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자의 식생활과 현대의 웰빙
__사찰음식의 보급과 관련하여(印度哲學 제38집)__
이자랑/ 동국대학교 HK 연구교수. jaranglee@hanmail.net
Ⅰ 서론.
Ⅱ 평범한 음식이 修行食.
Ⅲ 발우에 담긴 음식의 의미.
Ⅳ 식생활에 나타나는 절제.
Ⅴ 결론.
Ⅰ. 서론
최근 들어 템플스테이와 더불어 ‘사찰음식’이란 말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특징으로 거론되고 있다. 두 가지 모두 국가의 지원을 받아 조계종단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사업이 추진되고 있으며, 웰빙을 지향하는 현대인들의 취향과도 맞아떨어져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템플스테이가 사찰의 일상을 경험하며 마음의 휴식과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는 효과를 지닌다면, 사찰음식은 자연에 가까운 먹거리를 통한 건강의 증대 효과를 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사찰음식은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주는 탓인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나날이 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걸식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했던 인도불교에서 본다면 ‘사찰음식’이라는 용어는 생소하지만, 사찰에서 음식 재료의 공급이나 조리가 이루어졌던 동아시아의 불교적 전통에서 본다면 그리 낯설지 않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찰음식의 개념 정의는아직 명확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1) 다만 관련 서적들의 설명을 종합해 본다면, ‘사찰에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먹는 음식’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기사에서 ‘대체 어느 절에서 이렇게 먹나?’라는 제목으로 그 문제점을 표현했듯이,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게 되는 사찰음식은 출가자들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내용물도 호화스럽다.
또한 사찰음식을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나 주된 관심사는 내용물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한 마디로 현재 사찰음식이라는 이름하에 나타나는 여러 상업화 현상 내지 사람들의 인식을보면, 사찰음식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의아할 뿐이다. 물론 사찰음식이 현대인들의 식생활에 주고 있는 긍정적인 영향 내지 불교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상당한 포교 효과가 있다는 점, 나아가 한국의 대표적 불교문화로 세계에 알려지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사찰음식의 보급이나 유행에 찬물을 끼얹을 생각은 없다. 하지만 출가자들의 식생활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망각한 사찰음식은 그저 현대인들이 ‘잘 먹고 잘사는’ 정도의 의미로 신중하지 못하게 언급하는 고급스러운 하나의 웰빙 문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이 출가자의 삶을 오해하여 여러 가지 부작용을 양산해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논문에서는 율장을 중심으로 출가자의 식생활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특징을 검토하며 그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사찰음식은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된 후 자급자족하고 一日三食을 실천하게 되면서 나타난 것으로, 乞食(걸식)을 통해 출가자의 식생활을 해결했던 인도에는 사찰음식이라 부를 만한 사찰 특유의 음식이나 조리법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재가자가 보시해 주는 음식이 곧 출가자가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의 전부였던 것이다.
