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비구니 승가의 성립과 전개/마성 스님

실론섬 2015. 4. 11. 12:10

比丘尼僧伽의 成立과 展開

- 二部僧 制度를 中心으로 -


李秀昌(摩聖)/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1. 머리말


현재 상좌불교와 티베트불교에서는 비구니승가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 출가 수행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에서는 비구니승가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이유는 상좌불교에서는 일찍이 비구니승가의 전통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베트불교에서는 처음부터 비구니승가가 존재하지 않았다.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될 당시에는 이미 인도에서 비구니승가가 단절된 이후였다. 그래서 비구니승가가 아예 처음부터 티베트에 전해지지 않았다.

(스리랑카에서는 여성 출가 수행자를 ‘다사실마따(dasa-sil-mātā)’라고 부른다. 이것은 ‘열 가지 계율을 지키는 여성’이라는 뜻이다. 태국에서는 여성 출가 수행자를 ‘매지(mae ji)’라고 부른다. 그 의미는 비슷하다. 티베트에서도 여성 출가 수행자들이 있지만 이들을 모두 ‘비구니’로 인정하지 않는다.)


스리랑카의 비구니 스님다(사실마따(dasa-sil-mātā)


반면 중국․한국․대만에서는 지금도 비구니승가가 존재한다. 현재 전 세계에서 비구니의 位相이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과 대만이다. 한국과 대만의 비구니는 세계의 다른 종교의 여성 성직자들보다도 그 위상이 높은 편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의 비구니는 대승불교의 전통적인 수행체계를 갖추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비구니승가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비구니들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세계의 여성 불교 지도자들은 상좌불교와 티베트불교에 비구니승가를 復舊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실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러면 왜 상좌불교 국가에서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지 못하고 있는가? 한마디로 ‘二部僧(ubhato-saṅgha, 兩僧伽)’ 制度 때문이다. 이 제도는 ‘比丘尼 八敬法(비구니팔경법.aṭṭha garudhammā)’과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가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運用되지 못하는 원인이 바로 이 二部僧 제도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교승가 내부의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간의 불평등 혹은 차별적인 요소들은 모두 이 二部僧 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가 평등하게 운용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불교승가의 二部僧 제도에 대한 이해가 先行되어야 한다. 그래야 이 제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국내에서는 이 二部僧 제도의 모순과 그 극복 방안에 대해 언급한 논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필자는 아직 불교승가에서 二部僧(ubhato-saṅgha, 兩僧伽) 제도를 도입한 시기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불멸 후 비구니승가가 쇠퇴해졌을 때, 이부승 제도가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다른 논문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 논문은 이에 대한 보완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비구니승가의 성립과 전개에 대하여 이부승 제도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도에서 비구니승가가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성립된 이후에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 한다. 필자의 이러한 작업은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에 비구니승가를 복구하는데 그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밝혀둔다. 


2. 비구니승가의 성립과 계율의 제정


불교의 敎團(교단)은 크게 출가자와 재가자 그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을 흔히 四衆(cattāri parisadāni, 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이라고 부른다. 이 四衆을 하나로 묶어 상가(Saṅgha, 僧伽)라고 부른 것은 아니다. 상가에 재가자는 포함되지 않는다. 초기불교 시대부터 상가의 구성원은 오직 출가자뿐이었다. 이른바 비구는 ‘比丘僧伽(Bhikkhu-saṅgha)’에 조직되었고, 비구니는 ‘比丘尼僧伽(Bhikkhunī-saṅgha)’에 조직되었다. 이것을 ‘兩僧伽’ 혹은 ‘二部僧’이라고 한다.


이러한 兩僧伽는 원론적으로 동등한 입장에서 차별이 없어야 한다.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는 각기 독립해 있었고 자치적으로 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가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비구니승가는 언제나 비구승가의 지도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비구니승가의 성립 초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 전후 사정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비구니승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비구승가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루고 녹야원으로 가서 다섯 고행자들을 교화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그런데 인도에서 최초로 비구니승가가 성립된 시기는 대략 붓다 성도 후 20년경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비구니승가의 성립과 관련된 자료에 나타난 地名과 붓다의 安居地名이 일치하는 시기와 여기에 다시 아난다(Ānanda, 阿難) 존자의 출가 년도를 추정하여 산정한 것이다. 아난다 존자가 붓다의 시자가 된 것은 붓다의 나이 55세 때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비구니승가는 비구승가보다 약 20년 뒤에 성립되었던 것이다. 


