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중국 초기불교의 이제론

실론섬 2014. 5. 30. 09:38

중국 초기불교의 이제론

박 해당 경희대 교수


Ⅰ. 머리말

中觀佛敎(중관불교)의 주된 문제 가운데 하나는 眞諦(진제)와 俗諦(속제)의 二諦論(이제론)이다. 진제와 속제를 어떻게 규정하고,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었으며, 현대에도 여전히 논쟁거리의 하나로 남아있다.


중국불교에서도 [이제]에 대한 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상 중국불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魏晋(위진)시대의 格義佛敎(격의불교)에서부터 이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마침내 隋代(수대)에 이르러서는 이제론을 중심적인 문제로 삼은 三論宗(삼론종)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이제]에 대한 논의가 중국불교의 초기부터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격의불교의 주된 문제가 空(공)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론과 공사상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공사상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레 이제에 대한 논의를 포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격의불교에서는 이제가 독립적으로 논의되지 못하고 空(공)에 대한 탐구와 더불어 이루어졌으며, 이제론은 항상 공에 대한 논의의 한 부분으로서 나타났다. 격의불교의 비판자인 僧肇(승조)의 경우에도 이제론은 공에 대한 논의와 함께 나타난다. 그것은 아직 공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올바른 공의 이해를 확립하는 것이 중심적인 문제였으며, 이제를 독립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였던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 중국의 불교가 점점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이제]는 공사상과 별개로 독립적으로 논의되기에 이르렀으며, 그에 따라 이제(二諦)를 중심으로 하는 많은 글들이 발표되었다.


양(梁)나라의 昭明太子 蕭統(소명태자 소통)이 지은 [令旨解二諦義(영지해이체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소통은 먼저 이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 뒤, 이를 중심으로 여러 승려 및 지식인들과 대론하는 가운데 이제론을 전개하고 있다.


본고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격의불교와 승조 및 소통의 이제론이다. 격의불교와 승조의 이제론은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공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이제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空觀(공관)을 먼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먼저 이들의 공관을 개관한 뒤, 이를 바탕으로 이제론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제론은 단순히 이제에 관한 이론적 탐구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온갖 고통과 번뇌로 가득한 이 세계를 떠나 고통이 소멸한 세계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모든 이론적 작업들은 이것을 이루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이제에 대한 논의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될지라도 궁극적으로 해탈, 또는 초월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이들의 이제론이 어떠한 내용을 갖는가를 살펴본 뒤, 그것이 초월 또는 해탈의 문제와 관련하여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인가도 함께 다루고자 한다. 격의불교와 승조의 이제론은 승조의 [不眞空論(불진공론)]과 이에 대한 몇 가지 注疏(주소), 吉藏(길장)의 [中觀論疏(중관론소)]와 이에 대한 주소인 安澄(안징)의 [中論疏記(중론소기)]에 의존하며, 소통의 이제론은 [令旨解二諦義(영지해이제의)]에 의존한다.


Ⅱ. 격의불교의 이제론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위진시대에 성립된 격의불교를 통하여 중국사상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격의불교의 이론가들은 공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般若部(반야부) 경전을 바탕으로, [공]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이론을 제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공을 無(무)와 같은 것으로 보면서 이론을 전개하였지만, 이 무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서로 다른 견해를 나타내었다. 그리하여 六家七宗(육가칠종)으로 불리는 여러 가지 이론이 나타났다.


격의불교의 이론들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컸으며, 현재까지 가장 많은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本無義(본무의)다. 본무의는 다시 道安(도안)의 본무의와 竺法深(축법심)의 本無異義(본무이의)로, 먼저 축법심은 본무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본무란 色法(색법)이 있기 이전에 먼저 無(무)가 있었다 (는 뜻이다). 그러므로 有(유)는 無(무)로부터 나왔다. 즉 무는 유의 앞에 있으며, 유는 무의 뒤에 있다. 그러므로 본무라 한다.


여기에서 축법심은 현상인 有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本體(본체)인 無(무)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무를 현상의 본체라는 의미에서 본무라 칭한다. 그렇다면 본체인 무는 어떠한 것인가? 이에 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저 無란 무엇인가 ? 텅 빈 듯하여 아무 모습이 없지만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다. 有는 생겨날 수는 있지만 만물을 생겨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佛陀(불타)가 梵志(범지)에게 말하기를 '四大(사대)가 空(공)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축법심은 空을 無와 같은 것, 즉 현상의 발생론적 본체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왜 현상의 본체를 상정하는가를 밝히고 있다. 有인 현상은 어디까지나 생겨난 산물일 뿐, 세계를 생겨나게 하는 能生(능생)의 본체일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상을 산출해내는 본체를 따로 상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無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무는 어떠한 존재도 없다는 뜻의 절대무, 허무는 아니다. 그것은 차별적인 모습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無形(무형)이며, 한정적인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無名(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무(無)다.


