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해 모음

주해 모음 - ㅁ

실론섬 2014. 7. 23. 13:49

◎ 마노   
감각대상은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의 오처(五處)이고 그것을 아는 마음인, 식(識, viññāṇa)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의 전오식(前五識)이다. 그리고 마음(意, mano)은 정신적 대상을 아는 감각기능(根, indriya) 혹은 감각장소(處, āyatana)이다. 즉 눈(眼, cakkhu)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형상(色, rūpa)이라는 대상에 대한 안식(眼識, cakkhu-viññāṇa)이 일어나고 귀(耳, sota)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소리(聲, sadda)라는 대상에 대한 이식(耳識, sota-viññāṇa)이 일어나듯이 마음(心, citta)이라는 감각장소를 통해서 정신적인 대상(法, dhamma)에 대한 의식(意識, mano-viññāṇa)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은 물질적인 감각장소이지만 마음은 정신적인 감각장소 혹은 기능인 것이다. 그래서 마노(意, mano)는 찟따(心, citta)의 영역에 포함시키고 있고 인식과정에서 대상과 전오식(前五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오문전향의 마음)을 하고 다시 전오식과 의식(意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받아들이는 마음)을 한다.

 

◎ 마띠까(matikā)  
마띠까(matikā)는 어머니를 뜻하는 ‘마따(mātā)’에 형용사를 만드는 어미인 ‘ikā’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이다. 그래서 문자적인 뜻 그대로 ‘어머니에 속하는’의 의미이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나 계율의 조목을 요약한 것이다. 이 마띠까는 이렇게 율장에서 제일 먼저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초기에 율장에서는 빠띠목카를 마띠까로 불렀던 것이다. 뒤에는 부처님 말씀도 법수(法數)나 주제별로 분류해서 마띠까로 전승되어 오다가 여기에 설명을 붙이면서 아비담마 체계로 발전되어 온 것 이다.

 

◎ 마라  
‘마라(Māra)’는 √mṛ(죽이다, 죽다)에서 파생된 명사형으로 문자적으로는 ‘죽이는 자’란 뜻이다. PED에서 ‘death; usually personified as Name of person, Death, the Evil one, the Tempter (the Buddhist Devil or Principle of Destruction). Sometimes the term māra is applied to the whole of the worldly existence, or the realm of rebirth, as opposed to Nibbāna.’라고 설명되듯이, 죽음을 의인화한 명칭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악마(惡魔)나 파괴의 화신이다. 경에 나오는 마라는 대체적으로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사악함의 화신으로서의 마라: 사악한 자, 악마라는 뜻의 빠삐만(波旬, Pāpiman), 해탈을 방해하는 자라는 뜻의 나무찌(Namuci), 검은 자라는 뜻의 깐하(Kaṇha), 끝을 내는 자라는 뜻의 안따까(Antaka), 방일함의 친척이란 뜻의 파라마타반두(pamatta-bhandu) 등으로 불린다. (2) 천인으로서의 마라: 욕계의 최고 높은 천상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Paranimmitavasavatti)에 주재하는 천인이다. 그래서 마라는 중생들이 욕계를 못 벗어나도록 방해한다고 한다.(SnA.i.44; MA.i.28) 이런 마라는 범천(梵天, Brahmā)이나 제석(帝釋, Sakka)처럼 대단한 위력을 가졌고 마군(魔軍, Marāsena)이라는 군대도 가지고 있다. (3) 세간적인 모든 존재로서의 마라: 이 마라는 열반(nibbāna)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윤회계, 즉 오온(五蘊)을 상징한다. 그래서 후대 주석서는 다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마라(pañca-māra)를 들고 있다.
(1) 신으로서의 마라(devaputta-māra) (2) 번뇌로서의 마라(kilesa-māra) (3) 오온으로서의 마라(khandha-māra) (4) 업으로서의 마라(kamma-māra) (5) 죽음으로서의 마라(maccu-māra)이다. 

 

◎ 마음 
상좌부 불교에서는 ‘마음’이라 번역되는 찌따(citta)와 ‘식(識)’이라 번역되는 윈냐나(vinñāṇa)를 동의어로 간주하며 사실상 아무런 구분 없이 쓰고 있다. 굳이 구분한다면 찌따(citta)는 마음이나 식 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쓰고, 윈냐나는 6개 감각기관(六根, indriya)과 6개의 감각 대상(六境, visaya)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아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 아비담마에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과 마음의 작용에 관련된 용어를 간단히 정리해본다. (1) 찌따(citta)는 √cit(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경에서는 주로 우리의 생각이나 사고 일반을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난다. 그리고 아비담마에 의하면 이 찌따는 마노(mano)와 윈냐나(vinñāṇa)를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쓰인다. 한역은 심(心)이라 하고, 영역은 mind, consciousness, state of consciousness 등이라 한다. (2) 마노(mano)는 √man(생각하다)에서 온 술어로 오직 우리의 생각을 관장하는 감각기능(根, indriya)이거나 감각장소(處, āyatana)의 개념으로서만 등장한다. 한역은 의(意)라하고, 영역은 보통 mind라 한다. (3) 윈냐나(vinñāṇa)는 vi(분리하여)+√jñāṇa(알다)로 분해되는 술어로 여섯 감각기능(六根) 혹은 여섯 감각장소(六處)가 그 각각의 감각대상(六境)과 부딪칠 때 일어난, 아는 마음이다. 그래서 윈냐나는 모두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6가지가 있다. 한역은 식(識)이라 하고, 영역은 보통 consciousness이라 한다. (4) 쩨따시카(cetasika)는 마음(citta)과 함께 결합되어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며 전체 인식 행위에 있어서 마음이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도록 돕는 것이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이 없으면 일어나지 못하며 마음도 마음의 작용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단독으로 일어날 수 없다. 역할로 보면 이 둘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마음을 근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에 의지하여 대상을 인식하도록 돕기 때문이다. 한역은 심소(心所)라 하고, 영역은 mental concomitant, mental factor라고 한다. (5) 나마(nāma)는 문자적으로 ‘이름’을 뜻하는 말이지만 오온에서 물질(色)을 제외한 느낌(受), 표상(想), 행(行), 식(識)의 4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즉 정신을 지칭한다. 한역은 명(名)이라 하고, 영역은 mind, mentality라고 한다. 이렇게 찌따와 마노는 엄밀히 따지면 그 사용처가 분명 다르긴 하지만, 후대 주석서들과 아비담마에서는 찌따, 마노, 윈냐나를 같은 것이라 정의하고 있다.(Dhs.10; Vbh.87 등) 그래서 전체적으로 볼 때 찌따는 마노와 윈냐나를 포함한, 마음 일반을 나타내는 용어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 마음 
‘마음’이라 번역한 마노(mano)는 과거 중국에서는 의(意)로 번역하였지만 현재 우리가 이해하는 의(意)와 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쓰는 의(意)는 마음이라는 뜻보다는 의지나 의도라는 뜻을 더 강하게 내포하고 있지만 빨리어의 mano는 감각기관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우선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감각장소(處, āyatana)와 감각기능(根, indriya)과 문(門, dvāra)이다. 중생은 매 찰나 대상과의 연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데, 이 가운데 물질적인 대상과의 관계는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을 통해서 하게 된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은 각각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라는 대상을 만나는 문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서로 대(對)가 되어 만남이 일어나는 곳을 감각장소(處, āyatana)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장소는 눈에 보이는 기능이 있고 귀에 듣는 기능이 있듯이 각각에 고유한 기능 혹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감각기능(根, indriya)이라고 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상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눈의 문(眼門, cakkhu-dvāra)이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장소(眼處, cakkhu-āyatana)라고도 하고, 눈의 감각기능(眼根, cakkhu-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문/감각장소/감각기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마음(意, mano)이라고 명명한다. 그래서 설법하는 문맥에 따라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이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장소(意處, mano-āyatana)라고도 하고, 마음의 감각기능(意根, mano-indriya)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대상이 되는 정신적인 영역을 법(法, dhamma)이라고 부른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의 대상인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미세한 물질, 마음의 작용, 열반을 들고 있다.

 

◎ 마음(心, citta) 
빠알리어 citta는 √ cit/cint(to think, to cognize, to know)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빠알리 주석서들은 전통적으로 찟따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정의 한다. 그것은 행위자(katta, agent)와 도구(karana, instrument)와 행위 그 자체(kamma, activity)이다. 먼저 행위자의 측면에서는 "대상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고 정의하고, 도구의 측면에서는 "이것으로 인해 안다고 해서 마음이라 한다"라고 정의한다. 행위의 측면에서는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라고 정의한다.
주석서들은 정신(nama, 名)에 관계된 대부분의 빠알리어 술어들을 이렇게 판에 박힌 듯한 세 가지로 정의하고 있다. 이 세 가지 정의 중에서 세 번째인 "단지 알고 있는 그 자체가 마음이다(cintanamattam cittam)"라는 것이 가장 찟따를 실감나게 정의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여기서 cintana란 √ cit(to think)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인데 범어 일반에서 '-na'는 현재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어미이다. 그래서 cintana는 '알고 있음'을 의미하며, matta는 '단지, 다만'의 뜻으로 다른 의미를 배제할 때 원단어 뒤에 붙여 사용한다. 그래서 citanamatta는 '단지 알고 있음', '단지 알아차리고 있음' 그 자체만을 나타내고 다른 의미는 모두 배제한다는 뜻이다.마음은 알아차리는 행위를 떠나서는 그 자신 안에 실재적인 존재를 가지고 있는 행위자도 아니요 도구도 아니다. 행위자나 도구라는 표현으로 마음을 정의하는 것은 영원한 자아(atta, Sk. atman)가 바로 '알아차리는 행위자나 도구'라는 힌두적 견해를 논박하기 위해서이다. 불교 논사들은 이런 정의로써 자아가 알아차리는 행위를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단지 마음 혹은 알음알이가 그렇게 할 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알음알이란 단지 아는 행위일 뿐이고 그 행위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므로 필히 무상한 것이다.

