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스님의 법어
불교와 인생
나는 불교를 모른다. 그럴 뿐만 아니라 왜 불교를 모르게 되었는가 그 이유조차 모른다. 그러면서
'불교와 인생' 이라는 말을 한다는 모순과 망령을 꾸짖어마지 않는다. 그러니 불교를 모르는 이
산승이 인생인들 알 도리가 있겠는가?
모르는 불교, 알지 못하는 인생이지만 말로써 표현해야 하는 고충이 있다. 말이란 어떤 것이든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까닭이다. 예를들면 우리가 세 끼 밥을 먹지마는 평생 밥을 구경도 못하고
생식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먹어서 체험한 밥맛을 그대로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오늘 저녁을 잡숫고 나온 밥맛도 제대로 설명 못하겠거늘 우리의 학문,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제대로 설명 하겠는가? 학계의 인정된 이론이라 하더라도 절대적인 해답은 내리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가장 중대한 인생 문제를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산승이 말로서 표현 한다는 것은
소경이 코끼리 만지기보다 더 무모한 짓이다. 이렇듯이 제 말이 무가치할 것이나, 어쩔 수 없이
말하게 되었음을 애타할 뿐.
무엇이 사람이냐?
어데서 왔으며 잠깐 허덕이다가 어데로 가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만들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저절로 생긴 것인가? 인생 문제는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점점 몰라만 간다.
30여년 전 충북 속리산 법주사의 작은 암자에 있을 때 일이다. 서울에서 왔다는 학계 종사한다고
명함을 내어 놓은 40여명 탐방객들이 점심을 끝내자 한 시간쯤 틈이 있으니 불교에 관한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되묻기를 '사람이면 모두가 살겠다고 허덕이는데 선생들은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씀해 달라'고 했다. 기분이 하늘이라도 찌를듯하던 사람들이 차음 한 사람 두 사람
머리를 숙이기 시작해 아마 깊이 생각하나 보다 하였더니. 한참이나 고요가 흐르다가 복판에 앉은
분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못 죽어서 산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그 해답에 동의하듯 눈치로 부정하는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 그 사람들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해 본다면 못 죽어서 산다는 이외에 무슨 별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여러분만 그럴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 다 그럴것이고, 겨레나 인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먹고
배설하며, 잠자고 일하며, 번식과 생존으로 늙어 죽고, 썩어 없어진다는 이외에 뭐가 있겠는가?
영웅호걸과, 거진 천민 누구나를 막론하고 이 길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 예수나, 공자나, 석가도 다 마찬가지이다. 어쩌다가 태어나 이렇게 고해에서 방황하다가 죽어야 하니...
그렇기 때문에 항상 마음이 편치 않다. 세계를 다 거머 쥐어 보아도 마음이 편할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기어코 살아야만 할 어떠한 이유를 발견할 도리도 없다. 어떤 과학자나 철학자 또는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등 꼭 살아야 할 조건을 내세울 도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인생이 이렇게 허무맹랑할 수가 있는가. 무슨 뜻이 있겠지. 조물주가 이런 얄궂은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면 조물주를 끌어내려야 할 것이요, 저절로 생겼다 해도 답답하기만 하고 어찌어찌
하다가 생겼다 해도 맞지 않다. 이렇게 딱딱한 실정, 맹랑한 현실에 놓인 것이 우리 인생이다.
소위 5천년 인류 문화를 자랑하지만는 과학.철학.종교가들 할 것 없이 다방면으로 연구 했지만은
아직 이렇다 할 이 생명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더구나 영혼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죽어 보지 않는 한 사후의 영혼에 대하여 누가 분명히 알겠는가?
영혼이 있다 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요, 영혼이 없다 하는 사람도 미친 사람이다. 거짓말을 한다면
모르지만 참말이라면 영혼이 있다 없다는 말은 입을 떼지 못할 것이다.
이런 중대한 문제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해결해 낸 것이다. 내가 무엇인가? 참된 나에게는 영원
불변과 절대가 있는가? 자꾸 변한다면 어느 부분을 떼어 참된 나라고 정확한 이름을 지을 수는
없는가? 또한 자유가 구속되는 곳에서 어떻게 참된 나의 완전한 모습을 찾을 수 있는가?
우리가 나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형체는 시점의 경과를 따라 흘러가는 한강 물과 같이 그때 그 물
그대로가 아니듯이, 참된 나란 생각할 수록 알 길은 막막하다. 이 나 가운데서는 자기를 발견할 길이
없는데, 또 무엇을 어찌 한다고... 제 자랑을 하며 남이야 어떻든지 나만은 잘 살아 보자는 생각,
이 생각의 주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알아 보아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죽기느 ㄴ싫다 살고만 싶다는, 이 모든 생각과 행동의 주체인 참된 내가 실재하는 것을 모르고 도깨비 같은 고기 뭉치요 흙덩이에 불과한 이 육신을 자꾸만 나라고 위하고 있다.
그래서 소망대로 성공해 놓고도 환멸과 허무, 번뇌와 비애의 얄궂음 속에서 생을 유지하겠다고 헤매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이제까지 배우고 체험한 중에서는 얻을 길이 없는 '죽는 법이 있는 이상 죽지 않는 법도 있겠다'는
큰 지혜의 발로로써 싯다르타 태자는 구도의 첫 출발을 내딛었다. 우리도 이런 출발이 없다면 영영
못죽어 산다는 한 평생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진짜 자기가 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싯다르타 태자는 이것을 알아보기에 온갖 정력을 다 쏟았다. 이 문제가 선행되지 않고 내 뜻, 남의 생각, 세상 물정에 따라서 무슨 과학을 하느니 철학을 하느니 종교를 믿느니 하는 것은 언어 도단이다. 제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성인,교주라 하여 따라만 간다는 것은 망녕이며 자기 상실이다.
그러므로 싯다르타 태자도 만승천자(많은 재산과 권리를 가진 임금의 아들)가 다 뭐냐, 영웅 호걸, 퀘락 영화가 다 무엇인가 하고 홀연 왕궁을 떠났다. 그리고 6년 동안이나 이 문제 하나만을 생각하시느라고 한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실 줄을 몰랐다. 그러다가 마침내 하루 아침에 동쪽의 샛별을 보시고는 드디어 참된 나를 찾았으니 이로써 인류의 광명은 찾아진 것이다.
그때까지 긴 세월을 두고 아무리 연구해 보아야 인생이란 늘 불만이고, 공포.번뇌. 비애 뿐 이었다.
술이 잔뜩 취하여 천지를 분간 못하다가 술이 깨면 본 정신이 나타나 취했을 때의 오해가 풀리듯이,
인간사에 얼키어 서로가 불평과 싸움으로 옥신각신 하다가 길게 갈 날이 다가오면 취한 대로 가야 하니 한심한 일이다.
아무리 인문이 발전했다 하나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 현대 과학이나 철학.종교로써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 팔만대장경까지도 문자 밖의 뜻을 살피지 못한다면 역시 인생 문제를 해결 못할 것이다. 모든 경험과 지식, 불교를 안다는 것까지도 다를 바가 없다. 나라는 본 마음 자리의 참된 면목,
이것을 하느님이라 해도 되고 부처님이라 해도 무방하다.
무엇이 말을 듣고 앉았는가? 생각 이외의 본체가 듣는 것이 아니고 그것 밖의 나, 생각의 주체가 아닌여러분 자신이 듣고 앉았다. 생각하는 우리의 본 마음 이것만은 죽일 수도 자살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감할 수도 없고 불릴 수도 없으며, 깨끗한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시간이 흘러가고 공간이 벌어지고 천지만물이 생긴다. 하나님도 여기서 나오고 부처님도 여기서 나오고 일체 중생도 여기서 나온다.
궁극에 가서는 시간에도 자유하고 공간에도 자유하고 만물에도 자유하며 불 가운데서도 자유롭고
물 가운데서도 자유롭다. 또한 법만이 여기서 흘러 나갔기 때문에 모든 것에 자유자재할 수 있다.
그러니 이 마음 하나 깨치면 생사에 자유고 선악에도 자유로운 것... 이 마음을 모르면 중생이고
깨달으면 부처인 것이다.
일단 어둠에서 해탈하면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다. 시간도 현재에 위치하고 있으나 그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일치가 된다. 이 경지에 가면 부귀 영화가 탐나지 않는다. 인간으로서의 구할 것은 다 구한
셈이 된다. 나는 지금 말한 대로 되지 않으리라는 적은 의심이라도 생긴다면 이 즉석으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진리
[신심명(信心銘)]의 대의를 쉽게 풀이하기 위하여 [육조단경]의 자심즉삼신(自心卽三身)이란 법문의 뜻을 풀어 보자.
