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설명하지 않음(무기.無記) 품 Abyākata-vagga (AN 7.54-64)
abyākatasuttaṃ (AN 7.54-설명하지 않음(무기.無記) 경)
54.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여래가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비구여, 견해가 소멸하였기 때문에 여래가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에게는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것은 단지 견해일 뿐이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견해일 뿐이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단지 견해일 뿐이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것은 단지 견해일 뿐이다. 비구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러한 견해를 철저히 알지 못하고, 견해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견해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견해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러한 견해는 늘어난다. 그는 태어남∙늙음∙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해탈하지) 못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견해를 철저히 알고, 견해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견해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견해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그에게 이러한 견해는 소멸한다. 그는 태어남∙늙음∙죽음으로부터 벗어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가 설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설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마음 졸이지 않고 전율하지 않는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갈애에서 나온 것이다.(속하는 것이다) ··· 이것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 이것은 희론에서 나온 것이다. ··· 이것은 분별에서 나온 것이다. ··· 이것은 집착에서 나온 것이다. ···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는 이것은 나중에 후회할 일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이것은 나중에 후회할 일이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이것은 나중에 후회할 일이다. 비구여,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이것은 나중에 후회할 일이다. 비구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후회할 일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소멸을 철저히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알지 못한다. 그의 후회할 일은 늘어난다. 그는 태어남∙늙음∙죽음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슬픈∙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여,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러한 후회할 일을 철저히 알고, 후회할 일의 일어남을 철저히 알고, 후회할 일의 소멸을 철저히 알고, 후회할 일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철저히 안다. 그에게 이러한 후회할 일은 소멸한다. 그는 태어남∙늙음∙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 슬픔∙비탄∙고통∙근심∙번민으로부터 벗어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비구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가 설명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설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두려워하지 않고 동요하지 않고 마음 졸이지 않고 전율하지 않는다."
purisagatisuttaṃ (AN 7.55-사람들의 갈 곳 경)
55.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사람의 갈 곳과 집착 없는 완전한 열반을 설할 것이다. 그것을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일곱 가지 사람의 갈 곳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오면 그것은 열이 식을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과거에 지금의 존재를 태어나게 할 없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 나의 존재는 있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현재에 미래의 존재를 태어나게 할 없이] 없다면 [미래의]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yad atthi, yam bhuta)'은 현재의 다섯 가지 무더기(오온)를 뜻한다.(Ibid)
*'평정을 얻는다(upekkham patilabhati)'는 것은 그것에 대한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위빳사나의 편정을 얻는다는 뜻이다.(Ibid)
*'존재에 물들지 않는다(bhave na rajjati)'는 것은 과거의 오온에 대해 갈애와 견해로 인해 물들지 않는다는 말이고, '생겨남에 물들지 않는다(sambhave na rajjati)'는 것은 미래의 오온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Ibid)
*완전히 실현하지 못했다'는 것은 진리를 가로막는 어떤 일부분의 오염원들이 아직 버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완전히 모든 측면에서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는 뜻이다.(AA.iv.39)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antara-parinibbayi)'는 것은 태어남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간을 넘기지 않고, 그 중간에 오염원이 완전히 식음으로써 완전히 열반에 든다는 뜻이다.(Ibid)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튕겨지면서(위로 튀어 오르면서) 열이 식을 것이다.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튕겨졌다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열이 식을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어디에도 닿지 못한다(anupahacca talam);는 것은 헝공의 맨 위에 닿지도 못하고, 그것을 능가하지도 못하고, 또 땅에도 떨어지기도 전에 오로지 공중에서 식는다는 뜻이다. 이 세 가지 비유로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세 종류의 사람을 설명했다.(AA.iv.39)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튕겨졌다가 [땅에] 닿은 후에 열이 식을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닦는다.‘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행(行)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튕겨졌다가 [땅에] 닿은 후에 열이 식을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행없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행(行.형성력)을 통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튕겨졌다가 작은 풀 더미나 장작더미에 떨어질 것이다. 거기서 그것은 불도 내고 연기도 낼 것이고, 그 다음엔 그 큰 풀 더미나 장작더미를 다 태우고는 연료가 다하여 꺼질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행(行.형성력)을 통해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된다.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자가 된다. 예를 들면, 비구들이여, 무쇠 솥을 한낮에 시뻘겋게 달구어서 두드릴 때 파편이 떨어져 나와 위로 튀어 올랐다가 작은 풀 더미나 장작더미에 떨어질 것이다. 거기서 그것은 불도 내고 연기도 낼 것이고, 그 다음엔 큰 풀 더미나 장작더미를 태우고는 숲을 태우고 삼림지대를 태울 것이다. 그 다음엔 초원이나 황무지나 바위나 물이나 비옥한 땅을 만나면 거기서 연료가 다하여 꺼질 것이다. 그와 같이 여기 비구는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러나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다.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태어나는 자가 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사람의 갈 곳이다.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떤 것이 집착 없는 완전한 열반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닦는다.
