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논문및 평론/논문·평론

불교덕윤리에서 부정적 성향의 제거

실론섬 2015. 12. 23. 20:57

불교덕윤리에서 부정적 성향의 제거 ―탐진치의 지멸

(이 논문은 2008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KRF-2008-327-A00280)

안옥선/순천대학교

 

1. 머리말

2. 탐진치의 의미와 유사개념

3. 행위와 선악의 근본으로서 탐진치와 무탐진치

4. 탐진치 지멸의 방법

   1) 탐진치의 제압과 무탐진치 생각의 반복

   2) 부정관, 자애, 지혜의 닦음

   3) 육근수호(=육입처멸)

   4) 세 감각의 속성을 바르게 봄

 

5. 요약

 

[요약문]

논문은 불교덕윤리에서 선 실천의 요체인 ‘탐(rāga/lobha)진(dosa/paṭigha)치(moha) 지멸’에 대한 해명이다. 부정적 성향인 탐진치와 그 유사개념들, 행위와 선악 구분에 있어서 탐진치의 역할, 그리고 탐진치 지멸의 방법에 대해 살펴본다.

 

탐심은 감각적 욕망/쾌락을 추구하는 만족을 모르는 마음이며, 진심은 쾌락에 대한 좌절로부터 발생하는 싫어함/혐오 혹은 성냄/분노의 마음이다. 치심은 불교적 진리/실상에 대한 무지의 마음이다. 탐진치는 하나의 마음작용이지만, 가장 근원적인 것은 치심이다. 탐진치의 유사개념들은 갈애(taṇhā), 번뇌(āsava), 집착(upādāna), 속박(yoga), 장애(nīvaraṇa), 결박(saṁyojana), 잠재성향(anusaya) 등이다.

 

탐진치는 모든 행위를 가르는 기준이면서 선악을 가르는 기준이다. 모든 행위는 탐진치의 행위와 무탐진치의 행위로 나뉘며, 선악은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모든 행위의 지향방향은 탐진치 지멸이다. 불교덕윤리의 요체도 수행과 열반의 성취도 탐진치 지멸의 성향을 기르는 데 있다.

이 글에서 검토된 탐진치 지멸법은 팔정도와 사념처를 제외한 네 가지 방법이다. 1) 탐진치의 제압과 무탐진치 생각의 반복: 탐진치의 생각은 의도적으로 제압하고 무탐진치의 생각은 반복함으로써 마음의 경향이 되게 한다. 2) 부정관, 자애, 지혜의 닦음: 대상을 부정하다고 봄으로써, 대상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대상을 무상하다고 봄으로써 탐진치를 지멸시킨다. 3) 육근수호(=육입처멸): 육감각작용에 대한 감시·제어·통제를 통해 탐진치가 유입되지 않도록 한다. 육입처멸의 의미와 같다. 4) 세 감각의 속성을 바르게 봄: 쾌감각, 고감각,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의 속성을 바로 봄으로써 세 감각 배후에 수반되는 탐진치를 지멸한다.

 

이 연구는 불교덕윤리 뿐만 아니라 모든 불교의 중심에 있는 ‘탐진치 지멸’ 개념에 대한 체계적 검토라는 데 의미가 있지만, 이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비판적 연구는 앞으로 과제로 남겨져 있다.

 

1. 머리말

 

불교도덕이 덕윤리로서 이해될 수 있음은 선행연구들에서 밝혀진 바와 같다.1) 주지하다시피 덕윤리의 핵심특징은 일회적으로 도덕적인데 그치지 않고 항상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도록 성향/성품까지 도덕적이게 하는 데 있다. 도덕실천의 층위를 ‘앎-실천-성품’의 세 단계, 즉 선악을 판단하여 인지하는 단계, 인지된 선을 실천하는 단계, 항상 선(만)을 실천할 수 있는 성품의 단계로 이해한다면, 덕윤리는 성품의 단계까지 문제 삼는 윤리이다.

1) 대표적으로 Damien Keown(The Nature of Buddhist Ethics , New York: St. Martin’s 
   Press,1992), James Whitehill(“Buddhism and the Virtues,” Keown, Damien Ed., 
   Contemporary Buddhist Ethics , Richmond: Curzon Press, 2000, pp. 19-31), 
   Ken Jones(The New Social Face of Buddhism: A Call to Action, London: Wisdom 
   Publications, 2003, p. 128), 안옥선 「( 불교윤리와 현대윤리학의 만남」,『 불교학
   연구』12, 2005)을 참조. 또한 관련 선행연구로서 안옥선의「 행(saṅkhāra) 그침에 
   대한 한 이해」『( 대동철학』49, 2009)와「 불교덕윤리에서 성품의 중심개념으로서
   의 행(saṅkhāra)」『( 불교학연구』 23, 2009)을 참조.

 

첫 단계의 사람들은 선을 알기는 하지만 실천에 이르지 못할 수 있다. 선을 인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둘째 단계의 사람들은 인지한 선을 실천하지만, 그 실천은 일회적인데 그칠 수 있다. 첫째 단계에서는 나아간 것이지만 세 번째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셋째 단계에서 선은 반복적·항상적·습관적으로 실천된다. 덕 있는 ‘성품’이 실현된 단계로서, ‘의도적인 노력 없이도’ 도덕적인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단계이다.

 

셋째 단계는 덕윤리가 지향하는 단계로서 ‘항상적으로’ 그리고 ‘자연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성향(dispositions)이나 성품(character) 형성을 목적으로 한다. 특정 행위를 반복하여 습관화/체화시킴으로써 그러한 행위방식이 성품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덕윤리는 점진적이고 장기적이며 후천적인 노력을 전제한다. 덕윤리는 내면의 욕구까지 도덕적일 것을 지향하며 인위적/의도적 노력 없이도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성품상태’를 지향한다. 이러한 상태는 완성된 성품의 상태로서, 불교용어로 말하면 열반의 상태이다. 즉 내면의 모든 (부도덕적인) ‘부정적 성향’이 제거된 성품의 상태로서, 탐진치―탐심(rāga/lobha), 진심(싫어함/성냄)(dosa/paṭigha), 치심(어리석음)(moha)―가 지멸된 열반상태이다. 이러한 상태는 ‘도덕의 완성점과 열반지점이 일치’하는 상태이다.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성품상태를 지향하는 덕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탐진치 지멸의 성품/열반 상태’는2) 도덕의 완성상태이다.3) 도덕적으로 완전히 다 이루어, 더 이상 이룰 것이 남아 있지 않는 완성상태이다. 그런데 종종 오해되고 있듯이, ‘탐진치 지멸의 성품’이라는 완성상태는 도덕(이라는 표준)을 뛰어넘는 초월 지점이 아니다. 도덕을 뛰어넘어 도덕을 버리거나 무시하는 상태가 아니라, 도덕을 욕망의 수준까지 철저히 내재화/체화시킨 상태이다. 도덕적 성품의 완성자로서 아라한(arahat)은 이러한 상태의 사람이다. 따라서 그/그녀는 선악을 초월한 존재가 아니며 선을 구유한 존재이다. 지적되고 있듯이 ‘여래란 모든 불선/악을 버리고 선법을 구유한 이’(sabbākualadhammapahīno … tathāgato kusaladhammasamannāgato)이며,4) ‘아라한은 팔정도를 완성한 이’5)이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아라한은 선행(puññā)과 악행(pāpa)을 버렸지만 선(kusala)은 구유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아라한은 의식적인 시도 없이도 도덕적 행위를 수행하는데 도덕적 행위가 성품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6) 요컨대 마힌다(Mahinda)가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라한은 도덕을 초월했다기보다는 자연히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사람’이다.7) 아라한은 탐진치가 성품의 차원에서 지멸되었기 때문에, 성품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행위 또한 탐진치 지멸의 도덕적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탐진치 지멸의 성품을 긍정적 용어로 서술하면 ‘자비의 성품’이다. 초기불교에서 자비는 
   직접적으로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에서 두 번째 항목이지만, 사실 네 가지 전체를 체화
   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비는 생명체에 대한 연민의 마음(자애), 발고여락과 동고동락의 
   마음(자비), 기쁨을 공유하는 마음(공감적 기쁨)(희), (생명체에 대한) 평등한 마음(평정
   심)(사)의 종합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비는 보다 적극적으로는 보시, 애어, 이행, 
   동사의 사섭법으로 나타나고, 오계, 팔정도, 십선업에서도 전제되고 지향된다. 그런데 
   자비의 성품은 단순한 자비가 아니라 앞에서 열거한 모든 덕목군들의 체화를 의미한다.
3) 마힌다는 “불교의 열반 자체가 도덕적 완성이다.”라고 한다(Mahinda, Deegalle, “The 
   Moral Significance of Buddhist Nirvāṅa,” Pāli Buddhism (Hoffmann, Frank Ed. New 
   York:Curzon Publishing Company, 1996),p.116).
4) Mahinda, 앞의 논문, p. 115
5) M, ii, pp. 28-29
6) Mahinda, 앞의 논문, p. 114
7) Mahinda, 앞의 논문, p. 114

 

그런데 초기불교 관점에서 보면 성품의 완성상태, 혹은 도덕과 열반의 일치점에 이르는 과정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수행과정으로서 자기변형의 과정이다. 도덕의 완성과정도 열반의 성취과정도 덕윤리에서와 마찬가지로 반복적 수행에 의해서 성품을 변형시켜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모든 부정적 성품을 점진적으로 지멸시켜 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보면 도덕적 완성이나 열반은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 탐진치로 포괄되는 모든 부정적 성향을 지멸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해탈의 성품을 획득해 가는 것이다. 초기불교에서 왕도로서 제시되는 팔정도나 사념처 같은 수행론도 이를 위한것일 뿐이다. 수행론조차도 부정적인 성향을 지멸시킴으로써 탐진치 지멸의 성품을 성취하는 방법일 뿐인 것이다. 붓다는 “나는 탐진치의 절멸을 말한다(ucchedaṃ vadāmi rāgassa dosassa mohassa)”라고 하는데, 이는 탐진치 지멸이 모든 가르침 혹은 모든 수행의 목적임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8)

8) V, i, p. 235

 

이처럼 탐진치 지멸은 도덕과 열반(혹은 수행이나 불교의 목적등)의 요체이다. 따라서 탐진치 (그리고 그 반대개념인 무탐진치)에 대한 이해는 불교이해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불교덕윤리의 완성점이자 열반지점인 탐진치 지멸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한다.

