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한국불교의 현실에 비추어 본 테라와다불교(Theravāda Buddhism)의 현황과 과제/임승택

실론섬 2015. 11. 5. 04:41

국불교의 현실에 비추어 본

테라와다불교(Theravāda Buddhism)의 현황과 과제

임 승 택/경북대 철학과 교수


* 목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테라와다불교의 특성과 양상

Ⅲ. 한국에서의 현황

Ⅳ. 한국에서의 역할

Ⅴ. 한국에서의 과제


Ⅰ. 들어가는 말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Theravada Buddhasasana in Korea )가 결성되었다(법인설립 허가증 번호: 2008-72호). 테라와다(Theravāda)는 붓다(Buddha)의 가르침을 가장 원형에 가까운 형태로 계승하는 불교 종단(宗團)으로 인정된다. 또한 세계의 종교사를 통틀어 2300년이라는 유래 없는 최장의 역사를 자랑한다. 바로 이 전통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법인체가 한국에서 결성된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법인 설립의 의의를 현재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제반 현실에 비추어 되새겨 보고자 한다. 장구한 생명력의 테라와다는 그 자체로서 흥미로운 연구의 대상이며,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미래상을 모색하는 데에서 충분히 기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정관에 명시된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테라와다불교 가르침의 봉체(奉諦), 테라와다불교의 교법을 실현하는 정통수행법인 위빳사나 수행의 전파, 테라와다 상가의 계율 수호, 회원 간의 화합과 단결 도모, 수행처의 건립 운영, 상좌부불교 국가 및 모든 종교와의 교류로 테라와다불교의 포교와 한국불교의 새로운 지표를 창달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정관 제1장 제4조).” 이러한 내용은 테라와다불교 전통에 입각하여 불(佛)·법(法)·승(僧)의 삼보를 수호·선양하고자 하는 법인 설립의 취지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것이 원만하게 수행될 때 테라와다불교 자체만이 아니라 한국불교 전반에 걸쳐 긍정적인 파급 효과가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단법인이란 ‘특정한 목적을 결성한 사람들의 단체’로서, 구체적으로는 “영리가 아닌 사업을 목적으로 결합한 사람의 집합체가 독립된 권리능력을 지니고서 법률상의 실체를 이룬 것”을 가리킨다. 법인에 소속된 재산은 해당 목적 사업에 한정된 용도로 사용되며, 만약 해산될 경우에는 잔여 재산을 국고로 환수하거나 유관 단체에 증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이미 결성된 법인체의 재산은 더 이상 사적인 것이 아니며, 그러한 의미에서 법인 설립의 본래 목적을 실현하는 것만이 유일한 용도라고 할 수 있다. 법인체로서의 한국테라와다불교는 전통적인 테라와다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한 물질적․제도적 기반이 한국에서 최초로 공식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관에 따르면 본 법인은 전통적인 불교 종단의 형식을 표방하는 듯하다. 예컨대 “본 법인은 대표 이외에 법주를 추대하여 테라와다 불교 사상을 실천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종신 법주를 둔다(정관 제1장 제3조).”라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종단 규약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한국불교 및 남방 불교권의 기성 종단 시스템에서 볼 수 있는 구조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을 통해 본 법인이 한국에서의 테라와다불교 종단 건립이라는 보다 큰 차원의 움직임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종단의 설립은 특별한 법적 구속력을 지니지 않은 까닭에 법인의 그것에 비해 용이하게 추진․성사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테다와다불교 종단의 설립은 남방 불교권과의 원만한 관계 정립을 선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그러한 가능성만을 남겨 둔 상태에서 스스로의 역할과 과제를 찾는 것이 우선일 듯하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해 낼 수 있을지의 문제는 지대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본고는 이것을 살피기 위한 준비 과정으로서 테라와다불교의 특성과 양상에 관해 일단의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즉 테라와다불교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과 함께 현재 한국에서 수용되고 있는 현황을 우선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그러한 연후에 한국불교에서 노출되는 제반 문제점과 관련하여 테라와다불교의 사례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간명하면서도 일관된 테라와다불교의 가르침과 생활 방식은 한국불교의 건설적인 미래상을 정립하는 데에 많은 참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오늘날의 여건 속에서 테라와다불교가 만병통치식 대안은 될 수 없으며, 그것 역시 환경적 변화에 조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테라와다불교 자체에 대해 요구되는 과제와 개선책 또한 포함할 것이다. 필자는 이 작업을 통해 한국에서 요구되는 테라와다불교의 바람직한 모습이 객관적으로 조망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Ⅱ. 테라와다불교의 특성과 양상


