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승단 화합과 화합 포살/이자랑

실론섬 2015. 7. 20. 18:21

승단 화합과 화합 포살

이 자 랑(동국대 강사)

 

목차

I. 서론

Ⅱ. 화합승과 파승

     1. 화합승의 의미

     2. 파승의 의미

Ⅲ. 부동주로부터 본 화합의 의미

Ⅳ. 화합 포살의 의미

Ⅴ. 결  론

 

Ⅰ. 서  론

 

불교 승단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화합승(和合僧, samagga-saṃgha)이다. 승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며 수행에 힘쓰는 모습이야말로 출가․재가를 막론한 모든 불교도가 반드시 실현해내고 싶은 승단의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승단 생활의 규칙을 모아 놓은 율장을 보면, 승단의 분열은 극도로 기피되고 오로지 승단의 화합을 강조하는 많은 조문들과 기술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화합승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상황일까? 화합이라는 말로부터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협력하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율장에서는 화합승, 그리고 이 화합이 깨진 상태를 의미하는 파승(破僧, saṃghabheda)이라는 말이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 정의들을 종합해보면, 화합승이란 동일한 계 안에 거주하는 비구들이 포살이나 자자, 갈마와 같은 승단 행사를 함께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며, 파승이란 같은 계 안에서 따로 따로 나뉘어서 이와 같은 행사를 실행하는 것을 말한다.    

 

즉 승단의 화합을 측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동일 경계 내의 비구들이 승단 행사에 전원 참석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승단 행사 중에서도 특히 포살(布薩, uposatha)의 실행은 승단의 화합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포살이란 동일한 현전승가에 속하는 비구들이 보름에 한 번씩 한 자리에 모두 모여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pātimokkha)를 암송하며 보름 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모임으로써, 원래는 승단의 청정함을 확인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점차 포살은 승단의 화합을 상징하는 의식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포살에는 동일한 현전승가에 소속되어 있는 비구(니)들의 전원 출석이 요구되며, 이것이 바로 화합승의 실현이다.   

 

한편 포살이 화합을 상징하는 의식으로써 주목받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분열했던 승단이 다시 화합하고자 할 경우에 마지막 절차로 반드시 포살을 실행해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를 "화합 포살(sāmaggiuposatha)"이라고 한다. 분열했던 승단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서로 비난하지 않게 되었을 경우에는 양자 합의 하에 화합 갈마를 한 후, 마지막으로 이 포살을 실행하고 화합 승단으로 돌아가게 된다. 화합 포살은 분열했던 승단이 다시 완전하게 화합했음을 상징하는 의식으로써, 승단 운영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포살은 승단이 생명으로 하는 화합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의식으로써, 평상시의 승단의 화합 상태를 점검하는 의식일 뿐만 아니라, 분열했던 승단을 화합승으로 되살려내는 힘을 지니는 의식으로서, 인도 불교 교단사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역할을 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외국 학계에서는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인도불교 교단사에서  포살이 승단 운영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 왔는가 하는 점에 관하여 다양한 시각으로부터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흥미로운 많은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학계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 및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특히 화합 포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또 신중하게 논의되는 일도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번 기회에 제 율과 기존의 연구를 자료로 화합의 진정한 의미와, 불교 승단 운영에서 화합 포살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Ⅱ. 화합승과 파승

 

먼저, 화합승(和合僧, samagga-saṃgha)과 파승(破僧, saṃghabheda)에 관한 제 율의 기술을 검토하여 화합의 구체적인 의미를 살펴보자.   

   

1. 화합승의 의미

제 율에 기술된 화합승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빨리율』: samaggo nāma saṃgho samānasaṃvāsako samānasīmāya ṭhito.

           "화합승이란 동주자(同住者)가 동일한 계에 확립한 것이다"

            (Vinaya-piṭaka, vol. ⅲ, p. 173 (Samantapāsādikā, p. 607의 주석에 의하면, 

              samānasaṃvāsako는 정신적인 면에서 나뉘어져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하며, samānasīmāyaṃ 

              ṭhito는 육체적인 면에서 나뉘어져 있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사분율』: 和合者. 同一羯磨同一說戒. 僧者四比丘若五若十乃至無數.

           "화합이란 동일갈마․동일설계이다. 승이란 4명의 비구, 혹은 5명, 혹은 10명, 내지 

            무수이다."

『오분율』: 和合者. 同布薩自恣羯磨常所行事. 僧者從四人已上.

             "화합이란 포살․자자․갈마․상소행사를 같이 하는 것이다. 승이란 4명 이상이다."

『마하승기율』: 和合僧者. 不別衆. 諸比丘雖復鬪諍更相道說. 但一界一衆一處住. 一布薩自恣

                故. 名爲和合僧.

               "화합승이란 무리가 분열하지 않은 것이다. 설사 비구들이 투쟁하고 서로 싸운다 

                하더라도, 하나의 계․하나의 무리․하나의 주처에 살며 포살이나 자자를 함께 

                실행한다면 화합승이라고 한다."  

