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율장

초기경전에 나타난 경제사상

실론섬 2015. 7. 15. 17:33

초기경전에 나타난 경제사상

이 수 창(마성 스님)

 

Ⅰ. 머리말
Ⅱ. 인간생활에 있어서 경제의 중요성
    1. 경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
    2. 빈곤과 재산의 효용성
Ⅲ. 재산과 경제운용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
    1. 재화의 획득과 소비
    2. 불교의 직업관과 분배의 윤리
Ⅳ. 이상적인 불교의 경제모델
    1.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
    2. 시장경제에 대한 불교적 비판
Ⅴ. 맺음말

 

Ⅰ. 머리말

붓다는 언제나 상대편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했다. 즉 청취자의 능력과 수준에 따라 각기 다르게 법을 설했다. 이러한 붓다의 설법태도를 對機說法 혹은 應病與藥이라고 한다. 따라서 붓다의 설법은 크게 출가자를 위한 교설과 재가자를 위한 교설로 구분된다. 특히 불교의 사회․경제사상에 있어서는 그 구별이 뚜렷하다. 왜냐하면 출가자와 재가자는 그 삶의 방식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논의된 불교의 경제사상은 대부분 이 점을 간과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불교의 경제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구분하여 논의할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흔히 불교도는 無所有의 淸貧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덕목은 출가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출가자는 三衣一鉢에 의한 무소유의 삶이 美德이다. 반면 재가자는 보다 많은 財貨를 획득해야만 생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출가자에게 요구되는 금욕적인 무소유의 생활을 재가자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붓다는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에게는 정당한 방법에 의해 열심히 노력하여 보다 많은 재화를 획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결코 붓다는 가난을 찬양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재물은 자신의 삶은 물론 타인에게도 안락을 줄 수 있고, 또 나머지 여력으로 성자와 출가자에게 공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은 붓다께서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에게 설한 경제사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래야 재산과 경제운용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경제사상은 후대의 대승불교에 오면 약간 다르게 해석된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불교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은 초기경전에 나타난 경제사상으로 한정하여 논의를 전개할 것이다. 그리고 초기경전에 나타난 불교의 경제사상 중에서도 특히 재가자를 위한 경제사상을 중심으로 살펴볼 것이다.   

Ⅱ. 인간생활에 있어서 경제의 중요성

1. 경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고 생활을 유지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財貨가 필요하다. 인간이 그들의 생활을 위하여 필요한 財貨(goods)와 用役(service)을 획득하고 이용하는 행위를 經濟行爲(economic activity)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고립해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성원으로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므로 일정한 사회조직과 사회질서 하에서 경제행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정한 사회조직과 사회질서 하에서 행하는 인간의 경제행위를 총칭하여 經濟(economy)라 한다.   

결국 인간이 생활을 영위해 나가자면 물질적 욕망과 정신적 욕망을 충족해 나가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우선 그 충족수단으로서의 재화와 용역이 풍부하게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경제란 결국 인간이 그 물질적 정신적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데 필요한 재화와 용역을 조달하는 일련의 사회적 질서(social order)라 할 수 있다. 사람은 개인으로서 그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재화와 용역의 조달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경제행위이다. 인간은 이러한 경제행위를 떠나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도 이러한 경제행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출가자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이 요구되기 때문에 예외일 수는 없다. 인간을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즉 ‘인간은 경제적 동물이다’라고 특징짓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사회․경제문제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 간혹 어떤 사람은 불교에 무슨 경제사상이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난다세나 라뜨나빨라(Nandasena Ratnapala)는 그의 저서『불교사회학(Buddhist Soci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불교에는 실질적인 경제 이론이 전혀 없다고 자주 말해진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는 것은 불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세계의 매일의 세속적인 문제에 종사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본질에 있어서는 초세속적인 종교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이다. 먼저 이 세상에서 올바른 생활로 이끌면 결국은 다음 세상에서 행복으로 이끌게 된다고 불교의 교설은 주장한다. 불교에서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다른 세계가 아닌 이 세상에서 훌륭하고 덕스러운 생활에 관한 것이다. 붓다에 의해 설해진 최종적인 깨달음인 열반조차 지금 이 생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   

일반적으로 붓다의 가르침(Buddha sāsana)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라고 말한다. 붓다의 근본교설인 四聖諦와 緣起法 등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다 적용되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연히 불교는 超世間的인 종교라거나 脫世俗的인 가르침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은 현실을 무시한 잘못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사실 종교도 역사적 産物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회 현상은 緣起의 原理에 의해 끊임없이 변천해 간다. 이와 같이 모든 사회현상은 끊임없이 변천해 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생활은 역사와 사회를 초월할 수 없다?고 말한다. 불교의 사회․경제사상은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社會苦 속에서도 경제문제로 야기되는 것이 수없이 많다. 특히 요즘같이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는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또한 경제정책의 잘못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苦에는 根本苦와 社會苦가 있다. 근본고는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고통, 즉 自然的․生理的인 苦를 말한다. 사회고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생기는 고통, 즉 人爲的․倫理的인 苦를 말한다. 후자를 다른 말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고통’이라고 한다. 불교의 응용학문인 佛敎經濟學(Buddhist Economics)에서는 사회고만을 문제로 삼는다.)[金鎭烈,「佛敎의 社會學的 接近 試論」, 『韓國佛敎學? 第13輯, 1988, p. 165.]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스님은 일찍이 인간생활에 있어서 경제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즉 