비구니승가는 붓다의 姨母이자 養母였던 마하빠자빠띠 고따미(Mahāpajāpatī Gotamī, 大愛道瞿曇彌)와 석가족 여성들의 간청에 의해 성립되었다고 한다. ?律藏?의 ‘比丘尼 犍度’에 의하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붓다께 세 번이나 요청했다. 그러나 세 번 다 거절당했다. 그 뒤 아난다 존자가 다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때 붓다는 만일 여성들이 여덟 가지 조건을 일생동안 지키겠다고 서약한다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를 비롯한 오백 명의 석가족 여성들은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출가를 허락받았다. 그때의 조건이 바로 ‘比丘尼 八敬法(aṭṭha garudhammā)’이다. 그리고 붓다는 여성의 출가로 인해 천년 동안 지속될 正法이 오백 년으로 감소하게 되었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붓다가 처음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았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바라문 사회의 반대였고, 다른 하나는 승단 내부의 보수적인 비구들의 반대였다. 붓다는 안팎의 반대와 저항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특히 당시 바라문 사회에서 여성이 집을 나와 유행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라문 사회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큰 저항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승단 내부에서도 여성의 출가를 반대하였다. 특히 바라문 출신의 보수적인 비구들은 여성이 승가에 합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붓다는 곧바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할 수가 없었다. 붓다는 내심으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예전에 아내였던 야소다라(Yasodharā)를 포함한 석가족 여성들이 침략자 꼬살라國(Kosala)의 남성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붓다가 처음부터 거절하지 않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와 석가족 여인 오백 명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엄청난 비난과 파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던 붓다가 아무런 조건 없이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조건이 바로 ‘팔경법’이었던 것이다. 이 ‘팔경법’을 제시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적 반대 여론과 승단 내부의 반대 여론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었다. 지금의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보면 ‘팔경법’은 분명 승단 내부의 불평등 조항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팔경법’ 때문에 비구니승가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팔경법’에 담겨져 있는 이러한 배경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팔경법’은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에게는 具足戒에 해당되는 수계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붓다가 제시한 ‘八敬法’을 준수하겠다고 맹세함으로써 최초의 비구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를 따라 함께 출가한 석가족 출신의 여인들은 어떤 수계절차를 거쳤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비구니승가가 만들어진 뒤에는 별도의 비구니 授戒羯磨, 즉 白四羯磨(백사갈마)에 의해 具足戒를 받도록 제도화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여러 율장의 수계갈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비구니승가가 성립된 이후, 붓다는 역사적으로 55세부터 80세까지 약 25년간 비구니승가를 지도했다. 이 짧은 기간에 아라한과를 증득한 뛰어난 비구니들을 많이 배출시켰다. 초기경전에서는 비구니로서 비구를 능가할 만큼 우수한 제자가 있었다는 것이 자주 말해지고 있다.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이외에 담마딘나(Dhammadinnā), 웃빨라완나(Uppalavaṇṇā), 끼사고따미(Kisāgotamī), 케마(Khemā) 등은 유명한 비구니들이었다. 이러한 우수한 비구니가 나왔다고 하는 것은 교육자로서의 붓다가 얼마나 탁월하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수행에 전념하지 않고 말썽을 일으킨 비구니들도 많았다. 현존하는 비구니 계율을 통해서도 당시 비구니들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계율은 누군가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수많은 비구니 계율들이 제정되었다.


이와 같이 비구니승가의 성립과 함께 대두되는 문제는 바로 戒(sīla)와 律(vinaya)의 제정이었다. 僧伽와 戒律은 처음부터 분리할 수 없다. 비구니승가라고 하는 ‘수행 공동체’가 성립되었다면 반드시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규범, 즉 戒와 律이 제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僧團과 律藏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승가는 율장의 규정에 따라 운용되도록 제도화되었기 때문이다.


3. 비구니승가의 성립 이후의 전개


3.1. 붓다 在世時 비구니승가

붓다는 비구니승가의 성립 이후, 비구니승가를 어떻게 運用해야 좋을지에 대한 기본적인 방침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붓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각하게 고민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비구니승가의 羯磨는 어떻게 행할 것인지, 다툼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수행은 누구에게 배우도록 할 것인지 등등 새롭게 정하지 않으면 안 될 사항들이 많이 생겼다.


