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불교는 자비의 종교인가 해탈의 종교인가?

실론섬 2014. 12. 10. 16:49

불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다음과 같다. 공자님이나 마호멧트나 예수가 와서 물어도 이렇게 대답하면 틀림이 없다.


Sabbapapassa akaranam      일체의 악한 행동을 저지르지 않고

kusalassa upasampada        착한 공덕(善)을 받들어 행하며

sacittapariyodapanam          자기의 마음을 닦는 것(청정하게 하는 것)

etam buddhana sasanam      이것이 모든 부처님들의 가르침이다


이를 한자로는 칠불통계게(七佛通戒偈)라고 한다. (1)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2)선행을 한다. (3)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세 항목 속에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압축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고 (1)과(2)는 도덕/윤리적인 문제이며, (3)은 종교의 차원임은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善)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일만을 놓고 본다면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모든 성인들과 종교들의 일치된 가르침이다. 그런데 왜 유독 불교는 이것을 과거 일곱 부처님들의 공통된 가르침이며 이것이 바로 불교라고 만천하에 큰 소리로 천명을 했을까?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행위가 그리 쉬운 일일까? 일단 그 실행을 놓고 생각해 본다면 이처럼 어려운 문제도 다시 없을 것이다. 또한 종교를 믿는다는 신앙인이 악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고 선을 행할만한 힘과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면 그 신앙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연기법 위에 있다. 연기법은 인과의 법칙이다. 인과의 법칙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가르침이다. 인과는 원인(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는 것이다. 조건이 소멸되면 원인도 소멸된다는 것이다. 불교는 우리가 신.구.의로 의도적으로 행하는 인과율에 의해서 윤회를 하며 세세토록 유전한다고 말한다. 의도적 행위는 악(불선업)악이냐 선(선업)이냐 하는 두 가지 행위만 있다. 행위의 주체도 자신이며 그 결과도 자신이 받는다는 것이다. 절대신이나 조물주가 우리들이 행한 선과 악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책임지거나 사면해주거나 용서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이를 자업자득 인과응보라고 한다. 이것이 타종교와 불교를 가름짓는 잣대이다. 


불교의 두 가지 측면

불교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윤리/도덕적인 측면과 심리학적(철학적.교리적) 측면이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절대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분리를 한다면 못쓰는 동전처럼 불교도 절름발이가 되거나 외도들의 사상만도 못한 세치 혀 끝의 희론으로 전락하게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들이 신.구.의 세 가지로 행하는 의도적인 행위는 악이냐 선이냐 하는 것 딱두 가지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로 조건지워진 것(원인)은 반드시 결과를 가져온다. 이를 도덕적 인과율이며 선인선과 악인악과라고 한다. 설사 화두를 들고 참선을 하더라도 이 행위는 악이냐 선이냐로 구분이 된다. 그래서 팔정도에서는 올바른 정견과 올바른 노력과 삼매와 마음챙김이 있는 것이다. 즉 올바르게 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중생들이 출가를 하든 세간사 삶을 살든 행위를 하는한은 이러한 도덕적 인과율에 의한 과보에서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다 . 설사 붓다라도 벗어나고 도망치고 회피할 수 없고 남에게 떠 넘길 수 없고 남이 나 대신에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불교는 연기법이며 도덕적 인과율이다. 팔정도란 올바른 길이라는 뜻이다. 올바른 길이기에 선한 행위이다. 또한 팔정도는 실천의 길이다. 머리속으로만 생각한다고 결과가 도출되는 그런 가르침이 아니다. 경전은 이러한 도덕적 인과율의 가르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붓다는 악을 멀리하고 선한 행위를 하라고 45년간 가르침을 펼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오계나 10계나 율은 화두나 명상의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악이냐 선이냐를 판가름 짓는 잣대이고 도덕적 행위에 대한 인과율을 엄중하게 훈계하여 놓은 것이다. 오근 오력 사선정 사여의족 사성제 칠각지 팔정도등등 모든 수행의 가르침이 모두다 악과 선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음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지만 불교는 인과율이다. 그것이 가르침이다