“불교는 오직 숭고한 이상, 더 높은 도덕적 철학적 사상에만 관심을 갖고 있으며, 사람들의 사회적 경제적 복지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잘못이다. 붓다는 인간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였다. 붓다는 행복은 도덕적 정신적 원리에 바탕을 둔 청정한 삶을 살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붓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물질적 사회적 조건에서 그러한 삶을 영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불교는 물질적 풍요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한 목표에 대한 보다 높고 고귀한 목표를 향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보다 높은 목적을 성취하는데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정신적 성공에 도움이 되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어떤 고적한 곳에서 명상에 전념하고 있는 승려에게도 최소한의 물질이 요구된다.”   

한마디로 물질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2. 빈곤과 재산의 효용성
모든 생명체들은 행복과 안락을 추구한다. 인간의 생활에 있어서 음식, 의복, 주거, 건강 및 교육과 같은 어떤 기본적인 필수품들은 행복과 안락한 삶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필수품들은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지 않고는 만족스럽게 충족될 수 없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재물이 없으면 그가 속한 집단에서의 사회적 역할은 물론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조차 유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난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괴로움이다. 金色王經에서는 “어떤 괴로움이 가장 무서운가 하면, 빈궁의 괴로움이다. 죽는 괴로움과 가난한 괴로움 두 가지가 모두 다름이 없으나 차라리 죽는 괴로움을 받을지언정 빈궁하게 살지는 않으리라.”라고 했다. 이처럼 불교는 빈곤을 인류의 적으로 보고 있다. 또한 가난은 범죄와 사회 타락의 근본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보고 있다. 붓다는 Cakkavattisīhanāda sutta(轉輪聖王獅子吼經)에서 빈곤(dāḷiddiya)이 절도, 거짓말, 폭력, 증오, 잔혹 등과 같은 부도덕과 범죄의 원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대의 왕들은 오늘날의 정부처럼 형벌로써 범죄를 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붓다는 Kūṭadanta-sutta(究羅檀頭經)에서 이러한 형벌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가를 설명한다. 이러한 방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 대신 붓다는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경제적 조건이 개선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종자와 다른 농업 설비가 농부와 경작자에게 공급되어야 하고, 자본금이 무역업자나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어야 하며, 적정한 임금이 고용원들에게 지급되어야만 한다. 이와 같이 국민들에게 충분한 소득을 올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고, 근심과 불안을 갖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나라는 평화롭고 범죄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인간사회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을 예찬하지 않았다. 붓다는 기회 있을 때마다 재가자들에게 재산이 있어야 자신을 지킬 수 있고, 또 다른 이웃도 돌 볼 수 있다고 되풀이했다.   

 

家長이여, 성스러운 제자는 努力精勵하고 땀을 흘려, 팔의 힘에 의해 바른 재산을 모아, 法에 따라 얻은 재물을 가지고 다음의 일을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즐겁게 하고 살찌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킵니다. 처자나 奴僕들과 使用人을 즐겁게 하고 살찌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킵니다. 둘째는 친구와 동료를 즐겁게 하고 살찌게 하며 바르게 행복을 지킵니다. 셋째는 水․火․國王․盜賊 등 좋아하지 않는 상속자들의 災害가 있을 때 재물로서 지키어 자기를 無事安穩하게 합니다. 넷째는 재물로서 친척․손님 돌아가신 先祖․國王․諸神들에게 獻供 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는 나태와 게으름을 여의고 忍行이 깊으며 겸손하고 자기를 잘 제어하며, 평안하고 태연한 修行者에게 施物을 제공하여 그 果報로 樂天에 태어나게 합니다.   
Aṅguttara Nikāya (=A.), ed. R. Morris and E. Hardy, 5 volumes, (London: PTS, 1885-1900), Ⅱ. p. 66.

