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대품(大品)
1. 출가(出家) 2. 힘써 닦는 일 3. 훌륭하게 말해진 것 4. 순다리카 바아라드바아자 5. 마아가 6. 사비야 7. 세에라 8. 화살(矢) 9. 바아셋타 10. 코오카알리야 11. 나아라카 12. 두 가지 관찰
1. 출가
(405) 눈이 있는 사람은 어째서 출가를 했는지, 그는 무엇을 생각한 끝에 출가를 선택했는지, 그의 출가에 대해서 나는 이야기 하리라.
(406) ‘집에서 사는 생활은 비좁고 번거로우며, 번뇌(먼지)가 쌓이는 곳이다. 그러나 출가는 넓은 들판이며 번거로움이 없다’고 생각해 출가한 것이다.
(407) 출가한 다음에는 몸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멈추었다. 말로서 짓는 구업도 버리고, 아주 깨끗한 생활을 하였다.
(408) 눈 뜬 사람은 마가다국의 서울, 산으로 둘러싸인 왕사성으로 갔다. 수려한 모습을 가진 그는 탁발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 것이다.
(409)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높은 다락 위에서 그를 보았다. 뛰어난 모습을 가진 그를 보고 신하들에게 말했다.
(410) “그대들은 저 사람을 보아라. 아름답고 건장하고 깨끗할 뿐 아니라, 행동도 당당하게 앞만을 본다.
(411) 그는 눈을 아래로 두고 정신을 모으고 있다. 저 사람은 천한 가문의 출신이 아닌 것 같다. 신하들이여, 뛰어가 그를 따르라. 저 수행자가 어디로 가는가.”
(412) 왕의 신하들은 그의 뒤를 따라 갔다. ‘저 수행자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의 거처는 어디일까?’ 하면서.
(413) 그는 모든 감관을 억제하여 잘 다스리고 바르게 깨닫고 조심하면서 집집마다 음식을 빌어 잠깐 동안에 바리떼를 채웠다.
(414) 거룩한 분은 탁발을 끝내고 그 도시 밖으로 나와 판다바 산으로 향했다. 아마 그는 그곳에 머물고 있는 모양이다.
(415) 고타마가 자기의 처소에 가까이 이른 것을 보자 신하들은 그에게로 가까이 갔다. 그리고 한 신하는 왕궁으로 돌아가 왕에게 아뢰었다.
(416) “대왕이시여, 그 수행자는 판다바 산 앞쪽에 있는 굴 속에 호랑이나 황소처럼, 그리고 사자처럼 앉아 있습니다.”
(417) 신하의 말을 듣자 빔비사리 왕은 화려한 수레를 타고 판다바 산으로 길을 재촉했다.
(418) 왕은 수레로 갈 수 있는 곳까지 달려간 뒤 수레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 그의 곁에 앉았다.
(419) 왕은 기뻐하면서 인사를 나눈 후 이렇게 말했다.
(420) “당신은 젊음이 넘친 인생의 봄날과 같습니다. 용모도 수려한 것 으로 보아 귀한 왕족 태생인 것 같습니다.
(421) 코끼리 무리를 앞세운 용맹한 군대를 정비해서 나는 당신께 선물로 드리겠으니 그것을 받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태생을 알고 싶으니 말해 주십시오.”
(422) “왕이여, 저쪽 히말라야 기슭에 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으로 부(富)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423) 성은 <태양의 후예>라 하고, 종족은 <석가족>이라 합니다. 왕이여, 나는 그런 곳에서 출가를 했습니다.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424) 모든 욕망에는 근심이 있고, 출가는 안온하다고 알기 때문에 힘써 수행 합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2. 힘써 닦는 일 (정진)
(425) 네란자라 강 기슭에서 평안을 얻기 위해 힘써 수행하고 명상하는 나에게
(426) 악마 나무치가 위로의 말을 건네며 다가왔다. “당신은 여위었고 안색이 나쁩니다. 당신은 죽음에 임박해 있습니다.
(427) 당신은 죽지 않고 살 가망은 천에 하나 입니다. 당신은 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모든 착한 일도 할 수 있으므로.
(428) 당신이 베다를 배우는 사람으로써 청정한 수행을 하고 성스러운 불에 제물을 올리는 공덕을 쌓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429) 힘써 정진하는 길은 가기 힘들고 행하기 힘들며 도달하기도 어렵습니다.” 이 같은 시를 읊으면서 악마는 눈 뜬 분 곁에 섰다.
(430) 악마가 이렇게 말하자, 눈 뜬 분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게으름뱅이의 친구이며, 악한 자여!, 그대는 세속의 선업을 구해서 여기에 왔지만
(431) 내게는, 세속의 선업을 찾아야 할 필요가 털끝만큼도 없다. 악마는 선업의 공덕을 구하는 자에게 가서 말하라.
(432) 나에게는 믿음이 있고, 노력이 있고 지혜가 있다. 이처럼 정진하는 나에게 너는 어찌하여 생명의 죽고 사는 것을 묻는가(삶의 집착을 말하는가)?
(433) 열심히 정진하는 데서 일어나는 이 바람은 강물도 마르게 할 것이다. 그러니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내 몸의 피가 어찌 마르지 않겠는가.
(434) 몸의 피가 마르면 쓸개도 가래침도 마를 것이다. 살이 빠지면 마음은 더욱더 밝아지리라. 나의 생각과 지혜와 깨끗한 마음은 더욱더 편안하게 될 것이다.
(435) 나는 이토록 큰 고통을 받으면서도 이토록 편안히 살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은 모든 욕망을 돌아보지 않는다. 보라, 이 마음과 몸의 깨끗함을!
(436) 너의 첫째 군대는 욕망이고, 둘째 군대는 혐오이며, 셋째 군대는 굶주림, 넷째 군대는 집착이다.
(437) 다섯째 군대는 게으름과 수면, 여섯째 군대는 공포, 일곱째 군대는 의혹, 여덟째 군대는 겉치레와 고집이다.
(438)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득과 명성과 존경과 명예와, 또한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
(439) 나무치여, 이것들이 바로 너의 군대이다. 검은 악마의 병사인 것이다. 용감한 사람이 아니면 그를 이겨낼 수가 없지만, 용감한 자는 너를 이겨서 즐거움을 얻는다.
(440) 내가 검은 군사에게 항복할 것 같은가. 나에게 목숨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패배해서 굴욕적으로 사는 것 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겠다.
(441) 어떤 수행자나 바라문들은 너의 군대에게 패배하여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42) 악마의 병사가 코끼리를 타고 사방을 포위하고 있으니, 나는 그들을 맞아 싸우리라. 나로 하여금 이곳에서 물러나게 하지는 못하리라.
(443) 신들도 세상 사람도 너의 병사를 꺾을 수 없지만, 나는 지혜를 가지고 그것을 부숴버린다. 마치 굽지 않은 흙 단지를 돌로 깨트려 버리듯이.
(444)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굳은 신념을 가지고 이 나라 저 나라로 편력할 것이다. 여러 제자들과 함께.
(445) 그들은 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근심할 것이 없고, 욕망이 없는 경지에 그들은 도달하리라.
(446) 악마는 말했다. “우리들은 칠 년 동안이나 당신을 한걸음 한걸음 따라 다녔다. 그러나 항상 조심하고 있는 정각자에게는 뛰어들 틈이 없었다.
(447) 까마귀가 기름을 발라 놓은 바위 둘레를 맴돌며 ‘이곳에서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것을 얻을 수 없을까? 맛 좋은 먹이가 없을까?’ 하며 날아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448) 그곳에서 맛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까마귀는 날아 가 버렸다. 바위에 가까이 가 본 그 까마귀처럼, 우리는 지쳐서 고타마를 떠나 간다.”
(449) 근심에 잠긴 악마의 옆구리에서 비파가 뚝 떨어졌다. 그만 그 악마는 기운 없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 훌륭하게 말해 진 것
(450)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한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외로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 스승은 여러 사문들을 불렀다. “사문들이여,” ”거룩하신 스승이시여,”하고, 사문들은 스승께 대답했다. 스승께서는 말씀하시었다. “사문들이여, 네 가지 특징을 갖춘 말은 훌륭하게 설해져 조금도 잘못되지 않았다. 모든 지혜로운 사람들이 보아도 결점이 없어 비난 받지 않을 것이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수행자가 훌륭하게 설한 것만을 말하고, 잘못 설해진 것은 말하지 않으며, 진리(법)만을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며, 좋은 것만 말하고 좋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는다고 하자. 사문들이여, 이 네 가지 특징이 갖추어져 있는 말은 훌륭하게 설해진 말이고 잘못 설해진 것이 아니다. 모든 현자들이 보아도 결점이 없어 비난 받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말씀하신 후 행복한 사람인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훌륭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가장 옳은 말을 하라. 이것이 첫째다. 진리(법)을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둘째다. 좋은 말을 하고 좋지 않은 말을 하지 말라. 이것이 셋째다.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말라. 이것이 넷째다.”
이때 방기사 장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왼 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이 계신 곳을 향해 합장하고 말했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행복한 분이시여,” ”어디 말해 보라, 방기사여.”라고, 스승은 말씀 하셨다. 방기사 장로는 스승 앞에서 알맞은 시로써 스승을 찬탄했다.
(451) “’자기를 괴롭히지 않고 남을 해치지 않는 말만을 하여라.’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잘 설해진 말씀 입니다.
(452) ‘좋은 말만을 하여라.’ 이것은 기꺼이 환영 받을 말 입니다. 느낌이 나쁜 말을 쓰지 말고 기분 좋은 말만을 하는 것입니다.
(453) 진실은 참으로 불멸의 말 입니다. 이것은 영원한 법칙 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진실에, 사물에, 또는 이치에 안주하고 있습니다.
(454) 절대적인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은 여러 말 가운데서 가장 뛰어 난 것 입니다.”
4. 순다리카 바라드바자
(455)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스승께서는 코살라 국의 순다리카 강변에 머물고 계셨다. 마침 그때 바라문인 순다리카 바라드바자는 순다리카 강변에서 성화(성스러운 불. 聖火)를 만들어 불에 공양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바라문인 그는 불에 공양을 올리는 것을 끝내자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두루 살피면서 말했다. “이 남은 음식을 누구에게 줄까?” 그는 머지 않은 곳에 거룩한 스승이 나무 아래에서 머리까지 가사옷을 둘러쓰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왼 손에는 남은 음식을 들고, 오른 손에는 물병을 들고 스승께로 갔다. 스승은 그의 발소리를 듣고 머리에 둘렀던 것을 벗었다. 순다리카 바라드바자는, ‘이 분은 머리를 깎은 분이다. 이분은 삭발한 분이다.’하며, 되돌아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설사 머리를 깎았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바라문일 수도 있다. 가까이 가서 그의 출신을 물어 보리라.’ 그는 스승께 가까이 가서 물었다. “당신의 출신은 무엇입니까?” 스승은 바라문인 순다리카 바라드바자에게 시로써 말씀하셨다.
“나는 바라문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오. 나는 바이샤 족 사람도 아니고, 다른 아무것도 아니오. 나는 어떤 계급에도 속하지 않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깊은 사색을 하면서 세상을 두루 다니오.
(456) 나는 낡은 옷을 걸치고 집이 없으며, 수염과 머리를 깎고 마음을 편안히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고 다니고 있소. 바라문이여, 당신이 내게 출신을 묻는 것은 당치 않소.”