테라와다불교의 본질적 특성은 무엇이고 현재적 양상은 어떠한가. 이 부분이 명확해질 때 한국에서 요구되는 역할과 과제 또한 분명해 질 수 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붓다 사후 약 100년 무렵부터 붓다의 제자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는 그룹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계율과 교리의 해석에서 진취적인 모습을 보였던 대중부(大衆部, Mahāsaṃghika)와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상좌부(上座部, Sthiravāda, Theravāda)가 그것이다.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어떠한 방식으로 계승할 것인가의 문제를 놓고서 상반된 결론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시대적 변화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후자는 전통적인 가르침을 원형 그대로 유지․보존하는 쪽으로 기울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대중부와 상좌부는 지속적인 지말 분열의 과정을 걸치면서 소위 부파불교라는 독특한 시대상을 연출하게 된다. 이것을 아비달마(abhidharma)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때 갈라져 나간 부파의 숫자는 도합 열여덟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편 최초의 두 부파 가운데 대중부는 결국 와해되어 사라졌고, 다른 대부분의 지말 부파들 또한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스리랑카라는 고립된 지역에 정착한 상좌부는 여러 차례 힘든 시기를 겪으면서도 원래의 모습을 흩뜨리지 않고 오늘에까지 계속된다. 바로 이 부파가 본고에서 테라와다불교로 일컫는 그것이다. 현재에도 테라와다불교는 스리랑카를 중심으로 미얀마․태국․라오스․캄보디아․베트남 등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또한 인도․네팔․방글라데시아․말레이시아 등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케이트 코스비(Kate Crosby)가 지적하듯이 테라와다불교의 기본 특성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첫째, 테라와다불교는 빨리어(Pāli)로 작성된 삼장(三藏)의 문헌에 근거를 둔다. 둘째, 테라와다불교는 부파불교의 산물로서 아비달마적 색채를 강하게 지닌다. 셋째, 테라와다불교는 율장(vinaya)에 근거한 독특한 수계 전통을 고수한다. 이들 셋은 테라와다불교가 지닌 본래적인 색채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전통을 표방하고자하는 할 경우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내용들로 판단된다. 이들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테라와다불교는 빨리어(Pāli)로 작성된 경(經)·율(律)·론(論)의 삼장(三藏)에 근거해 있다. 빨리어 삼장은 현존하는 불교 문헌 가운데 오래된 언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붓다가 사용했던 원래의 언어와도 가장 유사할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빨리어 삼장은 단일 종단에 소속된 문헌으로는 가장 완벽하고 방대한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점은 북방 불교권에서 전해지는 삼장의 문헌들이 소속을 달리하는 여러 부파들의 가르침을 취합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과 대조를 이룬다. 테라와다불교가 존속하는 모든 지역에서 빨리어 삼장은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들은 빨리어 경전에 기술된 내용을 붓다의 원음으로 간주하면서 자신들의 종교적 실천을 위한 지침으로 삼는다. 사실 빨리어 경전 이외의 문헌들은 붓다의 사후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연후에 저술되었거나 혹은 단편적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따라서 빨리어 삼장에 대한 테라와다불교의 각별한 태도는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심지어 테라와다불교 고유의 실천 양식으로부터 다소 멀어진 지역에서도 빨리어 삼장의 권위만큼은 그대로 존속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테라와다불교의 교리적 경향은 고유의 아비달마(abhidharma)의 논장으로부터 유래한다. 논장은 분석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경전에 나타난 붓다의 가르침을 나름의 틀로써 분류․분석하고, 거기에 대해 해석을 가미하는 형식으로 구성된다. 또한 논장에는 특정 부파의 고유한 입장에 근거하여 다른 부파들의 견해와 교리를 비판하는 경향들도 나타난다. 예컨대 『까타왓투(論事, Kathāvatthu)』라는 테라와다의 논장에는 당시 중인도와 남인도에 형성되어 있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in), 대중부(大衆部, Mahāsāṅghika), 정량부(正量部, Sammatīya),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 북도부(北道部, Uttarāpathaka), 설인부(說因部, Hetuvādin) 등의 입장을 논파하는 대목들이 나타난다. 테라와다불교의 분석적․논쟁적 경향은 그것의 성립 자체가 부파불교의 개시와 맥락을 같이 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일부 학자들은 테라와다불교가 ‘분별설부(分別說部, vibhajjavāda school)’라는 명칭에 더욱 부합한다는 주장하기도 한다. 테라와다불교는 고유의 아비달마 체계에 근거하여 붓다의 가르침에 접근했던 만큼 본래부터 부파적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테라와다불교는 율장(vinaya)에 근거한 독특한 수계 전통을 지닌다. 역사적으로 테라와다불교에는 상이한 버전(version)의 율장 해석에 근거한 다양한 세부 지파들이 출현하였다. 그들은 테라와다라는 단일한 명칭을 사용하면서도 전통적인 계율 항목의 실천에 관련해서는 상이한 입장들을 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를 표방했던 모든 지파들은 각자의 승단 구성원들에 대해 227가지 계율 항목의 준수를 기본적으로 요구했다. 즉 예외 없이 바라제목차(pāṭimokkha)를 엄수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또한 그들은 승단의 생활에서 일정한 경계(界, sīmā)를 중심으로 현전승가(現前僧家, sammukhībhūtasaṃgha)를 구성하는 전통을 고수해 왔다. 그리고 현전승가를 율장에 기술된 모든 규정들이 그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기본 단위로 삼았다. 테라와다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경계의 설정이 없는 승단 운영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들은 이 전통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북방권의 대승불교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갖는 듯하다.


테다와다불교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전통 아래에서 스스로에 대해 붓다의 계승자라는 강한 자부심을 부여해 왔다. 따라서 이상의 내용은 테라와다불교 고유의 특성인 동시에 그들이 지녀온 자존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테라와다불교에도 다른 부파와 공유해 왔던 전통적인 관행들이 존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재가자들에 대한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라든가, 위정자들에 대한 조언가로서의 활동, 전문화된 의례의 집행, 심지어는 점성술가로서의 역할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거의 모든 불교권에서 발견되는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테라와다불교라고 해서 특별히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상의 세 가지 특성은 다른 불교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며, 테라와다불교 자체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데서 간과해서는 안 될 항목들이다.