 

논의에 앞서서 이미 함축된 한 가지를 명백히 해두면 이렇다. 즉 불교덕윤리의 완성점이자 열반지점인 탐진치 지멸에 대한 탐구는 자기 변혁/전환의 과정에서 요구되는 모든 부정적 성향의 지멸에 대한 탐구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탐진치지멸, 즉 부정적 성향의 지멸에 대한 탐구를 위해 우선 1) 탐진치의 의미, 그리고 탐진치를 대체하는 유사개념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탐진치의 다른 표현들이기도 한 갈애(taṇhā), 번뇌(āsava), 집착(upādāna), 속박(yoga), 장애(nīvaraṇa), 결박(saṁyojana/saññojana), 잠재성향(anusaya) 등의 부정적 성향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2) 모든 행위의 원인으로서 그리고 선악의 판별기준으로서 규정되고 있는 무탐진치와 탐진치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3) 부정적인 성품의 내용들인 탐진치 지멸의 방법들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2. 탐진치의 의미와 유사개념

초기경전에서 탐진치가 차지하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탐진치의 의미는 직접적·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는 않다. 냐나포니카(Ñyanaponika) 스님은 탐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탐심(rāga): 탐심(greed)은 결여, 욕구, 원함의 상태. 탐심은 항상 충족수 없다(inherently insatiabl).9)

9) 데이비즈에 의하면 탐심을 의미하는 또 다른 용어 ‘lobha’는 동사원형 ‘bubbhati(탐욕
   스럽다, 갈망하다, 욕망하다)’에서 파생되었고, 탐욕, 갈망, 욕망 등으로 번역된다. 그
   녀는 이 말을 ‘불만족하여 더 욕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감각적 쾌락/욕망(kāma), 
   갈애의 표현(kāma taṅhā, bhava taṅhā)이라고 한다(Davids, Rhys, Pali English 
   Dictionary (London: PTS, 1966), p. 585). 그녀의 이러한 해설에 의하면, 탐심은 
   감각적 쾌락과 갈애의 다른 표현이다.

 

진심(dosa): 싫어함, 혐오, 성냄. 탐심에 대한 반작용. 감각적 쾌락/욕망이나 갈애에 대한 반작용. 갈애의 표현(abhava taṅhā).

 

치심(moha): 무명, 무상-고-무아에 대한 무지, 사성제에 대한 무지. 연기/공/무아에 대한 무지.10)

10) Nyanaponika Thera, The Vision of Dhamma: Buddhist Writings of Nyanapnika 
    Thera (Kandy: BPS, 1994), p. 121

 

위 정의에도 나타난 것처럼 탐심은 만족되지 않는 (감각적) 욕망, 쾌락, 혹은 갈애를 추구하는 마음이며, 진심은 욕망, 쾌락, 혹은 갈애에 대한 좌절로부터 발생하는 싫어함/혐오와 성냄/분노의 마음이다. 탐심은 쾌락/쾌감을 주는 것에 대한 좇음이며, 진심은 그 반대의 것에 대한 거부이다. 탐심이 좋아하여 끌려 즐기려는 마음이라면, 진심은 싫어하고 혐오하여 물리치고 성내는 마음이다. 탐심은 집착으로 나타나며, 진심은 회피, 혐오, 적의 등으로 표현된다. 탐심과 진심은 외적으로는 서로 다른 양태로 표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쾌에 대해서 환락·집착하며 고통을 거부·혐오하는 한 가지 마음작용이다. 보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탐심과 진심은 쾌추구(고거부) 본능의 표현이다. 냐나포니카 스님은 진심을 ‘탐심 혹은 쾌락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진심이 쾌추구 본능의 또 다른 표현임을 지적한 것이다. 갈애로 말하자면 탐심과 진심은 갈애의 표현이다. 감각적 욕망/쾌락에 대한 갈애와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가 탐심의 표현이며, 고에 대한 역겨움 때문에 생명을 회피하는 갈애, 즉 비존재에 대한 갈애가 진심의 표현이다. 이와 달리 치심은 존재실상에 대한 무지의 마음으로서 존재를 무상-고-무아, 사성제, 혹은 연기/공/무아로서 보지 못하는 것이다. 치심은 항상 탐심과 진심을 수반한다. 탐심과 진심에는 항상 치심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탐진치는 서로 분리된 세 가지가 아니다. 탐진치는 하나의 작용이다. 쾌락추구의 탐심과 쾌락추구 과정에서의 좌절/분노/적의의 진심은 치심을 전제하는 마음의 한 작용이다. 치심으로 인하여 쾌에 대해 환락·집착하고 그 반대의 것에 대해서는 혐오·분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탐진치는 서로 수반하여 일어나는 하나의 작용이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근원적인 것은 치심이다. 치심이 사라지면 탐심과 진심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탐진치 중에서 치심이 가장 근원적인 것임은 붓다의 여러 입장에서 확인된다. 대표적 예를 들면, 올바른 마음 씀, 이치에 맞는 현명한 생각/숙고, 올바른 주의 등을 의미하는 ‘yoniso manasikara(如理作意)’는 지혜(paññā)에 이르는 필수요소이면서 지혜자체이기도 한데, 붓다는 탐진치가 이 반대인 ‘ayoniso manasikara(올바르지 않는 주의)’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본다.11) 그는 탐진치가 일어나는 조건/원인을 설명하면서, 탐진치가 모두 공통적으로 ‘올바르지 않는 주의’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한다. 외도들이 세 가지(탐진치)에 대해 물어오면 다음과 같이 답변해야 한다고 붓다는 말한다.

11) yoniso manasikara는 말 그대로 ‘근원적yoniso 마음manas 지음/씀kara’, 즉 이치에 
    맞는, 올바른, 현명한 마음씀/주의/생각을 의미하고, ayoniso manasika는 그 반대를 
    의미한다. yoniso manasikara는 지혜(paññā)에 이르는 데 필수적이며 지혜의 구성
    요소로서 sati(사티), vipassanā(비파사나), sammasati(정념), appamādo(불방일)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yoniso manasikara는 ‘如理作意’로 한역되었고, 영어권
    에서는 올바른 주의(집중)(proper attention), 올바른 사고(proper thinking), 현명한 
    숙고(wise reflection), 기술적 사유(skilful reflection) 등 다양하게 번역되고 있다.

 

“벗들이여, 어떤 이유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탐심(rāga)이 일어나고 일어난 탐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하는가? 그것은 보기에 좋은 형상(subhanimittanta) 때문이다. 보기에 좋은 형상에 대해 올바르지 않게 주의/생각할 때(ayoniso manasikaroto) 일어나지 않는 탐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탐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벗들이여, 이와 같은 이유로 이와 같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탐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탐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벗들이여, 어떤 이유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진심(dosa)이 일어나고 일어난 진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하는가? 그것은 혐오의 형상(paṭighanimitta) 때문이다. 혐오의 형상에 대해 올바르지 않게 주의/생각할 때 일어나지 않는 진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진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벗들이여, 이와 같은 이유로 이와 같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진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진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벗들이여, 어떤 이유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치심(moha)이 일어나고 일어난 치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하는가? 그것은 올바르지 않는 주의/생각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는 주의집중으로 인해 일어나지 않는 치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치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벗들이여, 이와 같은 이유로 이와 같은 조건으로 일어나지 않는 치심이 일어나고 일어난 치심이 더 많아지고 증장한다.” 

12) A, i, p. 200

 

나타난 것처럼 탐심은 보기에 좋은 형상에 대해 올바르지 않게, 혹은 이치에 맞지 않게 주의/생각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진심은 혐오의 형상에 대해 올바르지 않게 주의/생각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치심은 올바르지 않게 주의/생각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치심은 물론 탐심과 진심도 이치에 맞지 않고, 부적절하며, 현명하지 못한 주의/생각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탐심과 진심도 근본적으로는 치심에 근거한 것이다.

 

치심이 근원적인 것이라면 탐진치 지멸에 있어서도 치심의 지멸이 관건일 것이다. ‘수행은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데 초점이 있지만 가장 근원적으로는 치심을 지멸시키는 데 있다’고 지적되기도 하는데, 이는 올바른 지적이다. 사견이나 치심이 지멸되면 탐심과 진심도 저절로 지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불교에서 고통의 근원/시발을 무명으로 보는 것과 합치한다(십이연기에서도 윤회/고통 전개의 첫 고리가 무명임을 상기하자). 또한 “가장 더러운 것(최악의 오염)이 무명이다”(avijjā paramaṁ malam)13)라는 붓다의 선언과도 합치한다. 더러운 것으로 상징되는 불선의 근원이 무명인 것이다. 붓다는 모든 불선의 근원이 무명에 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3) D hammapada , 243게

 

“비구들이여, 어떠한 불선/악이든지 모두 무명에 뿌리를 두고 있고 무명에 의지한다. 무명이 제거될 때 모든 불선이 제거된다.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즉 ‘우리들은 방일하지 않을것이다’(appamattā viharissāmā)라고.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이와 같이 배워야 한다.”

