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교리 및 수행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임 승택

실론섬 2015. 3. 26. 02:30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

임 승택(林承澤)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강사.

 

I. 시작하는 말

  1. 연구 동기

  2. 연구 자료

II.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사나

  1. 양자의 의미

  2. 양자의 단계 및 종류

III. 사마타의 위빠사나의 관계

  1. 양자의 발현양태

  2. 양자의 세부내용및 위상

IV. 결론

 

I. 시작하는 말

 

1. 연구 동기 

‘止’와 ‘觀’으로 한역되곤 하는 ‘사마타(samatha)’와 ‘위빠싸나(vipassanā)’1)는 일찍부터 불교수행의 중심축으로 여겨져 왔다. 그리하여 수행의 여정을 이끌어 나가는 ‘양 날개’ 혹은 ‘한 쌍의 수레바퀴’로 비유되곤 한다. 특히 ‘止觀均等’이라든가 ‘止觀雙修’와 같은 말들은 이들 양자의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구체적인 내용과 함께 수행론적 위상에 대해 많은 생각의 여지를 제공하고 있다.1)

1) samatha’와 ‘vipassanā’의 한역어인 ‘止’와 ‘觀’을 그대로 채용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를 
   음사한 이유에 대해 해명할 필요가 있겠다.
   본 고의 Ⅱ장 첫 머리에 설명된 바와 같이, ‘samatha’란 동사원형 ‘√sam(고요해지다)’에
   서 기원한 말로 ‘고요(calm)’, ‘평정(tranquillity)’, ‘마음의 평온(quietude of heart)’ 등의 
   의미이다. 그리고 ‘vipassanā’는 ‘vi’이라고 하는 접두어와 ‘passanā’의 합성어로서, ‘vi’
   는 ‘분리’, ‘관통’, ‘강조’를 뜻하고 ‘passanā’는 동사원형 √pas에서 유래한 말로서 ‘보다
   (to see)’라고 하는 의미이다. 따라서 ‘vipassanā’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면 ‘관통하여 
   보는 것’ 혹은 ‘꿰뚫어 보는 것’이 된다.
   논자는 여기에서 한역어의 ‘止’가 ‘samatha’의 번역어로서 적절하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觀’이라는 번역술어가 ‘vipassanā’의 온전한 의미를 담아내기에는 불충한 면이 
   있음을 주목한다. 논자가 이해한바대로 vipassanā에 해당하는 한역어를 굳이 들라면, 
   ‘洞察’ 혹은 ‘通察’이다. 그러나 이들 한문 술어를 함부로 사용할 경우 예상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원어 그대로를 음사하여 표기한다.

 

최근에 이르러 몇몇 학술지에 사마타와 위빠싸나에 대한 연구논문이 게재된 적이 있다. 그들 논문은 바야흐로 이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장이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듯하다. 특히 김준호 선생의「初期佛典에 나타난 止觀槪念」과 조준호 선생(이하 존칭 생략)의「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는 빨리어 경전에 나타나는 양자의 개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공교롭게도 필자들의 이름과 제목이 유사하여 흥미를 부추기고 있다. 이들은 본격적인 학술논문으로서는 국내에서 최초로, 이 분야에 대해 집중적인 조명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설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논문 역시 선도적 연구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약점을 안고 있다는 면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즉 논의의 분위기를 성숙시키는 데에는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논점의 완성도 면에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이다.

 

우선 논평문의 지적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김준호의 결론적 언급으로서 “초기불전에서는 止觀이 확립된 수행체계로서 구체적인 서술로 나타나 있지 않(다…)”, “부파불교의 諸논서의 해석을 빌리지 않고 초기불전 안에서 이(止觀) 문제를 온전하게 해결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四無量心․四禪․四無色定을 성취하기 위한 기초적인 수행으로서 止觀이 설정되어 있다”는 등의 주장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개념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다지 넓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조준호의 주장으로서, “止의 내용을 四禪으로 보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觀수행까지 四禪 속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四禪의 단계적 내용에 있어, 그 어떠한 觀 즉 vipassanā의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止와 觀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四禪을 통해 念을 발현하지 않고는 四念處와 같은 觀 수행을 시작할 수 없다” 등의 내용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개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의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본 논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초기불교의 빨리어 경전 즉 5부의 Nikāya에는 ①사마타와 위빠싸나의 확립된 수행체계가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②이들의 발현양태와 순서 그리고 수행론상의 위계를 드러내는 언급이 등장하고, ③사마타와 위빠싸나를 동시에 평등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근거가 제시되어 있으며, ④네 번째 선정(第四禪)의 상태가 아닌 첫 번째 선정(初禪)에서 위빠싸나가 진행됨을 나타내는 언급이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그들 논문은 논술 태도에 있어, ‘최초기의 경전’이니 혹은 ‘초기불교 경전의 이른 층’이니 하는 애매한 틀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입장에 합치하는 경구만을 취사 선택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논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초기불교의 자료를 新古의 층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가설적 수준을 넘어선 뚜렷한 성과를 보인 적은 없다.

 

특히 김준호의 논문에서 ‘최초기의 경전’으로 언급된 Dhammapada(法句經), Suttanipāta(經集) 등은 전형적인 운문조의 경구집으로서, 형식적 특성상 산문조의 문장에 적합한 내용까지를 담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고 그들 문헌에 나타나는 내용만을 붓다의 원래 가르침인양 여기는 태도는 편협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나머지 4부의 Nikāya에서도 상당량 발견되는 운문조의 경구 내용과 비교․검토해 보면 어렵지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문제이다.

 

소위 말하는 초기불교의 ‘正典(canon)’으로 분류되는 4부의 阿含과 5부의 Nikāya는 아비달마논서들에 의한 法分類의 움직임이 정착되기 이전에 성립하였다.2) 그들 모두는 붓다 자신과 그의 직제자들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것이며, 늦추어 잡는다 하더라도 2200년 이상의 장구한 세월을 불교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경전의 권위를 넘어서는 주장을 한다는 말인가?

2) Khuddakanikāya를 제외한 4부 阿含과 4부 Nikāya의 성립연대는 기원전 4-3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Khuddakanikāya의 일부 경전 중에서 비교적 늦게 성립된 것은 기원전 
   3세기경의 아쇼카왕 시대 이후까지 내려온다. 그러나 늦은 시기에 편집된 경전이다 하더
   라도 그 내용이나 경전 자체가 나중에 성립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정승석 
   편저,『佛典解說事典』. (서울: 민족사, 1989), p. 236 참조.)