자심(自心) 이라는 말은 우리의 근본 마음, 성품, 진지한 뜻이다. 우리의 자심이 지금 말을 하고
싶으면 말을 하고, 듣고 싶으면 듣고, 또 그런 생각으로 행동하는 이런 것을 성품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성품이란 말을 잘 쓰지만 우리 말로는 마음이다. 또 심즉시불(心卽是佛)- 마음이 곧 부처다-
이란 말을 많이 쓴다.
이렇게 '마음이다, 성품이다' 하는 말로 진아(眞我) 를 표시하는데, 어떤 때는 '마음 심(心)' 자가
더 깊은 뜻으로 쓰여 지기도 하고 때로는 '성품 성(性)' 자가 더 깊은 뜻으로 쓰이기도 해서 대중하기
어려울 적이 많다. 그러나 우리 말로는 마음이 모든 생각의 주체라는 것을 단적으로 인식할 수가 있다. 이 마음 자리가 본래 부처님의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 삼신(三身)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자심즉삼신(自心卽三身) 이라 하는 것이다.
법신(法身)은 부처님의 진리를 몸에 비유해서 한 말이다.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영겁이 다 하도록
변할 수 없는 진리의 부처님을 말하는데, 이 것을 이불(理佛)이라고 한다. 형상이 아닌 순수 이치로만
있는 부처님, 법만의 부처님이란 뜻이다.
보신(報身)은 부처님이 보살행을 닦으실 적에 한량없는 원행을 닦았기 때문에 그 과보로 나타난
부처님의 몸을 말한다. 이 보신은 영구성을 가진 몸 이면서 빛깔이나 형상이 있는 부처님의 몸이다.
즉 아미타불과 같은 불신을 말한다.
끝으로 화신(化身)은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방편의 힘으로 나투신 몸을 말한다. 보살도 되고 중생으로도 되고 귀신으로 되어 중생을 제도하기에 알맞는 몸을 그때 그때 나투시는 것을
응신(應身) 또는 화신(化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나 인도에 탄생하신 석가모니 부처님
같으신 불 보살은 다 화신이다.
그런데 이 삼신은 성불을 다 갖추고 있지만 사실은 이 삼신이 우리 마음 가운데 근원적으로 다 갖추어져 있다는 뜻에서 자심 즉 삼신이 라고 한 것이다. 중생 자신이 본래부터 이 삼신을 다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을 나타내는 또 다른 법문으로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 이 마음을
밝히기만 하면 곧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한다 - 란 말이 있다. 사지(四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대원경지(大圓鏡智), 이렇게 네 가지 지혜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사지보리(四智菩리)라고도 한다. 이 네가지를 버리면 여섯 가지 신통, 즉 삼명육통
(三明六通)이 되는 것이다.
묘관찰지(妙觀察智)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모든 법을 남김없이 관찰하고 설법하여 중생의 번뇌를
끊어 주는 지혜를 말한다.
성소작지(成所作智)는 보살과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해 여러가지 불가사의한 일을 보여주는
지혜를 말한다.
평등성지(平等性智)는 평등일여한 진리를 관하여 너니 나니 하는 차별심을 여의므로 대자 대비심을
일으켜 보살과 중생을 여러가지로 이롭고 즐겁게 하는 지혜를 말한다.
대원경지(大圓鏡智)는 티끌이 거울에 남김없이 다 비치는 것처럼 이 지혜도 원만하고 분명하므로
대원경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본래부터 이 네가지 지혜가 마음 속에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이 '마음'을 밝혀내야
한다.
육조대사께서 출가하기 전 아직 노(盧)도령으로 계실 때의 일이다. 노 도령은 그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매일 나무를 해다 시장에 파는 효자 나무꾼이었다. 나무를 팔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느날
길가에서 [금강경]을 설명하는 어떤 법사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그 [금강경] 법사는 한낱 문자법사
(文子法師)에 불과 했지만, 육조대사는 이 법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라는
법문을 듣고 깨쳤다. 그 뜻은 어디에도 마음을 집착하지 말고 오직 마음 그대로 쓰라 하는 가르침
이다. 세속의 오욕은 물론, 선이든 악이든 일체의 애착을 버리라는 뜻이다. 그 [금강경]법사는
아직 마음을 깨치지 못한 문자 법사였지만. 길가에서 오가는 사람을 모아 놓고 가두 설법을 하다가
위대한 육조 대사를 만들 수 있었다. 육조 대사가 마음을 깨치고 나서 보니 우리 마음속에 사지(四智)
보리가 다 갖추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우리가 꿈을 꿀 때 보면 뭄뚱이는 사바 세계에 그대로 있지만 꿈에 가서는 천당, 지옥을 만들고
온 우주를 창조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은 비록 깨닫지 못해서 미(迷)한 번뇌 속에 싸여 있다
하더라도, 마음의 근본 실재만은 성불한 것이나 똑같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꿈에서는 우주와 인생을 다 만들어 내고 중생과 부처까지 창조해 내고 있지 않은가? 일체 보살이
다 그렇다.
꿈꾸는 그 사람 마음이 이렇게 부처니 중생이니 보살이니 유정이니 무정이니 5천년 역사를 창조해
낸 것을 보면, 부처 되기 전에도 우리 마음 속에 모든 것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갖추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 수가 있다. 이런 원리를 선종의 제 3조인 승찬 대사가 가장 간결하게
밝혀 놓은 것이 [신심명(信心銘)] 이다.
내가 마음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내가 말하는 이 마음은 심성.불성이란 뜻으로 하는 마음이나,
이 마음자리는 억만 겁 이전부터 잉ㅆ었고 억만 겁 뒤에 가서도 옛 것은 아니다. 가령 갖난 아이가
엄마 젖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그만 먹어야 된다는 것을 깨닫고 젖꼭지를 더 빨지 않는 그 마음이나,
노망이 들어 똥을 엿인줄 알고 찍어 먹는 그때나 그 마음 자리는 하나도 변함이 없다.
마음은 어린애도 아니고 늙은이도 아니다. 그러므로 생각을 낼 줄 아는 마음자리는 백 년전
이 세상에 태어나던 첫날이나, 백 년 뒤 이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그 날까지 늘고 주는 일 없이
항상 그대로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마음자리는 아득한 옛날 그 어느 시간에 비로소 생겨나온
것도 아니고, 자동차나 기계처럼 사용하면 할수록 낡아서 못 쓰게 되는 것도 아니다.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바로 이런 마음을 찾는 공부다.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마음을 직접 찾는 지름길이 바로
참선 공부다. 그래서 옛날 조사님들이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 자리는 우주의 주재자이면서 우주의 핵심인 것이다. 옛날 사람들 말로 하면
'신이다, 조물주다, 신령님이다'하고 말하지만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것이 부처님이다.
그러면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불리아 문연(不離兒 聞緣)하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 란 말은 눈으로 온갖 것을 다 보고,
귀로 온갖 소리를 다 들으며, 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약한 욕을 다 들어 가면서 남과 싸움도 하고 선악의 경계를 다 보면서 부처님 경지에 올라선다 -
그런 뜻이다. 참선하는 법이 모든 것을 다 떠나 가지고 마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선종의 특수한 점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 - 나
우리 인간이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 '마음'은 그 자체가 허공도 아니요 물질도 아닌 것이다. 물질과
허공, 그 모든 존재 이전의 실재이다. 곧 '마음'은 '나'라는 이 생명의 본체이다. 동시에 바로
전 우주의 생명으로서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아니며, 부처님도 하나님도 일체만물도 아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도 아니며, 설명할 수도 없고 또한 생각해 볼 수도 없는
'그 무엇'이다. 바로 이것이 '마음'이요 곧 나이며 모든 사람인 것이다. 듣고 보고 생각하는
우리들 자신인 것이다.
불이 뜨겁다, 얼음이 차다 하지만 불이나 얼음 그 자신들은 뜨겁고 차가움을 모르는 것이므로
대 자연계에는 달고 쓰고 차고 더운 것이 없다. 그것은 다만 이 마음의 생각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실존인 이 '마음'이 직접 현상계를 지었다 허물었다 하는 우주 조화의 주체인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이 '마음', 이것이 우리 자신의 문제요 인생의 문제인 것이다.
