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알리어 경전/디가 니까야

D21. 삭까의 질문 경(Sakkapanhasuttaṃ)

실론섬 2014. 4. 13. 03:50

*본경은 불교를 외호하는 최고의 천신이며 신들의 왕으로 불리는 삭까(인드라)가 중심이 되는 경이다. 신들의 왕인 삭까는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 질문을 드리고 이 질문을 통해서 그는 예류과를 증득하여 불교의 성자(ariya)의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이처럼 본경을 삭까가 세존께 질문을 드리는 것이 중심이 된 경이므로 경의 제목도 삭까빤하 숫따(Sakkapanha Suttam)이고 이를 중국에서는 석제환인문경(釋帝桓因問經)으로 한역되어 장아함의 14번째 경으로 전해온다.  
본경은 삭까라는 인도의 신을 내세워 신화적인 구성으로 전개되는 가르침이지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본경을 수행과 관계된 중요한 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본경을 통해서 삭까가 예류자가 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불교에서 설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본경은 깊이 있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언

 

344.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카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에 신들의 왕 삭까가 세존을 친견하고자 하는 열망(간절한 바람)이 생겼다. 그래서 신들의 왕 삭까에게  '지금 세존·이라한·정등각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실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카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보고서 삼십삼천의 신들에게 말했다.   
'존자들이여, 그분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 북쪽에 있는 웨디야카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십니다. 존자들이여, 우리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친견하러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삼십삼천의 신들은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했다. 

 

*암바산다(Ambasanda)는 amba(망고)+sanda(숲)이 합성해서 된 단어이며 주석서에서는 이런 망고 나무 숲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서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DA.ii.697)

*주석서에 의하면 웨디야카(Vediyaka) 산은 그 주위의 숲들로 에워싸여 있는 것이 마치 보석의 광맥이 둘러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Ibid)

*주석서에 의하면 인다살라 동굴(Indasala-guha)은 이 산에 있는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있는 동굴로 그 입구에는 큰 살라 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이 벽과 창문과 문을 달고 잘 장엄하여 세존께 드렸다고 한다.(Ibid) 중국의 법현 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비구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날란다에서 북동쪽으로 1요자나 거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현장 스님이 방문했을 때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DPPN) 현재 인도 비하르주의 Giriyek 마을에서 남서쪽으로 2마일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동굴이다. 

*'열망(간절한 바람)'으로 옮긴 원어는 ussukka(호기심, 바람)인데 주석서에서는 "법에 대한 염원(dhammaiko ussaho)"(DA.iii.697)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삭까는 신들 가운데서도 가장 끊임없이 세존을 친견하여 왔고 신들 가운데 가장 방일하지 않는 자이지만 이번에 마치 세존을 친견하지 않은 것처럼 큰 염원으로 세존을 친견하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삭까는 그의 수명이 다해가는 전조(pubba-nimitta)를 보았으며 놀랍고 두려워서 세존을 친견하고 세존의 도움을 청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DA.iii.697-698)  

 

345. 그러자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말했다.  
'아들 빤짜시카야, 그분 세존께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웨디야카 산의 인다살라 동굴에 머물고 계신다. 아들 빤짜시카야, 우리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친견하러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벨루와빤두 류트를 들고 신들의 왕 삭까를 따라 나섰다. 

 

*'벨루와빤두 류트'의 원어는 Veluvapandu-vina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익은 벨루와 열매처럼 노란 색깔이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DA.ii.699). 다른 주석서에 의하면 이 류트는 본래 마라(Mara)의 것이었다고 한다. 마라는 세존께서 고행을 시작하던 때부터 시작해서 정각을 이루신 후 1년이 될 때까지 무려 7년간을 세존의 허점을 찾았지만 실패하고 지쳐서 돌아가다가 너무 피곤해서 이 류트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삭까가 이를 주워서 빤짜시카에거 주었다고 한다.(SnA.ii.393f)

346. 삼심삼천의 신들에게 둘러싸여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를 앞세운 신들의 왕 삭까는 마치 힘센 자가 구부렸던 팔을 펴고, 편 팔을 구부리듯이 그와 같이 빠른 시간안에 삼십삼천에서 사라져서 마가다에서 라자가하의 동쪽에 있는 암바산다라는 바라문 마을의 북쪽에 있는 웨디야카 산에 나타났다. 그때 신들의 신통력 때문에 웨디야카 산과 암바산다 바라문 마을에는 큰 빛이 생겼다. 그러자 주변 마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웨디야카 산이 불탄다. 오늘 웨디야카 산이 타오른다. 오늘 웨디야카 산과 암바산다 바라문 마을이 훨훨 불타 오른다. 왜 오늘 웨디야까 산과 암바산다 바라문 마을에 큰 빛이 생겼을까?'라고 놀라고 두려움에 몸에 털이 곤두섰다.

 

347. 그때 신들의 왕 삭까가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말했다.  
'아들 빤짜시카야, 여래께서 선(禪)을 하고 선(禪)을 즐기고, 홀로 머무는 동안에는 나 같은 자가 다가가기 어렵다. 아들 빤짜시카야, 그대가 먼저 세존을 기쁘게 해드려라. 아들아, 그대가 먼저 기쁘게 해드리고 나중에 우리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을 친견하러 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벨루와빤두 류트를 가지고 인다살라 동굴로 갔다. 가서는 '이 정도면 세존은 나에게서 너무 멀지도 않고 너무 가깝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소리를 들으실 것이다.'라며 한 곁에 섰다. 

 

pañcasikhagītagāthā (빤짜시카의 노래 게송)

 

348. 한 곁에 서서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는 벨루와빤두 류트를 연주하며 이 게송들을 말했는데, 부처님과 관계되고, 법(가르침)과 관계되고, 성자들과 관계되고, 아라한과 관계되고,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것이었다.

 

'태양처럼 밝은 밧다여,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를 낳아준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예배합니다.

(선여인이여, 태양과 같이 밝은 분이여,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경배합니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가]
그분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밧다는 빤짜시카가 사랑했던 여인이다. 그녀는 띰바루라는 간답바 왕의 딸이었다.

땀 흘리는 자에게 바람이 소중하고(사랑스럽고), 목마른 자에게 물이 소중하고
법이 아라한에게 소중하듯이 천녀는 나에게 아내처럼 소중합니다.

(태양처럼 밝은 그대는 나에게 사랑으로 다가오니 마치 아라한들에게 법과 같습니다).

병든 자에게 약을 주듯이, 배고픈 자에게 음식을 주듯이
타오르는 화염에게 물을 붓듯이, 
밧다여, 나를 해방해 주십시오(사랑의 열병을 꺼주십시오).       

한 여름의 무더위에 지친 코끼리가
연꽃 잎과 꽃가루가 떠다니는

차가운 물이 담긴 호수에 뛰어들듯이, (나도) 그대의 가슴 안으로 뛰어듭니다.       

