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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2. 대념처경(大念處經.Mahāsatipaṭṭhānasuttaṃ)

실론섬 2014. 4. 13. 07:00

uddeso (서언)

 

37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루에서 깜마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라고. 그러자 비구들도 받들었다. "세존(존귀하신 이여)이시여'"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석서에서는 꾸루지방에서 「대념처경」을 설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꾸루(Kuru) 지방 주민들은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꾸루 지방의 비구와 비구니, 청신사와 청신녀들은 아주 좋은 기후 등의 조건을 갖추어 살고 있었다 한다. 적당한 기후 조건 등으로 인해 그곳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항상 건전했다고 한다. 그들은 몸과 마음이 건전하고 지혜의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이 있었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심오한 법문을 파악할 능력을 가졌음을 보시고 아라한과를 얻는 것에 대해서 21가지로 명상주제를 담아 이 심오한 법문인 「대념처경」을 설하셨던 것이다."(DA.iii.741)    

 

373.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이 길(道)은 중생들을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괴로움(고.苦)과 고뇌(우.憂)의 사라짐을 위한, (옳은)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길(magga.道)란 것은 어떤 뜻에서 길인가? 열반으로 간다는 뜻에서, 열반을 원하는 자들이 가야 한다는 뜻에서 길이다."(DA.iii.745)
*주석서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로 '유일한 길'의 의미를 설명한다.
"(1) '비구들이여, 이것은 유일한 길이어서 두 갈래로 가라지지 않았다.'고 그뜻을 보아야 한다.
(2) 혹은 '혼자서 가야 한다.(ekena ayitabbo)'고 해서 유일한 길(ekayano)이다. '혼자서'라는 것은 무리(gana)짓는 것을 버리고 홀로 머무는 한적한 마음으로라는 말이며, '가야 한다.'라는 것을 길을 따라가야 한다. 혹은 '이 길을 따라서 간다.'는 말로써 윤회로부터 열반으로 간다는 뜻이다.
(3) 한 사람의 길이 유일한 길이다. '한 사람의'라는 것은 '최고로 수승한 분의'라는 말로 모든 존재들 가운데 최고로 수승하신 세존이시다. 그러므로 세존의 길이라고 말한 것이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이 길을 따라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세존의 길이다. 그분께서 일으키셨기 때문이다. 
(4) 혹은 '간다.'고 해서 '길'이다. '가다, 나아가다'라는 뜻이다. 하나에 있는 길이라고 해서 유일한 길이다. '이 법과 율에 존재하는 것이며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5) 하나를 향해서 간다(ekam ayati)고 해서 유일한 길이다. 처음에는 여러 방면으로 수행하는 바법이 존재하지만 결국은 하나인 열반으로 간다는 말이다."(DA.iii.743)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sattanam visuddhiya)'라는 것은 탐욕(raga) 등의 오염원들로 인해 더렵혀진 중생들이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는 말이다."(DA.iii.745)
*"(옳은) 방법을 얻기 위한(nayassa adhigamaya)에서 방법이란 성스러운 팔정도를 말한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예비단계이며 세간적인 마음챙김의 확립인 이 길을 닦으면 출세간도를 얻게 된다. 그래서 '방법을 얻기 위한'이라고 말씀하셨다."(DA.iii.750)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nibbanassa sacchikiriyaya)라는 것은 갈애라는 욕망(vana)이 없기 때문에 열반이라는 이름을 얻은 불사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것을 스스로 체득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길을 닦으면 순차적으로 열반을 실현한다. 그래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DA.iii.751)
*네 가지 마음챙김을 닦고 많이 실천하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칠각지)들을 성취한다.(「출입식념경」M118)"라는 등에서 마음챙김이 바로 마음챙김의 확립이라고 설하셨다. 이 뜻은 다음과 같다. 
①일으켜 세운다(patthati)라고 해서 확립이다. '일으킨다, 건넌다, 앞으로 간다, 펼친다.'는 뜻이다. 마음챙김이 바로 확립이다. ②혹은 대상을 기억한다는 뜻에서 마음챙김이고 확립한다는 뜻에서 확립이다. 이처럼 마음챙김과 확립이기 때문에도 마음챙김의 확립이다."(DA.iii.753)
*원문에서는 '마음챙김의 확립들'이라고 복수로 나타난다. 여기에 대해서 주석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왜 마음챙김의 확립들'이라는 복수를 사용하는가? 마음챙김이 많기 때문이다.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 마음챙김은 복수이다. 그러면 길(magga)는 왜 단수인가? '길(도)'이라는 뜻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마음챙김도 길이라는 뜻에서는 하나가 된다."(Ibid)  
주석서는 계속해서 "그런데 왜 세존께서는 많지도 적지도 않게 네 가지만으로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하셨는가?"라고 묻고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1) 제도될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서이다. [세존께서는] ①갈애의 기질을 가진 자 ②사견의 기질을 가진자 ③사마타의 길을 가는 자 ④위빳사나의 길을 가는 자 등 제도될 사람들에 대해 둔하고 예리함을 기준으로 두 부류씩 나누셨다. 
①갈애의 기질을 가진 둔한 자에게는 조대(粗大)한 몸(身)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예리한 자에게는 미세한 느낌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청정에 이르는 길(visuddhimagga)이라고 설하셨다.
②사견의 기질을 가진 둔한 자에게는 지나치게 세분되지 않은 마음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예리한 자에게는 아주 세분된 심리현상(법)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이 확립이 청정에 이르는 길(도)이라고 하셨다.
③사마타의 길을 가는 둔한 자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표상을 얻는 첫 번째인 몸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예리한 자에게는 거친 대상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두 번째인 느낌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청정에 리는 길이라고 하셨다.
④위빳사나의 길을 가는 자도 둔한 자에게는 지나치게 세분되지 않은 대상인 세 번째인 마음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이, 예리한 자에게는 아주 세분된 대상인 네 번째인 법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이 확립이 청정에 이르는 길이라고 설하셨다. 이처럼 많지도 적지도 않게 네 가지만을 설하셨다. 
(2) 혹은, 깨끗하고 즐겁고 항상하고 자아라는 전도된 인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네 가지로 설하셨다. 몸은 부정(不淨)하다. 거기에 대해서 깨끗하다는 전도된 인식으로 헤매는 것이 중생들이다. 그들에게 여기에 대한 부정함을 보여줌으로써 그 전도된 인식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첫 번째인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을 설하셨다. 비록 느낌과 마음과 법을 각각 즐겁고 항상하고 자아라고 움켜쥐더라도 느낌은 괴로움이고 마음은 무상하고 법들은 무아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들에 대해서 즐겁고 항상하고 자아라는 전도된 인식으로 헤맨다. 그들에게 괴로운 사태 등을 보여줌으로써 그 전도된 인식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나머지 세 가지를 설하셨다. 이와 같이 깨끗하고 즐겁고 항상하고 자아라는 전도된 인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많지도 적지도 않게 네 가지만을 설하셨다고 알아야 한다."(DA.iii.754)    

 

