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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상윳따 - 제2장 전법륜 품(SN56:11-SN56:20. Dhammacakkapavattana-vagga)

실론섬 2014. 9. 7. 13:40

 

제2장 전법륜 품
Dhammacakkapavattana-vagga

dhammacakkappavattanasuttaṃ (SN 56.11-전법륜(轉法輪) 경)
108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무셨다.
거기에서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극단을 멀리해야 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쾌락에 관련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탐닉은 하천하고, 비천하고, 범속하고, 거룩하지 못하고, 이익이 되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고행의 탐닉은 고통스럽고, 거룩하지 못하고, 이익이 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멀리하여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다. 이러한 중도는 것은 눈을 만들고, 지혜(智)를 만들고, 평안을 만들고, 철저한 앎(證智), 완전한 깨달음(正覺),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눈을 만들고, 지혜(智)를 만들고, 평안(寂靜.적정)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中道)인가? 오직 이것(바로 이 여덟가지의 성스러운 길이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삶(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도.道)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고, 평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여래가 깨달은 중도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은 이와의 만남은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이와의 헤어짐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온[五取蘊.오취온]은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즉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게 하는 갈애로서, 기쁨과 탐냄과 더불어 여기저기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있음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있지 않음에 대한 갈애)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즉 갈애로부터의 남김없는 탐냄의 떠남,소멸, 포기, 버림, 해탈,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가 있다. 오직 이것,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의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기고, 지혜[智]가 생기고, 혜[慧]가 생기고, 밝음[明]이 생기고, 광명[光]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완전히 알아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완전히 알았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닦아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는 닦았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혜가 생기고, 밝음이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세 번 굴린 열두 형태[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지(知)와 견(見)의 아주 청정함이 없었던 때까지는, 비구들이여, 나는 하늘(神)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인간의 세계, 하늘사람이 사는 세계에 대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비구들이여, 나에게 세 번 굴린 열두형태의 이런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지(知)와 견(見)의 아주 청정함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나는 하늘이 사는 세계, 마라가 사는 세계, 브라흐마가 사는 세계, 사문과 바라문이 사는 인간의 세계, 하늘사람이 사는 세계에 대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혜(智)와 봄(見)이 생겼다.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이것이 태어남의 끝이다), 이 이후의 있음은 없다.(이제 다음의 존재는 없다)’라고."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함께하는 다섯 비구는 즐거워하며 세존의 말씀을 기뻐했다.

 

또한 이러한 설법이 설해기고 있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티끌이 없고 때가 없는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일어나는 법은 그 무엇이건 모두 소멸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이와 같이 세존에 의해 법륜(法輪.법의 바퀴)이 굴려졌을 때, 땅의 신(bhumma deva)들이 소리쳤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세존께서 굴리신 이 법륜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神)이나 마라나 브라흐마등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되돌릴 수 없다).'라고. 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왕천의 신(catumaharajika deva)들이 소리쳤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세존께서 굴리신 이 법륜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마라나 브라흐마등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tavatimsa deva)들이 ··· 야마천의 신(yama deva)들이 ··· 도솔천의 신(tusita deva)들이 ··· 화락천의 신(nimmanarati deva)들이 ··· 타화자재천의 신(paranimmitavasavatti deva)들이 ··· 범중천의 신(brahmakayika deva)들이 소리쳤다. '바라나시의 이시빠따나에 있는 사슴동산에서 세존께서 굴리신 이 법륜은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하늘이나 마라나 브라흐마등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이렇게 그 순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범천의 세상까지 소리가 퍼져나갔다. 일만 세계가 흔들렸고, 거세게 흔들렸고,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신들의 신통력을 능가하는 한량없고 밝은 빛이 세상에 나타났다.

 

그때 세존은 이런 감흥을 읊었다.

“벗들이여, 참으로 꼰단냐는 알았다. 벗들이여, 참으로 꼰단냐는 알았다.”라고.

이렇게 꼰단냐 존자에게 ‘안냐시꼰단냐’라는 이런 이름이 생겼다.