 

이와 같이 재가자에게 있어서 재물은 자신의 행복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재물이 없으면 궁핍의 고통을 면할 수 없다. 재물이 있어야 나와 친척과 이웃에게 안락을 주고, 성자들을 공양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재가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Aṅguttara Nikāya(增支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家長이여, 세상에서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실현해야 할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이 네 가지는 무엇이겠는가?  
적법한 수단으로 재산이 나에게 오기를! 이것이 (실현해야 할) 첫 번째 조건이다.    
적법한 수단으로 얻은 재산이 있고, 좋은 평판이 친척들 스승들과 더불어 나에게 오기를!  이것이 … 두 번째 조건이다.    
적법한 수단으로 얻은 재산이 있고, 친척들 스승들과 더불어 좋은 평판을 얻으면, 장수하고 먼 과거에 이르기를! 이것이 … 세 번째 조건이다.  
재산을 얻고 … 좋은 평판이 … 그리고 장수한 후, 육신이 스러지면, 저 세상에서 행복한 목적지, 하늘세계[天界]에 이르기를! 이것이 … 네 번째 조건이다.   
가장이여,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서 얻는 것이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겁고도 어려운, 실현해야 할 네 가지 조건이다. 

Aṅguttara Nikāya (=A.), ed. R. Morris and E. Hardy, 5 volumes, (London: PTS, 1885-1900), Ⅱ. p. 66.

 

이 경전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부유하고 풍요로운 사람이 되길 원한다. 붓다는 이 타고난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있었다. 붓다에 의하면, 이것은 바람직하고 소중하며 즐거운 것이지만 얻기는 어려운 것이다. 한 개인이 부유하고 풍요해지고 나면, 그는 자신의 친척들과 스승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장수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세 가지 조건만으로는 재생을 믿는 한 개인의 삶을 행복하고 성공적이며 완전하게 만들지 못한다. 재산, 좋은 평판과 장수의 성취와 함께 그는 육신이 스러지면, 저 세상에서 행복한 목적지, 하늘세계[天界]에 이르기를 바란다. 이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여건은 완전하고 만족스런 삶의 가장 근본적이고 중차대한 요소이다. 경제적 여건이 튼튼하고 안정되지 못하면, 그 개인은 어떤 희망도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된다. 자신의 모든 희망과 전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그의 재산이다. 평판, 장수 및 사후의 행복한 목적지는 재산의 결과로써 생기는 조건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이 얻기는 드물다.   

 

한때 디가자누(Dīghajānu)라는 사람이 붓다를 찾아와 말했다.
“세존이시여, 우리는 처자식과 가정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희들에게 현세와 내세에서의 행복에 도움이 될 어떤 가르침을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붓다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네 가지가 있다고 그에게 말했다.    
첫째, 자신이 종사하는 어떤 직업에서든 능숙하고 효율적이며, 근면하고 활동적(uṭṭāna-sampadā, 勤勉具足)이어야 한다. 또한 그것을 잘 알아야 한다.      
둘째, 이마에 땀을 흘리며 정당하게 벌어들인 자신의 소득을 보호(ārakkha-sampadā, 守護具足)해야 한다. 이것은 도적들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모든 생각은 당시의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셋째, 믿음직스럽고 학식 있고 덕망이 높고 도량이 넓고 지적인 좋은 친구(kalyāṇa-mittatā, 善友)를 사귀어야 한다. 그런 친구는 자신을 악에서 벗어나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넷째,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자신의 소득과 비례해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한다. 즉 너무 탐욕스럽게 축재해서도 안 되며 너무 낭비해도 안 된다. 바꿔 말하면 자신의 분수에 맞게 생활(samajīvikatā, 等命)해야 한다.   
A. Ⅳ, pp. 281-283.

 

위 경전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재산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자신의 어떠한 미래의 꿈도 실현할 수가 없다. 재가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선결 과제는 바로 경제적 안정이다. 붓다는 인간 사회에서 재산이 미치는 두드러진 역할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붓다는 경제적 조건은 개인과 국가의 힘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Ⅲ. 재산과 경제운용에 대한 불교도의 태도

1. 재화의 획득과 소비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재산은 궁핍의 고통을 제거하는 妙藥이기 때문에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획득하도록 권장하였다. 재산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붓다는 善生經에서 “처음에는 먼저 기술을 배워라. 그 다음으로 재물을 구하라.”라고 했다. 붓다는 Suttanipāta(經集)의 Mahāmaṅgalasutta(大吉祥經)에서도 재가자는 우선 “많이 배워라. 기술을 익히고 몸을 삼가라. 잘 실천하고 고상한 말을 행하라.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 부모를 봉양하고 처자를 보호해서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계속하라. 그것이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가르쳤다. 이와 아울러 붓다는 재물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勤勉과 精勵의 德을 강조했다.     

비구들이여, 세상에 店主가 있어 오전에 열심히 업무에 힘쓰지 않고 대낮에도 열심히 업무에 힘쓰지 않고 오후에도 열심히 업무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점주는 아직 얻지 못한 재를 얻을 수가 없고, 또 이미 얻은 재를 증식할 수가 없느니라.    
비구들이여, 세상에 점주가 있어 오전에 열심히 업무에 힘쓰고 대낮에도 열심히 업무에 힘쓰고 오후에도 열심히 업무에 힘쓴다면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구비한 점주는 아직 얻지 못한 재를 얻고 또 이미 얻은 재를 증식할 수가 있느니라. A. Ⅰ, pp. 115-6.   

