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대한 불교적 조망
김 성 철/동국대 불교문화대학 불교학과 교수
차 례
Ⅰ. 일상이란?
Ⅱ. 일상의 해체와 구성
1. 인지적 일상의 해체와 구성
2. 감성적 일상의 해체와 구성
Ⅲ. 다시 일상으로
1. 정화된 하나의 분별
2. 해체의 나락과 극복
(본 논문은 2001년 9월 8일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열린 <예술가를 위한 철학 강의>의 강의록으로 사용된 논문임)
Ⅰ. 일상이란?
일상(ordinary life, daily life)이란 우리의 삶 중 상식적인 부분을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산이 있고 강물이 흐르며 길 위로 차가 달리고, 때론 비가 내리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는 이런 세상에 태어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밥 먹고, 일하고, 놀고, 웃고, 울고, 고민하고, 기뻐하고, 다투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상은 평면적인 것이 아니다. 불교의 俱舍學과 唯識哲學에 의거하여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을 분석해 볼 경우 일상 중에는 남과 공유하는 영역이 있고 남과 공유하지 않는 영역이 있으며, 우리의 感性에 관계된 영역이 있고 우리의 認知에 관계된 영역이 있으며, 우리의 능동적 행위로 이루어진 영역이 있고 우리의 수동적 감수로 이루어진 영역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들이 유기적으로 얽혀서 출몰하며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는 경우, 나의 미각에 느껴진 음식의 맛은 ‘남과 공유하지 않는 영역’에 속하고, 식구들과 함께 앉은 식탁 위에 놓인 반찬들은 ‘남과 공유하는 영역’에속하며, 반찬을 고르는 매 순간의 욕구는 ‘감성에 관계된 영역’에 속하고, 반찬의 이름에 대한 생각은 ‘인지에 관계된 영역’에 속하며,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는 것은 ‘능동적 행위’이고, 느껴진 맛은 ‘수동적 감수’이다.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하나의 일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농부의 일상과 도시인의 일상이 다르고, 어린아이의 일상과 어른의 일상이 다르며, 남자의 일상과 여자의 일상이 다르고, 미국인의 일상과 한국인의 일상이 다르며, 일반인의 일상과 종교인의 일상이 다르고, 군인의 일상과 예술가의 일상이 다르며, 나의 일상과 남의 일상이 다르고 유복하게 태어난 사람의 일상과 박복하게 태어난 사람의 일상이 다르다.
한 개인의 경우에도 어릴 때의 일상과 늙은 후의 일상이 다르고, 직장에서의 일상과 집에서의 일상이 다르며, 사춘기(思春期)의 일상과 사추기(思秋期)의 일상이 다르다.
그러나 어느 누구의 일상이라고 하더라도, 또 언제 어디서의 일상이라고 하더라도 공통적으로 체험되는 것들이 있다. 인간이든 짐승이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태어나 살아가다 죽는다는 사실이고, 싫은 것은 배척하고 좋은 것은 욕구하기에 남과 갈등하며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며, 모든 일들이 언제나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어떤 민족, 어떤 종교, 어떤 철학체계에서든 공통적으로 권유되는 윤리적 덕목들이 있고 공통적으로 배척되는 성품들이 있다. 자기절제, 남에 대한 배려, 정직, 신의, 부지런함 등은 민족과 종교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권유되는 일상적 덕목들이며, 거짓, 교만, 방종, 나태 등은 공통적으로 배척되는 성품들이다.
이렇게 다양한 환경 속에서 複雜多技한 심신의 파노라마를 연출하며 어떤 사람은 향상의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추락의 삶을 산다. 또 위와 같은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 사회의 일각에는 종교인이나 철학자, 예술가와 같이 ‘인간의 일상 전반의 의미에 대해 연구하고 고뇌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일상 전체에 대해 사색하며 사는, 이들의 삶 역시 일상이다. 우리는 이들의 일상을 ‘메타(meta)일상’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면 이와 같이 메타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일상은 다종다양하며, 부단히 변화한다. 밥을 먹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책을 보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일을 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잠을 자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글을 쓰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싸우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사랑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노래를 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그림을 그리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명상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도둑질을 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자선을 베푸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며, 병드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고, 죽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에 대해 사색하는 것도 일상의 일부이다. 우리의 삶에서 일상 아닌 것이 없다. 일상의 外延은 무한히 열려 있다.
Ⅱ. 일상의 해체와 구성
하늘이 있고, 땅이 있고,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사람이 있고, 짐승이 있고, 탄생이 있고, 죽음이 있고, 눈이 있고, 코가 있고, 귀가 있고, 사랑이 있고, 증오가 있고, 행복이 있고, 불행이 있고,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고, 가는 것이 있고, 오는 것이 있고,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우리의 일상은 확실한 것일까?
불교에서는 이러한 일상의 세계를 세간(loka) 또는 세속(saṃvṛti)이라고 부르며, 세속이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언어적 관습(vyavahāra)에 의해 이루어진 세계라고 규정한다. 진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치밀한 철학적 분석이나 명상체험을 통해 발견되는 ‘궁극적 진리(paramārtha satya: 眞諦. 勝義諦, 第一義諦)’이며, 둘째는 ‘소치는 목동’조차 수긍할 수 있는 ‘일상적 진리’이다.
우리의 일상은 이 중에서 일상적 진리의 세계이다. 그리고 일상적 진리의 세계, 즉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우리의 일상은 사실은 우리의 사유와 언어가 조작해 낸 假想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방식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란 의미’이다. 우리는 대부분 삶과 죽음, 나와 세상, 우리의 이목구비, 고통과 행복 등이 모두 확고하게 실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그런 생각은 세속의 차원에서만 허용되는 착각일 뿐이며, 우리의 일상은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실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空 (śūnya)’은 ‘自性이 없다’거나 ‘실체가 없다’고 표현되기도 한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어째서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 또는 ‘모든 것은 공하다’고 말하는가?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緣起(pratītyasamutpāda)’를 중심 축으로 삼는다. 연기란, ‘因緣에 의한 발생’, ‘의존적 발생’, ‘상대성’이라고 풀이된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적으로 존재하기에 공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매일 체험하는 일상 역시 연기적으로 구성되기에 실체가 없으며 공하다. 연기의 법칙은 마음과 물질, 생명과 세계, 시간과 공간 모두를 지배하는 불교적 통일장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붓다(Buddha: 佛陀)의 깨달음은 연기법의 발견에 다름 아니다. 일상은 연기적으로 구성되며, 그런 연기적 구성 과정에 대한 치밀한 조망을 통해 일상의 실체성은 해체된다.
앞장에서 설명했듯이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의 모든 것은 感性에 관계된 영역과 認知에 관계된 영역으로 양분될 수 있다. 감성에 관계된 영역의 경우 분노와 탐욕 교만 등은 우리의 능동적 행위의 근원이 되고,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 등은 수동적으로 감수된다. 인지에 관계된 영역의 경우, 나와 너, 삶과 죽음, 더러움과 깨끗함과 같은 갖가지 생각들로 織造 된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의 삶의 지침이 되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는 인생에 대한 번민을 야기하고 다른 세계관을 갖는 타인과의 갈등을 초래한다.
만일 이렇게 두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상적 감정과 생각들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삶의 괴로움과 인생에 대한 번민과 타인과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연기에 대한 자각과 그에 의거한 실천을 통해 해결되고 해소된다.
