 혈통 보존이라는 필요에서 출발한 직업에 따른 신분제도로 예외나 혼용이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지금까지도 그 유형이 존재하고 있다.

 

여러 이민족이 모여있는 인도사회 속에서 카스트는 직업내 단결을 강화 시켜 전체의 질서를 유지시켜 준다는 장점도 있기 때문에 많은 사회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아리아인들의 종교문화는 현실적 이익을 위해 여러 신들 가운데 일신(一神)을 권청(勸請)하여 제단에 공물을 바쳐 불에 태우는 제식을 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종교 문화가 문헌으로 작성된 것이 베다(Veda)(B.C. 10-8C 경)이다. -

 

베다는 신에 대한 찬가를 모은 것으로 인도인들의 솔직한 종교 감정을 보여 주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의 베다 문헌은 ?리그 베다?, ?야주르 베다?, ?사마 베다?, ?아타르바 베다?의 네가지를 말한다. 이 외에도 브라흐마나(Brahmana,梵書), 아라냐카( 林書),우파니샤드(Upanisad,奧義書)가 있는데 이들은 넒은 의미에서 베다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점차 동남쪽으로 번져 나가 갠지즈강과 야무나 강 사이의 비옥한 평원에서 농경이 더욱 활발하게 되어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으로 새로운 사회 제도와 질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부족 국가에서 점차로 군주제국가적인 성격을 나타내게 되면서 왕조가 중시되는 형태로 발전되었다. 이 시대 가장 유력했던 도시국가로는 마가다국(Magada)을 비롯하여 코살라(Kosala),아반티(Avanti),밤사(Vamsa)가 있었다.

 

원주민과의 혼혈로 새로운 종족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베다 종교나 관습을 무시하게 되었으며 경제적인 발전과 왕족, 자산가들의 대두는 종래의 계급제도를 흔들리게 하였다. 이같은 경제, 사회, 문화의 현저한 변화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사상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바라문 지상주의와 피흘리는 제식 만능주의에 회의를 느낀 혁신적인 사상가들은 바라문에 대한 새로운 정신적 지도자로 사문(沙門, Sramana, Samana, 승가의 지도자)이 되었다. 불교 또한 이러한 사문의 한 형태 였다.

 

그러나, 많은 사문들이 혈통의 순수성을 주장하여 카스트의 지위를 스스로 인정 한 데 반하여 불교 사문들은 계급, 신분을 묻지 않고 그 출가를 인정하였다. 한때 사악했던 살인귀 아힌사카( 일명 앙굴리마라 )마저도 마음을 크게 돌려 불교 교단에 출가한 이상, 그를 잡으러 온 파세나지왕도 아힌사카가 출가 했기에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렇듯 불교의 사문에게 있어서 출신 카스트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라도 붇다와 그 제자에게 경의를 표했다. 또한 이러한 불교의 성격은 후에 많은 이민족들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한다.


원시 불교 


기원전 5세기경 붇다가 출현하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게 된다. 대체로 이 시기의 불교, 다시 말해 붇다께서 포교를 위해 많은 곳을 다니시고 많은 사람들을 교화 시킨 때에서 부터 붇다의 입멸 후, 여러가지 원인에 의해 각 부파로 분리하게 될 때 까지의 불교를 원시불교라고 한다. 이 원시불교의 중심 교리로는 연기설과 팔정도가 있다.

 

붇다는 성도후 녹야원에서  다섯비구에게 최초의 설법을 하게 되는 데 후세의 전법륜경(轉法輪經)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쾌락 생활과 고행 생활과 같은 양극단으로 치우친 수행방법은 무익한 것임을 몸소  깨달았다. 이러한 양극단을 버린 중도(中道)를 위해 여덟가지 도(八正道 - 바른 견해,바른 결의 ,바른 습관,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상념, 바른 명상)를 이야기 한다.

 

붇다의 설법을 들은 이들은 그 뜻을 받아들여 제자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 있어서 승가(僧伽,Samga)의 성립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 특유의 것이 아니고 당시 유행자 공동체의 한 형태였다.

 

그러나 기후 영향으로 유행하는데 어려움이 생기자 안거가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주처와 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승가의 질서를 자자와 포살로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점차로 계율이 형성되면서 부터 비구승가는 더 이상의 유행자의 형태가 아니고 정착한 수도승의 모임이라 할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였다. 이러한 이행은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며 초기 승가에서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더불어 일정한 승원에 머무르게 됨은, 교리와 계율을 전수하고 발전시키기에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게 되어, 교단 및 교법을 존속시키는 기반이 되었다.