이 경전에 의하면, 열심히 노력하지 않고 재화를 바라는 것은 올바른 불교도의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붓다는 善生經에서 “만일 사람이 게으르면 사업을 경영하지 못하고, 사업을 경영하지 못하면 功業을 이루지 못하며, 아직 얻지 못한 재물을 얻을 수 없고, 본래 있던 재물은 자꾸 없어지느니라.”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집착으로 축재하는 것을 붓다가 인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붓다는 생계를 벌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찬성한 것도 아니다. 붓다는 재물을 획득함에 있어서 일정한 윤리적 규범에 따라야 한다고 가르쳤다. 즉 정당한 방법에 의해 재산을 증대하고 집적하라고 했다. 이를테면 “자기도 남도 괴롭히지 않고 정당한 법에 의해 재산을 증대하고 집적한다.” 또한 “거래에 있어서도 부정한 화폐, 부정한 도량형, 부정한 수단 등도 배척하고 있다.” 雜阿含經 제48권 1283(技能經)에 의하면, “이와 같이 잘 직업을 힘써 지혜로써 그 재물을 구하면 그것을 따라 재물이 생기니, 모든 물이 바다로 흐르듯 하리. 그리하여 그 재물의 이익은 꿀벌이 온갖 맛을 모으듯 하고 밤낮으로 그 재물이 불어나가는 것이 마치 개미가 쌓은 흙더미 같으니라.”라고 했다. 이와 같이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꿀벌이 꽃의 꿀을 채취하듯이 精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붓다는 “그는 이렇게 재물을 구하기, 마치 꿀벌이 꽃을 따듯이 하나니, 오랫동안 재물을 구해 마땅히 스스로 쾌락을 받아라.”라고 했다. 이것은 재물을 구하되 나와 남을 함께 괴롭히지 않고 바른 법에 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는 재가자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재산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재산을 蓄積하라는 것은 아니다. 재가자가 재산을 획득하되, 정당한 방법 즉 ‘理法에 적합한 行爲’(dhammacaniyā), ‘비난을 받지 않는 행위’, ‘순수한 노력에 의한 행위’ 등에 의해 재산을 획득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한편 붓다는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재산을 지키는 것을 더욱 어렵다고 했다. 왜냐하면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들인 재산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떤 사정에 의해 소실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Aṅguttara Nikāya(增支部)에 의하면, “무엇이 신중함의 성취[守護具足]인가? 이와 관련하여 팔의 힘과 이마의 땀으로 모아서,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우리가 일과 노력으로 버는 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절약하고 지켜보고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왕이 이를 강탈하지 못하고, 도적 떼가 이를 훔쳐가지 못하고, 불이나 물이 이를 파괴하지 못하며 불필요한 상속자들이 이를 제거하지 못한다.” 이 경전의 설명은 人災나 天災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잘 보호하는 것도 재산의 획득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재산은 이러한 이유만으로 소실되는 것이 아니다. 이 보다는 자기의 잘못된 행위로 말미암아 재산이 소진된다. 다시 말해서 사치와 향락에 빠지는 방탕한 생활로 인해 재산이 소실된다. 붓다는 재산이 소진되고 인격이 손상되며 결국 파멸에 이르게 하는 여섯 경로를 우리에게 제시하였다. 붓다는 음주의 탐닉, 하릴없는 때의 거리 방황, 유흥과 오락의 과도한 애호, 도박 중독, 악행을 일삼는 자들과의 교우 및 게으름에 익숙해짐을 경계하도록 우리에게 충고했다. 이러한 보가위나사무카(Bhogavinasamukha)로 알려진 여섯 그릇된 행실, 즉 재산을 탕진하는 여섯 경로는 Sigālovāda sutta(敎授尸迦羅越經)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재산을 낭비하는 여섯 가지 행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음주, 방탕, 유흥, 노름, 악한 친구와의 교제, 게으름이다. 
젊은이여, 음주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느니라. 그것은 재산의 손실, 잦은 싸움질, 병, 나쁜 소문, 무례함, 지능 저하이다.   
젊은이여, 알맞지 않은 시간에 거리를 쏘다니는 방탕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그 자신이 보호받을 수 없고, 처자식과 재산도 그러하며, 보호받을 수 없는 범죄의 혐의를 받으며, 이름에 나쁜 소문이 붙어 다니며, 많은 말썽에 부딪치게 된다.  
젊은이여, 유흥장에 자주 출입하는 데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느니라. 유흥장에 가면 춤과 노래와 음악과 낭송과 악기와 손뼉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가를 찾게 된다.  
젊은이여, 노름에는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이기면 원한을 낳고, 지면 잃은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재산이 탕진되고, 그의 말은 의회나 법정에서 신뢰받지 못하며, 친구와 동료들의 경멸을 받으며, 사람들이 노름꾼은 좋은 남편이 될 수 없다고 얘기하기에 결혼 상대를 구하지 못하게 된다.
나쁜 친구와 사귀는 데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노름꾼․난봉꾼․술꾼․사기꾼․협잡꾼․깡패가 그의 친구나 동료가 되기 때문이다.   
게으름에도 여섯 가지 위험이 있다. 너무 추워서, 너무 더워서, 너무 일러서, 너무 늦어서, 너무 배고파서, 너무 배불러서 일하지 못한다는 게으름뱅이는 해야 할 일이 쌓이는 동안 돈을 벌지 못하며, 결국 갖고 있는 재산마저 날려버리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여섯 경로를 통해 재산을 탕진해 버린다. 그러나 음주, 방탕, 유흥, 노름, 악한 친구와의 교제, 게으름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재산의 손실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보장받을 수 있다.    