 

막대기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코끼리처럼, 그대의 뛰어난 자태에 취해서 

나는 창이나 긴 창을 진압하기 위해 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지 못합니다.

(마치 갈고리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코끼리가
창이나 투창 따위에는 관심도 없듯이
그런 나도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대의 뛰어난 자태에 취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묶였습니다. 낚시바늘을 삼킨 물고기처럼, 

평상심을 잃어버린 내 마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나의 마음은 그대에게 묶여 버렸으며
나의 마음은 평상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으니
마치 미끼달린 낚시를 문 물고기처럼)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밧다여, 나를 안아주십시오.
아름다운 눈을 가진 밧다여, 나를 안아주십시오. 

아름다운 여인이여, 나를 안아주십시오. 이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곱슬머리 여인이여,
나의 욕망은 처음에는 적었지만, 

아라한에게 한 보시처럼 이제는 여러 가지 상태로 자라났습니다.       


그러한 아라한들에게 내가 지은 공덕이
모든 점에서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와 함께 열매를 맺기를!       

이 둥근 대지 위에서 내가 지은 공덕이
모든 점에서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와 함께 열매를 맺기를!       

 

사꺄의 후손인 성자께서 선(禪)을 닦아 집중되고 신중하고 마음챙김을 가져
불사(不死)를 갈망하듯이, 태양처럼 밝은 밧다여, 이런 나도 그대를 갈망합니다.       

성자가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한 뒤에 기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여, 그대와 하나 되어 나는 이렇게 기뻐할 것입니다.       

만약에 삼십삼천의 왕이신 삭까께서 나의 바람을 들어주신다면
밧다여, 나는 그대를 청할 것입니다. 이렇게 나의 욕망은 강합니다.

 

현명한 여인이여, 곧 만개할 살라 나무 같은 딸을 위해
그대의 아버지에게 예배하면서 절합니다.'

349. 이렇게 노래하자 세존께서는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빤짜시카여, 그대의 류트 소리는 노래 소리와 잘 어울리고 그대의 노래 소리는 류트 소리와 잘 어울린다. 빤짜시카여, 그대의 류트 소리는 노래 소리와 불협화음을 내지 않고, 노래 소리는 류트 소리와 불협화음을 내지 않는다. 빤짜시카여, 그대는 언제 부처님과 관계되고, 가르침과 관계되고, 성자들과 관계되고, 아라한과 관계되고,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이 게송들을 하나로 묶었는가(이런 게송을 지었느냐)?"라고.
"세존이시여, 한때 깨달음을 성취한 그분 세존께서는 우루웰라에서 네란자라 강둑에 있는 아자빨라니그로다 나무 아래(염소치기의 니그로다 나무 아래)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그때 간답바의 왕 띰바루에게 태양처럼 밝은 밧다라는 딸이 있었는데 저는 그 여인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을 갈망했습니다. 삭까의 마부인 마딸리의 아들 시칸디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갈망했습니다. 그때문에, 세존이시여, 저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여인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때 저는 벨루와빤두 류트를 가지고 간답바의 왕 띰바루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는 벨루와빤두 류트를 연주하면서 부처님과 관계되고, 가르침과 관계되고, 성자들과 관계되고, 아라한과 관계되고, 연모의 정이 가득 담긴 이 게송들을 노래하였습니다.  

 

'태양처럼 밝은 밧다여, 나에게 기쁨을 주는 아름다운 그대를 낳아준
그대의 아버지 띰바루에게 예배합니다. ··· 
현명한 여인이여, 곧 만개할 살라 나무 같은 딸을 위해
그대의 아버지에게 예배하면서 절합니다.'

이렇게 노래하자, 세존이시여, 태양처럼 밝은 밧다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여, 저는 그분 세존을 면전에서 뵙지는 못했지만 삼십삼천의 신들의 수담마 의회에서 춤을 출 때 그분 세존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존자여, 그대가 그분 세존을 찬탄하니 오늘 우리는 함께 지냅시다.라고. 
세존이시여, 그런 저는 그녀와 함께 딩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이후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라고." 

 

sakkūpasaṅkama (삭까가 세존을 친견함)

 

350. 그때 신들의 왕 삭까에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는 세존을 친절히 맞이하고, 세존께서도 빤짜시카를 친절히 맞이한다.'라고. 
그러자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말했다. 
"아들 빤짜시카야, 그대는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대신들과 수행원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존경을 표합니다.'라고 나의 이름으로 세존께 경의를 표하여 주기 바란다.라고." 
"알겠습니다. 존자시여."라고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대답한 뒤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대신들과 수행원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숙여 존경을 표합니다."라면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였다.  
"빤짜시카여, 신들의 왕 삭까는 대신들과 수행원들과 함께 행복하여라.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그리고 다른 각각의 무리들은 행복을 원한다." 

 

351. 이렇게 세존께서는 이런 큰 위력을 가진 약카들에게 인사한다. 세존의 인사를 받은 신들의 왕 삭까는 인다살라 동굴에 들어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섰다. 삼십삼천의 신들도 인다살라 동굴에 들어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섰다. 간답바 신의 아들 빤짜시카도 인다살라 동굴에 들어가서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섰다.

  
그때 신들의 신통력 때문에 인다살라 동굴은 고르지 않았는데도 고르게 되었고, 대중이 들어가기에 불편했는데 자유로워졌다. 동굴의 어둠은 사라지고 광명이 생겼다.

 

352.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의무가 많고 해야 할 일이 많은 꼬시야 존자가 여기에 오다니 놀랍고 참으로 경이롭습니다.”라고. 
"세존이시여, 세존을 친견하러 오고 싶은 바람은 오래되었지만, 삼십삼천의 신들을 위한 이런저런 의무와 해야 할 일들에 묶여있습니다. 그런 저는 세존을 친견하러 올 수 없었습니다. 세존이시여, 한때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살랄라 건물에 머무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세존을 친견하기 위해 사왓티에 갔습니다. 그런데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어떤 삼매에 들어 앉아 계셨습니다. 부자띠라는 웻사와나 대천왕의 시녀가 세존의 곁에 있었는데, 합장하고 공경하며 서 있었습니다. 그때, 세존이시여, 저는 부자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매여, 그대는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대신들과 수행원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라고 나의 이름으로 세존께 경의를 표하여 주십시오.’라고.