따라서 고대인도승가의 규율집인 율장을 중심으로 사찰음식의 의의를 고찰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사찰음식을 ‘사찰에서 수행 정진하는 스님들이 먹는 음식’으로 정의하는 것에 이론이 없다면, 사찰음식의 본질은 ‘수행 정진’과 관련해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에서 사찰음식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고 또 어떻게 발전했는가, 그 특수성을 이해하는 것도 물론 사찰음식을 알기 위한 중요한 요소이지만, 이에 앞서 원래 수행 정진하는 출가자에게 있어 음식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또한 어떤 자세로 음식을 섭취 했는가, 그 본래 입장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사찰음식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율장에 나타나는 식생활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이 문제를 고찰하고, 나아가 출가자의 식생활이 현대의 진정한 웰빙 문화에 주어야 할 바람직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평범한 음식이 修行食
불교승가의 정식구성원인 비구․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승가로부터 具足戒羯磨(구족계갈마)를 받아야 한다. 구족계갈마가 끝나면 이어서구족계 희망자에게 四依, 즉 불교의 출가출가자가 의식주 전반에 걸쳐 지켜야 할 네 가지 원칙을 반드시 설해주고 그 실천을 인식 시켜야 한다. 이는 출가생활이 안락하다는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입단한 자가 막상 입단 후 녹록치 못한 승가생활에 불만을 품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래 출가자의 의식주 생활은 乞食, 糞掃衣, 樹下坐, 陳棄藥을 원칙으로 한 상당히 고된 것임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다. 이 사의 가운데 식생활과 관련된 원칙이 바로 ‘걸식’이다. 걸식은 鉢盂(patta)라는 그릇을 들고 마을로 내려가 집들을 돌며 음식을 보시 받아 식생활을 해결하는 것을 말한다. 걸식의 원어인 ‘삔다빠따(piṇḍapāta)’는 걸식이라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하고, 걸식에 의해 얻은 음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불교승가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인도의 출가자들은 원칙적으로 이와 같이 걸식을 통해 식생활을 해결했으며, 불교 역시 이런 기존 전통의 영향을 받아 걸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걸식은 하면서도 발우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음식을 받는 종교가들도 있었는데, 불교에서는 三衣一鉢이라 하여 항상 발우를 소지하도록 했다. 발우는 산스끄리뜨어 빠뜨라(pātra)의 음사어인 鉢多羅의 鉢과 그릇을 의미하는 盂를 합한 말로 출가자의 걸식용 그릇을 일컫는다. 응기(應器) 혹은 응량기(應量器)로 의역하기도 한다. 이른 아침 출가자가 발우를 들고 문 앞에 서 있으면 시주는 발우 안 중앙에 쌀로 지은 밥(odana)을 넣고 그 위에 스프(sūpa)를 끼얹어준다. 그리고 주변에 야채 등을 조린 반찬(vyañjana)을 담아준다. 발우 없이 음식을 받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발우 안에 담기는 음식, 이것이 바로 출가자의 식사이자 사찰음식의 기원인 셈이다.
때로는 請食(청식)이라 하여 재가신도가 특별히 준비한 초대식에 응하는 것도 허용되었지만, 걸식이든 청식이든 출가자의 식생활은 반드시 재가자의 보시로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출가자 스스로가 음식 재료를 구해 요리해서 먹는 일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 당시 인도의 종교가들 역시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생산 활동내지 음식의 조리 등을 하지 않고 오로지 재가자의 보시를 통해 식생활을 해결했는데, 고따마 붓다는 한층 더 이 원칙을 고수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불교의 경우에는 주인 없는 나무에서 떨어져 길가에 나뒹구는 과일 한 알조차도 재가자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면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하기 때문이다. 즉, 다음 조문이 이를 말해준다.
어떤 비구이든 주어지지 않은 음식물을 입에 넣는다면, 물과 이쑤시개를 제외하고 바일제이다.
이 조문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교수행자는 물과 이쑤시개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보시 받은 것이 아니라면 입에 넣어서는 안 된다. 단, 유행하는 곳의 상황이 불가피할 경우, 예를 들어 아무도 없는 산 속을 유행하고 있어 재가자로부터 음식 보시를 받을 수 없을 경우에는 주변에 있는 과실이나 감자 등을 집을 수 있다. 하지만 이때도 집어서 운반하는 것만이 허용된다. 즉, 집어서 운반하다 도중에 재가자를 만나면 그 앞에 떨어뜨려 그에게 줍게 한후 그로 하여금 다시 받는 방법으로 음식을 취해야 한다.