빠알리 주석가들은 구경법들의 성질을 명료하게 밝히기 위해 정의하는 방법을 네 가지로 제시하고, 이 네 가지를 통해 어떤 법이든 그 한계를 분명하게 구분짓고 있다. <청정도론>을 위시한 모든 주석서들이 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 네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특징(락카나, lakkhana) ㅡ 즉 그 법의 현저한 특질  

(2) 역할(라사, rasa) ㅡ 그 법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역할(kicca)이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sampatti)  

(3) 나타남(빳쭈빳타나, paccupatthana) ㅡ 결과로서 경험 속에서 그것이 나타나는 것  

(4) 가까운 원인(빠닷타나, padatthana) ㅡ 그것이 의지해 있는 가장 주요한 조건 

여러 논사와 주석서에서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행위(vijanana, 혹은 cintana)'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위바위니 띠까>는 <담마상가니>를 인용하여 마음을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정의하면서 대상이 없이는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빠라맛타디빠니 띠까>에서도 "아는 작용은 항상 대상을 기대한다. 그것은 대상이 없이는 얻어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찟따란 '대상을 앎'이다. 단지 대상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것을 찟따라 한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이 찟따와 윈냐나(vinnana, 의식)는 동의어로 간주되며 사실 아비담마에서는 아무런 구분없이 쓰이고 있다. 마노(mano, 意)와 하다야(hadaya, 심장, 가슴)도 이들의 동의어로 쓰이기는 하나, 마노는 법을 아는 감각기관이나 기능의 의미로, 하다야는 하다야 왔투(hadaya-vatthu)라 하여 마노가 머무는 물질적인 토대를 나타내는 제한된 의미로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찟따와 윈냐나는 아무런 구분없이 완전한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굳이 구분해 본다면 찟따는 마음이나 알음알이 등을 뜻하는 가장 보편적인 의미로, 윈냐나는 여섯 감각기관과 여섯 대상이 있는 곳에서 따라 일어나는 알음알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다.80) 지금 다투는 89가지 마음의 분류에서도 마노와 알음알이는 89가지 마음 가운데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마음은 대상을 알아차린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이 아무리 다양하게 일어나더라도 안다는 특징으로만 본다면 하나이지만 그 하나인 마음을 아비담마에서는 여러 유형으로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구분짓고 있다. 이런 유형들은 복수로 '마음들'이라고 표현하는데 89가지로, 더 자세하게는 121가지로 구별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제적으로는 마음들의 흐름(心相續, citta-santati), 즉 마음들이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것이다. 이들이 너무나 빠르게 상속하기 때문에 따로따로 분리된 여러 유형으로 우리가 간과하지 못할 뿐이다. 아비담마는 이런 유형의 마음들을 상세하게 구분해 낸다. 그뿐만 아니라 아비담마는 이런 여러 유형들의 마음들을 전체적으로 통일되고 서로 밀접하게 짜 넣어진 우주적인 질서로써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위해서는 아비담마는 몇 가지 분류의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여기서 설명하고 잇는 마음이 일어나는 곳(地, bhumi)에 따른 분류이다.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크게 넷으로 분류된다. 욕계, 색계, 무색계의 세간적인 것과 네 번째의 출세간적인 것이다. 세간에 속하는 세 가지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각각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 가지 세상(loka) 즉 삼계라 불리는 욕계, 색계, 무색계 세상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그러나 마음이 일어나는 곳과 세상이 서로 같은 것은 아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마음들을 유형에 따라 분류한 것이고 세상으로서의 삼계는 중생들이 태어나서 그 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그런 영역이나 세상을 말한다. 그렇지만 마음이 일어나는 곳과 생명체들이 사는 세상은 분명한 관계가 있다. 첫째, 각각의 일어나는 곳에 특유한 마음은 그에 상응하는 세상과 관련된 특유한 유형의 마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은 대부분 그에 상응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경향을 가지고 그런 세상에서 대부분 일어난다. 즉 색계의 마음은 대부분 색계세상에 태어난 유정들에 속하는 마음이라서 거의 대부분 색계 유정들이 일으키는 마음이다. 둘째, 그러나 어떤 장소에 속하는 마음은 그에 상응하는 세상에 묶인 것은 아니고 다른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들은 욕계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욕계의 마음들은 색계세상과 무색계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해도 이들의 관계는 분명히 있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나는 곳은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세째, 더욱이 어떤 특정한 곳에서 업을 일으키는 마음들은 그에 상응하는 세상으로 재생을 일어나게 만드는 경향이 강하다. 그리고 만일 그런 마음들이 재생연결을 일으킬 기회를 가지게 되면 그들은 오직 그 세상에서 재생연결을 일으키고 다른 세상에서는 일으키지 않는다. 예를 들면 욕계세상에 사는 유정들이 색계에 속하는 마음을 자주 일으키는데 특히 임종시에 이런 마음으로 죽으면 다음 생은 색계세상에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일어나는 곳과 그에 상응하는 세상과의 관계는 극히 가까운 것이다.


1. 욕계 마음(kamavacara-citta)

욕계로 번역되는 kamavacara는 kama와 avacara의 합성어이다.

kama는 √ kam(to desire)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초기경에서는 주로 다섯 감각기관(눈.귀.코.혀.몸)을 통해서 추구되는 것을 의미하는 문맥에서 panca-kamaguna(다섯 가닥의 욕망)라는 합성어로 많이 나타난다. 즉 감각기능(根)을 통해서 생기는 욕망이란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감각적 욕망'이라 옮긴다. avacara는 ava+√ car(to move)에서 파생된 단어로 형용사로는 '다니는, 나타나는, 살고 있는, 익숙한, 편한' 등의 의미로 쓰이고 중성명사로 쓰이면 '다니는 곳, 사는 곳'이란 의미에서 '영역, 범주'를 뜻한다. 거의 대부분 kamavacara 등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합성어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kamavacara는 '감각적 욕망의 영역'이란 의미이며 欲界라고 한역되었다.

여기에 상응하는 세상은 욕계세상(kama-bhumi/kama-loka)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네 가지 악도, 인간, 여섯 가지 욕계 천상(六欲天)의 11가지 욕계세상을 들고 있다. 욕계이 마음은 이런 11가지 욕계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마음들을 포함한다. 물론 이런 마음은 다른 세상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2. 색계 마음(rupavacara-citta) :

색계 마음은 색계세상(rupa-bhumi/rupa-loka)과 상응하는 마음의 경지, 다시 말하면 색계선(色界禪, rupajjhana)이라고 불리는 선정의 상태에 속하는 마음의 경지이다. 대부분 이런 영역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무엇이든지 색계 마음에 속한다. 여기서 이것을 색계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일반적으로 이것이 땅의 까시나(9장 §6참조)와 같은 도구 혹은 자기 몸의 일부분 등의 물질(rupa)을 대상으로 삼아 선정을 닦는 수행을 통해 얻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대상이 禪을 닦는 토대가 되고 이런 대상들을 토대로 해서 얻어진고귀한(mahaggata) 마음을 색계 마음(rupavacara-citta)이라 부른다.

3. 무색계 마음(arupavacara-citta)

무색계 마음은 무색계세상(arupa-bhumi/arupa-loka)과 상응하는 마음의 경지, 다시 말하면 無色界(arupa-jjhana)이라 불리는 선정의 상태에 속하는 마음의경지이다. 대부분 이런 영역에서 일어나는 마음은 무색계 마음에 속한다고 말한다. 수행자가 색계선을 넘어서서 형상이 없는 선정의 상태를 증득하기 위해 참선을 할 때는 물질의 형상과 연결된 모든 대상들을 버리고 '무한한 허공(akasa)' 따위의 물질이 아닌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이런 대상을 토대로 해서 얻어진 고귀한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이런 대상을 토대로 해서 얻어진 고귀한 마음을 무색계 마음이라 부른다.

4. 출세간 마음(lokuttara-citta) 

출세간으로 옮긴 lokuttara는 loka와 uttara가 합성된 술어이다. 
loka는 √ lok(to see)에서 파생된 명사로 '볼 수 있는 것'에서 세상(would)을 나타내는 단어로 정착이 되었다. uttara는 다시 ud(위로)+tara(더)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tard'는 비교급을 나타내는 어미로 '더(more)'를 뜻하며 '-tamd'는 최상급을 뜻한다. 그래서 uttara는 '더 높은, 더 위의'를 뜻하며 북쪽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lokuttara는 '더 높은 세상'을 뜻하며 세상을 벗어난 경지라는 의미에서 '출세간'으로 옮긴다.

 

<청정도론>의 주석서는 '부숨, 파멸(lujjana-palujjana)'이라는 뜻에서 loka(세상)이라 하고 그것에 포함되지 않고 그것을 건넜다(uttinna)라고 해서 출세간(lokuttara)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81) 한편 주석서에서는 세상(loka)이라는 개념을 (1) 유정이 사는 세상(satta-loka) (2) 물질적인 세상(okasa-loka) (3) 형성된 것들의 세상(sankhara-loka), 즉 정신과 물질의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有爲法)의 세 가지로 설명한다.82)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형성된 세상, 즉 ['나' 등으로]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들 안에 포함되는 모든 세간적인 현상(有爲法)들을 뜻한다. 

이런 유위법의 세상을 넘어선 것이 형성되지 않은 것, 무위법인 열반이며 이런 열반의 실현을 직접 성취하는 유형의 마음을 출세간 마음(lokuttara-citta)이라 하는데 앞의 세 가지 마음을 이것과 구분 하기 위해서 세간적인 마음(lokiya-citta)이라 부른다.

