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야단법석

외도들의 허망한 불교 인식론

실론섬 2015. 10. 2. 20:19

제목 : 불교의 존재론과 인식론


불교는 인식론도 아니고 존재론도 아니다

최근 연꽃님의 글에서 묘원 법사의 아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불교는 존재론이 아니고 인식론이다"라고 단언을 했다. 불교 입장에서 보면 한마디로 외도의 말이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이다.


"여기서 조금 짚고 넘어 가야 될 것이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불교는 존재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식론이예요. 존재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실체를 가진 것을 말합니다. 사실 존재는 인식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의 인식은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며 매 순간 변하기 때문에 실체가 없는 것으로 귀결 됩니다. 그래거 이렇게 알면 무아를 알아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게 됩니다. 서양철학은 존재론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 이야기 우리 많이 들어 보았을 거예요. 그러나 이러한 존재는 지극히 사적인 것이예요. 존재의 실재는 인식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관념(개념)과 실재의 문제이예요. 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바로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입니다. 몸을 존재로 보면 관념으로 보는 것이라서 몸이 가진 성품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인식으로 보면 몸이 가진 성품을 보아서 사물을 바르게 통찰할 수가 있습니다."[묘원 법사]


불교의 존재/인식론적 입장은 중도로써 연기법이다

불교는 철학적/심리학적 관점에서 논할 때 존재론적 입장일까 아니면 인식론적 입장일까? 결론은 그 둘다 모두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는 존재를 말할 때 '오온'이라고 하고, 세계를 말할 때 '12처'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존재란 무엇인가 : 오온

불교에서 세계란 무엇인가 : 12처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온과 12처는 모두다 연기법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말 즉 그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실체를 갖는 그런 의미의 논리 자체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한마디로 존재론도 아니고 인식론도 아니며 오직 연기법에 의한 중도일 뿐이다. 연기법에 의하면오온이나 12처는 어느것 하나 자체적으로 독립적으로 실체를 가지고 성립하지 않는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와 대승불교의 공관파와 유가행파 

끊임없이 무엇인가에 집착을 일으키는 우리의 마음은 어떤 존재인가? 붓다는 그것을 연기(緣起)의 원리에 의해 밝히고 있다. 집착 및 갈애에 의해 결과하는 고통이 의존하고 있는 조건들은 십이연기로 대표된다. 십이연기는 무명(無明), 의지적 행위(行), 의식(識), 개인적 존재(名色), 감각장소(六入, 六處), 감각적 접촉(觸), 느낌(受), 갈애(愛), 취착(取), 존재(有), 태어남(生), 노사(老死)를 말한다. 이들 열두 개의 연기는 서로간에 연하여 생기는 것으로서, 각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십이연기는 탐욕(貪), 증오(瞋), 미망(癡)이라는 근본적인 어리석음에 토대를 두고 있다.


갈애를 일으키고 욕심을 내는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을 서양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입장에서 파악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식론적 입장에서 파악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이 몸과 마음이라는 존재를 연기법에 바탕을 두고 파악했다. 이것은 오온무아(五蘊無我)의 개념에 의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고정적인 자아로 생각하는 것은 실은 오온(五蘊)에 불과하다.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모임이 바로 자아인 것이다. 그리고 색·수·상·행·식의 모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서 무상(無常)이다. 그리고 신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아는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다. 단지 그때그때 물질적 요소와 심리적 요소가 연기의 관계에 의해 모여 있는 모임일 뿐이다.


부파불교에서는 법(dharma)의 유(有)를 말한다. 여기에서 법은 요소로서의 실재이다. 그러나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요소로서의 법유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이론 등을 나가르주나(龍樹)는 구별(分別)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공의 논리를 가지고 논박한다. 그의 공사상은 중도 및 연기 이론과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그의 《중론(Madhyamaka-Sastra)》은 바로 이러한 공사상 이론을 담고 있다. 나가르주나는 그의 저작에서 설일체유부등의 여러 부파등을 원리를 비판한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의 공이 절대적인 공(악취공 惡取空)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철저히 배격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 이론이 허무주의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었다. 유식(唯識)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나가르주나의 중관사상과 더불어, 원시불교의 연기론 및 공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부파불교의 아공법유 이론을 논박하는 유식사상은 중관파의 이론을 보완, 극복하는 데로 나아간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지각 현상들은 단지 연기의 관계로만 있을 뿐, 자성을 갖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지만(空), 그래도 그와 같이 지각되는 현상들은 분명히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도대체 어떠한 방식으로 ‘있는’ 것인가? 우리들이 지각하는 현상들은 우리의 마음이 의식, 인식하는 과정으로서만 있을 뿐이다. 있는 것은 오로지 식뿐(唯識)이다. 