한편 대부분의 비구들은 처음부터 여성이 승가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비구니승가가 생긴 이후에도 비구들은 비구니승가의 존재 자체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비구니승가가 성립되었기 때문에 正法 천 년이 오백 년으로 減少되었다고 하는 전설도 비구니승가의 존재가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제1결집에 관한 내용 속에서도 비구니승가가 환영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승인 세존께서 여성의 출가를 허락하였음으로 비구들은 끝까지 반대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사실 비구승가의 입장에서 보면 새로 구성된 비구니승가는 귀찮은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비구니승가가 성립되기 전에는 없었던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승가에 남자만 있을 때에는 별로 불편을 느끼지 못하였는데, 여인이 승가에 합류하면서 수행 이외에 신경을 써야 할 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비구 波羅提木叉(pātimokkha)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戒目들은 비구니승가가 형성됨으로써 생긴 규정들이다. 예를 들면, 비구는 친족이 아닌 비구니에게 자기의 옷을 세탁시켜서는 안 되며, 양모를 물들이게 해서도 안 된다. 친족이 아닌 비구니에게서 옷을 받아서는 안 된다. 상가로부터 추천되지 않고 비구니들에게 설법을 해서는 안 된다. 추천된 경우라고 비구니 정사에 가서 설법하는 것을 금하고,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설법하는 것을 금하며, 친족이 아닌 비구니에게 자기의 옷을 주는 것을 금하고, 친족이 아닌 비구니에게 옷을 만들어 주는 것을 금하고, 다른 비구니와 약속하고 함께 여행하는 것을 금하고, 같은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을 금하고, 비구니와 가려진 으슥한 곳에 앉는 것을 금하는 등 여러 가지 戒가 새로 생기게 되었다.


아무튼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여성 출가자들이지만, 받아들인 이상 그 대우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대로 내버려 둘 것인지 동등한 권리를 인정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선배로서 지도해 줄 것인지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붓다가 취한 일관된 기본 방침은 ‘비구들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었다. 붓다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이른바 비구니승가는 비구승가의 지위 아래 둔다는 것이었다. 비구들도 비구니들을 자신들의 지도 아래에 두고 교육해 갈 것을 선택했다. 八敬法도 비구니의 바라제목차도 그렇게 지도하는 비구승가와 지도받는 비구니승가라고 하는 상하관계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처럼 비구니승가는 처음부터 불평등한 조건에서 출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후 사정에 대해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원래 남성만의 공동체로서 출발하여 그에 맞게 조직을 운영해 가던 불교 승단이 신참자로서 여성 출가자를 받아들이게 되고 다방면에 걸친 조직 변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남성 출가자로서는 결코 환영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 출가 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속세의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장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 되도록 부질없는 일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새로운 여성 수행자 집단이 들어왔다. 승단의 운영방법과 일상의 규칙, 그밖에 모든 것을 이 새로운 집단을 위해 다시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물론 이때에 비구니승가를 비구승가와 똑같이 동등한 조직으로서 자립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비구와 비구니의 입장을 대등하게 해서 율 규칙도 그때까지 비구들이 쓰고 있었던 것을 그대로 지키게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성 측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뒤늦게 들어온 여성 수행자가 선배인 남성 수행자의 지휘 하에 들어가야 하는 존재로서 팔경법이 제정되었다. 게다가 수행생활의 초보라는 점에서 남성보다도 한층 더 엄격한 규칙이 부가되었다. 당시 상황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다수의 멤버를 이룬 비구 승단에 비해 비구니 수는 턱없이 적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비구니승가를 성립했을 때에는 그 지원자 수가 단독으로 승단운영을 할 수 있을 만큼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먼저 여성 측에서 보면 이미 활동하고 있는 비구 승단 속에 전혀 이질적인 존재로서 비구니가 참여하는 것이므로 어떠한 일에서든 선배들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걸음부터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수행은 한 걸음도 진전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남성과 여성이 함께 지내는 것은 엄하게 금지되어 있기에, 그 비구 승단 속에 완전히 녹아들어가 생활해가며 지도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일단 비구니승가로서 독립된 집단을 형성해 가며 수시로 비구 승단의 지도를 받는다고 하는 형태밖에 방법은 없게 된다. 필시 이것이 비구니승가의 지위가 낮아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니승가는 비구승가보다 약 20년 늦게 출발하였기 때문에 초기에는 모든 측면에서 비구승가의 지시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배워야 할 것을 다 배우고 자주 운영 능력을 몸에 익혔다고 한다면 그와 같은 규칙에 계속 묶여 있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비구니승가가 비구의 지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 단계에 도달한 시점에서 그러한 규칙들은 철폐시켜서야 마땅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이후에도 그러한 규칙들은 폐기되지 않았다. 


