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 서원(誓願, praṇidhāna) 의식의 초기 불교적 모습에 대한 일고찰
최봉수 (불교학자)
• 목 차 •
Ⅰ. 머리말
Ⅱ. 서원의 중요성
Ⅲ. 대승불교의 서원의식
Ⅳ. 초기불교의 무원삼매(無願三昧)
Ⅴ. 초기불교의 성구(聖求)
Ⅵ. 초기불교의 결의 바라밀다(決意波羅蜜多)
Ⅶ. 「마하파리닙바나 숫타」의 서원
Ⅷ. 맺는 말
[한글요약]
서원은 가장 중요한 대승불교의 덕목 중 하나이다. 이미 대승의 주요 덕목을 열거해 놓은 열 가지 바라밀다 중 하나로 등장함을 보면 그 중량감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대승불교의 덕목은 사실 초기불교에서 그 배경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하므로, 서원도 초기불교에 그 기원 또는 배경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초기불교의 경설들을 살펴볼 때, 실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실이 드러난다.
우선 첫째로 ‘서원(paṇidhāna, praṇidhāna)’이라는 말 자체는 이미 많은 연구가들이 주목하듯이 초기불교에서는 그다지 긍정적인 덕목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원삼매(無願三昧) 무원해탈(無願解脫)로 이어지는 수행법과 그 결과에 주목해 볼 때 오히려 부정되어야 할 분위기마저 배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둘째로 ‘성구(聖求, ariya-pariyesana)’라는 표현이 초기불교에 출현하거니와, 이는 강렬한 서원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이다. 부처님이 출가 후 6년간 보살행을 전개해 나감에 있어서 근본 동기가 바로 ‘성구’라는 표현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성스런 것을 간절히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성구’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도 역시 ‘ 성구’할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그리고 셋째로 결의바라밀다(adhiṭṭāna-pāramitā)의 존재는 대승불교의 원바라밀다에 육박하는 무게로 다가온다. 결의 바라밀다의 결의에는 ‘의무(vata)’ 및 ‘서약(pratijñā)’의 뜻이 들어 있거니와, 성스런 것을 간절하게 구하면서[‘성구’] 아울러 반드시 이루어야할 ‘의무’처럼 그리고 반드시 지켜야 할 ‘서약’처럼 결의하라는 요청은 그대로 서원 의식으로 귀결된다. 즉 서원이라는 술어에 입각하여 고찰할 때 초기불교에 부정적 분위기가 느껴졌을 뿐이지, 서원 의식 또는 서원 정신은 오히려 강렬하고 활발하게 표출되는 것이 초기불교인 것이다.
그리하여 넷째로 부처님이 반열반에 즈음하여, 깨달은 직후의 사건의 하나를 회고하는 대목이 있거니와, 거기서 남녀 재가출가의 모든 불자들이 똑같이 불법 수행에 전념하기를 목적으로 두시고 아울러 전법에 나아가기를 목적으로 하신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결국 불자들은 단순히 자신의 해탈 열반은 물론 이웃의 해탈 열반까지 서원해야 한다는 뜻이 성립하고 마니, 여기서 초기불교 서원 의식의 절정을 보게 된다.
Ⅰ. 머리말
불교에는 많은 종교적인 덕목들이 선양되고 있지만 그중에서 서원의 중요성도 널리 설하고 있다. 본 한국정토학회에서 2007년도 가을 낙산사에서 개최한 학술세미나는 바로 그러한 서원의 중요성을 다시금 재인식하는 일환으로 개최되었을 것이다. 필자는 그 학회지를 통해 서원과 관련된 보다 학술적인 정보를 얻게 되었고 더욱더 서원의 중요성을 스스로에게 일깨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원 의식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가지면서 필자가 주로 전공하는 분야인 초기불교에서의 서원 의식을 좀 더 천착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토학회 제10집 학회지에서도 자세히 언급되고 있었지만 초기불교의 서원 의식에 대한 연구도 이미 의미 있는 수준으로 진행되어 있다. 여기에 필자가 그동안 살펴온 초기불교의 서원 의식과 관련된 정보를 좀 더 덧붙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왜냐면 기존의 연구가 서원을 뜻하는 팔리어인 파니디(paṇidhi, 범어로는 praṇidhi) 또는 파니다나(paṇidhāna, 범어로는 praṇidhāna)라는 말을 중심으로 살피거나, 서원(誓願), 본원(本願) 또는 원(願)이라는 술어가 나타나는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 온 것이 그간의 경향이었기에, 사실 초기 불교 서원 의식의 풍성함을 제대로 드러내는 데는 조금 미흡한 부분도 없잖아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글은 ‘원’이라는 술어 그 자체에서 좀 더 나아가, 의미 중심으로 초기 불교의 서원 의식을 살피는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 꽃 피는 서원 의식이 초기불교에서도 확고한 모습으로 이미 기원하고 있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성구(聖求, ariya-pariyesana)라는 술어의 의미와 결의(決意, adhiṭṭhāna)라는 술어의 의미를 통해 이들이 대승불교의 서원 의식을 초기불교에서도 잘 표출하고 있음을 새로이 소개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석가모니 부처님의 열반에 즈음하여 아난존자와 나눈 한 대화를 음미함으로서 초기불교의 서원 의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대승불교 서원 의식의 초기 불교적 모습에 대한 일고찰로 삼고자 한다. 그러면 먼저 서원의 중요성을 필자 스스로 느끼게 된 계기를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Ⅱ. 서원의 중요성
필자는 화엄부 경전을 읽으면서 한 부분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화엄경」 팔십권본으로 하자면 제 26품인 십지품 을 읽으면서 만나게 된 경우로서, 십지품 에는 주지의 사실이지만 보살 십지설(十地說)이 설해진다. 십지 보살이라고 하면 이미 [화엄경]에 의할 경우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의 보살계위를 거쳐서 도달하게 되는 지극히 심오한 보살의 계위이다.
그런데 필자가 의아하게 본 부분은, 그 외에도 몇 더 있지만, 특히 제2지 이구지(離垢地, vimalā bhūmi) 보살의 수행덕목이었다. 이구지 보살은 십선업(十善業)을 실천하는 단계로 설해지고 있다.1) 그런데 십선업은 초기불전에 의할 경우 가장 초보적인 실천법으로서 출가자는 물론 재가자들의 실천 법으로 흔히 제시되는 덕목이다. 그런 초보적인 실천 법을 어찌 그토록 깊은 경지의 십지 보살 중 제 2지인 이구지 보살의 수행 덕목으로 삼을 수 있는지가 필자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이구지 보살에 대한 십지품 의 한 대목을 보면서 왜 그런지에 대해 필자 나름의 이해를 조금 확립한 바가 있었다. 바로 섭선법계(攝善法戒)인 五종의 十선(善)을 말하는 대목이다.