이제까지의 세 가지가 테라와다불교의 기본 특성이라면, 지금부터 거론하게 될 내용은 현재적 양상에 관한 것이다. 즉 테라와다불교는 앞서의 특성들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멜포드 스피로(Melford Spiro)와 케이트 코스비(Kate Crosby)는 다음의 세 가지를 지목한다. ① 자기 변화(self-transformation)에 초점을 모으는 열반 지향적 테라와다(nibbānic Theravāda), ② 미래의 삶과 관련한 행위의 공덕과 윤리성을 강조하는 까르마적 종교(Kammatic religion)로서의 테라와다, ③ 현세의 삶에서 세속적인 복락을 얻기 위해 부적과 의례 따위를 행하는 마술적 불교(apotropaic Buddhism)로서의 테라와다가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를 통해 테라와다불교에는 열반의 실현을 위한 초월적 욕구와 함께 미래 혹은 현재의 삶에서 안락을 얻고자 하는 세속적인 바람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중에서 ①과 ②는 초기불교 당시부터 인정되던 내용으로서, 특히 ①은 출가 수행자들이 지향하는 이상적인 테라와다불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②는 재가자라든가 초심자들을 위한 역할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재가자라도 ①에 해당하는 실천적 태도와 이상을 지향할 수 있었고, 또한 거기에서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루었던 재가자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으로 출가 수행자에게 ②에 해당하는 가르침이 적용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듯하다. 따라서 ①의 양상은 테라와다불교가 지향하는 본래적 색채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으며, ②의 모습은 주변적이고 이차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③의 경우는 원래의 불교적 가르침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로, 토착 신앙과 습합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습합은 북방권의 대승불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쉽지만, 테라와다권에서도 엄연히 발견된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이들 중에서 현재 한국 불교계에 관심을 끄는 테라와다불교의 양상은 과연 무엇일까? 필자는 단연코 ①의 ‘자기 변화에 초점을 모으는 열반 지향적 테라와다’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이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미얀마(Myanmar)의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계열의 위빠사나는 많은 한국인 수행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재가자로서 인도에서 활약하고 있는 고앤까(S. N. Goenka)를 위시하여, 독특한 ‘정화 호흡법’으로 유명한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순차적 과정을 강조하는 파웃 사야도(Paaut Sayadaw) 등의 명상 기법도 주목을 끌고 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미얀마의 주요 명상 센터에 머무는 외국인 수행자들의 절반은 한국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들 남방권의 명상 기법은 대체적으로『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 DN. II. 290-315쪽)』이라는 경전과『청정도론(淸淨道論, Visuddhimagga)』이라는 주석문헌에 근거해 있다. 각각의 기법들은 구체적인 텍크닉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사실이지만, 두 문헌에서 제시하는 가르침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특징을 지닌다. 또한 궁극의 목적을 열반의 실현에 목적을 두고서 개개인의 변화에 역점을 둔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①의 현재적 양상과 그대로 통한다. 결론적으로 ‘자기 변화에 초점을 모으는 열반 지향적 테라와다’는 초기불교 이래의 본래적인 가르침을 계승하는 동시에, 한국불교가 남방의 테라와다불교 자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열반 지향적 테라와다불교는 엘리트 불교의 전형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현존하는 남방의 테라와다불교가 이러한 모습만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거기에는 현세의 삶에서 복락을 얻기 위한 기복적인 양상도 포함된다. 즉 열반 지향적 모습은 테라와다불교권에서 나타나는 주요 양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테라와다불교의 모든 것을 절대시하는 태도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상적인 테라와다의 모습만을 강조할 경우 그것이 지닌 실제 모습을 놓치게 되기 십상이다. 그리하여 그것과 비교되는 다른 지역권의 불교를 부당하게 폄하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테라와다불교를 표방했던 초창기의 일부 한국인 수행자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인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상에서 언급한 양상들과 별개로, 현대의 심리치료와 관련하여 전개되는 최근의 동향에 대해서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일찍이 붓다(Buddha)는 탐욕이라든가 아집과 같은 번뇌에 사로잡힌 상태를 정신적 질환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의 가르침은 마음의 병을 다스리기 위한 치료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위빠사나 명상은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프로그램의 일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현대의 심리치료는 바로 이것이 신경증과 같은 마음의 질병을 해소하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였다. 그리하여 위빠사나를 치료개입 방법으로 적극 활용하는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제 위빠사나와 심리치료라는 두 영역은 긴밀한 교섭 관계에 있으며, 특히 최근 개발된 일련의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에서 나타나는 양자의 유사성은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이것은 이전 시대에는 없었던 것으로, 테라와다불교의 현대적 양상과 관련하여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위빠사나가 건강의 증진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며, 인간 삶의 보편적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것이라는 점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더욱이 위빠사나를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현대의 심리치료는 특정한 병증의 개선과 치료에 주력하는 한정된 모습을 보일 뿐이다. 따라서 심리치료와 접목된 위빠사나는 본래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탐욕과 집착을 조장하기 쉬우며, 새로운 유형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이러한 활용 양상은 앞서 살펴보았던 ③에 해당하는 것으로 ‘현세의 삶 안에서 세속적인 복락을 얻기 위한’ 그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과학적 접근법을 취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세간적인 이익의 추구를 원동력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습합 불교의 한 양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위빠사나의 심리치료적 활용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바라 볼 수 없다. 이것이 지닌 파급력을 무시할 수 없거니와, 이러한 시도 자체에 대해 불교적 가르침이 더욱 구체적으로 적용될 가능성 또한 여전하기 때문이다. 장구한 생명력의 불교 명상은 현대의 심리치료 기법들에 대해 그 내구성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탐욕과 같은 부정적인 정서를 내려놓지 못하는 한 인간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지속적으로 확인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심리적인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자기’라는 실체가 없다는 것, 다시 말해서 무아(無我)의 도리를 체험적으로 깨우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위빠사나 명상을 계승․보급한 주역으로서의 테라와다불교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Ⅲ. 한국에서의 현황