14) S, ii, p. 263

 

이처럼 붓다는 불선/악의 근원이 무명이므로 무명의 제거를 통해 불선을 제거해야 한다고 본다(그리고 여기에서 그 방법으로 올바른 주의, 관명상, 사념처 등의 수행에 요구되는 불방일을 말한다). 치심과 다를 바 없는 무명을 불선의 근원으로 지목한 것은 (보다 포괄적으로 말하여) ‘불선의 근원은 탐진치’라고 할 때, 탐진치 중에서도 치심을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지적한 것과 같다. 달리 말하면 붓다는 불선의 근원을 탐진치 혹은 치심/무명이라고는 하지만, 불선의 근원을 탐심이나 치심 하나만을 들어 말하지는 않는다.

 

요컨대 탐심과 진심은 쾌추구(고거부) 마음이 환락·집착하고 혐오하는 작용으로서 그 대상의 속성에 대한 무지/치심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 탐진치는 하나의 마음작용이지만 무명/치심을 근원으로 한다. 탐진치 발생에서 근원적인 것은 치심이므로 탐진치 지멸에 있어서도 치심이 보다 근원적인 것이다. 즉, 치심의 사라짐으로부터 탐심과 진심도 사라지게 할 수 있다.15)

15) 붓다는 일어나지 않는 탐심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탐심이 사라지게 하는 조건을 
    혐오의 형상에 대한 올바른 주의라고 한다. 일어나지 않는 진심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난 진심을 사라지게 하는 조건을 자애의 심해탈이라고 한다. 일어나지 
    않는 치심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일어난 치심을 사라지게 하는 조건을 올바른 
    주의라고 한다. (A,i, pp.200-201)

 

그런데 탐진치는 모든 부정적 성향의 총칭이자 근원이지만, 부정적 성향은 다양한 다른 이름으로도 지칭된다. 초기불교에 나타난 그 대표적인 명칭들은 갈애(taṇhā), 번뇌(āsava), 집착(upādāna), 속박(yoga), 장애(nīvaraṇa), 결박(saṁyojana), 잠재성향(anusaya)이다. 

그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갈애(taṇhā):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존재하고자 하는 갈애(bhavataṇhā,) 존재하지 않고자 하는 갈애(vibhavataṇhā): 갈애는 존재를 계속하게 하고, 즐김과 탐심을 수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16) 갈애는 모든 현상/육경에 대하여 발생하는 ‘쾌락(감각적 욕망)에 대한 즐김·추구의 욕망’으로서 그 반대의 것을 거부/회피하는 욕망이다. 갈애는 탐심과 진심으로 포괄된다.

 

2) 집착(upādāna): 감각적 욕망에 대한 집착(kāmūpādāna),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ūpādāna), 계에 대한 집착(sīlabbatūpādāna),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ūpādāna): 첫째 것은 탐심에 나머지 셋은 치심에 포괄된다.17)

 

3) 번뇌(āsava): 감각적 욕망의 번뇌(kāmāsava), 존재의 번뇌(bhavāsava), 무명의 번뇌(avijjāsava)18): 네 가지로 말해지는 경우에는 (잘못된) 견해의 번뇌(diṭṭhāsava)가 추가됨. 탐심과 치심에 포괄된다.


4) 속박(yoga): 감각적 욕망의 속박(kāma yoga), 존재의 속박(bhava yoga), 견해의 속박(diṭṭhi yoga), 무명의 속박(avijjā yoga)19): 탐진치에 해당된다.

 

5) 다섯 장애(pañcimāni nīvaraṇāni/五蓋): 감각적 쾌락(kāmacchanda), 악의 ( vyāpāda) , 태 만 과 졸 음 ( thīnamiddha) , 들뜸 과 불안(uddhaccakukkucca), 의심(vicikicchā)20): 탐진치로 포괄된다(뒤 세 가지는 모두 치심의 작용).

 

6) 5가지 낮은 결박(pañcimāni orambhāgiyāni saññojanāni): 유신견(sakkāyadiṭṭhi), 의심(vicikicchā), 계율이나 의례에 대한 집착(sīlabbataparāmāso),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acchando), 악의(byāpādo)21): 탐진치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7) 5가지 높은 결박(pañcimāni uddhambhāgiyāni saññojanāni): 색계에 대한 탐심(rūparāgo), 무색계에 대한 탐심(arūparāgo), 아만(māno), 들뜸(uddhacca), 무지(avijjā)22): 색계와 무색계의 탐심과 관련되지만 탐진치로 포괄될 수 있다.


8) 7가지 (부정적) 잠재성향(anusaya): 감각적 쾌락의 잠재성향(kāmārāgānusayo), 혐오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o), 견해의 잠재성향(diṭṭhānusayo), 의심의 잠재성향(vicikicchānusayo), 아만의 잠재성향(mānānusayo), 존재의 잠재성향(bhavarāgānusayo),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o)23): 탐진치로 포괄된다.

16) S, v, p. 42117) M, i, p. 51
18) M, i, p. 5519) A, ii, p. 1020) A, iv, pp. 457-45821) A, iv, p. 459
22) A, iv, p. 46023) A, iv, p. 9

 

이상의 부정적 성향들을 탐진치와의 관계성 속에서 전체적으로 살펴보자. 정확히 상응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각 항목에서 밑줄, 이탤릭, 고딕 글씨는 각각 탐심, 진심 , 치심과 연관된다.

 

1. 갈애: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2. 집착: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계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

3. 번뇌: 감각적 쾌락에 대한 번뇌, 존재에 대한 번뇌, 무명에 대한 번뇌, 견해에 대한 번뇌

4. 속박: 감각적 쾌락의 속박, 존재의 속박, 견해의 속박, 무명의 속박5. 장애: 감각적 쾌락의 장애, 악의의 장애 , 태만과 졸음의 장애, 들뜸과 불안의 장애, 의심의 장애

6. 결박: 유신견, 의심, 계금취, 감각적 쾌락, 성냄 , 색계에 대한 탐심, 무색계에 대한 탐심, 아만, 들뜸, 무지

7. 잠재성향: 감각적 쾌락의 잠재성향, 싫어함의 잠재성향 , 견해의 잠재성향, 의심의 잠재성향, 아만의 잠재성향, 존재의 잠재성향, 무명의 잠재성향

 

각 항목에서 감각적 쾌락과 관련된 부정적 성향과 탐심으로 표현된 것(밑줄)은 탐심이다. 1의 비존재에 대한 갈애, 5의 악의의 장애, 6의 성냄, 7의 혐오의 잠재성향(이탤릭 )은 진심이다. 나머지 부정적 성향(고딕)은 직접·간접으로 치심과 관련된 것들이다. 탐심은 모든 항목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치심은 견해, 계에 대한 집착, 자아이론, 무명, 태만과 졸음, 유신견, 의심, 아만 등과 관련하여 다양하게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각 항목에서 중복적으로 나타나 있다.24) 치심은 1에도 전제되어 있어 모든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 논의에서 지적되었듯이 탐심과 진심은 그 속성상 치심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부정적 성향들이 탐진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 탐진치로 포괄·총칭될 수 있다.  

24) 5의 태만과 졸음, 들뜸과 불안, 그리고 6의 들뜸을 치심으로 분류한 것은 논란의 여지
      는 있지만, 치심과 가장 관련이 깊다고 보여진다.

 

위 부정적 성향들을 전체적으로 볼 때 주목되는 특징은 ‘직접적으로’ 탐심에 해당하는 ‘감각적 쾌락’이 모든 항목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25) 감각적 쾌락의 지멸은 불선법을 여의는 데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열반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열반에 필수적인 제1선정에서도 “감각적 쾌락/욕망을 여의고 불선법을 여읜다”(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라고 하고, 열반에 이르는 이욕(nekkhama)은 “감각적 욕망을 버리는 것”(kāmānaṃ nissaraṇaṃ yad idaṃ nekkhammaṁ)이라고도26) 설명된다. 탐심의 지멸에 있어서도 이러한 감각적 욕망의 지멸이 관건이며 요체라는 것이다. 위 항목들에서 주목되는 또 다른 점은 비존재에 대한 갈애, 악의, 성냄, 싫어함과 등과 같이 진심은 비교적 단순하게 제시되어 있으나 치심은 견해, 계, 자아이론, 무명, 태만과 졸음, 의심, 아만 등의 개념으로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25) 여기에서 ‘직접적’이라고 한 것은 감각적 쾌락이 잠재적·간접적으로 진심과 치심과
      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3. 행위와 선악의 근본으로서 탐진치와 무탐진치
붓다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탐진치로부터 근원하거나 무탐진치로부터 근원한다. 인간의 신구의(身口意) 행위는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오직) 두 가지로 식별된다. 붓다는 다음과 같이 모든 행위는 탐진치로부터 비롯되거나 무탐진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행위 일어남의 원인(nidānāni kammānaṃ samudayāya)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탐심(lobh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진심(dos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치심(moh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비구들이여, 무탐심(alobha)은 탐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Na 

bhikkhave lobhā alobho samudeti). 

