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불교덕윤리에서 성품의 중심개념으로서 ‘행’(saṅkhāra)/안옥순

실론섬 2015. 12. 23. 14:30

불교덕윤리에서 성품의 중심개념으로서 ‘행’(saṅkhāra)

안옥선/순천대학교

 

Ⅰ. 시작하며

Ⅱ. 불교덕윤리와 성품

Ⅲ. 성품의 중심기제로서의 행의 의미

    1. 행의 일반적 의미와 속성

    2. 성품의 중심기제로서의 ‘행’의 작용

       1) 오온조작으로서의 행

       2) 의도로서의 행

       3)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

Ⅳ. 맺음말

 

[요약문]

이 연구는 불교덕윤리의 문제들 중의 하나인 성품에 대한 해명의 시도이다. 성품에 해당하는

상응개념을 오온, 오온 중에서도 특히 행(saṅkhāra/行)이라고 보고 그 의미를 구명한다.

 

행의 일반적 의미는 ‘조작작용과 그 결과로서 현상전체’로 규정된다. 특히 오온의 맥락에서의

행은 현상/산출물을 전제한 ‘조작작용’이다. 행은 ‘조작작용’이라는 독특성을 가지면서도 오온의

보편속성을 공유한다. 즉 행은 조건적으로 발생하며 다른 오온과 함께 작용하고, 무상(anicca)·

고(dukkha)·무아(anatta)를 속성으로 한다.

 

중생은 무지로 인하여 다른 오온에 집착하듯이 행에 대해서도 집착한다. 그래서 중생에게 행은 

‘집착되고 있는 행’이다.

 

성품으로서의 행의 작용은 세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로 오온조작으로서의 행은 이미 조작된

오온을 재조작함으로써 오온의 작용방식과 형태를 결정짓는다. (재)조작은 여전히 탐진치에

의한 (재)조작일 수도 있고 무탐진치의 (재)조작일 수도 있다. (재)조작에 있어서는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중생과 아라한으로 나뉜다. 둘째로 의도로서의 행은 경험/현상세계에서 혹은

신구의 행위영역에서 의도로 작용한다. 의도는 특히 선을 체화하며 이상적인 성품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하다. 그런데 선의 체화가 완성적일 때 의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의도하지 않아도 선이 저절로 실현되기 때문이다. 셋째로 행은 신구의 업/행위로서

작용한다.

 

성품의 관점에서 살펴본 행의 이러한 세 가지 작용은 하나의 통일적 심리작용이다. 행의 한 가지

작용이 오온조작 작용으로도 설명되고, 경험이나 신구의 행위에서의 의도로서도 설명되고,

신구의 행위/업으로서도 설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행은 공통적으로 지멸되어야 할

속성을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지멸의 대상이다. 그 지멸의 지점이 성품의 완성상태이다.

 

I. 시작하며

 

현대 불교학에서 불교윤리라는 분야는 불교학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다. 불교윤리의 내용을 해명하는 것은 물론, 현대사회의 윤리문제들을 개별적으로 다루는 

응용윤리학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짧은 시간에 많은 성과들이 축적되고 있다. 더 나아가서 불교

윤리의 메타윤리적 속성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도 상당한 진척을 보이고 있다. 덕윤리, 절대주의 

윤리, 공리주의 윤리, 자연주의 윤리, 상대주의 윤리 등 많은 현대적 윤리술어들이 불교윤리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불교윤리 연구성과들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면 그 괄목할만한 성과 뒤에는

아직 해명되지 않고 있는 부분도 많다. 예컨대 불교윤리의 내용에 대한 기술적 설명은 무수하

지만, ‘불교윤리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 혹은 ‘불교에서 ‘윤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와

같은 보다 기본적인 문제는 방치되고 있다. 불교에서 ‘윤리’라는 말의 의미에 대한 어떠한

합의도 없이, 불교윤리에 대한 연구는 그 출발점을 떠나 멀리 와 있다. 또한 불교윤리가 서양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속성의 윤리인지에 대한 논의와 합의는 활발하지만, 이러한

연구에 전제되어야 할 상응개념에 대한 분석·해명에 대해서는 미진하다. 예컨대 불교윤리를

공리주의윤리라거나 덕윤리라고 할 때, ‘공리’나 ‘덕’에 상응하는 불교윤리의 개념에 대해서는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 논문에서 다룰 문제는 불교윤리에 대한 현대적 연구 속에서 이미 응답되었어야 하지만

아직까지 방치되고 있는 문제들 중의 하나로서, 덕윤리로서의 불교윤리의 성격규명과

관련된 문제이다. 불교학자들은 불교윤리가 ‘성품’을 문제 삼는 덕윤리라고 하면서도 ‘성품’

에 상응하는 불교윤리의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않고 있는데, 이 연구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불교덕윤리에서 ‘성품’에 상응하는 개념을 탐색하여 성품의

작용메카니즘을찾아 규명코자한다.

 

‘성품’은 자아의 문제이면서도 내적 성향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하는 불교의 개념은 오온

(pañcakhandha)에서 찾아진다. 또한 도덕의 맥락에서의 성품은 ‘포괄적 규정성’뿐만 아니라 ‘

의지적 선택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오온 중에서도 행(saṅkhāra/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행은 자신과 나머지 오온을 조작하면서(saṅkhāroti/abhisaṅkhāroti) 의도(cetanā)와 업/행위

(kamma)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행은 오온을 총괄하는 작용이기도 하면서 의도하는 가운데 

행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행은 오온이 드러나는 방식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뿐만 

아니라 선을 지향·선택·표현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행은 자신까지 지멸시킴으로써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데, 이 과정에서 자아의 성품은 윤회의 성품에서 열반의 성품으로 전환

되기 때문이다.

 

덕윤리, 불교덕윤리, 성품, 오온과 행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기초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성품의 

전환·형성 작용으로 이해될 수 있는 행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다. 필자는 먼저 ‘불교덕윤리’와 

‘성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볼 것이다(II). 다음으로 행의 의미를 살펴보는 데 있어서는 행의 

일반적 의미와 속성에 대해서 논의한 후에(III-1), 행의 세 가지 작용―오온조작으로서 행, 

의도로서 행, 신구의 업으로서의 행―에 대해 살펴볼 것(III-2)이다.

 

II. 불교덕윤리와 성품

 

불교윤리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서 불교윤리를 덕윤리라고 주장하여 그 이후의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는 키온(D.Keown)이다. 불교윤리 연구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그의 

저서『 불교윤리의 속성』(The Nature of Buddhist Ethics)은 그 이전의 연구들과 뚜렷이 구별

된다. 서양윤리적 관점을 불교윤리에 접맥시킨 최초의 체계적 연구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불교윤리의 전반적 속성을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덕윤리(virtueethics)에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키온은 불교윤리를 덕윤리로 이해한다. 그는 불교윤리가 윤리의 최고목적(nibbāna)을 달성하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성품을 변형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윤리라고 본다. 그에게 불교윤리의 

중심개념인 팔정도와 육바라밀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불교윤리에 대한 보다 

최근의 연구들은 키온의 이러한 연구를 보완·비판하고 있는 데, 케아(Cea), 화이트힐(Whitehill), 

죤스(Jones), 하비(Harvey)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이들이 불교윤리를 ‘오직’ 덕윤리 틀로만 이해하느냐, 아니면 공리주의적 특징과 칸트적 특징도 

갖는 윤리로 이해하느냐에 대해서는 입장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불교윤리가 최소한 덕윤리적 

특징을 갖는다고 보는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 즉 덕윤리에 의해서 불교윤리를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입장차이가 있지만, 불교윤리에서 ‘최소한’ 덕윤리적 속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더 나아가서 불교윤리를 덕윤리로 이해하는 학자들은 ‘불교윤리가 왜 덕윤리인가’ 혹은 ‘불교윤리

의 어떤 측면이 덕윤리적 속성을 의미 하는가’를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공통된 입장을 견지한다. 