그러면 이렇게 다양한 영역으로 분류되며, 개인차가 심하고, 상황에 따라 차별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모하기도 하지만, 공통점 역시 갖고 있는 이런 일상 전체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인지 불교철학의 눈을 빌어 면밀히 분석해 보기로 하자.
1. 인지적 일상의 해체와 구성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작성되는 다음의 판단을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와 남은 다르다. 내 영혼은 나의 몸 속 어딘가에 있다. 나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 나는 눈이 둘이고, 귀가 둘이며, 입은 하나 팔은 둘이다. 비가 내린다. 바람이 분다. 불이 장작을 태운다. 점토에서 항아리가 만들어진다. 지금 여기에 연필이 하나 놓여 있다. 배설물은 더러운 것이다. 밥은 입으로 먹는다.’ 또 경험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는다; ‘이 우주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우주의 끝은 있을까, 없을까? 깨달은 사람은 죽은 다음에 어딘가에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나는 어디에서 와서 죽은 후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앞에 든 예는 우리에게 확실히 경험되었다고 생각되는 판단들이며, 뒤에 든 예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기에 품는 참으로 궁금한 의문들이다. 만일 우리의 생각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면 위와 같은 판단이나 의문은 모두 확실한 판단이고 분명한 의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우리의 생각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역시 다른 사물이나 사태와 마찬가지로 ‘緣起的’으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에 대한 이런 비판적 분석은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번민의 해소라는 불교적 해탈로 연결된다.
실재론적 견지에서 볼 때, 우리는 마치 집을 짓듯이, ‘개념’이라는 벽돌을 쌓아 올려 갖가지 ‘판단’의 벽과 기둥을 만들어냄으로써 ‘세계관’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완성한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에 의거해 일상을 바라보고 체험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건축물의 기초가 된 벽돌이 부실할 경우 건물 전체가 와해되듯이, 우리의 세계관의 기초가 된 개념이 확고한 실체성을 갖지 못할 경우 우리의 세계관 전체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어떤 벽돌은 쉽게 부수어지고 어떤 벽돌은 어렵게 부수어지듯이 우리의 세계관의 재료가 된 다양한 개념들은 그 실체성을 해체하기 쉬운 것과 어려운 것으로 구분된다. 해체되지 않는 개념은 단 하나도 없다. 개념의 실체성을 해체하는 집요하고도 치밀한 분석적 사유를 불교에서는 ‘般若’라고 부른다. 漢譯佛典에서 반야란 知가 아니라 智라고 번역된다. 즉, 태양(日)과 같이 밝은 앎(知: jñā)이 바로 반야(智: prajñā)이다. 반야적 지혜로조망할 경우, ‘눈도 없고, 코도 없고 … 마음도 없고, 형상도 없고 … 생각도 없다’. 이것이 ‘궁극적 진리’(paramārtha satya : 眞諦)이다.
그러면 이러한 반야적 조망을 불교철학 중 中觀學과 華嚴學에 의해 분석해 보자. 중관학에서는 『반야경』의 공사상을 치밀한 분석을 통해 논증하고 있으며, 화엄학에서는 『화엄경』에 제시되어 있는 無碍의 경지를 철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제시한다. 서구철학사의 경우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이 칸트의 비판론에 의해 종합된 후 다시 헤겔의 관념론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불교사상사 역시 이와 유사하게 다양한 아비달마철학에서 비판철학인 중관사상으로, 그리고 관념론적인 唯識思想으로 변모하면서 전개된다.
그러나 불교사상사의 경우 다양한 철학체계 모두 ‘연기사상’이라는 공통분모를 갖는다는 점에서 서구철학사와 구별된다. 서구철학사는 反動의 역사라고 규정할 수 있다. 후대의 철학은 전시대의 철학을 비판하며 출현한다. 그러나 불교철학사의 경우는, 붓다가 발견한 ‘연기의 진리’를 각 시대정신에 부응하여 재해석해 간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불교철학사에서 출현한 다양한 사상들은 연기와 해탈이라는 한 맛(一味)을 구현하고 있기에 그 모두가 하나의 불교일 수 있는 것이다. 중관학과 화엄학 역시 ‘연기’에 대한 설명 방식의 차이에서 가름될 뿐 그 근본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먼저 중관학에 의거해 일상이 해체되고 구성되는 과정에 대해 고찰해 보자. ‘空의 논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관학에서는 반야적 지혜, 다시 말해 공의 지혜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 중관적 해체와 구성
【개념의 해체와 구성】
① ‘긺’과 ‘짧음’은 실체가 있는가?
우리는 어떤 막대를 보고 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의 저변에는 그에 비해 짧은 막대에 대한 상념이 선재(先在)했어야 한다. 짧은 막대를 염두에 두지 않고 길다는 생각은 결코 떠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동일한 막대에 대해 우리는 짧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다. 그 때에 우리의 생각의 저변에서는 반드시 그에 비해 긴 막대에 대한 상념이 선재했어야 한다. 어떤 길이의 막대가 길거나 짧다고 생각하는 일은 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상반된 짧음 또는 긺이라는 생각을 반드시 전제한 후 발생한다. 긺은 짧음에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하며 짧음은 긺에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 긺과 짦음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긺도 공하고 짧음도 공하다. .
‘더러움과 깨끗함’, ‘잘 생김과 못 생김’, ‘영리함과 우둔함’, ‘부유함과 가난함’과 같은 개념쌍들 모두 긺과 짧음의 경우와 같이 연기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그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이 이외에도‘건강과 질병’, ‘빠름과 느림’, ‘밝음과 어두움’, ‘뜨거움과 차가움’, ‘아름다움과 추함’, ‘바쁨과 한가함’ 등과 같은 상대적 개념들도 어렵지 않게 그 실체성이 논파된다. 이런 개념들은 사유의 건축물을 구성하고 있는 ‘부수어지기 쉬운 벽돌’들이다.
② 불과 연료는 실체가 있는가?
우리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은 후 불을 지핀다. 이 때 장작은 연료가 된다. 언뜻 보면 분명히 불이 있고 연료로서의 장작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히 분석할 경우 불은 홀로 실재하지 않는다. 장작에 불을 지피기 위해 성냥불을 켤 때 성냥에서 타오르는 불은 성냥 개피라는 연료에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라이터를 켜는 경우에도 가스라는 연료에 의존해야 비로소 불이 타오른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불을 존재하게 하는 연료란 불길의 모습만큼 노랗게 달구어진 탄소 알갱이들이다. 성냥불이건, 라이터 불이건 나무나 가스에서 발산된 미세한 탄소 알갱이들이 마치 숯불과 같이 달구어져 노랗게 빛을 발함으로써 너울거리는 불길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달구어져 밝은 빛을 발하던 탄소알갱이가 완전히 산화되면 무색의 탄산가스로 변하여 허공으로 날아간다. 그래서 불길의 윤곽이 형성된다. 그런 불길에서 불과 연료는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노랗게 너울거리는 하나의 사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思惟는 그런 하나의 사건에서 불과 연료를 분할해 낸다. 가스 불이건, 석유난로의 불길이건 산불이건 이 세상 어디를 찾아보아도 연료 없이 홀로 존재하는 불은 없다. 따라서 불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그러면 이렇게 홀로 존재하는 불이 없지만 연료는 불 없이도 홀로 존재하지 않을까? 헛간에 쌓여 있는 장작은 분명 불과 관계없이 홀로 존재하는 연료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연료 역시 불과 마찬가지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헛간에 쌓여 있는 장작은 아직 장작이 아니고 연료가 아니다. 헛간에 쌓인 장작은 건축재료로 활용될 수도 있고, 목각의 재료가 될 수도 있으며, 빨래방망이로 깎여질 수도 있다. 장작이 진정한 장작이기 위해서는 불이 붙어야 한다. 불이 붙어야 헛간에 쌓여 있던 나무토막에 비로소 장작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료 역시 불과 무관하게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연료와 불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기에 공하다. 불을 설정하기에 연료가 설정되며, 연료를 설정하기에 불이 설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불과 연료는 이렇게 분할을 통해 의존적으로 발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과 연료는 연기적으로 발생하기에 그 실체가 없다.
