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모음

주해 모음 - ㄷ

실론섬 2014. 7. 12. 20:11

 다문(多聞, bahu-śruta, bahu-ssuta)

다문(多聞, bahu-śruta, bahu-ssuta)이란 불교의 진리를 많이 듣고 들은 그대로 지키고 실천한다는 말. 많이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망상분별과 아집을 키우므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모든 경전의 벽두에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뜻도 부처님의 말씀을 지켜나간다는 뜻인데, 이 역시 이해로서의 문(聞)과 실천으로서의 행(行)이 아우러진 말이다. 단지 많이 듣는 것만으로는 다문의 이상적인 뜻에 미치지 못한다.


◎ 다섯 가지 감각의 대상 
다섯 감각의 대상(ārammaṇa)은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물질의 토대이고, 그것들과 만나는 감각접촉(phassa)이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다섯 가지이다. 그리고 마음(意, mano)을 통해 이러한 다섯 감각의 대상을 통해 받아들인 현상 즉 전오식(前五識)을 판독하고 인식한다. 즉 눈(眼, cakku)의 대상인 형상(色, rūpa)이 눈의 문(眼門, cakku-dvāra)에 나타나면 제일 먼저 오문전향의 마음(다섯 감각의 문들 가운데 하나로 향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눈의 문으로 향하고 그 다음에 눈의 아는 마음(眼識, cakku-viññaṇa)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받아들이는 마음(sampaṭicchana-citta)이, 그 다음에 조사하는 마음(āvajjana-citta)이, 그 다음에 결정하는 마음(voṭṭhapana-citta)이, 그 다음에 그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인 7가지 자와나의 마음(javana-citta)이, 그 다음에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ṅa-citta) 2가지가 일어난다. 하나의 인식과정에서 대상을 인식할 때 생기는 안식(眼識)은 한 심찰나 동안만 일어나지만 마음은 13개의 심찰나 동안 지속된다. 그러니까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의 전오식(前五識)은 의식이 없으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다음 단계의 마음인 받아들이는 마음, 조사하는 마음, 결정하는 마음 등이 없으면 판독불능으로 그들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 다섯 가지 과보 
다섯 가지 과보란 (1) 기능(根, indriya), (2) 대상(境, visaya), (3) 식(識, vinñāṇa), (4) 감각접촉(觸, phassa), (5) 느낌(受, vedanā)이다. 이를 다섯 가지 법이라고도 한다. 보는 경우에는 눈, 형상, 안식의 세 가지가 서로 맞부딪쳐서 시각접촉, 즉 감각접촉이 일어나고 이 감각접촉으로 말미암아 느낌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다섯 가지 법은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등의 다른 여섯 감각장소[六處]에도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 다섯 가지 기능(五根, 오근, pañca-indriya)  

다섯 가지 기능[五根]’으로 옮긴 빤쨔인드리야(pañca-indriya)는 pañca(다섯)+indriya(根.근, 기능)의 합성어이다. 중국에서는 오근(五根)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five faculties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기능에는

(1) 믿음의 기능(saddhā-indriya),

(2) 정진의 기능(viriya-indriya),

(3) 알아차림의 기능(sati-indriya),

(4) 삼매의 기능(samādhi-indriya),

(5) 지혜의 기능(paññā-indriya)이 있다.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은 모두 믿음(saddhā), 정진(viriya), 마음챙김(sati), 삼매(samādhi), 통찰지(paññā)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둘은 다른 역할을 한다. 기능(根, indriya)은 그 각각의 영역에서 지배하는 요소이고 힘(力, bala)은 반대되는 것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하는 법들을 강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다시 말해서, 다섯 가지 기능은 그들의 영역에서 각각 결심하고, 분발하고, 확립하고, 산만하지 않고, 식별한다. 이렇게 하면서 이와 반대되는 법들, 즉 우유부담함, 게으름, 부주의함, 동요, 미혹함을 극복한다. 반면 다섯 가지 힘은 이들과 같은 상태인데 흔들리지 않고 이와 반대되는 법들이 이들을 압도하지 못하도록 한다. 

 

◎ 다섯 가지 바른 삼매(pancangiko sammasamadhi)

'다섯 가지 바른 삼매(pancangiko sammasamadhi)' 란 '네 가지 선정(사선정.catutthajjhanasamadhi)' 에 속한 다섯 가지 상태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기쁨이 두루한 상태(pitipharana'. '즐거움이 두루한 상태(sukhapharana)'. '마음이 두루한 상태(cetopharana)'. '광명이 두루한 상태(alokapharanata)'. '곰곰이 살핌을 통해 떠오른 모습을 지닌 상태(paccavekkhananimitta)' 등이다.

 

◎ 다섯 가지 바퀴

①나무로 이루어진 바퀴(darucakka)

②보배로 이루어진 바퀴(ratanacakka)

③법으로 이루어진 바퀴(dhammacakka)

④옳은 행위로 이루어진 바퀴(iriyapathacakka)

⑤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진 바퀴(sampatticakka)

 

◎ 다섯 가지 장애(panca nivaranani. 五蓋. 오개)

'다섯 가지 장애(panca nivaranani)' 란 '감각적 쾌락(kama)'. '성냄(byapada)'. '혼침과 졸음(thinamiddha)'. '들뜸(uddhaccakukkucca)'. '의심(vidikiccha)' 의 다섯을 말한다.

 

◎ 다섯 가지 힘[五力] 

‘다섯 가지 힘[五力]’으로 옮긴 빤쨔발라(pañca-bala)는 pañca(다섯)+bala(力, 힘)의 합성어이다. 중국에서는 오력(五力)이라 번역했고 영어로는 five powers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 힘에는

(1) 믿음의 힘(saddhā-bala),

(2) 정진의 힘(viriya-bala),

(3) 마음챙김의 힘(sati-bala),

(4) 삼매(집중)의 힘(samādhi-bala),

(5) 지혜의 힘(paññā-bala)이 있다.

 

◎ 다섯 감각적 쾌락의 요인(pancahi kamagunehi)
시각대상(rupa). 소리(sadda). 냄새(gandha). 맛(rasa). 감촉(photthabba) 를 말한다.

