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근본불교) 이야기

초기불교는 초기불교의 시각으로

실론섬 2015. 10. 5. 18:14

초기불교는 초기불교 시각으로


여러번 말씀드리지만 초기불교는 초기불교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대승불교나 또는 서양철학등의 눈으로 보면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하고 모든 선입관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불자들은 대승불교나 또는 기존의 배운 관념을 그대로 지닌채 초기불교를 공부할려고 하고 자신의 논설을 할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초기불교에서 "불교는 자비의 종교이다",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가르침이다"..등등의 이야기를 하면 대승불교의 수행론에 젖은 분들은 단박에 반박을 하고 나서게 됩니다. 또한 "불교의 도덕/윤리"를 설파하면 화득짝 놀라면서 "불교 경전이 무슨 도덕교과서냐?"라고 반박을 합니다. 불교의 가르침이 중생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와 계율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자리잡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불교경전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러번 글을 올렸지만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불교경전은 출가주의를 지양하고 그리고 출가승에 대한 수행법(교리)를 모아놓은 책입니다. 물론 재가자들을 위한 가르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또한 수행승들을 위한 가르침에서 재가자들이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하지만 경전의 근본이념은 수행교리의 모음입니다.


불교는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둘로 나눈다면 출가승과 재가자입니다. 두 부류는 생활도 삶의 방식도 다릅니다. 수행승들이 재가자들처럼 살면 수행승이 이미 아니며, 그렇다고 재가자들이 250여개의 계율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수행승과 재가자들에게는 각각의 덕목과 가르침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국불교가 지금처럼 활력을 잃어버리고 확장세가 주춤한 것의 가장 큰 원인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세간의 삶과 괴리된 불교", "허망한 깨달음의 추구","수행론에 젖은 불교", "이기적 기복불교"등으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재가자가 수행승 흉내를 내면서 수행한다고 자랑하고 다녀야 마치 머리속에 지혜가 가득하고 뭔가 괜챦은 불자인냥 대접받는다는 망상과 아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수행승들의 설법은 세간의 삶과 너무 괴리되어 있어서 그것을 듣는 많은 불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지도 않고 어떤 감동도 제대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가르침이거나 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물 위에 떠다니는 부평초이거나 또는 모래 위에 성을 쌓는다면 이것은 결코 붓다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승가가 화합이 중요하듯 사부대중들도 네 개의 책상 다리처럼 각자에게 주어진 덕목을 충실히 실천하고 지켜 나갈때 비로소 불교는 튼튼해지고 계속하여 가르침을 널리 전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의 윤회


불교의 핵심교리중의 하나가 윤회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해탈하여 열반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열반의 성취란 불사의 문 즉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열반이 무엇인지도 알아야겠지만 더불어 윤회에 대해서는 더더욱 정확한 개념정립과 이해가 앞서야 합니다. "윤회의 가르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라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과연 우리들은 얼마나 윤회를 알고 있으며 얼마나 윤회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는지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은 사유를 해봐야 합니다. 윤회의 교리는 쉽고도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그 교리가 품고 있는 심오한 가르침은 우리의 생사 전반에 걸쳐 있습니다. 


수행을 하는 것도 결국은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윤회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안다면 내 수행의 결과가 선인지 불선인지 스스로 알것입니다. 헛된 수행을 하면서 자신의 삶이 향상되고 열반을 향해 나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붓다께서 말씀하셨듯이 소뿔에서 우유를 찾거나 또는 모래에서 기름을 짜낼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 밖에 없습니다. 대나무가 위로 뻗어 나갈 때 두 번째 마디는 첫 번째 마디를 의지하지 않고는 생길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마디가 부실하면 세 번째 마디가 튼튼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진정한 불자인가?


역사적으로 실존하셨던 붓다와 대승경전의 부처님을 구분하여 설명할 줄 모르고, 유마거사가 실존인물인냥 오해를 하고, 내 자식을 불자로 만들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불교를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어느 불자님과의 토론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부모님들은 세상에서 좋고 맛있는 것은 전부다 아이들에게 줄려고 부모의 삶도 기꺼이 희생합니다. 다른 아이들이 입고 마시고 공부한다면 내 아이도 뒤질세라 열심히 따라 합니다. 그렇게 좋은 것은 전부다 아이들에게 줄려고 하면서 막상 내 자식을 불교로도 만들지 않습니다. 토론을 하셨던 분은 '아이들의 결정권을 존중하고..어쩌고 저쩌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의 좋은 것은 모두다 아이들에게 줄려고 하면서 왜 불교라는 최고의 선물은 줄려고 하지 않느냐?라고 되물었습니다. 세상에서 불교만큼 아이들에게 좋은 것이 또 있습니까? 인격형성이나 장래의 삶을 살아가는데 불교에서만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가르침이 있나요? 


왜 아이들을 불교도로 만들지 못하는지요? 아이들이 교회에 가게끔 놔두는게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해서입니까? 그렇게 아이들의 결정과 하고싶은 것을 하도록 허락하는 마음 넓은 부모님들이 공부해라 이것해라 저것해라고 왜 온통 간섭을 하시는지요? 


결과적으로 부모님들이 아이들을 불교도로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불교에 대해서 가르쳐 줄 아무런 지식도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 어디인지, 붓다의 자비심이 무엇인지... 이곳 초중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만큼도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로 인해 만들어 진 것이 불교이고, 붓다는 불교의 교조입니다. 그런데 붓다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다보니 또는 붓다의 일생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불교를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연기 오온 사성제를 설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런 교리 필요하지 않습니다. 파타카라 여인이나 앙굴리말라가 교화한 그런 정도의 이야기면 충분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는 그러한 자료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고 발간된 것도 없습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불교책이라고 해봤자 천편일률적이고 금방 싫증을 내기 쉬운 것들로만 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럴수록 부모님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다양한 불교상식을 접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계를 지키고 불자의 16가지 덕목등은 더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다르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는 많이 다릅니다. 일단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와 대승경전이 찬술되면서 만들어진 부처님만큼이나 현실적으로 엄청난 간격이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눈으로 초기불교를 보면 숨어있는 것들이 잘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눈으로 대승불교를 보면 잘 보입니다. 결국 대승불교도 초기불교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구셈도 못하면서 산수책 펼쳐놓고 있고, 인수분해 공식도 모르면서 천년을 인수분해 문제 붙잡고 있어도 해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블로그는 수행승이 주인장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느 사찰에서 만든 블로그도 아닙니다. 그냥 삼시세끼 먹고 살기 바쁜 재가자가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제 블로그의 목적은 "붓다께서 재가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가르쳐 줄려고 했는가?"라는 것입니다. 4부 니까야 경전과 그외 전승되어 오는 여러 붓다의 생애에서 그것을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남방불교권의 재가불교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두서없이 글을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