‘있지 않았다면 나의 존재 있지 않았을 것이고, 없다면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되어있는 것, 그것을 나는 제거한다.’라고 평정을 얻는다. 그는 존재에 물들지 않고, 태어남에 물들지 않고, ‘수승하고 평화로운 경지가 있다.’라고 바른 지혜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경지를 완전히 실현한다. 자만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존재에 대한 집착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하고, 무명의 잠재성향을 완전히 제거한다. 그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이것을, 비구들이여, 집착 없는 열반이라고 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사람의 갈 곳과 집착 없는 완전한 열반이다.”
tissabrahmāsuttaṃ (AN 7.56-띳사 범천 경)
56.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두 명의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독수리봉 산의 거의 전부를 환하게 밝히면서 세존께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한 천신이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니들은 해탈하였습니다.”
다른 천신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니들은 집착 없이 잘 해탈하였습니다.”
천신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스승께서는 그것에 동의를 하셨다. 그러자 천신들은 ‘스승께서 우리의 말에 동의를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존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비구니들'이란 마하빠자빠띠(Mahapajapati) 장로니와 그를 따르던 5백 명의 비구니들이다. '해탈하였다.'는 것은 다섯 가지 해탈로 해탈한 것이고, '집착이 없다.'는 것은 남은 취착(upadana-sesa)이 조금도 없이 다섯 가지 해탈로 해탈하였다는 뜻이다.(AA.iv.40)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apajapati Gotami)장로니는 세존의 어머니인 마하마야(Mahamaya) 왕비의 동생이었고, 마하마야 왕비가 세존을 낳은 지 7일만에 돌아가시자 세존을 양육하였으며 세존의 아버지인 숫도다나 왕과 결혼하여 세존의 계모가 된 분이다.
세존께서는 그 밤이 지나자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간밤에 두 명의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으로 독수리봉 산의 거의 전부를 환하게 밝히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다가와서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섰다. 한 곁에 서서 한 천신이 나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니들은 해탈하였습니다.’ 다른 천신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비구니들은 집착 없이 잘 해탈하였습니다.’라고.
비구들이여, 천신들은 이렇게 말하였고 나는 그것에 동의를 하였다. 그러자 천신들은 ‘스승께서 우리의 말에 동의를 하셨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나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존경의 의미로 오른쪽으로 돌아 거기서 사라졌다.”
그때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앉아있었다.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런 생각이 일어났다.
'어떤 신들에게 이러한 앎이 있을까?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남아 있는 것이 있으면 남아 있는 것이 있다. 남아 있는 것이 없으면 남아 있는 것이 없다).’라고.
그 당시 띳사라는 비구가 얼마 전에 임종하여 어떤 범천의 세계에 태어났다. 거기서도 그들은 그를 '큰 신통력과 큰 위력을 가진 띳사 범천'이라고 그를 알았다.
*주석서에 의하면 띳사(Tissa) 비구 혹은 띳사 범천은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상좌였다고 한다.(AA.iv.40)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빠른 시간에 독수리봉 산에서 사라져 범천의 세계에 나타났다. 띳사 범천은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목갈라나 존자여. 환영합니다, 목갈라나 존자여. 목갈라나 존자여, 오랜만에 기회를 내셔서 여기에 오셨습니다. 앉으십시오. 이것이 마련된 자리입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띳사 범천도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띳사 범천에게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띳사여, 어떤 신들에게 이러한 앎이 있습니까?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목갈라나 존자여, 범신천(梵身天)의 신들에게 이러한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띳사여, 그러면 범신천의 모든 신들에게 이러한 앎이 있습니까?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목갈라나 존자여, 범신천의 모든 신들에게 이러한 앎이 있지는 않습니다.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목갈라나 존자여, 범신천의 신들 가운데 범천의 수명에 만족하고 범천의 용모와 범천의 행복과 범천의 명성과 범천의 지배력에 만족하는 자는 그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앎이 있지 않습니다.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목갈라나 존자여, 그러나 범천의 수명에 만족하지 않고 범천의 용모와 범천의 행복과 범천의 명성과 범천의 지배력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그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남아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여기, 목갈라나 존자여, 양면으로 해탈(양면해탈자.兩面解脫者)한 비구가 있습니다. 그런 그에 대해 그 신들은 이렇게 압니다.
