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불교·한국불교 논문및 평론

화두참구의 심리학적 접근

실론섬 2014. 6. 15. 17:56

화두참구의 심리학적 접근

인경스님(동방대학원대 자연치유학과 교수. khim56@hanmail.net)


Ⅰ 머리말. 

Ⅱ 화두의 조작적 정의. 

Ⅲ 화두참구의 역사적 원류. 

Ⅳ 화두참구의 심리학적 고찰. 

Ⅴ 결론.


Ⅰ. 머리말


‘화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간화선의 의미와 참구방법을 묻는 중요한 질문이다. 최근에 간화선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이점에 대한 논쟁이 일고 있다. ‘무자’만이 화두이고 ‘이뭣고’는 화두가 아니다는 성본의 주장에 대해서 월암은 무자공안만이 화두라고 한 점과 이뭣고 화두에 대한 역사적인 증거를 들어서 비판하면서, 화두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런 논쟁은 현대에서 간화선의 성격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 점에서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성본은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만이 유일한 간화선의 공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배경에는 간화선의 수행구조를, 번뇌 망념의 중생심[不覺]에서 본래의 불심[本覺]으로 되돌아가도록 하는 수행구조라고 보고, 이때 무자 공안이 그 방편으로 활용된다고 본다. 간화선의 수행구조를 ?기신론?의 중생심과 본래심의 용어로 설명한 점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왜 하필 무자는 가능하고, 이뭣고는 되지 않는가? 


이점에 대해서 성본은 이렇게 대답한다. 간화선은 문제제기의 의심과 본래심의 자각적인 참구라는 이중구조로 이루어졌다. 이때 이뭣고는 문제제기의 의심을 참구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두 번째의 본래심에 대한 자각적인 참구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뭣고는 문제제기는 가능하지만, 본래심의 대문을 두드리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화두를 들어야 본래심에 되돌아올 수가 있는가? 이점에 대해서 성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번뇌 망념이 일어날 때, 수시로 無라는 화두를 본래심의 소리로 제시하여 無라는 본래심의 소리를 또렷하게 듣고 자각하는 것이다.” 또한 간화선의 무자는 “마치 밀교의 ‘옴’자와 같이 근원적인 불성의 지혜작용인 법음을 제시하여 일체의 차별심, 사량 분별심을 초월하도록 하고 있는 방편적인 문자인 것이다.” 


이렇게 성본의 주장에 의하면, 이뭣고 화두가 문제제기의 의심에 머물고, 오직 무자화두만이 본래심의 자각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특히 간화선의 참구방법으로는 무자라는 소리에 초점을 맞춘 점이 그 특징이라 말할 수가 있다.


이런 성본의 주장에 대해서 월암은 매우 심각한 수준으로 비판을 한다. 화두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점에 대해서 월암은 중국과 한국의 많은 간화선자들의 문헌적 사례를 들어서, 화두참구의 본질을 의심으로 규정하고, 의심이 없으면 화두참구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오직 의심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화두참구의 이중구조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의심을 본질로 하는 화두는 무자화두를 비롯하여 수많은 화두가 제시되고 있고, 화두에는 좋은 화두, 나쁜 화두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다음으로 이뭣고 화두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수행한 사례가 없다는 성본의 주장에 대해서도, 월암은 한국과 중국의 선종사에 나타난 많은 사료를 제시하여 이점을 비판하고 이뭣고 화두는 오랜 역사적인 전통성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의 한국을 대표하는 선승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화두임을 강조한다.


이상의 화두참구와 관련된 논쟁에서 드러난 몇 가지의 과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화두는 어떻게 정의되고, 그 본질은 무엇인가? 둘째는 간화선에서 화두참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혹은 그 수행구조는 존재하는가? 이런 주제는 간화선에 중요한 과제들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과제들에 대해서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고찰하여보고자 한다. 여기서 심리학적이란 관점이라고 하는 점은 다음과 같은 점을 염두에 둔 까닭이다. 일단 간화선이 기본적으로 스승과 제자 간의 문답에서 비롯된 점, 화두참구가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으로서 작용할 때, 그것은 매우 개인적이고 심리학적인 측면을 가진다는 것, 간화선이 인간의 본성에 그 철학적인 기반을 둔다고 할 때, 본성은 현대 심리학에서 이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 하는 점들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전통적인 문헌적인 연구나 해석학적인 측면보다는 심리치료나 상담과 같은 보다 현실적인 적용을 전제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간화선의 임상적인 연구의 방법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통적인 문헌적인 연구의 성과를 기반하여 보다 심리학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고 해석하고자 노력의 일부이다.