붓다는 입멸 직전 ‘小小戒(khuddānukhuddakāni sikkhāpadāni)’는 버려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불멸 이후 보수적이었던 비구들은 小小戒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못한 아난다의 허물로 치부해 버리고, 붓다가 제정한 法(dhamma)과 律(vinaya)을 그대로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붓다가 한 번 제정한 것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佛制不改變’의 원칙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에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상좌부 불교국가에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은 二部僧 제도 때문이다. 이부승 제도란 비구니승가의 受戒 제도를 말한다. “비구니의 수계는 비구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다. 사미가 비구가 될 경우에는 비구 승단의 白四羯磨(백사갈마)만으로 그 의식이 끝난다. 하지만 式叉摩那(sikkhamānā)가 비구니가 될 경우에는 비구니승가의 백사갈마가 끝나면 그것을 비구승가에 보고하고, 비구승가에서 한 번 더 백사갈마를 해야 한다. 이것이 승인되어야 비로소 수계가 성립된다. 결국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비구니승가뿐만 아니라 비구승가의 승인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니승가는 비구 승단에 종속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것을 二部僧 제도라고 한다. 이 때문에 비구니승가는 영원히 비구승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현재 남방 상좌불교에서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비록 남방불교 국가의 어떤 여성이 다른 나라의 비구니승가로부터 具足戒를 받았다 할지라도 상좌부 전통의 비구승가로부터 다시 비구니계를 받아야 비로소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로 인정받게 된다. 그런데 상좌부의 비구들은 이미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 律脈이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계를 설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상좌부 율장에 근거한 비구니계를 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비구니가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二部僧 제도를 도입하도록 한 사람이 붓다의 十大弟子 가운데 持戒第一로 알려져 있는 우빨리(Upāli, 優波離) 존자였다는 것이다. 『五分律』에 의하면, 持律者였던 우빨리가 세존께 ‘비구니계는 二部僧持입니까? 아니면 一部僧持입니까?’라고 물어 二部僧持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빨리는 비구니들로부터 심한 비난과 곤욕을 당했다. 二部僧持란 즉 비구니의 율은 비구니뿐만 아니라 비구도 관리의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도 때문에 비구니승가가 더욱 힘들게 되었던 것이다.


二部僧 受戒 제도는 ‘比丘尼 八敬法’에도 명시되어 있다. 팔경법 중 第四敬法은 ‘式叉摩那가 계를 배워 마치면, 비구로부터 大戒(具足戒)를 받겠다고 청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이것은 『사분율』의 바일제법 제139조 ‘授宿往僧戒’(비구니계를 받은 다음 비구에게 가서 다시 수계해야 한다)와 유사하다. 즉 “만약 비구니가 구족계를 받은 다음 一夜를 지나고 比丘僧中에 가서 인준을 받게 되면 바일제이다.” 이 계는 비구니가 구족계를 받은 다음, 그 날 바로 비구승가에 가서 인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式叉摩那(正學女)가 구족계를 받고자 할 때 兩僧伽에 구족계의 의식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根本有部律』과 『明了論』은 이것을 제1경법에 두고 있다.


현행 『律藏』의 수계 제도에 따르면, 비구승가와 비구니승가의 구조가 다르다. 비구승가는 沙彌․比丘로 구성되어 있지만, 비구니승가는 沙彌尼․比丘尼 사이에 式叉摩那라는 또 다른 신분이 들어가 있다. 식차마나는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기 전에 2년 동안 여섯 가지 법을 공부하는 기간 중에 있는 여자 수행자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사미니에서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중간에 식차마나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흔히 식차마나는 비구니계를 받기 전에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라고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데 2년이라는 기간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니다. 6개월만 관찰해 보면 임신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2년간의 수행 기간을 강요한 것은 여성의 출가를 가능한 한 억제하기 위해 마련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러한 수계 제도는 붓다가 직접 제정한 것이 아니고 후대의 보수적인 비구들에 의해 삽입되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3.2. 붓다 入滅後 비구니승가