이것은 축법심이 무의 성격을 '텅 빈 듯하여 아무 모습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지만,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고 한 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공을 현상의 발생론적 본체로 규정한 축법심은 眞俗二諦(진속이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만물의 본무는 텅 빈 듯하여 아무 형상이 없으니 第一義諦(제일의제)이고, (본무로부터) 생겨난 만물은 世諦(세제)라 이름한다.


진제는 곧 本無(본무)를 가리키는 것이고, 속제는 末有(말유)인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는 존재론적인 위상이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이다. 따라서 진제와 속제는 동일한 대상에 대한 지칭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각기 다른 대상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안의 본무의는 다음과 같다.


無(무)는 온갖 변화의 앞에 있으며, 空은 모습을 지닌 여러 사물의 始原(시원)이다. 무릇 사람들의 마음에 방해가 되는 것은 末有(말유)다. 만약에 마음을 본무에 둔다면 잘못된 생각들은 곧 그치게 된다.


도안의 이 이론은 무를 현상인 유의 앞에 놓는다는 점에서 축법심의 이론과 다르지 않다. 그의 경우에도 공은 무이고 현상의 본체이다. 그러나 吉藏(길장)은 도안의 이론이 밝히고자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本性(본성)이 空寂(공적)하다'는 것이라고 하여 축법심의 이론과 구별한다.


도안의 시대에는 本無(본무)와 實相(실상), 法性(법성)이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법성이 공적하다는 것이며, 본무가 공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본무에는 잡다하며 생멸하는 현상적 존재들이 없다는 뜻이다. 본무와 법성에 관한 혜원(慧遠)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인연(因緣)에 있는 것은, 本無(본무)에는 없다. (인연에 있는 것이) 본무에는 없기 때문에 본무라고 하는 것이다. 본무와 법성은 같은 내용이면서 이름만 다를 뿐이다.


혜원은 인연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과, 인연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나누어서 본다. 그런데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연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은 自性的(자성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혜원이 말하는 본무는 자성적으로 존재하는 유일한 실체이다.


이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하여 자성적이지 않은 현상적인 존재들과는 존재론적 위상이 다르다. 혜원이 도안의 수제자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본무에 대한 혜원의 이러한 견해는 도안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길장이 도안의 입장을 옹호하여 축법심의 이론과는 다르다고 한 것은 정당한 근거가 없는 것이며, 도안의 본무의는 본체인 무를 중심으로 하는 '無(무)의 形而上學(형이상학)'이라는 점에서 축법심의 본무의와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도안은 무의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현상계가 전개되기 이전에는 텅 빈 듯하였을 따름이다. 元氣(원기)가 만물을 지어냄에 이르러 여러 사물들이 모습을 받고 나타났다. 모습을 지닌 사물들은 비록 원기에 의지하여 변화하나, 변화하게 하는 근본은 自然(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할 따름이니 어찌 그렇게 만드는 자가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무는 최초의 세계 전개의 앞에 있고, 공은 모습을 지닌 여러 사물들의 시원이다'고 한 것이며, 이 때문에 '본무'라 한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만물을 생겨나게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도안은 무가 절대무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무는 원기이다. 이 원기는 차별된 모습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텅 빈 듯하여 아무 모습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무는 축법심의 경우와 같이 무명, 무형의 무이지 어떠한 존재도 없음을 의미하는 절대무나 허무가 아니다.


현상적 존재들은 절대무의 상태에서 홀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원기의 자연스러운 산출로서 나타난 것이다. 도안은 이러한 존재론에 기초하여 진속이제를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본무는 진제이고, 말유는 속제이다'.


진·속 이제에 대한 이러한 규정은 축법심의 경우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의 경우에도 진제와 속제는 서로 다른 대상을 갖는다.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본무는 말유의 본체이기 때문에 진제 또한 속제의 본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도안은 진속이제를 본말의 구조에 적용시켜 표현하기도 한다. '진제는 속제의 근본이 된다.'



이처럼 공의 세계와 현상계의 관계를 本末(본말), 有無(유무)의 틀에 맞추어 설명하는 방식은 後漢末(후한말)에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일어나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玄學(현학)의 貴無論的(귀무론적) 사유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현학의 선구자인 王弼(왕필)은 老子(노자)에 대한 주석에서 '무'를 만물의 근원, 도의 근본으로 보면서 무위자연의 도를 체득한 성인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내세웠으며, 이것이 위진 사상계의 중심적 위치를 점유하였다.


왕필의 관심은 현상계의 잡다를 포괄할 수 있는 형이상학적 존재로서의 무규정적 본체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 형이상학적 본체를 무로 상정하여, 귀무론적 세계관을 확립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상적인 모든 존재는 유이며, 이들은 본체인 무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이 때의 무는 유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상대적인 무는 아니며, 오히려 형이상학적으로 추상화된 절대 그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적 일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에 의하면 무는 잡다한 현상적 존재를 산출하지만 그 자체는 잡다가 아니라 일자이며, 개념적으로 파악되지 않으므로 무형이고 무명이다.


따라서 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의 허무가 아니라 무형무명의 무이다. 왕필은 이를 '모습이 없고 이름지을 수 없는 도가 만물을 처음 만들어냈다'고 표현한다.


