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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상윳따 - 진리 상윳따(Sacca-saṁyutta) - 제1장 삼매 품 Samādhi-vagga(SN56:1-SN56:10)

실론섬 2014. 9. 7. 12:27

                   

제56상윳따 진리 상윳따  

Sacca-saṁyutta

제1장 삼매 품
Samādhi-vagga

samādhisuttaṃ (SN 56.1-삼매 경)
1071. 사왓티에서 설해짐.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삼매를 닦아야 한다. 삼매를 닦은 비구는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알아 차리는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린다(꿰뚫어 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ṭisallānasuttaṃ (SN 56.2-홀로 머묾 경)
1072. “비구들이여, 홀로 머묾에서 닦아라.
비구들이여, 홀로 머무는(홀로 머묾에 집중하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린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는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린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린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ṭhamakulaputtasuttaṃ (SN 56.3-좋은 가문의 아들 경1)
1073.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기 위해서 출가하였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할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리기 위해서 출가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기 위해서 출가한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거룩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한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 철저히 차리기 위해서 출가하였다. 미래에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할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기 위해서 출가할 것이다. 현재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이러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 차리기 위해서 출가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dutiyakulaputtasuttaṃ (SN 56.4-좋은 가문의 아들 경2)
1074.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하였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릴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한다.

 

무엇이 넷인가?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린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하였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릴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에 바르게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 출가하여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알아차리는 좋은 가문의 아들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실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paṭhamasamaṇabrāhmaṇasuttaṃ (SN 56.5-사문∙바라문 경1)
1075.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있는 그대로 깨달은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았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있는 그대로 깨달을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 있는 그대로 깨닫는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닫는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있는 그대로 깨달은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았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있는 그대로 깨달을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달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 있는 그대로 깨닫는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깨닫는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dutiyasamaṇabrāhmaṇasuttaṃ (SN 56.6-사문∙바라문 경2)
1076.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할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한다.

 

무엇이 넷인가? 괴로움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일어남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과거에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한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미래에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할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할 것이다. 비구들이여, 현재 있는 그대로 깨달음을 선언하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모두 있는 그대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의 깨달음을 선언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vitakkasuttaṃ (SN 56.7-생각[尋] 경)

1077.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 성냄에 대한 생각, 해코지에 대한 생각과 같은 삿되고 선하지 않은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생각들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이 아니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편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생각을 일으킬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길이다.’라고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생각들은 이익을 주고,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cintasuttaṃ (SN 56.8-사유 경)
1078.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러한 삿되고 선하지 않은 것을 사유하지 말아야 한다. 즉 ‘세상은 영원하다.’라거나, ‘세상은 영원하지 않다.’라거나, ‘세상은 유한하다.’라거나 ‘세상은 무한하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라거나,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것을 사유하는 것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이 아니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편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사유할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사유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사유해야 한다.‘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사유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런 것을 사유하는 것은 이익을 주고,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viggāhikakathāsuttaṃ (SN 56.9-논쟁의 말 경)
1079. “비구들이여, 논쟁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즉 ‘그대는 이 법과 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이 법과 율을 안다.’,  ‘어떻게 그대가 이 법과 율을 알것인가?’,  ‘그대는 삿된 길을 닦는 자이고(잘못 실천하는 자이고), 나는 바른 길을 닦는 자이다.’,  ‘나의 말은 일관되지만 그대의 말은 일관되지 않는다.’,  ‘그대는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을 뒤에 말했고 뒤에 말해야 하는 것을 먼저 말했다.’,  ‘그대가 주장해 오던 것은 논파되었다.’,  ‘나는 그대의 교설의 허점을 지적했다. 그대는 패했다. 혹은 만약 할 수 있다면 지금 설명해보라.’라고.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말들은 이익을 주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이 아니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편안)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말을 할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말들은 참으로 선함을 주고,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tiracchānakathāsuttaṃ (SN 56.10-하챦은 이야기 경)
1080.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러한 여러 가지 하챦은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된다. 즉 국왕에 대한 이야기, 도둑에 대한 이야기, 대신에 대한 이야기, 군대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상에 대한 이야기, 화환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탈 것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성읍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도로에 대한 이야기, 우물에 대한 이야기,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유령 귀신에 대한 이야기), 잡다한 이야기, 세상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바다에 대한 이야기, (존재와 비존재에 대해) 이렇다거나 이렇지 않다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이야기들은 참으로 이익을 주지 못하고, 청정범행의 시작이 아니고, 염오로 인도하지 못하고, 탐욕의 떠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편안)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철저한 앎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챦은(쓸데없는) 이야기(tiracchana-katha)'란 [해탈의] 인도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에 천상과 해탈의 길과는 평행선을 긋게 되는 이야기를 말한다.(SA.iii.294)  
*'우물에 대한 이야기'는 kumbhatthana-katha(항아리가 있는 곳의 이야기)를 옮긴 것인데 주석서에서 "이것은 물가에 서서 하는 이야기나 항아리로 물긷는 하녀들의 이야기를 말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SA.iii.295)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이야기 할 때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이야기는 참으로 이익을 주고, 청정범행의 시작이고, 염오로, 탐욕의 떠남으로, 소멸로, 고요함으로, 철저한 앎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그대들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닦아야 한다."

 

 

제1장 삼매 품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