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란 무엇인가?
참으로 단순한 질문이지만 대답은 쉽지가 않는게 바로 이 질문이다. 불교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일반인들의 대부분은 불교하면 일단 향이 피어 오르고 거대한 불상과 가사를 입고 앉아 있는 승려들의 모습을 제일먼저 연상할 것이다. 이것 이외에 불교라는 이미지를 대신할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조금도 양보를 한다면 아마도 깊은 산속과 구름과 물이 흘러가고 고즈넉한 산사에서 화두들고 앉아있는 승려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불교가 진정으로 담고 있는 것이 그런 것일까? 과연 방송이나 잡지등에서 보여주는 것들이나 그리고 일반인들이 연상하는 위와 같은 이미지들만이 불교일까? 이런것들이 불교의 내재된 근본 가치를 제대로 전하고 있을까? 우리들은 피상적인 외형에 너무 함몰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불교는 종교인가 아닌가?
불교는 일반적으로 종교로 간주한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불교는 절대 신이나 조물주를 인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이나 조물주를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심리학적(철학적)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불교가 종교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불교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붓다께서 처음 설하신 그 말씀들은 어떤 것일까? 오늘날처럼 손질되고 다듬어지고 발전되어 온 불교의 모양에서 그 원형이 어떻게 보존되고 있는 것일까?
불교는 외형적으로 보면 승려와 사원 그리고 사부대중의 모임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내면은 불교는 신을 부정하는 대신에 도덕.윤리를 강조한다. 신이 나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거나 신이 나의 미래를 결졍하지 않는다. 오직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한 행(行)에 의한 결과를 이야기한다. 열가지 착한 일(십선행)의 결과와 열가지 불건전한 행위에 대한 도덕.윤리적 결과를 이야기 한다. 따라서 당연히 절대자에게 의존하거나 기도나 주술적 행위에 대한 가치를 두지 않는다. 붓다에게 예불을 드리는 것도 불교라는 가르침을 주신 그분에 대한 존경의 표시방법일 뿐이다.
불교에서 믿음이란 내가 철저하게 알고 지혜로 꿰뚫어 그것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 확고부동한 결심을 말할 뿐이다. 따라서 맹목적 신앙이나 신심이 들어설 틈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불교의 모든 진리는 합리적이고도 논리정연하게 증명되고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이기에 절대자의 도움이 필요없을 뿐더러 맹목적 신앙도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의 이성과 상상과 사고를 넘어선 절대적인 진리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기에 그 지혜를 볼 수 있는 능력과 힘을 기르라고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방법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불교는 마음을 닦는 가르침이다. 마음을 닦는 목적은 분명하다. 아직 일어나지 않는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이미 일어난 선한 마음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또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이미 일어난 악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멸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닦음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이다. 하지만 그러한 고상한 목표보다는 우리가 세간사를 살면서 일상적으로 겪는 중생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삶이 좀더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이 우선 목표이다.
인간은 그것이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를 다시말하자면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 불만족이나 불충분으로부터 만족과 충분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돈을 벌고 좋은 집에서 살고 좋은 차를 갖고 맛있는 음식을 즐기며 감각적 쾌락을 향유하고자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행복추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교에서 이런 불만족과 불충분을 채워주는 것을 "불교적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마름이라고 하여 갈애(번뇌)라고 명쾌하게 지적한다. 이런 세속적 욕망의 충족은 어떠한 경우에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뿐더러 완벽한 충족이란 있을 수 없다. 사막의 한 가운데서 목마른 자에게 청량한 물을 주는 대신에 소금물을 주듯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것과 같다.
불교적 행복이란 무엇인가?
세속적 욕망을 충족하는게 행복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미안하게도 세속적 욕망의 충족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내 것을 내려 놓고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불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다. 즉 보시와 자비의 행위에 뒤따른 것이 곧 행복이라는 것이다. 보시라는 것은 나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주머니속에 돈 100원을 거지에게 주는 것은 내가 애써 모은 돈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마찬가지로 자비란 나라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전철 안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도움을 주는 것은 나라는 생각(자아관념)이 강할수록 행할 수 없는 것이다.