 

◎ 다섯 다른 존재로 나아감

지옥(nirayo). 축생(tiracchanayoni). 아귀(pettivisayo). 인간(manussa). 하늘(deva) 의 다섯 존재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 다섯 해탈의 장소(panca vimuttayatanani. 五解脫處)
'다섯 해탈의 장소(panca vimuttayatanani. 五解脫處)'란 
①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지는 법의 가르침을 듣는 것(attano hitatthaya parehi pavattitadhammadesanasa vanam) 
②다른 사람을 위해 그와 같이 들은 법을 가르치는 것(paresam hitatthaya attano yathasutashammadesama) 
③그와 같이 들은 법을 학습하는 것(yathasutassa dhammassa sajjhayakaranam) 
④그와 같이 들은 법을 마음으로 따라가며 사유하는 것(yathasutassa dhammassa cetasa anuvitakkanam) 
⑤부정함의 까시나 등 적절하게 관할할 때의 대상(kasinasubhadisu anukulam arammana)으로 설명되고 있다. PsA. p.69 참조

 

◎ 닦아야 한다(bhavetabba)

'닦아야 한다(bhavetabba)'는 말은 'bhaveti(닦다. 수습(修習)하다. 명상(冥想)하다)'의 미래수동분사형이다. 'vbhti'에 기원을 둔 말로, bhavati(이다·이 되다)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이 되게 하다'라고 하는 뜻에서 특정한 존재의 상태를 이끌어 내는 과정, 즉 실천행법으로 정착된 말임을 알 수 있다. 이 말의 명사형인 'bhavana'는 '수습'. '수행'등으로 번역이 되고 있다. 'bhavana' 는 보통 명상의 실천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경전(DN. vol.3. p.29emd)등에서는 이 말을 혜(慧)와 관련지워 '들음을 통해 이루어진 혜(sutamaya-panna)'. '사유를 통해 이루어진 혜(cintamaya-panna)'. '닦음을 이루어진 혜(bhavana-panna)' 등 세 가지 혜를 이루는 수단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bhavana-panna란 다름아닌 '명상의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혜'를 가리킨다.

 

◎ 단견(斷見,우쩨따딧티. uccheda-di ṭ ṭhi) 
‘단견(斷見)’으로 번역한 우쩨따딧티(uccheda-diṭṭhi)는 uccheda(끊어짐, 멸절)+diṭṭhi(견해)의 합성어이다. 사람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으며, 선악이라든가 과보는 없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도덕적 허무론이다. 이러한 단견은 12연기의 인과관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 이 단견은 쾌락주의와 유물론적 인생관의 기초가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악행을 짓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 단견과 결부된 갈애를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 vibhava-taṇhā)라고 한다.

◎ 단멸론(斷滅論, 웃체다와다 uccheda-v āda) 

‘단멸론(斷滅論)’이라 번역되는 우쩨따와다(uccheda-vāda)는 uccheda(끊어짐, 멸절)+vada(교의, 사상, 주의)의 합성어이다. 사람은 일단 죽으면 끝나는 것으로 다시 태어나는 법이 없으며, 선악이라든가 과보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릇된 견해로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이라고도 한다. 이 단멸론은 「범망경」(D1)에서 7가지로 정리되고 있다. 육사외도六師外都 중에서 뿌라나 까사빠(Pūrana Kassapa)와 막칼리 고살라(Makkhali Gosāla)와 아지따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의 사상이 대표적인 단멸론에 해당한다. 특히 아지따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가지 요소만이 실재하는 것이라고 설하고, 도덕적 행위의 무용함을 주장했다. 주석서(DA.i.166)에 따르면 이들 세 사상은 모두 무인론(無因論, ahetuka-vāda), 도덕부정론(無作用論, akiriya-vāda), 허무론(虛無論, natthika-vāda)이라고 한다.

◎ 대치(對治, pratipaksa)

대치(對治, pratipaksa)는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크게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 또는 정(定, dhyāna)과 혜(慧, prajñā)로 나누어진다.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포함한 불교의 주류전통에서는 번뇌는 관(觀) 또는 혜(慧)에 의해 제거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가론(瑜伽論)』 본지분의 「성문지」에서 수행도를 크게 세간도와 출세간도로 구분한다. 세간도는 하추상정(下麤上靜)의 방식에 따라 상승하는 방식으로 주로 선정의 힘에 의해 획득되는 것으로 보는데 비해, 출세간도는 견도(見道) 16행상에 대한 분석적인 혜의 방식으로 설명되고 있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이 방식은 선경류(禪經類)의 수행문헌에서 보이는데 출세간도를 얻기 위해서는 혜(慧)의 중심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선정은 번뇌의 현실적 작용을 단지 억압할 수 있을 뿐이고, 번뇌의 완전한 제거는 다만 혜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유가사지론』의 「섭결택분(攝決擇分)」(大30 p.669a12-21)에서는 대치를 4종으로 나누는데 염환대치(厭患對治), 단대치(斷對治), 지대치(持對治), 원분대치(遠分對治)를 작의(作意)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을 대치수행(對治修行)이라 한다.

 

◎ 대범천(大梵天, Mah ā-brahm ā) 

대범천(大梵天, Mahā-brahmā)은 초선천(初禪天)의 세 번째 천상을 뜻하기도 하고 여기서처럼 유력한 범천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력한 범천으로 경에서는 뚜두(Tudu), 나라다(Nārada), 가띠까라(Ghaṭikāra), 바까(Baka), 사냥꾸마라(Sanaṅkumarā), 사함빠띠(Sahampatī) 등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서 사함빠띠 범천이 대범천으로 많이 등장한다. 부처님께 법륜을 굴려주시길 간청한 대범천이 바로 사함빠띠이다.

 

◎ 대인

'대인(大人)'으로 번역한 마하뿌리사(Mahā-purisa)는 maha(大, 큰)+ purisa(人, 사람)의 합성어이다. PED에는 ‘a great man, a hero, a man destined by fate to be a Ruler or a Saviour of the World. A being thus favoured by fate possesses 32 marks by which people recognise his vocation or prophesy his greatness’라고 설명되듯이, 세상을 구원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 cakka-vatti)이나 세상을 구원하는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ā-sambuddha)가 될 운명을 지닌 위대한 사람, 영웅으로 그가 지닌 32가지 상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그의 사명을 인정받거나 그의 위대함이 예견된다.