어떤 네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근면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bhikkhu)라는 것은 도닦음(patipatti)을 성취할 사람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물론 신들이나 인간들도 도를 이룰 수 있지만 비구가 되는 것이 도를 닦는데 가장 수승하다고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그리고 도를 닦는 자는 누구나 비구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도닦음을 통해서도 비구의 신분을 보기 때문에 '비구'라고 말씀하셨다. 도를 닦는 자는 신이든 이간이든 모두 비구라는 명칭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말씀하셨다."(DA.iii.755)  
*"몸에서(kaye)라는 것은 '물질로 된 몸에서(色身.색신)'라는 뜻이다. 여기서 물질로 된 몸을 머리털, 몸털, 손발톱, 치아 등 신체 각 부분들의 집합(samuha)이라는 뜻에서 까야(kaya, 몸)'라고 지칭한다. 마치 코끼리 떼(hatthikaya)나 마차의 무리(rathakaya) 등에서 [까야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것처럼."(DA.iii.756)  
*"'몸에서'라고 말고 또 다시 '몸을 관찰하며(따라가며 보면서)'라고 몸이라는 단어를 취한 것은 (1) [대상이] 섞이지 않도록 확정 짓는 것과 단단하게 덩어리진 것을 분해하는 것 등을 보이기 위해서라고 알아야 한다. 즉
①몸에서 느낌이나 마음이나 법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몸만을 관찰한다(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그러므로 몸이라는 대상에서 몸을 관찰하는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대상이] 섞이지 않도록 확정 짓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②아울러 몸에서 사지나 부분을 떠나서 [전체로] 하나의 상태(ekadhamma)로도 관찰하지 않고, 머리털. 몸털 등을 떠나서 여자와 남자로도 관찰하지 않는다. 여기서 머리털, 몸털 등은 사대와 사대에서 파생된 물질의 덩어리라 불리는 몸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을 떠나서 [전체로] 하나의 상태라고 관찰하지 않는다. 
마치 구성요소를 관찰하듯이 사지나 부분들의 집합으로 관찰한다.
마치 도시를 구획별로 관찰하는 것처럼 머리털과 모털 등의 집합으로 관찰한다.
마치 파초의 줄기와 잎과 껍질을 분리하듯이, 빈주먹을 펴듯이, [몸을] 오직 근본물질과 파생된 물질의 덩어리로 관찰한다.
(2) 혹은 몸에 대해서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거머쥘 만한 그 어떤 것도 보지 않고 오히려 머리털, 몸털 등 여러 것의 집합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머리털 등의 현상의 집합이라 불리는 몸을 관찰한다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
(3) 나아가서 "이 몸에서 무상함을 관찰하고 항상함을 관찰하지 않는다."는 등의 순서대로 「무애해도」에 전해오는 방법인 무상의 특징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특징들을 가진 집합이라는 몸을 관찰하기 때문에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고 그 뜻을 보아야 한다."(DA.iii.756-757)
*"세상에 대한이란 '바로 그 몸에 대한'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몸은 무너진다는 뜻에서(lujjana-palujjantten) 세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지 몸에 대한 탐욕(욕심)과 싫어하는 마음만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느낌 등에 대해서도 버린다. 그러므로 "[나 등으로] 집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들도 또한 세상이다."(Vbh.195)라고 위방가에서 설하셨다."(DA.iii.758)  

*"세상에 대한(loke)이란 '바로 그 몸에 대한'이란 뜻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몸은 무너진다는 뜻에서(lujjana-palujjanatthena) 세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단지 몸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만을 버린다는 것이 아니라 느낌 등에 대해서도 버린다. 그러므로 "[나 등으로] 집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오취온) 들도 또한 세상이다."(Vbh.195등)라고 위방가(분별론)에서 설하셨다."(DA.iii.758)
*"탐욕(욕심, abhijjha)은 감각적 쾌락을 포함하고 싫어하는 마음(domanassa)은 악의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섯 가지] 장애(오개)에 포함된 이 두 가지 강한 법을 보여줌으로써 장애를 버리는 것을 설하신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DA.iii.758)
*"근면하고(atapi)라는 것은 삼계에서 오염원들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근면함이며 이것은 정진의 다른 이름이다. 근면함이 그에게 있기 때문에 '근면한 자'이다."(DA.iii.758)
*"분명하게 알아 차리고(sampajana)란 분명하게 알아차림(sampajanna)이라는 지혜(nana)를 구족한 것이다."(Ibid)
*"마음챙기는 자(satima)라는 것은 몸을 철저하게 파악하는(pariggahika) 마음챙김을 구족한 자라는 뜻이다. 그는 이 마음챙김으로 대상을 철저하게 거머쥐고 지혜로써 관찰한다. 왜냐하면 마음챙김이 없는 자에게 관찰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마음챙김은 모든 곳에 유익하다고 나는 말한다.(S.v.115)" 그러므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관찰하면서) 머문다.'고 여기서 몸을 관찰하는 마음챙김의 확립을 말씀하셨다."(Ibid)

*주석서는 이렇게 네 가지로 마음챙김을 설하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구니 만드는 숙련공은 거친 돗자리와 섬세한 돗자리와 상자와 바구니와 자루 등의 가재도구들을 만들고자 할 때 큰 대나무 하나를 네 등분으로 자른 다음에 그 각각의  대나무 토막을 다시 쪼개어서 그런 가재도구를 만든다. 그와 같이 세존께서도 마음챙김의 확립을 가르치시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형태의 수승함을 터득하게 하시려고 하나인 바른 마음챙김(samma-sati,정념, 正念)을 가지고 먼저 대상에 따라 그것을 네 등분으로 자르셨다. 그래서 '네 가지 마음챙김이 있나니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관찰하면서) 머문다.'라는 등의 방법으로 설하신 것이다."(DA.iii.761-762)    

 

kayanupassana anapanapabbam(신념처(몸의 관찰)-들숨날숨(호흡)에 대한 마음챙김)


374.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숲(아란냐)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거나, 빈 집으로 간 비구는 가부좌를 하고 몸을 반듯하게 세운 뒤, 면전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그는 오직 마음을 챙기며 숨을 마시고, 마음을 챙기며 숨을 내쉰다.

 

*"비구의 마음은 [출가하기 이전에] 실로 오랜 세월을 형상 등의 대상들에 산만해져 있어서 명상주제를 챙기는 과정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사나운 황소에 멍에를 멘 달구지가 길을 벗어나서 달려가는 것과 같다. ··· 이 비구도 오랜 세월을 형상 등의 대상들이라는 맛난 것을 마시면서 자란 사나운 마음을 길들이고자 하면 형상 등의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숲이나 나무 아래나 빈 방으로 들어 가서 거기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대상이라는 불리는 그 기둥에 마음챙김의 고삐를 매어 묶어야 한다. 그러면 그 마음은 이리저리 날뛰더라도 오랫동안 탐닉하던 대상을 얻지 못하게 되고 마음챙김의 고삐를 자르고 도망칠 수 없어서 이제 근접 [삼매]와 본 [삼매]를 통해서 그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대상을 의지하여 앉거나 눕는다. ···   
이것이 그의 수행에 어울리는 거처이다. 그래서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기에 적절한 거처를 취하는 것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DA.iii.762)
나아가서 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출입식념처, 出入息念處)은 몸의 관찰 가운데서도 아주 섬세하고 모든 부처님과 벽지불과 성문들이 특별함을 증득하여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기초가 된다. 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은 여자나 남자나 코끼리나 말 등의 소리가 시끄러운 마을을 떠나지 않고서는 성취하기가 쉽지 않다. 소리는 선(禪)의 가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을이 없는 숲에서는 수행자가 쉽게 이 명상주제를 거머쥐고 들숨날숨을 통해 제4선에 이르고 그 선을 기초로 삼아 상카라(행)들을 명상하고서 가장 높은 과위인 아라한과에 이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적절한 거처를 보이기 위해 세존께서 '숲 속에 가거나'라고 시작하셨다."(DA.iii.763)     
*"전면에 마음챙김을 확립하고: 명상주제를 향하여 마음챙김을 두고, 혹은 "접두어 pari(둘레에, 원만히)는 철저히 파악한다는 뜻이고, mukham(입, 얼굴)은 출구의 뜻이며, sati(마음챙김)은 확립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parmukham satim(철저히 파악하여 출구가 되는 마음챙김)이라고 설했다."(Ps.I.176) 이와 같이 「무애해도」에서 설한 방법에 따라서도 이 뜻을 알아야 한다. 간략히 설하면 '철저히 파악하여 [반대되는 심리현상인 잊어버림으로부터] 출구인 마음챙김을 닦고'라는 뜻이다."(「청정도론」VIII.161)   