Ⅱ. 화두의 조작적 정의 


가장 먼저 대두되는 문제가 화두에 대한 정의이다. 무엇을 화두라고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규정되어야 혼란을 피할 수가 있겠다. 조작적이란 말은 현장연구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서, 이론에 기반하여 보다 현장에 초점을 맞추어서 핵심용어를 정의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문헌적인 측면보다도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한 관점이다. 


간화선에서 화두를 말할 때 항상 함께 사용되는 용어가 공안이다. 일반적으로 공안과 화두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같은 의미인가? 만약 일반적으로 사용하듯이 공안과 화두를 동일시하면 공안의 출현이 곧 화두의 출현, 간화선의 성립이 된 시점으로 평가할 수가 있다. 이점에 대해서 필자는 공안과 화두를 엄격하게 구별할 것을 제안한 바가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화두의 정의문제뿐만 아니라, 선종사의 시기구분 문제와 직결되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간화선의 정체성을 세우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공안은 문자적으로는 관공서의 공문이란 의미로 일반적인 선문답을 가리킨다. 공안의 출현은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중시되는 조사선이 성립된 혜능 이후로 본다. 만약 공안과 화두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게 되면, 화두의 성립 곧 간화선이 당대의 8세기에 성립된 결과가 된다. 다음으로는 간화선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인데, 만약 공안과 화두를 구별하지 않는다면, 간화선은 과거의 당송대의 문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현재의 과제를 다루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간화선을 창립한 대혜종고는 스승이 발간한 공안집을 불태우고, 공안에서 의심하는 것을 비판하고, 옛 사람의 공안을 잡다한 독, 쓰레기 같은 말이라고 비판한 이유이다. 때문에, 공안과 화두는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간화선의 역사와 그 정체성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이 된다. 그래서 공안은 선문답의 일반을 가리키는 사례이고, 화두는 그 사례로서의 공안 가운데 핵심을 관통하는 하나의 언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런 정의에도 역시 문제가 있다. 왜냐면 화두의 본질을 일단 의심으로 볼 때, 공안의 핵심을 관통하는 ‘무자’나 ‘이뭣고’라는 언구 자체가 화두일 수는 없다는 점이다. 명상수행자에게 현실 속에서 아무런 의심이나 동기를 제기하지 못할 경우, 이때도 역시 무자나 이뭣고를 화두라고 지칭해야 되는가? 다시 말하면 수행하는 당사자에게서 의심이 없으면 그것을 화두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존의 화두에 대한 정의가 너무 문헌적이거나 과거의 선문답에 한정된 까닭에, 명상수행의 현실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간화선을 과거가 아닌, 지금여기의 현재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화두를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작적으로 정의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화두를 <명상수행자가 지금여기 현재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절실하게 의심하고 참구하는 실존적 자기문제>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라는 3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누가는 명상수행자의 당사자를 가리킨다.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공안이고 진리라고 해도 수행하는 당사자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우선적으로는 내게 ‘무자’나 ‘이뭣고’가 의미를 가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들이 내게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이것은 화두가 아니라, 지나가는 소리이거나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다. 화두는 수행 실천하는 당사자인 ‘나’의 절실한 실존의 문제여야 한다는 기준이다.


두 번째는 ‘무엇’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반드시 과거의 선문답에 기준점을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에 대한 물음이면 된다는 측면이다. 모든 선문답은 본래면목, 본성, 근본적인 한 물건에 관한 논의가 아닌가? 그렇다면 반드시 당송대의 선문답에 천착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부부간의 갈등이나 우울증의 문제도 그것의 접근방식이 본성, 본래면목에 초점을 맞춘다면, 역시 화두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점은 화두를 과거의 문답에서 해방시켜서, 현재의 과제로 되돌아오게 하는 기준이다. 이때야 비로소 화두는 생명력을 회복한 활구가 된다.


셋째는 ‘어떻게’ 문제이다. 이것은 화두참구의 방식을 말한다. 화두참구의 방식은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이나 염불수행과는 다른 방식임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남방의 수행은 대상, 현상을 관찰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래서 그것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하게 된다. 반면에 염불법은 소리에 집중함으로써 본래의 마음에 다가간다. 화두의 방식은 의심을 통한 깨달음이다. 여기서 의심은 사량분별을 의미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량분별을 끊어내는 본성에 대한 직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런 정의는 전통적으로 전해지는 분심, 믿음, 의심이라는 화두참구의 3요소와 비교된다. 분심은 ‘누가’에 해당되는 바로서 참구자의 당사자의 실존적인 문제라면, 믿음은 ‘무엇’을 참구할 것인가라는 주제로서 본래심, 본래면목이라는 대승불교의 불성사상에 기초함이고, 의심은 ‘어떻게’라는 참구의 방식을 말한 점에서 상통된다.