축법심이나 도안은 왕필류의 현학이 이룩한 본말론적 사유구조를 그대로 받아들여 공의 의미를 본무로 규정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진제와 속제를 서로 다른 존재로 보는 사고방식은 본무의뿐만 아니라 격의불교의 다른 이론에서도 나타난다. 識含義(식함의)를 주장한 于法開(우법개)는 [惑識二諦論(혹식이제론)]을 지었고, 幻化義(환화의)를 주장한 道壹(도일)은 [神二諦論(신이제론)]을 지었으며, 心無義(심무의)를 주장한 僧溫(승온)은 [心無二諦論(심무이제론)]을 지었고, 緣會義(연회의)를 주장한 于道(우도)는 [緣會二諦論(연회이제론)]을 지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이제가 이들의 주된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이 저작들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지만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자료들을 통하여 대체적인 윤곽은 잡아볼 수 있다.


心無義(심무의)는 만물이 무가 아니며, 무는 단지 마음의 無心(무심)을 의미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 이론은 본무의 이론과는 상반되는 것으로서 현상적인 모든 존재가 實有(실유)로서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은 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만물을 대하는 인식주관은 이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만물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객관적으로 실유하는 만물을 주관적으로 부정하여 무화시켜버린 마음의 상태인 무심을 무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심무의에서 무란 전적으로 인식론적인 것이며, 존재론적인 언명이 아니다. 이러한 바탕에서 진제와 속제를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규정한다.


(객관적으로) 色(색)이 존재하므로 속제이며, 마음에는 (색이) 없으므로 진제이다.


여기에서도 진제와 속제는 서로 다른 대상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만약 객관적으로 실유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에서만 멈추게 된다면 이는 속제의 단계이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이를 주관적으로 부정하여 색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게 된다면 이는 진제인 것이다.


심무의의 이러한 이제론은 현상계를 속제로 보는 점에서 본무의의 이제론과 일치한다. 그렇지만 본무의가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를 진제로 보는 데 반하여 심무의는 현상계의 주관적 부정을 진제로 보기 때문에 이 점에서는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진제가 현상계 그 자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 현상계를 떠난 관념의 세계이거나, 초월의 세계라는 점은 서로 일치한다.


識含義(식함의)는 三界(삼계)가 모두 꿈과 같아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서는 사라져버리며, 그 상태가 바로 공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길장이 이를 비판하여 '世諦(세제)를 잃는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식함의에서 진제는 깨달음의 세계로서 세계가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을 의미하고, 속제는 현상계가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세계를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제론은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인 위상이 서로 다른 존재로 규정하는 점에서 본무의 이론과 일치하며, 진제가 속제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심무의 이론과 일치하고 있다.


幻化義(환화의)는 세제인 존재는 모두 환상과 같아서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은 현상계를 세제, 곧 속제로 보고, 환상이 사라진 상태, 곧 현상계가 소멸한 상태를 진제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식함의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緣會義(연회의)는 인연이 모여 존재가 있게 되는 것을 세제, 곧 속제라 하고, 인연이 흩어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을 제일의제, 곧 진제라고 규정한다. 이것은 현상계의 존재론적인 변화를 세제와 진제로 규정하는 것이다. 현상적으로 존재할 때에는 속제이지만, 인연이 흩어져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면 진제라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본무의 이론처럼 현상의 배후에 어떤 본체를 상정하여 현상의 존재론적 지위를 부정하거나, 심무의처럼 실유하는 현상을 주관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으며, 식함의나 환화의처럼 현상계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인연으로 존재하는 현상계를 존재론적으로는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존재하는 세계는 결국 궁극적이지 않은 속제의 세계이며, 진제의 세계는 이 현상계가 존재론적으로 소멸해버리는 상태라고 규정한다는 점에서, 진제와 속제는 엄연히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른 대상을 가진다는 점에서 위의 이론들과 그 구조를 같이 한다. 더구나 진제가 속제의 소멸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처럼 격의불교의 이론들은 기본적으로 공을 무와 동일시하는 바탕에서 무의 성격을 규정하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론들을 제시하였다. 심무의를 제외한 격의불교의 이제론은 모두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인 것으로 규정하여, 존재론적 위상이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제를 속제인 현상계를 부정하거나 떠난 세계로 규정하였다.


심무의는 진제를 존재론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인신론적 부정으로 보았다. 이처럼 격의불교의 이제론은 진제와 속제의 대립구조를 전제로 속제인 현상계와는 다른 진제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으며, 진제의 세계야말로 궁극적으로 지향해 나아가야 할 세계로 보았다. 진제와 속제를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속제의 부정이나 초월을 통하여 진제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격의불교의 이제론은 결국 현상을 떠난 초월의 세계를 따로 상정하는 것으로 이끈다. 본무의를 주장한 도안이 공을 현상계의 본체인 무형무명의 무로 규정하는 것도 결국은 이 무를 통하여 잡다한 현상계의 온갖 번뇌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왕필류의 현학에서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聖人(성인)을 無(무)를 체득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과 상통한다. 현학의 이러한 성인관은 본체로서의 무를 강조함으로써 잡다한 현상의 가치를 격하시키고 궁극적으로는 관념적으로 잡다의 세계를 떠나 무의 세계로 마음이 돌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본무에 마음을 두면 헛된 생각들이 모두 사라진다'는 도안의 말은 이러한 생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卽色義(즉색의)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支遁(지둔)에게서도 나타난다.