비구들이여, 탐심은 탐심으로부터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무진심(adosa)은 진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진심은 진심으로부터 일어난다. 

구들이여, 무치심은 치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치심은 치심으로부터 일어난다. (중략) 비구들이여, 세 가지가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무탐심(alobh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무진심(ados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무치심(amoha)이 행위 일어남의 원인이다. 

비구들이여, 탐심은 무탐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무탐심은 무탐심으로부터 일어난다. 

비구들이여, 진심은 무진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무진심은 무진심으로부터 일어난다. 

비구들이며, 치심은 무치심으로부터 일어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무치심은 무치심으로부터 일어난다.” 

26) A, iii, pp. 338-339

 

이처럼 모든 행위는 탐진치를 원인으로 하거나 무탐진치를 원인으로 한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탐진치 각각은 무탐진치 각각으로부터 일어나지 않고 탐진치 각각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함으로써, 탐진치와 무탐진치를 대비시킨다. ‘모든 행위는 탐진치와 무탐진치, 두 가지 중 하나를 원인으로 한

다’는 입장은 선과 악의 규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탐진치를 원인으로 하는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악이다. 무탐진치를 원인으로 하는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선이다. 붓다는 탐진치를 뿌리로 하여 이로부터 비롯되는 신구의 행위는 악/불선이고, 무탐진치를 뿌리로 하여 이로부터 비롯된 신구의 행위는 선이라고 한다.


“세 가지 악의 뿌리가 있다. 탐심의 악의 뿌리, 진심의 악의 뿌리, 치심의 악의 뿌리가 있다. 세 가지 선의 뿌리가 있다. 무탐심의 선의 뿌리, 무진심의 선의 뿌리, 무치심의 선의 뿌리가 있다.”

27) D, iii, p. 214

 

“비구들이여, 세 가지 악의 뿌리가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탐심이 악의 뿌리이며, 진심이 악의 뿌리이며, 치심이 악의 뿌리이다. (……) 탐심을 갖는 이의 신구의 행위는 악이다. (……) 사악한 이의 신구의 행위는 악이다. (……) 어리석은 이의 신구의 행위는 악이다."

28) A, i, pp. 201-202

 

이처럼 선과 악의 뿌리/근본은 각각 무탐진치와 탐진치이다. 또 무탐진치로부터 비롯되는 행위는 tj선이며 탐진치로부터 비롯되는 행위는 악이다. 그런데 무탐진치와 탐진치 자체가 선이며 악이다. 붓다는 무탐진치가 선이며 탐진치가 악이라고 한다. 그는 밧차(Vaccha)에게 선과 악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할 수도 있고 상세하게 설할 수도 있지만, 간략하게 설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 즉 “탐심이 악이며 무탐심이 선이다. 진심이 악이며 무진심이 선이다. 치심이 악이며 무치심이 선이다.”30)

30) M, i, p. 489


탐진치의 유무가 선악의 뿌리인 만큼 우리는 모든 외적 행위의 선악 또한 이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붓다는 신구의를 통해 나타나는 행위의 선악의 구체적 예로서 십선업과 십악업을 말하는데, 그것은 탐진치의 유무에 따른 것이다. 탐진치로 인하여 열 가지 악한 행위인 십악업이 있고, 무탐진치로 인하여 열 가지 선한 행위인 십선업이 있다고 한다.31) 무탐진치로 인한 십선업은 선을 예시하며 선을 대표한다. 탐진치로 인한 십악업은 악을 예시하며 악을 대표한다. 현명한 이라면 이러한 선악의 이치에 대해 알아야 한다. 붓다는 고귀한 제자라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알아야 하며 그 뿌리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십선업과 십악업, 그리고 그 뿌리인 무탐진치와 탐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32)

31) A. v, pp. 264-265
32) M, 제9경

 

십선업과 십악업은 탐진치의 유무에 따른 선악의 전범으로서 명시적으로 제시되는 내용이지만 오계, 팔계, 사무량심과 사섭법 등도 초기불교에서 제시되는 선(그리고 이 반대는 악)의 내용들이다. 이들 내용들을 어기는 것은 탐진치를 전제로 하는 악이며 이들 내용을 실천하는 것은 무탐진치를 전제/지향하는 선이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내용들이 탐진치의 유무로 설명되고 탐진치의 유무로 환원될 수 있으며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선악이 된다는 것이다.


모든 행위가 탐진치의 유무로 구분될 수 있으며 선악 또한 탐진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는 붓다의 이러한 입장은 행위와 행위의 도덕성이 외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적 마음상태/성향에 따라 규정된다고 본 것이다. 마음상태/성향이 선으로 결정되면 모든 외적 행위 또한 선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실천)의 관건은 마음상태/성향을 형성하는 문제, 즉 무탐진치의 마음상태/성향을 기르는 문제가 된다. 무탐진치의 마음상태/성향만 유지되면 선은 담보되는 것이다. 수행(bhāvanā)도 마찬가지이다. 행위를 (탐진치 유무) 성향이나 마음상태의 반영으로 이해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서술도 불교덕윤리의 이 같은 핵심을 짚은 것이다.


“신구의에서 닦이지 못한 행위는 탐진치로 인하여 표현되는 것이며, 신구의에서 닦인 행위는 무탐진치로 인하여 표현되는 것이다. 행위에 대한 이러한 이해에서, 행위 표현은 성향에 대한 반사적 관계로 이해된 것이다. 즉 행위는 마음상태(mentality)를 반영한다. 이를 업으로 말하자면, 행위는 성향(rāga, dosa, moha의 탐진치)을 속성으로 하며, 행위는 의도(cetanā)를 원인으로 한다.”33)

33) John, C. Holt, “The Beginnings of Buddhist Discipline: Note on an Early Buddhist 
    Theory of Actions” (Fu, W. Charles & Wawrytko, A. Sandra Eds., Buddhist Ethics 
    and Modern Society: An International Symposium (London: Greenwood Press, 1992), p. 60

 

그런데 행위와 선악 구분의 기준으로서의 탐진치 유무에서 중요한 것은 그 지향 방향이다. 지향하는 바는 탐진치 지멸의 행위와 탐진치 지멸의 선이다. 따라서 수행의 요체 또한 당연히 탐진치 지멸의 행위, 즉 탐진치 지멸의 선을 증진시켜 가는 데 있다. 수행은 탐진치 지멸의 과정이다.


붓다는 수행에서 닦지 말아야 할 것과 닦아야 할 것을 분명히 말한다. 악을 늘어나게 하고 선을 줄어들게 하는 마음 일어남(cittuppāda)은 닦지 말아야 한다. 반대로 악을 줄어들게 하고 선을 늘어나게 하는 마음 일어남은 닦아야 하는데, 그것은 탐심, 악의, 폭력을 떠난 마음이라고도 예시된다. 한마디로 탐진(치)을 여읜 마음은 닦아야 하고 탐진(치)에 물든 마음은 닦지 말아야 한다.


“존자여, 악법들을 늘어나게 하고(parihāyanti) 선법들을 줄어들게 하는(abhivaḍḍhanti) 마음 일어남은 닦지 말아야 하고(asevitabba), 악법들을 줄어들게 하고 선법들을 늘어나게 하는 마음 일어남은 닦아야 한다(sevitabba).어떠한 마음 일어남이 악법들을 늘어나게 하고 어떠한 마음 일어남이 

선법들을 줄어들게 하는가? 어떤 사람들은 탐욕스럽고(abhijjhā) 탐심을 수반한 마음으로 머물고, 악의적이며(vyāpāda) 악의를 수반한 마음으로 머물고, 해치며(vihesā) 해치려는 마음으로 머문다. 이러한 마음 일어남이 악법들을 늘어나게 하고 선법들을 줄어들게 한다. 어떠한 마음 일어남이 악법들을 줄어들게 하고 선법들을 늘어나게 하는가? 어떤 사람은 탐욕스럽지 않고 탐심을 여읜 마음으로 머물며, 악의적이지 않고 악의를 여읜 마음으로 머물며, 해치지 않고 해치려는 마음 없이 머문다. 이러한 마음 일어남이 악법들을 줄어들게 하고 선법들을 늘어나게 한다.” 

34) M, iii, p. 50

 

나타난 바와 같이 인용문에 제시된 닦아야 할 마음 일어남은 ‘탐심, 악의, 해침을 여읜 마음’―즉 탐심과 진심을 여읜 마음―이다. 닦아야 할 수행의 방향은 선을 증가시키고 악을 감소시키는 마음인데, 그것은 탐진을 여읜 마음인 것이다. 앞에서 살폈듯이 탐진은 속성상 치심을 전제하므로 탐진을 여읜 마음은 탐진치를 여읜 마음을 의미한다. 즉 닦아야 할 마음은 선을 증가시키는 탐진치를 여읜 마음이고 닦지 말아야 할 마음은 탐진치의 마음인 것이다. 붓다는 동일경에서 신구의 행위 또한 마찬가지임을 말한다. 즉 탐진치의 신구의 행위는 여의여야 할 행위이고 무탐진치의 신구의 행위는 닦아야 할 행위이다.


이처럼 모든 행위가 탐진치유무에 따라 두 가지로 나뉠 수 있으며 선악 또한 그러하다는 붓다의 입장은 탐진치 지멸의 선/수행 혹은 탐진치 지멸의 마음 닦음으로 귀결된다.