 

세세한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같은 계 안에 거주하는 4명 이상의 동주(同住) 비구들이 함께 포살이나 자자, 혹은 갈마 등의 종교 행사를 행한다면 그것이 화합승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율장에서는 불교 승단의 실질적인 운영이 모두 현전승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현전승가란 지역적 경계인 계(界, sīmā)를 중심으로 최저 4명 이상의 비구(니)로 구성될 수 있으며, 이 안에 거주하는 비구들은 포살이나 자자, 갈마와 같은 승단의 중요한 행사에 반드시 전원 참석해야 한다. 화합승이란 현전승가의 동일한 계 안에 살고 있는 4명 이상의 비구들이 포살 등의 승단 행사에 전원 참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설사 비구들이 싸운다 하더라도 포살 등을 같이 하는 한 화합승이라고 하는 『마하승기율』의 기술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화합승에 대하여 품고 있는 생각과는 사뭇 다른 정의로써 특히 주목할 만하다. 

 

2. 파승의 의미

파승(破僧)이란 화합승이 깨진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상 소개한 화합승의 정의로부터 생각한다면, 파승이란 동일한 계의 비구들이 따로 따로 포살이나 자자, 갈마와 같은 승단의 행사를 실행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파승에 관해서는 제 율의 곳곳에 설해져 있으며, 특히 데와닷타(Devadatta)의 파승 사건과 관련해서 경분별(經分別, Suttavibhaṅga)의 승잔법 제10조와 제11조, 그리고 건도부 소품의 「파승건도」에서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이 부분들에 보이는 파승의 정의에 관해서는 이미 佐々木 閑가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고 있으므로, 이하 그의 연구를 중심으로 파승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佐々木는 제 율에 보이는 파승의 정의를 상세히 검토한 결과, 내용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즉 파갈마승(破羯磨僧, karmabheda)과 파법륜승(破法輪僧, cakrabheda)이다. 이 중 파갈마승이란 동일한 계 안의 비구들이 따로 따로 포살이나 자자, 갈마를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위에서 본 화합승의 정의와 정확하게 대응하는 개념이다. 한편, 파법륜승이란 불설(佛說)에 반하는 이설(異說)을 제창하는 것에 의해 도당을 모으고 독자적인 집단을 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파승의 정의는 모든 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율마다 채용하는 파승의 정의가 다르다. 즉『마하승기율』에서는 파갈마승 만이 파승의 정의로 사용되는 한편,『십송율』에서는 파법륜승 만이 파승의 정의로 사용되며, 이 외의『빨리율』이나『사분율』,『오분율』에서는 이 두 가지 파승의 정의가 혼재하고 있다. 이하 각 율의 파승 정의를 살펴보자. 

 

먼저, 『마하승기율』에서는 파승에 관하여 묻는 우바리에게 붓다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법에 따라 율에 따라 바르게 진리를 이해하고 있는 훌륭한 비구에 대해서는 예배․공경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 만약 어떤 비구가 그러한〔훌륭한〕비구의 설이 비법이며, 그러한 가르침에 따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여 승단에 싸움이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 승단이 하나의 계 안에서 공주(共住)하고 설계 및 갈마를 함께 실행하고 있는 한은 파승이 아니다. 내가 이미 규정한 일계일주(一界一住)에서 따로 따로 포살․자자․갈마를 행하는 것이 파승이다.

 

『마하승기율』에서 화합승과 파승을 구별하는 기준은 명확하다. 승단에 싸움이 발생하고 불화가 생겼다하더라도 이것은 파승이 아니다. 오로지 동일한 계 안에서 포살이나 갈마와 같은 승단 행사를 함께 하는가 아닌가 하는 점이 파승을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마하승기율』의 다음과 같은 기술로부터도 이 점은 분명하다.

 

또한 모든 자가 파승을 원하고 있지 않아도, 주처․계를 하나로 하면서 포살이나 자자, 승단 행사를 따로 따로 행한다면 이것을 파승이라고 한다.

1) 復不一切欲破僧. 但一住處. 共一界. 別衆布薩. 別自恣. 別作僧事. 是名破僧. (『마하승기율』
   권26, 대정장22, p. 441a)

 

한편, 『십송율』의 경우에는 다음과 같다.

 

14가지 파승의 원인이 있어 그 중의 어느 것인가가 관련되어 있는 경우〔파승이 된다〕. 14가지란,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주장하는 것. 법을 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 …… 만약 이 비구가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주장하며, 법이 아닌 것으로 비구들을 교화․설득하고 화합승을 분열시킨다면 화합승이 분열한 시점에서 그는 대죄를 저지른 것이 된다. 대죄를 저지르면 일 겁 동안 아비지옥에 떨어진다. …… 우바리여!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을 경우, 파승이라고 한다. 즉 창설(唱說)과 취주(取籌)이다. 창설이란 데와닷따처럼 승단에서?나 데와닷따는 다음과 같이 제언합니다. 운운?이라고 3번 제언하는 것이다. 취주란 데와닷따가 첫 번째 제언을 한 후에 4명의 동료와 함께 주를 잡은 것과 같이〔주를 잡은 것이다〕.