버리고 내 것을 포기함으로써 그 빈자리를 채워주는 안온하고 평온한 감정이 곧 불교적 행복인 것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거지에게 마음내어 돈을 주거나 또는 무거운 보따리를 머리위에 짊어진 할머니의 보따리를 대신하여 받아서 안전하게 옮겨주고 돌아 온 저녁시간에 가만히 눈감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에서 솟아 오르는 흐뭇한 감정이 바로 불교적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집착도 욕망도 탐욕도 들어설 틈이 없다. 어떠한 세속적 탐욕을 만족시켜주기 위한 불건전한 추구도 개입할 수가 없다.
이러한 불교적 행복을 추구하는 보시나 자비행이 개나 소나 되는게 아니다. 불건전한 생각으로 가득찬 마음에서 자비나 보시가 우러나올 수가 없다. 차라리 우물가에서 숭늉찾는게 더 쉽다. 내 마음이 건전하고 선한 생각으로 가득차게 할려면 끊임없는 훈련과 마음을 닦아야 한다. 그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불교이다. 바로 팔정도인 것이다.
불교는 출가하라고 하지 않는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과 열반이다. 하지만 해탈과 열반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고 오는게 아니다. 출가를 하든 하지 않든 그 마음이 불건전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면 해턀은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일뿐이다. 보시와 자비의 마음이 없는데 지혜가 생길리가 만무하다. 지혜없이 진리를 볼 수 없다. 지혜는 계를 지키고자 하는 건전한 마음에서만 올 수 있다. 계를 지키는 건전한 마음은 바로 보시와 자비행이다. 따라서 불교는 몸만 출가할 뿐 마음이 출가하지 않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단언한다.
불교는 사부대중이다. 승가와 재가자는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출가자의 본분은 중생들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스승이란 모범을 보이고 앞서 걸어가는 사람을 말한다. 나홀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출가자를 진정한 출가자요 중생의 스승이며 복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홀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싶다면 경전 짊어지고 무인도에 가면 된다. 중생들에게 보시를 받을 필요도 없고 중생들이 보시를 할 필요도 없다. 평생을 중생들 보시에 의존하고 그리고 자비도 보시행도 없이 결국 깨닫지 못한다면 그 출가승의 일생이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에게 무슨 공덕이 있을까? 틀린 길을 간다면 틀린 결과만 있을 뿐이다. 그게 인과응보이고 자업자득이다. 백번을 양보하더라도 홀로 깨달아 독각승(연각승)이 되면 뭘 할 것인가? 설법도 못하고 중생구제도 못하는 그런 깨달음이 무슨 소용인가?
2500년전 붓다는 휘엉청 밝은 보름날 법석에 가득 모인 중생들과 출가승들에게 뭐라고 설법을 했을까? 그게 경전에서 안 보인다면 차라리 내 눈을 짓이겨 봉사로 만들든가 아니면 개종을 하여 다른 종교 믿는게 훨씬 낫다. 타종교 믿으면서 보시행한다면 한가닥 공덕이라도 남는게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7조도품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1)사성제 2) 사정근 3)사여의족 4)오근 5)오력 6)팔정도 7)칠각지이다. 모두다 마음을 닦는 것이다. 어떤 마음을 닦는 것인가? 불건전한 생각을 버리고 선한 생각을 갖는 것이다. 선한 생각이란 무엇인가? 자비와 보시이다. 37조도품은 그냥 감나무 밑에만 있으면 오는가? 절대로 아니다. 끊임없는 훈련하고 실천하고 몸에 베이게 하는 것이다. 이를 훈습(薰習)이라고 한다. 꽃향기가 내가 향을 풍기고 싶다고 풍기는가? 저절로 풍겨지는 것이다. 이렇듯 보시와 자비는 저절로 풍겨지는 향기처럼 내 몸에서 행하여질 때 까지 수행하고 연습하는 것이 37조도품이다. 그게 완성되면 해탈이고 그리고 열반을 획득한다.