유사 이래 수천년 수만년 동안 부처님을 비롯한 몇몇분을 제외하고는 정신적 예지, 과학적
문명으로는 끝내 이 실마리를 풀지 못한 숙제이다. '나' 자신의 이 중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서는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류의 욕구와 자유와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을 외면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체 마음이란 무엇일까?
사람은 오직 살고만 싶어 할지언정 죽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왜일까? 살고 싶어할 줄 아는
이 '생명'이 바로 산 것이기 때문이다. 태초 이전부터 그러하였고, 차원 이전부터 이렇듯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죽어 있는 허공이나 물질과는 정말로 좋은
대조인 것이다. 허공이 물질이 될 수 없듯이, 물질 또한 허공이 될 수 없다.
이것이 바꾸어 질 수 없는 영원 불변의 원리이듯이, 당초부터 죽어져 있는 무기 물질이나
허공은 여하한 상태에서도 이렇게 생생하게 '산 생명'으로 변화할 수 없다. '산 것'은
볼래부터 산것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살아 있는 것이고, 또한 미래가 다할지라도 이
'산 것'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 이 '생명'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다. 그렇다면 이 '생명', 이 '마음'은
곧 우주의 핵심이며, 만물의 생명이며 만사에 주체일 수밖에 없다. 이 '산 생명'은 '사 마음'
을 떠나서는 진리가 될 수 없고, 또한 대 자연의 섭리와 조화가 진행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단일체로 된 이 '나'인 이 '마음'은 곧 전 우주의 핵심적인 진리이며, 대 자연의
섭리이며 천지 개벽과 음양 조화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렇듯 영원한 실재인 이 '생명',
이 '마음'을 떠나서 어느 곳에 인생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 무엇이 '나'일 수 있겠는가?
인생이여! 수천 년의 과거를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한번 고요히 생각해 보자.과연 그 무엇을
남겨 둘것이 있겠는가? 그것들은 다 산 공무(空無)의 마음에서 생겨 났다가 다시 공무에로
돌아가는 것들 뿐인 것이다. 바로 말하자면 그것들은 오직 이 자기 자심의 환각으로
환생환멸(幻生幻滅)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 생명은 곧 진리이며 신이며 부처며 유정이며 무정이며 선이며 악이며
남성이며 여성이다. 따라서 온 우주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무서운 사실은 생명이며
마음인 이 '나'는 사실상 내가 아니며, '생명'이 마음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하나님도
부처님도 유정도 무정도 남녀도 선악도 성인도 범부도 모든것도 다 아니다. 그것들은 다 이름들
뿐이며 말뿐인 것이다. 나 자신인 이 마음 자체의 사실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아무런 내용도
의미도 없는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하고 듣고 보고 생각하다가도 버릴 줄 아는 이'나'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모든
것들이 다 이기도 하고 다 아니기도 하니 말이다. 말로나 생각으로나 글로써는 맞춰낼 수
없는 것이다. 입만 벌리면, 아니 입을 벌리기 전에 벌써 틀렸다. 까딱하기도 전에 하늘과 땅
사이처럼 틀리다.
인생! 문자 그대로 신비이며 불가사의이다. 이 '생명! 이 '마음'! 이 '나'!를 바로만 깨닫고
보면 인생의 모든 문제는 모조리 해결되지 않겠는가?
'나'는 영원하며 자유로우며 평등하고 완전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모든 것이 다 완전하다.
있는 그대로가 없는 것이고, 없는 그대로가 있는 것이어서 만물이 다 제자리에서 완전하다.
이 행복도 아닌 행복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이다. 온 우주는 자유의 분위기에서 소용돌이칠
뿐이다.
인생! 이 영원과 자유 평등의 자아 완성, 아울러 인류의 영원한 평화의 길을 일러주시기 위해
석가.공자.예수를 비롯한 여러 성인들이 진리를 설파한 것이다. 진리는 하나요 둘이 아니다.
하나인 '신', 하나인 부처님에로 우리는 하루 빨리 뭉쳐야 한다. 인류를 전멸의 위기에서
구제하기 위하여, 영원한 인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조건 하나로 뭉쳐야 한다.
인생의 헛된 삶과 참된 길
우리 인간이란 본래 어디에서 았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며, 그저
막연히 생겨났으니 살 때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달픈 삶에 쫓기다 보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각박한 현실 생활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이미 살고 있는 것이며, 그러하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잘 사는 문제를 가지고 말하려 한다.
농사 짓는 사라이나 장사하는 사라이나 고기 잡는 사람이나 공장 직공, 정치인, 학자, 종교인,
심지어는 석가.공자.예수에게 무러 볼지라도 잘 살려는 마음, 즉 이 한 생각만은 똑같이 가지고
있으리라. 나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잘 살려는 이 한 마음을
가졌을진대 잘 살 수 있는 어떤 법칙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사는 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하는가를 우리 인간들 모두에게
묻고 싶다.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넣고 주무르는 재벌이 되거나 천하르 ㄹ다스리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의 웅변을 토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붓 하나로
놀라게 하는 큰 문호가 된다면 이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부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떠도는 구름, 흐르는 물로 살림을 삼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인냥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일러 잘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모두가
겉치레의 잘 사는 방법이 될지는 몰라도 참된 의미에서 말하는 잘 사는 방법은 아니리라.
그러면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부족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원망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성냄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미움과 질투가 없는 것이 잘사는 것이요, 공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보다 위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마음에 흡족한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인간의 일 평생을 백 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 평생을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또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새에 머리엔 흰 머리카락이 얹어 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는 수가
있다. 만일 인간들이 이런 이유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 생활만으로 지탱해 나간다면 이는
저 금수들의 생활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흔히들 살아간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 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100년의 삶의 권리르 ㄹ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하루 죽었다는 말 이외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1년을 살았다는 말은 곧 1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이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과 다를바 없다. 우리가 농사 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또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은 따지고 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것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구렁이 한테 물린 개구리의 운명은 구렁이 배 속에 완전히 들어가기까지 오직 구렁이
자신이 결정할 것이지 개구리에겐 아무런 자유도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인간의
자유 의사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죽음이라는 구렁이 앞에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가, 철학자 등 일체 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
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도 역시 업안(業眼)으로 밖에는 보지를 못함
도한 사실이다. 우리 일체 중생이 이 업안을 해탈하여 진리의 심안(心眼)으로 세상을 보고 살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런 진리의 법안(法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수양(心性修養),
곧 어두운 마음을 밝게함이니 견성이다.
견성이란 자기 성품(바탕)자리, 일체 만유(萬有)의 본성 자리 -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 자리를
맑고 청정하게 가져 만사만리(萬事萬理)를 통찰할 줄 아는 혜안(慧眼)의 눈을 얻는 것이다.
중생의 육안으로는 아니 보이나, 이상하고 묘하게도 성품은 각자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못 보고
못 찾는 것이 묘한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보고
이 고해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범부 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재물에
대한 욕심, 색에 대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가지 즐거움을 누려 보고자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러나 탐.진.치 삼독과 오욕병을
고치지 아니하고는 자기 성품을 볼 수 없나니, 먼저 ㅅ마독과 오욕락을 버리고 육바라밀을 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우리 일체 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서 영원한 절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 것 이다.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를 사바 세계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살아감에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고 잡아 먹고 약육강식하는 하나의 수라장이라 함이
무리가 아닌 것이니, 이 현실 세상은 과거 무량겁을 내려오며 서로가 지어 놓은 죄악의 업력으로
만들어진 인과응보의 보복의 결산장이라 할 것이다. 서로가 지은 바 업력과 업보로 괴로운
재난이 눈 앞에 전개됨은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인과 응보의 법칙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자기 성품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대중을 위한 불교
모름지기 마음이 깨끗하면 곧 불성에 도달 할 수 있다. 탐욕으로 인하여 분별심을 잃고 사랑과
미움을 갖는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첨을 하게 하고 미움은 원수를 낳는다.
탐욕이 있는 한 우리 마음은 맑아질 수 없고, 항상 무명의 어두움에 싸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가 부처인 줄은 누가 아는가. 아직도 석가 세존이 부처인 줄을 모른다.