이상으로 새롭게 정의된 화두에 의하면, ‘무자’와 ‘이뭣고’는 그 자체로는 화두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수행하는 개인에게, 자기의 본성에 대한 실존적인 과제로서, 의심이 가슴에서 현저하게 발생될 때, 이때야 비로소 우리는 이것을 화두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단순하게 과거의 고칙인 까닭에 화두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간화선의 영역을 과거의 유물로서 당․송대의 동어반복에서 해방시켜서, 현제의 과제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Ⅲ. 화두참구의 역사적 원류


공안이 역사적으로 발생한 문답을 가리키고, 화두는 수행하는 당사자가 공안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는 것으로 구별할 때, 공안은 역사적인 관점과 문헌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화두는 심리적이고 실존적인 자기문제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런 차이점을 오늘날 대표적인 공안인 이뭣고와 무자를 중심으로 성립된 당시의 문답을 다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공안에 대한 문제의식이 바로 화두이기 때문이다. 


⑴ 당대의 이뭣고 

먼저 ‘이뭣고’ 공안의 경우에 당 나라, 특히 마조계통에서 비롯되었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미의 시심마(是甚麽)의 번역어이다. 이 공안은 마조화상과 무업과의 문답에서 비롯되었다. 

마조는 훤칠한 용모의 무업(無業, 780-821)을 보고, “커다란 법당인데 그곳에 부처가 없구나.”고 말하였다. 그러자 무업은 절을 하고 물었다. “교학은 대략 공부를 했지만, 선문에서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데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때 마조는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하자, 무업은 다시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와서 전한 심인은 무엇입니까?” 이때 마조는 “정말 소란스럽군, 우선 갔다가 다음에 오게.”라고 말했다. 무업이 일어나서 나가는 때에 마조는 “이보게.” 무업을 불렀다. 무업이 고개를 돌려보자, 마조는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때 무업은 깨닫고 마조에게 절을 하였다.


이 문답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용어는 ‘이것이 무엇인가’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의 성격은 수련자인 무업이 스스로에게 행한 질문이 아니라, 스승인 마조가 무업에게 했던 일종의 발문이다. 발문이란 스승이 제자를 깨우치기 위해서 하는 질문을 가리키는 교육학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이것을 화두라 하지 않고 공안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무업이 마조의 마지막 질문을 받고 여전히 알지 못해서, 돌아가는 길에 이 스승의 발문에 대해서 스스로 의심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자기의 과제로서 참구한다면, 이것은 화두라고 부를 수가 있겠다.


그러면 이때 마조의 발문은 무업의 깨달음에 어떻게 작용을 했는가? 이것은 심리학적인 관점으로서 세 가지로 구별할 수가 있다. 첫째는 사량분별을 끊어냄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부분을 교학적인 이해나 개념적인 관념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를 배제하는 것이다. 알지 못하는 그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무업은 여전히 달마대사가 온 듯을 다른 질문을 한다. 이것은 개념적인 지식으로서 논리적인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조는 무업을 되돌려 보낸다. 둘째는 마음 그 자체에 직면하게 한다. 이점은 개념적인 이해가 무너지면서 발생되는 두 번째의 단계이다. 마음이 부처라는 것과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의미가 개념적으로 이해되지 못한다면, 이것들이 모두 부정된다면, 무엇이 남는가? 이것은 바로 지금여기의 마음이다. 무업이 되돌아보았을 때,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무업으로 하여금 개념적인 이해를 벗어나서, 지금여기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한다. 셋째는 분별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본래의 마음을 깨닫게 돕는다. 이점은 본성, 혹은 불성에 대한 직접적인 자각을 가능하게 한다. 분별적 마음에 대해서는 초월이고, 근본적인 마음자리에 대해서는 계합, 혹은 체험이 발생됨을 말한다. 이것은 유식불교의 용어로 말한다면 마음현상[心所法]이 아닌 마음자체[心體]로서의 본질에 도달함을 말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사량분별의 배제 → 지금여기에의 직면과 접촉 → 마음자체의 깨달음(초월)


이 3가지는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성격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은 일시에 일어날 수도 있고, 점진적으로 발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문답은 언제나 지금여기의 과제에서 비롯되고, 지금여기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는 점이다. 위의 문답에서 이점이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아마도 이런 사례를 찾는 일은 어렵지가 않다. 이를테면 백장과 위산의 경우이다. 어느 날 백장화상이 위산에게 화로에 불씨가 남아 있는지를 확인하여 보라고 말했다. 위산은 대충 뒤져보다가 “불씨가 없다.” 말하였다. 그러자 백장은 일어나서 손수 화로를 뒤졌다. 그리고 작은 불씨를 찾아내서 위산의 눈앞에 보이면서, “이게 불씨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되물었다. 이 순간에 위산은 깨닫게 되었다.