‘나와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이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고, 내가 있어야 세상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세상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세상 역시 나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혼과 육체’, ‘행위와 행위자’ 모두 연료와 불이 그렇듯이 연기적으로 발생한 개념들이기에 독립적 실재성이 없다. 즉, 실체가 없어 공하다.
③ ‘눈’과 ‘시각대상’은 실체가 있는가?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말한다. 분명 내 얼굴의 상부에는 두 개의 둥그런 눈동자가 만져진다. 눈이 있는 것, 그리고 그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이 눈 역시, 긴 것과 짧은 것, 불과 연료처럼 실체가 없다. 그 까닭은 ‘눈이 그 스스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의 본질은 ‘보는 힘’이다. 보는 능력, 보는 작용이 눈의 본질이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힘으로서의 눈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홀로 존재하는 불이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듯이 홀로 존재하는 ‘보는 힘’으로서의 눈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혹, 거울에 비추어 보면 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항변할지 모르나 거울에 비쳐 보이는 눈은 엄밀히 말해 진정한 눈이 아니다. 눈에 비친 시각대상의 세계의 일부일 뿐이다. 흰 동자와 검은 동자로 이루어진 작은 찻잎(茶葉) 모양의 시각대상일 뿐이다. 즉 거울에 비추어진 나의 얼굴 모습을 포함한 전체 풍경 중 작은 부분일 뿐이다. 그것은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이 아니다.
눈은 반드시 시각대상과 관계함으로써 눈이 된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바라볼 때, 우리에게 느껴지는 모든 것은 하나의 풍경일 뿐이다. 그 풍경에서 어느 부분이 보는 힘으로서의 눈에 속하고 어느 부분이 시각대상에 속하는지 구분되지 않는다. 양자를 분할하는 경계선은 내 앞에 펼쳐진 풍경 어디에도 그어져 있지 않다. 다만 풍경이라는 하나의 현상만 존재할 뿐인데 우리는 ‘눈으로 풍경을 본다’고 말한다. 눈과 시각대상을 분할해 냄으로써 ‘시각능력으로서의 눈’과 ‘시각대상의 세계’가 구성되는 것이다.
시각대상 역시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눈이 없을 경우 시각대상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선천적인 맹인에게 색깔과 형태가 무의미하듯이. ‘삶과 죽음’ 역시 마찬가지다. 주관적으로 볼 경우 나의 죽음, 내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되는 죽음은 나에게 확인된 적도 없고 앞으로 확인될 수도 없다. 마치 홀로 존재하는 불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었듯이, 시각능력으로서의 눈의 존재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었듯이, 내가 나의 죽음과 대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죽음은 실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실재하지 않기에, 삶 역시 삶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삶은 죽음과 함께 발생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염두에 두어야 지금의 이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실재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이것은 삶일 수도 없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지금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만난 적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죽음을 설정하기에 지금 여기에 대해 ‘삶’이 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다.
【관계의 해체와 구성】
앞에서 긺과 짧음, 불과 연료, 눈과 시각대상의 실재성을 논파하면서 긺은 짧음에 의존해야 존재하며, 불은 연료에 ‘의존’해야 존재할 수 있으며, 눈은 시각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눈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런 설명을 통해 우리는 긺과 짧음, 불과 연료, 눈과 시각대상과 같은 개념들이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아울러 연기와 공의 의미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연기를 설명하는 ‘의존’이나 ‘관계’란 말에 문제는 없을까? ‘모든 것이 연기적이기에 실체가 없어 공하다’면 관계 역시 실체가 있을 수가 없다. 만일 ‘관계성’만은 그 실체가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라는 주어에 예외가 있는 꼴이 되니 ‘모든 것이 연기적이기에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말은 보편적 진리성을 상실하고 만다. 그래서 중관학에서는 다시 그런 ‘관계성’ 역시 공하다고 분석해 낸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① ‘긺이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짧음에 의존하여 성립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긺의 성립 근거는 짧음이 된다. 그런데 짧음에 토대를 두고 긺이 성립한다면, 짧음은 원래 실재했어야 한다. 그러나 짧음 역시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짧음이 설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긺이 선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긺의 성립 근거로서 짧음을 얘기했으나, 그 짧음이 설정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긺이 있었어야 한다. 여기서 논의는 악순환에 빠진다. 긺을 규정하기 위해 긺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② 또 ‘불과 연료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고 말할 때, 불과 연료가 서로 의존하기 위해서는 그 실체가 미리 성립되어 있었어야 한다. 주체가 있어야 그것이 의존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리 성립되어 있던 불이 성립을 위해 다시 의존하게 된다는 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미리 불이 성립되어 있다면 성립되기 위해 다시 연료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반대로 아직 성립되지 않은 불과 연료가 서로 의존함으로써 불과 연료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해도 오류에 빠진다. 주체가 없는 것은 의존이라는 관계를 맺을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적으로 성립한다면 이 존재가 거꾸로 의존 받음이 성립되리니 지금은 의존함도 없고 성립될 존재도 없다(若法因待成 是法還成待 今則無因待 亦無所成法: yo ’pekṣya sidhyate bhāvastamevāpekṣya sidhyati/ yadi yo ’pekṣitavyaḥ sa sidhyatāṃ kamapekṣya kaḥ//) 만일 어떤 존재가 의존하여 성립되는 것이라면 아직 성립되지 않은 것에는 어떻게 의존할 수 있겠는가? 만일 성립되고 나서 의존하는 것이라면 이미 성립이 끝났는데 의존할 필요가 무엇 있겠는가?(若法有待成 未成云何待 若成已有待 成已何用待: yo ’pekṣya sidhyate bhāvaḥ so ’siddho ’pekṣate katham/ athāpyapekṣate siddhastvapekṣāsya na yujyate//): 龍樹, ?中論?, 第10 觀燃可燃品, 第10, 11偈.)