재물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소비를 줄이지 않으면 안 된다. 재물의 축적과 소비에 대한 붓다의 충고는 널리 알려져 있다. 雜阿含經에 의하면, “수입을 四等分하여 그 중 1/4은 자신의 生計費에 충당하고, 2/4는 生業을 영위하거나 資本으로 재투자하고, 나머지 1/4은 저축하여 자기 또는 타인의 빈궁에 대비하도록 권하고 있다.” 그런데 한역 中阿含經 제33권, 135(善生經)에서는 “그리고 재물을 구한 뒤에는 그것을 나누어 사등분으로 만들어라. 한 몫은 음식을 만들고, 한 몫은 농사를 장만하고, 한 몫은 모두 간직해 두어 급한 때의 쓰임에 이바지하라. 나머지 한 몫은 농사꾼이나 장사꾼에게 주어 이자를 나게 하라.”라고 약간 다르게 설해져 있다. 여기서 자기 또는 타인의 빈궁에 대비한 이 1/4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한때 과소비가 사회문제화 된 적이 있었던 사례에 비추어 보더라도 축재된 재물은 이웃과 사회를 위해 布施하거나, 어떤 특별한 용도를 위해 비축해 두라는 가르침은 되새겨 볼만하다.  

이와 같이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잡힌 생활수준을 유지하도록 권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자신의 분수에 맞게 생활하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게 자신의 소득과 비례해 합리적으로 소비해야 한다. 즉 너무 탐욕스럽게 축재해서도 안 되며 너무 낭비해도 안 된다. 그래야 지나치게 사치에 빠지지도 않고 지나치게 궁핍에 떨어지지도 않게 된다.  

붓다 당시의 일반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재물을 얻고 나면, 그 재물을 통해 향락적 생활을 즐기고자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향락생활을 삶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향락적인 생활은 결국 파멸을 초래할 뿐, 자신의 정신적 발전에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붓다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했기 때문에 욕망의 절제를 강조했다. 붓다는 ‘돈의 비(雨)로써도 욕망을 채울 수 없다’고 했다. 붓다는 어떤 사람이 재물을 획득했을지라도 그 재물을 향락적인 쾌락을 위해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했다. 이처럼 재물을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재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붓다는 잡아함경에서 재물을 구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즉 “재물은 무엇 때문에 구하는 것인가? 손과 발을 움직여 노력하여 바른 방법으로 재산을 획득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로 인해서 첫째는 부모를 안락하게 해드릴 수 있고, 둘째는 처자․친족․사용인․객인에 대하여 적절하게 물건을 베풀어 안락케 할 수 있고, 셋째는 성자들을 존경하고 공양할 수 있다.” 또 다른 경전에서는 “세나카에게 물었다. 도대체 남자는 어디에 의지할 곳을 찾아야 합니까? 진실 속에 있습니다. 진실에 안주하여서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재산을 만들어야 합니다. 축재가 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성전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재가자는 가능한 한 많은 재물을 축적하되, 축재가 되면 그 재물은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불교의 직업관과 분배의 윤리 
우리는 앞에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했다. 직업이 불교의 이상인 올바른 생활과 조화를 이루려면 두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만 한다. 첫째, 직업은 적어도 생활의 기본적인 필수품들을 제공할 수 있어야만 한다. 둘째, 우리의 업무는 윤리적으로 건전해야만 한다. 많은 유형의 직업은 충분한 혹은 훨씬 나은 수입을 제공하지만 정직하지 못하거나, 착취 또는 잔혹함을 수반한다. 붓다는 당시 만연했던 비윤리적 직업의 유형들을 예로 들어 재가자가 그러한 업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흔히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고는 물질 만능주의에서 나온 것으로써 불교적 가치관에서 보면 올바른 직업관이라고 할 수 없다. 불교에서는 바른 직업과 바르지 못한 직업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교도는 자신의 직업이나 거래에 있어서 비윤리적인 행동을 삼가야만 한다.    