이렇게 말했을 때, 세존이시여, 그 부자띠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존자여, 지금은 세존을 친견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세존은 홀로 삼매에 머물러 계십니다.’라고. 
‘그렇다면 자매여, 세존께서 그 삼매에서 나오셨을 때 '세존이시여, 신들의 왕 삭까가 대신들과 수행원들과 함께 세존의 발에 머리 숙여 예배드립니다.'라고 나의 이름으로 세존께 경의를 표하여 주시오.'
세존이시여, 그 자매가 세존께 저의 이름으로 경의를 표하였습니까? 세존께서는 그 자매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신들의 왕이여, 그 자매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나는 그 자매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나는 존자의 마차 바퀴 소리를 듣고 그 삼매로부터 깨어났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저희 삼십삼천의 무리에 처음으로 태어난 신들의 곁에서 듣고, 곁에서 받아들였습니다.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했을 때 신들의 무리는 충만하고, 아수라의 무리는 줄어든다.’라고. 세존이시여, 저는 여래-아라한-정등각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에 신들의 무리는 충만하고, 아수라의 무리는 줄어든다.’라는 것을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꼬시야(Kosiya)는 산스끄리뜨 까우쉬까(Kausika)에서 온 말로 리그로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 인드라의 다른 이름이다.

*그때 세존께서는 삭까의 지혜(nana)가 아직 익지 않은 것을(aparipaka-gata) 아시고 [친견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과의 증득(phalasamapatti)에 머무시면서 앉아계셨다. 삭까는 이것을 모르고 '어떤 삼매에 들어서'라고 말하고 있다."(DA.iii.705)   
과의 증득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XIII.5이하를 참조할 것. 과의 증득을 결론적으로 표현하면 '소멸로 표현된 열반을 대상으로 본삼매에 안주함'이다.  

 

gopakavatthu (고빠까 이야기) 

 

353. 여기, 세존이시여, 까삘라왓투에 고삐까라는 사꺄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세존에 대한 분명함이 있었고(믿음이 있었고), 법에 대한 분명함이 있었고, 승가에 대한 분명함이 있었고, 계를 지켰습니다. 그녀는 여성이 되기를 멀리하고 남성이 되는 것을 닦아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세계(善處)에 나아가 하늘 세계(天界)에 태어났습니다. 삼십삼천의 일원이 되어 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를 '신의 아들 고빠까, 신의 아들 고빠까'라고 부릅니다. 
세존이시여, 그리고 다른 세 비구들도 세존에게서 범행을 닦은 뒤에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묶인 것을 타고나고, 부여받고, 제공받은(갖추고 완비하여 즐기면서) 그들은 저희들을 섬기기 위해, 저희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옵니다. 그들이 저희들을 섬기기 위해, 저희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왔을 때 신의 아들 고빠까는 질책하였습니다.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얼굴을 어디에 두고 그분 세존의 법을 배웠습니까? 나는 고삐까라는 샤까의 딸이었지만 세존에 대한 분명함이 있고, 법에 대한 분명함이 있고, 승가에 대한 분명함이 있고, 계를 지켰습니다. 그런 나는 여성이 되기를 멀리하고 남성이 되는 것을 닦아서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세계에 나아가 하늘 세계에 태어났습니다. 삼십삼천의 일원이 되어 신들의 왕인 삭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기서는 나를 '신의 아들 고빠까, 신의 아들 고빠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그대들은 세존에게서 범행을 닦은 뒤에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났습니다. 존자들이여, 낮은 간답바의 무리에 태어난 동료들이라는, 참으로 보기에 나쁜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라고.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그들 가운데 두 명의 신들은 지금여기에서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한 명의 신은 계속 감각적 쾌락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오계를 구족하였다.(DA.iii.706)

*고삐까(Gopika)는 여성명사이고 이것의 남성명사가 고빠까(Gopaka)이다. 그녀가 삼십삼천의 신이 되었으므로 이름을 남성으로 부르는 것이다.

*범보천(brahmapurohita)은 초선을 닦아서 태어나는 색계 천상의 초선천 가운데 하나인데 초선천의 범중천(Brahma-parisajja)과 범보천(Brahma-purohita)과 대범천(Maha-brahma) 가운데 두 번째에 속하는 천상이다.   


354. 눈을 가진 분(세존)의 청신녀(淸信女)가 있었습니다.

나의 이름은 고삐까였습니다.

세존과 법에 대한 아주 분명함을 가졌고

승가에 대한 분명한 마음이 확고했습니다.

 

그분 세존의 좋은 법 덕분에

크게 청렴한 하늘 집에 태어난
나는 위풍당당한 삭까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나를 고빠까라고 압니다(부릅니다).  

 

그런데 간답바의 몸으로 태어나 살고 있는
예전에 보았던 비구들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인간이었을 때 
그들은 고따마의 제자였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발을 씻겨드리고 
먹을 것과 마실 것으로 공경했습니다.

 

세존의 법들을 배울 때
이 존자들은 얼굴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눈을 가진 분이 깨닫고 선언한 
법은 개별적으로 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각자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대들을 섬긴 나는 
성자들의 좋은 말씀을 들은 뒤에
큰 광명을 가진 삼십삼천에 태어 난
나는 삭까의 아들이 되어 큰 위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대들은 뛰어난 분을 섬겼고  
위없는 범행을 닦은 뒤에,
그대들은 낮은 몸으로 태어났습니다.
적절하지 못한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낮은 몸으로 태어난 동료들이라는
참으로 보기에 나쁜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간답바의 몸으로 태어난 그대들은 
섬기기 위해 신들에게 옵니다.

 

재가에 살던 나의
이런 수승함을 보십시오.

여자였던 나는 이제 천상의 감각적 쾌락을 다 갖춘
신이 되었습니다.

 

고따마의 제자에 의해 질책 받은 그들은 
고빠까를 만난 뒤 자극받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열성적으로 정진하리라.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자가 되지 않으리라.'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고따마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깨끗하게 한 뒤에
감각적 쾌락들에 대한 잘못됨을 보았습니다.

마치 코끼리가 묶고 있는 줄을 끊어내듯이
그들은 감각적 쾌락의 족쇄와 속박들
건너기 힘든 빠삐만의 족쇄들을 끊어낸 뒤에
삼십삼천의 신들에게로 갔습니다.

 

인드라와 함께하고 빠자빠띠와 함께하는 신들은
모두 수담마 의회에 함께 앉았습니다. 

 

때 없음을 만든, 때 없는 그들은 
그들이 앉아있는 곳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들을 보고나서 신들의 지배자인 신들의 왕(삭까)은
신들의 무리 가운데서 자극을 받았습니다.
'참으로 낮은 몸으로 태어난 그들이
삼십삼천의 신들을 능가하는구나.'

 

자극받아 생겨난 말이 신중하게 말해진 뒤에
고빠까는 신들의 왕에게 말했습니다.

 

'세존은 인간 세상에서 왕입니다.
감각적 쾌락을 지배하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들들인 그들은 마음챙김을 잃었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얻었습니다.

 

간답바의 몸으로 태어나 살고 있는 
그들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여기에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을 따르는 두 명은 
삼매를 닦음에 의해서 신들조차도 낮게 봅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 법은 밝혀집니다.
거기에 제자라면 누구에게나 어떤 불확실함도 없습니다. 
폭류를 건넜고 의심이 끊어진
승리자고 왕인 세존께 우리는 예배해야 합니다.

 

그들은 여기서 법을 안 뒤에 
수승함을 얻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은 범보천의 몸이라는
특별한 경지로 나아갔습니다.