 

① 길게 마실 때에는 '길게 마신다'고 알아 차린다. 길게 내쉴 때에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 차린다. 
② 짧게 마실 때에는 '짧게 마신다'고 알아 차린다. 짧게 내쉴 때에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 차린다. 
③ '온 몸을 느끼면서 마실 것이다'고 익힌다. '온 몸을 느끼면서 내쉴 것이다'고 익힌다. 
④ '육체적 현상(身行.신행)을 가라앉히면서 마실 것이다'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쉴 것이다'고 익힌다. 

 

얘를 들면, 비구들이여, 숙련된 도공이나 그의 제자가 길게 돌리면서 '길게 돌린다.'라고 분명히 알고, 짧게 돌리면서 '짧게 돌린다.'라고 분명히 안다(꿰뚫어 안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① 길게 마실 때에는 '길게 마신다'고 알아 차린다. 길게 내쉴 때에는 '길게 내쉰다'고 알아 차린다. 
② 짧게 마실 때에는 '짧게 마신다'고 알아 차린다. 짧게 내쉴 때에는 '짧게 내쉰다'고 알아 차린다. ③ '온 몸을 느끼면서 마실 것이다'고 익힌다. '온 몸을 느끼면서 내쉴 것이다'고 익힌다. ④ '육체적 현상(身行.신행)을 가라앉히면서 마실 것이다'고 익힌다. '육체적 현상을 가라앉히면서 내쉴 것이다'고 익힌다.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안으로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길게 돌리면서(digham va anchanto)라는 것은 큰 붑ㄱ의 가죽 등에 새길 때에 손과 발을 펴서 길게 끌어당기는 것을 말한다. 짧게 돌릴면서라는 것은 상아통과 바늘통에 새길 때에 짧게 끌어당기는 것을 말한다."(DA.iii.764)
*"이와 같이 안으로(iti ajjhattam va)라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 대해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DA.iii.765)  
'안으로(ajjhattam)'라는 것은 이미 획득된 자기자신 쪽 방향으로라는 의미이다.
*"혹은 밖으로(bahiddha va)라는 것은 남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 대해서이다."(Ibid)
'밖으로(bahiddha)'라는 것은 타인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자신을 타인으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호흡이나 행동이나 혹은 심리상태를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즉 '그는 거기서 바르게 삼매에 들고 고요하게 되어 밖으로 남의 몸에 대해서 지와 견을 가지게 됩니다.'라는 것이다. 안으로 삼매에 들고 밖으로 지와 견이 생겨난다. 이것이 위빳사나이다.  
*"혹은 안팎으로(ajjhatta-bahiddha)라는 것은 때로는 자신의 들숨과 날숨, 때로는 남의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수행자의 마음이] 아주 능숙해진 명상주제를 내려놓지 않고 [안팎으로] 움직이는 때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팎으로 따라가며 보는] 이 두 가지는 같은 시간엔(ekasmim kale) 일어나지 못한다."(Ibid)  
*"혹은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samudayadhammanupassi va)라는 것은 마치 대장장이의 자루와 풀무와 적절한 노력을 조건하여 바람이 계속해서 움직이듯 비구는 육체아 콧구멍과 마음을 조건하여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이 계속해서 움직인다. 몸 등의 현상을 일어나는 현상이라 한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혹은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라고 설하셨다."(Ibid)  
*"혹은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라는 것은 마치 자루를 치워버리거나 풀무가 부서지거나 적절한 노력이 없으면 그 바람은 생기지 않듯이 몸이 무너지고 콧구멍이 부서지거나 마음이 소멸하면 들숨과 날숨이라는 몸은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몸 등이 소멸할 때 들숨과 날숨도 소멸한다.고 보면서 '혹은 몸에서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라고 설하셨다."(Ibid)  
*"'몸이 있다.'라고 하는 것은 다만 몸이 있을 뿐이고 중생도 없고 인간도 없고 여자도 없고 남자도 없고 자아도 없고 자아에 속하는 것도 없고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어느 누구도 없고 누구의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마음챙김을 확립한다."(Ibid)  
*"~때까지(yavad eva)라는 것은 목적을 한정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런 말이다. 이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은 다른 것을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지혜를 위하여, 계속해서 더 넓고 더 높이 지혜를 키우고 마음챙김을 크게 하기 위해서, 즉 마음챙김과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증장하기 위해서라는 뜻이다."(DA.iii.766)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anissito ca vilharati)라는 것은 갈애와 견해에 의지하던 것을 이제 의지하지 않고서 머문다[는 뜻이다.]"(Ibid) 여기서 견해로 옮긴 원어는 ditthi이다. 주석서에서 ditthi가 별다른 설명이 없이 쓰일 때는 대부분 삿된 견해(miccha-ditthi, 사견)를 뜻한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 것도 움켜쥐지 않는다(na ca kinci loke upadiyati):세상에서 물질이나 느낌이나 인식이나 의도들이나 혹은 의식을 '이것은 나의 자아라거나 자아에 속하는 것'이라고 움켜쥐지 않는다."(Ibid)  
*"그가 이와 같이 닦을 때 들숨과 날숨을 표상으로 하여 네 가지 선(禪)이 일어난다. 그는 선으로부터 출정하여 들숨과 날숨이나 혹은 선의 구성요소들을 파악한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을 닦는 자는 "이 들숨과 날숨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토대를 의지한다. 토대란 육체(karaja-kaya)이고 육체란 네 가지 근본물질과 파생물질이다."라고 이와 같이 물질(rupa)을 파악한다. 그 다음에 동일한 대상을 가진 감각접촉을 다섯 번째로 하는 정신(nama)을 파악한다.
이와 같이 정신.물질을 파악한 뒤 그것의 조건을 탐구하면서 무명으로 시작하는 연기를 본다. "이것은 참으로 조건과 조건 따라 생긴 법일 뿐이지 중생이나 인간이라 할 어떤 것도 없다."라고 의심을 건너서 조건지워진 정신.물질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제기하여 위빳사나를 증장시키면서 순차적으로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것이 비구가 아라한까지 되는 출구가 된다.   
선을 닦는 자도 "이 선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을 의지하는가? 토대를 의지한다. 토대란 육체이다. 선의 구성요소는 정신이고, 육체란 물질이다."라고 정신.물질을 구분한 뒤 그것의 조건을 탐구하면서 무명으로 시작하는 연기를 본다. "이것은 참으로 조건과 조건 따라 생긴 법일 뿐이지 중생이나 인간이라 할 어떤 것도 없다."라고 의심을 건너서, 조건지워진 정신.물질에 대해 [무상.고.무아의] 삼특상을 제기하여 위빳사나를 증장시키면서 순차적으로 아라한과를 얻는다. 이것이 비구가 아라한까지 되는 출구가 된다."(DA.iii.764)  
"여기서 들숨과 날숨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마음챙김은 괴로움의 진리이다. 그 [마음챙김을] 일어나게 한 이전의 갈애는 일어남의 진리이다. 이 둘 생기지 않음이 소멸의 진리이다. 괴로움을 철저히 알아 일어남을 버리고 소멸을 대상으로 가지는 성스러운 도가 도의 진리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로써 노력하여 적멸을 얻는다. 이것이 들숨과 날숨을 통해서 입문한 비구가 아라한까지 되는 출구가 된다."(DA.iii.766)   


kāyānupassanā iriyāpathapabbaṃ (신념처-네 가지 자세)

 

375.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가면서 '나는 간다.'라고 분명히 알고, 서 있으면서 '나는 서 있다.'라고 분명히 알며, 앉아 있으면서 '나는 앉아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누워있으면서 '나는 누워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또한, 몸이 어떤 자세를 취하든 그것을 분명히 안다.