“불자여, 이 보살 마하살이 또 생각하기를 ‘십악업은 지옥 또는 아귀 또는 축생에 태어나는 원인이며, ① 십선업은 인간 또는 천상,내지 색계 또는 무색계에 태어나는 원인이다. ② 또 이 상품 십선업을 지혜로 익히지만, 마음이 용렬한 까닭이며, 삼계를 두려워하는 까닭이며, 대비심이 없는 까닭이며,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까닭으로 성문승이 된다. ③ 또 상품 십선업을 청정하게 익히지만, 남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깨달은 까닭이며, 대비 방편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며, 깊은 연기법을 깨달은 까닭으로 독각승이 된다. ④ 또 상품 십선업을 청정하게 익히면서 마음이 한량없이 광대하고 자비를 구족하고 방편에 포섭되고 큰 서원을 내고 중생을 버리지 아니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 보살의 여러 지(地)를 깨끗이 다스리고 모든 바라밀다에서 익히므로 보살의 광대한 행을 이룬다. ⑤또 상상품 십선업으로는 온갖 것이 청정한 까닭이며, 내지 십력과 사무소외를 증득하는 까닭이며, 일체 부처님을 모두 성취하리니, 그러므로 내가 이제 십선을 평등하게 행하며 온갖 것을 갖추어 청정하게 하리니, 이런 방편을 보살이 마땅히 배울 것이로다.’라고 한다.”
똑같은 십선업을 실천한다고 하더라도 ① 초보적인 불자는 생천(生天)의 과보를 얻고, ② 삼계를 두려워하는 자는 성문승의 과보를 얻고, ③ 인연(=연기)법을 깨닫는 자는 독각승의 과보를 얻는다고 해석할 만하다. 여기에 더해 똑 같은 십선업을 실천한다 하더라도 ④ 자비와 방편과 서원을 지닌 자는 보살의 광대한 행을 이루고, 그 연장선상에서 ⑤ 부처님을 이루는 과보를 얻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되는경설이다.
여기서 ①번과 ④번을 집중적으로 비교해 보고자 한다. ①번의 경우는 십선업을 실천해서 생천의 과보를 얻고, ④번의 경우는 보살에 해당하는 경설인데, 같은 십선업을 실천해도 보살의 광대한 행을 이룬다고 하거니와, 그 까닭은 무엇일까? 초보적인 불자의 경우 생천을 목적으로 십선업을 짓기 때문에 십선업을 실천해서 생천의 과보를 얻지만, 보살의 경우는 경전의 표현대로 자비와 방편과 서원을 지닌 까닭에 보살의 광대한 행을 이루는 것이 아닐까? 특히 이중에서도 서원이 눈에 띈다. 왜냐면 주지하다시피 제2 이구지 보살 앞 단계인 제1 환희지(歡喜地, pramuditā-bhūmi) 보살의 지위에서는 바로 십대원(十大願)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서원은 몇 개만 뜻을 발췌해 말해보면 “①모든 부처님께 모든 공양구로 공양하기를 원하고, ②부처님의 교법을 모두 받들어 보호하기를 원하고… ⑩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고 성불하기를 원한다.” 등이다.
정리하면, 생천을 목적으로 십선업을 실천하면 생천의 과보를 얻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목적으로 십선업을 실천하면 비록 그 실천 덕목의 수준은 초보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성취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뭐하고 사느냐’라는 질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뭐하러 사느냐’라는 질문일 것이다. 나쁜 짓만 아니라면 정말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해야 한다. 중요한 건 나쁜 짓 아닌 그 어떤 직업에 종사한다하더라도, 그 직업을 통해 얻은 양식을 먹고 살되,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어냐 하는 것이 진정 그 삶을 결정짓는 요인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직업으로 높은 수익을 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단순히 자신과 일족의 안락한 삶을 추구하기만 한다면, 그런 삶보다는 비록 작은 수입이라도 그것으로 유지하는 삶의 시간을 할애해서 열반과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삶에, 분명 전자보다 더 큰 가치를 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목적의식이니,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사느냐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럴 때 불교에서는 그 목적의식을 서원이라고 하는 술어 속에 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진정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목적의식을 또한 서원이라는 술어로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런 서원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야 말로 불자로서의 삶을 결정짓는다고 생각하거니와, 그러기에 불교의 수많은 덕목 중에서도 서원의 가치는 재평가해야하며, 서원의 중요성은 더욱 선양 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Ⅲ. 대승불교의 서원의식
우리나라는 전통적인 대승불교문화권에 속해 왔고,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많은 덕목 중에 서원의 위상은 상당하기에 한국의 불자들은 서원에 대해 비교적 친숙하다 해야 할 것이다. 먼저 서원의 의미를 잠시 살펴보자. 사실 불교의 ‘원’ 또는 ‘서원’이 지닌 의미는 꽤 다양하여 불교외의 다른 종교에서 불교의 ‘원’에 해당하는 한 단어를 대응시켜 찾기는 어려울 지경이다. 필자가 볼 때 불교의 원에는 최소한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앞으로 본문에서도 살피겠지만, 첫째는 강렬한 소망이고, 둘째는 굳건한 다짐이며, 셋째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서원의 세 가지 요소라고 본다. 무언가를 강렬히 바라면서 아울러 그것을 이루고 말겠다는 지속적인 다짐이 동반되고 나아가 그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이 바탕에 깔릴 때 불교에서는 ‘원’을 세웠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물론 여기서 주의할 것은 소망과 다짐과 확신의 대상이 지니는 명분이다. 아무거나 강렬히 소망한다고 원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을 소망할 때 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글 은 초기불교에 입각해 제 5절에서 ‘성스러운 것’을 소구 소망할 때 비로소 원에 해당한다고 말하거니와, 화엄경의 입장에 서서 “중생회향이 전제된 ‘하고자 함, 바람, 구함’을 대승보살의 원(願) 내지 서원(誓願)이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은 그것은 소승적인 욕(欲)이라 할 수 있다.”라는 관점도 주목할 만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서원은 반야부 경전의 육바라밀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화엄부 경전의 십바라밀다에 가면 여덟 번째 바라밀다로 포섭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초기대승불교 경전에 속하는 반야부의 경우도 육바라밀다에는 원바라밀다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반야부 경전 중에서도 초기에 성립한 것으로 보이는 [금강경]의 경우 서원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보살 서약(bodhisattva-pratijñā)이라는 술어가 나타나 주목된다. 라집역 [금강경] 지경복덕분 에는 나오지 않지만, 범본 [금강경]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나타난다.
“또 보살 서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도 이 법문을 들을 수 없고 받들 수 없고 간직할 수 없고 외울 수 없고 해득할 수 없으니 그러한 경우는 없는 것이다.”