 

2. 연구 자료

이상과 같은 취지의 본 논문을 기술하는 과정에서, 논자는 Khuddakanikāya의 12번째 경전으로 배속된 Paṭisambhidāmagga를 주된 자료로 활용하였다. 논자가 이 경전을 주목한 까닭은 초기불교의 수행체계를 가장 광범위하고도 체계적으로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헌은 4部 Nikāya에서 설해진 수행관련 교설들을 실제적인 입장에서 총괄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전모를 상세히 밝히는 내용들을 담고 있어, 이 분야에 대한 근거자료로서의 활용 가치가 높다.

 

나아가 Paṭisambhidāmagga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남방상좌부 불교의 위빠싸나 수행에Visuddhimagga 및 Vimuttimagga와 더불어 지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 세 문헌 중에서도 經藏(Suttapiṭaka)에 속한 것은 Paṭisambhidāmagga가 유일하다. 이러한 까닭에 Paṭisambhidāmagga의 위상은 한국불교의 조계종에서 ‘金剛經’과 ‘六祖壇經’이 지니는 그것에 비유할 만하다. Paṭisambhidāmagga는 위빠싸나 수행의 본령을 밝히는 문헌으로서, 그자료적 가치를 타 문헌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Paṭisambhidāmagga의 성립 연대에 관해서는 학자들 간에 견해가 아직 일치하지 않는다. Frauwaller와 Hinüber에 따르면 이문헌은 아비달마시대가 막을 내릴 무렵에 성립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渡辺照宏 또한 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그 저술 연대를 아비달마시대 이후로 보고 있다.20) 그들에 따르면 Paṭisambhidāmagga의 내용 중에는 아비달마시대의 논서들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개념들에 대한 축약적인 설명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성립 시기를 아비달마시대 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A. K. Warder는 Paṭisambhidāmagga의 성립 시기에 대해 그 대략적인 골격은 아쇼카왕 시대(B.C. 236)에 성립되었고, 이후 출현한 論書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술어들을 가미하여, 최후로는 B.C. 100년 경에 혜품 제3장의 ‘명료한 앎에 관한 논의(現觀論, abhisamayakathā)’를 채용하여 완성되었다고 본다.22) 그러나 최근의 주장으로서, 일본의 水野弘元은 그들 여타의 견해를 반박하면서, Paṭisambhidāmagga의 전체 내용은 諸論書 이전의 아쇼카왕 재세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결론지은 바가 있다.

 

水野弘元에 따르면 Paṭisambhidāmagga는 사상적으로든 문헌적으로든 초기논서의 선구적인 것으로서, 이후에 저술된 다른 문헌들과 비교해 볼 때 충분히 정리되거나 조직화되지 못했으며, 아비달마의 諸논서와 교류한 흔적이 없다. 따라서 후대에 부가된 내용이 없이, B.C. 250년 무렵을 하한선으로 하여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水野弘元의 그와 같은 결론은 Paṭisambhidāmagga에 등장한 고유의 문체와 서술양식 및 교리적 내용을 면밀하게 비교․분석한 토대 위에 얻어진 것으로, 이견을 펼치고 있는 타학자들의 주장에 비해 설득력이 탁월하다. 이와 같은 水野弘元의 주장대로라면, Paṭisambhidāmagga는 2250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 불제자들의 수행을 이끌어 온 셈이다.

 

Ⅱ. 경전에 나타난 사마타와 위빠싸나

 

1. 양자의 의미

빨리어의 ‘samatha’란 산스끄리뜨어의 동사원형 ‘√sam(고요해지다)’과 동일한 기원을 지닌 말로, 기본적 의미는 ‘고요(calm)’, ‘평정(tranquillity)’, ‘마음의 평온(quietude of heart)’ 등이다. 그리고 ‘vipassanā’는 ‘vi’이라고 하는 접두어와 ‘passanā’의 합성어인데, 여기에서 ‘vi’는 ‘분리’, ‘관통’, ‘강조’를 뜻하며, ‘passanā’는 동사원형 ‘√pas’에서 유래한 말로서 ‘보다(to see)’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vipassanā’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면 ‘꿰뚫어 보는 것’이다.

 

본 논문의 주된 근거자료인 Paṭisambhidāmagga의 대품 제1, 제1장 31절에는 “사마타에서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의 의미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위빠싸나에서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의 의미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그리고 같은 장 53절에는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로 사마타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따라가며 보는 법의 의미로 위빠싸나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라는 문구가 반복적으로 기술된다.

 

Paṭisambhidāmagga의 인용문에 등장한 ‘산란하지 않음(無散亂, avikkhepa)’이라는 표현은 ‘samatha’의 원어적 의미 즉 ‘고요’, ‘평정’등과 같은 일상적인 의미이다. 즉 김준호의 논문에서도 인용되다시피, Suttanipāta(經集) 게송 702의 “마을에서의 칭찬과 비난에 화를 내거나 우쭐거리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로 적정(santa)이다”라는 구절과, Dhammapada(法句經) 게송 202의 “승리나 패배로부터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에 나타나는 내용과도 상통하는 것으로, ‘a(-하지 않다)’와 ‘-vikkhepa(혼란, 산란, 당황)’의 소박한 의미로 정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vipassanā’라는 용어는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 anupassanā)’이라는 다소 전문적인 술어로써 설명되고 있다. ‘따라가며 보는 법’의 원어인 ‘anupassanā’에서 접두어 ‘anu’는 다른 말과 결합될 때, 일반적으로 ‘-을 따라(along, after, behind)’라고 하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anupassanā’의 온전한 의미는 ‘-을 따라가며 보는 것’이 된다. 이것은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의 과정에 놓인 사물을 지속적으로 관찰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관련하여 4부 Nikāya의 도처에서 살펴볼 수 있는 ‘일어남과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것(生滅隨觀, udayabbayānupassanā)’이라든가 ‘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것(變易隨觀, vipariṇāmānupassanā)’ 등의 술어는 이러한 ‘anupassanā’의 의미를 구체적인 수행법의 용례로써 잘 나타낸다 하겠다. 더불어 Paṭisambhidāmagga의 대품 제3의 36절 등에도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한다는 지각(常想)을 끊는다. 고통으로 따라가며 보아 즐겁다는 지각(樂想)을 끊는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아 나(我想)라는 지각을 끊는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들 용례와 문구는 ‘anupassanā’의 쓰임을 잘 반영하는 것으로, 본 술어가 특정한 목적성을 지닌 수행법의 용도로 정착되어 있음을 나타낸다.34) 결론적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으로 부연되는 ‘vipassanā’의 개념을 정리하면, ‘유동적인 사물에 대응하여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꿰뚫어 보는 것’이 된다.