모를 밖에 없는 것이다. 쉽없이 변천하느 ㄴ사바의 현상계에 올려있는 우리들의 가슴에 홀연히
떴다가 사라지곤 하는 석가 세존을 누가 감히 부처다 부처 아니다 하겠는가? 부처는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사람들은 흔히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부처, 그것은 '부처가 부처를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무엇을 부처라 하는고?' 하는
옛 선사의 말을 알아 두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고, 비로소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가 현상계에 머물러 있는 한 불멸의 부처를 찾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성상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였고 49년 설법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하였는 바
무엇으로 부처를 보고 듣겠는가?
눈이 멀고 귀가 먹는 것은 무념 무상의 경지이다. 참으로 눈이 멀고 귀가 먹은 현상계를 초월하면
절멸 무위한 경지에 들고, 그 경지에 들었다는 생각까지를 버려서 무아 무인이 되면 만물은
공한 것이 된다. 공한 속에서 부처가 어찌 있고, 부처를 보고 듣는 자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모두가 망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유무를 벗어나 반성할 것이다.
또 오늘 우리가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마땅히 다짐하여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데 굳이 부처는 찾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까닭을 살피고 다짐하는 일이다.
부처를 찾아서 나 혼자만이 부처가 되고자 할진대 모두가 틀렸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함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중생이 되지 않고 어떻게 그 불성을 내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없다. 석가 세존이 가섭에게 법을
전할 때도 대중 가운데서 하셨다. '염화시중'이 그것이다. 우리 속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이야말로
법을 이어받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법이 불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법을 구하고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현대에
불자들이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중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은 단 한사람이라도
제도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보살도이다.
둘을 가진 자는 하나를 나누어 주고, 하나를 가진 자는 반을 나누어 주고, 반도 없는 자는 내 몸을
바쳐서라도 봉사해야 한다. 남을 위하고 법을 위한다는 생각없이 행하여야 한다. 혼탁한 사회를
탓할 것이 아니라 이 혼탁한 사회 속에 뛰어들어 비록 내 몸에 때가 묻는 한이 있더라도
봉사를 그치지 말 일이다.
열반의 의미
열반이란 말이 죽음의 대명사처럼 와전되어 쓰여진 것은 오늘날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커다란 잘못이다. 열반이 죽음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어도 흔히 열반
이라고 하면 죽음을 연상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열반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격하 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열반 그것은 죽음이란 소극적인 뜻을 표현
하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불교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알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풀이하면 생노병사의 원이 되는 고뇌의 불덩이를 '불어 끈다''멸하여 없앤다'는 뜻도
있지만, 일체의 진리를 깨달아 보살이나 부처가 되는 그 자리를 열반의 자리라고 이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름 지음이 아니라 '깨달아 부처 됨'의 뜻이다. 이 열반의 자리는 청정무구의
자리이므로 마음에 일어나는 번뇌의 알맹이가 깨달음의 알맹이로 변이된 자리이며, 몸뚱이에서
일어나는 욕정의 불길이 청정한 향기로 변화하는 과정을 열반의 과정이라고 이름짓게 된 것이다.
열반을 증득한다는 것은 부처의 깨달음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며, 부처의 진리.모양.행업을
실천하는 제일의적인 의미를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부처의 자리가 열반 구경지의 자리이므로
번뇌의 티 없고 욕심의 흔적이 없는 것이다. 오직 바른 법에 귀의하여 바른 행을 닦아가는
최상승의 과행을 지어가는 길이 열반의 길이다.
열반을 증득하는 길은 고난의 길이며, 고난의 길이므로 수행의 길이다. 수행의 길은 영원한
진리의 세계 속에 자아를 귀의 시킴이다. 진리 속의 자아는 내 없는 '나'이다. '나'를 이름짓지
않는 '나'로 행함이 '참 나'의 행업이므로 고난의 길이다. 그러므로 증득하기 힘든 것이다.
자기를 바치지 않고, 번뇌를 버리지 않고, 욕정을 귾어 버리지 않고, 참회하지 않고, 계
지키지 않고, 참다움의 진리인 부처의 고향에 돌아 갈 수 있을 것인가?
부처님도 육신의 고난과 정신적인 고투로 이룩한 깨달음이 자기 해방의 길이었다. 자기의 해방은
'참 나'를 이룩하는 열반의 광명이다. 우리들 인간이 갖고 있는 육안은 흐리고 어둡지만 열반의
눈은 광명의 눈이다. 이것은 걸림없이 투과하는 직사의 빛이다. 굴곡없이 반사하고 막힘없이
관조하는 지혜의 눈이 열반의 빛이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말씀 하셨다.
"여래가, 청정한 계율을 가지는 이는 열반을 얻느니라 하였으니, 내가 지금 깨끗한 계율을 닦는
일로 열반을 얻으리라." " 세간의 계율은 청정하다고 이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세간의 계율은
있음을 위하는 연고며, 성품이 결정되지 못한 연고며, 끝까지 이르지 못한 연고며, 모든 중생을
널리 위하지 못하는 연고니,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하다 이름 하느니라"
이처럼 부처님은 '열반에 드실 때'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이것은 부처님의 멸도를 존칭한
것이지 죽음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육신은 가고 없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아 있고, 이 남아 있는 진리가 우리들에게 거울이 되고 있다. 인간은 하루를 살기
위하여 나 아닌 남과 싸우고 헐뜯고 있지만 자기 속에서 병들고 있는 불의를 버리려는 참회하는
기도가 없다. 이 번뇌의 병을 고치지 않고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
불교의 수행은 밖으로 비추이는 그림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비춰질 거울을 닦는
것이다. 이 거울은 남의 거울이 아니라 자기의 업의 거울이다. 부처님의 고행은 깨달음을
발현하는 노력이 크지만 자기 본성을 밝히려는 힘이 더 큰 것이다.
열반은 우리들 인간 생활에서 생기는 일체의 번뇌를 제거하여 자기 해방을 맞이하는 길이며,
구애됨이 없는 사회 생활에서 진아의 모습을 표현하는 길이다. 해탈되지 않은 육신, 무애롭지
못한 영혼은 천년을 닦아도 열반에 들지 않는 삼악 번뇌의 노예이다. 열반은 자기 해방과
해방을 가져오는 인간 본원의 자율성의 운동이다.
마음
보통 말 하기를 불교의 교설은 깊고 넓은 것이어서 대단히 알기 어려운 철학이며 과학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 하기에는 불교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경전은
거의가 중국 글인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어려운 한자를 익히고 다시 그 뜻을 알아야만,
경전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불교를 알게 되어 있기 때문에 불교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언어를 알지 못하므로 어려운 것이 그 진리 자체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예컨데 우리가 생명이다, 영혼이다, 귀신이다 혹은 불성이다, 보리이다, 열반이다, 성품자리다,
중도의 듯이다, 도는 반야다, 법화다, 원각이다, 화엄이다 하는 그 많은 소리가 팔만대장경
곳곳에서 이름이 달리 나오고 그 어의에 따라서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보니 불교의 근본 대의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많은 술어를 우리 말로 번역한다면 한마디로 박에 말할 수 없다. 그것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란 이 말에는 앞에서 말한 열반이나 반야, 불성, 생명, 중도, 영혼등이 함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쉬운것이 불교라고 생각한다.
현대 학문 전체가 총결하여 생명이 무엇인지를 연구하고 있으나 아직 그 생명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간단하며 평범하게 그 생명의 실재를 표현하는 말은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에 전부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불교를 우연한 기회에 듣고 대강 불교를 안 뒤로 부터 팔만대장경 전부가
이 '마음' 두 글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마음 두 글자로서 남에게 불교를 이해 시킬수 있고
가르쳐 줄 수 있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나는 근 오십년 가까이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공부해 왔다.
우리 말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좀 바꿔 말하면
'살아 있다'는 소리다. 즉 '생명이 있는 것'을 마음, 마음한다. 한문경전에도 '심즉시불(心卽是佛)'
즉 '마음이 곧 부처다'라고 나와 있다. 선종도 그러하고 팔만대장경도 중요 골자가 심즉시불이다.
우리 말로써 제일 하기 쉬운 것이 마음이다. 나는 마음이 물질이냐 허공이냐 하고 항상 분간 하려고
전심을 다 하였다. 이것은 한 해결을 보기 위함인데, 즉 이 마음이 물질이냐 물질이 아니냐가
판가름만 나면 불교를 이해하기가 쉽게 된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외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며, 밖에 있거나 높은데 있는것도 아니며, 마음이란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먹을 것을 생각하고, 또 우리가 일이 있어서 어디를 가자고 생각하면
이 몸뚱이는 자연 따라간다. 그러니 천지의 근본이 마음이고 만사의 주체가 이 마음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을 것이다.