온은 목적을 점진적으로 실현하면서 성품을 변환시키는 데서 덕윤리의 핵심을 찾으며, 불교

윤리 또한 그러하다고 본다. 화이트힐은 불교윤리의 핵심이 도덕적 성품을 각성시켜 개발하는 

데 있다고 본다. 죤스는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성품’을 배양하는 도덕이라고 본다. 하비는 

교윤리가 성품 배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덕윤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본다. 요컨대 이들 모두 

‘성품의 변환/각성/배양’을 들어 불교윤리를 덕윤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덕윤리의 중심개념인 ‘성품’(character)이라는 말의 의미를 명백히 해보기로 하자. 국어

사전에 의하면 우리말의 ‘성품’은 ‘사람 됨됨이’ 혹은 ‘인격’을 의미한다. 그런데 ‘됨됨이’나 

‘인격’이라는 말은 도덕적 가치판단과 결부된 말이다. 우리가 ‘됨됨이가 좋다’ 혹은 ‘인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도덕적으로 칭송 할만한 인품, 그것도 ‘(어느 정도) 

항상적인’ 인품을 가졌다는 말이다. 예컨대 자애로운 인품을 가졌다는 말은 그 사람이 (비교적) 

‘일관성 있게’ 자애롭게 행동하는 사람임을 의미한다.

 

서양 윤리 맥락에서 ‘성품’이라는 말도 이와 유사한 윤리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8) 한 학자에 

의하면 성품을 지칭하는 ‘character’라는 말은 특별한 윤리적 근원을 갖는다. 이 말의 어원은 

‘윤리’라는 말과 같으며, 그 의미는 ‘성품의 탁월함’이나 ‘도덕적 탁월함’을 뜻한다. 그리고 

‘성품의/도덕적 탁월함’은 윤리적으로 경탄할만한 성품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9) 이처럼 

서양언어의 맥락에서도 ‘성품’을 지칭하는 ‘character’라는 말은 애초부터 도덕적 의미를 갖는 

말로서, 도덕에 있어서 행위의 항상성, 지속성, 혹은 일관성을 전제한다.10)

8) 상식적으로도 ‘성품(character)’이라는 말은 도덕적 성품(moral character)을 의미한다. 
   이 말은 개인의 도덕적 속성에 대한 평가를 의미한다(http://en.wikipedia.org/wiki/
   Moral_character).
9) Marcia Hmiak은 ‘도덕적 성품(moral character)’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에서 ‘character
   (성품)’라는 말의 의미와 윤리적 근원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character’라는 
   말은 ‘다른 이로부터 구분하는 속성들의 합’을 의미한다. ‘character’라는 말의 윤리학적 
   근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2장에서 찾아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의 탁월함을 말하는 데, 사고의 탁월함(excellence of thought)과 
   성품의 탁월함(excellence of character)이 그것이다. ‘성품의 탁월함’을 의미하는 ‘êthikai 
   aretai’가 ‘도덕적 덕(moral virtue/virtues)’ 혹은 ‘도덕적 탁월함(moral excellence/
   excellences)’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성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êthos(character)’는
   ‘êthikos(윤리적인/ethical)’와 그 기원을 같이 한다. 그리하여 ‘도덕적 성품’이나 ‘성품의 
   탁월함’을 말할 때, 개인의 특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경탄할만한 사람을 
   만드는 속성들’의 조합을 강조하게 되었다(Marcia Hmiak, Moral Character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http://plato.stanford.edu/entries/moral-character/
   #VirMorChaAftGre), 2007).
10) 초기 희랍철학자들 또한 선한 도덕적 성품의 소유자가 선을 ‘어떻게’ 그리고 ‘언제’ 
    확보하느냐를 결정하기 위해서 (선한 행위의) ‘규칙성(regularity)’과 (선한 행위에 
    대한) ‘확실성(reliability)’이라는 개념을 활용했다고 한다(Marcia Hmiak, 앞의 글
    (moral character 항목). 그들 또한 행위의 규칙적 반복과 행위에 대한 변함없는 
    기대나 확신, 즉 선한 행위의 항상성/지속성을 선한 성품의 필수적 요소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윤리적 맥락―특히 덕윤리의 맥락―에서 지향되는 성품이란 ‘항상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는 성품’을 의미한다. 덕윤리는 일회적 행위가 아니라 항상적 성품배양을 지향한다. 덕윤리는

개별행위, 규범, 의무, 법칙으로서의 도덕이 아니라 도덕적 성품―강제적으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도덕적일 수 있는 성품―배양을 지향한다. 덕윤리의 기본패러다임을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덕을 ‘성품의 상태’로 정의한 것도 이러한 의미를 전제한다. 그는 덕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여 ‘중용

―우리에게 상대적인 중용―에 놓여 있는 선택과 관계된 성품의 상태(a state of character 

concerned with choice)’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적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한다. 

덕이란 이성을 통해 행위맥락 속에서 중용점을 찾아내어 선택·실천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성품에 근거한 것이라야 한다.

 

불교윤리학자들이 보고 있는 것처럼, 불교윤리의 핵심을 성품의 변환, 배양, 혹은 각성에서 찾을

때, 불교윤리 또한 덕윤리의 핵심 속성을 공유한다. 초기불교 입장에서 볼 때 불교수행은 지계, 

절제/제어, 마음챙김, 삼매 등―보다 포괄적으로는 팔정도나 37조도품―의 수행을 통해 점진적

으로 부정적 성향을 지멸시켜 나감으로써 긍정적 성품을 기르는 문제이다. 갈애(taṅhā), 집착

(upadāna), 번뇌(āsava), 나쁜 잠재성향(anusaya), 결박(saṁyojana), 탐진치(rāga/dosa/

moha)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지칭되는 마음의 부정적 성향을이 반대의 성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포괄적이면서도 간단히 말 하자면, 탐진치 지멸의 자비의 성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열반의 목적이면서) 도덕의 궁극목적인 닛바나(nibbāna)는 그러한 상태의 정점으로서 

성품의 완성상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불교윤리는 특정 ‘성품’의 배양을 관건으로 하는 덕윤리로 이해될 수 있다. 불교덕윤리는

성품의 배양에 있어서 부정적 성향을 지멸시켜 긍정적 성향을 기르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중생의

성품을 열반의 성품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III. 성품의 중심기제로서의 행의 의미

 

이와 같이 덕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덕윤리 또한 특정의 성품배양을 윤리의 핵심으로 본다. 

그렇다면 불교덕윤리에서 ‘성품’에 상응하는 개념은 무엇일까? 어떠한 기제를 통하여 성품의 

전환과 형성이 가능한 것일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성품의 기제는 오온(의 작용)에서 찾아진다. 

성품의 주체내지 행위자는 영혼과 같은 고정적 실체가 아니라 몸(rūpa/色), 감각/느낌

(vedanā/受), 지각/인식(saññā/相), 조작(력)/의지/성향(saṅkhāra/行), 의식/판단(viññāṇa/識)

으로 이루어지는 오온의 종합적 ‘작용’이다.