 

2. 양자의 단계 및 종류

살펴본 바와 같이, 사마타의 일상적인 의미는 ‘고요함’, ‘평정됨’, ‘산란하지 않음’이다. 그런데 이 사마타는 ‘산란하지 않음’의 ‘정도(degree)’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으로 갈래지워진다. 이른바 ‘네 가지 선정(四禪)’, ‘여덟 가지 선정(八禪定)’이 그것인데, 이 용어들은‘고요해진 마음의 상태’를 그 정도에 따라 일정한 단계로써 분류해 놓은 것이다. 관련 경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사마타의 힘(止力)이란 무엇인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으로부터의) 떠남(出離)의 힘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과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은 사마타의 힘이다. 성내지 않음(無瞋)의 힘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은 사마타의 힘이다. 빛에 대한 지각(光明想)의 힘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은 사마타의 힘이다… 내지… ‘사마타의 힘’이라 할 때, 어떠한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인가? ‘첫 번째 선정(初禪)에 의해 (다섯) 장애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 의해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세 번째 선정(第三禪)에 의해 기쁨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 의해 즐거움과 고통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공간에 걸림이 없는 선정(空無邊處定)에 의해 물질적 현상에 대한 지각(色想), 장애에 대한 지각(有對想), 잡다한 지각(種種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사마타의 힘이다. ‘의식에 걸림이 없는 선정(識無邊處定)에 의해 공간에 걸림이 없음에 대한 지각(空無邊處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아무것도 없는 선정(無所有處定)에 의해 의식에 걸림이 없음에 대한 지각(識無邊處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의해 아무것도 없음에 대한 지각(無所有處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 ‘들뜸에 수반된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의미에서) 사마타의 힘이다.(Ps. vol2. p172)

 

인용문에 등장한 ‘사마타의 힘’에서 ‘힘’의 원어인 ‘bala’는 ‘힘’‘위력’ ‘영향’ 등의 뜻을 지닌다. 따라서 이 ‘사마타의 힘’을 다른 말로 풀어 옮기면, ‘사마타의 힘에 의한 것’ 혹은 ‘사마타의 영향에 의한 것’ 등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을 인용문의 내용과 결부시켜 다시 말하자면, ‘사마타의 힘에 의한 것’이란 곧 ‘선정(jhāna)’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들 선정은 ‘산란하지 않음’의 깊이에 따라 8가지의 단계 혹은 종류로 나누어진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김준호는 “止(사마타)를 ‘집중’의 삼매로 풀어내는 종래의 해석은 초기불전 안에서는 그렇게 말할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 문구는 초기불전 안에서 그렇게 말할 근거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즉 ‘산란하지 않음’이라는 포괄적이고도 소박한 용어로써 정의된 사마타가 ‘선정’혹은 ‘삼매’라고 하는 구체적인 술어로써 풀이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여하튼 이렇게 해서, 인용문은 사마타의 단계 혹은 종류에 대해 밝히고 있다. 앞 부분에 등장한 ‘떠남(出離, nekkhamma)’이라든가 ‘성내지 않음(無瞋, abyāpāda)’ 등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欲欲, kāmacchanda)’이라든가 ‘성냄(瞋, byāpāda)’ 등의 다섯 장애(五蓋, pañca nīvaraṇāni)를 제거하는 것으로, 이들 장애를 제거하는 과정 하나 하나가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 cittassa ekaggatā)’ 즉 ‘선정의 예비적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다섯 장애가 완전히 제거됨과 동시에 발현되는 것이 ‘첫 번째 선정(初禪)’인데, 이하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서부터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까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그들 각각의 선정에서 제거되는 또 다른 ‘여러 번뇌(kilese)’와 그들 번뇌의 ‘구성요소(khandha)’들이 명시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인용문의 내용은 앞 소절에서 언급했던 것으로, ‘산란하지 않음의 의미로 사마타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경구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으서의 의의를 지닌다.다음으로는 위빠싸나에 대해 살펴본다. 관련 경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위빠싸나의 힘(觀力)이란 무엇인가?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無常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고통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苦隨觀)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내지… 늙음과 죽음에 대해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는것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늙음과 죽음에 대해 고통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은 위빠싸나의 힘이다… ‘위빠싸나의 힘’이라 할 때, 어떠한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인가? ‘무상으로 따라가며 보는 법에 의해 항상한다는 지각(常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고통으로 따라가며 보는 법에 의해 즐겁다는 지각(樂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무아로 따라가며 보는 법에 의해 나라는 지각(我想)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내지… ‘무명과 무명에 수반된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의미에서) 위빠싸나의 힘이다.

(Ps. vol.1. p98)

 

본 인용구는 위빠싸나의 다양한 갈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것 역시 앞 소절에서 언급했던 것으로, “따라가며 보는법의 의미로 위빠싸나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언급에 대한 구체적인 해명이다.