무한대의 공간과 한량없는 변화를 부리고 있는 물질 현상계를 일러 우리는 우주라고 부른다. 과학의
발달로 우주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무한대 공간을 관찰 규명하여도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아무리 무한대가 크다고 하여도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허공이 변하여 생명이
되는 수도 없으며, 만약에 허공이 변하여 생명이 될 수 있다면 그동안 수억만년 세월에 많은 생명이
뛰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생명이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데서나 생명은 생기지 않는다.
태초에 가령 '아메바'가 생겼다든지 혹은 그 계통에서 시작하여 동식물이 번식 발생 하였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 허공이 제 아무리 커도 그 놈은 생명이 없는 무정물, 즉 무기체이다. 그래서
허공은 무엇을 생각할 수 없다. 또 물지계의 현상이 천태만상으로 변화 무상하지만 그것 역시 근본
자체가 무기체다. 즉 무생명체이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이 태양이 되고 지구가 되고 돌이나 나무 등
온갖 것이 되었다 하여도 결국 생명없는 물질이 모였다 흩어 졌다 할 뿐이다.
그러면 그것들이 어떤 원리에서 집산하느냐 하면 현대의 쉬운말로 물리학적 또는 화학적인 원리
때문이다. 예컨데 흘러가는 물이 경사졌기 때문에 흐르는 것이지 물 자체가 흐르고 싶어서 흐르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억만겁을 흐르는 한강물은 제가 흐르는 줄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생명 물질이 서로 모였다 흩어지는 것은 그것들의 자주적이고 자유스런 행동이 아니고
땅이 경사 졌기 때문에 할 수없이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또 땅이 평면이 되니 부득이 고이는 것이지
물이 스스로 고이지 아니 하면 안 될 이유를 물은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고여
있으면서도 고여 있는 줄을 모른다. 고여 있는 거나 흐르는 것은 물의 자유가 아니다. 평면이
되어 있기 대문에 고이는 것이고 경사가 졌기 때문에 흐를 뿐이다.
그리고 물질계의 변화도 이와 같다. 지방이나 환경따라 돌도 다르고 물도 다 다르다. 물질 자체는
생각이 있어 다 다르게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생각 할 수도 없는
무정물이다. 다만 그렇게 되게만 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가 글을 쓰고 글을 보자는 생각이 허공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산에 가자는 생각 역시
물질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육체가 물질이긴 하나 물질적
육체에서 배고프다는 생각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녹음기가 녹음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조작된 녹음 테이프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의 자유 의사로 할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사람의 마음 조작에
따라 기계가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녹음기 제 혼자는 억만년이 지자도록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이와 같이 물질은 전부가 생명이 없다. 서로가 서로의 힘으로 파동할 뿐이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 행동을 하는 것이다. 우리 말로 생명을 마음이라고 한다. 이것만이 그저 남이 오라고 하면 '가볼까' 하고 생각할 수 있고, '안 간다'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절대 자유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생명이고 마음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물질이나
허공에서는 절대 생각할 수 없고 오직 마음에서만이 이런 생각을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 그것이 곧 나다.
마음 그 놈을 빼 놓고 나라고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떤 문제가
일어나 그것을 골몰히 생각할 때 도대체 어떤 것이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반문할 때는 내가 생각
한다고 대답한다. 또 '누가 그런 것을 했느냐'하고 물으면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고 대답
한다. 그러면서도 그 행동이나 생각이 내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행동할 수 있고 생각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생각하다가 버릴 수 있고, 행동하다가 그 행동을 중지할 수 있다. 생각을 다할 수도 있고,
반만 할 수도 있고, 시작하다가 중도에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행동과 생각을 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마음'이라고 하나 우리는 아직 그 실체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현미경이나 다른 것을 통하여 볼 수 있는데, 이 마음은 볼 수가 없다.
마치 눈이 자기의 눈을 볼 수 없듯이...
그런데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것은 내가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생각의
주체가 곧 나라는 소리다. 그러므로 나라고 하는 주체는 육체가 아니다. 행동하고 생각 할 수 있는
그 주체가 나라고 할 수 있으니 곧 마음이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이다'하는 이 마음도 마음이요,
남을 죽일려고 하는 생각도 마음이다. 이렇게 섞어 놓아서 문제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과 생각을 분리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마음은 모든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는
될 수 있어도 미리 이것이 새각은 없다. 그때 그때 그 사건따라 오관(五官)에 미치는 바에 의하여
그때 마음대로 부정도 긍정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정이나 긍정, 이것은 내가 아니다. 하나의
행동과 생각에 불과한 것이다. 행동이나 생각의 주체가 '나'인 것이다. 주체 그것을 우리는
마음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다. 그런 놈이 자기 마음대로 부정도 긍정도 하고 있다. 똑같은 사건을
가지고 긍정 했다가 부정 하고, 부정 했다가도 다시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주체는
미리 부정 긍정이 아니다. 자기 자유로 한다. 마음이 자유다. 이것은 나의 자유다. 그러므로 '나'라는
'나'는 지식도 아니요 사상도 아니요 신앙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나'일 뿐이다.
지식도 해 볼 수 있고, 사상이나 신앙을 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학이나 종교나
철학을 만들어 스스로 신앙도 해보고 또는 제가 만들었으면서도 믿지 않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은 모든 것의 주체인 것이다. 이 마음에는 아무것에도 걸림이 없다. 하나님에게도
구속되어 있지 않고, 부처님이나 진리에도 걸려 있지 않기 때문에 이놈이 자유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때나 이놈이 자유로이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일으 킬 수 있다. 그리하여 걷어
치우면 아무 것도 없다.또 그 생각이나 사건을 기억하려고 하면 몇 억 겁을 지난 후라도 그대로
기억 할 수 있다.
마음은 깨끗한 종이와 같아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글씨도 쓸 수 있으며, 가지 각색의 설계를
할 수도 있다. 본래 이 놈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은 자유다'하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보기에는 자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생명이 자유라는 것을
말하고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어째서 생명이 자유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나 자신은 가기 싫은데 왜 자꾸 가자고
하느냐고 할 때가 있는데, 가기 싫어 하는 놈이 자기의 생명인줄 알고 있다. 그것이 아니고
가자고 하면 갈 수 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는 놈이 생명인 것이다. 절대로 안 간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 그놈이 그 생각까지는 '절대' 같지만 그 놈이 임시로 그렇게 생각해 본 것 뿐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공산주의자가 알면 참으로 생명이란 것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구나 하고 공산주의를 다 버릴 수도 있다.
인생이 죽으면 완전히 끝난다고 하니까 유물론자들이 어쨌든 살아있는 동안 제가 미칠 때까지 힘껏
해보자는 것이다. 그래 보아야 별수도 ㅇ벗는 줄 알면서도 그래도 자살하기는 너무 억울하고
이왕 죽을바에야 마음대로 힘이나 써 보자고 발버둥친다. 그래서 그들은 '힘이 진리다'라고
말하고 윤리나 도덕 또는 종교는 힘 앞에서는 아무 기력이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생이 죽으면 그만이라고 하니 유물주의인 공산당을 하기도 하고, 자본주의를 하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여 제멋대로 힘을 길러 싸워 보자는 것이다. 이 두 사상이 싸움의 결과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도 싸우고 있는 것이다. 설사 싸움에서 이겨도 백 년안에 죽고 저 자신도 죽는
것이다. 이들이 아무 이익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보잘 것 없는 자만심과 부질없는
욕심 때문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 마음은 우리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고,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만들어 질 수도 없고, 없는 것 조차도 없으며, 진공 조차도 아니며, 사상도 아닌 까닭에 그 마음의
실체라는 것은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 누가 만들 수도 없고 제가 스스로 만들어 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노인 노릇도 하고 정치인 노릇도 하며, 살인 강도나 불량한 사람
노릇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을 깨치면 무엇이 되느냐 하는 것도 궁금한 것이다. 우리가 그런 줄 알면 깨쳐야 하는데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도 모르고 있다. 그러나 확실히 모르는 '내'가 '나'다. 모르는 이것이
법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듣고 인식하는 가운데 자기는 없고 그건 나가 아니다.
나 대신 한 개의 객관이거나 동시에 물질이거나 혹은 생명이지 아무 것도 아니다.
산 것이 있다고 하면 이 우주를 다 더듬어 보아도 없고 오직 내가 법문을 하고 여러분이 듣고 있는
주체인 마음뿐이다. 이것을 내 놓고는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없고 있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생명이 곧 나다.