 

성품에 상응하는 개념은 이들 오온 중에서도 조작(력), 의지, 성향등을 의미하는 행(saṅkhāra)

에서 찾을 수 있다. 행위와 관련하여 ‘성품’을 풀어쓸 때, 그것은 특정 ‘행위의 반복을 통한 습관’ 

혹은 ‘특정행위를 반복하려는 힘’인데, 오온 중에서도 행이 바로 이런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붓다에 의하면, 고정적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서의 자아 혹은 ‘행위의 패턴’으로서 

현상적 자아만이 있을 뿐인데, 이러한 자아의 기능이 행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품의 상응개념으로서 행의 이러한 주도성은 앞으로 살펴보게 될 행의 세 가지 .의미에서 분명해

진다. 행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오온을 조작함으로써 오온의 작용(방식)을 결정한다. 오온의 

작용을 통괄·결정함으로써 오온(작용)으로 표현되는 성품을 결정하는 것이 행이다. 다음으로 

행은 경험의 대상(六境)과 관련하여 의도(cetanā)로서 작용하면서 신구의 행위/업(kamma)

으로서 기능한다. 의도나 업의 작용을 통해서 행위패턴으로서의 성품을 규정하는 것이 행이다. 

다른 오온과 구별되는 행의 이러한 작용으로 인하여 오온 중에서도 행이 결정적이며 포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행위의 패턴을 형성해 가고 결정하는 것이 행이다.

 

붓다는 오온 중에서도 행을 들어 사람은 ‘단지 행의 더미(suddhasaṅkhāra puñjo)’ 라고 하는 데,

이 말은 행의 이상과 같은 결정성과 포괄성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서 붓다는 도달되어야 할 이상

상태로서 열반을 설명할 때도, 행을 들어 ‘행의 가라앉힘(saṅkhāra ūpasama)’ 혹은 ‘행의 지멸

/그침(saṅkhāra nirodha)’이라고 하는 데, 이 또한 행의 주도적·결정적 위상을 전제한다.

 

그러면 성품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행의 이상과 같은 역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행의 일반적 의미와 속성에 대해서 검토한 후에, 행의 세 가지 작용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행의 일반적 의미와 속성

주지하다시피 행(saṅkhāra/行)은 가장 난해한 불교용어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saṅkhāra

(행)’은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는데,15) 이는 행이 지칭하는 의미의 난해함은 물론 복잡성과 

다의성을 반영한 것이다. 

15) 우리나라에서는 ‘형성’, ‘의도적 행위’, ‘심리현상’, 의지/기질 등으로, 영어권에서는 
    ‘formation(형성)’, ‘karmic formation(업 형성)’, ‘fabrication(조작)’, ‘determination
    (결정)’, ‘preparation(준비)’, ‘dispositions(기질/성향)’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에 국한하여 그 의미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이들 서로 다른 번역어들은 하나의 

공통된 의미로 관통된다. 그것들은 ‘마음/내면에서 일어나는 존재의 조작작용과 그 외화’라는 

의미로 관통된다. 그리고 그러한 조작작용의 결과로서의 ‘모든 존재’ 혹은 ‘현상 전체’를 의미

한다. 우리는 행의 의미를 ‘의지적 마음작용과 그 외화, 그리고 그 산물로서의 존재’라고 간추릴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비즈(R. Davids)와 냐나틸로카(Nyanatiloka)의 행에 대한 용어설명도 

러한 의미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온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을 망라하여 오온에 

대하여 주목할 만한 연구서를 내놓은 보이스베르트(Boisvert)의 이해 또한 마찬가지이다.

 

데이비즈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행을 설명하고 있다.16) 그 설명은 크게 세 가지 의미―존재를 

이루는 근본속성(1), (마음의 의식지 향성을 포함한) 마음전체(2), (조작된) 모든 존재(3)―로 

압축된다. 이들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의미로서 문맥에 따라 어느 하나만이 선택될 것임에도 

불구하고,17) 그 의미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존재를 가능케 하는 존재의 모든 속성(1)은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마음작용의 산물이거나 마음전체에 기반을 두고 있어서(2) 이 양자는 

분리될 수 없으며, 이 양자가 뭇 존재의 세계인 (조작된) 현상세계(3)를 이루기 때문이다.

16) ①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조건 내지 근본속성의 총합: ⓐ 존재를 이루는 조건이나 
    속성의 총합(예컨대 āyu-, bhava-, jīvita-), ⓑ 본질적 조건, 선행하는 것, 공동작인, 
    신구의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kāya-, vacī -, citta/mano-). ② 오온의 하나로
    서 신체적 생명체의 속성으로서의 마음전체: 마음이 일어날 때의 마음의 수반성, 부
    수성, 의식지향성 혹은 인지의 단위. ③ 복수형(sankhārā)으로 모든 물리적·가시적 
    존재: 정신적·신체적 측면 모두를 의미하며 넓게는 현상세계 전체(T. W. Rhys 
    Davids, Pali-English Dictionary (London: PTS, 1966), 664-665쪽)
17) 파윳토(Payutto)는 행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오온의 맥락
    에서 행은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 의미가 심리적이라고 한다. 
    이와 달리 삼법인의 맥락에서 행은 모든 조작된 것을 의미하여 그 의미가 신체적·
    심리적인 것을 의미하여 오온전체를 의미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Phra Prayudha 
    Payutto, Grant Olson Trans., Buddha dhamma: Natural Law and Value for Life 
    (New York: State Uni. of New York, 1995), 76쪽).

 

따라서 맥락에 따라 어느 하나의 의미만이 선택될지라도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전제된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sabbe saṅkhāra anicca(諸行無常)’에서 saṅkhāra는 

‘모든 조작된 존재’(3)를 의미하지만, 이 모든 조작된 존재는 그 근본속성(1)과 그에 수반된 

마음작용(2)을 전제한다.

 

행의 의미에 대한 냐나틸로카의 설명 또한 핵심내용에 있어서 크게 다른 점은 없다. 그는 행의 

가장 보편적 의미로서 ‘조작(성)’을 강조한다, 그는 행이 ‘(현재의) 조작/형성(forming)행위’를 

의미할 수도 있고, (이미) ‘조작된 것’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이 두 가지 모두를 의미(가장 

보편적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는 ‘행’이라는 말이 갖는 특성을 잘 지적한 것이다.

 

오온에 관한 탁월한 저술을 내놓은 보이스베르트에 의하면, 행의 의미는 최종적으로 ‘산출력

(productive force)과 존재하는 모든 것’,이 두 가지로 집약된다. 전자는 신구의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의도’와 같은 것으로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며, 후자는 ‘조건 지워진 모든 것’ 

혹은 현상을 의미한다. 그의 설명에서 산출력과 존재하는 모든 것―의도와 현상, 조작작용으로서의

마음전체와 그 산물로서의 현상, 혹은 조작작용으로서의 행과 조작결과물로서의 행―은 ‘요리행위

(kiriyā)’와 ‘요리결과물(phala)’로 이루어지는 ‘요리(cooking)’에 비유된다. 요리행위가 요리

결과물인 음식을 산출하듯이, 작용으로서의 행이 결과로서의 행을 산출한다. 요리가 요리행위와 

요리결과물(음식)로 이루어지듯이, 행 또한 조작작용과 그 산물인 현상전체로 이루어진다. 

요컨대 요리가 능동적 작용과 수동적 산출물로 이루어지듯이 행 또한 그러하다.20)

20) 요리함은 일련의 행위들(예컨대 재료를 다듬고, 씻고, 볶는 것과 같은 행위들)로 이루어
    지고 그 행위들의 결과로서 음식이 있게 된다. ‘요리함’은 요리행위(kiriyā)와 요리결과
    물(phala)을 포함한다(104-105쪽). 적합한 재료들을 손질하여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과정이 ‘요리행위’로서 ‘작용으로서의 행’에 해당한다면, 요리행위의 최종결과로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결과로서의 행’에 해당한다.