많은 번역자들이 이 단어를 보살의 서원이라고도 번역한다. 실제 서원이라는 말과 의미상 인접하여 나타나니 예를 들어, [극락장엄경] 제10단의 한 경설에는 “다르마아카라 비구는 저 로케슈와라 여래의 앞에서 … 그와 같은 특별한 서원을 자세히 말씀드리고, 있는 그대로의 서약을 충실하게 실천하며 머물렀다.”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이처럼 서원과 서약이라는 말은 유사한 용도와 의미를 지니거니와, 이는 서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법화경]의 경우 더욱 풍부한 서원의식이 표출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제2 방편품 만해도 서원에 대한 다음의 표현들을 만나게 된다.
“또 사리불아 어떤 비구 비구니라도 스스로 아라한임을 공언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의 서원을 품지 않은 채, ‘나는 불승(佛乘)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말하거나 ‘나는 반열반 전의 최후신에 있다.’고 말한다면, 사리불아 너는 그를 증상만자(增上慢者)라고 알아내어야 한다.”
“언제든 여래의 법을 듣고 부처님이 되지 못한 유정은 한 명도 없으니, (여래 스스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간 뒤에, (유정들로 하여금)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게 하겠다는 것이 여러 여래들의 서원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화엄부의 경우는 앞서 「대방광불화엄경」의 제1환희지 보살의 십대원 중 제1, 제2, 제10과, 「십주경」의 제7원행지 보살이 성취해야 할 덕목으로 서원 바라밀다를 포함해 십바라밀다를 주(註)로나마 소개한 바와 같다. 물론 화엄부는 서원바라밀다를 가장 강력히 주창하는 경전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단순히 십지품에 나오는 환희지 보살의 십대원 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다양한 십대원들이 설해진다. 곧 “제14 명법품(明法品) , 제33 이세간품(離世間品) 그리고 [사십화엄경(四十華嚴經)]의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 ”에도 열 가지 큰 서원이 설해져 있다.
나아가 정토부 경전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서원과 관련하여 어떤 경전보다도 강렬한 의식을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아미타 부처님이 다르마아카라(법장) 비구 보살 시절에 48대원을 세웠다고 설해지거니와, 정토부 경전은 그 서원을 본원(本願, Pūrva-pran̜idhāna) 사상으로 승화시킨 뒤, 그러한 본원에 입각해 극락정토의 실재함과 아미타 부처님의 실존함과 염불왕생의 진실함을 설하는 경전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러한 서원에 대한 대승불교의 의식은 [마하와스투](Mahāvastu,大事)에까지 반영되어 있다. 비록 이 문헌이 대중부(大衆部,Mahāsaṅghika) 계통의 문헌에 속한다고 해도, 역시 부파불교를 반영하는 자료이거니와, 대승불교와의 차이는 분명하다고 봐야한다. 그런 부파불교의 문헌에서조차 네 가지 보살행을 소개하고 있거니와, “자성행(自性行, prakṛti-caryā), 원행(願行, praṇidhāna-caryā), 수순행(隨順行, anuloma-caryā), 불퇴행(不退行, anivartana-caryā)”이다. 여기 보면 두 번째 수행이 서원에 입각하고 있거니와, 이미 보살의 수행 덕목에 서원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있었음을 알 수 있다.
Ⅳ. 초기불교의 무원삼매(無願三昧)
그런데 초기불교를 보면 이렇게 활발한 대승불교의 서원 의식이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초기불교는 성격상 보살행을 선양하는 가르침이 아니므로 당연한 것 아닌가 하지만, 대승 보살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본생 보살(本生菩薩)은 있으므로 서원 의식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붓다왕사](Buddhavaṃsa, 佛種姓經)를 중심으로 본생 보살의 소식을 접할 수 있거니와, 그곳을 보면 서원 의식의 표출을 볼 수 있기도 하다.(주)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본생보살이었던 수메다(Sumedha, 善慧)는 디팡카라(Dīpaṅkara, 燃燈佛) 여래를 맞기 위해 머리털과 가죽옷을 젖은 흙 위에 펼친 채 엎드려서 이렇게 기원했다고 한다.주)
주) 본생 보살의 소식을 집대성한 것은 역시 [자타카(Jātaka, 本生經)]이다. 이 자료에서는 본생 보살이
연등불 전에서 수기를 받고 서원을 세운 뒤에 그 서원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구체적 실천을 열 가지 카테고리로 정리한 것이 [차리야피타카(Cariyāpiṭaka, 所行藏)]이거니와
곧 열 가지 바라밀로 요약하고 있다.
그리하여 [붓다왕사]가 보생보살의 수기와 서원에 초점이 있다면, [자타카]는 그 구체적인 실천 사례를
보여주고, [차리야피타카]는 십바라밀로서 다시 정리해 보여주니, 본생 보살의 서원과 관련해서도 이 세
자료를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52(붓다왕사의 게송번호) 땅 위에 엎드려 있던 나에게는 다음의 생각이 일어났다. 오늘 나는 기원한다. 나의 번뇌가 다 타서 없어지기를. 55. 이 상태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여기서 달리 법을 증득하여 그것으로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천신들을 포함한 세계에서 부처님이 되기를 기원한다.
56. 나 혼자만을 겨우 건질 수 있는 인간의 힘을 보인다 한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천신을 포함한 세계를 건지기를 기원한다.
57. 가장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이러한 나의 결심에 의하여, 모든 것에 대한 앎을 얻어서 많은 사람들을 건지기를 기원한다. 58. 윤회의 흐름을 단절시키고 재생으로 귀결되는 세 가지를 소멸시키어 법의 배에 올라타서 천신을 포함한 세계를 건지기를 기원한다.”
[붓다왕사] 2, 수메다의 희구 이야기(Sumedhapatthanā-kathā)[Kh.N.(N.D.P.) 7, p.309]
이는 분명 서원 의식의 표출로 볼 수 있고, 특히 56번의 기원은 혼자만의 구제는 무의미하니 모든 세계를 건지겠다는 내용을 드러내거니와, 앞서 [법화경] 등에서 보았던 대승의 서원과 동질임을 느끼게한다.
그런데 이 경문에 쓰이는 기원이라는 단어는 ‘프라니다나(praṇidhāna)’ 혹은 ‘파니다나(paṇidhāna)’가 아닌 ‘잇차마노(icchamāno)’이다. ‘잇차마노’는 ‘잇차티’(icchati)라는 동사에서 온 말인데, ‘잇차티’는 그냥 ‘바라다, 욕구하다, 기대하다’ 정도의 뜻을 지닌, 그런 뜻으로는 아마도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동사이다.
사실 이 경문이 속한 곳이 수메다의 희구(Sumedhapatthanā) 이야기 라고 할 때의 그 희구라는 말의 원어는 팟타나(patthanā)로서 이것은 오히려 서원의 원어인 ‘파니다나’의 의미를 추구하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 말은 후대의 편집자들이 편집의 편의를 위해 덧붙인 말로 보인다.