③ ‘눈은 시각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할 때, 눈이 시각대상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미리 존재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미리 존재하고 있는 눈은 시각대상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다시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와 반대로 아직 존재하지 않은 눈이 시각대상과 관계를 맺는다고 해도 오류에 빠진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눈은 다른 무엇과 관계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인식방법이 스스로 성립한다[고 그대가 주장한다]면, 그대의 [주장의] 경우, 인식방법은 인식대상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성립하게 된다. [왜냐하면] 스스로 성립하는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40). 만일, 그대의 [주장의] 경우, 인식대상들인 사물들에 의존하지 않고서 인식방법이 성립하는 것이라면, 그와 같은 그런 것들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인식방법들이 되지 않는다(41). 만일, 그것(= 인식방법)들이 [인식대상들에] 의존하여 성립한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잘못이 있는가? [이미] 성립된 것을 [의존에 의해 다시] 성립시키는 것이리라. 왜냐하면, 성립되지 않은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42). 만일, 그 어디서든지 인식방법들이 인식대상들에 의존하여 성립하는 것이라면, 인식방법들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인식대상이 [원래] 성립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43).(yadi svataśca pramāṇasiddhiranapekṣya tava prameyāṇi/ bhavati pramāṇasiddhirna parāpekṣā svataḥ siddhiḥ(40)// anapekṣya hi prameyānarthān yadi te pramāṇasiddhiriti/ na bhavanti kasyacidevamimāni tāni pramāṇāni(41)// atha matamapekṣya siddhisteṣāmityatrabhavati ko doṣaḥ/ siddhasya sādhanaṃ syānnāsiddho ‘pekṣate hyanyat(42)// sidhyanti hi prameyāṇyapekṣya yadi sarvathā pramāṇāni/ bhavati prameyasiddhirnāpekṣyaiva pramāṇāni(43)// 龍樹, ?廻諍論?, 第40~43偈: 김성철 역, ?회쟁론?, 경서원, 1999, pp.191~202).
이렇게 의존하는 대립쌍 간의 관계 역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대립쌍을 설정함에 따라 양자간에 ‘관계’라는 개념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판단의 해체와 구성】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바람이 분다’거나 ‘비가 내린다’는 말을 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바람’이나 ‘붐’, ‘비’나 ‘내림’이 실재한다고 생각되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실재론적 사고방식에 의해 세상을 바라볼 때, 그런 문장들은 논리적 오류를 內含하게 된다.
‘바람이 분다’고 말할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이 문장의 주어인 ‘바람’ 속에는 ‘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가, 배제되어 있는가? 그 어떤 경우에도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먼저 ‘바람’ 속에 ‘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면, ‘바람이 분다’는 말은 ‘<부는 바람>이 분다’는 의미가 되고 만다. 즉, 부는 것이 두 번 있게 되는 ‘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마치 ‘얼음이 언다’거나 ‘꿈을 꾼다’고 말할 때와 같이…. 또 ‘驛前 앞’이라고 말할 때와 같이…. 그와 반대로 ‘바람’ 속에 ‘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고 말해도 오류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불지 않는 바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에 위배는 오류’이다. 바람이 불 때 사실은 하나의 사태만 발생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바람’과 ‘붐’이라는 두 가지 사태로 분할해 내어 ‘바람이 분다’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문장에서 쓰인 主語와 述語 인 ‘바람’과 ‘붐’은 마치 ‘긴 것’과 ‘짧은 것’, ‘불’과 ‘연료’, ‘눈’과 ‘시각대상’이 緣起的으로 발생하였듯이 연기적으로 발생한 개념들이다. 이렇게 하나의 판단을 구성하는 요소인 주어와 술어가 각각 실재한다고 간주할 경우, 우리는 ‘중복의 오류’와 ‘사실에 위배되는 오류’에 빠지고 만다.
(龍樹의 「中論」에서는 ‘가는 놈이 간다’는 판단에 대해 위와 같은 방식의 논의를 벌인다. 이는 다음과 같다: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하면 감이 두 개가 있게 된다. 첫째는 가는 놈의 감이고 둘째는 가는 작용의 감이다”(若去者有去 則有二種去 一謂去者去 二謂去法去: gamane dve prasajyete gantā yadyuta gacchati/ ganteti cocyate yena gantā sanyacca gacchati//), “만일 가는 놈이 간다고 말한다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오류에 빠진다. 감 없는 가는 놈, 그런 가는 놈의 감을 희구하기 때문이다”(若謂去者去 是人則有咎 離去有去者 說去者有去: pakṣo gantā gacchatīti yasya tasya prasajyate/ gamanena vinā gantā ganturgamanamicchataḥ//), ?中論?, 第2 觀去來品, 第10~11偈.)
지금까지 거론한 ‘긺, 짧음, 더러움, 깨끗함, 잘생김, 못생김, 영리함, 우둔함, 부유함, 가난함, 건강, 질병, 선함, 악함, 빠름, 느림, 밝음, 어두움, 뜨거움, 차가움, 아름다움, 추함, 바쁨, 한가함, 불, 연료, 나, 세상, 영혼, 육체, 행위, 행위자, 눈, 시각대상, 삶, 죽음, 의존, 인식, 공, 바람, 붐, 비, 내림’은 물론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개념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적 분할’에 의해 발생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개념들의 연기적 기원을 망각한 채, 그것들이 다양한 사물이나 사태로서 실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한 후 낱낱을 조합하여 우리의 일상을 구성해 낸다.
‘나는 지금 눈으로 책을 본다’고 말할 때, 사실은 한 덩어리의 사건만 일어나고 있을 뿐인데 우리의 사고는 그 한 덩어리의 사건에서 ‘나’와 ‘지금’과 ‘눈’과 ‘책’과 ‘봄’을 분할해 낸 후, 다시 이를 재배열하여 하나의 판단을 작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 덩어리의 사건에서 ‘나’는 ‘지금, 눈, 책, 봄’과 유리되어 존재할 수 없으며, ‘지금’ 역시 ‘나, 눈, 책, 봄’과 유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 ‘봄’ 역시 ‘나, 지금, 눈, 책’과 유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그 한 덩어리의 사건에서 ‘나, 지금, 눈, 책, 봄’은 연기적으로 발생된 것들이다. 원래는 그 각각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각각은 분할을 통해 연기적으로 발생하며, 그런 연기적 발생 과정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그 각각이 원래 공함을 자각하게 된다. 즉, 그 각각의 실체성은 해체된다.
지금까지 중관학적 방식에 의해 일상이 해체되고 일상이 구성되는 모습에 대해 조망해 보았다. 중관학적 방식은 절대부정의 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일상을 해체한 후 그렇게 해체하는 데 쓰인 도구로서의 언어조차 해체한다. 일상을 해체하여 ‘모든 것은 공’하다고 말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공 역시 공하다고 말한다.
비유를 들어 보자. 캠프파이어를 위해 쌓아 놓은 장작들을 깡그리 잘 태우기 위해서는 그 중 하나의 장작개비를 들어 장작더미를 여기 저기 들춰가며 태우면 된다. 그러나 장작더미 전체에 불이 붙은 다음에는, 불쏘시개로 사용된 그 장작개비마저 불길 속에 던져 태워버린다. 또, 목욕을 하기 위해서는 비누가 묻은 수건을 들고 몸 구석구석을 여기저기 닦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건을 들었던 그 손에도 비누칠을 해 닦는다.
또 座中이 소란할 때 누군가가 일어나 ‘조용히 해!’라고 외친다. 그 후 소란함이 사라지면 ‘조용히 해!’라는 소리도 종적을 감추어 좌중은 조용하게 된다. 여기서 장작더미, 몸, 소란함은 공의 논리에 의해 비판되는 일상에 비유되고, 불쏘시개로 사용된 장작개비, 수건을 든 손, 조용히 하라는 소리는 공의 논리에 비교된다. 이렇게 중관학에서는 철저히 부정적 방식에 의해 일상을 해체하며, 그렇게 해체하는 데 쓰인 공의 논리 역시 해체해 버리는 절대부정적 방식에 의해 ‘연기’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낸다. 중국적 중관학인 三論宗의 大成者 길장(吉藏: 549~623 C.E.)은 이를 破邪顯正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런데 이와 상반되게 절대긍정적 방식에 의해 일상을 해체함으로써 연기에 대한 자각을 구현하는 불교사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화엄학이다. 이제 화엄학에 의거해 우리의 일상을 해체되고 구성되는 모습에 대해 조망해 보자.