현재 전 세계적으로 테라와다불교도의 숫자는 약 1억명 정도로 추산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테라와다불교는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서구 세계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특히 1970년대 이후에는 위빠사나(Vipassanā) 명상의 보급과 함께 서구인들에게 급속도로 확산되는 추세이다. 시간적으로 약간 뒤지지만 이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데에는 1990년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위빠사나 명상이 그 원인으로 자리한다. 많은 한국인 수행자들이 미얀마라든가 태국 등지로 건너가 위빠사나를 수행하였고, 귀국 후 자신의 체험을 주변에 알리는 가운데 테라와다불교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위빠사나 열풍은 한국불교의 수행 풍토에 자극제 역할을 하였고, 조계종을 중심으로 한 수행체계의 정립을 위한 일련의 움직임에도 나름의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000년대 초반에는 초기불교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소위 ‘위빠사나 논쟁’으로 일컬어지는 학문적 토론의 장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의 영향 아래에 있는 단체들은 거의가 위빠사나 수행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필자는 위빠사나 수행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국에서의 테라와다불교의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의 대략적인 전모는 ‘위빠사나 수행가이드(http://cafe.daum.net/vipassana)’를 통해 알 수 있으며, 거기에 링크된 단체의 숫자는 약 30여 곳에 이른다. 필자는 다음의 기준을 적용하여 그들이 지닌 성격과 특징을 일괄적으로 드러내 보고자 한다. ㉠ 한국인 재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 한국불교 종단에 소속된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 테라와다불교 소속의 한국인 출가자를 중심으로 한 단체, ㉣ 테라와다불교 종단에 소속된 단체 등이다. 몇몇의 단체들은 열거한 네 가지 가운데 둘 이상 포함하는 경우도 있고, 정보의 미비로 인해 이 기준을 적용하기 어려운 단체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를 통해 각각의 단체들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대략적인 역할을 비교적 분명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에 해당하는 수행 단체로는 ‘상좌불교한국명상원(한국위빠사나선원)’, ‘연방죽선원’, ‘고엥까지 위빳사나 수행모임’, ‘맑은마음명상원’, ‘동양위빠사나명상선원’, ‘호두마을’, ‘위빠사나붓다선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단체는 재가자가 중심이 되어 위빠사나 수행 모임을 이끌어 나간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외부에서 전문적인 위빠사나 지도자를 초빙하기도 하고, 혹은 국․내외의 타 단체와 연계하여 집중 수행 모임을 갖기도 한다. 여기에 속한 단체들은 명상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모임 구성의 주된 동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교리적 가르침의 연구, 명상 관련 정보의 보급, 자선 활동, 출판 사업, 명상센터의 건립 등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 나가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들 단체는 위빠사나 명상을 일상에 적용시켜 나가는 문제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재가자를 중심으로 한 수행 문화의 정착에 기대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에 해당하는 수행 단체로는 ‘근본불교수행도량 홍원사’, ‘근본불교수행도량 태종사’, ‘여래선원’, ‘정각선원’, ‘‘수행공동체 제따와나 초기불교선원’, ‘초기불전연구원’, ‘고요한 소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단체는 한국불교 종단에 속한 출가자가 중심이 되어 수행 모임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즉 한국 스님들이 위빠사나를 배워 와 보급시켜 나가는 경우이다. 이들 단체는 한국불교에 직․간접적인 지지 기반을 둔만큼 왕성한 활동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여기에 속한 지도자 그룹에는 오랜 동안의 수행 이력을 바탕에 둔 전문 명상가들이 많다. 한편 ‘초기불전연구원’과 ‘고요한 소리’는 수행보다는 경전의 번역과 명상에 관련된 문헌들을 소개하는 데에 주력한다. 이들 두 단체는 테라와다불교와 위빠사나의 정체를 알리는 데에 더욱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부류에 해당하는 단체들은 테라와다불교와 전통 한국불교가 만나는 접점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양자 간의 관계 정립 문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미온적인 활동에 머물게 될 경우 양쪽 모두로부터 배척될 수 있는 취약점을 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에 해당하는 수행 단체로는 ‘보리수선원’, ‘마하보디선원’, ‘붓다의 길따라 선원’, ‘반냐라마 사띠스쿨(사단법인: 수행도량 반야라마)’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단체는 테라와다불교권에서 수계를 받은 한국인 출가자들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여기에 속한 인물들 중에는 한국불교에 적을 둔 경우도 있지만, 실제 활동에서 한국불교와 뚜렷한 선을 긋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에 해당하는 단체들과 달리 한국불교의 울타리를 완전히 벗어나려는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그리하여 한국 내에서 테라와다불교의 수행과 생활 방식을 그대로 재현해 내는 데에 앞장서고 있다. 즉 위빠사나 수행뿐만 아니라 초기불교 이래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까지를 실천적 범위 안에 포함한다. 따라서 이들의 움직임이야말로 한국에서의 테라와다불교의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기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소속된 ‘보리수선원’, ‘마하보디선원’, ‘붓다의 길따라 선원’ 등은 사단법인 한국테라와다불교의 실제 주역이기도 한다. 한편 ‘반냐라마 사띠스쿨’ 경우는 약간 성격이 다르지만 이미 별개의 법인체를 결성하여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차후 한국에서 기대되는 테라와다불교의 역할은 이 부류에 속한 단체들의 행로와 긴밀한 연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에 해당하는 수행 단체로는 ‘미얀마선원’, ‘한국마하시선원’, ‘빤디따라마 서울분원’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미얀마의 테라와다불교에 적을 둔 단체들로서 한국에 위치한 포교원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미얀마선원’과 ‘한국마하시선원’은 미얀마 출신의 출가자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주요 신도층 또한 미얀마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로 파악된다. 한국 내에서 이들이 지닌 위상은 아직 크지 않으며 차후 한국인 신도층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상황대로라면 이들 단체는 테라와다불교의 본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한국불교에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상에서 거론한 타 단체들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할 경우 그 영향력을 배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빤디따라마 서울 분원’의 경우는 우 빤디따 사야도(U Panditā Sayadaw)의 가르침을 한국 내에 전파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실제 운영에서 ㉠에 해당하는 단체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가된 빤디따라마 명상센터의 분원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상과 같이 위빠사나 수행 단체들을 중심으로 한국 내의 테라와다불교 현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에서 위빠사나는 테라와다불교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명상 기법의 하나일 뿐이며, 테라와다불교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위빠사나 수행 그룹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현황에 접근해 들어간 본고의 방식은 중대한 취약점을 지닐 수 있다. 예컨대 교학이라든가 계율의 문제에 주력하는 테라와다불교 단체가 이미 한국에서 활동 중일 수도 있다. 물론 인터넷 검색에서 그러한 활동 양상은 아직 포착되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그들의 존재 가능성을 크지 않다. 그렇지만 차후 테라와다불교의 위상이 높아질 경우 위빠사나라는 수식어를 붙이지 않은 단체가 등장할 수도 있다. 앞 소절에서 거론했던 것으로, 테라와다불교의 기본 특성에 충실한 움직임들이 가시화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 테라와다불교의 영향 아래 있지만 이상에서 거론한 수행 단체들에 포함되지 않은 세력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테라와다불교권에서 수학한 연후에 독자적으로 학계라든가 출판계 등에 진출하여 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출가자로서 한국불교의 전통 종단에 복귀하여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세력들은 조직적인 차원에서 활동을 하지 않는 까닭에 테라와다불교의 현황에 포함시키기 어렵다. 그러나 이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며, 사실 앞서 거론한 단체들은 오히려 이들의 일각에 해당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비록 공개적인 활동에는 나서지 않고 있지만 테라와다불교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감을 지니고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긍정적인 모습을 확고히 정착시켜 나갈 경우, 이들은 일종의 외호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어렵지 않게 해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 지역의 종교가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는 경우는 대체적으로 전문적인 전교 활동에 의해서였다. 즉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붓다의 가르침에 정통한 서쪽 사람이 동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비단 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에서도 일반적으로 목격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논의 대상인 테라와다불교는 이것과 전혀 다른 양상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 형성된 필요에 의해 한국인 스스로 테라와다불교를 수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기류야말로 한국테라와다불교의 독특한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소규모의 자발적 열정에 바탕을 두었던 만큼 아직 화려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양상이다. 즉 이상에서 거론한 대부분의 위빠사나 수행 단체들은 실제 운영에서 열악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한국에서의 테라와다불교는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만큼 현재로서는 순수한 열정을 더욱 높이 살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Ⅳ. 한국에서의 역할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태생적으로 한국불교에 대한 정서적 친밀감을 갖고 있으며, 또한 한국불교 자체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한편 필자는 초기불교 전공자로서 테라와다불교의 위상을 매우 높이 평가하며,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나름의 역할을 하면서 발전해 나갈 수 있기를 염원한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에 노출되어 있는 현실이고, 한국 내의 테라와다불교 역시 그 존립 기반이 매우 미약하다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전자의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의 시금석 역할을 후자가 해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것을 통해 양자 모두의 활로가 개척될 수 있기를 염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소절은 한국불교가 처한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일단의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나아가 그것의 해소 방안은 무엇이고 테라와다불교의 사례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인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다음의 세 가지로 집약해 본다. ⓐ 교리체계와 수행체계의 난맥상, ⓑ 승단의 세속화와 질적 저하, ⓒ 시대와의 소통부재 등이다. 이들은 한국불교의 고질적인 병폐로서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다만 최근에 이르러 더욱 악화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한국불교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깊은 뿌리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쉽사리 해결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여러 종교들이 경합을 벌이는 오늘날의 다문화 사회에서 이러한 문제들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해결되어야만 하는 절박함을 안고 있다.