물론 초기불전에도 ‘파니디(paṇidhi)’라는 말이 쓰인다. 이 말은 서원의 원어인 ‘프라니다나’와 어형이 거의 같은 꼴이다. 마지막 접미사가 중성명사를 만드는 접미사(-na)가 아니고 여성 접미사(-i)여서 그렇지 그 어근(√dhā) 및 접두사(pra-ni)는 일치한다. 하지만 주지하다시피 ‘파니디’는 초기불교 안에서, 대승불교에서 쓰이는 ‘프라니다나’ 곧 서원의 뜻으로 잘 쓰이지는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유사한 어형인 ‘파니히타(paṇihita)’가 ‘무원삼매(無願三昧,appaṇihito samādhi)’라는 형태로 표현됨으로서 많은 연구가들이 지적 하지만 초기불교는 오히려 서원에 대한 부정의 입장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다시 세 가지 삼매가 있다 -공(空) 삼매․무상(無相) 삼매․무원(無願) 삼매이다(apare pi tayo samādhī. suññato samādhi, animittosamādhi, appaṇihito samādhi). (D.N. III 172.(N.D.P.), 219(P.T.S.)
이 삼매에 대한 경전의 설명을 살펴보면 연구가들의 그런 오해가 이해될 것도 같다. 먼저 [중아함]에서는 이 세 가지 삼매가 서로 뜻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삼매라고 한다. 그렇지만 [증일아함]을 보면, “공삼매를 원인으로 무원삼매를 얻고, 무원삼매를 원인으로 무상삼매를 얻는다.”고 설해져 있거니와, 서로 뜻은 다르고 하더라도 인과 관계를 맺으며 연결되어 있으므로 아예 별개로 볼 수도 없을 것이다. 마치 술을 연하여 식초가 발생할 때처럼, 술과 식초는 서로 별개이지만 술을 떠나서 식초가 있을 수 없는 것 같은 관계가 이들에게도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
같은 [증일아함]의 다른 경설에서는 이러한 인과 관계를 “세간에 대한 상념을 일으키므로 문득 생사지분을 받게 되거니와, 만일 공삼매를 얻게 되면 역시 원하는 바도 없어져 문득 무원삼매를 얻게 된다. 무원삼매를 얻음으로서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기를 구하지 않게되니 도대체 상념이 없어질 때 그 수행자는 다시 무상삼매를 얻게된다.”라는 식으로 설해주고 있다.
이 경설들에 입각하면 원이라는 말이 ‘생사윤회 속의 세간법에 대한 상념’을 바탕으로 정의된다. 그렇다면 해탈 열반을 목적으로 하는 초기불교에 입각하는 한 당연히 원은 없애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기에 남방 상좌부는 이를 바탕으로 세 가지 해탈(vimokkha)을 설하며 무원해탈(無願解脫, appaṇihita-vimokkha)의 개념마저 성립시키고 있다.(주)
주)Kh.N. V, p.213, 274, 282, 301, 308, 313 등에서 무원해탈이 여러 번 언급된다. 그리고
[파티삼비다막가]에서는 무원삼매, 무원해탈 뿐만 아니라, 무원주(無願住, appaṇihita-vihāra),
무원관(無願觀, appaṇihita-anupassanā), 무원등지(無願等至, appaṇihita-samāpatti) 등 여러
가지 무원의 개념이 나타나 있다. 이런 현상은 물론 이 자료가 남방 상좌부의 논서적 성향을
가지는 것이므로 그리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부파불교도들이 본 초기불교는 서원
의식마저 다소 미미한 것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원이란 생사윤회에 우리를 묶어두는 일종의 번뇌 악법(煩惱惡法)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쯤 되면 초기불교에 있어 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다지 종교적 덕목의 분위기를 띠는 것은 분명 아니다.
Ⅴ. 초기불교의 성구(聖求)
이처럼 초기불전에서 원이라는 말은 그다지 받들어야 할 종교적 덕목으로 격상되어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기불교에 서원 정신 또는 서원 의식이 없다고 단정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 다른 용어를 통해 그 정신이나 의식을 활발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반드시 인지해야 할 것이다.
먼저 필자는 초기불전 중 [맛지마 니카야]의 제 26경인 [파사라시경]을 주목하고 싶다. 왜냐면 이 경은 앞서 무원삼매를 살피면서 초기불교에서 원이라는 말이 ‘생사윤회 속의 세간법에 대한 추구’의 의미로 쓰이는 것을 보았는데 그러한 원을 ‘성스럽지 못한 추구(anariya-pariyesana)’로 규정하면서 그 반대의 ‘성스런 추구’ 곧 성구(聖求, ariya-pariyesana)를 선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성구’야말로 우리가 찾는 서원 의식을 드러내는 한 표현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경에서 ‘성구’라는 서원 의식을 볼 수 있는 대목을먼저 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비구들아, 두 가지 추구함이 있다. 성스러운 추구와 성스럽지 못한 추구이다. 성스럽지 못한 추구는 어떤 것인가. 사람은 반드시 태어난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사람은 반드시 늙는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늙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사람은 반드시 병든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병들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죽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사람은 반드시 슬픔에 빠진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슬픔에 빠지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사람은 반드시 번뇌에 빠진다. 그런데도 오히려 스스로 번뇌에 빠지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반드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늙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병들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죽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무엇이며, 번뇌에 빠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아들과 딸, 남녀, 노비, 양, 염소, 닭, 돼지, 코끼리, 소, 숫말, 암말, 금과 은 등의 애착물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며, 늙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하고, 슬픔에 빠지게 하는 것이며, 번뇌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것에 묶이고 심취되고 푹 빠져, 반드시 태어나는 존재이면서 오히려 스스로 태어나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하고,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픔에 빠지게 되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픔에 빠지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하고, 반드시 번뇌에 빠지게 되면서도 오히려 스스로 번뇌에 빠지게 만드는 것만을 추구한다. 이것이 성스럽지 못한 추구이다.”
“그러면 성스러운 추구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은 스스로 반드시 태어나는 줄 알아 그것을 근심한다. 그리하여 태어남이 없는 수행에 의한 안락 상태인 최상의 열반을 추구한다. 또 스스로 반드시 늙고, 병들고, 죽고, 슬픔에 빠지는 줄 알아 그것을 근심한다. 그리하여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픔이 없는 수행에 의한 안락 상태인 최상의 열반을 추구한다. 또 스스로 반드시 번뇌에 빠지게 되는 줄 알아 그것을 근심한다. 그리하여 번뇌가 없는 수행에 의한 안락 상태인 최상의 열반을 추구한다. 이것이 성스러운 추구이다.”
