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avāda 정통성에 대한 小考
- Dīpavaṃsa와 Mahāvaṃsa 비교연구를 중심으로 -
김 경래/동국대학교(서울) 불교학과 박사과정
Ⅰ. 서론
Ⅱ. 문헌의 특징
Ⅲ. 서술상의 불일치
Ⅳ. 결론
[요약문]
디빠왕사(Dīpavaṃsa)와 마하왕사(Mahāvaṃsa)는 스리랑카를 비롯한 동남아 테라와다
불교국가들에서 전승되던 Vaṃsa 문헌群 중 가장 대표적인문헌이다. 이들은 테라와다
정통성을 증명해주는 전거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비판적 검토 없이
이들을 동일한 관점에서 전거로 사용하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이끈다.
디빠왕사는 다양한 관점의 역사관을 담고 있는 일종의 야사모음집인 반면 마하왕사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 세력의 역사관을 토대로 제작된 장편연대기이다. 이러한 이들의
연대기적 차이점은 두 가지 서술상의 불일치를 야기하고 있다. 첫째, Theravāda의 용례이다.
전자는 붓다의 정법을 계승하는 ‘일군의 학문적 종교적 견해(doxography)’를 지칭한 반면,
후자는 마하위하라라는 ‘특정 사원세력’을 묘사하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 둘째, 둣타가마니
아바야(Duṭṭhagāmaṇī Abhaya, BCE 101-77)에 대한 서술이다. 그는 테라와다, 특히 마하위하라
전통에서 영웅시되는 인물로서 전자가 단지 13頌으로 그를 묘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후자는 861頌으로 그의 영웅적인 면모를 부각시켰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밝혀지듯, Vaṃsa문헌군을 근거로 테라와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에는
상당한 오류가 뒤따른다. 현존하는 Vaṃsa문헌군, 특히 마하왕사는 마하위하라라는 특정세력을
대변하는 문헌이기 때문이다.
Ⅰ. 서론
신화나 비문 등을 통해서만 연구 가능한 인도역사에 비해 스리랑카의 역사는 풍부한
역사문헌들, 즉 ‘왕사(vaṃsa)’라는 장르의 역사문헌群1)을 전승해왔다. 어원적으로 ‘vaṃsa
(Sk. vaṃśa)’는 대나무, 혈족, 전통, 왕조등을 의미하는데,2) Pāli 문헌으로서의 ‘왕사(Vaṃsa)’는
남아시아 전역에서 제작되었던 뽀라나(porāṇa)3) 장르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4)
1) 역사학자 화이트(Hayden White)는 연보(Annal)와 연대기(Chronicle), 그리고 역사(History)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i) 연보(Annal): 서술구조 없이 연속되는 연대기 속의 사건들을 단순 나열한다.
(ii) 연대기(Chronicle): 서술구조로 구성되어 있되, 사건들을 단순 나열한다. 연대기는 그 저자의
시기에 다다르면 사료가 더 이상 없게 되어 서술을 멈춘다.
(iii) 역사(History):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서술구조와 결말을 지닌다. 이상의 정의에
따른다면 Pāli Vaṃsa 문헌들은 일반적으로 연대기와 역사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Collins(1998) pp.255-256; Collins(2010) p.136.
2) PED p.590.
3) 뽀라나(porāṇa 혹은 purāṇa)란, ‘고대’, ‘고대의 저자’ 등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복수형태
porāṇā가 더 자주 쓰인다. 이들은 테라와다 주석전통에 영향을 끼쳤는데, 주석서에 총
116번 언급되고 있다. Adikaram(1946) p.16; PED p.475.
4) 왕사문헌은 뽀라나 문헌의 5가지 특징들 중 vaṃśa와 vaṃśānucarita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전자는 신, 족장, 왕, 위대한 혈족 등을 언급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러한 vaṃśa의 업적을
언급하는 것이다. 콜린스(Steven Collins)는 vaṃsa가 브라마나 시대부터 인도에서 다양한
형태로 유통되던 일종의 족보목록이었으나, 이후 서술구조 형 태를 지니게 되었다고 주장
했다. Collins(1990) p.79; Collins(2010) pp.136-137; 한편 러(B.C. Law)에 따르면, Pāli
단어 vaṃsa는 ‘혈통의 계보’를 의미하기 때문에, 인종 이나 왕조, 스승 등에 대한 ‘연대기’
혹은 ‘역사’를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역사서를 의미한다고 한다. 왕사(vaṃsa)라는 단어
자체는 ‘tanti’를 지칭하기 위해 선택된 용어 로서, 이는 다른 말로 ‘anvaya’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vaṃsa, tanti, anvaya 모두 paramparā(계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Hazra(2002) p.1.
콜린스(Steven Collins)는 Sanskrit 단어 vaṃśa가 ‘대나무’라는 의미를 지닌 것과 관련하여, 이
용어가 매우 흥미로운 메타포를 지니고 있음을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오직 하나의 줄기로만
뻗어가는 대나무처럼, 일반적인 족보목록과 달리 Vaṃsa는 한 번에 오직 하나의 정통성만을
인정한다고 한다. 따라서 Vaṃsa문헌군은 불교사에 입각한 왕권 계승에 대한 기록임과 동시에,
여기에 언급된 다방면의 인물들이 그 전통에서 특별한 지위와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명해주고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5)
5) Collins(1990) p.79.
실제로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대표적인 세력이었던 마하위하라(Mahāvihāra, 大寺)와 아바야기리
(Abhayagiri, 無畏山寺) 모두 그들만의 Vaṃsa 문헌들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계보와 업적을
목록으로 남기던 기존의 왕사(vaṃsa)장르에 점차 정치적 요소가 첨가되면서, 이러한 연대기들은
테라와다 내부세력들의 종교적 구원과 정통성을 보장해주는 권위를 갖게 되었다.6)
6) “스리랑카와 이후 동남아에서 제작된 ‘왕사’들은 인도와 이들 지역들을 연결하는 구원사적
(heilsgeschi-chtliche) 목적을 제공해주었다. 스리랑카에서의 초기 용례들은 싱할라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이러한 연대기들의 이념은
dhammadīpa, 즉 붓다가 예언한 섬이 그의 구원적 신앙의 역사적 매개 체가 될 것임을
인식시켜주었다···<중략>···고착화되고 폐쇄적인 성전과 연대기는 동등하게 여겨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사 장르는 계보와 업적의 목록에서 비롯된 것이고, 쇄적 성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지만 텍스트 목록의 단순한 사상에 중요한 정치적 요소를 첨가했고,
[폐쇄된 이후] 더 이상은 추가되거나 생략되지 않았다.” Collins(1990) p.80; 단순한
계보만을 다루는 인도문헌과 달리, 스리랑카의 왕사 문헌들은 왕의 계보(rājaparamparā)와
장로의 계보(theraparanparā)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스리랑카의 왕사문헌은 독특하고
훌륭한 역사문헌 혹은 준역사문헌으로 평가된다. 연대기의 저자들은 대부분 불교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장로들이었으므로 이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불교사를 서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제작한 문헌의 핵심은 역사였다는 점이다. 근대적
관점에서 스리랑카 연대기에 객관적인 역사의식이 부재하다는 평가가 제기될 수 있으나,
이들이 지닌 가치는 독보적이고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Hazra(2002) pp.1-2
한 때 역사 속에 잊혀져갔던 ‘왕사’문헌들은 1826년 유럽학자들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7)
이후 지속적인 편집·번역작업이 거듭되어왔다. 그러나 이 문헌들이 현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정식 역사자료로서 연구된 적은 거의 없으며, 문헌 장르로서도 또한 심도 있게 연구되지
않았다.8) 그러나 현존하는 Vaṃsa 문헌군은 그들이 지닌 편협한 史觀에도 불구하고 테라와다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
7) Malalasekera(1928) p.130.
8) Collins(2010) p.136.
본 연구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Vaṃsa문헌인 ‘디빠왕사’와 ‘마하왕사’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이들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검토하고, 이를 통해 밝혀지는 테라와다 정통성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문헌의 특징
1. 디빠왕사(Dīpavaṃsa, 島史, 이하 Dpv)
스리랑카에 대한 역사와 신화를 결합한 연대기로서 현존하는 最古의 문헌은 바로 Dpv이다. 이
문헌은 22개의 장으로 구성된 운문으로서,9) 붓다시대부터 CE 4세기 마하세나(Mahāsena)
통치기 까지를 다루고 있다.
9) 그러나 현존 Dpv에는 산문형태의 문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러(B.C. Law)에 따르면,
4장 47송의 산문은 율장등의 성전을 인용한 것이며, 12장 30-31송의 산문은 자따까
니다나 까타(Jātaka Nidāna Kathā)를 모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 문구가 후대에
삽입된 것인지 이후 운문화 과정에서 제외된 산문형태인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한다. Hazra(2002) pp.2-3.
후대의 연대기들이 대체로 단일저자의 작품인 반면,10) Dpv는 기존에 전해지던 다양한 문헌들의
모음집으로서 단일 저자의 저술이 아니다.11) 그 결과 제작시기에 대한 논란 또한 지속되어 왔다.