 

4. 탐진치 지멸의 방법
그러면 탐진치를 여읜 마음을 기르기/닦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탐진치를 여의어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초기불교에서 탐진치를 지멸시켜 열반에 이르는 왕도로서 제시되고 있는 가장 포괄적인 개념은 당연히 (사제) 팔정도이다. 

 

좁혀서 말하자면, 왕도이면서 수행론적 개념은 사념처이다. 팔정도를 ‘하나의 길’(ekayāna)이라고도 하고,35) 사념처를 ‘하나의 길로서의 방법’(ekayāna maggo)이라고도36) 한다. 팔정도나 사념처, 이 어느 것이든지 탐진치를 지멸하는 ‘하나의 길’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논리적으로 팔정도의 하나인 사념처(정념)는 팔정도를 구성하는 하나로서 팔정도에 포함되는 하위개념이지만, 수행에 있어서 팔정도 각각은 동시에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념처(정념)만을 들어 말하더라도 다른 나머지 일곱 가지를 전제해야 할 것이다. 팔정도 중에서 어느 하나만을 들어 말하더라도 그 온전한 실천은 나머지 항목들의 실천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은 탐진치 지멸과 관련하여 팔정도와 사념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35) D hammapada , 274게
36) M, i, p. 55

 

“벗이여, 탐심의 지멸, 진심의 지멸, 치심의 지멸을 열반이라 합니다. 도반이여, 이러한 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팔정도입니다.”

37) S, iv, p. 252


“비구들이여, 존재를 청정하게 하기 위한(sattānaṃ visuddhiyā),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기 위한, 고통과 근심을 소멸시키기 위한, 올바른 방책을 얻기 위한, 열반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길(ekāyana)이 있으니 사념처이다. 네 가지는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여기에서 몸에서 몸을 관찰하면서, 노력하고, 바로알고, 마음 챙기며, 세계에 대한 탐욕과 근심(abhijjhādomanassa)을 제거한다.” (나머지 느낌(수), 마음(심), 마음대상(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38) M, i, pp. 55-56


전반부 인용문에서는 탐진치 지멸의 열반의 길을 팔정도라고 하고 있다. 후반부 인용문에서는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는 길을 사념처라고 말하고 있다. 탐욕과 근심―탐심과 진심을 의미하는―은 치심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사념처 또한 탐진치 지멸의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념처 각각에서 탐진치가 지멸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사념처 각각에서 욕망(chanda)이 버려지고 불사에 이른다.”39)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9) S, v, pp. 181-182. 이 말에서 ‘욕망’은 좁게는 탐심을 의미하고 넓게는 탐진치를 의미
     한다.

 

이처럼 팔정도와 사념처, 이 어느 것이든지 탐진치 지멸의 방법으로 말해지고 있다. 그런데 초기경전은 탐진치 지멸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 방법들은 팔정도나 사념처와 상이한 방법들인 것이 아니다. 이들 방법들은 탐진치 지멸법으로서 독립적으로 강조되고 있지만, 팔정도나 사념처에 포괄되거나 보완하는 개념들로 이해된다. 이제 이들 방법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탐진치의 제압과 무탐진치 생각의 반복

붓다는 탐진치의 생각은 의도적으로 제압하고, 무탐진치의 생각은 반복하여 마음의 경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붓다는 마음에 의해서 탐진치와 결부된 생각을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제거할 수 있다고 본다. 탐진치의 부정적 생각이 일어나면 이를 제압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단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탐진치의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

 

붓다는「 거친 생각 중지 경」(Vitakkasaṅṭhānasutta)(M. 20경)에서 수승한 마음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서 인상에 대한 다섯 가지 올바른 주의(기울임)에 대해 말한다.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하는데, 그 노력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다섯 단계의 방법이다.

 

1) 욕망(chanda), 진심, 치심과 결부된 악행의 불선법 생각이 일어나면, 선한 인상과 관련된 다른 인상(nimitta)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nimittā aññaṃ nimittaṃ manasikātabbaṃ kusalūpasaṃ hitaṃ). 그러면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마음이      가라앉아 집중된다.(반복구절)

2) 그래도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러한 생각은 악하다, 이러한 생각은 비난받을 만하다, 이러한 생각은 고통을 유발한다.' 

라고 성찰해야 한다.(위 동일 반복구절)3) 그래도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러한 생각에 마음 챙기지 말고 주의하지도 말아야 한다(asati amanasikāro).(위 동일 반복구절)

4) 그래도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러한 생각들에 대한 ‘거친 생각의 행 중지에 대한 주의’를 일으켜야 한다(vitakkasaṅkhārasaṇṭhānaṃ manasikaroto).(위 동일 반복구절)

5) 그래도 탐진치와 결부된 악한 생각이 일어나면, 이를 물고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마음으로 마음    을 눌러야 한다(cetasā cittaṃ abhiniggaṇhitabbaṃ).(위 동일 반복구절)

40) M, i, pp. 120-121

 

탐진치와 결부된 생각이 일어나면 이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상과 같이 단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내적 갈등과 투쟁도 포함된다. 첫 단계에서 탐진치가 지멸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수차의 좌절을 겪을 수 있다. 지멸에 이르는 이러한 과정은 의도적으로 분투하는 노력의 과정이며 무탐진치의 마음에 의해서 탐진치의 마음을 제압하여 이겨가는 과정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탐진치의 악한 생각이 지멸되면 ‘마음이 가라앉아 집중되게 된다.’ 또한 이러한 탐진치 지멸의 결과로서 갈애를 지멸시키고 고의 지멸에 이른다. 붓다는 이렇게 노력하는 이는 ‘자신이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요컨대 내적으로 분투하는 의도적인 노력을 통하여 탐진치로 포괄·대표되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버리고 선의 생각만을 할 수 있다. 탐진치의 생각에 직면하여 그것을 의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러한 탐진치 제압의 방법과는 다른 방법으로서 탐진치와 반대되는 무탐진치의 생각을 자주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는 자주 생각하고 숙고한 것은 마음의 성향이 되므로, 감각적 쾌락, 악의, 상해의 생각을 하지 말고 그 반대인 이욕, 악의 없음, 불상해의 생각을 많이 하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무엇이든지 많이 생각하고 숙고한 것은 마음의 경향(nati)이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kāma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한다면, 그는 이욕에 대한 생각(nekkhammavitakka)을 버리고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된다. 그의 마음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그가 악의의 생각(byāpāda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한다면, 그는 악의 없음의 생각(abyāpādavitakka)을 버리고 악의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악의의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상해의 생각(vihiṃsā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한다면 그는 불상해의 생각(avihiṃsāvitakka)을 버리고 상해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상해의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41) M, i, p. 115

 

“비구들이여, 비구가 무엇이든지 많이 생각하고 숙고하면 그것은 마음의 경향이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이욕의 생각(nekkhamma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하면 감각적 쾌락의 생각(kāmavitakka)을 버리게 되고 이욕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이욕의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악의 없음의 생각(abyāpāda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하면 악의의 생각(byāpādavitakka)을 버리게 되고 악의 없음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악의 없음의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상해 없음의 생각(avihiṃsāvitakka)을 많이 생각하고 숙고하면 상해의 생각(vihiṃsāvitakka)을 버리게 되고 상해 없음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의 마음은 상해 없음의 생각으로 기울게 된다.”

42) M, i, p. 116

 

이와 같이 붓다는 감각적 쾌락, 악의, 상해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될 때, 그것이 마음의 성향이 된다고 한다. 또 그 반대의 이욕, 악의 없음, 불상해의 생각을 많이 하게 될 때, 그것이 마음의 성향이 된다고 한다. 환언하면 탐심, 진심, (치심)의 생각을 많이 하면 그것이 마음의 성향이 되고, 무탐, 무진, (무치)의 생각을 많이 하면 그것이 마음의 성향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적으로 탐진치의 생각을 버리고 그 반대인 무탐진치의 생각을 반복함으로써 무탐진치의 성향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2) 부정관, 자애, 지혜의 닦음

붓다는 부정관, 자애(mettā), 지혜를 닦음으로써 탐진치를 지멸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부정하다고 봄으로써 탐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자애를 닦음으로써 진심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지혜를 닦음으로써 치심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붓다는 간략히 말하기도 하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도 한다.

 

“부정함을 인식하는 이는 항상 탐심의 불을 끄고, 최고의 사람은 자애에 의해서 진심의 불을 끄고, 통찰로 이끄는 지혜에 의해서 치심의 불을 끈다.”

43) Itivuttaka , 93게


“부정한 표상을 올바르게 주의할 때, 일어나지 않는 탐심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탐심이 사라진다. (……) 자애의 심해탈을 올바르게 주의할 때 일어나지 않는 진심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진심이 사라진다. (……) 올바르게 주의할 때 일어나지 않는 치심이 일어나지 않고 일어난 치심이 사라진다.”

44) A, i, pp. 200-201


여기에서 부정하다고 보는 것이나 부정한 표상을 올바르게 보는 것은 상으로 표상되는 모든 존재를 부정하다고 보는 부정관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정관에 의해서 탐심을 사라지게 한다. 다음으로 자애나 자애를 통한 심해탈에 의해서 진심을 사라지게 한다. 지혜에 의해서 혹은 지혜에 도달하는 올바른 주의에 의해서 치심을 사라지게 한다. 이처럼 부정관, 자애, 지혜를 닦음으로써 탐심, 진심, 치심을 사라지게 한다.