 

초기의 불교는 전통적인 바라문보다 정통성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관념과 관행을 자유로이 받아들여, 전통이 중시되는 농촌보다는 변화를 요구하는 도시의 풍조와 일치하여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형의 종교였다. 또한, 불교교단에 대한 후원자와 승가의 경제를 유지시켜 주던 도시와 가까이에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였을 것이다. 이렇듯 초기 불교 승단은 오늘날 처럼 산속 깊숙히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함께 호흡하며 친근하게 가까이 있었던 것이다.

 

붇다가 설한 규율이나 교리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한 비유를 통하여 설하였기에 체계가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붇다가 있을 당시에는 규율이나 교리에 의문이 생기면 붇다께 여쭈어 일러 주신 대로 행하면 되었으나, 입멸하게 됨으로써 교리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에 부딪히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던 중, 대가섭(Mahakassapa)등의 후계자들은 붇다 재세중의 교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붇다가 열반에 든 그해, 라자가하(王舍城)교외의 칠엽굴에서 대가섭이 사회자가 되고 우팔리(Upali)가 율(律)을,아난다(Ananda)가 경(經)을 암송하게 되고, 이것을 참석한 500비구들이 검토하여 함께 암송하였다. 이를 제1 결집(라자가하 결집,500결집)이라고 한다. 그러나 참가자는 500명으로 교통과 통신등의 문제로 인해 지방에서는 참여하지 못한 비구들이 많았을 것이기에, 이러한 경전 결집을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결집을 요구하게 되는 일부 비구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부파 불교


그러던 중, 붇다 입멸후, 100년 경에 두가지의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하나는 계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였다. 베사리의 비구들은 보다 융통성 있는 해석을 원했고 코살라국의 장로(長老)야사와 그를 따르는 비구들은 아난다의 정통성을 흔들림 없이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야사는 베사리에 700비구를 모아 결집을 하게 되는데, 이 당시 문제시 되었던 것은 10사로 교리보다는 일상생활의 규율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을 제2결집(베사리 결집,700결집)이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마하데바(大天)스님의 출현이다. 마하데바는 5사7)를 들어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다는 아라한을 비방하게 되는데, 이러한 마하데바의 주장은 불교를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大衆部)로 나뉘어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붇다 입멸 후 100년경에 원시 불교가 분열을 거듭하여 20여개의 교단으로 갈라진 시대의 불교를 총칭하여 부파불교라 한다. 100년이라는 세월은 사람의 기억을 흐리게 하기에 알맞은 기간으로 세월이 지날 수록 계율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과 그 해석을 유연하게 하고자 하는 사람이 생기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일것이다.

 

따라서, 정통파라 자처하는 상좌부와 시대와 사상 해석 변화에 민감한 진보파(후에 대중부(大衆部)로 불리어짐)로 나뉘어 지게 된것이다. 이는 수백년 후에 나타나게 되는 소승과 대승의 대립 경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정통파가 반드시 가장 오래된 전통을 충실히 전한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 전통을 보존하려는 노력 자체가 전통을 왜곡하는 경우도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초기 종교의 전파가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포교하기 위한 서북인도, 중인도 등지에서는 보수적인 경향이 불교의 발생지역인 동인도에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보적인 경향을 뛰었을 것이다.

 

이 즈음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원정(B.C.327 - 325)으로 그리스 및 서아시아인들이 서북인도 지역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새로운 왕조를 이루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출현은 인도를 순간적으로 혼란속에 몰았고 이러한 어수선함 속에서 찬드라 굽타(Chandragupta)가 마가다국을 멸망시키고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마우랴(Maurya)왕조(B.C.317-B.C.180년경)를 열게 된다.

 

이 통일은 이민족의 침입이 잦고 혼란이 많은 인도 역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불교가 전인도적으로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마우랴왕조의 아쇼카(Asoka)왕은 영토 확장 사업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문화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를 위해, 칼링가지역(지금의 오릿사 지방)을 정복하러 갔다가 바르게 살며, 이웃을 사랑하는 일반 백성들이 전쟁속에서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영토확장의 명분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중앙집권적인 조직과 군사력에 의한 무력만으로는 광활한 영토와 인도의 여러 이민족을 통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높은 정치 이념 다르마8)가 필요 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 칼링가에서의 경험은 왕을 독실한 불교 신자가 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의심할 수 가 없다.