 

*"서리라고 마음이 일어나면 그것은 바람을 생기게 하고 바람은 암시를 생기게 하여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의 요소의 움직임에 의해서 온몸이 아래로부터 곧게 서는 상태를 '서는 것'이라 부른다." 나머지 자세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으로 설명한다.(DA.iii.767)     
*"그가 이와 같이 꿰뚫어 알 때 '중생이 가고 중생이 선다고 말하지만 참뜻은 중생이라 할 어떤 이가 가거나 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일컫게 된다. 이것은 마치 '수레가 가고 수레가 선다.'라고 말하지만 수레라고 이름 붙일 어떤 것이 가거나 서는 것이 아니라 네 마리 소에 멍에를 매어 솜씨 좋은 마부가 몰 때 '수레가 가고 수레가 선다.'라고 말하지만 수레라고 이름 붙일 어떤 것이 가거나 서는 것이 아니라 네 마리 소에 멍에를 매어 솜씨 좋은 마부가 몰 때 '수레가 가고 수레가 선다.'라는 단지 일상생활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몸은 [자신이 가고 서고 앉고 누우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레에 비유된다. 마음의 작용에서 생긴 바람은 [수레를 끌고 가는] 소에 비유된다. 그리고 마음은 마부에 비유된다."(Ibid)
*"또 그의 몸이 다른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든 간에 그 자세대로 꿰뚫어 안다는 것은 [몸의 자세를] 모두 포함하는 표현이다. 이것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형태로 몸이 놓여있더라도 각각의 형태대로 그것을 꿰뚫어 알아야 한다. 가는 형태를 통해서 '서 있다가 간다(thitam gacchati)'라고 꿰뚫어 알고, 서고 앉고 눕는 형태를 통해서 '서 있다가 눕는다.'라고 꿰뚫어 안다."(DA.iii.768)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kāyānupassanā sampajānapabbaṃ (신념처-분명하게 알아차림)


376. 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날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정지.正知) 행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가사와 발우와 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갈 때도(걸으면서)·설 때도(서면서)·앉을 때도·잠잘 때도·깨어있을 때도·말할 때도·침묵할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한다.    

 

*"나아갈 때도라는 것은 가는 것이고, 물러설 때도라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둘은 네 가지 자세에서 다 얻어진다. 우선 갈 때 앞으로 몸을 옮겨가는 것을 '나아간다(abhikkama)'라고 하며 되돌아오는 것을 '물러선다(patikkama)'라고 한다. 앉아있을 때 앉은 자가 자리의 앞부분을 향하여 움직이는 것을 '나아간다'라고 하며 뒷부분을 항해서 뒤로 움직이는 것을 '물러선다'라고 한다. 누워 있는 경우에도 이 방법이 적용된다."(MA.i.253)
*맛지마 니까야 주석서는 분명하게 알아차림을 다음의 넷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다.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 행한다는 것은 분명하게 알면서 모든 행위를 하거나 분명하게 아는 것만을 오직 행하는 것을 말한다. 그는 나아가는 것 등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차림을 행하며 어디서든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아차림에는 (1)이익됨을 분명하게 알아차림(satthaka-sampajanna) (2)적당함을 분명하게 알아차림(sappaya-sampajanna) (3)영역을 분명하게 알아차림(gocara-sampajanna) (4)미혹하지 않음인 분명하게 알아차림(asammoha-sampajanna)의 네 가지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있다."(MA.i.253)  
복주서에서는 미혹하지 않음인 분명하게 알아차림이란 나아감과 물러감 등에 대해서 미혹하지 않는 그 자체가 바로 분명하게 알아차림이라 설명하고 있다.(MAT.ii.315)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kāyānupassanā paṭikūlamanasikārapabbaṃ (신념처-몸의 31가지 부위에 대한 혐오)

 

377.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머리카락으로부터 내려가며, 이 몸에 대해 피부로 싸여져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은 관찰한다. '이 몸에는 머리카락·몸의 털·손발톱·치아·피부·살·힘줄·뼈·골수·신장(콩팥)·심장·간·근막(흉막)·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 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관절액·오줌이 있다.'라고.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밭벼·보리·콩·완두·기장·현미 같은 여러 가지 곡물을 가득 채운 양쪽에 주둥이가 있는 자루를 눈이 있는 사람이 풀고서 살펴볼 것이다. '이것은 밭벼, 이것은 보리, 이것은 콩, 이것은 완두, 이것은 기장, 이것은 현미다.'라고.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발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며, 머리카락으로부터 내려가며, 이 몸에 대해 피부로 싸여져 있고, 여러 가지 부정(不淨)한 것들은 관찰한다. '이 몸에는 머리카락·몸의 털·손발톱·치아·피부·살·힘줄·뼈·골수·신장(콩팥)·심장·간·근막(흉막)·지라·허파·창자·장간막·위· 똥·쓸개즙·가래·고름·피·땀·지방·눈물·기름·침·콧물·관절액·오줌이 있다.'라고.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kāyānupassanā dhātumanasikārapabbaṃ (신념처-사대(四大. 네 가지 근본물질)


378.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놓인 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별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계.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공기(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요소별로 따로따로 관찰할 때 중생이라는 인식은 사라진다. 요소를 의지하여 그의 마음은 안주한다."(DA.iii.770)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솜씨 좋은 백정이나 그의 조수가 소를 잡은 뒤에 큰길 사거리에 부위별로 분류해 놓고 앉아있을 것이다. 이처럼,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 몸을 놓인 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처해진 대로 놓여진 대로) 요소별로 관찰한다. '이 몸에는 땅의 요소(계.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공기(바람)의 요소가 있다.'라고. 