그리고 여기서 숙지하고 있어야 할 두 개의 술어가 있는데 '제한된'으로 옮긴 빠릿따(paritta)와 '고귀한'으로 옮긴 마학가따(mahaggata)이다. 여기서 paritta는 욕계의 마음을 나타내는 형용사이고 mahaggata는 색계와 무색계의 마음을 뜻하는 형용사이다. 욕계의 마음은 그 힘이나 영향력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84) 한편 색계.무색계의 마음은 장애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고귀하고 고귀한 禪에 의해서 얻어졌기 때문에 고귀하다고 설명한다. paritta는 인식과정(4장)에서 큰 대상을 나타내는 mahanta와 대가 되어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 paritta는 작은 대상을 나타낸다.(4장 §5 참조)

 

◎ 마음 순간
‘마음 순간’이라고 번역한 찟따 까나(citta-kkhaṇa)는 citta(마음)+khaṇa(순간, 찰나)의 합성어이다. 영어권에서는 보통 consciousness-moment, thought-moment라 한다. 계속 반복되는 마음의 인식과정(citta-vīthi)의 어느 한 단계를 점하는 시간을 가리킨다. 이 마음 순간은 일어남(生, uppāda)과 머묾(住, ṭhiti)과 무너짐(壞, bhaṅaga)의 세 순간으로 세분된다. 그리고 주석서에 따르면 이러한 마음 순간은 번개가 번쩍이고 눈 한번 깜빡이는 순간에도 수많은 마음 순간들이 흘러갈 수 있다고 한다.

 

◎ 마하까사빠(Mahā-kassapa) 장로 
마하까사빠(Mahā-kassapa) 장로는 부처님의 주요 제자들 가운데 한분으로,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에서 으뜸이었다.(A.i.23) 마가다(Magadha)의 마하띠타(Mahātittha)에서 바라문으로 태어났으며 원래 이름은 삐빨리(Pippali)였다. 그는 결혼을 원치 않았으나 부모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이 만든 조각과 똑 같은 여자가 있다면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 요건을 만족시키는 바따 카삘라니(Bhaddā Kāpilānī)라는 처녀를 싸갈라(Sāgala)에서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혼 상대자라고 만인이 인정해야 한다.’는 편지를 주고받다가 들켜서 빼앗겼다. 양가의 부모는 마침내 그들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그러나 서로의 합의로 첫날밤에 잠자리를 꽃줄로 갈라놓고 각기 따로 잠을 잤다. 삐빨리는 엄청난 부자였다. 그는 60여개의 호수를 소유하고 정원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인근 40여개 마을에 흩어져 살았다. 어느 날 그는 쟁기질하는 논에 갔다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죄임을 직감하고 출가를 결심하였다. 동시에 아내 바따도 까마귀들이 곤충을 잡아먹는 것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 그들은 함께 머리를 자른 뒤 발우를 손에 들고 우는 하인들을 뒤로 한 채 집을 떠났고 갈림길에서 헤어졌다. 그 후 까사빠는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의 향실(香室, Gandha-kuṭi)에서 부처님을 뵙고 먼저 제자가 되었고 바따는 나중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i Gotamī)의 비구니 교단에 출가했다. 마하까사빠는 부처님의 입멸 후 교단을 이끌고 1차 결집을 주도한 분이다.

 

◎ 마하 깟쨔야나(Mahā-kaccāyana) 존자  
마하깟쨔야나(Mahā-kaccāyana) 존자는 웃제니(Ujjeni)의 짠다빳조따(Caṇḍappajjota) 왕의 궁중제관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바라문 가문 출신이다. 깟짜나는 그의 족성이다. 그는 베다에 능통했으며 부친이 죽은 뒤 대를 이어 궁중제관이 되었다. 그후 짠다빳조따 왕의 명으로 일곱 명의 친구들과 함께 부처님을 웃제니로 초대하기 위해서 부처님께 갔다가 설법을 듣고 무애해(無碍解)를 갖춘 아라한이 되어 출가하였다. ◎ 마하나마(Mahā-nāma)마하나마(Mahā-nāma)는 석가족 왕의 한 사람이었으며 아누룻다(Anuruddha) 존자의 형이고 세존의 사촌이 된다. 세존께서는 앙굿따라 니까야(A1:14)에서 뛰어난 보시를 하는 자 가운데 으뜸이라고 그를 칭찬하실 정도로 정성을 다하여 세존을 모시고 승가를 후원하였다.

 

◎ 마하 마야(Mahāmāyā)
마하마야(Mahāmāyā)는 마야(māyā)라고도 하며 한역경전에서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알려져 있다. 「자따까」에 따르면 마야 왕비는 십만겁 동안 바라밀을 닦아왔으며, 보살을 잉태했을 때부터 남자에 대한 애욕을 일으키지도 않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오계(五戒)를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친정인 데와다하(天臂城, Devadaha)로 가는 도중에 룸비니(Lumbinī)에서 살라(Sāla)나무 가지를 잡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보살을 낳았다. 그리고 보살이 태어난 지 이레가 되던 날 죽어서 도솔천에서 마야데와뿟따(Māyādevaputta)라는 이름의 남자천인으로 재생했다. 부처님께서는 아살하(Āsāḷha) 보름날 간담바(Gaṇḍamba)나무 밑에서 쌍신변(雙身變, yamaka-pāṭihāriya)을 나투시고 나서 삼십삼천에 올라 3개월의 안거를 보내시며, 법문을 들으러 삼십삼천으로 내려온 어머니를 위시한 천인들에게 아비담마를 설하셨다.

 

◎ 망념(妄念)
망념(妄念)은 허망한 상념이나 무명이나 미망에 의한 집착된 생각이다. 어리석
은 사람이 미혹된 마음으로 인하여 모든 법의 진실한 의미를 모르고 전도된 경계를 두루 마음대로 구획지어 만들어내는 잘못된 사고를 말한다.

 

◎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rta-avyākrta)

무부무기(無覆無記, anivrta-avyākrta)는 정무기(淨無記), 즉 마음을 덮어 성도를
 장애하지 않는 무기. 유부무기(有覆無記)와 대칭된다. 무기(無記)는 선(善)도 아니고 불선(不善)도 아닌 것. 성도(聖道)를 덮어 가리거나 방해하거나 마음을 부정(不淨)하게 하거나 하지 않는 순수한 무기(無記)로 유위·무위의 두 가지 무기로 나누어진다. 유위무기(有爲無記)란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이숙·위의·공교·통과·자성 등의 다섯 가지가 있다. 

① 이숙무기(異熟無記)는 과거 선·불선의 인에 의해서 생한 이숙과의 체로서 이숙생(異熟生)이라고도 한다.

② 위의무기(威儀無記)는 사위의(四威儀)로서 위의로심(威儀路心)이라고도 한다. 

③ 공교무기(工巧無記)는 몸으로 짓는 것[身工巧]과 말로 짓는 것[語工巧]으로서 공교처심(工巧處心)이라고도 한다. 

④ 통과무기(通果無記)는 천안통(天眼通)과 천이통(天耳通)으로서 변화무기(變化無記)라고도 한다. ⑤ 자성무기(自性無記)는 이상 네 가지 무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무기를 말한다. 

무위무기(無爲無記)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승의무기(勝義無記)가 이에 해당되는데 승의무기는 삼무위 중 비택멸(非擇滅)에 속하는 무위(無爲)·허공(虛空) 등과 같다.

 

◎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 avikalpa-jñāna)
무분별지(無分別智, nirvikalpa-jñāna, avikalpa-jñāna)는 분별을 여읜 지혜로 보살
이 초지(初地)인 환희지(歡喜地)에서 견도(見道)에 들어갈 때 일체법의 진여를 반연하고 능취(能取)·소취(所取) 등의 차별을 끊으며 대상과 지혜가 하나되어 분별이 없는 것을 말한다. 또 진여를 인식대상으로 하는 순수(純粹)한 직관지(直觀智)로서 제일의지(第一義智)라고 한다. 『섭대승론석』 권7(大31 p.205b2-25)

에 “무분별지를 명(名)이라 하니, 이 명(名)의 행상은 어떠한가? 일체의(一切義)를 분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의(義)’란 경계이니, 이 지혜에는 모든 경계에 대한 능취·소취 등 두 가지 분별이 없다. 무분별지의 생(生)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열 가지 평등에 의해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생긴다. 또한 무분별지는 두 가지 평등에 의해서 생기니, 지(智)는 인식의 주체·경(境)은 인식의 대상이며 능연·소연이 모두 평등하기 때문에 무분별지가 생긴다고 한다. 無分別智是名, 此名其相云何. 謂不分別一切義. 義卽是境, 此智於一切境, 無復能取所取二種分別, 無分別智生. 有何相貌, 依十種平等. 能緣所緣悉平等故, 無分別智生. 又無分別智依二種平等, 謂智及境. 能緣所緣悉平等故, 無分別智生.”고 하였다. 『섭대승론(攝大乘論)』 권7下(大31 pp.23-27)에는 가행무분별지(加行無分別智), 근본무분별지(根本無分別智), 후득무분별지(後得無分別智)의 세 가지 무분별지를 기술하고 있다.