페레라(H.R. Perera)에 따르면, Dpv는 앞서 제작된 문헌들에 추가분이 제작되어 CE 4세기경에
현재의 형태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올덴베르그(H. Oldenberg)는 CE 4세기 초부터 5세기 초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고,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 역시 Dpv의 서술이 CE 302년
까지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4세기 초반까지 편집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12)
한편, 히뉘버 ( Oskar von Hinüber) 와 노먼 (K.R . Norman) 은 Pāli 주석서(Smp와 KhvA)에
Dpv가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이것의 성립시기를 마하세나의 통치기와 붓다고사의
활동시기 사이, 즉 CE 350년경으로 규정했다.13)
10) Malalasekera(1928) p.132.
11) Dpv에 서술된 비구니에 대한 언급(Dpv 18.11-17.)을 바탕으로 이것의 저자가 비구니
였다는 가설도 있다. Hazra(1994) p.636; Hazra(2002) pp.3-4.
12) Oldenberg(1879) pp.8-9; Malalasekera(1928) p.138; Hazra(2002) pp.4-5.
13) Hinüber(1996) pp.89; Norman(1983) p.115.
Pāli 주석서에서 Dpv는 총 5회 인용되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Chātapabbatapādamhi veṇuyaṭṭhi tayo ahu, setā rajatayaṭṭ ca latā kañcanasannibhā. nīlaṃ pītaṃ
lohitakaṃ odātañ ca pabhassaraṃ, kālakaṃ hoti sassirīkaṃ pupphasaṇṭhanatādisaṃ. tathāpi
pupphayaṭṭhi sā dijayaṭṭhi tathete, dijā yattha yathāvaṇṇe evaṃ tattha catuppade. Dpv 11.15-17;
Vālavījaniṃ uṇahīsaṃ khaggañ chattañ ca pādukaṃ, veṭhanaṃ sārapāmaṅgaṃ bhiṅkāraṃ
nandivaṭṭakaṃ. sivikaṃ saṅkhaṃ Gaṅgodakaṃ adhovimaṃ vathakoṭiyaṃ, suvaṇṇapātikaṭacchuṃ
mahagghaṃ hatthapuñchanaṃ. Anotattodakaṃ kājaṃ uttamaṃ haricadanaṃ, aruṇavaṇṇamattikaṃ
añjanaṃ nāgamāhaṭaṃ. harītakaṃ āmalakaṃ mahagghaṃ amatosadhaṃ, saṭṭhivāhasataṃ sāliṃ
sugandhaṃ sukamāhaṭaṃ, puññakammābhinibbattaṃ pāhesi Asokasavhayo. ahaṃ buddhañ ca
dhammañ ca saṅghañ ca saraṇaṃ gato upāsakattaṃ desemi Sakyaputtassa sāsane. imesu tīsu
vatthusu uttame jinasāsane, tvam pi cittaṃ pasādehi saraṇaṃ upehi satthuno. Dpv 12.1-6;
vālavījaniṃ uṇhīsaṃ chattaṃ khaggañ ca pādukaṃ veṭhanaṃ sārapāmaṅgaṃ bhiṅkāraṃ
nadivaṭṭakaṃ. Dpv 17.83.
Chātapabbatapādamhi veṇuyaṭṭhi tayo ahu, setā rajatayaṭṭ ca latā kañcanasannibhā. nīlādi yādisaṃ
pupphaṃ pupphayaṭṭhiṃhi tādisaṃ, sakuṇā sakuṇayaṭṭhimhi sarūpen'eva saṇṭhitā ti. Smp p.74;
vālavīhani uṇhīsaṃ chattaṃ khaggañ ca pādukaṃ, veṭhanaṃ sārapāmaṅgaṃ bhiṅkāraṃ nandivaṭṭakaṃ.
sivikaṃ saṅkhaṃ vaṭaṃsañ ca adhoviṃ vatthakoṭikaṃ, sovaṇṇapātikāṭacchuṃ mahagghaṃ
hatthapuñchaniṃ Anotattodakaṃ kājaṃ uttamaṃ haricandanaṃ aruṇavaṇṇamattikañ ca añjanaṃ
nāgamāhaṭaṃ harītakaṃ āmalakaṃ mahaggham amatosadhaṃ saṭṭhivāhasataṃ sāliṃ sugandhaṃ
suvakāhaṭaṃ puññakammābhinibbattaṃ pāhesi Asokasavhayo ti. Smp pp.75-76.
Nikkaḍḍhitvā pāpabhikkhu therehi Vajjiputtakā, aññaṃ pakkhaṃ labhiv ā na adhammavādī bahū
janā····<중략>······paṭhame vassasate n'atthi, dutiy e vassasatantare, bhinnā sattarasa vādā
uppannā jinasāsane. Dpv 5.30-53; KvA pp.3-5.
āvudhaṃ nikkhipitvāna ekamantaṃ upāvisi, nisajja rājā sammodi bahuṃ atthūpasaṃhitan..
Smp p.76; Dpv 12.52.
Sabbakāmī ca Sāḷho ca Revato Khujjasobhito, Yaso ca Sāṇasambhūto ete saddhivihārikā, therā
Ānandattherassa diṭṭhapubbā tathāgataṃ. Sumano V āsabhagāmī ca sey y ā saddhiv ihārikā,
dve ime Anuruddhassa diṭṭhapubbā tathāgataṃ. Dpv 4.49-51.
yehi therehi saṃgītā saṃgīti tesu vissutā, Sabbakāmī ca Sāḷho ca Revato Khujjasobhito Yaso ca
Sānasambhūto ete saddhivihārikā therā Ānandattherassa diṭṭhapubbā tathāgataṃ. Sumano
Vāsabhagāmī ca ñeyya saddhivihārikā dve ime Anuruddhassa diṭṭhapubbā tathāgataṃ dutiyo pana
saṃgīto yehi therehi saṃgaho sabbe pi pannabhārā te katakiccā anāsavā. Smp pp.34-35.
Vedissagiriye ramme vasivā tiṃsa rattiyo: kālañ ca gamanaṃ dāni, gacchāma dīpam uttamaṃ.
palinā Jambudīpato haṃsarājā va ambare, evam uppatitā therā nipatiṃsu naguttame. purato
puraseṭṭhassa pabbate meghasannibhe, patiṭṭhahiṃsu Missakakūṭamhi haṃsā va nagamuddhani.
Mahido nāma nāmena saṅghatthero tadā ahū, Iṭṭhiyo Uttiyo thero Baddhasālo ca Sambalo.
sāmaṇero ca Sumano Bhaṇḍuko ca upāsako, sabbe mahiddhikā ete Tambapaṇṇipasādakā.
Dpv 12.35-39.
Mahido nāma nāmena saṃghatthero tadā ahū, Iddhiyo Vuttiyo thero Baddhasālo ca Sambalo.
sāmaṇero ca Sumano chaḷabhiñño mahiddhiko. Bhaṇḍuko sattamo tesaṃ diṭṭhasacco upāsako,
Smp pp.70-71; Vedisagirimhi Rajagahe vasitvā tiṃsarattiyo: kālo ca gamanassā'ti gacchāmi
dīpam uttamaṃ. palīnā Jambudīpāto haṃ sarā j ā va ambare, evam up patitā therā nipatiṃ su
naguttame. purato puraseṭṭhassa pabbate meghasannibhe, patiṭṭhahiṃsu kūṭamhi haṃsā va
nagamuddhani. Smp p.71
Dpv의 제작시기 및 유통형태를 명백하게 밝혀줄만한 충분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상의 典據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추측이 가능하다. 즉, 1번 방식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차이는
아마도 붓다고사가 현존하는 판본보다 앞선 판본 혹은 古주석서(Sīhala Aṭṭhakathā)와 유사한
고문헌들을 번역하여 인용했을 가능성 등을 시사해준다.22) 그리고 2번 방식은 Dpv와
붓다고사가 참고한 부분이 최소한 해당부분만큼은 동일한 것이었다는 점을 짐작케 해준다.23)
마지막으로 3-5번 방식은 Pāli 주석서(Smp)와 Dpv가 동일한 고문헌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는
가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다.24) 이에 더하여 Dpv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니지 않은 미사여구들이
발견된다는 점은, 이 연대기가 원래 암송되어 전해지던 것이었음을 암시한다.25) 따라서
현존하는 Pāli 주석서에 인용된 형태를 통해 Dpv가 주석서를 비롯한 다른 Vaṃsa문헌들보다
앞선 문헌이었으며, 구전형태로 전승되고 있었음을 가정할 수 있다.
22) Norman(1983) p.115; 말라라세께라에 따르면, Mhv에는 다뚜세나왕(459-477)이 Dpv 를
독송하도록 명령했다는 언급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Dpv 최초제작시기와 다뚜세나
통치기 사이에는 약 100여년의 간격이 있으므로 붓다고사가 다른 판본을 참고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Malalasekera(1928) p.138.
23) Norman(1983) pp.116-117.
24) 올덴베르그(H. Oldenberg)에 따르면, Dpv와 Mhv는 동일한 자료를 바탕으로 저술된
것으로서 모두 마하위하라의 대주석에 있는 서문에 기반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Dpv는
CE 302년 보다 더 이전에는 제작될 수 없는 문헌이며, Dpv와 Mhv의 문체를 살펴보더라도
전자가 후자보다 더 이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Dpv는
다투세나 통치기(CE 5세기)에 마힌다를 기리는 축제에서 암송되었다고 한다. Law(1933)
pp.510-511. 25) Norman(1983) p.116; Malalasekera(1928) p.135.