 

앞의 세 사람의 행에 대한 이해를 종합하여 그 핵심을 단순화시키면, 행의 의미는 ‘(마음에 의한) 

조작작용과 그 결과로서 현상전체’이다. 이 두 의미는 서로 연관된 하나의 의미로서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지만, 그 중심의미는 조작작용에서 찾아진다(불교의 핵심은 동성(動性)에 있기 

때문이다). ‘행’의 한역어인 ‘行’ 또한 ‘조작작용’으로서의 행의 의미를 잘 살린 것이다. ‘흐를 행’,

‘다닐 행’, ‘행할 행’에서 ‘흐르다’, ‘다니다’, ‘행하다’ 등의 의미는 행의 동작성, 역동성, 작용성을

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오온의 관점에서 볼 때도, 행의 중심 의미는 (그 작용결과로서 현상/산출물을 전제한) ‘조작작용’

에서 찾아진다. 후에 면밀히 살펴보겠지만, 오온에서 행에 대한 형식적/명시적 정의는 ‘자신과 

다른 오온을 조작하는 것’이다. 행은 색(色)과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심적 작용인 수(受)상(想)

식(識)의 작용방식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오온을 조작한다. 수상식의 작용까지 관장

하는 심적 작용의 총체를 행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은 심적 내용들의 종합을 의미하여 하나의 마음

작용을 의미하는 수상식 (각각의) 온과 대조가 된다.’고 말할 때도, 다른 오온을 조작하는 행의 

총체적·포괄적 작용을 지적한 것이다.

 

행의 ‘조작작용’은 행만의 독특성이지만, 이러한 독특성에도 불구하고 행은 오온의 보편속성을 

공유한다. 행은 한편으로는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오온과 함께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발생시키는 외적 조건에 의존한다. 행도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개별체이거나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행 또한 다른 오온처럼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를 

속성으로 하며, 그 이상적 작용방식에 있어서는 무갈애·무집착이 요구된다.

 

행이 다른 오온과 함께 작용하며 자신을 발생시키는 조건을 갖는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

이다. 오온은 심신관계로 말하면 불이(不二)적 관계를 전제하고, 오온 각각으로 말하면 하나의 

연관된 통일체로서의 활동관계를 전제한다. 오온에서의 심신―몸(색)과 마음(수상행식)―은 

불이이기 때문에, 행 또한 몸/색에 의존하며 몸과 불이적 관계 속에서 기능한다. 다른 오온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행은 함께 작용하여 어느 경우에도 분리되어 기능하는 개별체이거나 실재일 

수 없다. 다른 오온 각각이 서로 다른 고유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듯이, 행 또한 자기 고유의 

역할을 갖고 그들과 함께 작용한다.

 

다른 한편, 행은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발생시키는 밖의 조건에 의존한다. 색은 음식/

자양분(āhāra)을 조건으로 발생하며, 수상‘행’은 촉(phassa)을 조건으로 발생하고, 식은 

명색(nāmarūpa)을 조건으로 발생한다는 데서 알 수 있듯이, 행 또한 촉을 조건으로 발생한다.

 

이와 같이 행은 색을 필수조건으로 하면서 다른 오온들과 함께 작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촉을 

발생의 외적 조건으로 한다. 다른 오온과 동일한 이러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행 또한 다른 

오온처럼 무상·고·무아의 보편속성을 공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상·고·무아의 보편속성은 중생에게 인지되지 않는다. 중생은 오온 각각을 

영속적이며(nicca/常), 즐거우며(sukha/樂), 항상적(atta/我)이라고 본다. 그 결과로 오온에 

대해 갈애(taṅhā)를 일으키고 집착한다.

 

붓다는 중생이 오온에 갈애를 일으켜 갈애로 인하여 오온에 집착(upādāna)한다고 말한다. 그는

‘중생이 오온에 집착하고(satta) 속박되기(visatta) 때문에 중생(satta)이다.’라고 한다. 중생은 

오온에 집착하기에, 그에게 오온은 항상 오취온(upadāna pañcakhandha)인 것이다. 행도 

중생에게는 (중생에 의해서) ‘집착되고 있는 행’이다.26)

26) 12연기에서 두 번째 나오는 (윤회의) 행도 오온의 실상의 관점에서 말하면, 무상·고·
    무아의 실상을 모르는 행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러한 ‘무명(avijjā)을 조건으로하
    여 행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오취온’이 오온과 다르듯이 ‘집착되는 행’ 또한 행과 다르다. 붓다는 오온과 오취온의 구분을 

분명히 한다. 오온에 대하여 번뇌(āsava)를 수반하고 오온에 집착하게 될 때, 오취온이 있게 

된다. 예컨대 색온의 경우 번뇌를 수반하고 색온에 집착할 때 색취온(rūpupādānakkhandha)이 

된다.27) 이처럼 오온과 오취온의 차이는 번뇌와 집착의 유무에 있다. 환언하면 갈애와 집착의 

유무에 있다.28)

27) sāsavaṃ upādānīyaṃ, ayaṃ vuccati rūpupādānakkhandho(SN, iii, 47쪽).
28) 세 가지 갈애와 네 가지 번뇌는 본질적으로 같은 내용이다. 주지하다시피 세 가지 갈애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kāma taṅhā), 존재에 대한 갈애(bhava taṅhā), 비존재에 대한 
    갈애(abhava taṅha)이다. 번뇌는 보통 서너 가지로 제시되는 데, 네 가지로 제시되는 경
    우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kāma āsavā), 존재의 번뇌(bhava āsava), 사견의 번뇌(diṭṭhi 
    āsava), 무명의 번뇌(avijjā āsava)이다. 존재의 번뇌는 비존재의 번뇌도 함축하며(왜냐
    하면 좋아하여 존재를 갈망하는 것이나 혐오하여 비존재의 상태를 갈망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심리적 기제이기 때문에), 의미가 같은 사견의 번뇌와 무명의 번뇌(왜냐하면 사
    견은 곧 무명을 의미하므로)는 모든 갈애에 전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뇌와 집착을 버림으로써, 혹은 갈애와 집착을 버림으로써―전자(번뇌나 갈애)를 버리면 

후자(집착)는 저절로 버려지므로―오온이 오취온이 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즉 행이 ‘집착하는 행’

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붓다는 ‘오온에 대한 갈애를 버림으로써 오취온이라는 짐을 부려야

한다.’라고 말한다.

 

‘오온 각각에 대해서 그것을 그치게 하는 지멸(nirodha)의 길, 혹은 팔정도를 알아서 지멸하라.’

도 말하는데, 이 또한 오온 자체를 지멸하라는 말이 아니라 오온에 대한 갈애를 버림으로써 

집착의 오온을 버리라는 말이다. 오온에 대한 이러한 입장은 행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31)

31) 따라서 현생에서 열반에 이르러 ‘행 지멸(saṅkhāra nirodha)’을 성취한 상태도 행의 
    절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행지멸의 상태인 상수멸정도 마찬가지이다. 행의 한
    시적인 그침의 상태일 뿐 절멸의 상태는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요컨대 행의 의미는 조작작용과 현상전체라는 의미로 압축된다. 두 의미가 서로를 전제하지만, 

핵심의미는 조작작용에 있다. 특히 인간 오온에 국한시킬 때 행의 의미는 ‘조작작용’이다

(그리고 이때의 ‘조작작용’은 그 결과인 현상을 전제한다).

 

이러한 의미의 행은 행만의 독특한 속성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행이 오온의 보편 속성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다. 행 또한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의 속성을 갖으며―다른 오온과 함께 작용하고, 

촉에 의존하며, 독립적·항상적 실재가 아니어서 무상·고·무아라는 보편 속성을 갖으며―, 이로 

인하여 행 또한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무갈애·무집착의 대상이다.