지둔은 도안이나 축법심이 그러했던 것처럼 초월하여 나아가야 할 세계와 현상계를 존재론적으로 분명하게 구별한다. 이러한 사유는 그가 당시 유행하고 있던 郭象(곽상)류의 초월이론에 반대하여 제시한 초월이론에서도 볼 수 있다.


郭象(곽상)은 모든 존재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이 逍遙(소요)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따로 초월해야 할 대상도 없고 초월해 나아가야 할 세계도 없다. 이것은 분명히 절대적인 현상 긍정의 존재론이며, 이 세계 밖의 다른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이러한 세계관의 기초는 만물의 獨化論(독화론)이다. 獨化(독화)란 모든 존재가 어떠한 발생론적인 본체나 형이상학적 본체를 가지지 않으면서 스스로 존재함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그 자체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차별적인 그대로가 바로 절대 긍정해야 할 상태이다.


따라서 차별성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 곧 소요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요론을 전개하는 곽상류의 현학에서 이상적 인간으로 내세우고 있는 성인은 현상적인 모든 존재에 대하여 차별하는 마음이 없으며,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무심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심무의에서 말하는 현상의 주관적 부정으로서의 무심과는 다르다. 성인은 세상을 부정하고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과 자연스럽게 조화하며 결코 세상과 대립하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이러한 소요이론에 반대하여 지둔은 다음과 같은 소요이론을 전개하였다.


지둔의 소요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소요라고 하는 것은 至人(지인)의 마음을 밝히는 것이다. 莊子(장자)는 大道(대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 뜻을 붕새와 메추라기에 의탁하였다. 붕새는 삶을 꾸려가는 길이 너무 넓으니 몸 밖에서 알맞음을 잃은 것이고, 메추라기는 가까운 데 있으면서 멀리 있는 것을 비웃으니 마음 안에 자랑함이 있는 것이다.


지인은 자연의 올바름을 타고 높이 올라 끝없이 노닌다. 그리하여 사물을 사물로서 대하지만 사물에 구속되지 않으니 아득히 自我(자아)가 없으며, 현묘하게 감응하여 억지로 하지 않고 빨리 하지 않아도 빠르게 되니 두루하여 적합하지 않음이 없다.


이것이 소요하게 되는 이유이다. 만일 욕망이 남아 있다면 당연히 만족시켜야 할 바가 있게 된다. 만족시켜야 할 바를 만족하게 하면은 마음이 상쾌하여 자연스러움 같은 것이 있는 듯하니, 마치 배고픈 사람이 한번 배부르게 먹고 목마른 사람이 한번 물배를 채우는 듯하다.


그렇지만 어찌 양식에 대하여 요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마실 것에 대하여 잔을 끊어버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니 진실로 至足(지족)이 아니라면 어찌 소요할 수 있겠는가 ? 이것이 向秀(향수)와 郭象(곽상)의 주석이 다하지 못한 바이다.


지둔은 현상의 차별적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려는 곽상의 소요이론과는 달리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현상계를 떠난 절대적인 소요의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그것은 완전히 욕망을 제거한 지인의 세계이고, 붕새나 메추라기와 같은 크고 작은 상대적인 세계를 넘어선 것이다.


만일 이러한 초월의 경지를 상정하지 않은 채, 곽상이나 상수처럼 단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만을 소요라고 한다면, 걸이나 도척처럼 본성이 잔혹하여 남을 해치는 사람들도 본성에 따라 산 것이므로 소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그러한 잘못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적이고 차별적인 현상계를 넘어선 절대적인 소요의 세계를 상정해야만 한다. 그 세계는 배고플 때 한번 배부르게 먹고, 목마를 때 한번 물배를 채우는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경지가 아니라 근원을 잡고 있어서 무궁한 세계이다.


그러므로 지둔에게 초월이란 이 세계를 넘어서 다른 세계로 가는 것이며, 지향해 나아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게 된다. 그 세계를 지둔은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 또는 至無(지무), 本無(본무)라고 한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오묘한 것의 근원이며, 여러 지혜의 현묘한 근원이다. 神王(신왕)이 말미암는 바이며, 如來(여래)가 비추는 공덕이다. 그것이 經(경)이 되매 지무로서 텅비었으며, '하니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사물에 대하여 사물이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사물을 다스릴 수 있으며, 지혜에 대하여 지혜라고 여기지 않으므로 지혜를 운용할 수 있다.


그러므로 三脫(삼탈)을 더욱 현묘한 경지에서 없애고, 만물을 空(공)하여 동일한 영역에서 가지런히 한다. 여러 부처의 근원을 밝히고, 모든 존재의 본무를 다한다. 十住(십주))의 묘한 계단을 올라가고 태어남이 없는 길로 나아간다. 왜 그러한가 ? 지무에 의지하기 때문에 작용이 있는 것이다. ··· 지극한 이치는 어둑하니 비어 이름이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이름도 없고 시작도 없는 이것이 도의 본체다.