 

왕은 몸소 국내 각지로 법의 순행을 하고 그 지방의 주민들에게 법을 가르쳤다. 또한 법의 사신 파견으로 외국과 인도 여러 지역 곳곳에 불교를 전파하게 된다. 따라서 스리랑카(실론)와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불교가 확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은 포교의 거점이 되는 동시에 후에 부파를 형성 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스리랑카는 전설에 의하면 아쇼카 왕자 (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가 전도해 개교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현재까지 매우 번창하고 있으며 상좌부(테라바다) 불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의 종교아래 여러 부파가 생기게 된 원인을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자. 첫번째는 앞에서도 잠시 이야기 되었듯이 붇다 입멸 후 그 교리에 대한 해석에 따른 입장의 차이를 들 수 있다. 두번째는 불교 교단에 귀의하게 되는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단체 생활을 운영해 나가는 데는 무리가 있어 지도자인 스승이나 선배를 따라 또 다른 집단을 형성 해 나가게 되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산맥과 강이 많아 지리적으로 험한 인도 반도에서는 주장학설이나 해석하는 입장에는 독특한 차이가 없으나 단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각기 나름대로의 학설을 정립해 나갔음은 쉽게 짐작해 낼 수 있다.

 

이렇게 불교가 지역적으로 발전하여 각지에 승가가 생기게 되면서 불교 경전이나 계율이 처음의 마가다 및 코살라 지방의 언어에서 여러 지방의 말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히 여러 부파간의 논쟁이 일어나게 되고, 이러한 논쟁이 일어나면서 자신의 파에 대한 학설에 보다 깊은 연구가 이루어져 교법에 대한 정리, 해석이 새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유력한 부파는 독자적으로 삼장(삼장,tri-pitaka)을 편찬하였는데, 구송으로 전해 지던 부파의 삼가장이 가장 먼저 문자로 쓰여지게 된 것은 B.C. 1세기 세일론(현재의 스리랑카) 상좌부에서 였다고 전해진다.

 

삼장에는 율(律)장, 경(經)장, 논(論)장이 있다. 대체로 각 부파는 근본 성전으로 법(法)즉 ‘경’과 ‘율’을 가지고 있었다. 율은 지역적 시대적 요청에 의해 나름대로 조금씩 특색을 발휘한 것은 ‘법의 해석’ 이었다. 이 같은 법의 해석은 각 부파가 ‘논(論)’이라는 형태로 제작하여 전승하면서 독특한 교의를 전개시켜 갔다. 부파불교를 아비달마(법의 분석, 해석)불교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한 종교의 우수함을 보여주기 위해 다른 종교를 탄압하거나 비난한 일은 없었다. 불교가 붇다 입멸 후 200여년 동안 특별한 유력자 없이 교단이 계속 유지되어 왔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도 안 되지만, 이 아쇼카왕의 절대적 후원이 없었다면 불교는 어쩌면 인도 어느 지방의 작은 종교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확실히 완전한 승리자 였으면서도 모든 전쟁을 그만두고, 화려한 궁중 생활에서 공공의 시설을 만들어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놀이와 제물을 위해 바치던 희생을 그만두게 한 사실은 그 시대 혁신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는 풍부한 생활과 바라문적 제사에 길들여진 귀족의 불만을 사 그의 말년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불을 피워 제물을 바쳐 자신의 불행을 염려하는 것보다 타인에게 베풀고 선을 실천함으로 복을 쌓는 일을 권했던 그 시대를 오늘날 우리 세대에서 다시 새겨봄은 큰 의미를 가질것이다.

 

불교가 지역적으로 발전 할 때는 해석상의 차이나 전통성의 주장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중앙으로 들어옴으로 해서 그 논쟁에 대한 결과는 그냥 내 버려 둘 수 없을 만큼 중요하게 되었다. 이에, 경전의 새로운 결집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불멸 후 330년경 아쇼카왕의 보호 아래 1천의 스님들이 파탈리 푸트라에서 3장(藏)을 확정하게 되는데, 이를 제 3 결집(1천 결집, 파탈리푸트라 결집)이라고 한다.

 

아쇼카왕 이후 마우랴 왕조는 흔들렸으며 얼마 후 푸샤미트라(Pusyamitra)의 반란으로 마우랴왕조는 무너지게 된다. 이리하여 쿠샨왕조가 열리게 될 때까지의 200여년 동안 인도는 혼란의 시대를 맞게 된다. 푸샤미트라는  쑹가(Sunga B.C.187-75)왕조를 일으키고 이 쑹가 왕조에서는 마우랴왕조의 정책에 대한 반동으로 브라만적인 성격을 부활한 복고적인 정책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의 즉위 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을 금하고 보다 민중 앞에 다가선 불교적인 정치 이념보다는 절대적이고 강압적인 정치 이념을 필요로 했음은 쉽게 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바라문적인 질서를  강요하였음에도 이전 왕실과 통치자의 후원을 중심으로 발전하던 불교에서 그 인도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으로 서서히 민중속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푸샤미트라왕의 만년(B.C.155-153년 경)에는 서북인도로 부터 심한 공격을 받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알렉산더 원정때 남아서 나라를 이룩한 박트리아(Bactria)왕조 였다. 박트리아 왕조는 알렉산더 대왕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 위해 인도 내륙쪽으로 들어오고자 했던 것이다.