이 공안의 경우에도 핵심된 언구는 ‘이게 무엇이냐, 이게 불씨가 아니냐’라는 반문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더욱 분명하게 지금여기에의 직면이 강조된다. 화로란 겨울에 방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다. 그런데 화로에 불씨가 없다고 말하는 위산에게 백장이 직접 불씨를 찾아서 눈앞에 내밀면서 이게 불씨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묻는 순간은, 위산이나 백장에게는 먼 과거의 역사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철저하게 경험하는 현실적인 순간이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언어에 의해서 분별하는 마음이 아닌, 지금여기의 마음에 직면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선사들의 공통된 발문점이다.


⑵ 송대의 무자공안

‘이뭣고’ 공안과는 무자공안의 경우는 그 성립배경이 조금 다른 측면이 있다. 무자의 경우는 지금여기의 현장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공안을 수행자가 의도적으로 의심을 하여 참구하도록 요청하는 주제로 채택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당 시대와는 다른 송대의 특징으로서 전혀 새로운 발상이고 차라리 새로운 발견이라고 평가하는 편이 더 좋겠다.


어떤 승려가 조주화상(趙州, 778~897)에게 질문을 하였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다.” “경전에 따르면,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어찌하여 없다고 말하십니까?” “그것이 업식(業識)의 성품에 머물러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조주록?에 근거한 무자공안이다. 하지만 이 구자무불성화(狗子無佛性話)는 조주화상보다 먼저 마조의 제자인 유관(惟寬, 755~817)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다. 어떤 승려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유관화상은 “있다.”고 대답했다. 그 스님은 “그러면 화상께도 있습니까?”고 묻자, “나에게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렇게 불성의 문제는 선종과 밀접하게 연계된 사상이다. 개에게나 나에게나 불성은 ‘없다.’고 말한다. 경전에는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고 설해지고 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없다고 대답한다. 왜인가? 여기에 의심이 생겨난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되는 무자를, 수행자가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관문으로, 수행의 한 방식으로 인식하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북송 시대의 오조법연(?-1104) 이후였다. 법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중 여러분, (趙州의 狗子無佛性話를) 평소에 어떻게 알고 있는가? 노승은 다만 無字를 들어 문득 쉰다. 그대들이 만약 이 無字만을 투득(透得)한다면, 천하의 사람들도 그대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것을) 투득해야 하는가? 투득한다면, 그것은 철두철미해야 한다. 투득했다면 와서 말해 보라. 나는 있다고 말하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또한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대들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이것은 상당법어이다. 송대에 들어와서 대중이 집단을 이루는 총림이 성립되면서, 정기적인 법문이 행하여 졌다. 이점이 당대와는 크게 달라진 환경이다. 이뭣고 공안이 일상의 삶에서 자연스런 문답의 결과로서 생겨났지만, 수행자가 집단을 이룬 송대에 들어와서 법연의 무자공안은 조사관(祖師關)으로서 설정되고, 대중은 계속적으로 의심하고 수행하여 투득하기를 요청받는다. 이것이 간화선의 출발점이다. ?무문관?의 무문화상도 마찬가지로, 참선자는 조사관을 투득해야 하는데, 대중에게 “무자를 360의 골절과 8만4천의 털구멍으로 의심을 일으켜서 밤낮으로 오직 무자를 참구하라”고 요청한다. 


이렇게 무자공안은 간화선을 창안한 남송 시대의 대혜종고를 거쳐서 ?무문관?에 이르러 수행자의 제일 관문으로 공고한 지위를 얻게 되었다. 조주의 무자는 송대의 법연화상 이후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새롭게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당대의 조주는 투득(透得)의 대상으로서 무자를 계속적으로 철저하게 의심하여 보라고, 결코 말하지 않았다.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문답은 조주화상의 수많은 문답 가운데 하나이고, 그것은 단순하게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러나 송대의 무자는 온 몸으로 의심의 덩어리를 만들어서, 대중이 뚫어야 하는 조사의 관문이다. 이것이 당대의 ‘조사선’과 달라진 송대의 ‘간화선’이다. 이것은 무자의 새로운 발견이었다.


