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자애와 연민으로 지켜보라”
[‘진흙속의연꽃’의 불교이야기] 49-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타인의 업(業)
“작은 권력자는 분노로 권위를 나타내고, 큰 권력자는 자애로 권력을 나타낸다”
2015-11-12 (목) 17:09 진흙속의연꽃 |
흔히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 한다.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는다.’는 뜻이다. 이를 자작자수(自作自受)라고도 한다. 물론 여기서 나를 뜻하는 자신이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일반사람들이 의례히 “내가~”라고 말 하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나는 말한다.’고 하든가‘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 (S1.25) 하였다. 여기서 자업자득이라 하였을 때 이는 “업보만 있고 작자는 없다.”라는 말과 같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이 있다. 지금 죽은 사람이 있다. 그때 그 사람의 행위에 대한 과보에 개입할 수 없다. 선한 것이든 불선한 것이든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받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도 개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인터넷카페에서 ‘묻고 답하기’를 보았다. 어느 질문에 대하여 M법사는 이렇게 코멘트를 달았다.
“미운 사람이 있을 때나 아들 때문에 슬플 때는 먼저 각자가 받는 업의 과보로 생각하십시오.
상대의 업의 과보는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은 단지 상대의 업의 과보를 지켜보고 자애와 연민을 보내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지은 업의 과보는 비켜갈 수 없습니다. 받아야 할 것은 당연히 받는 것이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M법사)
어찌 보면 상당히 냉정한 답변이라 볼 수 있다.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내가 개입하여 어찌해 보고 싶으나 실제로 바꿀 수 없음을 말한다. 지금 받고 있는 과보는 단지 그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지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자고 한다.
타인의 업에 개입하였을 때
만일 타인의 불행에 대하여 내가 개입하여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전지전능한 신이 된다. 악행을 저질러 지옥에 떨어질 운명에 처해 있는 자를 천상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내가 전지전능한 자라면 선과보에도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선행을 하여 천상과도 같은 행복을 누리는 자의 업보에 개입하여 내가 차지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이나 성공에 대하여 내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만일 개입하여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세상은 뒤죽박죽이 되어 버릴 것이다. 업보에는 악과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보도 있기 때문에 내가 개입 하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릴 것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 볼 뿐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하여 바꿀 수 없다. 타인의 성공과 번영에 대해서는 축하하며 함께 기뻐할 뿐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 자업자득이고 자작자수이다. 그래서 “받아야 할 것은 당연히 받는 것이 사물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라 했을 것이다.
자심해탈(慈心解脫)
부처님 가르침에 사무량심(四無量心)이 있다. 자애, 연민, 기뻐함, 평정을 말한다. 모두 업(業)과 관련이 있다. 타인의 불선과보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을 내야 함을 말한다. 타인의 선과보에 대해서는 축하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한다. 또 불선과보이든 선과보이든 모두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여 마음의 평정을 유지 하는 것이다.
사무량심은 기본적으로 닦는 것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타인의 업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업을 보면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자애의 마음을 내었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해진다. 자애를 방사 한다고 하여 상대방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자애의 마음을 내어 고요해졌을 때 이를 자심해탈(慈心解脫), 즉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이라 한다.
불교의 목적이 열반의 성취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 한다. 청정에 이르는 길 중의 하나가 사무량심을 닦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무량심을 닦는 근본목적은 해탈하기 위해서이다.
자애공덕의 과보
초기경에 따르면 자애공덕은 그 어떤 공덕 보다 더 수승하다고 하였다. 이띠붓따까(여시어경)에 따르면 “수행승들이여, 다시 태어날 근거가 되는 공덕을 만드는 토대들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 모든 것은 자애의 마음에 의한 해탈의 십육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It19)”라 하였다. 어떤 공덕행 보다 가장 수승한 것이 자애를 닦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별빛에 대한 달빛으로 비유하였다. 그렇다면 자애공덕은 어느 정도일까? 초기경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표현 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았는데, 칠년간 자애의 마음을 닦고 나서 일곱 파괴의 겁과 생성의 겁 기간 동안 이 세계에 돌아오지 않았다.”(A7.62)
부처님은 과거 성불하기 전에 자애를 닦았다. 그 공덕에 대한 과보로서 천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천상은 무너지지 않는 곳이다. 겁화가 일어나 주기적으로 우주가 파괴 되어도 안전한 곳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곳에 대하여 경에서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의 세계(極光天)’이라 하였다.