 

◎ 말리까(Mallikā) 
말리까(Mallikā)는 꼬살라(Kosala)국의 빠세나디(Pasenadi)왕의 정비였다. 말리까(Mallikā)는 재스민 꽃을 뜻하는데, 원래는 꼬살라의 화환 만드는 사람의 딸이었다. 16살 때 하루는 바구니에게 세 그릇의 유미죽(乳糜粥)을 가지고 친구들과 정원으로 가던 길에 부처님을 뵙자 그 죽을 드리고 예배를 올렸다. 부처님께서는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아난다(Ānanda) 존자가 부처님께 미소 지으신 이유를 여쭙자, 바로 그날 꼬살라의 정비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J.iii.405; SA.i.110ff). 부처님은 말리까의 행운을 설명하기 위해서 「꿈마사핀다 자따까(Kummāsapinda Jātaka)」(J.No.416)을 설하셨다. 그 날 빠세나디왕은 아자따삿투왕과 싸우다가 크게 패하고 실의에 빠져 돌아오는 길에 말리까의 목소리에 끌려 화원으로 들어왔다. 말리까는 왕이 오는 것을 보고는 앞으로 나가 말의 고삐를 잡았다. 왕은 지쳤기 때문에 이내 그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잠에 들었고 말리까는 왕을 정성으로 모셨다. 말리까의 상냥함에 만족한 왕은 바로 그날 그녀에게 수많은 보석을 하사하고 왕궁으로 데려가 정비로 삼았다. 그 날부터 말리까는 왕의 총애를 받는 아내가 되었고 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가 되었다. 말라까는 빠세나디왕과의 사이에 딸을 하나 두었지만 경에는 아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 딸은 「밀린다빤하」(M.ii.110)에서 왕의 유일한 딸이라고 하는 와지리(Vajīrī)인것 같다. 빠세나디왕은 태어난 아기가 딸인 것을 알고 크게 실망했지만 부처님께서 여자도 때로는 남자보다 지혜롭다고 왕에게 용기를 주셨다.(S.i.86f).
「밀린다빤하」(Mil. 115, 291)에서는 그녀를 선업의 과보가 현생에서 바로 결실을 맺고 그 명성이 천인들에게까지 미친 일곱 사람들 중의 한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말리까는 뛰어난 여신도(upāsika)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A.iv.348). 말리까는 어느 때 부처님께 왜 어떤 여자들은 평범한 용모에 가난한데 반해, 어떤 여자들은 아름답고 부유한지를 여쭈었고 부처님은 아름답고 부유한 여자들은 전생에 화내지 않고 보시에 힘썼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S.i.75) 말리까는 왕의 모범적인 아내이자, 부처님의 헌신적인 신자였지만 생전에 어떠한 도과도 얻지 못했다.「법구경」주석서(DhA.iii.119ff)에서는 말리까가 욕실에서 애완견과 삿된 성행위를 한 황당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빠세나디왕이 그 광경을 우연히 보고 말리까에게 따졌지만 말리까는 욕실의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하지만 임종의 순간 말리까는 자신의 그릇된 행위를 떠올렸고 그 때문에 무간지옥에 태어나 7일 동안 고통을 받다가 도솔천으로 올라갔다.

 

◎ 맛따꾼달리(Maṭṭhakuṇḍali)
맛따꾼달리(Maṭṭhakuṇḍali)는 바라문 아딘나푸바까(Adinnapubbaka)의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맛타꾼달리를 극진히 사랑했지만 지독한 구두쇠여서 대장장이에게 들어가는 돈을 아끼려고 자신이 손수 아들의 귀거리를 광택해 주었다. 그래서 광택 낸(maṭṭha) 귀거리(kuṇḍala)란 뜻의 맛타꾼달리로 불리게 되었다. 16살 때 맛따꾼달리는 황달에 걸렸지만 아버지는 돈을 아끼려고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이 직접 약을 처방해주었다. 그러나 차도가 없자 장례식에 오는 사람들이 자기 재산을 볼까봐 아들을 바깥의 마당에 옮겨 놓았다. 부처님께서는 천안으로 맛따꾼달리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큰 연민을 일으켜 바라문의 집 앞에 오셨다. 너무 병약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소년은 부처님에 대한 깊은 신심을 불러일으키고는 죽었다. 그리고는 넓이가 30평방이나 되는 황금궁전의 천인들 가운데 태어났다. 맛따꾼달리가 자기 전생을 조사해보자, 전생의 아버지가 묘지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시체를 화장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맛따꾼달리의 모습으로 변해 묘지에 가서 아버지 옆에 서서 울기 시작했다. 바라문이 왜 우냐고 묻자 천인은 달을 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천인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아버지의 어리석음을 꾸짖었다. 다음날 바라문은 부처님을 식사공양에 초대하였고 공양을 다 마치자 부처님께 단지 믿음만으로 천상계에 이를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 바라문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부처님께서는 맛따꾼달리가 바라문에게 나타나도록 해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부처님의 법문이 끝나자 맛따꾼달리와 바라문은 모두 수다원과를 얻었다.(DhA.i.20ff.; Vv.vii.9; VvA.322ff.; Pv.ii.5; PvA.92) 또한 8만 중생들도 진리를 깨달았다.(Mil.350). 

◎ 맛지마데사(Majjhima-desa) 

‘중국(中國)’이라 번역한 맛지마데사(Majjhima-desa), 또는 맛지마자나빠다(Majjima-janapada)는 당시 부처님의 교화지역과 거의 일치하는 갠지스 강 유역의 중인도를 가리킨다. 하지만 넓게는 인도 전역까지도 가리킨다. 그래서 불교중국(佛敎中國)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세계관에서는 부처님, 벽지불, 상수제자, 백만장자 등이 출현하는 중인도를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불전에는 이외에 인도를 가리키는 말로, 잠부디빠(Jambu-dīpa)가 나오는데 이는 수미산(須彌山, Sineru) 남쪽에 있는 대륙으로 잠부나무(閻浮樹, jambu)가 무성하게 자라는 땅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염부제(閻浮堤), 또는 남섬부주(南贍部洲)로 번역됐고 뒤에 인간세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되었다.

 

◎ 멘다까(Meṇḍaka
멘다까(Meṇḍaka)의 이야기는 「법구경」의 주석서(DhA.iv.203) 등에 나온다. 멘다까는 앙가(Aṅga)의 밧디야(Bhaddiya)라는 도시의 장자였다. 그는 다난자야(Dhanañjaya)의 아버지였고, 위사까(Visākhā)의 외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그는 빔비사라(Bimbisāra)왕의 다섯 재정관 중 한명이었다. 부처님께서 밧디야를 방문하셨을 때, 위사까의 도움을 받아서 부처님과 비구들께 공양을 올리고 법문을 들어서 수다원과를 얻었다.(DhA.i.384 ff; AA.i.129 f) 그가 목욕의식을 마치고 식량창고로 가서 그 문 앞에 서 있으면, 하늘에서 곡물이 비처럼 쏟아져 그 창고를 가득 채웠다고 한다.(Vin.i.240f; DhA.iii.372.f 등) 그의 아내, 짠다파두마(Candapadumā)는 한 움큼의 쌀과 하나의 카레로 음식을 만들었는데, 음식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음식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들, 다난자야(Dhanañjaya)는 천개의 동전을 지갑에 넣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 하루가 끝날 무렵에 지갑은 다시 돈으로 꽉 차게 되었다. 며느리, 수마나데위(Sumanadevī)는 4도나(doṇa)의 양곡이 담긴 바구니에 앉아 하인들에게 6개월간 양곡을 퍼주고도, 양곡은 그대로 있었다. 멘다까의 머슴, 뿐냐까(Puṇṇka)는 황금쟁기로 밭을 갈았다. 모든 고랑을 다 갈고도, 여섯 개의 다른 고랑이 새로 생겨났다. 이렇게 멘다까와 그의 가족 구성원들은 모두 복덕과 초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세간에 ‘아주 복 많은 다섯 사람(pañca-mahā-puññā)’이라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빔비사라왕은 이 소식을 듣고 대신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니, 모든 게 사실로 판명되었다. 이러한 멘다까와 그의 가족 구성원들의 복덕과 초능력은 다 과거 전생의 선업덕분이었다. 멘다까는 전생에 부유한 장자였다. 하지만 기근이 닥치자 비축해둔 양식은 점차 줄어들어 마침내 시종들을 모두 내보내야 했고, 나중에는 부인과 아들, 며느리, 머슴 한 명만 남았다. 멘다까의 아내는 자기 가족들이 먹기에만 겨우 충분한 밥을 지은 후 막 그 밥을 먹으려던 찰나 벽지불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벽지불을 보자 장자는 전생에 보시를 소홀히 하여 현생에 배고픔으로 허덕이게 된 자신의 악업을 떠올렸다. 장자는 벽지불에게 자신의 몫인 밥을 보시하고 음식의 풍족함과 내생에도 가족들과 함께하기를 기원하였다. 장자의 아내도 자신의 밥을 보시하고 비슷한 기원을 하였다. 그 아들과 며느리도 따라서 보시하면서 양식과 돈의 다함이 없이 공급되고, 같은 아내, 남편, 부모와 머슴들이 다시 상봉하기를 기원했다. 벽지불은 그들을 축원해주고 떠났습니다. 벽지불의 신통력으로 그들은 벽지불이 히말라야로 날아가서 다른 500명의 벽지불들과 음식을 나누는 것을 보았다. 바로 그날 장자와 그 가족들은 자신의 보시행이 놀라운 과보를 맺는 것을 발견하였다. 쌀독이 쌀로 가득 찼고, 만족할 때까지 먹어도 쌀은 언제나 넘쳐 났다. 또 곡물 창고도 곡식으로 가득 차 넘치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고따마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의 밧디야(Baddiya)에서 같은 가족 구성원이 됨으로써 그들의 기도는 성취되었다. 이들은 신통한 공덕을 가진 자의 본보기로서, 「청정도론」(Vis.XⅡ.42)에 그 일화가 소개될 정도로 유명하다.