(457) “여보시오, 바라문이 바라문을 만났을 때에는 ‘당신은 바라문이 아닙니까’라고 묻는 법입니다.” “만일 당신 자신이 바라문이거든 바라문인 내게 대답하시오. 나는 당신에게 세 구절 스물 넉자로 된 저 사비트리 찬가를 묻겠소.”
(458) “이 세상에서 선인이나 왕족, 바라문이나 일반인들은 무엇 때문에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것입니까?”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베다에 통달한 사람이 제사 때 어떤 세속인의 바치는 공물을 받는다면, 그 사람의 제사는 의미 있는 것이오.”
(459) 바라문이 말했다. “나는 베다에 뛰어난 사람을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대한 나의 공양물은 성취된 것 입니다. 이전에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해 다른 사람이 남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460) 스승께서 말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당신은 의로운 사람으로 정의를 구해 왔으니 가까이 와서 물으시오. 아마도 이곳에서 평안하고 성냄이 없고, 괴로움과 욕심이 없는 지혜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오.”
(461) “고타마시여, 저는 제사를 즐기고 있습니다. 또 제사를 지내려고 생각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알지를 못 합니다. 제게 가르쳐 주십시오. 무엇에 바치는 공양물이 효과가 있는가를.” ”그럼 바라문이여, 귀를 기울이시오. 나는 당신에게 진리를 말해주리다.
(462)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시오. 불은 온갖 섶에서 일어나는 것, 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도, 믿음과 진리를 구하는 마음이 굳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뉘우치는 마음으로 행동을 삼가면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오.
(463) 진실을 가지고 자제하고 모든 감관을 억제하며, 베다의 깊은 뜻을 통달하고 청정한 수행을 닦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과 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4)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살아가며, 자기 분수를 잘 알아 절제하고, 베틀의 북처럼 곧은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과 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5) 탐욕을 떠나 모든 감관을 조용히 지키고, 달이 월식에서 벗어 나듯이 걸림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6) 집착하는 일 없이 항상 마음을 다스려 내 것이라고 고집했던 모든 것을 버리고 세상을 거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치시오.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해야 합니다.
(467) 모든 욕망을 버리고 욕심을 이겨 생사의 끝을 알고 평안에 들어가, 맑고 시원한 호수처럼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68) 완전한 사람(여래)은 평등한 자(과거에 눈 뜬 사람들, 여러 부처님들)와 같고, 평등하지 않은 사람과는 멀리 떨어져 있소. 그는 끝없는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때가 묻지 않소.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합니다.
(469) 거짓과 교만과 탐욕을 떠나 내 것이라고 집착하거나 욕망과 성냄이 없어, 마음이 고요하여 근심의 때를 씻어 버린 바라문인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0) 마음의 집착을 이미 끊고 아무것에도 붙들리지 않으며,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서나 걸림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1) 마음을 한결같이 안정시켜 거센 흐름을 건너고, 가장 뛰어난 지혜로서 진리를 알고, 번뇌의 때를 소멸해 최후의 몸을 가지고 있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2) 생존의 더러움과 거친 말씨도 모두다 버렸소. 그는 베다에 통달한 사람이고, 모든 일에 해탈 하였소.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3) 집착을 뛰어넘어 집착이 없고, 교만한 마음이 가득한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교만한 마음이 없으며, 밭이나 땅과 함께 괴로움을 잘 알고 있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4) 욕망에 끌리지 않고 진리를 찾아 멀리 떠나고, 남들이 가르치는 다른 견해를 초월하여 아무것에도 걸리지 않은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5) 모든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이미 그것으로 인한 고통이 제거되고 존재하지 않소. 평안에 들어가 집착을 버리고 해탈한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6) 번뇌의 속박과 이 세상의 생존을 멸해 버린 궁극의 경지를 보고, 육체의 욕망을 남김없이 끊고 청정해서, 결점과 티끌이 없이 깨끗한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7) 자기 자신을 깊이 관찰하고, 마음이 안정되고 신체가 곧아, 스스로 편히 머물러 동요하지 않으며, 마음이 거칠지 않고 의혹이 없는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8)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장애는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에 대한 지견이 있으며, 마지막 인간의 몸을 가지고 위 없는 깨달음을 얻은 – 이것만으로도 사람은 깨끗해 진다 – 완전한 사람은 공양을 받을 만 합니다.
(479) 당신과 같은 베다에 뛰어난 사람을 만났으니, 저의 공양은 진실한 공양이 될 수 있습니다. 범천께서 증인이 되어 살펴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원컨대 저의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저의 공양을 받아 주십시오.
(480)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나는 먹을 수 없소. 바라문이여, 이것은 바르게 보는 사람들의 법이 아니오. 시를 읊어 얻은 것을 눈 뜬 사람들은 받지 않소. 바라문이여, 이것이 바로 눈 뜬 사람들의 생활 태도이오.
(481) 완전한 사람, 위대한 성자,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고 나쁜 행위를 소멸한 사람에게는 다른 음식을 바치시오. 그것이야말로 공덕을 바라는 이의 복밭이기 때문이오.”
(482) “스승이시여, 보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 제사 때 찾아 가 공양을 드릴 사람을, 저는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 알고 싶습니다.”
(483) “격정을 떠나 마음에 흐림이 없고, 모든 욕망을 벗어나 근심을 없앤 사람
(484) 한계의 끝(번뇌)을 눌러 생사를 다 알고, 성인의 덕성을 몸에 갖춘 그러한 성인이 제사 때 찾아오면,
(485) 그에게 눈썹을 찌푸리지 말고 합장하여 예배하시오. 음식을 가지고 공양 하시오. 이러한 보시는 뜻을 이루게 되고 많은 보답을 가져 오는 것이오.”
(486) “눈을 뜬 당신은 공양을 받기에 마땅 합니다. 당신은 으뜸가는 복밭이고 온 세상의 보시를 받으실 분 입니다. 당신께 드린 공양은 커다란 보답을 가져 올 것 입니다.” 바라문인 순다리카 바라드바자는 스승께 말씀 드렸다. “훌륭하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하십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가려진 것을 벗겨 주듯이, 길을 잃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 주듯이, 그리고 ‘눈 있는 자는 빛을 보리라’ 하면서 암흑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고타마 당신께 귀의 합니다. 그리고 가르침과 수행자의 모임에 귀의 합니다. 저는 고타마께 출가하고 완전한 계율을 받겠습니다.” 그리하여 바라문 순다리카 바라드바자는 스승께 출가하고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러고 얼마 후에 순다리카 바라드바아자는 홀로 멀리 떠나 게으르지 않고 힘써 정진한 끝에 더 없이 청정한 수행의 궁극 – 모든 사람들이 바로 그것을 얻기 위해 집을 떠나 집 없는 상태에서 수행하는 것인데 – 을 현생에서 스스로 깨닫고, 이를 증명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태어나는 일은 이제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이미 완성 되었다. 할 일을 다 마쳤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런 생을 받지 않는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순다리카 바라드바자 장로는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5. 젊은 마가의 질문
(487)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왕사성의 독수리 봉에 계시었다. 그때 마가 청년은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기쁘고 기억할 만한 인사를 나눈 뒤 한 옆에 앉더니 스승께 말했다.
“고타마시여, 저는 참으로 베푸는 사람이며, 관대하여 여러 사람들의 요구하는 바에 응하며, 올바른 방법으로 재물을 구합니다. 그리고는 올바르게 얻은 재물을 한 사람에게도 주고, 두 사람에게도 주고, 세 사람, 네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 일곱, 여덟, 아홉, 열 사람, 스무 사람, 서른, 마흔, 쉰 사람에게도 주고, 백 사람에게도 주며, 더 많은 사람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고타마시여, 내가 이렇게 주고 이와 같이 바친다면 얼마나 많은 복덕을 얻겠습니까?” “젊은이여, 그대가 그와 같이 참으로 나누어 주고 베푼다면, 많은 복덕을 얻게 되리라. 젊은이여, 누구든지 참으로 나누어 주는 베품이나, 관대하여 사람들이 요구하는 바에 응하며, 바른 방법으로 재산을 얻어 그 재산으로 하여금 한 사람 내지는 백 사람에게 나누어 주며,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은 많은 복덕을 얻게 되리라.” 마가 청년은 시로써 여쭈었다.
마가 청년이 말했다.
(487) “가사를 입고 집 없이 다니는 너그러운 스승이신 고타마께 저는 묻겠습니다. 베풀어 주기를 구하는 이에게 보시하는 사람,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고,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주는 사람이, 누구에게 바치는 공양물이 가장 깨끗합니까?”
(488) 스승은 대답 하셨다. “마가여, 보시를 구하는 이에게 보시하는 사람,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풀 때 그것을 받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어야 한다.”
(489) 마가 청년은 말했다. “보시를 구하는 사람에게 보시하는 사람, 복덕을 구하고 복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풀 때에, 마땅히 보시를 받을 사람이 누구인지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490) “참으로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자기를 다스리는 완전한 사람,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과 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1) 모든 속박을 끊고 자제하고 해탈하여 괴로움과 욕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2)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자제하고 해탈하여 괴로움과 욕심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3) 탐욕과 혐오와 어리석음을 버리고 번뇌의 더러움에서 벗어나 청정한 수행을 닦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4) 거짓도 없고 교만도 없고, 탐욕을 떠나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지도 않고, 욕망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5) 참으로 온갖 애착에 붙잡히지 않고, 이미 거센 흐름을 건너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이 다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6)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떠한 세상에 있어서도 갖가지 생존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7)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자신을 절제하고 베틀의 북처럼 똑바른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과 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8) 탐욕을 떠나 모든 감관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499) 마음이 평화롭고 탐욕을 떠나 성내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생존의 모든 조건 지워짐을 버리고, 갈 곳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0) 생과 사를 남김없이 버리고 모든 의혹을 넘어선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1)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한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2) ‘이것이 마지막 생존이고 다시는 생을 받지 않는다’라고, 이 세상에서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3) 베다를 잘 알고, 고요한 마음을 즐기며, 생각이 깊고, 깨달음을 얻어 많은 사람을 귀의시킨 사람들, 그들에게 때때로 공양을 바쳐라. 복덕을 구하는 바라문은 그들을 공양하라.
(504) “참으로 제 질문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보시 받을 사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승이시여, 당신께서는 이 모든 일들을 이 세상에서 분명히 알고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이 이치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 입니다.”
(505) 마가 청년이 다시 말했다. “보시를 구하는 이에게 보시하는 사람, 복과 덕을 구하고 복과 덕을 위해 공양을 바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남에게 음식을 베풀 때, 완전한 제사가 어떤 것인지를 저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506) 거룩한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가여, 제사를 지내라. 제사를 지내는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깨끗이 하여라. 제사 지낼 사람이 한 마음으로 신경을 쓸 일은 오로지 제사뿐이다. 그는 편안히 머물러 사악함을 버린다.
(507) 그는 탐욕에서 떠나 사악함을 누르고 한량없는 자비심을 일으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아서 그 마음이 사방에 가득 차게 한다.”