율장에 의하면 출가자는 재료를 얻어 와서 스스로 조리해도 안되며, 받은 음식물을 저장해 두어서도 안 된다. 음식물을 승가 안에 저장하는 內宿(anto vutthaṃ), 음식물을 승가 안에서 조리하는 內煮(anto pakkaṃ), 음식물을 비구 스스로 조리하는 自煮(sāmaṃpakkaṃ), 이 세 가지 행위가 모두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이는 음식을 마련하는 과정에 수반되는 갖가지 행위가 수행에 상당한 방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음식 재료를 구하고 요리하는 등의 행위는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하며, 특별한 재료나 요리법에 대한 집착 등으로 인해 갖가지 번뇌를 유발할 수 있다.
보존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인도처럼 더운 나라에서 음식을 남겨 두었다가 먹는 것은 음식이 상할까하는 우려로 잡념이 발생하여 수행에 집중하기 힘들며, 실제로 상한 음식을 먹어 탈이 나는 경우도 있게 된다. 따라서 걸식이나 청식을 통해서 얻은 음식은 그 날 오전 중에 모두 소비해야 하며 절대로 저장해 두었다가 먹어서는 안 된다. 바일제 제38조 ‘食殘宿食戒’에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어떤 비구이든 저장한 부드러운 음식이나 딱딱한 음식을 먹거나 씹는다면 바일제이다.
殘宿食(sannidhikāraka-bhojana)이란 식사하고 남은 음식을 그 다음날 먹으려고 하룻밤 보존해 둔 것을 말한다. 이 학처는 아난다의 화상인 벨랏타시사가 걸식에 가서 마른 밥을 받아와 보존해 두고 필요한 때에 물에 적셔 먹은 것을 계기로 제정되었다고 한다. 매일 걸식에 나가는 것을 번거롭게 여겨 음식을 저장한 것인데, 불필요한 음식물의 소유는 오히려 갖가지 번뇌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금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때 붓다는 특수한 사정이 있어 변두리 정사에서 음식 재료 등을 보관하거나 조리하는 것을 허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곳에서 죽을 끓이고 국을 만들고 고기를 자르는 등, 밤새 밖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수행을 방해하자 결국 다시 금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출가자들의 식생활은 오로지 재가신도들의 보시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수행식으로 불릴 만한 특별한 음식 재료도 조리법도 없었다. 재가자의 신심으로 보시되는 모든 먹거리가 출가자의 육체를 건강하게 유지하여 수행 정진할 수 있도록 해주는 훌륭한 음식이라 여겼던 것이다. 따라서 식재료나 요리 방법이라는 관점에서 출가자가 먹었던 음식의 특징을 찾는 것은 적어도 율장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의미하다. 그렇다면 식생활과 관련해서 율장에서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하, 발우에 담기게 되는 음식이 지니는 의미, 그리고 식생활 조문에 보이는 절제의 태도를 중심으로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Ⅲ. 발우에 담긴 음식의 의미
발우는 출가자의 식생활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도구이다. 한국의 불교승가에서는 지금도 밥그릇, 국그릇, 청수그릇, 찬그릇 등 모두 네 개의 발우를 사용하며 발우 공양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발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또한 발우 안에 담기는 음식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이미 몇몇 연구가 발우를 다루었으며, 이를 통해 상당 부분 그 의미가 밝혀졌다고 생각된다. 이들 연구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발우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발우가 ‘자기의 몸에 알맞도록 적당히 1일분의 양을 담는 그릇’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발우가 應量器라 한역되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재가신도가 발우에 담아준 주어진 양만을 섭취해야 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욕심 부릴 여지도 없이 적당히 1인분의 양을 담아 먹는 그릇으로서 발우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율장에 나타난 출가자들의 식생활을 보면 많든 적든 실제로 발우에 담긴 음식만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발우에 담긴 음식을 먹다가 많다고 여기면 남겨 다른 출가자에게 줄 수도 있고 또 버릴 수도 있다. 또한 자신의 발우에 담긴 음식이 부족하다고 여기면 다른 출가자가 殘食法을 하고 남긴 음식을 얼마든지 더 먹을 수도 있었다. 지금 사찰에서 하는 발우 공양을 보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 필요한 만큼 가져다 발우에 담아 먹기 때문에 발우가 자신의 적절한 양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율장의 이런 규정들은 수행 생활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체력 유지를 위해 가능하다면 자신의 양을 충분히 채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과식은 물론 엄격히 경계하지만, 특별히 소식을 권장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많든 적든 자신에게 ‘적당한 양’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재가자의 의지대로 채워지는 발우의 음식이 언제나 출가자 개개인이 그때그때 필요로 하는 적당한 양을 만족시켜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발우의 근본적인 의미를 단지 양적인 측면에서 찾는 것은 좀 부족한 느낌이 든다. 오히려 발우의 의미는 발우를 통해 받게 되는 음식에서 찾는 것이 보다 적절하지 않나 생각된다.