 

◎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 
목갈라나(Moggalāna) 존자는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와 함께 부처님의 상수제자이다. 라자가하(Rājagaha) 근교의 꼴리따 마을(Kolita-gāma)의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나 마을 이름을 따라서 꼴리따(Kolita)라 불렸다. 또 어머니의 이름이 목갈리(Moggalī) 또는 목갈리니(Moggalinī)였기 때문에 목갈라나(Moggalāna) 또는 마하목갈라나(Mahā-Moggalāna)라고도 불리게 되었다. 목갈라나가 태어난 바로 그날에 사리뿟따(Sāriputta)도 태어났다고 한다. 목갈라나와 사리뿟따의 두 집안은 7대째 돈독한 우의를 지켜왔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두 사람은 둘도 없는 절친한 친구였다. 하루는 자신들을 따르는 바라문 젊은이들과 함께 라자가하의 산마루 축제를 보러갔다가 갑자기 삶의 덧없음을 느끼고는 함께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처음에는 사리뿟따와 함께 불가지론(不可知論)을 펴는 산자야(Sañjaya)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사리뿟따로부터 앗사지(Assaji) 존자의 연기법의 게송을 전해 듣고 수다원과를 얻었다. 그리고는 사리뿟따와 함께 승가에 들어와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사리뿟따 존자와 목갈라나 존자를 비구들이 본받아야 하는 이상적인 제자라고 선언하셨다.(S.ii.235; A.i.88). 부처님은 「제분별경(諦分別經, Saccavibhanga-sutta)」(M.iii.248)에서 두 상수제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셨다. “사리뿟따는 아이를 낳는 어머니와 같고 목갈라나는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와 같다. 사리뿟따는 제자들을 가르쳐 수다원과에 들게 하고 목갈라나는 더 높은 단계로 이끌어 올려준다.” 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뿟따 존자와는 어렸을 때부터 친구이자 도반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 친분은 부처님의 말년 죽음이 그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세존께서는 두 상수제자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로 하여금 승가의 일을 분담하여 보살피도록 하시고, 여래가 안 계실 때에는 그들이 승가의 일을 책임지도록 하셨다. 또한 부처님은 긴요한 상황이 생기면 특별한 임무를 두 상수제자에게 부여하시는 일이 자주 있었다. 예컨대 데와닷따(Devadatta)가 웨살리(Vesāli)출신의 갓 출가한 비구들을 꼬드겨서 가야시사(象頭山, Gayāsīsa)로 데리고 가자, 부처님께서는 두 상수제자를 보내어서 데와닷따가 잠시 잠들어 있는 틈을 타 500명의 비구들을 설득하여 모두 되돌아오게 하셨다. (Vin.2:199-200)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력(iddhi-bala)이 누구보다도 으뜸이었다.(A.i.23). 존자는 살아 있는 형상을 무한대로 만들 수 있었고, 원하는 어떠한 형태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Thag.vs.1183) 또한 수미산(須彌山, Sineru)을 강낭콩처럼 으깨 버릴 수 있었으며(DhA.iii.212), 지구를 손가락으로 돗자리처럼 둘둘 감을 수도 있었고, 옹기장이의 물레바퀴처럼 돌릴 수도 있었으며, 펼쳐진 우산처럼 수미산위에 올려놓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부처님이 위층에 계시는 데도 불구하고 아래층에서 잡담을 하면서 노닥거리는 비구들을 따끔히 혼내주라는 세존의 명을 받고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른 뒤에 엄지발가락 끝으로 강당을 흔들어 비구들을 혼비백산하게 하였다.(S.v.269ff; SNA.i.336f) 어느 날 목갈라나 존자는 제석(Sakka)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과연 얼마나 이익을 얻고 있는지를 확인하러 삼십삼천으로 갔다. 하지만 제석은 자신의 영화에만 도취되어 너무 자만하고 있었으므로 무상함을 일깨워 주고자 손가락으로 제석의 웨자얀따(Vejayanta) 궁전을 크게 흔들었다.(M.i.251ff). 목갈라나 존자는 또한 부처님께서 바까(Baka) 범천의 자만을 꺾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범천의 처소로 가기도 하였다. 하지만 주석서들(ThagA.ii.188ff)에 따르면 목갈라나의 신통력의 백미는 용왕 난도빠난다(Nandopananda)를 조복시킨 일이었다. 목갈라나 존자는 별도의 선정에 들지 않고서도 아귀나 다른 중생계의 존재들을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었다고 한다.(DhA.ii.64; iii.60, 410f., 479; S.ii.254ff). 목갈라나 존자는 지혜에 있어서도 사리뿟따 존자 다음 가는 위치에 있었다. 「사라방가 자따까(Sarabhaṅga Jātaka)」(J.No.522)에 따르면 존자는 신통력으로 종종 웃사다(Ussada) 지옥과 천상계를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외도의 신자들은 지옥에서 고통 받고 있고 부처님의 신자들은 천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알려주었는데 이렇게 되자 세상 사람들이 점점 외도를 멀리하고 부처님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러자 이에 앙심을 품은 나형외도(裸形外道)들은 사마나굿따까(Samanaguttaka)라는 도적두목에게 천금을 주고 목갈라나 존자를 죽이라고 사주했다. 도적들은 존자를 죽이려고 깔라실라(Kālasilā)로 갔지만 멀리서 그들을 본 존자는 하늘을 날아 화를 면하였다. 둘째 날도, 셋째날도 존자는 신통력으로 자리를 피해 살 수 있었지만 7일째가 되자 전생에 지은 순후업(順後業, aparāpariyavedanīya-kamma)이 그 과보를 얻을 기회가 무르익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처럼 신통력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존자가 지었다는 순후업은 주석서들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자따까」(J.v.125 ff)에 따르면 목갈라나는 과거전생의 어느 때 아내의 사주를 받아 눈먼 부모를 수레에 태워 숲속으로 데리고 가서 도적이 나온 것처럼 꾸며 부모를 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모는 시력이 없었기 때문에 자식이 때리는 줄은 모르고 진짜 도적이라 생각하고는 아들 보고 빨리 피하라고 소리쳤다. 이러한 부모의 말에 감동한 아들은 원래 생각을 접고 부모를 도로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하지만「법구경」주석서(DhA.iii.65ff)에 따르면 존자는 실제로 숲속에서 부모를 때려 죽였고 이 악업으로 무수한 세월동안 무간지옥에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업은 오랫동안 그 과보를 받을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재속의 불씨처럼 묻혀 있다가 이렇게 존자의 최후 몸을 붙잡았다. 도적들은 존자를 때려 뼈를 부수어 잘게 썬 볏짚처럼 만들어 놓고는 이제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떠났다. 잠시 후 의식을 회복한 존자는 죽기 전에 부처님을 뵙고자 생각하고, 부서진 몸을 신통력으로 한데 묶고 하늘을 날아 부처님께 가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며 이제 자신이 반열반에 들 때가 왔음을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마지막 설법을 할 것을 요청하셨고 존자는 여러 기적들을 나투고는 마지막 법문을 하였다. 그리고는 깔라실라로 가서 반열반에 들었다. 이때 여섯 욕계천상에서는 큰 소동이 일어났고 천인들은 하늘의 꽃과 향료와 백단향가루와 갖가지 섶나무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다비장 주변 1유순 이내에 꽃비가 내렸다. 존자의 다비식은 천인과 인간들의 성대한 공경과 예배 속에서 7일 동안 아주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다비식이 모두 끝나고 나자 부처님은 존자의 사리(舍利)를 잘 수습하여 죽림정사(竹林精舍, Veḷuvana)에 탑을 세우게 하셨다. 사리뿟따 존자는 양력 10월과 11월에 걸쳐있는 깟띠까(Kattikā)달 보름날에 입적하였고 보름 후 초승달이 떠오르는 날에 목갈라나도 입적하였다.(SA.iii.181) 그로부터 반년 후에 부처님께서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 anupādisesa-nibbāna)에 드셨다. 「붓다왐사」(B.i.58)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의 몸은 푸른 연꽃이나 비구름의 색깔을 띠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리랑카에는 이는 존자가 가까운 과거에 지옥에서 받은 고통으로 인한 것이라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스리랑카에서 목갈라나 존자의 상과 그림은 모두 푸른색으로 칠해져 있다.) 주석서에 따르면 목갈라나 존자가 마지막 생에 고따마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된 것은 1아승지 10만겁 전 아노마닷시(Anomadassī) 부처님 제세시 시리왓다나(Sirivaḍḍhana)라는 바라문으로 있을 때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의 전신(前身)인 사라다(Sarada)와 함께 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가 되고자 원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19세기 중엽 영국의 커닝햄(Cunningham)에 의해 인도의 산치(Sanchi) 대탑에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사리가 들어있는 두 개의 석재 사리함이 발굴되었고 두 존자의 사리중 일부가 1950년 10월 20일 미얀마에 전해져 제6차 결집의 사적지에 세워진 양곤의 까바예(Kabaye) 파고다에 안치되었다.

 

◎ 무공용(無功用, anābhoga)
공용(功用)이란 신(身) 구(口) 의(意)로 의식적인 조
작이나 작용을 일으키는 것으로,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무공용(無功用)은 이러한 조작을 하려는 마음과 의도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살의 십지(十地) 중 제8 부동지(不動地)에 오른 보살은 수행력과 본원력을 원만하게 갖추고 있으므로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히 수행이 이루어지고 저절로 이타행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의 제8지 이상을 무공용지라고 부른다. 또한 부처님께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부처님께서 어떤 의도나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자연히 이루어지는데 역시 무공용의 한 예이다. 무공용은 마음의 평정[捨]을 이룸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무간지옥(無間地獄)
‘무간지옥(無間地獄)’으로 번역한 아위찌 니라야(Avīci-niraya)에서 아위찌(Avīci)는 a(부정접두어)+vīci(틈, 간격)으로 분해된다. 그래서 아위찌는 ‘틈이 없는’이란 뜻이다. 지옥에 태어난 중생들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한 순간의 쉴 틈도 없이 고통을 받으므로 중국에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의역했으며, 그냥 음역하여 아비지옥(阿鼻地獄)이라고도 했다. 무간지옥은 불교의 8가지 대지옥(Mahā-niraya) 중에서 제일 아래에 있고 가장 무시무시한 곳이다.(J.v.266). 때로는 대지옥을 무간지옥이라 부르기도 한다.(AA.i.376) 또 넓이가 1만 평방이고 우주(鐵圍山, cakka-vāḷa)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SnA.ii.443). 하지만 「밀린다빤하」에 따르면 이 무간지옥은 우주밖에 위치한다고 한다. 스팬스 하디(Spence Hardy)는 그의 저서「Manual of Buddhism」에서 보드가야의 보리수 7백 유순 아래에 이 지옥이 위치하고 있다는 한 전설을 언급하고 있다.(Hardy, Spence, Manual of Buddhism, London, 1853. Williams and Norgate, p.27) 
주석서들에 따르면 아주 무거운 죄업을 지은 자는 대지가 둘로 갈라져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진다고 한다.(DhA.i.127, 147; iii.181). 그리고 무간지옥의 불은 백 유순 밖에서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을 파괴할 정도로 세다고 한다.(A.i.142). 또한 한 순간에 집채만 한 바위를 녹여버리지만, 거기에 태어난 중생들은 모태에 다시 드는 것처럼 소멸하지 않는다고 한다.(DhA.i.127; Mil.67). 무간지옥에 태어나서 받는 고통의 기간은 중생의 죄업에 따라 서로 다르다. 예를 들면 빠세나디(Pasenadī)왕의 왕비, 말리까(Mallikā)는 단지 7일간만 무간지옥에 머물렀던 반면,(DhA.iii.121) 데와닷따(Devadatta)는 10만겁 동안 무간지옥에 머물면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DhA.i.148)

 

◎ 무루계(無漏戒)
무루계(無漏戒)는 계를 얻는 세 가지 방법 중 하나. 무루율의(無漏律儀)·도공계
(道共戒)·도생율의(道生律儀)라고도 한다. 견도 이상의 지위에 오른 유학과 무학의 성자가 성취하는 계로 유무학의 성자가 무루의 선정을 얻을 때 그 무루심에 악한 신업과 구업을 방호하는 공능이 있어 죄를 방지하는 것을 가리킨다.