 

*마치 어떤 백정이나 그의 제자가 소를 잡아 부위별로 나눈 다음 사방으로 통하는 대로의 중심지라 불리는 큰길 네거리에 부분씩 나누어 놓고 앉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가 미 몸을 놓인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 - 네 가지 자세 가운데 어떤 하나의 형태로 놓여 있고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 '이 몸에 땅의 요소가 있고 ··· 바람의 요소가 있다.'고 관찰한다.   
무슨 뜻인가? 백정이 소를 키울 때도, 도살장으로 끌고 올 때도, 끌고 온 뒤에 묶어서 둘 때도, 잡을 때도, 잡혀 죽은 것을 볼 때도, 그것을 베어서 부분마다 나누지 않고서는 그에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뼈로부터 살을 발라내어 앉아있을 때 '소'라는 인식은 사라지고 '고기'라는 인식이 일어난다. 그는 '나는 소를 팔고, 그들은 소를 사가지고 간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고기를 팔고, 그들은 고기를 사가지고 간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이 비구가 이전의 재가자이었거나 출가를 하였어도 [명상주제를 들지 않은] 어리석은 범부일 때는 이 몸을 놓인 대로 자세를 취한 대로 덩어리를 분해하여 요소별로 따로따로 관찰하지 않는 이상 그것에 대해 중생이라거나 사람이라거나 인간이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다."(DA.iii.770)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kāyānupassanā navasivathikapabbaṃ (신념처-시체의 변화)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①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하루나 이틀 또는 사흘 된, 부풀고 검푸른 빛을 띠고 완전히 부패된 시체를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나의 이 육신도 이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와 같이 될 것이며, 이렇게 되는 것을 필할 수가 없다).'라고.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②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를 까마귀가 쪼아 먹고, 솔개가 쪼아 먹고, 독수리가 쪼아 먹고, 개가 뜯어 먹고, 호랑이가 뜯어 먹고, 표범이 뜯어 먹고, 자칼이 뜯어 먹고 갖가지 벌레 무리가 파먹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③비구는 묘지에 버려져 있는 시체가 힘줄이 남아있고, 살점이 붙어있는 채로 해골로 변해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④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힘줄만 남아있고, 살점이 없이 핏자국만 얼룩진 채 해골로 변해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⑤비구는 묘지에 버려져 있는 시체가 힘줄만 남아 있고, 살점이나 핏기가 없는 채 해골로 변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⑥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여기저기에 손뼈, 다리뼈, 발목뼈, 무릎 뼈, 정강이뼈, 넓적다리뼈, 등뼈, 어깨뼈, 목뼈, 머리뼈 등으로 흩어져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⑦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조개껍질의 색처럼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⑧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의 뼈가 일 년도 더되어 한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다시,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⑨비구는 묘지에 버려진 시체가 뼈마저 삭아서 가루로 되어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오직 이 몸을 비교한다.  '이 몸 또한 이런 것이고, 이렇게 될 것이며,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리라.'라고.  

 

이렇게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몸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몸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vedanānupassanā (수념처-느낌을 따라가며 봄)

 
380.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꿰뚫어 안다).

②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③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④개발되지 않은(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세속적인 즐거운 느낌은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⑤개발된(비세속적인) 즐거운 느끼면서 '나는 개발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⑥개발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개발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⑦개발된 괴로운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개발된 괴로운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⑧개발되지 않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개발되지 않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⑨개발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끼면서 '나는 개발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느낀다.'라고 분명히 안다.  

 

*"'여기서 누가 느끼는가?' 어떤 중생이나 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느낌은 누구에게 속하는가?' 느낌은 어떤 중생이나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작용으로 느끼는가?'-[형상, 소리 등의] 토대를 대상(vatthu-arammana)으로 하여 느낌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와 같이 분명히 안다. '이런저런 즐거운 토대 등을 대상으로 삼아 오직 느낌이 느낄 뿐이다.(vedanava vedayati) 그런 느낌의 일어남을 가져 나는 느낀다고 하는 단지 일상적인 어법(vohara)이 있을 뿐이다.'라고. 이와 같이 감각토대를 대상으로 하여 느낌이 느낀다고 숙고하면서 '즐거운 느낌을 느낀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알아야 한다."(Ibid)   

*"개발되지 않은 즐거움(samisam sukham)이란 것은 세속의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기쁜(somanssa) 느낌이다."(DA.iii.775)
*"개발된 즐거움(niramisa sukham)이란 것은 출가 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기쁜 느낌이다."(Ibid)
*"개발되지 않은 괴로움이란 세속 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고통스런(domanassa) 느낌이다."(Ibid)
*"개발된 괴로움이란 출가 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고통스런 느낌이다."(Ibid)
*"개발되지 않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란 세속 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평온한 느낌이다."(Ibid)
*"개발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음이란 출가 생활에 바탕을 둔 여섯 가지 평온한 느낌이다."(Ibid)
이상의 각각에 대해서 맛지마 니까야 여섯 감각장소의 분석 경(M137)은 '세간에 의지한 것'과 '출리에 의지한 것'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렇게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밖에 머물거나,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느낌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느낌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느낌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느낌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느낌들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cittaanupassana (심념처-마음의 따라가며 봄) 


381.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①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②탐욕이 떠난(없는) 마음을 '탐욕이 떠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③성냄이 있는 마음을 '성냄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④성냄이 떠난 마음을 '성냄이 떠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⑤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⑥어리석음이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이 떠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⑦위축된(수축된) 마음을 '위축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⑧산란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⑨광대한 마음(고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⑩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⑪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⑫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알아차린다. ⑬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⑭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⑮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⑯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분명히 안다.   

 

*"위축된(sankhitta) 마음이란 해태와 혼침에 빠진 마음이다. 이것은 움츠러든 마음이기 때문이다."(Ibid)
*"산란한(vikkhitta) 마음이란 들뜸과 함께한 마음이다. 이것은 흩어진 마음이기 때문이다."(Ibid)
*광대한(mahaggata) 마음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이다."(Ibid)
*광대하지 않은(amahaggata) 마음이란 욕계의 마음이다."(Ibid)
*"위가 있는 마음(sauttara)이란 욕계의 마음이다."(Ibid)
*"위가 없는 마음(anuttara) 마음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이다. 이 색계와 무색계 마음들 중에서 색계 마음은 아직도 위가 남아 있는 마음이고 무색계 마음은 더 이상 위가 없는 마음이다."(Ibid)
*"해탈한(vimutta) 마음이란 반대를 대체함으로 인해 해탈한 마음과 억압으로 인해 해탈한 마음이다."(Ibid)
*"해탈하지 않은(avimutta) 마음이란 이런 두 가지 해탈이 없는 것이다. 근절의 해탈, 편안히 가락앉음의 해탈, 벗어남의 해탈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Ibid)  
청정도론 복주서(Pm.401 청정도론 XIII.12 주석)에서는 "반대를 대체함에 의한 해탈은 욕계의 유익한 마음을, 억압에 의한 해탈은 위가 없는 마음(즉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을, 근절의 해탈은 도의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음의 해탈은 과의 마음을, 벗어남의 해탈은 열반을 뜻한다."라고 주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세간적인 처음의 두 가지 해탈만이 해당된다.     

 

이렇게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마음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마음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마음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마음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안에 머물거나라는 것은 이와 같이 탐욕이 있는 마음 등을 파악하여 매 순간마다 어떤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 모두를 주시하고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나 남의 마음에 대해서나 때로는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때로는 남의 마음에 대해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 것을 말한다."(DA.iii.777)  


dhammanupassana (법념처-법을 따라가며 봄) 

 

382.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가 법(현상)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장애(5개,五蓋)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어떻게, 비구들이여, 비구가 다섯 가지 장애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안에(자신에게, 내적으로) 감각적인 쾌락이 있을 때 '내 안에 감감적 쾌락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자신에게 감각적 쾌락이 없을 때 '내 안에 감각적 쾌락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인 쾌락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감각적인 쾌락이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감각적 쾌락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자기에게 감각적 쾌락(욕망)이 있을 때 '내게 감각적 쾌락이 있다.'고 꿰뚫어 알고, 감각적 쾌락이 없을 때 '내게 감각적 쾌락이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감각적 쾌락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감각적 쾌락을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감각적 쾌락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여기서 아름다운 표상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이 일어난다. 아름다운 표상이란, 아름다운 그 자체도 아름다운 표상이고 아름다운 대상도 아름다운 표상이다.  
지혜롭지 못한 주의란 잘못된 방법(anuaya)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바른 길을 벗어나서(uppatha)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무상한 것에 대해서 항상하독, 괴로움에 대해서 즐겁다고, 자아가 없는 것에 대해서 자아라고, 부정한 것에 대해서 아름답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이 일어난다."(Ibid)   