어쭙쟎은 가짜 행세들
오늘날 불교는 어지럽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어쭙쟎게 재가자 주제에 수행승 행세를 하거나 수행승이 재가자들처럼 오탁악세의 세속일에 얽매이기 때문이다. 사부대중이라는 엄연한 불교의 화합체에서 각자 자신의 자리를 잘못 알고 어리석은 행동들을 하기 때문이다.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재가자 주제에 사념처 수행이니 사띠 수행이니 전문 출가승들도 하기 어려운 수행을 하면서 으시댄다. 수행센터의 문밖을 나서면 어느듯 마음은 혼탁스러워진다. 수행센터의 수행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 헛된 시간만 보낸 것이다. 재가자 주제에 뭔가 수행승처럼 들숨날숨 제대로 파악했다는 스스로의 만족감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차라리 조용히 명상센터에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지난날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마음을 다잡고 잘못된 것을 고칠려고 맹세하는게 훨씬 재가자다운 명상이다. 문밖을 나서서 혼탁한 현실에 부딛혀도 좀전에 굳힌 마음으로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이다. 굳이 사판 이판승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비추어 각자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재가자들이 불교를 좀 안다면서 하는 말은 해탈이니 열반타령이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가 해탈이니 열반이란다. 그래서 그게 재가자들에게 무슨 소용이며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가? 오계도 못지키고 250여가지의 비구율도 안 지키는 중생들이 해탈이니 열반이니 하는 말들을 입에 담을 자격조건이나 되는가 스스로 반문해 볼 일이다. 그게 목표라면서 왜 스스로는 출가도 안 하는가? 굳이 출가하지 않더라도 250 비구율 지키면서 세속생활을 해야 되지 않는가? 언제부터 불교가 말따로 행동따로처럼 따로국밥으로 노는 가르침이 되었는가?
경전에는 되풀이 하면서 재가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재가자들에게 어떻게 세간사를 살아야 하는지 붓다는 목이 터지라고 외쳐대고 있다. 출가자들에게도 점진적 단계적 가르침을 널리 펼치고 있다. 아라한들조차도 중생들에게 공덕 지을 기회를 주기 위하여 일부러 가난한 집을 찾아 가고 순서대로 집을 방문하여 탁발하며 먹지도 못할 쉰 음식을 기꺼이 먹어준다. 붓다께서는 한숟갈의 밥이라도 나누어 먹을 자비의 마음이 없다면 차라리 굶는게 낫다고 인색한 마음을 질책하고 있다. 붓다는 중생들이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하기를 기원했다. 그 행복하고 안락하고 편안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바로 탐욕을 버리고 떨쳐냄으로써 그 자리를 채우는 평온하고 안온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비요 보시이다. 그러한 자비와 보시의 공덕은 마치 누군가 물건을 옮겨놓듯이 스스로를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한다. 좋은 환경과 복덕을 받는 곳에 태어난다면 그의 삶은 행복해진다. 그 행복한 마음은 다시 행복을 짓는다. 한번 꿰뚫어 통찰한 지혜라면 윤회속에서도 절대로 그 가르침을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불교이며 행복이다.
수행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이다. 자비와 보시의 마음은 악한 생각을 물리친다. 악한 생각이 없다면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부드러워진 마음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떨쳐버릴 수 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세 가지 탐진치가 사라진다면 수행은 잘된다. 수행이 잘 된 마음은 쉽게 지혜를 보는 힘을 기르고 그 지혜의 힘은 무상 무아 연기를 본다. 그럼 해탈이고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열반이 온다.
키치로서의 불교 -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이 글이 2003년에 발표가 된 것이다. 10년이 넘은 지금도 원신연씨가 이와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뭔가 불교를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다. 불교의 고상함이나 참된 진리가 세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출세간에 있는줄로만 알고 있는 듯 하다. 수천번을 되풀이 하지만 불교는 중생들의 삶이 현존하는 이 세간에서 출발한 종교이다. 세간을 등진 불교는 없다. 그래서 용수는 세간의 진실없이는 절대적 진리가 설해질 수 없으며 절대적 진리없이는 열반은 획득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세간을 등진 곳에 불교의 진리가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서글픈 오해일 뿐이다. 붓다가 왜 깨달음을 얻은 후에 45년간이나 세간에서 걸식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았는가? 출세간에 불교의 진리가 있다면 이렇게 살다 반열반에 들었겠는가?