 

이 박트리아의 메난드로스(인도이름:Milindra밀린드라,혹은 Milanda 밀란다)왕은 불교를 옹호 하였는데, 그 상황을 보면 , 왕은 여러 종교를 둘러보다 나가세나 (Nagasena,那先)장로와 불교 교리에 대해 여러가지의 문답을 주고 받은 결과 느낀 바 있어 불교에 귀의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문답의 내용이  "밀란다 팡아,(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로  전해지고 있다.

 

이 밀란다 팡아는 불교의 교리를 설명함에 있어 쉽고 가까운 사물에 대한 비유를 써서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읽기도 했는데, 그 내용을 잠시 살펴보자.

 

메난드로스왕은 “당신들 스님들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악한 일을 해도 죽기직전에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저에게는 믿기지 않습니다.” 고 묻는다. 나가세나가 “작은 돌을 물 위에 두면 그 돌은 뜨겠습니까, 가라앉겠습니까?” 라고 되묻자, 왕은 “반드시 가라 앉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그렇다면 1백개의 큰 돌을 배에 실으면 배는 가라앉겠습니까?” 라고 다시 되묻자 왕은 “가라 앉지 않습니다.” 고 대답했다.

 

거기에서 나가세나는 “배에 실은 1백 개의 큰돌은 배 덕택에 가라 앉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도 전에 악한 짓을 했어도 한 번 만 부처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하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상에 태어 납니다. 작은 돌이 가라 앉는 것과 같이 불교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불교사의 전개,渡邊照광) 라는 붇다에 대한 신앙을 강조한 내용이 유명하다.

 

메난드로스 왕은 아주 훌륭한 정치를 펴서 그의 사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 그와 나가세나장로의 만남은 헬레니즘적인 서양과 인도적인 동양의 만남이라는 큰 의의를 가진다. 이에, 좀더 메난드로스왕의 불교 수용 배경을 고찰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메난드로스 왕은 그리스인으로 인도인에게 있어서는 이민족이였다. 카스트가 뼈 속 깊이 묻혀 있는 인도에서 이민족은 아무리 높은 지식이나 교양을 가지고 있다하여도 다슈(악마)로 경멸 당했다. 이에 반해, 불교는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계급적 차별을 부정, 4성의 평등을 설하여 이민족을 적대시 하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슝가 왕조는 마지막왕의 신하에 의해 무너지고 칸바 왕조를 세우지만 이 왕조는 45년만에 남인도의 안드리아 왕조에 의해 멸망당하게 된다. 안드리아 왕조는 마우랴 왕조때에는 그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이쇼카왕의 사후, 서서히 독립하여 기원전 28년 경에 칸바 왕조를 무너 뜨리고 중앙에 진출하게 된다.

 

아쇼카왕은 불교를 배웠으며 푸샤미트라는 바라문교를 배웠다. 그러나, 안드리아왕조는 원래 아리아인이 아니었으며 불교와 바라문교는 다같이 문화적으로 우세한 북인도의 아리아인으로부터 수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안드리아 왕국에서는 불교와 바라문교가 나란히 발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석굴을 대단히 많이 건설하였는데, 현재 데칸 지방에 남아 있는 불교의 석굴은 거의 이 왕조치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중에서 바라문교의 신자가 불교 승려를 위해 석굴을 만든 것도 있어서, 종교간의 충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는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교가 왕조와 도시 자산가들의 지지와 민중의 호응속에서 급속히 발전해 나가고 있는 기간에도, 옛 아리아인의 베다 성전에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바라문의 영향력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불교가 몇 번의 결집을 통해 교단을 정화하고 아울러 민중에 가까워 지려고 노력하였건만, 많은 부파가 새롭게 생겨나게 되어 기원전 1 세기 경에는 18부 혹은, 20 부파의 분열을 마쳤다.

 

그러는 동안 "마누 법전" 의 제작(B.C.1 세기)으로 농촌에서는 바라문의 권위를 세웠으며, 산스크리트 문법을 확립(B.C.2세기)하여 바라문 문화로 대표되는 산스크리트 문화로 중앙의 문화를 이끌어 나갔다.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의 바라문교는 각 지방에 남아 있던 부족 신앙이나 민속 신앙을 베다 성전의 권위에 포괄하여 흡수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힌두교라고 부르는 종교의 모습이 이 시기에 정립 되었다.