경전에 의하면, 재가자는 다섯 가지 업종에 종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식용을 위한 동물의 사육과 판매, 동물의 도살과 육류의 매매, 무기의 매매, 주류 및 마약의 매매 등이다. 또한 “어부․엽사 또는 양․돼지․노루 등의 도살자와 같은 살생업, 사형 집행자” 등은 바르지 못한 직업으로 분류했다. 이러한 것들은 재가자가 지켜야 할 五戒 중 不殺生戒와 不飮酒戒의 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특히 붓다는 무기의 생산이나 판매와 같은 특정한 거래는 사악한 생계 수단이라고 비판했다.     

오늘날에는 바르지 못한 직업의 목록에 보다 많은 것들이 추가될 것이다. 예를 들면, 절도․사기․수뢰․강탈, 부당 이득 등과 같이 정직하지 못하거나 잔인함을 수반하는 어떠한 것도 이 비윤리적 고용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임금 미지불, 임금에 상응하는 정당한 봉사 불이행, 제공된 봉사에 대한 과도한 청구 등이 모두 비윤리적 생계 수단들이다. 건전한 것으로 간주되는 농업과 농작 분야에서조차도 농지의 경계 변경과 타인 소유지의 침해, 소유권을 위한 거짓 소송, 타인 소유지의 재배나 소작 시의 산출 몫의 부당한 할당 등과 같은 것도 악행에 속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직업이란 여러 가지가 있다. 잡아함경 제48권 1283(技能經)에 의하면, “생활을 경영하는 그 업으로는 농사짓기와 장사하기와 소나 양을 먹이어 번식시키기, 전세를 놓아 이익 구하기, 집을 짓기와 침구 만들기, 이것은 여섯 가지 직업이거니, 방편으로써 온갖 직업 힘쓰면, 이 세상을 안락하게 살아가리라.”고 했다. 이 경전에서 말하는 직업은 농업, 상업, 행상, 목축, 金貸, 貸家業, 건축업, 목공업 등이라 할 수 있다. 本生經에서는 “경작, 상매, 금대, 牧納業” 등을 예로 들고 있다. 또한 Aṅguttara Nikāya(增支部)에서는 “경작, 상매, 목우, 射技, 官吏” 등을 바른 직업으로 보았다. 이러한 직업의 종류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과 생명체에게 피해를 주는 비윤리적인 직업은 올바른 직업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직종에 의한 사회적 신분의 고하귀천은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Suttanipāta(經集)의 Vasala sutta(賤民經)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오. 태어나면서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오.”라고 했다. 즉 태생에 의해 신분이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직업에 의해 신분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그가 어느 직종에 종사하느냐에 따라 사회적 신분은 달라진다. 그러므로 직업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런데 재가자는 자신의 노력에 의해 재화를 축적했더라도 자기 혼자서 독점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타인에게 베풀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재물을 모으는 것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福利를 나누어주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에서 베푸는 일, 즉 보시(dāna)를 강조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경제학에 있어서 분배의 윤리가 될 것이다.   
 
무릇 모든 인간은 재물을 갖기 원한다. 그런데 그 얻고자 하는 재물을 얻을 수 없거나, 상대적으로 빈곤감을 느낄 때 통치자와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되며, 그 불만이 가중되어 사회의 불안으로 연결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불만 중에서도 이 경제의 분배가 잘못 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된다. 이러한 분배의 윤리에 따라 사회체제 내지 정부형태까지 달라지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분배가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분배에 관한 언급은 초기경전의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주기 전에는 마음이 즐겁고, 주고 있을 때는 마음이 청정해지며, 준 뒤에는 마음이 기쁘다.(A. Ⅲ, p. 337) ” “법에 어긋남이 없이 얻은 富를 施與하면서 마음을 청정케 한다.A. Ⅲ, p. 354.”등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기는 풍족하게 살고 있으면서 늙어 쇠약한 부모는 돌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Sn. 98.” “엄청나게 많은 재산과 귀금속과 먹을 것이 풍족한 사람이 자기 혼자서만 독식한다면, 이것은 파멸의 문이다.Sn. 102.”라고 경고했다. 이처럼 붓다는 재산의 획득과 함께 보시를 강조함으로써 올바른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즉 물질적 보시를 통해 사회에로의 회향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았던 것이다. 요컨대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자신의 노력을 통해 최대한 재물을 축적하되, 그 재물을 향락적인 생활에 낭비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널리 베푸는 일’에 사용하라고 했다. 사실 헐벗고 가난한 이웃들에게 필요한 물품과 금전을 베풀어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백 마디의 金言보다 값진 甘露法雨가 될 것이다.  