먼저 교리와 수행체계의 난맥상에서 대해서부터 살펴본다. 예로부터 한국불교는 유형을 달리하는 여러 종파와 종단이 공존하면서 한데 어우러지는 독특한 양상을 보여 왔다. 물론 이러한 전통은 장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며, 특히 불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지던 시절에는 불교 자체가 흥성했던 여파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이질적인 종교들이 난립한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이것은 중대 취약점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문 수행자가 아닌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은 맥락을 달리하는 여러 교설들을 한꺼번에 접할 경우 혼란한 느낌만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불교에는 유식․중관․여래장․화엄․법화․선불교․밀교 등의 가르침과 함께 유교․도교․무속 등이 혼재해 있다. 이와 같은 잡다한 양상은 명확한 종교적 실천 목표를 흐리게 하고, 올바른 실천을 위한 결연한 의지를 손상시킬 위험성이 크다.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붓다의 가르침은 현실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는 간명하고도 일관된 형태일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經)·율(律)·론(論)의 독자적 체계를 완비한 테라와다불교는 붓다가 추구했던 원래의 의도를 되새기는 데에 많은 참고가 될 수 있다. 또한 쉽게 접근해 나갈 수 있는 실천 방법의 제시라는 측면에서도 훌륭한 사례를 제공한다. 예컨대 앞 소절에서 언급했던 위빠사나 수행이 바로 그것이다. 위빠사나는 예비적인 과정을 겪지 않고서도 용이하게 접근해 나갈 수 있으며, 일상생활에서도 다양하게 응용될 수 있는 장점을 지닌다. 더구나 이 방법은 명확한 경전적 근거를 지님과 동시에, 수행의 진척 정도를 상세하게 점검받을 수 있는 인터뷰 시스템이 잘 갖추어져 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위빠사나 수행이 한국불교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데에는 바로 이러한 원인이 크다. 이점에서 테라와다불교는 한국불교가 풀어야 할 난제 중의 하나에 대한 해결 사례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승단의 세속화와 질적 저하의 문제 또한 한국불교의 현실을 어둡게 만드는 주요 요인이다. 초기불교 당시에는 구족계를 내릴 때 사의법(四依法)을 설하고 그것에 의지한다고 할 때라야 비로소 비구로서의 자격을 부여했다고 한다. 즉 남이 버린 헌 옷 조각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 분소의(糞掃依), 신자들에게 빌어서 음식을 먹는 걸식의(乞食依), 나무 아래에서 명상을 하거나 잠을 자는 수하지(樹下止), 소의 오줌을 발효시켜 만든 약만을 사용하는 진기약(陳棄藥) 등을 실천하게 하였다. 이 사의법은 출가 수행자의 본분이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는 데에 있음을 분명히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규약 아래 초기불교 승단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었고, 재가자들에 대해 정신적 스승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진심어린 공경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시대와 장소가 변하면서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승단의 세속화와 질적 저하가 문제시되는 현 시점에서 사의법은 청정 승단으로의 회복을 위한 하나의 교훈이 될 수 있다. 물론 이 부분은 현재의 테라와다불교에서도 얼마간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테라와다불교권에서는 전통적인 계율 항목들을 가능한 한 그대로 지키려는 입장들이 항상 우세를 보여 왔다. 또한 승단의 자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계율을 수호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실천 과제로 상정하였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테라와다가 존속하는 대부분의 불교 국가에서 승단은 여전히 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기에는 이와 같이 출가 수행자의 본분을 잊지 않으려는 부단한 노력들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테라와다불교는 한국불교 승단의 권위와 위상을 진작시키기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대와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한국불교는 일견 테라와다불교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있는 듯하다. 한국불교는 대승불교 전통을 계승하는 반면에 테라와다불교는 소위 소승불교에 속한다. 주지하다시피 대승(大乘, mahāyāna)이란 ‘큰 수레’를 뜻하며 소승(小乘, hīnayāna)의 ‘작은 수레’와는 반대의 의미를 지닌다. 즉 ‘작은 수레’를 업그레이드한 ‘큰 가르침’이라는 의미이다. 대승에서는 자신만의 해탈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타인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데에 앞장서는 이타적 삶을 이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대승의 이념을 표방하는 한국불교는 스스로에 대해 시대와의 소통에 더욱 부합하는 모습을 지닌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옳은 생각인지에 대해서는 냉정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고귀한 이상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이상과 현실 자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대승불교는 오로지 붓다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는 데에 스스로의 존립 근거를 두었다. 따라서 형식적인 계율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모습으로 지속적인 쇄신의 길을 걸어왔다. 특히 북방권의 대승불교는 선종(禪宗)에 이르러 노동 생산적이고 자급자족적인 승단 규범을 확립시키기에 이른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자립적인 승단 경영은 기존의 불교에 대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물론 이러한 변화상은 불교의 동아시아적 정착이라는 측면에서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인해 탁발의 필요성이 줄어들게 된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이후 재정적으로 독립한 승단은 더 이상 재가자들과의 소통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영향 아래에서 한국불교는 재가자의 지원 없이도 살아남는 방법을 오랜 동안 모색해 왔다. 이러한 운영 시스템은 승단의 생존이라는 측면에서는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승단과 재가의 상호 고립이라는 부정적인 부산물을 남겼다. 그 결과 현재 한국불교에서 재가자들에게 허락된 공식적인 역할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한국불교는 시대와의 소통이라는 측면에서도 커다란 구조적 취약점을 떠안고 있는 셈이다.