◎ 대웅(大雄)

대웅(大雄)은 세웅(世雄)과 같은 뜻으로 부처님의 존칭이다. 부처님은 대정력(大定力)이 있어 큰 지혜를 갖추시며 세간에서 가장 용맹스럽게 일체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성취하여 큰 덕으로 중생을 교화하므로 대웅이라 부르고 그를 모신 곳을 대웅전(大雄殿)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량수경(無量壽經)』 권上에 “今日世雄住佛所住.”이라 하였고,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에 “世雄不可量”이라 한다.

 

◎ 대천세계(大千世界. mahāsāhasra-lokadhātu, mahāsahassa-lokadhātu) 인도의 우주관. 고대 인도인들은 사대주(四大洲)와 해·달 그리고 제천(諸天)을 하나의 소세계(小世界)라 하고, 천 개의 소세계를 합하여 소천세계(小千世界)라 하였다. 또 천 개의 소천세계를 합하면 중천세계(中千世界)가 되고, 천 개의 중천세계를 합하면 대천세계가 된다. 보통 대천세계라 하면 사람이 사는 다양한 모든 세계의 모습을 가리킨다. 소천·중천·대천을 모두 들어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라  한다.

 

◎ 데와닷따(Devadatta)

데와닷따(Devadatta)는 부처님의 사촌형제로 석가족의 숫빠붓다(Suppabuddha)왕과 아미따(Amitā) 왕비의 왕자로 태어났다. 데와닷따라는 이름은 ‘천인(deva)에게 바친(datta)’이란 뜻이다. 나중에 싯닫타 태자와 결혼한 밧다까짜나(Bhaddakaccānā)를 여동생으로 두었다. 어떤 문헌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아미또다나(Amitodana)의 아들이자 아난다(Ānanda)와는 형제였다고 한다.(Mhv.ii.22; MT.136; DhA.iii.44) 이러한 사실은 보살이 출가하고 나서 데와닷따가 밧다까짜나를 유혹하려 했다는 「마하와스뚜」(Mtu.69)의 언급에 의해서 힘을 얻고 있다. 율장(V.ii.189)의 어느 장에서는 데와닷따가 고디뿟따(Godhiputta)로 등장하는데 이는 어쩌면데와닷따의 어머니는 고디(Godhi)였음을 암시하는 지도 모른다.「마하와스뚜(Mahāvasutu)」같은 산스끄리뜨 불전은 데와닷따가 어린 시절부터 적개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이야기를 들고 있다. 싯닷타 태자가 자신의 무예솜씨를 보여주려고 할 때 흰꼬끼리가 태자에게 진상되었고 데와닷따는 시기심에서 그 코끼리를 죽였다. 나중에 싯닷타 태자가 성문을 막아놓은 그 코끼리 시체를 한손에 밖으로 던져 버렸다. 상윳따 니까야의 주석서(SA.i.62)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5마리 코끼리의 힘을 지녔다고 한다. 또 다른 때에 데와닷따는 기러기를 활로 쏘아 상처를 입힌데 항의하는 싯닷따 왕자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부처님께서 성도 후 까빌라와뚜(Kapilavatthu)를 방문하여 석가족에 법문을 설하셨을 때 데와닷따는 아난다(Ānanda), 바구(Bhagu), 낌빌라(Kimbila), 밧디야(Bhaddiya), 아누룻다(Anuruddha)와 같은 다른 석가족 왕자들과 그들의 이발사인 우빨리(Upāli)와 함께 출가하였다.(Vin.ii.182). 그 뒤 우안거를 지내는 동안 데와닷따는 범부의 신통(puthujja-nika-iddhi)을 얻었다.(Vin.ii.183). 데와닷따는 초창기에는 부처님께서 칭송하신 일곱 대장로의 명단에 언급될 정도로 승가에서 큰 존경과 명예를 누렸던 것 같다.(Ud.i.5; Vin.ii.189) 사리뿟따도 라자가하(Rājagaha)를 다니면서 이러한 데와닷따를 칭송하였을 정도였다.(DhA.i.64f).

하지만 부처님께서 입멸하시기 8년 전부터 데와닷따는 삿된 욕망에 사로잡혀 이득과 명예를 갈망하고 부처님을 시기하여 마가다국의 아자따삿뚜(Ajātasattu) 태자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 데와닷따는 뱀을 몸에 칭칭 감은 동자의 모습으로 변해서 아자따삿투의 침소에 나타나 왕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자 이에 크게 감명을 받은 아자따삿뚜는 데와닷따에 존경을 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5백대의 수레로 아침 저녁으로 데와닷따를 방문하고 5백가지 요리를 매일 그에게 보냈다고 전해진다.

 「자따까」(J.i.186, 508)에 따르면 아자따삿뚜는 데와닷따를 위해 가야시사(象頭山, Gayāsīsa)에 승원을 지어주고 매일 5백 개의 항아리에 3년 묵은 향기로운 쌀과 가장 훌륭한 요리를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음식들은 너무나 맛나고 훌륭한 것이어서 일부 부처님의 제자들도 몰래 데와닷타의 승원에 가서 음식을 먹고 돌아 올 정도였다. 이러한 환대에 힘입어 데와닷따의 야욕은 더욱 커져 승가의 통솔권을 부처님에게 뺏을 궁리까지 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일어나자 이전의 신통력은 모두 사라졌다. 목갈라나 존자의 제자로 마음으로 만들어진 몸의 천인(manomaya-kāyika-deva)으로 재생한 꼴리야족의 까꾸다(Kakudha)가 데와닷따의 이러한 계획을 간파하고는 목갈라나 존자에게 이 사실을 알려왔다. 존자는 나중에 부처님께 이 사실을 보고 드렸지만 부처님께서는 데와닷따가 언젠가는 마각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말씀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찾아와서 부처님은 이제 연로하니 그만 은퇴하고 승가의 통솔권을 자기에게 넘겨주시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하였다. 부처님은 그러한 제안을 일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도 승가의 통솔권을 주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내뱉은 침처럼 야비한 너에게 주겠느냐?”(Vin.ii.188). 이 말씀을 들은 데와닷따는 격노하여 부처님께 보복할 것을 다짐하였다.