극광천은 천상도표에 따르면 색계 이선의 첫 번째 천상인 아밧사라(ābhassarā)이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자애를 닦으면 우주의 성주괴공에서 벗어나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우주가 형성되는 성겁의 시기가 되면 우주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우주가 파괴될 때는 나는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에 있었고, 우주가 생성될 때에는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났다.(A7.62)”라 하였다.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일겁 단위로 주기적으로 파괴 되고 또 생성된다. 일 겁 단위로 성주괴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주기적으로 파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청정도론에 따르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치성하였을 때라 하였다. 탐욕이 치성하면 색계 초선천까지 파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빛이 흐르는 신들의 하느님 세계, 즉 색계 2선천의 광음천은 괴겁으로부터 안전한 것이다. 이렇게 자애를 닦으면 괴겁을 피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성겁의 시기에는 우주의 지배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우주가 생겨날 때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태어난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디가니까야 ‘하느님의 그물의 경(D1)’ 주석에 따르면 ‘텅 빈 하느님의 궁전’에 대하여 “원래 태어난 존재가 없기 때문에 텅 빈 하느님의 궁전이다.”라 하였다. 또 주석에서는 “하느님(Brahma)의 무리의 신들의 하느님 세계(Brahmakayika: 梵身天)의 땅에 태어난다.”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주의 생성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를 만드는 자도 없고 만들게 하는 자도 없다는 사실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업연과 시절의 인연에 의해서 보물의 땅이 생겨난다.”(Vism421)라 하였다.
자애를 닦으면 그 공덕으로 괴겁을 피해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겁에는 우주의 주재자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수행승들이여, 거기서 나는 일곱 번이나 하느님, 위대한 하느님, 승리자, 정복되지 않는 자, 널리 관찰하는 자, 자재한 자였다.”(A7.62) 라 하였다. 요즘 유일신교의 하느님 또는 하나님, 알라와 같은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흐마(梵天)을 일컫는 말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그 공덕은 상상을 초월한다. 여기서 공덕이라는 말은 행복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경에 따르면 “공덕을 짓는 것은 바로 행복을 지칭하는 것이다.”(A7.62)라 하였다. 어느 정도의 행복인가? 경에 따르면 일곱 번이나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수백 번이나 전륜성왕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렇게 자애공덕의 과보는 매우 크다.
이와 같은 같은 자애 사상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다. 이를 불교에 도입하여 적극 활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진정한 권력자는
기독교에서는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한마디로 그들만의 사랑이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말한다.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랑이다. 그런데 모든 유일신교에서는 이와 같은 일방적 사랑이 엿 보인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 역시 유일신교나 다름없었다. 초기경에 따르면 브라흐마(梵天)는 이 세상의 근원이자 창조자로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자애를 닦으면 하느님(Brahma)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유일신교에서는 창조주의 사랑을 강조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애라는 말은 창조주와도 매우 관련이 깊은 말이다. 그런데 초기경에서는 자애를 설명할 때 어머니의 사랑을 예로 들었다.
숫따니빠따 ‘자애의 경(Sn1.8)’을 보면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바쳐 구하듯(Mātā yathā niyaṃ puttaṃ āyusā ekaputtam anurakkhe)”(Stn149) 이라는 구절이 있다.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라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지만 구체적 실천론으로서 어머니의 사랑을 들고 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에는 조건이 없다. 어느 부모가 자식에 대한 사랑을 베풀고 나서 일기장에 “오늘 내가 착한 일 했다.”라고 적어 놓을까? 타인이 아이에게 선행을 베풀었다면 그렇게 써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부모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식에게 헌신한다.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애이다. 이를 확대하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사랑 역시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에 가장 큰 권력의 행사는 자애이다. 작은 권력자는 분노로서 권위를 나타내려 한다. 하지만 큰 권력자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자이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때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다. 진정한 권력자는 자애의 마음을 내는 자이다.