‘이 존자는 양면으로 해탈한 자다. 그의 몸이 유지될 때 까지 신과 인간들을 그를 본다. 그러나 몸이 무너지고 나면 신과 인간들은 그를 보지 못한다.’라고.
이렇게, 목갈라나 존자여, 그 신들에게는 이런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여기, 목갈라나 존자여, 지혜로 해탈(혜해탈자.慧解脫者)한 비구가 있습니다. 그런 그에 대해 그 신들은 이렇게 압니다.
‘이 존자는 지혜로 해탈한 자다. 그의 몸이 유지될 때 까지 신과 인간들을 그를 본다. 그러나 몸이 무너지고 나면 신과 인간들은 그를 보지 못한다.’라고 .
이렇게, 목갈라나 존자여, 그 신들에게는 이런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없으면 집착이 없다.’라고.
여기, 목갈라나 존자여, 몸으로 실현한 비구가 있습니다. 그런 그에 대해 그 신들은 이렇게 압니다.
‘이 존자는 몸으로 실현한 자다. 이 존자는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와 사귀며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하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성취하고자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목갈라나 존자여, 그 신들에게는 이런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있으면 집착이 남아 있다.’라고.
여기, 목갈라나 존자여, 견해를 얻은 비구가 있습니다. ··· 믿음으로 해탈한 비구가 있습니다. ··· 법을 따르는 비구가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 신들은 이렇게 압니다. ‘이 존자는 법을 따르는 자다. 이 존자는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하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성취하고자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나와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 목갈라나 존자여, 그 신들에게는 이런 앎이 있습니다. ‘집착이 있으면 집착이 있다.’라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띳사 범천의 말을 기뻐하고 감사한 뒤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빠른 시간에 범천의 세계에서 사라져 독수리봉 산에 나타났다. 그리고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띳사 범천과 나누었던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그런데 목갈라나여, 띳사 범천은 그대에게 일곱 번째인 표상 없이 머무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세존이시여,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간입니다. 선서시여, 지금이 바로 적절한 시간입니다. 세존께서 일곱 번째인 표상 없이 머무는 사람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세존의 말씀을 듣고 비구들은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갈라나여, 듣고 잘 사고하라. 나는 말하겠다.”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목갈라나 존자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기, 목갈라나여, 비구는 모든 표상들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문다. 그런 그에게 그 신들은 이렇게 안다.
‘이 존자는 모든 표상들에 대해서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서 표상 없는 마음의 삼매에 들어 머문다. 이 존자는 적당한 거처를 수용하고 좋은 친구들을 사귀며 감각기능들을 조화롭게 유지하여,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성취하고자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나와 출가하는 목적인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이렇게도, 목갈라나여, 그 신들에게는 이러한 앎이 있다.
‘집착이 있으면 집착이 있다.’라고.”
*'모든 표상(sabba-nimitta)'이란 모든 것에 대해 영원하다는 표상 등을 말한다. '표상없는 마음의 삼매(nimitta cetosamadhi)'란 깊은 위빳사나와 함께한 삼매(balava-vipassana-samadhi)를 뜻한다.(Ibid)
'깊은 위빳사나와 함께한 이 삼매는 영원하다는 표상 등이 없기 때문에 표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라 한 것이다.(AAT.iii.177)
sīhasenāpatisuttaṃ (AN 7.57-시하 장군 경)
57.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웨살리에서 큰 숲의 뾰족지붕(중각강당) 건물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시하 대장군이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시하 대장군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눈에 보이는, 이번 생에 속한) 보시의 결실을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시하여, 여기서 그대에게 되묻겠습니다. 그대에게 괜찮다면가 그것을 설명하십시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여기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하고, 다른 사람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아라한은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구를 먼저 연민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아라한이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을 먼저 연민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연민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아라한은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구를 먼저 방문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아라한이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을 먼저 방문하겠습니까! 아라한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먼저 방문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아라한은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구의 보시를 먼저 받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아라한이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의 보시를 먼저 받겠습니까! 아라한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의 보시를 먼저 받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아라한은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 먼저 법을 설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아라한이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에게 먼저 법을 설하겠습니까! 아라한은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먼저 법을 설할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구에게 좋은 명성이 퍼지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에게 좋은 명성이 퍼지겠습니까!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명성이 퍼질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가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든, 바라문의 회중이든, 장자의 회중이든, 사문의 회중이든, 그 어떤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가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든, 바라문의 회중이든, 장자의 회중이든, 사문의 회중이든, 그 어떤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가겠습니까!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든, 바라문의 회중이든, 장자의 회중이든, 사문의 회중이든, 그 어떤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갈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시하여,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나,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누가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어떻게 믿음이 없고 인색하고 욕심이 많고 난폭한 사람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나겠습니까! 믿음이 있고 보시의 주인이고 계속해서 베푸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보시의 결실에 대해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를 먼저 연민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를 먼저 방문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를 먼저 연민합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를 먼저 방문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의 보시를 먼저 받습니다. 세존이시여, 아라한은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에게 먼저 가르침을 설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에게 '시하 장군은 따르는 대중에게 보시를 행하는 자'라는 좋은 명성이 퍼집니다. 세존이시여, 보시를 행하는 자, 보시의 주인인 저는 끄샤뜨리야의 회중이나 바라문의 회중이나 장자의 회중이나 사문의 회중이나 그 어떠한 회중에 들어가더라도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들어갑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신 지금·여기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이러한 보시의 결실에 대해 단지 세존에 대한 믿음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도 또한 그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시하여,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난다.’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저는 세존에 대한 저의 믿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시하여, 그렇습니다. 시하여, 그렇습니다. 보시를 행하는 보시의 주인은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좋은 곳, 천상 세계에 태어납니다.”