데와닷따는 아자따삿뚜에게 가서 자신은 부처님을 죽일 테니까 태자는 부왕인 빔비사라(Bimbisāra)를 죽이라고 사주했다.「아파다나(Apādana)」(Ap.ii.300f)는 부처님을 해코지하려는 데와닷따의 이러한 모든 계획은 부처님이 전생에 지은 악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지따삿뚜는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고는 부처님을 쏘아 죽이는데 필요한 왕궁의 궁수(弓手)들을 데와닷따에게 붙여주었다. 데와닷따는 이 궁수들을첫 번째 장소에 1명, 두 번째 장소에는 2명, 세 번째 장소에는 3명, 이렇게 숫자를 늘려서 총 16명의 궁수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첫 번째 궁수가 부처님을 쏘아 죽이고 돌아오면 두 번째 장소에 배치된 2명의 궁수에게그를 쏘아 죽이게 하고, 그 2명의 궁수가 돌아오면 세 번째 장소의 궁수들이 그 2명의 궁수를 쏘아죽이게 하 는 식으로 내막을 영원히 묻어두려 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첫 번째 장소에 배치된 궁수에게 오시자 부처님의 위엄에 눌려서 궁수는 몸조차 움직일 수 없었다. 부처님께서 궁수에게 자애롭게 말씀을 건네시자 궁수는무기를 내려놓고 죄를 고백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에게 법문을 설하여 귀의하게 하시고는 데와닷따가 알려준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고 말씀 하셨다. 뒤에 있던 나머지 궁수들은 기다리다가 지쳐서 경계를 풀고는 차례차례 가버렸다. 뒤의 장소에 배치되어 있는 궁수들도 부처님의 신통력에 이끌려 부처님을 뵙게 되고 법문을 듣고 귀의하였다. 첫 번째 궁수는 데와닷따에게 돌아가 부처님의 위대한 신통력 때문에 자신은 부처님을 죽일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제 데와닷따는 자신이 직접 부처님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어느 날 부처님이 깃자꾸따(靈鷲山, Gijjhakūṭa)의 비탈길을 걷고 계실 때 큰 바위를 내던졌다. 그때 대지에서 두 개의 봉우리가 튀어나와서 그 바위가 부처님을 향해 더 이상 돌진하지 못하게 했지만 조각난 바위조각이 부처님의 발을 때려 피를 냈다. 큰 고통속에서 부처님은 맛다꾸찌(Maddakucchi)로, 거기서 다시 지와까(Jīvaka)의 암바와나(Ambavana)로 가서 치료를 받으셨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호위병을 두시길 원했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느 누구도 여래의 목숨을 앗아갈 수 없다고 하시며 그러한 청을 거절하셨다. 

부처님의 목숨을 앗으려는 데와닷따의 다음 시도는 코끼리꾼을 꼬드겨서 흉포한 코끼리 날라기리(Nālāgiri)에게 독한 술을 먹인 뒤에 부처님이 가는 길에 풀어 놓는 것이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고 부처님도 경고를 받았지만 발걸음을 되돌리지 않으셨다. 코끼리가 다가오자 부처님은 자애(mettā)의 힘으로 코끼리를 달래서 완전히 조복하셨다.

 이 야비한 행동으로 데와닷따는 세간의 오명만 뒤집어쓰게 되었고, 아자따삿뚜마저 여론의 힘에 밀려 그에 대한 후원을 접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누려온 명예와 이익이 대폭 감소하였다. 그러자 데와닷따는 꼬깔리까(Kokālika), 까따모라까띳사(Kaṭamoraka-tissa), 칸나데위야뿟따(Khaṇṇadeviyāputta), 사뭇다닷따(Samuddadatta) 같은 추종세력의 도움으로 승가를 분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비구들은 부처님을 찾아가 승가의 모든 구성원들은 다음과 같은 5가지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1) 비구는 평생 숲속에서만 지내야 한다.
(2) 비구는 공양초청에 응해선 안 되고 오직 걸식으로만 생활해야 한다.
(3) 비구는 오직 분소의(糞掃衣)만 입어야 되고 재가신자에게 가사를 받아서는 안 된다.
(4) 비구는 지붕이 아닌 나무 아래에서만 거주해야 한다.
(5) 비구는 고기를 절대로 먹어선 안된다. 부처님은 우안거 중에 나무아래서만 자는 계율을 제외한 다른 계율들은 그렇게 하고 싶은 비구들은 따를 수 
있다고 답하셨지만 이러한 계율을 강제사항으로 하는 것에는 반대하셨다. 부처님의 이러한 거절은 데와닷따를 기쁘게 하였고,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함께 부처님은 사치와 풍족에 빠지려 하고 있다고 함께 떠들고 다녔다. 

승가를 분열시키는 것은 무거운 죄업임을 경고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데와닷따는 아난다에게 이제는 부처님 없이 자신의 주재 하에 포살의식을 열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웨살리(Vesāli) 출신의 갓 출가한비구들을 꾀어서 상두산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 데와닷따는 두 상수제자를 곁에 두어서 부처님을 흉내 내려고 했다.(DhA.i.122). 데와닷따의 추종자에는 몇몇 비구니들도 있었다. 그 가운데 으뜸은 자기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절대 지치지 않았던 뚤라난다(Thullanandā) 비구니였다.(Vin.iv.66, 335). 꾸마라깟사빠(Kumāra-kassapa)의 어머니도 처음에는 데와닷따의 승가에 들어갔다가 임신한 것을 안 데와닷따가 그녀를 내쫒자 부처님께 찾아와 귀의를 한다. 단다빠니(Dandapāni)같은 일부 석가족도 부처님보다 데와닷따를 선호했던 듯하다.(MA.i.298). 부처님께서는 두 명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를 가야시사로 보내어 미혹에 빠진 비구들을 데려오도록 하셨다. 데와닷따는 꼬깔리까가 주의하라고 거듭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상수제자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승가에 들어오는 줄로만 믿고 크게 기뻐하며 환영하였다. 그날 밤 데와닷따는 늦게까지 비구들에게 설법하느라 피곤해서 좀 쉬려고 사리뿟따에게 대신 설법을 해달라고 요청하고는 잠시 잠에 빠졌다. 그 사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설법을 해서 오백 명의 비구들을 다시 데리고 돌아 왔다. 승원이 텅텅 빈 것을 발견한 꼬깔리까는 황급히 잠자고 있던 데와닷따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잠에서 깬 데와닷따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게 되자 입에서 뜨거운 피를 토했다. 그리고는 중병에 걸려 9개월 동안 몸져 누었다.(DhA.i.143, J.i.491) 

