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문선사는 소주(蘇州) 가흥(茄興)사람으로 속성(俗姓)은 장(張)씨다. 유년때 부터 이미 속세의 삶을 싫어 하였고 집안이 매우 가난해 일찌기 공왕사(空王寺)의 지징율사(志澄律師)에게 출가 하였다. 자질이 총명하여 책을 한번 읽으면 뜻이 모두 깨달아 두번다시 읽을 필요가 없었고 특히 언변(言辯)에 뛰어났다.
20세 때 강소성 비능단(毘陵壇)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다시 수년간 지징율사를 시봉 하였는데 이때 그는 특히 율장에 전념 했으며 또한 계율을 지키는데 엄정 하였다. 계(戒)로써 수행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그는 그 후 정(定)과 혜(慧)를 닦고자 목주(睦州) 도종선사(道從禪師)를 찾았으나
그는 황벽의 법사(法嗣. 이을 사)로써 강남인(江南人)이며 속성이 진(陳)씨였다.
따라서 진존숙(陳尊宿)이라고 불렸고 어머니와 이웃에 신을 만들어 봉야함으로써 진포혜(陳포鞋)라 불리기도 했다. 목주(睦州)는 처음 문언을 보자 문을 잠가 버렸다. 문언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니 문 안에서
"누구냐?"
하는 소리가 났다. 그가 이름을 대자 목주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로 왔느냐?"
"저는 아직 자성(自性)을 깨치지 못했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침을 주십시요"
목주는 문을 열고 그를 힐끗 한번 보고는 다시 곧 문을 닫아 버렸다.
이렇게 거절 당하기 3일째되는 날 목주가 문을 열자 문언은 재빨리 비집고 들어 갔다.
그러나 목주가 그를 움켜잡고
"말해봐! 어서 밀해!"
하며 다그친다. 문언이 입을 떼기 전에 목주는 그를 밀쳐내며
"이런 진(秦)나라 쓸모없는 물건아!"
했다. 일설에는 이때 황급히 문을 닫는 통에 문언의 다리가 문틈에 끼이는 순간 초견성(初見性)했다고 한다.
수년 후 문언은 목주의 권유로 복건성 설봉산(雪峯山) 숭성사(崇聖寺)의 의존선사(義存禪師)를 찾아 나선다. 문언은 설봉산 아랫마을에 이르러 한 스님을 만나 묻는다.
"오늘 설봉산으로 올라 가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들려주는 몇마디를 기억했다가 의존선사 스님에게 전해 주시되 절대 딴 사람이 시켰다는 말은 하지 마시오."
그 스님의 승락을 얻은 문언은
"스님이 절에 가거든 대중이 모이고 법상(法床)에 방장이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앞으로 나아가 그의 코앞에 똑바로 서서 '불쌍한 늙은이, 어째서 목에 걸린 칼을 벗지 않으시오'라고 하여 주십시요"
그 스님은 문언이 시키는대로 행했다. 설봉이 그 스님의 근기로는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알고는 추궁한 결과 그 말을 던진 장본인이 아랫마을의 한 객승임을 알고는 대중을 향해 이르기를 "대중은 아랫마을에 내려가 그대들 500여명의 선지식이 될 그 스님을 이곳으로 영접해 오라"하였다.
그후 문언은 설봉(설봉산에 살았기 때문에 산의 이름을 빌어 의존선사를 설봉이라 칭함)의 문하에서 수년간 참구(參究)를 거듭, 그의 심인(心印)을 이어 받기에 이른다.
48세 되던해(911년) 문언은 광동성 조계의 육조대사탑을 참배하고 이어 영수원(靈樹院) 지성여민선사(知聖如敏禪師)를 찾아가 그의 제일좌(第一座)가 되었다.
여민선사는 입적하면서 당시 왕이었던 광주에게 秘函(비함)을 남겼는데 그속에는 문언을 가리킨 [인천안목당중상과(人天眼目堂中上座)의 글씨가 담겨 있었다. 이에 왕은 칙사를 시켜 문언으로 하여금 법석(法席)을 열게 하고 그를 궁궐까지 초빙, 법문을 듣기도 하였다. 그후 923년 운문산에 주석하면서 부터는 항상 일천여 대중이 그의 밑에서 수행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시적일(示寂日. 임종일)이 가까워 운문선사는 대중들에게
"나의 세상인연이 이미 다했다. 이제 갈때가 됐다"
하니 제자들이
"스님 연세 비록 높으시나 신체와 정신이 아직 강건(强健)하시니 더 머물러 법을 펴 주십시요"
하였다. 운문선사는 아무 대꾸없이 시자를 시켜 차를 한잔 마시고는
"처음엔 내가 잔을 잡고 다음엔 네가 잡았으니 이렇게 잡고서 어찌 내가 안 가겠느냐"
하고 앉은 자세로 입적(坐化.좌화)을 하니 949년 4월 10일 이었다.