반면에 '나는 곧 우주 생명인 것이다'라고 우리가 인정을 할 수 도있다. 이것은 다행히도 3천년 전
인도에 '싯타르타'라고 하는 분이 그 진리에 대해서 깊이 생각 하였다. 그리고 깨달으셨다.
그는 인생의 죽음과 병듬과 탄생함을 원통하고 슬프게 생각 하였고, 왜 내가 영원토록 행복되이
살 수 없느냐 하고 발버둥친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인생의 무상함에 순응할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인생에 병들고 늙어 죽는 법이
있다면 반대로 영원히 병들지 않고 늙지도 않으며 살 수 있는 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 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인류 5천년 역사에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여 보지 못한 위대한 생각 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 가장 슬프고 무서운 것은 무엇보다도 죽음인 것이다. 싯다르타는 이렇게도
두려운 죽음의 원리가 있는 것 같이, 영원하고 불멸하는 삶의 원리도 반드시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싯다르타 태자만의 냉철한 판단력이요, 그야말로 무서운 고집 이었다. 과거 수많은
성인들이 있었으나 태자와 같은 위대한 뜻을 가져본 일도 없었거니와 해결한 분도 없었다.
지구가 둥글다고 고집하고 지구가 태양계를 중심해서 돈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듯이, 싯다르타가 죽지 않는 원리를 발견한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들은 그의 정신을 의심 했던
것이다. 싯다르타는 설산에서 공부 할 때 처음에는 진리를 객관적인 데서 찾으려고 했으나
그것은 잘못인 줄 깨닫고 주관적인 자기 안에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 하였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이 놈이 무엇이냐 하고 생각해 보았더니 바로 싯다르타 자신인 것을 알았다. 물론
자신의 육체가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음을 마음이라고 이름지어 부를 수 있는 놈은
또 무엇인가를 찾기에 노력 하였다.
그는 마침내 주체성을 찾았다.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하는 이 놈 역시 부정과 긍정이었다.
부정. 긍정을 주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할 때는 막연하더니 누가 하는 것이냐 할 때는 틀림없이
싯다르타 자신이었다. 내가 바로 부정도 긍정도 하였다. 그러나 부정하고 긍정하는 놈이 무엇이냐
할 때는 이 육체가 아니었다. 무엇인가 육신 말고 다른 하나가 있었다. 도대체 이 몸둥이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데 살기를 원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그 분명한 생각은 고금을 통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5천년 문화를 형성 하였다 하지만 항상 이 육체를 나라고 착각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 착각을 무명이라고 하는데, 이는 밝지 못하다는 뜻이다. 우리는 육체를 나라고 하는 착각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그 육체가 나라고 생각할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마음이 확실히 나
자신이며 그 있는 곳을 모르되,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육체 이것이 나 자신이라고 생가하고 있다.
그래도 생사에 대한 것을 생각 할 때는 역시 육체는 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남이 죽으니 나도
죽는가 보다 하고 중생들은 자포자기하고 사는 날까지 막연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싯다르타야말로 정말 역사상 가장 천재요 너무도 밝은 분이었다. 참으로 진리를 구현하려는 대 욕심자였다.
영원히 안 죽기 위해서 자기를 발견한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보리수 밑에 앉아서 부정과 긍정을 자유로이 주재하는, 즉 내가 곧 무엇이냐?
다른 것은 모르더라도 이것은 확실히 알아야 겠다고 결심했다. 제 정신을 못 차리고 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남을 따라 다니는 것은 바지 껍데기나 다름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미친 사람인
것이다. 남의 말에 따라 다니고 남의 행동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가령 자기 자신을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예수님의 진실한 그 뜻을 따를 수 있겠는가?
또 부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참 모습을 찾아야 부처님을 따르는 것이지 그렇지
못하면 올바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 자신부터 우선 알고 남을 찾아 보아야
하느것이 순서가 옳을 것이다.
싯다르타 태자는 6년동안 한 자리에 앉아서 가만히 살펴보니 일체 망상의 잡념이, 즉 장사하고
농사 짓고 시집가고 장가 들고 아들 딸 낳고 정치를 하고 사는 것이 완전히 허무하고 헛된 일이라는
결론이 나서 모두 마련없이 만사를 깨끗이 던져 버렸다. 아무 죄악도 아니고 그렇다고 선한 것도
아니고 복도 아니고 무슨 종교나 철학도 아니고 과학도 아니었다. 그런 것들은 다 쓸데없는 헛된
일이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다 던져 버리고 6년 동안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남는 것은 인생의 본래 면목 밖에 없었다. 그 순간 수도 6년의 피나는 고행
끝인 섣달 초파일 새벽에 동방의 샛별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깊은 의미를 각성했다.
그리하여 그대 처음으로 말씀하시길 '나 자신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쾌활 쾌활, 참
기특하고 기특하다 어찌 미처 이럴줄 내가 알았으랴' 하였다.
이제 일체 중생을 보니 전부 부처님과 똑같은 일체 공덕을 모두 갖추어 가지고 있었다. 아! 그것이
그러하건대 개가 되어 가지고 서로 먹으려고 머리가 깨어지도록 저희들끼리 물고 싸우는가 하면,
개미가 되어 가지고 저희끼리 싸우고 있었다.일체 중생이 이와 똑같은 형식으로 싸우며 헤매이고
있었다.
예수님이나 공자는 박애(博愛)니 인(仁)이라고 그렇게만 말했지, 우리 부처님과 같이 가련함을 말씀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자비를 말씀 하셨다. 박애나 인은 부처님의 자비의 설법인 사랑의 자심(慈心)
에 해당하는 것으로, 슬프고 가련하게 여기시는 비심(悲心)의 설법은 오직 부처님만이 말씀 하셨다.
똑같은 부처 자리를 가지고 어찌 저렇게 딱하게도 개나 소가 되어 가고 있는가. 저 중생이 언제 마음을 깨쳐 가지고 생사를 자유 자재하는 본래 인간이 되겠느냐 하는 근본적인 존재를 밝혀야만 하였다.
이것은 과거 미래 현재의 삼세일유법체항유(三世一有法體恒有)란 논리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전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금생의 싯다르타 태자가 이렇게 확실히 있듯이 전생에도 또 다른 몸뚱이를 가지고 있었다. 가령
개가 되거나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하는 것은 무진연기의 인연에 따라 이룩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진장으로 끝이 없는 과거로부터 훈습된 만물의 현상인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인연을 따라 그 과행을 지어 아니 되어 본 것이 없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물까지 그것도 한 개의 생명체 이니까. 그리고 심지어 풀도 되고 초목도 되어 온갖 것이
아니 되어 본 것이 없었다. 거기다가 더 기적은 바위 돌이 된 적도 있었고 허공이 된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듯 싯다르타 태자도 지금은 마음을 깨친 부처이나 조금도 소식이 없는 바위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우리가 대라은 연후에 긍정하게 되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이다. 우리가 깨치기 이전부터 '그렇다더라'하고 말만 내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칫 잘못 생각하면 크나큰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실지로 경험 못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이 이런 것일건가 저런 것일 건가 하면 굉장한 오산을 가진 착각이다.
짐승이나 사람이나 죽을 때는 영영 죽는 줄 안다. 심지어 공자님도 죽으면 영원히 죽는 줄 알고
죽었지만 아직까지도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살아 생전의 모습과 같은 존재로 또 뭐가 되어가지고
돌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마음 못 깨달았으면 천당이나 지옥이나 개나 소가 되어 가지고 지금
돌아 다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제 마음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조화의 힘이란 이 마음 밖에 없다. 물질도 조화를 못하는 것이고 허공도 조화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이 마음 밖에는 조화를 부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확실히 이 우주에 주체인 진리의 '핵'이 된다면 산 것이다. 허공이 진리가 될 수 없다.
또 허공이 우주의 '핵'이 될 수도 없다. 또 물질이 될 수도 없다. 그러니 하는 수 없이 이
마음이 우주의 '핵'이 되기 싫어도 되는 수 밖에 없다.
우주의 생명이 곧 나 자신이고 내가 또한 전 우주의 생명이고 진리고 핵심이고. 이것이 깨친
부처님이고 하나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완전히 깨친 것을 부처라고 한다면, 그 다음에 하나님이다.
진리,. 신이다 또 옥황상제다 해 봤자 불교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마음 못 깨친 중생인 것이다.