2) 用十四破僧事. 若從是中隨所用事. 十四者. 非法說法. 法說非法. …… 若是比丘非法說法. 
   以是非法敎衆折伏衆. 破和合僧. 破和合僧已得大罪. 得大罪已. 一劫壽墮阿鼻地獄中. …… 
   優波離. 有二因緣. 名破僧. 一唱說二取籌. 唱說者. 如調達於僧中乃至第二第三唱言. 
   我調達作是語. 取籌者. 如調達初唱竟共四伴取籌. (『십송율』권37, 대정장23, p. 266b)

 

즉 불설에 반하는 잘못된 14가지 주장을 하며 투표를 행하여 동료를 모으고 화합승을 분열시켜 독자적인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파승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파승의 조건으로는 창설과 취주를 들고 있다. 즉 잘못된 주장을 제안하는 것과 이 안건을 가지고 투표를 행하는 것이다. 잘못된 교리를 제안하여 사람들을 현혹시켜 분열하게 만드는 것을 파승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십송율』의 파승 정의는 파법륜승으로, 분명 앞에서 소개한 『마하승기율』의 파승 정의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한편,『빨리율』을 비롯한『사분율』과『오분율』에는 두 가지 파승의 정의가 혼재한다. 먼저 『빨리율』에서는 승쟁(僧諍, saṃgharāji)과 파승(破僧, saṃghabheda)의 차이를 묻는 우빨리(Upāli)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는 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우빨리여! 여기에 비구들이 있어,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설하고 법을 법이 아니라고 설하며, 율이 아닌 것을 율이라고 설하고, 율을 율이 아니라고 설하며,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씀하지 않으신 것을 여래가 설하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며, 여래가 설하고 말씀하신 것을 여래가 설하지 않고 말씀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행한 것이라고 하며, 여래가 행한 것을 여래가 행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여래가 제정하지 않은 것을 여래가 제정하였다고 하며, 여래가 제정한 것을 여래가 제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무죄를 죄라고 하며, 죄를 무죄라고 한다. 경죄(輕罪)를 중죄(重罪)라고 하며, 중죄를 경죄라고 한다. 유여죄(有餘罪)를 무여죄(無餘罪)라고 하며, 무여죄를 유여죄라고 한다. 추죄(麤罪)를 추죄가 아니라고 하며, 추죄가 아닌 것을 추죄라고 설한다. 그들이 이 18가지 점에 있어 나뉘고 분열하여, 별개의 포살․별개의 자자․별개의 갈마를 행한다면, 우빨리여! 이것이 파승이다. 

3) Vinaya-piṭaka, vol. ⅱ, p. 204.

 

이 정의에 따르면, 파승이란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주장하는 등의 18가지 잘못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따로 모여서 포살이나 자자, 갈마를 했을 때에 성립된다. 이것은 명확히 파법륜승과 파갈마승이 혼재된 정의이다. 즉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주장하는 등의 18가지 잘못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 ?라고 하는 전반 부분은 파법륜승에 해당하며, ?따로 모여서 포살이나 자자, 갈마를 했을 때?라고 하는 후반 부분은 파갈마승에 해당된다. 그러나 파승이 성립되는 시점은 따로 따로 포살 등을 행하는 때라고 보여지며, 파갈마승 쪽에 좀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한편『사분율』의 파승 정의는 다음과 같다.

 

두 가지 파승이 있다. 망어(妄語)와 상사어(相似語)이다. 이 두 가지에 의해 파승한다. 우바리여! 또한 두 가지 파승이 있다. 갈마를 하는 것과 사라(舍羅, salākā)를 잡는 것이다. 우바리여! 한 명의 비구는 파승할 수 없다. 어떤 수단을 써도 파승은 할 수 없다. 또한 비구니․식차마나․사미․사미니도 파승할 수 없다. 어떤 수단을 써도 파승은 할 수 없다. 우바리여! 한 쪽 무리에 한 명의 비구가 있고, 〔또 다른 한쪽 무리에 한 명의 비구가 있어〕그 사람이〔각각의 무리에서〕파승 사라를 행하고 갈마를 해도 파승은 할 수 없다. 단지 승단을 더럽히는 것일 뿐이다. 두 명, 세 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바리여! 만약 한쪽 무리에 4명 이상이 있고, 다른 한쪽 무리에도 4명 이상이 있어 파승 사라를 행하고, 갈마를 행한다면 이것을 바로 파승이라고 한다.

4) 有二事破僧. 妄語. 相似語. 以此二事故破僧. 優波離復有二事破僧. 作羯磨. 取舍羅. 
   優波離. 一比丘不能破僧. 雖求方便亦不能破僧. 亦非比丘尼非式叉摩那沙彌沙彌尼
   破僧. 雖求方便破僧亦不能破僧. 優波離此衆一比丘彼行破僧舍羅作羯磨. 如是不能
   破僧但令僧塵垢. 二人三人亦如是. 優波離. 若此衆四人若過. 彼衆四人若過行破僧
   舍羅作羯磨. 優波離齋是名爲破僧. (『사분율』권46, 대정장22, p. 913b)

 

『사분율』의 이 기술에도 파법륜승과 파갈마승이 혼재되어 있다.『오분율』의 정의도 이와 유사하다.

 

4사(事)가 있으면 파승이라고 한다. 즉, 5법을 설하는 것․스스로 투표를 행하는 것․주를 잡는 것․계 안에서 따로 따로 승단 행사를 행하는 것이다. 또 묻기를 "어떤 것이 승단이 불화합하는 것이며 파(破)가 아닙니까?" 부처님이 대답하셨다. "만약 왕이 파승을 도와 승단으로 하여금 불화합하게 해도 파는 아니다. 만약 대신이나 우바새․우바이․비구니․식차마나․사미․사미니․7명 이내의 비구가 파승을 도와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만약 상좌에게 묻지 않고 승사를 행했다면 이것은 불화이지만 승을 깬 것은 아니다. 만약 함께 식사하지 않고, 식사 때 자리를 달리 하고. 투쟁 매리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계 안에서 8명의 비구가 나뉘어서 2부를 이루고 따로 따로 승사를 행하게 되면 비로소 파(破)라고 한다."