25) Norman(1983) p.116; Malalasekera(1928) p.135.
Dpv는 초반부에서 인도불교의 역사를 서술한 후, 9章부터는 스리랑카史를 다루고 있다. 그
주요 내용으로는 3번에 걸친 붓다의 스리랑카 방문, 인도와 스리랑카의 왕족계보, 3차에 걸친
결집들과 2차 결집 이후 부파의 발생, 아소까의 업적, 위자야와 그 후손들의 스리랑카 개척,26)
데와낭삐야 띳사 통치기에 마힌다와 상가밋따의 불교전파, 이후 둣타가마니, 왓타가마니,
마하세나를 중심으로 한 왕들에 대한 서술 등을 들수 있다.27)
26) 스리랑카의 역사는 위자야(Vijaya)가 700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정착하여 왕이 된
BCE 543년부터 시작된다. 위자야는 벵갈(Bengal)의 랄라(Lala)지역에 있던 싱하뿌라
(Sinhapura)의 왕 싱하바후(Sinhabahu)의 아들이었다. 그는 700명의 범죄자들과 함께
자국에서 추방당하여 여러 지방을 떠돌던 끝에 스리랑카에 도착한 후, 당시 스리랑카의
통치자였던 약카(Yakkha)족의 여왕 꾸웨니(Kuveni)과 결혼하여 자연스럽게 정착민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위자야는 스스로를 싱하라(Sinharā, 사자) 혹은 싱할라(Sinhalā,
전사)로 불렀다고 한다. Jinaratana(1948) pp.8-9; 브라만의 영향권에 있었던 북인도
지역에서 온 위자야 일행은 고대 스리랑카에 브라만 문화를 전파한 것으로 추정된다.
27) Hazra(2002) pp.5-6; 한편, 프라우발너(E. Frauwallner)는 네 가지 주제 - ①붓다의
스리랑카 방문 ②왕조 ③1차 결집이후 불교승단의 역사(스리랑카 승려들의 이름도
언급) ④위자야(Vijaya)의 모험부터 마하세나왕의 통치기까지를 다루는 스리랑카역사-
로 Dpv를 정리했다. Hinüber(1996), p.90.
Dpv의 저자(즉, 최종편집자)는 이처럼 다양한 사건들을 서술함에 있어서, 유사한 내용을 정리하여
편집하지 않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서술된 동일사건을 그대로 보존시켰다. 따라서 동일인물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표기되기도 하고,28) 1차 결집의 중복된 서술29)과 2차 결집의 중복서술30)
속에서 동일한 구절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3차 결집 역시 중복서술31) 되어 있고,
아소까가 스리랑카로 보낸 선물에 대한 서술은 세 차례나 반복32)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이들이 서로 다른 자료들에서 발췌된 것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 전승되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후대에 남기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 등을 짐작하게 해준다.33)
28) Dpv 22.18(Bhātutissa); Dpv 22.30(Bhātikatissa).
29) Dpv 4.1-26; 5.1-15.
30) Dpv 4.47-53; 5.16-38.
31) Dpv 7.34-43; 7.44-59.
32) Dpv 9.32-40; 12.1-4; 17.83-86.
33) Norman(1983) p.116.
Dpv는 Mhv와 마찬가지로 CE 4세기 초반 마하세나왕의 죽음까지를 다루고 있는데, 연대기가
이렇게 중단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Mhv가 이것을 대신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언급이
무의미해졌을 가능성,34) 혹은 마하위하라 세력이 외부세력에 타격을 받았기에 제작이 중단
되었을 가능성 등을 짐작할 뿐이다.35) 그러나 Mhv가 제작된 이후에도 Dpv는 연대기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으며, 널리 유통되었다고 한다.36)
34) Mhv에 따르면(38.59) datvā sahassaṃ dīpetuṃ Dīpavaṃsaṃ samādisi([다투세나왕]
은 천[금]을 하사했고, 디빠왕사에 대한 dīpīka를 쓸 것을 명했다.) 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dīpīka’는 Mhv를 지칭한다고 한다. Law(1933) pp.527-528; 이를 바탕으로
Dpv의 성립시기를 이 시기로 규정하기도 한다. Hazra(2002) p.5. 35) Malalasekera(1928),
p.137; 마하세나의 죽음은 Dpv 제작시기와 유사하며, Mhv는 그 보다는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앗타까타-마하왕사를 소장하고 있던 마하위하 라는 마하세나와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가 죽자 연대기서술도 중단된
것으로 짐작된다. Oldenberg(1879) p.8; Law (1933) p.527.
36)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에 따르면, Āraṇyakavāsi에 속했던 담마낏띠 3세
(Dhammakitti III)가 그의 저서(Saddhamma-saṅgaha p.47 v.7; p.49, vv.8ff)에서
깊은 존경을 표하며 Dpv를 인용하고 있다고 한다. Malalasekera(1928) p.138.
2. 마하왕사(Mahāvaṃsa, 大史, 이하 Mhv)와 쭐라왕사(Cūḷavaṃsa, 小史, 이하 Clv)
CE 4세기경 스리랑카에는 당시로서는 매우 최근까지의 사건을 서술한 연대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연대기들은 마힌다 일행이 스리랑카로 건너올 때부터 전해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싱할리 산문과 Pāli 운문이 혼합된 형태로서 싱할라-앗타까타에 포함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의 사원들은 각자 자신만의 연대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신화시대부터 CE 19세기
까지를 다루는 장편 연대기인 Mhv는 이러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37)
37) Geiger(1908) pp.xlix f; Law(1933) p.514.
대다수의 학자들은 신화시대부터 마하세나의 통치기(CE 334-361, 37장 50송)까지 만을 Mhv라고
부르며, 37장 51송부터 마지막 101장 29송(CE 1815년)까지를 Clv라고 구분 짓고 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원래 Mhv는 37장 50송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이후 제작된 Clv가 추가되면서
후반부가 인위적으로 삭제되었다고 한다.38)
38) 노먼(K.R. Norman)에 따르면, 37장 50송이 만약 종결부였다면, 그에 합당하는 장식적인
운율(ornate metre)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이 부분은 Śloka metre로 제작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이 바로 37장 50송이 원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Norman(1983) p.118; 러(B.C. Law) 역시 스리랑카 왕들의 혈족구분을
바탕으로 마하나마의 Mhv가 마하세나의 통치기에서 끝났다고 단정 할 수는 없다고 주장
했다. Hazra(2002) p.11.
히뉘버(Oskar von Hinüber)는 Mhv와 Clv의 저자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39)
39) Hinüber(1996) p.88; 러(B.C. Law)에 따르면, 마하나마는 둣타가마니를, 담마낏띠는
빠락까마바후를, 띱보뚜와웨 싯닷타와 힉까두웨 스리 수망갈라는 낏띠시리를 각각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Hazra(2002) p.11.
①마하나마(Mahānāma) : 1장 1송 - 37장 50송 (마하나마 통치기까지)
② 담마 낏 띠(Dhammakitti) : 37 장 51송 - 7 9장 8 4송40) (빠락까마바후 1세 통치기까지)
③저자미상 : 79장 85송 - 90장 102송 (빠락까마바후 4세 통치기까지)
④띱보뚜와웨 수망갈라(Tibboṭuvāve Sumaṅgala) : 90장 105송 - 100장 301송
(낏띠시리라자시하 통치기까지)
⑤힉까두웨 스리 수망갈라(Hikkaduve Srī Sumaṅgala), 바뚜완뚜다웨빤디따(Baṭuvantudave
Paṇḍita) : 101장 1송 – 29송
Mhv와 Clv를 두 개의 독립된 연대기로 파악하는 것은 혈족과 연대기를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즉, 마하세나의 죽음으로 끝나는 Mhv가 싱할라 왕들의 ‘대왕통사’라면,
낏띠시리메가완나(Kitti Siri Meghavaṇṇa; 마하세나의 아들)로 시작되는 후기의 왕조들은
‘소왕통사(Cūḷavaṃsa)’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는 CE
302년 마하세나의 죽음으로 싱할라 왕들의 역사인 Mhv가 끝났다고 서술했다. 그에 따르면
이후 추가된 연대기, 즉 Clv의 왕조들은 더 이상 단일혈족의 왕조가 아닌 태양족과 이민족
(보리수 혹은 불치사리를 가져온 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왕족들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섬은 황폐해지고 마하세나를 계승한 왕들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존경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가이거(W. Geiger)는 또한 두 가지 전거 - (1) Clv 99.76 (2) 싱할리 라자왈리야
(Rājāvaliya)41) - 를 바탕으로 전기 연대기(마하나마의 Mhv)와 후기 연대기(Clv)를 구분했다.
그가 제시한 전거에 따르면, 마하세나 이후의 왕조가 Cūḷa라고 불리는 이유는 순혈이었던
왕들의 계보가 이후 불치사리와 보리수를 가져온 후손들에 의해 혼혈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42)
41) 스리랑카 고대 시기부터 위말라담마수리야 2세(Vimaladhammasūriya II)의 통치기
까지를 다루는 연대기로서 CE 8세기 초반에 싱할리로 제작되었다. Hazra(2002) p.29.
42) Malalasekera(1928), p.63; Hazra(1994) pp.647-648; Hazra(2002) p.11.
그러나 라훌라(W. Rahula)는 ‘Cūḷavaṃsa’라는 표현자체를 부정했다. 그에 따르면, 가이거(W.