우리의 의식, 인식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란 어떠한 존재인가를 말할 수밖에 없다. 원시불교 이래 우리의 마음은 심(心)·의(意)·식(識)으로 불리어 왔는데, 유식사상에서는 이것을 받아들여 더 심화시킨다. 심은 제8식, 의는 제7식, 식은 6개의 식(안.이.비.설.신.의식) 개념을 8식 개념에 의해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서 확립되었다. 또한 식의 상태를 의타기성(依他起性: 의타성),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분별성), 원성실성(圓成實性)등 삼성(三性) 설명했다.


어떤 사람의 인식(의식) 현상은, 언제나 그 사람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동일한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때의 주위 상황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 상태와의 관계에서, 혹은 어떤 알 수 없는 우연적인 요인과의 관계에서 의식 현상으로 나타난다. 식은 그 자체로 “연기적 존재”이다. 우리 마음 속에서 생겨나는 식의 현상은 이미 무수한 요인들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에서도 연기적 존재이지만, 우리 마음의 여러 차원과의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점에서도 연기적 존재이다.  


불교에서는 인식 대상뿐 아니라 우리의 인식 주관도 단지 연기의 존재일 뿐이다(我空). 연기의 존재인 자아의 배후에, 혹은 근저에 실체적 정신, 마음, 영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의 가르침에서 정확한 지혜를 얻도록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존재의 누구의 것입니까)?"

"비구여, 어떤 것이 존재이며 누구에게 존재가 있습니까?라고 말하거나, 존재가 다르고 존재하는 자는 다르다'라고 말하면 이 둘은 같은 것이며 표현만 다를 뿐이다. 비구여, '생명과 몸은 같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견해가 있으면 청정범행을 닦지 못한다. 비구여, 이러한 양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있다'라고 중도(연기법)에 의해서 여래는 법을 설한다."[S12:35 무명을 조건으로 함 경]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각장소가, 여섯 감각장소를 조건으로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슬픔, 고통, 불쾌, 정말이 생겨난다."


불교의 입장은 연기법이다. 존재론이니 인식론이니 하는 양극단을 버린다. 오온이 연기이며 연기가 곧 무상인데 그 어디에 고정되고 확립된 존재(존재론)와 인식을 하는 자(인식론)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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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외도들의 허망한 불교인식론


1) 업의 개념 정리를 위해서 

새삼스럽지만 여기서 불교에서 말하는 업에 대해서 개념정립을 다시 해보고자 한다.


업(業)이라고 번역되는 깜마(kamma, karmma)는 "...하다" 라는 말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래서 깜마라는 단어적 의미는 모든 행위 일반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무슨 행위든 다 업이라고 하지 않는다. 행위중에서도 '의도된 행위(cetana)가 개입된 행이를 업이라고 한정지어 말한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적인 행위를 업이라고 말한다. 몸과 말과 뜻(생각)으로 의도하고 업을 짓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의도된 행위는 선한것과 악한것 이 두가지 행이 밖에 없다. 악한것도 아니고 선한 것도 아닌 행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불교는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된 행위를 열가지로 구분하여 선한 것(kusala)을 십선업이라고 하고 악한 것을 불선업(akusala)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말하는 선과 불선의 판단 기준은 불교의 철학적(심리학적) 부분과 또다른 면을 이루고 있는 도덕적이고 윤리적 측면이다. 궁극적으로는 어떤 행위가 해탈과 열반에 유익한가 해로운가 하는 것의 판단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그 종자에 따라 각각의 고유한 열매가 열리듯 의도적 행위는 선한 행이와 불선의 행위에 따라서 그 고유한 업의 특성을 띄게 된다.이것을 업의 법칙(kamma niyama)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타나는 고유한 성질(특성)에 따른 결과를 깜마위빠카(,kamma vipak)라고 한다. 


붓다나 아라한을 제외한 모든 중생들의 의도적인 행위는 업이 된다. 붓다와 아라한의 경우에는 업의 근원이 되는 무명과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행위는 업을 쌓지 않는다. 이를 자유자재라고 하며 새가 하늘을 날아도 발자욱을 남기지 않고, 바람이 그물을 통과하는 것으로 여러번 설명을 했다. 