 

한편, 서북부 인도에서는 기원전.후로 하여 같은 유목민족인 흉노(匈奴)족에게 쫓겨 중앙 아시아 人인 월지족(月氏族)이 박트리아 땅으로 내려 오게 된다.  이들은 박트리아를 무너 뜨리고 유목민에서 점차로 정착하는 생활로 옮겨 자기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쿠샨(Kusana,Kusan A.D. 1세기 전반)왕조를 열게 된다.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로마로 팔러 들어가는 상인들에 의해 개척된 비단길을 통하여 동쪽으로는 중국, 서쪽으로는 로마제국과의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또한 중국과 인도의 문화교류, 불교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해 내게 된다. 쿠샨왕조는 처음에는 자신들의 종교를 보호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도내의 여러 종교에 감화 되어 특히 불교(부파 시대의 불교)에 귀의 하게 된다.

 

그 배경을 살펴 보면, 무역등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나 바라문을 비롯한 인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민족이었기에 사회적으로는 특정한 지위를 부여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카스트를 부정하면서도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에 귀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또 다른면에서는 그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가장 관심있어 하는 종교를 보호 해 주는 것이 정책적으로 필요하였기에 불교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후자로 해석해 보면 불교는 그 시대 서북인도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쿠샨 왕조의 3 대째 왕인 카니시카(Kaniska)왕의 출현은 인도 불교계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열게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등지의 불교도에게는 아쇼카왕과 함께 존경 받는  왕으로 후대에 기록되어지고 있다. 카니시카왕은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장로인 파르스바(Parsva)에 귀의하게 된다. 그리하여 카니시카 가람을 세우는 등 불교를 융성 시킨다. 또한 그와 아스바고샤(Asvaghosa)와의 만남은 불교사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아스바고샤는 처음에는 뛰어난 바라문교도 였다. 그는 불교도를 비롯한 많은 종교인들과 논쟁을 벌여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파르스바 장로를 만나 이루어진 논쟁에서 느낀바 있어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아스바고샤는 훌륭한 문인이였으며, 시인이자 음악가 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은 500명의 왕자를 일시에 불교에 귀의 시킬 정도로 뛰어나 놀란 왕이 그에게 연주를 그만 둘 것을 부탁할 정도 였다고 한다. 또한, 이 시기 여러 찬불송을 산스크리트어로 편찬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붇다짜리따(Buddhacanta, 佛所行讚)"로 붇다의 일생을 써 놓은 것이었다. 이는 후에 산스크리트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고 있다.

 

카니시카 왕 때 불교사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나게 되는 데 그것은 경전의 결집이다. 이 시대 여러 부파 중에 하나인 설일체유부는 7論중 하나인 발지론에서 유부교의 집대성인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沙論)"을 편찬하게 되는 데 이를 가리켜 제 4 결집이라고 한다. 이 결집된 내용이 엄청나게 많은 것이기에 카니시카왕 때 모든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따라서 계속해서 결집을 해오다가 카니시카왕의 보호 아래에서 끝을 맺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또한, 그 시대 안정된 사회 속에서 발전된 불교 미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그리스 헬레니즘과 불교가 융합된 간다라 미술은 쿠샨왕조 초기에 출현하여 카니시카왕 때 최전성기를 이루었으며 아시아 불교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지역은 간다라(현재의  페샤와르에 상당하는 지역)를 중심으로 동으로는 탁실과 서로는 핫다(Hadda)에서 카티씨, 북으로는 스와트(Swat)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퍼져 이썼다. 이 시대에는 장식을 위해 불상, 보살상이 제작되었다.

 

붇다 성도 후, 잦은 이민족의 침입과 교역의 융성으로 활발한 문화 교류가 가능해 지고 이에 따른 여러 문화의 자극에 전통의 구속에서 일부 벗어난 불교도들은 불상을 조각하기에 이른다(1세기말에서 2세기 초에 걸쳐)이러한 불상의 출현은 불상에 대한 예배 의례를 가져 왔고, 후에 발생하는 밀교의 의례는 불상이 없었다면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순수한 인도적 기법인 미투라 미술도 존재했었다.