발우 사용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재가자로부터 첫 번째 공양을 받을 때 일어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빨리율 대품 대건도 에 의하면,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붓다는 주변의 나무들을 차례로 돌며 선정을 즐기고 있었다. 라자야따나라는 나무 아래서 삼매를 즐기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따뿟사(Ta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2명의 상인은 전생에 친척 관계에 있던 樹神으로부터 이 세상에 붓다가 출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붓다를 찾아가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저희들을 위해 보리죽과 꿀 경단을 받으시어 저희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라며 공양을 올리고 싶다는 뜻을 전한다. 이때 붓다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한다. “모든 여래는 손으로 받지 않는다. 나는 어떤〔그릇〕으로 보리죽과 꿀 경단을 받으면 좋을까.” 그러자 이때 사천왕이 천계로부터 돌로 된 발우를 가져와 붓다에게 바쳤고, 붓다는 이 발우로 상인들의 공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전승은 발우 내지 발우의 사용이라는 행위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상인의 공양 제안을 받았을 때 붓다는 “모든 여래는 손으로 받지 않는다”라고 하여 손으로 직접 음식을 받는 행위가 깨달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라는 것을 보여주고, 붓다의 뜻을 알아챈 사천왕이 석발우를 바치자 붓다는 공양을 받고 있다. 또한 공양을 바치는 2명의 상인 역시 “저희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이익과 안락을 얻게 해 주시옵소서”라며 覺者에게 공양을 올려 공덕을 쌓고자 하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 이는 발우가 음식을 받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만 아니라, 발우에 담기는 음식 역시 굶주림을 채우기 위한 단순한 음식물에 머물지 않음을 시사한다.
깨달은 출가자를 아라한(arahant), 즉 공양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 불렀듯이 깨달은 사람 나아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출가자는 재가자로부터 음식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자이다. 음식을 받아 섭취한 출가자는 수행을 계속할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수행을 통해 얻은 진리를 재가자에게 설해주게 된다. 그저 배고픔을 해결하고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음식을 받아먹는 것이 아닌 것이다. 재가자 역시 수행 정진하는 훌륭한 출가자에게 음식을 공양함으로써 공덕을 쌓고 또한 인생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발우 내지 발우에 담긴 음식은 출가와 재가 양자의 이러한 궁극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이자, 상호 교환적 가치를 실현하는 상징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물론 현대의 웰빙문화, 나아가 사찰음식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발우의 이러한 의미를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에서 음식이 주는 자와 받는 자 양자 간에 이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은 너무 많은 음식을 앞에 두고 산다. 대량 생산의 시스템 속에서 쉽게 생겨나고 또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음식은 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음식의 소중함을 잊게 만든다. 그 음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내 앞에 놓이게 되는지, 또한 그 음식을 섭취하여 얻은 건강을 기반으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제공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양자 모두 이 음식이 내 자신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무심하게 음식을 제공하고 받아먹는다. 하지만 불교에서 음식은 단지 굶주림을 채우고 미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주는 자도 받는 자도 그 음식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 발우는 이러한 의미를 상징하는 그릇인 것이다. 이러한 발우의 의미는 동아시아에 불교가 들어와 사원에서 스스로 텃밭을 일구어 식재료를 조달하는 경우에도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음식이 자신에게 오기까지의 수많은 노고와 자연환경에 감사하며, 이 음식의 섭취로 얻은 건강으로 수행에 힘쓰고 또한 중생 교화에 진력하게 된다.