5) 有四事名破僧. 說五法自行籌捉籌於界內別行僧事. 又問. 云何名僧不和合而非破. 佛言. 
   若王助破僧令僧不和合而非破. 若大臣優婆塞優婆夷比丘尼式叉摩那沙彌沙彌尼一比
   丘乃至七比丘助破僧亦如是. 若不問上座而行僧事. 是卽不和亦非僧破. 若不共同食於
   食時異坐鬪諍罵詈亦如是. 要於界內八比丘分作二部別行僧事乃名爲破. (『오분율』
   권25, 대정장22, p. 166a)

 

『사분율』과『오분율』의 정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승쟁과는 달리 파승은 비구만이 할 수 있으며, 반드시 8명 이상의 비구가 필요하다6). 즉 현전승가는 최소 4명 이상으로 구성될 수 있기 때문에 각각 독립된 승단을 형성할 수 있도록 대립하는 양파(兩派)에 각각 4명씩의 비구가 필요한 것이다. 

6) 한편,『빨리율』과 『십송율』에서는 파승하기 위해서는 9명의 비구가 필요하다고 한다. 
   각각의 승단을 형성할 4명씩의 비구들과 함께, 법을 법이 아니라고 설하는 등의 18사, 
   내지 14사를 주장하는 자를 따로 헤아리고 있기 때문이다. Vinaya-piṭaka, vol.ⅱ, pp. 
   203~204; 『십송율』권37, 대정장23, pp. 266b~267a.

 

이상 살펴 본 바와 같이 제 율의 파승 정의에는 차이가 있다. 이 두 가지 파승의 정의는  승단 운영상 매우 큰 차이를 야기할 수 있다. 파법륜승에 따른다면 서로 다른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의 공동 생활은 불가능하지만, 파갈마승에 의하면 서로 다른 주장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승단 행사만 같이 한다면 공동 생활을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질적인 면에서 큰 차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두 개의 파승 개념이 제 율에는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제 율에 2종의 파승 정의가 보이는 것에 관하여, 佐々木 閑는 파승의 정의가 아쇼까 왕 시대의 어떤 사건을 계기로 파법륜승7)→파갈마승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본 논문에서는 이 점에 관한 자세한 언급은 생략하겠지만, 필자는 불멸 후에 파승의 정의가 필연적으로 파갈마승 쪽에 중점이 놓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불설에 반하는 잘못된 주장을 하며 비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독자적인 승단을 형성하는 파법륜승은 파승의 정의로써 현실적으로 점점 애매한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아주 미묘한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에, 법과 율을 직접 설한 붓다라는 최고의 권위가 사라진 이상, 과연 누가 불설과 비불설을 명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승단 내에 아무리 많은 지법자나 지율자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끊임없이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서로가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며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파승의 승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7) 파법륜승의 대표적인 사건은, 붓다의 가르침에 반하는 오사를 주장하며 4명의 비구를 
   데리고 독립된 승단을 형성한"데와닷따(Devadatta)의 파승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파법륜승은 붓다 내지 붓다의 가르침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파법륜승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붓다 재세 당시에 붓다를 대상으로 그의 법에 반하
   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파갈마승의 경우는 다르다. 이것은 승단의 의식을 함께 하느냐 아니냐는 문제이므로, 명확하게 화합과 파승 여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파승의 정의로서는 매우 분명한 기준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Ⅲ. 부동주로부터 본 화합의 의미

 

제 율에는 파승 사건이 몇 가지 전해지는데, 이 중에서 특히 율장 건도부「꼬삼비건도」에 전해지는 분열 사건은 파갈마승의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십송율』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구사미에서〔승단이 분열한 사건에서는〕어느 시점을 가지고 파승이라고 하는가? 답하기를 구사미의 비구들이 동일계․동일주처에 있으면서 따로 따로 포살 및 갈마를 행한 때를 가지고 파승이라고 한다.

8) 俱舍彌何時名破僧. 答若俱舍彌比丘界內共一住處. 別作布薩及諸羯磨. 爾時名破僧. 
   (『십송율』권55, 대정장23, p. 408a)

이 기술로부터 알 수 있듯이, 꼬삼비에서 발생한 비구 승단 분열 사건은 분명 파갈마승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하, 제 율에 전해지는「꼬삼비 건도」의 내용을 요약하여 일부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9)

9) 제 율의「꼬삼비 건도」는 다음과 같다.『빨리율』Vinaya-piṭaka, vol.ⅰ, pp, 337~360; 
   『사분율』권43, 대정장22, pp. 879b~885a; 『오분율』권24, 대정장22, pp. 158c~
   161a;『십송율』권30, 대정장23, pp. 214a~217c; Mūlasarvāstivādavinaya Kośāmvakavastu, 
   N. Dutt, Gilgit Manuscripts, vol. Ⅲ-2, pp. 173~196. 단,『마하승기율』에는 정확하게 
   대응하는 부분이 없으며, 대정장22. pp. 439b~440b, 440b~441b, 334c~335b에 유사한 
   기술이 발견될 뿐이다.