Geiger)를 비롯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전거 -Mhv 99장 76송에서 언급된 ‘Mahāvaṃsa’와
‘Cūḷavaṃsa’라는 표현 - 는 어디까지나 혈통과 관련된 것일 뿐, 연대기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한다. 또한 Mhv의 저자들이 이러한 구분을 한 적이 없으며, 다른 연대기 저자들 역시
37장 51송 이후의 부분을 언급하며 이를 ‘마하왕사’라고 언급해왔다고 역설했다.43)
43) Rahula(1956) p.xxii.
본 연구에서는 라훌라(W. Rahula)의 관점을 바탕으로 Mhv와 Clv를 분리하지 않고 아래와 같이
총 4부로 나누어 살펴보겠다.
1) Mhv 1부 (1장 1송 - 37장 50송: 고대시기 - CE 302년)
1부의 저자인 마하나마(Mahānāma)는 CE 5-6세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추정된다. Mhv-ṭ(p.502)에
따르면, 그는 데와낭삐야띳사 군대의 장군이었던 디가산다(Dīghasaṇḍa)가 건립한 사원인
디가산다나 사원(Dīghasaṇḍanavihāra)에 기거했다고 하는데, 이 사원은 마하위하라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다투세나왕의 삼촌이었는데, 이후 왕의 요청으로 출가했다고 한다.44)
44) 한편, Mhv는 다투세나의 아들인 목갈라나 1세가 빱바따위하라(Pabbatavihāra 혹은
Sīhagirivihāra)를 건립하고 마하나마에게 기증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Mhv 39.42
그러나 가이거(W. Geiger)는 Mhv와 Mhv-ṭ의 언급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에 따르면
다투세나는 CE 436년에 왕이 되었고, CE 436-441년 사이에 출가를 했는데, 당시 마하나마는
이미 매우 늙은 나이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Mhv의 저자와 목갈라나 1세에게 사원을
기증받은 승려가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45)
45) Hazra(2002) pp.7-8.
Mhv 전반부를 저술한 마하나마는 기존의 연대기가 지나치게 장황하고 생략과 반복이 많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기 위해 Mhv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46) 실제로 Mhv의 문체에는 보다
발전된 형태의 Pāli 문장 형식이 발견되는데, 가이거(W. Geiger)와 노먼(K.R. Norman)은
마하나마가 붓다고사의 Smp 서문을 참고했기에 이처럼 정교한 연대기를 저술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가이거는 마하나마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에 따르면, 비록 마하나마가
마하위하라의 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이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했고, 그것이 지닌 결점과 불규칙한 형식을 보완하고 수정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47)
46) Porāṇehi kato p'eso ativitthārito kvaci, atīva kvaci saṃkhitto, anekapunaruttako.
Mhv 1.2; 주석서에서는 고대의 연대기를 싱할라앗타까타-마하왕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Mhv-ṭ 36,5-7.47) Norman(1983) p.118; Geiger(1908) p.74
그러나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는 마하나마가 그다지 뛰어난 역량을 지닌 문헌가가
아니었으며, 편협한 전통관에 사로잡혀 역사적 사실을 은폐·왜곡했다고 평가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연대기 역시 Pāli 문헌사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Mhv를 Pāli 문헌의 정점에 도달한 작품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 역시
Mhv로 인해 Pāli 문헌이 발전했다는 점, 그리고 이후 세대들의 역사연구에 소중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다.48)
48) Malalasekera(1928) p.141; Hazra(2002) pp.8-9.
Mhv 1부와 마하나마에 대한 가치평가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Pāli 주석서를 참고했다는 사실은
이것의 제작시기를 추측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만약 그가 주석서를 참고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붓다고사보다 후대 사람이며, Mhv는 Dpv보다 1세기 가량 이후에 제작
된 것이 된다.49) 마하나마가 다투세나 통치기에 활동했다는 점, 그리고 다투세나가 Mhv의
제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전거 등을 고려해본다면, Mhv 1부의 제작시기는 CE 6세기
초반으로까지 연장될 수 있다.50)
49) Hinüber(1996) p.91.
50) Law(1933) p.514.
1부는 Dpv와 마찬가지로 고따마 붓다의 이야기로 시작하여 붓다의 3차례에 걸친 스리랑카
방문을 전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인도불교사,결집, 아소까의 통치와 전법사 파견, 위자야의
스리랑카 도착, 데와낭삐야 띳사 통치기의 마힌다와 상가밋따의 불교전파, 빤두까브햐,
둣타가마니, 왓타가마니 등의 업적을 다루고 있다.51)
51) 이상의 열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Mhv 전반부는 Dpv와 동일한 주제 - 인도·스리랑카의
역사와 사건들- 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Mhv는 빤두까브햐(Paṇḍkabhya), 둣타가마니,
왓타가마니에 대한 설명, 그리고 불교의 전파·정착·발전, 불교부파의 발생과 발전 등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 Hazra(2002) pp.10-11.
2) Mhv 2부 (37장 51송-79장 86송: CE 302년-CE 1186년)
2부의 저자는 담마낏띠(Dhammakitti)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싱할라 전통에 따르면 빠락까마바후 2세(Parakkamabāhu II)의 통치기(CE 13세기)에 담마낏띠라
는 이름의 버마 승려가 스리랑카로 건너왔다는 언급이 있으나, Mhv에는 이와 관련될 만한 승려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연대기에 따르면, 스리랑카출신의 담마낏띠 장로는 빠락까마 바후 1세
(Parakkamabāhu I)의 요청으로 스리랑카 특사로서 버마 남부지방인 라만냐(Rāmañña)를 방문
했다고 한다.52) 또한 쫄라국 승려 담마낏띠가 빠락까마바후 2세(Parakkamabāhu II)의 요청으로
불교승가를 재건하기 위해 스리랑카로 초청되었다는 언급도 있다.53) 몇몇 학자들은 바로 이
쫄라국 승려를 Mhv 2부의 저자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Mhv 37장 후반부의 저자는 아마도
이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54)
52) Mhv 76.32.
53) Mhv 84.11.
54) Hazra(1994) pp.648-650; Hazra(2002) pp.12-13.
2부는 43개의 章(37-79)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37장 51-52 송의 도입부는 Dpv의 마지막
두 송과 동일하다.55) 이는 이전 자료에 연속되는 느낌을 주기 위한 담마낏띠의 노력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55) asādhusaṃgamen'eva yāvajīvaṃ subhāsubhaṃ, katvā gato yathākammaṃ so
Mabhāsenabhūpati. tasmā asādhusaṃsaggaṃ ārakā parivajjiya ahiṃ vāsivisaṃ
vāsi kareyy'atthahitaṃ bhave ti. Dpv 22.75-76; Mhv 37.51-52.
가이거(W. Geiger)는 빠락까마바후 1세에 대한 서술과 그 이후의 章들이 서술상의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으나 이들이 단일 저자에 의해 저술되었음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윅끄라마싱하(Sirima Wickramasinghe)는 이 부분이 두 명의 저자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 리야나감가(Amaradasa Liyanagamge)는 비록 이 부분이 가이거가 파악한
것처럼 표면상 두 부분으로 분리되지는 않았지만, 빠락까마바후의 서사시를 다룸에 있어서 앞선
왕들과 뚜렷한 차이점이 발견된다고 지적했다.56)
56) Mhv 37-79장 중 앞부분이 다른 저자의 저술이라고 여겨지는 증거가 발견되는데, 전통에
따르면 담마낏띠가 빠락까마바후 2세 때 저술된 연대기가 빠락까마바후 1세 통 치기 당시
헌정된 연대기의 후반부라고 한다. Hazra(2002) p.13.
혹자는 마하세나 통치기 부터 빠락까마바후 4세(Dambadeṇiya의 Paṇṇditā Parakkamabāhu)의
통치기 까지를 담마낏띠의 저술로 간주하기도 하는데, 리즈 데이빗(Rhys Davids)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57)
57) “새로운 연대기 작가들은 자신이 속한 왕의 선대왕들과 관련된 연대기 언급을 서둘러
끝마쳤다. 그리고는 자신이 속해있던 군주의 통치기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해서는 매우
자세하게 언급했다. 빠라끄라마라는 위대한 왕의 통치[아마 빠라끄라마 1세를 지칭하는
듯]에서 중요한 chapter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게 설명하는 반면, 그 후에 있었던 왕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간다. 그리고 담바데니야의 빠라끄라마에 대해서는 7章이나 할애하고
있다. 아마도 두 담마낏띠에 대한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전자는 빠라끄라마 1세 다타왕사의
저자, 다른 한 사람은 담바데니야 빠라끄라마에 대한 Mhv의 저자이다. 여기서 후자는
문체상 후대에 속한 사람이 분명하다.” Rhys Davids, JRAS., vii, p.354, Malalasekera(1928)
p.142에서 재인용; 그러나 말라라세께 라는 이 주장을 증명할 충분한 증거가 없으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기존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평가했다. Malalasekera(1928) p.142.
3) Mhv 3부 (80장 1송-90장 102송: CE 1186년-CE 14세기 초반)
3부는 11개의 장(80-90)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분은 위자야바후 2세(Vijayabāhu II) 통치기
부터 빠락까마바후 4세 통치기 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저자는 쫄라국 승려라고 한다. 이 승려는
여러 언어에 능통했으며, 빠락까마바후 4세의 초청으로 스리랑카에 왔다고 한다.58)
58) Hazra(2002) pp.13-14.