 

다른 경우 붓다는 탐심과 치심에 대해서는 보다 포괄적으로 각각 부정관·무상관을 닦고 진심에 대해서는 사무량심을 닦을 것을 강조한다. 부정관과 무상관을 닦음으로써 탐심과 자만을 버리라고 한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닦음으로써 각각 악의, 해침, 불만/불쾌, 싫어함/혐오―총칭하여 진심―을 버리라고 한다.


“라훌라여, 자애 수행을 닦아라(mettaṃ bhāvanaṃ bhāvehi). 라훌라여, 자애(mettā/慈) 수행을 닦을 때 어떤 악의(vyāpādo)도 버려질 것이다.

라훌라여, 자비(karuṇa/悲)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여, 자비 수행을 닦을 때 어떤 해침(vihesā)도 버려질 것이다. 

라훌라여, 공감적 기쁨(mudita/喜)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여, 공감적 기쁨 수행을 닦을 때 어떤 불만/불쾌(arati)도 버려질 것이다. 

라훌라여, 평등한 마음(평정심)(upekkha/捨)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여, 평등한 마음 수행을 닦을 때 어떤 싫어함/혐오(paṭigho)도 버려질 것이다. 

라훌라여, 부정(asubha) 수행을 닦아라. 라훌라여, 부정 수행을 닦을 때 어떤 탐심(rāgo)도 버려질 것이다.

라훌라여, 무상으로 인식하는(aniccasañña) 수행을 닦아라, 무상으로 인식하는 수행을 닦을 때 어떤 자만(asmimāno)도 버려질 것이다.”

45) M, i, pp. 424-425


이처럼 붓다는 탐심을 유발시키는 대상에 대해서는 부정관을 닦음으로써 탐심을 버리라고 한다.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닦음으로써 진심―악의, 해침, 불만/불쾌, 싫어함/혐오―을 버리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무상하다고 인식하는 수행을 닦음으로써 치심의 일종인 ‘자만’을 버리라고 한다. 무상관을 수행함으로써 치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요컨대 부정관, 사무량심, 무상관이 탐진치를 버리는 수행으로 제시되고 있다.


부정관, 자애, 지혜를 닦음으로써, 혹은 부정관, 사무량심, 무상관을 닦음으로써 탐진치에 반대되는 마음을 닦아 탐진치를 지멸하는 것이다. 대상이나 지각된 상에 대해 ‘부정하다’고 인식한다면 탐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며, 사무량심으로 충만하다면 진심은 발생할 수 없을 것이며, 실상을 바로 보는 지혜를 닦는다면 치심은 약화되고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탐진치와 반대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닦음으로써 탐진치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3) 육근수호(=육입처멸)

육근수호(indriya gutti) 혹은 육근제어(indriya saṁvuta)47)는 여섯 감각(기능/작용)을 지키거나 제어함으로써 그 대상인 육경에 의해서 전복되지 않고 부정적 성향들의 유입을 막는 것이다. 여섯 대상(색성향미촉법의 육경)에 대해 여섯 감각(안이비설신의 육근)이 반응할 때 그 감각작용에 탐진치가 유입되지 않도록 육근을 지켜 제어하는 것이다.48)

47) indriya gutti와 indriya saṁvuta는 동일한 의미의 말이다. 예컨대 붓다에 의하면 ‘중생의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은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을 즐기고(ārāma), 기뻐하고(rata), 환락한
    다(sammudita).’ 그러나 여래는 ‘그것을 길들이고(dantaṁ), 수호하고(guttaṁ), 지키고
    (rakkhitaṁ), 제어한다(saṁvutaṁ).’ 그리고 ‘여래는 그것을 제어하는 법을 설한다.’
    (Tassa ca saṁvarāya dhammaṁ deseti). 여기에서 길들이고(dantaṁ), 수호하고 
    (guttaṁ), 지키고(rakkhitaṁ), 제어한다(saṁvutaṁ) 말은 모두 같은 의미의 말이다.
48) 육근의 작용은 그 대상인 육경(색성향미촉법)을 전제하며, 육근과 육식을 조건으로 발생
    하는 여섯 의식인 육식까지 전제한다. 더 나아가서는 육근작용은 육근, 육경, 육식의 화합
    인 육촉, 그리고 육촉으로부터 발생하는 세 감각(삼수)의 발생까지 함축적으로 전제한다. 
    요컨대 육근수호는 육근인 감각기능/감각작용에 대한 수호/제어를 의미하지만 보다 포괄
    적으로는 세 감각에 대한 수호/제어까지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육근수호가 탐진치 지멸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육근수호를 통해서 중생의 육근작용에 유입되는 탐진치를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육경에 대해서 발생하는 탐진치가 육근으로 들어와서 마음을 정복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나 비구니라도 시각(안)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색)에 대해 탐심이 있고, 진심이 있고, 치심이 있는데,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진심을 버리지 못하고, 치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이 작더라도 시각의 영역에 들어와 마음을 정복한다(pariyādiyanti). 하물며 크다면 어떻겠는가. 무슨 연유에서 인가? 

비구들이여, 탐심이 있고, 진심이 있고, 치심이 있어서, 탐심이 버려지지 않고, 진심이 버려지지 않고, 치심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한다.) 

49) S, iv, pp. 159-160

 

위 인용문은 육근 중에서도 시각에 의한 시각작용에 탐진치가 유입되어 마음을 정복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시각작용이 수호되지 않는 상태에서 탐진치가 유입되어 마음을 조정하고 마음이 탐진치에 의해 정복된 경우를 말하고 있다. 이는 나머지 다섯 감각작용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섯 감각작용(육근) 전체로 말하자면, 육근작용에 탐진치가 유입되어 육근이 육입(salāyatana)이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이는 십이연기의 구조로 말하면 무명, 행, 식, 명색, 육입에 이르는 과정에서, ‘무명(치심)이 전제된 육감각 작용’으로서의 육입작용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무명/치심은 치심의 성격상 탐심과 진심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십이연기의 육입관점에서, 무명을 전제하는 육감각 작용인 육입이 지멸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탐진치에 의해 조정/정복되고 있는 육감각 작용이 지멸되어야 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요컨대 탐진치가 작용하고 있는 육감각작용인 육입은 지멸되어야 한다. 이는 육근수호를 통해 육근 자체의 작용만을 남기는 것을 의미한다. 육근을 수호하지 못해 탐진치의 지배를 받는 육근작용으로서의 육입의 지멸을 의미한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일관되게 ‘육근수호 육입(처)멸’을 말하는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붓다는 ‘육근수호’를 말하는데, 그 의미는 사실 ‘육입(처)멸’과 같다(그리고 닛바나는 육입처멸이다(saḷāyatananrodho nibbānaṃ)라고 말해진다).50) 육근은 수호되어야 하고 육입은 지멸되어야 하기 때문에 육근과 육입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육근수호와 육입지멸의 상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탐진치가 유입됨 없이 육근만 작용하는 상태가 육근수호라면, 육근작용에 (탐진)치심이 유입되어 육근이 육입처가 되어버릴 때 이러한 육근작용인 육입처를 멸하는 것이 육입처멸이다. 육근수호든지 육입처멸이든지, 그것은 육근작용은 유지하되 그 작용에서 탐진치를 차단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두 말의 의미는 본질적으로 같다는 말이다. 육근수호는 (탐진치 없는) 순수한 육근의 기능만 남는 상태를 강조한 것이며, 육입처멸은 탐진치가 유입되어 있는 (탐진치의) 육근작용―무탐진치의 육근작용이 아니라―을 멸하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50) S, iv, p. 98

 

그런데 여기에서 분명히 해둘 것은 육경은 물론 육근도, 이것들 자체가 본래부터 탐진치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육근과 육경을 ‘조건으로’하여 탐진치가 일어날 뿐이다. 붓다는 근과 경 자체가 속박인 것이 아니라 양자를 의존해서 일어나는 ‘욕탐(chandarāgo)’이 속박이라고 한다. 육경이나 육근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이 양자를 묶는 욕탐이 문제라고 본 것이다. 시각(안)이 형상(색)에 묶인 것은 시각이 색에 묶인 것도 아니고 색이 시각에 묶인 것도 아니다. 이 양자를 조건으로 생겨난 욕망과 탐심에 의해서 묶인 것이다(다른 다섯 가지 근과 경의 경우도 동일). 이들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속박이다.51) 붓다는 이와 같이 근과 경이 욕탐에 의해 묶인 것은 마치 검은 소와 흰 소가 하나의 줄에 묶여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검은 소와 흰 소가 줄에 의해서 묶여 있는데, 흰 소가 검은 소에 묶여 있다고 하거나 검은 소가 흰 소에 묶여 있다고 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육근과 육경이 서로에 의해서 묶여 있다고 하는 것도 잘못이다. ‘욕탐에 의해서 서로 묶여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르다. 요컨대 육근과 육경이 속박인 것이 아니라 이 양자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욕탐이 속박인 것이다.

51) S, iv, pp. 162-163


이렇게 보면 욕탐―혹은 보다 포괄적으로 탐진치―이 문제이지 육근이나 육경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지멸의 대상은 육근이나 육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경에 대한 육근의 작용은 유지하되, 욕탐 혹은 탐(진치)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는 육근이 육경에 대해 작용하면서도 탐진치가 유입되지 않는 경우를 시각(안)과 형상(색)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탐진치가 유입되는 경우와는 반대로 말한다.


“비구들이여, 어떤 비구나 비구니라도 시각(안)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색)에 대해 탐진치가 없어 탐진치를 버렸다면 만약 시각에 의해 인식되는 형상이 크더라도 시각의 영역에 들어와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 하물며 작다면 어떻겠는가. 무슨 연유에서 인가? 