 

인용문에 나타난 내용의 핵심은 ‘늙음과 죽음’에서부터 ‘무명’에 이르는 12연기의 모든 지분에 대해 “무상․고통․무아 등으로 따라가며 보아 ‘항상한다는 지각(常想)’ 등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집약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는 “무명과 무명에 수반된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내용에 이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각각의 단계와 종류별로 갈래 지워짐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3)
3) 그러나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내용이 모든 경전에서 이와 같이 간단명료하게 일괄적
   으로 서술되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사마타의 경우 지금까지 4부 阿含에서 확인된 
   바에 따르면, 첫 번째 선정(初禪)만을 언급하는 경우(長阿含經 卷四, 대정1, p. 23c; 
   卷六, 대정1, p. 42b; 卷十三,대정1, p. 85bc; 中阿含經 卷二, 대정1, p. 422b; 卷三
   十六, 대정1, p. 657c-658a;卷四十, 대정1, p. 23c 등), 첫 번째 선정에서부터 세 번
   째 선정까지만을 언급하는 경우(中阿含經 卷五十五, 대정1, p. 775a; 卷五十七, 대정
   1, p. 786a), 첫 번째 선정과 네 번째 선정만을 언급하는 경우(中阿含經 卷五十八, 
   대정1, p. 789c), 아무것도 없는 선정(無所有處定)과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
   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만을 언급하는 경우(雜阿含經 卷十七, 대정2,p. 123c), 지각
   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만을 언급하는 경우(雜阿含經 卷四十八, 대정1, p. 
   730c) 등이 있으며, 선정의 종류와 내용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는 대목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예는 Paṭisambhidāmagga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바른 삼매(正
   定, sammāsamādhi)’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vol.1, p.41)에서는 첫 번째 선정
   에서부터 네 번째 선정까지만을 다루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공간에 걸림이 없는 선정 
   등 ‘물질적 현상의 영역을 벗어난 선정(無色定)’과 ‘사라져 다한 선정(滅盡定)’에 대해
   서도 자주언급하고 있지만, Aṅguttara-Nikaya(vol.4. p. 410)와 Saṁyutta-nikāya(vol.
   2. p. 222)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九次第定(navanupubbavihārasamāpatti)’의 
   일관된 체계로써 다루고 있는 곳은 경전 전체를 통하여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사마타의 체계가 발견된다는 사실은 그것이 정형화되기까지 상당
   한 시간적 간극이 있었음을 추측케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즉 기원을 달리하는 여러 
   사마타의 유형들이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었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와중에 각기 다른 선정체계가 기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논자는 이러한 추
   측에 대해 입장을 달리한다. 그리하여 논자는 그 원인을 對機의 입장에서 사마타의 체
   계를 설명하려 했던 것에서 찾는다. 왜냐하면 Paṭisambhidāmagga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동일한 텍스트의 동일한 장에서 각기 다른 사마타의 체계가 발견되기 때문
   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빠싸나에 대한 설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인용한 ‘위빠싸
   나의 힘’이라는 문구에서는 12연기 각각의 지분을 ‘無常․苦․無我 등으로 따라가며 보는 
   것’으로 위빠싸나를 풀이했지만, 본 고의 Ⅲ장 2절에는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十八
   隨觀)’이라고 하는 정형화된 위빠싸나의 항목들이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별도로 소개
   된다. 
   논자는 이들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체계를 다룸에 있어, 논리 전개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Paṭisambhidāmagga에 나타나는 고유의 수행차제(Ⅲ장 2절 참조)에 논의의 초점
   을 맞추고 있음을 밝힌다.

마지막으로 인용문에 나타난 양자의 차이점을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사마타는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과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을 거쳐 “들뜸에 수반된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으로 귀결에 이르고, 위빠싸나는 “항상한다는 지각(常想) 등에 대해 동요하지 않음”을 거쳐 “무명과 무명에 수반된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사마타와 위빠싸나에 대한 설명이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귀결점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양자의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즉 이들 인용구로써 위빠싸나는 ‘무명(avijj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며, 사마타는 ‘들뜸(棹擧, uddhacca)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직접 확인된 셈이다. 

 

따라서 사마타를 ‘집중’ 혹은 ‘삼매(samādhi)’로, 위빠싸나를 ‘지혜(paññā)'로 구분해서 보는 종래의 해석은 정당한 근거를 지닌 것임을 알 수 있다.40) 들뜸을 가라앉힌다는 것은 곧 집중 혹은 삼매를 이룬다는 의미이며, 무명을 제거한다는 것은 곧 지혜를 발현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 역으로, 그와 같은 전통적인 해석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이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명백히 해준다.

 

Ⅲ.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관계

 

1. 양자의 발현양태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발현양태 및 순서에 관련하여, 시작하는 말에서 언급했던 기존의 논문에는 “止와 觀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가, “四禪을 통해 念을 발현하지 않고는 四念處와 같은 觀 수행을 시작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이 실려있다. 그러한 논지에 따르면 양자의 순서는 사마타에서 위빠싸나로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과연 그러한지 경구의 내용을 살펴 보기로 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여기에 한 비구가 있어 사마타(止)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觀)를 닦는다. 그와 같이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을 때 길(道)이 생긴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한다. 그와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얽매임(結縛)이 끊긴다. 여러 잠재적 성향(隨眠)이 소멸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다. 그와 같이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을 때 길이 생긴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한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얽매임이 끊긴다. 여러 잠재적 성향이 소멸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다. 그와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을 때 길이 생긴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한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 얽매임이 끊긴다. 여러 잠재적 성향이 소멸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다시, 다른 비구가 있어 法에 의한 고양됨(棹擧)을 선호하는 마음을 지닌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그는 그때 (그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차츰) 내부적으로 멈추거나 가라앉아 한 곳에 고정되어 삼매에 들어간다. 그와 같이 길이 생긴다. 그는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한다. 그와 같이 그 길을 익히고, 닦고, 많이 행할 때, 여러얽매임이 끊긴다. 여러 잠재적 성향이 소멸된다.

친애하는 이들이여, 비구, 비구니로서 나의 면전에서 아라한됨(阿羅漢性)을 얻었노라 말하는 이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네 가지 길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이다.

(AN. vol.2. p. 157.)

 

본 경구는 Aṅguttaranikāya에 실린 것으로, 존자 아난다(Ānanda)가 아라한(阿羅漢, arahatta)에 이르는 길을 설하는 대목 중의 일부이다. 요약해서 정리하면, 아라한에 이르는 길은 ①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는 방법, ②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 방법, ③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방법, ④法에 의한 고양됨(棹擧)을 선호하는 마음 등이 있다는 것이다.4)

4) 여기에 제시된 ‘아라한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① ② ③은 수행의 과정에서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얼마만큼 중요한 위상을 지니는가를 다시금 생각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의 ④에 제시된 것으로, ‘법에 의한 고양됨을 선호하는 마음’은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도 아라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둔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논자가 판단하는 바로는, 이것 또한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영역에서 완
   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④에 제시된 방법에 대해 자세히 풀이하고 있는 
   Paṭisambhidāmagga의 경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法에 의한 고양됨(棹擧)을 선호하는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인가? 무상으
   로 마음낼 때, 빛이 생긴다. ‘빛이 법이다’라고 빛에 대해 마음기울인다. 그로인한 산란
   함은 들뜸이다. 그러한 들뜸을 선호하는 마음은 무상으로 드러나는 것을 여실하게 알아
   차리지 못하고, 고통으로 드러나는 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아로 드러나는 
   것을 여실하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한다. ‘법에 의한 고양됨을 선호하는 마
   음이다’고. (그러나) 그는 그때 (그것으로 인해) 그 마음이 (차츰) 내부적으로 멈추거나 
   가라앉아 한 곳에 고정되어 삼매에들어간다. 그와 같이 길이 생긴다. 어떠한 길이 생기
   는가... 내지... 이와 같은 길이 생긴다... 내지... 이와 같이 여러 얽매임이 끊어지고 여
   러 잠재적 성향이 소멸된다.” Ps. vol.2. pp. 101-102.