(508) “누가 깨끗해지고 해탈하는 것입니까? 누가 붙들려 얽매이는 것입니까? 무엇으로 인해 사람은 스스로 범천계에 이릅니까? 성인이시여, 몰라서 묻는 것이오니 일러 주십시오. 스승이시여, 저는 지금 범천을 눈앞에 보았습니다. 진실로 당신은 범천과 같은 분이십니다. 빛을 지닌 이시여, 어떻게 하면 범천계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509) 스승은 대답하셨다. “마가여,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완전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람은 보시를 받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보시를 베푸는 사람이 이처럼 바르게 제사를 지낸다면 범천계에 태어 날 것이다.”
(510)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마가 청년은 스승께 아뢰었다. “훌륭하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한 말씀 입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그리고 ‘눈 있는 사람은 빛을 볼 것이다’하여 암흑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께 귀의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청정한 도를 닦는 수행자의 모임에 귀의 합니다. 스승 고타마께서는 저를 재가 수행자로 받아 주십시오. 오늘부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귀의하겠습니다.”
6.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왕사성 죽림원에 있는 다람쥐 사육장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에게 한 신이 말했다. “사비야여, 사문이건 바라문이건 그대가 질문을 했을 때 분명히 답변할 수 있는 사람이 있거든 그대는 그 밑에서 깨끗한 수행을 닦아라.” 방랑의 수행자 사비야는 그 신에게서 그와 같은 말을 듣고 다음의 여섯 스승을 찾아가 물었다. 즉, 푸라나 캇사파, 막카리 고사라, 아지타 케사캄바리, 파쿠타 캇차야나, 베랏티족의 아들인 산자야, 나타족의 아들 니칸타 등인데, 그들은 사문이나 바라문으로서 많은 대중들을 이끄는 단체의 스승이었다. 명성을 떨치고, 교파의 지도자이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인이라고 숭배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에게서 질문을 받았지만, 만족하게 답변을 하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화를 내고 혐오와 근심의 빛을 감추지 못했으며, 도리어 사비야에게 반문을 했다. 그래서 사비야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문과 바라문들은 많은 무리들을 이끄는 단체의 스승이며, 명성있는 교파의 교조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질문을 받고도 만족스런 대답을 못했다.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혐오와 근심의 빛을 감추지 못했으며, 내게 도리어 반문을 했다.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 세속적인 욕망이나 누릴까 보다.’ 그러다가 사비야는 다시 이렇게 생각했다. ‘여기 계신 사문 고타마도 많은 대중을 거느린 단체의 스승이며, 명성이 있고, 교파의 교조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인이라 숭배를 받고 있다. 고타마를 찾아가 물어 봐야겠다.’ 그러면서 사비야는 이런 생각도 했다. ‘내가 이미 질문을 한 여러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늙은이들이지만, 높은 자리에 있고 경험을 쌓았으며 출가한 지가 꽤 오래 되었다. 그런데도 내게 해답을 못 주었는데, 어찌 사문 고타마가 내 물음에 똑똑히 대답을 해 줄 수 있을까? 사문 고타마는 아직 젊고 출가한지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사비야는 또 이렇게 생각했다. ‘사문을 젊다고 해서 우습게 보거나 경멸해서는 안 된다. 그는 젊지만 사문이다. 그에게는 큰 신통과 위력이 있다. 나는 고타마에게 가서 물어 보리라.’ 그리하여 사비야는 왕사성을 향해 길을 떠났다. 죽림원 다람쥐 사육장에 계시는 거룩한 스승을 뵈었다. 기쁘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인사를 나눈 뒤 한곁에 앉았다. 사비야는 시로써 스승께 여쭈었다.
“의혹이 있어 질문하고자 이곳에 왔습니다. 저를 위해 그 의혹을 풀어 주십시오. 제가 질문을 드리면 차례대로 법(진리)에 따라 분명히 대답해 주십시오.”
(511)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당신은 질문을 하려고 멀리서 왔소. 당신을 위해 그것을 풀어 주리다. 당신이 물으면 차례대로 법에 따라서 분명하게 대답해 주겠소.
(512) 사비야여, 무엇이든 마음에 있는 것을 물어 보시오. 나는 낱낱이 물음에 대답해 드리리다.”
(513) 이때 사비야는 생각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정말 희한한 일이다. 내가 다른 사문이나 바라문에게서는 들을 기회조차 얻지 못했는데, 사문 고타마께서는 그 기회를 주시는구나’ 그는 기뻐하면서 스승께 여쭈었다.
사비야가 물었다. “어떤 사람을 수행자라 부릅니까? 어떤 사람을 온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자신을 절제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을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스승이시여, 이것을 제게 설명해 주십시오.”
(514) 스승은 대답했다. “사비야여, 스스로 도를 닦아 완전한 평안에 이르고, 의혹을 뛰어 넘고 생과 사를 버리고 청정한 수행에 머물러 이 세상에 거듭 태어나지 않는 사람, 그를 수행자라 합니다.
(515) 모든 일에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혀 이 세상 아무것에도 해를 끼치지 않으며, 거센 흐름을 건너 세속의 때에 더럽혀지지 않고 육체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사문, 그를 온화한 사람이라 합니다.
(516)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모든 감관을 잘 다스리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이 싫어서 멀리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수행하는 사람, 그는 자기를 절제한 사람 입니다.
(517) 모든 시간과 윤회와 목숨이 있는 것의 생과 사, 그 두 가지를 분별하고 티끌을 털어 버리고, 깨끗하게 생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눈 뜬 사람이라 합니다.”
(518) 그때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환희심으로 다시 스승께 물었다. 사비야가 여쭈었다. “어떤 사람을 바라문이라 합니까? 어떤 사람을 목욕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어떤 사람을 용(龍)이라 부릅니까? 스승이시여,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519)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비야여, 모든 악을 물리치고 때묻지 않고, 마음을 잘 가라앉혀 스스로 안정하며, 윤회를 넘어서 완전한 자가 되어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바라문이라 합니다.
(520) 절대적인 평화의 세계에 들어가 선과 악을 버리고 때묻지 않으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알고 생과 사를 초월한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문 입니다.
(521)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모든 죄악을 씻어 버리고, 시간의 지배를 받는 신과 인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 그를 목욕하는 사람이라 부릅니다.
(522) 세속에 있으면서 어떠한 죄악도 짓지 않고 온갖 매듭의 얽힘을 풀어 버리고 모든 것에서 해탈한 사람, 이런 사람을 용이라 합니다.”
(523) 그때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환희가 가득 찬 마음으로 또다시 스승께 물었다. 사비야는 여쭈었다.
“무엇 때문에 밭의 승리자라 부릅니까? 무엇 때문에 뛰어난 사람이라 부릅니까? 무엇 때문에 현명한 사람이라 부릅니까? 무엇 때문에 성인이라 부릅니까? 스승이시여,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요.”
(524)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비야여, 하늘의 밭, 사람의 밭, 범천의 밭 등, 모든 밭을 분별하고 모든 밭의 근본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바로 그 때문에 <밭의 승리자>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525) 하늘의 곳간, 사람의 곳간, 범천의 곳간 등, 모든 곳간을 분별하고 모든 곳간의 근본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그 때문에 <뛰어난 사람>이라 불립니다.
(526) 안과 밖의 양면에서 바른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하여 청정한 지혜가 있고, 선과 악의 모든 업을 초월한 사람, 이런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현자(賢者)>라 불립니다.
(527) 온 세상에서 안팎으로 옳고 그름의 법을 알고, 인간과 신의 숭배를 받아 집착의 그물을 벗어난 사람, 그는 <성인> 입니다.
(528) 그때 방랑의 수행자 사바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환희심으로 가득 차서 다시 스승께 질문했다. 사비야가 여쭈었다. “무엇을 얻은 이를 베다에 통달한 사람이라 부릅니까? 어떻게 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을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라 부릅니까? 태생이 좋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사람 입니까? 스승이시여,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529) 스승께서 대답하셨다. “사비야여,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베다를 잘 분별해서 모든 감수(感受. 느낌)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그 감수마저 초월한 사람, 그는 <베다에 통달한 사람> 입니다.
(530) 안팎으로 병의 근원이 되는 망상과 명칭과 형태를 알아서, 온갖 병의 근원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그런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달관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531) 이 세상에서 모든 죄악을 떠나 지옥의 고통을 초월하고 부지런히 노력하는 사람, 힘을 다해 정진하는 현자, 그런 사람이 <힘써 노력하는 사람>이라 불립니다.
(532) 안팎으로 집착의 근원인 모든 속박을 잘라 버리고, 온갖 집착의 근원인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 그러한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태생이 좋은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533) 그때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환희심으로 가득 차서 또 다시 스승께 질문했다. 사비야가 물었다. “어떤 사람을 배움이 깊은 사람이라 부릅니까? 어떤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 부릅니까? 또 어떤 사람을 행(行)이 갖추어진 사람이라 부릅니까? 방랑하는 수행자란 도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스승이시여, 저에게 설명해 주십시오.”
(534) 스승께서는 말씀 하셨다. “사비야여, 가르침을 듣고 나서는, 세상의 옳고 그른 이치를 잘 알고, 모든 일을 정복하는 사람, 의혹이 없는 사람, 해탈한 사람, 괴로움이 없는 사람을 <배움이 깊은 사람>이라 부릅니다.
(535) 모든 더러움과 장애를 끊은 지혜로운 이는 모태에 들지 않습니다. 세가지 생각과 더러움을 털어 버리고 망상 분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거룩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536)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할 일을 다하고 뛰어나 항상 이치를 알며, 어떤 일에도 집착하지 않고, 해탈하여 성냄이 없는 사람, 그를 <행이 갖추어진 사람>이라 부릅니다.
(537) 위로나 아래로, 또는 옆으로나 가운데로 모름지기 괴로움의 괴로움이 생기는 행위를 피하고, 진리를 잘 알아 그대로 행하고, 거짓과 교만한 마음과 탐욕과 성냄과 명칭과 형태를 없애 버리고, 얻을 것을 얻은 사람, 그를 <방랑의 수행자>라 부릅니다.”
(538) 그때 사비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 몹시 기뻐하면서 환희심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께 합장하며 다음과 같은 시로써 스승을 찬탄하였다.
“사문들이 논쟁에 휘말린 명칭과 문자에 의해 생겨 난 예순 세가지 다른 생각을 이기고, 지혜 많은 분은 거센 흐름을 건너셨습니다.
(539) 당신은 괴로움을 모두 없애고 피안에 이른 분 입니다. 당신은 참 사람이시고 깨달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번뇌의 때를 씻어버린 분입니다. 당신에게는 빛이 있고, 이성이 있고, 지혜가 많습니다. 괴로움을 없앤 분이시여, 당신은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540) 당신은 저에게 의혹이 있는 것을 아시고, 저를 의혹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마음이 거칠지 않은 태양의 후예시여, 당신은 인자하십니다.
(541) 제가 예전에 품었던 의문을 당신께서는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눈이 있는 이여, 성인이시여, 참으로 당신은 깨달은 분 입니다. 당신에게는 아무것도 장애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542) 당신의 번민은 모두 소멸되었습니다. 당신은 시원스럽고 몸을 잘 절제하고 흔들리지 않고 성실하게 사는 분 입니다.
(543) 코끼리 중에 왕이시며 위대한 영웅이신 당신께서 말씀하실 때에는 모든 신들은 나라다와 팝바타들과 함께 기뻐 합니다.