비구들이여, 탐진치가 없어서 탐진치가 이미 버려졌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가지 감각(기능)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한다) 

52) S, iv, pp. 160-161

 

여기에서 붓다는 육근 중에서도 시각이 그 대상인 형상에 작용할 때 탐진치가 버려진 경우를 예로 들어 육근수호를 말한 것이다. 육근작용에서 탐진치가 버려져서 마음이 정복되지 않고 마음이 수호되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처럼 육근수호/육근제어는 육경에 대한 육근의 작용을 유지하면서 탐진치의 유입을 막는 것이다.

 

아날라요(Anālayo)는 붓다가 제시하는 ‘수행의 목적이 번뇌(āsava)를 근절시키고 나쁜 잠재성향인 아누사야(anusaya)를 뿌리뽑고 결박(saṁjojana)을 버리는 데’53) 있음을 지적하고,54) 감각제어(indriya saṁvara) 수행 또한 번뇌, 아누사야, 결박, 마음에서 불선법의 일어남, 그리고 ‘감각 문에서의 반응’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함으로써 보다 포괄적으로 육근수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55) 여기에서 육근수호에 대한 가장 직접적 서술은 ‘감각문에서의 반응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 되겠지만, 번뇌, 아누사야, 결박, 불선법의 일어남 등을 피하기 위한 방법이 모두 육근수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그리고 탐진치로 말하자면, 육근수호는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방법이다.

53) S, v, p. 2854) Anālayo, Satipaṭṭhāna: The Direct Path to Realization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2003), p. 22455) Anālayo, 앞의 책, p. 225

 

 

그런데 이렇게 이해되는 육근수호/감각제어 수행은 사념처 수행과 다르지 않다. 육근수호와 사념처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그 작용은 중첩적이다. 감각제어는 사념처의 일부이기도 하며, 감각제어와 사념처가 상호의존한다고도 설명된다.56) 감각제어의 방법은 지각과정에서의 반작용(reaction)과 확산(proliferation)을 막고자하는 사념처에 근거한다고도 분석된다.57) 그래서 육근수호와 사념처 모두 똑같이 탐욕과 근심(abhijjhādomanassa)을 제거하는 방법으로도 말해진다. 붓다는 육근수호를 통해 탐욕과 근심―탐심과 진심―을 침입하지 못하도록 한다고도 하고,58) 사념처 수행에 의해서 탐욕과 근심을 버린다고도 말한다.59) 요컨대 육근수호나 사념처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중첩적인 것으로서 모두 탐심과 진심, 보다 포괄적으로 탐진치를 버리기 위한 수행이다.

56) Anālayo, 앞의 책, p. 7157) Anālayo, 앞의 책, p. 225
58) M, i, pp. 180-18159) M, ii, p. 11. 여기에서 탐욕(abhijjhā)과 근심(domanassa)은 탐심과 진심에 해당한

     다. Ñāṅamoli & Bodhi, The Middle Length of the Buddha: A Translation of the Majjhima 
     Nikāya (Boston: Wisdom Publication, 1995), p. 1220 참조.

 

또한 이렇게 이해되는 육근수호의 상태는 저 유명한「 바히야경」(Bāhiyasutta)에서 말하는 상태와 같다. 붓다는 바히야(Bāhiya)에게‘보여지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 들려지는 것에서 들려지는것만을 들으며, 감각되는 것에서 감각되는 것만을 감각하며, 인식되는 것에서 인식되는 것만을 지각하라’고 한다. 육근(작용)으로 육경을 접하되―혹은 육근작용을 유지하되―그 어떤 주관적 과정도 개입시키지 말고 오직 감각하라고 말한다.


“바히야여, 그대는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 보여지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만을 보아야 한다. 들려지는 것에서 들려지는 것만을 보아야 한다. 감각되는 것에서 감각되는 것만을 감각해야 한다. 인식되는 것에 인식되는 것만을 보아야 한다. 바히야여,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 

바히야여, 보여지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만이 있을 때, 들려지는 것에서 들려지는 것만이 있을 때, 감각되는 것에서 감각되는 것만이 있을 때, 인식되는 것에서 인식되는 것만이 있을 때, 바히야여, 그대는 거기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거기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여기에도 있지 않을 것이며, 거기에도 있지 않을 것이며, 그 양자 사이에도 있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고의 끝이다.”

60) Udāna 1.10 (Bāhiyasutta), p. 8

 

보여지고, 들려지고, 감각되고, 인식되는 것에서 오직 보기만하고 듣기만하고 감각하기만 하고 인식하기만 하라는 것이다. 자극을 축소시키지도 말고 증폭시키지도 말고 주어지는 그대로 보고, 듣고, 감각하고, 인식하라는 것이다. 아날라요는 이를 무엇에 대해서든지 ‘단지 의식하고 있음’(bare awareness)의 뜻으로 풀이한다. ‘단지 의식하고 있음’은 감각지각의 원자료를 평가하고 증폭시키는 마음을 막으며, 인지의 편파적 형상과 불선한 생각과 연상을 일으키지 않고 감각문에서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지 단순히 기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단지 감각만’(mere sensation)을 갖는 것이다. 여기에서 탐진치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이 상태가 바로 탐진치로 포괄되는 모든 부정적 성향의 지멸상태―열반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4) 세 감각의 속성을 바르게 봄

탐진치를 지멸하는 네 번째 방법은 쾌감각, 고감각,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의 속성을 바로 보는 것이다. 바로 봄으로써 세 감각 배후에 수반되는 탐진치를 지멸하는 것이다.

 

붓다는 세 감각에 탐진치가 수반되는 것은 세 감각에 대한 올바르지 못한 태도/인식 때문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쾌감각을 즐거워하며 탐착하고, 고감각을 비탄하여 고통스러워하며,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해서는 그것의 생멸, 위험, 벗어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 감각에 대하여 각각 탐심, 진심, 치심이 수반된다. 붓다는 육경, 육근, 육식, 촉으로부터 발생하는 세 가지 감각에 대해서 올바르게 대하지 못할 때 탐진치의 잠재성향이 있게 된다고 하는데, 시각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시각(안)과 형상(색)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안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의 화합이 접촉(phassa/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쾌로 느껴지는 (감각), 고로 느껴지는 (감각), 쾌도 고도 아닌 것으로 느껴지는 (감각)이 있다. 쾌감각에 접촉하여 그것을 즐기고, 환대하고, 집착하여 머무른다면, 탐심의 잠재성향(rāgānusaya)이 잠재한다. 고감각에 접촉하여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하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미혹에 빠지면, 혐오/분노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a)이 잠재한다.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접촉하여 그것의 생멸, 유혹, 위험,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여실히 알지 못하면,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이 잠재한다. 

 

비구들이여, 그가 쾌감각을 위한 탐심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고, 고감각에 대한 혐오/분노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고,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을 버리지 않고, 무명을 버리고 지혜(명)를 일으키지 않고서, 여기에서 지금 고를 끝내겠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나머지 다섯 감각기능과 그에 상응하는 다섯 경계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한다) 

61) M, iii, p. 285

 

여기에서 붓다는 쾌감각을 즐기고 환대하고 집착할 때, 고감각을 슬퍼하고 우울해하고 비탄해할 때,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의 생멸, 유혹, 위험 그리고 이로부터 벗어남을 알지 못할 때, 이들 감각의 배후에 각각 탐진치가 잠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세 감각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갖지 못할 때 탐진치가 성향으로 잠재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 감각에 대해 올바른 태도/이해를 갖지 못할 때 탐진치가 잠재한다면, 이와 반대로 세 감각에 대해 바르게 보면 탐진치의 잠재성향은 사라질 것이다. 붓다는 탐진치를 버리는 이를 ‘바르게 보는 이’라고 함으로써, 그리고 쾌감각과 고감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탐심과 진심이 수반된다고 함으로써, 이러한 입장을 표명한다.

 

“비구들이여, 세 가지 감각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쾌 감각, 고감각,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이다. 쾌 감각을 위한 탐심의 잠재성향을 버려야 한다. 고감각에 대한 혐오/분노의 잠재성향도 버려야 한다.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도 버려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쾌 감각을 위한 탐심의 잠재성향(rāgānusaya)을 버리고, 고감각에 대한 혐오/분노의 잠재성향(paṭighānusaya)도 버리고,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한 무명의 잠재성향(avijjānusaya)도 버리면, 비구들이여, 그 비구를 잠재성향들을 버린 ‘바르게 보는 이’라고 부른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자르고 자만을 버리고 고의 끝에 이른다. (……) 쾌가 감각될 때 (쾌)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탐심의 잠재성향이 나타난다. 고를 경험할 때 (고)감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게 혐오의 잠재성향이 나타난다. 크게 지혜로운 이에 의해 설해진 고도 쾌도 아닌 평화(adukkhamasukhaṃ santaṃ)에 대해서(조차)도 쾌를 추구한다면 그는 고로부터 풀려나지 못한다.