* 화엄적 해체와 구성
【하나는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하나다(一卽一切 多卽一)】
앞에서 중관학에 의거해 불도 그 실체가 없고, 연료도 그 실체가 없다는 점을 논증한 바 있다. 헛간에 쌓여 있는 나무토막은 불이 붙어야 비로소 장작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다. 이름이 없다는 말은, 역으로 수많은 이름이 부여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나무토막은 ‘장작’일 수도 있고, ‘조각품의 재료’일 수도 있으며, ‘건자재’일 수도 있다. 무기로 사용한다면, ‘몽둥이’가 된다. 목침으로 쓴다면 ‘베개’가 된다. 마당에 선을 긋는 데 사용한다면 커다란 ‘필기구’가 된다. 그대로 미술전시장에 진열하면 오브제(objet)로서 ‘미술작품’이 된다. 나무 속에 사는 벌레에게는 ‘집’이면서 ‘먹이’이다. 그 모습은 내 망막의 ‘살’이다. 唯心論者가 볼 때에는 나의 ‘마음’이다. 일체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선언한 高僧에게 그 장작은 ‘부처’다. 나의 눈으로 먹는 ‘밥’이다. 여러 원소가 결합된 ‘물질’이다. 나의 주의력을 강탈한 ‘강도’다. 기독교인에게는 ‘신비한 피조물’이다. 나무꾼에게는 ‘돈’이다. 여러 물질들이 화합하여 만들어 낸 ‘똥’이다. 나의 눈에는 ‘시각대상’이다. …
따라서 ‘헛간의 나무토막은’, 장작이고, 조각품의 재료이며, 건자재이고, 몽둥이이며, 베개이고, 필기구이고, 미술작품이며, 집이고, 먹이이며, 살이고, 마음이고, 부처이며, 밥이고, 물질이며, 강도이고, 신비한 피조물이며, 똥이고, 돈이며, 시각대상이다. 우리가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경우 ‘헛간의 장작’(一)은 단순히 많은 것을 넘어서 ‘모든 것’(一切)이 되고 만다. 화엄학에서는 이런 이치를 ‘하나가 곧 모든 것이다(一卽一切)’라고 표현한다. 여기서 하나는 비단 장작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평생을 한 분야에 종사한 사람들의 입에서 이러한 一卽一切의 선언이 발화되는 것을 종종 접하게 된다.
원로 기호학자는 ‘모든 것이 기호다’라고 선언한다. 화가 레제(Fernand Léger)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唯心論者들은 ‘모든 것이 마음이다’라고 말한다. 唯物論者는 ‘모든 것이 물질이다’라고 말한다. 禪僧은 ‘行住坐臥 중 禪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避靜에 들어간 천주교 신자는 ‘일체가 하느님’이라는 점을 명상한다. 불전에는 ‘頭頭物物이 모두 부처님이다’라는 선언이 등장한다. 교육학자는 ‘평생교육’을 말한다. 사업가에게는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된다. 모든 것이 기호이고, 아름답고, 마음이며, 물질이고, 선이며, 하느님이고, 부처님이고, 교육이며, 돈이다. 인상파와 입체파, 야수파를 거쳐 현대의 추상미술과 비디오 아트, 해프닝, 설치미술을 산출해 온 서양미술사는, ‘모든 것이 미술이다’라는 해체적 명제를 향해 ‘미술’이라는 개념의 테두리를 넓혀 온 과정이었다.
모든 것이 시계이다. 손목시계는 시계이다. 벽시계도 시계이다. 해시계도 시계이다. 물시계도 시계이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도 그 위치에 따라 시간을 짐작케 하기에 시계이다. 달도 시계, 별도 시계이다. 우리의 몸도 시계이다. 몸을 보면 나이라는 시간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도 시계이다. 낡은 건물과 새 건물이 있듯이…. 나무도 시계이고, 산도 시계이고, 길도 시계이다. 이 세상에 시계 아닌 것은 없다.
한 가지 개념의 범위에 절대적 테두리를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치 통계곡선이 x축에 닿지 않고 무한히 근접하기만 하듯이…. 화엄학에서 ‘하나는 모든 것이다(一卽一切)’라고 할 때 ‘모든 것’은 ‘무한’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미술이고, 모든 것이 연극이며, 모든 것이 한 편의 드라마이고, 모든 것이 동공이라는 카메라에 찍힌 사진이며, 모든 것이 음악이고, 모든 것이 춤을 추고, 모든 것이 운동을 하며, 모든 것은 길이고, 모든 것은 산이며, 모든 것은 어둡고, 모든 것은 밝으며, 모든 것은 바깥이고, 모든 것은 안이며, 모든 것은 나의 몸이고, 모든 것은 남이며,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것이고, 모든 것은 남이 만든 것이며, 모든 것은 컵이고, 모든 것은 슬픔이며, 모든 것은 기쁨이고 … 모든 것은 비극이고 모든 것은 희극이다. 그리고 앞 장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은 일상이다. 하나의 개념은 무한을 함의한다(一卽一切名).
그런데 지금까지 말했듯이, 모든 것이 미술이고, 모든 것이 연극이며, 모든 것이 사진이고, 모든 것이 똥이고, 모든 것이 부처이고, 모든 것이 길이고, 모든 것이 산이고, 모든 것이 하느님이고, 모든 것이 컵이고, … 모든 것이 희극이라면, “A≡B이고 A≡C라면, B≡C다”라는 단순한 논리법칙에 의해, 미술은 연극이고 연극은 사진이며, 사진은 똥이고 똥은 부처이며, 부처는 길이고, 길은 미술이며, 하느님은 산이고, 컵은 사진이라는 파격적 선언이 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는 마른 똥막대기’라는 등의 禪師들의 獅子吼가 吐露 될 수 있는 것이다. 看話禪 수행에서 話頭로 사용되는 이러한 파격적 판단은, 우리의 사유의 극한에서 발견되는 무분별적 조망에서 터져 나오는 ‘至高至純한 無碍의 판단’이다. 화엄은 이렇게 선불교로 연결된다.