(544) 존귀하신 분이시여, 당신께 예배 드립니다. 가장 뛰어난 분이시여, 당신께 예배 드립니다. 신들을 포함한 온 세상에서 당신에게 견줄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545) 당신은 깨달은 분 입니다. 당신은 스승 이십니다. 당신은 악마를 정복한 분이며 현자이십니다. 당신은 번뇌의 숨은 힘을 끊고 스스로 거센 흐름을 건너셨고, 또 사람들을 건너 주십니다.
(546) 당신은 속박을 뛰어 넘었고,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 버렸습니다. 당신은 집착하지 않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자 입니다.
(547) 아름다운 흰 연꽃이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듯이, 당신은 선과 악의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습니다. 용감한 분이시여, 두 발을 뻗으십시오. 사비야는 스승께 예배 드립니다.”
(548) 방랑의 수행자 사비야는 거룩하신 스승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하며 말했다.
“훌륭한 말씀 입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훌륭한 가르침 입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덮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듯이, 또는 ‘눈 있는 이는 빛을 보리라’하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비춰 주듯이,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진리를 밝혀 주셨습니다. 저는 당신 고타마에게 귀의 합니다. 그리고 가름침과 수행승의 모임에 귀의 합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께 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완전한 계율을 받고 싶습니다.”
“사비야여, 과거에 이교도이었던 이가 내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넉 달 동안 따로 살아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난 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수행자는 그를 출가시키고, 완전한 계율을 받게 해서 수행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사람에 따라 그 기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그러시다면 저는 넉 달이 아니라 네 해 동안이라도 따로 살겠습니다. 그래서 사 년이 지난 이제는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 여러 수행자들은 저를 출가시키고 완전한 계율을 받게 하여 수행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방랑하는 수행자 사비야는 그때 바로 스승 앞에서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비야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며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정진하다가, 마침내 다시 없는 깨끗한 수행의 궁극 –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얻고자 집을 나와 집 없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 을 현세에서 스스로 깨달아 증명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수행은 이미 완성됐다. 할 일을 다했다. 이제 다시 이러한 생존을 받지는 않는다.’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비야 장로는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7. 바라문 세라
나는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스승께서 수행자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앙굿타라파를 두루 다니사다가 아파나라고 하는 앙굿타라파의 한 마을에 들어 가셨다. 머리를 땋은 수행자 케니야는 생각했다. ‘석가족의 아들인 사문 고타마는 석가족의 집에서 출가하여, 수행자 천 이백오십 인의 큰 무리를 이끌고 두루 다니시다가 아파나에 이르렀다. 그 고타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좋은 평판이 있다. 즉 그는 참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와 덕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세상을 알아버린 사람, 위 없는 사람,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 이, 신과 인간의 스승, 눈 뜬 사람, 거룩한 스승이라고 불린다. 그는 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증명하여 신,악마, 범천을 포함한 이 세계와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가르침을 베푼다. 그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고, 말과 뜻이 잘 갖추어진 가르침과 원만하고 청정한 수행을 설법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토록 훌륭하고 존경 받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머리를 땋은 수행자 케니야는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가서 인사를 드렸다. 기쁘고 기억에 남을만한 인사를 나눈 후에 한편에 가 앉았다. 스승께서는 머리를 땋은 수행자 케니야에게 진리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용기를 주어 기쁘게 해주셨다. 케니야는 스승께 이같이 말씀 드렸다.
“고타마께서는 수행자들과 함께 내일 제가 올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스승은 케니야에게 말씀 하셨다. “케니야여, 수행자들의 숫자는 무려 천이백오십 인이나 됩니다. 또 당신은 바라문들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케니야는 거듭 스승께 여쭈었다. “고타마시여, 수행자들의 숫자가 천이백오십 인이나 되며, 또 저는 바라문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타마께서는 수행자들과 함께 내일 제가 올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스승은 케니야에게 거듭 말씀하셨다. “케니야여, 수행자들의 무리는 많아서 천이백오십 인이나 되며, 당신은 바라문을 섬기고 있지 않습니까?” 케니야는 세번째로 스승께 여쭈었다. “고타마시여, 수행자들의 무리는 많아서 천이백오십 인이나 되며, 또 저는 바라문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타마께서는 그들과 함께 오셔서 제가 올리는 음식을 받아 주십시오.” 스승께서는 침묵으로써 승낙을 하셨다. 케니야는 스승께서 승낙하신 것을 알고 자리에서 떠나 자기의 거처로 갔다. 그리고 친구와 친척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 말을 들으십시오. 나는 사문 고타마를 그 수행자들과 함께 내일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나를 도와 주십시오.” 케니야의 친구와 친척들은 승낙하고, 어떤 이는 솥을 걸고 나무를 쪼개며, 어떤 이는 그릇을 씻고 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고 혹은 자리를 준비했다. 그러고 케이냐 자신은 흰 천으로 된 천막으로 둥글게 공양 자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때 세라 바라문은 아파나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3베다의 깊은 뜻을 깨달아 어휘, 활용론, 음운론, 어원론과 제4의 아티르바 베다와 제5 고담(古譚)의 어구와 문법에 통달하고, 순세론(順世論)과 위인의 관상에 통달으며, 삼백 명의 소년에게 베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니야는 세라 바라문을 따르고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그때 세라 바라문은 삼백 명의 소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는 오래 앉아 있었기 때문에 생긴 피로를 풀기 위하여 여기저기 산책을 하다가 케니야의 처소에 가까이 가게 되었다.
세라 바라문은 케니야의 처소에 사는 머리를 땋은 친구와 친척들이, 어떤 이는 솥을 걸고 나무를 쪼개며, 어떤 이는 그릇을 씻고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붓고 혹은 자리를 준비하며, 케니야는 몸소 천막을 쳐서 음식을 먹는 자리를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케니야에게 다가가 물었다. “케니야, 당신 아들이 장가라도 가는 것입니까? 혹은 딸이 시집이라도 가는 것입니까? 아니면, 큰 제사가 있습니까? 또는 마가다 왕 세니야 빔비사라가 군대를 이끌고 내일 제사라도 하러 온다고 전갈을 받았습니까?” “세라시여, 저는 아들을 장가 보내지도 않고 딸을 시집 보내지도 않으며, 또 마가다왕 세니야 빔비사라를 초대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게는 머지 않아 큰 공양이 있습니다. 석가족 아들인 사문 고타마가 석가족 집에서 출가하여 앙굿타라파를 두루 다니다가 그를 따르는 수행자 천이백오십 인과 함께 아파나에 오셨습니다. 그 고타마에게는 이런 좋은 소문이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 스승은 참사람, 깨달은 사람, 지혜와 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사람을 잘 길들이는 이, 신과 인간의 스승, 눈 뜬 사람, 거룩한 스승이라고들 합니다. 저는 그분을 수행자들과 함께 내일 식사에 초대 했습니다.” “케니야여, 당신은 그를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세라여, 나는 그를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다.” “케니야여, 당신은 그를 <눈 뜬 사람>이라 부릅니까?” “세에라여, 나는 그를 <눈 뜬 사람> 이라 부릅니다.”
그때 세라 바라문은 생각했다. ‘눈 뜬 사람이란, 이 세상에서 그 목소리를 듣기조차 힘든 일이다. 그런데 우리들 성전(聖典)속에 위인의 상(相)이 서른 두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그것을 갖추고 있는 위인에게는 단 두 가지 길이 있을 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다. 만일 그가 세속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전륜왕이 되어 정의를 지키는 법왕, 세상의 정복자로서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일곱가지 보배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는 바퀴(輪), 코끼리, 말, 구슬, 여자, 제물 그리고 지휘자라는 보배가 따를 것이다. 또 그에게는 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어 모두가 용감무쌍하며 적을 쳐부순다. 그는 이 세상의 끝에 이르기까지 무력을 쓰지 않고 정의로써 정복하고 지배한다. 그러나 그가 만일 집을 떠나 출가자가 된다면 참사람, 깨달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 온갖 번뇌를 없앨 것이다.’ 세라는 케니야에게 물었다. “케니야여, 그런 그 참사람, 깨달은 사람인 고타마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케니야는 바른 팔을 들어 세라 바라문에게 말했다. “세라여, 저쪽으로 가면 푸른 숲이 있습니다. 그분은 그곳에 계십니다.” 그리하여 세라 바라문은 삼백 명의 소년들과 함께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세라 바라문은 같이 온 소년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천천히 걸어 소리를 내지 말고 따라 오너라. 모든 스승은 사자처럼 홀로 거니는 분이며, 가까이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문 고타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너희들은 중간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내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세라 바라문은 거룩하신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스승께 절을 하고 나서 기쁘고 기억할만한 인사를 나눈 뒤 한편으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세라 바라문은 스승의 몸에 서른 두 가지 위인의 상이 있는지를 살폈다. 그는 스승의 몸에서 단 두 가지 상을 빼고는 서른 두 가지 위인의 상이 거의 갖추어져 있음을 보았다. 그 두 가지 상이 과연 스승께 있는지 없는지 의심되어 <눈 뜬 사람>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두 가지란 몸의 막(膜)속에 들어 있는 음부와 광장설상이었다. 그때 스승은 생각했다. ‘이 세라 바라문은 내 몸에 있는 서른 두 가지 위인의 상을 거의 보았지만, 단 두 가지는 보질 못했다. 몸의 막 속에 들어 있는 음부와 광장설상이라는 두 위인상이 과연 내게 있는지 없는지 의심하고, 눈 뜬 사람임을 믿지 않는구나.’ 그래서 스승께서는 세에라 바라문이 몸의 막 속에 들어 있는 음부를 볼 수 있도록 신통력을 발휘 하셨다. 그리고 혀를 내밀어 혓바닥으로 양쪽 귓속을 아래 위로 핥으시고, 양쪽 콧구멍을 아래 위로 핥으시며, 또 이마를 핥으시었다. 세라 바라문은 이렇게 생각했다. ‘사문 고타마는 서른 두가지 위인상을 완전히 갖추고 계시다. 그러나 나는 그가 깨달은 사람인지 아닌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나는 늙고 나이가 많아, 스승이나 또는 그의 스승인 바라문들이 ‘모든 존경 받는 사람과 깨친 사람은 자기가 칭찬 받았을 때는 자신을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럼, 나는 적당한 시로써 사문 고타마를 그 앞에서 찬탄하리라.‘ 그래서 세에라 바라문은 적당한 시로써 스승의 앞에서 찬양하였다.
“고타마시여, 힘이 넘치는 이여, 당신의 몸은 완전하고 빛이 나며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금빛으로 빛나며 아주 깨끗 합니다.
(549) 그리고 태생이 좋은 사람이 갖추는 용모는 모두 위인의 상으로서 당신 몸에 있습니다.
(550) 당신은 눈이 맑고 얼굴도 보기 좋으며, 신체는 크고 단정하며, 수행자들 속에서도 태양처럼 빛납니다.
(551) 당신은 보기에도 아름다운 수행자로 그 살갗은 황금빛 입니다. 이렇듯 용모가 훌륭한데 어찌 수행자가 되었습니까?
(552) 당신은 전륜왕이 되어 군대를 거느리고 세상을 정복하여 잠부주(인도)의 지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553) 왕이나 왕족들은 당신께 충성을 맹세할 것입니다. 고타마시여, 왕 중의 왕으로서, 인류의 제왕으로서 세상을 통치를 하십시오.”