이러한 화두참구의 과정은 역시 몇 개의 단계로 정리할 수가 있다. 여기서 고려후기 간화선에 크게 영향을 미친 ?몽산법어?의 경우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체로 <공안에 의한 문제제기 → 화두의 결택과 참구 → 수행의 단계들 → 돈오와 보임>의 순서로 설해지고 있다. 이것은 화두참구의 전체적인 과정을 잘 보여준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여기서 화두의 결택과 참구의 단계에서 강조하는 첫 번째가 공안에 대한 의심이다. 몽산은 ‘큰 의심이 있으면 큰 깨달음이 있다’고 강조한다. 둘째는 화두를 참구할 때 회광자간(廻光自看)을 강조한다. 이점은 몽상덕이에게 있어 특징적인 측면이다. 마지막으로는 선병으로서 사량분별에 대한 배제이다. 이것은 오조법연 이후로 대혜종고에게서 강조되고, 보조지눌에 의해서 명명된 ‘선문십종병(禪門十種病)’을 말한다. 여기에 의거한다면, 화두참구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과정, 혹은 성격을 가진다. 


 본성에 대한 의심 → 사량분별의 배제 → 회광자간 → 깨달음


이것은 화두참구의 특징이기도 하고 화두참구의 과정을 설명하여 준다. 물론 이것은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이해,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간화선이란 수행자가 본성을 향한 질문으로서 의심을 통해서 사량분별을 배제하고, 지금여기에로의 직면 곧 회광자간을 통해서 자신의 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이루는 공부법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다.


송대에 들어와서 일단 당대의 공안이 의심하여 조사관문을 뚫는 수행의 형태로 정착이 되자, 이런 방식은 무자뿐만 아니라, 이뭣고를 비롯한 다른 모든 공안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그것은 선대의 문답을 이해할 수가 없다면, 그것을 공부의 길로 삼아서 의심하여 참구하여 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무자공안만을 가지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대의 간화선은 점차로 단순하게 되고 특정한 몇 개의 공안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마침내는 오직 무자만이 유일한 제일의 관문이라는 과도한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의 배경에는 선문답이 가지는 개방성과 자발성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관료적인 태도가 가로놓여있다. 다양한 공안에서 하나의 대표를 선출함으로써, 단순화시키고 강력한 실천력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다른 모든 가능성과 점검하는 논의의 과정을 틀어막아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행정적인 관료화된 송대의 간화선은 과거에 천착하면서, 당대의 선문답이 가지는 지금여기의 현재에서 발생되는 활발한 창조성을 죽여 버리고,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유물로서 박물관에 전시된 화석으로 만들어버렸다. 


오늘날 간화선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선대의 공안에서 그 출발점을 잡지 말고, 바로 지금여기의 현재 자신의 문제로부터 결택하여 참구해야하는데 있다. 저기에 그냥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공안은 나의 문제이고 나의 삶이고 나의 이야기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자신의 실존적인 과제로서 절박한 문제의식이 중요하다. 이런 문제의식이 없으면 간화선은 그 성립의 기반이 무너진다. 그래서 모든 선장들은 공안에 대한 절박한 자기의심을 강조한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화두는 바로 의심을 본질로 하고, 의심이 있으면 화두이고 의심이 없으면 그것은 지나가는 개소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현대 한국의 대표적인 선승의 한 분이셨던 구산스님은 좌선을 해석하면서, 반복적으로 의심하여 화두가 수행자의 내부에 자리 잡는 것을 좌(坐)라 하고, 그 결과로서 화두를 계속적으로 일상에서 참구하여 가는 것을 선(禪)이라고 정의한다. 좌선이란, 간화선에서 보면, 앉아서 하는 수행법이 아니라,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화두를 참구하는 공부법이다. 


이렇게 일상에서 참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심이 가슴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가슴에 자리잡기 위해서는 먼저 의심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야 한다. 의심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의심은 바로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당에 모셔진 유물은 실존이 아니다. 분명하게 간화선은 지금여기에서 질문이 발생되어야 한다. 과거의 문답에 천착해서는 활구가 아닌 사구가 된다. 이것이 선대의 공안집을 불태운 대혜종고의 고민이었다. 하지만 그도 역시 이런 시대적인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후로 당대의 문답에서 출발한 송대의 간화선은 스스로 함정에 빠져버렸다. 더욱 형식화되고, 관료화에 침범당하고, 스스로 박물관에 모셔진 골동품이 되어버렸다.


Ⅳ. 화두참구의 심리학적 고찰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측면을 앞장에서, 자기 본성에 대한 의심과 탐색, 사량분별의 배제, 지금여기에의 직면과 접촉, 깨달음과 초월 등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부분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점에서 보면 교육학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화두참구의 과정이 개인적인 심리현상의 일부로서 심리학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여기서는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측면이 역사적으로는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현대 심리학에서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⑴ 보조, 나옹, 한암의 경우 

선종의 역사 속에서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메카니즘을 분명하게 제공한 이는 고려의 보조지눌과 나옹혜근, 그리고 현대의 한암선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먼저 보조지눌의 경우를 살펴보자.