 

아울러, 출가자를 중심으로 경전이나 연구하고 계율을 암송하던 전문적인 종교에서 지금의 찬불가와 같은 음악을 아슈바고샤가 연주하고, 불상을 조각하여 그곳을 재가 신자들이 찾아 갈 수 있었다는 데 보다 더 일반화된 종교로의 불교를 발견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불상에 예배함으로 자연스럽게 붇다에 대한 신격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힌두이즘과 대승불교의 형성 


다시 한번 시대순으로 되살펴 본다면 붇다가 입멸한 후,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불상을 만드는 일은 경전을 문자로 기록하는 일과 함께 유한한 붇다의 모습 밖에 보여 줄 수 없다는 이유로 금기시 되었다. 그러한 속에서 숭배, 예배의 대상이 붇다의 사리에 탑을 세워 공양하는 일로 진전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시에 불탑 숭배는 공덕을 쌓는 중요한 행위로 여기기도 했다.

 

이 재가 신자들은 붇다의 가르침의 내용 보다는 붇다에 대한 동경이 신앙의 원천이 되어 불탑 신앙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B.C.2세기 무렵부터 부파불교가 출가자를 중심으로 하여여 아비달마 연구에서 보여진 것처럼 점차로 전문화되고, 힌두교에서는 박티 신앙8)이 현저하여 자신을 비우고 신에게 귀의 하는 것이 신선한 모습으로 비쳐지게 된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출가하지 못한 대중들의 구원을 목적으로 대승 불교가 일어나게 된다.

 

대승불교의 출현은 언필칭 재가 신자들의 위대한 승리였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권력과 유착한 일부 승려의 타락성을 공격하고 나아가 이미 비불교화된 기존 승단을 부정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불탑 주변의 신자들은 붇다의 근본 가르침으로 돌아가 그에 입각한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고 이념체계를 정립해 나갔다. 이는 믿음이 돈독한 이라면 재가와 출가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든지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출가를 전제로 하는 엄격한 명상수행을 통하여 보살도를 닦아 나가는 기존의 승려 사회에 대한 소리없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기존 승단에 회의를 느끼고 민중교화를 그 본래적 임무로 자각하고 노력하던 진보적 승려들이 합류하면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난다. 이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하여 인도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관념, 사상은 보살(bodhisattva,菩薩)행과 이타행(利他行)이다. 보살은 붇다의 전생을 가리키는, 붇다 한 사람에게만 적용 되던 말에서 이타의 서원을 발하고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하는 사람으로 본래 의미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 하였다. 찬불을 기조로 한 민중교화를 위하여 만들어진 설화집인 자타카( 붇다께서 과거의 많은 생애 가운데, 사람으로 혹은 동물로 태어나 하게 되는 많은 경험들을 내용으로 함. ) 에서 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보시를 비롯한 많은 선행을 쌓고, 이러한 공덕이 쌓인 결과, 붇다가 된다고 설하고있다.

 

아슈바고샤보다 한 세대 늦게 남인도 안드라 왕조에서는 나가르주나(龍樹)가 출현하게 된다. 이로서 잔잔히 흐르고 있던 대승은 뛰어난 논사를 만남으로 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는 데칸고원의 비다르바에서 탄생하여 젊었을 때에는 바라문교에 정통했지만 후에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유부계)하였다. 이 후 대승의 교리를 체득한 후, 싸타바하나왕조의 보호아래 나가르쥬나콘다에서 입멸하였다. 저서로는 "라트나발리(Ratnavali)","중론(Madhyamakakarika,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대품반야(大品般若)", "십주 비바사론(十住 毘婆沙論)"이 있는데, 특히 "중론" 은 중관학파를 형성하여 그 전통이 6세기 이후에 부활하게 된다.

 

나가르쥬나 학설을 계승한 아랴데바(Aryadeva,聖天)는 공(空)사상을 내외에 선양하는 데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사백론(四百論)","百論(백론)","백자론(百字論)"이 있는 데 후에 "백론", "중론", "십이문론"을 三論이라하여 중국 에서는 여기에 기반을 하여 삼론종을 이룬다.

 

쿠샨 왕조와 안드라 왕조는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며 서로 견제, 발전하다가 2세기 무렵 거의 같은 시기에 두 왕조는 몰락한다. 이후 인도는 100여년간의 혼란을 견뎌 내어야만 했다. 4세기경 굽타 왕조가 일어설 때까지의 주목 할 만한 논사나 경전이 알려져 있는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인도는 4세기 초 굽타 왕조가 성립(A.D 300 - A.D.500)된 시대로 부터 문화 부흥의 큰 전환기에 들어간다. 서북인도에서 서인도, 그리고 갠지즈강 중류지방에 이르는 지역을 수 세기에 걸쳐 이민족이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스 세력의 박트리아 왕조, 중앙 아시아 출신의 쿠샨 왕족등이 그것이다.