발우에 담긴 음식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는 점은 바라제목차의 중학법 조문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중학법 제27조 “나는 공경하며 걸식(발우 안에 담긴 음식)을 받아야 한다고 배울 것이다”와 제28조 “나는 발우를 주시하며 걸식을 받아야 한다고 배울 것이다”, 그리고 제31조 “나는 공경하며 걸식(발우 안에 담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배울 것이다”와 제32조 “나는 발우를 주시하며 걸식을 먹어야 한다고 배울 것이다.” 이들 조문은 발우에 담기는 음식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것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음식에 대한 공경심을 설하고 있다. 율장에 의하면 음식은 藥食이다. 율장 대품 藥犍度 는 출가자들의 식생활을 규정한 章인데, 여기서는 모든 음식이 약으로 다루어진다. 내용과 질에 상관없이 재가자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음식은 다 약인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가가 아닌,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섭취하는 가가 음식의 진가 여부를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사찰음식의 힘이다.
Ⅳ. 식생활에 나타나는 절제
음식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사찰음식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바로 절제된 식생활이다. 소중한 음식이기에 절제된 올바른 방법으로 잘 섭취하여 그 음식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에서 음식은 단지 배고픔을 달래고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음식을 통해 건강하고 맑은 육신을 유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수행 정진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율장에서는 절제된 식생활을 위한 많은 규정을 마련하여 출가자들이 음식에 집착하거나 이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겪는 일이 없도록 미연에 방지하고 있다.
사실 식욕은 인간의 매우 강렬한 본능 가운데 하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난 음식을 배부르게 먹고자 하며, 이러한 욕망은 곧잘 도를 넘어 몸을 괴롭히는 주범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본능인 만큼 절제하기도 힘들다. 그래서인지 식생활에 관한 조문은 많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음식의 질과 양에 관한 문제이다. 현대인들이 특별히 맛난 음식을 배불리 먹는, 다시 말해 맛나게 요리된 음식에 집착하고 또 이를 자신이 소화해낼 수 없을 정도로 과다하게 섭취하여 갖가지 고통을 겪듯이, 출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 두 가지가 식생활과 관련하여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먼저 ‘특별히 맛난 음식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는 조문들을 보자. 걸식이나 청식 등 재가신도가 음식을 마련해서 제공하는 것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출가자는 식재료를 선택할 수도 요리법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음식에 대한 선택권은 있을 수 없지만, 특별히 맛난 음식을 먹고자 하면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걸식을 할 때 부유한 집을 찾아 간다거나, 경험상 맛난 음식을 얻었던 집을 위주로 돌게 되면 맛난 음식을 얻게 될 확률은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동들은 음식에 대한 분별심을 키우고 번뇌를 유발하게 되므로 엄격히 단속할 필요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바로 바일제 제39조 ‘索美食戒’와 바일제 제33조 ‘展轉食戒’이다.
음식물을 섭취하는 시간이나 횟수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정작 음식물의 내용물에 관해서는 관대한 것이 율장의 입장이다. 즉 음식물의 내용에 관해서는 특별한 제약 없이 보시 받은 음식물이라면 대부분 먹을 수 있다. 빨리율 바일제 제35조 ‘足食戒’및 제37조 ‘非時食戒’ 등에 의하면, 비구가 오전 중에 먹는 음식물은 단단한 음식(khādaniya)과 부드러운 음식(bhojaniya)의 2종으로 나뉜다. 이 중 부드러운 음식은 밥(odana), 죽(kummāsa), 보리음식(sattu), 생선(maccha), 고기(maṃsa)의 5종으로 정식에 해당하며, 단단한 음식은 깨물어 씹어 먹어야 하는 과일이나 열매, 야채 등의 먹을거리로 비정식을 가리킨다. 사실상 거의 모든 음식을 다 섭취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美食(paṇīta-bhojana)이라 불리는 것들은 섭취에 제약을 두었다. 미식이란 영양가 높은 맛난 음식을 가리키는데, 바일제 제39조 ‘색미식계’는 바로 미식을 탐하는 것을 경계하는 학처이다.