그러면 화엄학적 견지에서는 어째서 이렇게 상식을 넘어선 결론이 도출되는 것일까? 중관학에서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근거가, 연기설에 있었듯이 화엄학에서 ‘하나는 모든 것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되는 근거도 연기설에 있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의 지혜(慧, 觀)를 얻기 위해서는 선정(定, 止)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定慧雙修, 또는 止觀雙運이라고 부른다. 선정(定, 止)과 지혜(慧, 觀)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정혜쌍수는 신비하거나 난해한 수행이 아니다. 단순히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될 수 있다. 여기서 ‘곰곰이’란 ‘마음을 집중하는 定’에 해당되고 ‘생각하는 것’은 ‘慧’에 해당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문제를 풀고자 할 때 곰곰이 생각한다. 불교에서 제시하는 坐禪 수행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곰곰이’라는 일상적 행위를 보다 전문적으로 체계화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하나의 개념의 범위와 의미를 규정하기 위해 곰곰이 생각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모든 개념의 의미와 범위가 해체되는 일을 체험하였다. 왜 그렇게 됐을까? 우리가 실재한다고 당연시했던 개념들은 사실은 모두 연기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개념의 의미와 범위를 규정하려고 할 때 우리의 생각은 그 개념 하나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집중할 경우 그 개념을 발생시킨 연기적 대응쌍에 대한 기억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연기적 대응쌍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그 개념의 의미가 확고한 듯이 느껴지는 법인데, 마음에 동요 없이 그 개념 하나만 주시할 경우, 즉 인식의 장에 그 개념의 대응쌍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주의력을 모아 하나의 개념에만 집중할 경우 그 개념은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안경을 쓰고 안경을 찾는 것, 목걸이를 잃어버렸는지 확인하는 행위, 시골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으면 그 냄새가 약해지는 것 모두 한 가지 감각만 계속될 경우, 그런 감각에 대한 인식을 야기한 대응감각에 대한 기억이 사라짐과 함께, 그 감각에 대한 인식 역시 점차 소실되기 때문이다.
처음 안경을 낄 경우 안경테가 피부를 누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왜냐하면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의 피부의 느낌과 안경을 쓴 이후의 피부의 느낌이 다르기 때문이다. 안경을 쓴 이후의 피부의 느낌은 연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안경을 쓴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안경을 쓰기 전의 피부의 느낌에 대한 기억이 점차 소실된다. 그 결과 안경을 썼다는 느낌도 사라진다. 그 때 우리는 무심코 안경을 쓰지 않았다고 착각하고서 안경을 찾게 된다.
이와 같은 이치에 의해 하나의 개념의 정체를 집요하게 추구해 들어갈 경우, 우리는 그 개념의 실체가 해체되는 것을 경험한다. 달리 말하면 空性과 만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공성(śūnyatā)을 ‘모든 존재(法: dharma)가 공유하는 궁극적인 정체(諸法實相, 法性: dharmatā)’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치로 인해 ‘부처나 보살의 名號를 되풀이해서 염송함으로써 三昧(samādhi)로 진입하는 염불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가 모든 것이다’라는 화엄적 이치가 적용되는 분야는 비단 이름뿐만이 아니다. 사물의 모양도 一卽一切의 이치에 의해 해체된다. 지금 탁자 위에 컵이 하나 놓여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이 컵의 모양을 그대로 그려보라고 주문할 때 우리는 어떻게 그려야 할까? 옆모습을 그릴 것인가 위 모습을 그릴 것인가? 시점이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 컵의 형태의 진실은 도저히 평면 위에 모두 담을 수가 없다. 컵의 모습은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네모지며, 그 속에 들어 가 보면 아늑한 집이 되고, 눈앞에 마주 대면 벽이 되고, 멀리 떨어지면 하나의 점이 되며, 더 멀리 떨어지면 허공에 동화된다. 빙빙 돌리면 원이 되고, 좌우로 휘두르면 면이 되고 선이 된다. 이 중 어떤 것도 컵의 본래적인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이 모든 것이 컵의 모습일 수가 있다. 따라서 ‘컵의 본질적 모습이 어떠하냐?’고 물을 때 우리는 ‘모든 모습을 띤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중에서 우리는 인물의 정면과 측면의 모습을 함께 그린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형태의 진실, 입체의 진실을 평면에 표현하려던 피카소의 勞作들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은 무한한 視點을 용인하기에 그 모습은 피카소의 그림에 구상화되어 있듯이 두 세 가지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하다. 즉, 하나의 사물은 무한한 모습을 갖는다(一卽一切相).
이름(名)과 모양(相)은 물론이고, 우리의 감정의 영역에서도 일즉일체의 진실은 작용한다. 우리의 감정이 밖으로 표출된 대표적인 동작이 ‘웃음’과 ‘울음’이다. 흔히 웃음은 좋은 것, 울음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그럴까? 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止觀)’해 보자. 우리는 언제 웃는가? 물론 좋을 때 웃는다. 기쁠 때에도 웃는다. 즐거울 때에도 웃는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해 한없이 슬플 때에도 웃는다. 남을 비웃는 嘲笑도 있다. 너무 화가 날 때에도 웃는다. 아첨의 웃음도 있다. 허탈해도 웃는다. 사춘기의 소녀는 가랑잎이 굴러가는 것만 보아도 웃는다. 웃음 역시 그 테두리가 없다. 모든 감정이 웃음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울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슬플 때 운다. 그러나 너무 기쁠 때에도 운다. 무서울 때에도 운다. 훌륭한 예술에 감동할 때에도 운다. 운동 경기에서 이긴 사람도 울고 진 사람도 운다. 울음 역시 그 테두리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나 연극을 보면서, 슬픔을 웃음으로, 기쁨을 울음으로 멋지게 표현하는 名俳優의 역설적 연기에 감동하게 되는 것이다.
2. 감성적 일상의 해체와 구성
우리가 체험하는 일상은 개념과 판단 또는 사물과 사태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질투, 사랑, 분노, 교만, 탐욕을 분출하고 기쁨, 슬픔, 괴로움, 즐거움, 우울을 느끼면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감성들이다. 질투와 사랑과 분노와 교만과 탐욕 등은 ‘능동적으로 분출되는 心身의 작용’이며,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 그리고 우울 등은 ‘수동적으로 감수되는 심신의 느낌’이다.
우리는 앞 절에서 認知的 일상을 구성하는 개념과 판단들이 해체되고 구성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그 결과 인지적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그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탐욕이나 분노, 괴로움이나 즐거움과 같이 감성적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 역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외아들을 잃은 홀어머니가 느끼는 애절한 슬픔도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젯밤 내내 나를 괴롭힌 두개골을 부수는 듯한 치통 역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헤이즐넛 커피의 향기도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봄꽃이 만발한 정원의 아름다움에 취한 황홀한 내 마음 역시 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것들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질투, 사랑, 분노, 교만, 탐욕과 같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 능동적으로 분출되는 감정들은 우리의 마음속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그릇된 인지체계로 인해 발생하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인지의 영역에서 자아와 사물과 사태의 실체가 없어 공하다는 자각이 철저하지 못하기에 호․불호(好․不好)의 감정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인지체계가 정화될 경우 능동적으로 분출되던 신심의 작용이 사라진다. 마치 긴 것이 없으면 짧은 것이 있을 수 없고, 연료가 없으면 불이 존재할 수 없듯이, 인지의 영역에서 분별이 사라지면 애증의 감정 역시 사라지게 된다.
또, 기쁨, 슬픔, 괴로움, 즐거움과 같이 수동적으로 감수되는 느낌들 역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그런 느낌들은 모두 과거, 또는 전생의 언젠가 내가 분출했던 감정과 행위로 인해 구성되어 나에게 체험되는 것들이다. 과거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분노하여 그를 해침으로써 그에게 괴로움과 슬픔을 주었다면, 내가 그를 향해 내뿜었던 분노와 해침은, 괴로움과 슬픔으로 나에게 나타나고, 과거의 언젠가 내가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어 즐거움을 주었다면, 그 호의는 현재의 나에게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지의 영역에서는 緣起하는 대립쌍 중 어느 하나가 발생할 때 다른 하나는 반드시 동시적으로 발생하지만, 감성의 영역에서는 어느 하나가 발생할 경우 그와 연기적으로 얽혀 있는 다른 하나는 시간을 달리하여 미래에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 지은 행위(業)와 연기적으로 얽혀 있는 果報의 결실은 행위와 동시에 체험되기도 하고, 現生 중의 미래 언젠가 나타날 수도 있고 내생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 더욱 먼 미래에 나타날 수도 있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因果應報의 교리이다.