 

존자여, 그런 법들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왔습니다.
세존께서 기회를 주신다면
존자여, 우리는 질문을 합시다.'"라고.

 

355. 그러자 세존께 이런 생각이 떠오르셨다.  
'이 약까는 오랜 세월 청정함을 가졌다. 나에게 질문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모두 이익으로 이끌리는 것을 질문 할 것이고, 불이익으로 이끌리는 것을 질문하지 않을 것이다. 질문 받은 내가 설명하는 것을 빠르게 알 것이다.'라고.

 

356. 그러자 세존께서는 신들의 왕 삭까에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신들의 왕이여, 나에게 질문하십시오. 마음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는 거듭되는 그 질문의 끝을 만들겠습니다(그 질문에 대해서 결론에 이르도록 할 것입니다)."라고.

 

357. 세존으로부터 허락을 받은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께 이런 첫 번째 질문을 했다. 

 

"존자시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다른 각각의 무리들은 '원망 없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대감이 없고(적을 만들지 않고), 분노 없는 원망 없는 자로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족쇄 때문에 원망이 있고, 몽둥이를 들고, 적대감이 있고, 분노 있는 원망하는 자로 머물게 됩니까?"    
신들의 왕 삭까는 이렇게 세존께 질문을 드렸다. 그의 질문을 받은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존자시여'로 옮긴 원어는 마리사(marisa)이다. 신들이 남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일반적인 호칭이다. 삭까는 세존께 질문을 드릴 때 이런 호칭을 사용하다가 질문을 마무리하고 나서 확신이 생기자 이후에는 반떼(bhante)라는 호칭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신들의 왕이여, 신들과 인간들과 아수라들과 용들과 간답바들과 다른 각각의 무리들은 '원망 없고, 몽둥이를 들지 않고, 적대감이 없고, 분노 없는 원망 없는 자로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질투와 인색의 족쇄 때문에 원망이 있고, 몽둥이를 들고, 적대감이 있고, 분노 있는 원망하는 자로 머뭅니다."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받은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을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세존의 설명을 듣고서 저에게 여기에 대한 의심은 극복되었고, 불확실함은 제거되었습니다."


*'타인의 성공에 지쳐 버리는(khiyana) 특성을 가진 것이 질투(issa)고, 자신의 성공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가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asahana) 역활을 가진 것이 인색(maccharoya)이다.(DA.iii.718-19)
*'그것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라는 문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존이시여'는 호격 반떼(bhante)의 번역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세존으로 옮기는 바가와(bhagava)의 호격이다.

 

358.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께 이어지는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질투와 인색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에서 자라고(일어나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 무엇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도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질투와 인색은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인연이고(좋아하고 싫어함이 인연이고),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에서 자라고,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에서 생기고,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근원입니다.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있을 때 질투와 인색이 있고,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없을 때 질투와 인색이 없습니다."

 

*좋아하는(piya) 중생과 상카라(행)들은 근원으로 하여 인색(macchariya)이 있고 싫어하는(apiya) 중생과 상카라들을 근원으로 하여 질투(issa)가 있다. 혹은 둘은 둘 모두의 근원이 된다."(DA.iii.719)  

 

"존자시여,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에서 자라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 무엇이 있을 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있으며, 무엇이 없을 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은 열의(관심)가 인연이고, 열의에서 자라고, 열의에서 생기고, 열의가 근원입니다. 열의가 있을 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있고, 열의가 없을 때 사랑스러움과 사랑스럽지 않음이 없습니다."

 

*「청정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열의(관심, 의욕, chanda)를 설명하고 있다. "열의는 하고 싶어 함의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고 싶어 하는 특징을 가진다. 대상을 찾는 역활을 한다. 대상을 원함으로 나타난다. 바로 그 대상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 열의는 대상을 잡는데 마음을 뻗는 것이 마치 손을 뻗는 것과 같다고 알아야 한다."(Vis.XIV.150)  
본경의 주석서에서는 pariyesana-chanda(찾는 열의), patilabha-chanda(얻고자 하는 열의), paribhoga-chanda(즐기고자 하는 열의), sannidhi-chanda(축적하고자 하는 열의), vissajjana-chanda(집착하는 열의)의 다섯 가지 열의를 들고 각각을 설명한 뒤에 본경에서는 오직 갈애(tanha)를 두고 설한 것이라고 하며(DA.iii.720) 복주서에서는 이것은 바로 집착하는 열의라고 설명하고 있다.(DAT.ii.326)  

 

"존자시여, 열의는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에서 자라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 무엇이 있을 때 열의가 있고, 무엇이 없을 때 열의가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열의는 일으킨 생각(尋. 거친 사유)이 인연이고, 일으킨 생각에서 자라고, 일으킨 생각에서 자라고, 일으킨 생각이 근원입니다. 일으킨 생각이 있을 때 열의가 있고, 일으킨 생각이 없을 때 열의가 없습니다."


"존자시여, 일으킨 생각은 무엇이 인연이고, 무엇에서 자라고,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이 근원입니까? 무엇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고, 무엇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이 없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일으킨 생각은 희론(戱論)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이 인연이고, 희론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에서 자라고, 희론의 인색에 의한 헤아림에서 생기고, 희론의 인색에 의한 헤아림이 근원입니다. 희론의 인색에 의한 헤아림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이 있고, 희론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이 없을 때 일으킨 생각이 없습니다."

 

*"세 가지 희론(사량분별, papanca)이 있다. 갈애(tanha)에 의한 희론과 자만(mana)에 의한 희론과 사견(ditthi)에 의한 희론이다."(DA.iii.721)  
*'희론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은 papanca(희론)-sanna(인식)-sankha(헤아림)으로 분석해서 옮긴 것이다.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취하고(matta) 방일한(pamatta) 모습에(akara) 다다른다(papana) 뜻에서 희론(papanca)이다. 이것과 함께한 인식이 희론을 가진 인식이다. 헤아림이란 부분이란 뜻이다."(Ibid)  
즉 주석서에서는 papanca를 pamatta(방일함)의 pa와 '다다른다'를 의미하는 papana의 결합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희론 없음(nippapanca)'은 열반의 여러 동의어들 가운데 하나로 나타난다. 아비담마의 가르침에 따르면 papanca(빠빤짜)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갈애, 자만, 사견으로부터 벗어남을 말한다.(VbhA.508)  

 

"존자시여, 어떻게 닦을 때  비구가 희론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의 소멸로 적절히 이끄는 닦음을 실천하는 자입니까?"