죽음이 가까워 오자,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뵙고 사죄를 드리려 했지만 부처님은 이제 다시는 여래를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뵙기 위해 시종들을 데리고 여정을 떠났지만 기원정사(Jetavana) 근처의 연못가에 이르러 잠시 자신의 들것을 멈추게 한 뒤 씻으려 했다. 바로 그때 데와닷따의 악업이 성숙하여 대지가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그를 무간지옥(無間地獄, Avīci-niraya)으로 삼켜버렸다.

「밀린다빤하(Milindapañhā)」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그래도 초기에는 출세간의 삶(梵行, brahma-cariya)을 살았기 때문에 무간지옥에서 10만겁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격은 뒤에 다시 인간계에 태어나 아띠싸라(Aṭṭhissara)라는 벽지불이 될 것이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데와닷따가 데와라자(天王, Deva-rāja)라는 이름의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법구경」주석서(DhA.i.147), 「밀린다빤하」(Mil.108), 「사뭇다와니쟈 자따까(Samuddavānija Jātaka)」(J.No.466)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대지가 갈라져 무간지옥에 떨어지려는 순간에 부처님 이외에 다른 귀의처가 없음을 고백하는 다음의 게송을 읊었다고 한다.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저 가장 뛰어나신 분
신들 중의 신, 사람과 법을 다루시는 분
일체를 두루 보시는 분
온갖 복상(福相)을 구족하신 부처님께
제 생명을 다해 귀의합니다.”(J.No.466)
부처님께서 데와닷따의 출가를 받아들이셨을 때 예견하신 것이 바로 이 데와닷따의 마지막 신앙고백이었다.
 「밀린다빤하」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데와닷따가 여래의 가르침에서 출가하면 그의 고통은 끝날 것임을 
아시고는 한없는 자비의 마음으로 그를 출가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일 세존이 데와닷따를 출가시키지 않았다면 그는 1조의 겁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밀린다빤하」(Mil.101)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부처님 당시에 산채로 땅속으로 빨려 들어간 다섯 사람들 중 한명이었다. 그 다섯이란 바로 웁빨리완나 비구니를 겁탈한 아난다(Ananda), 사리뿟따 존자의 머리를 내리친 난다까(Nandaka)야차, 부처님을 중상한 친챠 마나위까(Ciñcā-mānavikā), 부처님의 앞길을 가로 막은 숩빠붓다(Suppabuddha), 그리고 데와닷따였다. 

「법구경」주석서(DhA.i.147)에서는 무간지옥에서 데와닷따가 당하는 고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과거 전생에 데와닷따가 깔라부(Kalābu)왕과 마하파타빠(Mahāpatāpa)왕이었을 때도 대지가 갈라지면서 무간지옥에 떨어졌었다. 데와닷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데와닷따의 전신, 삥갈라(Pingala)왕이 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큰 축제를 열었다. (DhA.i.126f).

「자따까」 주석서에는 데와닷따의 부처님에 대한 적개심은 비단 금생에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적개심은 무수히 많은 겁(劫)동안 지속되었고 어떤 때에는 보살을 해코지하려는 시도가 실패했지만, 어떤 때에는 성공하기도 했다. 시간을 거치면서 눈덩이처럼 커져온 이 적개심이 처음에 어떻게 발단이 되었는지는「세리와니쟈 자따까(Serivānija Jātaka)」(J.No.3)에 나와 있다.

「밀린다빤하」에 나오는 밀린다왕의 양도논법(兩刀論法)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부처님과 데와닷따 간의 업의 우열문제였다. 즉 밀린다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자따까」의 몇 가지 예를 들면서 왜 사악한 데와닷따가 몇 번의 전생에서는 보살보다 위력이 더 뛰어났는지를 물었다. 나가세나는 데와닷따도 전생에는 가난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다리를 놓는 등의 여러 선행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부처님께서는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해코지 하려고 온갖 음모와 공작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조금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셨다고 한다.(Mil.410)

 

◎ 두 가지 계(dve dhatuyo. 二界)

'두 가지 계(dve dhatuyo. 二界)'란 '유위의 계' 와 '무위의 계'를 가리킨다. PsA에는(p.67) '두 가지 계란 유위의 계와 무위의 계이다(dve dhatuyoti sankhata ca dhatu asankhata ca dahtu)'라는 언급이 있다.

 

◎ 두 가지 사악한 견해(dvihi ditthigatehi)

①항상한다는 견해(sassata-ditthi.상견.常見)

②단멸한다는 견해(uccheda-ditthi.단견.斷見)

 

◎ 두 가지 수행법 

불교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의 두 가지 다른 수행법이 있다. 사마타 수행자는 먼저 어느 수준까지의 근접집중(upacāra-samādhi)과 근본집중(appanā-samādhi)에 이르는 사마타를 닦는데, 먼저 근접집중이나 색계 혹은 무색계선정을 얻은 뒤 선정 상태에서 일어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지켜본다. 그런 후에 이 선정에서 나타나는 각지(覺支)들을 무상·고·무아라고 알아차린다. 이런 수행자가 먼저 근접집중이나 근본집중을 얻는 것을 심청정(心淸淨, citta-visuddhi)이라 한다. 

반면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러한 위빠사나의 토대가 되는 사마타수행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수행자는 계를 청정히 하고 자신 안에서 벌어지는 정신과 물질의 변화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바로 들어간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힘과 정확한 겨냥을 얻게 되면 마음은 어떤 법칙을 따라서 항상 변화하는 정신과 물질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집중되는데 이것은 사마타의 근접집중에 필적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러한 매순간의 마음집중을 찰나집중(khaṇika-samādhi)이라고 한다. 이것은 근접집중과 동등한 정도의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를 심청정으로 보는 것이다.