(554) 스승은 대답했다. “세라여, 나는 왕이며 위 없는 진리의 왕 입니다. 진리로써 바퀴(법)를 굴리는 것 입니다. 거꾸로 돌 수 없는 바퀴를”
(555) 세라 바라문이 말했다. “당신은 정각자라고 스스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고타마시여, ‘당신은 위 없는 진리의 왕이고, 진리로써 바퀴를 굴린다’고 말씀 하십니다.
(556) 그렇다면 누가 당신의 장군 입니까? 당신을 이어받을 제자는 누구입니까? 누가 당신의 뒤를 이어 이 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까?”
(557) 스승은 대답하셨다. “세라여, 내가 굴린 위 없는 바퀴를 사리뿟타가 굴릴 것입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을 따라 나타난 사람 입니다.
(558) 나는 알아야 할 것을 이미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붓다 입니다. 바라문이여
(559) 나에 대한 의혹을 푸십시오. 바라문이여, 그리고 나를 믿으십시오. 깨달은 사람들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 입니다.
(560) 그들(눈 뜬 사람)이 가끔 세상에 나타나는 것은 그대들에게는 만나보기 어려운 일인데, 나는 바로 그 정각자 입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번뇌의 화살을 꺾어 버린 위 없는 사람 입니다.
(561) 나는 신성한 사람이며, 비길 데 없고, 악마의 군대를 물리쳤으며, 모든 적을 항복 시켰고, 아무것에도 두려움 없이 기뻐합니다.”
(562) 세라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눈이 있는 이의 말씀을 들어라. 그는 번뇌의 사슬을 끊어버린 사람이며 위대한 영웅이시다. 마치 사자가 숲 속에서 포효하는 것과 같다.
(563) 신성한 분, 비길 데가 없고, 악마의 군대를 물리친 이를 보고 누가 믿지 않을 것인가. 피부가 검은 종족 출신이라도 믿으리라.
(564)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를 따르라. 그리고 따르고 싶지 않은 자들은 떠나라. 나는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에게 출가하겠다.”
(565) 세라의 제자들이 말했다. “만일 스승님께서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기뻐 하신다면, 저희들도 또한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에게 출가하겠습니다.”
(566) 세라가 스승께 말했다. “저희들 삼백 명의 바라문은 합장하고 부탁 합니다. 스승이시여, 저희들은 당신 곁에서 깨끗한 수행을 닦겠습니다.”
(567) 스승이 말씀하셨다. “세라여, 깨끗한 수행은 잘 설해져 있습니다. 그것은 눈 앞에 당장 열매(과보)를 가져 옵니다. 도를 닦는 사람이 게으르지 않고 출가하여 깨끗한 수행을 닦는 것은 헛된 일이 아닙니다.”
(568) 세라 바라문은 제자들과 함께 스승 곁에 출가하여 완전한 계율을 받았다. 그때 머리를 땋은 수행자 케니야는 그날 밤이 지나자 자기 처소에서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스승께 시간이 된 것을 알렸다. “고타마시여, 시간이 되었습니다.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스승은 오전 중에 속옷과 겉옷을 입고 바리때를 드시고 머리 땋은 수행자 케니야의 처소로 가셨다. 그리고 수행자의 무리와 함께 미리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케니야는 부처님을 비롯하여 수행자들에게 손수 맛 좋은 음식을 나르면서 마음껏 드시도록 권했다. 그리고 케니야는 스승께서 공양을 마치시고 음식에서 손을 떼시자 스승의 발 밑에 앉았다. 스승은 다음과 같은 시로써 케니야에게 감사의 말씀을 하셨다.
“불에 대한 공양은 공양중에서도 가장 으뜸입니다. 사비트리는 베다의 시구 중에서 으뜸이고, 왕은 사람 중에서 으뜸이며, 큰 바다는 모든 강 중에도 으뜸입니다.
(569) 달은 별들 중에서 으뜸이며, 태양은 빛나는 것 중에서 으뜸이고, 수행자들은 복과 덕을 바라고 공양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으뜸입니다.”
(570) 스승은 이러한 시로써 케니야에게 감사의 뜻을 말씀하시고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 가셨다. 세라 장로는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을 떠나 홀로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여 얼마 안 가서 (여러 사람들이 그것을 얻으려고 떳떳하게 집을 나와 집 없는 생활을 하듯이) 위 없는 진리의 궁극을 현세에서 스스로 깨닫고 증명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태어나는 일은 끝났다. 청정한 행은 이미 완성되었다. 할 일은 다 마쳤다. 이제 다시는 이러한 생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세라 장로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성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후 세라 장로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었다. 그리고 옷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스승께 합장하여 다음의 시로써 여쭈었다.
“스승이시여, 눈이 있는 분이시여, 오늘부터 여드레 전에 우리는 당신께 귀의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 밤을 지나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 속에서 안정을 얻었습니다.
(571) 당신은 깨달으신 분 입니다. 당신은 스승이십니다. 당신은 악마를 정복자 한 분이며 현자 이십니다. 당신은 번뇌의 숨은 힘을 끊고, 스스로 거센 흐름을 건너셨고, 또 사람들을 건네 주십니다.
(572) 당신은 속박을 뛰어 넘었고 모든 번뇌의 더러움을 없애 버렸습니다. 당신은 집착하지 않고 두려워 떨지 않는 사자입니다.
(573) 이들 삼백 명의 수행자는 합장하고 서 있습니다. 용감한 분이시여, 발을 뻗쳐 주십시오. 여러 수행자들로 하여금 스승께 예배 드리게 하렵니다.”
8. 화살
사람의 생명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얼마를 사는지 아무도 모른다. 애처롭고 짧으며 고뇌로 엉켜 있는 것이다.
(575) 태어난 것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늙으면 죽음이 찾아 온다. 실로 생이 있는 자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576) 익은 과일은 빨리 떨어 질 위험이 있다. 그와 같이 태어난 자는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
(577) 이를 테면, 옹기장이가 만든 질그릇이 마침내는 모두 깨어지고 말듯이 사람의 목숨도 또한 그러하다.
(578) 젊은이도, 늙은이도, 어리석은 이도, 지혜로운 이도 모두 죽음에는 굴복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579) 그들은 죽음에 붙잡혀 저 세상으로 가지만, 아버지도 그 자식을 구하지 못하고 친척도 그 친척을 구하지 못한다.
(580) 보라. 친척들이 애타는 마음으로 지켜보지만, 사람은 하나씩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사라져 간다.
(581)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늙음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는 세상의 참모습(실상)을 잘 알고 슬퍼하지 않는다.
(582) 그대는 온 사람의 길을 모르고, 또 간 사람의 길을 모른다. 그대는 생과 사의 양극을 보지 못하고 부질없이 슬피 운다.
(583) 지혜로운 이도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584)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 다만 그에게는 더욱더 괴로움이 생기고 몸만 야위어 갈 따름이다.
(585) 괴로워할수록 몸은 여위어지고 추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울고 슬퍼하는 것은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이다.
(586) 슬픔을 버리지 않는 사람은 점점 더 괴로워질 뿐이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운다는 것은 슬픔에 사로잡힌 것이다.
(587) 또한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라. 또 살아 있는 자는 죽음에 붙잡혀 떨고 있지 않은가.
(588) 사람들이 여러 가지를 염원할지라도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기대에 어긋나는 것도 이와 같으니라. 보라, 세상의 저 모습을!
(589) 가령 사람이 백 년을 살거나 그 이상을 산다 할지라도 마침내는 친족들을 떠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을 버리게 된다.
(590) 그러므로 존경하는 사람의 말씀을 듣고, 죽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는 ‘그는 이미 내 힘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구나’라고 깨달아 슬퍼하거나 탄식하지 말아라.
(591) 이를테면, 집에 불이 난 것을 물로 꺼 버리듯이, 지혜로운 사람들은 걱정이 생겼을 때는 이내 지워 버린다. 마치 바람이 솜털을 날려 버리는 것과 같이.
(593) 번뇌의 화살을 뽑아 버리고 거리낌 없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면, 모든 걱정을 초월하여 근심 없는 자, 평안에 들어간 자가 될 것이다.
9. 바셋타
(594)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거룩한 스승께서는 잇차낭갈라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때 재산이 많고 유명한 바라문들이 그곳에 많이 살고 있었다. 즉, 찬킨 바라문, 타룻카 바라문, 폭카라사티 바라문, 자눗소니 바라문, 토데야 바라문, 이밖에 저명한 바라문들이었다. 그때 바셋타와 바라드바자라고 하는 두 젊은이가 오랫동안 앉아 있었기 때문에 생긴 피로를 풀고자 여기저기 거닐면서 논쟁을 벌였다. “도대체 바라문이란 어떤 것인가? 바라드바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통이 모두다 칠 대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혈통에 대해서 지탄이나 비난 받은 일이 없는 이런 사람을 바라문이라 합니다.” 바셋타는 말했다. “계율을 지키며 덕행을 갖추고 있다면, 바로 이 사람이 바라문 입니다.” 바라드바자는 바셋타를 설득할 수 없었고, 바셋타도 바라드바자를 설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셋타는 바라드바자에게 말했다. “바라드바자여, 석가족의 아들인 사문 고타마는 출가하여 이곳 잇차낭갈라 숲 속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 고타마에게는 다음과 같은 좋은 명성이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 스승은 존경할만한 사람, 눈 뜬 사람, 지혜와 덕행을 갖춘 사람, 행복한 사람, 세상일을 잘 아는 사람, 위 없는 사람, 사람들을 잘 길들이는 사람, 신과 인간의 스승, 눈이 열린 깨달은 사람,거룩한 스승이라고 합니다. 바라드바자여, 사문 고타마에게 가 봅시다. 거기 가서 그분에 이것을 물어 봅시다. 그의 대답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믿읍시다.” 그들은 스승이 계신 곳으로 찾아 갔다. 스승께 절을 하고 나서, 기뻐고 잊을 수 없는 말들로 인사를 나눈 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바셋타 바라문은 다음과 같은 시로써 스승께 여쭈었다.
“우리 두사람은 3베다 학자라고 스승도 인정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저는 폭카라사티의 제자이고 이 사람은 타루카의 제자 입니다.
(595) 3베다에 쓰여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다의 어귀와 문법에 통달했고 독송도 스승에게 견줄 만 합니다.
(596) 고타마여, 그러한 우리가 태생에 대한 논쟁을 했습니다. ‘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된다’고 바라드바자는 말 합니다. 그 러나 저는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된다’고 주장 합니다. 눈이 있는 분이시여,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597)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설득 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 뜬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당신에게 질문하기 위해 온 것 입니다.
(598) 사람들이 보름달을 향해 합장하고 예배하며 공경 하듯이, 세상 사람들은 고타마를 예배하고 공경 합니다.
(599) 세상의 눈으로 출현하신 고타마에게 우리는 묻습니다. 태생(혈통)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바라문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도록.”
(600) 스승은 대답하셨다. “바셋타여, 그대들을 위해 모든 생물에 대한 태생의 구별을 차례대로 설명해 주리라. 그대들에게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 것은 태생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1) 풀이나 나무에도 종류의 구별이 있는 줄을 알아라. 그러나 그들은, ‘우리는 풀이다’라든가, ‘우리는 나무다’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2) 또 구더기나 귀뚜라미로부터 개미에 이르는 것들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3) 작은 것이나 큰 것이나 네발 달린 짐승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4) 배를 땅에 대고 기어 다니는 길이가 긴 것들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5) 물 속에 태어나 물에서 사는 물고기들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6) 그리고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도 종류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라. 그들의 특징은 태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태생은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607) 이와 같이 생명이 있는 동물들에 있어서는 태생에 따른 특징이 여러 가지로 다르지만, 사람에게는 태생에 기인한 특징이 다를 수 없다.