 

더불어 인용문의 후미에는 “나의 면전에서 아라한됨을 얻었노라 말하는 이들은 모두 다 이와 같은 네 가지 방법에 의해서이거나 혹은 이들 중 어느 하나에 의해서이다”라고 하는 자상한 해설까지 등장한다. 다시 말해서 사마타를 먼저 행할 수도 있고, 위빠싸나를 먼저 행할 수도 있으며, 이들 양자를 한꺼번에 행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로써 “止와 觀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따위의 주장이 경전의 가르침을 벗어난 독자적인 것임에 분명해졌다.

 

논자가 파악하는 바, 그와 같은 견해의 이면에는 ‘네 번째 선정’을 발현하고 난 후, 모든 주관적 느낌이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여실하게 바라보는(如實智見)’ 위빠싸나의 수행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다.44) 이것은 위빠싸나의 본래적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심정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그러나 상반된 내용을 전하는 경구의 가르침이 있는 한,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견해일 뿐이다. 더구나 본 논문의 진행과정에서 확인되겠지만, 위빠싸나의 수행은 ‘네 번째 선정’을 발현하고 난 후가 아닌,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서 진행된다.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발현 순서에 관련한 경전의 언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위에서 인용된 경구의 가르침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그 근거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먼저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는 방법과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경구를 인용해 본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으로부터의) 떠남(出離)의 힘에 의한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과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은 삼매이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에 대해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고, 고통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며,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다. 이와 같이 사마타가 처음이고 위빠싸나가 나중이다. (Ps.vol2. P47)

 

다음으로는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 방법과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경구를 인용해 본다.

 

무상으로 따라가며 본다(無我隨觀)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고, 고통으로 따라가며 본다(苦隨觀)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며, 무아로 따라가며 본다(無我隨觀)는 의미에서 위빠싸나이다. 거기에서 생겨난 제법은 내놓음(最捨)46)의 대상(所緣)이며, (이것은 곧)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으로서 삼매이다. 그러므로 말한다.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다.(Ps. vol.2. p. 96)

 

인용된 두 경구는 수행의 과정이 사마타에서 위빠싸나로 혹은 위빠싸나에서 사마타로 전환될 수 있는 근거를 밝히고 있다. 여기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면, 위빠싸나란 대상(所緣)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이고, 그와 같이 무상․고통․무아로 집착없이 따라가는 과정은 ‘내놓음(最捨)’이라는 술어로 집약되며, 그 속에서 여러 번뇌를 버리게 되고, 소멸․열반의 계로 약진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 과정은 곧 ‘마음의 하나됨(心一境性)’과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으로 통하여, 결과적으로 사마타와 동일한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이제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방법과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이유를 밝히는 경구를 인용해 본다.5)

5)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방법과 또한 그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이를 16가지 양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 16의 테마는 
   다음과 같다. “16가지 모습으로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다. 대상(所緣)의 의미
   에서, 영역(行境)의 의미에서, 끊음(斷)의 의미에서, 포기의 의미에서, 벗어남(出離)의 
   의미에서, 물러남(退轉)의 의미에서, 고요함의 의미에서, 수승함(妙善)의 의미에서, 
   해탈의 의미에서, 無漏의 의미에서, 건넘(度)의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음(無因相)의 
   의미에서, 바램없음의 의미에서, 空性의 의미에서, 한 맛(一味)의 의미에서, 어긋나지 
   않음(不超越)의 의미에서, 짝을 이룸(俱存)의 의미에서이다.” (Ps. vol.2. p. 27)
   이하 Paṭisambhidāmagga의 구존품 제1의 6절에서부터는 여기에서 인용하고자 하는 
   것 이외의 나머지 15가지 근거로써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함께 성립하는 이유를 밝힌다. 
   그러나 나머지 내용 또한 그 형식에 있어서는 여기에서 인용되는 것과 동일한 구조이므
   로 그들 모두를 일일이 확인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들뜸을 끊을 때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은 삼매로서 대상(所緣)의 소멸(을 수반한다). 무명을 끊을 때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의 위빠싸나는 대상의 소멸(을 수반한다). 따라서 대상의 의미(에 근거하여),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한 맛(一味)이며 짝을 이루는 것(俱存)이며 서로 어긋나지 않는(不超越)다.(Ps. vol.2. p. 97)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방법은 앞서 살펴본 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는 방법 혹은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 방법과 유사한 원리이다. 즉 대상(所緣, ārammaṇa)에 대한 완전한 집중과 몰입은 곧 인식 근거로서의 대상의 역할의 소멸을 초래한다. 그리고 유동적인 대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할 때, 그것은 곧 무상․고통․무아의 특성을 드러내게 되며 결국은 사라져 없어진다. 이것 역시 인식 근거로서의 대상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들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로써 양자가 회통된다는 점이 경구의 설명을 통해 자명하게 밝혀졌다. 이와 같은 회통의 원리는 초기불교의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상당한 유연성과 더불어 고도의 체계성을 지닌 것임을 잘 드러낸다. 또한 이것은 실제적인 수행자의 입장에 맞추어 그 가르침이 설파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즉 하나의 길을 통한 일관된 정진만으로도 종극에 가서는 다른 여타의 길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발현양태와 순서에 있어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이들 양자는 순서상의 고정된 절차를 지니지 않으며 어느 것을 먼저 시작하여도 된다. 이러한 사실로써 ‘止觀均等’이니 ‘止觀雙修’니 하는 전통적인 어구들이 근거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2. 양자의 세부내용 및 위상

이상과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발현양태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이제 이들 양자의 세부적 내용으로서, 각각의 선정 단계와 위빠싸나에 관련한 구체적인 경구의 해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양자의 수행론적 위상이 그 윤곽을 드러낼 것이다. 먼저 선정의 세부적 내용을 밝히는 경구를 인용한다.