 

◎ 두 가지 장애(二障)

두 가지 장애(二障)란 혹장(惑障)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이다. 『구사론(俱舍論)』에는 번뇌장(煩惱障)과 해탈장(解脫障), 유식론(唯識論)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 『원각경(圓覺經)』에는 이장(理障)과 사장(事障), 금강경론(金剛經論)에는 번뇌장과 삼매장(三昧障), 또는 내장(內障)과 외장(外障)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다. 이장(二障)은 번뇌장( klesa-avarana)과 소지장( jneya-avarana)으로『유가사지론』 18권(大30, p.375a22) 등에 보인다. 번뇌장은 혹장이라고도 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며, 성도(聖道)를 방해해서 열반을 얻지 못하게 하는 번뇌를 말한다. 소지장은 지장(智障)이라고도 하며 탐·진·치 등의 번뇌가 객관의 진상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는 장애가 되므로 소지장이라고 한다. 『성유식론』 9권(大31 p.48c6-11)에 “번뇌장이란 변계소집인 실체의 자아로 집착하는 아견[살가야견(薩迦耶見)]을 상수(上首)로 하는 128가지 근본번뇌 및 그것의 등류인 모든 수번뇌를 말한다. 이것이 모두 유정의 몸과 마음을 어지럽게 괴롭혀서 능히 열반을 장애하는 것을 번뇌장이라고 한다. 소지장이란 변계소집인 실체의 법으로 집착하는 아견을 첫째로 하는 악견·의심·무명·탐애·성냄·교만 등이다. 인식의 대상과 전도됨이 없는 본성을 덮어서 능히 깨달음을 장애하는 것을 소지장이라고 한다. 煩惱障者, 謂執遍計所執實我, 薩迦耶見而爲上首, 百二十八根

本煩惱, 及彼等流諸隨煩惱. 此皆擾惱有情身心, 能障涅槃名煩惱障. 所知障者, 謂執遍計所執實法, 薩迦耶見而爲上首, 見疑無明愛?慢等. 覆所知境無顚倒性, 能障菩提名所知障. 번뇌장은 아집을 근본으로 하고 소지장은 법집을 근본으로 한다. 그 작용의 특징을 말하면 번뇌장은 열반을, 소지장은 보리를 장애한다.”고 하였다.

 

◎ 두 가지 이익(二利)

두 가지 이익(二利)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 자리(自利)는 노력하고 정진하여 수도의 공을 쌓는 것으로 그로부터 생기는 복락과 지혜 등의 좋은 과덕(果德)의 이익을 자기 자신만이 받아 누리는 것[上求菩提]. 이타(利他)는 다른 이를 이익하게 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닦는 공덕을 말한다[下化衆生]. 소승의 행은 자리뿐이지만 대승의 행은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원만을 목표로 한다.

 

◎ 두루 아는 지혜 (빠린냐. pariñña) 
‘두루 아는 지혜’라고 번역한 빠린냐(pariñña)는 PED에서 ‘accurate or exact knowledge, comprehension, full understanding.’이라고 설명되듯이, ‘정확한 앎, 통달, 두루 앎, 완전한 이해’를 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변지(邊知)라고 번역했다. 「청정도론」(Vis.XX.3)에 따르면 세 가지 두루 아는 지혜(pariñña)가 있다.

(1) 안것의 두루 아는 지혜(知邊知, ñāta-pariñña): 물질은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성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성을 조사함으로서 생기는 두루 아는 지혜이다.

(2) 조사의 두루 아는 지혜(審察邊知, tirana-pariñña):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3) 버림의 두루 아는 지혜(斷邊知, pahāna-pariñña):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서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빠사나의 두루 아는 지혜이다. 

◎ 두시(Dūsī) 
두시(Dūsī)는 까꾸산다(Kakusandha) 부처님 당시의 마라(Māra)였다. 두시는 처음에 바라문들로 하여금 까꾸산다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위두라(Vidhura) 존자와 산지와(Sañjīva) 존자를 헐뜯도록 했다. 하지만 비구들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brahma-vihāra)으로 그러한 시도가 실패하자, 다시 바라문들로 하여금 비구들을 높이 공경하도록 하여 그들을 유혹하려 했다. 하지만 까꾸산다 부처님의 방해로 두시의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마침내 두시는 한 소년의 몸에 깃들어서 부처님을 모시고 아침 탁발을 나서는 위두라(Vidura)존자에게 돌을 던져 그 머리를 깨뜨려 죽였다. 두시는 그 즉시 무간지옥에 떨어졌다. 맛지마 니까야,「마라문책경(Māratajjaniya-sutta)」(M.i.333) 및 「테라가따」(Thag.1187-91)와 그 주석서(ThagA.ii.183)에 나온다. 여기서 마하 목갈라나는 자신의 배에 깃든 마라에게 성자를 해코지하는 죄업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경고하면서 그 두시가 바로 전생의 자신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 두타(頭陀, dhuta)
두타(頭陀, dhuta)는 두수(??)·두수(?藪)·두책(??)·수치(修治)·기제(棄除)·사태(沙汰)·완세(浣洗)·분탄(紛彈)·요진(搖振)·제견(除見)·기(棄)·동(動) 등으로 의역한다.

또는 두타행(頭陀行)·두타사(頭陀事)·두타공덕(頭陀功德, dh?ta-guna)이라고도 한다. 범어의 원래 뜻은 흔들어 떨어 버린다는 뜻을 가진 동사 어근 √dh?에서 파생한 것으로 흔들리다. 동요되다는 뜻이며, 심신에 묻은 때를 떨어 없애 버린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곧 마음을 닦아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떨어버리는 수행을 가리킨다. 두타는 일반적으로 열두 가지의 수행법으로 이루어져 있어 십이두타라고 부르기도 한다.