누군들 늙고 병들고 죽고 싶을 것이며, 슬퍼하고 번뇌에 빠지고 싶겠는가? 그런데 결과론적으로 늙고 병들고 죽게 하고 슬픔과 번뇌에 빠지게 만드는 것인데도, 그런 것을 추구하면 그것이 성스럽지 못한 추구이니, 무원삼매에서 부정하는 원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 경설은 서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심리적 진실을 한 가지 알려주고 있다. 누구든 늙고 병들고 죽기를 싫어하고 슬픔과 번민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왜 결국 그렇게 만드는 것을 추구하게 될까?
늙음과 병과 죽음이 인생의 결과라는 것을 범부들도 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 인간 존재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에 대해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오히려 사람은 완전해 지기 위해 끝없이 무언가를 추구해야만 한다. 그럴 때 대개의 사람은 네 가지를 추구하며 완전해지고자 하니 첫째, 쾌락(pleasure)이며 둘째, 명예(prestige)이며 셋째, 권력(power)이며 넷째, 재물(property)이 아닌가 한다. 영어 단어로 하면모두 ‘p’자로 시작하는 것이 흥미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위의 경설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평이하게 “아들과 딸, 남녀, 노비, 양, 염소, 닭, 돼지, 코끼리, 소, 숫말, 암말, 금과 은등의 애착물”이라고 표현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경설에서 언급한 대상들도 쾌락 등의 네 가지로 물론 이해될 수 있다. 이 경설에서 언급된 남녀는 쾌락을 은유하고 있고, 아들과 딸 및 노비는 명예를, 코끼리는 권력을, 그 외 금과 은 등은 재물을 은유한다고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서는 인간이란 결코 완전해질 수 없다. 그러기에 이와 다른 무언가를 추구하여 완전해지려고 하는 문화가 종교 아니겠는가? 그러면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바로 성스런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이미 종교학자들이 종교를 ‘성스런 것과 만남’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떠올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위의 경설의 ‘성스런추구’는 성스런 것을 만나려고 하니 성스런 추구일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성스런 것인가? [파사라시 경]은 그것을 모두 세 가지로 설해주고 있다. 첫째는 위에 인용했듯이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슬픔과 번뇌가 없는 수행에 의한 안락 상태인 최상의 열반(ajātaṃ ajaraṃ abyādhiṃ amataṃ asokaṃ asaṅkiliṭṭhaṃ anuttaraṃ yogakkhemaṃ nibbānaṃ)”을 성스런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둘째 셋째는 같은 경의 다음 대목에서 ‘선(善)함’과 ‘최상의 적정구(寂靜句)’라는 표현으로 설해주고 있다.
“그때 보살은 젊었었다. 머리는 새까맸었고 피 끓는 청춘이었다. 욕심이란 없는 선하신 어머니 아버지께서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시며 마다했지만 보살은 머리와 수염을 깎고 법의를 입고 출가했다. 그리고 보살은 무엇이 선인가를 찾고 최상의 적정구를 추구했다.”
“무엇이 선인가를 찾고 최상의 적정구를 추구한다.”는 이 표현은 이 경 속에 모두 여섯 차례나 사용될 정도로 선호를 받고 있으므로 서원 의식과 관련해 이 표현의 중요성도 우리는 과소평가하면 아니될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표현의 의미는 무얼까? 대개는 세 표현이 뜻은 같은데 표현만 다른 것들로 이해한다. 특히 셋째 적정구의 ‘구(pada)’를 오히려 ‘상태(state)’로 해석하여, 그 원어인 ‘아눗타라 산티와라파다(anuttara santivarapada)’를 ‘더 이상 없는 지고의 평화 상태(the unexcelled state of sublime peace)’라고 번역하거니와, 이것은 바로 최상의 열반을 의미하는 말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두 그렇게 보는 것은 아니다. 정통의 P.T.S. 번역본에는 “평화를 향한 비교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는 ‘길’(the incomparable matchless ‘path’ to peace)”33)이라고 번역되어 있듯이 다른 견해도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를 ‘상태’나 ‘길’도 좋지만 ‘구절’로 이해한다. 바로 [법구]할 때의 그 ‘구(句)’가 ‘담마파다(Dhamma-pada)’의 ‘파다(pada)’인 것처럼 말이다. 왜냐면 ‘아눗타라 산티와라파다’가 [맛지마 니카야]의 102번째 경인 [다섯 경(Pañcattaya sutta)]에는 이렇게 나타난다. “그리고 비구들아, 여래는 이러한 최상의 적정구를 잘 깨달으셨으니 곧 육촉처(六觸處)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 취착함이 없이 해탈하셨다.” 여기서 ‘육촉처의 집기 내지 벗어남을 있는 대로 안다.’라는 표현을 주의해야 하거니와, 이 표현은 [디가 니카야]의 첫째 경인 [범망경(Brāhmajālasutta)]에 다음과 같은 배경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특히 여기에 든[다섯 경]과 [범망경]은 모두 외도 사상에 대해 분류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그 취지가 아주 유사하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다음 경설을 유심히 살펴보자.
“과거와 미래에 관해 62가지 경우로 다르게 분류할 수 있는 좁은 견해들을 주장하고 있는 사문 바라문들은, 그 모두가 육촉처에 부딪치고 부딪쳐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느낌[受]에 기대어 갈애가 있고, 갈애[愛]에 기대어 취착이 있고, 취착[取]에 기대어 됨이 있고, 됨[有]에 기대어 태어남이 있고, 태어남[生]에 기대어 늙음 죽음[老死] 슬픔 눈물 괴로움 근심 갈등이 존재한다. 비구들아, 실로 비구는 육촉처의 집기와 사라짐과 맛과 환난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내어야 한다.”
이 경설은 무엇을 말하는가? ‘육촉처의 집기 내지 벗어남을 있는그대로 안다.’라는 표현은 바로 육촉처에서 시작되는 ‘연기(緣起)’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안다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파사라시경]이나 [다섯 경]에 나오는 최상의 적정구는 단순히 해탈 열반의 경지라기보다는, 해탈 열반을 향한 수행을 가능하게 하는 연기의 법칙을 일컫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면 ‘성구’의 둘째 대상인 ‘선(善)’은 무엇을 뜻할까? 언제나 선은 윤리적인 개념이고, 행동의 가치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바람직한 행동을 위한 윤리 개념으로 선(善, kuśala)과 정(正,samyak)을 제시한다.(주) ‘선’은 주로 업설과 결합해 선업(善業)이라는 술어로 주로 쓰이고, ‘정’은 수행도와 결합해 정도(正道)라는 술어로 널리 쓰인다. 필자가 보기에는 [파사라시 경]에 나오는 “무엇이 선인가를 찾는다.”고 할 때의 ‘선’은 단순히 선업의 선만을 뜻한다기보다는 정도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보고 싶다. 정도는 결국 선행이 심화된 것을 특정하여 부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주) 불교 윤리는 선의 윤리->정의 윤리->진(眞, pāra)의 윤리->각(覺,bodhi)의 윤리로 점점
심화되어 가거니와, 파사라시 경에 나오는 ‘선함’은 이 네 단계의 윤리적 전개 중에 꼭
첫 단계의 선의 윤리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처님이 되고자하는 보살행으로 언급된
윤리로서의 선함이므로, 이 선함에는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각의 윤리까지 포함한다고 봐야하고,
초기불교에 한정해도 정의 윤리까지는 포함한다고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 선(善)의 원어를
‘kuśala(kusala)’로 정(正)의 원어를‘samyak(sammā)’로 각(覺)의 원어를 ‘bodhi’로 잡는 것은
문제가 없는데, 진(眞)의 원어를 ‘피안(pāra)’으로 잡는 것은 좀 의아스러울 수가 있다.