 

부처님이 꼬삼비의 고시타원(Ghositārāma)에 계실 때, 어떤 비구가 죄를 저질렀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비구들 중 일부가 그의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주장함에 따라 이 비구도 자신의 행동이 죄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 비구의 행동을 죄라고 생각하는 비구들이 일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며 거죄(擧罪)갈마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비구들은 이 갈마를 무효라고 주장하며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양자 사이에 싸움이 발생하였다. 이를 들으신 부처님은?비구 승단은 분열했다(bhinno bhikkhusaṃgho)?고 한탄하시며, 각각의 비구들에게 다가가 죄를 인정하지 않는데 거죄갈마를 하거나, 죄를 저질러 놓고 참회하지 않는다거나 한다면 승단에서 따로 따로 포살이나 자자, 갈마 등이 행해지고 결국 논쟁이나 시비가 발생하여 파승(破僧)을 불러일으키게 될 것이니, 서로 상대가 말하는 것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충고하고 떠나셨다.

 

그때 거죄된 비구를 따르는 비구들은 계 안에서 포살이나 승갈마를 행하고, 거죄한 쪽의 비구들은 계 밖으로 나가서 따로 따로 포살이나 승갈마를 행했다. 이것을 들은 부처님은 "만약 그 거죄된 비구에게 따르는 비구들이, 혹은 거죄한 비구들이 각각 내가 제정한 백(白, ñatti)이나 창설(唱說, anussāvana)에 의해 각각 포살이나 승갈마를 한다면 그것은 여법(如法)하며 부동(不動)이며 응리(應理)이다. 왜냐하면 이 비구들은 너희들과 부동주(不同住)이며, 너희들은 그들과 부동주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10) Vinaya-piṭaka, vol. ⅰ, p. 340.

 

한 비구의 행동이 범계(犯戒)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승단에 싸움이 발생하여 결국 파승으로까지 발전한 사건으로, 결국 양쪽 비구들이 각각 계를 달리하여 개별적으로 포살이나 갈마를 하기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부동주(不同住, nānāsaṃvāsaka)라는 개념에 관해서는 이미 발표한 적이 있으므로, 본 논문에서는 부동주가 화합승의 실현과 관련해서 지니는 중요성에 관하여 언급해 두고자 한다.

 

「꼬삼비 건도」를 참고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현전승가 안에서 비구들간에 싸움이 발생했다고 하자. 한쪽에서 무리하게 거죄갈마를 행하여 벌하려고 하지만, 상대방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며 갈마의 무효를 주장한다. 서로 조금도 양보할 마음이 없다. 게다가 각각 지지하는 세력이 있어 팽팽히 맞서고 있고,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을 판단할 만한 명확한 근거도 찾기 힘들다. 양쪽 모두 자신들이 여법설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어느 쪽도 반성하거나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승단 행사를 해야 하는데 이미 승단에 심각한 불화가 발생한 상황이므로 한 자리에 모여 의식을 진행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다. 어느 한 쪽이 양보하고 물러서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은 수습될 수 없다. 그렇다고 동일한 계 안에서 따로 따로 포살을 하자니 이것은 명백히 파갈마승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비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위에서 언급한 「꼬삼비 건도」의 후반 부분에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대립하던 비구들 중, 거죄갈마를 행한 쪽 비구들이 계 밖으로 나가서 포살이나 갈마 등을 실행하고, 거죄갈마를 받은 비구들은 계 안에서 포살 등을 실행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붓다는 이 행동에 대하여 만약 그들이 제정된 대로 행한다면 여법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써 서로 부동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주어진다. 즉 서로 싸우며 분열하고 아직 화해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서로 부동주라면 각기 개별적으로 하는 승단 행사를 여법한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미 다른 논문을 통해 고찰한 바와 같이, 부동주가 되는데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스스로 자신을 부동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승가가 화합하여 그를 불견(不見)․불참회(不懺悔)․불사(不捨)로 거죄하는 것이다. 이 중 "스스로 자신을 부동주로 한다"는 것은 율마다 기술이 달라 명확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모든 기술을 종합하여 생각해 볼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는 그룹으로 옮겨가 그 일원이 되는 것에 의해 다른 그룹의 비구들과 부동주의 상태가 되는 것, 혹은 자신의 동조자를 찾아 승가를 깨고 나가는 것에 의해 자신이 속해 있던 승가의 비구들과 부동주의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승가가 화합하여 그를 불견․불참회․불사로 거죄하는 것"이란 비구가 죄를 저지른 경우, 다른 비구로부터 그 죄를 지적 받고도 인정하지 않거나, 참회하지 않거나, 견해를 버리지 않는 경우에 화합 승가가 불견죄거죄갈마(不見罪擧罪羯磨, āpattiyā adassane ukkhepaniyakamma)․불참죄거죄갈마(不懺罪擧罪羯磨, āpattiyā appaṭikamme ukkhepaniyakamma)․불사악견거죄갈마(不捨惡見擧罪羯磨, pāpikāya diṭṭhiyā appaṭinissagge ukkhepaniyakamma)라는 3종의 거죄갈마를 행하는 것에 의해 그 비구를 부동주의 상태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부동주에 관한 이 두 가지 설명으로부터 보아, 부동주란 주로 견해의 대립을 계기로 스스로 또는 승가의 갈마에 의해 타의로 놓이게 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로 사정은 다르지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비구들과 함께 거주하고 공동 생활을 함으로써 대립하는 다른 비구들과 정신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분리된 상태에서 생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부동주의 개념이 율장에서 용인되고 있다는 사실은, 비구들이 하나의 계 안에서 대립하며 분열할 경우에 자신이 여법하다고 생각되는 쪽의 비구들과 함께 새로운 계를 만들고 자신들만의 현전승가에서 화합하여 포살이나 갈마를 실행하는 것이 인정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독립하여 현전승가를 새롭게 만들어도 된다고 명확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승단 행사를 하기 위해서는 계를 설정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계 밖으로 나간 비구들이 계를 설정하지 않고 의식을 거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계를 설정하면 자연스럽게 현전승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의미로 파악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꼬삼비 건도」의 이 기술은 주목할 만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거죄갈마를 받은 자들은 범계자(犯戒者)들이므로 해죄갈마를 받기 전까지는 정식 비구라고 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이들이 자신들끼리 하는 승단 회의 등은 여법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아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분명 이들이 개별적으로 행하는 포살 등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실행되는 것이라면 여법한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불교 승단이 생각하는 화합승의 중요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즉 견해의 차이로 인하여 승단에 불화가 생겼을 경우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여법한 비구들에게 동조하여 그들과 함께 화합하는 것도 파승을 피하고 불교 승단 전체의 화합을 유지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는 한, 양쪽 비구들은 서로 부동주이므로 각각 불교 승단의 정식 비구로써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이다.11)