사무량심을 닦는 목적은
어느 누구도 타인의 업에 개입할 수 없다. 지금 불행에 처한 자의 업에 내가 뛰어 들어 운명을 바꾸어 줄 수 없다. 지금 성공과 번영을 누리는 자의 업에 개입하여 내 것으로 가로챌 수 없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타인의 번영과 성공에 대해서는 축하와 함께 기뻐해 주어야 한다. 인생의 파란곡절을 겪을 때는 모두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임을 반조하여 평정을 유지해야 한다. 사무량심은 자신의 마음을 닦아 해탈하기 위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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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진흙속의연꽃이라는 분이 미디어 붓다에 올려 놓은 글이다. 장황하게 글을 늘어 놓았는데 하나하나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비판하고자 한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업 교리는 한마디로 말하면 자업자득 인과응보로 말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지은 업은 자신이 받고, 지은 업대로 업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생들은 윤회를 하면서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서 선처(좋은 곳)에 태어나기도 하고 악처(나쁜 곳)에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윤회와 업의 이론은 불교만의 독특한 교리가 아니다. 불교 이전에 이미 인도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 다른 종교들도 이미 윤회와 업을 종교속에 포함하고 있었다. 붓다는 이러한 인도사회의 윤회와 업이론을 불교속에 도입하면서 그들과 전혀 다른 독특한 가르침을 정립했다.
즉 타종교들은 고정된 자아를 주장했고 그리고 업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을 했다. 이러한 주장은 운명론이나 숙명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교는 무아를 주장했고 또한 자신의 운명은 얼마든지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어둠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생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
빛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
빛에서 어둠으로 가는 인생
이러한 업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초기불교 이야기나 교리방등에 이미 글들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재삼 되풀이 하지 않겠다.
보살정신 붇돋우기
연꽃은 그의 글에서 말하길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 볼 뿐 그 사람의 업에 개입하여 바꿀 수 없다." 라고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재삼 강조하기를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아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말해서 곁에 피를 흘리면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거나 또는 불 속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쳐도 그저 자애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야만 할 뿐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굶어 죽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그것은 그 사람이 응당 받아야 할 업보를 받는 것이니 타인이 개입해서 밥을 줘서는 안된다는 그야말로 해괘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다.
붓다는 45년을 설법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중생들이 안락하고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할 수 있을까를 항상 염두에 두었다. 그래서 붓다의 하루 일과중 첫 번째는 천안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중생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신통력으로 찾아가 도움을 줬다. 또한 중생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빛에서 빛으로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고 마지막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도 중생교화를 멈추지 않았다. 또한 붓다는 자신이 아직 깨달음을 얻기 이전의 보살이었을 때 자신의 몸까지 남을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자비정신을 발휘하고 있다.
대승불교의 아미타불은 자신의 이름만 불러도 극락에 태어날 수 있도록 서원을 세웠고, 관세음보살은 천 개의 손과 귀로 중생들의 아픈곳을 살펴 볼려고 했으며, 지장보살은 단 한사람의 중생이 구제될 때 까지 자신의 성불조차도 미루었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병들고 아프기 때문에 자신도 병들고 아프다고 했다. 대승불교에서는 이를 사섭법(四攝法)으로 설명하며 그 사상적 본질을 동체대비(同體大悲)에 두고 있다.
세상은 연기이기에 자비심이 설명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떠나서 우리들은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도우고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가라는 아주 기초적인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또는 자신의 자비심에 대해서 왜 이런 마음을 내야 하는가라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연기로 설명할 수 있다. 연기란 많은 글로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상관관계로 설명하고자 한다. 즉 상호 관련이다.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저것이 없어지면 이것도 없어진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세상을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인드라망이라고 설명한다. 상호 얼키고 설켜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덧붙이는 자비희사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의 평화나 개인의 행복은 어떠한 관계이든 상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상은 나홀로란 없다. 그러기에 남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고 나의 행복이 곧 남의 행복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행복이란 함께 다같이 기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한 개인은 그 개인으로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연기의 관계에서의 한 개인으로 존재하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자비와 보시를 베풀어 줄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타인의 행복을 볼 때는
굶어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당연히 밥을 줘야 한다. 피를 흘리고 있으면 치료해줘야 한다. 불 속에서 살려달라고 한다면 뛰어들어 구해줘야 한다. 그저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만 보면서 불에 타서 죽는 것이 그 사람의 업보이니 어쩔 수 없다면서 지켜만 보는게 아니다. 한갓 미개한 동물들조차도 그들 사회에서는 상호 도움과 의존이 있다.