대승불교의 영향권에서 살아 온 필자에게 테라와다는 왠지 낯선 것이 사실이다. 또한 대부분의 한국인 불교도는 테라와다를 소승불교로 폄하하려는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테라와다 승단은 결코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았으며 재가자들과의 철저한 상호의존적 관계를 유지해 왔다. 예컨대 아직까지 남아있는 탁발 전통은 법시(法施)와 재시(財施)를 매개로 한 승단과 재가 사이의 유기적 결속을 상징한다. 초기불교 이래로 테라와다의 재가자들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승가 구성원의 대리자 역할을 맡아 왔다. 또한 그들은 승단의 운영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가지고 참여해 왔으며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현재에도 테라와다 전통에 속한 재가자들은 사원의 관리라든가 재정 운영에 있어서 상당 부분 역할을 맡고 있다. 바로 이것이 승단과 재가를 결속시키고 청정 승가를 구현하는 데에 일정 부분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례에 비추어 승단의 운영에서 재가자들의 존재가 불편하게만 여겨지는 듯이 보이는 한국불교계의 현실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이상은 한국불교의 개선책과 관련하여 테라와다불교로부터 참고해 볼 수 있는 대안들이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전통적인 실천 방식을 옛 모습 그대로 고스란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바로 그것이 외형적이고 가시적인 포교 활동보다 더욱 강력한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붓다의 전형적인 포교 방식은 외부적인 강압보다는 자발적인 수용과 참여를 유도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방식은 기존의 한국불교와의 원만한 관계 정립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유념해 두어야 할 듯하다. 전통적인 실천 방식의 유지는 테라와다불교 자체뿐만이 아니라 한국불교 전체를 위해서도 큰 보탬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양자는 경쟁자적 관계가 아닌 동반자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자의 동반자적 관계는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 없이 정법(正法)에 의한 진리 수호에 매진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굳건히 정착될 때 그 감화력은 한국불교계 전체의 밝은 앞날을 널리 비추게 될 것이다.