안에 성냄이 있을 때 '내 안에 성냄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성냄이 없을 때 '내 안에 성냄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성냄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성냄이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성냄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성냄을 일으키는 표상(적의를 일으키는 표상, patigha-nimitta)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에 성냄(악의)이 일어난다. 여기서 성냄 그 자체도 성냄을 일으키는 표상이고 성냄을 일으키는 대상도 성냄을 일으키는 표상이다. 지혜롭지 못한 주의란 모든 곳에서 같은 특징을 가진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악의가 일어난다. ··· <중략> ···    
자애(metta)를 통한 마음의 해탈에 대해서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서 이것을 제거한다. 여기서 자애란 본삼매와 근접삼매에 다 적용된다. 마음의 해탈은 오직 본삼매이다. 지혜로운 주의는 앞서 설한 특징을 가진다. 이런 것을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악의가 제거된다."(DA.iii.778-779)  

 

안에 해태와 혼침이 있을 때 '내 안에 해태와 혼침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해태와 혼침이 없을 때 '내 안에 해태와 혼침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해태와 혼침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해태와 혼침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나른함 등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해태와 혼침이 일어난다. 권태로움은 몸의 게으름을 뜻하고, 하품은 몸의 늘어짐을 뜻하고, 식곤증은 식사 후에 오는 피곤함을 뜻하고, 마음의 가라앉음은 마음의 무기력함을 뜻한다. 이들 나른함 등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많이 짓기 때문에 해태와 혼침이 일어난다. ··· <중략> ···      
[정진을] 시작하는 요소(arambhadhatu) 등에 대해서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해태와 혼침이 제거된다. 여기서 시작하는 요소라는 것은 처음 시작한 정진이다. 벗어나는 요소(nikkama-dhatu)라는 것은 게으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강하다. 분발하는 요소(parakkama-dhatu)라는 것은 더욱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보다 더 강하다. 이런 세 가지 정진들에 지혜로운 주의를 많이 기울이면 해태와 혼침이 제거된다."(DA.iii.780)   


안에 들뜸과 후회가 있을 때 '내 안에 들뜸과 후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들뜸과 후회가 없을 때 '내 안에 들뜸과 후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들뜸과 후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들뜸과 후회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들뜸과 후회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지혜롭지 못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들뜸과 후회가 일어난다. 고요하지 못함이라는 것은 고요하지 못한 모습인데 뜻으로는 들뜸과 후회이다. 여기에 대해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많이 짓기 때문에 들뜸과 후회가 일어난다. ··· <중략> ···       
삼매라고 불리는 마음의 고요함에 대해 지혜로운 주의를 통해서 들뜸과 후회를 제거한다."(DA.iii.781)


안에 의심이 있을 때 '내 안에 의심이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의심이 없을 때 '내 안에 의심이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의심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의심이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의심이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의심스러운 것들에 대해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기울이는 자에게 의심이 일어난다. 의심스러운 것들이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의심을 하기 때문에 의심 그 자체이다. 여기에 대해서 지혜롭지 못한 주의를 많이 짓기 때문에 의심이 일어난다. ··· <중략> ···         
유익한 법(선법) 등에 대한 지혜로운 주의를 기울여서 의심을 제거한다."(DA.iii.782)

 

이렇게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dhammānupassanā khandhapabbaṃ (법념처-오온)


383.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 五取蘊)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집탁에 의한 온의 법들에서 법을 이어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물질이 있고, 이렇게 물질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물질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느낌이 있고, 이렇게 느낌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느낌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인식이 있고, 이렇게 인식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인식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상카라(행)들이 있고, 이렇게 상카라들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상카라들의 사라짐이 있다.
이렇게 의식이 있고, 이렇게 의식의 일어남이 있고, 이렇게 의식의 사라짐이 있다.'라고.

*"이것이 물질이다(iti rupam)라는 것은 이만큼이 물질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물질이 있지 않다라고 고유성질을 통해서 물질을 아는 것을 말한다. 느낌 등에 대해서도 이 방법은 적용된다. 여기서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물질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청정도론」의 「무더기의 해설」(XIV장)에서 설하였다."(Ibid)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rupassa samudayo)라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 등이 일어남으로써 다섯 가지 형태로 물질의 일어남이 있다는 말이다."(Ibid)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rupassa atthangamo)라는 것은 이와 같이 무명 등이 소멸함으로써 다섯 가지 형태로 물질의 사라지이 있다는 말이다. 느낌 등에 대해서도 이 방법은 적용된다. 여기서 이것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다. 상세한 것은 「청정도론」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지혜의 해설」(XX장 893dlgk)에서 설하였다."(Ibid)  

 

이렇게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오온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dhammānupassanā āyatanapabbaṃ (법념처-족쇄)

 

384.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의 법들에서 법을 이어 보면서 머무는가?

 

*"여기서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육내외처, 六內外處]의 법들에서라는 것은 눈.귀.코.혀.몸.마음이라는 이들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와 형상.소리.냄새.맛.감촉.법이라는 이들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를 말한다."(DA.iii.784)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알고, 형상들을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뜷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을 꿰뚫어 안다. 형상을 꿰뚫어 안다. 이 둘을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제거하는지 꿰뚫어 알며, 어떻게 하면 제거한 족쇄가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꿰뚫어 안다)

 

*"눈을 꿰뚫어 안다는 것은 눈의 감성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Ibid)
*"형상을 꿰뚫어 안다는 것은 [업.마음.온도.음식의] 넷에서 생긴 밖의 물질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Ibid)
*"이 둘을 연(緣)하여 일어난 족쇄도 꿰뚫어 안다는 것은 눈과 형상이라는 이 둘을 연(緣)하여 (1)감각적 쾌락의 족쇄 (2)적의의 족쇄 (3)자만의 족쇄 (4)사견의 족쇄 (5)의심의 족쇄 (6)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 (7)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 (8)질투의 족쇄 (9)인색의 족쇄 (10)무명의 족쇄라는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는데 이것을 역활과 특징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는 말이다.(여기서 설명하는 열 가지 족쇄는 아비담마의 방법에 따른 것이다. 경에서 설하는 족쇄와 아비담바에서 설하는 족쇄는 조금 다르다.)  
그러면 어떻게 일어나는가?
(1)눈의 문의 영역에 나타난 원하는 대상을 감각적 쾌락의 달콤함을 통해서 그것을 맛보고 즐길 때 그에게 감각적 쾌락의 족쇄가 일어난다. (2)원하지 않는 대상을 증오할 때 그에게 적의의 족쇄가 일어난다. (3)'나를 제외하고 다른 누가 이 대상을 분별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여길 때 그에게 자만의 족쇄가 일어난다. (4)'이 형상은 항상하고 견고하다.'고 움켜쥘 때 그에게 사견의 족쇄가 일어난다. (5)'이 형상이 참으로 중생인가, 아니면 중생의 것인가?'라고 의심할 때 그에게 의심의 족쇄가 일어난다. (6)'이것은 번영하는 존재에서 쉽게 얻어질 것이다.'라고 존재를 원할 때 그에게 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가 일어난다. (7)'미래에도 이런 계율과 의식을 받들어 행할 수가 있기를'이라고 계율과 의식을 받들 때 그에게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의 족쇄가 일어난다. (8)'오, 참으로 이 형상을 다른 사람들은 얻지 못하기를'이라고 시샘할 때 그에게 질투의 족쇄가 일어난다. (9)자신이 얻은 형상으로 남에게 인색하게 굴 때 그에게 인색의 족쇄가 일어난다. (10)이 모든 것과 함께 생긴 무지함을 통해서 무명의 족쇄가 일어난다."(Ibid)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라는 것은 전에 일어나지 않았던 열 가지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안다는 말이다."(Ibid)  
*"그러면 무슨 이유로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가? 사견.의심.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질투.인색이라는 이 다섯 가지 족쇄는 예류도를 [얻음에] 의해서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과 적의 두 가지 거친 족쇄는 일래도에 의해서, 미세한 것은 불환도에 의해서, 자만과 존재에 대한 욕망과 무명의 세 가지 족쇄는 아라한도에 의해서 미래에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DA.iii.785)   