굶어죽어가는 사람에게 밥을 주는것이 타인의 업에 개입하고 타인의 업을 바꾸는게 아니다. 그러한 행위는 타인의 업을 바꾸고 개입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선업을 쌓고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을 사는 모습이다.
업과 윤회의 이론은 말처럼 쉬운게 아니다.
불교에서 가장 어렵고도 쉬운 교리가 있다면 바로 업과 윤회의 교리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교리적으로 파고들면 이것만큼 논란과 깊이를 알 수 없는 것도 없다. 업이 발효되는 것도 과일이 익어야 떨어지듯이 업보가 성숙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현생에서 받는 업도 있고 다음생에서 받는 업도 있다고 한다. 그이외에도 조건과 여건에 따라서 업이 나타나기도 한다고 한다.
의도된 행위로 인한 업보가 생겼을 시에 그것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한다면 이것은 숙명론이고 운명론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는 숙명론과 운명론을 배척하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업의 교리를 한층 발전시킨다. 예를 들어서 아무리 작은 돌맹이라도 물 속에 던지면 가라앉지만 반대로 아무리 큰 돌이라도 배위에 올려 놓으면 가라앉지 않고 강물을 건널 수 있다. 이렇듯 선업은 악업을 능가하고 또한 업이 나타나지 않게끔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위에서 설명했지만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인생은 자신의 업을 바꾸는 인생의 행로이다. 만약에 타종교처럼 한번 굳어진 업은 바꿀 수 없는 운명론이라면 이러한 인생 자체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자비도 보시도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하지만 결코 불교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불교는 감화니 교화니 구제니 하는 말을 한다. 즉 괴로운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이를 초기불교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이미 발생한 업에 대해서 집착하기 보다는 그 업을 극복하고 보다 좋은 업을 받도록 교화하고 훈계하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에 집중한다. 피를 흘리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료해 주면서 고통을 덜어주고 그 사람이 똑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좋은 말을 해주는게 불교이다. 경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설법에 교화되어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선업을 쌓아서 선처에 태어나는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는 없지만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는 있다
경전에 보면 아난 존자가 "수행의 절반은 좋은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을 때 붓다는 "좋은 친구를 사귀는 것은 수행의 절반을 이룩한 것이 아니라 전부를 이룩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하셨다. 이렇듯 연기의 세상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의든 타의든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우리들은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도 없고 그 사람의 업을 대신 짊어질 수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인생을 바꾸고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감화시킬 수 있다.
업은 도덕적 인과율이다. 즉 신구의 세 가지로 의도적으로 지은 행위에 대한 결과물이다. 선인선과 악인악과이다. 그러므로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을 연민의 정으로 그저 바라만 볼 것이 아니라 밥을 만들어 주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도반이 되어 줄 수 있다. 그게 업이 중생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자비와 타종교의 사랑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연꽃은 글에서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자애이다. 이를 확대하면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사랑 역시 같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라고 망발을 하고 있다.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이슬람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개념은 같은 울타리 즉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통하는 교리이다. 그들은 타종교인들 즉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개념을 포함시키지 않는다. 도와줘도 그것은 선교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들에 반대하거나 울타리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무자비한 살육뿐이다. 기독교 이슬람이란 이름하에 일어난 무수한 전쟁과 살육이 이를 방증한다.
하지만 불교의 자비는 조건이 없다. 그것은 살아있는 모든 유정물에게 통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일어난 종교전쟁이 없는 것이다. 불교의 자비와 타종교의 사랑은 전혀 다른 개념이며 당연히 불교의 자비는 세상의 그 어떠한 가치관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개념이다.
자비희사란 무엇인가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서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 연꽃의 글이 얼마나 잘못된 사견인지 별도로 글을 덧붙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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