십이두타에 ① 아란야에 머무는 것[在阿蘭若處] ② 늘 걸식을 행하는 것[常行乞食] ③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次第乞食] ④ 한끼만 먹은것[受一食法] ⑤ 과식하지 않는 것[節量食] ⑥ 점심을 먹고 나면 더 이상 먹지 않는 것[中後不得飮漿] ⑦ 누더기를 입는 것[著幣衲衣] ⑧ 삼의만을 입는 것[但三衣] ⑨ 무덤가에 머무는 것[塚間住] ⑩ 나무 밑에서 쉬는 것[樹下止] ⑪ 노지에 앉는 것[露地坐] ⑫ 눕지 앉는 것[但坐不臥]을 말한다.

 

 두타(頭陀, dhūta)

두타(頭陀, dhūta)는 두수(抖擻)·두수(抖藪)·두책(抖拺)·수치(修治)·기제(棄除)·사태(沙汰)·완세(浣洗)·분탄(紛彈)·요진(搖振)·제견(除見)·기(棄)·동(動) 등으로 의역한다. 또는 두타행(頭陀行)·두타사(頭陀事)·두타공덕(頭陀功德, dhūta-guna)이라고도 한다. 흔들어 떨어 버린다는 뜻을 가진 동사 어근 √dhū에서 파생한 것으로, 심신에 묻은 때를 떨어 없앤다는 뜻이다. 곧 마음을 닦아 의·식·주에 대한 탐욕을 떨쳐버리는 수행을 가리킨다.

 

◎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은 「청정도론」(Vis.Ⅱ)에 상세히 나오는데 다음과 같은 13가지가 있다. 부처님 당시 이 두타행에 으뜸인 분이 바로 제 1차 결집을 주도한 마하까사빠(Mahā-kassapa)였다. (1) 분소의(糞掃衣)를 입는 수행(2) 삼의(三衣)만 수용하는 수행(3) 탁발음식만 수용하는 수행(4) 차례대로 탁발하는 수행(5) 한 자리에서만 먹는 수행(6)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는 수행(7)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 수행(8) 숲에 머무르는 수행(9) 나무 아래 머무는 수행(10) 노천에 머무는 수행(11) 공동묘지에 머무는 수행(12) 배정된 대로 머무는 수행(13) 눕지 않는 수행 

 

◎ 도거(掉擧, auddhatya)
도거(掉擧, auddhatya)는 5위 75법 중 대번뇌지법(大煩惱地法)의 하나인 십전
(十纏)의 하나이다. 유식(唯識)의 5위 100법 중에는 수번뇌(隨煩惱)의 하나. 마음을 들뜨고 불안정하게 하여 사마타(奢摩他, 止 samatha)를 방해하는 심소를 말한다. 이에 비해 마음을 가라앉게 하여 비발사나(毘鉢舍那, 觀 vipasana)를 방해하는 심소를 혼침(惛沈, styāna)이라 한다. 『대승아비달마집론』 1권(大30 p.665a25-27)에 “도거란 무엇인가? 탐욕(貪欲)의 일부로서, 과거의 즐거웠던 일을 기억함으로써 마음을 적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본질로 하며 사마타를 방해하는 작용을 한다. 何等掉擧? 謂貪欲分, 隨念淨相, 心不寂靜爲體, 障奢摩他爲業.”라고 하였다.

 

◎ 드러남(upatthana)

'upavstha'를 원현으로 하는 말로 '가까이에 머물다'는 일차적인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래하여 '공고히 하다'. '확립하다'. '보살피다'. '다가서다'등의 의미와 함께 인식되는 대상의 측면에서 '나타나다'. '드러나다'등의 의미로 확대된다.

 

◎ 들뜸 

‘들뜸’으로 번역되는 웃닷짜(uddhacca)는 ‘위로 가버린 상태, 올려진 상태’를 뜻하며 들뜨고 흥분되고 불안한 마음상태를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도거(掉擧)로 한역되었고 영어권에서는 restlessness이라고 한다. 이 들뜸은 경에서 후회(kukkucca)와 합성되어 다섯 가지 장애(五蓋, nīvaraṇa) 가운데 네 번째 장애로 나타난다. 또한 이 들뜸은 10가지 족쇄(結, saṁyojana) 중의 아홉 번째 족쇄로 아라한이 되어야만 비로소 완전히 극복이 된다. 그래서 모든 불선에 항상 존재하는 원초적인 동요라고 할 수 있겠다.

 

◎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  

‘등록하는 마음(tadārammaṇa-citta)’에서 등록으로 옮긴 따다라마나(tadārammaṇa)는 tad(그)+ārammaṇa(대상)가 합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는 ‘그것을 대상으로 가진 마음’이란 뜻이다. 즉 이 등록에 바로 앞에 일어난 자와나가 가졌던 그 대상을 자기의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마음이란 뜻이다. 영어로는 registr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은 두 심찰나 동안 일어난다고 하는데 오문으로 큰 대상이 들어 왔을 때나 마음에 선명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만 일어나는 마음의 역할이고 그 이외의 인식과정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자와나가 일곱 번 일어난 뒤 바로 사라져 버리고 바왕가가 일어나기에는 대상이 너무 크거나 분명할 경우에 나타나는 마음의 역할이다. 즉 자와나가 너무 강해서 바로 바왕가의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고 두 번 단기 그 자와나의 대상을 대상으로 가져서 일어나는 일련의 마음이다. 이 등록이 끝나면 바왕가로 들어가고 그 바왕가는 다른 대상이 나타나기 전까지 계속된다.

 

◎ 디따담마(diṭṭha-dhamma) 
디따담마(diṭṭha-dhamma)는 빨리 삼장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1) diṭṭha-dhamma 혹은 diṭṭheva dhamme(이 표현을 많이 쓴다)는 ‘현재’나 ‘금생 ’ 등의 의미가 있다. 이 경우 중국에서 현법(現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보여진 법’이고 이것은 대부분 처소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보여진 법에서’가 된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현재’나 ‘지금 여기’나 ‘금생’으로 해석이 된다. 과거생과 미래 생에 대(對)가 될 때는 ‘금생’의 의미가 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가 되어서 나타날 때는 ‘현재’의 의미가 되고 바로 지금 여기(here and now)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자금 여기에서’ 등의 의미가 된다. 이런 예는 본서 제 2장에서 볼 수 있는데, 62가지 사견중의 하나로, 천상의 지복을 지금 이 생에서 누릴 수 있다고 보는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 diṭṭhidhammanibbāna-vada)이 그것이다. (2) diṭṭha-dhamma는 문자 그대로 ‘법을 보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빨리 삼장에서는 거의 대부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법을 이해해서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긴 경우를 뜻한다. 그래서 법의 눈이 생긴 위의 정형구 바로 다음에 ‘법을 보았고 법을 얻었고 법을 체득했고 법을 간파했고 의심을 건넜고 혼란을 제거했고 무외를 얻었고 스승의 교법에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었다.’라는 문맥에서 나타난다. 이 경우 중국에서 견법(見法)으로 옮겼는데 문자 그대로 ‘법의 무상·고·무아를 보았다’, ‘부처님 법의 의미를 보았다, 체득했다’는 뜻이 된다.