 

그러다가 동인도 마가다 지방 출신인 굽타 왕조에 의해 마우랴 왕조 이래 처음으로 인도인의 지배에 의한 대제국이 수립되었다. 굽타 왕조 시대는 그 왕을 찬드라 굽타 1 세라고 불렀다는데서 나타나듯이 바라문을 중시하는 복고적인 성격을 나타내었다. 따라서 바라문의 문화인 산스크리트를 중앙에 들여 각종 법령, 문학, 종교에 사용하였다.

 

굽타왕조의 복고적인 성격으로 이 시대 인도 대륙의 여러 왕들은 대부분 힌두교도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 교단이 박해를 받은 사실은 없었다. 오히려 힌두의 왕들은 불교 교단을 외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신앙과 관계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종교, 종파에도 동등하게 존경, 보호하는 오래된 전통에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불교는 특히 이 굽타 왕조 시대에 힌두 세계의 여러 문화를 대폭적으로 수용하였다. 역으로 말하면, 불교가 힌두교의 신관(神觀)과 신앙에 흡수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힌두교도의 입장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일파로 간주되는 원인이 되었고, 따라서 이단으로 배척될 점을 갖지 않았음으로도 힌두왕들의 외호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수반두는 본시 경량부에 속해 유부의 개설서 <<구사론>>을 저술했는데 뒤에 형 아상가(無著)의 권유로 대승에 들어가 형의 뒤를 이어 새로운 교리체계를 확립했다. 그는 활동적이어서 소승이나 도의 어긋남에 대한 비판도 시도하여 불교의 명성을 높이는 일에 크나큰 공헌을 하였다. 중인도의 아요다를 주요무대로 해서 굽타왕조의 왕(아마 찬드라 굽타 1세)의 후원으로 아요다외에 푸루랴푸라, 캐시미르등에도 불교사원을 건립했다. 바수반두의 계통은 그 후 대승불교의 주류가 되어 번영하였다.

 

5세기초 굽타왕이 날란다사원을 지음으로 불교는 고향땅인 마가다로 그 중심이 옮겨진다. 당시 소승불교에서는 유부계와 정량계가 대승불교에서는 중관계와 유식계로 나뉠 수 있다. 이 중관계와 유식계는 8세기 이후 급속히 쇠락하고 중관, 유가의 중간적 경향을 취하는 중관유가파가 나타났다. 또 이러한 사실들은 동시에 밀교사 이기도 한 것이다. 


밀 교 


굽타왕조의 몰락 이후,불교에 귀의한 하르샤바르다나왕(Harsavardhana,戒日)을 이어 프라티하라(Pratihara,750-1000C)왕조는 서북방에서 인도로 들어온  여러민족의 혼혈자손으로 스스로 무사계급의 자손인 라즈푸트(Rajput)라 부르며 봉건적인 지배제도를 학립하였다. 보통 인도 역사상 중세의 시작을 이 시대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전통을 존중하는 불교를 박해하는 데 이로 인해 불교는 장소를 옮기고 이 시기에 급속히 밀교화가 진행되어진다.  이어 8세기 중엽 팔라(Pala)왕조(730년-1197년 견)가 일어나 세나왕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일관하여 불교를 보호하였다.

 

고팔라(Gopala,치세 750-770C)왕때 마가다에 오단타푸리(Odantapuri)사원을 그리고 다르마팔라(Dharmapala, 치세 990-810c)왕때 역시 마가다에 비크라마시라(Vikramasila)가 세워지게 되어 난다라와 함께 밀교위주의 불교학이 행해진 3대 사원이 된다. 특히 비크라마시라 사원은 인도 불교 최후의 거점으로 티벳으로 전해져 티벳불교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팔라왕조때의 논사로는 중관유가파로 "탓트바상그라하(Tantvasamgraha)"를 지은 산타라크시티(Santaraksita)와 티벳 라마(Lama)교의 실질적인 창시자가 되는 파드마삼바마(Padmasambhava)가 있었다.

 

이미 굽타시대때 부터 대폭적인 힌두이즘을 받아들였고 이 시대 불교에 미친 힌두파의 영향은 힌두적 신들의 수용과 주술적 의례의 도입뿐만 아니라, 불교 교단의 승들은 이미 힌두적 제사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즉, 현세 이익적인 의례와 주술적인 요소가 열반 성불을 위한 수행방법으로 승화, 순화되는 측면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로 발생한 것이 밀교이다. 그러나, 불교가 세속화(힌두화) 되었다고 해서 불교의 본질이 상실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 하면 불교의 계와 율은 엄연히 존재 하였으며,그 지킴에 있어서 여전히 엄격 하였기 때문이다.