보조는 인간의 본성을 ‘공적영지(空寂靈知)’로서 해명한다. 이것을 체득하는 방식으로 보조지눌은 ?수심결?에서 ‘이뭣고’라는 공안을 화두로서 제시하고, 그 과정을 번뇌로부터의 회광반조(廻光返照)로 설명한다. 화두참구의 결과로서 공적영지(空寂靈知)는 체득된다. 


보조는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의 마음을 찾아야하는데, 부처란 바로 현재의 이 마음이라고 전제한다. 그러자 현재의 이 마음이 부처라면 왜 나는 이것을 알지를 못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보조는 배가 고프고 갈증을 알고, 춥고 더움을 아는 것이 ‘이것은 필경에 어떤 물건인가’를 묻고, ‘바로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 공안에서 이해하고 깨닫는 바가 있다면 옛 성인과 손을 함께 잡고 갈 것이다’고 말한다.


보조가 제시하는 공안은 ‘필경 이것이 무엇인가(竟是何物)?’라는 것이다. 보조는 ?수심결?에서 이 공안을 4군데에서 질문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 공안참구의 과정을 돈오점수(頓悟漸修)로서 설명하고, 이 공안의 본질을 회관반조(廻光返照)로서 규정한다. 한 생각을 되돌리는 회광반조를 통해서 본래의 본성을 깨닫게 된다는 것으로, 여기서 본성이란 바로 공적영지를 가리킨다. 보고 듣고 웃고 말하고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필경에 누가 이렇게 행위하고 운전하는가? 이것이 다름 아닌 부처의 마음이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로는 까마귀 소리를 듣는 것을 가지고 다시금 설명한다. 까마귀 소리를 듣는 그것을 되돌려서 들어보라. 그곳에는 다른 분별이 없고, 허공과 같다. 이것이 바로 너의 본성이고, 이것이 바로 공적의 영지이다. 이런 화두참구의 과정을 보조는 공적과 영지라는 두 과정으로 설명한다. 까마귀 소리를 듣는 것은 분별이지만, 이차적으로 그것을 반조하는 것은 분별이 아니다. 먼저 마음이 고요해지는 공적과 이 공적을 바탕으로 해서 얻게 되는 신령한 자각으로서 영지이다.


이런 화두참구의 과정은 고려 말 나옹선사도 역시 발견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각이 일어나고 생각이 사라지는 것을 생사라 한다. 생사에 처해서는 온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라. 화두가 순일하면 곧 생사가 다하게 된다. 생사가 다한 자리가 바로 신령함이 있다. 신령하지만 화두가 없다면, 곧 그것은 무기이다. 신령한 가운데 화두가 어둡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공적영지이다. 이것은 무너지지 않고 그 무엇과도 뒤섞이지 않는다. 


나옹선사의 화두참구의 과정은 화두를 통해서 공적을 이루고 이런 공적을 바탕으로 해서 영지를 얻게 되는 과정으로서, 보조지눌과 동일한 방식을 취한다. 그런데 현대의 한암선사도 나옹선사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런 화두참구의 과정을 설명한다. 물론 한암선사의 인용문은 공적과 영지의 구분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이상과 같이 이런 화두 참구의 과정을 표로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제1단계: 마음의 생사 → *화두참구  → 마음의 공적(空寂)  

                        ↳  육취윤회                 

  제2단계: 마음의 공적 → *화두참구  → 마음의 영지(靈知)

                        ↳ 무기


이것은 2단계로 구별이 된다. 제1단계에서 물든 마음이 생사, 기멸을 거듭할 때, 참선자는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들면, 생멸이 다하게 된다. 만약 이때 화두를 들지 않고 생멸하는 마음에 끌려가면, 육도의 윤회에 빠지게 된다. 마음이 산란함을 화두로서 대치함으로써 마음의 공적(空寂)을 이룰 수가 있다. 여기서 공적이란 마음이 텅 비워지고 산란함이 사라져서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로서 일반적 용어로는 선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위의 제2단계에서는 일단 마음이 고요해진 선정상태[空寂]에서 출발하는데, 이때도 역시 계속적인 화두를 참구하게 된다. 만약이 이때 화두가 없으면, 무기(無記)에 떨어진다.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화두가 있어서 어둡지 않고 환하게 밝아진 것을 ‘신령한 지혜[靈知]’라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화두는 육도윤회의 산란함을 극복하는 선정에 이르는 과정이고 동시에 화두는 혼침이나 무기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지혜의 길이다. 이런 점에서 화두와 반조는 서로 별개가 아니라, 화두참구의 동일한 심리학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또한 이런 해석은 초기불교 이래로 강조해온 불교수행의 선정과 지혜라는 두 축을 화두로서 설명한 것이다. 