 

*'희론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의 소멸로 적절히 이끄는 닦음'으로 옮긴 원어는 papancasannasankha-nirodha-saruppagamini-patipanno라는 긴 합성어이다. 주석서에서는 "이러한 희론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람의 부서짐, 소멸, 가라앉음과 이것에 적합하고 이것으로 인도하는 위빳사나와 함께 한 도를 질문드렸다."(DA.iii.721)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의 주해에서도 밝혔듯이 이러한 희론의 소멸이 바로 열반이다. 그래서 이제 세존께서는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 즉 도닦음을 신들의 왕 삭까에게 설하시는데 세존께서는 이제 세 가지 느낌들을 통해서 그것을 제시하고 계신다.  
한편 주석서에서는 물질의 명상주제(rupa-kammatthana)와 비물질(arupa,정신, 名)의 명상주제로 명상주제를 둘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 뒤 "그런데 여기서는 세존께서 비물질의 명상주제를 느낌을 상수(上首)로 하여 설하신다."(DA.iii.723)고 적고 있다.   

 

vedanākammaṭṭhānaṃ (느낌의 명상 주제)


359. "신들의 왕이여, 만족(정신적인 즐거움)에 대해서도 실천해야 하는 것과(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받들어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두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불만족(정신적인 괴로움,고뇌)에 대해서도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평정에 대해서도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가지로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세 가지 느낌(tisso vedana)에 대해서 설하신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세 가지 느낌, 즉 괴로운 느낌, 즐거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으로 설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세 가지 느낌은 욕계의 몸을 바탕으로 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들은 이런 거친 욕계의 몸은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만족(somanassa), 불만족(domanassa), 평정(upekkha)이라는 세 가지 느낌을 설하신다.

주지하다시피 아비담마에서는 다섯 가지 느낌을 [육체적] 괴로움, [육체적] 즐거움, 만족, 불만족, 평정이다. 
본경의 주석서에서도 "왜냐하면 신들에게는 물질보다 비물질(arupa, 無色, 정신)이 더 분명하며 비물질의 느낌이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devatananhi rupato arupam pakatataram, arupepi vedana pakatatara)라고 설명하고 있다.(Ibid)  

 

360. '신들의 왕이여, 만족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어떤 만족에 대해 '이 만족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증장하고 선법(善法)은 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만족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만족에 대해 '이 만족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만족은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서 만약에 일으킨 생각(거친 사유)과 지속적인 고찰(미세한 사유)도 있고, 만약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도 없는 것이 있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것들이 더 뛰어납니다. '신들의 왕이여, 만족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이제 비물질(정신)의 명상주제 가운데서 그에게 분명한 느낌을 통해서 천착해 들어가는 입구(abhinivesa-mukha)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시고 그에 대한 답을 설하신다고 설명하고 있다.(DA.iii.724) 
*"이러한 재가에 바탕을 둔(geha-sita) 정신적 즐거움은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DA.iii.724)
*"이러한 출리에 바탕을 둔(nekkhamma-sita) 정신적 즐거움은 시런해야 한다."(Ibid)
*"이 출리에 바탕을 둔 만족(정신적 즐거움)이란 출리와 위빳사나와 계속해서 생각함(anussati)과 초선을 통해서 생긴 일으킨 생각이 있고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 정신적 즐거움이라고 알아야 한다."(DA.iii.725)
*"이것은 제2선과 제3선을 통해서 일어난 일으킨 생각이 없고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만족이라고 알아야 한다."(Ibid)
*"이것을 통해서 무엇을 설하셨는가? 두 가지 아라한과를 설하셨다. 어떻게? 어떤 비구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있는만족에서 위빳사나를 확립한 뒤 '이 만족은 무엇을 의지하였는가?'라고 호지하여 이들은 [형상, 소리 등의] 토대를 의지했다. <*토대란 바로 육신이다. 이것을 두고 "그런데 나의 이 의식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있다(M77/ii.17 등)"라고 설하셨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근본물질들(사대)과 파생된 물질들이다.>라고 꿰뚫어 안다고 감각접촉을 다섯 번째로 하는 것들에서 설명한 방법대로 차례대로 아라한과에 확립된다.  
다른 비구는 같은 방법으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만족에서 위빳사나를 확립한 뒤 아라한과에 확립된다. 이 가운데서 후자가 더 수승하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경우가 더 수승하다고 하셨다."(DA.iii.725)  


361. '신들의 왕이여, 불만족(고뇌)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불만족에 대해 ‘이 불만족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증장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불만족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불만족에 대해 ‘이 불만족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증장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불만족은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서 만약에 일으킨 생각(거친 사유)과 지속적인 고찰(미세한 사유)도 있고, 만약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도 없는 것이 있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것들이 더 뛰어납니다. '신들의 왕이여, 불만족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실천해야 할 정신적인 괴로움은 출리에 바탕을 둔 정신적 괴로움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한다. 그리고 주석서는 다음의 「맛지마 니까야」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을 인용하고 있다.(DA.iii.731)  
"여기서 무엇이 여섯 가지 출리에 바탕을 둔 불만족)정신적 괴로움)인가? 형색들은 참으로 무상하고 변하고 항상하지 않고 소멸한다고 알아 이전의 형색들이나 지금의 형색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면서 위없는 해탈에 대한 부러움(바램.염원)을 일으킨다. '지금 성자들이 증득하여 머무는 경지를 나는 언제 증득하여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위없는 해탈에 대한 부러움을 일으키면서 부러움을 조건으로 불만족이 일어난다. 이러한 불만족을 출리에 의지한 불만족이라고 한다. 소리들은 참으로 ··· 냄새들은 참으로 ··· 맛들은 참으로 ··· 감촉들은 참으로 ··· 법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면서 위없는 해탈에 대한 부러움(바램.염원)을 일으킨다. '지금 성자들이 증득하여 머무는 경지를 나는 언제 증득하여 머물게 될 것인가?'라고 위없는 해탈에 대한 부러움을 일으키면서 부러움을 조건으로 불만족이 일어난다. 이러한 불만족을 출리에 의지한 불만족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섯 가지 출리에 의지한 불만족이다. "  
*여기서도 주석서는 실천하지 않아야 할 불만족은 재가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맛지마 니까야」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의 아래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DA.iii.726)
"여기서 무엇이 여섯 가지 의 세간에 의지한 불만족인가?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들고 매력적이고 세속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눈으로 인식되는 형색들을 획득하지 못함을 힉득하지 못함으로부터 보면서 혹은 이미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하지 못한 것들을 회상하면서 불만족이 일어난다. 이러한 불만족을 세간에 의지한 불만족이라고 한다. 귀로 인식되는 소리들을 ··· 코로 인식되는 냄새들을 ··· 혀로 인식되는 맛들을 ··· 몸으로 인식되는 감촉들을 ··· 마음으로 인식되는 법들을 획득하지 못함을 획득하지 못함으로부터 보면서 혹은 이미 과거에 소멸하고 변해버린 이전에 획득하지 못한 것을 회상하면서 불만족이 일어난다. 이러한 불만족을 세간에 의지한 불만족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섯 가지 세간에 의지한 불만족이다."     