다음과 같은 것이 미식이다. 즉, 숙소(sappi), 생소(navanīta), 기름(tela), 꿀(madhu), 설탕(phāṇita), 생선(maccha), 고기(maṃsa), 우유(khīra), 요구르트(dadhi)이다. 어떤 비구라도 이러한 미식을 병이 아닌데 자신을 위해 구걸하여 먹는다면 바일제이다. 병에 걸린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신을 위해 미식을 구걸하여 먹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다. 물론 스스로 구걸하지 않고 주어진 것이라면 먹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병에 걸린 특수한 경우가 아닌데 이런 음식들을 스스로 요구해서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식으로 거론되는 이 음식들은 주로 유제품과 기름류, 꿀이나 설탕, 생선이나 고기 등과 같이 영양가 풍부하고 맛난 음식들이다. 색미식계가 제정된 인연담에 의하면, 아프지도 않은 비구들이 이러한 음식을 스스로 요구하여 재가자들의 맹비난을 샀다고 한다. 이로 보아 당시 이러한 음식들은 다소 고급스러운 음식으로 생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학처의 제정 배경에는 당시의 일반사회가 가지고 있던 음식에 대한 통념이 반영되어 있지만, 한편으로는 영양가 풍부한 좀 특별한 음식을 굳이 건강할 때도 스스로 찾아서 섭취할 필요는 없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맛난 음식에 대한 탐욕의 경계는 다음 조문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 빨리율 바일제 제33조 ‘展轉食戒’이다. 한 곳에서 식사 공양을 받고 또 다른 곳에서 공양을 받는다면 다음과 같은 때를 제외하고 바일제이다. 그 때란, 아플 때, 옷을 보시 받을 때, 옷을 만들 때이다. 이 조문은 한 곳에서만 식사 공양을 받을 것을 규정한 것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며 더 나은 음식을 요구하거나 찾아다니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빨리율의 인연담에 의하면, 다른 이에게 고용되어 생활하는 한 가난한 사람이 내세의 행복을 위해 공덕을 쌓으려 보수를 모아 부처님과 비구승에게 식사 공양을 청했다. 그런데 비구들은 시주자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고 당연히 충분히 식사를 제공하지 못할 것으로 추측하여 미리 다른 곳에서 걸식을 한 후 그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많은 음식을 준비해 두었고 비구들은 조금밖에 먹을 수 없었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남게 되자 시주자는 당연히 불쾌해했다. 이 조문의 제정 배경에는 이런 행동을 통해 시주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시주자의 보시를 헛되게 만드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맛난 음식을 충분히 먹고자 하는 욕망을 제어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중학법 제33조 “나는 차례대로 발우에 담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배울 것이다”28)라는 조문 역시 시주받은 음식 가운데 맛난 음식부터 골라먹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음식에 대해 분별심을 갖고 탐착하는 행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경계된다.
출가자의 식생활과 관련하여 또 한 가지 강조되는 점은 ‘적절한 양의 식사’이다. 과식도 소식도 아닌, 적절한 양을 알아 육체적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에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최선이다. 午後不食의 규정은 이런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오후불식이란 식사는 새벽녘부터 정오까지의 오전 중에 끝내야 하며, 그 이외의 시간에는 단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빨리율의 인연담 만으로는 불교에서 오후불식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기 어려운데, 한역율의 해당 조문을 보면 오후불식은 대충 두 가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선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많은 출가자의 생활 특징으로 보아 오후불식은 안락한 심신 유지를 위해 꼭 필요한 원칙이었다는 점이다. [마하승기율]에는 “여래는 한번의 식사를 하기 때문에 몸이 가볍고 편하다. 너희들도 또한 하루에 한 번 식사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설명이 나온다. 즉, 하루 오전 중의 한 번의 식사가 건강에 좋고 또한 안락하게 머물 수 있기 때문에 오후불식한다는 것이다.