(608) 머리카락이나 머리, 귀, 눈, 입, 코, 입술이나 눈썹에 대해서도
(609) 목이나 어깨, 배, 등, 궁둥이, 가슴, 음부나 성별에 대해서도.
(610) 손이나 발, 손가락, 손톱, 종아리, 넓적다리, 피부색이나 음성에 대해서도, 다른 동물처럼 태생에 기인한 특징의 구별이 사람에게는 결코 없다.
(611) 몸을 가지고 태어난 동물 사이에는 각기 구별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그런 구별이 없다. 인간 사이에서 구별이 있는 것은 다만 그 이름 뿐이다.
(612) 인간 가운데서 소를 키우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셋타여.
(613) 인간 가운데서 여러 가지 기능을 활용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술자이지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음을 알아라. 바셋타여.
(614) 인간 가운데서 사고 파는 것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상인이리 부르지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음을 알아라. 바셋타여.
(615) 인간 가운데서 남의 일을 해주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고용인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알아라. 바셋타여.
(616) 인간 가운데서 주지 않은 것을(훔친 것) 가지고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둑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셋타여.
(617) 인간 가운데서 무술에 의해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무사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셋타여.
(618) 인간 가운데서 제사를 주관하면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제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라. 바셋타여.
(619) 인간 가운데서 마을이나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이라 부르지 바라문이라 부르지 않음을 알아라. 바셋타여.
(620) 나는 바라문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람을 바라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그대여, 라고 불리는 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무엇인가 소유물에 속박되어 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집착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1) 모든 속박을 끊고 두려움이 없으며, 집착을 초월해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2) 가죽 끈과 가죽 줄을 고삐와 함께 끊어 버리고 장래를 없앤 눈 뜬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3) 죄 없이 비난을 받고 폭력이나 구속을 참고 견디며, 인내력이 있고 마음이 굳센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4) 화를 내지 않고 도덕을 지키며, 계율에 따라 욕심을 부리지 않고, 몸을 잘 다스려 <최후의 몸>에 이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5) 연꽃 잎에 이슬처럼, 송곳 끝에 겨자씨처럼, 온갖 욕정에 더럽혀지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6) 이 세상에서 이미 자기의 고뇌가 소멸된 것을 알고, 무거운 짐을 내려 놓고 걸림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7) 지혜 깊고 현명하며 온갖 길에 통달해 최고의 목적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8) 재가자나 출가자 누구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정해진 거처 없이 유행하며 욕심이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29) 힘이 세거나 약한 어떤 생물에게도 고통을 주지 않고, 또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630) 앙심을 품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그들에게 적의를 품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자와 함께 있으면서도 마음이 온화하며, 집착하는 자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631) 겨자씨가 송곳 끝에서 떨어지듯이, 애착과 증오와 거만과 거짓을 털어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2) 거칠지 않고 이야기를 전하는데 진실한 말을 하며, 말로써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사람, 나는 그를 바라문이라 부른다.
(633) 이 세상에서 길고 짧거나, 가늘고 굵거나,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막론하고, 주지 않은 것은 어떤 물건이라도 갖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4)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바라지 않고, 욕심도 걸림도 없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5) 집착이 없고 완전히 깨달아 의혹이 없이 불사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6) 이 세상의 재앙이나 복덕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근심과 티끌이 없이 깨끗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7) 구름에 가리지 않은 달처럼, 깨끗하고 맑아 환락의 생활이 끝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8) 이 힘들고 어려운 길, 윤회, 헤맴을 넘고 피안에 이르러 정신을 안정시키고, 욕망도 의혹도 집착도 없이 마음이 고요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39) 이 세상의 욕망을 끊고 집을 떠나 유행하며 애착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0)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끊고 집을 떠나 걸식하며 애착의 생활을 끝낸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1) 인간의 인연을 끊어 버리고 천상의 인연도 벗어나 모든 굴레를 벗어난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2) 쾌락도 쾌락 아닌 것도 버리고, 맑고 깨끗해져 얽매임이 없이 세상을 이겨낸 영웅,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3)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생사를 알고, 집착 없이 행복한 사람, 깨달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4) 신도 귀신(간다르바)도 인간도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사람, 번뇌의 더러움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5) 앞에도 뒤에도 중간에도 한 물건도 가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6) 황소처럼 늘름하고 기품 있는, 영웅, 대선인, 승리자, 욕망 없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깨달은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7) 세속 생활의 모든 일을 알고, 천국과 지옥을 보며, 생존을 멸해 버린 사람, 그를 나는 바라문이라 부른다.
(648) 세상에서 쓰는 이름이나 성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태어난 그때마다 붙여져 전해지는 것이다.
(649) 이름이 임시로 붙여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릇된 선입견을 오래 가지게 된다. 모르는 사람은 말한다. ‘태생에 의해서 바라문이 된다’고.
(650)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생에 의해 바라문이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되고, 행위로 인해 바라문이 안되기도 하는 것이다.
(651) 행위에 의해 농부가 되고, 행위에 의해 기술자가 되며, 행위에 의해 상인이 되고, 또한 행위에 의해 고용인이 된다.
(652)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사제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653)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사실 그대로 본다. 그들은 <연기>를 보는 자이며, 행위와 그 과보를 잘 알고 있다.
(654) 세상은 의도된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조건지워 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행위에 메어 있다. 마치 달리는 수레가 밧줄에 의해 매어 있듯이.
(655) 고행과 청정한 행과 감관의 억제와 자제, 이것이 바라문이 된다. 이것이 으뜸가는 바라문이다.
(656) 현자들이 볼 때 3베다를 갖추고 마음 편안하여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사람이 범천이며 제석이다. 바셋타여, 이러하다는 것을 알아라.
(657) 이와 같은 말씀을 듣고 바세타와 바라드바자 청년은 스승께 말씀 드렸다. “훌륭 하십니다. 고타마시여, 훌륭하십니다. 고타마시여, 마치 넘어진 사람을 일으켜 주듯이, 엎인 것을 벗겨 주듯이, 길 잃은 사람에게 길을 알려 주듯이, 그리고 ‘눈 있는 자 빛을 볼것이다’하면서 어두운 밤에 등불을 밝혀 주듯이, 당신 고타마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법)를 밝혀 주셨습니다. 이제 저희들은 고타마와 진리와 승가에 귀의 하겠습니다. 고타마께서는 저희를 오늘부터 죽을 때 까지 귀의한 재가 수행자로 받아 주십시오.”
10. 비난하는 사람 코칼리야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날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사밧티의 제타 숲, 고독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장자의 동산에 계시었다. 그 때 수행자 코칼리야는 스승이 계신 곳으로 갔다. 스승께 인사 드린 후 한쪽으로 물러나 앉은 후 말씀 드렸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사리뿟타와 목갈라나는 삿된 생각을 가지고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스승은 수행자 코칼리야에게 말했다. “코칼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코칼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는 선량한 수행자들이다.” 코칼리야는 거듭 말했다. “거룩한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만, 사리뿟타와 목갈리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나쁜 욕망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스승은 다시 수행자 코칼리야에게 말씀하셨다. “코칼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사리뿟타와 목갈라나를 믿고 사랑하여라.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 코칼라야는 세번째로 말씀드렸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저는 스승을 믿고 의지합니다만, 사리뿟타와 목갈라나는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나쁜 욕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스승께서도 세 번 같은 말씀을 하셨다. “코칼리야여,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그들을 믿고 사랑하여라. 그들은 선량한 사람들이다.” 그러자 수행자 코칼리야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승께 절하고 바른쪽으로 돌아 나가 버렸다. 그는 나가자마자 온 몸에 겨자씨만한 종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겨자씨만 하던 것이 점차 팥알만 해졌다. 팥알만 하던 것이 또 콩알만 해졌다. 그러더니 대추씨만해지고 대추알만 해졌다. 이와 같이 감자만 해지고, 덜 익은 모과 열매만해지고 익은 모과만하던 것이 마침내 터져서 고름과 피가 되어 흘렀다. 코칼리야는 마침내 그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사리뿟타와 목갈라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때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한밤중이 지났을 무렵, 아름다운 얼굴로 제타 숲을 두루 비추면서 스승이 계신 곳으로 찾아갔다. 스승께 예를 갖추어 인사를 드린 뒤 한편에 서서 말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수행자 코칼리야는 죽었습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수행자 코칼리야 사리뿟타와 목갈라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죽어서 홍련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사바세계의 주인인 범천은 이렇게 말하며 스승께 절하고 바른쪽으로 돌아 사라졌다.
날이 밝자 스승께서는 여러 수행승에게, 어제 밤에 범천이 왔었던 일을 말씀 하셨다. 그때 한 수행자가 이렇게 말했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얼마나 됩니까?” “수행자여, 홍련지옥의 수명은 길다. 그것을 몇 년이라든가, 몇 백년, 몇 천년, 몇만 년이라고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거룩하신 스승이시여, 그렇지만 비유로써 설명할 수는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그렇게 말 할 수는 있다.” 하시면서 스승께서는 말씀하셨다. “수행자여, 이를테면 코살라 나라의 그릇으로 스무 카리카의 깨(한 수레분)가 있는데, 그것을 꺼낸다고 하자. 한 사람이 백 년마다 한 알씩 꺼내는 방법으로 해서, 그 스무 카리카의 깨를 다 꺼낸다 하면 그것이 한 압부다 지옥이다. 그리고 스무 압부다 지옥은 한 니랍부다 지옥과 같다. 그리고 또 스무 니랍부다 지옥은 한 아바바 지옥이며, 스무 아바바 지옥은 한 아하하지옥, 스무 아하하 지옥은 한 아타타 지옥이며, 스무 아타타 지옥은 한 황련지옥과 같고, 스무 황련지옥은 한 백수련지옥과 같으며, 스무 백수련 지옥은 한 청련(靑蓮) 지옥, 스무 청련 지옥은 한 백련 지옥과 같다. 그래서 스무 백련 지옥은 한 홍련 지옥에 해당된다. 수행자들이여, 그런데 코칼리야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에게 적의를 품었기 때문에 홍련지옥에 떨어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인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 하신 뒤, 다시 말씀을 계속하셨다.
(657) 사람이 태어 날 때에는 그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자는 욕설을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마는 것이다.
(658) 비난 받을 사람을 칭찬하고, 또 칭찬해야 할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 그는 입으로 죄를 짓고 그 죄 때문에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659) 도박으로 재산을 잃는 자는 가령 자신까지를 포함해 모든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그 불행은 오히려 적은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경지에 이른 사람에게 악의를 품은 사람의 죄는 아주 무거운 것이다.
(660) 악의적인 험담이나 나쁜 뜻을 가지고 성인을 비방하는 사람은, 십만삼십육 니랍부다 지옥과 다섯 압부다 지옥에 떨어진다.
(661) 거짓말을 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또 했으면서도 안 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둘 다 똑같이 행동이 비열한 사람들이라, 죽은 후에는 같은 내세를 갖는다.(지옥에 떨어진다)
(662) 남을 해칠 마음이 없고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그러한 나쁜 과보가 되돌아 온다. 바람을 거슬러서 먼지가 날아 오는 것처럼.