 

tathāgatasuttaṃ (SN 56.12-여래(如來) 경)
1082.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철저히 알아져야(알려져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는 철저히 알아졌다(알려졌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는 닦아야 한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여래에게 ‘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는 닦았다.’라는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법들에 대한 눈이 생겼다. 지혜가 생겼다. 혜가 생겼다. 밝음이 생겼다. 광명이 생겼다."

 

khandhasuttam (SN 56.13-무더기 경)
1083.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다섯 가지 집착에 의한 무더기[五取蘊]라는 것이 그 대답이니, 그것은 물질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 인식의 무더기, 형성의 무더기, 의식의 무더기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함, 떠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해탈,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니[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ajjhattikāyatanasuttam (SN 56.14-안의 감각장소 경)

1084. “비구들이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가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인가?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六入處]라는 것이 그 대답이니, 그것은 눈의 감각장소, 귀의 감각장소, 코의 감각장소, 혀의 감각장소, 몸의 감각장소, 마음의  감각장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사라지고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바른 길[八支聖道]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 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라고 불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thamadhāranasuttam (SN 56.15-간직함 경1)

1085.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괴로움은 세존께서 설하신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의 일어남은 세존께서 설하신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은 세존께서 설하신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세존께서 설하신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세존께서 설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는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하다. 비구여, 괴로움은 내가 설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괴로움의 일어남은 내가 설한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은 내가 설한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내가 설한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비구여, 이와 같이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dutiyadhāranasuttam (SN 56.16-간직함 경2)
1086.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간직하고 있는가?”

이렇게 말씀하시자 어떤 비구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설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러면 그대는 어떻게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는가?”
"세존이시여, 저는 괴로움은 세존께서 설하신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문 고따마가 설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나는 이런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버리고 다른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괴로움의 일어남은 세존께서 설하신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 세존이시여, 괴로움의 소멸은 세존께서 설하신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 세존이시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세존께서 설하신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런데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고따마가 설한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나는 이런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버리고 다른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세존께서 설하신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비구여. 비구여, 그대는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잘 간직하고 있으니 훌륭하다. 비구여, 괴로움은 내가 설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 한다. 비구여, 그런데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문 고따마가 설한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나는 이런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버리고 다른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구여, 괴로움의 일어남은 내가 설한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 비구여, 괴로움의 소멸은 내가 설한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 비구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은 내가 설한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라고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비구여, 그런데 어떤 사문이든 바라문이든 그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문 고따마가 설한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다. 나는 이런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버리고 다른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를 천명할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구여, 이와 같이 내가 설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그대는 잘 간직하여야 한다.


비구들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avijjāsuttaṃ (SN 56.17-무명 경)

1087.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무명, 무명’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이 무명이고 어떤 점에서 무명에 속한 것입니까?”

“비구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대한 무지. 이것이 무명이라고 불린다. 이런 점에서 무명에 속한 것이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vijjāsuttaṃ (SN 56.18-명지(明) 경)

1088. 그 무렵  어떤 비구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경의를 표하고 난 뒤에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그 비구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명지, 명지’이라고 불립니다. 무엇이 명지이고, 어떤 점에서 명지에 속한 것입니까?”

“비구여,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지혜. 이것이 명지이라고 불린다. 이런 점에서 명지에 속한 것이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saṅkāsanasuttam (SN 56.19-뜻의 함축 경)

1089.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나는 선언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어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현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뜻(의미)이 함축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나는 선언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어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현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나는 선언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어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현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뜻(의미)이 함축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고 나는 선언하였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여기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어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표현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tathasuttam (SN 56.20-진실함 경)

1090. “비구들이여, 네 가지 진실함, 거짓이 아님,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님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이것은 진실하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는 이것은 진실하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는 이것은 진실하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이것은 진실하다. 이것은 거짓이 아니다. 이것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진실함, 거짓이 아님,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님이 있다.


비구여, 그러므로 그대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제2장 전법륜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