arakkheyyasuttam (AN 7.58-감추지 않아야 함 경)
58. “비구들이여, 여래는 네 가지에 대해서는 감출 필요가 없고, 세 가지에 대해서는 비난받을 일이 없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여래는 어떠한 네 가지에 대해서는 감출 필요가 없는가?
비구들이여, 여래는 몸의 품행이 청정하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남이 나의 이것을 알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추어야만 하는, 몸으로 하는 나쁜 행위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말의 품행이 청정하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남이 나의 이것을 알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추어야만 하는, 말로 하는 나쁜 행위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마음의 품행이 청정하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남이 나의 이것을 알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추어야만 하는, 마음으로 하는 나쁜 행위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생계 수단이 청정하기 때문에 여래에게는 ‘남이 나의 이것을 알지 못하기를.’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추어야만 하는, 삿된 생계수단이란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해서는 감출 필요가 없다.
비구들이여, 어떠한 세 가지에 대해서는 비난받을 일이 없는가?
비구들이여, 여래는 법을 설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참으로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세계, 인간의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이런 이유로 당신은 법을 잘 설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나를 질책할 그 어떤 조짐도 나는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조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을 얻고 두려움을 없음을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제자들에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과 그 길의 닦음을 천명하였다. 그렇게 길을 닦은 나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에 대해서 참으로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세계, 인간의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적절한 이유를 가지로 ‘이런 이유로 그대는 제자들에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길과 그 길의 닦음을 잘 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길을 닦은 그대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지 않습니다.’라고 나를 질책할 그 어떤 조짐도 나는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조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은(安隱)을 얻고 두려움 없음을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수백 명의 나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여기에 대해서 참으로 신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범천이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세계, 인간의 세계, 하늘 사람이 사는 세계에서 그 누구도 적절한 이유를 가지고 ‘이런 이유로 수백 명의 그대의 제자들은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지 않습니다.’라고 나를 질책할 그 어떤 조짐도 나는 보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나는 내게서 이런 조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안온(安隱)을 얻고 두려움 없음을 얻고 담대함을 얻어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세 가지에 대해서는 비난받을 일이 없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러한 네 가지에 대해서는 감출 필요가 없고, 이러한 세 가지에 대해서는 비난받을 일이 없다.”
kimbilasuttam (AN 7.59-낌빌라 경)
59.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낌빌라에서 대나무 숲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낌빌라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아서 낌빌라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 정법이 오래 머물지 못합니까?”
“낌빌라여, 여기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법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승가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닦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삼매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방일하지 않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친절한 환영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낌빌라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 정법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세존이시여, 무슨 원인과 무슨 조건 때문에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도 정법이 오래 머뭅니까?”