 

2. 성품의 중심기제로서의 ‘행’의 작용

이러한 ‘행’이 성품의 중심개념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오온의 보편속성을 가지면서도, 어느 

오온과도 다른 그만의 독특한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인간은 ‘행의 더미일

뿐’이다. 인간은 오온이지만, 오온 중에서도 하나를 들어 말한다면 그것은 색도 아니요, 수도 

아니요, 상도 아니요, 식도 아닌 행인 것이다. 이러한 행의 속성을 가리켜 요한슨(Johanson)은 

‘오온의 각 요소들이 지니는 중요성은 똑같지 않으며, 오온도 궁극적으로는 행이다’라고 한다.

 

성품에 있어서 행의 이러한 대표성과 중요성은 그 작용에서 확인된다. 행은 세 가지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는 데, 오온조작, 의도, 그리고 업/행위이다. 이 세 작용은 별개의 서로 다른 작용

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용을 다른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다. 오온조작은 곧 의도나 업/행위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고, 의도나 업/행위는 오온작용 자체라고 할 수 있다.

 

1) 오온조작으로서의 행

붓다는 행의 오온조작의 역할에 대해 말하여, 행과 다른 네 가지 온을 조작한다(abhisaṁkharoti)

고 한다. 그는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각기 그렇게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각각의 기능을 열거

하고 있는 데, 행에 대해서는 “행은 조작된 것을 조작한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엇 때문에 행이라 불리는가? 비구들이여, 행은 조작된 것을 조작하기 때문에 

행이라 불리 운다. 행은 어떤 조작된 것을 조작하는가. 행은 조작된 색을 색성(色性)으로 조작한다.

행은 조작된 수를 수성(受性)으로 조작한다. 행은 조작된 상을 상성(想性)으로 조작한다. 행은 

조작된 식을 식성(識性)으로 조작한다. 비구들이여, 행은 조작된 것을 조작하기 때문에 행이라 

불린다.”33)

33) SN, iii, 87쪽. 중요하므로 강조된 부분에 해당하는 원문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Rūpaṃ rūpattāya saṃkhataṃ abhisaṃkharonti. Vedanaṃ vedanattāya saṃkhataṃ
    abhisaṃkharonti. Saññaṃ saññattāya saṃkhataṃ abhisaṃkharonti. Saṃkhāre
    saṃkhārattāya saṃkhataṃ abhisaṃkharonti.

 

위 인 용 문 의 “ 행 은 조 작 된 것 을 조 작 한 다 ( saṁkhataṁabhisaṁkharonti)”에서,34) ‘조작

된 것’은 그 뒤의 문장들에서 나오는 목적격으로 표현된 색수상행식을 지칭한다. ‘조작된 것을’로

번역된 ‘saṁkhataṁ’은 saṅkharoti의 과거분사가 명사로 쓰인 것이다. 이때의 격은 목적격이다. 

의미상으로 ‘(이미) 조작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행은 조작된 것을 조작한다’는 말은 

‘행은 (이미) 조작되어 있는 색수상행식을 (재)조작한다’는 말이다.35)

34) ‘Abhisankharoti(abhi + sankharoti)’의 의미를 데이비즈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즉 이 말은 ‘준비하다(prepare)’, ‘하다(do)’, ‘수행하다(perform)’, ‘만들다/조작하다
    (work)’, ‘일으켜 세우다(get up)’를 의미한다(Rhys Davids, 앞의 사전, 70쪽).
35) 여기에서 ‘(이미) 조작되어 있는 색수상행식’에 대해서 ‘그것이 무엇에 의해서 조작된 
    것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면, 우리는 ‘행’에 의해서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오온 
    모두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은 ‘행’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 (이미) 조작되어 있는 것’ , 즉 ‘상카타(saṁkhata)’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초기경전에서 상카타의 반대말인 ‘아상카타(asaṃkhata)’는 닛바나를 정의하는 핵심어이다. 이

말은 지금까지 모호하게 이해되어 왔고 또 성품과 관련된 그 구체적 의미가 간과되어 왔지만,36)

그 의미는 자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붓다는 ‘아상카타’를 가리켜서 ‘무탐진치’라고 분명하게 정의

한다. ‘무탐진치 혹은 탐진치지멸이 닛바나’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탐진치 지멸(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이 아상카타이다.’37)라고도 하고 “탐진치 지멸이 닛바나이다.”38)

라고도 한다. 우리는 아상카타가 닛바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며 탐진치 지멸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품으로 말하자면, 상카타는 ‘탐진치의 성품상태’라고 말할 수 있고 아상카타는 

무탐진치의 성품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36) 주지하다시피 ‘상카타’와 ‘아상카타’는 한역에서 각각 ‘有爲’와 ‘無爲’로 번역되었다. 
    운허 스님은 ‘위(僞)’는 위작(爲作)·조작(造作)의 뜻이라고 하고 ‘유위’를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현상에는 반드시 생주
    이멸의 형태가 있다’고 한다(672쪽). ‘무위’에 대해서는 ‘모든 법의 진실체’라고 정
    의하고 ‘인연인 위작·조작을 여의고, 생·주·이·멸 4상(相)의 변천이 없는 진리’를 말
    한다고 설명한다(운허, 앞의 책, 226쪽). 팔리어 사전에서는 유위와 무위를 각각
    ‘원인으로부터 산출된 것’과 ‘원인으로부터 산출되지 않은 것’으로 풀이한다. 이 두 
    해석에서 유위와 무위, 혹은 상카타와 아상카타는 생멸법, 인과법, 혹은 윤회법의 
    적용유무에 따라 구별된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자아나 성품변화와 
    관련하여 어떠한 구체적 의미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37) SN, iv, 359쪽. Katamañca bhikkhave asaṅkhataṃ: yo bhikkhave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idaṃ vuccati bhikkhave asaṅkhataṃ.
38) SN, iv, 251쪽. Yo kho āvuso rāgakkhayo dosakkhayo mohakkhayo idaṃ vuccati 
    nibbānanti.

 

따라서 앞 인용문에서의 ‘상카타’의 의미는 ‘탐진치(성품)에 의한 조작’을 의미한다. 그리고 

‘행은 (이미) 조작된 것을 (재)조작한다’는 말은 ‘행은 탐진치에 의해 조작된 것을 (재)조작한다’

로 이해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카타가 탐진치에 의해 조작된 오온을 (재)조작할 때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색을 예로 들어보자. 색을 색성(色性/rūpattāya)으로 

(재)조작할 때, 우리는 탐진치에 의해 영향 받는 방식으로 (재)조작할 수도 있고 탐진치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재)조작할 수도 있다. 전자는 윤회의 중생이 택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열반의 