절름발이 불교를 하지 말자

한국불교는 선불교의 영향으로 인하여 이러한 도덕적 인과율을 너무나 간과하고 무시하는 측면이 강하다. 불교는 인과율을 가르치는 것인데 오직 성불만 하면 된다는 식이다. 산 속에서 몇년이고 몇 십년이고 화두들고 있으면 된다고 가르친다. 원인도 없는데 결과만 바라보는 즉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만 평생 기다리다 재가자들의 금쪽같은 공양밥만 축내고 인생을 끝내는 꼴이다. 화두들고 평생을 산 속에 있는게 선한 행위일까 악한 행위일까? 각자의 판단의 몫이지만 결코 선한 행위는 아니다. 선한 행위가 없는데 선한 행위의 결과인 성불이 획득될리가 없는 것이다. 


자비와 보시라는 선한 행위에 의해서 선한 결과가 나오고 이러한 선한 결과는 결과적으로 스스로를 높은 삶의 단계로 끌어 올리고 향기롭게 하며 이러한 행복한 삶의 결과로 해탈과 열반이 온다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게 한국불교이다. 원인은 짓지도 않으면서 결과만 바라고 있다. 모든 교리나 수행을 관념이나 화석화된 고정된 사견속에 매몰되어 있다. 올바른 행위의 결과에 의해서 올바르게 체득한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결과를 얻어 세 치 혀로 뱉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높은 경지에 있는 큰 스님이라도 언행이 일치가 되질 않는 것이다. 중국 조사들의 말씀이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시 되고 종정 스님이나 큰 스님들의 법어라는 것이 케케묵은 조사들의 말씀들을 주워다 오는 한심한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불교는 행으로 하는게 아니라 관념으로만 하기 때문이다.


엉터리 재가자들이 망치는 불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국불교를 망친 것은 수행승의 잘못보다는 재가자들의 잘못이 더 크다. 엉터리 재가자들이 엉터리 불교를 만든 것이다. 이기심으로 가득찬 기복불교에다가 개인의 영달과 안위만을 위한 기도등이 판을 치는 이유는 결코 수행승의 잘못만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재가자들이 깨끗하면 불교는 당연히 청정해 진다. 붓다 시절의 코삼비 비구의 사건은 모든 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해 주고 있다. 남방권의 불교가 그나마 청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재가자들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행승들이 수행승답지 못하면 모든 공양을 끊어 버린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수행승다운 청정함을 유지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한국은 곳곳에서 불교의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가 높다. 하지만 전부다 수행승 잘못으로 돌려 버린다. 조계종이 잘못되었다고 소리치지만 조계사에 가보면 손바닥 비비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각 사찰에는 불교기는 게양하지 않으면서도 '00기도'라고 광고하는 현수막이 365일 떨어질 날이 없다. 수행승이 청정함해야 한다고 큰 소리로 요구하는 재가자들 중에서 과연 몇명이나 인과의 법칙을 알고 관념적인불교가 아니라 행의 불교를 하는가? 과연 몇명이나 정기적으로 사찰에 가며 아무런 조건없이 보시를하고 있는가? 어느 누가 가족들을 불자로 만들려고 노력하며 어느 누가 일요일날 골프장이나 낚시터 대신에 사찰에 부처님 뵈러 가는가? 다시말하지만 재가자가 청정하면 불교도 청정해지고 자연스럽게 수행승들도 청정해 진다. 그것이 인과의 법칙이다.


초기불교는 관념의 불교가 아니다

한국의 불교는 부처님의 불교도 아니고 인도의불교도 아니다. 한국의 불교는 중국불교의 아류에 불과할 뿐이다. 그것도 도교와 불교가 만나서 탄생한 사생아인 선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이건 절대로 부처님의 불교가 아니다. 불교 믿는다고 부처님 믿는다고 말하기보다는 6대조사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좀더 심하게 말하면 한국불교는 혜능교요 조사교이며 무당교일 뿐이다.