“낌빌라여, 여기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 비구들과 비구니들과 청신사들과 청신녀들이 스승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법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승가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닦음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삼매를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방일하지 않음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친절한 환영을 존중하고 순응하며 머문다. 낌빌라여, 이러한 원인과 이러한 조건 때문에 여래가 반열반에 든 뒤에도 정법이 오래 머문다.”
sattadhammasuttam (AN 7.60-일곱 가지 법 경)
60.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오래지 않아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에 의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게 된다. 무엇이 일곱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믿음이 있고, 계를 잘 지키고, 많이 배우고, 편안하게 머물고, 열심히 정진하고, 마음 챙김을 가지고, 지혜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법을 갖춘 비구는 오래지 않아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게 된다.”
pacalāyamānasuttaṃ (AN 7.61-졸고 있음 경)
6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박가에서 수수마라기리의 베사깔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목갈라나 존자가 마가다의 깔라왈라뭇따 마을에서 졸면서 앉아 있었다. 세존께서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天眼]으로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마가다의 깔라왈라뭇따 마을에서 졸면서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것을 보시자 마치 힘 센 사람이 구부렸던 팔을 펴고 폈던 팔을 구부리는 것처럼 빠른 시간에 숨수마라기리의 베사쌀라 숲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사라져 마가다의 깔라왈라뭇따 마을에 있는 마하목갈라나 존자의 앞에 나타나셨다. 세존께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세존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가(Bhagga)는 종족 이름이면서 나라 이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꼬삼비에 예속되어 있었던 듯하며 왓지 공화국의 일원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DPPN) 그래서 인도 중원의 16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박가는 웨살리와 사왓티 사이에 놓여 있었고 수도는 숨수마라기리(Sumsumara-giri, 악어산)였으며 그곳에 있는 숲이 베사깔라 숲(Bhesakala-vana)이다. 세존께서는 이곳에서 8번째 안거를 보내셨다고 한다.
*깔라왈라뭇따 마을(Kallavalamutta-gama)은 본경에서 보듯이 마하목갈라나 존자가 아라한이 된 곳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존자는 출가한 날부터 이곳에서 머물렀다고 하는데 7일간 경행하는 정진을 한 끝에 피고한여 해태와 혼침(thina-middha)에 빠져 있다가 본경에서 설하신 세존의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DhpA.i.96)
*'졸면서'로 옮긴 원어는 pacalayamana인데 졸음에 빠져 몸을 흔들면서 앉아있는 것을 뜻한다. 주석서에 의하면 목갈라나 존자는 7일을 경행하는 정진을 하였기 때문에 아주 피곤하여 졸고 있었다고 한다.(AA,iv.41)
“목갈라나여, 그대는 졸고 있지 않는가? 목갈라나여, 그대는 졸고 있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므로 목갈라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머물 때 그대를 혼침(졸음)에 빠지게 하는 그 인식에 마음을 기울이지 말라. 그 인식을 많이 닦지 말라.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마음으로부터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숙고하고 마음으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배운 대로 이해한 대로 법을 상세하게 암송해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양쪽 귀를 잡아당기고 손으로 몸의 여기저기를 문질러고 두드려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별자리와 별들을 쳐다보아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광명상(光明想)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낮이다.’라는 인식을 확고히 해야 한다. 낮에 광명(밝은 빛)을 본 것처럼 밤에도 광명을 보고, 밤에 광명을 본 것처럼 낮에도 광명을 본다. 이렇게 열려있고 방해받지 않은 마음으로 마음을 밝게 만들어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감각기능들을 안으로 향하게 하고,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게 함으로써 앞과 뒤를 똑바로 인식하면서 경행을 확고히 해야 한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혼침이 제거될 것이라는 경우는 있다.
만약 이렇게 머무는 그대에게 그 혼침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목갈라나여, 더 나아가 그대는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언제] 일어날 것이라는 인식에 마음을 기울인 후 발을 포개고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향한 채 사자처럼 누워라. 목갈라나여, 깨어나면 ‘누워있는 즐거움, 옆구리를 대고 있는 즐거움, 잠자는 즐거움에 빠져 머물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목갈라나여, 그대는 이렇게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목갈라나여, 그대는 이렇게 닦아야 한다.
‘나는 자만으로 콧대를 높이 세우고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목갈라나여, 그대는이렇게 닦아야 한다. 만약, 목갈라나여, 비구가 자만으로 콧대를 높이 세우고 재가자의 집을 방문하였는데, 목갈라나여, 재가자의 집에 할 일이 많이 있다. 그 일들 때문에 사람들이 방문한 비구에게 마음을 쓰지 못하면, 거기에서 비구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누가 지금 이 집에서 나를 혼란케 하는가?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는 기색이 역력하구나.’라고. 이렇게 그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게 되어 의기소침하게 된다. 의기소침하면 들뜨고(산만해지고), 들뜨면 단속하지 못하고, 단속하지 못하면 마음은 삼매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므로, 목갈라나여, 그대는 이렇게 닦아야 한다. ‘나는 논쟁의 소지가 있는 말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목갈라나여, 그대는 참으로 이렇게 닦아야 한다. 목갈라나여, 논쟁이 있으면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예상된다.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들뜨고, 들뜨면 단속하지 못하고, 단속하지 못하면 마음은 삼매로부터 멀어진다. 목갈라나여, 나는 모든 교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모든 교제를 칭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목갈라나여, 나는 재가자들이나 출가자들과 교제하는 것을 칭찬하지 않는다. 조용하고 소리가 없고 한적하고 사람들로부터 멀고 혼자 앉기에 좋은 외딴 처소들과 교제하는 것을 칭찬한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마하목갈라나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간략하게 말씀하시면, 어떻게 해서 비구는 갈애가 소멸하여 해탈을 성취하고,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온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실천하고, 구경의 목적을 이루고, 신과 인간들 사이에 으뜸이 됩니까?”