육신을 다비하지 않고 보탑(寶塔)에 모시니 이 탑은 그가 생전에 미리 방장실(方丈室)앞에 세우도록 모양까지 일러둔 것이었다. 육신입탑(肉身入塔)을 치르는 날 제자는 물론 평소 그를 흠모하던 부근의 백성이 몰려들어 수천명을 넘어 섰다고 한다.
운문의 육신은 운문산 광태선원(光泰禪院)에 안치한지 15년이 지난 8월 석탑을 여니 육신이 조금도 생전과 다름없었으며 수염과 머리카락도 길게 자랐다고 전한다.
그의 육신은 입적한지 천년이 넘는 지금까지도 광동성 유원현의 운문산에서 생신의 모습 그대로 가부좌하고 앉아 육신보살의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운문선사의 어록은 문인 수견(守堅)이 모아 놓은 광록(廣錄) 3권이 있다.
운문은 특히 봉변(鋒辨. 칼끝 봉. 분별할 변)이 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기언(奇言), 경구(警句), 괴언(怪言), 망담(妄談)이 거침이 없었으나 모두 빗나감이 없는 대근설법(大根說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일자관(一子關)이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무엇이 정법안(正法眼) 입니까?"
"보(普)"
"졸탁지기(졸啄之機)를 어떻게 보십니까?"
"향(響)"
"살불살모(殺父殺母)는 불전(佛前)에 참회 하지만 살불살조(殺佛殺祖)는 어딜 향해 참회 합니까?"
"로(露)"
"도(道)란 무엇 입니까?"
"거(去)"
"운문의 한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친(親)"
다음으로 유명한 운문삼구(雲門三句)가 있다. 이 세귀절은 운문의 제자 연밀(緣密)에 의해 정리된 것이나 그것은 곧 운문의 가르침과 통한다.
삼구(三句)는 함개건곤(涵蓋乾坤 천지를 덮어 적신다), 절단중류(截斷衆流 모든 물줄기를 끊는다),
수파수랑(隨波遂浪 파도를 따라 물결을 일으킨다)이다. 이는 내재적 측면에서 볼때 그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전 우주와 모든 것을 흠뻑 적시며, 그 초월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모든 물줄기를 단절해 우리가 엿보거나 접근조차 할 수 없으며, 그것의 현세적 작용의 면에서 볼 때 근기와 취향을 따라 함께 흐르며 이끈다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외 몇가지 널리 알려져 있는 공안(公案이 있다.
한선객이 물었다.
"부처는 누구 입니까"
"똥묻은 막대기"
이는 운문의 입이 얼마나 험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 화두 이지만 먹고 자고 배설하는 생활자체가 선(禪)임을 전제한다면 악취 보다는 향내음 날법한 명구(名句)다.
또한 어느 승려가 "나무가 시들고 잎이 떨어질 땐 어떻습니까?"하고 물은데 대해서 답한 [체로금풍(體露金風)]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운문이 자신의 노잔(老殘) 소식을 전한 것이라고도 하고 또 혹자는 나뭇가지의 자태를 나타냄과 아울러 법신(法身)이나 진아(眞我)의 순수한 본질, 즉 영원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또 한 스님이 물었다.
"제불(諸佛)이 출현한 곳이 어디 입니까?"
"동산수상행(東山水上行)"
이 공안 역시 동산(東山)이 물위로 흘러 간다는 풀이와 동산수(東山水)가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등의 견해가 분분하지만 아무튼 사량분별(思量分別)의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버리는 절단중류(截斷衆流)의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우리에게도 너무나 잘 알려진 가르침이 있다.
어느날 운문선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보름 이전은 너희에게 안 붇는다. 보름 이후의 것을 한마디로 말해 보아라"
제자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모두 바보였기 때문은 아니다. 질문의 중대함을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운문은 제자들을 대신해서 스스로 대답하길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운문선사의 질문을 알기쉽게 풀이하면 '오늘까지의 일은 묻지 않는다. 오늘 이 시각 이후의 네 생명의 상태를 한마디로 설명하라'는 뜻이 된다. 바꾸어 말하면 '깨닫기 이전의 이야기는 필요없다. 깨달은 다음의 세계를 한마디로 말하라'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은 대자유인에게는
안 좋은 날이 있을리 없을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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