 

362. ‘신들의 왕이여, 평정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평정에 대해 ‘이 평정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평정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평정에 대해 ‘이 평정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평정은 실천해야 합니다. 거기서 만약에 일으킨 생각(거친 사유)과 지속적인 고찰(미세한 사유)도 있고, 만약에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도 없는 것이 있다면,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고찰이 없는 것들이 더 뛰어납니다. '신들의 왕이여, 평정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같은 방법으로 출리에 바탕을 둔 평정(평온)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을 인용한다. "여기서 무엇이 여섯 가지 출리에 의지한 평정인가? 그러나 형색들은 참으로 무상하고 변하고 항상하지 않고 소멸한다고 알아 이전의 형색들이나 지금의 형색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면서 평정이 생기는데, 이런 평정은 형색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런 평정을 출리에 의지한 것이라고 한다. 소리는 참으로 ··· 냄새는 참으로 ··· 맛은 참으로 ··· 감촉은 참으로 ··· 법은 참으로 무상하고 변하고 항상하지 않고 소멸한다고 알아 이전의 법들이나 지금의 법들은 모두 무상하고 괴롭고 변하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면서 평정이 생기는데, 이런 평정은 법을 넘어선다. 그러므로 이런 평정을 출리에 의지한 평정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섯 가지 출리에 의지한 평정이다."      
*같은 방법으로 재가에 바탕을 둔 평정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을 인용한다. 여기서 무엇이 여섯 가지 세간에 의지한(재가에 바탕을 둔) 평정인가? 눈으로 형색을 보면서 어리석고 미혹한 범부, (오염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과보를 극복하지 못하고 위험을 보지 못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평정이 생기는데, 이런 평정은 형색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평정을 세간에 의지한 것이라고 한다.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혀로 맛을 맛보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 어리석고 미혹한 범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과보를 극복하지 못하고 위험을 보지 못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평정이 생기는데, 이런 평정은 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런 평정을 세간에 의지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여섯 가지 세간에 의지한 평정이다.  

 

363. 신들의 왕이여, 이렇게 닦는 비구가 희론(戱論)의 인식에 의한 헤아림의 소멸로 적절히 이끄는 닦음을 실천하는 자입니다.”라고.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받은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세존의 설명을 듣고서 여기서 저는 의심과 불확실을 건넜습니다(의심은 극복되었고, 불확실함은 제거되었습니다)."라고.

 

*주석서에서 삭까는 이 설법을 듣고 예류과를 얻고서 죽어서 즉시에 다시 태어났다고 한다. '삭까는 예류자가 된 후에 세존의 앞에서 죽은 뒤 어린 삭까가 되어 태어났다. 신들이 죽을 때는 화현을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오고 가는 경우를 남들이 알지 못한다. 마치 등불의 불꽃과도 같다. 그래서 다른 신들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삭까는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알았고 세존께서는 지혜를 잃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셨으니 이처럼 두 사람만이 알았다.(DA.iii.732)

 

pātimokkhasaṃvaro (계목의 단속)

 

364.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께 이어지는 질문을 드렸다.

 

"그러면 존자시여, 계목의 단속을 위해 닦는 비구는 어떻게 실천합니까?"  
"신들의 왕이여,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구함(추구)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추구(구함,pariyesana)는 몸과 말로써 추구하는(구하는) 것이다.(Ibid)
몸으로 짓는 행위와 말로 짓는 행위가 설하여 졌으니 당연히 마음으로 짓는 행위가 나와야 한다. 마음으로 짓는 행위는 너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계목의 단속의 문맥에서 특별히 추구를 들고 있다.

*이제 계목의 단속을 설명하기 위해서 몸으로 짓는 행위 등을 설하신다고 주석서는 말한다.(Ibid) 계속해서 주석서는 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계의 설명은 [열 가지] 업의 길(kammapatha)과, 선포하신 것(pannatti)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 먼저 업의 길을 통해서 설명하면, 몸으로 짓는 행위 중에서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살생, 훔치는 것, 삿된 음행을 말한다. 선포하신 것을 통해서 설명하면, 선포하신 학습계목(sikkhapada)을 몸의 문(kaya-dvara)에서 범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실천해야 하는 것은 살생 등을 금하는 것과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몸의 문에서 범하지 않는 것이다. 말로 짓는 행위 중에서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거짓말 등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선포하신 것을 통해서 설명하면,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말의 문(vaci-dvara)에서 범하는 것으로 설명되어야 한다. 실천해야 하는 것은 각각 거짓말 등을 금하는 것과 선포하신 학습계목을 말의 문에서 범하지 않는 것이다."(Ibid)
*주석서에서는 실천해야 하는 구함으로 「맛지마 니까야」「덫 경」(M26)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스러운 구함을 들고 있고,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구함으로는 같은 경에 언급되는 성스럽지 못한 구함을 들고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DA.iii.733) 덫 경의 해당 부분을 여기서 인용한다.
"비구들이여, 두 가지 두함이 있다. 성스럽지 못한 구함과 성스러운 구함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성스럽지 못한 구함인가? 비구들이여, 어떤 사람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자신이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늙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늙음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병듦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병듦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죽음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죽음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슬픔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슬픔의 법을 구하고, 여기 어떤 사람은 오염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자신이 오염되는 존재이면서) 오직 오염의 법을 구한다. 비구들이여, 무엇을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비구들이여, 자식과 아내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하인과 하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염소와 양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닭과 돼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코끼리와 소와 말과 당나귀가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금. 은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런 재생의 조건들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욕심내고, 탐착하고, 묶여있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남의 법을 지니고 있으면서 오직 태어남의 법을 구한다."   

 

'신들의 왕이여,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해 '이 몸으로 짓는 행위를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늘어나고 선법(善法)은 줄어든다.'고 알면, 이런 몸으로 짓는 행위는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해 '이 몸으로 짓는 행위에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몸으로 짓는 행위는 실천해야 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몸으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 '이 말로 짓는 행위를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不善法)은 늘어나고 선법(善法)은 줄어든다.'고 알면, 이런 말로 짓는 행위는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 '이 말로 짓는 행위에 실천하는 나에게 블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알게 되면, 이런 말로 짓는 행위는 실천해야 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말로 짓는 행위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구함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실천해야 하는 것과 받들어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을 연(緣)하여 말했습니까? 
거기서 구함에 대해, '이 구함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든다.'고 알면 그러한 구함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서 구함에 대해, '이 구함을 실천하는 나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난다.'라고 알면, 이런 구함은 실천해야 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구함에도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말합니다. 그것은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했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계목의 단속을 위해 닦는 비구는 이렇게 실천합니다."라고.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의 질문을 받은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신들의 왕 삭까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세존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 여기서 저는 의심과 불확실을 건넜습니다(여기에 대한 의심은 극복되었고, 불확실함은 제거되었습니다)."라고.  

 

indriyasaṃvaro (감각기능(근.根)의 단속)

 

365.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께 이어지는 질문을 드렸다.