 

◎ 무량(無量, 압빠만냐, appamanna) – 2가지 

appamanna는 ‘측량, 단위, 합계, 길이’ 등을 뜻하는 중성 명사pamand(Sk. pramana, pra+√ ma, to measure)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pra+√ ma의 Pot. 분사인 pamanna(Sk. pramanya)에 부정 접두어 ‘a-‘를 첨가하여 이루어진 단어로서 ‘잴 수 없는’을 뜻하며 여성명사로 쓰여서 ‘잴 수 없음, 잴 수 없이 많음, 무량함’의 의미이다. 無量으로 한역되었다.

 

자애[慈, metta], 연민[悲, karuna], 같이 기뻐함[喜, mudita], 평온[捨,upekha]을 초기 경들에서는 네 가지 신성한 머묾[梵住, 브라흐마 위하라,brahma-vihara, 고결한 마음가짐]이라는 술어로, 주석서들과 대승불교에서는 본 술어를 四無量으로 표현한다. 중생들에 대한 이런 네 가지 자세를 무량(appamanna)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네 가지는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제한없이 모두 다 적용되며 비록 한 중생에게 향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량이없이 때문이다.

 

네 가지 무량을 중생들에 대한 이상적인 태도로 인정하지만 아비담마에서는 연민[悲], 같이 기뻐함[喜]의 두 가지만을 무량이라는 제목으로 마음부수에 포함시키고 있다. 자애[慈]는 성냄 없음(adosa)의 한 형태이고 평온[捨]은 중립(tatramajjhattata)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냄 없음이 반드시 자애로써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형태로써 드러날 수 있다. 그러나 자애가 마음에 일어날 때는 성냄 없음의 마음부수가 드러남으로 나타난다. 중립의 마음부수와 중생들에게 차별 없는 평온의 고결한 마음가짐에도 이런 관계가 성립된다. 그러나 연민, 같이 기뻐함은 그들 자체가 마음부수로써 나타나며 다른 마음부수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자애와 평온의 밑바탕이 되는 성냄 없음과 중립은 모든 아름다운 마음들과 함께 하지만 이 두 가지는 이들 역할을 개인적을 사용할 때 나타난다.

1. 연민[悲, karuna] 2. 같이 기뻐함[喜, mudita] - 이들은 무량이라 한다.
1. 연민[悲, 까루나, karuna] :2. 같이 기뻐함[喜, 무디따, mudita] :

『청정도론』에서는 자애, 연민, 같이 기뻐함, 평온의 사무량심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청정도론 IX] : “이 자애와 동정, 더불어 기뻐함과 평온의 뜻에 관해
서 설하면 우선 호의를 가지기(majjati) 때문에 자애(metta)이다. 정을 가진다(siniyhati)는 뜻이다. 친구에 대한 태도(mitte bhava), 혹은 이것은 친구에게 일어나기(mittassa pavatti) 때문에 자애(metta)이다. 다른 이가 고통스러워할 때 선한 사람의 가슴이 동요하기(kampanam karoti) 때문에 연민(karuna)이라 한다. 혹은 다른 이의 고통을 제거하고, 죽이고, 분쇄하기 때문에 연민이다. 혹은 고통받는 자들에게 흩어져서(kiriyati) 충만함으로써 확장되기 때문에 연민이다. 그것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기뻐한다. 혹은 스스로 기뻐한다, 혹은 단지 기뻐하기 때문에 같이 기뻐함이다. ‘원한이 없기를!’하는 등의 관심을 버리고 중립적인 상태에 의지함으로써 평정하기(upekkhati) 때문에 평온(upekkha)이라 한다. 

 

그러나 특징 등에 관해 보자면 자애는 복리(hita)의 형태로 일어난다. 복리를 가져오는 작용을 한다. 증오의 조복으로 나타난다. 중생에게서 사랑스러움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악의를 가라앉힐 때 성취하고 갈애를 일으킬 때 실패한다. 연민은 중생에게 일어난 고통을 완화하려는 형태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다른 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작용을 한다. 잔인함이 없음으로나타난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는 자들에서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를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이것은 잔인함을 가라핝힐 때 성취하고 근심을 일으킬때 실패한다. 같이 기뻐함의 특징은 [다른 이의 성공을] 기뻐함이다. 질투하지 않는 작용을 한다. 싫어함(arati)을 제거함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의 성공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싫어함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세속적인 희열로써]왁자지껄한 웃음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평온은 중생들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majjhatta)로 일어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중생들을 향해 평정한 상태(samabhava)를 보는 역할을 한다. 적개심과 찬동을 가라앉힘으로 나타난다. 중생들은 업을 그 소유물로 가진다(kamma-ssaka). ‘[업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중생들이 행복하고,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고, 이미 얻은 영화를 잃어 버리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여 업이 그들의 소유물임을 보는 것이 가까운 원인이다. 적개심과 찬동을 가라앉힐 때 이것을 성취하고, 무지에 바탕한 무관심을 일으킬 때 실패한다. 무지는 감각적 욕망에 바탕하기 때문이다.

 

◎ 무량함(appamāṇa) 
앙굿따라 니까야 주석서(AA.iii.231)에 따르면 ‘무량함’이라 번역되는 아빠마나(appamāṇa)는 그 범위를 잴수 있는 법이 아닌 출세간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자애(慈, mettā), 연민((悲, karuṇā), (喜, muditā), 평온(捨, upekkhā)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無量心)을 뜻하지만 아비담마의 이런 문맥에서는 도와 과를 뜻하기도 한다.

 

◎ 무명(無明) 
‘무명(無明)’이라 번역한 아윗쟈(avijjā)는 a(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사)+√vid(알다, 지각하다, 이해하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이 아윗쟈는 어리석음으로 번역되는 모하(moha)와 동의어로 마음의 눈을 가려 사물의 진정한 실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dukkha), 부정(asubha)이라는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의 네 가지 특징을 ‘영원하다, 즐겁다, 자아다, 깨끗하다고 여기는 전도된 인식(vipallāsa-saññā)을 가리킨다. 경에서는 사성제를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이 무명은 모든 불선과 윤회의 근본원인이기 때문에 12연기에서 맨 처음의 각지로 등장한다. 또한 네 가지 번뇌(漏, āsava)와 네 가지 잠재성향(隨眠, ānusaya)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무상(無相, animitta)
무상(無相, animitta)은 이상(二相)이 없다는 뜻으로 공(空)과 같은 맥락이다. 

모든 존재의 대대적인 차별상으로서의 이상(異相)이 없는 제법 실상, 곧 공이라는 일상(一相)의 도리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구체적인 차별상과 별도로 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별상 그대로가 무상이며, 다양한 상(相)을 갖추고 있는 것을 무상이라 보는 것이 일반적 논리이다. 진여(眞如)·보리(菩提)·열반(涅槃) 등의 본질적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쓰인다.

 

◎ 무상, 고, 무아 
무상, 고, 무아는 오온(五蘊)과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ā)의 보편적 속성으로 빨리어로는 띠락카나(ti-lakkaṇa)라고 한다.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려면 위빠사나를 통하여 이러한 세 가지 성품을 반드시 철견해야 한다.
(1) 무상(無常, anicca) - 무상함, 덧없음, 또는 영원하지 않음이란 뜻으로 모든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이 변화하고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다. 영어권에서는 impermanence라고 한다.
(2) 고(苦, dhkkha) - 불만스러움, 괴로움, 고통으로 모든 윤회하는 존재의 보편적 특성은 고(苦)라는 것, 즉 존재의 전반적 불만족성을 나태나는 말이다. 영어권에서는 suffering, unsatisfactoriness라고 한다.
(3) 무아(無我, anatta) - 영원한 자아는 없고 실재하지 않음을 가리킨다. 영어권에서는 not-self, non-ego, impersonality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경의 도처에서 이러한 무상·고·무아를 설하셨는데 특히 이는 대부분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문맥에서 나타나며 오온으로 대표되는 모든 개념적 존재를 분석하고 분해하고 해체해서 드러나는 유위법의 무상·고·무아를 철견할 때 해탈과 열반은 실현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유위법의 무상을 꿰뚫은 해탈을 무상해탈(無常解脫)이라 하고 고를 꿰뚫어 실현한 해탈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 하고 무아를 꿰뚫어서 실현한 해탈을 공해탈(空解脫)이라 부른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삼법인(三法印)이라는 용어는 빨리 경이나 상좌부 아비담마나 주석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법인(法印)이라는 말은 산스끄리뜨 dharma-mudra의 번역어로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의 율장과 「아비달마법온족론(阿毘達磨法蘊足論)」과 같은 설일체유부 논장에서 제일 먼저 사용한 술어이며 이것이 반야부(般若部)의 「대지도론(大智度論)」 등에서도 채용되었고 후대의 많은 중국 주석가들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대승불교의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적정열반(寂靜涅槃)으로 여기에 일체개고(一切槪苦)를 넣어 사법인(四法印)이라고 하기도 한다. 