초기불교가 한국에 도입된지 십수년이 되었다. 아직은 초기불교가 한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기에는 여러가지 여건이 여의치 않지만 나날이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는 불자들이 늘어나는 것은 고무적인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한국의 초기불교는 첫 도입부터가 크게 잘못된 것 같다. 붓다의 가르침이 올바르게 전달되기 보다는 위빠사나니 사띠니 하는 미얀마식 수행법이 앞장서서 도입되고 너도나도 위빠사나 또는 사띠 수행에 매달린다. 그리고 초기불교 국가에서 공부하고 수행한 사람들이 극히 드물다 보니 실제의 삶 속에서의 지혜와 실천행을 옮기는 인과의 불교라는 가르침보다는 그저 경전으로 책으로 수박 겉햩기식의 불교가 초기불교라는 허울을 쓰고 설친다. 


경전만 대승경전에서 초기경전으로 바꾸면 전부다 초기불자인냥 행세하는 얼토당토 않은 행태까지 나타나고 있다. 경전이 전승되어 온 시간이 2500년이 넘는다. 붓다 시대와 지금은 각 나라나 사회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 그러기에 불교가 그 사회에 어떻게 녹아있고 어떻게 청정하게 변해왔는지를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해 봐야 한다. 이것은 책이나 관광이나 베낭여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초기경전 몇권 읽었다고 재가자들이 수행승처럼 행동하고 잘난척 으시대는 모습은 가관이 아닐 수 없다. 오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해탈이니 열반이니 허튼 소리들을 하고 있다. 경전에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란다. 한마디로 관념으로만 사견으로만 초기불교를 보는 외눈박이다. 초기불교 국가에는 와보지도 않았으면서 와 본 사람보다 더 잘 아는 것처럼 큰소리 친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봤기 때문이란다. 보시도 없고 헌공도 없고 자비도 없고 오직 열반만이 초기불교라고 한다. 경전에 열반 이야기를 해 놓았기 때문이란다. 오계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되고 열반만 알면 된다고 한다. 열반이 불교의 목적이기 때문이란다. 


진정한 초기불자가 되자

다시말하지만 불교는 인과이다. 인과는 행이다. 행이 어려운게 아니다. 오계중에 하나라도, 하루라도 , 일주일이라도, 한달이라도 지켜 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면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동전 한닢을 주지 못한다면 두 손 모아 마음으로 '다음생에는 좋은 곳에 태어나길..'이라고 기도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나만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보다는 '모두다 잘되길 모두다 행복하길...'이라고 기도하는 것이 불교이다.


경전에는 말룽카뿟따가 10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지 않기 때문에 붓다를 비난하는 것과 그리고 신통력을 보이지 않기에 믿을 수 없다는 어느 바라문에 대한 붓다의 엄중한 훈계가 실려있다. 붓다는 이들에게 '내가 언제 너에게 불교를 믿으면 10가지에 대해서 대답을 해 준다고 했느냐? 내가 언제 신통이나 기적을 보여준다고 했느냐?' 하면서 꾸짖는다. 그러면서 붓다는 불교의 진정한 신통이나 기적이란 바로 "육신통 같은 신통력의 보여줌이 아니라 올바른 가르침'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배움으로 인하여 사람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것이 바로 불교의 진정한 가치이며 기적이라는 것이다.


불교를 믿으면서 내 삶이나 인생이 바뀌지 않는다면 이건 불교를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복을 바란다면 타종교나 무당 찾아가는게 더 빠르다. 못된 짓만 하다가 천국에 태어나고 싶으면 믿기만 하면 죄를 용서해 준다는 기독교 믿는게 훨씬 인생에 도움이 된다. 불교 믿는다고 괜히 허송세월 아까운 돈 쓸 필요 없다. 불교는 자업자득의 종교이다. 행에 따른 결과를 이야기하는 인과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타종교 믿는다고 선행을 못하고 이웃에 사랑을 못 베푸는게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과 봉사가 어떻게 불교의 자비나 보시와 다른지를 모른다면 지금부터라도 타종교로 개종하는게 남은 생이라도 편안하게 사는 방법이다. 


결론적으로 초기경전만 들고 있다고 초기불교를 믿거나 초기불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과를 믿으며 내 마음을 바꾸고 내 삶을 바꾸고 내 인생을 바꾸어야 진정한 초기불자가 된다는 것이다. 열반이니 해탈이니 그런것을 믿기 보다는 오늘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오계중의 하나라도 단 하루라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는 마음속에 붓다의 음성이 더욱더 가까이 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