⑵ 현대 심리학에서의 의미

간화선의 심리학적인 기초는 견성성불에서 보듯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에 기초한다. 이것을 불교교학에서는 불성이나 여래장의 개념으로 이해한 반면에, 선종에서 이것은 한 물건, 본래면목, 본래심이라고 했다. 보조와 나옹, 그리고 한암은 이것을 공적영지로서 이해한다. 


그러면 인간의 근원적인 본성을 현대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을까? 근래에 심리학의 영역에서도 종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이나 자아초월(transpersonal)과 같은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Spirituality의 어원은 호흡, 용기, 생명을 의미하는 라틴어인 spiritus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 말은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려는 개인적인 탐색과 관련되고, 초월적인 존재를 포함할 수도 있고, 그것을 포함하지 않고 정의할 수도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transpersonal’이란 개념도 유사한 방식으로 사용된다. 미숙한 개인이나 정상적인 개인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데, 관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가 있다. 이를테면 조화와 전체성, 궁극적인 관심, 삶에 대한 내적인 태도와 공감, 거룩한 깨달음, 초월경험, 차이에서 비롯된 동질성, 창조적인 성장과 본질을 포함한 매우 포괄적인 의미를 함축한다. 


영성(靈性)은 신령스런 본성으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공적영지(空寂靈知)라는 개념과 상통하는 것으로, 온전한 전체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이다. 전통적인 심리학적 해석인 몸/마음의 이분법적인 틀에서는 이해가 곤란한 개념이다. 정신분석뿐만 아니라 행동주의와 인본주의까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의 이원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된 심리학이다. 이들의 목표는 현실에의 적응이고 자아실현이다. 물론 이러한 목표는 실제 생활을 해나가는데 중요하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덕목이다. 하지만 이들 전통적인 심리학적 관점에는 생태계의 문제와 더불어서 산업화에 뒤따르는 인간의 본성, 소외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다룰 수가 없다. 여기에는 신령스런 본성, 성품의 문제가 배제되거나 소외되어 있다. 인간을 온전한 인간 전체로서 이해하는 관점이 필요해지면서, 신령스런 본성을 인정하고 중시하는, 종교와 통합된 심리학의 접근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최근에 세력을 얻어가고 있는, 영성(spirituality)과 관련된 자아초월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이다. 이 자아초월심리학의 최근 동향은 4가지의 형태로 전개된다. 하나는 의식의 스펙트럼으로서 성장의 방향, 둘째는 참된 자기에 대한 치료적인 관점, 셋째는 낮은 단계의 자기 정체성에서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과정, 넷째는 개인과 초월의 영역에서 자기자각의 기술을 활용한 깨달음의 과정 등이다. 


선종의 견성성불의 주된 가치도 바로 이러한 영성과 자아초월의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몸/마음의 이원론적인 체계가 아닌 근본적인 성품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선문답과 간화선의 지향점은 바로 불교적 영성개념과 초기불교 이래로 전승된 무아심리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분석보다는 통합, 부분보다는 전체, 개별적인 접근보다는 총체적인 접근방식을 취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다. 화두의 본질을 의심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아비담마에 기초한 위빠사나처럼 심리적인 마음현상을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본성에 대한 전체적인 접근방식으로 이것은 질문과 의심을 통해서 성취한다. 마음현상은 관찰에 의한 통찰이 중요하지만, 본래면목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의심을 타파함에서 오는 전체적인 깨달음에 의해서 체득되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선문답이나 간화선에서 사용하는 질문의 방식을 유사하게 사용하는 서구에서 개발된 치료 프로그램에는 수용전념 명상치료(ACT)가 있다. 이것은 행동치료와 인지치료의 전개과정에 발생된 제3세대에 해당된다. 수용전념 명상치료는 행동과 인지의 영역을 포괄하지만, 심리현상에 대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명상적 요소와 개념자아와는 다른 근본적인 자아에 대한 깨달음을 강조한 점에서 자아초월적 성격을 가진다. 특히 여기서는 선종에서 사용되는 은유와 질문법이 자주 사용된다. 구체적인 문답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T: 여기에 체스보드가 있다. 체스는 하얀색이 있고 검정색이 있다. 이들 체스는 왕이 있고 여왕이 있고 귀족도 있고, 성주도 있고, 병사들도 있다. 하얀색의 체스는 당신의 긍정적인 생각이나 긍정적 느낌이나 좋은 기억들이다. 반면에 검정색은 부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느낌들이나 기억들이다. 이들은 보드에서 싸우고 있다. 당신은 이런 상황을 당신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가 있습니까?

C: 그래요. 마치 나 자신과 같아요. 나는 지금 내부에서 늘 전쟁중입니다.