11) 이와 같은 태도는「꼬삼비 건도」에 전해지는 싸우는 비구들에 대한 사부대중의 
    태도에 관한 붓다의 가르침으로부터도 충분히 엿 볼 수 있다. 꼬삼비에서 싸우던 
    비구들이 부처님을 만나기 위하여 사왓띠로 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부대중이 각각 
    그들이 사왓띠에 왔을 때 어떻게 행동하면 좋은가에 관하여 부처님께 여쭙는 이
    야기가 전해진다. 이때 부처님은 출가자들에게는 양쪽 비구들의 이야기를 공평하
    게 들어 준 후에 비법설자와 여법설자를 구분하는 18사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할 것을, 한편 재가신자에게는 양쪽에게 똑 같이 보시를 하고 법을 들은 후에 
    여법설자가 누구인가를 판단해야 한다고 설하셨다. 똑 같은 불교 승단의 비구로써 
    어떠한 선입견도 갖지 말고 공평하게 의견을 들어 본 후에 경과 율에 비추어 판단
    하라는 것이다. 또한 이 비구들이 사왓띠에 도착하자, 부처님은 이들이 다시 충돌
    할 것을 염려하시어 와좌처(臥坐處)를 분리해서 주도록 사리불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어떠한 경우에도 상좌비구가 와좌처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
    다고 하신다. 그리고 옷과 음식은 공평하게 나누어주라고 지시하신다. 
    (Vinaya-piṭaka, vol.ⅰ, pp. 354~356)

 

한쪽 비구들이 자신들에게 행해진 갈마의 결정에 끝내 굴복하지 않는다면 결코 강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서로를 부동주로 인정하며 자신들이 여법이라고 생각하는 쪽의 비구들과 함께 생활하고 포살 등을 행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 볼 여유를 갖는 것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비구들은 서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화합승이나 파승의 정의로부터도 알 수 있듯이, 비구들간의 싸움은 화합을 재는 절대적인 판단 조건이 아니다. 물론 대립하지 않고 항상 물과 우유처럼 조화를 이루며 상대방에 대하여 기쁨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이므로 때로는 싸움도 발생하고 대립하는 일도 생긴다. 이 때 서로 동일한 계 안에서 쟁론만 거듭하다가는 파승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부동주는 현실적으로 파갈마승을 막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부동주에 근거하여 개별적으로 행하는 포살을 인정하게 되면, 파갈마승이 발생할 염려는 사라진다. 이들은 서로 계를 달리 하는 자들이므로 포살 등의 승단 행사를 함께 실행할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꼬삼비 건도」에 전해지는 부동주에 관한 기술에서, 대립하던 비구들 중 거죄갈마를 행한 쪽 비구들이 계 밖으로 나가서 포살이나 갈마 등을 실행하고, 거죄갈마를 받은 비구들은 계 안에서 포살 등을 실행했다는 점은 신중하게 고려해 볼 여지가 있다. 보통 세간의 상식이라면, 거죄갈마를 행한 쪽 비구들이 원래의 현전승가를 장악하고, 거죄갈마를 받은 쪽 비구들이 밖으로 쫓겨 나가는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그런데 이 건도의 전승에 따르자면, 오히려 갈마를 행한 비구들이 승단의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비구들을 남겨 둔 채 계 밖으로 나가서 포살 등을 개별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승단이 쟁사를 해결하고 화합승을 실현해 가는데는 분명 세간의 가치 체계와는 구별되는 기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화합 포살의 의미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양쪽 비구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돌이켜 볼 만한 시간적․정신적인 여유를 갖게 되면, 때로는 분열했던 승단의 구성원들이 다시 화합을 희망하게 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자신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승단의 화합이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파승을 한다거나 독립해서 나가 버린다는 것은 왠지 내키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어느 한쪽이 혹은 양쪽 비구들이 서로 반성을 하며 화합을 바란다면, 승단은 적절한 절차를 거쳐 다시 화합승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 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포살(布薩, uposatha)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설사 하나의 계 안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승쟁(僧諍, saṃgharāji)일 뿐 파승은 아니다. 파승이란,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동일한 계 안에서 나뉘어 개별적으로 승단 행사를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승단의 화합이 포살과 같은 승단 행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살은 동일한 계를 중심으로 성립한 현전승가의 비구(니)들이 한 자리에 모두 모여 바라제목차를 암송하며 보름동안의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청정과 화합을 확인하는 모임이다. 포살에는 동일한 현전승가에 소속되어 있는 비구(니)들이 전원 참석해야 하며 단 한 명도 불참해서는 안 된다. 단, 병 등의 이유로 도저히 참석 불가능한 경우에는 자신의 청정함을 다른 비구를 통해 승단에 알려야만 한다. 이것을 여청정(與淸淨)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청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심각할 경우에는 다른 비구들이 병든 비구의 처소에 가서 포살을 해야 한다. 이 정도로 포살에는 동일한 계 내의 비구들의 전원 참석이 필수이며, 만약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이유 없이 불참하는 비구가 생긴다면 그것은 곧 승단의 불화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보름마다 이루어지는 이 포살은 정기적인 것으로, 만월과 신월에 각기 한 번씩 열린다. 그런데 승단에는 이 정기적인 포살 이외에?화합 포살(和合布薩, sāmaggiuposatha)?이라고 하여 비정기적인 포살이 있다. 이것은 분열했던 승단이 다시 화합 승단이 되고자 할 경우에 실행하게 되는 포살이다. 이 포살의 존재는 제 율의 「꼬삼비 건도」 및 간단하게 나마 「포살건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포살건도」에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언급이 있다.