불멸 후 비구니승가는 급격히 쇠퇴해진 것으로 보인다. 불멸 후 뛰어난 비구니가 배출되었다는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아쇼까왕의 法勅에는 비구니승가에 대한 언급이 있다. 하지만 불멸 100여년 무렵에 일어난 ‘十事非法’이라고 하는 논쟁에서는 비구니승가의 동향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다. 이것은 불멸후에는 비구니승가가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비구니승가는 이미 마하빠자빠띠 고따미의 사후에는 겨우 그 명맥을 유지했던 것 같다. 一說에 의하면 마하빠자빠띠 고따미는 120세에 입적했는데, 그때 오백 명의 비구니들이 함께 입적했다고 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때 이미 비구니승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을 모두 잃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까다로운 수계제도 때문에 출가하는 여성의 숫자도 급격히 줄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비구승가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으로 布薩이나 說戒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구들 가운데는 ‘二部毘尼를 외우는 사람’이라는 것이 자주 말해지고 있다. 이것은 비구율과 비구니율 두 가지를 傳持하고 있는 비구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율은 비구율에 비구니율이 부가되어 있는 형태로 편집되어 있다. 이것도 비구가 비구니율까지도 전지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비구니들은 독자적인 힘으로 비구니율을 전지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단절될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비구들이 비구니율까지도 전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도 비구니승가가 약체였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비구니승가에서 비구승가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으로 어떤 羯磨도 행할 수 없었던 것 같다. 敎誡人을 비구승가에 청하라고 한 것은 비구니승가에 誦誡人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구족계를 설해 줄 和尙阿闍梨를 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摩訶僧祇律』의 式叉摩那로 2년 동안 계를 배우고 구족계를 받고자 비구승가에 청하는 의식에 그러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들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遮法이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일 것이다. 


비구니의 차법은 비구의 차법보다 24가지나 더 많다. 일반적으로 “부채가 있다든지, 부모의 승낙을 얻지 못했다든지 하는 공통된 사항도 상당히 많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여성 성기의 기형이나 생리의 이상 등 여성 특유의 신체적 이상성을 상세히 들어 각각 차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①여근이 없는 자, ②여근이 불완전한 자, ③월경이 없는 자, ④경혈이 멈추지 않는 자, ⑤언제나 생리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 ⑥항상 소변이 흘러 늘 젖어 있는 자, ⑦외음부가 돌출해 있는 자, ⑧여성동성애자, ⑨수염이 나서 남자 같은 모습을 한 자, ⑩성기와 직장부분이 딱 들러붙어 있는 자, ⑪남근과 여근을 모두 가지고 있는 자 등이다. 이 밖에 남성과 공통된 사항 즉, ‘다섯 가지 중병’, ‘노예’, ‘부채자’와 같은 항목이 열거된다. 이러한 항목들은 다른 문맥에서는 여성을 비난할 때 매도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비구니 수계의 遮法에는 아무런 합리성도 없고 필연성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명색뿐인 착상으로 정해진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이러한 차법은 승단에서 여성 출가자를 반기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여성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임은 말할 나위없다.  


이것은 붓다 입멸 후, 처음부터 여성의 출가를 반대했거나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던 보수적인 비구들이 가능한 한 여성의 출가를 막기 위해 고의로 차법을 강화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式叉摩那가 2년 동안 학계를 배우고, 二部僧으로부터 구족계를 받도록 한 것 등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해 볼 때, 비구니승가는 붓다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붓다의 입멸 후에는 그다지 크게 발전하지 못하고 세력이 약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교단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고 할 정도의 일도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도에서 아쇼까(Aśoka, B.C. 273-236 재위) 왕이 통치하던 시기에 비구니승가가 크게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비구니에 대한 기록이 아쇼까왕의 비문에 나타나며, 왕의 딸인 상가밋따(Saṅghamittā)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높았던가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이 시기가 불멸 후 비구니승가의 황금기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황금기는 오래가지 못한 듯하다. 그 후 인도사회는 점차적으로 힌두전통의 사회체제로 변화해 갔기 때문이다. 힌두전통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쇠퇴해졌다.