설일체유부는 인도의 부파불교 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독특한 종지를 내세워 대승불교와 각축했던 교파였는데, 이들은 이론투쟁을 많이 겪었던 만큼 자신과 남들과의 차이점을 분명히 할 필요성에서 법의 도장[法印]과 같은 확고한 잣대가 요구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띠락카나(ti-lakkaṇa)를 원 의미에 가깝게 번역한다면 삼법인보다는 ‘세 가지 성품’이나 ‘세 가지 특징’이 더 타당하다고 하겠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법인은 수행에 대한 강한 메시지보다는 불교 전반의 가장 큰 특징을 천명하는 의미가 더 크다고 하겠다.

 

◎ 무상승(無上乘, yāna-ānuttarya, mahāyāna)

무상승(無上乘, yāna-ānuttarya, mahāyāna)이란 최상의 승(乘)이라는 뜻으로 대승의 다른 이름이다. 『대보적경(大寶積經)』 28권(大11 p.157b2-5)에 “선남자여 제불여래의 정진정각으로 행하는 도는 그 승을 대승이라 하며 상승이라 하며 묘승이라 하며 승승이라 하며 무상승이라 하며 무상상승이라 하며 무등승이라 하며 불악승이라 하며 무등등승 이라 한다. 善男子, 諸佛如來正眞正覺所行之道, 彼乘名為大乘, 名為上乘, 名為妙乘, 名為勝乘, 名無上乘, 名無上上乘, 名無等乘, 名不惡乘, 名為無等等乘.”고 하였다.

 

◎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

무표색(無表色, avijñapti-rūpa)은 밖으로 표현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행위로서 물질적인 존재를 의미한다. 『구사론』에서는 색법(色法)의 열한 가지 법 가운데 하나로 사대종(四大種)을 만든다 하고, 유식설에서는 제6의식의 사(思)의 심소가 제8식으로 훈습된 종자 위에 거짓으로 세운 심법으로 무표사(無表思)라고 한다. 또 무표색은 ‘사(思)의 종자(種子)’의 형태를 인정하고 있다. 종자란 행위 후에 남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力]으로 이것은 유식설에서 훈습(熏習) 또는 습기(習氣)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유부의 무표색은 이것을 실체적으로 파악하나, 경량부에서는 이것을 배척하고 무실체(無實體)의 입장에서 역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anuttarā-samyaksambodhih)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anuttarā-samyaksambodhih)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다른 이름. 무상정등각이란 위없는 바른 깨달음으로 궁극적인 경지를 지칭하는 말이다. 『대승본생심지관경(大乘本生心地觀經)』권2 (大3 p.300b28-c1)에 “선남자 선여인들이 대비심을 발하여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면 자신의 몸과 처자를 다른 사람에게 준다 하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다. 若有善男子善女人, 發大悲心, 爲求無上正等菩提, 以自妻子, 施與他人, 心無吝惜.” 또 『구사론』 권12(大29 p.63c17-19)에 “보살이 만약 삼무수겁(三無數劫) 즉 삼아승기겁동안 큰 복덕과 지혜를 닦으며, 육바라밀을 실천하고 수많은 고행을 행하면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한다. 菩薩, 要經三劫無數, 修大福德, 智慧資糧, 六波羅蜜多, 多百千苦行, 方證無上正等菩提.”라고 한다.

 

◎ 무상유정(無想有情) 
‘무상유정(無想有情)’으로 번역되는 아산냐삿따(asañña-satta)는 인식이 없는 중생이란 뜻이다. 이들은 마음(citta)이 아예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인식과정(vīthi-citta)도 없다. 전생에 인식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여 인식이 없는 경지를 얻고자 선정을 닦았기 때문에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태어나며 인식이 생겨나는 순간 그 무리로부터 죽게 된다고 한다.

◎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

무생지(無生智, anutpāda-jñāna)는 십지(十智)의 하나. 아비달마 교학에서는 진지(眞智)와 더불어 깨달음을 이루는 지혜로 간주한다. 사제(四諦)의 이치를 깨달아 더 이상 사제를 알고 끊으며, 증득하고 닦아야 할 것이 없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 권10(大31 p.742c22-27)에 “무생지란 이 결과로 얻는 지혜이며 혹은 이 결과를 반연하여 불생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무생으로 인하여 얻는 지혜를 무생지라 한다. 혹은 무생을 반연하여 대상으로 하는 지혜를 무생지라 한다. 이것은 뜻으로 말한 것이다. 미래의 모든 고과(苦果)가 궁극적으로 불생법(不生法)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이 지혜를 얻는다. 비록 다른 제(諦)를 반연하여 대상으로 하더라도 역시 무생지라 한다. 혹은 고제(苦諦)의 무생(無生)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므로 무생지라 한다. 無生智者, 謂由果斷所得智, 或緣果不生爲境. 所以者何. 由有無生, 故所得智, 名無生智. 或緣無生爲境, 名無生智. 此義意言. 由有當來一切苦果, 畢竟不生法性故, 而得此智. 雖緣餘諦爲境, 亦名無生智. 或緣苦諦無生爲境, 故名無生智.”

 

◎ 무인론(無因論, ahetuka-diṭṭhi) 
무인론(無因論, ahetuka-diṭṭhi)은 원인을 부정하는 견해이다. 즉 중생의 번뇌와 청정에는 아무런 원인(因, hetu)도 조건(緣, paccaya)도 없다는 견해로서 중생들은 우연이나 운명이나 필요에 의해서 오염되기도 하고 청정해지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3가지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 중의 하나이다. 경에서는 이외에도 허무론(虛無論, natthika-diṭṭhi), 무작용론(無作用論, akiriya-diṭṭhi)을 삿된 견해로 더 들고 있다.(D2; M60; M76)

 

◎ 무위(無爲, asamskrta)
무위(無爲, asamskrta)는 조작(造作)·작위(作爲)함이 없다는 뜻으로 인연화합에 의해 생멸(生滅)하는 모든 법을 유위(有爲, samskrta)라고 하는 데 대하여, 유위법이 가진 생주이멸(生住異滅)의 사상(四相)을 떠난 것을 무위(無爲)라고 한다.

◎ 무작용론(無作用論) 
‘무작용론(無作用論)’이라 번역한 아끼리야 딧티(akiriya-diṭṭhi)는 행위는 아무런 결과를 낳지 못한다는 업보를 부정하는 견해이다. 선업이 가지는 특질을 인정하는 않는 일종의 도덕부정론(akiriya-vāda)이며 경에서 언급하는 세 가지 삿된 견해(micchā-diṭṭhi) 중 하나이다.

◎ 문사수(聞思修, śruta-cintā-bhāvanā, śruta-prayoga, śrutādi, suta-cintā-bhāvanā)
문사수(聞思修, śruta-cintā-bhāvanā, śruta-prayoga, śrutādi, suta-cintā-bhāvanā)는
 교법을 듣고[聞] 그 이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思] 실제로 닦아 익히는 것[修]을 뜻한다. 또는 그 문·사·수로 얻어진 지혜를 가리킨다. 문사수란 무루(無漏)의 지혜를 얻기 위한 기본 방법이다. 즉 수행자는 경전에서 전래되는 교설을 듣고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하여, 다시 교설의 의미와 이치를 사유하게 되고, 나아가 실제로 명상 수행을 한다. 이것을 통해 진리에 대한 판단력이 점차로 고양됨과 동시에 불선(不善)과 탐욕을 제거하고 무루의 지혜에 나아갈 수 있다. 이 문사수에 의해 얻어진 지혜의 본성은 유루(有漏)의 세속지이지만 이는 무루의 지혜를 낳는 근본이기도하다.

 

◎ 문혜(聞慧, 들어서 아는 지혜)
‘들어서 아는 지혜[聞慧]’로 번역한 수따마야냐나(suta-maya-ñāṇa)는 suta(聞, 들음)+maya(만들어진, 이루어진)+ñāṇa(지혜)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suta는 동사 suṇāti(듣다)의 과거분사형이다. 여기서 이 동사 suṇāti의 의미를 한 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냥 ‘들었다’로 이해하지만 불교뿐만 아니라 바라문교나 자이나교 등 고대 인도의 전통에서는 듣는다는 의미는 단순히 듣는다는 것 이상으로서 ‘배웠다’는 뜻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다. 모든 가르침은 문자로 전승된 것이 아니라 모두 스승의 입에서 제자들에게로 구전되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실제로 빨리 경에서 다문(多聞)의 의미로 많이 나타나는 바후수따(bahussuta)는 영어로도 ‘very learned’라고 번역되듯이 많이 들었다는 의미보다는 많이 배워 지식과 학문과 수행과 인격이 고상하다는 뜻이다.

◎ 문혜(聞慧)
문혜(聞慧)는 문사수(聞思修, śruta-cintā-bhāvanā, śruta-prayoga, śrutādi, 
sutacintā-bhāvanā)수행의 하나로서 교법을 듣고[聞] 그 이치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思] 실제로 닦고 익히는 것[修]을 뜻하니 무루(無漏)의 지혜를 얻기 위한 기본 방법이다. 즉 수행자는 경전에서 전래되는 교설을 들은 다음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계기로 하여, 다시 교설의 의미와 이치를 사유하게 되고, 나아가 실제로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진리에 대한 판단력이 점차로 고양됨과 동시에 불선(不善)과 탐욕을 제거하여 무루의 지혜로 나아갈 수 있다. 이 문사수에 의해 얻어진 지혜의 본성은 유루의 세속지이지만 이는 무루의 지혜를 낳는 근본이기도 하다.