즉 범속한 생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도 공자도 전생 후생을 몰랐고 오직 싯다르타 태자만
안 까닭이다.
그런데 요즈음 심리학계에서 , 어린애나 어른이나 최면술을 걸어서 시험을 해본 결과 전생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전생 이야기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걸어
40세를 먹었다, 20세를 먹었다, 10세가 되었다, 5세가 되었다 하고 자꾸 나이를 소급해 올라가 보면
그때 그때의 연령에 따라 과거의 기억을 되찾아 말한다. 또 1살이 되었다 하면 우리는 기억 할 수도
없고 추측할 수도 없는 일을 자세히 말한다.
최면술이라는 것이 별것이 아니다. 나 자신도 그 전에는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마술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최면술이라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정신을 통일
시켜주는 한 방편의 집중법인 것이다. 잠을 재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잡념을 제거해 주는 것이다.
마음을 안정시켜 가지고 잡념 망상을 가만히 제거해 준다. 잡념을 없애고 나면 정신이 가장 분명해
진다. 그렇게 되면 과거나 미래를 다 통하게 된다.
마음은 아무 생각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며 사상도 아니고 밝고 어두운 것도 아니며 둥글고 모난 것
도한 아니며 남성도 여성도 아니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일체의 것을 초월하다
보니 만사에 다 통해 있다. 그러니 이것을 내 놓고 우주의 주체가 있을 수 없고 진리가 있을 수 없다.
그런 까닭으로 마음을 깨친 이 말고는 참 지도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이 우주의 '핵'인
때문이다.
우주의 핵인 이 마음을 깨치기 전에 누가 옳은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기야 있기는 있겠지.
모두가 다 다른 소리를 하니까. 기도를 하거나 무슨 수를 써서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르게 된다 해도
그보다는 확실히 자기 생명을 깨쳐 참 우주의 주체로 복귀하여 전지전능 할 수 있다면 그것 밖에는
우리가 믿을 데가 - 긍정이 갈 데가 - 없다.
그리고 본래 하나님은 있고 인간은 인간이다 하면 그것으 ㄴ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완전히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천당에 가 보아야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면 천당에 가나마나 한 것이다. 설사 좀 편안히
산다고 하지만 좋은 것이 무에 있겠는가? 항상 거기의 부속품이 되어 가지고 언제 또 하나님이
나를 죽일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하나님이라 하지 않는가. 더군다나 요즈음은
인공위성이 나와 우주를 돌고 도는데 천당이 어느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일반
다른 종교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절대 신을 하나 내세워서 거기에 무조건 절대 복종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이들 다른 종교와 정의를 달리하므로 일반 서양 사람들은 불교르 ㄹ종교라고 부르지
않는다. 불교는 깨침을 위주로 한다하니 절대 복종하는 자기들 신앙과 다르므로 배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순종한다는 것은 인간의 노예 근성만 조장할 뿐이다. 하나님의울타리에 꼭 끼어
넣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면 모든것을 이루어 주고 하나님의 뜻 속에 살지 않으면 멸망을 준다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논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뜻이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다손 치더라도 천당이라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니 하나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있을 데가 없게 되었다. 즉 하나님의 거주지는 주소 불명이며 근본적인 주체가 될 것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꼭 자기와 같이 만들었다고 하여 인격신이라고 한다. 인격신이라고 한다면
역시 모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모양이 없다고 한다면 인격신이라고 할 수 없고
모양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과 같이 눈은 가로 놓이고 코는 그 밑에 우뚝서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하나의 물질적인 성격을 지닌 육체냐 하는 문제다. 만약 물질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비행기나 인공위성을 타고 우주를 돌아 다니다 보면 그 하나님을 만나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도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와 같이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도 육체가 아니고 하나의 '환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으 하나의 도깨비이다. 그것이 눈에
보인다 안 보인다 할 수 있다면 물질이 아닌 하나의 환상일 것이다. 그러니 도깨비라는 소리 밖에
안된다. 요즘 신학자들도 여기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를 못한다. 결국 그 사람들도 신이 없다고
말한다. 성직을 직업으로 삼는 신부나 목사들은 성서 그대로 참말이라고 말을 하지만 지금 신학자들은 공중에 신이 없다고 말한다. 과거에 잘못 생각했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니 신을 새로 창조 하여야 한다. 신을 우리가 창조한 것이지, 신이 있어서 우리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을 새로 창조하려고 하므로 기성 종교는 다 깨졌다. 그러므로 앞으로 현대인의
종교는 불교 뿐이라고 세계 많은 지성인은 생각하고 있다.
불교는 두길이 있는데 곧 대승과 소승이다.
대승 불교는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뿐인데, 어디서 그러면 대승 사상을 배울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중국은 공ㅅ한 국가라 들어가 배울 길이 없고, 그리고 일본은 확실히 문자로는 불교가
발달해 있어도 알맹이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에는 불교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마음에 대한 논란을 많이 하고 있으나 거의 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어떤 일본 학자는 요새 과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그것 불성이다' 라고 말해도
일본 하계에서는 아무 말도 없다. 그러니 그것을 아니라고 말하자니 다른 자료가 없고 시인하려 하자니 너무 막연한 실정이다. 그러나 '에너지가 불성이다'하는 것은 유물 사상이다. 이런 식으로 일본
불교가 텅 비어 있다.
한국 불교를 내가 배워보니 부서지기는 했어도 배울것이 있었다. 가령 내가 승려가 되어 가지고
이 산문 저 산문으로 돌아다니면서 나이 많은 스님들한테 언제 승려가 되었으냐, 무엇을 배웠느냐
하고 자꾸 물어보면 그래도 하나씩 하나씩 배울 것이 있었다. 1백명을 만나면 1백가지가 배워지고,
10가지를 물어서 한가지가 배워지기도 하고, 1백가지를 물어서 한 가지를 배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가령 사판 스님들한테 살림하는 것을 물어도 배워지고 배운경을 가지고 이리저리 물으면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하였다. 또 선방에 나와서 여러 선지식을 찾아가 참선하느 방법도 묻고,
그리고 공부를 해서 나는 조금은 맛을 본 것이다. 지난날 공부해 온 경로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공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도 한국에 태어나 공부한 덕이다.
내가 50년전 출가할 때 우리 민족은 일제 치하에서 가혹한 곤혹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어찌하든지
참략의 근성과 압박 정치의 씨를 남기지 않고 뽑아 버려야 하겠다고 강한 결심을 품었었는데 마침
금강산에 계시는 훌륭한 박포명 스님께 발심하여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깨치는
이 길이 오직 하나 있는 걸 모르고 남을 원수로 삼고 자꾸 죽일려고만 해서 잘못 했으면 세세생생에
원수를 맺을 뻔 했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면, 자연적으로 대 자비의 불세계가 되고 약소 민족은 해방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달아 전세계 독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세계는 본래부터 하나였다.
그러나 불교를 물로사 오늘의 세계가 조각조각 분열 되었다.
나는 어디를 가나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자기 마음을 밝히고 편벽된 집착심을 떠나야 하며 무애 자재한 자비는 원수의 경계가 없는 것이라고 항상 말하였다. 나는 그리고 누구를 보든지 묻기를, 가령
우리가 무엇을 보는데 보는 것은 눈이 보느냐 마음이 보느냐 하고 질문한다. 이것은 대학생이나
유치원 어린애나 다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는 소리다. 그러나 마음이 본다, 눈이 본다, 또는
마음과 눈이 어울려 본다고 대개들 말한다, 사실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
요즈음은 영혼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모든 물체는 오직 눈이 보고 눈에 그림자가 들어 오니까
카메라처럼 신경이 이를 전달하여 뇌수가 판단한다 라고 말한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눈을
뜨고 사물을 보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치 거울을 깨끗이 닦아 놓으면 자연히 거울에
사물이 비치듯 눈을 뜨고 앉아서 안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이것은 진실이다. 그런데도 뜻밖의 문제가 있다.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번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작용함과 상상함에 따라 이 마음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
생각이 있을 때에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이 다 보인다. 안 보이면 안 보이는 것가지도 알고 있다.