◎ 디빠왐사(島史, Dīpavaṃsa)   
[디빠왐사(島史, Dīpavaṃsa)] 등에 따르면 아소까왕이 불교교단을 풍족하게 지원해 줌으로써 교단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지만 안이한 생활을 바라고 출가하는 자가 많아지고 승가의 계율이나 수행이 문란해졌다. 그 때문에 승가에 싸움이 일어나 월례행사인 포살도 행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승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목갈리뿟따 띳사장로가 아소카왕의 지원을 받아 승가를 숙정했다. 즉 불교를 분별설(分別說, vibhajja-vāda)이라고 말한 사람은 불교도이며, 이에 반하는 비구는 불교도가 아니라고 하여 승가에서 추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vibhajja는 해체, 분석, 분별이라는 뜻으로 상좌부 불교는 부처님의 말씀을 분석적으로 이해하여 설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분별론자(vibhajja-vādin)라고 부르고 있다. 그래서 일부 서양이나 일본학자들도 남방상좌부를 분별상좌부라고 부른다. 아무튼 이 교설을 명확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비담마 칠론 중 하나인「까따왓투(論事, Kathāvatthu)」였고, 그 후 목갈리뿟따 띳사는 1,000여명의 아라한을 선발하여 9개월에 걸쳐 3차 결집을 완성하였다.

◎ 디빵까라(Dīpaṅkara) 
디빵까라(Dīpaṅkara) 부처님은 4아승지(asaṅkheyya) 10만겁(kappa)전에 나셨던 과거 부처님으로, 고따마 부처님이 아마라와띠(不死城, Amaravatī)에서 수메다(善慧, Sumedha)라는 수행자로 있을 때 처음으로 성불의 수기(授記)를 내려준 부처님이다. 이때 수메다는 일곱 송이의 연꽃을 이 부처님께 공양하고, 진흙탕에 자신의 몸을 엎드려 부처님으로 하여금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한역으로는 연등불(燃燈佛), 정광불(錠光佛)이라고 한다. 

◎ 땅의 신(地神, bhumma-deva) 
땅의 신(地神, bhumma-deva)은 천상에 거주하지 않고 외딴 곳에 있는 숲이나 산이나 사당 등을 의지해서 사는 신을 가리킨다. 이들 가운데서 힘이 강한 신들은 두 가지 원인이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재생연결식을 가진다. 그들은 대개 공덕이 모자라서 어렵사리 살아가는 저열한 신들을 포함한 회중들을 거느리기도 한다. 레디 사야도(Ledi Sayādaw)에 따르면 이런 공덕이 모자라는 저열한 신들이 바로 원인 없는 재생연결식을 가지고 태어난 신들이라고 한다.

 

◎ 때 아닌 때 먹는 것 
‘때 아닌 때 먹는 것’이라 번역한 위깔라보자나(vikāla-bhojana)는 vi(非, 아닌)+kāla(시간)+bhojana(음식)로 
분해된다. 즉 12시(정오)가 넘어서 음식을 먹는 것을 말한다. 시계가 없던 옛날에는 태양이 하늘의 중간에 왔을 때를 의미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비시식(非時食)이라 번역했다.

 

◎ 띠싸 대사원(Tissa-Mahāvihāra) 
띠싸 대사원(Tissa-Mahāvihāra)은 상좌부 불교의 근본도량이었으며 수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한 상좌부 불교역사의 산실이었다. 지금도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 그 유적지가 남아있다. 

◎ 띨라신(Thilashin)   
현재 미얀마를 비롯한 상좌부 불교국가에는 정식 비구니는 존재하지 않고 삭발·염의하고 8계만을 평생 지키는 일종의 정학녀(正學女)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들을 미얀마에선 띨라신(Thilashin)이라고 한다. 원래 부처님 당시에는 비구니 승가가 있었지만, 오래 전에 전란과 기근 등으로 스리랑카에서 비구니 계맥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상좌부 불교국에는 비구니 승가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다만 최근 태국이나 스리랑카에서 대만과 같은 대승불교국에서 비구니계를 수계하고 돌아와 단절된 상좌부의 비구니 법맥을 이으려는 이들이 있지만 정통 상좌부교단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 띳티라 자따까(Tittira Jākata)

[띳티라 자따까(Tittira Jākata)](J.No.319)는 부처님께서 라훌라(Rāhula)가 공부 짓기를 좋아하는 것을 언급하여 설하신 전생 이야기이다. 과거 어느 때 보살은 바라문 수행자였고 라훌라는 새잡이가 길들여 미끼로 부리는 자고새였다. 자고새가 한번 울면 다른 자고새들이 그 주변에 모여 들었는데 그때 새잡이가 와서 다 잡았다. 그것을 본 자고새는 자신이 악업을 짓고 있다고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보살은 자고새에게 악한 의도가 없다면 그 행위는 악업이 되지 않는다는 말로써 자고새가 그러한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해 주었다. 

 ◎ 탁실라(Taxila) 

탁실라(Taxila)는 현재 파카스탄 라왈핀디 부근의 지명으로 빨리 경에는 딱까실라(Takkasilā)로 나온다.「자따까」는 이곳을 간다라 왕국의 수도이자 학문의 큰 중심지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지만 비하르의 날란다(Nalanda)에 있는 것과 같은 강연장과 거주지역을 갖춘 대학 도시는 아니었다. 탁실라에서 교사는 제자들을 유숙시켰고 그들은 하숙비를 스승과 가족에게 현금이나 용역의 형태로 지불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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