(663) 여러 가지 탐욕의 대상에 빠져, 믿음도 없고 인색하며, 불친절하고 이기적이며 이간질을 하는 사람은 말로써 남을 때리는 것과 같다.
(664) 입이 더렵고 불성실하며 천한 자여,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사악한 행위를 하는 자여, 야비하고 불량하며 미숙한 자여, 이 세상에서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라. 그대는 지옥에 떨어지리라.
(665) 그대는 먼지를 뿌려서 세상을 더럽히고 착한 사람들을 비난하여 악업을 쌓으며, 온갖 나쁜 일을 하여 오랫동안 깊은 구렁텅이(지옥)에 빠진다.
(666) 그 어떤 업도 그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반드시 돌아와 그 주인이 그것을 받는다. 어리석은 자는 이 세상에서 악업을 짓고 내세에서 그 괴로운 죄과를 받는다.
(667) 지옥에 떨어진 자는 쇠꼬챙이로 꿰이고, 날카로운 철창에 찔린다. 또한 불에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속세에서 업만큼 먹어야 한다.
(668) 지옥의 옥졸들은 ‘잡아라!, 때려라!’ 소리 칠 뿐 부드러운 말을 하지 않으며, 상냥한 얼굴로 대해주지 않고, 의지가 되어 주지 않는다. 지옥에 떨어진 자는 숯불 위에 앉아야 하면 뜨거운 불길 속에 들어가야 한다.
(669) 또한 지옥의 옥졸들은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을 철망으로 몰아 넣어 쇠망치로 내려 친다. 그리고는 새까만 암흑 속에 가두는데, 그 어둠은 안개처럼 끝없이 퍼져 있다.
(670) 또 다음에는 펄펄 끓어 오르는 가마솥에 들어가야 한다. 오랫동안 그 끓는 가마솥 안에서 삶기면서 떴다 가라앉았다 한다.
(671) 고름과 피로 가득 찬 솥이 있어, 죄를 범한 자는 그 속에서 삶긴다. 그는 그곳에서 이리저리 삶기면서 어디로 가든지 피고름 때문에 더렵혀진다.
(672) 구더기가 우글거리는 가마솥이 있어, 죄를 범한 자는 그 안에서 삶긴다. 나오려 해도 붙잡을 것이 없다. 그 솥은 안으로 굽고 둘레가 모두 한결같기 때문이다.
(673) 날카로운 칼날로 된 숲이 있어, 지옥에 떨어진 사람이 그 속에서 팔다리가 잘린다. 옥졸들은 꼬챙이로 혀를 꿰어 잡아 당기면서 괴롭힌다.
(674) 또 지옥에 떨어진 자는 예리한 면도칼이 흐르는 베다라니 강에 이른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쁜 일을 하고 죄를 범함으로써 그곳에 떨어진다.
(675) 그곳에는 검은 개, 늑대와 여우들이 있어, 울부짖는 사람들을 뜯어 먹는다. 또 독수리 까마귀들도 살을 쪼아 먹는다.
(676) 죄를 범한 자가 받는 지옥의 생태는 실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을 하고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677) 홍련 지옥에 떨어진 자의 수명은 짐수레에 싫은 깨알의 수만큼 된다고 현자들은 헤아렸다. 즉 그 햇수는 오조년과 오천만년 인 것이다.
(678) 그 기간 동안은 여기서 말한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 지옥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청정하고 어질고 착한 미덕을 위해 항상 말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 11. 나라카
(679) 아시타 현자는 한낮의 휴식 때에, 깨끗하고 단정한 옷을 입은 서른 명의 신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옷을 벗어 들고 흔들며 재석천을 극구 찬탄하는 것을 보았다.
(680) 기뻐서 뛰노는 신들을 보고 현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신들이 기쁨에 넘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왜 당신들은 옷을 벗어 흔들고 있는 것입니까?
(681) 만일 아수라와 싸움에서 신들이 승리하고 아수라가 졌다 할지라도 몸의 털을 곤두 세울만큼 그토록 기뻐할 수는 없을 것인데, 어떤 희귀한 일이 있기에 그처럼 기뻐하는 것입니까?
(682) 당신들은 소리 높여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하고 손뼉을 치면서 춤을 추고 있습니다. 나는 수미산 꼭대기에 살고 있는 당신들에게 묻습니다. 존경하는 분들이여, 제 궁금증을 어서 풀어 주십시오.”
(683) 신들은 대답했다. “비할 데 없이 뛰어난 보배인 저 보살이 모든 사람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인간 세계에 태어났습니다. 석가족 마을 룸비니 동산에. 그래서 우리는 이토록 기쁨에 넘쳐 있는 것입니다.
(684) 무릇 살아 있는 자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사람, 가장 높은 사람, 황소 같은 사람이, 머지 않아 선인들이 모이는 숲에서 법(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용맹스러운 사자가 다른 모든 짐승들을 제압하고 포효를 하듯이.”
(685) 현자는 그 말을 듣자 급히 인간세계로 내려 왔다. 그리고 숫도다나 왕의 궁전에 가서 석가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도 한번 뵙고 싶습니다.”
(686) 그리하여 석가 족들은 솜씨 있는 금세공이 만든 황금처럼 반짝이며 행복에 빛나는 거룩한 아기의 얼굴을 아시타 선인에게 보였다.
(687) 불꽃처럼 빛나고 하늘의 달처럼 밝으며, 구름을 헤치고 비치는 가을 태양처럼 환한 아기를 보고 아시타 선인은 환희에 넘쳐 몹시 기뻤다.
(688) 신들은 천 개의 둥근 고리가 달린 양산을 공중에 펼쳤다. 또 황금 자루가 달린 지팡이(불자)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689) 아시타 선인은, 얼굴을 흰 양산으로 가리고 빨간 담요에 싸여 있는 황금 보물 같은 아기를 보고 기뻐서 가슴에 안았다.
(690) 관상과 베다에 통달한 그는, 황소같이 훌륭한 석가족의 아기를 안고 그의 용모를 살피더니 환호성을 질렀다. “이 아기는 위 없는 사람, 인간 중에서 가장 위대 합니다.!”
(691) 그러더니, 선인은 자기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생각하고, 말 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다. 선인이 우는 것을 보고 석가족 사람들은 물었다. “우리의 왕자에게 무슨 장애라도 있단 말인가?”
(692)ㅏ 석가족의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을 보고 선인은 말했다. “왕자에게 어떤 불길한 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인물이 아닙니다. 정성을 다해서 잘 길러 주십시오.
(693) 이 왕자는 깨달음의 궁극에 이를 것입니다. 이 아기는 가장 으뜸가는 청정을 보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그들을 불쌍히 여긴 나머지 법(진리)의 바퀴를 굴릴 것입니다. 그의 청정한 덕행은 널리 퍼져 나갈 것입니다.
(694)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남아 있는 내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곧 내게는 죽음이 찾아 올 것입니다. 나는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가르침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슬퍼하는 것 입니다.
(695) 청정한 수행자 아시타 선인은 석가족 사람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고 주고 궁전을 떠났다. 그는 자기의 조카 나라카를 불러 비할 데 없이 큰 힘을 가진 사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하였다.
(696) “만일 네가 나중에 ‘눈 뜬 사람이 깨달음을 펴고 진리의 길을 간다’는 말을 듣거든, 그때 그곳에 가서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그 밑에서 청정한 수행을 닦아라.”
(697) 미래에 으뜸가는 청정을 지닌 분이 온다는 것을 예견한 아시타 선인의 가르침을 받고 나라카는 온갖 선업을 쌓고 자신의 감관을 다스리며 승리자를 기다렸다.
(698) 훌륭한 승리자가 <법(진리)의 바퀴>를 굴린다는 소문을 듣고, 아시타 선인이 일러 준 대로 으뜸가는 승리자를 보고 기뻐하며 거룩한 성인에게 수행을 길을 물었다.
(699) 나라카가 말했다. “아시타 선인께서 알려 준 말이 진실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하오니 고타마시여, 모든 것을 통달하신 당신께 묻겠습니다.
(700) 저는 출가하여 탁발의 행을 쌓으려 하오니, 성스러운 수행과 최상의 경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701) 스승께서 말씀 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성스러운 수행을 일러 주리라. 이것은 행하기 어렵고 이루기 힘들다. 이제 그대에게 그것을 알려 줄 것이니, 마음을 굳건히 하라.
(702) 마을에서 비난을 받든지 공경을 받든지 한결 같은 태도로 대하여라. 비난을 받더라도 성내지 말며, 공경을 받더라도 우쭐거리지 말고 마음을 가다듬어라.
(703) 가령 동산의 숲 속에 있더라도 불꽃처럼 여러 가지 유혹이 나타난다. 여자는 수행자를 유혹한다. 여인들이 유혹하도록 하지 말라.
(704) 모든 육체적 쾌락을 버리고, 약하고 강한 모든 생명 있는 것에 대해 증오하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하지도 말라.
(705) 그들은 나와 같고 나도 그들과 같다고 생각하여, 살아 있는 어떤 것들을 죽여서는 안 된다. 또한 남들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706) 범부가 집착하는 욕망과 욕심을 떠나 눈 있는 사람은 그것을 버리고 진리의 길을 가라. 그리하여 이 세상의 지옥을 벗어나라.
(707) 배를 비우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없애고 탐내지 말라. 욕망을 버리면 욕심이 없어 평안하다.
(708) 수행자는 탁발을 끝내고 숲에 돌아 와 나무 아래 머물러 앉아야 한다.
(709) 그리고 온 몸의 안정에 전념하고 나무 아래서 명상함으로써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710) 날이 밝으면 마을로 가야 한다. 누구에게 식사 초대를 받거나 마을에서 음식을 가져 올지라도 결코 반겨서는 안 된다.
(711) 마을에 이르러 이집 저집들을 조급하게 돌아 다녀서는 안 된다. 입을 다물고, 음식을 얻으려는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
(712) ‘음식을 얻어서 잘 됐다’’얻지 못한 것도 잘 됐다’ 생각하고, 어떤 경우에라도 태연히 돌아온다. 마치 과일을 주으려고 나무 밑에 간 사람이 과일을 줍거나 줍지 못하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713) 바리때를 손에 들고 돌아 다니는 그는, 벙어리는 아닌데 벙어리처럼 보일 것이다. 시주받은 것이 적다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보시하는 사람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714) 스승은 높고 낮은 여러 가지 수행에 대해서 말씀 하셨다. 거듭 피안에 이르는 일은 없으나 한번에 이르는 일도 없다.
(715) 윤회의 흐름을 끊은 수행자에게는 집착이 없다. 해야 할 선행도, 하지 말아야 할 악행도 버렸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것이다.”
(716) 스승은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에게 성자의 길을 말하리라. 음식을 얻을 때에는 칼날의 비유를 생각 하여라.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스스로 배를 비우라.
(717)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또한 쓸데없이 많은 것을 생각해서도 안 된다. 비린내가 없이, 걸림이 없이, 청정한 수행을 궁극의 의지처로 삼아라.
(718) 홀로 있는 일을 배우라. 으뜸가는 수행은 홀로 있는 것이다. 홀로 있어야만 진정으로 즐거울 수 있다.
(719) 그렇게 하면 그는 온 세상에 빛나리라. 욕망을 버리고 명상하고 있는 그의 명성을 들으면, 내 제자는 더욱더 겸손해 지고 믿음이 깊어 질 것이다..