귀를 꿰뚫어 알고, 소리들을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뚫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코를 꿰뚫어 알고, 냄새들을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뚫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혀를 꿰뚫어 알고, 맛들을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뚫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몸을 꿰뚫어 알고, 감촉들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뚫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마음을 꿰뚫어 알고, 법(法. 마음현상)들을 꿰뚫어 알고, 이 두 가지를 연(緣)하여 일어나는 족쇄를 꿰뚫어 안다. 일어나지 않은 족쇄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족쇄가 버려지면 버려졌다고 분명히 알며, 버려진 족쇄가 이후에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족쇄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dhammānupassanā bojjhaṅgapabbaṃ (법념처-(칠)각지)


385.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 요소(칠각지.七覺支)의 법들에서 법을 이어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라는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안에(그에게)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염각지.念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자기에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있다.'고 꿰뚫어 알고,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을 때 '내게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없다.'고 꿰뚫어 안다. 비구는 전에 없던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꿰뚫어 알고, 일어난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송요소를 어떻게 닦아서 성취하는지 꿰뚫어 안다.)  

 

*"마음챙김의 깨달음의 구성요소라는 것은 마음챙김이라 부르는 깨달음의 구성요소이다.
여기서 위빳사나를 시작하는 그때부터 수행자는 깨달음을 얻게 되므로 깨달음(sambodhi)이라 한다. 혹은 그는 마음챙김 등의 일곱 가지 법들의 조화(samaggi) 때문에 깨닫고, 오염원의 졸림에서 깨어나거나 [네 가지] 진리를 통찰한다. 그러므로 그 법의 조화로움이 깨달음이다.
그런 깨달음의 구성요소(tassa sambodhissa tassa va sambodhiya angam)라고 해서 깨달음의 구성요소(sambojjhangam,각지(覺支))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 부르는 깨달음의 구성요라고 한 것이다. 나머지 깨달음의 구성요소들에 대해서도 이 방법으로 단어의 뜻을 알아야 한다."(DA.iii.785-786)  


안에 법에 대한 선별(간택)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택법각지.擇法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법에 대한 선별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정진각지.精進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정진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안에 희열(기쁨)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희각지.喜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희열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안에 편안함(평온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경안각지.輕安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편안함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정각지.定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삼매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사각지.捨覺支)가 있을 때 '내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라고 분명히 알고,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을 때 '내 안에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없다.'라고 분명히 안다. 일어나지 않은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고, 일어난 평정으로 이루어진 깨달음의 요소가 늘어나 충만하면 충만했다고 분명히 안다.   

이렇게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dhammānupassanā saccapabbaṃ (법념처-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


386. 다시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사성제.四聖諦)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네 가지 성스러운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하게 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철저하게 안다.  

 

*"여기서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는 것은 갈애를 제외하고 삼계에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고유성질에 따라서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DA.iii.797)  
*"이런 괴로움을 생기게 하고 일어나게 하는 이전의 갈애를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꿰뚫어 알고, 이 둘이 일어나지 않는 열반을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꿰뚫어 알며, 괴로움을 철저하게 알고 일어남을 제거하고 소멸을 실현하는 성스러운 길을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고유성질에 따라서 꿰뚫어 안다는 뜻이다. 성스러운 진리의 설명은 청정도론 XVI장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졌다."(Ibid)  

 

dukkhasaccaniddeso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고성제.苦聖諦))

387.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가?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번민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이와의 만남은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괴로움이며,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함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오취온. 五取蘊)은 괴로움이다.  

388.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태어남인가?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태어남, 시작됨, 나타남, 자라남, 온(蘊)의 드러남, 터전(감각기관)의 획득 - 바로 이것을 태어남이라 한다.  

389.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늙음인가?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 속에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늙음, 노쇠, 치아빠짐, 피부의 주름, 나이의 다함(남은 수명이 다함), 감각기관들이 쇠퇴해지는 것 - 바로 이것을 늙음이라 한다.  

390.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죽음인가?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무리로부터 그렇고 그런 중생들의 사라짐, 이동, 파괴, 소멸, 죽음, 끝남, 오온의 파괴, 신체의 소진, 목숨의 근의 단절 - 바로 이것을 죽음이라 한다. 

391.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슬픔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에 연류되어 맞게되는 슬픔, 우수, 슬퍼함, 내적인 슬픔, 내적으로 가득한 슬픔, 마음의 고뇌와 슬픔의 화살이다. 바로 이것을 슬픔이라 한다. 

392.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비탄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에 연류되어 맞게되는 한탄, 비통, 비탄, 통곡, 통탄, 절규, 울부짖음, 지껄임, 멍한 지껄임, 공허한 지껌임 - 바로 이것을 비탄이라고 한다.

393.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괴로움인가? 
몸이 불쾌함으로서 몸의 괴로움,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의 괴로운 감각, 몸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서의 괴로운 느낌 - 바로 이것을 괴로움이라 한다.  

394.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근심인가? 
마음의 불쾌감으로서 마음의 괴로움,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 괴로운 감각,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불쾌감으로 괴로운 느낌 - 바로 이것을 고뇌라고 한다.  

395.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번민인가?
친족의 불행에 연류되거나, 재산의 손실에 연류되거나, 병고에 연류되거나, 계(戒)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견해의 훼손에 연류되거나,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불행에 따라가는,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의 고통스러운 법에 연류되어 맞게되는 오뇌, 우뇌, 불안, 번뇌, 불안에 빠짐 - 바로 이것을 번민이라고 한다. 

396.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사랑하지 않은 이와의 만남에서 오는 괴로움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마음에 들지 않고, 원하지 않으며, 유쾌하지 않은 시각, 소리, 향기,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이쪽의 불이익을 원하거나, 손해를 원하거나, 어려움을 원하거나, 안온하지 않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들과 만나거나, 동거하거나, 엮이거나, 관계를 맺는 것 - 바로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397.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에서 오는 괴로움인가?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마음에 들고, 원하며, 유쾌하게 하는 시각, 소리, 향기, 맛, 감촉을 지녔거나, 혹은 다시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이쪽의 이로움을 원하고, 이익을 원하고, 즐거움을 원하고,안온하게 되기를 원하는, 바로 그러한 이들, 즉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 친구, 동료, 친족, 친척들과 헤어지거나, 동거하지 못하거나, 엮이지 못하거나,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 - 바로 이것을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에서 오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398. 비구들이여, 그럼 무엇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인가? 
태어나게 되어있는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나는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태어남의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늙음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늙음의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늙음의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병듦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병듦의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병듦이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죽음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의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죽음의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번민의 법을 지닌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욕망이 일어난다. '아,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번민의 법이 없다면! 참으로 우리에게 슬픔, 비탄, 괴로움, 근심, 번민의 법이 오지 말았으면!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 바로 이것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한다.  