 

비구들이여! 포살〔일이〕아닌 때에 포살을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승단의 화합을 위한 경우는 제외한다.

12) na ca bhikkhave anuposathe uposatho kātabbo aññatra saṃghasāmaggiyā ?ti.
    (Vinaya-piṭaka, vol. ⅱ, p. 136) 

 

이 기술을 통해, 정기적인 포살 이외에 승단이 화합하고자 할 경우에 하게 되는 포살의 종류가 따로 있음을 엿 볼 수 있는데, 이 화합 포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꼬삼비 건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빨리율』에 의하면, 이 건도의 후반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거죄된 비구는 경과 율을 살펴 본 후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편을 들어 준 비구들에게 청하여 해죄(解罪) 갈마를 받았다. 해죄 갈마를 한 후, 이 비구들은 이전에 거죄갈마를 실행했던 비구들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 지금까지의 싸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승단 화합을 이룰 것(saṃghasāmaggiṃ karoti)" 을 제안했다. 이 일을 들으신 부처님은 화합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일러주셨다. "병든 자와 병들지 않은 자 그 누구도 구별 없이 모두 한 자리에 모인 후, 총명 유능한 비구가 나와 사건의 경과를 고하며 승단 화합을 하자는 내용의 백을 선언한다. 그리고 나서 이에 대한 찬반 여부를 모인 비구들에게 한번 묻는다. 반대 의견이 없으면, 승단 화합을 인정하는 갈마는 이루어진 것이 된다. 갈마가 끝나면 즉시 포살 의식을 행하고 바라제목차를 암송해야 한다."

13) Vinaya-piṭaka, vol. ⅰ, p. 357

 

즉, 한 비구가 범계(犯戒)를 하고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비구들의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을 계기로 승단이 분열했다. 사태는 붓다 조차도 중재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해지고, 결국 재가신자들의 행동에 위기를 느낀 비구들이 붓다에게 중재를 요청하기 위해 움직이다가 범계 비구가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이 속해 있던 승단에서 해죄갈마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분열했던 승단이 서로 화합의 뜻을 밝힘으로써 문제는 해결된 것이다.

 

그러나 단지 '우리 화합합시다'라는 말로 화합이 성립될 리는 없다. 파승의 조건을 해소시키지 않으면 화합승으로는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이다. 동일한 계 안에서 따로 따로 포살을 행하는 것이 파승이라면, 함께 모여 포살을 하는 것으로 파승 상태를 해소하고 화합을 찾아야 한다. 

 

분열했던 두 승단이 서로 화합하고자 한다면, 먼저 어느 한 쪽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하며 화합의 뜻을 밝힌다. 이에 다른 한 쪽 비구들도 동의하면 모든 비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승단 화합을 확인하는 갈마를 행하고 이어서 화합의 표시로 바라제목차를 읊으며 포살을 하는 것이다. 이 때 하는 포살을 화합 포살이라고 한다. 이 화합 포살은 분열했던 승단이 다시 화합했음을 승인하고 상징하는 유일한 의식으로, 승단 운영상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개인의 경우에는 승단의 충고도 거부하고 자신의 주장을 계속 고집한다면 거죄갈마를 통해 일정한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만약 반성하고 뉘우치면 해죄 갈마를 받고 승단에 복귀할 수 있다. 

 

