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행위에는 마음이 앞선다
우리의 모든 행동은 몸 말 마음(신구의)의 세가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모든 실질적 행동에는 항상 마음이 앞선다. 그런후에 행동이 나온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욱하는 심정으로 화를 내고 욕설을 할 때는 화를 내고 욕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고 그리고 그 의도된 마음에 따라서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오는 것이다. 화를 내더라도 곧 화를 내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화를 참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마음이 앞선다. 법구경 1.2 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법(일체)은 마음이 앞서 가고(마음에 지배되며)
마음이 제법의 주인이며(마음을 주인으로 삼고)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만약 사람이 더렵혀진 마음(나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에게 괴로움이 반드시 따를 것은
마치 수레가 소나 말의 잘자욱을 뒤따르는 것과 같다
제법(일)은 마음이 앞서 가고
마음을 제법의 주인이며
마음에 의해서 모든 행위는 지어진다
만약 사람이 청정한(깨끗한. 선한 마음)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에게 즐거움(행복)이 반드시 따를 것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라가며 떠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 "마음이란 무엇인가"를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알고 싶다면 이 방에 올려져 있는 "마음이란 무엇인가", "담다파다(법구경) 1.2번 게송 - 의도된 마음에 의한 과보"라는 글을 읽어보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의도된 마음에 의한 행위가 업을 잉태한다
"업이란 도덕적 인과율이다". "업이란 의도된 행위의 결과물이다".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지만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불교에서 업의 교설을 제대로 설명하고 이해하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업이 도덕적 인과율이고 의도적 행위에 국한된 결과라는 부분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어리둥절 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도덕적 인과율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의도를 갖고 신구의 세 가지로 행하는 행동에는 선하거나 나쁘거나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이것 두 가지 이외에는 없습니다. 선한 것은 십선행이며 나쁜 것은 십선행의 반대인 십악행입니다. 이러한 열 가지는 도덕적/윤리적 행위입니다. 이게 무슨 선불교의 화두이거나 오묘한 불교의 진리가 아닙니다. 설사 한 소식하겠다고 화두를 들고 있더라도 선하거나 악하거나 딱 두 가지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들 일상사의 모든 행위들은 이러한 도덕적 행위이며 그 결과물로써 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의도된 행위에 국한 합니다.
업의 종류중에 무기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업을 잉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의도한 행위가 아닌 것들을 말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길을 가다가 발 밑에 지렁이가 있는 줄을 모르고 밝아서 죽였다 하면 그것은 업이 잉태되지 않습니다. 내가 죽이겠다고 의도하지 않았고 그 마음이 앞서서 행위가 뒤따라 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무렇게나 땅을 헤집고 다니면서 땅 속의 생물들을 죽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생물들 입장에서 본다면 원한을 받을 만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곧 되묻습니다. '그럼 실수를 사람을 죽여도 업이 잉태하지 않겠네' '과실로 인한 것도 괜챦겠네' '술 먹고 정신이 없어서...' 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의도한 마음이란 평생을 두고 염원하는 것처럼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고 이루고자 의도된 마음을 내는 것도 있지만 심찰나적으로 의도적인 마음을 내기도 합니다. 심찰나란 찰나보다 더 짧은 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싸움을 하다가 남을 위협하기 위해서 돌을 던졌는데 그게 재수없게 상대방 머리에 맞아서 죽었거나 큰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럼 그게 내가 상처를 입히거나 죽이겠다고 의도해서 던진 돌이 아니기 때문에 업이 잉태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는 심찰나적인 마음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불과 합니다.
화를 내거나 다투는 어느 짧은 순간에 스스로가 미쳐 깨닫기도 전 어떤 찰나의 순간에 죽이고 싶다거나 박살을 내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런 짧은 마음의 움직이 우리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순간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위파사나 수행이란 찰나적으로 우리들 몸속에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꿰뚫어 통찰하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수행이 없다면 그런 찰나적인 마음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보통의 중생들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는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돌을 던진 그 힘의 원천은 바로 악한 생각이 뒷받침이 되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악한 생각이 찰나적으로 일어났다면 그 생각을 꿰뚫어 통찰하고 알아챈다면 그 마음을 붙들어 맬 수 있고 콘트롤 할 수 있습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마지막 마음이 다음생의 첫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마지막 마음의 순간이 어떤 것이냐 하면 우리가 파리를 파리채로 딱 하고 때려잡는 그 짧은 순간에도 파리의 마음에는 찰나적으로 마지막 마음의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마음이 곧 다음생의 첫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그만큼 수행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파사나 또는 사띠 수행등으로 마음을 보는 집중력이 높아지면 즉 다시 말해서 몸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온갖 마음의 모양들을 꿰뚫어 통찰하는 힘이 있게 되면 우리들은 쉽게 나쁜 쪽으로 의도된 행위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욕을 할려고 하다가도 순간적으로 '아.. 욕을 할려고 하는구나'하고 마음 속에서 일어난 악한 생각을 알아채면 바로 입을 다물려고 긴 숨을 쉬면서 참게 됩니다. 하지만 마음을 통찰하고 꿰뚫어 보는 힘이 약하게 되면 마음에 휘둘리게 됩니다. 즉 감정적인 행동을 쉽게 합니다. 쉽게 폭발하고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위의 담마파다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 속에서 찰나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을 제대로 통찰하고 또한 십선행을 굳게 지킬려고 한다면 범부들처럼 쉽게 마음이 동요되거나 바깥의 온갖 대상들에 대해서 내 마음이 오락가락 하지 않게 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 볼 수 있기에 마음의 콘트롤이 가능하게 됩니다.