 

첫 번째 선정(初禪)에는… 거친 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한 사유(伺)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즐거움(樂)이 수반되고, 마음굳힘(攝持)이 수반되고, 믿음(信)이 수반되고, 정진이 수반되고, 마음지킴이 수반되고, 삼매가 수반되고, 혜가 수반된다.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서는… 또한 기쁨이 수반되고, 즐거움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내지… 혜가 수반된다.

세 번째 선정(第三禪)에서는… 또한 즐거움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내지… 혜가 수반된다.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서는… 또한 평정(捨)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내지… 혜가 수반된다.

공간에 걸림이 없는 선정(空無邊處定), 의식에 걸림이 없는 선정(識無邊處定), 아무것도 없는 선정(無所有處定),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 등에서도… 또한 평정이 수반되고, 마음굳힘이 수반되고… 내지… 혜가 수반된다.(Ps. vol.1. pp. 168-169)

6) ‘평정(捨, upekkha)’이라는 술어에 대해 PsA.(p. 511)에서는 다음과 같이, “느낌에는 
   그와 같이 즐거움과 괴로움으로 포착되는 것이 있고, 평정으로서 미세하여 붙잡기 어
   렵고 잘 포착되지 않는 것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와 같은 PsA.의 설명은 ‘평
   정’이라는 용어가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선정’과 ‘세 번째 선정’에서의 ‘기쁨’, ‘즐거
   움’ 등이 모두 가라앉아 ‘초연해진 상태’를 가리키는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인용된 경구의 내용은 앞서 Ⅱ장 2절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산란하지 않음’의 정도를 8단계의 선정체계로써 풀어낸 것이다. 그리하여 ‘첫 번째 선정(初禪)’에서부터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기까지의 심리적 상태가 어떠한가를 나타내고 있다. 이상 인용구에 실린 이들 선정의 내용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선정 : 거친 사유  : 미세 사유 : 기쁨 : 즐거움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두 번째 선정 :                  :                  : 기쁨 : 즐거움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세 번째 선정 :                  :                  :       : 즐거움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네 번째 선정 :                  :                  :       : 평정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공간에…선정:                 :                  :       : 평정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의식에…선정:                 :                  :       : 평정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아무것도…선정 :            :                  :       : 평정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지각이 …선정  :             :                   :       : 평정         : 마음 굳힘 : 믿음 : 정진 : 마음 지킴 : 삼매 : 혜 
                                      [도표 1] 선정의 단계에 따른 심리적 내용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각 선정의 상태에서 진행되는 마음작용의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표의 내용 중에서 주목되는 사항을 되짚어 보면 다음과 같다. 그것은 ‘두 번째 선정(第二禪)’에서 ‘언어적 현상(vacīsaṅkhārā)’을 담지하는 ‘거친 사유(尋)’와 ‘미세한 사유(伺)’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선정(第四禪)’에서는 ‘세 번째 선정(第三禪)’에서의 ‘즐거움(樂)’을 빼는 대신 거기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평정(捨, upekkha)’을 넣고 있다.

 

각주의 용어설명에서 드러나듯이, ‘평정(upekkha)’이란 ‘언어적 현상’이 그치고 즐거움과 괴로움 모두가 가라앉아 평정되고 초연해진 마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네 번째 선정’이라는 것이다. 이하 ‘물질적 현상의 영역을 벗어난 네 가지 선정(四無色定)’ 또한 ‘네 번째 선정’의 상태와 동일한 내용을 지닌 것으로 설명된다. 이들 ‘물질적 현상의 영역을 벗어난 네 가지 선정’에는 평정(捨)․마음굳힘(攝持)․믿음(信)․정진․마음지킴․삼매․혜 등의 7가지 심리적 작용이 수반된다.

 

결과적으로 이들 ‘네 번째 선정(第四禪)’ 이후의 선정들은 ‘네 번째 선정’ 자체와 동일한 심리적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즉 ‘네 번째 선정’과 동일한 정도의 ‘산란하지 않음(無散亂)’의 지평 위에서, ‘공간적 제약’ 혹은 ‘관념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난 순서에 맞추어 배열되어 있을 뿐이다.54) 따라서 실제적인 내용면에서는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정의 단계적 내용에 관련하여, Paṭisambhidāmagga에서는 이상과 같이 기술한다. 다음으로는 위빠싸나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 보겠다. 경전에서는 위빠싸나의 행법을 다음과 같이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十八隨觀)’으로 세분화한다.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에 의해 항상함에 대한 지각(常想)을,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에 의해 즐거움에 대한 지각(樂想)을,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에 의해 나라는 지각(我想)을, 싫어하여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厭離隨觀)에 의해 즐거워 함(喜)을, 탐냄을 떠나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에 의해 탐냄(貪)을, 소멸을 따라가며 보는 법(滅隨觀)에 의해 일어남(集)을, 버리고 따라가며 보는 법(捨離隨觀)에 의해 집착(取着)을, 다해 없어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盡滅隨觀)에 의해 두터움에 대한 지각(厚想)을,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衰滅隨觀)에 의해 지속하는 힘(存續)을, 달라짐을 따라가며 보는 법(變易隨觀)에 의해 견고함에 대한 지각(堅固想)을, 드러나지 않음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因相隨觀)에 의해 드러난 모습(因相)을, 바램없이 따라가며 보는 법(無願隨觀)에 의해 바램(願)을, 공성을 따라가며 보는 법(空性隨觀)에 의해 편향됨(現貪)을, 탁월한 혜로써 법을 보는 법(增上慧法觀)에 의해 견고함의 집착에 의한 편향됨(堅執現貪)을, 있는 그대로 알아보는 법(如實智見)에 의해 어리석음에 의한 편향됨(迷妄現貪)을, 잘못됨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법(過患隨觀)에 의해 집착에 의한 편향됨(執着現貪)을, 돌이켜 관찰하여 따라가며 보는 법(省察隨觀)에 의해 돌이켜 관찰함이 결여됨(無省察)을, 물러나 따라가며 보는 법(還滅隨觀)에 의해 매임에 의한 편향됨(結縛現貪)을 제거한다…

(Ps. vol.1. p. 45)

 

이들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은 위빠싸나 수행의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무명을 제거해 나가는 방법’으로서의 ‘따라가며 보는 법(隨觀)’의 18가지와 그들 각각의 구체적 용도가 밝혀진 셈이다.