그 이외에 업의 기능에 따른 종류, 과보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른 종류, 성숙하는 시간에 따라, 과보를 생산할 장소에 따라 구분한다. 또한 업력(kamma vega), 업을 짓는 마음(abhisankhara vinnana), 업의 존재(kamma bhava)등등 다양하고 심층적으로 업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예외없이 업은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며 자기가 업의 상속자가 된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꼬 자기 업으로 지탱한다. 선한 업을 짓든 악한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자업자득의 업의 개념은 후대에 오면서 다양하게 발전을 하며 특히 일부 부파에서는 공업(共業)이라는 개념으로까지 확대해석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업의 개념은 초기불교 입장에서 보면 받아 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제 글방의 193번"업의 길 품(kammapatha vagga)에 보면 붓다는 유유상종이라고 하였다. 육도윤회와 삼계라는 세계에서 본다면 비슷한 업을 지은 사람끼리 모이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은 차후 기회가 닿으면 한번 설명을 하고자 한다.


2) 세월호 사건을 불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설명할까?

순수한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국가/사회적인 문제를 극히 개인적인 행위에 국한한 업의 논리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붓다는 중생들이 가져야 할 직업과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법과 그리고 공동체 사회가 화합하고 모여사는 방법등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업의 논리와는 또다른 것이다. 붓다는 왕이 다스려야 하는 법과 국민들이 행하여야 하는 사회일반적인 상식의 논리를 충분히 펼쳐 놓았다.


그런점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면 쉬울 것 같다. 즉 대통령의 국정운영의 잘못, 공무원들의 국가공복으로써의 근무자세, 사회조직원들 개개인의 사고방식등이 총체적으로 부실화한데서 온 것이라고 본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보면 나라의 운영, 사회공동체로써의 개개인의 마음가짐, 공직자들이나 비지니스를 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등등이 어느 것 하나가 붓다께서 일러주신 것과 합치되는 것이 없다. 나라와 정부조직 사회구성원들이 만들어 낸 부실의 결과이지 결코 업의 논리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3) 불교의 논리가 모두에게 통할 수 없다

중국의 불교는 전래된 이후에 세번째 걸쳐서 법난을 겪는다. 그 법난의 이유가 여러가지이지만 공통적인 것은 당시 중국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던 "유교 사상"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을 했기 때문이다. 즉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부터 "시작도 알 수 없는 윤회로부터 목이 잘려 흘린 피는갠지스강보다 많고... 지금의 아내가 과거에는 내 어머니일 수도 있고 내 아버지가 다음생에는 내 자식일 수도 있고..." 이런 교리적 설명이 아무리 옳다고 하더라도 유교사상에서는 하늘 두쪽나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것이다. 아니 뭐라고? 내 아버지가 내 자식이 되고 내 마누라가 내 어머니가 되고..." 불교가 멸문을 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윗 글에서도 밝혔지만 세월호 사건을 업의 논리나 윤회의 논리로 접근하고 싶지는 않다. 그 대신에 붓다께서 일러주신 국가경영 사회구성원의 자세등등의 가르침으로 접근하고 싶다. 세월호 희생자들의 각자의 업이 그 무엇이었든 간에 현생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였으니 지금쯤은 모두다 좋은 곳에 태어났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뒤에 남은 우리들은 두번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위해서라도 붓다의 가르침대로 나라가 운영되고 사회조직원들의 마음자세가 바뀌었으면 한다.


3)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불교는 인식론도 존재론도 아니라고 앞전 글에서 충분하게 설명했다. 그럼에도 이 작자는 계속하여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한다. 얻어 터질 것을 의식해서인지 연기론을 주워다 가타 붙였지만 결과적으로 불교는 인식론이라는 것이다. 즉 존재론과 인식론의 양극단중의 하나인 인식론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단멸론이나 상주론과 다름없는 양극단의 논리를 옳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인식하고 인식되어 진다는 문제에서 본다면, 만약에 내가 인식한다면 그 인식하는 주체를 전제해야 한다. 사물이 나를 인식한다면 인식하는 사물이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불교는 인식하는 자도 인식되어지는 대상도 모두다 고정되고 향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게 연기일 뿐이다. 인식을 하는 존재도 연기의 산물이며 인식되어 지는 대상도 연기의 산물이다. 따라서  연기에 의한 인식이나 존재가 인식론이나 존재론의 주체나 전제로 선정되어 질 수는 없다. 


따라서 불교는 인식론이라고 해도 틀렸고 존재론이라고 해도 틀린말이 되는 것이다. 다만 불교는 인식한다 존재한다는 말을 쓰지만 그것을 두개의 양극단인 인식론이냐 존재론이냐의 철학적 궤변에 끼워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불교를 인식론이다 존재론이다라고 양 극단의 하나를 단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불교는 연기법이다. 인식도 존재도 모두다 연기이다. 그래서 불교는 연기법이라고 하는 것이지 인식론이다 존재론이다라는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이 불교인들에게 너희들은 존재론이냐 또는 인식론이냐라고 묻는다면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불교는 존재론도 아니요 인식론도 아니다. 불교는 연기법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