마우리아(maurya)왕조가 망하고 기원후 300년 경 들어선 굽타(Gupta)왕조 시대에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힌두전통이 장려되었다. 이러한 힌두전통의 사회체제에서 출세간을 지향했던 불교 여성 출가자들의 입지는 점차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힌두전통에 위배되는 여성 출가자로 구성된 비구니승단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인도를 방문했던 동아시아의 求法僧들의 기록에 의하면 4세기경까지는 비구니승단에 대한 흔적들이 보이지만, 6세기 이후부터 이러한 비구니승단에 대한 언급들은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중국의 구법승 義淨(635-713)은 비구니들이 비구들과 같은 물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671년에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 비구니승단은 최소한 10-11세기까지는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인도에서 비구니승가가 최고조에 달해있던 황금기에 비구니승가의 전통이 세일론(Ceylon, 지금의 스리랑카)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이다. 세일론 年代記의 전통에 따르면, 아쇼까왕은 인도의 안팎에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전도단을 파견했다. 그는 자신의 아들 마힌다(Mahinda) 장로와 다른 4명의 스님들을 세일론에 파견하여 데와남삐야띳사(Devānampiyatissa, 247-207 B.C.) 왕과 수행원들에게 붓다의 가르침을 전했다. 세일론의 왕과 국민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깊은 인상을 받아 불교를 받아들였다. 100,000명의 남녀가 새로운 종교를 받아들였고, 1,000명의 남자가 승단에 들어가 비구가 되었다. 사찰들은 도처에 건립되었고, 부자들의 기부금은 사찰의 유지에 쓰였다. 한편 아누라(Anulā) 왕비와 많은 여성들도 또한 승단에 들어가 구족계를 받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출가를 허락해 줄 수 있는 비구니가 없었다. 데와남삐야띳사 왕은 여성들을 위해 특별한 비구니들을 파견해 달라고 아쇼까왕에게 使者를 보냈다. 그래서 구족계를 받은 마힌다의 여동생 상가밋따(Saṅghamittā)와 4명의 비구니와 2명의 재가자를 세일론으로 보내 주었다.


상가밋따 비구니가 보리수 묘목을 가지고 세일론에 도착했을 때, 아누라((Anulā) 왕비와 여성들이 비구니승가에 입단했다. 이때 왕비와 500명의 여성은 비구니계를 받고, 500명의 소녀들은 사미니계를 받았다. 그들은 아주 짧은 기간에 아라한과를 증득했다. 그리고 예전의 우빠시까(Upāsika-vihāra)를 개조하고 여러 차례 확장하여 ‘핫탈하까(Hatthāḷhaka-vihāra)’ 혹은 ‘비구누-빳사야(Bhikkhunupassaya, 비구니의 거처)’라고 하였다. 상가밋따 역시 이 사원에서 살았다.


세일론에서 비구니승가의 기반이 확고해졌을 때 마리짜왓띠(Maricavaṭṭi-vihāra) 사원의 낙성식에 100,000명의 비구와 90,000명의 비구니가 참석했다. 또한 마하쩨띠야(Mahācetiya)의 낙성을 계기로 이루어진 법회에서 설법을 듣고 18,000명의 비구, 14,000명의 비구니가 아라한과를 이루었다. 비구니승가는 王都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는 물론 지방에까지 확고한 뿌리를 내렸다. 마히라(Mahilā), 사만따(Samantā), 기리까리(Girikāli), 다시(Dāsī), 까리(Kālī) 등 5명의 특별한 비구니는 20,000명의 비구니들과 함께 로하나(Rohaṇa)에서 아누라다뿌라로 와서 법을 설했다. 수만나(Sumanā)라는 아주 유명한 비구니는 남쪽 지역 출신인데, 과거생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었다.


세일론의 비구니승가는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여성들을 이끌 수 있었지만, 최하위의 신분은 간혹 특별한 경우뿐이었다. 예를 들면 마히라((Mahilā)와 사만따(Samantā)는 까까완나띳사(Kākavaṇṇatissa) 왕의 딸이었고, 기리까리(Girikāli)는 까까완나띳사 왕의 대신의 딸이었다. 다른 두 비구니는 도둑의 딸이었다. 수만나(Sumanā)는 대신의 부인이었다. 아누라다뿌라에서 律을 가르치는데 탁월했던 마하띳사(Mahātissā)라는 비구니는 시골사람의 딸이었다.