한때 한국은 생활불교라고 하여 산속에서 불교가 내려와서 세간사 중생들과 함께 하기를 고대했다. 지금도 생활불교를 주장하는 분들이 많다. 그게 불교이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은 남방권을 여행해 봤겠지만 그 어느나라도 세속과 불교가 등진 곳은 없다. 세간사가 곧 불교이다. 귀한 독자 아들 잃고 울부짖는 부모들에게 붓다가 출가하라고 했는가? 오히려 밤마다 열심히 성생활 잘 하면서 아들 딸 많이 낳고 돈도 많이 벌고 열심히 살라고 했다.
달라이라마나 탁낫한의 행복론은 통속적이고 세간을 등진 불교의 모습은 예술인가? 이게 웬 망발인가? 도대체 예술과 통속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통속적인 것들이 예술이라는 해궤한 가면을 쓰고 설쳐댄 기독교나 천주교를 한번 보라. 드 높은 가치와 신의 세계를 주창하면서 그들이 저지른 더러운 똥만도 못한 통속적인 짓거리들을. 세간의 행복을 주장하고 행복하게 살라고 가르치는 불교가 통속이라면 차라리 예술이라는 더러운 가면을 쓴 것들보다 더 인간적이지 않는가? 인간을 도외시한 종교나 진리가 무슨 가치가 있는가? 차라리 나는 통속적 불교를 가슴에 죽고 죽고 말것이다.
진흙속의연꽃의 어리석음
불교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수백편의 글들이 있다. 세가지로 네가지로 나누어서 경전 곳곳에 훈계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달라이라마나 탁낫한의 행복론을 키치로서의 불교라는 자다가 봉창 뜯는 소리같은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대뜸 불교는 열반이 목표이지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고 주절거린다. 연꽃의 가장 큰 어리석음은 그가 그토록 불교는 행복이다 아니다라고 하면서도 결코 불교의 행복이 무엇인지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불교가 행복론이 아니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론을 정면으로 반박해야 할 것이다. 한데 이 작자의 글 어디에도 행복이 무엇인지 말한 곳은 없다. 그저 통속적 욕망의 충족이 행복이라는 단어이니 그게 불교에서는 용납이 안된다는 억지만 잔뜩 늘어놓고 있다.
언제 불교적 행복을 통속적 욕망의 충족이라고 했는가? 저 여자 한번 끌어안고 싶다는 취착이 가득하여 마침내 한번 끌어 안으니 마음이 흡족한게 불교적 행복인가? 아니면 전철 안에서 아이 업고 있는 아줌마에게 자리 양보해주고 난 다음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흡족한 마음이 불교적 행복인가? 그걸 모른다면 차라리 개종하는게 낫다. 불교인이라고 지칭하기도 부끄럽다. 이런 행복을 키치라고 통속적이라고 말하는 이 어리석은 대학생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불교는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돈키호테 같은 중생에게는 영원히 알려지지 않는 진리이다
불교는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말한다. 세간법을 도외시한 곳에 출세간법은 존립할 수가 없다. 중생들에게는 출세간법이 없어도 살수 있지만 세간법이 없으면 짐승과 똑같아 진다. 경전은 어머니도 스승의 부인도 이웃집 아줌마도 이모 숙모 딸도 몰라보는 난잡한 짐승들의 성교를 비유하면서 훈계하고 있다. 이게 출세간 법인가 세간법인가? 이런 세간법이 없는 곳에 출가승을 위하거나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을 설하는 출세간법이 존립할 수 있는가?
일층도 없는데 2층이 존재할 수 있는가? 세간의 진실에 뿌리 내리지 않은 불교의 진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오계가 무엇이며 250가지의 비구율이 도대체 뭔가? 그건 모두다 도덕이요 윤리이다. 우리들의 의도적으로 행하는 행위에는 선하거나 악하거나 딱 두가지 밖에 없다. 이 두가지 행위의 결과가 바로 육도를 돌고 도는 윤회인 것이다.
진정한 불자라면 풍차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는 어리석은 돈키호테는 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풍차의 날개에 찢겨져 죽는 것은 하등 억울할 것도 없지만 아무런 죄도 없이 주인의 채직질에 못이겨 달려가 죽은 말의 불쌍함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다시말해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이요 열반이다. 하지만 오계도 제대로 못지키는 중생이 열반을 입에 올리는 것은 어리석은 돈키호테와 같다는 것이다.
열반이 목표인가? 그럼 우선먼저 자신부터 행복하라. 안락하라. 편안하라.
불교적 행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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