아라한이 택하는 방식이다. 후자의 경우 궁극적으로는 행에 의한 색의 재조작을 멈추고 행/오온

을 지멸시킴으로써 무여열반(anupādisesa)에 이를 것이지만, 유여열반(saupādisesa)의 생존 

상태에서는 색을 색성으로 재조작하는 일을 회피할 수 없다.39) 그러나 이때의 재조작은 

탐진치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39) ‘조작된 색을 색성(色性)으로 조작한다(Rūpaṃ rūpattāya saṃkhataṃ abhisaṃkharonti)’
    에서 ‘색성으로(rūpattāya)’는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rūpa에 추상명사를 만드는 어미‘ta’
    가 붙고(t의 중복은 연성법에 의한 것으로 모음 다음에서의 중복) 여기에 다시 단수여격
    어미 āya가 붙은 것이다. 직역을 하면, ‘색성을 위해서’이지만 의미를 살려서 하면 ‘색성
    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이해는 윤회와 열반과 관련된 행의 
    기능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되지만,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정확한 해석과 해명이 제시되지 않고 있다. rūpa가 구체적 개별 색을 의미한다면 rūpatta
    는 추상적/보편적 색의 속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중생은 개별 색을 볼 때 탐진치가 
    수반된 각각의 속성을 염두에 두고 재조작하며, 아라한은 개별 색을 볼 때 무탐진치의 
    눈으로 색의 실상―무상, 고, 무아의 보편속성―을 염두에 두고 재조작할 것이다. 요컨대 
    ‘색을 색성으로’ 재조작할 때 중생은 탐진치가 수반된 ‘색성’으로 재조작하며, 생존의/
    유여열반의 아라한은 색의 실상에 대한 인식이 수반된 색성으로 재조작한다. 후자의 경
    우 탐진치 지멸과 실상인식을 전제하는 행의 재조작으로서 사실상 행의 순화나 지멸을 
    의미한다. 행의 재조작에 있어서 중생과 아라한의 이러한 차이는 상카타와 아상카타로 
    나타난다.

 

중생이 행에 의해서 오온을 (재)조작하는 방식은 탐진치, 갈애, 혹은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방식

이며, 오온의 무상·고·무아의 실상을 모르는 방식이므로―12연기에서 ‘무명을 조건으로 하여 

행이 있다(avijjā paccayā saṅkhārā)’에서 알 수 있듯이 무명을 조건으로 한 방식이므로―, 

중생에게 행은 윤회 속에서 고통을 재생산하며 지속시키는 동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은 

윤회의 성품을 지속시키는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중생이 윤회의 성품을 벗어나려고 할 때는 

행은 물론 오온의 실상을 여실히 봄으로써 무탐진치의 행의 작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무탐진치의 행의 작용을 지향하면서 열반의 성품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상카타와 

아상카타로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즉 열반의 성품에서는 갈애·집착의 탐진치에 의해 

작용하는 상카타(saṅkhāta)로서의 행이 아니라 무갈애·무집착의 무탐진치로 작용하는 아상카타

(asaṅkhāta)로서의 행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행의 가라앉힘(saṅkhāra ūpasama)’ 

혹은 ‘행의 그침/지멸(saṅkhāra nirodha)’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컨대 행의 첫 번째 작용에서 행은 (탐진치에 의해) 조작된 오온을 (재)조작한다. 재조작 작용

으로서 행은 중생에게는 윤회를 지속시킨다. 중생은 오온의 속성인 무상·고·무아에 대해 

무지하고 탐진치, 갈애, 혹은 집착에 묶여 있어서, 그러한 방식으로 행을 작동시키며 윤회의 

성품을 지속시킨다. 반대로 행이 무탐진치의 방식으로 오온을 재조작할 때, 아라한의 열반의 

성품이 추구·유지된다. 전자는 탐진치의 상카타의 상태를 지향하지만 후자는 무탐진치의 

아상카타의 상태를 지향한다.

 

2) 의도로서의 행

성품의 중심개념으로서 행의 두 번째 작용은 ‘의도(cetanā)’로서의 작용이다.

 

한 경전에서는 오온을 설명하면서―사대로부터 발생하는 색, 그리고 여섯 대상(육경)을 대상으로 

하여 발생하는 수상행식 각각을 설명하면서―, 붓다는 행을 ‘의도’라고 명시한다. 색성향미촉법의 

섯 종류의 대상에 대한, 혹은 여섯 대상과 관련한 ‘의도’가 곧 여섯 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행인가? 비구들이여, 이러한 여섯 가지 의도의 무리(cetanākāyā)가 있다. 즉 색(色)에 

대한/관계된 의도, 성(聲)에 대한 의도, 향(香)에 대한 의도, 미(味)에 대한 의도, 촉(觸)에 대한 

의도, 법(法)에 대한 의도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을 행이라고 부른다. 촉의 일어남으로부터 

행의 일어남이 있다.” 

40) SN, iii, 62쪽.

 

이처럼 행은 ‘의도(cetanā)’라고 규정되고, 의도로서의 행이 여섯 경계인 색성향미촉법의 대상

세계에 대하여 발생한다고 말해진다. 여섯 경계에 대하여 여섯 의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섯 

경계는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현상세계를 의미하므로, 의도 또한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세계에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의도로서의 행은 몸의 행위, 말, 생각, 즉 신구의와 결부되어 말해진다. 신구의 

각각에 대하여 신구의 의도(sañcetanā)가 있다고 말해진다.41)

41) 신구의 각각에 대하여 몸의 의도(kāyasañcetanā), 말의 의도(vacīsañcetanā), 마음의 의도
    (manosañcetanā)가 말해지고, 이것들을 원인으로 하여 내적으로 쾌고가 일어난다고 한다.
    (SN, ii, 39-40쪽).

 

‘의도로서의 행이 여섯 경계인 현상세계와 관계해서 일어난다’라는 말이나 ‘신구의 행위에 의도가

있다’는 말은 인간의 모든 경험이나 행위에 의도가 작용함을 의미한다. 이 두 말은 관점을 달리해서

말한 것일 뿐 결국 동일한 말이다. 여섯 경계로서 현상의 경험은 신구의 행위를 전제하고 신구의

행위 또한 여섯 경계를 전제하므로, 경계의 경험과 신구의 행위는 서로를 전제한다. 요점은 인간의

어떤경험/행위에서든지 의도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활동이 지속되는 한 경계의 경험과

신구의 행위는 지속되고, 이 양자에 수반되는 의도 또한 그러하다. 강조컨대 중생의 생명이 지속되는

한, 의도로서의 행의 작용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의도의 이러한 속성을 이해의 편의상 ‘의도의 지속성’

이라고 해두자.

 

불교에서 말하는 의도의 속성은 지속성 이외에도 ‘지향성’을 들 수 있다. 사실 불교에서가 

아니더라도 통상적으로 ‘지향성’은 의도의 핵심의미이다. 흥미롭게도 의도를 의미하는 팔리어 

‘cetanā’라는 말은 ‘생각하다(cinteti/ceteti)’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서 생각의 지속성과 

지향성을 요체로 한다.42) ‘지속적으로 생각하면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것’을 의도라고 

할 수 있다.

42) ‘cetanā’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생각함 자체뿐만 아니라 지향성/목적까지 
    포함한다. 그것은 ‘행위에 있어서의 마음 상태’, ‘적극적인 생각’, ‘의도’, ‘목적’, 
    ‘의지’ 등을 의미한다(Davids, 앞의 사전, 271쪽). 이러한 의미를 모두 고려한다면 
    ‘의도’는 마음상태로서 생각의 지속성과 지향성을 요체로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의도의 지속성과 지향성이 성품의 전환과 형성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의도는 특정의 성품을 지향, 선택, 결정, 형성, 유지하는 작용을 할 수 

있다. 의지의 이러한 작용을 통해서 특정 신구의가 반복되고, 더 나아가 반복을 통해서 습관화

되고, 결국에는 성품으로 굳어질 수 있다. 사실계(sīla), 이치에 맞는 주의(집중)

(yonisomanasikāra), 념처수행법(sati), 삼매(samādhi), 선정(jhāna) 등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들 수행법들은 지속적이고 지향적인 의도를 전제한다. 예컨대 선(kusala)을 기르고 선을 

체화하려는 의도, 더 나아가서는 (그러한 기름과 체화를 통해) 열반에 이르려는 의도를 

전제한다.