지금 내가 팔을 휘두르면(業) 팔의 근육이 긴장되는 느낌과 피부를 스치는 바람결의 느낌(果報)이 즉각 체험된다. 감았던 눈을 뜨면(업)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이 내 시야에 나타난다(과보). 이런 예는 감성의 영역에서 원인(業)과 果報가 동시적으로 체험되는 가장 단순한 인과응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를 향해 지은 선행이나 악행의 경우, 그 과보는 그런 행위에 부응하는 즐거움(樂)이나 괴로움(苦)을 나에게 초래할 만큼 주변여건이 무르익어야 과보로 나타난다. 즉, 시간을 달리하여 나타난다(異熟果). 작은 행위로 큰 과보가 초래되기도 하고, 큰 행위로 작은 과보가 초래되기도 한다.
우리가 현생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모든 괴로움과 슬픔과 즐거움과 기쁨은 우연히 나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전생, 또는 과거에 내가 지었던 행위에 의거해 緣起的으로 발생한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앞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슬픔과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우리의 마음에서 분노와 질투, 교만과 탐욕 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혹 그런 마음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한 그것이 말이나 행동을 통해 표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의 미래, 또는 내생을 행복한 삶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지켜야 할 행위의 준칙을 불교에서는 계율이라고 부른다.
계율은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종교적 신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만 승속을 막론하고 준수하는 대표적인 계율로 十善戒를 들 수 있다. ①동물을 죽이지 말 것, ②훔치지 말 것, ③잘못된 음행을 하지 말 것, ④거짓말하지 말 것, ⑤욕하지 말 것, ⑥이간질하지 말 것, ⑦꾸며서 말하지 말 것, ⑧탐욕을 내지 말 것, ⑨화내지 말 것, ⑩잘못된 세계관을 갖지 말 것. 우리가 이러한 덕목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에는 미래에 언젠가 그와 연기적으로 얽혀 있는 불길한 과보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어째서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고 그와 반대로 지극히 잘난 사람도 있는가? 어째서 어떤 생명은 짐승으로 태어나고 다른 생명은 사람으로 태어나는가? 어째서 이 세상에는 착하게 삶에도 불구하고 불행한 사람이 있고 사악함에도 불구하고유복한 사람이 있는가? 불교에서는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이런 모든 차별 역시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전생, 또는 과거에 이루어진 우리의 행위(業)에 의존하여 연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체험하는 행복과 불행, 빈부귀천의 차별 등은 모두 우리 스스로 지어낸 것들이다. 따라서 유복한 사람이 세세생생 유복할 수만은 없고, 박복한 사람이 세세생생 박복할 수만은 없다. 내가 현재에 겪고 있는 일상의 행복과 불행은 모두 전생이나 과거에 이루어진 나의 행위의 결과이다.또 내가 미래에 겪게 될 일상의 모든 것들은 지금의 나의 마음가짐과 행동이 결정한다. 따라서, 지금 내가 아무리 박복해도 올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나의 미래와 내생의 행복이 보장되고, 지금 내가 아무리 유복해도 올바르고 착하게 살아야 나의 미래와 내생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認知의 영역에서 긴 것이 없어지면 짧은 것이 없어지듯이, 感性의 영역에서는 행위가 없으면 그와 관계된 과보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행위와 과보를 없애는 방법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말 그대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와 과보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분별을 없애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상 올바른 행동은 하기에, 그런 올바른 행동의 과보가 미래에 나타난다. 즉, 전자와 같이 사는 사람의 경우 윤회의 세계에서 향상할 수는 있어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나와 사물과 세계에 대한 모든 분별이 끊어졌기에 행동을 해도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된다. 말을 해도 말을 하는 것이 아니며, 걸어가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과보를 받아도 과보를 받는 것이 아니다.
아직 분별에 휩싸인 남이 볼 때에는 그가 말을 하고 걸어가며 과보를 받지만 공성을 체득한 자신이 볼 때에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걸어가는 것도 아니며, 과보를 받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부처는 35세에 깨달음을 얻은 후 80세에 열반하기까지 45년간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깨달은 禪師들은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의 일상 중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부분도 그 궁극적 뿌리는 이렇게 인지적인데 있다. 불교는 主知的 종교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감성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 행복과 불행에 대한 불교의 해석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고 계시적이고 종교적이다. 따라서 이는 철학적 논의의 장에 포함시켜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를 제외하면 일상에 대한 불교적 조망은 반쪽짜리가 되고 만다.
Ⅲ. 다시 일상으로
1. 정화된 하나의 분별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갖가지 개념들과 판단들’이 해체되고 구성되는 모습에 대해 중관학과 화엄학에 의거하여 고찰해 보았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길은 길이고 컵은 컵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그러나 중관적 조망 하에서는 보면 산도 공하고 물도 공하고 길도 공하고 컵도 공하며 화엄적 조망 하에서는 산도 무한이며, 물도 무한이고 길도 무한이고 컵도 무한이다. 중관학에서는 절대부정적 방식에 의해 일상적 분별을 타파하며 화엄학에서는 절대긍정적 방식에 의해 일상적 분별을 타파한다. 중관학과 화엄학의 일상에 대한 접근방식과 그로 인해 도출된 명제는 상반되지만 양자 모두 일상적 분별을 타파한다는 점에서 그 취지를 같이한다. 비근한 예를 들어 이에 대해 다시 설명해 보자.
지금 이 곳에 불려 나와 강의를 하고 있는 나는 청중에 대해서 ‘강사’이다. 학교에 가면 ‘교수’이다. 나의 아이들에게는 ‘아빠’이고 처에게는 ‘남편’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고, 조카에게는 ‘삼촌’이며, 삼촌에게는 ‘조카’이고, 옆집 아이에게는 ‘동네 아저씨’이고, 수술대에 누우면 ‘고기 덩어리’이고, 뱃속의 기생충에게는 ‘우주’이며, 바퀴벌레에게는 殺氣 등등한 ‘적’이다. 이 중 그 어떤 것도 나의 호칭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호칭이 될 수가 있다. 여기서 ‘그 어떤 것도 나의 호칭이 아니다(無名)’라는 측면은 나의 호칭에 대한 절대부정적 조망, 즉 중관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조망이며, ‘그 모든 것들이 나의 호칭이다(一切名)’라는 측면은 나의 호칭에 대한 절대긍정적 조망, 즉 화엄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조망이다.