··· 이치는 변화하지 않으며, 변화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 그러므로 온갖 변화가 이치의 밖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에 따르면 반야바라밀은 여래의 근본적인 깨달음이며, 그 내용은 지무이다. 이 지무는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는 것이지만 결코 허무는 아니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지무는 시작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끝도 없으며, 모든 변화로부터 벗어나 있다. 이것은 잡다하고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현상계와는 다른 세계이다.


이 세계는 지둔이 말하는 초월의 세계고 여래의 세계며, 소요의 세계고 지인의 세계다. 이처럼 지둔이 지향하는 초월의 세계는 곽상과는 달리 현상계를 넘어선 곳에 있는 절대의 세계다. 이 점에서 그는 본무의 이론을 편 도안이나 축법심과 같은 입장에 선다.


'모든 존재는 의탁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으뜸이 없을 수가 없으며, 모든 일에는 말미암는 바가 있으므로 근본이 없는 것이 없다'는 그의 말은 그가 철저하게 왕필류의 본말이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그가 직접 진속이제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한 것은 없지만 결국 반야바라밀의 세계, 초월의 세계, 본무·지무의 세계가 곧 진제이며, 상대적인 차별의 세계, 유의 세계가 곧 속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인식의 차이가 아니라 분명히 서로 다른 존재론적 위상을 갖는 것이다.


Ⅲ. 승조와 소통의 이제론


1. 승조의 이제론

僧肇(승조)는 격의불교의 비판자로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격의불교를 비판하는 가운데 空(공)과 二諦(이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시함으로써 중국불교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먼저 격의불교의 주요한 세 가지 이론인 본무의와 즉색의 및 심무의에 대하여 비판한다.


이 비판을 통하여 승조는 공을 발생론적인 본체인 무명 무형의 무나, 혹은 실유하는 현상계에 대한 관념적 부정인 무심의 무로 보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밝힌다. 그리고 공이란 유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무가 아니라 有無(유무)의 中道(중도)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존재는 有(유)가 아닌 까닭이 있으며, 無(무)가 아닌 까닭이 있다. 유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유라고는 하지만 유가 아니며, 무가 아닌 까닭이 있으므로 무라고는 하지만 무가 아니다. 무라고는 하지만 무가 아니므로 무는 절대적인 허무가 아니며, 유라고는 하지만 유가 아니므로 유는 참된 유가 아니다. 유가 참된 유가 아니고, 무가 현상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유와 무라는 이름은 다를지라도 가리키는 바는 같다. 


··· 존재를 무(無)라고 한다면 邪見(사견)이 잘못되지 않게 되며, 존재를 유라고 한다면 常見이 옳게 된다. 그러나 존재는 무가 아니므로 사견은 잘못된 것이며, 존재가 유가 아니므로 상견은 옳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眞諦(진제)의 말이다.


이처럼 공을 유무의 중도로 파악함으로써 승조는 공의 세계가 현상계를 벗어난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현상계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공이란 단지 현상계가 연기적으로 존재하므로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實相(실상)이라고 하지만, 결코 현상의 배후에 있는 다른 세계를 상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이란 자성적인 현상계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여기에서 비로소 공은 형이상학적 또는 생성론적 본체라는 성격을 벗어나게 된다.


공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다시 진속이제에 대한 이해로 연결된다. 우선 그의 이제론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는 언표될 수 없는 공한 세계 그 자체를 진제라고 보는 것이고,

둘째는 속제와 진제가 모두 이 공한 세계에 대한 언표라고 보는 것이다.

먼저 언표될 수 없는 공한 세계 그 자체로서의 진제에 대하여 승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제는 개념적인 가르침의 밖에서 홀로  고요하다.'


여기에서 진제는 격의불교의 이제론에서와 같이 진리의 세계 그 자체를 뜻한다. 그런데 승조가 보는 진리의 세계란 결국 현상이 공하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가 현상이 부정되는 곳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격의불교의 이제론이 그 기본구조에서 현상계를 속제로 놓고, 현상계가 사라진 궁극의 세계, 무의 세계를 진제로 놓는 것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말을 살펴보면, 어찌 만물을 모두 없애버리고 감각을 틀어막아 아무것도 없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진제라고 말하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사물의 본성에 나아가 거스르지 않기 때문에 사물 또한 거스르지 않는 것이다.


격의불교의 이제론에서는 진리의 세계를 진제라 하고, 현상계를 속제라고 하였다. 그리고 진제는 결국 속제의 부정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승조는 현상계를 진리의 세계인 진제와 대립되는 속제로 보지 않으며, 현상계의 참다운 본성인 공함이 곧 진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승조는 진제가 결코 현상의 부정으로 나타난 존재론적이거나 인식론적인 또 다른 세계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제는 결코 현상의 부정이 아니며, 격의불교의 이론가들이 현상을 속제로 놓았던 것으로 보자면 속제의 부정도 아니다. 진제라고 한 것은 세상의 참된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할 뿐이다.