많은 시간을 앉아서 선정으로 보내는 출가자의 경우 하루 세 끼의 식사는 육체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명 부담스럽고도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또 하나는 적당하지 못한 때에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겪게 될 갖가지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이다. 즉, 적당하지 못한 시기에 걸식을 하러 출가자가 마을로 들어감으로써 본인에게나 재가자에게나 바람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염려가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해가 진 저녁시간에 문 앞에 남자가 서 있는 상황은 부녀자들을 놀라게 할 수도 있고, 또한 재가자들이 편안하게 음주를 즐기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므로 여러가지 점에서 출가자가 돌아다니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시간대인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 요소는 현대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나 오후불식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단, 음식의 섭취로 인해 적어도 자신의 몸이 고통을 겪는 상황은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앉아서 선정을 주로 하는 출가자가 하루 세끼를 꼬박 챙겨 먹는 것은 분명 위장에 부담을 주는 일이다. 그럼에도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음식을 탐한다면 결국 몸은 고통을 겪게 된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를 잘 파악하여 음식으로 인해 고통받는 상황을 초래하지 않는 것이다. 소중한 음식을 자신의 잘못된 욕망으로 약이 아닌 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오후불식은 자신의 심신 상태를 잘 파악하여 음식의 양과 횟수를 조절하며 음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번거로움을 조절해 갈 것을 가르쳐준다. 음식은 건강하고 편안한 육체를 지탱하고 이를 기반으로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해야 한다. 결코 몸을 괴롭히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음식을 섭취하는 사람의 절제력에 달려 있다.
Ⅴ. 결론
사찰음식의 보급은 분명 현대인들의 식생활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농약으로 뒤범벅이 된 재료에 화학조미료로 맛을 낸 시중의 음식을 꺼리는 많은 사람들은 천연조미료로 깔끔하게 맛을 낸 청정한 사찰음식에 매료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사찰음식이 건강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이런 점에서 사찰음식의 보급은 기뻐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찰 음식의 장점이라면, 도대체 사찰음식이 다른 자연식 내지 일반 유기농 식단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들 역시 유기농 재료를 사용하여 천연조미료로 맛을 내며, 고염․고지방․고칼로리를 지양하는 태도로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재료나 요리 방법만으로 사찰음식의 특징을 부각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디서 사찰음식의 특징을 찾아야 할까? 사찰음식이 몸도 마음도 건강한 진정한 웰빙 음식으로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고급스러운 재료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조리법에 있는 것이 아닌, 깨달음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정진하는 출가자들이 가장 소박한 음식으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하는 지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멋지게 요리된 음식이라도 먹는 사람이 그 음식의 소중함을 모른 채 지나치게 탐한다면 오히려 몸을 괴롭히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약이 되어 심신의 건강을 지켜주어야 할 음식이 오히려 독이 되어 건강을 해치는 주범이 되는 것이다. 출가자의 식생활이 음식의 재료나 요리법이 아닌, 절제에 중점을 두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먹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똑같은 음식이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적인 음식을 섭취하되 음식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떨쳐버리고,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다른 사람도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음식을 대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사찰음식의 힘이 아닐까 생각된다.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고, 채소를 위주로 하며,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등, 일반적으로 사찰음식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요소들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찰음식에 담긴 소중한 의미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음식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그 소중한 음식을 편안하게 섭취하는 절제의 태도는 분명 재료나 조리법 이상으로 현대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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