그러나 승단의 경우에는 갈마를 한 후에 바라제목차를 암송하는 화합 포살을 함으로써 완전한 화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 화합 포살은 분명 파갈마승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일한 계 안의 비구들이 포살 등을 따로 따로 하는 것이 파갈마승이므로, 함께 포살을 하는 화합 포살을 통하여 파승 상태를 해소하고 화합승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승가 공동체는 무엇보다 화합 실현을 최고의 이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승단의 구성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이익보다는 승단의 화합을 최우선으로 하며, 승단의 모임이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접어두고 참석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충돌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심각한 경우에는 파승도 일어날 수 있다. 특히 파갈마승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때 어느 한 쪽이, 혹은 양쪽 모두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참회하며 화합을 바란다면, 불교 승단은 갈마를 통하여 이러한 의지를 확인한 후, 화합 포살을 실행함으로써 화합승으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그러나 승단에 싸움이 생겨 파승이 발생할 만한 사건이 있을 경우, 그 사건을 조사하고 일의 진상을 이해한 후에 승단의 화합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여법한 승단의 화합으로, 화합 포살도 이러한 경우에 이루어져야 한다. 즉 승단에 쟁사가 발생하면 잘 조사하여 사건의 원인을 잘 파악한 후에 화합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차 없이 이루어진 화합이란 문자만 있는 화합으로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들을 앞서서 풀어 나가야 할 총명 유능한 비구는 계율에 허물이 없고, 항상 주의 깊게 행동하며, 자신의 감관을 잘 제어하는 자라야 한다. 또한 적으로부터 조차 질책 당할 만한 것이 없어야 하며, 모임에서 어떠한 질문을 받아도 주저하지 않고 항상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며, 선배 비구들을 존중하고 경과 율에도 정통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승단의 의무에 대해서도 설해진 대로 잘 처리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이 화합이란 항상 여법한 비구의 주도하에 여법한 방법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이 화합 포살은 칠멸쟁법 중 여초부지(如草覆地, tiṇavatthāraka)14) 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여초부지가 멸쟁법의 한 방법으로써, 대립 상태가 심각하고 수습하기 어려워 이대로 방치하면 파승의 위험이 있을 경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서로 화해하는 방법으로 쟁사를 해결하는 방법이라면, 화합 포살은 이미 분열해 버린 두 승단이 화합에 동의하고 이를 확인하는 갈마를 실행한 후에 화합의 표식으로 행하는 마지막 의식이라고 볼 수 있다.

14) Vinaya-piṭaka, vol. ⅱ, pp. 86~88. 여초부지는 비구들이 심각하게 대립하고 있는 
    경우에 승단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조정을 시도하고 그것을 양쪽 비구들이 받아들이는 
    식으로 쟁사를 해결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쟁론하는 양쪽 비구들이 모두 한 곳에 모인 
    뒤에, 한쪽 파의 비구 중에서 총명 유능한 비구가 나와 현재의 심각한 상황을 고하며, 
   자신을 비롯한 승단의 모든 구성원들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죄를 덮어버리고 이 쟁사
    를 여초부지에 의해 해결할 것을 제안한다. 다른 파의 비구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하여 양측 비구들이 각각 사태를 수습하는 것에 동의하면 쟁사는 해결되는 것이다. 
    이 때, 바라이나 승잔죄와 같은 중죄(thūlavajja)나 재가상응죄(在家相應罪, 
    gihipaṭisaṃyutta)는 제외된다. 왜냐하면, 바라이나 승잔죄는 매우 중대한 죄로 그에 
    상당하는 벌이 있으므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덮어버릴 수 없으며, 재가상응죄는 
    재가인이 비구의 참회를 인정하고 용서하지 않는 한 출죄할 수 없으므로 이 양자는 
    제외하는 것이다.

 

Ⅴ. 결  론

이상, 제 율을 자료로 화합승과 파승의 의미, 그리고 승단의 화합과 관련하여 부동주나 화합 포살이 갖는 의미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화합승과 파승을 가리는 기준은 같은 계 안에 거주하는 4명 이상의 동주(同住) 비구들이 포살이나 자자, 혹은 갈마 등의 종교 행사를 함께 실행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이것은 현전승가라고 하는, 소단위이지만 율장의 모든 규칙들이 직접 적용되는 공동체를 하나의 기준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현전승가가 모여서 사방승가라고 하는 거대한 불교 교단이 완성된다. 한마디로 "불교 교단의 화합"이라고 해도 너무나 막연한 표현이므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개개의 현전승가를 기준으로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승단 행사의 화합 여부를 통해 승단의 화합을 결정하는 것이다.

현전승가에서는 언제든지 비구들간에 싸움이 발생할 수 있다. 사소한 문제든지 심각한 문제든지 일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양쪽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승단에 혼란을 일으키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승쟁(僧諍)이다. 이 때 승쟁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여러 가지 멸쟁법 등이 적용되는데, 이성적으로 이 방법들을 적용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적용했으나 양쪽 중 어느 한 쪽이 그 과정이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등의 중대 상황이 발생하여 서로 대립으로만 치 닫을 경우가 있다. 이 때, 동일한 계 안에서 함께 포살 등의 승단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파승 행위라는 것을 알면서도, 절대로 비법설자들과 함께 포살을 하고 싶지 않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여법설자라고 판단한 쪽의 비구들과 동주하며 승단 행사를 함께 함으로써 파갈마승의 상황을 피하는 것도 화합승 실현의 한 방법이다. 같은 계 안에서 서로를 의식하며 감정 싸움을 계속하다가는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잠시 떨어져 있음으로써 마음도 가라앉히고, 자신들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여유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여전히 각자 양보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서로 부동주의 상태로 남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음을 깨닫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행동에 전혀 잘못은 없는 듯 하지만 승단의 화합이라는 면을 중시해서 한 발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대립했던 상대 비구들에게 화합의 뜻을 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서로가 동의하게 되면 전원 한 자리에 모여 화합 갈마를 하고, 마지막으로 그 표식으로 바라제목차를 읊으며 화합 포살을 행함으로써 화합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꼬삼비 건도」에 전해지는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승단에서 늘 발생할 수 있는 파갈마승에 대한 훌륭한 대처법을 보여 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론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불교 승단은 화합승의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 공동체이다. 평상시에 화합을 깨뜨리지 않도록 구성원들이 서로 노력하는 것이 물론 최선이겠지만, 율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파승이라는 상황이 발생한 경우에도 이를 적절한 방법으로 수습하여 다시 화합승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기회를 서로에게 부여하는 것 또한 화합승 실현을 위한 여법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