사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진(眞)의 원어는 ‘satya(sacca)’이다. 그런데 이 원어는 사성제(四聖諦)의 제의 원어이거니와 이중 ‘도제’는 팔정도와 주로 연결되어, 정(正)의 윤리와 연관되게 할 우려가 있다. 그리고 진의 윤리는 대승불교의 육바라밀다설을 전제로 하는 윤리라고 본다.
불교는 흔히 예로부터 실상문(實相門), 연기문(緣起門), 수행문(修行門)의 세 가지 범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견해들이 있어 왔다. 실제 종교학에서도 종교학의 연구 분야를 종교 신앙[信], 종교 사상[解], 종교 실천[行], 종교 체험[證]으로 나눌 수 있거니와, 종교사상이 연기문이고, 종교 실천이 수행문이며, 종교체험이 실상문에 해당한다고 볼만하다. 그랬을 때 [파사라시 경]에 나오는 ‘성구’는 다름 아닌 실상문에 속하는 ‘최상의 열반’을 추구하고, 연기문에 속하는 ‘최상의 적정구’를 추구하고 수행문에 속하는 ‘선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정리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는 이미 불자들이 간절히 구하고 원해야 할 바를 정연한 교리적인 범주에 입각해서 잘 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부처님의 보살 시절 보살행이 또한 그러했다고 하시면서, 성스런 추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따라서 초기불교에 분명히 존재하는 서원 의식을 부인할 수 없으며, 그 의식은 ‘성구’라는 표현을 통해 강렬히 표출되고 있다 할 것이다.
Ⅵ. 초기불교의 결의 바라밀다(決意波羅蜜多)
이러한 초기불교의 서원 의식은 대승불교에서 보기 어려운 독특한 용어를 또 하나 성립시키고 있다. 앞서도 화엄부를 중심으로 원 바라밀다를 포함한 열 가지 바라밀다를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초기불교에서도 열 가지 바라밀다가 설해진다. 비록 초기불교 경전성립사(주)를 전제해서 본다면 비교적 후대에 성립되는 자료인 [붓다왕사]나 [차리야피타카]에 주로 출현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권위를 결코 무시해서는 아니 된다.
주) 남전 니카야 중 다섯 째인 「쿳다카 니카야」에 국한해 본다면, I. 부파분열이 시작되는
즈음 [우다나(자설경)], [담마파다(법구경)], [이티붓타카(여시어경)], [숫타니파타(經集)]의
전3품, [테라가타(장로게)], [테리가타(장로니게)], [자타카(본생경)]의 원형 또는 일부 등
성립. II. 아쇼카 왕의 시대 또는 그 이후 [위마나왓투(천궁사)], [페타왓투(아귀사)], [니데사(의석)],
[파티삼비다마가(무애해도)] 등 작성. III. 그 뒤에서 서기전 1세기경 왓타가마니(Vaṭṭagāmaṇi)왕의
시대까지 [아파다나(비유경)], [쿳다카파타(소송경)], [붓다왕사(불종성경)], [차리야피타카(소행장)]
성립을 말한다.
[붓다왕사]나 [차리야피타카]에 나타나는 열 가지 바라밀다는 ①보시(dāna) 바라밀다, ②지계(sīla) 바라밀다, ③출리(出離, nekkhamma)바라밀다, ④지혜(paññā) 바라밀다, ⑤정진(viriya) 바라밀다, ⑥인내(khanti) 바라밀다, ⑦진실(sacca) 바라밀다, ⑧결의(adhiṭṭhāna) 바라밀다, ⑨자애(mettā) 바라밀다, ⑩평정(upekhā) 바라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⑧결의 바라밀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바라밀다는 열가지 바라밀다 중 여덟 번째 바라밀다인데, 마치 화엄부의 열 가지 바라밀다 중 여덟 번째 바라밀다가 원 바라밀다인 것과 같아 더욱 흥미롭다.
흔히 불교의 서원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소망과 같은 범주의 덕목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제3절 서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원에 소구(所求) 소망(所望)하는 부분이 분명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순히 소구 소망하는 것으로 서원의 의미가 다한 것은 아니다. 불교의 서원에는 자신의 소구 소망한 바를 자신의 힘으로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굳은 다짐’과 이룰 수 있다는 ‘부동의 확신’이 합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즉 불교의 서원은 강렬한 소망과 굳은 다짐 및 부동의 신심의 결합체이거니와, 이중 강렬한 소망이 ‘성스런 추구’ 곧 ‘성구(聖求)’에 해당하고, 굳은 다짐과 부동의 신심이 ‘결의 바라밀다’의 ‘결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싶다. 이중에서도 ‘결의’에 내재된 굳은 다짐에 대해 중점을 두어 몇 가지를 논술하고자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 수메다 보살 시절에 이 결의 바라밀다를 충족하려 할 때의 모습을 「붓다왕사」에서는 이렇게 그리고 있다.
“150. 부처님을 만드는 법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깨달음을 익게 하는 다른 법을 나는 찾아야 했다. 151. 법을 찾던 나는 그 때 여덟번째로 결의 바라밀을 발견했다. 그것은 옛날의 위대한 도사들이 닦고 실천하던 것이다.
152. 너는 여덟째로 이것을 굳게 지니어라. 여기서 흔들리지 않도록 해라. 원만한 깨달음을 얻도록 해라.
153. 산정의 바위는 흔들리지 않고 잘 정착해 있으니, 광폭한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고 자기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154. 그와 같이 너는 결의한 것에서 언제라도 흔들리지 말아서 결의 바라밀을 완성하라. 원만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붓다왕사] 2, 수메다의 희구 이야기(Sumedhapatthanā-kathā)
이 경설들은 결의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소구 소망한 것이 있다면 폭풍이 몰아쳐도 끄떡 않고 서 있는 산 정상의 바위처럼 결코 흔들리지 말고 밀고 나가야 한다는 요청이 잘 드러나 있거니와, 그런 것을 결의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방 상좌부에서는 결의에 모두 세 가지 결의가 있다고 한다. ①전조 결의(前兆決意) ②희망 결의 ③의무 결의(義務決意, vata-adhiṭṭhāna)가 그것이다. 이중 물론 본생 보살에 대한 기사이지만 보살행과 관련해서는 세 번째 의무 결의가 중요하다고하면서 이런 설명을 한다.