그러하지만 마음이 볼 생각을 안 하고 딴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가령 슬픔이라든지 기쁜이라든지
운명이라든지 또는 무엇을 깊이 연구하고 있다는지, 그럴때에는 눈을 아무리 뜨고 있어도 도대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경우 눈이 썩은 것이 아니고 신경이 상한 것도 아니고 뇌수가 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상의 작용 없이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이 보고 싶어할 때 보이고, 보기 싫어
할 때는 보이지 않으므로 이것은 마음이 보는 것이지 눈이 보는 것이 아니다. 눈은 거기에 대한
인연이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가령 귀나 코 입으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눈은 보이니 그것은
볼 수 있는 기관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가령 밖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 혹은 사람이 죽는다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면 밖에 나가 보아야 할 텐데 문이 잠겨 있어 빨리 나갈 수는 없고
해서 문구멍을 뚫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구멍 그것은 본다 안 본다가 없는 것이다. 눈동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의 의사에 의해서이다. 귀로써는우주에 편재하여 있는 모든 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마음이 그 무엇을 들으려고 하면 개미 발자국 소리인 그 조용함도 다 들리고, 마음이 듣지
않으려고 할 대에는 아무리 옆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거나 칭찬을 하여도 들리지 않는다. 심한
경우에는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안 들린다. 마음이 객관적인 사물에 대한 소리를 들으려고만 하면
개미 움직임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좋은 기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미세함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이런 것을 보아도 확실히 마음이 보고 듣는 것이지 구멍이 보는 것도 아니고 뇌수가 듣는 것도
아니다. 코도 냄새를 맡으려고 하면 온갖 것을 다 맡는데, 맡을 생각이 없을 때는 코에다 똥을 한
덩어리 발라도 냄새를 모른다. 구린내가 콧구멍으로 꽉차게 들어 갈텐데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입도 맛을 알려고 할 대는 온갖 음식을 다 먹어도 낱낱이 그 맛을 다 알지만, 맛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없을 때는 종일 씹고 있어도 그 맛을 모른다. 입이 맛을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안다.
그러므로 사람의 오관은 아무것도 아닌 하나의 고무 주머니에 불과하다. 하나의 눈구멍이나 귓구멍이나 콧구멍이나 입구멍이나 목구멍이다.
이와 같이 좋은 기계를 만들어 놓고 마음이라는 조종사가 앉아서 보고 싶을 때는 텔레비젼을 보고,
듣고 싶을 때는 라디오를 듣고, 방송이나 무전을 치고 싶으면 방송도 하고, 밧데리가 약해 졌을 때는
충전해서 밥이나 김치 또는 된장국을 맛있게 먹는다, 그래도 이것들은 하나도 안 쓸려면 안 쓸 수도
있다.
육체 이놈을 아무데나 내버리고 앉았으면 육체가 있으나 마나 아무것도 없다.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정신, 즉 마음과 육체가 둘이 있는 줄 알 수 있다. 그것을 가지고 정밀한 기계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
이것도 요사이 우리가 생물학을 배울 때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해서 현실 그대로 배우면 다 된 것같이 알았지만, 불교를 배우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시 재검토를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났다.
가령 우리가 생명의 비유를 들어보자. 한 개의 달걀이 병아리가 되는 것을 살펴보면 달걀이 노란자와
흰자가 있고 노란자 위에 밥알만한 씨눈이 있는 것을 본다. 그러면 달걀을 하나의 물질로 보면 맑은
액체에다 여러가지 요소를 섞었다고 본다. 그 '요소는 혼합물이다' 라고 보면 된다. 생명없는
무정물이니까 혼합물이라고 본다. 혼합물인 데도 먹으면 이익이 되는 혼합물이다.
병아리가 되는 것을 보면, 암탉이 달걀을 품고 있은지 사흘 후 깨어 보면 노른자 위에 있는 씨눈,
즉 배자에 붉은 핏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루 하루 지날수록 그 핏줄이 돋아 나오는데 어느정도
지나면 그 계란이 핏덩어리같이 된다. 열흘 후에는 밥알 같은 배자 그것이 주둥이가 된다. 돌이라도
깰 수 있는 단단한 주둥이가 된다. 발톱이나 털, 오장 육뷰가 동시에 샌긴다. 3주일 후에는 하얀 털을
가진 예쁜 병아리가 탄생한다.
그 혼합물인 달걀 자신은 아무리 생명을 일으키려 하여도 제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디서 이런 신비한 조화가 나오느냐 하고 가만히 보니 실제로 그 안에 있는 배자에서 나온다.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 배자만이 전체가 아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 보니 좁쌀만한
아주 작은 것이 있어 거기서 나온다. 그러나 자꾸 그 핵심을 찾으니 좁쌀 눈 만한 것이 있어 거기서
그런 조화가 나온다. 다시 정밀히 들여다보니 바늘 끝으로도 찌를 수 없는데서 그 무궁무진한 조화가
나온 것을 알았다. 그래도 자꾸 자꾸 더 조사를 해 보니까 나중에는 바늘로 지를 틈도 없다. 그러니
수학상으로 말하면 무산소, 즉 점 이전이라고 하며 그렇다고 진공도 아니다. 없는 무도 아니다.
없는 것 조차도 없어진 것이다. 점 이전 그것이 조화를 부리는 것이다.
그 혼합물만 가지고 병아리를 한 마리 만들고 혼합물과 같은 혼합물을 가지고 뼈도 만들고 털도 만든다.
그러니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요즘 생물 학자들이 '물질의 결정, 그것이 생명이다'하고 말하면서도
신비라고 감탄한다. '이것이 생명이다' 하고 결정을 짓지 못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니다. 바늘로도 찌를 수 없는 점 이전으로 돌아갔다 하면 그것을
적디 적은 무한 소이다. 무한대가 있는 것 같이 무한소이다. 무한소라고 하는 것 역시 한계가 없다.
적디 적어서 적은 것 까지도 없으니 한계가 없는 것이다. 한계가 없으니 도로 그것이 무한대이다.
즉 무한소는 무한대로 통한다.
끝으로 간추려 다시 말하자면, 신만이 우주의 주재자란 유신 사상이나, 오늘날 과 같은 물질 만능의
유물사상은, 인류에게 아흑의 구렁텅이만을 깊게 할 뿐이지, 참된 인생의 밝고 영원하며 행복된
길을 찾아 주지 못한다. 오직 내 마음이 우주를 주재하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부처님의 유심 사상만이 참혹한 암흑에서 헉덕이는 인류를 구원하는 참된 길인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인생이 무엇인가를 올바르게 알기 전에는 이 지구상에 평화와 자유가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우리에게는 점차 서광이 비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는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정법의 새싹이 이 땅에서 싹트고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땅에 다행히 태어났을 때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이 육신과 이 마음을 갖고 부지런히 용맹 정진 참회하여야 한다.
이 마음을 여의고는 만법이 존재하지 않으니 오직 이 마음을 밝히고 이 마음을 의지하여 만사를
자재할 수 있는 영원 무궁한 대 자유인이 되어 중생의 구세주가 되어야 겠다. 그리고 높고 큰 원력을
굳게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죽기 전에 우리는 먼저 살기부터 해야 한다. 산다는 것, 이것은 우리 인생이
태어날 대 부터 걸머지고 있느 멍에요 권리이다. 그리고 이 '삶'을 위해 우리는 평생토록 일을
하고 싸우고 또는 휴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새까만 연탄을 지고 승가사 꼭대기까지 오르내리는
짐꾼의 경우를 보자. 밝기 전에 일어나 어둡도록 일을 하는 농사꾼을 생각해 보자. 기타 교단에서
강의를 하느 ㄴ이, 정이를 하는 사람, 노동자, 인텔리... 어느 경우를 든지 그들은 모두 살기위해
활동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모두 진정한 '삶'을 위해서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저
몸둥이를 살찌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일 뿐, 시시각각으로 달라져 가는 그리하여 언젠가는 죽고
말 이 육신을 편안케 하기 위해 움직이는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아무 때든지 죽어 없어질 이 육신만을 위해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를 생각할 때 나는 불가불 '싯다르타' 태자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싯다르타
태자는 실로 이렇게 죽어 없어지는 몸둥이 이외에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분이다.
'또하나의 삶' 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성이라 해도 좋고 '하나님'이라 해도 좋다. 어쨌든 영원히
살아 있는 '나', 물질이 아닌 '나', 다시 말해서 진여나 여래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또하나의 삶'
이다. 이것은 온갖 움직임과 생각의 주체가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영원한 나'는, 온 우주에
가득차 있어서 나와 결코 둘이 아닌 혼연일체의 존재인 것이다. 여러분은 바로 이 '영원한 나'를
찾기 위햇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모두 이 '영원한 나'를 찾는 길로 일로 매진하자.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나'를 찾는
'새 삶의 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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