T: 검정색 기사가 공격합니다. “당신은 나쁜 엄마입니다.” 그러자 하얀색 여왕이 “나는 나의 아이들을 잘 돌볼 것입니다.” 또한 다른 검정색 귀족이 “실제로 당신의 남편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 그러자 하얀색의 기사가 “나는 떠날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검정색의 여왕은 “아니, 너는 어디에도 갈 수가 없어. 결국은 다시 돌아올 걸.”라고 전쟁은 계속됩니다.

C: 그래요. 맞아요. 정확하게 나의 이야기예요. 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요. 이 전쟁은 계속될 것만 같아요. 


T: 그렇게 느낄 수 있어요. 너무 오랫동안 당신은 자신과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 체스가 아닐 가능성을 찾아보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전쟁을 멈출 수가 있잖아요. 이 비유에서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은 보드 위의 체스와 같습니다. 당신은 누구죠.

C: 체스?

T: 어떻게 당신과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동시에 체스일 수가 있죠? 당신은 당신의 차를 가졌지만, 차가 당신이 아닌 것처럼, 당신은 당신의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처럼 당신은 누구이죠?

C: 게임하는 사람?

T: 우리는 지금 당신이 어떻게 게임하는 사람이 되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언제 당신이 체스를 움직이려하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좋아요. 당신은 게임하는 사람 이외에 당신은 무엇일 수가 있죠?

C: 보드?

T: 네, 맞아요. 바로 그렇습니다. 보드가 없이는 체스들은 체스로서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보드는 체스를 가지고 있고, 체스가 체스일 수 있도록 그 문맥을 제공합니다. 이상한 질문처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당신의 생각은 당신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있습니까?

C: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T: 그래요. 만약 당신이 보드가 된다면, 당신은 전쟁을 관찰 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이 체스가 된다면 그 전쟁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체스는 마음현상에 해당되고, 체스판 자체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상징한다. 마음현상들은 서로 양 편으로 나누어서 전쟁을 치른다. 체스들은 개념적 자아이고 감정과 생각들, 이러고 저러는 갈망과 행동들을 포함한다. 반면에 이들로부터 초월한 그렇지만 그들의 배경되고, 바탕 되는 판 자체는 변함없는 본래면목이 된다. 여기서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라든지 혹은 ‘무엇이 나인가’하는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이것은 생각이나 느낌의 내용을 묻는 질문이 아니고, 그런 생각과 느낌의 근거가 되는 바탕 자체[體]로서의 판을 염두에 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간화선의 창시자로 알려진 대혜종고의 문답에서도 발견되는 내용이다. 이때는 체스게임이 아니고 바둑이 등장한다. 이참정과 조대제는 자주 만나 바둑을 하는데, 대혜가 이 사실을 알고서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진다. 바둑이 흑백으로 나누어지기 전에 나아가, 바둑판을 다 흐트러뜨리고, 한수를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지를 묻는다. 


이것은 체스게임의 비유와 너무나 닮은꼴이다. 바둑알은 느낌이나 생각 혹은 기억들이다. 이것들은 서로 엉키어서 전쟁을 치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참으로 나가 아니라면 어떤 것이 나인가? 이런 생각과 감정을 일시에 쓸어버리고 한 점을 놓는다면 어디에 놓을 것인가? 이런 맥락적 자아의 개념은 화두의 심리치료적인 의미를 시사하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Ⅴ. 결론


본고는 간화선에서 화두참구의 과정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먼저 화두의 조작적인 정의로서 <명상수행자가 지금여기 현재에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절실하게 의심하고 참구하는 실존적 자기문제>로 하고, 이것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라는 세 관점을 가지는데, 분심, 믿음, 의심이라는 전통적인 화두참구의 3요소와 상응함을 살펴보았다.


화두참구의 심리학적인 성격은 ‘자기 본성에 대한 의심과 탐색’, ‘사량분별의 배제’, ‘지금여기에의 직면과 접촉’, ‘깨달음과 초월’ 등으로 이해하였고, 특히 당대에 성립한 이뭣고와 송대에 발견된 무자공안의 성격적 차이점을 논의하였다. 이후 간화선이 단순화되고 형식화되면서 선문답의 활발성을 상실한 점을 지적하였다.


화두참구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의 방식은 보조, 나옹, 한암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관점을 소개하고, 그것의 심리학적인 이해는 생멸심의 차단에 의한 공적, 무기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오는 영지라는 과정임을 설명하고, 공적영지는 오늘날 심리학에서 대두되는 영성과 자아초월의 심리학과 연결됨을 논의하였고, 마지막으로는 그것이 상담상황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수용전념 명상치료의 경우를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