“여기, 목갈라나여, 비구는 ‘모든 법에 대해 [갈애와 사견을 통해서] 집착해서는 안된다.'라고 배운다. 목갈라나여, 이렇게 ‘모든 법에 대해 [갈애와 사견을 통해서] 집착해서는 안된다.'라고 배운 비구는 모든 법을 완전한 지혜로 안다. 모든 법을 완전한 지혜로 안 뒤 모든 법을 철저하게 안다. 모든 법을 철저하게 안 뒤 어떤 느낌을 느끼더라도, 그것이 즐거운 느낌이든 괴로운 느낌이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든, 그는 그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이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놓아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그는 그 느낌들에 대해서 무상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탐욕이 사라짐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소멸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고, 놓아버림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물면서 세상에 대해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으면 동요하지 않는다. 동요하지 않으면 스스로 완전히 열반에 든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안다.
목갈라나여, 간략하게 말하면, 이렇게 해서 비구는 갈애가 소멸하여 해탈을 성취하고, 구경의 완성을 이루고, 구경의 유가안온(열반)을 얻고, 구경의 청정범행을 실천하고, 구경의 목적을 이루고, 신과 인간들 사이에서 으뜸이 된다.”
mettasuttaṃ (AN 7.62-자애 경)
62. “비구들이여, 공덕을 두려워하지 말라. 비구들이여, 공덕이라는 것은 행복과 같은 말이다. 비구들이여, 나는 오랜 세월을 지어온 공덕으로 오랜 세월동안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과보를 경험했다. 나는 7년을 자애의 마음을 닦았다. 7년 동안 자애의 마음을 닦은 뒤 일곱 번의 수축(파괴)하고 팽창(생성)하는 겁 동안 이 세상에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비구들이여, 세상이 수축할 때 나는 광음천에 태어났고, 세상이 팽창할 때는 텅 빈 범천의 궁전에 태어났다.
거기서, 비구들이여, 나는 범천이었고, 대범천이었고, 정복자였고, 널리 보는 자였고, 지배자였다. 비구들이여, 나는 서른여섯 번을 신들의 왕인 삭까였다. 그리고 나는 수백번을 법을 가진 자, 법의 왕, 사방을 정복한 승리자, 나라를 안정되게 하고, 일곱 가지 보배를 갖춘 자인 전륜성왕이었다.
그런 나에게, 비구들이여, 윤보(輪寶), 상보(象寶), 마보(馬寶), 보배보(寶貝寶), 여인보(女人寶), 장자보(長者寶) 그리고 주장신보(主藏臣寶)를 일곱 번째로 하는 이런 일곱 가지 보배가 있었다. 천 명이 넘는 나의 아들들은 용감하고 훤칠하며 다른 군대를 압도하였다. 그는 바다를 끝으로 하는 이 땅을 몽둥이와 칼에 의하지 않고, 법으로써 승리하여 통치하였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은 공덕(功德)의 유익(有益)한 과보를 보라.
비구들이여, [나는] 칠 년 동안 자애의 마음을 닦은 뒤에
일곱 번의 수축하고 팽창하는 겁(劫) 동안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세상이 수축할 때는 광음천(光音天)에 태어났고,
세상이 팽창할 때는 비어있는 범천(梵天)의 궁전에 태어났다.
일곱 번 대범천이었고, 그때 지배력이 있었다.
서른여섯 번 신들의 왕이었고 신들이 왕국을 건설했다.
잠부디빠의 통치자인 전륜성왕이었고
머리에 의식을 치른 끄샤뜨리야로서 인간들의 지배자였다.
몽둥이와 칼 없이 이 땅을 다스렸고
폭력을 행하지 않고, 고르게 이 땅을 이끌었다.
이 대지에서 법에 의한 지배력을 행한 뒤에
큰 재산과 큰 재물과 큰 번영을 가졌으며
모든 즐길 거리와 칠보(七堡)를 갖춘 가문에 태어났다.