 

◎ 문혜, 사혜, 수혜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수행체계인 팔정도의 세 번째 도, 즉 혜온(慧蘊, paññā-kkhandha)을 계발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 
(1) 문혜(聞慧, suta-maya-ñāṇa):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어서 얻는 지혜로 문소성지(聞所成智)라고도 한다. 
(2) 사혜(思慧, cintā-maya-ñāṇa): 책과 경을 읽거나 법문을 들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여 얻는 지혜로 사소성지(思所成智)라고도 한다. 
(3) 수혜(修慧, bhāvanā-maya-ñāṇa): 읽고 듣고 생각한 바를 실 수행을 닦아서 얻는 지혜로 수소성지(修所成智)라고도 한다.

문혜(聞慧)는 다른 사람의 법문을 듣거나 경과 책을 읽어서 생기는 지혜이다. 이렇게 얻은 지혜는 올바른 방향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나 그 지혜만으로는 해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빌려온 지혜이기 때문이다. 들어서 얻은 지혜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인 사혜(思慧)로 가야 한다. 이성적으로 우리는 들었던 것과 읽었던 것이 논리적이고 실제적이며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를 점검하고 받아들인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이해의 역할은 그 다음 단계의 지혜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의 지혜는 수혜(修慧)인데, 수행을 통한 경험적인 차원에서 자기 자신 안에서 계발한 지혜를 말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지혜이다. 들어서 생기는 문혜나 사유해서 아는 사혜는 우리에게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영감을 주고 길안내를 해주지만 진정으로 깨달을 수 있는 지혜는 오직 수혜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둔 지혜이기 때문이다. 

◎ 물질   
‘물질’로 번역한 루빠(rūpa)는 중국에서 색(色)으로 통일되어 옮겼지만 문맥에 따라 물질일반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이고 형상과 색깔을 뜻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먼저 물질 일반으로서의 루빠(rūpa)는 오온(五蘊)의 처음인 색온(色蘊)으로 아비담마에서 28가지 물질로 나타난다.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물질(rūpa)이라 하는가? 그것은 변형되기 때문이다(ruppati). 그래서 물질(rūpa)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서 변형되는가? 차가움, 더움, 배고픔, 목마름, 파리, 모기, 바람, 햇빛, 파충류들에 의해서이다.”(S22:79/iii.86)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위바위니띠까」와 「청정도론」의 주석서에서는 물질을 ‘춥고 더운 등의 반대되는 조건들 때문에 변화를 겪고, 변화를 강요하는 것’으로 해석한다.아비담마에 따르면 이 28가지 물질은 크게 4가지의 근본물질(mahābhūta-rūpa)과 24가지의 파생된 물질(upādā-rūpa)로 나뉜다. 

 

(1) 근본물질(mahābhūta-rūpa)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들로, 서로 분리될 수 없으며 이들이 여러 형태로 조합되어 작은 것은 미세한 먼지에서부터 큰 것으로는 큰 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을 구성한다. 흔히 사대(四大)라고 알려져 있으며 다음의 4가지가 있다. 

① 땅의 요소(地大, paṭhavi-dhātu): 거칢, 조악함, 반드러움, 부드러움, 딱딱함, 견고함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phoṭṭhabba)으로 느낄 수 있다. 

② 물의 요소(水大, āpo-dhātu): 점착성, 유동성, 촉촉함, 응집력을 특징으로 하며 몸의 감촉으로써는 느끼지 못하고 마음의 문(意門, mano-dvāra)으로만 느낄 수 있다. 

③ 불의 요소(火大, tejo-dhātu): 뜨거움, 차가움, 따스함을 특징으로 하며 유기체를 성숙하고 숙성하게 한다.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기타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바로 몸의 열 때문이다. 이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진다.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④ 바람의 요소(風大, vāyo-dhātu): 팽창, 압박, 움직임을 특징으로 하며 역시 몸의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2) 파생된 물질(upādā-rūpa)은 사대에서 파생되었거나 사대를 의지해서 생긴 물질의 현상으로 총 24가지가 있다. 이들 24가지 형태의 물질은 크게 11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즉 일곱은 구체적인 물질(nipphanna-rūpa)인데 이들은 고유의 성질(自性, sabhāva)을 가지고 있어서 위빠사나로써 주시하고 통찰할 수 있다. 나머지 네 부류는 그 성질상 아주 추상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이라 부른다. 
그리고 형상, 색깔로서의 루빠는 눈(眼, cakku)의 대가 되는 것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처(六處, saḷāyatana) 중 하나이다.

물질의 개요 물질(rūpa) 구체적인 물질(nipphana-rūpa) 

1. 근본 물질(bhūta-rūpa)

1) 땅의 요소(地界, paṭhavī-dhātu) 2) 물의 요소(水界, āpo-dhātu) 3) 불의 요소(火界, tejo-dhāthu) 4) 바람의 요소(風界, vāyo-dhātu)

2. 감성 물질(pasāda-rūpa)

5) 눈의 감성(cakkhu-pasāda)6) 귀의 감성(sota-pasāda)7) 코의 감성(ghāna-pasāda)8) 혀의 감성(jivhā-pasāda)9) 몸의 감성(kāya-pasāda)

3. 대상의 물질(gocara-rūpa)

10) 물질(色, rūpa)11. 소리(聲, sadda)12. 냄새(香, gandha)13. 맛(味, rasa)*감촉은 땅, 불, 바람의 3大임.

4. 성의 물질(bhāva-rūpa)14) 여성(itthibhāva 혹은 itthatta)15) 남성(pumbhāva혹은 purisatta)

5. 심장의 물질(hadaya-rūpa)16) 심장토대(hadaya-vatthu)

6.생명의 물질(jīvita-rūpa)17) 생명 기능(命根, jīvitindriya)

7. 음식의 물질(āhāra-rūpa)18) 영양소(ojā)

 

추상적인 물질(anipphanna-rūpa)

8. 한정하는 물질(pariccheda-rūpa)

19) 허공의 요소(空界, ākāsa-dhātu)
9. 암시의 물질(viññatti-rūpa)

20) 몸의 암시(kāya-viññatti) 21) 말의 암시(vacī-viññatti)
10. 변화의 물질(vikāra-rūpa)

22) 물질의 가벼움(rūpassa-lahutā)23) 물질의 부드러움 (rūpassa-mudutā)24) 물질의 적합함 rūpassa-kammaññatā)
11. 특징의 물질(lakkhaṇa-rūpa)25) 생성(upacaya)26) 상속(santati)27) 쇠퇴(jaratā)28) 무상함(aniccatā)

 

◎ 믿음 
불교의 믿음과 관계된 빨리어 술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빠사다(pasādā): ‘깨끗한 믿음’으로 번역되는 빠사다는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 즉 ‘고요함, 편안함’을 나타낸다. 아울러 그런 고요함처럼 깨끗한 믿음을 뜻한다. 오까빠나(okappana)와 동의어이다.

(2) 삿다(saddhā): ‘믿음’으로 번역되는 삿다는(saddha)는 전통적으로 srad(가슴)+√dha(놓다)로 분석한다. 그래서 ‘마음을 어떤 대상에 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믿음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믿고 삼보에 귀의할 때 생긴다. 하지만 이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조사와 탐구를 통한 합리적인 이해에 기반을 둔 확신을 뜻한다. 그래서 영어권에서도 faith, belief보다는 confidence로 많이 번역한다. 전통적으로 이 삿다는 모든 선법(kusala-dhamma)의 씨앗이라 불린다.(Sn.77) 주석서의 설명에 따르면 그 이유는 깨끗한 믿음(okappana/pasāda)과 신해(adhimokkha)가 마음에 일어나도록 고무하여 윤회의 폭류를 건너기 위한 여정(pakkhadhana)을 떠나도록 하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은 다섯 가지 기능(五根, pañca-indriya)과 다섯 가지 힘(五力, pañca-bala) 중의 하나이다.

(3) 아디목카(adhimokkha): ‘확신, 결단, 결심’으로 번역되는 아디목카는 adhi(향하여)+√muc(벗어나다. 해탈하다)에서 파생된 명사로 ‘해탈을 향한다는 것’이 그 기본의미이다. 즉 불·법·승 삼보에 확신을 가지는 것은 곧 해탈로 향하는 기초가 완전히 다져졌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용어는 경에서보다는 논서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믿음의 요소로 나타날 때는 삿다(saddhā)와 빠사다(pasādā)에 바탕한 확신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는 신해(信解)라고 옮겼다. 이처럼 불교에서 말하는 신앙은 합리적인 이해와 통찰에 기반을 둔 것으로 ‘와서 보라(ehipassika)’는 것이지 ‘와서 믿으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와서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다. 빨리 경 도처에서는 깨달음을 일컬어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 dhamma-cakkhu)이 생겼다.(S.V.423)'라고 묘사하고 있고, 지혜인 냐나(ñāṇa)와 봄(dassana)의 합성명사인 냐나-닷싸나(智見, ñāṇa-dassana)라는 용어가 중요한 술어로서 많이 나타난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맹목적 믿음보다는 보고 아는 것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신행(信行)의 출발로 삼고 있다.

 

◎ 밀린다빤하
[밀린다빤하(Milindapañhā)]는 서기전 2세기 후반에 서북 인도를 지배한 그리스인 밀린다왕과 인도 스님 나가세나 간에 행해진 불교 교리에 관한 문답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미란타왕문경(彌蘭陀王問經)」,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등으로 번역되었지만 빨리본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이것을 볼 때 이 경은 상좌부 이외의 다른 부파에도 알려져 있던 문헌으로 보인다. 스리랑카에서 형성되지 않은 상좌부의 몇 안 되는 후기 문헌의 하나로, 경에 버금가는 그 권위는 의심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붓다고사(Buddhagosa)와 같은 저명한 주석가도 그 권위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여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다. 여기에서 논의되는 논점들은 무아설과 같은 빨리 경의 핵심적 논제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교리는 정통 상좌부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이 경을 쿳다까 니까야에 포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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