 

이러한 ‘의도’는 나쁜 성품을 바꿀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좋은 성품을 지향하고 지속시킬 수도 

있게 한다. 우리가 신구의를 통해 선이라는 지향점을 지속적으로 의도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성품이 될 수 있다. 붓다는 반복하여 생각하면―의도하면―그것이 성향/성품이 된다고 본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많이 생각하고(bahulamanuvitakketi) 숙고하는(anuvicāreti) 것은 무엇이든지

그와 같이 마음의 성향(nati)이 된다. 비구들이여, 만일 비구가 감각적 쾌락(kāma)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면, 이욕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기울어진다(namati). 비구들이여, 비구가 만일 악의적인 생각

(byāpādavitakka)을 많이 하고 숙고한다면, 악의적이지 않는 생각을 버리게 되고 악의적인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 그의 마음은 악의적인 생각으로 기울어진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상해의 

생각(vihiṃsāvitakka)을 많이 하고 숙고한다면, 불상해의 생각을 버리고 상해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상해의 생각으로 기울어진다.”

43) MN, i, 115쪽.

 

감각적 쾌락에 대해 반복하여 많이 생각하면 마음에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고, 악의적 생각을 

반복하여 많이 하면 마음에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는 선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선에 대해서 항상 의도하고 실천하면, 성향 또한 선의 성향이 되게 할 수 있다. 

반복적인 생각, 혹은 지속적으로 지향하는 의도에 의해서 그러한 성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성향(cetasonati)은 우리가 의도적으로 길러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기르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선의 성향으로서 그 최종점은 탐진치 지멸의 열반의 

성품이다. 그런데 탐진치 지멸의 열반의 성품을 갖게 되었을 때, 선이나 열반과 관련된 의도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상태에 도달하기 때문이다.44)

44) 붓다는 예컨대 탐욕을 여읜 자는 ‘해탈지견을 성취하기를’하고 바라는 의도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한다. 탐욕을 여읜 자가 해탈지견을 실현하는 것은 바랄 필요도 없이 
    자연히 성취되기 때문이다(AN, v, 312쪽). 여기에서 붓다는 의도하지 않고도 저절로 
    실현되는 선의 성품상태 혹은 탐진치 지멸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의도는 선악과 관련하여 선(의 성품)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선 실천의 궁극에서는 

불필요하게 된다. 의도할 필요도 없이, 혹은 의도적 노력 없이, 선의 성품이 체화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선한 성품의 체화가 불교덕윤리에서 선실천의 정점이기도 하며, 이 상태는 

조작작용으로서의 행이 그 이상적 상태에서 무탐진치의 행으로 작용하는 지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행의 두 번째 작용은 ‘의도’이다. 행은 현상세계의 경험이나 신구의 행위에 대한 의도로서

작용한다. 이러한 의도로서의 행의 작용은 그 지속성과 지향성으로 인하여 특정 성품의 형성에 

중요하다. 그것은 열반의 성품을 지향·형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성품의 

완성점에서는 선을 지향하는 의도적 노력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3)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

세 번째 ‘행’의 작용은 ‘신구의 업/행위(kamma)’로서의 작용이다.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의 의미는 다음의 세 가지 점에 비추어 확인될 수 있다. 1) 업/행위의 

경우처럼, 행 또한 신구의 세 범주로 제시될 뿐만 아니라 선악개념을 수반하며 ‘행’과 ‘업/행위’

라는 말이 상환적으로 쓰인다. 2) ‘신구의 행’의 지칭범위나 의미가 ‘신구의 업/행위’와 다르지 

않다. 3) 붓다의 업/행위에 대한 정의인 ‘의도는 업이다’를 앞에서의 명제 ‘의도는 행이다’와 

함께 고려하면, ‘업/행위가 행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행이 신구의 업/행위임을 보여주는 첫째 내용은 다소 복합적이다. 붓다는 ‘행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신행, 구행, 의행이라 답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구의 행 개념에도 신구의 

업/행위에서처럼 선악개념이 수반된다고 한다. 또한 선악개념과 관련하여 ‘행’으로 묻는 질문에 

대하여 ‘업/행위’라는 말로 답변함으로써 행과 ‘업/행위’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12연기의 개념 하나하나를 정의·설명하고 있는 한 핵심경전(Vibhaṅgasuttaṃ)에서는 ‘행이 무엇

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고, 이에 대해 ‘신행(kāyasaṅkhāra), 구행(vacīsaṅkhāra), 의행

(cittasaṅkhāra)을 행이라고 한다.’ 즉 “비구들이여, 무엇이 행인가? 비구들이여, 세 가지 행이 

있다. 신행, 구행, 의행이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들을 행이라고 부른다.”45)라고 한다. 

45) SN, ii, 3쪽.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업/행위를 말함에 있어서도 몸을 통한 행위(kāyakamma), 언어를 통한 행위

(vacīkamma), 마음을 통한 행위(manokamma/cittakamma)의 세 가지 신구의 업/행위를 말한다.

런데 여기에서 제시되고 있는 신구의 행은 말할 나위 없이 신구의 업/행위의 대체용어라고 

이해된다.

 

이처럼 신구의 행이 신구의 업/행위의 대체용어라면, 신구의 행 또한 업/행위 개념의 핵심인

선악개념을 수반해야 할 것이다. 업/행위에 따른 인과가 있듯이, 행도 마찬가지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예상은 경전에서 확인된다. 악의에 찬 신구의 행은 악한 결과를 가져오고, 선의에 찬

신구의 행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말해진다. 한 경전(Saṅkhāra-sutta)에서는 악의의 신구의

행을 실천한 결과로서 악의에 찬 세상에 태어나, 악의에 찬 감각접촉을 만나 악의에 찬 괴로운 감각을 

느낀다고 말한다. 이와 반대로 악의 없는 신구의 행을 실천하여, 악의 없는 세상에 태어나, 악의 

없는 감각접촉을 만나 행복한 감각을 갖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신구의 행 또한 선악인과와 

결부된 신구의 업/행위의 의미로 쓰인다.

 

사실, 명시적으로 행과 업/행위는 동일어로 사용된다. 또 다른 경전(Sattamakammasuttam)에서는

네 가지 ‘업/행위’의 유형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신구의 ‘행’이라는 용어로 답변한다. 예컨대 나쁜/

은 결과를 수반하는 나쁜 ‘업/행위’는 악의(byāpajjha)의 신구의 ‘행’을 조작할 때 생겨난다고 

한다. 신구의를 통해 악의 ‘행’을 조작한다는 것은 신구의를 통해 악한 업/행위를 짓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결과로서 악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사례는 행 또한 업/행위의 개념처럼 인과를 수반하는 선악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행’과 ‘업/행위’가 동일한 의미로서 상환적으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행이 업/행위의 

우처럼 선악개념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은 붓다가 행을 선행의 행(puññābhisaṅkhāra), 

불선행의 행(apuññābhisaṅkhāra), 그리고 부동의 행(āneñjābhisaṅkhāra)의 세 가지로 

열거하는 데서도 인된다.

 

요컨대 업/행위처럼 행 또한 신구의 세 범주를 가지며 선악개념의 인과법칙을 수반한다. 선악개념

의 인과법칙을 설명하는 맥락에서는 ‘행’과 ‘업/행위’가 동일의미로서 상환적으로 사용된다.

 

행이 신구의 업/행위임을 보여주는 두 번째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숨, 생각, 지각(상)과 감각(수),

각각이 신구의 행인 이유를 설명하는 한 대화에서, 신구의 행의 지칭의미가 신구의 업/

행위의 지칭 의미와 다르지 않게 나타난다.