약 10세기까지 왕실에서 비구니와 비구니사원을 후원해 주었다는 수많은 증거가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중 하나만 소개하면, “악가보디 4세(Aggabodhi Ⅳ, 658-674 A.C.)의 시대에 왕비가 비구니들을 위해 사원을 짓고, 비구니들의 편의를 도모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스리랑카에서 비구니승가는 10세기 아누라다뿌라 시기가 끝날 때까지 번성했다. 그 기간은 남인도의 쫄라(Coḷa)인들이 통치하고 있다가 완전히 물러간 시기를 말한다. 당시에는 비구승가 조차 지킬 수 없었다. 이들의 침입으로 王都 아누라다뿌라와 사원들은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위자야바후 1세(Vijayabāhu Ⅰ, 1045-1111) 왕은 반세기 동안 세일론을 점령하고 있던 쫄라인들을 격퇴하고 왕위를 되찾았다. 그리고 버마(Burma)로부터 장로들을 초청하여 구족계 계단을 복구했다. 그러나 그때 비구니승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와 같이 당시 정치․사회적인 문제들로 인해 스리랑카에서 비구니승가가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최소한 10세기까지는 비구니승가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연대기들과 고고학적 증거들이 밝히고 있다. 특히 외국인의 침입에 의한 전쟁이 끝나고 나라를 되찾았을 때, 불행하게도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지 않았다. 그때는 아직 버마에 비구니승가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버마의 비구니승가도 절멸되었다. 피터하비(Peter Harvey)는 미얀마의 비구니승가는 13세기 몽고가 침입하기 이전까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다른 남방불교 국가인 태국․라오스․캄보디아 등에서도 비구니승단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4. 비구니승가의 복구 문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와 티베트에서는 비구니승가를 인정하지 않는다. 티베트는 처음부터 비구니승가가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복구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그들은 합의에 의해 비구니승가를 새로 창립시키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승불교의 전통을 따르기 때문에 단절된 律脈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런데 상좌불교에 비구니승가를 복구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는 상좌부 불교국가의 비구니승가 복구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자.


현재 어떤 사람은 이미 상좌부 불교국가에 비구니승가가 복구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1993년 10월 스리랑카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여성불자대회에서 한국의 비구니들이 참석하여 비구니계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태국의 쿠닝 카니타 위첸짜로엔(Khunying Kanitha Wichiencharoen)도 이때 비구니계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비구니라고 말한다. 또한 1996년 12월 8일 인도 웃따르 쁘라데시(Uttar Pradesh) 이씨빠따나(Isipatana) 사르나트(Sarnath)에 있는 물라간다꾸띠(Mulagandhakuti)에서 스리랑카에서 온 다사실마따(dasa-sil-mātā) 10명에게 한국의 비구니들이 비구니계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당시 스리랑카의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또한 위라라뜨네(D. Amarasiri Weeraratne)는 “1996년 12월 8일은 상좌부 불교의 역사에서 경축일이다.”라고 잡지에 기고했다. 


이 글은 1018년 촐라인(Cholian)들에 의해 단절되었던 스리랑카 비구니승가를 복구한 것이라고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행사는 인도 대각회(Maha Bodhi Society) 회장이었던 스리랑카 출신 위뿔라사라(Ven. Mapalagama Wipulasara) 스님이 주선한 것으로, 한국의 비구 비구니들이 대거 참석하여 스리랑카 비구니승가를 복구시켜 준 것으로 되어있다. 이때 한국의 비구․비구니를 인솔하고 참석한 대표는 세계불교승가회 부회장인 서의현 스님이다. 그때 참석한 한국의 스님 명단과 비구니계를 받은 10명의 스리랑카 다사실마따의 명단도 이 책에 실려 있다. 이 때문에 스리랑카 승단에서는 큰 논쟁이 있었으며, 위뿔라사라 스님은 징계에 회부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그 이후 곧바로 죽었다. 스리랑카의 비구승단에서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아마 그때 한국 대표로 참석한 스님들이 이처럼 중요한 행사인지도 모르고 참석하였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001년 태국에서 최초로 여성이 비구니계를 받았을 때, 비구 위주의 태국 승단과 법적․종교적 지위로부터 배제되는 여성들에 대한 문제가 여론의 핵심으로 대두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태국에서는 여성 출가자에게 비구니계를 거부하고 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한국과 대만의 비구니들이 ‘다사실마따’와 ‘매지’들에게 비구니계를 설해 주고자 시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전통 상좌부의 비구들은 한국의 비구니들을 경계한다. 


다음은 어떻게 하면 적법하게 상좌부의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여 비구승가로부터 승인받을 수 있겠는가? 이 일은 어느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추진한다고 해서 성립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현재 ‘다사실마따’나 ‘매지’로 생활하고 있는 이들이 비구니승가의 복구를 간절히 원해야 한다. 그리고 비구니승가가 복구된 후 자체적으로 羯磨를 행할 수 있는 율장에 정통한 인물들을 미리 많이 양성해 놓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비구니계를 설해 복구했다고 하더라도 비구니승단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많은 ‘다사실마따’나 ‘매지’들은 진정으로 비구니승가의 복구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재 상태 그대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일부 불교페미니스트(Buddhist Feminist)들과 한국의 비구니들이 앞장서서 상좌부 스님들에게 왜 비구니승가를 복구시켜주지 않느냐고 항의한다.  