가이거(W. Geiger)는 2부와 3부를 구분하는 2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첫 번째 근거는 그가 분석한
필사본(MS 4th)에서 79장 84송이 귀경게(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
a) 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형식은 분명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두 번째 근거는 그의
또 다른 필사본(MS 5th)에 빠락까마바후 1세의 악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빠락까마바후 1세의 업적을 칭송하던 저자가 갑자기 그의 악행을 근거로 위자야바후 2세를 칭송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4) Mhv 4부 (나머지 부분)
91장부터 100장까지의 저자는 띱보뚜와웨 수망갈라(Tibboṭuvāve Sumaṅgala)이며,
낏띠시리라자시하의 통치기(CE 1746-1781)를 다루고 있다. 노먼(K.R. Norman)에 따르면, 그는
스리랑카에서 통용되는 Mhv를 보충하기 위해 샴(Siam)에서 Mhv사본을 구해왔다고 한다.60)
60) Norman(1983) p.140.
101장은 CE 1815년까지를 서술하고 있으며 힉까두웨 스리 수망갈라(Hikkaduve Srī Sumaṅgala)
와 바뚜완뚜다웨 빤디따(Baṭuvantudave Paṇḍita)에 의해 추가된 연대기이다.61)
61) Geiger(1973) II p.300
Ⅲ. 서술상의 불일치
Dpv와 Mhv는 동일한 사료, 즉 ‘앗타까타-마하왕사(Aṭṭhakathā-Mahāvaṃsa; 싱할리 주석서에
함께 편집되어 전해지던 역사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62) 이 자료는 고대 스리랑카의 역사를
다루는 연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장주석의 도입부로도 받아들여질 만큼 절대적인 권위를
보장받고 있었다. 이들은 마하위하라를 비롯한 스리랑카 사원들 각각에서 다양한 교정본으로
보존되고 있었는데,63) Dpv와 Mhv를 편집한 역사가들은 아마도 흩어져 있던 여러 가지
교정본들을 참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Dpv는 다른 연대기들과는 차별화된 문헌으로
평가된다. Mhv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대기들이 특정 학파 혹은 세력권에 소속된 단일저자(혹은
동일한 관점을 지닌 다수의 저자들)의 작품이었다면, Dpv는 익명저자들의 다양한 관점이
투영된 역사기록들을 수집·편집한 것이다. 그러므로 Dpv에는 단일한 관점을 바탕으로 정리된
여타의 연대기들이 의도적으로 삭제했거나 수정했던 감추어진 역사의 단면이 보존되어
있다.64)
62) 원래 앗타까타마하왕사는 마힌다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내용까지만을 다루고 있었으나,
이후 역사가들에 의해 연대기의 서술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Law(1933) p.527.
63) Mhv의 주석인 Mhv-ṭ가 결집되던 당시에도 서로 다른 내용의 문헌들이 각각의 사원에서
보존되고 있었으며, 이들 사원들 대부분은 자신만의 주석서를 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Malalasekera(1928), pp.133-134; 뿐만 아니라 Mhv는 캄보디아에도 통용되고 있었는데,
내용이 더 추가가 되어 길이는 스리랑카의 두 배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Norman(1983)
p.140; EM(캄보디아 마하왕사)은 총 5,772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5장은 1,582송으로서
이 중 675송이 앞선 붓다들의 이야기와 고따마의 유년시절, 그리고 스리랑카 첫 방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6-10장은 319송으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9-20장(마힌다에 대한 이야기)은
967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해서 1부는 2,868송으로 이루어져 있다. 총 2,904송으로
이루어진 2부 중에서 둣타가마니 이야기인 22-32장은 2,345송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Mhv
(967송)의 거의 3배에 가깝다. Mhv 2부 1,404송 중에서 둣타가마니에 대한 언급은 861송을
차지하고 있는 반면, EM은 2,932송들 중에서 2,345송으로 4/5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둣타가마니 아바야 서사시라는 Mhv의 별명은 사실 EM에 훨씬 더 적절한 것이다.
Malalasekera(1937) p.xlviii.
64) 러(B.C. Law)는 Dpv가 연대기로서 많은 단점을 지니고 있지만, 역사 이면에 감추어진
스리랑카의 귀중한 이야기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분석적 연구가 요구되는
중요한 연대기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Dpv와 Mhv의 판본 비교연구를 바탕으로, Dpv가
고대 자료들의 흔적을 가능한 한 많이 반영하고자 했던 반면, 이후 제작된 Mhv는 보다
완성된 Pāli 체계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고대 자료들을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히뉘버(Oskar von Hinüber)는 Dpv에 웃따라위하라(=아바야기리)소속 승려들이 저술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들이 Mhv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 또한 이들 연대기에서 발견되는 서술·편집상
차이점들을 바탕으로 Dpv에 비해, Mhv의 서술관점이 마하위하라 세력과 매우 밀착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Malalasekera(1928) p.133-134; Law(1933) pp.525-526;
Hinüber(1996) pp.89-91; Hazra(2002) p.5.
여기서는 앞서 살펴본 Dpv와 Mhv의 특징을 바탕으로 이들이 동일한 단어 혹은 동일한
사건들을 서로 달리 해석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1. Dpv와 Mhv후반부의 불일치: ‘Theravāda’의 含意
‘Theravāda’란, 현재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불교전통을 지칭한다. 이러한
서구적 관점에 토대를 둔 개념은 1830년 최초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1951년 세계불교도우의회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를 통해 소승불교(Hīnayāna) 혹은 지리적으로 남쪽에 속하는
불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근대이전(pre-modern)65), 즉 Pāli 문헌에 사용된
‘thera-vāda’라는 복합어는 ①일군의 학문적․종교적 견해(doxography), 혹은 ②특정 사원세력을
의미했다.66)
65) 콜린스(S. Collins)는 상좌부의 역사를 3단계 - early, traditional, modern - 로 분류 했다.
1단계는 붓다 활동시기부터 아소까의 통치기 까지를 의미하는데, 아소까 이전의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으므로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그가 남긴 비문이나 이후의
문헌들을 통해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2단계는 아소까 통치기 이후부터 다양한 사료들 -
비문, 동전, 그림, 조각 등 - 이 전해지게 되는 시기를 의미한다. 마지막 3단계는 다양한
사료들은 물론 서구 탐험가와 식민통치국가의 관리, 그리고 인류학자 등의 보고서들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에는 또한 토착세력의 통치자나 관리들이
남긴 기록 역시 참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Collins(1990) pp.72-73.
66) Collins, private discussion(2010.2.26.)
Dpv(5章)에서 ‘theravāda’는 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①Theravāda의 청정함과 분노를 여읨, 그리고 위없음은 10번의 우기가 10번 [즉, 100년 동안]
이나 오래도록 유지되었다.
visuddho apagatadoso theravādānam uttamo; pavattittha cirakālaṃ vassānaṃ dasadhā dasā ti.
Dpv 5.15
②첫 100번의 우기가 지나고 두 번째 100번에 이르렀을 때 [즉, 또 다시 100년이 지났을 때,]
최대 규모의 거대한 분파가 Theravāda [장로]들에게 일어났다.
nikkhante paṭhame vassasate sampatte dutiye sate; mahābhedo ajāyittha theravādanam uttamo.
Dpv 5.16
③청정한 Theravāda에서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났다. 화지부와 독자부 비구들[로 구성된] 2분파가
형성되었다.
visuddhatheravādamhi puna bhedo ajāyatha; Mahiṃsāsakā Vajjiputtakā duvidhā bhijjittha bhikkhavo.
Dpv 5.45.
④Theravāda로부터 분리된 이 11개의 학파들은 [올바른] 의미와 담마, 그리고 결집[된 가르침들
중] 일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일부 중에서 혼란스러운 부분은 내버려두고 [파괴]했다.
ime ekādasa vādā pabhinnā theravādato; atthaṃ dhammañ ca bhindiṃsu ekadesañ ca saṃgahaṃ;
gaṇṭhiñ ca ekadesamhi chaḍḍetvāna akaṃsu te. Dpv 5.49.
⑤17가지의 분리된 견해들이 있고,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견해가 있다. 분리되지 않은 견해를
합해 [견해]들은 모두 18가지이다. 위대한 [보리]수처럼 위없는 Theravāda는 부족함도 없고
과함도 없으며, 오직 승자의 가르침일 뿐이다. 나머지 견해[를 지닌 부파들]은 나무 가지처럼
생겨났다.
sattarasa bhinnavādā eko vādo abhinnako; sabbev' aṭṭhārasa honti 'bhinnavādena te saha. nigrodho
va mahārukkho theravādānam uttamo anūnam anadhikañ c'eva kevalaṃ jinasāsanaṃ, kaṇṭakā viya
rukkhamhi nibbattā vādasesakā. Dpv 5.51-52.
⑥스승 목갈리뿟따는 직계제자인 마힌다에게 율 전체와 theravāda 전체를 가르쳤다.
Moggaliputto upajjhāyo Mahindaṃ saddhivihārikaṃ; vācesi vinayaṃ sabbaṃ theravādaṃ anūnakaṃ.
Dpv 5.88.