62) S, iv, pp. 205-206

 

이 경에서는 탐진치 잠재성향을 버린 이를 (세 감각을) ‘바르게 보는 이’로 규정함으로써 탐진치를 버림에는 바르게 보는 것이 전제됨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쾌고 감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 탐심과 진심이 수반된다고 말하고 있다. 세 감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탐진치 지멸의 전제이며 세 감각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결여가 탐진치를 부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세 감각을 바르게 이해한다는 것, 혹은 이에 근거한 세 감각에 대한 올바른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쾌감을 즐거워하고, 고감을 괴로워하고,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의 생멸과 유혹과 위험과 그로부터 벗어남을 알지 못하면 탐진치가 수반된다’는 앞의 서술에 암시되어 있다. 붓다는 ‘쾌감각과 고감각에 대해서는 고로 보고, 고도 쾌도 아닌 감각에 대해서는 무상하다’고 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쾌감각을 고로 보고, 고감각을 화살이라고 보고, 고도 쾌도 아닌 감각을 무상하다고 본다. 비구들이여, 그 비구를 ‘올바르게 보는 이’(sammaddasa)라고 부른다. 그는 갈애를 부수고, 결박을 잘라내고, 아만을 철저히 버리고, 고의 끝에 이른다.”

63) S, iv, p. 207

 

나타난 바와 같이, 핵심은 쾌고 감각을 고로 보고,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을 무상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를 달리 말하여, ‘쾌감각을 즐기지 말며, 고감각에 대해서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해서는 생멸, 유혹, 위험, 벗어남을 알라’고도 말한다. 배우지 못한 범부와 달리 배운 고귀한 제자(ariyasāvaka)는 이러한 태도를 갖는다. 고귀한 제자는 1) 고감각에 대해 신체적 고통을 느끼나 정신적/마음의 고통은 안 느낀다. 고감각과 접촉할 때 그것을 혐오하지 않고, 혐오의 잠재성향을 잠재시키지 않는다. 2) 쾌감각과 접촉하여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으며 탐심의 잠재성향을 갖지 않는다. 3) 감각의 생멸, 유혹, 위험,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남을 알아, 고도 쾌도 아닌 감각에 대하여 무명의 성향을 잠재시키지 않는다.65) 요컨대 고를 마음으로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으며, 쾌를 즐기지 않으며, 쾌도 고도 아닌 감각의 실상을 앎으로써 탐진치의 성향을 버린다. 결론적으로 세 가지 감각에 속박되지 않으면서 탐진치를 벗어나는 것이다.

65) 이와 달리 배우지 못한 범부는 1) 고감각에 대해 신체적·정신적 두 가지 고통을 느끼며, 
    고감각에 대한 혐오의 잠재성향을 갖는다. 2) 쾌감각과 접촉하면, 감각적 쾌락을 즐기며 
    이에 대한 탐심의 성향을 잠재시킨다. 3) 감각의 생멸, 유혹, 위험, 그것에서 벗어남을 
    알지 못하여,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대한 무지의 성향을 잠재시킨다(S, iv, pp. 207-209).

 

지금까지 살펴본 탐진치 지멸의 네 가지 방법, 즉 1) 탐진치의 제압과 무탐진치 생각의 반복, 2) 부정관, 자애, 지혜의 닦음, 3) 육근수호/육근제어(=육입처멸), 4) 세 감각의 속성을 바르게 보는 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탐진치 지멸의 왕도인 팔정도나 사념처와 상이한 방법들이 아니다. 팔정도나 사념처, 혹은 사념처를 포함한 팔정도가 열반을 위한 수행의 첫 단계에서부터 완성단계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요청되듯이 이들 네 가지 방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특히 팔정도에서의 정념/사념처 수행법은 지금까지 살펴본 네 가지 탐진치 지멸법을 자기 안에 포함하거나 전제한다고 이해된다. 혹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예컨대 네 가지 탐진치 지멸법들 중에서 육근수호는 사념처 수행법과 중복되며 서로를 필요로 한다.

 

5. 요약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덕윤리에서 선 실천의 요체인 ‘탐진치 지멸’에 대해 탐구하였다. 팔리어 경전에 근거하여 탐진치와 그 유사개념들에 대한 의미를 밝히고, 행위와 선악 구분에 있어서 탐진치의 역할, 그리고 탐진치 지멸의 방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탐심은 감각적 욕망/쾌락을 추구하는 만족을 모르는 마음이며, 진심은 쾌락에 대한 좌절로부터 발생하는 싫어함/혐오 혹은 성냄/분노의 마음이다. 치심은 무상·고·무아, 사성제, 혹은 연기·공·무아의 실상에 대한 무지의 마음이다. 탐심이 좋아하여 끌려가며 즐기려는 마음이라면, 진심은 싫어하여 물리치고 성내는 마음이다. 탐심과 진심은 쾌에 대해서는 환락·집착하며 고통에 대해서는 거부·혐오하는 마음작용으로서 그 대상에 대한 무지/치심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 기실 탐진치는 하나의 마음작용이다. 그런데 탐진치에서 가장 근원적인 것은 치심이다. 치심으로 인하여 탐심과 진심도 일어난다. 탐진치의 유사 개념군들로는 갈애(taṇhā), 번뇌(āsava), 집착(upādāna), 속박(yoga), 장애(nīvaraṇa), 결박(saṁyojana), 잠재성향(anusaya) 등이 있는데, 이들 모두 탐진치로 포괄·총칭된다.

 

모든 행위를 가르는 기준도 탐진치의 유무이며 선악을 가르는 기준도 탐진치의 유무이다. 모든 행위는 탐진치의 행위와 무탐진치의 행위로 나뉘며, 선악은 탐진치의 유무에 따라 결정된다. 탐진치로 말하면 탐진치 자체가 악이며 무탐진치가 선인데, 무탐진치 행위의 구체적·대표적 예시로서 십선업이 제시된다. 내적 마음상태인 탐진치가 모든 행위의 속성인 선악을 규정하여 선악은 오직 내적 동기인 탐진치유무에 의해 결정되므로, 선의 체화를 지향/목적으로 하는 수행 또한 탐진치를 여읜 마음을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대표적 왕도는 팔정도 혹은 (팔정도 중에서도) 정념/사념처가 제시된다. 필자는 이 글에서 이 두 가지 왕도 이외의 다른 네 가지 방법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들 네 가지는 팔정도나 사념처와 중첩적인 탐진치 지멸법이다.

 

1) 탐진치의 제압과 무탐진치 생각의 반복: 탐진치의 생각은 의도적으로 제압하고 무탐진치의 생각은 반복함으로써 무탐진치의 생각이 마음의 경향이 되게 한다. 이 과정은 갈등과 좌절의 과정을 포함한다. 감각적 쾌락, 악의, 상해와 같은 탐진치 관련의 악한 생각을 노력하여 피하고/버리고/제압하고, 악의 없음, 불상해의 생각을 많이 함으로써 그것으로 하여금 마음의 성향이 되게 하는 것이다. 붓다는 의도적으로 노력함으로써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다.

 

2) 부정관, 자애, 지혜의 닦음: (본래 그 속성이) 부정한 표상을 올바르게 봄으로써 탐심을 버리고, 자애나 자애의 심해탈을 통해 진심을 버리고, 지혜나 지혜에 도달하는 올바른 주의를 통해 치심을 사라지게 한다. 혹은 부정관·사무량심·무상관을 통해 탐진치를 멸한다. 이 방법은 대상을 부정하다고 봄으로써, 대상에 대해 자애의 마음을 일으킴으로써, 대상을 무상하다고 봄으로써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방법이다.

 

3) 육근수호(=육입처멸): 중생이 여섯 대상(색성향미촉법의 육경)에 대해 여섯 감각/감각기능(안이비설신의 육근)으로 반응할 때, 그 감각작용에는 탐진치가 유입되어 마음을 조정·정복하는데, 이때 육근에 대한 감시·제어·통제를 통해 탐진치가 유입되지 않도록 한다. 그런데 육근작용에 탐진치가 유입된다는 것은 십이연기구조에서 알 수 있듯이 육근에 ‘무명’이 수반되어―더 나아가서 진심과 치심을 유발시키는― 육입으로 작용함을 의미한다. 육근수호는 육근의 작용기능은 유지하면서 탐진치의 유입을 막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육근작용에서 (탐진)치를 지멸시키는 육입처멸을 의미한다. 이러한 육근수호 상태는 붓다가 열반상태로 묘사하고 있는 ‘보여지는 것에서 보여지는 것만을 보고, 들려지는 것에서 들려지는 것만을 들으며, 감각되는 것에서 감각되는 것만을 감각하며, 지각되는 것에서 지각되는 것만을 지각하는 상태’와 같다.

 

4) 세 감각의 속성을 바르게 봄: 이 방법은 쾌감각, 고감각, 쾌도고도 아닌 감각의 속성을 바로 봄으로써 이들 세 감각 배후에 수반되는 탐진치를 지멸하는 것이다. 세 감각을 바르게 본다는 것은 ‘쾌감각과 고감각에 대해서는 고로 보고, 고도 쾌도 아닌 감각에 대해서는 무상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쾌, 고, 쾌도 고도 아닌 감각에 탐진치가 수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방법의 핵심은 감각적 쾌락, 악의, 상해와 같은 탐진치 관련의 악한 생각을 의도적으로 노력하여 피하고/버리고/제압하고, 이욕, 악의 없음, 불상해의 생각을 많이 함으로써 그것으로 하여금 마음의 성향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연구에서는 지면의 제약상 탐진치에 대한 일차적 연구에 그쳤다. 탐진치에 대한 유사개념들 간 실질적 관계를 밝히는 문제, 혹은 제시된 탐진치 지멸방법이 그러한 성품형성에 대하여 갖는 실질적 유용성의 문제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탐진치 지멸(의성품)이 갖는 중요성은 불교덕윤리에서 뿐만 아니라 사실 전불교의 문제이기도 한 만큼, 이러한 문제에 대한 탐구는 다양한 관점에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