그러면 왜 상좌부에서는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가? 위자야라트나(Wijayaratna)가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상좌부 불교국가에는 약간의 여성들이 황색 혹은 흰색 가사를 두르고 8계 혹은 10계를 지니고 있지만, 비구니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율장』에 의하면, 비구승가는 여성들에게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수여할 수가 없다. 이것은 兩僧伽의 면전에서 오직 비구니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더욱이 구족계와 같은 것은 최소한 다섯 명의 長老尼 면전에서 행해져야만 한다. 사실상 비구니승가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定足數를 오랫동안 채울 수 없었으며, 법률상의 행위(Saṅgha-kamma, 僧伽羯磨)와 같은 것이 오랫동안 가능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비구니계를 설해 줄 수 있는 자격 있는 비구니들이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권의 비구니는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계를 설할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중국과 한국의 계맥은 瑞祥受戒에 의한 것이다. 自誓受戒나 瑞祥受戒는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용인된다. 그러나 『율장』과 상좌부 전통에서는 용인되지 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율맥이 단절되었을 때, 버마 스님의 도움을 받아 계단을 복구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면 전혀 방법이 없는가? 필자는 있다고 생각한다. 상좌부 비구승가에서 비구니승가를 복구시킬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게 된다. 상좌부 불교 국가의 최고 장로들이 한 자리에 모여 二部僧 제도로는 도저히 단절된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수 없기 때문에 律師 10명을 선발하여 특별 계단을 설립하여 비구니계를 설하는 것이다. 그러면 상좌부 비구니승가가 복구된다. 그 후 10년이 경과한 뒤, 처음 비구니계를 받은 비구니들이 장로니가 되었을 때, 다시 비구니계를 설하면 된다. 그러면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계를 계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율장의 규정을 크게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상좌불교 국가에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아닌 다른 전통을 가진 대승불교권의 비구니들이 상좌부권의 여성들에게 비구니계를 설한다는 것은 상좌부 비구승가의 반발만 가져올 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율장의 규정이나 전통에도 맞지 않는다. 이러한 편법으로는 결코 그 정통성을 확보해 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록 한국의 비구니가 1993년, 1996년 스리랑카와 인도에서 비구니계를 설했다고 하더라도 다시 상좌부의 비구승가로부터 비구니계를 받아야만 비로소 비구니승가의 복구가 승인된다. 비구니계는 二部僧의 제도로 실시하라고 『율장』에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고 한국의 비구니들이 상좌불교의 비구니승가의 복구에 적극적으로 간여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그 보다는 남방 상좌부의 다사실마따나 매지들이 스스로 비구니승가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지도해 주고 그들을 후원해 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육 수준이 너무 낮아서 『율장』에 명시된 羯磨나 說戒를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5. 맺음말


현재 세계의 여성 불교지도자들은 상좌불교에 비구니승가를 복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상좌불교에는 비구니승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성 출가수행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에서는 비구니승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면 왜 상좌불교에서는 비구니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가? 한마디로 비구니의 受戒法인 二部僧 제도 때문이다.

『율장』의 규정에 의하면, 비구니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비구니승가에서 비구니계를 받고, 다시 비구승가에 가서 한 번 더 비구니계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상좌불교에서 비구니의 律脈은 단절되었기 때문에 비구니계를 전해 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비구니가 이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전통의 비구니로부터 아무리 비구니계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 상좌불교에 비구니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二部僧 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상좌불교 국가에 비구니승가가 복구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율장』에 규정된 비구니 수계법인 二部僧 제도를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한 의미의 상좌부 비구니승가가 복구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비구승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원히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수 없는가? 상좌부의 장로들이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본다. 장로들의 합의에 의해 단 한 번만 二部僧持가 아닌 一部僧持로 비구니계를 설해 주면, 10년 후에는 비구니들에 의해 비구니계를 설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 비구승가에서 다시 비구니계를 수계해 주면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승가는 완전히 복구될 것이다. 이것은 『율장』의 규정과 상좌부 전통을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상좌부 전통의 비구니승가를 복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율장』의 규정과 절차를 무시하고 한국의 비구니들이 상좌부 비구니승가의 복구에 직접적으로 간여하는 것은 결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 보다는 ‘다사실마따’나 ‘매지’들이 진정으로 비구니승가의 복구를 원할 때까지, 그리고 그들이 비구니승가를 복구한 뒤에도 자체적으로 說戒와 羯磨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될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고 지원해 주는 것이 우선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