여기에서는 진리의 세계로서의 진제에 대립하는 개념으로서의 속제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렇지만 속제를 진리에 대한 언어적인 가르침으로 보고 진제를 그 내용으로 보는 中論(중론)의 이제론에 비추어볼 때, 이럴 경우의 속제는 진제에 대한 언어적인 가르침 또는 언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승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진제조차도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언어적 가르침, 또는 언표로 본다. 여기에서 승조의 이제론이 갖는 독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승조는 언표로서의 속제와 진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진제로써 有(유)가 아님을 밝히고 속제로써 無(무)가 아님을 밝힌다. 그러므로 어찌 이제로써 두 가지 다른 대상을 가리키겠는가?


여기에서 승조는 진제와 속제가 서로 다른 세계를 그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세계, 곧 공한 현상계에 대한 언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격의불교의 이론가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진제와 속제는 존재론적으로 대립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존재, 곧 현상계에 대한 언표로서 상호보완적인 위치에 있다.


진제나 속제 어느 하나라도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것은 현상계의 공한 모습은 언어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계는 개념적인 사유로써 파악될 수 없는 것이지만, 현상계의 참된 모습을 가르치기 위한 방편으로 진제와 속제의 가르침을 사용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관념에 사로잡혀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할 때 그러한 관념을 부정하여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이 속제라면, 진제는 이 속제의 가르침을 다시 고정관념화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속제가 일상의 언어에 대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면, 진제는 가르침으로 사용된 언어에 대한 집착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속제와 진제는 고정적인 형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매우 변증법적이다. 즉 그가 말하는 바 '속제로써 비유를 밝히고 진제로써 비무를 밝힌다'고 한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다. 세속인들이 세상은 實有(실유)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 관념을 깨뜨리기 위하여 세상은 '유가 아니다(非有;비유)'라는 가르침을 사용한다. 이것이 속제이다.


그러면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세상이 유와 대립되는 개념인 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하여 세상은 '무가 아니다(非無)'라는 가르침을 사용한다. 이것이 진제이다. 여기에서 진제의 가르침으로서의 非無(비무) 안에는 이미 非有(비유)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말은 참으로 진제의 말이다'라는 말을 통하여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를 모두 가르침으로 보는 이제론은 인도 중관학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승조만의 독특한 이론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언어가 가지는 한계성과 도구적인 유용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공과 이제의 바탕 위에 성립된 그의 초월론에서는 당연히 현상계를 떠난 다른 세계로의 초월을 상정하지 않는다.


성인은 온갖 변화를 타지만 변화하지 않고, 온갖 미혹됨을 밟지만 항상 통한다. 이것은 만물이 스스로 텅 빈 것에 나아가서 텅 빈 것을 빌리지 않고서도 만물을 텅 빈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매우 기이하도다, 세존이시여! 참된 경지를 움직이지 않으시면서도 모든 존재가 설 자리가 되십니다. 참됨을 떠나지 않으시면서도 설 자리를 삼으셨기 때문에 서는 곳이 바로 참된 곳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하니 도가 멀리 있는가? 접하는 것마다 모두 참된 것이다. 성인이 멀리 있는가? 체득하면 바로 신묘하게 되는 것이다.


공이 현상계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일 뿐, 현상계를 떠난 다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진제와 속제가 단지 도구적인 것으로서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초월의 세계 또한 존재론적으로 현상계 밖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지혜를 얻은 성인은 그렇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본체를 체득하여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無化(무화)시켜버린 사람도 아니며, 존재론적으로 참된 존재인 현상을 주관적으로 무화시켜버린 사람도 아니다. 그는 현상이 공하다는 진리를 올바로 체득한 사람이다. 누구든지 그것을 체득하기만 하면 곧 성인이 되는 것이며, 초월하는 것이다. 그 초월의 세계가 현상을 떠난 것이 아니며, 체득의 내용이 현상의 올바른 모습이기 때문에, 그것을 체득한 사람에게는 현상이 그대로 진리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진리는 현상을 떠나있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참된 모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초월의 세계가 세속적인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은 그에게 매우 분명한 것이다.

승조의 입장에서 볼 때 현상을 떠난 다른 곳에서 초월의 세계를 구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세계를 가정하고서 그곳에 이르고자 하는 것처럼 헛된 일일 뿐이다. 여기에서 초월계와 현상계는 더 이상 이원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공한 현상을 공하지 않은 것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인식주관에 문제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은 인식주관이 현상의 참된 모습을 올바로 파악하는 데서 성립하는 순전히 인식론적인 사건일 뿐이며, 어떠한 존재론적 변화도 수반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는 세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깨뜨리고 현상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고안된 언어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2. 소통의 이제론

소통은 이제와 法身(법신)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을 가하였으며, 이에 대하여 여러 승려, 속인들과 문답을 전개하였다. 그는 먼저 이제를 다음과 같이 파악한다.