“단순한 결의나 지명(指命)은 결의 바라밀다를 충족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결의는 과거에 속하지도 않고 현재에 속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 굳게 결의한 대로 미래에 정확하게 준수할 때 결의 바라밀다를 비로소 충족하게 된다. 그러니 지금 열렬히 결의했지만 나중에 그것을 준수하는데 실패한다면 그 사람의 결의는 무익하고 무의미해진다. 이런 관념은 「카윌락카나 탓폰(Kavilakkhaṇā Thatpon)」에서 표현되어 있다. 거기에 있는 한 줄에서는, 뿔이 둘이 아니고 하나뿐인 짐승인 코뿔소의 뿔을 결의에 비유할 만하다는 취지의 글이 있다. 마치 코뿔소가 오직 하나의 뿔만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결의를 흔들림 없이 굳건하고 확고하게 고수해야 한다. [카윌락카나]의 그 구절은 [붓다왕사]에 나오듯이 ‘바위산과 같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과 일치한다.”
[대불전경] 제2권, pp.474∼475
결의란 과거형이나 현재형이라기보다는 미래형이라는 시제상의 지적은 참으로 신선하다. 그러기에 결의는 마치 강제성이 개입된 의무와 같다고 여겨야 하니, 의무란 미래 어느 시기까지 반드시 이루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우리에게 의무란, 해도 되고 아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임을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그처럼 ‘성스럽게 추구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해도 되고 아니 해도 되는 것으로 두지 말고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의무를 실행해 나갈 때의 마음으로 임해야 하니 그것을 ‘결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디가 니카야]의 [상기티 숫타]에서는 이러한 결의의 대상을 네 가지로 제시한다.
“네 가지 결의가 있다. 지혜(paññā)에의 결의, 진실(sacca)에의 결의, 버림(cāga)에의 결의, 적지(寂止, upasama)에의 결의이다.”
이 네 가지 결의는 지혜를 일으키고야 말겠다는 결의,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결의, 기필코 보시를 베풀겠다는 결의, 열반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결의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마치 대승불교에 사홍서원이 있다면, 초기불교는 그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이렇게 네 가지 결의가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결의를 의무결의로 실천해야하니, 불자에게 지혜를 일으키고, 진실만을 말하고, 보시를 베풀고, 적지[열반]에 이르는 것은 해도 되고 아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의무 사항이라는 뜻이 바로 결의 바라밀다의 내용인 것이다.
앞 항목에서 ‘성스런 추구’를 살피면서, 그 ‘성구(聖求)’의 대상으로 실상문에 속한 ‘최상의 열반’, 연기문에 속한 ‘최상의 적정구’, 수행문에 속한 ‘선함’을 들었다. 그 세 가지 대상에도 이상의 의무 결의의 관점을 적용하면, 불자에게 있어 최상의 열반에 이르고 최상의 적정구를 알고 선함만을 실천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아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성취해야 하는 필수 사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앞서 원을 뜻하는 ‘프라니다나’와 밀접한 말로 [금강경]의 ‘보살 서약(bodhisattva-pratijñā)’이라는 표현을 소개한 적이 있다. 원이 원으로서 의미를 지니려면 그것이 반드시 지켜야 할 서약으로 여겨져야 함을 알 수 있거니와, 이러한 ‘서약’의 개념도 초기불교에는 ‘결의 바라밀다’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한다.
결국 대승불교의 서원 의식은 초기불교적인 용어로 하자면 ‘성구’와 ‘결의’로 인수분해 된다고 생각한다. 서원이 서원인 것은 아무 것이나 원하기 때문이 아니라,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승불교는 ‘전 중생의 성불’과 ‘불국토 건설’이라는 목적을 가장 원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 보는 것일 테다. 그럴 때 초기불교의 ‘성구’의 대상은 요약하면 ‘열반의 증득’을 목적으로 하므로 대승불교만큼 심오하거나 원대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 형태에 있어서는, 가장 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구해야 한다는 점을 ‘성스런 것’을 구한다는 말로 못 박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서원이라는 한자어의 구성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서원의 ‘서’ 자는 맹세나 서약을 뜻하는 ‘서(誓)’자이다. 바로 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약속이 내재되어 있음을 번역어이지만 잘 드러낸 것이다. 반드시 지키지 못하고 반드시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이미 그것은 원이 아니니 원은 미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지금 굳게 결의한 대로 미래에 정확하게 준수할 때 결의 바라밀다를 충족하게 된다.”는 의무 결의가 바로 연상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승불교의 서원 의식을 초기불교 속에서도 ‘성구’와 ‘결의’라는 두 술어 속에서 충분히 만날 수 있다고 결론 내려도 좋을 것이다.
Ⅶ. [마하파리닙바나 숫타]의 서원
초기불전 중 가장 방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경전인 [마하파리닙바나 숫타(대반열반경)]에는 부처님의 서원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기사가 설해져 있다.
한때 나는 아난다야, 우루웰라의 네란자라 강가에 있는 아자팔라닉로다 나무에서 지냈는데 그때 나는 처음으로 원만히 잘 깨달아 붓다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난다야, 악마가 나에게 다가왔다. 다가와서 한쪽에 선 악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 부처님께서는 지금 반열반하소서. 선서께서는 지금 반열반하소서. 부처님, 지금은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실 시간입니다.” 이와 같이 청할 때 아난다야, 나는 악마에게 말했다. “마라야, 나의 법을 듣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①비구들ㆍ②비구니들ㆍ③남자 재가자들ㆍ④여자 재가자들은 슬기로워야 한다. (1) 법으로 인도되고,법에 확신을 가지고, 법에 대해 들은 것이 많고, 법을 지니고, 법에 따라 법에 이르고, 바르게 이르고, 법에 따라 수행해야 하는 등의조건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반열반하지 않겠다. (2)그리고 자신의 스승의 법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하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세우고, 연설하고, 분석하고, 설명하지 않는다면, 역시 반열반하지 않겠다. (3)그리고 논쟁이 일어날 경우, 법에 입각해 잘 반박하지 못하고 신비로움이 갖추어진 법을 설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코 반열반하지 않겠다. ⑤그리고 나의 범행법이 번창하지 않고, 풍부해지지 않고, 확대되지 않고, 많은 사람이 지니지 않고, 늘어나지 않고, 천신과 인간에 이르기까지 잘 전달되어 정돈되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반열반하지 않겠다.”라고.