 

"그러면 존자시여, 감각기능의 단속을 위해 닦는 비구는 어떻게 실천합니까?"라고.  
"신들의 왕이여, 눈으로 인식해야 하는 형상들에 대해서도(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에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귀로 인식해야 하는 소리들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코로 인식해야 하는 냄새들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혀로 인식해야 하는 맛들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몸으로 인식해야 하는 감촉들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마음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마음현상)에 대해서도 나는 실천해야 하는 것과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것의 두 가지로 말합니다."

*"간략하게 말하면, 어떤 형상을 보면서 감각적 쾌락(raga) 등이 일어나면 그것은 실천하지 않아야 한다. 보아서는 안된다, 쳐다보아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면서 부정의 인식(asubhasanna, 부정상, 不淨想)이 자리 잡거나 청정한 믿음이 일어나거나 무상하다는 인식(aniccasanna)을 얻게 되면 그런 것은 실천하여야 한다."(DA.iii.736)   
주석서에서는 비슷한 방법으로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인 법을 대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마음으로 옮긴 원어는 mano(마노)이다.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했다. 마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은 감각장소(ayatana, 處(처))와 감각기능(indriya, 根(근)) 과 문(門)이다.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혹은 색깔),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불교세어는 감각장소(處, 처)라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감각기능(根, 근)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매순간 우리의 삶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은 정신적인 영역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 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마노(mano)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맥에 따라서 마노의 문이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장소라고도 하고, 마노의 감각기능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마노는 초기불교가 천명한 독특한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러한 마노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불교에서는 법(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노의 대상인 법을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부수들, 열반을 들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에게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상세한 의미를 압니다.
세존이시여, 실천하는 자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드는 눈으로 인식해야 하는 형상들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어떤 경우에 '내가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을 받아들일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제거된다.'고 알면 그러한 눈으로 알아지는 형상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실천하는 자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나는 눈으로 인식해야 하는 형상들은 실천해야 합니다. ··· 귀로 인식해야 하는 소리들 … 코로 인식해야 하는 냄새들 … 혀로 인식해야 하는 맛들 … 몸으로 인식해야 하는 감촉들 … 실천하는 자에게 불선법은 늘어나고 선법은 줄어드는 마음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法)들은 실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실천하는 자에게 불선법은 줄어들고 선법은 늘어나는 마음으로 인식해야 하는 법들은 실천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간략하게 설하신 이 말씀에 대해 이렇게 상세한 의미를 아는 저는 질문에 대한 세존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 여기서 의심과 불확실을 건넜습니다."


366.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께 이어지는 질문을 드렸다.

 

"존자시여, 모든 사문·바라문은 동일한 교설을 말하고, 동일한 계를 지니고, 동일한 관심(의욕)을 가지고, 동일한 것(동일한 목적)에 묶여 있습니까?”라고.
“신들의 왕이여, 모든 사문·바라문은 동일한 교설을 말하고, 동일한 계를 지니고,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동일한 것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이들의 말이 오직 하나인(eka) 끝(anta)을 가졌으며 둘로(dvedha) 나누어진 교설이 아니라고 해서 '동일한 교설을 가진 자'라고 한다. [삭까는] '하나만을 말합니까?;라고 세존께 묻는 것이다."(DA.iii.737)  

 

"그러면 존자시여, 무엇 때문에 모든 사문·바라문은 동일한 교설을 말하고, 동일한 계를 지니고,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동일한 것에 묶여 있지 않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세상에는 다양한 요소, 여러 요소가 있습니다. 다양한 요소, 여러 요소가 있는 그 세상에서 중생들은 집착하는 요소를 강하게 붙잡고 집착하여 말합니다.
‘이것만이 진리이고 다른 것은 거짓이다.’라고. 그것 때문에 모든 사문·바라문은 동일한 교설을 말하고, 동일한 계를 지니고, 동일한 관심을 가지고, 동일한 것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여러 의향(ajjhasaya)을 가지고 있고 다양한 의향을 가지고 있다. 한 사람이 가고자 하면 다른 사람은 서고자 한다. 한 사람이 서고자하면 다른 사람은 눕고자 한다. 두 중생이 하나의 의향을 가지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러한 여러 요소(dhatu)를 가지고 있고 각각 다른 요소를 가진 세상에서 중생들은 그것이 무슨 요소이든 그것이 무슨 의향이든 그것을 천착하고(abhinivisanti) 거머쥔다(ganhanti)."(Ibid)   

 

"존자시여, 모든 사문·바라문에게 지속되는 끝(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지속되는 유가안온(구경의 유가안온(瑜伽安隱.열반을 얻으며), 지속되는 범행(구경의 청정범행을 닦고), 지속되는 귀결이 있습니까(구경의 목적을 얻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모든 사문·바라문에게 지속되는 끝, 지속되는 유가안온, 지속되는 범행, 지속되는 귀결이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anta)'란 파멸(vinasa)이다. 이들에게 끝을 넘어선 완성(nittha)이 있다고 해서 지속되는 끝(구경의 완성)이라고 한다. 이러한 끝 즉 최상의 안식(parama-assasa)인 열반은 모두에게 파멸을 넘어선 영원한 것이라고 말한다."(Ibid)

*'유가안온(瑜伽安穩)'은 yogakkhema(요가케마)의 한역이다. 여기서 유가(瑜伽)는 yoga의 음역이고 안온(安穩)은 khema의 의역이다. 이 단어는 리그로베다에서부터 나타나는데 yoga는 '획득'을 khema는 '보존(저축)'을 뜻했다. 그러나 빠알리 주석서들에서 예외 없이 yoga를 속박으로 해석해서 속박들로부터 풀려나서 안온한 열반(yogehi khematta nibbanam yogakkhemam nama, SA.i.255)으로 유가안온을 설명한다. 즉 이것은 열반의 동의어로 중요하게 쓰였다.   
*'귀결'로 옮긴 원어는 pariyosana 이다. 열반의 다름 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Ibid)

 

"그러면 존자시여, 무엇 때문에 모든 사문·바라문에게 지속되는 끝, 지속되는 유가안온, 지속되는 범행, 지속되는 귀결이 있지 않습니까?"  
"신들의 왕이여, 갈애의 소멸에 의해 해탈한 비구들에게 지속되는 끝, 지속되는 유가안온, 지속되는 범행, 지속되는 귀결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문·바라문에게 지속되는 끝, 지속되는 유가안온, 지속되는 범행, 지속되는 귀결이 있지 않습니다."  

 

*"갈애의 소멸(tanha-sankhaya)이란 도(magga)와 열반이다. 도는 갈애를 소멸하고 파멸시킨다(vinaseti)고 해서 갈애의 소멸이다. 열반은 갈애를 소멸하고 파멸시켜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갈애의 소멸이다. 갈애를 소멸하는 도에 의해서 해탈했고 갈애의 소멸인 열반으로 향한다고해서 갈애를 소멸하여 해탈한 것(tanha-sankhaya-vimutta)이다."(DA.iii.738)   

 

신들의 왕 삭까는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했다.
"그것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그렇습니다, 선서시여. 질문에 대한 세존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서 여기서 저는 의심과 불확실을 건넜습니다(여기에 대한 의심은 극복되었고, 불확실함은 제거되었습니다)."라고.    