이제라고 하는 것은 하나는 진제고 다른 하나는 속제다. 진제는 제일의제라고도 하며, 속제는 세제라고도 한다.··· '眞(진)'이라고 하는 것은 실답다는 뜻이니, 평등하다는 것이며, 사이에 끼어들어 뒤섞일 수 있는 다른 법이 없다는 것이다. '俗(속)'이라는 것은 모인다는 뜻이니, 이 법이 생겨나자 헛되고 거짓된 것이 일어났다.


'第一義(제일의)'라고 하는 것은 생겨남이 없는 경지에 나아가 따로 아름다운 이름을 세운 것이니 이 법이 가장 뛰어나고 가장 미묘하여 이에 미칠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世(세)'라고 하는 것은 떨어져 있다는 뜻이니, 생겨나고 사라지고 하여 흘러 움직여서 머무름이 없는 모양이다. ··· 진제는 유와 무를 떠났으며, 속제는 유와 무에 나아간다. 유와 무에 나아가는 것은 假名(가명)이며, 유와 무를 떠난 것은 중도다. 진제는 중도로서 생겨남이 없는 것을 體(체)로 하며, 속제는 가명으로서 생겨나는 것을 체로 한다.


여기에서 소통은 진제와 속제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서로 다른 차원의 것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현상적인 세계를 의미하는 속제 · 세제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항상된 모습을 가지지 못하여, 유와 무라는 개념적인 틀로 파악할 수 있는 상대적인 세계인데 반하여 진제 · 제일의제는 아무런 변화가 없이 항상된 모습을 가지며, 유와 무라는 개념틀을 떠난 세계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속제를 가명이라 하며, 진제를 중도라 한다. 이처럼 소통은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으로 전혀 다른 세계로 파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의 이제론을 둘러싸고 다른 사람들과 나눈 문답 속에서 소통은 이러한 이해 가능성을 부정한다.


南澗寺(남간사)의 慧超(혜초)가 물었다. 헛되고 거짓된 것이 일어나는 것이 속제고, 유나 무라는 개념을 떠나 있는 것이 진제라고 한다면, 헛되고 거짓된 것과 참된 것의 體(체)가 당연히 서로 다른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太子(태자)가 답하였다. 세속의 사람들이 아는 것은 생겨나는 것을 체로 삼으며, 세속을 떠난 사람들이 아는 것은 생겨남이 없는 것을 체로 삼는다. 사람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당연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진제라고 하는 것은 유에 나아가 공이라 하고, 속제라고 하는 것은 공을 가리켜 유라고 하는 것이니, 이 뜻에 의거한다면 서로 다를 수 없음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소통은 진제와 속제가 그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다를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진제와 속제의 구별은 진제의 세계와 속제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판이하게 구별되어 존재하는 것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불은 항상 뜨거운데 차갑다고 잘못 보는" 경우처럼 다만 사람들의 인식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일 뿐이다. 즉 같은 현상계에 대하여 세속 사람들은 그저 드러나는 모습만을 보고서 생겨난다거나 없어진다는 식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한번 인식의 전환을 이룬 초세속의 사람은 그것이 단지 겉모습일 뿐, 그러한 변화는 없다는 것을 안다. 인식의 대상은 오직 하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인식의 내용은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통은 진제와 속제를 현상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잘못된 인식이라는 인식상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 진제는 올바른 인식이며, 속제는 잘못된 인식이다. 그러므로 진제와 속제의 구별은 오로지 인식주관인 사람에 의한 구별일 뿐 존재론적 구별은 아니다.


이 점에서 소통의 이제론은 격의불교의 이제론과 다르다. 이것은 또한 진제와 속제를 동일한 진리에 대한 언어적 가르침으로 파악한 승조의 이제론과도 구별된다.


中興寺(중흥사)의 僧懷(승희)가 물었다. 진제가 속제에서 떨어져 있지 않고, 속제가 진제에서 떨어져 있지 않다면, 진제는 相(상)이 없는 것이고, 속제는 상이 있는 것이어서, 상이 있음과 상이 없음은 서로 다른 것인데, 어찌하여 같은 체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태자가 답하였다. 상이 있음과 상이 없음은 여기에서는 같지 않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이 보는 것은 상이 있음이고, 성인이 보는 것은 상이 없음이다. 이것으로 논한다면 둘 아닌 것이 가능하다.

다시 물었다. 이미 하나의 법이라고 한다면, 어찌하여 보는 것에 둘이 있게 되는가? 보는 것이 둘이라면 이것이 어찌 하나의 법이겠는가 ?

태자가 답하였다. 이치는 둘이 아니지만 다만 사람이 보는 바에 따라서 둘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둘이라면 어찌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

태자가 답하였다. 만일 법에 실제로 둘이 있다면 서로 어긋날 수 있다. 그러나 법은 항상 둘이 아니며, 사람이 보는 것이 둘일 뿐이다. 이로써 말하자면 어찌 서로 떨어질 수 있겠는가?

다시 물었다. 사람이 보는 것이 둘이라면  사람이 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치가 이미 하나인데 어찌 둘일 수 있는가 ?