 

Ⅳ. 이상적인 불교의 경제모델

1.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
지금까지 우리는 초기경전에 나타난 재화의 효용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 이유는 재가자의 삶에 있어서 재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 만큼 높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말해서 인간생활에 있어서 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으로 물질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물질은 보다 높은 고귀한 목표를 향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붓다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적 발전과 함께 정신적 발전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정신적 발전 없는 물질적 풍요는 타락과 패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게 되는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질적 빈곤이고, 다른 하나는 극도의 물질적 풍요이다.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1989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노벨 평화상 수락 연설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의 진보는 인간의 향상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티베트에서는 과학기술과 경제발전에 너무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정신적 발전 없는 물질적 발전은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몇몇 국가들에서는 너무 지나친 관심을 외적인 것에 쏟고 있으면서도 내적인 발전은 하찮은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물질과 정신 둘 다 중요하다고 믿으며, 둘 사이의 훌륭한 균형을 이루기 위해 병행하여 발전시켜야만 합니다."  

이와 같이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불교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인은 물론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함께 충족되기를 바란다. Aṅguttara Nikāya(增支部)의 Andha sutta(盲人經)에 진술된 바와 같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세 가지 사람이란 눈먼 사람(andha), 외눈 가진 사람(ekacakkhu) 및 두 눈 가진 사람(dvicakkhu)이다. 눈먼 사람이란 공들여 얻지 못한 재산을 취득하거나 자신이 지닌 재산을 증식할 눈은 물론 선과 악, 비난받을 일과 칭찬받을 일, 비천함과 고귀함, 밝음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보기에 적합한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한쪽 눈 가진 사람은 재산을 취득할 눈은 가지고 있지만 선과 악, 비난받을 일과 칭찬받을 일, 비천함과 고귀함, 밝음과 어둠이라는 상태를 볼 눈은 가지고 있지 않다. 두 눈 가진 사람은 재산을 얻기 위한 눈과 선과 악의 상태를 보기 위한 눈 둘 모두를 가지고 있다.

 

이 경전에서의 분명한 지적은 두 눈 가진 세 번째 사람이 가장 훌륭하고 가장 모범적이라는 점이다. 이 경전에 의하면, 선과 악은 보지만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 수가 없다. 그는 심지어 한쪽 눈 가진 사람으로도 간주되지 않는다. 이것은 재산이 완전하고 즐거운 인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불교는 가난을 찬양하지 않는다. 더욱이 이 경전은 자신의 근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충분한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은 진정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그는 간신히 연명할 필수품을 충족시킬 자원마저 부족해 언제나 좌절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부유한 사람이 덕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다. 이 경전에 따르면 재산과 덕은 손을 맞잡고 간다. 재산과 덕 두 가지를 함께 갖춤이 두 눈을 가진 사람의 경우처럼 이상적인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 Aggañña sutta(起世因本經)에 의하면, 출가자가 생기게 된 동기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출가자는 재가자가 획득할 수 없는 정신적 영역을 대신해 주는 조건으로 그가 필요한 최소한의 의식주를 공급해 주겠다는 어떤 계약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출가자는 일체의 경제행위, 즉 생산 활동에 종사하는 것이 금기시 되었다. 그래서 출가자는 무소유의 삶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재가자는 그 반대로 오히려 더 많은 재화를 획득하여 출가자에게 공양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 되었다.   

한때 붓다는 사왓티(Sāvatthi, 舍衛城)에 저 유명한 제따와나(Jetavana, 祇園精舍)를 설립했던 아나타삔디까(Anāthapiṇḍika, 須達多)에게 평범한 가정생활을 하는 재가자(평신도)는 네 종류의 행복을 가진다고 말했다. 첫 번째 행복은 올바르고 정당한 수단으로 획득한 경제적 안정이나 충분한 재산을 향유하는 것이다. 두 번째 행복은 그 재산을 자신과 가족, 친구와 친척, 또는 가치 있는 행위에 인색하지 않게 소비하는 것이다. 세 번째 행복은 負債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네 번째 행복은 생각, 말, 혹은 행동에서 악을 저지르지 않고, 과오 없는 청정한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이른바 atthisukha(利益樂), bhogasukha(受用樂), anaṇa(無債樂), anavajjasukha(無過樂)가 그것이다.  