세상을 연민하는 세존. 아라한.정등각들에 의해 이것은 잘 설해졌다.
이것이 위대함의 원인이다. 나는 땅에 속한 동안 실패하지 않았다.
많은 재산과 필수품을 가진 빛나는 왕이었다.
잠부디빠의 통치자로서 신통과 명성을 가졌다.
비록 비천한 태생이라고 해도 들은 뒤에 누가 믿음을 갖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자신을 사랑하여 위대함을 바라는 자들은
세존.아라한.정등각자들의 가르침을 기억하면서 정법(正法)을 존중해야 한다.
bhariyāsuttam (AN 7.63-아내 경)
63.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카 승원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차림을 바르게 하시고 발우와 가사를 지니고 아나타삔디카 장자의 집으로 가셨다. 가셔서는 마련된 자리에 앉으셨다. 그 무렵에 아나타삔디카 장자의 집에서 사람들은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그때 아나타삔디카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나타삔디카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자여, 왜 그대의 집에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큰 소리로 떠들고 있는가? 꼭 어부가 물고기들을 끌어올리 때와 같구나.”
“세존이시여, 제게는 수자따라는 며느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부유하며 부유한 가문에서 시집왔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도 몰라보고 시아버지도 몰라보고 남편도 몰라보고 세존을 존경하지도 않고 존중하지도 않고 숭상하지도 않고 예배하지도 않습니다.”
세존께서는 그의 며느리 수자따를 부르셨다.
“수자따여, 이리 오너라.”
“예, 세존이시여.”라고 수자따는 세존께 대답하고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수자따에게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수자따여, 사람에게는 일곱 부류의 아내가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 살인자와 같은 아내, 도둑과 같은 아내, 악덕 안주인과 같은 아내, 어머니와 같은 아내, 누이와 같은 아내, 친구와 같은 아내, 하녀와 같은 아내이다.
수자따여, 이러한 일곱 부류의 아내 가운데 그대는 어떤 부류의 아내인가?”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해주신 그 뜻을 상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세존께서 제게 상세하게 설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해주신 그 뜻을 자세하게 알 것입니다.”
“수자따여, 그렇다면 이제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존이시여.”라고 수자따는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타락한 마음을 가졌고 남편의 손해를 바라며 다른 남자들에 홀리고 남편을 무시하며 돈으로 사왔고 살인에 호기심이 있는 이러한 아내는 살인자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기술과 장사와 농사를 열심히 하여 자기 남편이 번 재산을 적은 것일지라도 가져가고자 하는 이러한 아내는 도둑이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일을 하려하지 않고 게으르고 많이 먹고 욕설을 하고 고약하고 나쁜 말을 해대고 부지런한 자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러한 아내는 악덕 안주인이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항상 남편의 이로움을 바라고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보호하듯 남편을 보호하며 그의 재산을 잘 모아서 보호하는 이러한 아내는 어머니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마치 손아래 여동생이 손위 언니한테 하듯이 자신의 남편을 존중하며 양심을 가져 남편이 바라는 바대로 하는 이러한 아내는 누이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마치 친구가 오랜 만에 온 친구에게 하듯이 남편을 보고 기뻐하고 좋은 가문의 태생이며 계를 지키고 남편에 헌신하는 이러한 아내는 친구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몽둥이를 잡고 공격하면서 겁을 준다하더라도 성내지 않고 고요하며 마음이 타락하지 않고 잘 견디며 화내지 않고 남편이 바라는 바대로 하는 이러한 아내는 하녀라고도 불리고 아내라고도 불린다.
여기 아내는 살인자라고도 불리고 도둑이라고도, 악덕 안주인이라고도 불린다. 그녀는 계행이 나쁘고 말이 거칠고 존경받지 못하나니 몸이 무너지면 지옥으로 간다.
여기 아내는 어머니라고 불리고 누이라고도 불리고 친구라고도 불리고 하녀라고도 불린다. 그녀는 계행에 굳게 서고 오랜 세월 몸과 말과 마음을 잘 단속하여 몸이 무너지면 선처로 간다.
수자따여, 이러한 일곱 부류의 아내 가운데 그대는 어떤 부류의 아내인가?”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오늘부터 저를 남편의 하녀와 같은 아내라고 여겨주십시오.”
kodhanasuttaṃ (AN 7.64-화난 사람 경)
64.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敵)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일곱 가지 법이 있다. 어떤 일곱 가지인가?