중관적 조망이나 화엄적 조망이나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해체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 취지는 같다. 그러나 일상 속의 나는 중관에서 말하듯이 아무 호칭 없이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화엄에서 말하듯이 모든 호칭으로 동시에 함께 불리며 생활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를 대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나에 대해 하나의 호칭이 부여된다. 즉, 나를 대하는 사람의 정체에 의존하여 나에 대한 무한한 호칭 중 하나의 호칭이 결정된다. 이렇게 일상에서 나에게 부여되는 호칭은 연기적으로 발생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설명했듯이 지금 탁자 위에 놓인 컵의 모양은 위에서 보면 동그랗고 옆에서 보면 네모지며, 그 속에 들어가 보면 벽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 되고, 눈앞에 마주 대면 벽이 되고, 멀리 떨어지면 하나의 점이 되며, 더 멀리 떨어지면 허공에 동화된다. 빙빙 돌리면 원이 되고, 좌우로 휘두르면 면이 되고 선이 된다. 이들 중 그 어떤 것도 컵의 본질적 모양이 아니지만(無相), 거꾸로 그 모든 모양이 컵의 모양이 될 수가 있다(一切相).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컵은 아무런 모양을 갖지 않는 것(無, 空)도 아니고, 가능한 모든 모양들이 한꺼번에 나타나 보이는 것(一切)도 아니다. 그런 다양한 모양들 중 매 순간 하나의 모양(一相)만 우리에게 보일 수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空’이나 ‘無’도 아니고 ‘一切’도 아닌 하나의 分別뿐이다. ‘공’이나 ‘무’, ‘일체’라고 해도, 그런 개념들이 우리의 사유의 세계에 들어온 이상 공, 무, 일체라는 또 다른 분별일 뿐이다. 그러나 공이나 무, 일체라는 분별은 다른 분별을 깨뜨려 주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된 분별이라는 점에서 자가당착에서 벗어난다. 무한한 컵의 모양들 중 어느 한 모양이 드러날(顯了) 때에는 다른 모든 모양들은 숨는다(隱密). 관찰자의 시점에 의존하여 연기적으로 하나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러한 이치를 화엄학에서는 ‘숨고 드러남이 함께 이룩되어 있는 이치’(隱密顯了俱成門)라고 부른다.
중관과 화엄적 조망에 의해 사물이나 사태에 실체가 있다는 고정관념이 모두 깨진다고 해서 우리의 면전에 나타나 보이는 일상의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산은 그대로 산으로 보이고, 물은 그대로 물로서 나타나며, 길은 길이고, 컵은 컵이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의 때가 淨化된 이후의 일상은 공성(空, 無)과 무한(一切)의 토대 위에서 전개된다. 그래서 산은 산이 아니면서 산이고, 물은 물이 아니면서 물이며, 길은 길이 아니면서 길이고, 컵은 컵이 아니면서 컵이다.
앞에서 말했던 ‘참된 진리에 대한 조망’과 ‘일상적 진리에 의거한 분별’이 중첩되어 있는 것이 진정한 일상의 모습인 것이다. 사실은 없지만(참된 진리) 있는 것처럼(일상적 진리) 보이는 ‘淨化된 일상’은, ‘실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우리의 가슴이 반응하게 만드는 꿈’에 비유되기도 한다.
중관과 화엄적 조망으로 우리의 의식이 어느 정도 정화될 경우 우리는 인습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매일 매일 새롭게 창의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과학자의 경우는 기발한 발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으며, 예술가의 경우는 예기치 못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할 수 있고, 정치인의 경우는 난국을 타개하는 절묘한 정책을 고안하여 사회를 선도할 수가 있다. 더 나아가 삶과 죽음, 인생과 세계에 대한 고정관념까지 모두 타파할 경우 우리는 완전한 깨침, 즉 해탈과 열반을 체험하게 된다.
2. 해체의 나락과 극복
현대문명은 우리의 認知體系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動因 중 하나는 헬레니즘(Hellenism)에 기원을 둔 서구인들의 분석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가능해진 이질적 문명과의 만남이다. 우리의 인지체계는, 내적으로는 치밀한 분석적 사고를 통해, 외적으로는 이질적 세계관이나 가치관, 인생관과 충돌할 때 해체된다.
불교의 空 사상을 연마하지 않아도 현대를 사는 우리의 인지는 해체의 방향으로 질주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첫째는, ‘모든 것이 공하다’는 명제는 이론이 아니라 일상에 대한 우리의 실재론적 분별을 정화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갖는다는 점이고, 둘째는 ‘인지의 해체’는 ‘감성의 정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할 경우 ‘모든 것이 공하다’는 말 역시 모든 것에 포함되기에 공해야 한다. 따라서 이 말은 절대절명의 이론일 수가 없다. 다만 모든 것에 실체가 있다는 집착을 시정해 주기 위해 동원된 도구적 명제일 뿐이다. 낙서로 더러워지는 담벼락에 쓰여진 낙서금지라는 글씨와 같다. 낙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때 낙서금지라는 글씨 역시 지워져야 하듯이, 모든 것이 공하다는 사실이 자각될 때 공이라는 말 역시 폐기되어야 한다.
또, ‘공’은 비누에 비교된다. 옷감에 묻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비누를 사용하지만 얼룩이 지워지면 비눗기 역시 헹구어 내야 하듯이 우리의 일상적 분별이 해체되면 공이라는 상념 역시 해체되어야 한다. 그래서 佛典에서는 ‘공도 역시 공하다’고 말한다. 공을 하나의 이론으로 착각한 사람의 경우, ‘공’을 통해 얻어진 해체적인 조망을 ‘일상의 차원’에 대입하여 살아간다. 이는 ‘해체’라는 ‘분별’을 내며 살아가는 꼴이다. 그러나 진정한 해체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출몰하는 하나 하나의 분별에 깊이 깊이 침잠해 들어갈 때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마치 時調唱을 부를 때와 같이.
불교 내에서 가끔 막행막식적 無碍行을 깨달음의 징표로 착각하는 수행자가 출현하는 것은 이렇게 도구적 성격을 갖는 해체의 과정이 무차별을 주장하는 하나의 세계관으로 착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전에서는 ‘차라리 어리석은 아이처럼 내가 있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갖고 살아갈지언정 空을 또 다른 세계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며, 중관학에서는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세계관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공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공을 다시 하나의 세계관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 어떤 부처가 출현해도 구제할 수 없다’거나, ‘잘못 파악된 공은 어리석은 사람을 파괴한다. 마치 독사를 잘못 잡았을 때와 같이, 주문을 잘못 외웠을 때와 같이’라고 경계한다.
唯識學에서도 이러한 상태를 惡取空(잘못 파악된 공)이라고 명명하며 혹독하게 비판한다.
해체의 방향으로 진행되어 온 현대사회가 아노미(anomie) 상태로 추락하는 과정은, 공의 취지에 대해 오해한 어리석은 불교수행자가 막행막식으로 逸脫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러면 이런 악취공의 奈落(Naraka: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일상적 진리’를 다시 건립하여, ‘감성의 정화’에 진력하는 일이다. 우리는 인지의 차원에서 ‘분노’와 ‘탐욕’이라는 개념에 실체가 없음도 자각해야 하지만, 감성의 차원에서 ‘분노’와 ‘탐욕’을 제어하는 도덕적, 윤리적 실천에도 진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윤리와 도덕은 실용적 목적에서 조작된 강제적 명령이 아니라, 분노와 탐욕의 시발점인 ‘자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참된 진리’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절대적 행위규범이다. 자아가 실재하지 않기에, 나와 남의 구분이 해체되며, 그 결과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다른 생명을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이 湧出하게 된다.
해체 이후 만나게 되는 진정한 일상은, 해체의 나락에 빠져 가치판단이 상실된 채 허우적대는 廢人의 삶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겸비하고 隱顯이 自在하게 활동하는 거룩한 聖人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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