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인식론도 존재론도 아닌 연기이다
얼마전 나는 연꽃님의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주장한 이 재열 법사의 글을 옮겨와 장황하게 횡설수설한 글에 대해서 두번에 걸쳐서 논박을 했다. 그 글은 여기 1587번과 1592번에 올려져 있다. 그 글에서 나는 불교는 존재론도 아니고 인식론도 아니다. 굳이 말할려고 한다면 '불교는 연기론' 이라고 주장을 한 바 있다.
최근 이 작자는 '있는 그대로 세상의 발생과 소멸을 관찰하면, 영원주의와 허무주의 극복'이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 자체로는 특별한 오류가 없다. 하지만 그 자신이 불과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재열 법사의 주장을 옳다고 하면서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주장했던 작자이다. 그런데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듯이 "깟쨔야나곳따 경(S12:15)"을 옮겨와서 불교의 연기를 늘어놓고 있다.
법우님들의 참고를 위하여 깟쨔야나곳따 경의 핵심부분을 다시 옮겨보기로 한다. 괄호안은 전 박사님의 번역인데 솔직히 이 부분은 각묵 스님의 번역이 보다 명확하게 경의 주제를 파악하는데 올바른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의 내용은 언듯보면 햇갈리는듯 하지만 영원주의(상주론)과 허무주의(단멸론)를 연기법으로 논파한 내용이다.
깟쨔야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깟쨔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비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깟쨔야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자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깟쨔야나여, 참으로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세상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존재라는 것은 사라진다)
세상의 발생을 12연기에서 보면 순관이다. 즉 현세의 존재들은 무명과 갈애(번뇌)때문에 생겨나고 우리들이 그러한 발생의 조건을 끊임없이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고 죽음을 반복하는 윤회는 조건 발생적이다. 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윤회한다. 따라서 조건 소멸도 없는데(업의 소멸) 죽으면 내생도 없고 모든게 없다는 허무주의(단멸론)은 논박되고 혁파되는 것이다.
세상의 소멸을 12연기에서 보면 역관이다. 형성된 존재들이 조건의 소멸로 인하여 차례대로 소멸되어 가는 모습은 곧 영원주의(상주론)는 논박되고 혁파되는 것이다.
12연기는 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일어나고 조건이 사라지면 반드시 소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존재론도 인식론도 성립이 될 수 없다. 고정되고 변하지 않는 존재도 없을 뿐더러 그렇다고 인식하는 주체나 인식되어지는 대상 자체도 모두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조건따라 발생하고 소멸하는 연기를 말하는 것이 불교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 존재는 누구의 것입니까?
"비구여,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말하거나 존재가 다르고 존재하는 자가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 둘은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를 뿐이다. 비구여, '생명과 몸은 같다거나 생명과 몸이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중도(연기법)에 의해서 어래는 법을 설한다.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우울.슬픔.고통.불쾌.절망이 생겨난다." (S12:35. 무명을 조건으로 함 경)
참고로 덧붙이자면 대승불교의 철학적 두 줄기는 공관파와 유식파이다. 이 중 유식파는 인식되는 것만이 존재하는 것이고 인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주장을 했다. 한데 여기서 많은 불자들이 이러한 유식의 설명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며 이로인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재열 법사의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유식론은 '우리들이 체험하는 지각 현상들은 단지 연기의 관계로만 있을 뿐, 자성을 갖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지만 그래도 그와 같이 지각되는 현상들은 분명이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이 지각하는 현상들은 우리의 마음이 인식하는 과정으로서만 있을 뿐이다. 그럼 우리의 마음이란 어떠한 존재인가?
근본불교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심(心).의(意).식(識)으로 불러왔으며 6식까지만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유식은 이를 받아들이고 발전시켜서 식은 6식(안.이.비.설.신.의식)으로, 의는 7식으로, 심은 8식으로 확대했다. 그리고 식의 상태를 의타기성.변계소집성.원성실성등의 3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굳이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식(識)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연기적 존재일 뿐이다. 우리들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심.의.식은 다른 여러가지 요인들과의 상관관계에서만 일어난다.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심의식은 없다는 점에서 이미 연기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불교에서는 인식의 대상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도 단지 연기의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연기적 존재의 뒷면에 실체적 마음이나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인식하는 자도 인식되어지는 대상도 모두 연기이다. 당연히 불교에서 존재는 인식론이 아니라 연기인 것이다. 만일 인식론이라고 한다면 인식하는 작자는 누구이며 인식되어지는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그들 자체가 불변이어야 한다. 그래야 존재론처럼 인식론도 성립이 되는 것이다.
불교가 인식론이라고 주장하는 작자들의 자기 모순
위에서 설명한대로 불교가 인식론이라는 주장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럼에도 인식론이다라고 주장한 작자들이 마구잡이식으로 경전을 가져와서 연기법을 늘어놓고 있다. 불교는 연기법이다라는 것과 불교는 인식론이다라는 것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불교는 인식론이다라고 하는 주장을 연기법은 혁파하고 있다.
정말로 인식론을 주장하는 작자들이 이 경전을 옮겨 올려면 그들의 인식론이 왜 이 경전과 합치하는지를 진지하게 설명해야 하고 더불어 자신들의 인식론이 경전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그런 내용도 전혀 없이 이전에 자신들이 무엇을 주장했는지조차 모른채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한 채 마치 불교는 연기법인냥 주절주절대는 것은 자기 모순일 뿐더러 그들의 지식이 어느 밑바닥 수준인가를 보여줄 뿐이다.
누군가가 불자들에게 물을 수 있다. 불교는 인식론인가 존재론인가? 그렇다면 올바른 불자라면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 '불교는 존재론도 인식론도 아니다. 불교는 연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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