 

“도반, 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신체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것들은 신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이 신행(kāyasaṅkhāra)입니다. 거친 생각을 하고 그 후에 미세한 생각을 하며

그런 다음에 말을 합니다. 그래서 거친 생각과 미세한 생각은 구행(vacīsaṅkhāra)입니다. 지각(상)과

감각(수)은 마음에 속하며 그것들은 마음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각과 감각은 의행

(cittasaṅkhāra)입니다.” 

46) MN, i, 301쪽.

 

신체로부터 비롯되고 신체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숨이 신행이라는 것, 생각 이후에 말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 구행이라는 것, 그리고 지각·감각이 마음에 속하고 마음으로 비롯되기 때문에 

의행이라는 말은 숨, 생각, 지각과 감각이 신구의 행인 이유를 밝힌 것이다.

 

이 설명은 이 셋이 신구의 행의 ‘일례’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른 한편, 이 설명은 신체로부터 비롯

되거나 결부된 것이면 신행이 되고, 말로 귀결되는 것이면 구행이 되고, 마음으로부터 비롯되거나

마음과 결부된 것이면 의행이 된다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신구의 업/행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다. 즉 신구의 행과 신구의 업/행위의 지칭범위내지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행이 신구의 업/행위임을 보여주는 세 번째 내용은 붓다의 업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의도에 대한 

앞에서의 정의로부터 ‘행이 곧 업/행위다’라는 명제가 이끌어내어진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업에 대해서 ‘의도는 업이다’50)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앞에서살펴본 것처럼 

의도는 행의 한 의미이다. 우리는 의도, 업, 행위를 각각 a, b, c로 표현하여 앞에서의 명제들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즉 ①‘의도는 업/행위이다’(a=b). 또한 ②‘의도는 행이다’(a=c). 

이 두 명제로부터 우리는 ③‘업/행위와 행은 같다’(b=c)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50) 주지하다시피 붓다는 “비구들이여, 나는 의도를 업이라고 부른다(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ami)”라고 업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행위/업에 
    있어서의 의도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로서 행위의 선악판단에 있어서 의도의 도덕
    성을 중시하는 불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말로 이해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을 
    오직 의도만을 업이라고―그래서 의도 없는 행위에는 도덕적 책임이 수반되지 않는
    다고―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신구의 행위 모두에 의도가 전제되어 
    있다는 전제하에서 붓다는 ‘의도가 업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의 다
    음 문장을 보면 “의도하면서 몸으로 말로 마음으로 행위한다(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라고 하고 있다. 즉 모든 신구의 행위에는 의도가 
    전제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AN, iii, 415쪽).

 

이와 같이 세 가지 내용에 비추어보면, 신구의 행과 신구의 업/행위는 동일한 의미이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업/행위는 ‘소멸’의 대상이므로 신구의 업/행위로서 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는 

오온 조작작용으로서의 행의 작용과 의도로서의 행의 작용에서 ‘지멸’의 지점이 제시되었던 

것과 같다.

 

IV. 맺음말

 

이 연구에서 필자는 불교윤리를 설명하는 주요 패러다임을 덕윤리(virtue ethics)라고 이해하고, 

덕윤리의 핵심개념인 성품에 상응하는 개념을 불교윤리에서 찾아 그 의미를 구명코자 하였다. 

불교 덕윤리에서 성품에 상응하는 개념을 오온, 특히 오온 중에서도 행(saṅkhāra/行)이라고 

보고 그 작용을 세 가지로 이해하였다.

 

성품으로서의 행의 작용을 살펴보기에 앞서서 행의 일반적 의미를 검토하였다. 행의 일반적 의미는

‘조작작용과 그 결과로서 현상전체’라고 이해되었다. 이 두 의미는 서로 연관된 하나의 의미로서 

로가 서로를 전제하지만, 그 중심의미를 조작작용이라고 보았다. 특히 오온의 맥락에서의 행은

현상/산출물을 전제한 ‘조작작용’을 의미한다. 행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오온의 작용방식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오온을 ‘조작’한다. 행은 이러한 ‘조작작용’이라는 독특성을 

가지면서도 오온의 보편속성을 공유한다. 행 또한 다른 오온과 마찬가지로 조건적으로 발생하며 

다른 오온과 함께 작용하고, 다른 오온처럼 무상(anicca)·고(dukkha)·무아(anatta)를 속성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속성에 무지한 중생은 오온을 집착의 오온, 즉 오취온(upadāna 

pañcakhandha)으로 대한다. 중생에게는 행 또한 ‘집착되고 있는 행’이다.

 

행이 다른 오온을 제치고 성품의 개념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최종적·결정적으로 다른 

오온의 작용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행의 더미일 뿐’이라거나 열반은 ‘행의 가라앉힘’ 

혹은 ‘행의 그침/지멸’이라는 말은 행의 이러한 대표성을 반영한다.

 

성품의 중심기제로서의 행의 작용은 세 가지로 이해되었는데, 오온조작으로서의 행, 의도로서의 행,

리고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의 작용이다.

 

오온조작으로서의 행의 작용은 이미 조작된 오온을 재조작함으로써 오온의 작용방식과 형태를 

결정짓는다. ‘이미 조작된 오온’은 탐진치에 의해 조작되어 있는 오온인데, 이를 (재)조작하는 

것이 행이다. (재)조작은 여전히 탐진치에 의한 (재)조작일 수도 있고 무탐진치의 (재)조작일 

수도 있다. (재)조작에 있어서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중생과 아라한으로 나뉜다. 지향방향은 

윤회의 중생상태에서 열반의 아라한상태, 즉 탐진치의 조작상태에서 무탐진치의 (재)조작상태

(asaṅkhāta)이다.

 

의도(cetanā)로서의 행의 작용은 행이 육경으로 지칭되는 경험/현상세계에서, 혹은 신구의 행위

영역에서 관찰된다. 인간의 경험이나 행위에는 항상 의도로서의 행의 작용이 전제되며, 의도의 

특성인 지속성과 지향성은 특정 성품의 형성에 있어서 특히 중요하다. 의도는 선을 체화하고

이상적인 성품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하다. 의도에 의해서 선의 성품이 

길러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 체화의 완성점에서는 인위적 의도나 노력 없이도 선이 실천되기

때문에, 선과 관련된 의도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의 작용은 다음의 세 가지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확인되었다. 첫째 신구의

업/행위로서의 행은 행의 범주와 인과적 선악개념 수반에 있어서 업/행위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악의 맥락에서 ‘행’과 ‘업/행위’가 동일의미로 사용된다. 둘째 ‘신구의 행’의 지칭범위나 의미가

‘신구의 업/행위’와 다르지 않다. 셋째 ‘의도가 업/행위다’라는 업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의도가 

행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업/행위가 행이다’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데 성품의 관점에서 살펴본 이상과 같은 행의 세 가지 작용은 하나의 통일적 심리작용이다. 

행의 한 가지 작용이 오온조작 작용으로도 설명되고, 경험이나 신구의 행위에서의 의도로서도 

설명되고, 신구의 행위/업으로서도 설명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세 가지 행의 작용은 공통적

으로 지멸되어야 할 속성을 자기 속에 내포하고 있다. 즉 무탐진치 상태를 지향하는 오온의 

재조작 작용으로서의 행은 탐진치의 행의 지멸을 목표로 하며, 육경이나 신구의에 대한 

의도서의 행작용은 선실천과 관련하여 그 궁극의 점에서는 불필요하게 되며, 신구의 업/행위

로서의 행작용 또한 그침/지멸을 그 궁극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 지멸의 최종점에서 

열반의 완성된 성품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탐진치의 행 지멸의 최종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탐구되어야 할 남겨진 과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통해서 완성된 성품의 

구체적 의미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