네 가지 종류의 행복 가운데 세 가지가 경제적이라는 점과 붓다가 마지막으로 그 금융가에게 경제적 물질적인 행복은 과오 없는 훌륭한 생활에서 얻어지는 정신적 행복의 16분의 1의 가치도 안 된다고 상기시켰다.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위 경전에 의하면, 경제적 복지가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필수적인 요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물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은 정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비하면 1/16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신적 도덕적 기반이 전혀 없는 단지 물질적 발전이라면, 이것은 진정한 발전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불교는 물질적 발전을 장려하면서도, 도덕적 정신적 품격의 계발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시장경제에 대한 불교적 비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시장경제 체제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일찍이 슈마허(E. F. Schumach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의 세계경제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구조로 고착화되어 자연환경의 파괴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태국의 저명한 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술락 시바라크사(Sulak Sivaraksa)는 “지금의 경제적 현실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neoliberal capitalism)로서, 인간복지와 환경보존의 측면에서 이익을 축적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분명히 세계사회를 조절한다거나 조직하는 방법은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원래 자본주의(capitalism)는 개인적 소유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자본주의는 ‘자본에 의한 이윤의 추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경쟁 활동과 사유재산 제도의 확립에 의해 보장된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다른 말로 ‘시장경제’라고도 부른다.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은 이익이다. 기업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익을 추구하려고 한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 또한 그러한 방식으로 창출된 이익은 언젠가는 모든 인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조금씩 흘러나올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부자와 빈자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벌려 놓았으며, 국가 간의 빈부격차도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즉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경제적 불평등을 가져온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간과 환경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고, 인간의 끝없는 탐욕심을 더욱 조장시켜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그러나 불교는 탐욕을 비난하고 거부한다. 왜냐하면 탐욕은 괴로움이라는 나쁜 길로 이끈다고 보기 때문이다. 술락 시바라크사가 지적한 바와 같이, “탐욕은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결코 만족으로 이끌어 줄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켜서 만족할 수 있는지, 자기 수행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염려하고, 증진시키고, 이롭게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사람을 단지 반(半) 인간으로 취급한다. 즉 경제적인 탐욕․증오․이기심만 조장할 뿐 다른 고려들을 배제하도록 장려된다. 불교는 인간에 대해서 전체적으로 접근한다. 정신과 마음을 수양해야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회적 관계와 인간관계가 여러 가지로 강조된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발전이란 인간의 물질적․사회적․정신적 필수품 교류에 주의를 돌렸던 역사적 과정이다. 또한 발전의 실현 가능한 계획은 인간 사회는 근본적으로 광범위한 환경에 의존하여 살아가며, 발전은 생태계의 지탱 능력을 위협하는 것을 쫓아가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자본주의는 오직 이윤만을 추구하는 시장경제와 과소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러한 경제 모델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사회의 타락과 자연의 무자비한 이기적 이용으로 이끈다. 또한 이러한 자본주의는 긴 안목으로 보면 전체의 인류 복지를 희생하여 특권을 가진 몇몇을 위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붓다는 인간의 존엄성과 일치하는 기본적인 생리적 요구물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발전을 기대했다. 동시에 이러한 발전의 계획은 사람들의 생리적 요구를 실현하기에는 자연의 한계가 있으며, 그러한 한계를 넘어선 물질적 소비의 추구는 개인과 사회의 양면에 해로운 것임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미래의 발전은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되, 경쟁과 착취보다는 협동과 자비 및 연민의 정신에 의해서 관리되는 인간관계가 요구된다.      

불교에 의하면, 재산은 필요악이다. 인간생활에 있어서 재산 없이는 불완전하며 안락과 즐거움을 가질 수 없고, 모든 성취를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재산은 꼭 필요하다. 또한 재산은 인간들의 부정․잔혹․탐욕․불만족을 만들기 때문에 이것은 악이다. 재산과 경제에 대한 붓다의 교설은 이러한 이분법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음을 완전히 이해해야만 한다. 재산의 이러한 이중성에 대해서 붓다는 한편으로는 정당한 방법과 수단으로 얻은 재산의 유용성을 설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재산의 불이익과 불건전한 결과를 밝히고 있다. 이러한 붓다의 재산에 관한 中道的 태도야말로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Ⅴ. 맺음말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경제행위이다. 이러한 경제행위를 떠나서 인간은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출가자도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이 요구되기 때문에 경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물질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므로 최소한의 물질마저 소유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속한 집단에서의 사회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조차 유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자는 우선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재산은 궁핍의 고통을 제거하는 묘약이기 때문에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재화를 획득하라고 권장했다. 왜냐하면 재물은 자신의 삶은 물론 타인에게도 안락을 줄 수 있고, 또 나머지 여력으로 성자와 출가자에게 공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붓다는 非法으로 蓄財하라고 권장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정당한 방법에 의해 재산을 획득하고, 그 재물을 활용함에 있어서도 분수에 맞는 생활, 즉 수입과 지출의 균형이 잡힌 생활을 하라고 권했다. 또한 붓다는 자신의 재산을 헛되이 쾌락적인 향락생활을 위해 소비하지 말고, 이웃을 위해 널리 베풀 것을 당부했다.    

사실 인간생활에 있어서 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불교는 궁극적으로 물질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물질은 보다 높은 고귀한 목표를 향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래서 물질적 발전을 장려하면서도, 도덕적 정신적 품격의 계발을 더욱 강조한다. 한마디로 물질과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불교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강요함으로써 자연환경의 파괴와 같은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러한 현재의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