Ⅴ. 한국에서의 과제


본 소절에서는 테라와다불교 자체에 대해 요구되는 과제와 개선책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21세기의 한국사회는 그간의 전통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테라와다불교 역시 이러한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테라와다불교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해 본다. ㉮ 계율 항목의 현실적 적용, ㉯ 아비달마 교리체계의 수용과 유포, ㉰ 위빠사나의 보급과 활용, ㉱ 조직 기반의 구축, ㉲ 기존 테라와다불교와의 관계 정립, ㉳ 한국불교 종단들과의 관계 정립 등이다. 이상은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가 존속해 나가자면 어쩔 수 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을 문제들로 생각된다. 따라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대처해 나가야만 하는 과제들이 아닐까 싶다.


㉮의 ‘계율 항목의 현실적 적용’ 문제는 일견 사소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으로 이 문제에서 보수적 입장을 취해 왔던 테라와다불교의 정체성과 관계된 중대 사안이다. 예컨대 붓다의 사후 약 100년 무렵에 발생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제2차 결집 당시, 불교 교단을 갈라지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10사(事)로 일컬어지는 계율의 문제였다. 즉 이미 10사를 실행하고 있던 대중부(大衆部)와 달리 테라와다(上座部)에서는 그것을 부당한 것으로 보았고, 또한 그것을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속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2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표면적으로는 변함이 없는 테라와다불교 고유의 입장인 듯하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에서 이들 모두를 거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예컨대 현대인으로 살아가면서 돈을 만지지 않고 생활하기란 지극히 비현실적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금은정(金寶淨)을 무작정 반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계율 항목을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문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출가자들의 편익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은 한국의 현실에서 금은정과 같은 사안의 수용 문제는 유연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계율의 문제는 매우 신중한 접근을 필요로 하며, 그것의 변용이 가져올 부정적 영향에 대한 충분한 고려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한번 수정을 가하거나 예외 규정을 두게 되면 또 다른 상황에서 재차 삼차 수정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렇게 되면 계율의 기본 틀마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더구나 계율 준수의 관행이 일단 훼손되고 나면 그것을 돌이키기란 매우 어렵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유독 한국에서만 계율의 적용을 느슨하게 할 수도 없다. 결국 이 문제는 테라와다불교 전체의 특성과 맞물린 것으로, 보다 큰 차원에서의 대안 모색을 위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의 ‘아비달마 교리체계의 수용과 유포’는 Ⅱ장에서 언급했던 테라와다불교의 기본 특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테라와다불교는 아비달마 논장에 근거한 고유의 분석적 교리체계에 근거해 있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본래부터 부파적 성향을 강하게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위빠사나 수행 또한 아비달마의 교리체계와 표리의 관계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초기불전연구원’이라든가 ‘고요한 소리’ 등에서 출판물을 통해 이미 많은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보리수 선원’이라든가 ‘호두마을’ 등에서도 명성 높은 학승들을 초빙하여 특별 강좌를 개최하는 등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테라와다의 아비달마 교리체계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적 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며, 그러한 만큼 더욱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테라와다불교에 대해 흥미를 유발한 주요 요인이 위빠사나였다면, 이제부터의 그것은 고유의 분석적 교리체계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 아비달마 교리체계야말로 테라와다불교의 본래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기본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심도 깊은 연구와 유포는 차후 테라와다불교가 주력해 나가야 할 핵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의 ‘위빠사나의 보급과 활용’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상당 부분 다루었다. 그러나 이것은 테라와다불교의 현실적 기여라는 측면에서 재차 강조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이전에는 없었던 일로서 최근에 이르러 위빠사나는 서구 심리치료의 치료개입 방법으로 활발하게 응용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과학적 접근법과 전통적 수행법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상당한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시도되고 있는 위빠사나와 심리치료간의 교섭은 대체로 심리학자 혹은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주도되는 편중된 양상을 보인다. 더욱이 대부분의 심리치료자들은 위빠사나의 긍정적인 측면을 병증의 치료 효과에만 제한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따라서 붓다의 본래 취지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서 위빠사나의 치료적 효능에 접근해 들어가는 움직임이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자면 불교의 교리와 수행 체계 전반에 정통해 있으면서 심리학과 심리치료 분야까지를 망라할 수 있는 해박한 식견을 갖춘 전문가의 양성이 필수적이다.