①은 1차 결집의 맥락에서 붓다의 직계제자들(thera)의 견해를 의미한다. ②는 2차 결집의
맥락에서 앞선 결집(1차 결집)과 동일한 견해를 의미한다. ③은 2차 결집이후 발생한 분열,
즉 직계제자들의 견해(Theravāda)에서 마하상기까(Mahāsaṃghīka, 大衆部)가 분리된 부파를
의미한다. ④의 Theravāda는 마하상기까와 대립했던 부파를 의미하는 반면, ⑤의 Theravāda는
11개의 부파로 내부 분파된73) 이후의 부파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⑥은 ⑤와 유사한 의미로서
11개의 부파들 중 정통 계승을 표방하는 부파의 견해를 의미한다.
73) Dpv에 따르면, 먼저 마하상기까는 고꿀리까(Gokulika, 牛家部)와 에까브요하라 (Ekabyohāra,
一說部)로 분열되고, 이어 고꿀리까 내부에서 바훗수따까(Bahussutaka, 多聞部)와 빤냣띠
(Paññatti, 說假部)가 분열한다. 그리고 마하상기까 내부에서 이후 분열된 부파를 비판하는
쩨띠야(Cetiya, 制多山部)가 성립했다. 테라와다(Theravāda) 는 이보다 더 복잡한 내부분열을
겪게된다. 먼저 마힝사사까(Mahiṃsāsaka, 化地部) 와 왓지뿟따까(Vajjiputtaka, 犢子部)가
독립하고, 이들 두 부파는 이후 각각 하부분 열을 겪게되어, 마힝사사까는 삽밧티와다
(Sabbatthivāda, 說一切有部), 담마굿따 (Dhammagutta, 法藏部)로 분파되고,
왓지뿟따까는 담마웃따리까(Dhammuttarika, 法 上部), 밧다야니까(Bhaddayānika, 賢胄部),
찬나가리까(Channagarika, 密林山部), 삼미 띠(Sammiti, 正量部) 등 4개의 부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이후 삽밧티와다는 깟사삐 까(Kassapika, 飮光部)를, 깟사삐까는 상깐띠까
(Saṃkantika, 說轉部)를 하부부파로 형성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별개부파인 숫따와다
(Suttavāda, 經量部)가 정립되었다. Dpv 5.39-48.
이상의 용례 속에서 Dpv는 Theravāda를 제외한 다른 부파들을 bhinnavādā로 규정하고 있다.
과거분사 bhinna의 어근인 √bhid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단절하다’, ‘몰락하다’, ‘찢어지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74) Dpv 5장에서 반복적으로 발견되는 bhinna의 용례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4) PED p.505; Apte pp.1197-1198
그들은 그릇된 법과 율,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에 동떨어진 것[을 설했고], 그리고 담마의
[진정한] 의미를 파괴하고서 그릇된 것들을 설했다.
uddhammaṃ ubbinayañ ca apagataṃ satthusāsane; atthaṃ dhammañ ca bhinditvā vilomāni
dīpayiṃsu te.
75) Dpv 5.19.
그리고 8명의 위대한 초월적 능력을 지닌 장로들은 [아소까왕]의 후원을 얻어서 十事를
파괴하고서 그 사악한 것들을 척결했다.76)
tañ ca pakkhaṃ labhitvāna aṭṭha therā mahiddhikā; dasa vatthūni bhinditvā pāpe
niddhamayiṃsu te.
76) Dpv 5.26.
마하상기까 소속 비구들은 그릇된 가르침을 폈다. [그들은] 원래 [결집되어있던] 문헌을
파괴하고서 다른 문헌을 폈다.
Mahāsaṃgītikā bhikkhū vilomaṃ akaṃsu sāsanaṃ; bhinditvā mūlasaṃgahaṃ
aññaṃ akaṃsu saṃgahaṃ.
77) Dpv 5.32.
그들은 다른 곳에 포함된 숫따를 [잘못된] 다른 곳에 포함시켰고, 5니까야에 있는 담마의
[진정한] 의미를 파괴했다.
aññattha saṃgahitaṃ suttaṃ aññattha akariṃsu te; atthaṃ dhammañ ca
bhindiṃsu ye nikāyesu pañcasu.
78) Dpv 5.33.
마하상기까를 [세운] 자들이 바로 먼저 ‘분리된 견해[를 지닌 자]들’이다. 그리고서 그들을
본따서 많은 ‘분리된 견해[를 지닌 자]들’이 생겼다.
pubbaṃgamā bhinnavādā Mahāsaṃgītikārakā; tesañ ca anukāreṇa bhinnavādā
bahū ahū.
79) Dpv 5.39.
그들은 담마의 [진정한] 의미와 결집[된 가르침들 중] 일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일부 중에서
혼란스러운 부분은 내버려두고 나머지를 [파괴]했다.
atthaṃ dhammañ ca bhindiṃsu ekadesañ ca saṃgahaṃ; gaṇṭhiñ ca ekadesamhi
chaḍḍetvā aññaṃ akaṃsu te.
80) Dpv 5.43.
Theravāda로부터 분리된 이 11개의 학파들은 담마의 [진정한] 의미와 결집[된 가르침들 중]
일부를 파괴했다. 그리고 그 일부 중에서 혼란스러운 부분은 내버려두고 [파괴]했다.
ime ekādasa vādā pabhinnā theravādato; atthaṃ dhammañ ca bhindiṃsu ekadesañ
ca saṃgahaṃ; gaṇṭhiñ ca ekadesamhi chaḍḍetvāna akaṃsu te.
81) Dpv 5.49.
17가지의 분리된 견해들이 있고,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견해가 있다. 분리되지 않은 견해를
합해 [견해]들은 모두 18가지이다.
sattarasa bhinnavādā eko vādo abhinnako; sabbev' aṭṭhārasa honti 'bhinnavādena
te saha.
82) Dpv 5.51.
첫 100년 동안에는 [분파가] 없었다. 두 번째 100년 동안 승자의 가르침에 17가지 분리된
견해들이 발생했다.
paṭhame vassasate n'atthi, dutiye vassasatantare; bhinnā sattarasa vādā uppannā
jinasāsane.
83) Dpv 5.53.
그때 출가하여 성취를 이룬 띳사는 이교도의 견해를 파괴하고 [진실된] 가르침을 정립할
것이다.
pabbajito tadā Tisso pariyattiñ ca pāpuṇi; bhinditvā titthiyavādaṃ patiṭṭhapessati
sāsanaṃ.
84) Dpv 5.58; Dpv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적 견해, 즉 ‘이단’을 지칭하기 위해 titthiyavāda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하고 있다.
모든 700비구들은 [진실된] 가르침을 설하고서 十事를 파괴한 후,
그 장로들은 반열반에 들었다.
sabbe sattasatā bhikkhū anusāsetvāna sāsanaṃ; dasa vatthūni bhinditvā therā te
parinibbutā.
85) Dpv 5.60.
이상 √bhid 파생형태들 중 동사형(bhinditvā, bhindiṃsu)으로 사용된 19, 26, 32, 33, 43, 49, 58,
60 송은 ‘파괴하다’의 의미를 지니는 반면, 형용사형(bhinnavāda, pabhinna, bhinna)으로 사용된
39, 49, 51, 53송의 경우 ‘분리된’의 의미로 사용되었다.86)
86) 이러한 용례는 Mhv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Vājiriyā, cha ete pi Jambudīpamhi bhinnakā,
Dhammarucī Sāgaliyā Laṅkādīpamhi bhinnakā. Mhv 5.13.
이처럼 bhinnavāda는 당시의 부파상황을 설명해주는 가치중립적인 용어로서 단순히 분리된
다수의 견해들을 의미할 뿐 결코 ‘이단’을 의미하지 않았다. 따라서 Dpv의 Theravāda는
bhinnavāda와 대립되는 개념으로서, ‘분리되기 이전의 견해’, 즉 붓다의 정통성을 견지하는
자들의 관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석이 Mhv의 용례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면밀한
검토가 요구된다. Mhv 전반부에서 발견되는 Theravāda의 의미는 Dpv와 크게 다르지 않다.
[1차 결집이후] 첫 100년간 Theravāda는 단일[세력]이었다. 그러나 이후 [Theravāda] 내부에서
다른 부파들이 발생했다.
Eko va theravādo so ādivassasate ahu, aññācariyavādā tu tato oraṃ ajāyisuṃ.
87) Mhv 5.2.
그러나 Theravāda [비구]들로부터 Mahiṃsāsaka(化地部) 비구들과 Vajjiputtaka(犢子部)
비구들이라는 2개 [부파]가 생겨났다.
Puna pi theravādehi Mahiṃsāsakabhikkhavo, Vajjīputtakabhikkhū ca duve jātā ime
khalu.
88) Mhv 5.6.
Theravāda를 포함하여 그들은 12개[의 부파]와, 앞서 언급된 6개 부파가 [합해져] 18개의
부파가 된다.
Theravādena saha te honti dvādas' ime pi ca, pubbe vuttā cha vādā ca iti
aṭṭhārasākhilā.
89) Mhv 5.10.
다만 Mhv는 분리된 부파들을 niggahītā라는 용어로 이단시하고 있다.
十事를 지지하는 그 10,000명의 사악한 비구들을 위대한 장로들은 논파했다.
Niggahaṃ pāpabhikkhūnaṃ dasavatthukadīpinaṃ, tesaṃ dasasahassānaṃ
mahātherā akaṃsu te.