 

나아가 경전에서는 이들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이 과연 어떠한 수행론적 위상을 지니는가에 대해 알 수 있게 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무상을 따라가며 보는 법(無常隨觀)의…, 고통을 따라가며 보는 법(苦隨觀)의… 무아를 따라가며 보는 법(無我隨觀)의…, 돌이켜 관찰하여 따라가며 보는 법(省察隨觀)의, 물러나 따라가며 보는 법(還滅隨觀)의, 흐름으로 들어섬에 나아감(預流道)의,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의, 돌아 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의,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의 처음은 무엇이고, 중간은 무엇이며, 끝은 무엇인가?…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에서는… 또한 거친 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한 사유(伺)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즐거움(樂)이 수반되고, 마음굳힘(攝持)이 수반되고, 믿음(信)이 수반되고, 정진이 수반되고, 마음지킴(念)이 수반되고, 삼매가 수반되고, 혜가 수반된다.(Ps. vol.1. pp. 169-170)

 

여기에 인용된 경구의 내용은 두 가지 측면에서 수행의 위계에 관련한 중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첫째, 사마타에 관련한 언급에 뒤이어 설명되는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十八隨觀)’이 ‘흐름으로 들어섬에 나아감(預流道)’,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 등 ‘4가지 사문의 나아감(四沙門道)’의 앞 단계에 배속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곧 ‘사마타’ → ‘위빠싸나’ → ‘나아감(道)’라고 하는 수행상의 위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을 다시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8가지 선정’의 단계를 거쳐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을 통과하여 ‘4가지 나아감’이라고 하는 전체 30단계에 이른다.7) 이와 같은 수행의 위계에 관련한 언급은, 비록 그 숫자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Paṭisambhidāmagga의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견되며, 대략적인 수순의 일치를 보인다.

7) 여기에서 언급된 ‘8가지 선정’ →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 → ‘4가지 나아감’의 
   수순은 Paṭisambhidāmagga의 대품 제3, 11절에서부터 20절(vol.1. pp. 167-170)
   까지에 등장한 것으로, 거기에서는 ‘들숨과 날숨에 대한 마음지킴(入出息念, 
   ānāpanasati)’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구조로 엮어내
   고, 다시 이를 ‘수행의 위계와 나아감의 과정’과 연계하여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여기에서 언급된 30단계 이외에도, 26단계(vol.1. p. 82 이하), 37단계(vol.1. pp. 23-26), 41단계(vol.1. p. 20 등)라고 하는 수행의 위계에 관련된 언급들이 등장하지만, 그들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적 흐름은 서로 일치한다. 그리하여 26단계의 경우에는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 → ‘4가지 나아감과 4가지 들어섬’으로 구성되어 있고, 37단계의 경우에는 ‘7가지 선정의 예비적 단계’8) → ‘8가지 선정’ →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 → ‘4가지 나아감(道)’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지막 41단계의 경우에는 앞의 37단계에 ‘4가지 들어섬(果)’이 첨가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8) ‘7가지 선정의 예비적 단계’란 ‘떠남(出離)’, ‘성내지 않음(無瞋)’, ‘빛에 대한 지각
   (光明想)’, ‘산란하지 않음(無散亂)’, ‘법의 결정(法決定)’, ‘지혜’, ‘환희’의 7가지에 
   의해, ‘감각적 쾌락에 대한 바램(欲欲)’, ‘성냄(瞋)’, ‘혼침과 졸음(昏沈隨眠)’, ‘들뜸
   (棹擧)’, ‘의심(疑)’, ‘무명’, ‘혐오’ 등의 7가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7가지 번뇌를 제거하고 나면 곧 ‘첫 번째 선정(初禪)’의 상태에 이른다. Ps. vol.1. 
   p. 31

 

앞 소절에서 살펴 보았듯이,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서로 회통되는 원리를 지닌다. 따라서 이것의 발현양태가 반드시 고정적인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이들 두 행법은 상호간에 보완되는 원리를 지닌 것이므로, 혹은 앞서고 혹은 뒷서는 형식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즉 상황에 따라서 사마타가 먼저 행해질 수도 있고, 위빠싸나가 먼저 행해질 수도 있다는 문제이다.

 

그러나 경구의 설명이 모두 그와 같은 양상으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양자의 발현양태와는 별도로 그들 사이에 엄연한 수행론적 위계가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용문에 등장한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은 수행의 위계상으로 볼 때,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을 거친 이후, 이를 벗어나 다시 첫 번째 선정(初禪)으로 되돌아 왔을 때의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한 바로 이것은 수행의 위계에 관련된 두 번째의 중대한 정보로 이어진다. 즉 위빠싸나와 더불어 일체의 무명과 번뇌가 단절된 ‘성위(道果)’에 이르기 위해서는 ‘거친 사유’라든가 ‘미세한 사유’등의 ‘첫 번째 선정’과 동일한 심리적 내용물이 수반되는 상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에서는… 또한 거친 사유(尋)가 수반되고, 미세한 사유(伺)가 수반되고, 기쁨(喜)이 수반되고,… ”라는 문구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十八隨觀)’과 ‘4가지 나아감(四道)’ 모두에는 거친 사유(尋)․미세한 사유(伺)․기쁨(喜)․즐거움(樂)․마음굳힘(攝持)․믿음(信)․정진․마음지킴(念)․삼매․혜 등의 10가지 심리적 작용이 수반된다. 이들 10가지 심리적 상태는 첫 번째 선정(初禪)의 내용물이다. 따라서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과 ‘4가지 나아감’의 모두는 첫 번째 선정의 심리적 상태와 사실상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위빠싸나’와 더불어 ‘4가지 나아감의 경지(四道)’가 첫 번째 선정의 심리적 상태에서 진행된다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수행론적 위상에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무명’을 타파하고 ‘번뇌’를 제거하는데 있어서 깊은 선정의 상태에 몰입해 있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나타낸다. 즉 ‘두 번째 선정(第二禪)’ 이하 ‘지각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선정(非想非非想處定)’에 이르기까지는 선정체계 자체 내에서 높은 위상을 지닌 것일지언정, 궁극적인 진리의 체득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아라한에 들어섬(阿羅漢果)