 

367.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에 세존에게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다. 

 
"세존이시여, 동요(갈망)는 병이고, 동요는 종기고, 동요는 화살이고, 동요는 사람들을 이런저런 존재로 다시 태어남을 이끕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높고 낮은 태어남을 겪습니다(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도록 끌고 다닙니다). 세존이시여, 여기 밖의 다른 사문·바라문에게서는 허락을 얻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저에게 질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는데) 세존께서는 저에게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잠재해 있었던 의심과 불확실의 화살은 뽑혔습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이런 질문을 다른 사문·바라문에게 질문했던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질문을 다른 사문·바라문들에게 질문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신들의 왕이여, 그들은 어떻게 설명을 하였습니까? 그대가 곤란하지 않다면 말해 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세존이나 세존과 같으신 분이 앉아 계신 곳이라면 저는 곤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신들의 왕이여, 말해주십시오."
"세존이시여, 저는 숲 속 외딴 거주처에 산다고 생각되는 사문·바라문에게 가서 이런 것들을 질문했습니다. 저의 질문에 대해 그들은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설명하지 못하고 '존자는 누구십니까?'라고 저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을 받은 저는 '존자여, 나는 신들의 왕 삭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신들의 왕이여, 존자는 어떤 업을 지어서 이런 지위를(경지를) 얻었습니까?'라고 이어지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배운 대로 이해한대로 법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만큼으로 즐거워했습니다. '우리는 신들의 왕 삭까를 보았다. 우리가 질문한 것을 우리에게 설명했다.'라고. 확실히 제가 그들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저의 제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의 제자이고, 흐름에 든 자(豫流者)여서, (네 가지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 자, (해탈이) 확실한 자, 깨달음을 겨냥한 자가 되었습니다."

 

somanassapaṭilābhakathā (만족을 얻음의 이야기)

 

368.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지금 이전에 이와 같은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전에 이와 같은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다."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지금 이전에 이와 같은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은 것을 기억합니까?"

 

"세존이시여, 예전에 신들과 아수라들의 전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 전쟁에서 신들이 승리하고 아수라들은 패배하였습니다. 그런 저에게, 세존이시여, 그 전쟁에서 승리한 뒤 승리자로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제 신들에게 주어진 것과 아수라에게 주어진 것 둘 모두를 신들이 즐길 것이다.'라고. 
세존이시여, 저에게 그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은 것은 몽둥이가 함께한 영역이고 칼이 함께한 영역의 것이어서 염오(싫어하여 떠남)로 인도하지 못하고(이끌지 못하고), 탐욕의 사라짐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완전한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세존이시여, 저에게 세존의 법을 듣고서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은 것은 몽둥이가 함게한 영역이 아니고 칼이 함께한 영역의 것이 아니어서, 전적으로 염오로, 탐욕의 사라짐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완전한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합니다."    

 

369. "그러면 신들의 왕이여, 그대는 어떤 이유를 보기에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선언합니까?
"세존이시여, 여섯 가지 이유를 보았기에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저는 여기 [인다살라 동굴에서] 저는 신의 존재로 머물고 있습니다.

저는 다시 목숨을 얻었습니다. 존자여, 이렇게 아십시오.

 

세존이시여, 이런 첫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다시 태어남을 얻었다(punarayu ca me laddho)'는 것은 다시 다른 업의 과보로 나의 생명을 얻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죽었음(cutabhava)과 태어났음(upapannabhava)을 드러내고 있다.(DA.iii.739)  

 

천상의 몸에서 죽으면 비인간(非人間)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

당황하지 않고 저의 마음이 기뻐하는 모태에 들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두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그런 저는 혼란스럽지(미혹하지) 않은 지혜로 머물고, 가르침들을 좋아할 것입니다.
바른 방법으로 빈틈없이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물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세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만약 제가 바른 방법으로 실천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완전한 지혜로 머물 것이고, 그것은 (인간으로는)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네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인간의 몸에서 죽으면 저는 인간의 목숨이 끊어진 뒤에

신들의 세상에서 최상의 신이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다섯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더욱 뛰어난 신들인 명성을 가진 색구경경천이 있는데

이것이 윤회하는 저의 마지막 거처가 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여섯 번째 이유를 보아서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여섯 가지 이유를 보았기에 저는 이런 만족을 얻고 기쁨을 얻음을 선언합니다.


370.
사유가 끝나지 않았고, 의심과 불확실을 가진  
저는 여래를 찾아서 오랜 시간을 방랑하였습니다. 

외딴곳에 머무는 사문들에 대해 아마도 깨달은 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저는 그들을 섬기기 위해 갔습니다.

‘어떻게 성취하고, 어떻게 실패합니까?’라고
질문받은 그들은 길과 실천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신들의 왕 삭까가 왔다고 그들이 저를 알았을 때
그들은 ‘무엇을 행한 뒤에 신들이 왕 삭까가 되었습니까?’라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그들에게 사람들에게 들은 법을 들은 대로 설하였습니다.
‘우리는 신들의 왕을 보았다.’라며 그들은 즐거워했습니다.

세존을 보았을 때 의심을 완전히 건넜습니다.
깨달은 분을 존경하는 저는 오늘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갈애의 화살을 꺾은 분, 대적할 자 없는 분이며
대웅(大雄)이며 태양의 후예이신 세존께 저는 예배합니다.

존자시여, 신들이 범천에게 행하는 것처럼
오늘 저희는 당신께 행합니다. 당신께 스스로 행합니다.

오직 당신께서 깨달은 분이고, 당신이 위없는 스승입니다.
신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당신께 대적할 자는 없습니다.”

371. 그리고 신들의 왕 삭까는 간답바의 아들 빤짜시카에게 말했다.
"그대 빤짜시카여. 그대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대가 먼저 세존을 기쁘게 해드렸기 때문에, 빤짜시카여, 나중에 우리가 세존·아라한·정등각을 친견하러 올 수 있었다. 나는 필요한 때에 그대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그대는 간답바의 왕이 될 것이다. 그대가 그토록 원하던 태양과 같이 밝은 밧다를 그대에게 줄 것이다."라고.


그러고 신들의 왕 삭까는 손으로 땅을 짚고 세 번 감흥어를 읊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예경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예경합니다.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께 예경합니다." 

 

이 설명이 설해지고 있을 때 신들의 왕 삭까와 8만의 다른 신들에게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는 티끌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법안, 法眼]이 생겼다. 이렇게 신들의 왕 삭까는 질문하였고, 그에게 세존께서는 설명하셨다. 그래서 이 설명은 삭까의 질문이라고 명명되었다.


 
삭까의 질문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