태자가 답하였다. 이치는 비록 둘이 아닐지라도 사람에 의하여 둘로 이루어진다.


이처럼 진제와 속제가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가 아니고, 현상과 진리의 세계가 존재론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단지 인식상의 옳고 그름만 있을 뿐이라면, 초월해 나아가야 할 세계가 현상계를 떠난 곳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초월의 세계를 따로 상정하는 것은 인간의 잘못된 인식에 말미암은 것일 뿐이다.


현상계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게 되면 이러한 잘못된 관념들은 사라지며, 잘못된 관념이 사라지면 진제와 속제의 구별도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진제와 속제 모두를 잊게 된다고 말한다.


始興王(시흥왕)의 다섯째 아들 蕭曄(소엽)이 물었다. ··· 보살이 진리를 깨칠 때 속제와 진제를 잊어버리는가 그렇지 않은가 ?

태자가 답하였다. 속제도 진제도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쳤다고 한다. ··· 만일 속제와 진제를 보존하고 있다면 어떻게 실답고 참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바로 이 둘을 버렸기 때문에 실답고 참되다고 하는 것이다.

··· ··· 

다시 물었다. 보살이 진리를 깨치면서 이미 속제와 진제를 잊었는데 지금 그것을 실답고 참되다고 부른다면 이치에 어긋나게 된다.

태자가 답하였다. 임시적인 이름으로 실답고 참되다고 하는 것이지, 궁극적으로는 참되다고 하는 것조차 잊는 것이다.


여기에서 소통은 참된 깨달음의 세계가 모든 개념적인 차별을 넘어선 경지임을 밝히고 있다. 그 세계에서는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의 개념적인 분별을 넘어서 있을 뿐만 아니라, 참되고 거짓된 것이라는 것조차 없다.


현상계와 초월의 세계라는 관념이나, 본말적인 사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진리라고 하는 것조차 임시적인 이름일 뿐, 상대적인 구별 속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처럼 현상계의 참된 모습이 언어적인 표현을 떠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소통은 승조와 견해를 같이 한다.


모든 개념적인 규정을 떠난 절대 무차별의 세계는 바로 현상의 본래 모습이며,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다. 그 세계는 바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이며,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체득할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진제와 속제를 옳은 인식과 잘못된 인식으로 규정한 소통의 이제론의 당연한 귀결이다.

 

Ⅳ. 맺음말;

격의불교와 승조 그리고 소통의 이제론은 이제에 대하여 가능한 여러 가지 해석의 유형들을 보여준다. 심무의를 제외한 격의불교의 이제론은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 서로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속제는 현상계이며, 진제는 현상계를 초월하거나 현상계가 소멸한 곳에서 나타나는 공의 세계, 무의 세계이다.


이러한 이제론은 필연적으로 현상계를 떠난 곳에 존재하는 초월의 세계를 상정하고 그곳으로 나아가는 초월론으로 이끈다. 여기에서 초월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아니라 현상을 떠난 다른 존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처럼 심무의를 제외한 격의불교의 이론들이 존재론적으로 다른 세계를 상정하는 초월이론을 가지는 데 반하여, 심무의는 현상에 대한 주관적 부정을 통하여 초월을 이룬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그렇지만 심무의를 포함한 격의불교의 이론들은 존재론적이든 인식론적이든 현상의 부정을 통하여 초월을 이룬다고 하는 점에서 일치한다.


승조의 이제론은 진제와 속제를 모두 진리에 대한 언어적인 가르침으로 보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언어의 한계성과 유용성을 바탕으로 진제와 속제를 변증법적 관계에서 파악한 이러한 이제론은 길장에게 이어져 삼론종의 독특한 이제이론으로 발전한다.


그의 이제론은 현상계를 떠난 초월의 세계, 또는 본체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으며, 진리는 현상계의 참다운 모습인 공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진제와 속제는 이에 대한 언어적인 가르침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 또는 해탈은 현상계를 떠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참된 모습에 대한 인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제와 속제는 이를 위한 방편이다.


인식의 전환으로서의 초월 또는 해탈은 소통의 이제론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통은 진제와 속제를 존재론적인 것이나, 언어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인식의 옳고 그름으로 파악한다. 인식의 대상은 동일한 현상계이다.


그러나 진제는 현상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인 데 반하여 속제는 잘못된 인식이다. 이러한 이제론은 격의불교와 같이 진제와 속제를 대립적으로 파악하여 진제를 궁극적인 것으로 보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식론적인 것일 뿐 존재론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월은 인식론적인 것일 뿐 존재의 변화나 부정을 동반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중국불교의 초월 또는 해탈이론은 초월적인 세계와 현상계를 존재론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로 상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그러한 차별을 없애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이러한 전개는 이후의 중국불교사의 흐름을 놓고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후대에 발달된 종파불교의 초월이론이 華嚴宗(화엄종)의 事事無碍法界論(사사무애법계론)이나 禪宗(선종)의 修行論(수행론)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로 이러한 노선에 따라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초월이론은 진제와 속제에 대한 이해의 변화를 통하여 가능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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