→ 아라한에 나아감(阿羅漢道) ↑

지각이 …아닌 선정 / 돌아오지 않음에 들어섬(不還果) ↑

↑아무것 …없는 선정 |― → 돌아오지 않음에 나아감(不還道) ↑

↑의식에 …없는 선정 | 한번 돌아옴에 들어섬(一來果) ↑

↑공간에 …없는 선정 |― → 한번 돌아옴에 나아감(一來道) ↑

↑네 번째 선정 | 흐름에 들어섬(預流果) ↑

↑세 번째 선정 |― → 흐름으로 나아감(預流道) ↑

↑두 번째 선정 ↓ ↑

↑첫 번째 선정 ← - - - - - →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十八隨觀)

              [사마타의 체계] [위빠싸나의 체계 및 성위]

‘→’ 표시는 위계에 따른 순차적 진행을 의미함

‘← - →’ 표시는 동일한 ‘첫 번째 선정’의 상태를 의미함

9) 본 도식에는 불교 선정체계 최후의 것으로 거론되는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선정
   (想受滅定, saññāvedayitanirodhasamāpatti)’이 빠져 있다. 그러나 
   Paṭisambhidāmagga에 그러한 선정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
   대 Ps., vol.1. p. 99의 “두 번째 선정에 들어간 자에게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
   유에 의한 언어적 현상이 그친다. 네 번째 선정에 들어간 자에게는 들숨과 날숨
   에 의한 육체적 현상이 그친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들어간 자에게는 지각과 
   느낌에 의한 정신적 현상이 그친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선정’은 불교 고유의 것으로, ‘진리를 인식하는 구경의 경
   지’ 혹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열반’ 등으로 거론되
   기도 한다. 즉 선정의 하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단순한 선정수행의 정점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SN. vol.4. p. 295; 中阿含經, 大因經, 대정1, pp. 581b-592a 등)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논자는 위의 선정체계 내에서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선정’
   이 배제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본다.
   즉 본문의 내용을 결론지으면, 사마타는 위빠싸나의 예비적 행법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선정’을 사마타의 범위에 넣게 
   되면, 그것마저 위빠싸나의 예비적 행법으로 귀착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따라서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선정’을 사마타의 영역에서 배제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
   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논자의 추측은 아직 경증에 의
   거한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차후의 과제
   로 남겨 두기로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라한에 이르는 길에는 ①사마타를 선행한 후 위빠싸나를 닦는 방법, ②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 방법, ③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방법 등이 있다. 이들 세 가지 방법을 위의 도식에 엮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①의 방법은 8단계의 선정을 순차적으로 거친 후, 첫 번째 선정의 상태로 되돌아와서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을 닦아 아라한에 접근해 나가는 방법이다. 또한 ①의 방법에서는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 진입하고 난 후, 그 이후의 선정단계로 나아가지 않고 곧 바로 위빠싸나로 전향하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②의 방법은 위빠싸나의 세부항목으로서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을 우선하는 것을 말한다. ②에서는 그들 위빠싸나의 수행이 원만하게 이루어질 경우, 첫 번째 선정과 동일한 심리적 상태가 뒤따른다. 따라서 위빠싸나를 선행한 후 사마타를 닦는 법이 자연적으로 성취된다. ②의 경우는 예비적 선정의 개발 없이도 위빠싸나가 가능하다는 경전적 근거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③의 방법 또한 ②의 방법에서 드러난 원리의 연장 선상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18가지 따라가며 보는 법’의 위빠싸나를 행하고 있다는 것은 곧 첫 번째 선정의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는 것이 된다. 

 

이상과 같이 초기불교의 경전에는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수행론적 위계가 엄연한 체계로써 등장한다. 그러나 논의된 바와 같이, 그러한 수행론적 위계는 양자의 발현양태와는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수행자의 성향과 근기에 따라 몇몇 단계는 건너 뛸 수도 있고, 또한 그 순서가 뒤바뀔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의 사마타와 위빠싸나는 고도의 체계적 연관성을 지닌 것임과 더불어,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적용의 양상 또한 갖춘 것임이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Ⅳ. 결론

 

이상과 같은 초기불교의 경전에는 ①사마타와 위빠싸나의 확립된 수행체계가 나타나 있고, ②이들의 발현양태와 순서 그리고 수행론상의 위계가 제시되어 있으며, ③사마타와 위빠싸나를 동시에 평등하게 수행할 수 있고, ④위빠싸나의 수행은 네 번째 선정이 아닌 첫 번째 선정에서 진행됨을 드러내는 내용들이 명백히 기술되어 있다. 이들 확인된 내용은 사마타와 위빠싸나에 관련한 이전의 논문들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으로, 특히 초기불교의 경전에 나타난 양자의 개념을 온전히 규명하는데 일조하는 바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수행의 문제란 곧 삶의 문제이다. 그러한 까닭에 수행의 문제는 철저한 고증을 통해서 접근해 나가야 한다. 잘못된 삶을 되물릴 수 없듯이, 수행에서 야기될 수 있는 잘못됨 또한 되물리기 힘든 이유에서이다. 본 논문의 내용은 4부의 아함과 5부의 Nikāya를 벗어나지 않는다. 200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 동안 무수한 인간들에 의해 시험되고 검증된 가르침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논자가 굳이 경전에 나타난 내용만을 고수한 까닭은 바로 이때문이다. 물론 옛 것을 새로운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해 내려는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옛 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하여 옛 것을 왜곡한 바탕 위에서 진행된 것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갖가지 폐해는 예측마저 곤란하다. 우리는 그간의 역사 속에 등장했다가 사라져간 무수한 유사종교에서 그러한 사례들을 보곤한다.

 

더불어 우리 학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빨리어 경전에 근거한 초기불교의 연구는 아직 초보 수준이다. 그러한 만큼 어느 누구도 이 분야에 대해 독단적인 태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한 이유에서 부파불교 등의 다른 여러 가르침에도 귀를 열어 두어야 할 것이지만, 일단 4부의 아함과 5부의 Nikāya만큼이라도 충실히 이해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논자의 바램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