90) Mhv 4.55.
그 2차 결집을 주도한 장로들에 의해 논파된 사악한 비구들은 모두 10,000명이었다.
그들은 Mahāsaṃghika(大衆部)라는 부파[를 만들었고] 그로부터 Gokulika(牛家部)와
Ekabyohāra(一說部)가 생겼다.
Tehi saṃgītikārehi therehi dutiyehi te, niggahītā pāpabhikkhū sabbe
dasasahassakā, akaṃs' ācariyavādaṃ te Mahāsaṃghikanāmakaṃ, tato Gokulikā
jātā Ekavyohārikā pi ca.
91) Mhv 5.3-4.
그러나 Mhv 후반부(37장 이후)부터는 Theravāda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한다.
① [마하나마王은] 두마락카山에 사원을 건립하고서 [왕비인] 마헤시의 권유로 [그 사원을]
Theravāda 비구들에게 주었다.
Vihāraṃ kārayitvāna Dhūmarakkhamhi pabbate, mahesiyā nayenādā bhikkhūṇaṃ
theravādinaṃ.
92) Mhv 37.213.
② [다뚜세나는] 암밧탈라 [사원]을 건립하고서 Theravāda [승려들]에게 주고자 했다.
katvā Ambtthalaṃ Theravādīnaṃ dātukāmako.
93) Mhv 38.76a
③ [깟사빠 1세]가 [잇사라사마나라마 사원]을 [테라와다 승려들에게] 보시하자,
테라와다 승려들은 [아버지를 살해한 왕에게 보시를 받는 것을] 원치 않았다.
dente tasmiṃ na yicchiṃsu samaṇā Theravādino.
94) Mhv 39.12a.
①의 주어는 마하나마(Mahānāma, CE 409 - 431)이다 . 한 때 아바야기리 소속 사원에서
승려생활을 했던95) 그는 이후 왕이 되어서도 아바야기리 세력을 지지했고 3개의 사원을
건립하여 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하위하라를 지지하던 왕비 마헤시의 권유로 마하위하라
에도 1개의 사원을 보시했다. 그의 통치기에 중국구법승 法顯과 인도 승려 붓다고사가
스리랑카를 방문했다. ②는 다뚜세나(Dhātusena, CE 455-473) 통치기에 벌어진 사건이다. 그는
쩨띠야기리를 원래 주인이었던 마하위하라에게 돌려주고자 했으나 아바야기리의 강력한
반발로 실패했다. 당시 아바야기리 세력은 왕의 권력에 맞설 수 있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③은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한 깟사빠 1세(Kassapa I, CE 473-495)의 이야기이다.
그는 이후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공덕을 쌓기 위해 마하위하라와 아바야기리 모두에게
사원을 기증했다.96)
95) Adikaram(1946) p.93.
96) Mhv 후반부에는 Theravāda를 대신하여 Theriyavāda라는 표현도 사용되고 있는데,
의미상 차이는 없다. Bhikkhū Theriyavāde so kātuṃ tehi uposathaṃ, ārāhetvā
paṭikkhitto pakuppitvā anādaro. Mhv 44.80; sutvā Theriyavādānaṃ pubbañātīnam
attano, pāpānaṃ duṭṭhacittānaṃ apakāre kate bahū. Mhv 46.8.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Theravāda라는 용어는 Dpv와 Mhv 초반부에서는 ‘일군의 관점’을
의미했다. 그러나 Mhv 후반부에 이르러 이 용어는 특정 사원세력, 즉 ‘마하위하라 세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변화되었다.
Dpv와 Mhv가 마하위하라 세력의 전승문헌임을 감안한다면, 마하위하라 세력은 당시 통용되던
‘theravāda’의 모순된 용례를 의도적으로 보존함으로써, 붓다의 정통성과 그들의 사원세력을
동일시하고, 正法을 계승하는 유일한 세력으로서 스스로를 규정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실제로 적중했으며, 그 결과 대부분의 현대학자들은 테라와다와
마하위하라를 동일시하게 되었다.97)
97) 말라라세께라(G.P. Malalasekera)는 마하위하라를 테라와다로, 아바야기리를 비-테라와다로
규정했다. 그는 왓타가마니 통치기에 아바야기리를 본부로 한 담마루찌 분파가 형성되어
마힌다 이후 확립되어오던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 시켰다고 주장했다.
Malalasekera(1928) pp.51-52
2. Dpv와 Mhv전반부의 불일치: 종교적 관점과 민중적 관점
가이거(W. Geiger)는 종교적 관점(kirchlichen Tradition)과 민중적 관점(volkstümlicher
Überlieferung)이라는 잣대로 Dpv와 Mhv를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Dpv가 통치자들의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종교적인 행동들에 주목했다면, Mhv는 두 가지 측면을 융합시켜 스리랑카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8)
98) Geiger(1905) pp.22-28.
가이거의 주장과 관련하여, 두 연대기의 상이한 관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둣타가마니 아바야(Duṭṭhagāmaṇī Abhaya,BCE 101-77)의 서사시이다. 그는 마힌다가
데와낭삐야 띳사(Devānaṃpiya Tissa, BCE 247-207)99)를 잇는 성군으로 예언했다고 전해질만큼,
100) 스리랑카의 역사뿐 아니라 테라와다 교단 내에서도 영웅시되는 인물이다.101) 왕자시절,
그는 스리랑카를 지배하던 다밀라(Damiḷa)와 전쟁을 벌이고자 아버지 까까완나 띳사
(Kākavaṇṇatissa)를 설득했으나 좌절당하고 스리랑카 남부로 떠나게 된다.102) 그러나 얼마 후
왕이 사망하자 남부세력을 기반으로 형제 Tissa(훗날 Saddhā-Tissa)를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후, 다밀라의 왕 엘라라(Eḷāra)를 물리쳤다. 그러나 엘라라의 시체를 화장하여 예의를
갖추었으며, 왕권을 자신의 아들(Sāliya)이 아닌 형제(Saddhā-Tissa)에게 물려주는 등
덕스러운 행동을 통해 스리랑카 최고의 통치자로 명성을 높였다.103)
99) 데와낭삐야띳사는 아소까와 긴밀한 우호관계를 맺었으며, 전법사 마힌다를 맞이해
스리랑카에 불교를 정착시킨 통치자로서, 마하위하라가 건립된 것도 이 시기였다.
Adikaram(1953) pp.49-50; DPPN vol.1 pp.1119-1121.
100) alaṃ mahārāja tumhākaṃ aññaṃ bahuṃ kammaṃ atthi, tumhākaṃ pana nattā
Duṭṭhagāmini Abhayo nāma rājā kāressatī ti. Smp p.102.
101) 남인도에 비해 풍족한 토양을 지니고 있던 스리랑카는 한 때 브라만교도였던 남인도
쫄라국의 왕자 엘라라(Elāra, BCE 145-101)에게 북쪽지방을 점령당했다. 당시 스리랑카
남쪽 로한나(Rohaṇa)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던 왕자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ī)는 불교를
위한 성전을 선포했고, 대대적인 항쟁을 했다. 결국 둣타가마니는 따밀세력(쫄라국)을
몰아내고 스리랑카 전역을 통치권으로 확보했다고 한다. Mhv 25.17.
102) 이 사건으로 인해 분노한 왕자는 왕에게 여자옷을 선물했는데, ‘Duṭṭha’라는 별명은
이때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DPPN I p.1093; 그러나 가이거(W. Geiger)는 둣타가마니의
이름 또한 민중적인 관점으로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둣타가마니란, ‘악한 Gāmani’라는
민담(volkstümlichen)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이는 사원의 후원자라는 의미보다는 전쟁과
폭력을 기반으로 왕위를 차지한 길들여지지 않은 戰士에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한다. Geiger(1901) p.22, note.1.
103) DPPN I pp.1093-1095.
둣타가마니에 대한 Dpv의 묘사가 단지 13頌(18.53-19.11)에 그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Mhv는
이를 위해 861頌(22-32章)을 할애하고 있다.104) Mhv는 둣타가마니 서사시를 확장하면서 그의
종교성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25章 이후부터는 전쟁을 끝낸 둣타가마니가 자신이 행한 살생을
참회하기위해 사원을 건립하고 공덕을 쌓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105) 이처럼 Dpv에서
여러 통치자들 중 하나에 불과했던 둣타가마니는 Mhv에 이르러 聖戰을 통해 스리랑카의
민족성과 佛法을 수호한 영웅으로 승격된다.
104) Mhv 전반부(1.1-37.50)는 총 2,915頌이다. Malalasekera(1937) p.xlviii.
105) Mhv 25.98f.
이러한 Mhv의 특징은 마하위하라 세력과 무관하지 않다. 주석서에는 이와 관련된 매우
의미심장한 일화가 발견되고 있다. Smv에 따르면, 전쟁에서 승리한 둣타가마니가 한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자 여덟 명의 비구들이 왕에게 論藏 중 Yam(Citta Yamaka)를 암송해주었다고
한다.106)
106) Smv II p.640.