(720) 이 일을 깊은 강물과 얖은 개울물의 비유로 알아라.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어 흐르지만,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는 법이다.
(721)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다.
(722) 사문이 의미 있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스스로 알고 법을 설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알고서 많은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723) 그러나 스스로 알면서도 자제하여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인의 행동에 알맞다. 그는 성인으로서 성인의 행동을 보인 것이다..”
12. 두 가지 관찰
(72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사밧티의 동산에 있는 미가라 장자의 어머니의 누각 안에 계시었다. 그 때 거룩하신 스승은 정기적인 집회날인 달 밝은 보름밤에 수행자(비구)의 무리에 둘러 싸여 집 밖에 계시었다. 거룩하신 스승께서는 묵묵이 앉아 있는 수행자들을 둘러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 하시었다. “여러 수행자들이여,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진리가 있다. 수행자들이여, 그대들이 거룩하게 집을 나와 깨달음에 이르는 여러 가지 진리를 듣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라.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라고. 그러면 그대들이 말하는 두 가지란 무엇이냐고 한다면, ‘이것은 괴로움(苦)이다.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이다.’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고, ‘이것은 괴로움의 그침이다. 이것은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이다.’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자여,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열매(과보)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얻든가, 혹은 번뇌가 남아 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괴로움을 모르고, 또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모르며, 괴로움의 그침을 모르고,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도 모르는 사람들
(725)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얻지 못하고, 지혜의 해탈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없다. 그들은 생과 사를 계속 받는다.
(726) 그러나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을 알고, 괴로움의 그침을 알고 또한 괴로움을 그치게 하는 길을 아는 사람들
(727)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이루고, 지혜의 해탈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끊어 버릴 수가 있다. 그들은 생과 사를 더 이상 받지 않는다.”
(728) “수행자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하고 누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무슨 까닭인가. 모든 괴로움은 모두 업에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업을 남김없이 끊어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수행승자들이여,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열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든가, 혹은 번뇌가 남아 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거룩한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행복한 스승께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은 생존의 업에 따라 일어난다. 참으로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 생존의 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되풀이해서 괴로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분명히 알고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을 관찰해 업을 짓지 말아라.”
(729)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묻는 이가 있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떠한 괴로움이든 무명(무지)으로 인해서 생긴다고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무명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열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얻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 삶에서 다른 삶으로 되풀이하여 윤회를 받는 사람들은 그 원인이 무명에 있다.
(730) 무명이란 기나긴 헤맴인데, 이로 말미암아 오랜 윤회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밝은 지혜에 이른 사람들은 다시 생존을 받는 일이 없다.”
(731) “수행자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하고 누가 묻거든, ‘있다’라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떠한 괴로움이든 모두 형성력으로 인해 생긴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형성력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서 어느 한가지를 얻을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모두 형성력으로 인해 생기는 것이다. 모든 형성력이 없어진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
(732) 괴로움은 형성력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모든 형성력을 없애고 욕심을 끊는다면, 괴로움은 없어지고 만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라.
(733)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아는 현자나 베다에 통달한 사람들은, 악마의 속박에서 벗어나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34) “수행자들이여, 또 다른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방법은 없는가 하고 그대들에게 누군가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식별(識)로 인해서 일어난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식별작용(분별작용)을 남김없이 없앤다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를 얻을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든가, 또는 번뇌의 마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어떠한 괴로움이 생길지라도 그것은 모두 식별작용으로 인해 일어난다. 식별작용이 소멸된다면 괴로움이 생길 수 없다.”
(735) 괴로움은 식별작용에 의해 일어난다고 알아 식별작용을 고요히 가라앉힌 수행자는, 쾌락을 탐하지 않고 절대적인 평화에 이른다.”
(736) 수행자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하고 누가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접촉으로 인해서 일어난다는 것이 그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접촉을 남김없이 아주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 된다. 즉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든가,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접촉에 얽매이고, 생존의 물결에 휩쓸리며, 그릇된 길에 들어선 사람은 속박을 끊기 어렵다.
(737) 그러나 접촉을 잘 알아 평안을 즐기는 사람은, 실로 접촉을 없애 버렸기 때문에 쾌락을 느끼지 않고(벗어나) 평안에 이르게 된다.”
(738)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도 모두 느낌(감수感受)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모든 느낌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로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개의 열매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 하거나, 또는 번뇌가 남아 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즐겁든 괴롭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든 내적으로, 외적으로 느낀 것은 모두,
(739) 괴로움이라 알고, 없어지고 말 허망한 것을 느낄 때마다 그것의 소멸을 인정하고서야 그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다. 느낌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수행자는 쾌락에서 벗어나 평안에 이르게 된다.”
(740)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모든 괴로움은 망상으로 인해 생긴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망상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하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고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에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또는 번뇌의 남음이 있는 이 헤매는 생존에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망상을 벗 삼는 사람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전전하며 윤회를 벗어 나지 못한다.
(741) 괴로움은 망상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수행자는 망상을 버리고 망상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정진해야 한다.”
(742)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라고 대답해라.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집착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관찰하는 것이 그 첫째이다. 그러나 집착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렇게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열매 중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든가, 또는 번뇌가 남아 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것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집착으로 인해 생존이 생긴다. 생존하는 자는 괴로움을 받는다. 태어난 자에게는 죽음이 따른다. 이것이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이다.
(743) 그러므로 현자들은 집착을 끊고 태어남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을 잘 알아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4)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라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움직임에 의해 일어 난다고 보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움직임을 남김없이 없애 버리면 괴로움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괴로움은 움직임으로 인해 생긴다. 모든 움직임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5) 괴로움은 움직임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모든 움직임을 버리고,
(746) 생존에 대한 집착을 끊고 마음이 고요한 수행자는 윤회를 벗어난다. 그는 다시는 생존을 받지 않는다.”
(747) “수행자들이여, 또 다른 방법에 의해서도 두 가지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가 하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라고 대답하라. 어째서 그런가. 모든 괴로움은 음식으로 인해서 생긴다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음식에 대한 집착을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열매 중 하나가 기대된다. 즉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든가 또는 번뇌가 남아 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괴로움은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 음식에 대한 집착이 소멸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48) 괴로움은 음식으로 인해 생긴다는 것을 알아, 모든 음식을 잘 알고 모든 음식에 집착하지 않는다.
(749) 모든 번뇌의 때를 없애 버리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바르게 알고, 반성하며 법에 따라 사는 베다의 달인은 어리석은 생존자의 숫자에 들지 않는다.”
(750)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떤 괴로움이든 모두 마음의 동요로 인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그러나 마음의 동요를 남김없이 없애 버린다면 괴로움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열매 중 어느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 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든 괴로움은 마음의 동요로 인해 생긴다. 모든 마음의 동요가 그치게 되면 괴로움도 생기지 않는다.
(751) 괴로움은 동요로 인해 일어난다고 알아서, 수행자는 마음의 동요를 버리고, 모든 형성력(물질. 제행, sankhara)을 종식시켜, 동요 없이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정진해야 한다.”
(752)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걸림이 있는 사람(구속이 있는 사람)은 주저한다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하나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 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와 같이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걸림이 없는 사람은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걸림이 있는 사람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전전하며 집착하고 있어 윤회를 벗어 날 수 없다.
(753) 여러 가지 걸림 속에 커다란 두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아, 수행자는 걸림 없고 집착 없이 바른 생각을 가지고 수행해야 한다.
(754)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물질적 영역보다도 비물질적 영역이 더욱더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 첫째 관찰이다. 비물질적 영역보다 소멸의 영역이 더욱 고요하다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 하거나, 혹은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 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물질적 영역에 태어나는 모든 생물과 비물질적 영역에 사는 모든 생물들은 소멸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다.
(755) 그러나 물질적 영역을 잘 알고, 비물질적 영역에 안주하여 소멸의 영역에 도달한 사람들은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다(해탈한 사람이다).”
(756)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고 대답해라. 어째서 그런가.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이것은 진리다’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허망하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첫째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이것은 허망하다’라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진리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써 보는 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바르게 보아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하나가 기대된다. 즉, 현세에서 지혜를 증득하거나, 번뇌가 남아있는 이 헤매는 생존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보라, 신과 세상 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고 그 이름(명칭)과 형태에 집착해 있으면서 이것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757) 어떤 것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이 사실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자의 생각은 허망하기 때문이다. 지나가 버리는 것은 허망한 것이므로.
(758) 그러나 해탈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것을 진리로 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에, 쾌락을 탐하지 않고 평안에 들어간 것이다.”
(759) “수행자들이여, 또 두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가라고 누가 그대들에게 묻거든 ‘있다’라고 대답해라. 수행자들이여,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이것은 안락이다’라고 생각한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고뇌(괴로움)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본다. 이것이 첫째 관찰이다. 신과 악마가 공존하는 세계, 사문, 바라문, 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존자가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성자들은 ‘이것은 안락이다’라고 사실대로 바른 지혜로써 본다. 이것이 둘째 관찰이다. 이와 같이 두 가지를 가지고 바르게 관찰하여 게으르지 않고 정진하는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과보 중 어느 하나가 기대된다. 즉, 이 세상에서 지혜를 얻든가, 또는 번뇌가 남아있는 이 윤회의 생존에 다시 돌아오지 않든가 하는 일이다.” 스승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빛깔(형상), 소리, 향기, 맛, 감촉(만져지는 것),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한결같이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
(760) 그것들은 실로 신이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다같이 ‘기쁨’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것이 사라질 때에는 그들은 그것을 ‘괴로움’ 이라고 생각한다.
(761) 그러나 성인들은 자기의 육신에 대한 집착을 끊는 것을 ‘기쁨’ 이라고 생각한다. 바르게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세상 사람들과는 정반대이다.
(762) 세상 사람들이 ‘기쁨’이라 하는 것을 성자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세상 사람들이 ‘괴로움’이라 하는 것을 성자들은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기서 미망에 빠져 헤어나질 못한다.
(763) 덮여 있는 사람에게는 어둠이 있다. 바르게 보지 않는 사람에게는 암흑이 있다. 선량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펼쳐 보여진다. 마치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빛이 있는 것처럼,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짐승 같은 무지한 사람들은 진리가 곁에 있어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764) 생에 대한 탐욕에 사로 잡히고 생존의 흐름에 떠 내려가, 악마의 영토에 들어 간 사람은 이 진리를 깨닫기 어렵다.
(765) 성자들 말고 누가 이 경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지를 바르게 알면, 번뇌의 때가 묻지 않은 이가 되어 절대 평화의 세계에 들어 가리라.”
스승은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자들은 기뻐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이 설법이 있을 때 육십명의 수행자들은 집착을 없애, 마음이 더러움에서 해탈되었다.
|
'숫타니 파타(Sutta nipat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숫타니파아타』(Suttanipāta)의 佛陀觀 (0) | 2016.12.30 |
---|---|
Suttanipāta에 나타난 번뇌론과 수행론 고찰/이필원 (0) | 2016.04.17 |
숫타니파타의 구성과 내용 (0) | 2015.04.18 |
숫타니파타 (Sutta nipata) - 제4장 8편의 시 (1) | 2014.03.17 |
숫타니파타(Sutta nipata) - 제1장 사품(蛇品) & 제2장 소품(小品) (0) | 2014.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