한편 종래의 단조로운 위빠사나 기법들에 대해서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전통적인 명상 방법은 대체로 단순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초보 수행자들에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따라서 명상에 대한 흥미를 지속적으로 고양시키면서도 그것의 원리를 쉽게 터득할 수 있도록 돕는 보조적인 방법의 개발이 필요하다. 최근 서구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사띠에 근거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MBSR)’, ‘사띠에 근거한 인지치료(MBCT)’, ‘변증법적 행동치료(DBT)’, ‘수용-참여 치료(ACT)’ 등은 좋은 사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치료 프로그램들은 위빠사나의 원리를 십분 활용하면서도 흥미로운 다양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초보 수행자는 물론 거동이 불편한 중증의 환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활용은 위빠사나의 저변 인력을 늘이기 위한 현실적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해 볼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의 ‘조직 기반의 구축’은 테라와다불교 또한 종교 단체의 하나라는 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항목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출가자 중심의 종단이지만, 재가자들과의 철저한 상호의존적 관계에 바탕을 둔 독특한 양상으로 계승되어 왔다. 한국에서도 테라와다불교의 존속을 위해서는 재정적인 뒷받침을 감당해 줄만 한 재가자 집단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이점에서 재가자 조직의 구축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일이 아무리 시급하더라도 테라와다불교의 본래적인 색채를 훼손해서는 곤란하다. 예컨대 과도하게 신도 모집 행위에 나선다거나 타 종교에 대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테라와다불교는 붓다의 가르침을 원래대로 고수하려는 이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인 만큼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또한 수동적이기도 하다. 바로 이점은 이 종단을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 취약점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큰 안목에서 보자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이 종단의 존재 이유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 테라와다불교는 스스로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재현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붓다의 가르침에 목말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로 그것일 수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테라와다불교의 경쟁력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의 ‘기존 테라와다불교와의 관계 정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과제 중의 하나이다. 테라와다불교는 스리랑카․태국․미얀마라는 세 나라를 중심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이 종단은 이들 중 어느 한 나라에서 쇠락하게 되었을 경우 다른 두 나라에서 새롭게 이식해 들여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곤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을 중심으로 주도되는 한국테라와다불교에도 고려될 필요가 있다. 특정 종단의 가르침을 온전히 수용하는 문제는 받아들이는 쪽의 의지만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특히 테라와다불교는 세계 종교사에 비추어 최고의 전통과 권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는 일련의 움직임들이 보다 확고하게 정착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테라와다불교권과의 원만한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또한 Ⅲ장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한국에는 미얀마의 테라와다불교에 적을 둔 공식적인 단체들이 이미 진출해 있다. 필자는 남방불교권의 지지와 협력이야말로 한국인에 의한 테라와다불교에 대해 그 공신력을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본다. 나아가 ‘계율 항목의 현실적 적용’이라든가 ‘한국불교 종단들과의 관계 정립’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가는 데에서도 일종의 의지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의 ‘한국불교 종단들과의 관계 정립’ 문제가 남아 있다. 이것에 대한 필자의 기본 입장은 이미 Ⅳ장에서 충분히 언급하였다. 다만 여기에서는 앞서 다루지 못한 사항만을 덧붙이고자 한다. 필자는 이제까지 한국불교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논의한 느낌이 없지 않다. 이것은 한국불교에 대해 문제 있는 집단으로 보이게 할 소지를 제공하며, 또한 테라와다불교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 위험성도 없지 않다. 그런데 여기에서 필자가 더욱 심각하게 고민하는 대목은, 바로 이러한 인식이 테라와다불교를 표방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일부의 추종자들은 한국불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극단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태도는 양자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으며, 특히 대다수 한국인 불교도에게 테라와다불교를 불평불만에 가득 찬 공격적 집단으로 오인케 할 빌미마저 제공한다.


물론 현재의 한국불교는 개선해야 할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테라와다불교를 하나의 모범 사례로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불교가 지닌 우수성 또한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불교는 인도와 전혀 다른 지리적․환경적 요인 속에서도 무려 1700년이라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조계종의 대표적 소의경전인 『금강경』은 시대를 초월한 붓다 가르침의 정수로 평가되며, 불교도로서 이 문헌이 전하는 메시지를 외면할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부 전통 선원에서 보이는 구도의 열기는 세계의 어느 불교권에서도 찾을 수 없는 치열함 그 자체이다. 무엇보다도 한국불교는 500년에 걸친 가혹한 훼불의 시기를 견디어 낸 강인함을 지닌다. 따라서 테라와다불교만을 절대시하고 한국불교에 대해서는 낮추어 보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양자가 동반자적 입장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선양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또한 상대의 장점을 통해 스스로의 단점을 보완해 나가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러한 속에서 테라와다불교와 한국불교 종단들은 원만한 관계 정립에 이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