연대기에 따르면, 2차 결집을 주도한 700아라한들은 三藏을 암기하고 있었으며,107) 2차 결집
이후 분파된 大衆部의 승려들(Mahāsaṅgītikā)은 아비담마 논서(Abhidhamma Pakaraṇa)를
비롯한 Theravāda 문헌들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전한다.108) 그러나 『摩訶僧祇律』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大衆部가 부정한 것은 Theravāda의 논서였을 뿐, 論藏전통 자체는 수용하고
있었다.109) 또한 논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經量部(Sautrāntika) 등의 부파들도 그들만의
논서를 소지하고 있었다.110) 따라서 불교부파들은 동일한 經藏, 유사한 律藏, 그리고 전혀
다른 論藏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論藏은 불멸후 각 부파들의 정법성과
정체성을 형성해주는 중요한 문헌群으로 부상하게 된다.
107) 'Tadā so Revatatthero saddhammaṭṭhitiyā ciraṃ; Kāretuṃ dhammasaṅgītiṃ sabba-
bhikkhu-samūhato. Pahinnatthādiñāṇānaṃ piṭakattayadhārinaṃ; Satāni satta bhikkhūnaṃ
arahantānam uccati.' Mhv 4.61-62; 'atha therā puna dhammañ ca vinayañ ca saṃgāyissāmā
ti tipiṭakadhare pattapaṭisambhide sattasate bhikkhū uccinitvā···'. Smp p.34.
108) 'Nikkaḍḍhitvā pāpabhikkhū therehi Vajjiputtakā; Aññaṃ pakkhaṃ labhitvāna adhammavādī
bahū janā. Dasa sahassi samāgantvā akaṃsu dhammasaṅgahaṃ; Tasmā'yaṃ dhammasaṅgīti
Mahāsaṅgīti vuccati. Mahāsaṅgītikā bhikkhā vilomaṃ akaṃsu sāsanaṃ; Bhiditvā mūlasaṅgahaṃ
aññaṃ akaṃsu saṃgahaṃ. Aññatha saṅgahitaṃ suttaṃ aññattha akariṃsu te; Athaṃ
dhammañ ca bhidiṃsu ye nikāyesu pañcasu. Pariyāyadesitaṃ cāpi atho nippariyāyadesitaṃ;
Nītatthaṃ c'eva neyyathaṃ ajānivāna bhikkhavo. Aññaṃ sadhāya bhaṇitaṃ aññatthaṃ
ṭhapayiṃsu te; Byañjanacchāyāya te bhikkhū bahu athaṃ vināsayuṃ. Chaḍḍetvā ekadesaṃ
ca suttaṃ vinayañ ca gambhīraṃ; Paṭirūpaṃ suttavinayaṃ tañ ca aññaṃ kariṃsu te.
Parivāraṃ athuddhāraṃ abhidhammappakaraṇaṃ; Paṭisambhidañca niddesaṃ ekadesañ ca
jātakaṃ, Ettakaṃ vissajjetvāna aññāni akariṃsu te.' Dpv 5.30-37; 그런데 37송의 ‘Parivāraṃ
athuddhāraṃ abhidhammappakaraṇaṃ’는 판본에 따라 ‘Parivāraṃ athuddhāraṃ abhidhammaṃ
chappakaraṇaṃ,’ 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아비담마 6론(chappakaraṇa)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 이들 연대기들의 설명이 사실이라면, 논장은 2차 결집 이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연대기들 중 어느것도 2차 결집 이전에 논장이 암송되었다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2차 결집 당시 논장은 지금과 같은 삼장체계로 정립되어 있지 않았거나,
혹은 정립되어 있었다하더라도 성전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Norman(1983) p.96.
109) 敎誡者若阿毘曇。若毘尼。阿毘曇者九部修多羅。毘尼者波羅提木叉廣略。『摩訶僧祇 律』
(T.22 no.1425) 536b21-22.
110) Lamotte(1958) pp.180-181.
Asl에 명시되어 있듯, 마하위하라 세력이 인정한 論藏은『담마상가니(Dhammasaṅgaṇī,
法集論)』,『위방가(Vibhaṇga, 分別論)』,『다뚜까타(Dhātukathā, 界說論)』,『뿍갈라빤냣띠
(Puggalapaññatti, 人施說論)』, 『까타왓투(Kathāvatthu, 論事)』,『야마까(Yamaka, 雙論)』,
『빳타나(Paṭṭhāna, 發趣論)』등의 7가지 논서였다.111) 따라서 당시 승려들이 둣타가마니에게
Yam를 암송해주었고, 그가 이것에 만족했다는 주석서의 진술은 둣타가마니가 마하위하라
세력을 대변하는 통치자였음을 의미한다.(혹은 그렇게 주장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111) Pakaraṇaparicchedato pan'esa Dhammasaṅgaṇi vibhaṅga dhātukathā puggalapaññatti
kathāvatthu yamaka paṭṭhānānaṃ sattannaṃ pakaraṇānaṃ vasena ṭhito. Ayam ettha
ācariyānaṃ samānakathā. Asl p.3
둣타가마니와 마하위하라 세력의 우호적인 관계는 유적을 통해서도 확인되는데, 마하위하라
에는 그의 聖戰과 승리를 증명하는 벽화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112) 반면, 아바야기리
지역에서 출토된 50 여개의 비문들(BCE 2세기에서 CE 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됨) 중에는 따밀어
(Tamil=Damiḷa)로 쓰여진 것들이 발견되고 있는데,113) 이는 둣타가마니가 적대시하던 따밀
출신 승려들이 아바야기리에서 활동했음을 의미한다.
112) ‘[둣타가마니와 엘라라의] 대결은 싱할리 예술가들에게 아주 사랑받는 모티브가 되 었다.
이 대결은 또한 Dambul의 5개의 동굴사원 중에서 가장 큰 사원 - 소위 마하 위하라라고
불리는 - 벽화에 묘사되어 전해지고 있다.’ Geiger(1905) p.21, note.3.
113) Kulatunge(1999) p.66.
또한 Mhv는 통치자로서 둣타가마니 못지않은 업적을 남겼던 왓타가마니 아바야( Vaṭṭagāmaṇī
Abhaya, BCE 27 -19 )와 마하세나 ( Mahā sena, CE 334-361)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왓타가마니 아바야는 아바야기리 세력의 창시자로서 마하위하라 세력을
억압했던 최초의 통치자였다. 마하세나는 남인도 승려 상가밋따를 스승으로 삼아 마하위하라
세력을 붕괴시켰다. 그의 통치기에 아바야기리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Mhv가 제작되던 당시는 테라와다가 마하위하라와 아바야기리로 분리되어 긴장관계를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짐작컨대 Mhv는 전쟁영웅 둣타가마니를 佛法의 수호자로 격상시켰고,
주석서는 이 관점을 이어받아 그가 수호하고자 했던 佛法이 결국 마하위하라의 가르침이었음을
유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둣타가마니를 중심으로 정립된 Mhv의 역사관은 이후 종교성과
민족성을 동일시하는 보수적인 테라와다 문화로 정착된다.114)
114) Mhv는 그의 투쟁이 왕권의 향유를 위한 것이 아닌 붓다의 가르침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rajjasukhāya vāyāmo nāyaṃ mama, sadāpi ca,
saṃbuddhasāsanasseva ṭhapanāya ayaṃ mama. Mhv 25.17; 둣타가마니의 항쟁은
이후 스리랑카인들에게 불교신앙과 민족성을 동일한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정치적 슬로건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Rahula(1970) p.34.
IV. 결론
본 연구는 테라와다에 대한 보다 체계적인 분석과 해석학적인 접근을 위한 시론으로서 대표적인
두 연대기 Dpv와 Mhv를 비교분석해보았다. 두 연대기를 토대로 전개한 논의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Dpv와 Mhv는 서로 이질적인 특징을 지닌 연대기이다. 전자는 다수의 익명저자들이
저술한 야사모음집인 반면, 후자는 마하위하라 세력의 관점을 바탕으로 재편집 재구성된
연대기이다. 따라서 전자를 통해 후자가 외면한 역사의 단면들을 짐작할 수 있다.
둘째, Theravāda라는 용어는 초기 연대기에서 ‘(그들의 정통성 여부는 차치하고서) 일군의
관점을 지닌 자들’을 의미했으나, Mhv 후반부부터는 마하위하라(Mahāvihāra)라는 ‘특정 사원’
만을 의미하게 되었다. 따라서 Mhv는 의도적으로 ‘일군의 관점을 지닌 자들’을 ‘특정 사원세력’
과 동일시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연대기 어디에도 이러한 동일시에 대한
근거나 부연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셋째, Mhv는 수많은 통치자들 중 마하위하라 세력을
후원했던 통치자를 국가와 불법의 수호자로 격상시켰다. 이는 Mhv의 역사서술이 철저히
마하위하라 세력의 관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해준다.
Vaṃsa 문헌군, 특히 Dpv와 Mhv는 테라와다 역사를 재구성하는 중요한 전거로 평가받지만,
정작 Vaṃsa 문헌군 자체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마하위하라의 정통성을 근거로 마하위하라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이렇듯
‘테라와다 정통성’ - 자체에 대한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 에 대한 논의는 종종 상당한 무리수를
동반하곤 한다. 이는 동남아 지역에 대한 몰역사적 태도와 다양한 Pāli 문헌에 대한 단편적인
접근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테라와다 전통의 연구는 종합적인 Pāli 문헌군(Tipitaka,
Aṭṭhakathā, Vaṃsa) 분석과 당대의 사회-종교적 맥락(Socioreligious Condition)에 대한 철저한
검토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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