399. 비구들이여, 요컨대 그럼 어떻게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이 괴로움인가? 그것은 다음과 같다. 
물질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느낌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인식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상카라(행)들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 의식(식별)작용에 집착하여 이루어진 온이 있는바, 이들을 일컬어 요컨데 다섯 집착에 의한 온은 괴로움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다. 

samudayasaccaniddeso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
400.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가?  
그것은 태어남을 있게 하는 갈애로서, 기쁨과 탐욕과 더불어 여기저기에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있음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이다.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tatratatra-abhinandini)이란 어느 곳에서 몸을 받더라도 즐거워한다는 뜻이다."(DA.iii.800)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nha)란 존재를 열망함에 의해서 생긴 상견(常見, sassata-ditthi)이 함께 하는 색계와 무색계의 존재에 대한 탐욕과 선(禪)을 갈망하는 것의 동의어이다."(Ibid)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nha)라는 것은 단견(斷見, uccheda-ditthi)이 함께 하는 탐욕의 동의어이다."(Ibid)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갈애는 어디에서 생겨나려 하거나 생기는가? 이와 같은 갈애는 어디에서 머물려 하거나 머무는가? 
비구들이여,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세간에서의 눈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귀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혀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몸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마음(意)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은 사랑스러운 것이며 즐거운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코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혀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몸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접촉(닿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귀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코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혀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몸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눈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귀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코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혀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몸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마음의 접촉으로 일어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지각(想)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의도(思)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생겨나려 하거나 생긴다. 거기에 머물려 하거나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바로 괴로움의 발생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다. 

nirodhasaccaniddeso (법념처-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고멸성제.苦滅聖諦))
401.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바로 이러한 갈애로부터의 남김 없는 탐냄의 떠남, 소멸, 포기, 버림, 해탈, 무집착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이러한 갈애는 어디에서 끊어지려 하거나 끊기는가? 어디에서 소멸하거나 소멸하는가?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사랑스러운 모습과 즐겁게 하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세간에서의 눈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귀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코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혀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몸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마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코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혀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몸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식별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눈에 의한 접촉(닿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귀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코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혀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몸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마음에 의한 접촉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눈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코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혀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몸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마음의 접촉에서 생겨난 느낌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 시각대상(色)에 의한 지각(想)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지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 시각대상에 의한 의도(思)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의도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대한 갈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거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시각대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은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소리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냄새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맛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감촉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세간에서의 법(마음현상)에 의한 미세한 사유는 사랑스러운 모습에 관련되거나 즐겁게 하는 모습에 관련된다. 바로 거기에서 이러한 갈애는 끊어지려 하거나 끊긴다. 거기에서 소멸하려 하거나 소멸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의 바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이다.  

maggasaccaniddeso (법념처-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402.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인가? 
오직 이것,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삶),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바른 견해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사유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부터의] 떠남에 대한 사유, 성내지 않음에 대한 사유, 해치지 않음에 대한 사유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사유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로 부터 떠나는 것, 이간하는 말(중상모략)로 부터 떠나는 것, 거친 말(욕설)로부터 떠나는 것, 꾸며대는 말로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말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행위인가? 
살생으로부터 떠나는 것, 주지 않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는 것, 삿된 음행으로부터 떠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행동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생계인가? 
여기에 비구는, 삿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해 삶을 영위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생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여기 비구는, 아직 생겨나지 않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삿되고 섢지 않은 법을 끊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한 법을 생겨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이미 생겨난 선한 법을 바로 세우고, 혼란스럽게 않게 하며, 증장하고, 풍성케 하며, 닦고, 원만하게 하기 위하여 바램을 일으키고 노력하며 정진을 행한다. 마음을 잡아 힘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정진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따라가며(이어 보면서)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근면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알아차림과 마음챙김을 지닌 비구는, 세상에 대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서 머문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바른 삼매인가?  
여기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를 지닌, 멀어짐(분리)으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첫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곳에 고정되어,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두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세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즐거움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 네 번째 선정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바른 삼매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403. 이렇게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밖에 머물거나,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안팎에 머문다. 또는 일어나는 현상(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물거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법에 머문다. 또는 오직 지혜만이 있고 밀착된 마음챙김만이 있을 때까지, ‘법이 있다!’라고 마음챙김을 확고히 한다. 과정을 넘어서서 머물고(이제 그는 [갈애와 견해를] 의지하지 않고 머물고), 세상에서 아무것도 붙잡지(움켜쥐지) 않는다. 이렇게도, 비구들이여, 비구는 네 가지 성스러운 법들에서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이만큼이 21가지 명상주제이니 즉 (1)들숨날숨 (2)네 가지 자세 (3)네 가지 분명하게 알아차림 (4)31가지 몸의 형태 (5)사대를 분석함 (6)~(14)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 (15)느낌의 관찰 (16)마음의 관찰 (17)장애를 파악함 (18)무더기(온)을 파악함 (19)감각장소를 파악함 (20)깨달음의 구성요소를 파악함 (21)진리를 파악함이다. 이들 가운데서 들숨날숨과 31가지 몸의 형태와 아홉 가지 공동묘지의 관찰이라는 11가지는 본삼매에 드는 명상주제이다. 그런데 디가 니까야를 암송하는 마하시와(Mahasiva) 장로는 9가지 공동묘지의 관찰은 위험함을 관찰하는 것으로 설해졌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의 견해에 따르면 두 가지만 이 본삼매에 드는 명상주제이고 나머지는 모두 근접삼매에 드는 명상주제이다. 그러나 이 모든 명상주제에서 모두다 천착(abhinivesa)이 생기는가?라고 만약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네 가지 자세와 분명하게 알아차림과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에서는 천착이 생기지 않고 그 나머지 명상주제에서만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하시와 장로는 "이런 명상주제에서도 천착이 생긴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나에게 네 가지 자세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나에게 네 가지 분명하게 알아차림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나에게 다섯 가지 장애가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라는 식으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천착이 생긴다."라고 말했다."(DA.iii.805)   

          

404. 비구들이여, 누구라도 이 네 가지에 대한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을 7년 동안 바르게 닦고 익히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현생에서 최고의 지혜(아라한)를 얻거나 또는 집착이 얼마간 남아 있다면 불환과(아나가미)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든지 이 사념처를 6년 도안 바르게 닦고 익히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현생에서 최고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이 얼마간 남아있다면 아나함(불환과)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6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5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4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3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2년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1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라도 이 사념처를 7개월 동안이라도 바르게 닦고 익히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현생에서 최고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이 얼마간 남아 있다면 아나함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7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6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5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4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3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2개월이 아니어도 좋다. 비구들이여, 보름이 아니어도 좋다. 누구라도 이 사념처를 7일동안 이라도 바르게 닦고 익히면, 그는 두 가지 결실 중 한 가지를 기대할 수 있다. 바로 이 현생에서 최고의 지혜를 얻거나 집착이 얼마간 남아 있다면 아나함의 단계를 기대할 수 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라는 이 길(道)은 중생들을 청정을 위한, 슬픔(수.愁)과 비탄(비.悲)을 건너기 위한, 괴로움(고.苦)과 고뇌(우.憂)의 사라짐을 위한, (옳은) 방법을 얻기 위한,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을 연(緣)하여 말하였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 비구들은 즐거워하면서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내념처 경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