 

밀교의 가장 큰 특징은 주술적인 의례를 조직화한 것과 신비주의적인 경향이다. 이에 여러가지 종교에 대하여 두드러지게 관대한 대승불교는 힌두이즘의 영향 아래에서 7세기 중엽부터 급속히 밀교화 되었다.

 

초기경전에서 보이는 밀교는 주로 몸을 보호하고 복을 빌며 재앙을 물리치기 위해 주문을 읊는 의례(잡밀)인데, 대승경전에서는 이같은 목적을 위해 많은 다라니9)를  설하고 있다. 밀교는 진언승(眞言乘,Manttrayana)인 순수밀교와 금강승(金剛乘, Vajrayana), 시륜승(時輪乘, Kalac?akrayana)이라 불리는 탄트라 밀교로 나눌 수 있다.

 

진언승에서는 지혜와 방편이 중심 교리로 경전에는  "대일경(大日經,Mahavairocana-sutra)", " 금강정경(金剛頂經)"이 있다. 금강승에서는 지혜는 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방편은 동적인 남성에 비유되어 남녀의 교합을 요가로서 나타내었다.문헌으로는"문수사리근본의궤경(文殊師利根本儀軌經,Manjusrimulakalpa)", "일체여래금강삼업최상비밀대교왕경(一切如來金剛三業最上秘密大敎王經,Guhyasamajatantra)", "비밀집회(秘密集會,Tathagataguhyaka)탄트라"가 있다.

 

점차로 불교의 본질인 열반이 힌두교의 탄트리즘의 그것과 거의 등질의 것이 됨으로 불교는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고 힌두세계로 흡수 될 수 밖에 없는 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금강승의 일개 분파인 시륜승은 10세기 무렵부터 성행하여 인도밀교의 최후가 된다. 11세기초 활약한 탄트라 밀교 논사로는 후에 티베트에 들어가 티베트 불교를 부흥시키는 아티샤(Atisa Dipapamkara Srijnana, 980-1052)가 있다.대부분 티베트어로 되어 있는 밀교, 탄트라 문헌은 그 연대가 거의 알려 지지 않고 있으며 내용도 아직 밝혀 지지 않아 연구 될 과제이다.


이슬람교도의 침입과 불교 부흥운동 


아프카니스탄의 투르크계 가즈니(Ghazni) 왕조는 이슬람교도로 986년 부터 인도  정복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북인도 원정에서 이민족의 이슬람교의 개종,노예와 물자의 약탈이 주된 목적이였으므로 점령지를 오랫동안 지배하지 않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사원과 성지를 파괴하고 보물을 약탈했으며 승려를 살해하는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의 참극을 자행했다.

 

구르(Ghur) 왕조에 이르러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면서 불교는 인도 본토로 부터 그 모습을 감추어 버리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한 원인을 고찰 해보자. 밀교의 불교 의례는 카스트에 관계없이 만인에게 개방되 일정한 통과의례가 없이 단지 덕을 쌓는 것과 기원 의례를 수행는 것만으로도 신자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신도들의 결속도 그리 강하지는 못하여 카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힌두세계 내에 토착화하는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슬람교도의 침입이 북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게 되는 큰 원인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원이 파괴되고 승려가 살해되었으며, 혹은 네팔, 티벳 등지로 피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를 외호하였던 왕가 또는 자산가가 몰락하였던 점도 간과 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이슬람교도의 박해에 의해 인도 불교가 소멸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미 불교의 본질적인 열반이 힌두교의 그것과 유사하게 됨으로 불교로서의 존재 이유를 상실하여 불교가 점차로 힌두세계로 흡수 됨으로 그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서 인도 문화의 르네상스가 제창되자 스리랑카의 다르마팔라 등에 의한 인도 불교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붓다가야 불탑의 보수와 불교도에 의한 관리가 실현되었다. 이 운동은 ‘ 대보리회(大普 會) ’ 가 중심이 되었다.

 

또 한 갈래의 부흥 운동은 불가촉천민으로 천대받던 하층 민중들 사이에 반(反)힌두의 표상으로 사성평등(四姓平等)의 불교를 신앙하자는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특히, 부처님 열반 2천 5백 년을 기념하는 붓다자얀티(1956)에 암베드카르를 지도자로 해서 불교에의 집단 개종이 일어났다.  (불교 입문)

 

불교가 12세기 이슬람 침입을 기회로, 이미 쇠퇴, 동화되고 있던 불교는 인도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불교도가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정신적 유산의 대부분은 인도인들에게 전해져 불교라는 이름을 의식하지 않는 경우에 있어서도 많은 인도인은 불교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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