중생(오온의 집합체)이란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
중생이란 무엇인가? 정답은 오온의 집합체 입니다.
그러한 오온의 집합체인 중생들의 상황은 어떤가? 심찰나적으로 생멸을 거듭하며 흘러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우리들이 강을 볼 때 그 강은 하나의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앞의 물과 뒤의 물이 엄연히 구분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뭉쳐서 하나의 흐름처럼 우리 눈에는 보입니다. 폭포수가 떨어질 때 그 폭포물은 하나의 물줄기처럼 이어져 떨어집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당연히 앞의 물과 뒤의 물이 구분됩니다. 그것이 뭉쳐서 하나의 폭포물로 보여질 뿐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든다면 파도를 보게 됩니다. 파도를 볼 때면 하나의 파도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일렁거리면서 우리에게 보여집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앞의 파도가 사라질 무렵에 뒷 파도가 일어나고 다시 그 파도가 사라질 때면 다시 새로운 파도가 일어나면서 끊임없이 연결이 되어 우리들 눈에는 하나의 파도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듯 우리들 몸과 마음도 심찰나적으로 끊어졌다가 이어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릅니다. 1초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엄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하나의 존재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단 1초도 우리 몸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앞의 강물이나 폭포나 파도의 예에서 보듯이 엄연히 앞과 뒤가 다르지만 그것이 이어져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보면 아시겠지만 마음이란 대상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고정된 마음이라는 것이 우리들 몸 속에 있다가 그것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마음이란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지 못합니다. 즉 착한 마음과 선한 마음이 동시에 반반씩 생겨나지 않습니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하는 하나의 마음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해탈에 이르는 가장 큰 수행으로써 네 가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일어난 악한 마음을 더이상 일어나지 않게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난 선한 마음을 계속하여 유지토록 하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마음을 일어나게 온 힘을 쏟는 것입니다.
무상을 안다는 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그것은 집착을 끊게 하고 일어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물을 보이는 대로 보는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본다면 즉 무상을 꿰뚫어 통찰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하지만 범부들은 육내외입처로 느껴지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영원하거나 고정된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곧 집착심을 냅니다. 만약에 보석이 내일모레 모레로 변한다고 한다면 보석에 집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석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집착합니다. 나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이 확고부동하게 앞선다면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집착하고 재벌들처럼 상속문제로 형제끼리 골육상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범부들은 살면서 내가 죽는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곧바로 몇년 남은 인생이 몇천년은 계속될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살면서 아웅다웅 할 뿐이지 결코 언젠가는 죽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게 범부들입니다. 혹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가도 순간적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재가자의 삶을 살면서
말이 많이 빗나간듯 합니다만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오계도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의도된 행위가 업을 잉태하고 의도된 도더적 행위 결과물이 업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거기에 조금은 시간을 내어 사띠이든 위파사나 수행을 하여 마음을 보는 힘을 기른다면 금상첨화일 것입니다.
마음은 대상에 따라서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들은 대상에 대해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집착심을 떨어 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마음은 동시에 두 가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 악한 마음보다는 선한 마음이 먼저 일어나게 노력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악한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선두다툼에서 늘 선한 마음이 먼저 자리를 차지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의도된 행위가 업이라고 했듯이 남을 해치는 행위에는 절대로 무의식이나 실수나 과실이란 없습니다. 어느 짧은 순간에 이미 악한 마음이 일어나 우리들을 휘감아 버린 결과입니다. 그러하기에 마음을 다잡고 찰나적으로 몸 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잘 관찰하고 그리고 선한 마음이 늘 마음에 자리잡아 악한 마음이 비집고 들어 설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이 불교도이며 그것이 참된 공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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