여기,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의 용모가 나빠지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자기 적의 아름다운 용모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목욕하고, 향수를 뿌리고, 머리와 수염을 깎고, 흰옷을 입더라도 화에 억눌린 그의 용모는 나빠진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첫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이 잠을 잘 못자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자기 적이 행복하게 잠드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모직 양탄자, 흰색의 모직 양탄자, 꽃무늬 양탄자, 까달리 사슴 가죽으로 만든 최상의 모포, 차양, 양면이 붉은 베개가 있는 소파에서 자더라도 화에 억눌린 그는 잠을 잘 못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두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에게 많은 이익이 생기지 않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자기 적에게 많은 이익이 생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손해 되는 것을 얻고서도 ‘나에게 이익되는 것을 얻었다.’라고 생각하고, 이익되는 것을 얻고서도 ‘나에게 손해 되는 것을 얻었다.’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서로 반대되어 얻어진 이 법들은 오랫동안 불익과 괴로움으로 이끈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세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이 부자가 되지 않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이 부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을 흘렸고 법과 함께하고 법의 실천으로 얻은 그의 재물들을 왕이 모두 왕의 창고에 들여놓는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네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이 명성 있는 자가 되지 않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이 명성 있는 자가 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얻은 명성이 그에게서 사라져버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다섯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이 친구가 없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이 친구가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친구들과 동료들과 친척들과 가족들도 그를 멀리하고 떠나버린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여섯 번째 법이다.
다시,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에게 ‘참으로 이 사람이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기를!’이라고 원한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적은 그의 적이 좋은 곳에 가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비구들이여, 화를 내고 화에 억눌리고 화에 정복되면,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한다. 그는 화에 압도되어 몸으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말로 나쁜 행위를 하고, 마음으로 나쁜 행위를 한 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난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을 기쁘게 하는 일곱 번째 법이다.
이것이, 비구들이여, 화난 여자나 남자에게 찾아오는, 적에게 도움이 되고 적에게 기쁘게 하는 일곱 가지 법이다."
화난 사람은 용모가 나쁘고, 편히 잠자지 못한다.
이익을 얻으도 손해가 되어 버린다.
화난 사람은 그것 때문에 몸과 말로 해친 뒤에
화에 억눌린 사람은 재산과 아내를 잃는다.
화가 나서 들뜬 사람은 명성을 잃는다.
우호적인 친척과 친구들도 화난 사람을 떠나버린다.
화는 손해의 원인이고, 화는 마음을 흔든다.
안에서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을 사람은 알지 못한다.
화난 자는 이익을 알지 못하고,
화난 자는 법을 보지 못한다.
화가 사람을 이길 때는
장님처럼 어둠만이 있다.
화난 자는 하기 쉬운 것을 부수듯이
하기 어려운 것도 부수어 버리고
나중에 그가 화에서 벗어났을 때,
불이 덴 사람처럼 괴로워하면서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
연기를 가진 불이 연기를 뿜어내듯이.
화가 뻗어나올 때, 그것 때문에 젊은이가 화를 내면
부끄러운 줄 아는 힘도 없을 것이고, 뉘우칠 줄 아는 힘도 없을 것이고,
말씀도 존경도 없다. 화에 억눌린 자에게는 어떠한 등불도 없다(의지할 섬도 없다).
후회를 부르는 업들은 법으로부터 멀다.
그것을 말할테니 말하는 그대로 그것을 들어라.
화난 자는 아버지를 해치고, 화난 자는 자기의 어머니도 해친다.
화난 자는 바라문을 해치고, 화난 자는 범부도 해친다.
어머니가 키워주고 돌보아주셔서 이 세상을 보게 되지만
하지만, 화난 범부는 생명을 보전해 준 어머니도 해친다.
자신에 의해서 비교하는 중생들은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다.
하지만, 다양한 것들에 혼미해진 화난 범부는 자신을 해친다.
칼로 자신을 해치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독을 마신다.
줄에 묶여서 죽고, 산의 협곡에서 떨어져 죽는다.
화난 자는 중생을 죽이고 자신을 죽이는 업들을 짓고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파멸을 부른다.
이처럼 분노의 모습을 한 마라의 사슬이
동굴(심장)에 누워있다.
지혜와 정진과 견해로써 그것을 길들여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
현명한 자는 그처럼 불선(不善)을 잘라내야 한다.
그런 법들을 닦아야 한다.
우리의 추한 모습을 보일지 말라.
화에서 벗어나고, 근심에서 벗어나고,
탐욕에서 벗어나고, 질투에서 벗어나서
화를 길들이고 제거하여
번뇌없이 완전히 열반에 들어야 한다.
제6장 설명하지 않음 품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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