이 기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지 5주차에 있었던 일을 열반에 들기 3개월 전에 회고하시면서 아난존자에게 들려주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기사에는 모두 다섯 가지 부처님의 바람이 실려 있고, 그중 앞의 네 가지에는 또 각각 세 가지의 바람이 담겨 있다.
첫째는 비구 제자들이 (1) 부처님의 가르침에 입각해 수행해야 하고, (2) 부처님의 가르침을 남에게 전해줘야 하고, (3) 논쟁이 일어나면 잘 조복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둘째는 비구니 제자들이 역시 그러해야 하고, 셋째는 남자 재가의 제자들이 역시 그러해야 하고, 넷째는 여자 재가의 제자들이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그리하여 다섯째는 부처님의 청정한 수행법이 널리 인간과 천신의 세계에 충만해야 한다는 바람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나는 열반하지 않겠다(na tāvāhaṃ parinibbāyissāmi)’고 단언하신다. 마치 [극락장엄경]에 설해진 다르마아카라 비구 보살의 본원에 ‘∼∼하지 못한다면, 저는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원만히 잘 깨닫지 않을 것입니다.(mā tāvad- aham- anuttarāṃ samyaksambodhim- abhisaṃbudhyeyam)’46)라는 표현과 그 분위기가 사뭇 유사한 것이다.
대개 부처님의 서원은 [붓다왕사] 등에서 보듯이 본생 보살일 적의 서원이나, [증일아함]에서 보듯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간략하게 혹은 담담하게 언급한 것을 들 수 있다. 그중 [붓다왕사]의 서원은 이미 [Ⅳ. 초기불교의 무원삼매(無願三昧)] 항목에서 살폈던대로이다.
그리고 [증일아함]의 경우는 부처님의 오사(五事)라는 것으로 제27권 제2경47)에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다섯 가지 일을 하러 오신다(如來出現世時必當爲五事)고 설해져 있으니, 첫째는 “법륜을 굴리는 일”, 둘째는 “부모를 건지는 일”, 셋째는 “믿음 없는 자를 믿음의 땅에 세우는 일”, 넷째는 “보살의 뜻을 일으키지 않은 자에게 보살심을 일으키게 하는 일(未發菩薩意使發菩薩心)”, 다섯째는 “미래에 마땅히 부처님을 이루리라는 수기를 주는 일(當授將來佛決)”이라고 한다. 이것도 일종의 서원 의식에 입각해서 살필 수 있는 대목이지만 그 표현이 아주 무미건조한 부분이 있다.
그런데 이 [마하파리닙바나 숫타]에는 [붓다왕사]와 달리 살아계신 현실의 부처님의 서원을 명료하게 살필 수 있어서 주목된다. 아울러 [증일아함]의 오사에 대한 무미건조한 표현과 달리 ‘내 뜻이 이뤄지지 않으면 열반하지 않겠다.’는 다짐에서 반드시 이루고 말겠다는 간절하면서도 ‘결의’에 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또한 주목된다는 것이다.
또한 제자들에 대한 서원에서 주의할 점이 있다. 곧 남녀의 구별을 두지 않고 출가 재가의 차별을 두지 않은 채 남녀 재가출가의 모든 제자들이 함께 그 목적을 성취해 주길 간절히 바라셨다는 점이다. 한때 일본에서 ‘무원삼매’ 등을 해석하면서 초기불교에는 재가자에게는 세속적인 목적만이 주어지고 해탈 열반 등이 목적으로 제시되지는 않았으니 해탈 열반 등은 출가자만을 위한 것이었다든지, 아니면 그렇게 구별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든지 하는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에도 위의 기사는 암시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부처님은 남녀와 재가출가를 구분하지 않고 부처님과 인연된 모든 불자들에게 정확히 공통되는 목적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목적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으로, 그것도 부처님께서 친히 이루고야 말겠다는 결의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초기불교 자료에 입각하는 한,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살 시절에는 최상의 열반(실상문)과 최상의 적정구(연기문)와 선함(수행문)을 성취하고자 하는 서원을 세우셨고, 부처님이 되신 후에는 남녀 재가 출가의 모든 제자들에게는 지혜와 진실과 보시와 열반에의 서원을 세우라고 하면서, 스스로에게는 제자들이 자신의 법을 수행하고 남에게 전하고 논쟁을 조복하고 아울러 범행이 세상에 충만하기를 바라고 결의하는 서원을 세우고 지내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굳이 원 또는 서원이라는 말 자체를 대승불교에서 그 말이 쓰이는 것처럼 그렇게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하더라도, 대승불교의 서원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정신 또는 의식은 초기불교에서도 ‘성구’ 및 ‘결의’ 등의 표현을 매개로 하여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Ⅷ. 맺는 말
일반적으로 초기불교와 서원 의식을 쉬 연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파불교나 소승불교를 초기불교와 혼동하는데서 벌어진 현상 아닌가 할 정도로, 초기불교 그 자체로 보면, 주목할만큼의 강렬한 서원 의식의 존재를 부인해서는 아니 되리라고 생각한다. ‘성구’라는 의식이 우리 부처님의 육년 보살행을 이끌었던 것임을 [파사라시 숫타] 곧 [성구경]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었거니와, 그것이 이미 서원 의식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었다. 이어 ‘결의’라는 덕목이 ‘바라밀다’와 결합하여 나타난다는 사실은 초기불교의 서원 의식이 초보적이거나 원시적인 것이 아니라, 완성된 모습으로 정착해 있었다고 주장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대승불교는 ‘전 중생의 성불’과 ‘불국토 건설’을 목적으로 하고 초기불교는 ‘자신의 열반 증득’을 목적으로 한다고 간단히 정돈해 버리는 경향이 사람들에게 있는 듯하다. 그리하여 초기불교에는 이웃을 고귀한 목적의식에 동참시키려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 한 서원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말 수도 있다. 그래서 초기불교와 서원 의식의 연결을 꺼릴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살핀 [마하파리닙바나 숫타.대반열반경]의 기사는 불자들이 남녀 출가재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부처님의 “법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하고, 가르치고, 시설하고, 세우고, 연설하고, 분석하고, 설명해 줘야 할 것이며” 그를 바탕으로 “부처님의 범행법을 많은 사람이 지니고 천신과 인간에까지 잘 전달되어야 한다.”고 했으니, 불자들은 자신의 해탈 열반은 물론 나아가 이웃의 해탈 열반까지 서원해야 한다는 뜻이 성립하고 만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의 목적의식 속에 대승불교의 서원만큼은 아니더라도 거기에 버금가는 크기의 목적의식이 존재하고 그것은 충분히 고귀한 목적의식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이웃들에게도 그 고귀한 목적의식에 동참하기를 바란다면 대승불교의 서원 의식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되는 서원의식이 초기불교에 존재함을 주장하는 것은 온당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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